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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피는어린왕자
누구나 때는 묻는다. 그 때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그 사람의 능력이자 매력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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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클래식Ⅱ] 서평 | 독후감 2019-12-22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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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이지 클래식 2

류인하 저
42미디어콘텐츠 | 2019년 1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음악보다는 음악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 음악이 취미인 사람들, 클래식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들께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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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어릴 때 자주 보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중 "Fantasia"가 있다. 어찌나 이 영화를 좋아했던지, 아마 100번도 넘게 봤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20살 때는 잊었던 그 감동을 다시 느끼기 위해 (유투브로 충분히 볼 수 있는데도) DVD를 구매해서 아직까지 소장하고 있다. 무려 1940년 제작된 영화임을 감안했을 때, Fantasia는 믿을 수 없을만큼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왜 Fantasia에 열광했을까? 그 영화야 말로 클래식에 대한 내 사랑이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Fantasia는 8곡의 클래식 음악에 맞춰 디즈니사에서 만든 스토리와 이미지가 나열되는 독특한 방식의 애니메이션이다. 바흐와 베토벤은 물론 클래식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던 4살 때의 나는 영화와 음악이 전달하는 시청각적 자극에 매료되었다. 무소르그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이나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따로 들었을 때 다소 어렵고 지루할 수 있는 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르테에 맞춰 커지는 악마의 형상이나 단조에서 장조로 바뀔 때 햇살이 비치는 영상 효과 등을 보며 나는 상상력을 발휘해 꿈을 꾸었고, 감정적인 오르내림을 충만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이 때의 경험이 나의 공연 관람 습관에도 영향을 줬다. 나는 클래식 공연을 종종 찾아 가는 편인데, 공연 레파토리에 모르는 곡이 있을 때는 미리 몇 번 들어서 귀에 익게 만든다. 대략적인 음악의 분위기를 알게 된 다음 공연장에서 직접 곡을 들을 때에는 곡과 어울리는 지난 날의 기억을 회상하거나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게 클래식 공연에서 졸지 않고 기분 좋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나의 방법이다. 연주자들의 실력에 대해 평가할 정도의 예민한 귀를 가지지 않은 일반인인 나로서는 그 시간을 나에게 가장 만족스러운 시간으로 보내는 것이 최고인데, 그러기에는 음악의 분위기와 맞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이 최선임을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밝고 활기찬 곡을 듣고 싶은데 어둡고 우울한 곡이 나온다면, 그 곡이 아무리 좋아도 귀에 달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공연 방문 전에 곡을 몇 번 들으며 곡에 대한 나의 기대치와 분위기를 어떤 느낌으로 튜닝할 지 결정한다. 그리고 공연장에서는 튜닝된 분위기에 맞춰 곡을 즐긴다.


 왜 책 서평단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바로 이 책이 Fantasia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클래식이라는 장르의 음악은 현대 음악보다 상대적으로 길고 가사를 알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미지화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것이 아마 클래식이 어렵게 다가오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Fantasia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클래식에도 적절한 이미지와 스토리만 더해진다면,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 유희로 바뀔 수 있는지 지난 80년 간 Fantasia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런 이미지는 어디에서 나온느가? 바로 시대와 작곡가의 맥락이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는 원래 지하철 화장실에서 자주 들릴 법한 음악이라 생각되었지만, 그 뒤에 숨겨진 엘가와 앨리스의 신분을 뛰어 넘는 사랑을 이해하게 된 다음에는 곡이 다르게 들린다. 랩소디 인 블루는 묵직하고 웅장한 차이코프스키류의 곡을 좋아하는 나에게 별다른 매력이 없었지만, 가난한 유대인 이민자 출신으로 당대 유행하던 재즈에 영감을 받아 벅차오르는 영감을 주체하지 못하고 곡을 휘갈겼던 스토리를 떠올리면 동년배 젊은이의 재치가 느껴지는 것 같아 그 피아노 소리가 친구처럼 반갑다.


 음악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소리가 1, 마음이 9라고 생각한다. 맘에 드는 영화의 OST는 나중에 따로 들을 때도 좋은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다양한 작곡가의 생애와 에피소드를 설명한다. 모든 곡에는 그 곡이 쓰인 당시 작곡가의 감정 상태가 반영되어 있다. 그런 것들을 느끼며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면 클래식이 결코 멀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나도 클래식을 잘 안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 글을 읽는 독자분께서 클래식을 알아가고 싶다면 추천드리고 싶다. 그리고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그 책의 작곡자가 쓴 대표 음악을 틀어 놓고 읽었으면 좋겠다. 그러면서 본인이 선호하는 시대와 작곡가를 더욱 잘 알 수 있게 될테니 말이다. 


