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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후기』
황제의 유산(한스 크리스티안 후프/북스토리) | ↘『독서후기』 2006-05-20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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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황제의 유산

한스 크리스티앙 후프 저/오영훈 역
북스토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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Ł ø ş ŧ 역사 속에서 사라진 승자와 패자

┌-Ð 프란시스 드레이크 경 - 여왕의 해적
(1) 스페인의 비밀
  콜럼버스가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한 이래 채 반 세기 밖에 지나지 않는 동안 많은 변화가 생겼다. 풍부한 지하자원과 노동인력 등을 고루 갖추어 가히 부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아메리카를 스페인 혼자서 독점하게 된 것이었다. 루터교나 개신교들을 경멸하는 정통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은 로마의 교황으로부터 아메리카를 독점할 수 있다는 칙령을 받아낸다. 개신교 국가였던 영국 역시 이 칙령 때문에 스페인의 엄청난 부의 근원지인 아메리카를 그냥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돈이 바로 앞에 있는데 가만히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영국인이었던 홉킨스는 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을 팔아넘기는 노예장사를 시작한다. 이 장사는 수입이 아주 짭짤했는데 스페인의 전함들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아주 조심하면서 다녀야 했다. 바로 이 홉킨스와 인척간이었던 드레이크는 그 아래에서 선장의 지휘에 까지 올랐다. 그런데 수월히 스페인의 눈을 피해 다니던 이들에게 대단히 안 좋은 사건이 일어난다. 멕시코 만에서 큰 폭풍우를 만난 이들은 모든 배들과 인력들을 잃지 않으려면 가까운 항구로 피해야만 했다. 그러나 모두 스페인의 항구들 뿐. 다행히 영국과 스페인은 아직까지 적대 국가는 아니었고 형식상 동맹 국가였다. 물론 일이 꼬이면 잘 못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이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결국 일은 꼬이고 만다. 스페인 전함의 사령관이 영국 배들을 상대로 선제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이 치열한 포격전에 스페인과 영국 배들 모두 피해를 많이 입어서 수 척이 침몰했다. 결국 일부 영국인들은 붙잡혀서 끔찍한 일을 당하였는데 드레이크는 도중에 상황을 알아차리고 도망을 간다. 이 일로 홉킨스와는 사이가 벌어졌는데 드레이크는 자신의 배, ‘황금 사슴호’를 가지고 파란만장한 해적 일생을 시작하게 된다.

(2) 수수께끼 해적 근거지
  이제 확실히 적이 된 스페인이 장악하다 못해 눌러 앉아버린 카리브 해 일대에서 해적질을 하려면 확실한 근거지가 필요했다. 드레이크는 결국 아주 이상적인 근거지를 발견해낸다. 가까운 스페인 근거지에서 수 백 km떨어져 있는 곳에 항구로 적합한 곳이 있었는데 그 항구에서 아주 조금만 밀림 속으로 들어가면 과일도 있고 물도 있으며 살기 적합한 곳이 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근대까지도 게릴라들의 은신처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근거지를 마련한 드레이크는 본격적인 해적질을 시작한다. 드레이크의 본선은 ‘황금 사슴호’였는데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길이는 30m, 폭은 6m밖에 안되는 아주 작은 배였다. 그러나 이 배는 해적의 생명인 속도를 한껏 살릴 수 있도록 설계되어있었고 최첨단 대포들도 잔뜩 실어져 있었기에 가히 최고의 전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드레이크는 호위선이 없는 운송선을 공격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보통 해적들이 넘치는 카리브 해였기 때문에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한 스페인 근거지를 습격한 일을 계기로 드레이크는 유명한 해적이 된다.

(3) 불의의 습격
  드레이크는 부하들과 아주 대담한 공격 작전을 편다. 근처의 한 스페인 거점을 털기로 한 것이다. 그 곳은 성수기에는 활기에 넘치고 붐비는 곳이고 비수기에는 아메리카 각지에서 모여든 물품들을 모아두는 곳이었다. 드레이크는 그 곳을 지키는 스페인 함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작은 보트를 타고 잠입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들키게 된다. 이쯤 되면 능력 있는 대장도 후퇴를 명령하기 마련인데 드레이크는 무모하게도 창고로 돌진을 명령한다. 창고까지 돌진한 드레이크와 그의 부하들. 그러나 드레이크는 스페인 군과의 총격전에서 다리를 관통당하고 만다. 드레이크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부하들이었기에 부하들은 드레이크를 호휘하며 후퇴한다. 사실 이 창고에는 마침 별다른 것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잠입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별 얻을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스페인 군을 뚫고 중심부까지 용감히 돌격한 이 해적 대장에 주목하게 된다.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이유를 드레이크는 곧 알아챈다. 바로 그는 스페인 군 안의 사정에 어두웠던 것이다. 그는 스페인 군 안에 스파이를 심어놓아야 했다. 그의 눈에 걸려든 것이 인디언들. 스페인 군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인디언들은 선뜻 드레이크에게 많은 정보를 갖다 주기 시작하고 음식 같은 것도 지원해준다.

(4) 여왕의 해적
  그 때까지만 해도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스페인의 필립 2세와 더 이상 상황이 악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드레이크를 공식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 좋고 말재주 뛰어나며 모든 면모가 훌륭했던 드레이크를 만나보고는 곧 후원을 시작한다. 이 사실에 매우 분노한 필립 2세는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당시 최고의 함대인 무적함대를 출격시킨다. 사실 필립 2세는 드레이크에게 많은 피해를 당하고 있었기에 그 분노는 더 컸다. 드레이크가 운송 중인 보물들을 육지에서 약탈하기도 하고 스페인으로 가는 운송선을 나포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의 직위를 받은 드레이크 경의 지휘아래에 있던 영국 함대의 작전에 말려든 무적함대는 모두 패배하고 만다. 해적 습관을 버리지 못한 드레이크에게 군함까지 약탈당한 스페인은 기력을 잃고 만다.

(5) 승리와 종말
  스페인 쪽에서 잡으려고 그렇게 안달이었던 드레이크 경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잡히지 않는다. 불패무적의 신화를 창조한 이순신과는 또 다른 모습의 선장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드레이크는 늙어가면서 점점 그 판단력이 흐려졌는지 많은 실책을 범하기도 하고 바로 옆에 지나가는 운송선을 몰라보기까지 한다. 결국 다시 손을 잡은 홉킨스가 죽은 뒤 곧 카리브 해의 열병에 걸려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다. 그의 시체는 부하들에 의하여 그가 누비던 카리브 해 어딘가에 버려지게 된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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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1-4(KBS 역사스페셜/효형출판) | ↘『독서후기』 2006-05-20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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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역사 스페셜 세트

KBS 역사 스페셜 원저
효형출판 | 2004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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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1

