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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몸으로 느끼면서 쓴 행위의 언어 예술 | 소설,시 2022-11-2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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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변신 / 시골 의사

프란츠 카프카 저/박종대 역
책세상 | 2022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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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는 자신의 글을 그의 삶의 현실에 투영하지 말 것을, 즉 일치하지 않음을 주장했지만, 그가 살던 현실의 시공간에 밀착하지 않고서는 그가 쓴 소설들을 읽어 낼 방법이 없다. 단편 변신은 자본주의로 인한 인간의 전락(轉落)이라거나 의식과 존재 분열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소외와 고독의 묘사라는 독해들이 있다. 나는 이 같은 피상적 시선으로 그레고르 잠자라는 존재의 이야기를 그 분명함을 지우는 보편성의 읽기로는 지속적으로 따라갈 수가 없음을 안다.

 

이 작품은 구체성을 띤 20세기 프라하에 사는 유대인, 독일 주류 사회의 일원으로 묻혀 살기위해 그들을 모방해야만 살아 갈 수 있었던 당대의 사회적 맥락 하에서 읽기시작 했을 때 비로소 온통 안개 속 같았던 문장의 의미가 표면에 떠오르는 것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함으로써만 서구 백인의 시선으로 흐려놓은 추상적 독법을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커다란 갑충으로 변한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발견한 자신의 몸은 보편적 인간의 현대성 속에서의 추락한 존재도 아니며, 정신분열적 고통의 상징도 아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 초에 유대인을 향한 주류의 담론으로 형성된 퇴화론에 주목해야 한다. 유럽인 자신들과 구별하기 힘든 이방인인 유대인이 자신들의 일상에 깊이 침투하자 이에 대한 팽배한 불안은 차별의 이미지를 만들어 그들에게 씌우기 시작했다. 병들거나 변형되거나 성별의 경계가 불분명한 퇴화된 인종이라는 타자성이 그 전형적 클리셰다. 이 타자화 도식은 유대인의 윤리적 도덕적 형상으로 이어져 그들의 동화(同化)를 차단하고 경계했던 것이 당대의 현실이다.

 

당대를 장악하고 있던 이러한 비틀린 인종, 몸 담론을 카프카는 실제 잘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일상에서 겪는 차별의 언어였다. 특히 그는 자신의 신경증, 소화불량 등 육체적 허약함을 의식하고 체조연습, 수영, 노젓기 등을 통해 주류가 가하는 편견을 극복하려 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111112일 일기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내 몸의 상태가 나의 발전에 주된 방해물이 될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중략) 나는 계속되는 실패에 익숙해져야만 할 것이다.” 이렇게 전제하면 그레고리의 갑충 변신은 퇴화의 담론을 거부없이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소설의 어느 곳에서도 변한 몸에 대한 원인이나 목적, 의미에 대한 묘사나 설득력 있는 서술이 없는 이유가 해명된다.

 

대신 소설은 이러한 생물학적 물질적 변화의 설명이 아니라 이것의 본질적 의미에 대한 관찰과 사유를 풀어 놓은 것이라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보게 되면, 갑충으로 변화된 몸, 퇴화된 몸은 주류 사회에 동화하려 했으나 실패한 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렇게 실패한 몸이 됨으로써 비로소 가짜를 벗어던지고 본연의 삶, 순수한 자신의 몸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몸이 된다. 설혹 그것이 죽음까지 무릅써야하는 온 몸으로 느끼며 밀고 나가야 하는 절박함, 그 자체일지언정 말이다. 이것이 카프카의 소설을 생명의 예술이라 부르게 되는 바로 그 이유일 것이며, 상실한 정체성 회복과 삶의 주체적 자기를 발견하는 긍정의 서사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갑충의 몸은 벌거벗은 몸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회적 문화적 껍질을 벗어던진 몸으로서 사회적 위상을 상실하고 인간사회에서 이탈한 존재가 되는 것은 일종의 카프카적 사유 실험이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은 이것의 진행 여정이다. 갑충이 되어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출장을 위해 기차 시간에 맞추어 나가지도 못한다. 아니나 다를까 누이동생부터 어머니, 아버지가 차례로 출근하지 않는 아들 방을 두드리며 그레고르를 채근하고, 이어서 직장 지배인이 방문하여, 그레고르를 비난하는 말을 쏟아놓는다. 이제보니 이상하게 변덕을 부리고 그걸 이상한 방식으로 시위 하는군요.(21)”라며 유대인을 향한 주류시선의 전형적 클리셰를 풀어놓는다. 이어 거래처 수금 문제와 연관하여 그의 지각에 의혹을 표명했던 사장의 말이나, 당신의 일자리는 고정직이 아니에요!”라는 지위의 불안정성까지 발설한다.

 

 

5년간 지각 한 번 없이 성실한 능력있는 직원의 단 한 차례의 지각에 득달같이 달려와 퍼붓는 이들로부터 자아상과 타자상의 커다란 불일치, 보이지 않았던 막대한 간극이 드러난다. 주류사회에 편입되어 동화된 존재, 유럽인이라는 자아상은 터무니없는 것이며, 그 환상은 붕괴한다. 그의 직업에 대한 우리말 번역어에 대한 지적이 있다. 대개 외근사원 또는 외판원으로 번역된 원어는 여행자(der Reisende)'의 의미가 함유된 단어이다. 이것은 살고있는 사회에 소속되지 못하는 방랑하는 유대인에 대한 또 하나의 상징어로 써졌다는 것이다. 변신 전의 그레고르 잠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 그것이다.

