내블로그 | 랜덤블로그 쪽지
耽讀
http://blog.yes24.com/kdssae
리스트 | RSS
태그 & 테마링 | 방명록
耽讀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프로필 쪽지 친구추가
10월 스타지수 : 별2,094
댓글알리미 비글 : 사용안함
전체보기
기본 카테고리
나의 리뷰
Wish List
My Story
My Favorites
耽讀 쓴 기사
오마이뉴스기사
대한민국
성경읽기
노무현
창비주간논평
사색의 향기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성약출판사
耽讀
MB
미디어
남북관계
정치기사
사회기사
국제
경제기사
4대강
천안함
김대중
한나라당
민주당
민노당
세종시
한국교회
인사청문회
문재인과 민주통합당
질매섬과 네 동무의 5.18
박근혜정부
박정희
나의 리뷰
기본 카테고리
리뷰
역사
인문
음반
문학
사회
소설
에세이
정치
어린이
기독교
자연과학
경제
인물
gift
문화
예술
DVD
나의 메모
耽讀글방
耽讀메모
태그
내용이 없습니다.
2021 / 1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월별보기

역사
세종 그가 위대한 군주였던 이유를 알겠네 | 역사 2013-07-30 16:57
http://blog.yes24.com/document/7339906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군주의 조건

김준태 저
민음사 | 2013년 07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조선은 27명의 군주가 있었다(엄밀히 따지면 순종은 군주로 보기 힘듬). 그리고 대한민국은 박근혜 대통령까지 11명의 대통령이다(윤보선은 의원내각제하 대통령이었고, 최규하는 하야 함). 조선 개국이 1392년이니, 631년 동안 군주(대통령)는 겨우 38명뿐이다. 군주(대통령)은 하늘이 내린다는 말이 결코 헛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지만 38명 중에도, 세종대왕 같은 위대한 군주가 있는가하면, 연산군과 광해군처럼 반정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한 군주도 있었다. 또한 박정희와 전두환처럼 군사반란을 일으켜 민주주의를 유린한 대통령이 있는가 하면, 김대중-노무현처럼 첫 비주류 정권을 탄생시킨 대통령도 있었다.

 

백성, 곧 인민이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에 어떤 군주와 대통령을 맞느냐에 따라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 세종같은 군주를 모시고 살았던 백성들은 가장 태평한 시대를 보냈을 것이고, 연산군같은 폭군 지배 아래 살았던 백성들은 참혹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군사반란을 일으킨 박정희 치하에 살았던 인민들은 '병영국가'에서 산다는 경험을 했을 것이고, 지금와서 생각하면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적어도 사람답게 살았던 시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군주(대통령)을 제대로 만나야 한다. 우리는 조선은 봉건왕조이므로 민주공화국를 살아가는 우리가 훨씬 더 사람답게 산다고 할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만은 분명 낫다. 하지만 군주다운 군주를 만났느냐를 따져 물어면 조선 백성보다 우리가 낫다고 할 수 없다.  

 

세종 "가뭄은 내 부덕함이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은 '한글창제', '측우기 발명', '해시계 발명', '대마도 정벌' 같은 업적을 남겼기 때문일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세종은 자신이 잘 못했을 때 "내 책임이요"를 할 줄 알았고, 자신 주위에 "전하에게 유감입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을 신하로 뒀기 때문이다.

 

스피치 라이터 김준태씨가 쓴 <군주의 조건>(민음사)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는 분명히 형벌이 바르제 집행되지 못하여 죄 있는 자가 잘못 하여 용서를 받고 무고한 자가 도리어 화를 입어서 일 것이다. 쓸 사람과 버릴 사람이 바뀌었고, 충성스럽고 바른 말 하는 이가 홀대받고(중략)번다한 세금으로 인해 쪼들려서 원망과 한탄이 일어났으니, 평화로운 삶을 살지 못하게 된 이들이 얼마나 많을지 헤아릴 수 없다. 이는 모두 과인의 부덕함에서 비롯된 것이니, 내가 반성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기를 그만둘 수가 없다."(27쪽)

 

1427년 가뭄이 들자 세종이 내린 교서다. 영조도 천둥이 쳤다는 보고를 받은 후 "하늘이 경고하는 뜻을 보이시니, 어찌하여 발생한 것인가. 그 이유를 따져보니 잘못이 실로 과인에게 있다"는 교서를 내렸다.


가뭄을 자기 책임이라고 하는 세종과 천둥친 것을 자신의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영조를  '세종과 영조도 미신을 믿었는가?'라고 비판할지 모른다. 하지만 세종과 영조가 이런 교서를 내린 이유는 "이런 현상에 대해서도 임금의 반성을 의무화함으로써 군주가 불시에 자신을 성찰하고 점검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며 "군주로 하여금 잠시라도 마음을 놓거나 나태하지 않게 효과가 있었기"때문이다.

 

가뭄과 천둥치는 것까지 자신의 부덕함이라는 임금을 보고, 어떤 신하와 백성이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김준태는 세종과 이런 모습에 대해"자신이 보지 못했고 듣지 못했다 해도, 일을 그르쳤을 가능성이 단 1펀센트라도 있다면 그것을 막지 못한 임금의 잘못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지난 6년 동안 대한민국 대통령은 "내 책임이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사과'라는 단어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자신이 임명한 청와대 대변인이 성추행을 범해 미국에서 몰래 도망왔는 데도 말이다. 봉건왕조 군주였던 세종과 영조, 민주공화국 대통령인 이명박과 박근혜 과연 누가 제대로 된 군주(대통령) 자격을 가졌을까?

 

세종은 딴죽거는 신하를 좋아했다

 

세종을 보면 봉건왕조 군주가 아니라, 민주공화국 대통령같은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는 데 그 중 하나가 비판자와 반대자들을 자기 곁에 뒀다는 점이다.

 

"세종이 심혈을 기울인 싱크탱크인 집현전의 초대 책임자는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죽이는 데 앞장선 중전의 원수 박은이었으며, 18년간의 영의정으로서 세종을 보좌한 황희는 세종이 세장에 책봉되는 것을 끝까지 반대하다 귀양을 간 세종의 '정적'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맹사성, 허조, 조말생, 최윤덕, 김종서, 최만리 등 당대의 명신들은 세종에게 서슴없이 반대 목소리를 냈던 인물이다."(121쪽)

 

특히 세종은 중전 소헌왕후를 사랑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했던 중전 아버지인 심온을 죽인 박은을 집현진 첫 수장에 앉혔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세종이 사람을 쓸 때는 공과 사를 따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인사정책은 정보의 '정'자도 모르는 사람을 국정원장에 앉혔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 '수첩인사'라는 비판을 받는 박근혜 대통령과 달라도 정말 다르다.

 

이조판서, 우의정을 지낸 허조 반대에 지친 세종은 "허조는 정말 고집불통이야"라고 토로했지만, 세종은 그를 썼다. 이유는 "강력한 반대자가 있어야 비로서 리더는 자신의 판단력에 의문을 던지게 되기"때문이다. 세종은 한 마디로 자기 정책에 '딴죽'거는 신하를 좋아했다. 허조 같은 반대자가 있었기에 세종이 추진한 정책은 더 튼튼해졌고, 정치가 더욱 견고해질 수 있었다. 만약 이명박 전 대통령이 최대 업적인 '4대강사업'을 감사원과 한나라당(새누리당)이 야당과 시민단체만큼은 아니더라도 50%만 반대했더라면 22조원이라는 혈세를 낭비하거나, '4대강 죽이기 사업'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지렁이 백성 말도 들었던, 세종

 

박근혜정권도 별 다르지 않다. '대통령 지시'만 떨어지기를 바란다. 대통령에게 "이건 안 됩니다"라고 반대하는 이들을 볼 수 없다. 대통령과 다른 생각을 입밖으로 내지 못한다. 감히 대통령에게 다른 생각을 말하는 것은 '불경'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새다. 왜 박근혜 정부에는 허조가 없는가?

 

세종이 천재라고 생각하는가? 역사기록을 보면 세종은 분명 천재 소질이 있었다. 하지만 세종은 반대자들과 비판자들과 끊임없이 논쟁했다. 자신이 부족함을 안 것이다. 김준태는 "군주 스스로 자신이 완벽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 손으로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을 차단하는 것"이라며 "거기에다 사사건건 신하들의 선생 노릇을 하려 든다면 경박해 보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세종은 누구처럼 '깨알지시'하는 군주가 아니었다.

 

세종은 끊임없이 듣는 군주였다. "설령 무지렁이 농부의 말이라도 반드시 들어 보아서 말한 바가 옳으면 채택하여 받아들이고,적절하지 않은 말이라 해도 절대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 이는 임금이 저지를지도 모르는 오류를 미리 막고, 자칫 놓치기 쉬운 백성들의 사정을 확이하며, 나아가 임금 자신의 지혜를 넓히기 위해서이다."(117쪽) 라고 말한 이가 세종이다. 이에 비해 박 대통령은 1시간 동안 '깨알지시'를 할 정도로 자기 할 말만한다. 듣지 않는다는 말이다.

 

1시간가량 진행된 국무회의는 거의 박 대통령 발언으로 채워졌다. 신임 장관들은 포부와 각오를 밝힌 뒤 박 대통령 지시사항을 받아적었다.-3월 12일 <경향신문> 1시간 회의 내내 대통령 발언… 장관들은 지시사항 받아 적기 바빠

 

이런 박 대통령 깨알지시에 대해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지난 17일 민주당 원혜영 의원이 주도하는 '혁신과 정의의 나라' 포럼에서 "참모의 창조성 죽이는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박 대통령이 지시만 하는 대통령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취임한지 다섯 달이 넘었지만, 직접 국민 앞에 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다.

 

세종이 위대한 군주가 된 이유는 바로, 문제가 터졌을 때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고, 비판하는 신하를 많이 두었으며, 항상 열린 귀를 가졌기 때문이다. 세종 치하에 살았던 조선 백성들이 부러운 이유다. 우리는 과연 5년 후 이런 지도자를 뽑을 수 있을까?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2        
역사(학문)에 '절대'는 없다....투퀴디데스를 의심하라 | 역사 2013-06-16 19:55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7289518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도널드 케이건 저/박재욱 역/한정숙 감수
휴머니스트 | 2013년 05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투키디데스'(Θουκυδίδης, 기원전 465년경~기원전 400년경)'. 고대 그리스 아테네 역사가다. 그가 쓴 <필로폰네소스 전쟁사>(이하 전쟁사)는 고대 역사서 중 최고 역사서로 꼽힌다. 이 책은 기원전 431년부터 기원전 404년까지 고대 그리스 아테네 주도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 주도 '펠로폰네소스 동맹' 사이에 일어난 '펠로폰네소스 전쟁'(Πελοποννησιακός Πόλεμος)을 기술한 '미완성'(411년까지만 다룸) 작품으로 8권이다.

국제관계와 전쟁사 연구자들 '바이블'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사람들은 <전쟁사>를 통해 고대 그리스 역사와 정치, 군사, 문화 전반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스 역사를 알려면 읽어야 할 책이었다. 1947년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기획한 조지 마셜 (George Marshal)은 그해 2월 프린스턴 대학에서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나는 필로폰네소스 전쟁의 시대와 아테나이의 몰락을 적어도 한 번이라도 되새겨보지 않은 사람이 현대 국제관계늬 몇몇 기본 문제들을 매우 자혜롭게 혹은 자신감을 가지고 다룰 수 있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재인용-<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휴머니스트) 11쪽


마샬 말 이후 국제관계와 전쟁사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되려면 반드시 읽어야 했다. 더 나아가 '가방끈이 조금 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두꺼운' <전쟁사>를 들고 다니는 이도 있었다. <전쟁사>을 읽은 '너도 나도' 투기디데스가 최고 역사가이고, 그를 능가할 이가 없다는 평으로 이어졌다. 한 번 부여된 권위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그리고 그 권위에 도전하는 일 쉽지 않다.