동북아 패권 다툼, 고구려․수나라 전쟁
―▶ 수양제가 고구려를 치려던 까닭은?
   중국을 통일했지만 진시황제의 진나라처럼 채 100년도 유지를 못한 수나라. 수나라의 멸망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건에는 고구려 침략과 대운하 건설이 있다. 수나라의 양제는 양자강과 황하를 잇는 1600km의 대운하를 건설하여 여러모로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그에 따른 백성들의 원성이 부메랑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대운하야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만들었다고 해도 되지만 왜 고구려를 침략한 것일까? 더욱이 수나라가 중국통일을 하는데 50만 명의 군사를 쓴 반면 고구려 침략에는 수륙군 모두 합쳐 100만 명의 훨씬 넘는 대군을 사용한다. 고구려가 조공을 받치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는 등 무례한 짓을 저질렀다고 해도 쉽사리 이해가 가지는 않는 부분이다.
―▶ 천하의 중심은 어디인가
   고구려는 5세기에 중국이 많은 혼란한 상황을 틈타 북경 근처까지 진출한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백제에게서 항복을 받아내고 신라에 군대를 주둔시킨다. 이러한 상황에서 광개토대왕의 비문에는 태왕, 사해, 천손 등의 표현을 쓴다. 천손 등의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고구려는 천하의 중심일 정도로 강성했던 것이다. 그런데 수나라가 서쪽의 천하의 중심이 된 상황에서 천하의 중심은 수나라와 고구려로 나누어 질 수밖에 없었다.
―▶ 문명대전
   고구려와 수나라가 공존할 당시 몽골 쪽에는 돌궐이 자리 잡고 있었고 중국 서쪽에는 그 유명한 사마르칸트가 무역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돌궐 지방에 세워진 비문에는 고구려 사신이 다녀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사마르칸트의 벽화에는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 먼 거리까지 고구려의 손길이 뻗쳤던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는 중개무역 등으로 많은 이문을 남기고 있었기에 새로 등장한 수나라의 입장으로서는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 수나라의 신무기들
   청나라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더 많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중국(물론 지금은 그 반대이다.). 당시 수나라도 고구려보다 더 많은 신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신무기는 총 5개로 엘리베이터처럼 움직이면서 적을 살피는 소차, 투석기라고 할 수 있는 발석차, 성문을 부수기에 아주 효과적인 당차, 성벽 밑을 파고들어갈 수 있도록 방어해주는 전호피차, 사다리를 효과적으로 올려주는 운제가 있다. 수나라의 배들도 고구려의 것들보다 거대했다. 그러나 이 모든 신무기들도 고구려의 성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 난공불락의 고구려 성
   북방의 산지 땅이 많고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던 고구려이기에 북쪽에는 많은 산성들이 있었다. 죽 늘어선 산성들은 만리장성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는데 이 효과가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입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특히 당나라의 태종이 이끄는 대군을 맞아 요동성은 길게 항전하였으며 작은 산성이었던 안시성은 당나라의 군대를 패퇴시키기도 하였다. 수나라의 침입 때에도 고구려의 성들은 그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그런데 고구려 성들은 왜 난공불락이라 불릴 정도로 튼튼했던 것일까? 고구려의 성들에는 공통점이 2가지 있었다. 치라는 것이 있었는데 성벽에 일정한 간격을 두고 튀어나오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을 이용해 고구려 군사들은 3면에서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고 성벽에는 옹성을 쌓아서 적들이 쉽게 성문을 공격할 수 없었다.
―▶ 전쟁이 끝난 뒤
   모두가 알듯이 전쟁이 끝나자 국력이 쇠퇴한 수나라는 멸망하게 된다. 그러나 승리한 고구려도 치명상을 입고 점점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후에 고구려는 당 태종의 침략을 간신히 막아낸 이후 연개소문의 집권 아래에 잠깐 빛을 보기도 하였지만 결국 멸망하고 만다.


 

역사스페셜 2

1. 가야인도 성형수술을 했다.
―▶ 가야무덤의 인골
   경남 김해시 예안리의 한 농촌 구석에서는 그동안 간간히 가야 시대 유물들이 발견되곤 했다. 그래서 대대적인 발굴을 해보자 의외로 많은 가야 시대 유물들과 함께 190여 개의 인골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가야 시대 인골들 중에 이상한 두개골이 몇 개 있었다. 아주 특이한 형태여서 가야 시대 두개골과도 다르 지금까지 한 번도 연구되지 않은 형태였다. 얼굴 폭이 넓고 미간에서 정수리까지의 길이가 훨씬 짧은 두개골로 대단히 특이했다. 이 두개골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변한 것일까? 그 이유는 아주 뜻밖이었다. 성형수술…….
―▶ 가야여인의 성형수술, 편두
   중국의 전족 풍습은 조금의 관심만 있다면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렸을 때부터 발을 헝겊 등으로 꽉 감싸서 발이 커지게 하지 않으면 그것이 미(美)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이 전족 풍습은 여자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는 용도로도 악용되었다. 그런데 중국여인들이 전족을 했다면 우리나라의 가야여인들은 편두를 했다. 고전 판 성형수술인 편두는 무엇일까? 사람이 갓난아기일 때는 신체의 모든 부분이 약하고 쉽게 변형된다. 가야인들은 바로 이 점을 이용한 것인데 편두에는 2가지 방법이 있었다. 한 가지는 잘 움직이지 않는 갓난아기의 이마 위에 커다란 돌을 올려놓아 이마 두개골이 머리 위쪽으로 휘어지게 한 것이다. 다른 한 가지 방법은 머리 양 쪽에 단단한 것을 댄 뒤 끈으로 묶어서 고정 시켜 놓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정말 가야인들이 원하던 모양이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잘 못하면 두개골이 얇아져서 뚫어질 수도 있는 위험한 풍습이었다.
―▶ 인골을 통해 본 가야인의 삶
   가야인들의 인골 속에서는 남자와 여자의 것으로 보이는 골반 뼈도 출토되었다. 이를 통하여 남자, 여자 뼈를 가려내었는데 다른 뼈들과 추정해 본 결과 가야인의 평균 키는 1900년 대 보다 좀 더 컸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과는 달리 신생아들의 사망률이 높았던 만큼 무덤 속에는 옹관묘에 아기들의 뼈가 들어있기도 하였다. 그런데 인골들은 우리에게 더 많은 정보를 준다. 가야인들은 얼마나 이빨을 많이 사용했는지 30대가 되어도 이빨의 3분의 2가 닳아 없어졌고 대부분 옥니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어떤 가야인은 축농증이 얼마나 심했던지 그 고름이 입 천장을 뚫은 흔적이 보이기도 하였다.


2. 연개소문, 독재자인가 영웅인가?
―▶ 중국인들이 두려워했던 연개소문.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에는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대결에서 설인귀가 이기는 경극이 유행했었다고 한다. 이 경극에서 연개소문은 엄청난 덩치에 칼을 5개나 차고 무시무시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 장군으로 묘사되었었는데 연개소문이 설인귀에게 진 것은 모욕이라며 북한이 경극 중단 요구를 해서 결국 경극은 중단 됐다고 한다.
 경극에서 묘사된 연개소문의 무서운 생김새에서 보듯이 옛 중국인들은 연개소문을 두려워했다. 비록 신라를 적으로 만들면서 나당 동맹을 맺게 한 장본인이지만 적어도 그가 살아있는 동안은 당나라 군대에게 매번 패배를 안겼다.
―▶ 645년, 연개소문과 당 태종.
   중국 대륙을 통일한 당나라는 북방의 돌궐과 고구려에게 많은 위협을 느꼈다. 특히 고구려는 그 힘이 아직도 막강해서 더욱 위협을 느낀 듯싶다. 결국 당나라는 고구려에게 신라에 대한 공격을 금지하라며 시비를 걸게 된다. 사실 당나라가 요구한다고 고구려가 수나라와의 전쟁 때 뒤를 친 신라에 대한 공격을 멈출 리가 없었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당연히 말도 안 된다는 답신을 보내었고 당 태종은 육, 수군을 모두 동원하여 총 공세를 시작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 태종은 요동성을 간신히 점령한 뒤 요동성과 주변의 작은 성들에게 60만 석의 군량미를 획득했다고 한다. 그런데 당 태종은 작은 산성이었던 안시성에서 발이 묶인 뒤 결국 대패를 당하고 퇴각하고 만다. 퇴각하는 당 태종의 이유는 군량미가 부족하다는 이유. 60만 석이나 되는 군량미를 그 단시간 안에 소비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아마 고구려가 다시 그 군량미를 빼앗았거나 부풀려진 전과 일 수도 있다.
―▶ 당군은 왜 요하 하구로 퇴각했나?
   당군의 퇴각기록을 보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당 태종은 눈에 화살을 맞아 큰 부상을 당한 상태(이 부상은 실제가 아니고 무용담일 확률이 더 높다.)이고 당시 겨울만 되면 늪으로 변하던 요하 하구에서의 원활한 후퇴는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늪을 건너기 위해 사투하면서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간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런데 왜 당군은 가장 최악의 길인 요하 하구로 퇴각한 것일까? 그만큼 당군은 급박했던 것이었다. 원래 10만의 수군이 군량미를 날라야 하는데 고구려의 비사성에 기지를 둔 고구려 수군에게 막혀서 보급로가 끊긴 것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고구려의 반격은 실로 거세였다. 당 태종이 본국 깊숙한 곳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쉬고 옷을 갈아입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 연개소문은 대당 강경론자였다.
   당나라가 개국할 당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 장수왕 -> 문자명왕으로 이어지는 전성기에서 점점 쇠퇴하고 있었다. 남쪽의 많은 영토는 신라에게 빼앗긴 상태였고 온달 장군의 남쪽 영토 수복 시도가 실패하면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북쪽에서는 돌궐이 힘을 키웠고 중원에서는 당나라가 새로운 패자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러자 영류왕은 당나라와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당나라의 요구는 거의 다 들어주었고 수나라를 패퇴시킨 것을 기념하던 건축물까지 부수게 된다. 이런 행위가 너무나 마음에 안 들던 대당 강경론자 연개소문은 영류왕을 살해하게 된다. 그리고 보장왕을 왕에 추대하고 자신은 당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다.
―▶ 연개소문은 만리장성을 넘었나?
   만리장성 너머에는 고려관이라는 옛 지명을 가진 곳이 있다. 이곳은 고구려 군대의 기지로 추정되었는데 그렇다면 연개소문의 당 태종 추격군은 만리장성까지 넘은 것일까? 이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만리장성이 비록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세운 것이지만 한 쪽이 함락되면 만리장성 전체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기 때문에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이에 반해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곳곳에 위치한 산성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10개 성 중 1개 성은 반드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연개소문 이후의 고구려.
   연개소문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는 당나라의 침입이 매번 실패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사망하게 된다. 이때부터 고구려에는 패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연개소문의 세 아들들이 서로 대막리지 자리를 두고 다투다가 결국 형제 일부가 당나라로 건너가 버린 것이었다. 결국 연개소문의 한 아들의 안내로 평양성까지 진격한 나․당 연합군. 대막리지가 된 연개소문의 둘째아들 남건은 보장왕이 투항한 뒤로도 계속 항전을 계속했지만 결국 포로가 되고 만다. 연개소문의 통치 아래 묻혀 있던 고구려의 내부 갈등이 결국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이다.

