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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버스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디지털 세계 2022-01-17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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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디지털 신세계 메타버스를 선점하라

자오궈둥,이환환,쉬위엔중 공저/정주은 역/김정이 감수
미디어숲 | 2022년 01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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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 전에 '메타버스(Meta-verse)'에 대한 이해란 정말 피상적인 것이었다. 고작 3차원 게임과 블록체인 기술이 더해진 분산 장부로 탈중앙화하려는 새로운 프로그램 정도로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제목의 디지털 신세계가 함유하고 있는 의미처럼 지금의 실제(real) 세계를 벗어나 온전히 가상 세계가 인간의 삶을 점령하는 완전한 디지털 세계를 향한 진입의 시작으로서 메타버스를 말하고 있는 까닭이다.

 

무수한 물질 거래나 정보 교환이 온라인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우리들은 현실의 신체를 체감하며 살고 있다. 이를테면 지금의 세상은 인간 삶의 정보화를 통한 현실 세계를 지지하고 보조하는 수단이지만, 디지털화 중에서도 메타버스는 정보화에 의한 부산물에 머무르던 데이터가 현실의 모든 물리적 세계를 재구성해 디지털 세계에 모델링한 세계로 급속하게 전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A. 메타버스, 과연 희망찬 미래 세계인가?

 

메타버스는 현실세계가 없어진 완전한 디지털 세계를 추구(139)”한다는 궁극의 지향을 지닌 개념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몸은 껍데기로 영양분을 공급받으며 단지 정신의 에너지원으로 존재할 뿐 메타버스라는 가상의 공간 속 인간들의 분신이야말로 정신’, 그 자체인 세계를 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메타버스는 포스트휴먼을 꿈꾸는, 새로운 인간을 예정한다. 지금의 탄소 기반의 인간이 규소 기반의 새로운 존재가 되겠다는 발걸음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사고를 지배하던 전통적 지식들은 대부분 쓸모없어지는 전복된 세계를 전개한다. 정신의 분신들이 거니는 세계는 인간의 생리적 욕구 전반을 떨쳐버린다. 따라서 현실 세계를 지탱하는 모든 가치 체계에서도 새로운 개념이 지배하게 된다. 누구나 가상의 공간에서 디지털 제품을 무한정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제품의 가치는 더 이상 노동의 투입과 비례하지 않으며, 한계편익도 체감하지 않는다.

 

또한 물류비용도 시장 형성을 위한 국가라는 중앙 통제 기관의 사회 인프라 투자와 같은 비용도 필요 없는 그야말로 비용이 '0(zero)'에 수렴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상공간을 실현하는 메타버스 안에서 모든 가상의 존재(아바타)는 평등과 자유에 대한 어떤 제약도, 아무런 통제 조직도 없다. 화폐의 통용(거래 결제)은 블록체인 기술에 의한 분산 원장 기술로 금융감독 기구와 같은 중앙기관이나 은행 등 거점 기구도 불필요하게 되어 모든 개인이 직접 거래하게 됨으로써 수수료, 세금 등, 비용은 사라진다.

 

이 같은 인터넷의 마지막 진화 형태인 메타버스는 함께 창조하고 누리고 함께 관리한다는 주체 없는 세계를 전망한다. 몰입식 경험, 자유로운 창조, 소셜 네트워킹, 비용 제로 수렴의 새로운 경제체제, 포스트휴먼의 새로운 문명(72)”을 메타버스의 기본 특징이라 천명하고 있듯이 마치 유토피아라는 이상사회를 실현 하겠다는 의지를 느끼게 한다. 책은 이처럼 희망찬 미래 기술과 그것이 창출하는 디지털 세계를 찬양하며 과거를 뒤돌아보지 말라. 씩씩하게 미래를 맞으라롱 펠로우의 한 구절 시구와 함께 어서 빨리 메타버스의 물결에 합류하라고 촉구한다.

 

그럼에도 이 책의 넘치는 선전 문구와는 달리 저자들은 메타버스가 안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기술적 문제점들에 대한 반성적 성찰을 비교적 꼼꼼하게 집으며, 균형적 시선을 갖추기도 하는데, 아마 메타버스에 대한 이들의 의지가 그만큼 집요함의 반증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B. 메타버스의 현실적 문제와 한계

 

바로 지금의 현실에서도 거대 플랫폼은 시초에 개방과 평등의 실현을 위해 발명되었던 월드와이드웹(www)의 신념은 사라지고, 중심 노드(nod)의 정보우위를 이용해 이용자인 대중의 자유롭고 평등한 데이터의 권리를 박탈(212)"한 독점적 괴물이 되어있다.

 

메타버스의 창세기를 열었다고 일컬어지는 '로블록스(Roblox Studio)'는 가상공간이라는 플랫폼을 만들어 이용자들이 스스로 게임이나 물품을 만들 수 있으며, 판매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자신들만의 화폐인 로벅스를 만들어 로블록스 내에서 거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이제 로블록스는 가입자 2천 만 명이 넘는 거대 플랫폼이 되어 자산가치 400억 달러를 넘는 거대 기업이 되었다. 연료 공급(추가 재원의 투입)없이 엔진이 돌아가는 플라이휠 효과로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흑자 전환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이는 유토피아를 내걸었지만 플랫폼의 소유주와 주력 개발자는 거부(巨富)가 되고 이용자는 가난한 다수의 대중이라는 극단적 양극화의 문제뿐 아니라 정보 독점에 의한 막강한 권력까지 독차지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독점적 현상의 초래를 단지 비즈니스 유전자라는 것이 그렇게 생겨먹었다고 관용의 시선을 보내기에는 그 부작용이 너무나 크다. 그리고 넌센스가 도사리고 있다. 물질 욕망을 벗어던진 정신적 자아실현의 공간이라고 하지만, 이 자아실현이란 것이 가상공간에서 각종의 화려한 아이템으로 장착하기 위해 디지털 화폐를 사용하는 것으로 전환되었을 뿐, 본질적인 인간의 욕망을 벗어난 것이 아니기에 이는 오히려 자아부재 현상만을 초래한다는 질책을 면하기 어려운 주장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메타버스가 실현하겠다는 장점들은 모두 단점의 이면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중앙 통제 조직이라는 주체가 없기에 모든 유형의 자유가 실현되는 공간이라 하지만 플랫폼이 이윤을 얻기 위한 일종의 중앙 통제 기제인 개발자 집단이 있으며, 로벅스 같은 디지털 화폐와 실물 경제상의 법정 화폐와의 환율 유지책임은 아무도 지려하지 않는 도덕적 부패의 심리까지 상존한다. 이는 기술적, 경제적, 정치적 문제까지 초래하는 커다란 사회적 문제에 대한 지나친 낙관이랄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사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를 기업 모토로 하였던 1999년의 구글은 오늘 가장 사악한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올바른 일을 하자(Do the right thing)"로 모토를 바꾸었다. 게다가 2021년 새로운 버전인 몰스 월드는 아이들의 계정을 훔치고 이를 협박수단으로 소아성애를 즐기는 악인이 넘치는가하면, SF 세계의 메타버스를 자칭하는 이브 온라인은 타 이용자의 환산 가치 약 16,500달러를 약탈하듯이 이용자의 안위와 안전에 대한 통제 상실의 현상을 줄곧 드러내기도 한다. 과연 메타버스는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디스토피아의 실현인가? 저자들은 메타버스의 자치방식은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자인하면서도 이는 현실 세계에도 으레 벌어지는 일이 아니냐고 항변하기까지 한다.

