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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처럼 슬며시 마음에 스며드는 작품들 | 소설,시 2022-09-24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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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방어가 제철

안윤 저
자음과모음 | 2022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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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에는 소설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설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세 편의 단편에는 칼칼한 육개장, 미역국, 방어회, 각종 소박한 전() 등 일상적 음식들이 등장한다. 달밤의 화자(話者)는 생일상을 준비하고, 방어가 제철의 주인공 안라는 반찬가게를 하며, 만화경302호 세입자인 나경101호 할머니 단심의 먹음직스런 주전부리와 함께하며 자신의 곁을 넓혀 나간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과정은 어쩌면 행복과 설렘의 시간일 것이다. 마련하고 서로 나눌 대상이 있는 이 행위에는 사람에 대한 어떤 진정한 관계, 의미로 채워진 인생살이의 풍성함이 있는 것만 같다. 이런 연유 때문이었을까? 작품 모두가 애틋한 그리움의 언어처럼 다가오고, 왠지 정화된 느낌으로 충만해지게 하는 듯하다.

 

소설 달밤의 첫 문장은 생일상을 차린다고 며칠 전부터 분주했어요.” 라는 이미 고인(故人)이 된 친했던 언니 은주를 향한 일종의 방백(傍白)이다. 이 방백은 은주의 제사상을 앞에 두고 여기 하늘 좀 올려다보고요. 달이 떴네.” 하는 마지막 장면과 조우하며, 새로운 사랑과 떠난 사랑 모두를 아름다운 한 편의 시()로 엮어낸다.

 

가난했던 학창 시절, 그리고 졸업 후에도 ()도 잠도 미래도 오지 않을 거 라며 실의에 잠기곤 하던 화자에게 응원과 격려, 따스한 사랑을 주었던 선배언니 은주, 자신이 쓴 시나리오의 작은 댓가라도 생기면 맛있는 음식을 사주며, 삶에 대한 안심을 심어주던 그녀를 향한 애도의 이야기는 음악세계를 위해 전념하는 소애가 자신의 세계로 문득 들어오게 된 사연과 동행하기 시작한다. 소설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화자의 방백은 말하는 여정 자체를 통해 다르지만 닮은 관계의 반복이라는 인간 정신의 새로운 인식 수단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결코 다르지 않은 두 사랑을 간직할 수 있게 함으로써.

 

방어는 제철제철에 방점을 두어 읽게 하는, 어떤 반복되는 의례적 행위가 끌어내는 기억, 그 행위에 담긴 해결되지 않았던 응어리이자, 드러남으로써 분명해지고 삶의 정상성을 회복시켜주는 그런 것처럼 보인다. 주인공 안라는 오빠와 그의 친구인 정오(正吾)가 즐기는 책과 음악과 영화를 함께하며 자신도 모르게 이들을 공유하고 내면화한 채 성장한다. 가계의 경제적 형편은 기울고 있었지만 안라는 이를 체감하지 못한다.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픈 안라는 형편이 되지 못한다는 엄마의 말림에도 불구하고 비싼 미술입시 학원에 등록한다.

 

어느 날, 군 입대 명분으로 휴학한 오빠 재영이 건설현장에서 일하다 크레인에서 떨어진 철근더미로 사망하게 되고, 이 죽음은 미술하겠다고 설친 자신의 욕심으로 일어났다는 죄책감으로 자리 잡는다. 결국 열아홉 살의 10. 내 인생에 욕심 따윈 내지 않을 거라고결심하곤 어려운 살림살이를 위한 밥벌이에 나선다. 그녀의 이십대가 끝나가고 있을 즈음 엄마는 암 재발로 사망하고, 이모들과 함께 꾸려가던 엄마의 반찬가게를 물려받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라는 물음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오빠의 단짝이었던 정오는 오빠의 죽음에 연락도 되지 않았으며, 장례식장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 정오로부터 엄마가 떠나간 지 넉 달이 지난 날 연락이 온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이 바로 방어회를 파는 음식점이다. 안라와 정오 두 사람은 극히 상투적인 몇 마디를 나누며 만남을 이어나가고, 매년 12, 방어 철이 되면 방어회집에서 조금은 진전된 자신들의 삶 속 일상을 나누기도 한다. 음식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실이라는 제재는 달밤과 흡사하지만 그 관계와 삶의 체험이 다른 사람들이기에 파묻혀 드러나지 않은 것의 실체에 대한 궁금증이 소설을 이끄는 힘이 되어준다. 음식과 인간관계가 지니는 이 흥미로운 조합은 마침내 친밀성의 진전, 억압된 속내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고등학교 시절 부족한 미술학원 수강료로 쓰라며 정오가 주었던 돈, 그것을 봉투에 담아 내민다. 이 뜻밖의 행위는 흐릿해졌던 옛 기억을 촉발한다.