 끝으로 내가 알고 있는 짤막한 스토리 하나 소개하고 싶다. 엘가가 1차 세계 대전 중 만든 첼로 협주곡은 비극적인 분위기의 단조 곡이다. 당시에는 사랑받지 못했던 이 곡이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재클린 뒤 프리의 연주 이후이다. 뒤 프리는 자신의 혼을 불태워서 곡을 연주하는 것처럼 온 에너지를 엘가 첼로 협주곡에 쏟았는데, 이는 28살에 병에 걸려 은퇴하고 40대에 요절한 그녀의 삶을 생각하면 마치 복선처럼 안타깝기 그지 없다. 바로 그 뒤 프리가 23살에 결혼한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과 협연하여 남긴 첼로 협주곡의 링크가 아래 있다. 엘가의 노년기에 작성된 우울한 첼로 협주곡은 젊음을 불태워 연주한 뒤 요절한 첼리스트의 어두운 이야기와 연극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잘 이어져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PhkZW_jwc0  


 출퇴근 길에 작곡가 한 명씩 가볍게 읽기 좋았고, 생애 첫 책 서평단에 당첨되어 감사하다.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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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 독후감 2019-10-12 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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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저/이시형 역
청아출판사 | 2005년 08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극한의 고통에서 피어나는 인간 존엄과 삶의 의미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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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줄곧 행복한 사람이었다. 천성적으로 이유가 중요했던 나는 내 존재와 내 행위에 대해 끊임없이 이유를 만들었다. 그런 이유들은 내 행동을 의미있게 만들었고, 생성된 의미들은 내 삶을 전진시켰다. 이 책을 읽고 나니 그랬던 내 스스로가 대견하다. 삶에 질문하기 보다는 삶에 답하려했던 나의 태도가 나를 살게 했고, 나를 행복케 했다. 


적당한 책임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에 동의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누르는 무게를 필요로 한다. 지상에서 발을 붙이고 살기 위해서는 중력이 필요하듯 말이다. 식물을 가꾸고, 강아지를 키우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일들은 모두 책임을 지는 일이다. 요즘 아이들은 고생을 모른다는 말이 있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책임질 것이 없을 뿐이다. 학교에서 눈에 보이는 성적이 아닌 자기 삶에 대한 책임감을 좀 더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천국이 싫다. 이상적인 공간도 싫다. 그렇다고 불지옥이 좋은가 하면 그건 당연히 아니다. 나는 이 지상이 좋다. 이 곳에는 가능성이 있다.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꿔가는, 고통을 의미로 견뎌내는, 그 의미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가능성이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꽃은 핀다. 생존 앞에서도 우정이 있고, 죽음 앞에서도 명예가 있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자들이 있다. 그 곳의 고통을 동경하거나 갈망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안에서 지켜졌던 인간성에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내 삶의 방식과 잘 맞고 유익했던 이 책으로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이 단 하나의 의문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이 어려웠다. 너무나도 어려웠다.. 지난 몇 년간 느껴본 적이 없는 답답함 속에서 글을 썼다가 지우곤 했다. 머리 속에 생각이 너무 많다. 내 친구는 왜 죽었을까?


10월이 되고 바람이 선선해지자, 미뤄왔던 결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4년만에 만난 친구의 모습, 그녀는 이제 너무 작아졌다. 그렇게 작아진 줄 모르고 큰 꽃을 가져간 나는 "이를 어쩐담?" 하고 되뇌고, 그녀는 "다 함께 볼 수 있게 저기 가운데에 놓아 줘."라고 답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미안해한다. 나는 미안하다. 네가 삶의 의미를 잃어가는 동안 아무 것도 해준 게 없어서. 그 곳에 우두커니 서서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너는 대답하고 싶은 것들만 대답한다. 왜 죽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묵묵부답이다. 


프랑클 박사. 삶의 의미가 있다면,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면 인간은 고통을 참아낼 수 있다고 했잖아요. 비슷한 맥락의 니체의 말을 나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삶은 질문하는 게 아니라 대답하는 과정임을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적당한 책임은 인간을 짓누르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휘발되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것임을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 친구는 왜 죽었을까요? 

