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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약출판사
KBS 김미화 고소, 김미화는 "대한민국 화이팅" 과연 진실은 | 성약출판사 2010-07-0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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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김미화씨가 자기 트위터 "KBS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글을 올린 후 파문이 확산되고, KBS는 김미화씨 주장은 사실무근이라며 고소했다. 뿐만 아니라 KBS는 6일 <9뉴스>에서 "방송인 김미화 씨는 KBS 내부에 '출연금지 문건' 이른바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에 올렸다"며 "해당 문건이 KBS에 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출연이 안 된다고 하더라는 주장"이라며 김미화씨 트위터 글 내용을 전했다.

KBS는 이어 "KBS 관계자들이 해당 리스트의 존재 여부를 밝혀 달라고 덧붙여, 김씨 스스로도 단순히 전해들은 이야기임을 인정했다"며 "이같은 일방적 주장은 삽시간에 3만 명이 넘는 트위터 팔로어를 통해 일파만파 확산됐고, 김 씨의 주장을 여과 없이 전하는 언론 보도도 잇따랐다"면서 언론과 인터넷, 트위터를 통해 확산 된 것을 자세히 보도하고, 확인과정 없이 보도한 언론을 탓하기도 했다.

 

KBS는 또 "김씨의 발언은 사실무근이며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며 특히 조대현 KBS부사장 인터뷰를 통해 "목격한 것도 아니고 들었다는 이야기를 그렇게 유포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탄을 금치 않을 수 없다"고 KBS반응을 전했다.

KBS는 이어 "KBS는 사회적 공인인 김 씨가 근거없는 추측성 발언을 해 KBS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김씨를 경찰에 고소했다"며 당일 오후 김씨를 영등포경찰서에 고소했음을 밝힌 뒤, "김 씨의 글을 그대로 인용 보도한 언론들에 대해서도 언론중재위를 통해 정정보도를 요청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누리꾼 반응은 냉담했다. <9시뉴스> 기사에 달린 댓글이다.

 

 KBS<9시뉴스>의 <KBS “김미화 ‘출연금지 문건’ 주장 법적 대응”>에 달린 댓글

 

한편 김미화씨는 트위터 다시 글을 올려 "좌? 우? black? white? 정말 지치지도 않습니다. 내일? 승소한 좌파논란 입니다만, 또, 고등법원에서 재판받습니다. 곧? 영등포경찰서에 불려 간답니다. 대한민국 만세!!!"라고 했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경찰이 수사에 나섰으니 진실은 밝혀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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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묻는 사람들에게 | 성약출판사 2008-07-0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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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묻는 친구에게
황영철  

 

지방에서 치과를 운영하다가 최근에 서울 근교 신도시로 이사를 하여 개원한 한 친구가 있다.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다가, 자기가 다닐 수 있는 좋은 교회를 추천해 달라는 부탁을 그로부터 받았다. 그 친구는 자기 아파트 근처의 어떤 교회에 나가본 이야기도 하면서 그런 부탁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친구는 적어도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그냥 나가면 된다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음이 또한 분명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른 분명한 어떤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나에게 그런 부탁을 했음이 분명했다. 아마 좋은 교회에 나가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 그러므로 교회를 결정할 때에 그저 다니기 편한, 집에서 가까운 아무 교회나 다녀도 되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그 친구에게 무엇이라고 말해 주어야 할까?