하지만 모든 학문은 '의심'을 통해 진보한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2400년 전 투키디데스 눈으로 본 <전쟁사>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기술했는지 의문을 통해 사실을 따져 묻는 것 역사가로서 당연한 도전이다. 그리고 틀린 부분이 있으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예일대학에서 고대 그리스 역사를 가르치고 연구해온 도널드 케이건은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이하 투퀴디데스>에서 "투퀴디데스를 온전하게 이해하려면 비판적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사상의 세계뿐 아니라 행동의 세계에서 살아간 인간이기 때문"에 "틀린 부분이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기사 관련 사진
 투퀴디데스, 역사를 다시 쓰다
ⓒ 휴머니스트

 

역사서 '바이블'<전쟁사>...비판적 읽기

케이건이 <투퀴디데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위대한 전통의 권위라도 과도하게 존경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투퀴디데스를 무시하고, <전쟁사>가 모두 틀린 것이니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비판적 읽기를 통해 8권이란 엄청난 분량의 <전쟁사>를 쓰면서 "세상에 외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며, 그의 역사 서술은 올바른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투퀴디데서 역사서술 방법과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투퀴디데스도 무오류가 아니며, 다른 모든 저자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가 내린 결론도 검증해봐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작업을 한 뒤 그 결과를 투퀴디데스의 해석과 비교한 이후에야 비로소 투퀴디데스의 정신에 더 온전하게 접근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차이와 충돌을 살펴봄으로써 투퀴디데스의 가장 창조적인 기여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투퀴디데스는 자기 시대에 통용되던 해석이 잘못되었다고 믿었고, 사건에 대한 이해를 교정하기 위해 역사를 서술하고 논증했던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을 이해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왜 투퀴디데스가 그토록 자주 동시대인의 견해와 확연하게 다른 의견을 제시했는지 물을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투퀴디데스의 방법과 목적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37쪽)

케이건은 여기서 우리에게 학문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학문(여기서는 '역사')연구에서 절대는 없다. 그 어떤 위대한 역사가라 할지라도 역사해석에서 오류가 있으며 그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케이건은 투퀴디데스를 최초의 '수정주의자'라고 칭한다. 조금 생각하면 투퀴디데스를 수정주의자로 부르는 케이건 주장에 고개를 갸웃뚱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전쟁사>를 가정 먼저 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케이건은 "역사가는 모두 수정주의자"라면서 "'수정주의자'란 문제를 바라보는 기존 방식을 날카롭고 철저하게 재검토하여 새롭고 통합적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정신을 중대하게 바꾸려는 저자를 말한다"고 정의한다.

투퀴디데스가 <전쟁사>를 "'영원한 유산'되기를, 그리고 '과거에 벌어진 일과 무릇 인간사가 그러하듯이 미래에 똑같거나 비슷한 방식으로 다시 벌어질 일을 명확히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라면서 기록했기에 최초의 수정주의자로 정의해도 무방한 것이다.

'수정주의자' 투퀴디데스 "아테나이 민주정 아냐"...과연 그럴까

케이건은 투퀴디데스가 "스파르타인이 전쟁을 개시한 이유는 '동맹국들이 택한 논변에 설득되어사가 아니라 아테나이가 보유한 힘이 날로 커지고 대부분이 이미 아테나이의 영향력 안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두려웠기 때문이다'고 주장"한 것을  반박한다.

"헬라스 독립을 위해 페르시아에 대항한 위대한 전쟁에서는 아테나이와 스파르타는 협력"했고, "스파르트가 아테나이의 위험성을 더 이상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는 이미 아테나이가 막강한 힘을 갖췄고, 아테나이를 넘어설 능력이 능력이 되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았기"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대인 대다수는 전쟁은 피할 수 있었으며, 메가라 봉쇄령을 비롯한 페리클레스의 실책이 전쟁을 일으켰다"본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아테나이(아테네)가 민주주의 기원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투퀴디데스는 "아테나이는 명목상 민주정었으나 사실 점점 제1시민(페리클레스)이 통치하는  정체가 되었다"고 기술했다. 이같은 투퀴디데스 주장에 대해 "나라의 모든 결정은 민회에서 다수결로 처리"되었고,"매년 선거를 치르고, 공식적인 재무 감사를 받아야 했으며, 언제나 소환되거나 공식재판에 회부될 가능성이 열려 있었기"에 이런한 체제가 진정한 민주정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케이건은 반박한다.

"투퀴디데스가 페리클레스 시대 아테나이를 민주정이 아니라고 부인한 것이야말로 당시 사람들 사이에 광범위하게 퍼졌던 견해를 수정하려는 특히 대담한 시도였다."(174쪽)

케이건은 이외에도 페리클레스 사후 니키아스와 아테나이 정치 지도자 자리를 두고 경쟁한 클레온에 대한 평가 "시민 중 가장 난폭했고, 당시 누구보다 가장 크게 시민에게 영향을 끼쳤다"는 투퀴디데스 평가에 대해 이렇게 비판한다.

클레온의 동시대인 중 다수가 거의 항상 클레온 편에 섰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들은 대개 클레온이 제시한 정책을 기꺼이 따랐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비길 데 없이 높은 명예를 안겨주었다. 심지어 클레온이 큰 패배를 당하고 죽은 뒤에도 존경받고 성공한 장군에게 바치는 명예를 그에게 선사했다. 이와 달리 투퀴디데스는 클레온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동시대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해석을 제시했다.(242쪽)

그리고 아테나이 쇠퇴로 이끈 시켈리아(시칠리아) 원정 책임에 대해 투퀴디데스는 "선동가이며 난폭하고 야심찼던 알키바데스"와 "원정군을 내보낸 아테나이인이 실수한 것"이리거 말한다. 하지만 케이건은 "자기 시대에 그런 일을 당하기에 가장 부적절한 사람"이며 "온 생애를 '아레테'-덕 또는 탁월함-에 따라 살았다"고 칭송한 니키아스에게 있다고 반박한다. 이유는 "아테나인들은 공공 묘역에 비석을 세우고 시켈리아에서 싸우다 죽은 장군들의 이름을 새켰는데, 니키아스 이름은 고의로 누락"했다. 아테나이 사람들이 자신들이 당한 재앙을 두고 니키아스에게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의문 없이 받아 들이는 것...비극

그럼 왜 투퀴디데스는 이처럼 동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당대 역사 해석을 '수정하려고 했을까? 케이건은 "투퀴디데스가 민주정 체제를 혐오했다"면서 "'페리클레스'와 그가 이끈 독재정이 틀렸다는 당대의 해석과 주장이 틀렸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역사를 수정해서 기술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투퀴디데스는 헤르도토스처럼 '역사의 아버지'가 아니라 '정치사의 아버지'라고 말한다. 케이건은 "투퀴디데스의 해석을 비판 없이 그대로 받아 들이는 일은 마차 1,2차 세계대전에서 핵심 역할을 한 원스턴 처칠이 직접 자기 시대를 회고한 해석한 역사 서술을 아무 의문 없이 진실로 받아 들이는 것과 같다"고 경고한다. 사건과 역사, 학문에서 의문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야 말로 가장 위험한 것이다.

하지만 투퀴디데스 <필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역사상 최초로 인간 사회의 발전에 무수한 질문을 던졌고, 여러 종류의 정체(政體)가 가지는 특징과 장단점 검토한 주제를 담고 있다. 이들 주제는 아직까지도 인간사를 이해하고 지도자가 되려는 사람에는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질문으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투퀴디데스가 수정주의를 취했을지라도 새로운 유형의 역사학을 발명하고 새로운 질문을 제기했으며 그로써 인간이 사고하는 방식을 형성하고 사고의 품격을 높였다는 사실만은 추앙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고종과 메이지의 '결정적' 차이는 이것 | 역사 2013-06-13 22:40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7285402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조선의 못난 개항

문소영 저
역사의아침 | 2013년 0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대한제국 황제 고종(1852~1919)과 일본제국 천황 메이지(1852~1912). 두 사람은 태어난 해가 같다. 왕위에 오른 해도 비슷하다. 고종은 1863년, 메이지는 1867년이다. 권좌에 오른 때 그리고 죽은 해도 엇비슷한 두 사람, 하지만 통치행위 결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고종은 재위 기간 동안 나라가 망했고, 메이지는 그 망한 나라를 차지했다.

역사에 가정이란 있을 수 없지만, 만약 역사가 거꾸로 진행돼 고종이 일본을 차지하고, 메이지가 쓸쓸하게 권좌에서 내려왔다면 2013년 한반도는 적어도 허리가 잘린 나라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역사는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왜 고종은 메이지처럼 되지 못했을까

궁금하다. 왜 고종은 메이지처럼 되지 못했을까.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에게 강제 개항했다. 일본은 23년 후인 1876년 미국이 자신들에게 했던 것처럼 조선에 개항(강화도조약)을 요구한다. 일본이 미국과 강제조항을 맺었지만, 메이지를 중심으로 유신을 단행해 아시아 강대국으로 자리매김했다.

기사 관련 사진
 조선의 못난 개항
ⓒ 역사의아침

 

 

하지만 조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강제개항 후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34년 동안 제대로 된 개혁과 근대화를 이루지 못했다. 34년 동안 조선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 <서울신문> 문화부 학술담당 문소영 기자가 쓴 <조선의 못난 개항>(역사의아침)은 그 작은 답을 제시하고 있다.

책 제목에 쓰인 단어 '못난 개항'은 독자의 입장에서 불편하다. 하지만, 저자 문소영이 이 책을 통해 "일본은 1853년 미국 페리 함대에 의해 강제 개항을 시작했지만, 하급무사와 지식인이 결합해 구체제를 해체하고 메이지 유신에 성공하면서 단숨에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부상했다"며 역사자료와 문서를 통해 주장하고 있다. 그 주장 앞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은 개항 이후 34년간 허송세월을 보냈다. 그 중심에는 고종이 있다. 사람들은 을사늑약 당시 '옥쇄'를 숨기고. 이준 열사 등을 헤이그에 보낸 것 등을 예로 들면서 고종이 나름대로 대한제국(조선)을 지키기 위해 힘썼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문소영은 이렇게 묻는다.

고종에 대한 우호적 평가 있을 수 없는 일

"대한민국의 어떤 대통령이 만약 일본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독도를 포기하고 일본에 넘겨준다고 선언했다고 가정해보자.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그리해야 한다는 결정을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 5000만 명은 그 '어떤' 대통령의 결정을 따를 수 있을까? 아마도 탄핵과 같은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결사대를 구성해서 극단적이 행동을 할지로 모를 일이다."(본문 20쪽)

그런데 고종은 아예 '삼천리금수강산'을 송두리째 일본에 넘겨줬다. 35년 일제식민지배가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깊고도 넓다. 아직도 상처는 낫지 않고 있다. 일본 극우만 아니라 역사교과서에서 이제는 당당하게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고, 극우 성향의 총리는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부정한다. 심지어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직업여성'에 비유하고, 말뚝을 우리 사법부에 보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자행하고 있다. 이 모든 책임 근원은 고종에게 있는 것 아닐까.

