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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대한민국, '두 명의 대통령'이 필요하다 | 인물 2012-07-21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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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안철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

김헌태,오연호 공저
10만인클럽 | 201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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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1일) 기준으로 대통령 선거일이 153일 남았다. 새누리당 후보는 박근혜(이하 모든 사람 존칭 생략)가 99% 거의 확정되었고, 야권은 문재인·손학규·김두관·정세균·조경태·김영환·박준영 등이 경쟁에 나섰다. 그리고 '안철수'가 있다.

 

안철수는 자신의 입으로 '대통령에 출마하겠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언론사와 여론조사 기관은 그의 이름을 올린다. 지지율은 양자대결에서는 40%대 중반, 다자대결에서는 20% 안팎이 나온다. 대선 출마 선언을 하고도 지지율이 한 자릿수에 머무는 사람이 대부분임을 비하면 놀라운 수치다. 

 

언론은 안철수 강연 취재를 하면서 "나 오늘부로 대통령 출마합니다"라는 말 듣기만을 바라고, 그런 말이 나오지 않으면 괜히 딴죽을 건다. 정치권도 "빨리 출마를 결정"하라고 닦달한다. 급기야 새누리당 '박근혜 경선캠프'의 홍사덕은 "나폴레옹은 권력을 위해 필요하면 노동자 계급이든 소농민이든 붙고, 어떤 때는 귀족계급과도 그러면서 20년을 집권했다"며 안철수를 나폴레옹에 비유하기에 이른다. 

 

유권자들도 안철수가 출마 의사를 자꾸 늦추자 '피로도'가 쌓여간다. 지난 12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문재인은 18.3% 지지율을 기록했고, 안철수는 16.1%에 그쳤다. 이에 대해 리얼미터의 이택수 대표는 "안 원장이 정치참여 문제에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상태가 계속 이어지며 유권자의 피로도가 쌓이고 관심도도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솔직히 나 역시 피로감이 든다.

 

하지만 안철수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대통령'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중앙일보>가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에 의뢰해 매일 실시하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안철수 지지율은 17일 조사에서 23.1%로 앞날인 16일 19.6%보다 3.5%포인트 상승했다. 

 

이런 가운데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이 안철수 현상을 분석한 책 한 권을 내놨다. <안철수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김헌태·오연호 공저)이다. 90여 쪽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이지만 안철수 '개인'에 대한 탐구나, 그저 안철수 현상만 다루지 않고 12월 대선을 앞둔 현 시점에서 안철수를 둘러싼 사회적 '화두'에 답하고 있다.

 

안철수, 민심이 원하는 '권력의지'가 있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5월 30일 저녁 부산대 경암체육관에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이라는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먼저 공동저자인 오연호(<오마이뉴스> 대표)는 안철수가 대통령직을 향한 권력의지가 있음을 밝힌다. 안철수는 사석에서 지인들에게 "이명박 대통령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다", "오세훈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말은 누구나 다 한다. 나같은 사람도 그렇다. 포털사이트에도 하루에 수만 명이 이 대통령을 비판하는 댓글을 달고 있다. 오세훈 전 시장은 '5세훈'이라는 조롱까지 받았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한다고 안철수에게 권력의지가 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럼 무엇이 있다는 걸까? 오연호의 진단은 매우 색다르다. 우리는 그동안 '개인'에게서 권력의지를 찾았지만 오연호는 '민심'에서 권력의지가 온다고 진단한다.

 

권력의지는 민심에서 나온다. 자신이 아무리 대통령이 되고 싶어도 지지도가 바닥이면 권력의지는 있다가도 사라진다. (줄임) 민심이 '당신이 대통령감'이라고 인정해주면, 그전까지 없던 권력의지도 생길 수 있다. 그 지지도가 의미있게 지속되면 권력의지도 진화한다.(본문 가운데)

 

생각하면 안철수는 이런 말을 자주했다.

 

내 개인의 명성은 내가 잘해서가 아닌고 사회가 나에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 사회에 보답하는 것이 내 역할이다. 그 과정에서 희생이 필요하다면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

 

나는 결정권자가 아니다. 결정의 주체는 국민이다. 나 같은 사람을 국민이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상황 변화에 따라 나의 선택이 달라질 수 있다.(본문 가운데)

 

즉 안철수에게는 민심이 원하는 '권력의지'가 있는 것이다. 물론 듣기에 따리서는 굉장히 무책임하게 보인다. 주권자 국민의 뜻을 높이 산 것은 맞지만 지도자는 자기 결정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철수는 민심만 아니라 스스로도 권력의지를 드러낸다.

 

그는 "누구의 봉이 돼서 이용만 당하는 것은 싫다"거나 "대접만 받고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자리"는 거부한다. 대한민국 최고 결정권자가 되어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의지로 읽힌다.

 

안철수 "노무현 모든 것 버렸다"... 안철수도 준비됐나

 

'안철수'가 구원자가 아니라 바로 '시민' 자신이다.

 

 

그런데 유권자가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아직 안철수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안철수가 아직 결심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과연 대통령 업무를 잘, 재미있게 할 수 있을 것인가'에 있다고 오연호는 말한다. 안철수와 사업 파트너로 함께 일했다는 한 중소기업인은 안철수의 약점을 이렇게 말한다.

 

안철수는 정치 경험이 너무 없다. 아직 그릇이 작다. 그는 어떤 정치적 큰 문제에 부딪혀 그것을 해결해본 적이 없다.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긴 김대중은 삶과 정치를 동일시하던 사람이다. 노무현도 마찬가지다. (줄임) 내 한 몸 산산조각 나더라도 나를 던져서 하겠다는 그런 결단을 안철수는 아직 보여준 적이 없다. 그런 결기가 없다. 우리가 노무현에 대해 불안불안하면서도 좋아했던 이유는 그런 결기가 있어서가 아니었겠나?(분문 가운데)

 

안철수도 알았다. 그는 지인에게 "노무현은 모든 것을 버렸다. 그래서 대통령이 되었다.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도 못 당하더라. 기존 정치판을 바꾸기 위해 새로운 뭔가를 하는 사람들은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 이제 안철수에게는 남은 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이다.

 

사람들은 안철수가 머뭇거린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머뭇거림은 '책임의식' 결여라고 주장한다. "모든 것을 버린 노무현"과 같은 희생정신이 없다고 타박하는 것이다. 하지만 13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한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교수 생각은 다르다.

 

안 교수는 "(안철수는) 무한한 책임의식이 있다. 일반인의 정서와 다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는 건 굉장히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한국 정치인 중에 그런 의식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고 평했다. 그리고 "안철수 드래프트 시작되면 박근혜는 진다"고 단언했다.

 

역사에 무한한 책임의식을 가진 안철수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남는다. 안철수는 '표'는 얻을 수 있지만 '세력'은 없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혼자'가 아니라 '세력'을 통해 국정을 운영한다. 안철수에게 세력은 결국 '민주진보진영'이 될 수밖에 없다. 안철수 스스로 고백했듯이 '새누리당'은 아니다.

 

안철수 세력은 민주진보진영, 곧 '99% 시민'

 

'안철수'가 구원자가 아니라 바로 '시민' 자신이다

 

그런데 겉으로는 '1%가 아닌 99%를 위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면서 아직도 20세기식 정치공학과 '나를 중심으로'라는 인식에 머물러 있는 민주통합당과 민주진보진영은 아니다. 이런 민주통합당과 민주진보진영이 안철수와 정치공학적으로 단일화를 해도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럼 길은 무엇인가? 공동저자인 김헌태(정치평론가 및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국제정치 전공 겸임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즉 민주통합당과 민주진보진영이 뼈를 깎는 각성과 99%를 위한 정치세력으로 거듭나는 길이다. 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민주통합당이 먼저 국민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민주진보진영의 이름으로 하기 싫으면 정치의 이름으로라도 '국민에게 희망을 주지 못한 죄'를 깨닫고 사죄하는 것이 맞다. 또 마지막 변수로 남은 '안철수'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부끄럽지만 도와달라"라고 말해야 할 때다. 이 시점에는 그러한 모습이야말로 서민과 중산층의 친구임을 자처하는 50년 전통 민주 세력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본문 가운데) 

 

이런 각성을 하면 시민은 다시 민주통합당과 민주진보진영으로 눈을 돌릴 것이며, 거대한 파도를 일으킬 것이다. 그 파도가 목표로 삼아야 할 대상은 '1%'다. 프랑스 대통령 올랑드는 이런 말을 했다.

 

"나의 진짜 적은 이름도 없으며, 얼굴도 없고, 정당도 아니다. 그는 선거에 출마하지도 않고 당선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배한다. 나의 적은 금융자본이다."

 

1% 탐욕을 견제할 유일한 힘은 '시민' 자신

 

안철수와 민주진영 만남은 '나를 중심으로 한 만남'이 아니라 '국민을 중심으로 한 만남'이 되어야 한다.

 

1% 탐욕을 견제할 수 있는 힘과 자질 그리고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져야 한다. 그 힘의 원천은 '시민'자신이다. 민주헌정을 유린한 '5·16 군사반란'을 "구국의 혁명", "대한민국 초석"이라며 강변하는 세력이 1%다. 그들은 아직도 견고하다. 대한민국 지배세력으로 남아 자신들 배를 채우면서도 '애국'을 말한다. 속임수요, 거짓이다.