왜 어떤 사람은 의미를 찾고 어떤 사람은 잃어버리나요? 왜 그게 하필이면 내 친구일까요? 그건 개인의 역량이나 책임에 불과합니까? 아니면 주위 사람들의 연대 책임입니까? 사랑을 알고, 사랑을 주고 받는 것에 익숙한 내 친구는 왜 죽었을까요? 꿈이 있고, 그 꿈을 위해 여러 발자국을 내딛었던 그 순간에 왜 죽었을까요? 아름다움을 알던, 배우는 것도 많았던 그녀는 왜 죽었을까요? 그녀의 삶에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면, 대체 누가, 무엇이 그녀를 그 곳으로 이끌었을까요? 

나는 저 멀리 날아가버린 그녀가 그립습니다.




책을 통해 고통 속에서도 한 발씩 나아가는 고귀한 영혼들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찬란한 젊음을 앞에 두고 죽음을 택하는 절망의 깊이를 헤아릴 수는 없었습니다.



죽음의 수용소를 읽고,

아끼던 친구의 묘를 방문한 다음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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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자서전 | 독후감 2019-08-31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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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안중근 의사 자서전

안중근 저
종합출판범우 | 2014년 10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간결하고 묵직하게 울려퍼지는 안중근 의사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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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심은 오늘 날에도 필요할까?

애국심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나에게 공동체는 중요하다. 나를 둘러싼 타인들의 집합이 나의 존재 이유를 만들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받을 때보다 줄 때 더 기쁘다고 나는 믿는다. 더 많이 갖기 위해 산다면 공동체란 필요 없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더 베풀고 기여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누구는 정이라 부르고, 누구는 선행이라 부르고, 누구는 의무라 부르는 그 공동체를 향한 애정과 기여, 그런 것들이 비록 힘들더라도 삶을 살아내게 만든다. 가족이 없고, 친구가 없고, 지인이 없고, 아무도 없다면, 삶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나에게 애국심은 이런 공동체정신의 큰 버전이다. 이런 공동체 정신이 삶을 지탱하므로 애국심은 필요한 감정이다. 요컨대 나라를 위해 애국심을 갖자는 게 아니라, 개인의 행복을 위해 애국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에는 깊고얕음이 있다. 사람마다 더 아끼는 공동체가 있는 법이다. 대개의 경우 나>가족>연인>친구>고관여단체>저관여단체>국가>인류 순서로 아끼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이 공동체 간의 위계는 꽤 중요해서, 순서를 지키지 않을 경우 삶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주위에서도 흔한 예를 찾을 수 있다. 가족보다 회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아빠를 생각해보자. 그는 마땅히 본받을만한 애사심을 품고 있지만,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가족/친구/직장까지 다 내팽겨 버린 채 전세계를 돌며 인류애를 설파한다면, 아마 신이 됐거나 미친놈 소리를 들을 것이다. 때문에 이런 공동체 의식은 단계를 건너뛰고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 가까운 사람을 향한 충분한 애정 없이 애국심이나 시민의식만을 강조하는 것은 자칫 맹목적 신념이 되어 참혹한 결과를 이끌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안중근의 애국심은 본받을만 하다. 그는 위로는 부모를 공경하고, 아래로는 후학을 양성했으며, 주변 사람들 중 의인이 있다면 일본인이건 프랑스인이건 의를 다졌다. 뺨을 때린 사람도 웃으며 품을 수 있는 호방한 위인이었다. 그의 눈으로 내려다 본 세상에는 핍박받는 조선인이 너무 많았다. 그런 조선인을 위해 10년, 100년이 걸리더라도 언젠가는 자주 주권을 회복하는 데 기여하고자 그는 7발의 총성을 울린다. 그런 그를 보며 애국심을 기르는 방법을 다시 정립하게 된다. 섵불리 한일전에 박수를 치며 얼굴이 벌개질 필요 없다. 다만 내 주위 사람들을 더 아껴야 할 뿐이다. 그것이 애국심을 기르기 위한 근본적이고 궁극적인 해결책이다. 나 아닌 타인을 품고, 그렇게 품는 사람들의 범위를 서서히 확장하다보면 어느새 만난 적도 없는 한반도 구석구석의 힘든 영혼들이 눈에 밟히리라. 그것이 바로 애국심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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