문소영은 "최근 고종의 일가나 조선 말기에 대한 대단히 우호적인 시선은 우려할 만한 대목이 있다"며 "정책적인 결정이었기에 책임을 묻지 않으려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는데, 책임을 물을 일은 묻고 단죄할 일은 단죄를 하는 것이 한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바람직하다"고 고종에게 책임을 묻지 않으려는 시도를 강하게 반박한다.

일본 '교육개혁'할 때, 조선은 망한 명나라 숭배

고종은 부친 흥선대원군 섭정기간 10년(1863~1873)을 빼고, 1907년까지 34년을 권좌에 있었다. 34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한 세대다. 충분히 한 나라를 개혁하고 근대화시킬 수 있는 시기였다. 고종이 통치한 대한제국을 삼킨 메이지는 달랐다. 메이지는 아버지 고메이 천황이 급사하는 바람에 1867년 1월 열다섯 살 나이로 즉위한다. 새 천황은 "죠수 출신 이토 히로부미와 사쓰마와 조슈·도사·에치젠 번 등이 연합해 막부를 제치고, 신지 개혁세력"과 함께 개혁을 단행했다. 무엇보다 메이지는 교육제도 개혁을 통해 유신을 성공적 안착시킨다.

"근대화 정신과 서양문화·제도 등 서양문명의 전국민적인 확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교육 제대의 개편이었다. 메이지 정부는 1872년 프랑스 교육제도를 모방해 학제를 공포했다. '학제명령서'는 신분에 의한 취학의 차별을 철폐했다. 신분이 세습되지 않았기 때문에 학문은 입신 출세할 수 있는 자산으로 떠올랐다."(본문 174쪽)

하지만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1871년 '서원철폐'를 단행하자 최익현은 1873년 서원철폐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다. 또 명나라 신종을 위해 세운 '만동묘' 폐지를 결정하자 "유생들은 통문을 내 사람들을 모았고 검은 두건과 가죽 허리띠를 한 사람들이 한성에 1만 명이 모여들어" 원상 복구를 주장한다. 흥선대원군이 1873년 하야하자 다음해 고종은 만동묘를 부활시킨다.

일본 메이지와 신진개혁세력들이 프랑스식 교육개혁을 통해 개혁과 근대화를 통해 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 조선 고종과 지도자들은 400년 전 망한 명나라와 죽은 황제를 숭배하는 데 급급했다. 조선과 일본의 미래는 이미 결정난 것 아니었을까.

물론 조선도 서양 문물을 처음으로 접한 유길준, 1905년 '을사오적'에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지만 처음이는 반일파였던 이완용처럼 미국을 다녀온 이도 있다. 그리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같은 개혁파가 있었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냈다. 왜 실패했을까? 문소영은 "김옥균의 실패는 고종만 바라보고, 고종의 결단으로 대부분이 결정되는 왕조국가의 한계 때문이"이라며 "고종이 변심할 수도 있다는 점을 계산에 넣지 못했고, 힘으로 밀어붙일 만한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조선을 선도해야 할 지식인인 선비들이 주자학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 같은 정치인이 조선에 있었다면

무엇보다 조선에는 우리에게는 민족원흉이지만 "영국 유학을 다녀와 '근대화론자'가 돼 메이지 천황 신정부가 들어선 뒤 유럽에서 배은 의회제도와 헌법제정 등 각종 제도를 일본에 이식시키며 급속하게 발전시킨 이토 히로부미"같은 이가 없었다.

"우리에게는 독자적으로 '조선의 길'을 제시해줄 만한 조선의 사상가가 부재했다. 개화의 필요성을 지식층인 양반과 선비들이 받아들이고, 선비와 양반들의 각성이 백성들에게 스며들어 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흥선대원군이 만약 후쿠자와 유키치처럼 유럽과 미국을 주유했더라면, 최소한 1847년에 예정대로 중국에 사신으로라도 다녀왔더라면, 그의 대외정책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밑도 끝도 없는 상상을 하며 아쉬움을 달랠 뿐이다."(본문 113쪽)

조선 지식인 사회는 그들의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파였다가 친청파가 되고, 친청파였다가 친러파가 됐다. 그리고 친러파였다가 친일파가 됐다. 주류기득권이 자리만 바꿨을 뿐 조선사회 근본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은 달랐다. 일본은 "비주류가 주류를 전복"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에서 천황제로 권력체계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섰"고 "인재를 등용하는 방식도 신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발탁"함으로써 정치지형만 아니라 일본사회 전체가 거대한 변화를 겪게 됐다.

비주류가 주류를 전복한 일본... 무능한 주류가 존속한 조선

그럼 조선에서는 언제쯤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섰을까. 1862년 진주농민전쟁과 1894년 동학항쟁은 비주류가 주류에 저항한 사건이다. 하지만 조선 기득권은 이를 강경진압했다. "조선 고급관리 사교모임 같았던 독립협회"는 동학농민전쟁과 의병활동을 폄훼했고 자주의식은 없었다. 강만길은 <고쳐 쓴 한국근현대사>(창비·2006)에서 이렇게 적었다.

"조선은 세계 만국이 오늘날 독립국으로 승인하여 주어 조선 사람이 어떤 나라에 조선을 차지하라고 빌지만 않으면 차지할 나라가 없을지라. 그런 고로 조선에서는 해육군을 많이 길러 외국이 침범하는 것을 막을 까닭도 없고 다만 나라에 해육군이 조금만 있어 동학이나 의병 같은 토비나 진정시킬 만하면 넉넉할지라."(본문 207쪽에서 재인용)

자신들 동학과 의병들에게 자신들 기득권만 보호해주는 군대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조선 관리들이었다. 일본과 대결에서 승리한다는 자체가 허망할 수밖에 없다. 무능한 주류 때문에 나라를 잃고 많다. 문제는 이후에도 비주류가 주류를 전복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의 주장 "한반도에서 비주류가 주류로 올라선 경험은 1997년 외환위기를 맞아 김대중 대통령이 호남을 바탕으로 정권을 잡은 것이나, 2002년 민주당 내에서 소수이자 비주류였던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처럼 비주류가 주류를 이기고 권력을 잡은 적은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1년 12월 10일 대선후보 출마 연설을 통해 "조선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다"며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고 패가망신했다"고 꼬집었다.

일본 극우 비난보다 조선 개항 실패를 직시해야

주류는 이런 노무현을 가만두지 않았다. 비주류 중 비주류인 노무현이 대통령이 됐지만, 기득권은 5년 내내 노무현을 비난했고, 심지어 1년 만에 탄핵을 시도했다. <조선의 못난 개항>을 읽으면서 노무현이 한 말이 귓가에 맴돌았고, 한편으로 불편했다. 이른바 '자학사관'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종과 메이지가 같은 시기에 태어나고, 권좌에 오르고, 죽었다. 결과는 고종은 메이지에게 폐위당하고 자신의 나라는 망했다는 점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 우기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를 직업여성이라 모독할 때 우리가 일본대사관에서 일장기만 불태운다면 어떻게 될까. 113년 전 대한제국 멸망의 교훈을 체득하지 못했다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불편하지만 냉정하게 그 시대를 평가하고 분석해 다시는 나라가 망하는 비극을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2        
'마녀사냥'시대, 중세를 극복해야 | 역사 2013-04-21 09:04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7208397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원종우 저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십자군 전쟁 시작하기 전에 유럽 기독교 문명을 파괴하는 문화적 마르크스주의 없애야 …2083은 이슬람 몰아내는 해다. 대화는 끝났다. 무장항쟁이다.…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이 무슬림을 구하기 위해 기독교인을 학살한 것이다."

테러범 안드레스 베링 브레이비크가 테러 수시간 전 1500쪽에 이르는 '2083: 유럽 독립 선언문'이라는 제목의 글을 시사토론 웹사이트(www.freak.no
)에 올린 글입니다. 브레이비크는 지난 2011년 7월 23일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 인근 우토야섬에서 발생한 청소년 캠프 총기테러를 자행해 98명을 숨지게 했습니다. 브레이크는 기독교 근본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범인 신원이 완전히 밝혀지기 전 우리나라 일부 언론들은 용의자를 알카에다와 아프가니스탄, 리비아 등과 관련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성 보도를 쏟아냈습니다.

테러범은 '이슬람'...십자군은 '성전' 과연 그럴까?

왜 우리 언론들은 이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자연스럽게(?) 이슬람을 의심할까요? 우리 언론들이 이슬람교에 대한 악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외신 대부분이 서구 언론 시각을 그대로 보도하거나,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알게 모르게 서구 시각으로 이슬람을 보는 것입니다.

'전쟁광' 조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은 2001년 9월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하면서 "이번 전쟁은 새로운 종류의 악(Evil)에 대항하는 투쟁이며, 테러를 응징하는 십자군 전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십자군에 대한 미국 대통령의 무지를 그대로 드러낸 사건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악을 응징한 전쟁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군이 악에 가까웠습니다.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광기에 휩싸여 살육을 일삼고 다녔다고 할 수 없지만 전반적으로 그들이 유럽과 이슬람 세계에 끼친 폐해는 아주 컸고, 특히 '성스러운 군대', '신의 영광' 등의 거창하고도 숭고한 명분을 생각한다며 그 윤리적 타락 정도는 실로 비참한 것이다. 해방 전쟁, 성전 등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모든 다른 전쟁처럼 십자군 원정도 힘에 중독되어 피를 탐닉하는 인간의 잔인성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 비극이었을 뿐이다." -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유럽편>

딴지관광청(현 노매드21)에 '파토의 유럽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약 5년 동안 연재한 글을 수정 보완한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원종우 지음 ㅣ 역사의아침 펴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 관한 지식이 과연 진리일까?"라고 묻습니다.

특히 승자가 쓰는 역사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고, 그들이 기록한 역사를 비판없이 받아 들이는 우리들 자세에 딴죽을 겁니다.

2년 전 이맘때입니다. 동네에 신혼부부가 '00못'가를 거닐다가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연못은 연꽃이 피면 굉장히 예쁜데, 우리 가족도 1년에 두 세번은 가는 곳이라 충격을 받았습니다. 흉흉한 소문이란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신부가 윤간을 당해 숨졌다는 것입니다. 저 역시 그 흉흉한 소문을 들은 후 길을 거닐다가 외국인노동자를 보면 순간 피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내 몸에 뿌리깊은 '인종주의'....

