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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의의 언어가 실종된 사회 | My Story 2020-09-02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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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대와 혐오의 언어가 지배하는 사회 - 협의의 언어를 생각키 위해


만인이 만인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군부 독재, 시민(민간) 사찰 정권 하에서는 제 목소리를 숨기고 눈치만 보던 자들, 자신들의 알량한 기득권을 보듬으며 부당과 불편, 차별과 폭력적 억압으로 신음하던 이웃들과 행동하는 저항자들이 있을 때 입을 굳게 다물고 외면하고 있던 자들이다. 


그런데 바로 지금 이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해 거침없이 입에서 쏟아낸다. 인간다움을 상실한 감정의 말, 그 혐오의  무수한 말, 말, 말들..., 아무렴 표현의 자유가 무슨 절대적 권리라는 냥 말이다. 그리고 독재정권, 파시스트 권력, 무능한 대통령이라 비난한다. 자신의 입 맛에 맞지 않으면 즉시 적대와 혐오의 독설을 뿜어낸다. 검사,판사,변호사,의사,회계사,대학 교수,고위관료,기업 자본가,방송,신문 기자..., 모두 계급적 이익을 향유하던 자들이다. 자신은 이들 계층이 아니라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들 계층이 곧 자신의 소속이라는 환각 상태인지 자문해 볼 일이다.


책임없는 자유


오늘의 한국 사회를 보며 민주주의를 성취, 유지한다는 것이 고달프고 쓰라린 과정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이들이 이렇게 뱉어내는 비난의 소리들이 이 사회를 가득 채우는 것은 눈치 볼 권력이 없기 때문이라는 믿음에 토대를 둔다. 어떠한 말이든 '자유'라는, 자신의 말에 족쇄를 채우거나 인신의 자유에 여하한 폭압적 억압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란 타자가 존재할 때 가능한 언어이다. 혼자라면 자유라는 말은 가능한 말이 아니니 말이다.  즉 공공이라는 타자에 대해서 자유이기에 그 자유를 누리려면 공공에 대한 책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개인, 같은 이익으로 뭉쳐진 집단이 자신들의 자유와 이익을 주장할 때 공동선을 우선 생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군부 독재 시절에도 없던 폭거?


몇 일 전, 의사협회의 대표라는 자는 의료현장을 벗어난 이들의 복귀를 점검하려는 공무원들의 행정 행위를 군부독재시절에도 없던 폭거라고 비난했다. 독재 권력 하에서는 시민의 고통을 외면하던 계층들이다. 그 어떠한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고 기득권 유지에 급급했으니 독재 권력과 마주칠 일이 없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하니 그의 말이 옳다. 군부독재 시절에는 아무런 자기 표현도 행동도 하지 않았으니 애초 마주치는 사건이 존재 할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자기 이익의 문제가 당면하자 행동하는 기만과 위선을 스스로 돌아 볼 수 있어야 한다.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이러한 표현의 자유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소위 파쇼 정권이라 불리던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 독재 시절을 상기할 수 있는 자가 이렇게 무지함을 드러낼 때 그 탐욕스러움만 두드러지고 모든 진정함은 사라지고 만다. 


의사의 공백은 상대적 약자인 간호사의 강도 높은 노고를 요구하고 대통령이 이를 격려하는 발언을 하자 조중동 황색신문은 일제히 편가르기 한다고 악의적 합창을 한다.  이 적대적 행위로 끊임없이 정권을 흔들어대고 여론의 방향을 이끈다. 이것은 그대로 온라인 포털,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순식간에 확산되어 마치 이것이 진실인 듯 고정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렇듯 기득권 세력과 관련되어서는 언론 권력은 자신들의 욕망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거짓과 호도, 악의는 조중동이 황색 언론이 되게하는 핵심 기제이다.  가진 것을 스스로 내려놓기란 정말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불의한, 오늘의 시민적 가치가 수용하지 못하는 특권은 벗어던져야 한다. 