역사스페셜 3

1. 고려 말 왜구는 정예부대였다.
―▶ 왜구 장수의 무장 수준
   왜구가 극성이기 시작한 고려 말에 일어난 황산대첩에는 특이한 왜구 장수가 등장한다. 바로 중무장을 한 채 고려군을 휘졌고 다니던 소년 장군. 이 ‘아기발도’라는 왜구 소년 장수 때문에 당시 고려군에는 이성계 등 유능한 장군들이 있었음에도 쉽게 승기를 잡지는 못했다. 이성계는 화살을 아기발도의 가슴팍에 명중시키기도 하였으나 아기발도의 철갑옷에 맞고 튀어져 나왔다. 다른 장군들이나 부하들이 날린 화살도 같은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 때 이성계가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로 아기발도의 투구 끈을 맞춘다. 그 때문에 투구가 벗겨지자 그 순간을 틈타 부하가 화살을 날려 아기발도를 죽이게 된다. 비록 아기발도를 처치하기는 했지만 그 중무장을 보아 왜구가 단순한 해적집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왜구의 전투 능력과 규모
   왜구의 주요 침탈 지역은 남해안 지역과 서해안의 금강 하굿둑(하구둑이 아님.) 주변이었다. 특히 금강 쪽으로 500척이 넘는 선단으로 침입했다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500척이라는 숫자만 보아도 왜구의 숫자가 상상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의 전 수군 배들을 합쳐도 수백 척이라는 숫자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이 왜구들은 진주 쪽으로 침입을 하였는데 왜구의 보병 숫자는 진주에서 5000명 정도였고 기병도 1600명 정도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더욱이 상륙할 때 일어난 대, 소규모 전투에서 죽은 왜구들까지 합하면 넉넉히 1만이라고 할 수 있으니 사단 정도의 군사력은 되었을 것이다. 설마 이 많은 왜구들이 모두 해적은 아니지 않겠는가? isn't it??
―▶ 전략․전술을 통해 본 왜구의 실체
   고려 말 진포에서 패배를 당한 왜구들의 잔당들 중 70명은 무등산의 험준한 규봉암에서 농성전을 한다. 규봉암은 3면이 절벽이고 입구는 단 하나이기 때문에 이 잔당들은 그 지형을 살려서 방어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충청남도 홍산에서 연승을 하던 왜구가 험준한 산 지형을 이용해 방어하여 최영 장군이 화살까지 맞아가면서 간신히 승리를 이끌어 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왜구들은 유인작전까지 구사한다. 이것으로 보아 왜구는 군사 훈련을 받은 정예 군사들이었다.
―▶ 왜구가 노린 것
   우리가 대부분 알고 있듯이 왜구들은 주로 식량을 얻기 위해 침입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진짜로 왜구들의 초기 침입 취지는 식량 약탈이었는데 고려의 문화재들이 일본에서 비싼 값에 팔리자 문화재까지 약탈해 가는 도둑이 되어버렸다. 그 결과 고려의 문화재들이 우리나라릿?다른 나라에 더 많은 안타까운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 왜구 침략의 시대적 배경
   가마쿠라 막부의 후기에 천황 자리를 놓고 두 세력이 맞붙게 된다. 그런데 수가 더 많던 쇼니 군이 기구치 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패배하게 된다. 하지만 아직 많은 수의 부하들을 휘하에 두고 있던 쇼니 군은 재기를 위해 군량미 등이 필요하게 된다. 당시 대마도는 이 쇼니의 아래에 놓여있었다. 그러나 대마도도 식량을 고려에서 약탈해 오는 현실이었기에 쇼니의 군대는 군량미를 위해 고려를 침탈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역사스페셜 4

『평양성, 난공불락의 비결』
-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성은 당대 최고의 철옹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고구려 역사상 한 번도 밖에서의 공격에 함락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망할 때 평양성이 함락된 이유는 당나라와 밀통한 한 중이 성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① : 평양성은 당대 세계 최대였다.
- 오래 전의 성이기에 완벽하게 보존 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평양성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더욱이 성의 동쪽과 서쪽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자연 해자로 삼았고 북쪽은 금수산의 험준한 절벽으로 방어했으며 성벽이 무려 16km나 되는 평양성이다. 더욱이 처음에는 성벽에 성벽보다 더 높은 높이로 흙을 쌓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겉으로 보기에는 토성인데 안은 돌로 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 나누어서 한 곳이 함락되더라도 나머지 성들이 방어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결국 중간 중간의 성벽 길이를 겉 성벽 16km에 더하면 중국의 장안성 보다 긴 23km가 된다.
② : 글자를 새긴 성돌의 비밀
- 이 고구려의 평양성은 분명 최고의 성이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역사서에는 단 두 줄의 기록 밖에 없다. 시작 년도와 공사를 마친 년도였는데 놀랍게도 완성하는데 42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평양성의 축조과정은 역사서가 아닌 돌에서 찾을 수 있다. 평양성을 쌓을 때 그 구간을 나누어 구간 마다 책임자를 두었기 때문에 구간마다 돌에 여러 가지 내용이 새겨져 있다.
③ : 왜 화려한 안학궁을 버리고 평양성으로 옮겼을까?
- 대제국이었던 고구려의 첫 수도는 지금의 집안에 있는 국내성이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취하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게 된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직 평양성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고 천혜의 요새이며 커다란 식수용 유원지까지 있는 대성산성과 화려한 안학궁 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장수왕은 평소에 평지의 안학궁에서 머무르다가 전시가 되면 대성산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점점 다른 나라들이 힘을 키워가고 북쪽으로는 돌궐이, 남쪽으로는 동맹을 맺은 신라와 백제가 침입해 와서 고구려는 좀 더 강력한 도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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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5-7(KBS 역사스페셜/효형출판) | ↘『독서후기』 2006-05-20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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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스페셜 5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