백인들이 황인종과 흑인종을 차별하는 것만 인종주의라고 생각했던 인종주의는 제 몸에도 배어있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깜둥이", "냄새난다"같은 말을 쉽게 합니다. 중국 사람을 '떼놈', 일본 사람을 '쪽발이'라고 합니다. 심지어 한국계 중국인(조선족)을 비하하기 까지 합니다. 이처럼 인종주의는 아주 멀리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한국인 사이에 통용되는 인간에 대한 상식을 이주 노동자들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돈 없고 힘없는데도 생김새와 말도 우리와 다르다는 사실은 힘을 가진 고용주에게 무의식적인 폭압의 빌미를 제공한다. 그 결과 이주 노동자들을 하등한 존재로 대하게 되고, 이런 관념은 그들의 잔인한 행위를 합리화 하면서 동물적 가학성마저 촉발시킨다. 이 시점에서 양심은 증발해버리고 일종의 자기최면 상태에 놓이는데 이것은 인종주의 전형적인 심리 유형이기도 하다."(본문에서)

일본 사람들은 우리를 '조센징'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노하면서 우리는 그들을 '원숭이'에 비유한다. 지은이는 이런 언행을 "인종주의 전향"이라며 "여기서 인종주의를 발견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글을 쓴 사람 역시 자신이 인종주의 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종우 글을 읽어면서 내 몸 속에 배인 인종주의가 얼마나 뿌리깊은지 말았습니다. 남탓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에는 흰피부를 가진 백인과 검은 피부를 가진 흑인 그리고 동남아 사람들을 쉽게 만납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는 순간 우리 마음은 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백인은 아무렇지 않는데, 흑인과 동남아 사람들은 왠지 꺼림칙합니다. 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를 걷어낼 때만이 우리는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국가는 여럿이고 민족은 다양하더라도 이제 세계는 여러 측면에서 하나가 되고 있다. '세계화'라는 표현은 자본의 탐욕을 대변하는 부정적인 의미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경제와 낯섦을 허물고 차이를 인종하고 받아들이면서 공존을 꾀한다는 의미에서 세계가 하나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다. 이것은 거창한 구호, 제도, 조약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작은 것에서부터 지각하고 실천할 때만 언젠가 세상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가될 수 있을 것이다.

<지도밖으로 행군하라>를 지은 한비야 교장(세계시민학교)이 만든 '세계시민'이란 단어는 아주 의미가 깊습니다. 지구상에는 200개가 넘는 나라가 있고, 수천개나 넘는 민족이 있습니다. 피부색깔이 다른 인종이 있습니다. 국적과 민족, 인종은 달라도 '시민'으로 하나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 속에는 인종주의를 자연스럽게 제거합니다.

'마녀사냥'시대, 중세를 극복해야....

지은이는 말합니다. 역사는 시간별로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세시대를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던 십자군 전쟁은 '야만'입니다. 이와 함께 마녀사냥은 중세는 그리스·로마시대 정신문명을 퇴보시켰습니다. 마녀로 고발당한 이유를 보면 중세가 얼마나 정신문명 고갈시대인지 알 수 있습니다.

큰소리로 웃는다. 전혀 웃지 않는다. 혼자 중얼거린다. 간질병이 있거나 사시다. 외모가 흉하다. 고양이를 키운다. 피부병이 있다. 몽유병이 있다. 교회를 다니지 않거나 고해를 하지 않는다. 낮에 잠을 잔다.(본문에서)

이게 중세였습니다. 하지만 중세 마녀사냥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 지은이 진단입니다. 예를 들면 1950년대 '매카시즘'과 1990년대 유고·터키·이라크·인도네시아·남아프리카 등에서 벌어진 인종분규도 "마녀사냥과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는 '빨갱이 사냥'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술문명은 진보할지 몰라도, 정신문명은 퇴보와 되풀이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극복할 때만이 우리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한 문명의 수준은 부, 과학기술, 법 제도 같은 표면적인 것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문명이 증오를 얼마나 통제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부의 재분배라든가 사회적 기회의 확보와 함께, 증오를 현명하게 통제하는 문명에서는 일상에서의 평화와 행복을 구가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구성원 간의 미움이 만연된 사회는 제 아무리 국내 총생산량이 높다 한들 타의 모범이 될 수 없다.

중세는 과연 끝났는가. 십자군과 마녀사냥은 과거의 역사일 뿐인가. 나의 증오가 이데올로기, 신념으로 포장되어 미움과 폭력으로 발휘되는 일은 이제 다시 없을 것인가. 이 질문의 답은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갈 세상이 던져줄 것이다. 이념이나 이론, 슬로건이나 명분이 아닌 삶 자체가 말이다(본문에서).

역사는 반드시 '진보'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는 '좌절과 퇴보'를 통해 극복한다는 것이 지은이 생각입니다. 특히 '승자의 기록'인 역사는 '오류'일 수 있음을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류의 오류를 이해할 때... 인종주의 극복할 수 있어

'인류의 오류'를 이해해야만 역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인종주의'와 '십자군 전쟁' 그리고 '마녀사냥'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절대적 선이나 악이 아니며 단지 이익에 의해 선 또는 악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현명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유럽편>이 독자에게 던진 주제입니다.

나는 유럽의 과거와 오늘을 통해 '이성을 통한 근대정신의 달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이성이란 차가운 논리나 계산적인 지식이 아니라 현실을 바로 보고, 인간을 인간으로 이해하고 포용하는 지성과 용기를 말한다. 또 악한 행동을 비판하고 응징하되,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들여다보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나 자신도, 여러분도, 대한민국도, 다른 어떤 사람이나 나라보다 선하거나 훌륭하지 않다. 한계를 알고 역사와 사회의 교훈을 배워나갈 때, 진정 기본으로 복귀하고 순수함으로 회귀할 수 있는 지혜와 근대가 추구했던 이상에 하루하루 근접하는 삶의 자세를 갖추게 될 것이다.(중락) 스스로의 한계와 문제를 알면서도 거기에 함몰되지 않고 소신 껏 더 나은 생존이 길을 택하는 것, 그렇게 선택한 길을 묵묵히 가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힘이고 용기이기 때문이다.(맺음말)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조선 노비들의 '존재감', 상상을 초월하네 | 역사 2013-04-14 19:09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7199286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조선 노비들

김종성 저
역사의아침 | 2013년 0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이전에, 부농이나 지주에게 고용되어 그 집의 농사일이나 잡일을 해 주고 품삯을 받는 사내를 이르던 말.

'머슴'에 대한 포털 다음 국어사전 뜻풀이다. 어릴 적 동네에도 머슴들이 있었다. 그들 삶은 어린 내가 보기에도 참 힘들겠다, 싶었다. 이제 더 이상 머슴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1997년 IMF '방아쇠'를 당긴 한보그룹 몰락 때 청문회에 나왔던 정태수 당시 회장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머슴이 뭘 알겠는가."

'머슴론' 존재하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이 한 마디는 대한민국 재벌그룹 회장들이 임직원들을 어떤 존재로 생각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말이었다. 월급쟁이들은 "머슴이 뭘 알겠는가"라는 말을 듣고, 엄청난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자본이 노동자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오히려 더 악화됐다는 느낌마저 든다. 적어도 머슴은 지주에게 모든 생존권을 박탈당하진 않았다. 다른 지주와 부농에게로 옮길 수 있고, 자작농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 노동자들은 강하게 표현하면 '파리목숨'이다. 언제 잘릴지 모른다.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 일류기업이 된 국내 한 대기업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노조는 안된다"는 창업주의 유지를 받들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조 결성을 방해한다. 헌법조차 무시하는 것이다. 정치권력은 자본의 눈치를 보고, 공권력은 감시한 자본을 잡아넣기보다는 노동자를 옭아맨다. 그리하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지만, 'OO공화국', 'OO제국'같은 민주시민에게는 부끄러운 말을 만들어냈다. 이런 일들을 접할 때마다, 과연 '대한민국은 조선시대보다 너 낫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여기 책 한 권이 있다. <오마이뉴스>에서 '사극으로 역사읽기'를 쓰고 있는 김종성 시민기자가 쓴 <조선 노비들-천하지만 특별한>(역사의 아침 펴냄)이다.

선비와 토론한 노비, 박인수

<조선노비들>은 그동안 사극을 통해서 보고 느꼈던 '노비'에 대한 짧은 생각을 고쳐주고, 더 풍성하게 해준다.

조선시대 노비 열여덟 명의 삶을 소개하고, 각각의 노비와 관련된 개별 쟁점, 즉 노비의 개념, 기원, 결혼, 직업, 사회적 지위, 유형, 의무, 법률관계, 재산, 자녀, 면천, 저항 등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또한 사료 속에만 존재하던 인물들을 사료 밖으로 끄집어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그동안 사극이나 문학 작품 등에서 '하나의 면'만이 부각된 노비들의 본모습과 함께, 그들의 모습을 통해 조선을 지탱했던 기둥 중 하나였던 '노비제도'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한다. - 출판사 소개

SBS 드라마 <뿌리깊은나무>(2011)에서 똘복(강채윤 어릴적 이름)과 석삼(똘복이 아버지)이 글자를 알았다면, 석삼은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똘복과 석삼이처럼 조선시대 노비들은 문자를 해독하지 못했다. 세종 이도의 한글창제도 문자 해독을 못하는 백성 때문이었다. 당연히 노비가 학문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여기 우리 상상을 뛰어넘는 노비가 있다. 서경덕의 제자로 당대 최고 학자인 박지화에게 유학을 배운 노비 박인수다. 박인수는 불경까지 익혀 선비들과 토론을 해도 막힘이 없었다. 한 마디로 '알아줄' 정도였다. 그런 그를 그 시대 선비들은 노비가 글자를 안 다고 내치지 않았다. 그를 존경했다. 그렇다 모두는 아니었지만 조선 선비들은 자신보다 학식이 높은 자를 존경할 줄 알았다. 어쩌면 그것이 조선이 527년 동안 존속할 수 있었던 이유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매일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수십 명의 제자가 찾아와 마당에 늘어서서 절을 올렸다"면서 "박인수를 떠받는 제자들은 거의 다 양인이었을 것이고 그중 상당수는 특권층인 양반이었을 텐데, 그런 사람들이 노비를 떠받들었다니!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적었다. 나 역시 납득하기 힘들다. 우리가 가진 노비에 대한 인식이 그만큼 좁기 때문이리라.

여종 손가락 자른 주인....야구방망이 매타작한 대한민국 어느 재벌 회장

하지만 여종 손가락을 자른 주인도 있었다. 중종조 명재상인 송질의 딸이면서 조광조 일파로 몰려 한때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삼정승을 지낸 홍언필 부인인 송씨가 그 사람이다. 송씨는 혼례식날 신혼방에 술상을 가지고 들어온 여종 손가락을 잘라버렸다. 그는 또 남편과 간통한 남의 집 여종을 수없이 매질하고 칼로 머리털을 잘랐다. 심지어 매질 당해 쓰러진 그 여종을 생사 확인조차 하지 않고 땅에 묻었다.

이런 일은 조선시대만 있었을까? 매질 당하는 노비를 보면서 지난 2010년  아이를 둔 가장을 야구방망이로 때린 한 재벌 대표가 생각났다. 당연히 매타작을 한 이는 법의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법원은 그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했다. 재판부가 그를 집행유예로 감경한 이유는 "피해자와 합의했고 사회적 지탄을 받은 점 등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기본적인 인간대접조차 받지 못한 조선 노비들 지위는 물건이나 다름없었다"고 말한다. 야구방망이 휘두른 최아무개 회장도 여종 손가락을 자르고, 여종을 매질한 송씨와 별반 다르지 않다.

노비들은 죽어도 동정받기는 커녕 오히려 그들을 죽인 이들이 더 추앙받기도 했다. 정조 때 형조판서를, 순조 때 우의정을 지낸 이서구는 노비를 때려 죽였지만, "번거로워 관아에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혹자들은 "'젊은 친구'가 어쩜 그렇게 훌륭한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하고 감탄하기 까지했"다니, 노비는 사람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나마 대한민국은 매타작을 한 재벌회장에 대해 분노할 줄은 알았다.

노비가 없었다면 조선을 굴러가지 못했을 것

노비도 노비 나름이다. "1000명의 부하를 거느린 노비"가 있는가 하면, 남편을 과거에 급제시킨 여종도 있다. 무엇보다 재산을 축적하여 자식들에게 물려주거나 기근에 빠진 사람들을 도운 노비도 있었다고 한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충청도 진천에 사는 사노비 임복은 기근에 빠진 사람들을 돕고자 곡식 2000석을 바쳐 성종에 의해 면천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이같은 예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대다수 노비들은 양인들에 비해 가난하게 살았다.