 

안철수와 민주진보진영이 만나 대한민국 60년을 지배한 1%의 견고한 아성을 무너뜨려야 한다. '김대중-노무현'은 공성전을 펼쳤지만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안철수와 민주진보진영이 "나를 중심으로"가 아니라 오직 '국민'만을 위해 함께한다면 가능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이 안철수도 아닌, 민주진보진영도 아닌 '새로운 연합'을 지지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 당연히 대선주자 간 약속이나, 권력 배분 얘기가 먼저 오가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즉, 정파 간 연합의 성격이 부각되기보다는 시민의 참여가 바탕이 된 '시민연합'이 되어야 한다고 김헌태는 강조한다.

 

2013년 "국가 수반'과 '시민 수반"이 등장해야

 

나아가 그는 야권대선주자들(안철수 포함)과 대중성과 정통성을 지닌 인사들이 민주지도자 회의를 구성해 국민들이 "너희들을 딱 한 번만 더 믿어보겠다"는 연합정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김헌태는 주장한다. 중요한 것은 대선에 승리했다고, 자리다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직 국민들이 승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철수와 민주진보진영 모두는 이 말을 새겨야 한다.

 

대선 승리를 정치인 자신들이 잘해서 이겼다고 생각하며 자축할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국민이 아직 승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날은 엄숙한 날, 비장한 선언의 날이 되어야 한다. '정의가 이겼다'는 말은 그날 나올 말이 아니다. 정의는 '1%'의 항복을 받아내는 날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이 풀리는 날도 아니다. 한은 정치인들이 풀어야 하는 게 아니라, 국민이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2012년 대선 승리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특히 대선에서 승리했다고 해서, 연합정부의 틀이 사라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공식적 새로운 정부의 출범과 함께 시민정부가 한날한시 동시에 출범해야 한다. 즉 헌법상의 '국가 수반'과 시민들의 열망을 대표하는 '시민 수반'이라는 두 명의 새로운 지도자가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다.(본문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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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자 이완용, 반일에서 친일 그리고 매국 | 인물 2011-08-29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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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이완용 평전

김윤희 저
한겨레출판 | 201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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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29일)은 꼭 101년 전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주에 주권을 빼앗긴 날이다. 역사는 이를 '경술국치일'라고 부른다. 광복절은 가슴에 담고, 경축하지만 우리는 국치일을 기억하는 것은 애써 외면한다. 너무 어둡고 뼈아프고 수치스러운 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날을 가슴에 새겨 다시 나라를 잃는 비극과 수치는 없어야 한다.

 

경술국치일을 가슴에 새기면서 대한민국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름 석자에 '매국노'가 따라 붙는 이완용을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경술국치보다 5년 앞선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은 일제에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외교권을 일제에 넘긴 준 이들이 있으니 우리가 '을사오적'(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이라 부르는 자들이다.

 

그런데 을사오적하면 이완용만 떠오르고 다른 이들 이름은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완용으로서는 이지용, 박제순, 이근택,권중현도 같이 나라를 팔아 먹었는데 왜 나에게만 딴죽을 거느냐고 따지겠지만 우리 역사는 을사오적 중심이 이완용이고, 5년 후 한일병합조약을 통해 대한제국 주권을 일제에 넘겨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완용을 잘 모른다. 그가 어떻게 자랐고, 어떻게 친일파가 되어 끝내 나라를 팔아 먹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친일 역적 중 최고봉에 오른 그 이기에 비난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이완용도 처음부터 나라를 팔아 먹을 것이라 작정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매국까지 이르러게 되었는지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완용 평전>(김윤희, 한겨레출판)은 우리가 그 동안 너무 몰랐던 이완용을 알아가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한겨레 출판이 지난 5월100명의 국내 역사 인물을 국내 연구자들이 제대로 조명하는 역사인물평전 시리즈를 펴내기 시작했는 데 가장 먼저 이름을 올리는 이가 이완용이다.

 

참 구성이 흥미롭다. 다음이 안중근 의사, <백팔번뇌>< 금강예찬> <조선독립운동사>을 우리 문학사와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최남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최남선 역시 이광수와 함께 끝내 친일로 갔다. 안중근 의사가 매국노 이완용과 친일파 최남선에 둘려 쌓여 있는 모양새다.

 

'합리적 근대인' 이완용

 

우리 정치사를 보면 이념을 갈아탄 정치인들을 많이 본다. 그런데 대부분 진보에서 보수로 갈아타지 보수가 진보로 이념을 갈아탄 경우는 없다. 사람들은 이념을 갈아탄 이들을 '변절자'라고 부른다. 과연 이완용은 어떤 과정을 거치면서 매국에 이르게 되었을까.

 

글쓴이는 책에서 '매국노'라고 섣불리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 근대인"이라며 "'충군'과 '애국'이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위해 용기를 내거나 또는 제국주의 폭력에 분노하기보다는 자신을 포함한 다수가 문명화 혜택을 누리기 위해 절대로 분노하지 않은 이성적 인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는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조약 모든 죄과를 이완용에게만 묻는 우리의 섣부른 평가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준다. 이완용은 25세 때인 1882년, 증광별시 문과에 급제했지만 정치입문은 4년이 지난 1886년 3월 24일 규장각 시교로 등용된다.

 

일제에 '반일'로 찍힌 친미주의자 이완용

 

그리고 이완용은 1887년 11월 주미공사관 참찬관으로 미국을 다녀와 미국물을 먹었고, 1888-1890년까지 주미대리공사를 지내면서 서구 문물에 눈을 뜨고, 조선을 서구사회로 만들고 싶어하는 친미주의 성향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을 모습을 보면서 그 나라이 부강함이 무엇 때문이지 고민했을 것이고, 조선이 부유해지기 위해선 미국의 어떤 것을 모방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의 판단도 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양반관료로서 왕에 대한 충성심이 강했던 그는 조선 정치체제를 크게 바꾸지 않는 채 미국과 같은 부강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51쪽)

 

이처럼 이완용은 대한제국 체제 내에서 부강한 나라를 꿈꿨던 이완용은 실용주의자였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갑오개혁, 1898년 독립협회운동을 통해 체제 변혁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좌절되는 모습을 보면서 그는 현실주의자 된다. 

 

지은이는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분노할 현실은 없었다"고 말한다. 자기 희생을 통해 변혁 주체가 되어 대한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정치체제가 한반도에 등장해 청나라와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기는 것은 막아야 한다는 확신은 그에게 없었던 것이다.

 

정치입문 초중반기인 1894년 갑오개혁 소용돌이 속에 일본 공사관이 서기관 히오키 마쓰보고서에는 정동파(친미파)에 대해 분석을 하면서 이완용이 반일에 섰다고 말한다.

 

"금후 시국이 변할 때에는 다시 어떤 파로 변할지 알 수 없지만, 금일의 정세로 논단한다며 일본을 비난하고 배척하는 기색이 날로 치열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므로 이를 일본 배척파라고 추정해도 틀림없다고 확신한다"고 적어 놓았다. 그리고 서광범 이완용 이윤용을 지목해 이들은 일본을 배척하는 기색이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고 밝혔다.(69쪽)

 

그런데 마쓰 보고서 "금후 시국이 변할 때에는 다시 어떤 파로 변할지 알 수 없지만"이라는 분석이 묘한 여운이 남는다. 지금은 친미·반일이지만 언제든지 친일도 돌아설 수 있는 것이다. 맞았다. 이완용은 11년 후 을사늑약을 통해 친일도 모자라 매국에 들어선다.

 

친일과 매국

 

그는 고종에 대한 의리만 지킨다면 왕조가 무너져도 별 상관이 없었다. 자기 선택이 원칙에 위배되고 매국이라 할지라도 그 길을 택한 것이다. 그랬기에 을사늑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할 수 있었다.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과 최익현이 "황실의 보존과 안녕이라는 그들의 말을 진실로 믿으십니까?"라는 상소를 통해 고종 황제를강하게 비판하자 이완용은 1905년 12월 8일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다.

 

"새 조약의 주된 취지에 대해 말하자면, 독립이라는 칭호가 바뀌지 않았고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묘사직은 안녕하고 황실도 존엄합니다. 다만 외교상의 한 가지 문제만 잠시 이웃나라에 맡긴 것인데, 우리가 부강해지면 되찾을 날이 있을 것입니다."(208쪽)

 

외교권이 없는 나라가 어찌 독립국가이며, 종묘사직과 황실이 어떻게 존엄한가. 결국 이 상소는 이완용 변명에 불과했다. 이후 이완용은 '매국노'로 불리게 되었다. 우리가 부강해지면 되찾을 수 있다고 했지만 이완용은 생전에 자기 팔아 먹은 대한제국을 찾지 못했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과 체결한 을사늑약문서. 이 조약에서는 외교권박탈과 통감부 설치 등을 규정했고, 대한제국은 사실상 일본제국주의 식민지가 된다.<이완용평전>

 

하지만 이 모든게 이완용를 비롯한 을사오적만의 책임일까. 이토 히로부미가 고종에게 을사늑약 체결을 겁박한다. 그러자 고종은 "짐은 스스로 이를 재결할 수 없다. 짐의 정부 신료들에게 자순(諮詢)하고 또 일반 인민들의 의향도 살필 필요가 있다"라고 한다.

 

을사늑약, 고종 책임은 없나

 

그러자 이토는 "귀국은 헌법 정치도 아니며 만기(萬機) 모두 다 폐하의 친재(親裁)로 결정한다고 하는, 이른바 군주전제국이 아닙니까? 그리고 인민의 의향 운운이라 했지만 필시 이는 인민을 선동하여 일본의 제안에 반항을 시도하려는 생각이라고 추측됩니다"라고 고종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즉 결정권은 신하들이 아니라 고종 황제 당신이라는 비판이다. 지은이 역시 고종에게 책임을 묻는다.