 

양반, 여전한 권위적 망상 


이건 또다른 형태의 기득권 자락을 움켜쥔 자의 얘기다. 지나간 시대, 양반의 언어를 흉내낸 하찮은 문장을 삼류 수구 언론 매체들, 가십 좋아하는 온라인 미디어, SNS에 이리 저리 퍼나르고, 마치 무슨 새로운 가치의 제안이나 있는 냥 호들갑을 떨어대며, 이를 이용하여 수구세력의 결집에 이용하느라 분주하다.  자기 이익을 얼싸안고 옛 시절 노비와 평민위에 군림하던 향수를 누리고 싶었던 시대착오적인 권위적 망상, 뿌리 깊은 사회적 폐해인 지역 연고의 권위 지향적 수구자를 자처하며 수치도 모른 채 이기주의를 자랑하는 모양새다. 여기에 집권 세력에 합승하지 못한 이들이 가장 더러운 감정인 질투의 욕망을 은닉한 채 이 비루한 문장을 치켜세우며 슬며시 숟가락을 얹어 놓는다.  이 퇴행적 사태가 포탈 페이지를 장식하는 사회, 그래서 이 미성숙의 유아적 정신 세계는 책임을 인식할 줄 모른다.

 

권력화된 담론가들 ; 위선과 기만의 언어


사회에 담론을 형성할 수 있는 자들은 이미 권력자들, 기득권자들이다. 특히 이명박 정권하에서 거대 자본가와 이에 편승한 언론 권력의 정치 세력화를 위해 탄생한 종합편성채널은 소위 '논객'이라 칭하는 담론가들을 양산했다.  변호사, 의사, 회계사, 하물며 기생충 선생, 서구의  미학과 철학 언저리를 맴돌며 천박한 입놀림으로 진보를 자처하던 지식 돌팔이들까지 나서 정치,경제 전문가 행세를 하며 기득권 유지에 한 몫 한다. 미디어에 얼굴을 내밀어 이익 세력의 눈에 들기 위해 분투하고, 너저분한 지식을 70~80년대 어용 선생들 저리가라 할 정도로 융통하며 기회주의적 행동을 주저하지 않는다. 


 


엉터리들이 난무하는 사회, 조중동 황색 언론이 연일 자신들의 더러운 입을 대신하니 추켜세우지 않을 까닭이 없다. 혐오와 적대를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추악한 생산수단을 투입하려 어떤 일이든 마다않는 이들의 행위에서 자본가의 전형적 생산양식을 보게되는 것은 필연적 관계성 때문일 것이다. 자기 노동 없이 타자의 노동 착취산물인 잉여가치, 대가 지불 없이 획득되는 이익에 익숙한 계층의 습관화된 전술이다. 언제까지 이를 지속하려는 심산인가? 지금의 집권 세력을 무너 뜨리면 기득권이 유지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인가? 앞으로 마주하게 될 세계에서도 이전의 가치를 실행 할 수 있을까? 

 

새로운 가치의 요구


지금 세계는 어쩌면 일상적 풍속이 될지 모르는 바이러스와의 싸움 중이다. 이에 더해 이미 생활 플랫폼의 급속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을 뿐아니라 분자생물학, 인공지능, 나노기술 등 가공할 과학 기술은 인간 세계 전반의 가치를 새롭게 정의 할 것을 압박하고 있다. 이 급진적인 낯 선 세계로의 진입은 과거에서의 전용을 허락하는 그런 세계가 아니다. 거대화된 산업 기술자본가들은 성가신 인간 노동 가치에 대한 논란을 불식시키고 싶어한다. 그것이 가능한 세계가 아닌가! 이제 기계적 자동화를 넘어 인공지능에 의한 로봇화로 인간노동의 소용은 극단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노동 가능 인력의 실업이 증가하는 것은 멈출 수 없는 사태이다. 거의 모든 소비재의 거래는 가상의 공간으로 이전 되고 있다. 바이러스의 창궐은 변화된 상거래의 플랫폼이 어디인지, 새로운 노동력의 요구는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가치 인식의 재편이 요구되는 것이다. 과연 알량한 지난 지식으로 자신과 파당적 이익을 위해 거침없이 쏟아내는 말이 진정 누구를 위한 목소리인지 가슴 저 깊은 곳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볼 일이다. 삭힘없는 그 언어의 가벼움들...

