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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 작가의 마음 들여다보기 - [눈부신 하루]를 읽고 | 마흔의 서재(수리중) 2023-03-25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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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눈부신 하루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저/안영신 등역
작가와비평 | 2023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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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근대 작가의 마음 들여다보기
<눈부신 하루> 읽고

 



 

의무를 수행한다는 건 이만저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해야만 한다. 왜 사는가. 왜 글을 쓰는가. 지금 나는 "그건 의무를 수행하기 위한 겁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12쪽)


  나 역시 서평을 써야만 한다. 서평단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다. 한 문학 잡지로부터 대여섯 장 분량의 수필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은 작가 D도 원고료보다는 어떠한 의무감을 느끼며 글을 써내려간다. 열흘 동안 쓸 만한 이야기를 고르고 버리기를 반복하다 결국 그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얻은 게 없는 것도 아니다. 짧은 글 한 편에 자신의 생각을 모조리 담으려 기를 쓰고 있는 자기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자기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으며 멈추지 말고 더 분발해서 글을 쓰라는 명령이 모두 '의무'라는 것에 기인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작가 나름의 산고 끝에 「의무 수행」이라는 제목을 달고 태어난 글을 읽고 문득 궁금해졌다. 문학 잡지에 실린 글은 정작 따로 있었던 게 아닐까? 아니면 이 글이 문학 잡지에 실렸다면 편집자의 의도에 부합하는 글이었을까?

  「나의 창작 과정」에서는 글쓰기 좋은 시간, 날씨, 계절 등 자기만의 루틴을 갖고 글을 쓸 때 인물과 사건을 만들기보다 키운다는 자세로 임한다는 작가 A를 만날 수 있다. 한 작품을 탈고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뭐라도 또 써보고 싶어진다는 그지만, 막상 출간된 책을 보면 대체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때마다 글을 쓰는 방식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더 중요함을 뼈저리게 느낀다는 그의 말에 밑줄을 긋고 싶어진다. 또한 작가 N은 다소 늦은 나이에 선보인 첫 소설이 대성공을 거뒀음에도 스스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이러한 무심함은 그가 쓴 「나의 첫 소설」에서 자신의 과거사를 되돌아보는 내내 일관되게 이어진다. 학창시절에 진로를 정하는 것에서부터 대학 졸업 후 직업을 선택하고 다시 유학을 갔다 돌아와서 소설을 쓰기까지가 모두 누군가의 권유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렇게 매듭을 짓는다. "나라는 사람은 어쩌면 주위 사람들이 만들어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23쪽)"


  <눈부신 하루>는 문학을 대하는 작가들의 경험을 시작으로 그들의 소소한 일상과 옛 추억 그리고 인생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관한 수필들을 소개한다. 책에는 앞서 언급한 낯익은 이름 말고도 처음 알게 된 작가들이 많다. 각각의 글에서 닮은 듯 다른 작가의 문체(라고 쓰고 '성격'이라 읽으면 어떨까)와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기억에 남는 몇 가지 이야기를 옮겨본다. 초등학교 시절 작문시간에 "꽃놀이"라른 주제를 놓고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 결국 백지를 낸 작가 M은 "'꽃보다 경단'. 너도 경단 좋아하지? 꽃 보러 가서 경단 먹었다고 쓰면 되잖아.(66쪽)"라는 선생님의 조언을 듣고 '경단이 피었다, 경단이 피었다(67쪽)'라고 다시 써내어 좋은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피식 웃음이 나는데, 그가 발견한 남들은 모르는 색다른 즐거움 하나(가 궁금한 독자는 책에서 직접 확인해보시길 바란다)는 엉뚱하지만 동심이 물씬 묻어나는 행동이라 아빠 미소가 지어진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떠나 어른의 세상을 살다보면 종종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을 마주하기도 한다. 작가 S에게는 '겨울', '가난', '늙음', 그리고 '죽음'이 그러한 존재들이다. 그는 그들을 의인화하여 대화를 나누면서 그동안의 선입견을 버리게 되고 남은 인생에서 그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물음을 독자에게 던진다. 죽음은 생명의 탄생과 함께 시작됨을 모르지 않는다. 히나마쓰리(매년 3월 3일에 여자아이의 행복을 기원하는 전통 행사) 밤에 남자아이를 출산한 작가 Y는 자기만의 방이 아닌 '분만실에서' 의사 몰래 글을 써내려간다. 당시 일본 사회, 특히 문학계와 문학작품에 만연한 남녀차별을 여러 사례를 들어 비판한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균형 있는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더 많은 여성 작가가 탄생하길 기원하는 그에게서 버니지아 울프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나, 약속은 반드시 지키고 싶다. 인간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타인과의 약속은 불가항력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깬 적이 없다. 다만 가끔 깨는 약속이 있다. 그건 원고 집필 약속이다. 이것만은 도저히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다.(248쪽)