 

"을사조약 체결을 거절할 명분으로 외교절차 준수 이외에 고종이 내건 '대신과 인민의 의향을 묻는다'라는 것은 당시 대한제국 정치체제상 단순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전제 국가인 대한제국 운명을 결정할 사람은 황제인 고종 한 사람뿐이었다."(190쪽)

 

나라를 끝내 팔다

 

전제 왕정 황제였던 고종은 이처럼 을사늑약 책임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그럴지라도 이완용이 '매국'에서 자유로운 것은 절대 아니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이완용은 조선왕조 안에서 개혁을 바랐다.

이완용은 한일병합조약 체결을 앞두고 국화와 왕의 지위를 요구한다.

 

"주권없는 국가와 왕실은 단순히 형식에 불과하지만, 일반 인민의 감정을 고려한다면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일찍이 한국이 청국에 예속되었던 때에도 국왕의 칭호를 써왔다. 왕의 칭호를 그대로 두고 종실의 제사를 영구히 존속시킨다면 민심을 달래는 방법이 될 것이고, 서로 응하고 정성스럽게 협동하는 정신에도 부합될 것이다."(252쪽)

 

 

나라를 넘기면서까지 이완용은 국왕 칭호만 유지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라보다 국왕 칭호만을. 그게 내일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을사늑약때처럼 "우리가 부강해지면 되찾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실용에 빠진 이완용은 원칙과 명분, 백성의 안위와 국가의 주권보다는 왕이라는 호칭만 존재하면 된다는 현실 안주를 택한 것이다. 원칙을 버리고 현실을 택하려는 유혹은 우리 시대에도 이어진다. 시대 조류에 원칙을 버리고 변절을 통해 자기가 추구했던 것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비극을 우리는 많이 보았다.

 

갑자기 미국 현상학자 랠프 험멜은 "공무원은 생김새는 인간과 비슷해도 머리와 영혼이 없는 존재"라고 했고, 막스 베버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에서 "관료의 권위가 영혼없는 전문가"라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관료만 영혼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노할 현실이 많은데 분노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영혼없는 자가 될 것이다. 이완용이 우리에게 준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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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보다, '선생님'이 더 어울려요" | 인물 2010-11-13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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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김대중 자서전 세트

김대중 저
삼인 | 201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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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또 광주 KBS냐 왜 우리 동네는 경상도인데 빨갱이 전라도 방송이 나오는 거야. 빨리 꺼라 꺼"

 

우리 집은 경남 사천이었는데 이상하게도 1980년대 초에는 진주 KBS(MBC인지 정확하지 않음)가 아니라 광주KBS가 나왔다.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세뇌 교육이 되었는지 중학생이었지만 빨갱이들이 사는 동네 방송을 보는 것 자체가 항상 불만이었다. 빨갱이 중심은 '김대중'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백무현이 <만화 김대중>에서 "빨갱이가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광주 망월동에서, 펑펑 울었다"고 평하고, 김대중 대통령은 2009년 1월 7일 일기에서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고 썼던 것처럼 김대중은 '빨갱이'가 아니라 '사람․선생․대통령'이었다.

 

나 역시 대학 진학 후 책들과 사람들을 만나고, 군 생활 도중 전남 목포 태생인 선임병을 만나면서 김대중을 조금씩 알아간다. 빨갱이 김대중은 점점 나에게 '사람'으로 다가왔고, 선생과 대통령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는 막을 수 없는 거대한 힘이었다.

 

이 거대한 힘은 "전라도 방송 나온"다며 텔레비전 꺼라 했던 사람에게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날 부산 서면 한 포장마차에서 김대중을 열렬하게 지지했던 한 동무와 생애 처음으로 술과 눈물 그리고 빗물이 뒤엉켜 밤새도록 통음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1997년 12월, 5년 전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별을 못했던 그 통음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전화하고, 전화했다. 다섯 달 전 나와 한 몸이 된 경상도 태생 아내도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고, 밤을 새웠다.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유세에서 "내일 이 나라의 정권이 교체됩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탄생합니다. 고난의 시대가 끝나고 희망의 시대가 시작됩니다."(1권 673쪽)고 외쳤다. 그 외침이 내 마음을 때렸고, 승리를 확신했다. 그날 밤 "대통령, 김대중"이 온 나라에 울려 퍼졌고, '김대중 당선자'가 "서민의 권익을 철저히 보호하여 우리 경제가 민주적 시장 경제로 발전해 나가는, 그런 시대를 열겠다"는 다짐을 보면서 '그를 선택했다'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5년 전 '통음'은 '희열'로 변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살았던 시간은 일제식민지, 한국전쟁, 이승만 독재정권, 박정희 독재정권과 전두환 독재정권, 그리고 경제 식민지였던 IMF, 남북정상회담이라는 20세기 대한민국 역사를 관통하는 삶이었다. 여든 살이 넘은 사람들이 다 경험한 시간이었지만 김대중은 달랐다. 특히 박정희 독재정권부터 남북정상회담까지는 대한민국 현대사 중심에 서 있었다. 박정희는 3선 개헌과 납치, 유신독재로 독재자와 민주주의를 유린하였고, 김대중은 저항했다. 그리하여 박정희는 독재자로서 반민주 상징이었고, 김대중은 민주주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자서전에서 "독재의 살기는 갈수록 독했다. 긴급조치는 모든 분야에서 의욕과 희망을 거세해 버렸다. 사람들은 실어증에 걸린 듯 말을 잃었고, 지식인들은 자기 검열에 걸린 자신을 발견하고는 치욕에 몸을 떨었다. 당시의 침묵 속에는 온갖 수모가 들어 있었다."(1권 349쪽)고 박정희 독재정권의 살기를 회고했다. 살기가 넘치는 정권, 곧 '병영국가'였다. '살기'와 '병영국가' 박정희 정권을 이토록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병영에는 사실 죽임이 난무하는 곳으로 살기가 넘친다.

 

민주주의는 '살림누리'다.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대한민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어 살기 넘치는 세상을 만들었다. 민주주의를 거세한 박정희, 그는 독재자였다. 김대중은 자서전 곳곳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독재자 박정희"라고 표현한다. 사람들은 박정희가 독재자는 맞지만 경제를 발전시켰다면서 그를 추켜세운다. 살림누리를 살기가 넘치는 병영국가로 만들었는데 추켜세우니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러기에 김대중 생각은 조금 다르다. 박정희가 장면 정부를 무너뜨리고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장면 정부는 '민주주의를 신봉했던 민주정부'였다. 그래서 말한다. "만일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장면 정권이 경제 부흥을 추진했다면 어찌되었을까? 장담을 할 수 없지만 국민들의 참여와 지지로 더 높은 효과를 보았을지도 모른다"고. 장면 정부를 무능하다고 비판하지만 박정희 독재정권 경제정책은 장면 정부가 세운 터 위에서 출발했고 그 열매를 따 먹고서 박정희가 다 이루었다고 자랑하고, 추켜세운다.

 

그렇다 독재자 박정희는 경제발전을 이룬 것은 맞지만 민주주의를 신봉하지 않았다. 배고픔은 해결했지만 민주주의를 유린했다.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함께 이루어졌다면 1997년 IMF는 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박정희 독재정권의 대기업 위주 정책과 정경유착은 결국 한국 경제 뿌리를 뒤흔들었고, 인민들은 고통과 눈물로 통곡으로 21세기를 맞아야 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확신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 첫 일성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드러나게 났고, 박정희가 남긴 IMF를 극복했다.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함께 갈 때만이 이룩할 수 있는 일이었다.

 

민주주의를 배반한 박정희와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고자 했던 김대중은 격하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독재자 박정희는 민주주의 신봉자 김대중을 박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박해가 통하지 않자 '부통령' 자리를 주겠다는 회유도 서슴치 않았다. 그럴 때마다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하고, 배반하지 않았다. 저항하는 힘의 원천은 신념인 "행동하는 양심" 때문이다. 이것이 김대중을 김대중답게 했고, 수없이 변절해간 이들과 다른 점이었다.

 

"난 좋은 자리에 가려고 이러는 게 아닙니다. 민주주의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내가 무엇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1권 301쪽)

 

이 대목을 읽는 순간 머리를 때렸고, 가슴을 저몄다. 모든 독재가 내가 '아니면'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김대중에게 독재자 박정희 핍박보다, 인간 근본을 뒤흔드는 '유혹'을 더 이겨내기 힘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유혹을 이겨냈다. 그러기에 김대중은 오랫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함께 투쟁했던 김영삼이 쿠데타 세력과 손잡자 "그 쿠데타의, 야합의 주역이 김영삼씨였다는 데 나는 충격을 받았다. 왜 역사에 버림받을 길을 선택했는지는 한때 민주화 동지로서 지금도 안타깝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보다는 집권 욕이 앞섰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1권 571쪽)고 회고한다.

 

이 내용을 말할 때 김대중은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온 몸을 휘감았을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쿠데타로 민주주의를 유린한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으리라. 권력에 눈멀어 사상과 신념, 민주주의를 저버리는 일은 용서받기 힘들다. 이유는 그를 따랐던 수 많은 인민들 배신했기 때문이다. 독재자로 처음부터 살았던 자들보다, 독재자를 비판했던 이가 민주주의를 유린한 자들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앞으로 이런 자들이 다시는 생겨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하지만 아직도 김영삼은 야합에 대해 한번도 인민 앞에 사죄하지 않았다. 김영삼을 용서하기 힘든 이유다.

 

그러나 김대중은 함께 했던 민주동지가 변절하고 독재자들이 그를 핍박하고, 박해하고 회유하할지라도 김대중이 변절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 그것은 김대중이 강조했던 '행동하는 양심'을 통하여 민주주의가 반드시 이기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으리라. 그러기에 전두환이 그를 아무리 회유해도 마지막까지 그에게 굴복하지 않고 양심을 택했다. 그는 마지막 진술에서 말한다.