나는 그동안 조선조 신분구조는 '사농공상(선비, 농부, 공장, 상인)'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지은이는 "법적으로 존재한 신분은 양인과 천민(노비)뿐이었다"고 말한다. 사농공상은 신분 구별이 아니라 "직역(職域)의 구별이었다"고 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양인 중에도 사농공상이 있고, 천민 중에도 '사농공상'이 있다는 말이다.

1590년 통신사 허성을 수행한 노비 백대붕은 한시를 잘 지었다. 노비가 통신사를 수행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농사를 짓는 노비, 기술을 보유한 공노비, 실무행정을 담당하는 노비 츨신 서리들이 있었다. 한 마디로 조선은 노비가 없었다면 굴러가지 못했을 것이다.

"행정도 상당 부분은 노비들에 의해, 수공업제품의 생산도 노비들에 의해, 거기에다가 농업생산 역시 상당 부분은 노비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니, 조선이란 나라는 기본적으로 노비들에 의해 굴러가는 나라였던 셈이다."(본문에서)

노비는 '마당쇠'와 '삼월이'가 아냐, 하지만....

이처럼 노비는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마당쇠'와 '삼월이'가 아니었다. 물론 양인처럼 마음을 먹는다고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손가락이 잘리고, 매타작 당해 죽어도 동정을 받기는 커녕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산업생산의 상당부분을 책임졌다는 점에서 노비는 노동자와 흡사한 존재"였다.

조선 노비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저항했다. 왕과 귀족 지배층은 이를 공권력으로 막았다. 하지만 저항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결국 1894년 노비제도는 공식 폐지됐다. 120년이 지난 지금 노동자들은 치열한 생존권 투쟁을 하고 있다. 우리는 김종성의 마지막 글을 가슴에 새길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서민이 노동자 대중이라면, 옛날의 서민은 노비 대중이었다. 즉 이 둘은 자기 시대의 대표적인 서민이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 같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노비제 시대와 노동자 시대에는 역사 발전의 공통적인 패턴이 있을 수밖에 없고, 그 패턴은 앞으로 계속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일본만 역사를 왜곡한다고? 과연 그럴까 | 역사 2013-03-31 21:59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7175800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이주한 저
위즈덤하우스 | 2013년 01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을 강력히 규탄한다"

일본 문부과학성이 '독도 영유권' 주장을 담은 고등학교 사회교과서 검증을 통과시키자, 지난 27일 새누리당 민현주 대변인 낸 논평입니다. 서남수 교육부 장관은 아예 서한을 보내 "일본 사회과 교과서에 독도 기술이 확대되고 가해자로서의 역사인식이 희박한 일본정부의 입장이 교과서 기술에 반영됐다"며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역사왜곡, 일본 '전유물'? 아닌 것 같은데...

'독도는 우리 땅'은 불변입니다. 하지만 과연 일본만 우리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 들어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시도가 끊임없이 제기되었습니다. 뉴라이트 핵심 인물이자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일본이 독도를 일본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며 일본 극우와 근현대 인식이 비슷합니다.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 역사의아침

 

그리고 박근혜 정부들어 '5.16군사반란'을 '쿠데타'로 부르지 못하는 고위공직자들이 수두룩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일본에 항의 서한을 보낸 서남수 교육부 장관입니다.

문제는 현대사만 왜곡된 것이 아니라 고대사(고조선·한사군·임나일본부)가 주류 역사학자들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됐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일제식민지사관 시각을 가졌다고 강하게 비판합니다. 이들 중 한 사람이 이주한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한국 주류 역사학계에는 '한국'과 '역사학'이 없다. 중국의 변방사나 일본의 지방사로 한국 역사를 보니 한국이 사라졌다. 역사적 사실에 성실하기는커녕 사실을 외면하거나 과장하고, 견강부화하거나 억단해서 진실을 매몰시키니 '역사학' 없다."-<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이주한 지음 ㅣ 역사의 아침 펴냄) 서문에서

주류 역사학계가 한국사를 중국 '변방사'나 일본 '지방사'로 봤다는 주장에 동의하기 힘들지만, 이주한은 한국사 '거두' 이병도 전 서울대 교수와 그의 후예들이 얼마나 한국사를 왜곡시켰는지 강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한국사를 죽인, 조선사편수회 이어받은 주류 역사학

몇 년 전 한국사가 필수과목에서 빠져 논란이 빚어지고, 아직도 수능은 선택과목이라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비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제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국사는 필수였고, 학력고사(1986년 학년도)는 20점짜리 필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나는 것은 '태정태세문단세...'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역사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단재 신채호
ⓒ 다음백과사전

 

아직도 한국사를 '암기과목'으로 생각하니 제대로된 역사관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고대사가 일제식민사관 지배를 받고 있는 주류 역사학계 주장이 '정설'이 된 것에 대해 강하게 비판한 책이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입니다.

"1945년 조선총독부는 해체되었지만,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는 한국 주류 역사학계로 승계되었다. 광복 후 독립운동가가 친일파의 손에 청산되면서 한국사 원형과 진실은 철저하게 부관참시 당했다. 조선사편수회가 날조하고  왜곡한 역사는 이른바 '실증주의'로 치장되었고, 조선사편수회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의 과학적 역사학은 '신념이 앞서 관념론, '국수주의'로 전락했다. 그렇게 한국사는 죽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며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단재 선생은 또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해석했습니다.

김삼웅 "단재 고대사만 제대로 연구했다면, 중국 역사왜곡 없을 것"

이같은 인식은 밖으로는 아의 단위인 우리 민족과 국가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안으로는 각 시대 다양한 역사적 모순은 투쟁을 통해 사회발전 한다는 변증법적 역사관입니다. 이주한은 "주류 식민사학자들은 단재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그들과 단재는 양립할 수 없다. 식민사학자들은 조선총독부의 시각으로 한국사를 본다"면서 "일본 극우파 시각으로 한국사를 본다. 그리니 양립할 수 없다"고 질타하면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지은 <단채 신채호 평전>(시대의 창)을 다음과 같이 인용합니다.

"한국 사학계가 단재의 고대사만 제대로 연구하고 고증에 충실해왔다면 감히 중국이 요즘 같이 황당무계한  역사 왜곡의 망설을 들고 나오지 못하였을 터이다. 이런 의미에서 단재의 고대사에 대한 인식과 100년 앞을 내다보는 진정한 사가의 진면목을 보인다."

 단재 선생은 역사를 보는 주체적 관점을 매우 강조했다.
ⓒ 역사의 아침

 


이주한은 단재 선생이 역사를 보는 주체적 관점을 무엇보다 강조했다면서 "주체적 관심이란 누가, 어떤 시각으로 역사를 바로보는가 문제"라고 합니다. 단재는 중화주의나 일제 식민주의 관점에서 보는 것을 가장 먼저 경계했다고 이주한은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침략과 지배의 관점에 서면 반드시 역사를 왜곡하기 때문"이란 것이 단재 신채호의 역사를 보는 관점이었습니다.

"식민주의사관은 일제 한국 침략과 지배 정당화 합리화"

그럼 식민사관은 어떻게 우리나라에 생겨났을까요?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역사학)는<식민사관은 어떻게 생겨났는가>에서 "일제 어용학자들은 한국사 연구를 '한국침략'이라는 그들 정책에 맞춰 진행시켰다. 따라서 식민주의사관은 일제가 한국 침략과 지배를 한국의 역사로 정당화 합리화 위해 고안해 낸 역사관"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근거해 이주한은 "이만열 분석은 정확하다"며 "침략과 지배를 위해 고안함 역사가 제대로 된 역사일 수 없다. 학문이 아니고 정치이고, 이론이 아니라 폭력이다"고 식민주의사관을 맹비난합니다.

옛 서독 대통령 바이체크가 2차 대전 패전 40돌 기념식에서 "기억을 생생하게 간직하는 게, 왜 중요한지 이해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극복이 아니다. 과거에 눈을 감은 사람은 현재도 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주한도 말합니다.

"기억은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끔 한다. 기억이 없는 인간은 인간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지키기 어렵다. 역사는 기억이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얼마든지 농락되고 누군가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다. 역사를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러나 역사를 기억하는 자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책 서문)

우리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친일파와 수구기득권세력이 끊임없이 역사를 왜곡하고, 제대로 된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식민사관은 역사만 아니라 현대사 전반에 걸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식민사관 논란은 단순히 역사학계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역사관은 그 시대의 세계관을 함축한 것이어서,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젠더·교육·법·예술 등 사회 전 영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가 식민사관에서 비롯되지는 않겠지만, 그로부터 자유로운 것도 없다. 식민사관은 오늘도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사가 죽어야 한국이 산다는 말이 성립하는 것이다."(본문에서)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에 있다고?

'한사군'(낙랑·진번·임둔·현도), 시험 때마다 많이 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사군 위치를 두고 주류사학계는 한반도 서북부라고 주장합니다. 우리들도 그렇게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주한은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이라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위만조선의 항신들이 제후로 봉해진 지역
ⓒ 역사의 아침

 


 주류 역사학계가 주장하는 한사군,임나일본부의 위치와 실제 위치
ⓒ 역사의 아침

 


서기전 1세기경 <사>》나 서기 1세기경 <한서>, 3세기 후반 <삼국지>, 5세기경 고대 남송의 <후한서>를 비롯한 중국 고대 사료들에서 한사군의 위치를 추적해야 한다. 1차 사료를 해석한 2차 사료보다 1차 사료를 우선해야 한다. 이것은 역사학의 기본이다. 중국 고대 사료는 일관되게 한사군 중심지인 낙랑이 요동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인 패수가 지금의 난하라는 사실도 중국 고대 사료에 근거해 어렵지 않게 비정할 수 있다. "패수가 압록강이다, 청천강이다" 하는 고정관념만 버리면 그렇다. -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이나 중국에 있었다는 주장은 이전부터 제기되었습니다. 아직도 첨예한 논란입니다. 그러므로 이주한 주장이 완전한 정설로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지만, 한산군 위치가 어디인지에 따라 중국 동북공정을 반복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임은 분명합니다.

역사는 늘 "왜"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

이주한 같은 주장을 '국수주의'로 비판할 수 있지만, 이주한은 "하나의 정설만 있어야 하는 한국사는 이미 역사도 아니고 학문도 아니다"면서 "이미 답이 다 정해져 있으니 연구할 필요가 없다. 역사는 늘 '왜'라는 질문에서 시작한다"고 강조합니다. 어떤 학문이던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논쟁과 토론을 해야 합니다. 사료를 통해 상대방의 역사 해석을 반박할 때만 한국사는 발전하고 우리 사회 역시 진보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분야 중에서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것이 역사관이다. 역사관은 한 사람의 종합적인 인식체계이자 한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시도한 발상의 전환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이 순간 영혼의 소리에 집중해보자. 우리의 사고와 의식, 일상을 지배하는 가치를 각자의 장에서 문제제기하고, 새로운 꿈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연대의 장으로 나오자. 모두를 위한 역사는 없다. 일제 식민사관에 균열이 생길 때, 우리는 역동적으로 굽이치는 변혁의 물결을 맞을 것이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정의가 힘이 될 수 있는 세상 열망하지 않으면, 파시즘 도래... | 역사 2013-02-11 21:54
http://blog.yes24.com/document/7086707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대한민국 잔혹사

김동춘 저
한겨레출판 | 2013년 01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 아무리 여러 번 들어도 실제로 한 번 보는 것보다는 못하다)이란 말이 있지만, 우리 옛말에 "서울 안 가 본 사람이 서울 가 본 사람을 이긴다"는 말도 있습니다. 며칠 전 지인들과 김용준 전 국무총리후보자 낙마 이유 중 하나인 두 아들 병역문제를 비판하면서 저는 우리도 이제 모병제로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저를 제외한 세 사람이 모두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남북이 대치한 상황에서 아직 모병제는 성급하다는 논리를 폈고, 저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토론하다가 다른 일행이 와서 더 이상 토론은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병영국가', 황군장교 유산...