 

1장은 이같이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 그 자체가 지닌 사회적 시선과 자기 이해와의 불일치를 관찰토록 하였다면, 2장에서는 폐쇄된 자기 공간에서 지내는 갑충으로서 그레고르의 내면 독백에 의존한 심리세계가 주로 그려진다. 그의 목소리는 찍찍거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서서히 의사소통 세계에서 언어에 의한 소통 가능성을 상실해가고, 누이동생이 갖다 주는 쓰레기 같은 음식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부각하며 벌거벗은 존재로서 감당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배열한다. 유대인은 주류사회에 등장해서는 안 되는 몸이라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에도 불구하고 그 동화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직장은 물론 가족 모두에게서 배제되는 존재로 전락하게 되는 현실 그것이다.

 

또한 갑충 그레고르의 독백 즉 사유가 진행되는 폐쇄된 공간은 누이동생의 의도에 따라 텅 빈 동굴 같은 공간이 됨으로써 그의 점차 약화되는 시력처럼 그를 둘러싼 환경 모두가 퇴화하기 시작한다. 반면에 동물로서의 그레고르는 천장에 매달려 있기를 좋아하게 되며 신체적 안정감과 함께, 숨을 훨씬 편하게 쉴 수 있는 자기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의 느낌에 젖어든다. 점차 직업과 가족 양쪽 모두에게 착취당하던 삶으로부터 벗어난 해방감, 평온함을 만끽하기 시작한다. 벽과 천장을 이리저리 기어다니면서 끈적끈적한 흔적을 남기며 그는 자신의 온 몸으로 글을 쓴다. 온 몸으로 느끼면서 행하는 글쓰기, 일종의 행위 예술이다, 이 역시 카프카다운 은유이다. 껍질, 사회적 외피를 벗어던짐으로써 되찾은 퇴화라 경멸하는 고유의 정체성, 이때 주류의 소통매체와 그들의 시선을 포기함으로써 자신에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3장에 이르러 기생적 역할이 전환되어 직업이라는 돈 벌이에 나서야 한 가족들의 생계수단으로 받아들인 하숙생들의 앞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여동생의 연주 음악에 홀린 듯, 이미 예술적 존재로 변화한 그레고르는 금지된 문턱을 넘어 거실로 기어 나온다. 이 장면은 아마도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대목이라 할 수 있는데, 이미 사회와 소통이 불가능한 존재가 된 그가 위험에 노출된 최악의 순간이면서 예술적 감각으로 충만된 최고조로 고양된 감각에 취한 해방과 구원의 분위기가 교차하는 의미심장한 광경이기 때문이다. 이미 그의 무의식적인 위험에 대한 무관심, 즉 해탈의 순간은 그를 발견한 하숙생들과 아버지에 의해 비극적 폭력으로 전환된다.

 

아들을 방으로 몰아대기 위해 쉿쉿거리는 동물을 향한 소리, 그리고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을 상징하듯 그를 향해 던졌던 사과가 살 속에 박혀 썩어가는 몸, 더 이상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납작하게 말라가는 몸은 죽음의 수용, 자기 죄업에 대한 인정의 행위였을 것이다. 주류 사회의 편입을 위한 무기력한 몸부림은 자신의 예술적 삶의 불가능이었으며, 이 불가능을 선택함으로써 일상적 직업을 지닌 가족 부양자로서의 삶을 놓은 것에 대한 죄의식은 결코 그에게 함께 할 수 없는 것이었음이다. 이렇게 정리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변신은 그레고르의 탈출구였지만, 이것은 주변세계로부터의 고립이었으며, 자기만의 길은 삶을 죽음으로 이끌 수밖에 없었다는 카프카의 불가피한 신념이었다고.

 

그래서 그의 죽음에는 슬픔도, 비탄도 가족조차의 애도도 없다. 그레고르는 그의 내적 일치 속에서 평온하게 죽은 것이므로. 그가 죽자 가족들이 산책에 나서는 것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이러한 관점에서 그의 부모 세대가 찾지 못한 탈출구를 찾으려는 시도라 할 수 있으며, 작가 자신의 전업 작가로서 허용되지 않는 삶의 현실에 대한 자기 삶의 완성에 대한 갈망의 욕구 실현이라 할 수 있다.  자기실존, 인간의 자유를 향한 이 처절한 몸의 사유는 그래서 더욱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물론 이 같이 시대에 대한 담론에 밀착한 독해로서만 읽힐 때 간과되는 것들이 있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성()의 실패에 대한 장면들이다. 이 작품에서도 자신이 만들어 벽에 부착한 액자에 끼워넣은 모피를 입은 여인의 사진에 배를 바짝 붙여 그것을 치워버리지 못하게 하는 행위나, 속옷차림으로 쓰러지면서 아버지에 안기는 어머니의 모습처럼 아버지에 의해 억압된 실현되지 못한 성의 문제는 또 다른 당대의 문화적 세대적 갈등의 담론에 다가가게 한다. 이처럼 이 소설은 다층적이고 다면적인 접근의 해석이 가능 할 것이다.  그것은 다른 이의 감상에서 발견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세상 번역본에는 단편 시골의사가 함께 수록되어있는데, 이 작품은 바로 성의 실패와 관련한 전형적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억압으로 통제된 가면의 삶과 순수하게 날뛰는 욕망, 그 본연의 삶을 방황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고통의 형상이 말()과 어여쁜 하녀 로자, 망상처럼 나타난 남자, 침대에 누워있는 환자와 벌어진 분홍빛 상처가 교차하며 응축된 밀도로 그려지고 있다. 짧지만 강렬한 작품이다. 실패함으로써 성공한다는 카프카의 작품을 읽는 것은 주기적으로 찾게 되는 어떤 유혹이다. 블가능 속을 헤매고 싶은 은폐되고 억압된 내 무의식의 분출 욕망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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