 

"내 판단으로 머지않아 1980년대에는 민주주의가 회복될 것입니다. 나는 그걸 확실히 믿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거든 먼저 죽어 간 나를 위해서든, 또 다른 누구를 위해서든 정치적인 보복이 이 땅에서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부탁하고 싶습니다.(1권 422쪽)

 

'선견지명' 민주주의가 1980년대 회복되리라는 이 믿음이 있었기에 자기 몸을 지키고 권력을 가지기 위해 양심을 배반한 이들, 사상을 변절한 이들과는 달리 김대중은 이처럼 민주주의가 다시 회복되리라는 믿음을 간직했기에 양심을 배반하지 않았다. 김대중도 살고 싶었다. "살려주십시오. 아직 제게는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국민들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저를 구해주십시오."(1권 313쪽)

 

생명에 대한 간절한 애착, 사람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다. 하지만 김대중은 김대중 '목숨'보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인민들의 생명을 더 귀하게 여겼다.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바로 광주다. 그는 "광주는 영원히 민주주의 본향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독재자 전두환이 광주와 시민들을 유린하고, 자신을 회유하면서 "대통령만 빼고 다 주겠다면서 만약 듣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지만 김대중은 "광주에서 희생당한 사람들, 내 어찌 살아서 그들을 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옥중에서라도 싸우다 죽어야 했다"고 다짐했다. '일사각오'(一死覺悟)다. 죽기를 각오하면 진실과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다.

 

사람들을 주목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 이 믿음은 '민주주의'도 감격하여 김대중을 배반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민주주의는 김대중을 배반하지 않는 이 위대한 역사가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힘이었고, 그가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까지 인민들에게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그를 '김대중 선생'이라 불렀고, 세계 수많은 민주시민들은 "김대중을 살려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는 지금 이 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질곡을 끝내는 기회가 왔다. 1987년 6월 전두환 독재를 끝장낼 수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자기 삶에서 가장 실패로 기록될 야당 단일화를 거부했다. 그도 "나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나 후회스럽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자서전에서 가장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다. 더 깊은 통곡이 있어야 했다. 단일화 실패로 광주 시민들이 "우리 눈물을 닦아 주십시오"라는 것을 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7년 단일화를 군사독재정권을 끝냈다면 민주주의는 훨씬 더 빨리 정착되었을 것이다.

 

단일화 실패에 대해 책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김대중은 박정희-전두환에 이어 노태우까지 그를 유혹했지만 "민정당과 평민당이 합치는 것은 민의를 배반하는 엄중한 사건"이라며 거부하면서 단일화 실패에 대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김대중은 1997년 대한민국 15대 '대통령'이 된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선거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김대중에게만 영광이 아니라 인민 전체의 영광과 기쁨이었고, 한국 민주주의의 위대한 승리였다.

 

김대중 표현을 빌리자면 "사람들은 나를 '인동초'라 불렀다. 처연한 아름다움, 인동초에는 눈물이 깃들여 있었다. 맞다. 지지자들이 나를 바라보며 흘린 눈물, 그 눈물이 모여 강물을 이루었고 나는 그 강물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 마침내 대통령이 되었다"였다. 그렇다, 수많은 이들이 흘린 눈물이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인민의 눈물을 배반하지 않는 김대중 그가 대통령이 되다니 감격, 감격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대통령'보다. 더 울리는 존칭이 있다. '선생'이다. 정치인에게 '선생'이라는 존칭은 짧은 내 생각으로는 김구 선생 이후 처음이 아닐까? 하지만 많은 이들이 '선생'에 대한 알러지 반응을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 '선생'보다는 김대중 '대통령'이 더 친근하다. 그런데 지난 해 여름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추모했다. 아내는 조의록에 "영원한 선생님"이라고 썼다. 물었다.

 

"당신 왜 '영원한 선생님'이라고 썼어요?"

 

"원래 '선생님'은 더 나아갈 수 있는 길에서도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깨닫게 하는 분인데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 그런 분이잖아요. 김대중 대통령은 '대통령'보다는 '선생님'이 더 어울려요."

 

뒷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맞다. '대통령'보다 선생님이다. 대통령은 아무래도 '권위주의'냄새가 나지만 선생은 존경과 친근감이 함께 풍긴다. 하지만 김대중 '선생'은 인민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면서 손수건을 건네 줄 수 있지만, 텅 빈 국가 곳간을 채울 수 없고, 북한 김정일 위원장과 만나 평화를 논의할 수는 있지만 서명을 통해 평화를 정착시킬 수는 없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할 수 있는 일이다.

 

정치인 김대중, 아니 '선생' 김대중은 "'통일'은 순결한 과제"라고 표현할 정도로 한반도 평화는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고, 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김대중은 '평화공존교류-연방-완전통일'을 이라는 '공화국 연방제 통일방안'을 제시하였고, '대통령'이 되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을 추진하였고, 정상회담이 합의되자 "가슴이 복 바쳤"을 정도로 그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자기를 걸었다. 김대중은 김정일과 만남 자리에서도 "통일은 당장 이루지 못해도 한반도에서 전쟁의 먹구름은 벗겨 내고, 이산가족 문제는 꼭 해결해야 한다"는 다짐을 했다. 이 간절함이 얼마나 진했으면 "김 위원장 본관은 어디입니까"라는 '인간적인 호소'를 하였고, 끝내 해방 55년, 분단 52년 만에 위대한 '6․15남북공동선언'을 성사시켰다.

 

하지만 김대중은 끝까지 "6․15 공동 선언은 각본 없는 거대한 드라마였다. 모두가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했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의 뜻대로 이뤄졌다. 나는 국민의 뜻을 받들었고, 그래서 진정한 주역은 국민들이었다"(2권 312쪽)고 한다. 인민에게 모든 공을 돌리는 김대중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독재자와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았던 김대중이 다른 점을 여기서도 발견할 수 있다. 독재자는 모든 것을 자기 업적으로 미화하고, 신화로 만들지만 김대중은 인민을 앞세웠고, 이들이 없었다면 한반도 평화는 이를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것에서도 '대통령'보다 '선생'이 그에게 어울린다.

 

하지만 그는 "나는 그를 머지않아 다시 만날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포옹이었다. 그를 배웅할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2권 306쪽)는 말처럼 김정일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바람이 이루어졌다면 김정일 위원장이 서울에 왔다면 한반도 평화를 더 진전되었을 것이다. 물론 다음 대통령이었던 노무현은 '10․4선언'으로 뒤를 이어 한반도 평화를 정착시켜나갔지만 이명박 정권은 6․15 공동 선언과 10․4선언을 모두 내팽개쳐버렸다.

 

참 어리석은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4년에 이미 "미국의 주장을 무조건 따르던 시대도 지나갔다. 우리가 외교 역량을 강화해서 미국과의 관계를 계속 튼튼히 하고 별도로 주변 각국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들과 다각적인 외교 활동을 해나가는 것이 필요했다(1권 638쪽)"는 선견지명을 보여주었지만 16년이 지난 오늘 이명박 정권은 정반대로 가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다. 전임자들이 그에게 물려준 한반도 평화의 위대한 유산을 살리지 못한 어리석음을 넘어 우매함을 보여주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은 마지막 한해를 참 치열하게 살았다. 그것은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이 다시 부활하는 모습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1987년 이후 다시는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일은 없으리라. 자기 생애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이명박 정권은 1987년 이전으로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되돌렸다. 민주주의를 배반하는 이명박 정권을 향해 김대중은 마지막 저항을 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을 마지막 보내면서 "당신은 우리 마음 속에 살아서 민주주의 위기, 경제 위기, 남북관계 위기 이 3대 위기를 헤쳐 나가는 데 힘이 되어 달"라고 했고, 육신을 놓기 마지막 연설에서는 "'행동하는 양심'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우리는 행동하는 양심으로 자유와 서민 경제를 지키고, 평화로운 남북 관계를 지키는 일에 모두 들고 일어나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나라, 희망이 있는 나라를 만듭시다"고 뼛속 깊은 곳에서 나오는 온힘으로 절규했다.

 

이명박 정권이 얼마나 민주주의를 훼손하였고, 평생을 민주주의를 위해 살아온 '선생' 마지막 숨을 몰아시면서 까지 민주주의를 위해 행동하라 절규는 인민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해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김대중 자서전>을 덮으면서 "나는 마지막까지 역사와 국민을 믿었다"는 말에 그를 영원한 선생으로 평했던 아내의 말이 사실이며, 진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인생은 생각할 수 록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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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역사, 반복되지 않도록 노력하자 | 인물 2010-02-07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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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히틀러 세트

이언 커쇼 저/이희재 역
교양인 | 2010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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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독재자 반열에 오른 이들은 많다. 히틀러, 무솔리니, 스탈린, 마오쩌둥, 김일성 등이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아돌프 히틀러만큼 20세기 독재자로 자리매김한 이는 없다. 히틀러는 5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목숨을 앗았고, 아니 더 많은 사람들을 갈가리 찢기게 하여 독일을 넘어 여러 나라와 여러 민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유례가 없었고 20세기 대학살 주모자였던 그는 책을 좋아했다. 베토벤, 브루크너, 그리고 평생 음악 이상으로 삼았던 리하르트 바그너를 좋아했으며 한 때는 위대한 미술가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스무네 살이 될 때까지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뾰족한 계획도 없이 무위도식하면서 떠돌고 있던" 별 볼일 없이 산 '낙오자'에 불과했다.