 

망상, 망언, 망동 ; 그 박약함


책임질 필요가 없는 비난이란 얼마나 하기 쉬운가. 개신교 장로회 목사임을 자처하는 자의 분별 없는 망동과 망언들, 기득권자들이 툭하면 던지는 사회적 이익의 가치가 크면 그것이 선이라는 자신들의 신념을 정작 사회가 요구하면 음모요, 부당이고 악이라고 주장한다. 공공선을 요구하면 속세의 것들이 초월의 세계를 아느냐고 악다구니를 쓴다. 초월, 내세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분간 할 줄 모르는 박약(薄弱)함, 이 맹목과 자기 기만적 인식에 대한 무지는 필요를 소모 시킨다. 제발 타자를 물고 뜯는 데 그 잘난 지식을 낭비하지 말자. 진정 공정한 세상, 어느 누구도 차별의 대상이 되지 않는 세상, 가난이 대물림되는 파렴치함이 없는 세상, 타자에 대한 연민이 가득한 세계를 위한 협의의 언어가 넘치는 세계를 생각하자. 백서가 있으니 흑서로의 맞섬이 황당함이라는 자각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어찌 세계를 흑과 백으로만 설명 할 수 있겠는가.


남용되는 악의의 언어 : '패륜'

 

패륜이란 부모, 자식을 살해하는 등 존속의 생을 위협하는, 더 이상 사람이기를 멈춘 인간을 향한 가장 극악한 언어이다. 대통령을 향해 초딩 안 군의 입에서 배설된 말이다. 구중궁궐에서 공주 행세만 하던 독재자 딸의 모습과 흡사한 강남의 한 병원 원장의 왕자로 자란 인물다운 편협성과 후안무치에 더해 무식함을 토대로 한 악의에서 뱉어진 말이다. 이기심을 넘어 자신이 기득계층이라는 자각에서 출발한 정치적 적대감의 표시가 이제는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


말의 사악함, 기득권도 권력이라고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휘두르는 것인데, 왜인들이 한국인을 향해 퍼붓는 '극혐', 소위 극우주의자들의 행태를 빼닮았다. 정말 그만 하기를 바란다. 시민 대다수의 고달픈 삶에 아랑곳없이 바이러스의 무차별적인 확산에 불씨를 당겨 서민 대중의 삶을 더욱 피폐화시키는 신앙의 가면 뒤에, 공공의료의 질서 뒤에 숨은 이기심을 어느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진정한 협의의 언어를 말하라! 진정 실의에 잠긴 이웃들을 위한 언어를 말하라! 폭력의 언어로 그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반목과 혐오와 적대를 키우고 양산하여 얻어내는 분열이 대체 시민 대중의 삶에 어떤 이로움이 있다는 것인가? 너무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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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들, 비동시대성의 위기 | My Story 2018-09-11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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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파우스트비극23, ‘성안의 안 마당에 이르면 파우스트는 중세기사로 변장하여 헬레나에게 압운시를 가르치는 관능적 쾌락의 정점에 달하는 장면이 있다. 고대와, 중세와 근대를 마구잡이로 널뛰며 도착한, 이 장면은 역사적 위치로부터 해방된 서로 다른 시대의 인물들과 양식들이 공존하는별난 세계, 소위 비동시대성(Non-Synchronism)’이라는 말을 설명할 때면 빈번하게 인용되는 부분이다.

 

비동시대성이란 많은 개인들이 같은 시대에 살고 있지만 문화적 또는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서로 다른 시대에 속한 사태를 일컫는다. 이러한 양태의 탁월한 사례로서 파우스트는 예외없이 등장한다. 이 개념이 떠오른 것은 바로 지금 우리 정치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질성을 바라보면서 문학의 기능을 새삼스럽게 생각게 된 탓이다. 한국사회는 엄청난 변혁기에 서있으며, 평화와 번영, 평등과 자연과의 공존 등 새로운 가치를 향해 있다. 대부분의 개인들은 더 이상 안보에 볼모가 되어, 불안과 경쟁, 성장과 차별의 수구적 경향에 머물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독일의 사상가인 에른스트 블로흐가 그의 저술 Heritage of Our Times, 1932에 쓴 문장은 마침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개인들이 지닌 시대성의 논파 그것만 같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지금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 오직 외적으로만 그렇다.

오늘 거리에서 이들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동시대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이들이 서로 같은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사회의 많은 담론가들은 여전히  비동시대성의 역행적 의식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이미 떠난지 오래된 진영 논리에 사로잡혀 자신의 마비된 인지능력을 반성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금 언제 그랬냐는 듯 새로운 가치와 민심의 변화를 읽겠다고 선언했던 불과 3개월 전 여우의 눈물을 짐짓 흘리는 체했던 수구적 교활함의 태도가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있으니 말이다.

