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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퍼올린 삶의 언어 | 소설,시 2020-10-24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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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김이설 저
작가정신 | 2020년 10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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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오늘 밤에도 써야겠다. (...) 

당신들의 흙먼지와 흙먼지 속에서 기어이 피어오르는 우리의 언어에 대해서

 - 책 193~194 '작가의 말' 중에서

 

뿌옇고 흐리멍텅하며 유해하기만한 알 수 없는 적의로 가득한 세계, 그럼에도 기어이 흘러나오는 삶의 언어, 피어나는 생명의 꽃를 말한다.  마침내 시를 쓰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해진 이 소설 속 화자가 되었든, 돌을 굴려올리는 산 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마음이 가득 채워진 시지프가 되었든 그 인간적 확신이 느껴지는 작가의 위 문장은 덩달아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너무 쉽게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전락하는" 집 안 일에 짓눌려  "자신의 언어를 꺼내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던 한 인간에게 좌절과 불안과 공허 끝에 움튼 것이기에 더 애틋했는지 모르겠다. 


"넌 아직 피지 못한 꽃이다."  - 117쪽에서]

"계절이 변하는 걸 절감할 때마다 떠오르는" , 몹시 보고 싶은 사람, 그럼에도 헤어져야 했던 남자와의 재회에 마냥 행복해 할 수 없는 여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삶을 거부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구속의 이유를 의문으로 남긴 채 여자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목련빌라는 열 살 때부터 불혹을 바라보는 현재까지 30년 남짓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집이다. 밖에서 집 안이 훤히 보이는 1층이어서 아둠이 내리면 커튼을 내려 "사방이 막힌 상자 같"다. 넉넉지 못한 집안의 장녀, 책을  읽고 또 읽으며 낙서와 상상에 잠기는 아이였던 여자는 "아무여도 상관없는" 존재라는 기대 없는 시선속에 성장한다.


대학 입시의 실패에 이어 3년 매달린 공무원 시험도 성과없이 끝나며 여자는 스물 다섯, 처음으로 아르바이트 돈벌이를 시작하자  서점으로 달려가 시집을 사들고 읽어내려갈 때 비로소 자신이 "하고 싶은 걸 모른 척 무시하고 안 보이는 척 외면" 했던 실체를 떠올린다.  '장래 희망 없음'이라 자신을 적시하던 여자는 시(詩)를 필사하며 자신의 시를 쓰려하지만 필사 노트만 늘어갈 뿐 써내지 못한다. 여자의 가슴 속에 꿈틀리는 것은 직장, 적정한 수입, 안정적 가정이라는 세계가 규정한 삶이 아니다. 여자는 이러한 삶에 저항하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자, "그제야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마음의 소리를 드러낸다.


언니는 "글을 쓰고 싶은 거구나"라며 이 목소리를 처음으로 헤아려 준 동생의 지지는 여자를 야간대학의 문예창작과로 이끌고, "세계를 응시하는 깊이에 한계"를 확장하며,  "생생한 자기 삶의 언어"를 단련하는 시간을 갖는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동생은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고 여자의 등록금 대부금을 부담해준다. 그런 동생의 결혼 생활은 제부의 외도와 우악스런 폭력으로 얼룩진 피폐한 삶이다. 이때 여자가 동생에게 묻는다.  "이렇게 문드러지게 어떻게 살았냐"고, 여기에 동생은 "반발보다는 포기와 체념이 수월했다."고 답변한다.  나는 이 문장을 동생의 입을 빈 여자의 마음으로 읽는다.


그런 동생이 온 몸이 멍든 채 젖먹이와 세살 아이를 안고 목련빌라로 들어왔다. 스무 평 남짓의 공간에 아버지와 어머니, 여자와 동생, 그리고 두 아이의, 질식할 것만 같은,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로 허덕이기에 바쁜" 일상을 보낸다. 야간이면 경비일을 나가는 아버지, 고시원 청소를 하는 어머니, 아이들의 양육비를 벌기위해 회계업무와 학원 파트타임을 하는 동생, 여자는 육아와 집안 일을 맡게된다.  


여자는  "동동거리며 노력하고 애쓰는" 집 안 일들의 결과가 너무 미미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허무의 나락에서 허우적 거린다. 칭얼 대는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야 오로지 자신의  시간을 맞이하지만 지치고 황폐해진 육신은 "식탁에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놓은 시집과 필사 노트, 흰 종이와 잘 깍은 연필"로 아무것도 써내지 못한다. 그녀는 "쓰고 싶지만 써지지 않았다." 고 혼잣말을 한다. 이렇게 "가족은 공동 희생 구조"였다는 여자의 정의는 정서적 연대의 단위라는 가족 이데올로기 환상 이면의 진실을 노출한다. 위기와 고통의 억압이 수면위로 부상할 때 오늘날 우리네 가족의 그 적나라한 관계의 이기성만이.