 

책이 동무였고, 바로크를 사랑하고, 미술가가 되기를 바랐으며, 별 볼 일 없이 젊음을 보냈던 '낙오자'가 도대체 어떻게 독일에서 권력을 휘어잡고 20세기 세계사에서 수천 만 명 인민들을 죽음으로 이끌었을까? 특히 그의 조국 독일은 철학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철학자 중 첫 손가락에 꼽혀도 토를 달 사람을 없는 이마누엘 칸트, <파우스트>를 쓴 요한 볼프강 폰 괴테,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유명한 책을 남긴 피히테를 선조로 두었다. 이런 정신문명을 가진 독일인들이 어떻게 이 독재자를 '하이 히틀러'라고 부르면서 충성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을 영국 세필드 대학의 현대사 교수이자 구조주의 역사학자인 이언 커쇼가 30여년에 걸친 히틀러와 제3제국 연구 성과를 종합해 펴낸 <히틀러 1·2>에서 찾을 수 있다. 엄청난 자료를 바탕으로 히틀러와 나치 체제를 분석한 전기 '히틀러' 1·2권 합쳐-영어판은 총4권-2236쪽이 넘는 분량이라, 처음엔 읽을 엄두가 나질 않는다.

 

물론 책 분량이 많다고 좋은 책은 아니다. 하지만 이언 커쇼는 엄청난 자료를 바탕으로 치밀한 연구를 통해 <히틀러1·2>를 썼다.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히틀러 연구서 가운데 가장 치밀하고, 깊이 있고, 균형 잡힌 저작이라는 평가를 받아 2000년 최고의 역사 저작에 수여하는 울프슨 역사상을 수상했다.

 

1권은 1889년 히틀러의 출생부터 위대한 예술가를 꿈꾼 청년 시절, 1933년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오른 후 재무장을 선언, 1936년 라인란트 점령을 계기로 독일제국의 위대한 부활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까지를 다루었다. 

 

커쇼는 히틀러를 '개인'으로 보기보다 당시 독일이라는 '사회'가 함께 히틀러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외곬, 확고부동, 모든 장애물을 쓸어버리는 무자비함, 영특한 냉소주의도"도 한 몫했지만 "히틀러의 권력은 사실 사회에 더 깊은 뿌리를 두었다, 그것은 히틀러를 추종한 사람들이 히틀러에게 쏟아 부은 사회적 기대와 욕망의 산물이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문명의 뿌리를 뒤흔든 나치의 공격은 20세기를 규정하는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히틀러는 그 공격의 지원지였다. 그렇지만 히틀러는 그 공격의 주창자였지 일차 원인은 아니었다."(1권 36쪽).

 

즉 히틀러가 독재자가 된 것은 단순히 히틀러 개인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와 그 사회가 바란 산물이라는 말이다. 독일 인민들이 히틀러에게 열광한 이유에 대한 설명은 이렇다.

 

"전쟁, 혁명, 민족적 수모, 볼셰비즘에 대한 공포는 워낙 광범위하게 독일 국민을 뒤흔들었고, 히틀러는 그런 상황을 발판으로 삼았다. 독일의 서민들이 느끼는 공포와 울분과 고정관념을 당대의 어느 정치인보다도 잘 대변했다. 더 나은 새로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어느 정치인보다도 잘 심어주었다."(1권 603쪽)

 

한 때는 위대했지만 이제는 쇠락하여 초라해진 독일 제국, 독일 민족을 구원하겠다는 히틀러의 환상은 독일 인민들을 감동시켰고, 지지자들은 점점 히틀러와 나치체제에 동조하게 된 것이다.

 

2권은 히틀러가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 지도자가 된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후 히틀러가 독일을 전쟁으로 몰고 가 결국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9년 뒤인 1945년 베를린의 어두운 지하 벙커에서 자살하는 것까지 다루었다. 커쇼는 히틀러를 악마로 만들어 단죄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철저히 객관적이다.

 

"나는 역사적 인물에 드러난 악의 문제를 도덕적으로 단죄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내가 하려는 것은 히틀러가 도대체 어떻게 한 사회를 휘어잡았기에 그 사회가 그렇게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히틀러를 지지했는가 하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2권 8쪽)

 

위대한 독일 제국 부활을 선언하고, 지도자로서 능력을 보이자 인민들은 그를 지지했고, 인민들이 자신을 지지하자 히틀러를 자신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타협은 없었고, 독일제국이 자기 손에 달렸다고 확신했다.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변수로서 나 같은 사람은 유일무이하다. 군인이나 민간인 중 누구도 나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 나는 지력과 결단의 힘을 믿는다. 전쟁은 언제나 적을 절멸시켜야 한다. 이걸 외면하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이다. 타협은 없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나는 쳐들어가서 무릎을 꿇지 않을 것이다. 제국의 운명이 오직 나한테 달렸다."(2권 354쪽)

 

오직 자신에 대한 절대적 신념에서 우러나오는 이 연설, 선동성을 통해 참모들과 독일인민들은 그를 숭배했고, 히틀러 지배력은 극지방의 빙하처럼 견고해져 극단의 길로 치닫게 된다. 이 신념은 결국 패배의 지름길이 되었다고 커쇼는 말한다.

 

이어 커쇼는 "지도자의 카리스마에서 나오는 권력은 허깨비가 아니다, 수많은 사람이 실제로 굳게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지도자 숭배는 수백만 명의 보통 사람을 휘어잡았다. 더불어 알아주는 자리에 있고 힘깨나 쓴다는 사람까지도 속으로는 비판을 하고 우습게 볼지언정, 지도자 숭배를 자기 입맛에 맞게 이용하다 보니, 히틀러의 권력이 어떤 견제도 받지 않는 절대 권력으로 굳게된 것이다.

 

자연히 히틀러는 누구한테도 견제받지 않았다. 파멸로 가는 길은 훤히 뚫렸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독일 인민을 비롯하여 독일 안팎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나치정권에 희생됐다.  

 

사람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 바가 거의 없는 히틀러지만,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컸다. 그는 <나의 투쟁>에서 "나는 아버지는 존경했지만 어머니는 사랑했다"라고 썼다, 그리고 벙커에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머니 사진을 품에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만약 그가 어머니를 사랑한 것만큼 다른 이들을 사랑했다면 20세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에서 '만약'은 공상일뿐 현실이 아니다.

 

이 책은 히틀러에게 사로잡힌 독일 사회와 유럽인들의 모습을 통해 결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히틀러 치하에서 벌어진 일은 현대 문명 자체의 소산이자 특성인가? 그런 참사의 가능성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는가? 히틀러와 그의 시대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현재형이다고 말한다. 

 

저자는 1권 머리글에서 "히틀러의 유산은 우리 모두의 것"이라며 "그 유산에는 어떻게 히틀러가 가능했는지를 이해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의무도 들어간다. 우리는 오직 역사를 통해서만 미래를 위해서 배울 수가 있다"고 적었다. 2천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읽기 부담스럽다고 해도 한 번 도전해보자. 우린 히틀러를 악마로 비판만 하지 말고 그가 저지른 그런 참혹함이 다시는 우리에게 되풀이 되지 않도록 모두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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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선생님인지 빨갱이인지 역사가 기록할 것" | 인물 2009-09-11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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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만화 김대중 1

백무현 글, 그림
시대의창 | 2009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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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 전두환 · 김대중을 떼어놓고 한국 현대사를 논하는 것은불가능에 가깝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쿠데타로 집권했고, 김대중은 그 쿠데타가 민주주의를 유린했기 때문에 저항했다.
 
박정희와 전두환은 자신들이 일으킨 쿠데타에 저항한 김대중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박정희는 김대중을 감옥에 잡아넣거나 집에 감금했으며, 납치까지 저질렀다. 전두환은 그에게 '내란음모'라는 무시무시한 죄목을 뒤집어 씌워 사형을 선고했다.
 
얼마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함으로써 박정희와 김대중은 역사 속 인물이 되었다. 박정희는 마지막까지 김대중에 대한 분노를 거두지 않았고, 전두환은 김대중 전 대통령 때가 전직들이 가장 살기 좋았다는 말 한마디로 자기가 저지른 죄를 씻어버리려고 했다. 그의 서거로 말미암아 우리 사회는 '김대중'을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책을 통하여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았던 삶을 돌아보는 것이다.
 
<만화 박정희> <만화 전두환>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던 백무현 화백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쓴 책과 그와 함께 했던 정치인, 언론인, 교수들이 쓴 저작물뿐만 아니라 그를 비판했던 사람들이 쓴 저작물까지 다 살펴 3년간 작업 끝에 <만화 김대중 1·2>을 내놓았다. 앞으로 3-5권이 더 나올 것이다.
 
백무현은 먼저 "'빨갱이'도 눈물이 있을까?"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한다. '빨갱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홍글씨'였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명해도, 정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지 않고, 그 권력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해온 사람들은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정죄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았던 "빨갱이가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광주 망월동에서, 펑펑 울었다"고 백무현은 회고한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권양숙 여사 손을 잡고 통곡하는 모습은 결코 지울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렇다. 빨갱이도 눈물을 흘렸다. 빨갱이라고 정죄했던 그들이 오히려 피도 눈물도 없었다.
 
김대중은 '사람'이었다. '빨갱이'와 '선생님'이라는 양극단으로 평가받았던 그. 백무현은 김대중이 살아온 정치적 삶을 무조건 따르지 않는 '비판적' 지지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가장 즐겨보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동물의 왕국>이라는 사실과, 귀여운 강아지를 혼낸 것에 단단히 화가 나 국회에서 집으로 득달같이 달려와 아내 이희호 여사에게 따졌다"는 일화를 깨닫고 '인간 김대중'을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동물을 사랑한 김대중이라면 어찌 '사람'을 사랑하지 않았겠는가. 가난한 자들, 여성들을 사랑했다. 용산철거민참사를 보면서 가슴이 아렸다고 말했다. 그 사랑은 자기를 좋아한 사람만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빨갱이'로 매도한 자들까지, 정적까지 용서한 휴머니스트였다고 백무현은 <만화 김대중>에서 그리고 있다.
 
