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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5-7(KBS 역사스페셜/효형출판) | ↘『독서후기』 2006-05-20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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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5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

- 허균은 동인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허엽의 아들이다. 당대 세력가의 아들이었고 그의 누이인 허난설헌과 다른 형제들이 모두 뛰어난 문장가였고 재능이 많았기에 출세할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허균은 얼마 되지 않는 벼슬 기간 동안 무려 6번이나 파직되고 복직되기를 반복하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처럼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 기생과 놀아나는 경박한 인물이다?
- 허균이 여러 벼슬자리를 거치면서 파직의 이유가 된 가장 많은 사유는 바로 기생들과 많이 어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 황진이나 계월 등과 같이(KBS 불멸의 이순신에도 문장과 시에 뛰어난 기생이 나온다.)문장과 시에 뛰어난 기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허균은 기생들과 같이 지내며 글을 주고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 것이 조정에서는 일에 태만하고 기생들과 어울리기만 한다고 전해졌기 때문에 파직의 사유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허균은 기생들과 놀기만 하는 경박한 한량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② : 천한 불교와 천주교를 신봉하는 이단이다?
- 당시 유교를 국교로 삼던 조선은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와 다른 나라에서 들어오던 천주교를 이단교로 정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승려들과 절은 모두 외진 곳에 있어야 했고 심지어 승려들은 한성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천주교도 조상을 섬기는 방식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조선 말기까지도 박해를 받아야했다. 그런데 허균은 이 모든 유교 법도를 무시하고 불교 인사들과 천주교를 가까이 하게 된다. 불교를 대표하는 사명당이나 다른 고승들과 가까이 어울렸으며 청나라에 사신 수행으로 갈 때마다 많은 돈을 들여 책을 엄청 많이 샀는데 이 책들이 모두 천주교에 관한 책들이었다. 이 사실을 조선 사대부들이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사명당 같은 승려들이 임진왜란을 끝내는데 많은 공을 세웠지만 말이다.
③ : 서자들의 후견인이다?
- 조선 사회에서 서자들은 천민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영의정의 서자라도 결코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다. 조선이 서자들을 이렇듯 학대하기 시작한 계기는 태종이 정도전을 죽이면서 부터이다. 서로의 신념이 다르던 이 두 사람 중 태종은 정도전을 죽이게 되었고 정도전이 서자라는 이유로 그 때부터 서자들을 소외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성군이라고 일컫는 성종도 서자들의 탈출구를 모두 막아버렸고 임진왜란 때 잠깐 서자들이 벼슬을 하기도 하였으나 그것도 전쟁 중 만이었다. 하지만 서자들 중 정말 뛰어난 사람도 있다고 생각한 허균은 여러 서자들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이 사실 때문에 칠서사건 때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칠서사건의 주동자들인 서자들이 허균을 입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균이 서자들을 가까이 한 것 역시 그에게는 독약이 되었다.
④ : 이씨 왕조를 뒤엎으려 했다?
- 허균은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당대 세력가이던 이이첨에게 벼슬자리를 부탁하게 된다. 광해군이 세자이던 시절 이이첨과 허균은 광해군과 아주 친했기 때문에 이 세 사람은 서로 잘 될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이첨은 친구 허균을 사지에 몰아넣을 만큼 잔인한 사람이었다. 이이첨은 허균이 이씨 왕조를 뒤엎어버리고 서자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는 이유로 역모 죄를 씌운다. 허균은 결국 이 역모 죄로 인하여 능지처참당하고 그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만다. 오죽하면 동인의 우두머리인 허엽의 비가 두 동강으로 부러졌겠는가? 사실 허균이 서자들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지만 정말 역모를 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천재시인 최치원은 조기 유학생이었다.』
- 고려 초기을 다룬 역사책이나 드라마들을 보면 최 씨를 가진 사람들 중에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유명한 최 씨들은 대부분 신라시대 때부터 내려온 사람들로 신라 말기에도 최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특히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쓴 격문으로 아주 유명했고 신라로 돌아와 왕에게 간언을 하다가 쫓겨난 최치원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① : 최치원은 조기 유학생이었다.
- 요즘에는 초등학생들도 영어를 배우기 위해 많이 유학을 떠나고 있고 중․고등학생들도 캐나다, 뉴질랜드 등으로 유학을 가고 있다. 그래?조기 유학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이 많은데 신라시대에도 조기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고 한다. 명문가들의 아들들은 대부분 바닷길 수 천리를 가야하고 다시 육로로 수 천리를 가야하는 당나라 수도로 유학을 많이 떠났다고 한다. 최치원의 경우 12살 무렵에 그 먼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다른 명문가 자식들도 이 나이 쯤 떠났다고 하니 조기 유학 열풍은 오늘날의 이야기만은 아닌 듯하다.