그럴 듯한 건물을 갖춘 교회로 정하라고 말해야 할까? 어떤 특정한 신학교를 졸업한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로 정하라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어떤 특정한 교단에 속한 교회에 출석하라고 말해야 할까? 그 친구가 나에게 교회론에 관련된 어떤 이론적인 문제를 질문했더라면, 아는 것 모르는 것 동원해서 나름대로 어렵지 않게 대답을 해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의 질문은 현실적이고 단순한 것이었지만 대답하기는 훨씬 어려운 것이었다. 하기야 단순한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 날 그 친구와 함께 꽤 오랫동안 앉아서 대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준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교회를 자기의 교회로 정해야 하느냐가 오늘날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이던 시기가 역사상에 있었다. 물론 작은 규모로는 그런 선택의 어려움에 직면한 많은 경우가 있었겠지만, 그것이 역사의 큰 흐름과 관련하여, 그리고 그 개인의 운명과 관련하여 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시기가 특별히 있었는데,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던 이른바 초대교회 시대와 개신교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분리되던 종교개혁 시대가 그런 시기였다. 그 시대에 살던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어떤 교회를 택하느냐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어떤 교회를 택하느냐 하는 문제로 고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종교적 갈등 이외에도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삶의 문제가 연루되어 있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나올 때의 문제의 핵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과 그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믿느냐 하는 것, 즉 기독론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신의 주장처럼 완전한 인간이면서 동시에 단순한 인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완전한 신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노력하였으며, 그의 삶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표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 시대에 어느 교회에 속하느냐 하는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를 입고 지상에 살았던 구체적인 한 사람으로 믿으면서 동시에 그를 완전한 하나님으로 믿고, 그리고 그 믿음이 함의하는 종교적 사회적 삶의 태도를 취하는 교회가 어디인가 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분리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와 유대교는 갈라지게 되었고 각 사람들은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이해와 믿음에 근거하여 자신이 속할 교회를 결정하였다. 이 선택의 여지는 오늘날에도 있다. 오늘날도 어떤 사람들은 유대교가 참된 계시 종교라고 믿으면서 기독교를 거부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유대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이다.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거의 대부분이 유대교도였다. 유대교가 가진 종교적 철저성과 배타성이 어떤 것임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개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찌 그런 개종의 이유를 말할 수 없었겠는가? 특별히 사도 바울이 기독교의 정당성을 변증하는 방식의 한 가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논증의 탁월성은 유대교 밖의 기독교적 관점에 서서 유대교를 평가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 자체를 분석함으로써 기독교의 정당성을 입증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판과 평가의 방식으로서는 가장 우수한 방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선 사도 바울은 유대교가 자기네 종교의 경전으로 삼고 있는 구약 성경의 가르침을 잘 살펴보면 그것이 실은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의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사도 바울이 거론하는 것은 유대교의 주장대로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느냐, 아니면 행위가 아닌 믿음에 의하여 구원을 얻느냐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은 교묘하게도 유대인들이 자기네 민족의 조상으로 우러르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고 있다(로마서 4장). 바울의 논리를 요약하면 아브라함은 그가 지킬 율법이나 할례의 법이 있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며, 따라서 아브라함의 신앙의 자세를 바로 따르는 사람들은 기독교도들이지 유대교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이 사용하는 논리는, 구약을 잘 살펴보면 유대인 속에는 두개의 흐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의 산물인 한 흐름과, 동일하게 유대인에게서 나오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 밖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즉 약속의 이삭에 비해서 이스마엘은 비록 동일한 아브라함의 자녀이지만 참된 의미의 구약 종교에 속하지 않았으며, 태내에서부터 선택된 야곱에 비하면 에서는 비록 자기 동생 야곱과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그런 육신적 출생과는 무관하게 참된 구약 종교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은 유대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거나, 유대교를 자기의 종교로 가지고 있다는 것과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구약 유대교의 흐름 속에는 두 개의 흐름이 존재했고, 그중에서 참된 흐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태어난 기독교가 계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도 바울은 훨씬 다양하고 풍부한 증거로 이 사실을 입증한다.