 

니체 또한 선악을 넘어서에서 독일인들은 그저께의 사람들, 그리고 모레의 사람들이다. - 그들에게 아직 오늘이 없다.” 라며, 시대의 가치에 뒤쳐진 자신의 동족을 향해 외치기도 했으며, 프로이트는 끝이 있는 분석과 끝이 없는 분석(Die endliche und die unendliche Analyse)에서 원시 시대의 용(dragon)들은 실제로 멸종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듯 수구적 가치의 망령이 여전히 발목을 잡아당기는 현실을 꼬집기도 했다.

 

혹여 나의 문화적, 정치적 의식이 현재의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이 사회에 비동시대성이 횡행하게 하는 존재가 아닌지 다시금 돌아보게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헤르만 브로흐의 소설 몽유병자들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그에게 요하임과 루체나는 그들이 속한 시대, 즉 그들에게 살아갈 권리를 부여해준 시대에서

존재의 작은 단편들만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더 큰 부분은 어딘가 다른 곳에, (....)이 세계가 각기 다른 세기에 속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래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바로 그들이 동시대인들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들이 불안정하고 서로를 합리적으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마 이 때문이리라.”

 

문학 작품은 실로 많은 것들을 시사한다. 제한된 공간속에 공존하는 역사적 비동질적인 사회적, 상징적 형식들을 예리하게 통찰해 낸다. 우리의 문학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성찰들이 발견 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된다. 최근의 한국 소설들은 지나치게 현상적인 문제들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전환기에 선 나라들에서는 항상 세계적인 걸작이 탄생했다. 마침 우리도 그렇다. 지금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거대한 발걸음을 구성하고 있는 어마어마한 사유의 가치들을 모색하는 문학 작품들이 많이 써지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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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 인류가 당면한 '현재'의 화급한 곤경을 애기한다 | My Story 2018-08-12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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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하찮은 존재에 불과하던 유인원이 어떻게 지구 행성의 주인행세를 하게 되었는지 인류의 과거를 개관했던 사피엔스에 이어, 영원불멸의 삶을 희구하며 궁극적으로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 종()의 미래를 탐사하며 오만함에 고양되어있는 인류를 향해 마지막 경고의 메시지 같았던 호모데우스로 인간 미래에 대한 논의에 많은 인간들의 시선을 모았던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교수가 인류의 현재를 위한 교훈을 내놓았다.

 

 

새로이 출간된 책은 21 Lessons for the 21st Century,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이라고 해석하면 될 듯하다. 이로서 그의 '인류' 3부작이 완성된다.

 

 

하라리 교수의 눈에 비친 오늘의 인간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직면한 일상에 허우적대느라 인류의 미래라는 거대 담론에 무관심한 종으로 보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이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혐오와 멸시의 질책을 보내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우리들에게 배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한다. 다만, 인류의 중차대한 운명, 당면한 곤경들에 대한 보다 진지한 참여와 사유의 기회가 되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 목표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다급하게 처리해야 할 것들에서 놓여나질 못한다. 그래서 인류의 미래가 자신에게 부당하게 결정되었다고 뒤늦게 호소해보아야 역사는 냉정하다. 바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 인류가 직면한 문제라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그래서 알아야 한다. 하라리는 뭄바이 빈민촌에서 두 아이를 기르느라 분투하는 홀어머니의 관심사는 다음 끼니다.” 라고 말한다. 즉 눈앞에 닥친 끼니의 문제가 지구온난화나 자유민주주의위기 같은 것보다 훨씬 다급할 것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 관심 밖의 일로 인해 뭄바이 빈민촌에서마저 살 수 없는 곳이 되면생존의 뿌리마저 상실하는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21 Lessons ... 은 바로 이 당면한 곤경의 상이한 면들을 다루고 있다.

 

 

전 세계 사회를 규정하고 지구 전체의 미래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은 주요 힘들을 살펴보는 이 교훈 선집은 현재의 우리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자극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고귀한 방향등이 되어 줄 것 같다. 최소한 명료한 전망을 얻을 수는 없을지언정 우리의 미래를 위한 핵심 질문이 무엇인지는 알아차리게 해 줄 터이다. 20188월 영문판 출간소식과 서문이 소개되자 독자들의 탄성어린 찬사가 이어지고 있다.  우리말 번역판도 동시에 출간 될 것(9.1 예정)으로 보인다.