백무현은 말한다. 그의 정적들은 김대중을 '빨갱이'로 정죄하다가 먹히지 않으니 마지막에는 '대통령병 환자'라고 매도했다고. 그러나 민주주의를 유린한 박정희는 18년을 집권했다. 전두환도 민주주의를 유린하면서 죄 없는 광주시민을 무참히 학살했다. 오히려 박정희와 전두환이 더 대통령병 환자였다고 비판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명언을 남기고 흙으로 돌아간 김대중에게 백무현은 "진정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며 "그가 과연 '빨갱이 김대중'인지 '선생님 김대중'인지 이제 역사가 기록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그는 <만화 김대중>을 3년 전부터 기획했다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2009년 1월 7일 일기에서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고 썼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백무현은 이를 두고 "'행동하는 양심'이 승리한다는 믿음이라"고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았던 시간에는 일제식민지, 한국전쟁, 이승만 정권, 박정희 독재정권과 전두환 독재정권, 그리고 경제 식민지였던 IMF,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여든 살이 넘은 사람들이 다 경험한 시간이었지만 김대중는 달랐다. 특히 박정희 독재정권부터 남북정상회담까지는 중심이었다.
 
<만화 김대중 1>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태어난 하의도의 과거를 먼저 그렸다. 하의도를 먼저 다룬 이유는 하의도가 지닌 역사적인 의미 때문이다. '하의도' 그곳은 조선시대에는 선조 딸 정명공주 시댁인 풍산 홍씨 가문에게, 일제강점기에는 이완용을 등에 업은 홍씨 가문과 일본인들에게, 조국 해방 후에는 미군정에게 착취를 당했고 이에 분개하여 300년 동안이나 농민들이 농지탈환운동을 전개한 곳이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마지막 고향 방문이던 2009년 4월 하의도 농민운동기념관 개관식에 참석해 "인생을 살아오면서 하의3도 농민의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굴하지 않고 투쟁해왔다"고 말한 바 있다.
 
1권에서 하의도 농민들 토지반환역사를 길게 다룬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김대중이 '인동초'가 된 이유는 선조들이 300년 동안 자신들 권리를 위해 부당한 권력에 저항했던 삶이 육화되었기 때문이리라.
 

2권에서는 김대중과 박정희의 만남을 다루었다. 어쩌면 박정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아가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박정희가 김대중이 주장하는 대로 3선개헌과 유신독재를 하지 않았다면 김대중은 40대에 대통령이 되었겠지만 독재정권에 저항한 상징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박정희는 3선개헌과 납치, 유신독재로 독재자와 민주주의를 유린한 상징이 되어버렸다. 김대중은 그에게 저항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항하면 박해했다. 박해할수록 김대중은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았다. 이것이 김대중을 김대중답게 했고, 수없이 변절해간 이들과 다른 점이었다.

 

앞으로 나올 3권은 서울의 봄, 김대중내란음모사건, 전 세계에서 일어났던 구명 운동, 미국 망명, 2.12 총선을 다룬다. 4권은 6월항쟁, 야권분열, 1992년 대선, 정계은퇴, 50년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청와대에 입성하기까지를 다룬다. 5권은 IMF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노벨 평화상 수상, 노무현 전 대통령을 해양수산부장관에 임명, 정권 재창출 따위를 다룬다.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길로 간 김대중 전 대통령. <만화 김대중 1-5권>은 민주주의와 남북화해, 서민을 위해 평생을 살았던 '행동하는 양심' 김대중을 우리에게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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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또 다시 죽어야 하나? | 인물 2009-07-05 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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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김대중 죽이기

강준만 저
개마고원 | 1995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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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죽이기>. 이 도발적이고, 과격한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책제목이 14년 만에 부활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11일 '6·15 남북 공동선언' 9주년 기념 강연에서 "독재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지 말자. 이 땅에 독재가 다시 살아나고 있고 빈부 격차가 사상 최악으로 심해졌다"며 "우리 모두 행동하는 양심으로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 후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강하게 비판했다. 그 중에 눈길을 끈 비판은 <조중동>이었다. 조선일보는 13일 <김대중 전 대통령, 국가 원로다운 언행을> 사설에서 "올해 86세의 국가 원로인 김 전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반(反)정부 투쟁을 선동하는 듯한 발언을 한 것은 듣기에 민망하고 거북하다"고 했으며, 동아일보는 <'민주' 탈 쓰고 反민주 부추긴 DJ의 정권타도 선동> 사설에서 민주선거로 선출된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한 것을 두고 "DJ는 민주의 가면을 쓴 반민주주의자임을 보여줬다"고 맹비난했다.

 

강준만은 1995년 1월 "적어도 최근 십수 년간, 한국 정치와 관련하여 가장 두드러진 음모는 무엇인가? 그건 바로 '김대중 죽이기'"라면서 "집단적인 탐욕과 음모와 무지와 위선과 기만에 희생된, 앞으로도 희생이 될 수 있는 인물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바로 김대중"이라고 했는데 그 '앞으로'가 14년이 지난 2009년 6월에도 현재진행형이 되었다.

 

강준만은 <김대중 죽이기>에서 "우리나라 정치평론은 대부분 쓰레기"라면서 "우리나라 정치평론이 쓰레기라는 데 동의하거나, 아니면 그런 주장을 한 강준만이 정신나간 놈이라는" 양자택일을 판단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정치평론을 쓰레기라고 표현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강준만은 '언론'과 '지식인'을 맹비난한다. 강준만은 언론이 김대중을 먹고 자랐으며, 어떤 때는 영웅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서 독자들의 눈을 속여왔다고 말한다.

 

"분명히 해두자. 당신은 그동안 언론이라는 창문을 통해 김대중을 보았을 뿐이다. 그런데 그 창문은 김대중의 전체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거이니와, 더러운 때와 의도적인 분탕질로 투명하지도 않았다."(16쪽)

 

이 언론 중심에는 <조선일보>가 있다. 강준만이 <조선일보>에 주목한 이유는 '의제 설정'을 주도하는 신문이면서 "철저하게 이념적인 동시에 철저하게 상업적인이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극우와 극좌에 치우친 신문이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는데 <조선일보>만 성공하고 있다고 말한다. 바로 이 <조선일보>가 김대중을 아주 교묘하게 비난하고 다른 언론은 <조선일보>를 따라가고 있다고 말한다.

 

"<조선일보>는 김대중을 잡아 먹고 자란 신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 딱한 건 5공 시절에 급성장한 <조선일보>가 이젠 한국 최대의 신문으로서 한국 사회의 여론 형성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일보> 방우영 사장이 지난 91년 자랑사람아 이야기한 그대로 '발행부수 2백만이면 독자는 6백만명이 되는데, 이는 우리나라 성인 인구의 약 3분의 1이 조선일보를 매일 읽는 것'을 의미한다. 이건 정말 두렵게 생각해야 할 사실이다."(192쪽)

 

물론 <조선일보>는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막지 못했고, 1995년보다는 약해졌다. 하지만 우리나라 어떤 언론보다 의제 설정을 주도하는 것은 사실이다. 지식인을 향한 비판은 더 가혹하다.

 

지식인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여론을 왜곡할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식인이 '정치평론'이라는 이름으로 언론을 통하여 정치혐오증을 심어주고, 김대중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독자들에게 심어주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정치평론의 양비론은 현실 정치인 김대중의 행태와 '김대중 신화' 사이의 괴리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언론과 지식인의 부추김을 받아 형성된 국민의 잘못된 정치 인식 자체가 김대중이 당면해야 했던 최대의 적이었던 것이다."(261쪽)

 

특히 강준만은 진보적인 지식인들도 "진보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김대중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진보성을 선명하게 내세울 수 있다"면서 "김대중에 대한 비판은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고 맹비난했다.

 

"그들의 순수성이나 양심을 못 믿는게 아니다. 그들의 순수성이나 양심은 기묘하게도 김대중에 대해서만큼은 실종돼 버렸다. 그들은 원칙을 부르짖다가도 김대중 문제만 나오면 그 어떤 보수주의자 못지 않은 현실주의자로 돌변해 버린다."(284쪽)

 

14년 전과 다른 점은 김대중은 대통령이 되었고, 그 영향력은 현저히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강준만이 '김대중 죽이기' 선봉장으로 비판했던 <조선일보>는 김대중이 지향했던 가치와 철학, 이룬 업적인 민주주의와  남북화해 따위를 맹비난하고 있다. 김대중을 비판했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다. 아직 '김대중 죽이기'는 끝나지 않은 것이다.

 

'김대중'이라는 인물 자체가 아니라 그가 가졌던 정신을 죽이려고 한다. 김대중이 가졌던 정신을 존중하고, 함께 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김대중 정신을 죽이려고 날 뛰는 저들의 저열한 방법을 정확하게 알고 김대중 정신을 다시 살리는 일에 전심전력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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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않겠다" | 인물 2009-07-05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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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백범일지

김학민, 이병갑 공저
학민사 | 1997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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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경전 중에는 <성경>, 고전 중에는 <그리스․로마신화>와 <삼국지>는 한 가정에 한 권쯤은 다 있을 것이다. 그럼 우리나라 사람이 쓴 책 중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달리 판단하겠지만 짧은 생각에는 <백범일지>도 포함될 것이다.