그러나 신약 성경 시대의 이 문제는 오늘 어느 교회를 자기 교회로 정해야 하느냐에 대하여 당장 분명한 빛을 비추어 주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물론 이것은 그렇게 보일 뿐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신구교를 막론한 대부분의 기독교는 약간씩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가르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이것도 사실은 그렇게 보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 시대의 상황이 도리어 오늘 우리에게 훨씬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교회 내에서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에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하게 되는 것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떤 교회를 정할 것인지의 기준을 기존의 교회와는 무관하게 세워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한 것이었다. 중세 동안에 기독교는 하나였고, 그 기독교의 교회도 하나였다. 그것은 잘 아는 대로 가톨릭 교회였다. ‘가톨릭’이라는 말은 과연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교회가 진짜 교회인가에 대하여 문제 삼을 필요도 없었고 여지도 없었다. 그들은 하나의 기독교 교회에 속하면 되었다. 그런데 여기 자기들이 기독교 교회라고 주장하는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기존 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을 향하여 적그리스도라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 즉 서로 양립되기를 거부하는 두 개의 기독교 교회가 존재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사람들은 이 두 개의 기독교 교회에서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가려내기 위한 기준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른바 “참 교회”(true Church)라는 말이 생겨났던 것이다. 양립될 수 없는 두 개의 교회가 있다면, 최소한 둘 중의 하나는 거짓 교회일 수밖에 없다. 혹은 최악의 상황에서는 두 교회가 다 거짓 교회이고 참 교회는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두 교회가 다 참 교회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는 면에서 동일했기 때문에, 기독론에 관한 초보적이고 평면적인 주장만으로는 판단의 척도가 되지 않았다. 즉 이제 문제는 어느 교회가 자기들이 고백하는 그 내용에 일관된 신앙과 교회적 삶을 영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훨씬 복잡해졌고, 상당한 성경적 신학적 지식이 없이는 판단을 내리기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지경에 사람들은 처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종교개혁 당시의 선택의 어려움은 오늘날의 선택의 어려움과 유사한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개혁자들은 이 문제에 대하여,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었을 때에 사람들이 수긍하고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을 세워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들이 세운 기준의 한 표준적인 문장이 벨직 신앙고백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이 신앙고백은 개신교가 중요한 신앙고백서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권위 있는 문서이다. 그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29항 거짓 교회와 구별되는 참된 교회의 표지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어느 것이 참된 교회인지를 부지런히, 그리고 신중하게 분별하여야 한다고 믿는데, 그 이유는 세상에 있는 모든 종파들이 스스로 교회라는 이름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위선자들, 즉 선한 사람들과 함께 교회에 섞여 있어서 외적으로는 교회 안에 있지만 교회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우리가 말하는 것은, 참된 교회의 몸과 교통은 자기들을 교회라고 부르는 모든 종파들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교회가 알려지는 표지들은 이것들이다: 만약 복음의 순결한 교리가 그 안에서 가르쳐진다면; 만약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의 성례들을 집행한다면; 만약 죄를 처벌함에 있어서 교회의 권징이 실행된다면; 요컨대, 만약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순결한 말씀을 따라서 수행되며, 그것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이 거부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인정된다면. 이것에 의하여 참된 교회는 분명히 알려질 수 있으며, 어떤 사람도 이런 교회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교회의 지체인 사람들에 관해서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의 표지에 의하여 알려질 수 있다: 즉 믿음에 의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받아들이고서, 그들은 죄를 피하며, 의를 좇으며, 참 하나님과 그들의 이웃을 사랑하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으며, 육신과 함께 육신의 일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러나 이 말은 그들 속에 큰 결함이 남아 있지 않다는 말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생애 동안 내내 성신을 통하여 그것들과 싸우며, 계속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죽음, 수난, 그리고 순종에서 그들의 피난처를 구한다 - 그의 안에서 그들은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사죄를 소유한다.


거짓 교회에 대해서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게보다는 자체에게 더 큰 능력과 권위를 부여하며,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려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의 말씀 속에서 지정된 대로 성례들을 집행하지 않으며, 자기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서 거기에 덧붙이거나 거기서 뺀다; 그것은 그리스도보다는 사람을 더 의지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거룩하게 살면서 그것의 오류, 탐욕, 우상숭배를 꾸짖는 사람들을 박해한다.


이 두 교회들은 쉽게 알려지며 서로 구별된다.”