 

이 밖에도 메타버스가 내재하고 있는 본질적 문제는 지면에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메타버스를 자임하는 플랫폼들의 상호 호환성이 전혀 없기에 저마다의 화폐와 저마다의 다른 기술적 체계로 시공을 뛰어넘는 세계의 창조라는 말은 그저 공허한 울림만 줄 뿐이다. 예로서 애플의 앱스토어와 안드로이드의 앱마켓의 프로그램이 서로 호환되지 않듯이 실질적으로는 그들이 어떤 이상을 내걸지라도 단지 플랫폼 소유주의 이익 욕망을 선전하는 과학기술의 탈을 뒤집어 쓴 앞잡이 이론에 불과할 것이다. 끝으로 플랫폼의 운영 관리를 위한 정책 제정이나 시행의 주체는 누가 될 것인가? 이러한 물음에 여전히 명확한 답의 제시가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메타버스의 궁극적인 실현을 가능케 할 디지털 기반 기술들은 언제 모두 완성 될 수 있을까? 세계 인터넷 속도가 가장 빠른 10개국 평균이 200Mbps고 한다. 그러나 고효율 영상 압축 알고리즘을 연구하더라도 메타버스의 3D 공간을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려 138Gbps가 요구되듯이 VRAR기기는 물론 라우터조차 사용자의 가상공간 일체감 형성을 위해서는 많은 기간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아닌 새로운 존재는 실재와 가상의 구분이 사라지는 일체화된 존재, 즉 포스트휴먼을 만들어내기 위한 도전이라 할 것이다.

 

C. 맺는 말

 

그런데 포스트휴먼이 되려는 이러한 욕망의 근저에 있는 이상(理想)들이란 것이 완벽하게 충족되는, 더는 실물 세계를 인간이 외면하는 세계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 몸이라는 거추장스런 껍데기(이들 저자의 표현)는 가상공간에서 자유롭게 활개 치는 정신의 에너지원에 불과한 것일까? 메타버스를 찬양하는 이들의 말처럼 현실이라는 실체성은 팽겨 치자고 하자, 그리곤 가상공간에서 마음껏 자기실현을 하며 정신의 만족을 누리는 것이 정말 유토피아인가?

 

대다수의 유저인 대중은 좁은 거주 공간에서 가상공간과 접속 가능한 단말기와 VR기기를 쓰고 디지털 공간에서 부지런히 창조행위(디지털 노동)를 하며, 플랫폼 소유자와 개발자들은 세계의 모든 권력과 물질적 부를 독차지하곤 현실과 가상 세계를 호령 하게 되지 않겠는가? 이게 유토피아의 실현인가? 정부도 없고, 세금도 없고, 굳이 실물의 차량이나 옷도 필요 없는 벌거숭이 인간들, 디지털 노예만이 지구를 거니는 암울한 세계, 아포칼립스(aporkalypse)아닌가? 내겐 디지털 혁명이란 언어 아래서 탐욕을 위장한 추악한 욕망만이 보인다.

 

포스트 휴먼의 세계, 인간의 신체를 버리고 두뇌만의 정신세계를 칭송하는 이 이원론적 이데올로기의 디지털 기술에 대한 전체 인류의 거대한 협의와 합의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물음을 갖게 된다. 인간에 대한 기니긴 존재적 물음을 진정 하여야 할 때 인 것 같다. 메타버스가 지향하는 덕목들, 자유, 평등, 권력의 분산, 물질로부터의 해방...,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 육신을 떠나 오직 정신적 승리를 위해서 추구하는 것이라면 정말 무엇인가 잘못된 걸음을 하고 있는 것만 같다.

 

메타버스에 대한 과다한 선전으로 장식된 이 책은 그 이상에서부터 그 고유의 특성, 현실 플랫폼들의 장단점들, 실현 기술을 위한 디지털 기반 기술의 실태에 이르기까지 평이하고 대중적 설명으로 그 실체를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고마운 안내서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정말 꼭 가야할 현 인간의 마지막 세계라면 그 윤리적, 정치적 지향에 대한 깊은 숙고가 필요하리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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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예측 불가능성 | My Story 2022-01-15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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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역사학자 '마틴 반 크레벨드' 의 예측의 역사(A Short History of Prediction)에 대한 감상과 예측의 토대적 정신에 대한 부분적 정리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 예측의 역사 - 그 찬란한 예측 불가능성 에 대해서

 

만약에 인간에게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 완전하게 예측,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나 방법이 있다면 살아가는 것에 어떤 의미, 어떤 세상이 펼쳐 질 수 있을까? 우리들은 삶을 선택 과정의 연속이라 말하곤 한다. 그런데 미래를 남김없이 안다면 그저 예정된 길을 걸어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미래를 미리 알고자 안달하지만 정작 알게 되었을 경우 목표도 희망도 성취도 어떠한 의욕도 쓸모없어지게 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가올 세상을 예견 할 수 없다면 인간은 또한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기에 이 예측의 시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설령 그것이 무수한 불완전성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역사학자 '마틴 반 크레벨드'는 이처럼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예측하고 그에따라 행동하려는 것은 "생명 현상의 본질"이라 말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역사 내내 예측을 위해 사용된 방법들과 추론의 과정은 당대 인간들의 신념을 드러내 주리라는 것이며, 이 것은 곧 인간성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작업이라 주장한다. 인간의 예측 방식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간 동안 과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고대 샤먼에서 현대의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하는 수학적 알고리즘에 의한 예측에 이르기까지 그 방식들에 대한 역사적 접근을 통해 인간 능력의 본질을 추적한다. 이 역사적 탐사에서 어쩌면 우리들은 기존의 관점을 수정해야 하는 망설임의 지점에 이를지도 모르겠다.

 

1. 변성 의식 상태를 요구하는 예측

 

'변성 의식'이라 함은 "중독, 희열, 가수 상태, "과 같이 정신 기능에 대한 주관적 경험이 의식이 명확히 깨어있을 때의 일반적 기준을 현저히 벗어난 상태(28)"를 일컫는다. 고대 사회의 예측은 이러한 상태에 있는 샤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능력에 의존했다. 평상시와 다른 의식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이들 샤먼의 예측 능력, 마술적 힘을 지니게 된다고 믿었다. 이 샤먼이 21세기라고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발생 초기부터 '어처구니없는 사기꾼, 위험한 악령을 불러들이는 악마, 어린아이의 정신적 산물'과 같이 샤먼에 대한 의구심은 항시 따라다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 기이하고 불길한 꿍꿍이를 지닌 존재에 대해 불신을 보내며 이성적 판단을 요구한다.