  원활한 대인 관계를 위한 작가 K만의 인생 철학이 담긴 「나의 일상 규범」의 한 대목이다. 앞서 소개한 작가 D가 이 글을 봤다면 눈살을 찌푸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작가로서의 삶을 살다간 두 사람이었기에 이내 누구보다 격한 공감을 나눴을 것 같다. 일본 근대 작가들의 수필을 모아 엮은 <눈부신 하루>는 소설만으로는 온전히 알아차리기 어려운 일본 근대 작가들의 심리와 경험을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위트 넘치는 문장과 삶의 통찰이 담긴 글들을 다 읽고 나서 불현듯 이 글들을 쓴 작가들이 백 년 전에 살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자 문학의 가치라고 생각한다. 세월이 흐르면 작가는 세상을 떠나지만 그의 글과 독자는 계속 남게 된다. 남겨진 글과 독자는 결코 외롭거나 두렵지 않다. 언제든 글을 통해 작가와 독자는 연결될 수 있고, 삶의 경험과 사유를 나누며 위로와 영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작가들에게 안부를 전하며 이 한 마디를 남기고 싶다. "작가 D여, 서평단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하였노라! 작가 K여, 서평 작성 약속을 지켰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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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향한 마음을 쓰고 드러내는 일에 대하여 - [당신, 크리스천 맞아?]를 읽고 | ㄴ이어령의 발상지(發想志) 2023-03-0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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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당신, 크리스천 맞아?

이어령 저
열림원 | 2023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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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향한 마음을 쓰고 드러내는 일에 대하여

<당신, 크리스천 맞아?>를 읽고

 


 

 

  "당신, 크리스천 맞아?" 필자의 대답은 '아니올시다'이다. 무신론자도 아니다. 그럼에도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로서 종교와 신앙의 역할을 인정하고 또 공감한다. 이번에 <당신, 크리스천 맞아?>를 집어든 것도 그 때문이다. 무엇보다 살아생전 뭇사람들로부터 책의 제목과 똑같은 질문을 받았고 스스로에게도 쉼 없이 되물었던 고(故) 이어령 선생이 쓴 책이기에, 서평단 모집 때 자연스럽게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책을 거듭 읽고도 막상 서평을 쓰려니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고민 끝에 이어령의 글을 좋아하는 독자답게 써보기로 마음 먹었다. 다시 말해 저자의 이야기를 굳이 종교적으로만 들을 게 아니라, 평소 그가 즐겨했던 '인문학적 시선'으로도 바라보자는 것이다.

  저자는 국대(國代) 지성(知性)이자 70년 동안 무신론자로 살면서 성경, 기독교계와 교회의 부패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한 사람이었다. 그가 쓴 시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에서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라는 마지막 구절도 "글 쓰는 사람으로서 아름다운 글로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고 싶었지, 믿음과 신앙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려(76쪽)" 쓴 것이 아니라고 밝힌 바 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2007년 여름에 세례를 받았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그는 여러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사람들의 환호와 불신이 뒤섞인 그 물음 앞에 서게 된다. "당신, 크리스천 맞아?"