제가 징병제가 아닌 모병제를 지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폭력 문화가 군대에서 왔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편견과 단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1987년 5월부터 1989년 9월까지 군복무를 하면서 경험한 것은 폭력이 폭력을 낳는다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저보다 먼저 군복무를 한 분들은 더 심각한 폭력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저도 상상을 초월하는 폭력을 당했고, 동기 중에는 선임병에게 구타를 당해 중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 군 폭력 문화는 일제잔재 중 하나입니다. 독재자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17년 동안 '병영국가'로 통치한 이유 중 하나가 일본군과 황군장교로 살면서 몸에 물든 '폭력성'이 한 몫했습니다.

"후배들을 다잡기 위한 일본 군대의 폐습인 기합 문화. 이런 무조건 적인 폭력 문화는 박정희 통치 기간에도 역시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만화 박정희 1> 87쪽(백무현 글 ㅣ 박순찬 그림 ㅣ시대의 창 펴냄)

독재자 박정희를 칭송하는 이들은 그가 산업화와 경제개발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거뒀다는 논리를 폅니다. 하지만 이 빛나는 성과 뒤편에는 폭력이 폭력을 낳는 어둠이 자리하고 있음은 애써 외면하거나,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독재는 필요악이라고 주장합니다. 배불리게 했다는 이유로 폭력도 가능하다는 민주공화국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폭력은 그 어떤 논리로도 정당성이 없습니다.

물론 지금은 독재자 박정희가 통치한 방식인 '병역체제'와는 다릅니다. 하지만 더 교묘하고 은밀하게 국가는 폭력을 자행합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비판세력을 감옥에 가두어버렸지만, 이명박 정권은 '밥줄'을 끊었습니다. 용산참사는 아직 진행형이고, 쌍용자동차와 한진중공업 노동자는 죽음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공권력이 오히려 국민을 보호하기보다는 국민을 테러리스트로 만들었습니다.

 대한민국잔혹사
ⓒ 한겨레출판

 

이 같은 일이 이어지는 이유는 폭력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무지 때문입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한겨레 21>에 2년간 연재한 글을 모은 <대한민국 잔혹사>(한겨레출판)은 마르크 블로흐(Marc Bloch)가 말한 "과거에 대한 무지가 현재의 이해 부족을 초래한다"는 주장을 되샘질시켜주며 폭력을 반성하지 않으면 폭력은 반복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은이는 힘이 정의를 지배하고, 군림해온 대한민국 역사를 하나하나 살피면서, 폭력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파악합니다. 그래야 대한민국 과거사는 '잔혹사'였지만 현재와 미래는 잔혹사가 반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4·3 사건'여순 반란, 빨치산, 그리고 용산참사는 6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 사건으로 전혀 관련성이 없는 것 같지만, 지은이 생각은 다릅니다.

이승만 정권이 양민을 '적'으로 규정한 것처럼 이명박 정권 역시 용산철거민들은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적'이었습니다.

4·3 사건' 양민과 용산참사 철거민은 공권력 '적'...

"망루에 올라가 강제 진압을 당하지 않으려고 화염병을 준비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것은 생존을 위한 버티기를 국가와 국민에게 공격을 가하는 테러 세력의 폭력으로 간주한 사고방식이었다. 폭력 기구로 무장한 채 도심에서 버티는 농성자들은 이명박 정부에는 신속히 제거해야 할 '적'이었던 셈이다. 용산 참사는 한국전쟁 전후 시기와 마찬가지로 토벌의 논리,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 후방 영역에 '적'을 그냥 둘 수 없다는 생각, 혹은 대항 폭력을 방치할 수 없다는 다급함과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용산 농성자들은 비록 정부를 공격하지 않더라도 존재 자체가 위협이었다"(본문에서)

하지만 권력자로부터 폭행을 명령받은 자들은 "상관의 명령이므로 복종했을 뿐"(1951년 거창 학살 책임자 이종대), "나는 철저히 '상명하복' 원칙을 지켰고 조직을 위해 십자가를 졌다"(고문 기술자 이근안)면서 자신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고 변명한다고 지은이는 지적합니다. 즉, 국가와 권력이 명령했기 때문에 자신의 폭력은 정당하다는 논리입니다. '절대복종', '상명하복'이 인민의 자유와 인간존엄성 보다 더 우위에 있다는 논리는 결국 잔혹한 대한민국을 만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은이는 "옳은 자를 강하게 하는 일은, 정치의 무대에 누가 서는가, 어떻게 정치를 하는가의 문제다"라며 "그러자면 우선 옳지 않으면서도 힘을 갖게 된 사람들의 이력과 연유를 만천하에 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옳은 일을 하다가 탄핵당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위로하며, 그들의 아픔에 공감해주는 일도 그만큼 중요하다. 관심, 앎, 연대, 공감은 옳음에 힘을 부여하는 무기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정치를 힘이 정의로 군림하게 된 한국 사회의 메커니즘 속에서 다시 읽어야 하고, 힘이 정의가 된 역사를 반추하면서 정의가 힘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열망해야 한다."(본문에서)

정의가 힘이 될 수 있는 세상 열망하지 않으면, 파시즘 도래...

정의가 힘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열망하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1980년대로 돌아갈 수 있음을 지난 5년 동안 경험했습니다. 불의와 국가폭력에 저항하지 않으면 유신독재로 회구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유신헌법이 이렇듯 국가를 신성시하며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 원칙을 깡그리 무시하고도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라는 내용을 헌법에 집어넣은 사실이야말로 오늘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교과서에 집어넣자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즉 유신헌법은 자유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는 '자유+민주'가 아니라 '자유민주'이고 정확히 말하면 '자유(민주)'다. 이 '자유(민주)'는 공산 독재는 배격하나 반공 독재와 자본 독재, 더 나아가 파시즘까지 용인할 여지를 남긴다.(본문에서)

지난 30일은 20세기 '도살자'이자 가장 완벽한 독재자인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오른지 꼭 80년(1932년)이 된 날입니다. 이날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인권은 스스로 주장하지 못하고, 자유는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며, 민주주의는 스스로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한겨레>는 지난 31일 보도했습니다. 메르켈 총리는 또 "독재자가 독일사회의 다양성을 모두 쓸어버리는 데 고작 6개월이 걸렸다"며 "나치의 부상은 함께 한 독일 엘리트들과 이를 묵인한 사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영원히 경고가 돼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히틀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가능합니다. 박정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박정희식 통치행위를 그리워하는, 아니 거의 '종교성'을 지닌 존재로 추앙하는 세력들이 있습니다. 히틀러와 박정희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다양성이 없는 민주주의는 없습니다. 그것은 독재이자, 파시즘입니다.

박근혜 당선인이 '100%대한민국', '국민대통합'을 강조하는 것이 심히 우려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민주주의에서 100%는 없습니다. 민주주의에서 대통합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대통합은 모두가 같은 생각, 모두가 같은 마음, 모두가 한 목표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논리입니다. 김용준 전 후보자 검증을 "사적인 공격"이라고 분노한 것은 비판기능을 인정하지 않는 박 당선인의 정치인식을 그대로 보여주었습니다. 다양성은 비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을 탄압하고, 배척하면 독재로 회귀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가 도래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국가권력 폭력을 넘어 자본권력 폭력 도래...

국가폭력을 넘어 자본권력 폭력이 그 도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지난 해 7월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서 '현대판 사병'이 등장한 사실이 <오마이뉴스> 보도를 통해 드러났습니다. '컨택터스(CONTACTUS)'라는 용역업체입니다. 이 업체는 MBC, KEC, 유성기업 등 파업 현장뿐 아니라 여주 4대강, 제자교회를 비롯해 울산유치권, 마포공사장, 군산공사장, (천안)골프장, (용인)유치권, 재개발 총회 등 각종 분쟁 현장에 용역이 투입됐습니다. <오마이뉴스>는 국가권력이 아닌 자본권력의 폭력을 낱낱이 보도했습니다.

그런데 이들 용역업체 직원 중에는 가난한 대학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은이는 이들 대학생 논리가 과거 우익 테러 조직이 주장한 논리와 비슷하다고 탄식합니다.

과거의 우익 테러 조직이나 오늘날 파업 현장에 투입되어 농성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용역 직원들의 행동의 동기는 거의 동일하다. 다음 학기 등록금을 마련하려고 용역업체에 들어왔다는 한 대학생은 "긴급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살기 위해 봉을 휘두른다"라고 말하면서, 이 일을 하는 것이 떳떳하지는 않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을 안 하면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라고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토로한다.(중략)예나 지금이나 우익 테러의 명분은 동일하다. 과거의 '공산당 때려잡기'가 오늘의 '종북 때려잡기'로 변했을 뿐이다. 우익 테러 세력이 이제 합법적으로 설치된 회사의 직원이라는 점이 과거와 달라진 점일까? 사설 테러 조직이 공권력을 대신하는 나라에서 국가란 도대체 무엇일까?(본문에서)

국가 폭력 철저히 반성과 성찰, 살림누리를 열어가...

그리고 올해 들어 <오마이뉴스>는 특별기획 '헌법 위에 군림하는 이마트'를 30일 현재 19번째 보도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잔혹사가 자본권력으로까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제 할 일은 대한민국 잔혹사를 반성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잔혹사를 반성하면 폭력은 중단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국가폭력으로 스러져간 이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잔혹사가 되풀이 하지 않도록 반성과 성찰을 몸에 녹여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앞날은 잔혹함이 아니라 살림누리입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3        
머리와 가슴으로 쓴 '고난의 역사' | 역사 2010-02-04 16:17
http://blog.yes24.com/document/1893452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뜻으로 본 한국역사

함석헌 저
한길사 | 2009년 03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내가 그 분을 뵌 것은 딱 한 번이다. 1985년 봄쯤이었는데 경남 진주 어느 교회에서였다. 그 때 무슨 말을 하였는지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여든 다섯 몸으로 역사와 민중을 향한 열정만을 읽을 수 있었다.

 

씨알 함석헌 선생. 그가 세상을 떠난지 오늘(4일)로 21년이 되었다. 오래 전 읽었던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다시 들었다. 이 책은 선생께서 1934-35년 동인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글과 해방 이후 쓴 글을 묶은 것이다.

 

함석헌 선생은 역사를 전공한 분도 아니다. 하지만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나온 우리 역사에 대한 통사(通史)다. 그리고 단순히 '역사'만 아니라 '사상'이 혼합된 사상사에 가깝다.

 

그가 <성서조선>에 연재할 당시는 일제식민지였다. 그러니 조선 역사에 대해 글을 쓴 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일제의 강압도 문제였지만 제대로 자료와 그에게 가르침을 주는 이가 없었지만 그는 머리와 가슴으로 씨름하면서 글을 섰다고 했다.