 

구약에 무수히 등장하는 "신에게 영감을 받아 미리 이야기 하는 자" 로서 예언자(prophet)라 하여 샤먼과는 구분하지만 그 본래의 특성은 결코 샤먼이 하는 영()과의 교류와 다르지 않다. 에레미야, 이사야, 엘리야 등등 이들이 예언을 하려 할 때면 "아이고 배야! 아이고 가슴이야...(에레미야4:19)",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포도주에 잔뜩 취한 사람처럼 되었으니(23:9)"와 같이 변성 의식 상태에 빠져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스의 신탁을 내리는 피티아 또는 시빌라로 불리던 예언자 역시 섬망의 발생을 자극하는 가스를 흡입하고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불분명한 내용을 주절거렸으며, 이것을 신관들이 해석한 것이 소위 신탁이라는 것이었다. 꿈 또한 해몽가가 달라붙어 자신들의 꿈을 해석하고 싶어하는 이들의 욕망을 들어줬다. 아침에 깨어 꿈으로 뒤숭숭해하는 파라오의 꿈을 해석하며 정치적, 군사적, 왕의 신변에 대한 미래를 예측하는 해몽가가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특히 죽은 자와 상담한다는 심령술사는 고대로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에 더욱 번창했던 예언 행위의 일면을 보여준다. 베르길리우스의아이네이스나 단테의신곡에 등장하는 죽은 자들은 한결같이 미래를 알고 있는 자들로 등장하여 예언적 말들을 들려준다. 오늘 현대 합리주의 이성을 지닌 우리들은 심령술에 의지하는 것을 나약함과 혼란의 징표라고 여기기도 한다. 더구나 1326년 교황 요한 22세의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용한 심령술사 처단이라는 강력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심령술사는 어디에나 있었다는 당대 역사의 증언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믿음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1904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존 윌리엄 스트럿 레일리'는 심령연구협회장을 맡기도 했다니 입증 불가능한 영매에 대한 사람의 오묘한 마음에 대한 주소를 가늠케 한다. 이러한 영적 믿음에 대한 심리학적 규명을 떠나서 인간의 문화적 신념 그 자체로 이해 될 필요가 있다.

 

 

 

2. 합리적 예측의 형식을 지닌 것들

 

샤먼,구약의 예언자, 신탁 예언가 시빌라, 꿈 해몽가. 심령술사 등 이들은 한결같이 변성의식 상태에 기초한 예측 행위들이다. 근대 사회 이전의 모든 예측이 이처럼 이성과 논리를 사용하지 않는 예측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상세히 관찰하고 규칙을 만들어 적정한 추론에 의한 미래 예측을 하기도 했다. 점성술(astrology)은 그 대표적인 예측 방식이다. 하늘의 별자리를 관측하고 그 주기적 질서를 인간의 삶과의 연관성을 통해 의미를 부여한다.

 

사실 이 방식이 합리성을 취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황도대의 12궁과 인간의 네 가지 기질(다혈질, 담즙질, 우울질, 점액질)사이의 관련성(133)"으로 인간의 미래를 예측한다는 그 유사적 유추는 조잡해 보이기까지 한다. 한편 징조나 전조와 같이 일상에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 새롭고 드문 현상의 목격은 인간에게 정신적 경각심을 야기하고, 이는 곧 명백한 미래의 현상을 암시하는 예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혜성의 다가옴이나 태양 흑점의 증가나 감소는 다가올 재앙으로 해석되거나 인 간 영혼에 대한 유리와 불리함으로 유추하곤 했다. 이에대해 '성 아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했다.

 


"징조는 해로운 호기심과 마음을 괴롭히는 불안, 지독한 예속으로 가득 차있다. 징조에 어떤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의를 기울이고 기록을 하기 때문에 징조에 의미가 생긴 것이다." -147


 

이러한 믿음들의 역할이 사라지게 된 것은 과학 혁명이다. 혜성은 재앙이 아니라 단지 주기적인 운동일 뿐임을 증명한 '에드먼드 헬리'의 치밀한 관측에 의한 과학적 예측의 정확성에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번개 또한 신의 징벌이 아니라 구름의 전기 방전 현상이라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발견처럼 '세계의 탈주술화'에 밀려난 것이다. 기원전 고대 철학자인 플라톤 역시 점술은 "인간의 지혜가 아닌 어리석음"의 증거라고 힐난했음에도 주술 세계에서 벗어난 오늘에도 이들 전근대적 예측 방식은 여전히 그 믿음을 따르는 인간을 없애지 못했다. 왜 사람들은 이러한 비이성적 예언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아마 이들 예측의 모호함에 따른 자의적 해석이 주는 자기 위안적 예언의 가능성과, 유치하기까지 한 유아적 유추가 주는 수월함이라는 무사유의 편리함이며, 과학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직접적인 강렬함의 인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바이블 코드(Bible code)'라는 성경의 문장을 낱개의 알파벳으로 열거한 후 그것을 종과 횡, 대각선으로, 혹은 한 자 건너 한 자를 읽으며 마치 예언적 문구가 있었다며 예수의 예지력을 말하는 것처럼 공허한 것에 대한 믿음도 여전히 횡행한다. 이 방법들은 "성경이외의 이 세상의 모든 책에도 적용 가능(193)"하다. 개개의 인간마다 그들이 성장하고 활동하는 문화적 공간에 다소의 차이들이 존재한다. 이들 미래 예측 방식은 이러한 문화적 태도와 믿음이 결합되어 특정 개인들에게 주입된 문화의 영역에 좌우되곤 하는 듯하다. 이렇듯 터무니없는 헛소리이지만 바로 그것에 은닉된 인간 본성의 모습을 관찰하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이기도 하다.

 

3. 현대적 예측 방식

 

현대적 예측 방식은 분명 다음과 같은 클리셰를 기초로 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미래는 과거의 앎을 양분으로 한다는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거나 주기적으로 순환한다는 발상이다. 따라서 과거의 관찰, 역사적 교훈을 발견하면  미래를 보다 근접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변하지 않는 속성들이 있다. 권력의 속성이나 이를 얻고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방법은 누천년간 변하지 않은 것들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말은 불변하지 않는 세계의 패턴을 주장하는 목소리지만 오늘 이러한 논리로는 아무런 예측도 내 놓을 수 없다.

 

이 역사적 패턴의 순환이나 반복이라는 생각은 오늘에도 건재한데, 특히 경제학에서 말하는 경기의 주기 이론이다. 쿠즈네츠 사이클이나 드라티예프 파동 이론은 불황과 호황 설명의 주류로서 활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경기라는 것은 본디 고저를 오르내리는 것이고 이들의 주기 년한이란 것이 항상 들어맞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이들이 중요 변수로 사용하는 석탄, 철 등물질의 중요성은 이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여 실제 경제를 반영하지도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더 이상 무수한 자료들 중에서 어떤 자료(변수)가 유의미한 지를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게 되었지만 의미의 유효성과 무효성을 구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 특정 변수를 이용하는 것은 예측의 정확성을 심하게 왜곡시키곤 한다. 저자 크레벨드는 인간 예측의 역사 이래 "지속적이고 확실한 하나의 '마스터 키'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213)."고 단정한다. 1965년 인텔의 창시자 중 한 명인 '고든 무어'는 집적회로의 트랜지스터 수가 18개월마다 2배로 증가할 것이라 선언했으나 이 예측은 오늘에는 아무런 의미도 전해주지 못하는 무용한 예측이 되었다. 속도가 너무 빨라 관계들이 자리를 잡기도 전에 낡은 것이 되어버리는 세상이 되었다.