 

 

사실은 자다가도 몇백 번씩 얘기를 하거든요. '아니다'라고요. 사도 바울도 그랬습니다.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난다'라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훌륭히 전한, 그렇게 위대한 바울도 그랬는데 제가 세례 한번 받았다고 금세 착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죠.(17쪽)

 

  성경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지라 사도 바울이 어떤 인물인지 모른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탄압하는 일을 했다는 그도 결국엔 하나님을 믿게 된 것과 같이 자신도 다양한 만남의 방식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실명할 위기에 처한 딸 이민아 목사가 낫길 바라는 기도를 올리며 그가 세례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교토에서 홀로 생활하며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를 쓸 무럽부터 종교에 귀의할 준비를 했으며, 딸이 처한 상황이 '트리거'가 됐다고 말한다. 당시 그는 남은 생을 자기만의 방식, 즉 글로서 신앙심을 쏟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교토에서 찾고, 하와이에서 만나고, 한국에서 행했던 종교적 체험과 깨달음을 담아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썼던 것이다. 책에서 그는 말한다. 지성과 영성은 양립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의 궁극에 영성이 있다고. 아직 자신은 지성과 영성의 '문지방' 위에 서 있다고.

  <당신, 크리스천 맞아?>는 '문지방 위의 대화', 곧 그가 수년에 걸쳐 여러 매체와 진행한 인터뷰, 강연 등에서 (어느 드라마의 명대사처럼) 크리스천임에도 당당히 그렇다고 '왜 말을 못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한 언론사의 '절대자에 대한 실존적 차원의 무릎 꿇기', 즉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넘어간 것 아니냐는 해석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떻게 믿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성경을 읽느냐가 중요(111쪽)"하다는 저자의 말이 적어도 필자에게는 한 줄기 빛처럼 와닿았다. 성경을 역사적 사실로 읽는 사람들이나 교조주의자, 또는 원리주의자의 눈에는 이단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는 인문학적 관점에서 종교를 얘기할 수 있고 스스로도 신앙인으로서 찾고 또 답해야 할 의무가 있으므로 성경을 '알레고리'라는 수사법으로 읽는다고 덧붙인다.

 

 

저는 그분들과 충돌하거나 서로 의견이 다른 게 아닙니다. 그분들은 '신학(神學)'을 하시고, 저는 거기서 니은(ㄴ)을 뺀 '시학(詩學)'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텍스트 읽기를 하고, 그분들은 실천하고 봉사하는, 분류하고 적용하고 요리해내는 역할이시지요.(243쪽)

 

  여러 사례 가운데 한 가지만 살펴보자면, 저자가 오래 전부터 성경을 읽어오면서 가장 거부반응을 가졌던 것이 '노아의 방주'라고 한다. 물이 들어오면 뜨는 배를 왜 산꼭대기에서 만들라고 했으며, 그 배에 짐승 암수 두 마리씩을 넣었다는데 암수 없는 단성 생물들은 또 어떻게 되며,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이 한 공간에 사는 게 가능한 일인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지성을 낳은 의문이 영성을 낳는 믿음'으로 거듭나자 '메타언어(대상을 직접 서술하는 언어 자체를 다시 언급하는 한 차원 높은 언어)'를 통해 제1창조는 첫째 날부터 일곱째 날까지 '시간'을 만들었고, 제2창조는 노아의 방주가 '공간'을 만듦으로써 혼란한 우주에 질서를 부여했다고 재해석한 것이다.

  비록 문학 비평가 시점으로 성경을 읽었기에 종교적 해석과는 다른 점이 많을 수밖에 없겠으나, 절대자의 말씀을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로 다 옮기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을 낱말의 부분으로 읽기보다는 전체적 행위의 언어로 읽을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지적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텍스트 외에도 옛날 신혼방에서 얼어죽을 뻔 한 금붕어를 살려낸 일화와, 천적마저 떠난 영하 50도의 남극에서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는 황제펭귄에게서 생명의 소중함과 부활의 의미를 재발견해내기도 한다. 책의 말미에서 이러한 가치를 설파하고 실천하는 우리나라의 기독교인과 그들이 모인 교회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과 희망의 메시지를 함께 전하는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이제는 그 문지방을 넘어 영성의 세계에 있을 저자에게 감사한다. 성경이라는 텍스트를 읽는 새로운 방법을 일깨워줘서, 나아가 신 혹은 종교를 넘어 무언가를 향한 마음을 쓰고 드러내는 태도에 대해 또 다른 영감을 선물해줘서.