 

한 집에 한 권쯤 있는 책들은 시중에 나온 것만 해도 수십 종에 이른다. <백범일지>도 20여종이나 된다고 한다. 20여종 되는 책 중에는 원본을 나름대로 원본에 충실한 '족보 있는 판본'도 있지만 급히 베낀 책까지 있다. <백범일지>라도 다 같은 <백범일지>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고민이 된다. 무엇을 손에 들고 읽어야 할지.

 

고민을 해결해 준 <백범일지> 중 하나가 김학민․이병갑 주해 <정본 백범일지>이다. <정본 백범일지>는 '주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 동안 교열과정에서 삭제해버린 구절을 원본과 꼼꼼하게 대조하여 복원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352쪽-355쪽에 실은 '대가족명부'이다. 대가족 명부는 기미운동(3.1운동)으로 인하여 상해에 옮겨와 거주하던 5백여 동포를 일컫는다. 그 동안 대가족 명부은 친필본과 필사본에도 모두 누락되어 있었는데 이를 복원한 것이다. 아직 완전한 명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발걸음임은 분명하다.

 

<백범일지>가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1947년이었으니 올해로 62년이다. <백범일지> 세상에 나오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자 이승만 정권은 '금서'딱지를 붙이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백범은 <백범일지>가 처음 책으로 나올 때 편찬 배경을 서술하기 책머리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는 우리의 시체로 성벽을 삼아서 우리 독립을 지키고, 우리 시체로 발등상을 삼아서 우리 자손을 높이고, 우리 시체로 거름을 삼아서 우리 문화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혀야 한다. 나는 나보다 앞서서 세상을 떠나간 동지들이 다 이 일을 하고 간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한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다."

 

"내 비록 늙었으나 이 몸뚱이를 헛되이 썩히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에는 조국 해방을 위해 자신을 바친 것 외에는 어떤 사리사욕을 추구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백범은 "나라는 내 나라요 남들의 나라가 아니다.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백범은 "독립은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내가 하는 것이지 따로 어떤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한다. 백범 때는 독립이 가장 큰 소명이었지만 오늘은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는 일이 가장 큰 소명이기 때문이다.

 

백범은 "양반이 있음으로 국가가 독립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양반의 학대를 좀더 받아도 나라만 살아났으면 좋겠다"말을 한다. '양반' 조선시대 권력집단이자, 기득권이다. 이들이 나라를 위해 충성하지 않고, 기득권에 매몰되자 결국 조선은 멸망했다. 백범이 바라는 바는 바로 양반는 구국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라는 말이다.

 

과연 오늘 대한민국을 이끌고 있는 세력은 자기 희생을 통하여 나라를 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지배자가 되었을 뿐, 나라를 위해 자기 희생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 백범은 상해임시정부 국무령과 국무위원이 되었을 때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의 60평생을 회고하면 너무도 상리(常理)에 벗어지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대개 사람이 귀하면 궁(窮)이 없겠고, 궁하면 귀가 없을 것이나 나는 귀역궁 궁역궁(貴亦窮 窮亦窮:귀한 몸이어도 궁하고 궁한 몸이어도 궁함으로) 일생을 지낸다. 국가독립을 하면 삼천리 강산이 다 내것이 될는지는 알지 못하나 천하의 넓고 큰 지구 표면에 한 뼘의 땅 반칸의 집도 소유가 없다" (정본 백범일지 <국무령, 국무위원> 261쪽)

 

조국이 일제식민지인데 배불리 먹고, 잘 입고, 잘 사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조국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으니 권력과 집을 가져도 누구 하나 탓하지 않겠지만 백범은 그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가 바란 것은 조국독립있고, 조국이 독립해도 자기 영달을 위해 독립을 이용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대통령 만들었다고 법과 민주주의는 온데간데 없고, 자기 자리 차지하기 바쁜 이명박 정권모습과 달라도 정말 다르다. 백범을 존경하면 무엇하나. <백범일지>를 읽어면 무엇하나. 그가 바랐던 삶을 자기 삶에 녹이지 않으면 <백범일지>는 종이 위에 쓴 글일뿐이다.

 

고은 선생은 <백범일지>를 읽을 때마다 "울게 되는 눈물의 책"이라며 "현 시대를 살고 있는 젊은이라면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과 근원을 찾게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젊은이 뿐만 아니다.

 

오늘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렸다. 민주주의를 스스로 짓밟고서도 한 번도 진심어린 사과 한 번 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되찾고 하는 이들을 곤봉과 방패로 내리찍고, 군홧발로 짓밟고 있다. 

 

백범이 <백범일지>에서 조국 독립을 그토록 강조했다면 2009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백범일지>를 읽어면서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힘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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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은 패배하지 않았다 | 인물 2009-07-05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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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패배한 암살

김삼웅 등저
학민사 | 1992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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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 울린 '총성'은 정확히 1년 후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가 있고, 가정의 이산이 있고, 동족의 상잔까지 있게 되는 것이"라고 했던 백범 선생 말처럼 한반도를 불바다로 만드는 서막 중 하나였다.

 

'만약'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총성이 울리지 않았다면 1950년 6월 25일은 역사 속에서 민족상잔으로 '기억'되지 않고, 그저 역사 속에 흘러갔던 어느 한 날이었을지 모른다.

 

백범이 간지 오늘(26일)로 60년이 되었다. 그 때 그 현장에 있었고, 1948년 4월 백범 선생과 함께 38선을 넘었던 선우진 선생은 생전에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라고 했었다. 

 

어디 선우진 선생 한 명 뿐이겠는가. 그를 아직도 못 잡아 먹어 안달인 사람들이 많고, 좌파로 매도하며, 5만원권과 함께 발행되어야 했던 10만원권 발행이 무기한 연기된 2009년 6월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있다. 부끄러움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오늘 1992년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 관장 선생이 엮은 <패배한 암살>은 백범을 죽음으로 이끈 세력이 누구인지 밝히고자 하는 산물이었다.

 

<패배한 암살>은 백범 선생 암살 관계를 다룬 글 가운데 비교적 충실한 내용과 각종 자료와 증언을 중심으로 김삼웅 선생 외 14명이 쓴 글을 제1부 해방정국과 민족노선의 좌절, 제2부 백범 암살의 전개과정, 제3부 백범 암살의 배후, 제4부 누구를 위한 반역인가로 엮었다.

 

그들은 백범 암살을 한 개인의 죽음으로 보지 않는다. 해방정국의 치열한 노선 싸움과 거대한 정치적 음모는 결국 백범을 암살로 몰아갔고, 백범을 암살한 자들은 한 사람을 살해한 '살해범'이 아니라 민족 반역자로 단죄하고 있다.

 

김구와 이승만에 대해 수많은 평가가 있겠지만 '백범 선생과 우남 노선의 갈등'을 쓴 이원모(미주 백범기념사업회장)-1992년 나온 책이라 당시 직책을 그대로 씀-는 백범 선생과 이승만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자칭 '대통령' 이승만과 임시정부 수위를 자청한 사람 김구"라 평하면서 이렇게 썼다.

 

이승만 대통령 집권 때 남산에 높여 세웠던 그의 동상이 4.19 혁명 때 학생들에 의해 넘어뜨려졌는데, 남산 그 지역에 국민의 이름으로 동양 최대의 백범 김구 선생 동상이 세워진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28쪽)

 

이토록 다른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그를 암살한 마지막 배후로 지목되었지만 그 잘난 '물증'이 없어 아직도 역사는 그를 단죄하지 못하고 있다. 그가 서거하자 온 나라는 통곡했다. 많은 통곡이 있지만 <패배한 암살>에 실린 독립투사 박동엽 선생( 전 대광고 교감)은 '백범 김구 선생 참변 목격기'에서 이렇게 썼다.

 

"선생님! 정몽주 쓰러질 때 누가 보았는지, 사육신 넘어질 때 누가 울었는지 저는 모르옵니다. 그러나 님이 쓰러질 때 이 못난 동수(冬秀)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하늘도 몸부림치고 땅도 눈물 피눈물 뿌리던 그 날! 겨레의 장자를 끊는 비통한 통곡소리 산을 뒤덮던 그 날 !독재자의 앞잡이들은 '좌익계열에서 통곡대를 조작하였다'고 조작하여 전주와 담벼락마다 위협과 공갈로 무시무시한 포고물을 붙여서 참지 못하여 터지는 울음소리마저 붕해 놓았다는 것입니다"(155쪽)

 

백범 때도 통곡을 조작했다고 한다. 민족을 반역한 그들과 민주주의를 훼손한 이가 60년을 사이에 두고 어찌 이리 닮았는가. 백범을 지우기 바빴던 이들이 다시 부활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이 울었고, 땅도 피눈물을 쏟았다. 백범 암살은 숱한 이들 마음 속에 비통함으로 자리잡았고, 백범을 보낼 수 없었다. 이승만 정권은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오늘 누구처럼.

 

백범 암살자는 안두희이다. 하지만 그는 총만 쐈을 뿐 그는 진짜 암살자가 아니다. 백범을 죽이라고 명한 마지막 결정권자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가 누구일까? 김삼웅 전 관장은 '백범 암살과 이승만' 글에서 이승만에게 많은 혐의점이 있다고 밝히지만 '혐의점'일 뿐이다. 그는 17년 전에 이렇게 바랐다.