- 허균은 동인들의 우두머리 격이었던 허엽의 아들이다. 당대 세력가의 아들이었고 그의 누이인 허난설헌과 다른 형제들이 모두 뛰어난 문장가였고 재능이 많았기에 출세할 기회는 많았다. 그러나 허균은 얼마 되지 않는 벼슬 기간 동안 무려 6번이나 파직되고 복직되기를 반복하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 이유는 다음처럼 4가지로 나눌 수 있다.
① : 기생과 놀아나는 경박한 인물이다?
- 허균이 여러 벼슬자리를 거치면서 파직의 이유가 된 가장 많은 사유는 바로 기생들과 많이 어울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 황진이나 계월 등과 같이(KBS 불멸의 이순신에도 문장과 시에 뛰어난 기생이 나온다.)문장과 시에 뛰어난 기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허균은 기생들과 같이 지내며 글을 주고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 것이 조정에서는 일에 태만하고 기생들과 어울리기만 한다고 전해졌기 때문에 파직의 사유가 되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허균은 기생들과 놀기만 하는 경박한 한량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② : 천한 불교와 천주교를 신봉하는 이단이다?
- 당시 유교를 국교로 삼던 조선은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와 다른 나라에서 들어오던 천주교를 이단교로 정해놓았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승려들과 절은 모두 외진 곳에 있어야 했고 심지어 승려들은 한성에 들어오지도 못했다. 천주교도 조상을 섬기는 방식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조선 말기까지도 박해를 받아야했다. 그런데 허균은 이 모든 유교 법도를 무시하고 불교 인사들과 천주교를 가까이 하게 된다. 불교를 대표하는 사명당이나 다른 고승들과 가까이 어울렸으며 청나라에 사신 수행으로 갈 때마다 많은 돈을 들여 책을 엄청 많이 샀는데 이 책들이 모두 천주교에 관한 책들이었다. 이 사실을 조선 사대부들이 좋게 볼 리가 없었다. 사명당 같은 승려들이 임진왜란을 끝내는데 많은 공을 세웠지만 말이다.
③ : 서자들의 후견인이다?
- 조선 사회에서 서자들은 천민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영의정의 서자라도 결코 벼슬길에 오를 수 없었다. 조선이 서자들을 이렇듯 학대하기 시작한 계기는 태종이 정도전을 죽이면서 부터이다. 서로의 신념이 다르던 이 두 사람 중 태종은 정도전을 죽이게 되었고 정도전이 서자라는 이유로 그 때부터 서자들을 소외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성군이라고 일컫는 성종도 서자들의 탈출구를 모두 막아버렸고 임진왜란 때 잠깐 서자들이 벼슬을 하기도 하였으나 그것도 전쟁 중 만이었다. 하지만 서자들 중 정말 뛰어난 사람도 있다고 생각한 허균은 여러 서자들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고 이 사실 때문에 칠서사건 때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었다. 다행히 칠서사건의 주동자들인 서자들이 허균을 입에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균이 서자들을 가까이 한 것 역시 그에게는 독약이 되었다.
④ : 이씨 왕조를 뒤엎으려 했다?
- 허균은 벼슬길에 나가기 위해 당대 세력가이던 이이첨에게 벼슬자리를 부탁하게 된다. 광해군이 세자이던 시절 이이첨과 허균은 광해군과 아주 친했기 때문에 이 세 사람은 서로 잘 될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이이첨은 친구 허균을 사지에 몰아넣을 만큼 잔인한 사람이었다. 이이첨은 허균이 이씨 왕조를 뒤엎어버리고 서자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는 이유로 역모 죄를 씌운다. 허균은 결국 이 역모 죄로 인하여 능지처참당하고 그의 집안은 멸문지화를 당하고 만다. 오죽하면 동인의 우두머리인 허엽의 비가 두 동강으로 부러졌겠는가? 사실 허균이 서자들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꿈꾸었지만 정말 역모를 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천재시인 최치원은 조기 유학생이었다.』
- 고려 초기을 다룬 역사책이나 드라마들을 보면 최 씨를 가진 사람들 중에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유명한 최 씨들은 대부분 신라시대 때부터 내려온 사람들로 신라 말기에도 최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특히 당나라에서 황소의 난을 토벌하기 위해 쓴 격문으로 아주 유명했고 신라로 돌아와 왕에게 간언을 하다가 쫓겨난 최치원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① : 최치원은 조기 유학생이었다.
- 요즘에는 초등학생들도 영어를 배우기 위해 많이 유학을 떠나고 있고 중․고등학생들도 캐나다, 뉴질랜드 등으로 유학을 가고 있다. 그래?조기 유학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이 많은데 신라시대에도 조기 유학 열풍이 불고 있었다고 한다. 명문가들의 아들들은 대부분 바닷길 수 천리를 가야하고 다시 육로로 수 천리를 가야하는 당나라 수도로 유학을 많이 떠났다고 한다. 최치원의 경우 12살 무렵에 그 먼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다른 명문가 자식들도 이 나이 쯤 떠났다고 하니 조기 유학 열풍은 오늘날의 이야기만은 아닌 듯하다.
② : 최치원의 유학생활
- 신라는 매소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조선 같이 제후국이 아닌 자유국가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당나라에서 벼슬을 하면 영광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나라로 유학 간 명문가 자식들은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하는 부담을 갖게 되었다. 최치원의 경우 아버지가 10년 안에 당나라에서 장원급제를 해야 돌아올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10년의 시간이나 준 것을 보아 경쟁률이 굉장히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치원은 10년은 커녕 8년도 되지 않아 장원급제를 하게 된다. 그리고 최치원의 글은 점점 당나라에서도 유명해 지기 시작한다.
③ : 중국을 감동시킨 격황소문
- 최치원 하면 생각나는 것이 바로 격황소문이다. 당시 당나라에서는 황소의 난이 일어나서 곳곳이 전화로 얼룩지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토벌대 장군 휘하로 전쟁터에 간 최치원은 한 격문을 지어서 황소에게 보내게 된다. 그런데 이 격문을 읽은 황소가 기절을 했을 뿐더러 크게 놀랐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최치원이 글을 잘 써도 반란의 영수가 기절까지 했을까? 당시 당나라에서는 글을 고사성어처럼 함축된 의미로 지었기 때문에 좋은 글을 짓기가 어려웠었다고 한다. 그런 실정에서 아주 일품의 격문을 지었으니 황소가 기절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④ : 최치원은 신라 개혁을 꿈꿨다.
- 황소의 난 이 후 최치원은 당나라 내에서 아주 유명해졌고 벼슬도 계속 높아졌기 때문에 당나라에서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최치원은 갑자기 신라로 귀환을 하게 된다. 굳이 고향으로 돌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당시 신라는 말기에 접어들었고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기에 최치원은 자신의 국가를 살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최치원은 귀국한 뒤 환영을 받고 곧바로 개혁안을 짜서 왕에게 받혔지만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더욱이 귀국하면서 받았던 벼슬까지 빼앗기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역사스페셜 6

1. 일본의 신라 침공, 발해가 막다.
▷▶ 요즘 들어 ‘통일신라’라고 부르는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부르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엄연히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진짜로 한반도 북쪽의 요동, 만주는 물론 저 멀리 지금의 러시아 영토까지 넓은 땅을 지배했던 발해는 통일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신라 입장에서는 멸망시켰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위쪽에 버티고 있으니 언짢고 발해 입장에서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가 밑에 있으니 언짢을 것이라고 대부분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나라의 국경에서는 많은 충돌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사실 발해와 신라는 그렇게 나쁜 관계는 아니었으며 충돌도 별로 없었고 발해와 신라를 잇는 큰 길도 이미 있었다는 역사적 증거들이 속속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더욱 결정적인 단서가 나타났다. 바로 신라를 침입하려 한 일본을 발해가 막아준 것이다.
 우리들은 일본의 도읍이 나라였을 때, 보통 나라시대라고 한다. 이때의 인물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이토 히로부미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천황의 바로 다음 위치였으며 큰 권력을 휘둘렀으며 더욱이 자신들의 문화가 삼국에서 온 것을 간과해 버리고 한반도를 침략하려 했던 인물이라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다이묘들을 다른 나라에 집중 시키려고 신라 정벌 계획을 세운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결정적으로 발해에 협공을 요청한다. 당시 발해와 일본은 아주 가까운 사이여서 협공이 이루어지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발해는 그 협공 제안을 거절한다. 결국 힘을 잃어버린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다른 경쟁자들에게 패해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신라 정벌 계획도 취소되었다.
 사실 일본이 신라 정벌 계획을 계속 진행했더라도 곧 패했을 것이다. 일본의 군사들은 한반도에서 큰 활약을 펼치지 못했고 이 계획을 알아차린 신라가 마지노선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에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2. 신라는 당군을 어떻게 이겼나? - 매소성 전투의 비밀
▷▶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을 한 신라는 또 하나의 큰 산을 만나게 된다. 연합을 하였던 당나라가 신라까지 멸망시키고 삼국을 정벌하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더욱이 당시 당나라의 군사력은 세계 최강이었다. 여기서 잠깐! 왜 당나라 군사력이 최강일까? 바로 당나라의 주력 군사는 기병이었기 때문이다. 기병은 말 위에서 싸우고 말은 시속 60km로 달리기 때문에 혼자서 많은 보병들을 헤치울 수 있는 이점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런 기병으로 이루어진 군대 수만 명이 매소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신라는 이 군대의 3분의 1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우리의 예상을 뒤엎고 신라는 당나라 군사들을 모두 무찔렀고 한반도에서 당나라 군사를 모두 몰아내었다. 일당백의 기병 수만 명을 적은 군사로 무찌른 그 비결은 무엇인가? 바로 장창병과 노를 갖고 있는 궁수들이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기병 군대를 프로방스의 장창부대가 무찔러 버린 사건이 있었다. 길이가 3m 쯤 되는 긴 창을 앞으로 세우고 있으면 기병들은 뚫고 들어올 수 없었고 달려들자니 죽을 테고 달려들지 않자니 뒤에서 화살들이 쏟아지고 이렇게 전멸당한 것이다. 더욱이 신라의 장창병 뒤에 있던 궁수들은 노라는 물건을 사용했다. 이 노는 신라의 비밀 병기로 중국의 무기를 개량한 것이었다. 정확하고 빠른 노에 당할 기병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신라는 장창병, 노를 갖은 궁수로 단판승을 내어버린 것이다.