 

드디어 오늘을 휩쓰는 예측의 기술인 변증접적 역사 방식에 기초한 '트렌드', 즉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회적 변화의 개념을 반영한 예측 방식이다. 사실 오늘날 기업의 경영계획을 비롯한 국가의 예산 계획은 모두 이 트렌드에 외삽법을 가미한 예측이라 할 수 있다. 과거의 추세를 전제로 하여 이 연장선 위에 미래의 일정 시점에서의 상황을 예측하는 것이다. 세계의 위대한 석학들인 스티븐 핑거, 유발 하라리, 레이 커즈와일 등의 저술 상의 예언들은 이 방식을 토대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방식 또한 우리의 인지 편향을 배제하지 못하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트렌드(추이)란 여기에서 나올지 모르는 이익을 얻고자 하는 트렌드가 가세하여 스스로 가속화, 증가한다. 또한 외삽법 역시 주로 발전중인 분야에 촛점을 맞추기에 이것은 예측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방향을 심화시키는 일종의 방향 제시가 될 우려를 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역사는 결코 자연과학의 법칙을 따른 적이 없다.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항상 물이 되듯이 인간 세계는 불변의 동일한 상황을 낳지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늘 자기 고유의 길을 걸어왔다. 즉 변증법적인 "더 높고 새로운 수준으로의 고양"을 향해 걸어왔다는 것이다. 급기야 현대인들은 강력한 예측 도구로서 통계학을 토대로 하는 모델, 그 알고리즘을 통한 예측에 나섰다. 이것은 점성술이나 역사 주기론과 같은 자의성이 개입된 단순 합리론도 아니며, 변성의식상태에 의존하는 영적 예측도 아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중대한 특이점이 있다. 이 모델 예측 방식은 "한 인간의 삶에 대한 예측은 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집단의 미래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251)"는 것이다. 보험업자는 특정 인간이 교통사고를 낸다고 예측하지 못하지만 나이, 성별, 년간 주행거리와 같은 범주에 따른 사고율을 거의 정확하게 예측하곤 막대한 수익을 얻는다. 이 통계적 확률 모델은 리스크 관리와 추정 이익 등을 예측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이 모델 역시 수시로 중요 변수를 변화시켜 주어야 하며, 변수들의 배제와 포함 여부라는 선택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이들 또한 인간과 환경의 복잡다단한 요소들의 빈틈없는 반영의 산물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한국 사회에 한창인 선거 결과 예측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여론 조사 역시 통계적 모델 방식의 하나이다. 여기에는 표본집단 선택과 편향 배제를 위한 임의적인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며, 여론 조사 발표는 미래의 결과에 영향을 끼쳐 예측이라기 보다는 미래 결과의 강화를 조장하기도 한다. 더구나 언제나 말한 대로 행동하지 않는 인간의 심리적 동요는 반영할 수 도 없으며 반영되지도 않는다. 다분히 정치적 이익집단에 의한 조작과 왜곡이 개입하는 근대 이전의 샤먼이나 점성가의 예측보다 나을 것이 없는 방식이라 할 수도 있다. 외형은 과학적 도구인 통계를 이용하지만 여타의 섬망이나 직관적 유추와 그리 다를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현대 과학의 엄청난 진보의 역량에 기대 막강한 컴퓨터 및 예측 장비 동원한 오늘의 기후 예측은 예전보다 조금 나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 정보는 별로 진전된 것이 없기도 하다. 다리가 쑤셔오니 비가 올 것 같다는 징후에 의한 예측이나 60% 비 올 확률의 예보가 무엇이 그리 다른가? 비는 오거나 오지 않는 것이다. 60% 비가 내린다는 이 애매모호한 예보는 항상 옳거나 틀린 예측이다. 사실 이 표현은 외형적으로는 과학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저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예측 가능한 미래' 라는 표현처럼 역량 부족을 눈가림 하는 언어처럼 꼴사나운 말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다.

 

 

 288쪽 부분 발췌

 

4. 결 어

 

인간의 예측을 향한 관심은 모두에서 말했듯이 생명 현상의 본질이다. 이 책의 여정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아내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의 역사를 탐사하며 궁극적으로 인간 본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의 관점으로 보면 미친 인간의 헛소리이거나 터무니없는 소리이고 음험하고 교활한 술책을 숨긴 조작된 말이지만 그것들은 당대의 나름대로 인간의 문화적 속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과학화, 관료주의적 통제 방식이 휩쓰는 오늘날의 일관성, 규칙성, 신뢰성을 축으로 하는 과학적 예측이라 하여 그리 나을 것도 없다.

 

아마 파우스트가 예측 불가능성을 토로하는 구절이 진실의 목소리일지도 모른다. "내 가슴 속에는 아아,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있구나,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 무엇이 현실이 될 지 예측하는 것은 순전히 운 또는 기껏해야 직감이라 알려진 모호한 것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294;파우스트1-1112,)"

 

정말 중요한 예측의 누락이 있다. 결코 예측에 반영하지도 할 수도 없는 것,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사실을 고려할 어떠한 방법도 없다는 점이다. 이에 더해 "무엇인가 관찰하려는 시도가 그것의 변화를 일으키고, 아원자 수준에서 두 개를 동시에 측정 할 수 없다(295)"는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불확정성의 원리나 복잡계의 카오스 이론처럼 인간에게는 완벽한 예측을 가능케 할 충분한 지적 능력 없음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다. 어쩌면 인간의 '찬란한 예측 불가능성'이 인간의 본질인지도 모를 일이다.

 

만일 기표가 기의에 정확히 일치하여 아무런 간극도 없이 정확히 일치하는 세계, 남김없이 명확한 미래의 예측이 가능하다면 과연 인간의 삶이 더 풍요로워질까? 냉혹하고 모든 것이 그저 의미없이 거닐어야 하는 무의미, 아마 무()의 공간이 되지 않을까? 인간의 예측 역사라는 지대를 탐사하며 예측이란 인간에게 삶의 고유한 향취를 더해주는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 같다. 개인의 예측이 배제된 현대의 세련된 과학적 예측 방식은 호기심 가득한 인간 본성으로부터 결코 점술과 샤먼(무당)의 예언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예측의 역사

마틴 반 크레벨드 저/김하현 역
현암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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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과 권력 - Masse 02 | 나의 리뷰 2022-01-13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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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의 형태적 분류에서 규모의 확산 기준에 따른 열림과 닫힘의 군중에 이어 밀도와 평등성의 속성, 목표의 본질에 따른 군중의 특성을 관찰하고,  군중이 품고 있는 감정에 의한 군중의 성향을 알아본다.   『군중과 권력』의 도입부인 「군중」에 대한 두 번째 소회 혹은 정리((39~95쪽)이다. 따라서 책의 도입부인 군중에 대한 읽기는 3회에 걸쳐 기록될 것 같다.


 

군중의 형태 분류; 밀도와 평등성 그리고 목표의 본질

 

밀도와 평등성은 항시 동행하는 것이 아닌데,  여기서는 군중의 '방전(응축된 것의 폭발 또는 해방)'이란 것이 중요한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정체 상태를 오랜동안 지속하며 자신의 밀도를 높이며 언젠가의 방전을 기다리는 군중이 있을 수 있으며, 아예 처음부터 끊임없는 방전을 수행하는 군중도 있다. 이를 각기 '정체 군중''율동적 혹은 박동적 군중'이라 한다. 