 

 

저는 문지방에 서 있는 긴장으로 7년간 계속 왔습니다. 남들은 저를 욕할지 몰라도, 처음 세례를 받았던 그날을 잊지 않는······. 그리고 제가 크리스천과 논크리스천의 경계선에서 아직도 헤매고 있음을 숨기지 않고 모든 분에게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정직한 모습이며, 저와 같은 이들에게 용기를 주고 그들이 언제가 문지방을 넘어가는 힘이 되어주는 게 제 역할이 아닌가 합니다.(234~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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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자가 마지막으로 건넨 말 | 타자의 말들 2023-02-26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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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없는 자가 마지막으로 건넨 말

 

 

얼마 전 이어령 선생의 임종에 관해 그의 아들이 한 인터뷰가 떠오른다. 그 인터뷰에 따르면 이어령 선생은 죽기 한 시간 전 외국에 있는 손주들과 화상으로 인사를 나눴다. 물론 활기찬 굿바이는 아니었지만 온전한 시각으로 그들을 보고 그들의 인사에 손을 들어 흔들었다. 행복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리고 죽기 직전 어딘가를 응시했다. 임종을 지킨 아들의 말에 따르면 30분 정도 계속된 그 응시는 죽음을 관찰하는 행위 같았다고 한다. 어둡고 두렵고 우울한 표정이 아니라 아주 재미있는 걸 지켜보는 듯한 표정이었다는 것이다.

(313쪽, 『그렇게 죽지 않는다』 중에서)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누가 “괜찮니”라고 말을 걸어도
금세 울음이 터질 거 같은
노엽고 외로운 때가 있을 겁니다.

내 신발 옆에 벗어 놓았던 작은 신발들
내 편지 봉투에 적은 수신인들의 이름
내 귀에다 대고 속삭이던 말소리들은
지금 모두
어디 있는가.
아니 정말 그런 것들이 있기라도 했었는가.

그런 때에는 연필 한 자루 잘 깎아
글을 씁니다.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 손톱에 대하여
문득 발견한 묵은 흉터에 대하여
떨어진 단추에 대하여
빗방울에 대하여

정말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어디가나 벽이고 무인도이고
혼자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겁니다.

 

이어령, 「정말 그럴 때가 」 전문

 

 

 

그렇게 죽지 않는다

홍영아 저
어떤책 | 2022년 10월

누구나 시 하나쯤 가슴에 품고 산다

김선경 편
메이븐 | 2019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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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속에 저 바람 속에 'ㅇㅇ' 있다 -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읽고 | ㄴ이어령의 발상지(發想志) 2023-02-26 0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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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이어령 저
문학사상 | 2008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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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속에 저 바람 속에 'ㅇㅇ' 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읽고

 

 

우리의 피부빛과 똑같은 그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 우리의 마음이 있다.

(17쪽, 「여는 말」 중에서)

 