이 소설의, 아니 여자를 비롯한 이 가족 구성원들 삶의 변화, 전환이 시작되는 계기인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가족(식구)의 형식적 도식의 붕괴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전형성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삶의 전망으로 이전한다.  "좁은 경비실에서 가슴을 움켜쥐고 쓰러진 채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더없이 쓸쓸하고 잔인한 죽음은  삶의 유한성, 세계의 불합리성과 이해 불가능성과 더불어 관계의 이기성으로 결합된 가족이라는 토대의 해체와 어떤 인간적 호소를 불러 일으킨다. 여자는 "조용히고즈넉하게쓸쓸히오롯이동떨어져서가만히차분하게 같은 단어들을 누릴 수" 있는 그녀를 붙들어 맸던 가족을 벗어난 바깥의 세계,  더없이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세계, 피지 못한 꽃을 피울 수 있는 세계로 나가기로 한다. 


이때 집을 나가고 싶다는 여자의 조심스러운 의지가 발설 되었을 때 어머니와 동생의 반응은 가족의 연대라는 감정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것인지, 이것을 해체하고 벗어나는 것에 어떤 용기와 열정, 인식이 요구되는지 발견케 된다.


  "그럼 애들은?", "뭐 서운한 거 있었어? 아니면 우리가 뭐 잘 한 거라도 있어?" , 

 "... 못 나가. 어딜 나가!", 

 "그럼 이렇게 살다가 이 집에서 늙어 죽었으면 좋겠어?", "죽을 거 같은니까 하는 소리잖아! ..."

 - 책 158~159 쪽에서 부분 발췌


닫힌 세계, 속박을 요구하는 세계, 삶의 열정을 앗아가는 세계 속에서의 삶이란 좁아터진 경비 초소에서 싸늘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죽음과 다를 바 없는 세계이다. 여자는 죽음의 세계, 자살을 요구하는 공간을 벗어나 삶의 공간으로 뛰쳐 나간다.  언제까지고 기다리고 있겠다는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 곳, 피지 못한 꽃이 되지 못하더라도 "연둣빛 싹" 아니 "새하얀 뿌리 한 쪽"이라도  될 수 있는 곳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원을" 꿈꾸는 시(詩) 의 세계로 발을 내닫는다.


이처럼 세계의 불가능성과 모순을 생생하고 처절하게 인식한 사람이 마침내 죽음의 세계에 저항하고, 비록 성과없는 것일지라도 "시집의 한 페이지를 한 글자 한 글자 아주 천천히 베껴 써" 내려가듯이 멈추지 않는 집요함,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순간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 속으로 그 인간적 의지의 아름다움이 밀고 들어오는 듯 뿌듯한 느낌으로 채워진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쓰고 싶었다고 서술하는 '정류장과 무덤과 지리멸렬한 계절의 속박...' 에 대한 이야기와  "지금 여기 있다"는 것, 그 고동치는 살아있음에 대한 감각의 회복이 마치 내 자유처럼 마음의 손뼉을 치게 된다. 어쩌면 자기 삶을 에워싼 조건에 희미한 미소를 보낼 수 있을 때,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없음을,  이미 지치지 않을 자신의 마음 깊은 곳, 그 열정만으로도 삶이란 행복 할 수 있음을 상상하게 된다.  


환영』, 『오늘처럼 고요히』 등 그간 작가 김이설의 소설들은 내게 추하고 어둡고 불쾌한, 그리고 자괴감이 뒤얽힌 무기력의 세계에서 그 허무를 안고 버티기에 안간힘을 쓰던 인물들의 이야기로 기억된다. 그런데 이제 이 소설의 인물은 그 세계의 바깥으로 뛰쳐 나온다. 그리곤 기어이 자신의 언어를 길어 올린다. 자유와 열정어린 살아있는 자의 목소리를 듣는 듯한, 공원 산책길에서 막 피어나려는 이슬 맺힌 꽃 봉오리를 발견하는 그런 희열이라 해야 할까? 오랜만에 만나는 작가의 삶의 길에 대한 의지와 안내가 그지없이 반가운 읽기였다고 고백해야겠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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