역사스페셜 7

1. 순장, 과연 생매장이었나?
―▶무엇이 순장 묘인가?
  큰 힘을 가진 권력자가 죽으면 그 길을 같이 가줄 부인이나 노예, 포로들을 산채로 묻는 다고 알고 있는 순장. 고대에 관습이었던 순장 묘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경상북도 경산시 임당동 벌판에는 수십 기의 대형 고분들이 있고 그 안에서 많은 유골들이 발견되었다. 더욱이 이곳에서 순장 묘에는 부곽과 주곽이 있어서 신분에 따라 묻힌 곳도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발견된 순장 묘들 중에 가장 큰 것으로 꼽히는 가야의 44호분의 경우에는 최고 지배자 급의 고분이라고 한다. 이 고분에는 무려 36명 이상이 순장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그 당시 장례의식이 정말 거대했을 것이다.
―▶순장자들, 어떻게 죽었나?
  우리는 지금까지 묘에 묻히는 순장자들이 모두 산채로 묻혔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순장을 끔찍해 하는 것이다. 현대의 생매장이나 다름없는 것을 수십 명에게 적용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순장자들의 유골들을 조사하자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왔다. 몇 명의 순장자들의 두개골을 자세히 관찰하자 크게 골절되어 손상된 부분이 있었다. 이 부분을 정밀감식 해보자 둔기에 맞아서 크게 두개골이 파손될 정도로 치명상을 입은 것이었다. 더욱이 어떤 순장자들은 꿇어앉은 채 있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순장자들은 분명히 묻히기 전에 살해당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이 순장됐나?
  순장자들의 종류는 노예나 전쟁포로 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사실은 다르다고 한다. 물론 노예나 전쟁포로들이 묻히기는 했지만 순장자를 모시던 하인들이나 시녀들도 같이 묻힌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첩들도 묻히기도 한다. 이런 것들을 모아 죽은 사람의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같이 순장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순장이 폐지된 뒤
  끔찍한 고대 관습인 순장은 신라 지증왕 때 처음으로 금지되게 된다. 왜 지증왕은 고대 관습인 순장을 금지 시켰을까? 당시 지증왕은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마립간 같은 칭호를 버리고 왕의 칭호를 쓴 임금이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신라를 개혁하였고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이런 일들을 하려면 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런데 고대에는 지금처럼 인구가 많지 않아서 여러 부족한 점들이 많았다. 이렇게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수십 명을 같이 죽인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 결국 지증왕은 순장을 폐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2. 0.3밀리미터(mm)의 예술, 감은사 사리함
―▶ 감은사 동탑 사리함, 1천 3백 년의 잠에서 깨어나다.
   유명한 사찰들을 보면 대부분 사리탑 안에 사리함이 있기 마련이다. 불국사에서도 발견이 되었고 그 유명했던 황룡사의 사리함도 발견되었다. 그런데 가장 거대했던 황룡사의 사리함은 별로 특이한 문양이 없었으며 불국사의 사리함도 화려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감은사 동탑을 해체하던 중 대단한 사리함을 발견하게 된다. 진흙이 잔뜩 묻은 감은사 동탑의 사리함은 정말 대단한 물건이었던 것이다. 겉 외함의 사천왕상 또한 멋졌지만 그 안 내함의 장식세공은 뛰어난 신라의 기술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0.3밀리미터의 예술
   요즘에 진짜 모기의 침에 엄청 작은 인형을 제작하여 올려놓기도 하고 몇 센티미터도 안 되는 모형 배의 0.5mm도 안 되는 돛대 끝 위에 체스판을 만들기도 하는 마이크로 미술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 감은사 동탑 사리함 내함의 장식들은 정말 대단히 작고 섬세한 물건들이다. 쌀알 크기 만한 풍탁이 있을뿐더러 사리병은 성냥 길이만 하고 그 뚜껑은 100원 동전의 반 크기였다. 더욱이 이 장식들을 1백 배율로 촬영하면 여러 개 금 알갱이들이 보인다. 이 금 알갱이들은 손수 제작하여 붙힌 것이었는데 이 알갱이의 크기는 0.3mm밖에 되지 않았다. 현대 기술로도 똑같이 재현하려면 시행착오가 많이 생기는데 그 옛날 어떻게 이런 섬세한 것들을 만들 수 있었는지 감탄스럽기만 하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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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 사이언스(이정모/휘슬러) | ↘『독서후기』 2006-05-20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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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바이블 사이언스

이정모 저
휘슬러 | 2003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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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에 따르면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큰 벌로 대홍수를 내려 노아와 노아의 방주에 탄 그의 가족, 동물들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노아에게 특별히 하느님이 그 재앙을 가르쳐 주어 노아의 방주가 탄생할 수 있었는데 세상을 하나도 남김없이 집어삼킬 정도의 홍수가 가능한 것일까? 에베레스트 산같이 수 천m 되는 산들의 봉우리만 보일 정도로 상상할 수 없는 홍수를 만든 물은 다 어디서 온 것일까? 비록 아주 먼 옛날 대홍수가 일어났었다는 연구결과가 있지만 노아의 방주 이야기처럼 심각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그 대홍수를 성경에서 조금 과장 표현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수 천km에 이르는 지구 속을 뚫고 들어가면 그 가운데에 엄청난 양의 물이 있을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직접 들어가지는 못해도 다른 여러 첨단장치로 추측을 해보자면 무려 지금 바다 물의 양 * 5배의 양이라고 한다. 진짜로 이 지구 내부 물의 양이 바다 물의 5배라면 노아의 방주가 이야기가 조금은 억지(?)설명될 수 있다. 이야기에 따르면 비가 40일 동안 연이어서 쏟아졌고 엄청난 양의 물이 다 빠져서 땅이 들어날 때까지 150일이 넘었다고 한다. 혹시 지구 속의 물이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 나오는 대 홍수의 물이 아닐까?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2. 성경에 따르면 처음에 우주가 만들어지기도 전에는 시간도, 공간도 다른 아무 것도 없이 오직 하느님만이 있었다고 한다. 하느님은 처음으로 빛을 만들었고 다른 여러 가지를 창조해내어 한 달은 커녕 15일도 지나지 않아 모든 것을 창조해내셨다고 한다. 물론 우주도 하느님이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좀 더 과학적인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우주의 탄생은 2가지 학설로 나뉘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주가 처음부터 아주 오래전 세상이 생겼을 때부터 지금같이 존재했었다는 학설이 유력했다. 하지만 점점 허블 등의 과학자들이 우주를 관찰하고 미국의 NASA에서 우주의 온도 분포도를 나타낸 지도를 발표하면서 러시아의 한 과학자는 우주가 큰 폭발로 생겨났다는 새로운 주장을 하게 되었다. 이 학설은 지동설과 같이 비난을 받았지만 지금은 기정사실화 되어있다.
 빅뱅(Big Bang)이론에 대해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이 있다면 빅뱅이론을 반대하던 한 과학자가 TV토론에서 무슨 터무니없는 학설이냐며 빅뱅이라는 말로 비난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반대자에게서 나온 빅뱅이 그 학설의 본제목이 되어 버린 것이다.