  두 해 전 예스블로그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닉네임을 '흙속에저바람속에'라고 정한 이유를 말한 적이 있다. 고(故) 이어령 선생의 저작 중 가장 아끼는 책이 바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이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정작 지금까지 책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음을 불현듯 깨달았다. 때마침 2월 26일이 선생의 1주기가 되는 날이기에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다시 책을 집어든다. 정치사회적으로 혼란했던 1960년대 초에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주제로 경향신문에 연재한 글들을 엮어 만든 책에는 청년 이어령의 자유로운 사유와 예리한 시선이 가득 담겨 있다. 6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의 시각에서 보자면 그가 설파한 이야기들 가운데 시대에 맞지 않아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부분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렇지만 방대한 한국사를 토대로 '한국인의,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을 위한' 한국 문화론을 일구어낸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자신과 같이 누런 얼굴색을 하고 같은 말을 쓰며 같은 의식주 문화를 공유해온 이웃들을 지켜보면서 그가 글로 그려낸 한국의 자화상은 그다지 아름답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경 속 글쓴이의 모국에 대한 짙은 애정과 관심이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을 찬찬히 음미하도록 이끈다. 우리가 가진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추함도 감추지 말고 드러내 마주할 때 비로소 한 단계 더 성숙한 문화를 만들 수 있다는 선생의 쓴소리도 책 곳곳에서 들린다. 한국 문화를 하나로 콕 찝 말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우리 문화의 정수(精髓)를 찾아내기 위해 의상(한복, 모자), 식습관(밥상, 음료), 건축(돌담, 신라 오릉), 생활도구(지게, 바가지, 장죽, 가래), 예술(노래, 설화) 등 여러 영역에서 다양한 소재를 끌어다 놓고 서로 다른 것들과 견주고 비틀고 뒤집기를 거듭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렇게 한국인의 손으로 빚은 마음들이 『우리 문화 박물지(리뷰 바로보기)』에 잘 드러나 있으니 함께 읽어도 좋을 듯하다.

 

배고픈 울음, 윷놀이 같은 정쟁의 울음 그리고 내 조국을 내 조국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울음······. 이 땅의 어느 흙 속에도 어느 바람 속에도 그 울음이 젖어 있지 않은 것이란 없다.(38쪽)

 

  본 서평에서는 『우리 문화 박물지』에서 다루지 않은 것들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흔히들 한국인의 정서하면 '한(恨)'과 '정(情)'으로 한정(限定)짓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먼저 '한'에는 원망과 억울함 그리고 안타까움과 슬픔이 배어 있다. "잘 울어야 효자였고 잘 울어야 충신이며 열녀였던(21쪽)" 우리나라는 울음과 눈물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그 슬픔과 울음은 대부분이 가난과 굶주림에서 비롯되었음을 짚어낸다. 배고픈 설움보다 더 큰 것은 없다며 목청높여 울어대던 아이들이 종종 부르는 옛노래들에도 온통 먹는 얘기뿐이다. 그렇게 서민은 배고파서 울고, 유복한 인간이나 지식인은 삼족을 멸하는 당쟁의 검은 선풍 속에서 울었던 것이다.(32쪽) 특히 그동안 남녀노소 누구나 웃고 떠들며 즐기는 놀이로만 알았던 윷놀이에서 '비극성'을 재발견한 저자의 해석이 퍽 흥미롭다. 엎치락뒤치락 하며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윷가락과 말판에서 쫓고 쫓기는 말들이 우리 민족의 비극을 암시하는 것 같다고, 어쩌면 윷의 말판은 피비린내 나는 사화 당쟁의 압축도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의 그 '사랑'이란 말은 본래 고어(古語)로는 '생각한다'는 뜻이었다. 생각하는 것이 곧 사랑이요, 사랑하는 것이 곧 생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격렬하고 노골적인, 행동적인 사랑보다는 언제나 마음 속에서 샘솟는 사모의 이 한국인의 기질에는 더 어울렸던 모양이다.(164쪽)

 