② : 최치원의 유학생활
- 신라는 매소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조선 같이 제후국이 아닌 자유국가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면 영광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나라로 유학 간 명문가 자식들은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되었다. 최치원의 경우 아버지가 10년 안에 당나라에서 장원급제를 해야 돌아올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10년의 시간이나 준 것을 보아 경쟁률이 굉장히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치원은 10년은 커녕 8년도 되지 않아 장원급제를 하게 된다. 그리고 최치원의 글은 점점 당나라에서도 유명해 지기 시작한다.
③ : 중국을 감동시킨 격황소문
- 최치원 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격황소문이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황소의 난이 일어나서 곳곳이 전화로 얼룩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토벌대 장군 휘하로 전쟁터에 간 최치원은 한 격문을 지어서 황소에게 보내게 된다. 그런데 이 격문을 읽은 황소가 기절을 했을 뿐더러 크게 놀랐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최치원이 글을 잘 써도 반란의 영수가 기절까지 했을까? 당시 당나라에서는 글을 고사성어처럼 함축된 의미로 지었기 때문에 좋은 글을 짓기가 어려웠었다고 한다. 그런 실정에서 아주 일품의 격문을 지었으니 황소가 기절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④ : 최치원은 신라 개혁을 꿈꿨다.
- 황소의 난 이 후 최치원은 당나라 내에서 아주 유명해졌고 벼슬도 계속 높아졌기 때문에 당나라에서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최치원은 갑자기 신라로 귀환을 하게 된다. 굳이 고향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당시 신라는 말기에 접어들었고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에 최치원은 자신의 국가를 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치원은 귀국한 뒤 환영을 받고 곧바로 개혁안을 짜서 왕에게 받혔지만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더욱이 귀국하면서 받았던 벼슬까지 빼앗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역사스페셜 6

1. 일본의 신라 침공, 발해가 막다.
▷▶ 요즘 들어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부르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엄연히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진짜로 한반도 북쪽의 요동, 만주는 물론 저 멀리 지금의 러시아 영토까지 넓은 땅을 지배했던 발해는 통일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신라 입장에서는 멸망시켰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위쪽에 버티고 있으니 언짢고 발해 입장에서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가 밑에 있으니 언짢을 것이라고 대부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나라의 국경에서는 많은 충돌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사실 발해와 신라는 그렇게 나쁜 관계는 아니었으며 충돌도 별로 없었고 발해와 신라를 잇는 큰 길도 이미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단서가 나타났다. 바로 신라를 침입하려 한 일본을 발해가 막아준 것이다.
 우리들은 일본의 도읍이 나라였을 때, 보통 나라시대라고 한다. 이때의 인물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토 히로부미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천황의 바로 다음 위치였으며 큰 권력을 휘둘렀으며 더욱이 자신들의 문화가 삼국에서 온 것을 간과해 버리고 한반도를 침략하려 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다이묘들을 다른 나라에 집중 시키려고 신라 정벌 계획을 세운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결정적으로 발해에 협공을 요청한다. 당시 발해와 일본은 아주 가까운 사이여서 협공이 이루어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발해는 그 협공 제안을 거절한다. 결국 힘을 잃어버린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다른 경쟁자들에게 패해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신라 정벌 계획도 취소되었다.
 사실 일본이 신라 정벌 계획을 계속 진행했더라도 곧 패했을 것이다. 일본의 군사들은 한반도에서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이 계획을 알아차린 신라가 마지노선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에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2. 신라는 당군을 어떻게 이겼나? - 매소성 전투의 비밀
▷▶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을 한 신라는 또 하나의 큰 산을 만나게 된다. 연합을 하였던 당나라가 신라까지 멸망시키고 삼국을 정벌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더욱이 당시 당나라의 군사력은 세계 최강이었다. 여기서 잠깐! 왜 당나라 군사력이 최강일까? 바로 당나라의 주력 군사는 기병이었기 때문이다. 기병은 말 위에서 싸우고 말은 시속 60km로 달리기 때문에 혼자서 많은 보병들을 헤치울 수 있는 이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대 수만 명이 매소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신라는 이 군대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신라는 당나라 군사들을 모두 무찔렀고 한반도에서 당나라 군사를 모두 몰아내었다. 일당백의 기병 수만 명을 적은 군사로 무찌른 그 비결은 무엇인가? 바로 장창병과 노를 갖고 있는 궁수들이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기병 군대를 프로방스의 장창부대가 무찔러 버린 사건이 있었다. 길이가 3m 쯤 되는 긴 창을 앞으로 세우고 있으면 기병들은 뚫고 들어올 수 없었고 달려들자니 죽을 테고 달려들지 않자니 뒤에서 화살들이 쏟아지고 이렇게 전멸당한 것이다. 더욱이 신라의 장창병 뒤에 있던 궁수들은 노라는 물건을 사용했다. 이 노는 신라의 비밀 병기로 중국의 무기를 개량한 것이었다. 정확하고 빠른 노에 당할 기병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신라는 장창병, 노를 갖은 궁수로 단판승을 내어버린 것이다.