3. 성경에서 여호수와를 따라 가나안에 도착한 유대인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를 함락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요새는 전설적으로도 함락될 수 없는 대단한 요새였다. 하지만 여호수와는 함락하고 만다. 바로 공명을 이용해서...
 며칠이고 성벽주위를 돌던 여호수와와 유대인들은 어느 날 아주 큰 목소리로 다 함께 소리를 지른다. 그런데 그 소리가 동시에 울리면서 공명이 발생해 성벽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이 공명이 성벽을 부쉈다는 역사적 근거는 없지만 다리를 무너뜨렸다는 역사적 증거는 있다. 영국군이 같이 발을 맞추며 다리를 건너는데 그 발이 내는 음파들이 어떤 특정 음파로 합쳐지면서 큰 힘이 발휘되어 다리가 무너져버린 것이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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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신화 사이언스(이정모/휘슬러) | ↘『독서후기』 2006-05-20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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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그리스 로마 신화 사이언스

이정모 저
휘슬러 | 2004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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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오스와 가이아
└> 흔히 카오스 하면 혼돈과 나비현상이 생각난다. 카오스 밖에 없었고 다른 것이라곤 전혀 없었을 때 카오스가 비를 내리려고 구름을 만들면 지진이 일어나는 등 의도와는 다른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났지만 카오스는 이런 세상이 아닌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원했다.
 그런데 나비현상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 나비현상은 ‘작은 변화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변화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베이징에서 나비가 날면 뉴욕에 폭풍우가 분다는 것들이 모두 나비현상이다. 이 책에서는 나비현상의 예로 두 가지를 들었다.
- 제주도에서 나비가 말의 주위를 날아다니자 말은 꼬리를 휘둘렀지만 나비는 맞지 않고 돌에 맞아 그 돌이 강가로 굴러가게 된다. 강가에서 돌은 나뭇가지들을 건드렸고 그 나뭇가지들은 다시 다른 돌들을 밀어내어 돌들이 강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리해서 강의 물길에 변화가 생기고 그 여파는 바다까지 흘러가 다른 엉뚱한 곳에 폭풍이 불게 되었다는 것이다.
- 어떤 남편이 아내를 위해 바나나를 사왔다. 그런데 그 바나나가 마침 상한 것이어서 아내는 그 것을 먹고 배탈이 나게 된다. 화가 잔뜩 난 아내는 그 바나나를 아들에게 주고 슈퍼에서 바꿔오라고 한다. 그런데 슈퍼에 간 아들은 그 곳에서 한 여자와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이 둘 사이에서는 거스 히딩크가 태어나게 된다. 이 거스 히딩크는 한국 축구를 월드컵 4강에 올려놓고 세계에 한국을 홍보하게 된다. 만약 그 바나나가 상하지 않았더라면 거스 히딩크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월드컵 4강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이 내용은 예를 든 것뿐임.)
 그 외에도 수능 날 신발 끈을 매다가 엘리베이터를 두 번째 올 때 타게 되어 버스를 못 탔고 다음 버스를 타고 갔지만 수능 시간에 늦어 대학교에 못 들어가게 되었다. 결국 대학교도 못 나와 직장을 얻지 못한 그 청년은 폐인이 된다. 이렇게 사소한 신발 끈에 의해 청년의 인생이 바뀌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런 하찮은 일을 과대 포장한 면도 있지만 이 나비현상에서 카오스 이론이 나왔다고 한다.

2. 페르세우스, 죽음의 이미지
└> 어느 나라의 왕에게는 아름다운 딸, 다나에가 있었다. 그런데 다나에의 모습에 반한 제우스가 다른 모습으로 변장하고 온다. 결국 다나에는 제우스의 아들을 낳게 된다. 다나에는 아들을 숨기려고 했으나 아들, 페르세우스의 큰 울음소리에 아버지가 알아버렸고 왕은 다나에와 페르세우스를 상자에 넣어 다른 나라로 흘려보낸다.
 다른 나라에 도착한 다나에에게 반한 다른 나라 왕은 그 옆에 버티고 있는 페르세우스를 없애버리고 싶었다. 결국 다른 나라 왕의 함정에 빠져버린 페르세우스는 메두사의 머리를 잘라다가 받혀야 했다. 이에 크게 걱정을 한 다나에는 헤르메스와 아테나에게 도움을 청했고 이 두 신은 페르세우스를 따라가게 된다. 페르세우스는 님프들을 통해 메두사가 있는 곳을 알아냈으며 님프들에게 날개달린 샌들과 투명 투구를 선물 받게 된다. 페르세우스는 날개달린 샌들을 신고 순식간에 메두사가 있는 곳으로 간다. 그 곳에서 제우스가 내린 크로노스의 낫을 받게 되는데 아테나의 방패의 도움을 받아서 페르세우스는 낫으로 메두사의 머리를 베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날개달린 샌들을 신으면 가고자 하는 곳에 순간이동 된다고 한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을까? 팩스의 원리를 이용하면 과학적으로 나마 가능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은 1뒤에 0이 28개 붙는 원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원자 하나에 1kb라고 가정할 때 그 용량은 10억 광년 두께의 하드디스크에 저장할 수 있는 양이라고 한다. 결국 지금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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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전쟁(조나단 스위프트/미래사) | ↘『독서후기』 2006-05-20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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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책들의 전쟁

조나단 스위프트 저/류경희 역
미래사 | 2003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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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의 종류는 크게 고전 쪽과 현대 쪽으로 나뉠 수 있다. 고전 쪽에는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책이 속해 있고 현대 쪽에는 15세기 정도부터 속해있다. 그런데 이 고전 쪽과 현대 쪽 책들이 서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결과 상대편에게 발사하던 잉크가 넘쳐나는 강도 다 말라버릴 정도로 치열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사건의 발단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스에 두 산이 있었다. 이 두 산은 서로 가까이 붙어있었는데 고전 책들은 조금 높은 봉우리에 자리 잡았고 현대 책들은 낮은 봉우리에 자리 잡았다. 그렇게 살아가던 어느 날 현대 책들은 자신들의 전망권이 고전 책들의 높은 봉우리에 가로막혀 침해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고전 책들의 봉우리가 있는 쪽 너머는 볼 수가 없었다. 결국 현대 책들은 고전 책들에게 서안을 보내게 된다.
 간단히...
『고전 책들의 봉우리에 우리의 전망권이 헤쳐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쪽에서 우리의 타협안 중 하나를 선택하라. 타협안 중 첫째는 우리와 자리를 바꿔서 그 쪽은 우리 봉우리로 오고 우리는 그 쪽 높은 봉우리로 가자는 것이다. 둘째는 앞의 조건이 싫을 경우 우리 현대 책들이 모두 삽을 들고 그 쪽의 봉우리를 깎아내리겠다는 것이다.』
 물론 고전 책들은 이 모든 타협안을 묵살하고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한다. 우리가 왜 그 쪽과 자리를 바꿔야 하고 설사 많은 책들이 삽을 들고 봉우리를 깎는다고 하여도 산은 커다란 바위로 되어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러면서 거부를 하자 현대 책들은 분노를 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불화는 결국 전쟁으로 번지게 된다.
 영국의 한 도서관에 있는 주인은 현대 책들과 고전 책들을 서로 분리해 놓는다. 그런데 현대 책들은 좋은 자리에 차곡차곡 배치해 놓은 반면에 고전 책들은 빛도 잘 들지 않는 구석에 꽂아놓은 것이다. 결국 현대 책들과 고전 책들은 전쟁을 시작한다.
 현대 책 진영에서는 많은 수의 책들이 있어서 부대가 거대해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장수들은 모두 훌륭하거나 뛰어난 사람들이 없었다. 군대 또한 군기가 잡혀있지 않고 오합지졸일 따름이었다. 그에 반해 고전 책 진영은 군사들도 숫자가 작지만 장수들이 모두 그 분야를 잘 맡을 수 있었고 지략 또한 많았다. 전쟁이 시작되자 고전 책 진영은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 현대 책 진영을 쓸어버렸다. 그러나 쓸어버려도 숫자에서 압도적 우위를 보이는 현대 책 진영에서는 계속 군대가 쏟아져 나왔다. 그 결과 전쟁은 계속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책들의 전쟁에는 트로이 전쟁처럼 신들이 가세하게 된다. 이 신들로 인해 운명이 바뀌면서 어느 사람의 칼날은 무뎌지고 어느 사람의 창은 엄청 날카로워지게 되며 어떤 사람의 창은 날아가다가 그냥 떨어지기도 했다. 결국 결판이 나지 않았다.