 

"지도교수가 있는 대학도 아니지, 도서관도 참고서도 없는 시골인 오지이지, 자료라고는 중등학교 교과서와 보통 돌아다니는 몇 권의 참고서를 가지고 나는 내 머리와 가슴과 씨름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출판사리뷰)

 

가슴과 머리로 씨름하여 준비한 내용을 강연하고, 글로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함석헌 선생은 한국 역사를 '고난의 역사', 우리 민족을 '수난의 여왕'이라고 했다. 하지만 고난은 우리의 숙명으로 받아들여 무기력하게 고난 앞에 패배자로 남을 것이 아니라 이겨내 보다 높은 차원을 나아가 역사의 사명을 다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고난은 인생을 심화한다. 고난을 역사를 정화한다. 평면적이던 호호야(好好爺)도 이를 통하고 나면 입체적인 신앙을 가지게 되고, 더럽던 압박과 싸움의 역사도 눈물을 통하여 볼 때는 선으로 가는 힘씀이 아닌 것이 없다. 중국의 교만, 만주의 사나움, 일본의 영악, 러시아의 음흉이 다 견디기 어려웠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면 언제 망했을지 모른다. 우리가 고난의 길을 걷는 것은 살고자 하기 때문이요, 살고자 함은 살아 있기 때문이요. 살아 있음은 살려 주시기 때문이다. 살려 두시는 것은 할 일이 있는 증거다. 우리의 맡은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고난의 초달(楚撻)을 견디어야 한다.

 

우리가 고난과 수난 앞에 패배자가 아니라 고난이라는 회초리를 이기고 남아가야 하는 이유는 역사는 뜻없이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패한 역사가 우리 앞에 있지만 역사가 실패한 이유는 사람이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실패한 역사를 이겨내게 되면 역사는 무의미하지 않는 것이다.

 

역사는 뜻없이 끝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에는 허다한 실패가 있다. 실패가 허다하다기보다는 잘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러나 실패라고 하더라도 그저 실패로 그치는 실패는 아니다. 영원한 실패라는 것은 없다. 몇 번을 잘못하더라도 역사가 무의미하게 끝나지 않기 위하여 늘 다시 힘쓸 의무가 남아 있다. 다시 함이 삶이요, 역사요, 뜻이다. 열번 넘어지면 넘어지는 순간 열한번째로 일어나야 하는 책임이 이미 짊어지워진 것이다

 

그가 이 글을 썼을 때는 식민지배를 당한 지 25년이 지나고 있었다. 25년이면 패배주의가 그들을 지배했을 것이다. 하지만 함석헌은 말한다. 역사는 뜻없이 끝나지 않는다고. 실패하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는 자에게 역사는 주어진다고. 열번 넘어지면 열한번째 일어나야 하는 책임이 주어졌다고 말한다. 식민지 인민을 향한 그의 부르짖음은 울림이 되었을 것이다. 그 울림이 지금도 우리를 향하고 있다. 역사를 책임지는 것, 바로 그것은 인민인 우리가 감당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명'이라고 한다.

 

고난의 역사라지만 그 역사에는 의미가 있어야 한다. 의미 없는 고난은 무엇이냐? 사실은의미 없이는 고난 조차도 없다. 죽음 뿐이지. 그러나 의미는 어디서 오나? 의미는 전체에 있다. 전체는 명한 것이다. 그 명은 의미를 다하는 것이다. 사명 없이도 하는 고난, 그것이 바위가 무너짐이요. 중생이 넘어짐이다. 그러므로 사명하는 자각이야말로 재생의 원동력이다. 거의 쇠망하도록 자친 민족일수록 세계적 사명을 자각시킬 필요가 있다. 쇠망은 결국 정신적 쇠망이요, 정신은 결국 명이다.

 

우리가 주인이라고 한다. 인민이 주인요. 인민이 주인이라는 역사 의식을 가질 때만에 역사를 말할 수 있노라고 한다. 그런데 함석헌에게 '고난'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는 고난을 '양심'이라고 말한다. 역사의 사건이나 인물이 남긴 업적이 아니라 그들이 양심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다. 업적에 매몰되지 말고, 그들은 가졌던 양심 곧, 자유하는 정신을 가졌는지 물어야 한다는 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함석헌의 시각이다.

 

어쩔 수 없이 내게 주어진 것이 이 하나밖에 없다. 이 마음이 자유하는 마음, 자유하는 정신이라는 것이다. 이제라도 해야 된다. 이제라도 우리가 하려면 될 수 있다. 마음만 있으면 된다. 빈 소리 하지 말고 공상하지 마라. 우리가 받은 유일한 역사적 유산은 이것뿐이다. 사실 어느 나라 무슨 문화도 복잡한 듯하지만 들추고 보면 수북한 껍질뿐이요, 마지막에 정말 남는 것은 이것뿐이다. 자유하는 정신.

 

자유하는 정신을 가졌는가 당신은. 함석헌 다른 책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산다>에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삽니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역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생각하는 마음이라야 죽은 가운데서 살아날 수 있습니다"고 했다. 생각하는 사람이 자유하는 정신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하는 사람, 자유하는 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역사를 지을 수 있겠는가. 살아 있으나 죽은 자에 불과한 사람들이 역사를 만들어갈 수 있겠는가.

 

함석헌은 씨알은 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 소리를 내야 씨알이라고 했다. 속에 알이드는 것은 싹이 트기 위해서였다. 자기가 죽고 못하거든 여러분이 내라,  천천만만으로 내야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 자유하는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역사를 향해 말해야 한다. 그것이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사람들에게 던진 뜻이다.

이제는 민주주의 시대다. 대중이 스스로 하기로 깨는 시대다. 집권자가 잘하면 좋겠지만 못하는 경우는 민중 스스로가 해야 한다.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면 해야 할 의무가 분명해질 것이요. 하자는 의지를 발동시키면 할 수 있는 높고 거룩한 사명이 저 위에서 손짓해 부르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 의무가 분명해지고 그 사명이 빛나게 되면 그 신념이 한층 더 높아지고 더 굳어질 것이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3        
230년 전 '연암'이 후손을 위해 남긴 이용후생의 길 | 역사 2010-01-17 16:55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853019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열하일기 세트

박지원 저/김혈조 역
돌베개 | 2009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열하일기>. 조선시대 최고 문장가이자, '문체반정' 주역인 연암 박지원 선생이 44세 때인 1780년(정조 5)에 삼종형 명원(明源)이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 잔치 진하사로 베이징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수행하면서 열하(熱河)의 문인들과 사귀고, 연경(燕京)의 명사들과 교유하면서 본 것들을 기록한 일기이자, 기행문이다.

 

연암 선생은 <열하일기>에서 중국의 역사와 풍속, 지리, 토목, 건축, 천문, 선박, 문화와 정치를 경험하고 겪은 충격을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가는 조선 지배층인 사대부와 조선 사회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결국 이 신랄한 비판때문에 지금은 <열하일기>를 모르는 사람들이 없고, 한 번쯤은 다 읽었고, 연암 선생 최고 역작으로 평가하지만 조선말 사대부들은 1901년 한학자 김택영이 <연암집>을 엮으면서 펴내기까지 약 1세기 동안은 '불온서적'으로 만들어버렸다.

 

김택영 이후 <열하일기>는 1948년에 시작된 최초의 전문 번역인 김성칠 선생본, 북한 국립출판사의 리상호 선생본, 윤재영 선생의 박영문고본, 가장 최근에 출간된 고미숙 선생을 통하여 번역과 편역을 통하여 쏟아져나왔다.

 

그런데 또 <열하일기>가 나왔다. 도서출판 '돌베개'가 한국한문학의 산문 문학에 주로 관심을 두고 있으며, 특히 연암 박지원의 산문 문학을 집중적으로 탐구하면서 <박지원의 산문문학> 따위를 쓴 한문학자 김혈조 교수 (영남대 한문교육과)의 새 번역으로 완역 펴냈다.

 

<열하일기>는 '압록강을 건너며'(도강록)으로 시작하는데 연암 선생은 처음부터 명나라가 망한지 130년이 지났는데도 명을 중국의 주인으로 숭상하는 조선을 향한 신랄한 비판하고 있다. 변화를 읽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가는 사대부를 향한 연암의 비판은 어쩌면 새로운 세상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자신을 향햔 채찍일지도 모른다.

 

"청나라 사람이 중국에 들어가 그 주인이 되니 훌륭한 전통 문화 제도가 변하여 오랑캐 문화로 바뀌었지만, 한반도를 둘러싼 수천 리의 우리나라는 압록강을 경계로 나라를 다스리며 홀로 과거의 문화 제도를 지키고 있다."(1권 27쪽)

 

그리고 중원의 주인인 청나라가 아니라 망한 명나라를 아직도 숭상할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를 아직도 한반도에 제한시키는 역사와 영토의식까지 부재한 것을 비판하는 연암을 보면서 읽는 이들은 연암이 단순히 우리는 못났고, 중국은 잘났다는 사대주의에 빠져 있다는 생각을 일순간에 지워버리는 자주의식이 매우 강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아! 후세에 땅의 경계를 상세히 알지 못하고서 한사군의 땅을 모두 함부로 압록강 안으로 한정해 사실을 억지로 끌어다 합치시키고 구구하게 배분하고는, 그 안에서 패수(浿水)가 어디인지 찾으려 하였다. 압록강을 패수라 말하기도 하고, 청천강을 패수라 말하기도 하며, 대동강을 가리켜 패수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조선의 옛 영토를 전쟁도 하지 않고 줄어들게 만든 격이다."(1권 84쪽)

 

연암은 우리나라 굴뚝이 틈이 생기면 실낱같은 바람이라도 아궁이 불을 꺼 버리기 때문에 우리나라 방구들은 불을 밖으로 내뿜어 골고루 따뜻해지지 않지만 청나라 굴뚝은 큰 항아라만 하게 뚫어서 벽돌을 부도탑 모양으로 쌓아 올려 집의 높이와 같게 하여 연기가 항아리 속으로 떨어져 마치 숨을 들이쉬듯 빨아 당기는 모습을 보고 이런 생각을 떠올린다.

 

"우리나라는 집안이 가난해도 글 읽기를 좋아하지만, 수많은 형제들의 코 끝에는 오뉴월에도  항시 고드름을 달고 있으니 원컨대 이 법을 겨울의 괴로움이나 면하게 해주었으면 좋겠다"(1권117쪽)

 

추위에 떠는 가난한 인민들을 향한 선비의 애틋한 마음과 함께 추우면 생각을 고쳐 굴뚝을 새로 만들어여 하는데도, 책상머리에 앉아 글만 읽으면 된다는 사대부를 향한 비판은 230년 후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주는 교훈이 매우 크다. 

 

책상머리에서 글이나 읽으면서 변하는 시대를 읽지 못하는 사대부를 향한 비판을 이어가던 연암은 북경에서 동북쪽으로 420리 이며, 만리장성 밖 200여리 지점에는 있는 열하로 떠나면서 소현세자를 떠올리며 가슴을 치는 장면은 영락없이 조선 사대부다.