 

 

[예약판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유발 하라리 저/전병근 역
김영사 | 2018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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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하엘 콜하스'에 대한 기대 | My Story 2014-02-21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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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콜하스(Michael Kohlhaas) - 법과 정의의 실재에 대한 물음

 

1805년에 집필되었던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소설 『미하엘 콜하스』가 200여년이 훌쩍 넘어 영화화되었다는 것은 여전히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는 문제의 근원에 있어서 거듭 환기되어야 할 충분한 것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화되자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의 주제의식을 떠올리게 된다. 기득권 계층의 공고한 연결망인 부당한 사회시스템을 어떻게 정의로운 시스템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까? 하는 그것, 말(馬)장수인 ‘미하엘 콜하스’는 선량한 시민의 삶을 파괴하는 악행인 이 불의의 힘에 대항하여 정의를 지키는 것, 그리고 존재하지만 작동하지 않는 법의 존재론적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자 또한 정당화에 대한 의지의 화신(化身)이다.

 

개봉되는 영화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될지 자못 궁금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이 일반적 시민의 호소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에 대해, 나아가 과연 법의 힘은 최초에 누가 부여한 것이며, 그 법이 항상 정의로운가 하는 것에 대한 의문 말이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소송』에 첨삭된 그가 쓴 유명한 우화인 「법 앞에서」에 등장하는 법의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는 시골사람의 그 불가능성처럼 열려있지만 이미 법안에 있는 인간이기에 여는 것이 가능치 않은 그 법의 폐쇄성까지는 아닐지라도 일반 시민에게 그 법의 도달은 요원하기만 한 것이 사실이 아니겠는가?

 

사건의 발단은 이렇다. 말을 거래하기 위한 긴 여정에서 미하엘은 영주인 융커로부터 예기치 않은 통행세의 요구를 받는다. 이 새로운 통행권리에 대한 이해가 없던 미하엘은 융커 일원이 탐내던 그의 말과 하인을 담보로 하고 여정의 목적인 말 거래를 무사히 마친다. 그리고 융커가 요구했던 통행증에 대한 제도의 존재여부를 해당관청에 문의하지만 그런 제도는 실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즉 부당한 횡포이며 약탈인 것임을.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말과 하인을 찾지만 뼈만 앙상하게 남은 말과 융커 일원의 무례와 위협만을 마주하게 된다.

 

귀가한 미하엘은 변호사의 선임과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소송을 제기하지만 이미 권력망의 요지에 산재한 융커가문은 중간에서 소장을 파기하고 미하엘의 요구를 묵살한다. 자신의 소장이 최고 권력자인 선제후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인지한 미하엘은 직접 전달하려 하지만 여성의 유연성을 내세운 아내가 전달하기 위해 떠나고 이내 수많은 상처의 반죽음 상태로 마차에 실려 돌아온 채,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지배계급의 파렴치와 탐욕, 그 전횡이 구조화되어 그네들의 부당, 불의, 부정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세계라는 인식에 도달한다.

 

미하엘은 이렇게 구조화된 불의에 맞서기 위해 일군의 피압박민들의 무리를 규합하여 얼마 전 한국의 대통령이 지적한바 있는 ‘구조적 난맥상’이라는 것, 더러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파렴치한들의 네트워크인 학연, 지연, 혈연으로 뭉쳐진 부정한 사회 시스템에 저항한다. 융커를 보호하는 도시를 방화하고 그를 비호하는 세력을 살해한다. 미하엘의 세력이 점점 불어나자 지배계층인 귀족들의 불안감은 점증된다. 이때 미하엘의 처사를 비난하는 루터의 포고문이 나돌자 미하엘은 루터를 방문하여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역설한다.

 

아마 주제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미하엘과 루터의 질의와 응답으로 이루어진 대화는 이 소설이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사회의 시스템과 법의 궁극에 대한 사유의 기틀을 제공한 명문(明文)일 것이다.