 책들의 전쟁 이야기 외에도 이 책에는 조나단 스위프트가 사회를 풍자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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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역사와 사건-누비아(쿠시)(노엘 그로브/YBM시사) | ↘『독서후기』 2006-05-20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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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비아.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다. 북아프리카에 위치해 있으며 쿠시 제국이라고도 불리던 누비아는 고대 역사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 예로 한니발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한니발이 로마를 정벌하려 마음을 먹었던 당시 누비아 인들은 뛰어난 기병을 갖고 있었다. 당연히 북아프리카에 영향력이 큰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은 이 누비아 인들을 끌여들었다. 이 누비아 인들의 타고난 승마 솜씨는 전투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그러나 진정으로 카르타고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닌 누비아 인들은 한니발이 불리해 지자 좋은 조건의 로마 편으로 건너가 버렸다. 뛰어난 동맹을 하나 잃어버린 한니발에게는 불리함이 따랐고 지난날의 동맹이었던 누비아 인들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만약 누비아가 카르타고와 땔 수 없는 동맹 관계였다면 로마도 꽤 불리한 면이 있었을 것이다. 포에니 전쟁 이후에도 누비아 인들의 기병대는 고대 국가들의 유용한 용병이 되어주었다.
 그런데 이 누비아는 어디 있는 나라인가? 놀랍게도 누비아는 지금의 이집트에 있었다. 그들은 이집트 나일강 제 1폭포부터 이집트 남쪽 끝까지 광대한 영토를 가졌지만 문화에서 앞서는 이집트에 계속 문화적 지배를 받게 된다. 하지만 이 검은 아프리카 인의 나라 누비아는 점점 힘을 키워간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본떠 누비아 어도 만들어 내고 피라미드 등의 문화를 전수 받은 누비아는 쇠퇴해져가는 이집트를 결국 정복해 버린다.
 1세기 종안 이집트 전체를 다스리던 누비아는 침입해온 아시리아 인들에게 밀려 수도를 수 백 km남쪽인 비옥한 영역으로 옮긴다. 그들은 물품 무역, 노예무역도 하면서 부를 쌓아갔고 로마부터 멀리 중국까지 교역 영역을 확대하였다. 이들은 결코 무지한 원주민들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누비아 인들은 산림 파괴와 괴팍한 날씨 등을 견디지 못하고 쇠퇴해져 갔고 결국 침략해온 에티오피아의 악숨 제국 군대에게 패해 역사를 마감하게 된다.

 미케네.
 미케네 인들은 그리스 남쪽 섬의 크레타 인들이 망하기 전에 그리스 남쪽의 미케네 시를 중심으로 발전해 나갔다. 그들은 정말 놀랍게도 1세기도 지나지 않아 그리스를 야금야금 먹어들어 갔고 뛰어난 문화도 자랑하였다.
 더욱이 항해술에 뛰어났던 미케네 인들은 에게해와 동 지중해에서 교역을 하며 부를 쌓았고 때로는 약탈과 해적 일도 일삼았다. 그런데 이렇게 발전해 나가던 미케네 인들은 갑자기 역사에서 사라진다. 아직도 의견은 분분하지만 학자들은 북쪽에서 내려온 도리아 인들에게 망했을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는다. 뛰어난 문화를 자랑하며 북 지중해를 주름잡았지만 청동문화인 미케네 인들과는 달리 도리아 인들은 철제 문화였던 것이다!
 뛰어난 문화의 상징 미케네 인들이 사라지면서 안타깝께도 그 후 얼마 동안은 문화에 암흑만이 드리워졌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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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황제(앤 팔루던/갑인공방) | ↘『독서후기』 2006-05-20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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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중국 황제

앤 팔루던 저/이동진,윤미경 공역
갑인공방 | 2004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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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아 대륙에서 인도의 인더스 문명과 함께 가장 중요하게 인정되는 문명은 중국의 황하문명이다. 중국은 기원전 수 세기 전, 우리나라에서는 나라가 채 세워지기도 전에 하, 은, 주 같은 나라들이 생겨났고 그 유명한 성군, 요 ․ 순 임금도 있었다.
 요 ․ 순 임금으로 시작하여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건륭제까지 중국에는 크고 작은 나라들이 패권을 다퉜고 그 중 진, 한, 수, 당, 송, 원, 명, 청나라까지 단 8개의 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였다. 그 중 두 번째 통일국가인 한나라가 존재했을 때 우리나라에는 고조선이 세워졌다는 것을 보았을 때 중국의 역사의 위대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8개의 통일국가들에는 성군도 있었으며 폭군도 있었다. 그 중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황제는
- 진나라의 시황제 : 폭군으로 악명이 높고 만리장성을 세웠으며 거대한 진시황릉을 지었음.
- 한나라의 고조 : 항우와 패권을 다툰 유명한 “유방”으로 주위에 많은 충신들을 거느렸음.
          문제 : 한나라를 제정비하고 문화 수준을 높였다.
          무제 : 전쟁으로 비단길을 개척하기도 했으나 전쟁으로 한나라의 몰락을 초례함.
- 수나라의 양견 : 고구려를 100만 대군으로 여러 번 침략하였으나 실패하여 수나라를 멸망시킨 인물.
- 당나라의 태종 : 2대 황제로 양견처럼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결국 실패하였고 그에 반해 당나라 내에서는 뛰어난 문화를 만들어내었다.
- 원나라의 칭기즈 칸 : 작은 부족 국가인 몽고를 대제국으로 만든 장본인.
          쿠빌라이 칸 : 칭기즈 칸의 영토에서 더욱 확장함.
그 외에도 성군들과 폭군들은 많다. 이들은 자신의 나라를 부흥하기도 몰락시키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 사이 사이의 많은 황제들을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이 중국의 황제에서는 이 황제들을 모두 총망라하여 보여주고 있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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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하멜 표류기(강준식/웅진닷컴) | ↘『독서후기』 2006-05-20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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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다시 읽는 하멜표류기