 

"아아, 마음 아프다! 소현세자가 심양의 사저에 계실 때 당시 신하들이 떠나고 머무르거나, 사신기 가고 올 즈음에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된 자는 마땅히 죽어야 된다는 말쯤은 오히려 느긋한 표현에 속할 것이다. 어떻게 머물 수 있었겠으며, 어떻게 떠날 수 있었으랴? 어떻게 참고 보냈으며 어떻게 참고 놓아주었는가? 이야말로 우리나라 사람이 가장 통곡했을 때이다. 서캐처럼 작은 나 같은 미천한 신하가 백년이 지난 뒤인 오늘 생각해 보아도 오히려 혼이 싸늘하게 연기처럼 사그러지고 뼈가 시리어 부서질 듯한데, 하물며 당시 그 자리에서 이별의 절을 하고 하직하는 말을 하는 즈음에야 어떠했겠는가"(1권 467쪽)

 

100년 전 세자가 청나라에 끌려간 것을 떠올리면서 뼈가 시리는 고통을 겪는 연암은 또 다시 지배층을 보면 통탄할 일이다. 다시는 그런 경험을 하지 말아야 하는데 100년이 지났는데도 조선 지배층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청나라 관원들이 말을 직접 관리보고 이런 일을 천하다고 하지 않으려는 우리나라 사대부를 향한 비판은 일하지 않고 살려는 우리에게도 귀중한 가르침이다.

 

"우리나라 사대부들은 모든 일들을 직접 하지 않는다. 옛날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을 때이 한 양반이 자신의 비복을 시켜 말에게 콩을 더 주라고 주의를 주었다가 좀스럽다는 이유로 그만 전랑의 벼슬자리가 막힌 일이 있다. 말을 관리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큰 정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서 모든 것을 아래 비복들의 손에 맡긴다. 비록 직책은 목장을 감독하는 일이고, 사람은 정식 벼슬을 하는 사람이건마는 도대체 말을 기르는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배우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목축을 맡은 관원들이 무식하다는 말이다."(2권 87쪽)

 

일하지 않는 사대부, 말을 돌보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기는 조선 관원들. 말을 기르는 것이 진정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인데도 조선지배층은 하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조선이 부강해질 수 있겠는가. 나라를 강하게 만드는 말을 기르는 방법도 모르는 조선 사대부는 외교도 문외한이라고 통탄하고 있다. 내치도 못하면서 외치도 못하는 조선. 그것을 본 연암의 고통은 뼈져리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교적 언사에 익숙하지 못해, 혹 어려운 것을 묻는데 급급하거나 당대의 일을 섣불리 이야기하기도 하고, 혹 우리의 의복과 갓을 과시하면서 그들이 자신들의 의복과 관을 부끄러워하는지 살피기도 하며, 혹은 바로 대놓고 한족을 어찌 생각하느냐고 다그쳐 물어봄으로써 그들의 억장을 무너지게 만든다. 이따위 행동은 비단 그들이 꺼려하고 싫어하는 행동일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어설픈 실수이고 역시 셈세하지 못한 것이다.(2권 282쪽)

 

외교를 어설프게 하는 것에 대해 연암은 겸손한 마음으로 배움을 청해야 마음 놓고 이야기를 터놓도록 유도하고, 겉으로는 잘 모르는 것처럼 가장해서 그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면, 그들의 눈썹 한 번 움직이는 데서도 참과 거짓을 볼 수 있을 것이요, 웃고 이야기 하는 동안에도 실정을 능히 탐지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상대를 배려하면서 상대 마음을 읽고, 국익을 위해 일하는 것은 이 시대 외교 상식인데 230년 전 연암은 벌써 알고 있었다.

 

<열하일기>는 이처럼 변하는 시대를 읽지 못하고, 우물 안에 갇혀 있으면서 망한 명나라가 숭상하는 조선 사대부를 향한 일갈이 곳곳에 묻어있다. 이는 230년 후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마찬가지다. 배우고, 배워야 한다. 변하는 세상을 읽고 나의 고집에만 갇혀 있으면 우리에게 진보는 없다. 만약이지만 조선말 사대부들이 <열하일기>를 읽고 탐독했다면 100년 후 조선은 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연암의 후학인 유득공은 <열하일기>의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중국의 노래나 가요에 관한 것, 풍습에 관한 기록도 사실은 나라의 치란(治亂)에 관련된 것들이고, 성곽과 궁실에 대한 묘사라든지, 농사짓고 목축하며 도자기 굽고 쇠를 다루는 것들에 대한 내용은 그 일체가 기구를 과학적으로 편리하게 사용하여 민생을 두텁게 하자는 이용후생(利用厚生) 의 길이 되는 내용이  모두 <열하일기>에 들어있다."(1권 23쪽)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8        
조선국왕의 과다한 업무, 술도 마음대로 못마셔 | 역사 2009-09-05 20:53
http://blog.yes24.com/document/1581550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조선 국왕의 일생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편
글항아리 | 2009년 08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유권자에게 선택받아 지도자가 되는 대한민국 '대통령'은 삼권분립을 통하여 견제받는 권력이다. 하지만 세습으로 권좌에 오르는 조선 '국왕'은 삼권을 손아귀에 쥔 절대권력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임금을 '지존'이라 칭했다.

 

그런데 왕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나라를 경영할 능력과 자질이 없는데도 지존이 된다면 조선은 생존 가능성을 위협받게 된다. 신분만 지존이 아니라 능력과 자질에서도 지존이 되어야 했다. '조선'과 '국왕'은 곧 하나로 운명 공동체였던 셈이다.

 

조선과 하나였던 조선국왕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역사학, 문학, 국악, 풍수지리학 따위를 전공한 한국학 전문가들이 섬세한 서술과 화려한 도판으로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펴낸 <조선국왕의 일생>은 멀게만 느껴졌던 조선국왕을 가까이서 만나게 한다. 

 

자질과 능력을 갖춘 국왕 탄생을 위해 조선이 쏟은 노력은 왕비 침전 이름에서부터 확인된다. 경복궁의 왕비 침전을 교태전이라고 하는데 "하늘(왕)과 땅(왕비)이 교차하면 장차 국왕이 될 적정자가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 창덕궁 왕비 침전은 대조전으로 "큰 인물을 만든다"는 의미였다.

 

이뿐 아니다. 국왕와 왕비의 합궁은 반드시 좋을 날짜만 이루어졌는데 "뱀날과 호랑이날, 초하루, 보름, 그믐"은 피했으며 "바람부는 날, 천둥치는 날"도 안 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날짜를 미루다보면 "국왕과 왕비가 만날 수 있는 길일은 한 달에 하루나 이틀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조선 국왕은 이렇게 태어났다.

 

태어나는 것도 쉽게 태어날 수 없었던 국왕은 태어난 순간부터 엄청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세자 때부터 보양청 교육, 강양청 교육, 서연(書筵)이란 교육 과정을 거쳤다.  맹자는 왕은 덕으로써 인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었다. 즉 왕이 절대권력을 가졌지만 힘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덕으로 나라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이 덕은 어디서 나오는가? 바로 '배움'이다. '배움' 그것은 곧 조선 국왕이 평생을 해야 할 의무요 덕목이었다. 

 

왕이 된 후에도 배움은 계속되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경연(慶筵)이다. 경연에서 국왕은 신하들과 조선의 국정 이념인 성리학을 국정에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논의와 논쟁, 토론을 했다. 궁궐 전각 중에 정치 현안을 논했던 '편전'이 있는데 삼봉 정도전은 편전을 '사정전'이라 지었다. 사정전에서 "온갖 일이 결정되니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조선국왕은 이렇게 배움을 통하여 조선을 경영했다.

 

국왕만큼 중요한 존재가 왕비다. 왕비가 중요한 이유는 다음 조선을 이어갈 왕세자를 생산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집안과 성품은 당연한 일이었고, 용모도 중요한 조건이었다. 세종 대왕은 세자빈을 간택하기 위해 황희와 맹사성, 변계량과 논의하면서 "세계(世係)와 부덕(婦德)은 본래부터 중요하나, 혹시 인물이 아름답지 않다면 또한 불가할 것이라" 했으며 <영조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적고 있다.

 

아조(我朝)에 와서 간택한 것이 어느 세대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비루하고 또 불경하여 단지 용모의 예쁘고 누추함과 언어의 조용하고 우함으로써 취한다(55쪽)

 

간택을 받은 후 국모가 되기 위한 수업은 혹독했다. 국모로서 갖추어야 할 교양과 예절, 품위, 걸음 걸이, 동작과 태도를 배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소학'까지 익혀야 했다. 간택에서 혹독한 교육, 그리고 세자까지 생산하여 모든 영광을 다 이루었다면 그들은 행복했을까? 고종과 결혼한 명성왕후는 평소 "내 죽으면 사대문 안을 돌아보지 않으리라"고 했고, 정조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가 지은 <한중록>은 국모가 되는 심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선친께서 근심 걱정을 하시며 훈계하는 말씀이 많으시니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만 같아 몸둘 바를 몰라 하면서도 부모 옆을 떠날 일이 서러워 어린 간장이 녹을 듯하며 만사에 아무 흥미도 없었다.(58쪽)

 

조선국왕들 평균 수명은 마흔일곱 살도 되지 못했다. 오래 살지 못한 이유로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엄청난 업무 때문이다. 조선국왕은 입법과 사법, 행정권까지 모든 업무를 담당할 뿐만 아니라 "신과 인간의 두 세계를 연결하는 존재"였다. 때문에 조상신과 토지신, 농업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나라와 백성들 안위까지 구해야 했다. 업무량이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정조 6년(1782년) 2월 20일자 일기를 보면 정조는 아침 8시에 업무를 시작하여 밤 9시가 넘어야 끝냈다. 정조 4년 1월 1일 사직단에 제사를 지낼 때는 오전 10시에 사직단에 나아가 다음 날 새벽 3시에 제사를 마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국왕들의 업무량을 알 수 있다.

 

드라마 <대장금>을 보면 국왕은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산해진미를 먹는다. 과연 조선국왕들은 그렇게 먹었을까?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수양대군은 1463년 <의약론>이라는 책을 지었는데 세상에는 여덟가지 의사가 있다고 했다. 그 중 으뜸이 심의요, 다음이 식의라고 했다. 음식을 통하여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로 곧 식치(食治)다.

 

음식에도 차고 더운 것이 있어서 처방하여 치료할 수 있다. 그러니 어찌 쓰고 시어야 한다거나 마른풀이나 썩은 뿌리를 먹어야 낫는다고 핑계하겠는가? 과식을 막지 않는다면 이 또한 식의가 아니다.(185쪽)

 

조선국왕들의 식치는 '죽'이었는데 가장 대표적인 죽은 '쌀죽'으로 "설사가 심해 탈수 증세가 있고 기운이 떨어진 경우" 먹었다. 차 또한 중요한 식치로 '인삼차'는 "원기를 회복하는 데 사용"되었다. 한 마디로 "조선 왕실의 건강법은 유교(성리학)의 이상대로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미리미리 조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절제하는 삶' 그 자체"였다. 마음대로 산해진미를 먹지 않았다는 말이다.

 

조선국왕은 술 마시는 날도 정해져 있었으며, 백성들과 함께 하는 연회도 열었다. 평생을 이렇게 살았던 왕도 일반 사람들처럼 똑같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다른 점 하나는 국왕의 죽음은 또 다른 권력이 등극하는 것이었다. 조선국왕의 일생은 이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묘에 가서 후손들에게 섬김을 받았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0        
1 2 3 4
진행중인 이벤트
나의 북마크
이벤트 세상
조금은 뭐 하지만
눈을 조금 넓히자!
나라사랑
나의 친구
나의 친구들
최근 댓글
wkdf qhrh rkqlsken 
언젠가 티브이 재방으로 우연히 '실종.. 
리뷰읽다말고 책이 궁금해져서 주문하고.. 
오늘 61 | 전체 2276915
2004-11-19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