 

닫힌 군중의 특수한 예로서 이미 언급된 경기장에 모여든 군중은 정체 군중의 적절한 보기가 될 것 같다. 빽빽한 밀도로 압축되어 있으나 언제 방전이 일어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방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상을 가진 방전이 유예된 군중이다.  골(Goal)이 터지기까지 군중은 인내한다. 그러다 골이라도 터지면 일제히 진정되었던 감정들이 엄청난 함성으로 일제히 터져 강렬한 감정의 힘으로부터 생기는 자유를 만끽한다. 이렇게 와해되기 전까지 몇 차례의 방전이 있는 경기장의 군중과 달리 피아노 협주곡이 울려퍼지는 음악회의 군중이나 연극,오페라를 관람하는 군중은 인위적으로 훈련된 소위 교양이란 것에 의해 정해진 때 박수를 치며 그것을 어렴풋이 알릴 뿐이다. 이 기묘한 반응은 이들 관객의 정체 상태에 대한 의식화된 행태의 발현일 것이다. 이들 군중은 방전이 내면화되거나 이처럼 작은 흔적만을 보이기도 한다.

 

이와 달리 율동적 군중은 밀도와 평등성이 동시에 실현되는 군중이다. 이러한 형태의 군중의 모습은 일사분란하게 하나의 노래나 음악에 맞춰 펄쩍 펄쩍 제자리에서 뛰거나 동일한 신체의 움직임을 하는 열린 군중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보다 율동의 지배력에 완전히 포획된 군중의 모습은 원시 부족들의 어떤 충동에 휘말린 듯한 광적인 춤에서 흔하게 목격할 수 있다. 자기 집단의 수를 먼 미래가 아닌 즉시에 늘리기 위한 수단으로서 하나처럼 움직이는 군중의 땅을 박차는 소리는 경계 밖의 사람들에게 극도의 경계심과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율동이라는  반복과 중첩의 행위로 부족한 수를 보충하고, 내부적으로는 동일한 목표를 지녔다는 일체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똑같은 순간에 똑같은 동작을 함으로써 춤추는 각 개인은 평등감에 사로잡히고 이것은 집단 구성원에게 일체화된 막강한 힘의 소유를 느끼게 해준다. 여기에 어떤 도전은 즉각 공동에 대한 위협이 되고 난폭한 행동을 유발한다. 외부 집단에 대한 하나의 단일체임을 과시하는 효과적인 수단인 것이다. 

 


 

이같이 방전에 의한 평등감의 실현이나 밀도로 인한 일체감 형성의 군중이라는 분류 기준 외에 군중의 본질적 목표를 마냥 지연시켜 결국 목적지가 곧 방전인 기묘한 군중, '느린 군중'의 형태들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이러한 야릇한 군중의 형성 유지를 대부분 종교 집단에서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느린 군중의 예는 약속의 땅을 향한 무려 40년간 유랑이 지속되었던 출애굽 군중처럼  "부동의 목적지(50쪽)" , 하나의 절박한 목적을 위한 인내의 군중이다. 즉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방전인 지연된 목표를 향한 군중이다.  "위대한 종교들은 이 지연 작업에서 대가다운 솜씨(53쪽)"를 보여준다.

 

방전이 한없이 유예되거나 부인된 느린 군중은 빈번한 와해를 제거하여야만 존속된다는 운명을 잘 알고  있기에 영악한 수단을 마련했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고 이승에서는 결코 도달될 수 없는 목적을 선정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아 복된 천국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자격, 오직 믿는 자에게만 허용되는 저세상이라는 죽음의 입구가 목적이 되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이 보이지 않는 모호성 때문에 배신자를 단속하는 것은 자의적이고 수월해진다. 신성불가침의 목적지가 곧 방전이 되는 오늘날의 세계 종교들이 느린 군중의 속성을 갖는 이유이다.

 

망자들, '귀신의 대군(slugh)'이라는 고대의 전설을 통해 전해져오는 죽은 자들인 군중은 보이지 않는 군중이지만 무릇 산 자들에게  여전히 이 상상의 군중은 엄청난 위력을 행사한다. 특히 느린 군중인 종교 집단은 이 보이지 않는 군중을 믿음을 유지키위한 유용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감정의 분류에 의한 군중의 유형

 

카네티는 감정의 유형에 따라 군중을 다섯 가지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금 동물과 인간이 공히 공유하는 군중과 인간 고유의 군중으로 분류하고 있다. 전자는 추적과 도주 군중이며, 후자는 금지, 역전, 축제 군중이다.  이 중에서 추적 군중과 금지, 역전 군중은 오늘의 대중들이 형성하는 군중의 감정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유형이다.

 

'추적 군중'은 사회에서 행해지는 어떤 행위가 군중의 뜻을 뚜렷하게 배반하고 있다는 공감 형성의 확산과 같이 처단할 대상이라는 목표가 분명할 때 신속하게 이뤄지는 군중이다. 이 처단 대상을 제거하는 공동의 참여에 사회는 이렇다할 방해 명분이 없기에 이 추적 군중의 목표는 안전하게 그리고 오히려 권장되기까지 하곤 한다. 사실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군중의 유형이다. 추방이나 공개 처형과 같은 공동 살해를 위해 모여든 군중은 오늘날 이러한 원시적 형태와는 다소 변형된 재판이라는 형식을 이용하지만 어쨌든 궁극적 목표인 처단(처형)을 부르는 추적 군중으로서 한국 사회의 촛불 시위에 모인 군중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라!"라는 유대인들의 외침은 문자 그대로 추적 군중의 목소리다. 이  공동 살해를 위해 모인 군중은 처단이라는 격하 조치를 통해 처단의 대상과 군중을 평등의 위치로 되돌려놓는다. 이 격하 대상과 군중과의 간격이 크면 클수록 군중의 흥분, 쾌감은 더욱 강렬해진다. 무엇인가 해냈다는 희열, 방전의 순간을 맞으며 추적 군중은 해산한다. 

 

그러나 몇 세기 전의 공개 처형처럼 처단된 제물의 머리가 군중에게 직접 주어져 군중을 충격으로 몰아넣는 일은 오늘날 발생하지 않지만, 이 대상의 정치적 동료들은 군중의 와해를 조속히 진행시키기 위해 대상을 신속하게 던져주곤 한다.  이들 동료 정치인의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동료의 머리를 군중에게 내던져 주는 일은 한국 사회에서는 아주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함께 몰락하는 일은 한국의 수구 정치 세력에게는 결코 찾아 볼 수 없는 미덕이라는 점은 이 사회의 정치 집단을 통제하는 어떤 실마리를 제공하는 관점이 될 수도 있겠다.