 

 

 

안라가 붓글씨 연습을 위해 펼쳐놓은 화선지의 귀퉁이에 자신의 이름 正吾(정오)를 쓰고, 그 옆에 자신의 것보다 안라의 오빠 재영을 더 신중하게 쓰던 모습, 아이스크림을 사러 갔다 돌아온 오빠가 그것을 보고 감추지 않던 미소를 띠던 장면은 모든 순간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회피된 애도와 죄의식을 이렇게 마주함으로써 정오와 안라는 기억할 수 있으며 그 기억을 보듬을 수 있는 삶의 정상성을 회복한다. 시대의 추억을 되씹으면서 인생살이와 사람의 관계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볼 작정이라 썼던 황석영 선생의 문장이 마침 떠오른다. 누군가와 마주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묻힌 기억들을 마구 꺼내고 싶어진다.

 

어쩌면 인생살이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질이 그 전부를 차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수록작인 만화경은 다섯 가구가 사는 작은 한 채의 빌라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웃사촌이란 말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 낯선 옛 말이 된지 한참이다. 오히려 앞집, 아랫집, 윗집 등 이웃은 경계와 무관심의 대상이다. 소설의 주인공 나경은 이혼 후 혼자 사는 서른다섯 살 아가씨와 아줌마의 경계에 선 여성이다.

 

나경은 4층에 사는 빌라의 주인 숙분이 하는 행동이 불쾌하고 거북하기 그지없다. 출근할 때면 여지없이 4층 창을 열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느낌, 계약할 때 출생 시간을 묻던 기묘한 모습 등은 어째 감시의 시선을 받고 있는 듯한 께름직함이다. 두 아이를 양육하느라 바쁜 친구 수진에게 하소연했을 때 답변은 너 그거 자의식 과잉이다, 다들 자기 살기 바쁘다.”는 것이다. 숙분의 행동이 부당하다는 인식은 반지하층에 가까운 101호에 단심이 이사 오면서, 그녀의 베풂과 나눔이 보여주는 이웃과의 스스럼없는 친교의 모습으로 점차 변화하기 시작한다.

 

단심이 가지고 올라와 맛보라며 내미는 각종의 소박한 부침개 등 음식은 초콜릿 등을 얹어 되돌려진다. 이렇게 단심의 집 방문과 그녀와의 대화가 늘어나며 빌라 내 이웃들은 서로의 곁을 내주는 관계로 발전한다. 어느 날 새벽 5시면 규칙적으로 들려오던 302호 위층인 주인집 4층 숙분의 서성거리는 울림이 들리지 않는다. 101호 단심은 4층 문이 잠겨 열리지 않으며,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숙분의 신병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을까 걱정한다. 119에 연락하고,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부러진 다리로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숙분을 발견한다.

 

숙분의 수술이 진행될 때 단심으로부터 옛 친구였던 숙분과의 사연과 302호 전 입주자가 사망한 후 수일이 경과한 뒤에 발견되었던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숙분은 외롭게 죽은 전 입주자 이미리내가 혼자 죽게 내버려 두었다는 안타까움이 나경이 숙분의 행위로부터 오해했던 이유였음을 알게 된다. 소설 전면을 흐르는 내용은 이처럼 소소한 나눔과 증여의 장면들로 채워지며, 여성들, 나아가 이웃들의 유대로 확장되고, 오늘의 불의한 핵가족중심 사회의 대안으로서 새로운 유형의 가족연대를 보여준다. 또한 오늘날 물질화, 쾌락지향의 언어로 전화(轉化)행복의 개념을 다시 복원한다. 기준을 조금 낮추어 살라고, 일상을 뒤흔드는 걱정거리가 없는 상태, 조금은 단조롭게 느껴지는 삶의 일상성, 그것이 행복이라고.

 

산다는 것은 어쩌면 가을 잎이 쓸쓸히 나뒹구는 어느 고적한 길을 홀로 거닐 다 저 먼 하늘을 올려다보는 상념의 반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은 친구들, 동료들, 이웃들에 자신의 곁을 내어주고, 그네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소소한 관계의 기쁨이 삶을 더욱 아름답고 풍요롭게 해 주기도 할 것이다. 삭막하게 닫힌 마음에 서로 다른 모습들의 사랑이 추억처럼 슬며시 스며드는 이 작품집을 읽으며, 떠오르는 그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어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에 잠긴다. 그래 살아있는 나, 아끼지 말고 살 것이다. 어느새 다가 온 가을의 스산한 기운처럼 그렇게 이 소설들은 잊거나 잃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들과 함께 마음을 사랑의 기대로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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