물론 이 신앙고백은 많은 부분에서 로마 가톨릭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구별과 그것에 따른 제반 현상들은 반드시 가톨릭에 대해서만 적용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신앙고백은 참 교회의 표지를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 복음의 순결한 교리가 그 안에서 가르쳐진다면; 둘째,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대로의 성례들을 집행한다면; 셋째, 만약 죄를 처벌함에 있어서 교회의 권징이 실행된다면 그 교회는 참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첫째번 것에 대하여 살펴보면, 복음의 순결한 교리가 가르쳐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가감이나 곡해가 없이 가르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무엇을 가감하거나 곡해하는 일을 엄중히 경고하였다: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잠 30:6);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그러므로 우리는 베뢰아 사람들처럼 우리가 배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과연 그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일이 필요하다. 교회 성장이나, 신자에 대한 위로나, 기타 어떤 의도에 의해서건 하나님의 말씀이 고의적으로 곡해되거나 가감되어서 가르쳐지는 것은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둘째번 것에 대하여 살펴보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뿐이다. 제자들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명하셨고, 성찬은 친히 제정하여 행하셨다. 이 성례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르쳐진 그대로 순결하게 행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제도들을 교회에서 권위 있는 것처럼 시행하는 것은 참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셋째번 것에 대하여 살펴보면, 권징의 목적은 교회에서 죄를 처벌함으로써 교회의 순결을 보존하는 것이다. 교회가 권징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기 위해서는 교회의 도덕적 권위가 전제되어야 한다. 즉 현재의 경륜에 있어서 교회의 권세는 물리력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영적 도덕적 감화력에 기초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죄를 범한 신자에게 징계를 내리고(근신, 성찬에의 참여를 금함, 혹은 출교 등의 조치) 신자는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여 그 징계를 받아들이는 것은 교회의 영적 도덕적 감화력이 그만큼 강해야 하는 것이다.(물론 교회의 징계에 반발하는 사람이 있을 때에 그것이 그 개인의 잘못된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오늘날 권징의 문제에 대하여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다 죄인인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죄를 물어서 징계를 내릴 수 있느냐고 하지만, 이것은 사적인 일과 공적인 일을 혼동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교회의 권징은 죄 있는 개인이 죄를 지은 다른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권세를 가진 공적 기구인 교회가 그 자체의 구성원 중에서 잘못을 범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다. 마치 재판관의 활동이 사적인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니라, 국가 권력의 행사라는 공적인 성격을 갖는 것과 같다.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위임 받은 권세를 영적 도덕적 감화력을 통하여 확보한 후에, 그것에 근거하여 신실하게 징계를 시행하는 것은 참된 교회의 중요한 표지 중 하나라고 개혁자들은 믿었던 것이다.


“요컨대, 만약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순결한 말씀을 따라서 수행되며, 그것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이 거부되며,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인정된다면. 이것에 의하여 참된 교회는 분명히 알려질 수 있으며, 어떤 사람도 이런 교회로부터 자신을 분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성례나 권징뿐만 아니라 교회와 관련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수행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지상에 존재하는 어떤 교회가 과연 참된 교회인가의 문제는 결국 그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가르치고 전하는 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오직 성경’은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표어 중의 하나였다.


물론 오늘날 개신교의 상황은 이 고백서의 마지막 문장처럼 그렇게 쉽게 알려지고 구별되는 상황은 아니다. 우선 참 교회니 거짓 교회니 하는 말 자체에 대하여 많은 사람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그런 것을 문제 삼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리주의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개신교도들은 그들의 신앙의 뿌리가 바로 그 분리주의였음을 기억하여야 하며(Protestant라는 말 자체가 그런 함의를 가진다), 그들이 분리주의자라고 비난하는 바로 그 태도가, 그들의 믿음의 선조들이 취하였던 태도였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상황은(특히 한국의 상황은) 종교개혁 시대처럼 교리적 차이점이 명확하게 표명되는 것이 아니라, 교리는 개괄적으로 동의하되 실제에 있어서 달리 행하는 것이 또한 문제이다. 이런 요소들이 모여서 오늘날 참 교회와 거짓 교회의 분별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참 교회가 곧 완전한 교회는 아니다. 지상에서 아무리 완전한 교회라 할지라도 아직 죄의 오염이 남아 있고, 많은 부족이 있다. 그럴지라도 벨직 신앙고백이 말하는 이 표지는 참 교회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임이 분명하다. 이것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지적하였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고백서는 오늘날 교회를 정하지 못하여 고민하는 신자들에게 여전히 매우 유용한 기준을 제공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 점과 관련하여 자신의 성경적, 혹은 신학적 지식의 부족을 마냥 핑계대고 있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 7:17)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즉 “그래도 나는 도대체 구분이 안갑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국 “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에 그렇게 열심이 아닙니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셈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니까 그 친구는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그렇다. 이것은 어려운 문제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자신이 어느 교회에 속하느냐를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런 교회를 찾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바른 교회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성약소식지11호> 에 실린 황영철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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