역사스페셜 7

1. 순장, 과연 생매장이었나?
―▶무엇이 순장 묘인가?
  큰 힘을 가진 권력자가 죽으면 그 길을 같이 가줄 부인이나 노예, 포로들을 산채로 묻는 다고 알고 있는 순장. 고대에 관습이었던 순장 묘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 벌판에는 수십 기의 대형 고분들이 있고 그 안에서 많은 유골들이 발견되었다. 더욱이 이곳에서 순장 묘에는 부곽과 주곽이 있어서 신분에 따라 묻힌 곳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발견된 순장 묘들 중에 가장 큰 것으로 꼽히는 가야의 44호분의 경우에는 최고 지배자 급의 고분이라고 한다. 이 고분에는 무려 36명 이상이 순장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그 당시 장례의식이 정말 거대했을 것이다.
―▶순장자들, 어떻게 죽었나?
  우리는 지금까지 묘에 묻히는 순장자들이 모두 산채로 묻혔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순장을 끔찍해 하는 것이다. 현대의 생매장이나 다름없는 것을 수십 명에게 적용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순장자들의 유골들을 조사하자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몇 명의 순장자들의 두개골을 자세히 관찰하자 크게 골절되어 손상된 부분이 있었다. 이 부분을 정밀감식 해보자 둔기에 맞아서 크게 두개골이 파손될 정도로 치명상을 입은 것이었다. 더욱이 어떤 순장자들은 꿇어앉은 채 있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순장자들은 분명히 묻히기 전에 살해당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순장됐나?
  순장자들의 종류는 노예나 전쟁포로 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다르다고 한다. 물론 노예나 전쟁포로들이 묻히기는 했지만 순장자를 모시던 하인들이나 시녀들도 같이 묻힌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첩들도 묻히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모아 죽은 사람의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같이 순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순장이 폐지된 뒤
  끔찍한 고대 관습인 순장은 신라 지증왕 때 처음으로 금지되게 된다. 왜 지증왕은 고대 관습인 순장을 금지 시켰을까? 당시 지증왕은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마립간 같은 칭호를 버리고 왕의 칭호를 쓴 임금이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신라를 개혁하였고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일들을 하려면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런데 고대에는 지금처럼 인구가 많지 않아서 여러 부족한 점들이 많았다. 이렇게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수십 명을 같이 죽인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결국 지증왕은 순장을 폐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2. 0.3밀리미터(mm)의 예술, 감은사 사리함
―▶ 감은사 동탑 사리함, 1천 3백 년의 잠에서 깨어나다.
   유명한 사찰들을 보면 대부분 사리탑 안에 사리함이 있기 마련이다. 불국사에서도 발견이 되었고 그 유명했던 황룡사의 사리함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가장 거대했던 황룡사의 사리함은 별로 특이한 문양이 없었으며 불국사의 사리함도 화려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감은사 동탑을 해체하던 중 대단한 사리함을 발견하게 된다. 진흙이 잔뜩 묻은 감은사 동탑의 사리함은 정말 대단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겉 외함의 사천왕상 또한 멋졌지만 그 안 내함의 장식세공은 뛰어난 신라의 기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0.3밀리미터의 예술
   요즘에 진짜 모기의 침에 엄청 작은 인형을 제작하여 올려놓기도 하고 몇 센티미터도 안 되는 모형 배의 0.5mm도 안 되는 돛대 끝 위에 체스판을 만들기도 하는 마이크로 미술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 감은사 동탑 사리함 내함의 장식들은 정말 대단히 작고 섬세한 물건들이다. 쌀알 크기 만한 풍탁이 있을뿐더러 사리병은 성냥 길이만 하고 그 뚜껑은 100원 동전의 반 크기였다. 더욱이 이 장식들을 1백 배율로 촬영하면 여러 개 금 알갱이들이 보인다. 이 금 알갱이들은 손수 제작하여 붙힌 것이었는데 이 알갱이의 크기는 0.3mm밖에 되지 않았다. 현대 기술로도 똑같이 재현하려면 시행착오가 많이 생기는데 그 옛날 어떻게 이런 섬세한 것들을 만들 수 있었는지 감탄스럽기만 하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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