 


"얘야, 늑대는 늘 양떼를 잡아먹고 살았단다. 그런데 이제는 양떼가 늑대를 잡아먹을 차례인가 보다."    - 1789년 프랑스 혁명 중 '줄리앙 부인'의 편지에서,  75쪽


 

이와 유사한 군중이 있는데, 이는 추적 군중처럼 특정 대상이나 사건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상황을 역전 시켜야 할 필요성의 대두, 이를테면 계급화된 사회의 상하 역전과 같은 혁명적 상황을 목표로 하는 군중이다. 이를 '역전 군중'이라 한다. 즉 소수로 이루어진 지배계급의 영악함에 대항해 다수의 수적 우세라는 군중 형성으로 개인으로서는 불가능했던 일을 성취하려는 군중이다. 사실 추적 군중의 표면적 활동과 역전 군중의 행위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추적 군중에게는 역전 군중의 감정이 스멀스멀 피어나기도 한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정치 집단은 그래서 추적 군중이 역전 군중으로의 변화를 재빨리 차단하기 위해 제물을 신속하게 던져 주기도 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동맹 파업을 카네티는 왜 '금지 군중'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웠는지 모르겠다.  아마 수많은 사람들이 평상시에 잘 수행하던 일을 갑자기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극히 내부적 행위라는 점에서 여타 군중의 외부적 상황에 의한 형성과 다르기에 명명된 것 같다. 이는 일상적으로 수행되던 규칙과 질서의 금지를 선언하는 것이며, 만일 이 금지를 어기고 자신들의 외부 세계가 기대하는 바에 따르는 자는 곧 배신자이며 적대자가 되는 엄격하게 닫힌 군중이다. 

 

또한 이 파업 노동자 구성원들은 노동 현장에서의 상하 질서가 파괴되고 모두가 적대 세력에 의해 동일한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일체감과 평등감을 느낀다. 이 조직은 그 수명이 짧다는 한계 때문에 금지 경계의 넘나듦에 엄격한 규칙을 지닌다. 개별 행동이 방치되는 순간 일체성의 손상과 함께 군중이 파괴되기에 그렇다. 오늘날 노동조합을 와해시키려는 경영집단의 시도가 바로 여기에 집중되는 이유이다. 타협보다는 분열과 와해를 통한 해결에 관심을 갖는 자본의 인색함, 착취욕이라는 속성 탓이리라.

 

피난민 대열과 같은 '도주 군중'이나 방종과 향락의 평등 군중인 '축제 군중'은 내게 이렇다할 연상을 주지 못했다. 어쩌면 이 분류의 용도를 다시금 상기해야 할 때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군중의 분류상 마지막으로 특수한 군중으로서 '보이지 않는 군중' '이중 군중', '군중  결정체'는 세번째 감상으로 넘겨야 겠다. 일회(一回)의 소회가 너무 길어진 것 같다. 이러한 유형별 군중의 속성은 오늘날 대부분 정치, 사회적인 전술 전략의 기본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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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과 권력 - Masse 01 | 나의 리뷰 2022-01-11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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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중 현상과 권력의 상관 관계에 대한 '엘리아스 카네티(Elias Canetti)' 필생의 역작인 『군중과 권력(Masse und Macht)』을 읽어나가며 대략 20회 정도의 짧은 감상을 남겨두기로 했다. 세분화된 개념마다 별도의 글로 작성되어 어떤 일관적 성취를 하고 있기에 그때마다 떠오르는 단상을 남겨두는 것이 독서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 시작한다. 다음은 책의 도입부인 「군중」의 전반부(~50쪽)에 해당한다.  아마 '닫힌 군중'의 분출에 대한 인상적인 글이 아니었으면 이 행위를 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르겠다. 카네티의 통찰력이 너무 매혹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제 '군중의 물리학''권력의 정신분석학'의 세계로 들어가기로 한다.

 


 

군중이란 개념은 아주 희한한 현상이다.  사람들은 대개 낯선 사람과의 접촉을 기피하고 혹 누군가 손끝이나 어깨, 신체의 한 부분을 스치고 지나가기라도 하면 눈을 부라리고 곧 싸울 태세를 갖추기까지 한다. 접촉에 대한 이러한 신경질적인 회피 반응을 하는 사람들이 몸과 몸이 빽빽하게 밀착되다시피한 물리적 밀도가 높은 군중이 되었을 때는 접촉 공포가 사라진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 아닐 수 없다.

 

왜 이렇게 밀집된 공간에 밀착되어 군중이 되려하는 것일까?  "민 자가 밀린 자요, 밀린 자가 곧 민 자인 것처럼 느껴지는(18쪽)", 이것이 그 답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구별도 해제해버리는 이 움직임이 몰고오는 평등감, 이 평등감이 접촉의 두려움을 지워버린다. 아니 오히려 안전감마저 느끼게 된다.  이같은 '접촉 공포의 전도(顚倒)'가 바로 군중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때때로 광장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게된다. 혹은 그 일원인 군중이 되기도 한다. 처음에는 소수의 사람이 특정 장소에 도착하고 곧이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밀도를 높여간다. 이렇게 자생적으로 형성된 군중일지라도 그 발생시기부터 성장 욕구를 지닌다. 경계없이 누구나 아무런 장애없이 그 군중에 가세하여 밀도를 더욱 높일 수 있다. 이렇게 확장에 한계를 지니지 않은 군중을 '열린 군중(die offene masse)'이라 부른다. 이와 대조되는 군중, 군중의 성장을 포기하고 영속성에 역점을 둔 군중을 '닫힌 군중(die geschlossene masse)'이라 정의 한다. 

 

평상시에 개인은 저마다의 계급, 신분, 재산 따위에 딸려있는 자기만의 권속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러한 위계질서가 만들어내는 사람간의 간격을 확고하게 하고 확대시키곤 한다. 즉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개인들에게 중압감을 주고 상호 고립되도록 강요(21쪽)"한다. 이 위계질서의 심리가 인간의 마음을 붙들어 매 상호간의 행동을 규정한다는 것은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사람 사는 세상의 철칙처럼 되어있다. 그러나 이 위계의 고저는 움직임의 자유에 대한 제약이다결코 자기만의 행위로 이 자유, 간격의 철폐, 접촉의 실현은 달성되지 않는다. 타인이 간격을 고수하는 한 가까이 갈 수 없는 탓이다.

 

군중의 미덕은 이러한 심리적(무의식적,의식적) 욕구를 실현 시켜준다. 함께 모임으로서만 간격의 질곡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밀집 상태, 가득찬 사람의 군집인 군중은 위계질서가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해지는 환상을 선사한다. 하지만 항구적이고 진정한 평등은 아니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이전의 권속이 다시금 부활하기에 그렇다. 만일 진정한 전환이 일어나는 군중이라면 그것은 닫힌 군중, 엄격한 규범에 의해 제한된 사람들만의 결속체일 경우가 될 것이다. 어쨌든 군중은 항상 와해의 예감을 안고 있기에 유지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구성원의 유입, 즉 군중은 계속 성장해야만 한다. 

 


【본문 22쪽, 부분 발췌 인용】

 

군중의 속성들

 

개인들의 이러한 최초의 밀집은 위계질서, 즉 기성의 무엇인가에 적대적 욕구가 투사되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닫힌 군중으로 제도와 각종 규범에 의해 자유와 평등에 대한 욕구를 진정시키고 있다.  직장 내의 상사와 부하, 정교한 사내 규정들, 혹은 저 멀고 먼 종교적 목표를 위해 인내하고 있을 뿐이기도 하다. 그러다 이 닫힌 군중들이 열린 군중으로 전이한다. 이것을 '분출'이라 한다. 진정, 억제, 지연 되었던 욕구들이 해방되어 도시의 광장과 길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여기에 어떤 본래의 특성들이 내재되어 있을까? 군중이 그들의 적이라 규정한 것에 대한 파괴적 분출, 그리고 그들에 적대적 감정을 야기한 대상에 대한 집요한 추적의 감정이다.