강준식 저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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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국가대표 팀을 월드컵 4강에 올려놓음으로 서 한국을 세계 널리 알린 네덜란드 감독, 거스 히딩크(Guus Hiddink). 우리가 지금도 원하고 있는 히딩크이기에 그의 나라 네덜란드는 우리에게 특별한 존재이다. 그런데 아마도 네덜란드는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한 특별한 존재인 듯싶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앞에서 말했듯이 월드컵 4강 신화로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려서 지금 한국을 거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알 것이다. 그리고 조선시대 우리나라에 표류해 온 네덜란드 사람, 하멜 역시 조선을 서방 세계에 알려 많은 관심을 일으켰다. 이것들을 보면 정말 네덜란드가 우리나라에게는 특별한 존재인 듯싶다.
 하멜이 쓴 하멜 표류기는 처음 발간된 시기부터 엄청난 인기를 누리며 수 없이 많은 판본 등을 만들어 내었는데 워낙 옛날 책이다 보니 그 긴 세월 동안 조금씩은 아이러니한 부분들이 새롭게 생겨났다. 물론 하멜이 전문적으로 책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표류기를 쓰면서 이상하게 넘어간 부분들이 있지만 말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 당시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에 몰아친 항해열풍 속에 합류하여 거친 바다로 나가게 된 하멜. 하멜은 포수 계급으로 동남아시아의 동인도회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서기로 승진한(하멜이 글을 쓸 수 있었기에 선원들 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서기가 될 수 있었다.)하멜은 스페르웨르 호를 타고 일본으로 항해를 나섰다. 그런데 타이완을 거친 뒤 일본으로 가던 배가 폭풍우에 휘말리면서 불행하게도 제주도 남쪽 해안가에 난파당하고 말았다. 도대체 이곳이 어딘지 황당해 하던 하멜 일행은 많은 지식과 항해경력을 가지고 있는 일등 항해사의 도움으로 이곳이 제주도라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하멜 일행은 곧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이원진 제주 목사 휘하의 군사들에게 붙잡히게 된다. 조선인들에게 코가 크고 금발이고 몸집이 큰 서양인들은 괴기한 사람들로 보였다. 그래서 제주 목사 이원진은 하멜 일행을 일단 가두고 조정으로 장계를 보내게 된다. 조정 대신들은 이 장계를 보고 꽤 놀라고 당황해 했지만 이미 몇 년 전에 표류 해와 훈련도감에서 일하던 서양인이 있었음으로 이 서양인을 보내게 된다. 서양인이 제주도에 도착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하멜 일행은 제주 목사 이원진의 따뜻한 환대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고 한다. 또한 조정에서 내려 보낸 서양인이 우연찮게도 같은 네덜란드 인이어서 이들은 정말 많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를 껴안았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운이 좋았던 하멜 일행이었는데 곧 시련이 닥친다. 조정 대신들이 하멜 일행을 잘 보내줄 생각은 젖혀놓고 하멜 일행이 가지고 온 여러 물품을 가로챌 궁리만 한 것이다. 결국 중국에 보낼 상품들 중 부족한 것이 하멜 일행에게 있자 모두 가로채 버렸다. 하멜 일행은 조금 남은 물품만 팔아서 적은 돈만 얻을 수 있었고 곧 도성까지의 긴 여행길에 오르게 된다.
 제주도에서 전라도로 배를 탄 뒤 다시 서울까지 육로로 간 하멜 일행은 북벌에 힘쓰고 있는 효종을 만나 환대를 샀고 곧 효종의 호위대가 된다. 호위대가 된 것에 큰 불만이 없었던 이들은 청나라의 사신만 오지 않았더라면 임금의 호위대로 넉넉한 살림을 차린 채 조선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의 사신이 조선에 오자 성급한 2명이 청나라 사신에게 가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조선은 이 일이 크게 번질 것을 우려하여 사신에게 많은 뇌물을 주었고 일을 일으킨 2명은 감옥에 가두었는데 곧 이 2명은 옥사하게 된다. 그리고 남은 하멜 일행은 전라도 병사와 전라 좌수영, 남원에 각각 흩어져 살게 되었다. 자신들이 속한 관청에서 일을 한 하멜 일행은 새로 부임해 오는 사령관들을 ‘좋은 사령관’, ‘나쁜 사령관’으로 나눠서 불렀다. 진짜로 ‘나쁜 사령관’은 하멜 일행을 못 살게 굴었다. 그런데 점점 ‘나쁜 사령관’만 부임해 오자 하멜 일행은 참을 수 없었다. 탈출을 결심한 하멜과 다른 6명은 작은 배로 주변 바다를 항해할 수 있는 허락을 받아내었다. 그런 뒤 그동안 모아온 돈으로 일본까지 갈 수 있는 배를 사게 된다. 물론 주변 지역에서 솜을 사서 실어 온다는 목적이라고 말했지만 말이다. 준비가 끝난 하멜 일행은 일본으로 필사의 도주를 실시했고 성공했다. 일본에서 두 차례의 조사를 받았고 곧 일본과의 조선의 외교 뒤 동인도 회사로 귀항할 수 있었다. 조선에 남은 다른 일행 역시 무사히 동인도 회사로 돌아왔다. 그런데 동인도 회사가 조선에 있는 동안의 월급을 주지 않고 1년 월급만 주기로 하자 몇 몇 일행은 네덜란드로 서둘러 돌아간 뒤 이사들에게 따져서 2년 월급을 받게 된다. 1년 월급을 받은 하멜과 다른 사람들은 네덜란드에 돌아온 뒤 자신의 표류기를 출판하는데 이는 엄청난 효과를 얻었게 만든다. 이 표류기의 성과로 동인도 회사 이사들이 하멜과 남은 일행에게 그동안의 월급을 모두 주겠다고 한 것이다.
 이로 인해 하멜은 유명해지고 돈도 모두 받게 되었으며 조선은 서양 세계에 알려졌으니 서로 손해 볼 것은 없는 듯싶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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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인 안중근(강석하/예림당) | ↘『독서후기』 2006-05-20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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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대한국인 안중근

강석하
예림당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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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에 ‘도마 안중근’이라는 영화가 나왔다. 감독은 서세원이고 안중근의 생애를 담은 영화였다. 그런 영화도 액션영화와 함께 좋아하는 나여서 보려고 했지만 감독, 서세원을 싫어해서 안 보게 되었다. 그러나 안중근은 전 조선인의 원흉이자 수 억 명의 중국인들조차 죽이지 못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단 3방의 총성으로 없애버리고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라는 말까지 남긴 점에서 결코 우리의 마음속에서 떠날 수 없는 인물이다. 수 억 명의 중국인들은 물론 일본의 제국주의에 희생된 나라의 백성들도 죽이지 못했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일 생각을 했고 또한 성공한 안중근이 우리 한국인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안중근은 안태훈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렸을 때 이름은 안응칠이다. 그런데 태어났을 때부터 대장부의 기질을 타고났음으로 할아버지에게 많은 아낌과 사랑을 받았다. 안중근은 어렸을 때부터 청계동에 살았는데 비록 오지 속의 작은 마을이어서 지적인 사람이 될 수는 없었지만 사냥꾼들과 다른 길을 떠나는 대장부들을 보면서 큰 꿈을 길렀고 튼튼한 체력과 뛰어난 사격술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한성(지금의 서울)에 있을 당시 천주교를 우연히 알게 되었고 천주교라는 종교철학에 이끌려 천주교인이 되었으며 거추장스러운 상투도 잘라내었다. 물론 이 단발 이야기를 들은 집안의 어르신들과 큰 형이 노발대발하고 그 종교를 당장에 집어치우라는 협박을 받게 되었지만 안태훈은 굽히지 않았다. 안중근 또한 그런 아버지를 이어받아 천주교인이 되었다. 이 천주교인이 된 것은 안중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절친해진 주교에게 세계의 정보와 새로운 문물들을 배우게 되었고 위험에 처했을 때 성당에 몸을 피해 일본 경찰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사냥꾼들을 만나면서 익힌 사격술이 뛰어났던 안중근은 천주교인이 된 이후에도 계속 사냥도 하고 다른 무력을 사용해야하는 의로운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동학 군대를 기습하라는 관청의 명령에 따라 아버지 안태훈의 지시대로 수 명의 포수들로 수 많은 동학 군대를 사살하고 식량을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나중에 안타깝게도 비열한 사람들의 모함으로 곤욕을 치뤘지만 말이다.
 청년이 된 안중근은 더 큰 뜻을 펼치기 위해 독립운동에 나섰고 뛰어난 사격술과 비범한 능력을 가졌던 덕에 급속도로 승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독립군 부대의 사령관까지 맞게 되었다. 그리고 압록강 주변의 독립군이 모두 함께 진격할 때 자신의 부대를 지휘했는데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부하들을 잃은 뒤 떠돌아다니다가 천신만고 끝에 돌아오게 되었다. 독립군 참패 이후 안중근은 더 이상 독립군을 이끌지 않았는데 그는 더 큰 일을 준비했다.
 하얼빈에 이토 히로부미가 잠깐 들린다는 말을 듣고 안중근은 그를 암살할 기상천외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주변 인물들을 이용하여 차근차근 준비한 안중근은 그 당일 날까지 계획을 발각당하지 않았다. 이제 이토 히로부미 저격만 남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당도하자 안중근은 뛰어난 일본말 솜씨로 일본인 기자 행색을 하며 이토 히로부미 곁으로 다가갔는데 도중에 많은 운이 따라주었다. 드디어 기회를 잡은 안중근은 탕! 탕! 탕! 하며 세발의 총을 쏘았고 모두 명중당한 이토 히로부미는 곧 죽게 되었다. 안중근은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감옥에서 사형만 기다리게 되었지만 그동안 많은 글도 쓰며 의연한 태도를 보였기에 일본의 간부들까지 그에게 압도당하여 존경하게 되었다.
 결국 안중근은 젊은 나이로 사망했지만 그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은 전 세계가 경악할 정도로 큰 일이었다.

//김만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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