누가 “불과 칼로서 침범할 권리를 주었느냐?”라는 루터의 물음에 미하엘은 “아무도 없습니다.”라고 답변한다. 그에게 어느 누가 폭력의 권리를 줄 수 있는가? 이것은 누가 법 제정의 권리를 부여하였는가 하는 질문과 다름없다. 루소 같으면 ‘일반의지’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그 존재를 규명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어서 “누가 이 국가 사회로부터 너를 추방했는가?”라는 질문에 미하엘은 자기만의 목소리로 답변한다. “추방당한 자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자를 말합니다.”라는 정의로 대신한다. 즉 누가 종용한 것이 아니라 작동하지 않는 법, 법이 무용한, 의미 없는 지대가 존재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루터의 중재안에 의해 미하엘 집단의 방화와 살인 등 반란행위의 사면과 안전한 귀가를 조건으로 저항집단을 해산하지만, 융커 가를 비롯한 이해집단은 미하엘의 소송을 무효화하고 오히려 국기문란과 재산 파괴 행위 등을 이유로 처형을 모의하고 실행하려 한다. 여기서 다시금 법과 정의의 실효적 발현을 위한 멋진 대화가 등장 한다. “나라가 제일 먼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융커를 악형에 처하라고 고소하는 것이고, 비로소 나라는 말 장수 미하엘 콜하스를 처형할 권한을 갖는 것”이라는 선언이다. 법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미하엘은 기꺼이 자신의 죽음을 담보하는 것이다.

 

사실 상대적 약자인 일반 시민이 자신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힘에 항변하고 자신의 기본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수월치 않은 것이 현실이다. 사법부, 변호인, 교육청 등 사회적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자신의 사악한 행위에 대한 제도적 처벌을 회피하는 『도가니』에서 보여주는 권력의 구조적인 난맥상은 법의 의미 없음과 법의 문(門)을 열고 들어 갈 수 있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를 야기한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법과 법 집행의 이러한 자의성은 정의에 대한 어려운 과제를 던진다. 불의에 대한 약자들의 연대와 저항의 실행이란 힘겨움의 요구, 결국 자기희생을 담보하여야만 기능하는 정의의 실현이란 왠지 불분명해 보인다. 정의가 절로 작동하는 구조의 사회를 염원하기에 인간의 본성이란 무능력하기만 한 것일까? 21세기에 제작된 영화는 과연 이러한 의문에 대해 어떠한 시선을 더하고 있을지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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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도서]죽음은 소멸이외의 의미를 가지는가? | My Story 2013-06-15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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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물음의 대상인 언어, 아니 그 무형적 실체성에 대해서 인간은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죽음 !' 일상에서 죽음을 항시 생각하지는 못하지만, 필연적으로 모든 인간에게 다가올 이 현상은 아마 부조리중에서도 최악의 부조리일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관한 인간들의 의문은 헤아릴 수 없는 사유를 만들어 왔을것이다. 삶이 끝난다는 것의 의미는 진정 무엇인지, 소멸, 사라짐이라는 의미만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니 구태여 진정한 의미를 찾는 까닭은 무엇인지, 물을 필요조차 없는 단지 '무(無)' 그 이상도 이이하도 아닌 것은 아닌지... 게다가 종교와 심리학과 같은 분야에서는 영혼과 죽음 이후의 존재를 상정하기까지 하고, 자연 순화의 고리에 연결하여 윤회를 말하기도 한다.

 

결국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은 산 자들이 삶의 실체성에 공고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공상일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가오는 그림자에 대한 인식을 떨쳐내는 것이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다.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이라는 책은 이처럼 혼란스러운 내게 죽음의 이해를 통해 현재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어떤 명확성, 삶의 방향에 대한 이해를 제시해 줄 것 만 같다.

 

살아있다는 것은 육체만의 실존 문제인가, 영혼, 혹은 정신이라 지칭하는 것은 육체의 부산물일 뿐인가? 더 나아가서 살아 있다고 말 할 수 있는 근거는 진정 무엇인가?  죽음은 그저 생명의 박탈에 불과한 것인가? 언제 어떻게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는 불명확성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죽음은 내게 오고 말 것이라는 확정적 필연성은 대체 어떤 관계라도 있기는 한 것인가? 그렇다면 죽음은 악질이고 두려운 것인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 것인가? 이들에 대한 케이건의 진지한 사유는 분명 내 삶의 의미와 의욕을 위한 어루만짐이 되어줄것 만 같다. 팔순이 훨씬 넘어버린 부모님들을 뵐 때면 더더욱 죽음 앞에 서 있게 될 나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매번 벼르기만 하다가 놓쳐버린 이 책을 비로소 읽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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