 

각종 간격을 타파하는 상징적 폭력과 파괴 욕망이 실현되는 모습을 우리들은 목격하게 된다. 보도블록을 깨부수어 던지고, 동상이나 특정 건물을 파괴하여 수긍할 수 없는 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군중의 존재 이유와 만족감의 표출이며, 이로인해 군중의 결집과 확장의 동력이 충전된다. 이렇게 기성의 질서와 경계를 파괴함으로써 군중 구성원은 갇혀있던 인격의 한계를 초월하고 자유의 안도감을 확보하게 된다. 아마 이 파괴적 욕망의 가장 인상적인 것인 '()'은 한국사회 군중들이 들어 올리는 촛불의 상징성을 떠올리게 한다.

 

아주 먼 곳에서도 촛불은 보이고 사람들을 이끌어 군중의 밀집도를 높이고, 무한히 확대되어 가는 촛불의 확산은 적대적인 것에 대한 파괴의 성취를 예견케 한다. 만일 누군가 이 군중을 파괴하려 한다고 가정해보자.  외부로부터의 어떤 공격도 부당한 악의로 해석되기에 결코 공권력으로도 와해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결집을 강화하게 될 뿐임을 한국사회의 짧은 민주화 역사가 그것을 보여준다.  사실 이러한 군중의 와해는 내부로부터의 공격으로 무너진다. 즉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혼자있고 싶어하는 조그만 반역자의 욕망을 지닌 개인의 욕구"가 소란을 일으킬 때이다.  따라서 항구적 단절과 고립이라는 물리적 차단을 비롯한 협박과 회유는 군중 내부의 반역자를 활성화시켜 붕괴시키려는 외부 공격자들의 유일한 술책이 되곤 한다.

 

카네티의 닫힌 군중은 세계 종교들의 특징을 발견하게도 하는데, 군중의 반역성은 본유적인 것이기에 와해의 두려움이 상시적으로 존재한다. 그렇다고 목표 달성과 함께 저절로 와해되는 열린 군중처럼 기한의 한계를 가지지 않으며, 격렬하고 신속한 '분출'이나 '폭발적 방출(방전;entladung)'을 군중에게  제공할 수 없는 닫힌 군중의 전형인 종교는 영구적으로 구성원을 잡아놓을 방책이 요구된다. 따라서 초기의 종교들은 결속과 영구성을 확보하기 위한 내부의 규칙과 제도 구축을 절감하게되고 나름의 제도 도입에 비상한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종교적 의례와 각종 계율등의 규칙이 정립되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구성원을 묶어 둘수는 없다. 분출이나 방출을 할 수 있는 목표가 현실적 눈 앞에 있다면 달성되고 와해되고 말기에 인간이  "살아있는 한 도달할 수 없는, 끊임없는 노력과 복종 끝에 마주하게 될 죽음의 순간(31쪽)"을 목표로 설정하게 된다. 또한 군중의 반역성을 잠재우기 위해 '순한 양떼'를 요구하며 신도가 '양'이 되어 순종할수록 칭찬과 영예를 선사한다. 종교의 존속은 이러한 요소들을 규칙적으로 반복케하여 구성원들의 경험에 내면화시킴으로써  이 반복에 헌신과 쾌락을 감응케 한다. 종교를 들여다보면 자신의 군중을 유지 존속키 위한 군중 속성 모두를 완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가끔은 이러한 종교가 열린 군중 행세를 하려 할 때가 있다. COVID의 무차별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집합 예배를 자제할 것을 당부했을 때, 반발하여 정권을 향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열린 군중 행세를 하는 경우는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내세적 목표를 가진 집단이 갑자기 현세라는 구체적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순간 금지의 규율로 자신들이 인내했던 응어리가 분출되어 광란의 행태를 보인다. 더이상 이들은 종교인이 아닌 전혀 다른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이제 이 군중은 닫힌 군중이 아니라 열린 군중이라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이렇게 종교는 더는 종교가 아닌 이기적 이익 집단이 된다. 하나의 현상에 대한 성찰 도구로서 이 군중의 속성은 유효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매우 흥미로운 군중의 이해도 있다. 국가간의 축구 시합이나 프리미어 리그같은 관객이 빽빽한 경기가벌어지는 경기장의 군중을 보자. 이것은 닫힌 군중에서도 다소 특이한 성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밀도의 상한선이 정해진 군중이 정해진 시간에 자신들의 일상적 규칙과 습관을 떨쳐버리고 대규모로 모여 있는 것이다.  이들의 목표는 무엇일까?  바로 '공동의 흥분'이다. 수 만의 머리가 스탠드 아래에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를 바라보고 있다. 군중들은 자신들의 앞과 마주보이는 사람들의 흥분을 통시에 볼 수 있다. 타인의 흥분에 자신의 흥분을 더하게 된다. 이들에 깃든 동질성과 포용성이 바로 군중의 속성이다. 골을 넣거나 심한 태클로 선수가 부상당하면 아~, 또는 와~하는 경기장을 가득 매운 함성이 장관을 연출한다. 군중은 방전을 필수적으로 요구한다. 이 방전이 없다면 군중은 더이상 군중이 아니게 된다. 그 순간  군중 구성원 모두는 평등과 해방감에 전율한다. 현대 스포츠의 스펙타클은 이 군중의 속성을 전제로 한다. 

 

군중의 밀도와 확장을 기준으로 한 열린 군중과 닫힌 군중이란 개념에서 시작된 군중의 특성을 살펴보는 책의 도입부만으로도 이어질 카네티의 35년 장구한 연구 내용의 흥미진진한 기대를 멈출 수가 없다.  이제 군중의 또다른 분류기준에 의한 탐사로 시선을 돌려야 할 것 같다.

 

군중과 권력

엘리아스 카네티 저/강두식,박병덕 공역
바다출판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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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예스리커버] 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저/김은령 역/홍욱희 감수
에코리브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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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봄; Silent Spring은 생물학자 '에드워드 O. 윌슨'의 지적처럼 생태계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높이고, 환경운동의 탄생을 가능케 한 위대한 저작물이다. 영면(永眠)에 든 '레이첼 카슨'이 오늘의 지구 환경을 보았다면 과연 어떤 충격적 자극을 우리 대중에게 선사하려 할까? 이 책이 집필되고 발표되던 1962년과는 그야말로 비교할 수 조차 없는 환경오염과 온난화, 전 지구적 전염성 질병의 확산에 경악하지 않았을까? 