  다음으로 '사랑'을 생각해본다. 저자는 서양인들의 그것을 활활 타오르는 난로불에, 한국(동양)인의 그것은 불이 다 타고 난 후에야 시작되는 화롯불의 불덩어리 혹은 온돌의 온기에 가깝다고 비유한다. 국경 없는 세계화 시대에 사는 현대인에게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겠지만,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베르테르, 오페라 『카르멘』의 카르멘이 사랑을 대하는 태도와 고려가요 「가시리」, 민요 「아리랑」의 화자들이 사랑에 임하는 자세를 비교해본다면 일리 있는 얘기다. "쉬이 덥지도 않고 쉬이 식지도 않는 사랑의 풍속은 엄격한 의미에서 애(愛)라기보다 정(情)이다.(164쪽)"라는 저자의 말과 위에 인용한 옛말(고어)로 유추해보건대, 한국인은 '겉사랑'보다 '속사랑'을 추구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를 거칠게 해석한 독자에게는 옛사람들이 너무 소극적인, 속된 말로 '멋대가리' 없는 사랑만 한 것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이제 '스타일'과 '멋'에 관한 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차례다.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옷을 '스타일리시하다'고 말하는 것은 '멋지다'는 뜻과 다르지 않기에 '스타일'과 '멋'은 비슷한 의미로 여겨진다. 그러나 저자는 이 둘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정반대의 성격을 드러낸다고 설명한다. "'스타일'이 '산만하고 무질서한 것에 어떤 법칙을 부여하는 것(268쪽)"인 반면, "'멋'은 무엇인가 격식에서 벗어나고 틀에 박힌 질서를 깨뜨리는 데에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모자를 삐딱하게 쓰거나 단추를 다 잠그지 않고 한 두개 풀어놓은 상태를 상상해보자. 아울러 지나치게 짜임새가 있어 빈틈이 없는 것을 보고 '멋대가리가 없다'고 말하는 걸 볼 때 '스타일'을 벗어난 파격성에서 '멋'이 우러남을 알 수 있다. 충청도 민요 「천안 삼거리」는 또 어떠한가. "천안 삼거리 흥! 능수나 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척 늘어졌구나 흥!" 여기서 '멋'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를, 통제가 아니라 해방을, 타율이 아니라 자율을 나타내는 말로 한국인은 '멋'을 존중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당시 사회분위기에 억눌려 제대로 아니, '제멋대로' 발현시키지 못했던 그들이 오늘날의 K-문화를 본다면 조금이라도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우리는 '멋' 속에서 미를 찾으려고 하고 '멋' 속에서 인생을 살려고 했다. 그것을 보면 우리는 개성과 자유 의식을 존중하는 민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자유 의식을 갖고 싶어 하면서도 부자연스러운 사회 예의나 유교적인 고식성* 밑에서 그것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해석해야 될 것이다.(270-271쪽)

*고식성(姑息性): 뚜렷한 해결 대책 없이 임시적인 변통으로 그때그때의 안정만을 바라는 성질

 

  끝으로 책을 만난지 이십년이 지나도록 책의 제목이 왜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인지 궁금해하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막연하게나마 우리나라의 인문(人文)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흙'과 '바람'이 제격이라고 어림짐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2021년에 출간된 이어령 선생과 김민희 기자의 인터뷰집 『이어령, 80년 생각』에서 마침내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뭐가 있는진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거야. 뒤에 무슨 말을 넣든 그건 각자의 자유예요.(107쪽, 『이어령, 80년 생각』)"라는 선생의 말을 곱씹어본다. 한국인과 한국문화는 그 혼자만 써낼 수 있는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대 혹은 현대를 사는 사람들이 함께 그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과 반론을 제기함으로써 작게는 보다 적극적인 독서를, 크게는 집단지성으로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쓴 책이라고 믿는다. 전세계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K-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은 요즘, <흙 속에 저 바람 속에>를 읽으면서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톺아보고 앞으로 만들어나갈 우리 문화에 대하여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일도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리 교과서 같이 딱딱한 '풍토(風土)'라는 말을 세 살 때 배운 우리말로 풀어봤어. '풍'을 '바람'으로, '토'를 흙''으로 바꿨지. 그랬더니 새 말이 됐어. 진짜 우리가 살아온 한국의 흙냄새, 바람결이 몸에 와 닿는 것 같은 말이 된 거야. 그리고 '바람 속에 흙 속에'로 하지 않고 '풍토'의 순서를 바꿔 '흙 속에 바람 속에'로 해봤지. 어때요? 말의 느낌이 한겨 살아나지? 한국의 풍토론이 시적 감각어로 변신한 거예요. '풍토'라는 판박이 말의 굳은살에서 새살이 돋아나게 된 거야.

(102쪽, 『이어령, 80년 생각』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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