 

국회가 국정조사권 발동이나 청문회를 열어 진상규명에 적극 나서 이 땅의 건국사를 바로잡아야 국가의 기틀이 바로 서게 된다.(259쪽)

 

그 바람은 아직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회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밝힌 것 하나 없다. 60년이 되었는데, 김구 선생을 다들 존경한다면서, 민족 지도자라 추앙하면서 그를 죽음으로 이끈 진범을 찾는 일을 하지 않는다. 17년 전에는 안두희가 살아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어떻게 할 것인가. 김구 선생 추모와 함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백범 암살자 마지막 진범을 찾아 단죄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는 패배하지 않았다. 1949년 6월 26일 총성은 백범을 패배로 이끈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 우뚝한 바위와 모진 비바람을 막아주는 민족 지도자로 마음에 새겼다.<패배한 암살>이 던지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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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조선일보 싸움은 끝났을까? | 인물 2009-05-2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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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유시민 저
개마고원 | 2002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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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은 언론과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조선일보>와는 쉴 새 없이 싸웠다. 대통령을 그만둔 후에도 <조선일보>는 노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왜 <조선일보>와 노무현은 싸웠을까? 아니 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웠을까?

 

16대 대통령 선거를 넉 달여 앞둔 2002년 8월 '노의 남자'로 불리는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장관이 쓴 <왜 노무현은 조선일보와 싸우는가>에서 그 실마리를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유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이 "노무현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욕을 먹고 불이익을 당하면서 굳이 <조선일보>와 싸우는가를 해명"하기 위해 책을 썼다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조선일보>와 싸우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노무현과 <조선일보>의 싸움에는 대한민국을 반세기 동안 지배해온 '앙시앵 레짐(구체제)'의 목숨이 걸려있다. 어느 네티즌의 표현을 빌면, 우리는 '바스타유 감옥'을 부쉈지만 '앙시앵 레짐'을 해체하지는 못했다. 국민은 6월 항쟁을 통해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민주화의 문을 여는 데는 성공했지만, 강고한 동맹을 맺은 극우언론과 극우정당의 사상적 ․ 정치적 지배에서 사회를 전면적으로 해방시키는 데까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조선일보>를 상대로 한 노무현 전쟁은 바로 이 '앙시앵 레짐'의 해체를 겨냥한 것이다." (7쪽)

 

노무현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임기를 지냈지만 '앙시앵 레짐'을 완전히 해체시키지 못했다. 그러므로 '노의 남자'답게 굉장히 노 전 대통령에게 너무 편파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유시민은 말한다. 자신은 '객관적 관찰자'가 아니라 "공정하게 편파적인 것이 가장 공정한 것이며, 공정한 것이 가장 편파적이라"는 한 누리꾼 말을 빌어 "노무현과 <조선일보> 가운데 어느 쪽을 응원해야 할지 분명하게 판단하지 못하거나, 어느 쪽인가를 편들면서도 싸움이 벌어진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책을 썼을 뿐이라고 했다.

 

노무현과 <조선일보> 싸움은 1991년 노 전 대통령이 민주당 대변인이 되었을 때 <조선일보>가 프로필을 소개하면서 "고졸 변호사 … 상당한 재산가"라는 제목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그 유명한 '호화 요트'였다. 노 전 대통령은 <조선일보>를 상대로 명예훼손소송을 걸었다 . 다른 정치인들이라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후 싸움은 모두가 다 알고 있다.

 

정치인이라면 <조선일보> 같은 거대 언론과 잘 지내려하지만 노무현은 달랐다. 그 이유를 유시민은 "노무현은 '불관용'과 싸우며 통합과 화해를 추구한다."면서 "그는 '조선일보'가 지향하는 '멋진 신세계'와 어울리지 않는 정치인이다. 둘 사이의 싸움은 필연적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럼 이 싸움이 언제 끝날까 "노무현이 대통령의 꿈을 접지 않는 한, 또한 '조선일보'가 '밤의 대통령'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조선일보'의 공격과 노무현의 반격은 끝나지 않는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이 싸움은 그의 임기 내내 계속될 것이다"라고 했다. 유시민 전 장관 말처럼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었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퇴임 후에도 <조선일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2001년 6월 7일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수구세력 선봉에 <조선일보>가 서 있다고"고 했으며, 2001년 12월 3일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는 "조선일보는 공정한 보도를 하지 않는 신문입니다. 친일경력과 군사독재정권과 결탁했던 과거가 있는 신문입니다. 기득권층의 편에 서 있는 신문이고, 중산층과 서민들에게 적대적인 신문입니다. 그들이 왜곡보도를 하는 한 국민들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언론의 정도를 벗어난 신문과 어떻게 인터뷰를 할 수 있겠습니까?"라면서 <조선일보>와 인터뷰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 약속은 대통령 임기 동안 지켰다.

 

하지만 이제 그가 갔다. 더 이상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다. 유시민은 마지막 글에서 "노무현이 낙선한다고 해도 <조선일보>가 웃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고 했다. 그 이유로 "노무현이 벌였던 <조선일보>와 일전은 한국의 민주주의와 개혁, 국민톨합과 한반도의 평화를 가로막고 훼손하는 앙시앵 레짐을 백일하에 드러냈기 때문이라"했다.

 

유시민 말과 바람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앙시엥 레짐을 완전히 해체하지 못했지만 <조선일보> 실체가 무엇인지 드러낸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죽기 전까지 그토록 <조선일보>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난했다. 그럼 노무현 전 대통령이 가고 없는 지금과 앞으로 <조선일보>는 노무현과 싸울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노무현을 기다리고 있을까? <조선일보> 일전을 벌여 앙시엥 레짐의 완전한 해체를 실행에 옮길 사람은 누군인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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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을 두려워한 연주자, 글렌 굴드 | 인물 2009-05-28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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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계의 영원한 수수께끼" "고독과 광기를 예술로 승화한 음악가"로 불리우는 '글렌 굴드'를 을유문화사가 시리즈로 펴내는 '현대 예술의 거장' 일곱 번째 책에서 그의 절친한 동무였던 피터 F. 오스왈드가 쓴 <글렌 굴드-피아니즘의 황홀경>에서 만날 수 있다.

 

글랜 굴드는 평생 우울증으로 고생한 때문인지 여느 연주자들처럼 화려한 쇼맨십은커녕 박수조차 내키지 않을 정도로 청중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한다. 무대 생활도 짧았고, 삶도 쉰 살에 마침표를 찍었다. 무대 생활과 삶이 짧았으니 단순한 삶을 살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에게 주목했을까?

 

"무대와 청중을 싫어했으나 그의 실황 연주가 스튜디오 녹음 연주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평도 있다. 또 낭만주의 음악을 꺼려했으면서도 젊은 시절 연주한그의 쇼팽이 얼마나 낭만적이고 아름다운지 사람들은 기억한다. 그는 단순한 연주자가 아니라 음악에 대해 자신의 분명한 입장과 주관을 가진 음악가였으며, 자신의 해석을 옹호하기 위해 당시 음악 풍토를 거부하고 싸워나가 사람이었다."(10쪽)

 

모순과 독특한 면모는 매력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많은 이들이 그 수수께끼에 도전했던 것이다. 오스왈드는 굴렌굴드가 1957년 2월 28일 캘리포니아 한 무대에서 바흐의 바(F)단조 협주곡 연주를 들을 때에 "진정 종교적 계시와 같았다"면서 "정말 대단한 연주자였다! 음악을 극히 지적으로 이해하면서 그토록 멋지고 당당하게 몸으로 녹여 보여주는 마술과도 같은 솜씨를 지닌 피아니스트를 나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고 했다.

 

글렌 굴드는 글을 읽기도 전에 악보를 읽었고, 방금 들었거나 연주했던 작품은 다 머리에 담을 정도로 음악 재능이 뛰어나 글렌 굴드 어머니는 모차르트와 자주 비교하면서 "글렌이 세 살짜리 천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뛰어난 천재 글렌은 동무와 동떨어진 외로운 아이였다. 동무들은 난폭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평생 그와 함께 하면서 힘들게 했던 우울증의 시작이기도 했다. 동무없는 삶은 그를 우울증으로 고통스럽게 했지만 "그가 좋아했던 피아노나 오르간으로 음악을 연주하는 화려한 고독"이었으니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선물이었다.

 

글렌은 자기 방식대로 일을 해나갔다. 이 고집을 어느 누구도 꺾지 못했고, 현실과는 동떨어졌다. 자신보다 경험 많은 피아니스트에게 도움을 요청할 마음은 없었고, 자신을 교정해줄 다른 음악가들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나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만을 의지했다. 하지만 그의 연주를 들었던 한 이스라엘 주부가 그에게 보낸 편지는 글렌의 연주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평범한 이스라엘 주부랍니다. 당신들은 사람에게 관심이 없고 우리들을 싫어할 정도라고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당신에게 충심으로 감사 드려야겠어요. 당신의 연주를 듣고 딴 사람이 되어 집으로 돌아와 먀칠 동안 그 여흥으로 살았습니다. 신의 축복을 기원하면서"(274쪽)

 

청중 앞에 나서기를 싫어했던 그는 1964년 "내가 사람들은 음식 정도만큼만 중요하다"면서 "나이 들어갈수록 점점 더 음식이나 사람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깨닫게 됩니다. 나는 갈등이나 서로 대립하는 생각들에서 나 자신을 떼어놓고자 합니다. 수도원처럼 격리되어 지내는 것이 내겐 더 좋아요"라는 말을 잠시 무대를 떠났다. 그리고 그가 한 일은 녹음과 작곡, 프로그램 제작까지 했다.

 

솔직히 <글렌 굴드-피안즘의 황홀경>을 읽을 때까지 글렌을 몰랐다. 하지만 "고립은 인간 행복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낸 시간만큼 혼자 있을 때 시간이 인간에게는 필요하다"고 말한 글렌의 삶과 연주, 녹음과 작곡 인생은 왜 그를 고독과 광기를 예술로 승화한 음악가로 칭했는지 알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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