 

책은 과학자와 행정 관료들만의 전문 용어를 지양하고 대중적인 친화적 언어를 이용하여 치밀하고 입증 가능한 사례와 연구분석 자료, 그리고 환경의 생태적 영향을 밀도 높은 실증적 언어로  대중의 인식을 깨운다. 어쩌면 환경 보전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접근 방법의 가장 효과적인 모델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카슨은 인간의 환경 파괴적 행위를 '중단'하라는 말 대신에 '폐해를 끝내자"고 말한다. 즉 피상적이고 공격적인 언어가 아니라  구체적 행위로서 '수단'이 지닌 과학적, 생태적 문제점을 토대로 한 해결책을 찾자고 촉구한다. 

 

1950년대  화학제로 만들어진 DDT등 방역제의 무차별적 살포가 광범위한 생태계의 구성요소인  물, 토양, 식물, 곤충, 동물, 인간이라는 상호유기적 공동체를 손상,파괴시키고 있음에도 부인하거나 외면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화학기업, 이해관계에 얽힌 과학자들, 정부 관료들의 실체를 대중에게 인식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과학자 카슨에게는 중요한 의무감이었던 듯하다.  또한 대중의 생태계에 대한 관심을 모으기 위해 무엇보다 인체에 미치는 자연과의 유기적 관계성을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했음을 읽을 수도 있다. 카슨은  이를위해 실제 살포 지역의 구체적인 피해를 적시하고, 해당 살포제의 성분과 그것의 생태계 구성 인자들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입증된 과학적 연구,분석 자료를 토대로 조목모족 설명하고 있다.

 


"새로운 살충제를 고안해내는 속도가 유독물질의 영향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습득하는 속도를 훨씬 앞지르기 때문에 살충제(디엘드린)가 우리 몸 속에 어떻게 축적되고 분배되며 배출되는지 그 일반적 지식에는 허점이 많다."     -49


 

무엇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산업주체들의 행태는 인간을 비롯한 생태계에 대한 '총합적 위험'의 검증없이 제품을 개발,생산,판매한다. 만일 살충제의 살포, 화학제의 무단 방출 등으로 인한 호수나 강, 인근 해역의 어류 패사 등 환경적 위험을 지적하면, 물 속에서 해당 성분이 없으므로 관련없다고 버젓이 주장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검출되지 않던 유독 성분이 세대를 거듭하며 번식한 플랑크톤에서는 계속 발견(73쪽)"되는 것처럼 생물의 몸에 담겨진 것 뿐이다. 

 

이와는 다른 유형의 폐해로 독성 물질인 알드린을 포함한 살충제를 살포하여 폐사한 동식물의 원인을 조사하자 알드린은 검출되지 않고 다른 독성 물질인 디엘드린이 검출된다. 다시금 해당 살충제와는 무관한 현상이라 선언하는 것이며, 살충제는 무차별 살포된다. 사실은 "인간 개입없이 대기,물, 빛에 의한 화학작용으로 전혀 새로운 물질이 만들어진 것(68쪽)"이다. 알드린은 디엘드린으로 쉽게 변하는 화학물질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화학물질의 상호작용은 그 결과의 예측은 물론 통제 불가능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한다.

 


"장기적 인식과 불확실한 효과를 언급하면 '비관론자들의 근거없는 상상'으로 무시한다."   -93쪽


 

화학적 방제를 생물학적 자연방제로 전환할 것을 제안하면 비용의 잇점을 주장하곤 한다. 카슨은 이러한 편협한 단견을 비판한다. 특정지역의 해충 제거의 이익과 방역살충 비용의 대비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무관한 익충과 동식물의 떼 죽음, 이들 자연의 복원비용, 그리고 완전 박멸되지 않아 천적이 사라진 지역에서 내성을 키운 해충의 폭증에 따른 추가 비용의 발생 등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중대한 오판이라는 것이다.

 

카슨의 지적처럼  이는 "특정 이해관계에 연루된(112쪽)" 학자들과 관료들의 부패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산업체로부터  받는 연구기금, 방제라는 명분 뒤에 숨은 관료와 산업체와의 은밀한 유착은 생태계 파괴라는 거대한 과제에 있어서조차 보이는 반(反)생태적 행태로서 지금도 단절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책에는 불개미 퇴치와 왜콩풍뎅이 퇴치라는 두 개의 대규모 방역사업이 소개되고 있는데,  당시 농무부 관료들, 법원 판사, 주의회 의원이 한결같이 무참한 피해를 외면하고 산업체의 입장을 옹호하는 장면은 많은 시사점을 남긴다.

 

 


 

 


"한 때 새들의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가득 찼던 아침을 맞는 것은 어색한 고요함 뿐이었다." -127쪽


 

저 비행, 무차별 살포가 가져올 생태적 피해를 우려하는 시선에 정부 관료는 "별다른 주의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 살충제는 인간은 물론 애완 동물에게도 피해가 없다(115쪽)"고 주장한다. 1957년 2,000만 에이커 지역에 불개미 퇴치라는 명목으로 엄청나게 내리붙는 살충제의 살포는 "사실상 새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이상한 지역이 나타났다.(129쪽)"는 보고처럼 생물종의 완벽한 멸종으로 드러난다.  "미국의 살충제 업체들은 노다지를 캔 것처럼 보였다(189쪽)"는 증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오늘 우리들은 잘 알고 있다. 산업체의 이익이 곧 국가 경제의 이익이라는 이 야릇한 이익의 논리가 지금 신음하는 지구 생태계의 근원이라 해도 왜곡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재앙이 아닌 '아직 가지 않은 다른 길'은 지구의 보호라는 궁극적인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이자 유일한 기회다."   -305쪽


 

이같은 이윤 논리는 항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비도덕적 가치관에 기초한다.   이러한  단견에 의한 이익추구가 계속되는 한 환경의 내재적 저항력과 인간을 비롯한 생물종의 자기 조절 방어벽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약화시킨다. 인간의 자연을 향한 인위적 조절 행위가 자기 파괴적이라는 것을 이제 많은 사람들이 어렴풋이 공감하는 세계가 되었지만, 여전히 인간 자신을 성가시게하고 불편하게 하는 것이 곧 자연의 어떤 대상이라 생각하는 순간 제거, 박멸, 파괴, 개발이라는 습성을 절제하지 못하고 있다.

 

카슨은 생물학적 자연 방제를 위한 방법의 개발을 위한 노력은 물론 복잡하게 상호 유기적으로 얽힌 생태계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명료하고 정확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 책이 환기하는 메시지는  오늘날 우리의 과학과 사회, 정치적 의제에서 환경에  대한 비상한 관심을 촉발하는 중요한 언어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야금 야금 자연을 훼손하며 인간의 욕구를 밀어 부치곤 한다. 

 


"생태계는 한 편으로 너무 연약해서 쉽게 파괴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튼튼하고 회복력이 강해서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역습해 온다."   -325쪽


 

자연이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한다는 오만한 표현인  "자연을 통제한다"는 이 겸손을 잃은 인식이 바로 그러한 인간에게 파멸을 겨누는 것이라며,  크나큰 불행이라는 카슨의 마지막 문장은 무한한 성장욕망에 흠뻑 젖은 오늘의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경고일 것이다. 자연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그 어떤 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의 언어가 그 어떤 언어보다 커다란 믿음이 되는 날이 오긴할까? 하드커버의 모습으로 다가온 이 고귀한 지성의 언어를 다시 읽으며 환경에 대한 절실한 요청을 깊숙이 마음에 새겨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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