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블로그 | 랜덤블로그 쪽지
필리아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
http://blog.yes24.com/kuju
리스트
태그 & 테마링 | 방명록
필리아
童而習之,白紛如也 Thinking!
파워 문화 블로그

PowerCultureBlog with YES24 Since 2010

2·4기 책

프로필 쪽지 친구추가
9월 스타지수 : 별4,361
댓글알리미 비글 : 사용함
전체보기
기본 카테고리
나의 리뷰
Wish List
My Story
My Favorites
나의 리뷰
소설,시
에세이,평론
인문,사회
자연과학
나의 메모
기본 카테고리
태그
책임없는자유 새로운가치 지역연고주의 기회주의 21세기공화주의와공동선한국 최대행복 js밀 매킨타이어 폭력의거시물리학 폭력의미시물리학
2020 / 09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월별보기
나의 친구
나의 친구들
최근 댓글
필리아님~ 좋은 리뷰 .. 
좋은 리뷰 잘 읽고 갑.. 
글 속에 필리아님이 .. 
우수 리뷰어 선정되신.. 
왕관 달려있네요. 잘 .. 
새로운 글

인문,사회
파괴되는 민주주의 가치들, 탈출구를 찾아서 | 인문,사회 2020-09-12 19:10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3011931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게임 오버 GAME OVER

한스 페터 마르틴 저/이지윤 역
한빛비즈 | 2020년 08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대중들은 기득권층에 저항해 새로운 자의식과 힘을 모색하는

인간 역사의 중요 사건으로 기록 될 그러한 시대에 들어섰다.”

- 본문 243쪽 중에서(부분 변형 발췌)

 

굳건하게 믿어오던 우리네 행위가 의지하던 가치들 - 평등,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 정의(공정성) 등등 - 이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분석, 규명하는 빼어난 통찰들이 끝없이 지금 이 세계 주요 담론 중 하나로서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다. 사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극우화하는 권위주의와 새로운 민족주의의 대두, 상실되어가는 시민 연대 가능성, 가짜뉴스와 음모론이 조장하는 분열주의에 숨은 수구적 기득권의 파렴치함 등은 이제 그 어휘에서조차 피로감이 느껴질 만큼 반복된 언어들이다.

 

이 책 게임 오버(Game Over)도 믿어왔던 가치들, 저자는 서구 세계가 쌓아 온 문명화 모델이라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이 상황 종료! 에 직면하였음을 선언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동일한 언어의 반복에 가깝다 할 수 있다. 다만, 저자가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독일을 중심으로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 그리고 독재적 전체주의 시스템을 선전하고 있는 자본 대국 중국을 통해 변화하고 있는 세계 질서와 변질된 가치들의 형태와 양상을 이해하고, 추락하는 세상의 고통 고발이 한국 사회가 마주한 현안이거나 곧 다가 올 현실이기에 유용한 참조가 되어 준다.

 

12장으로 구성되어 1~9장에 이르는 9개의 장에서는 민주적 가치들의게임오버를 선언할 수밖에 없게 된 오늘의 세계를 분석, 조명하고, 이후 3개의 장에서는 일종의 출구 전략을 제시하고 있지만, 단연 세계를 하나의 중국으로 만들겠다는 야망이 빚어낸 그 파괴적 파급력을 말하는 이미 시작된 세계사회의 위기와 균열을 말하는 제2장과, ‘서구 사회는 어떻게 민주주의를 거부했는가라며 감정의 정치를 이용한 엘리트 기득권 계층의 민족주의의 민낯을 폭로하는 제 4장은 아마 이 책의 실질적 본질이며 비범한 통찰의 핵이라 할 것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Made in China)

 

 

중국이 강대국으로 재부상하겠다는 차이나 드림을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習近平)

 

비약적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완벽한 시민감시를 통해 권력기반을 공고하게 한 중국 정치 엘리트들은 자본주의는 자신들의 감시공산주의에서 더욱 꽃을 피운다는 듯, 그들의 독재적 전체주의 시스템을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선전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이식하던 서구사회의 기대와는 달리 중국의 시장은 결코 민주주의의 길로 들어서지 않았으며, 이제 중국의 시장에 목을 맨 대다수의 경제 선진국들은 그들의 의지에 맞설 힘을 상실했다. 시진핑의 담대한 선언은 결코 공상적 기대의 말이 아니다. 독일 최대은행인 도이치방크의 최대주주, 세계 최고의 자동차 생산기업 다임러의 최대주주가 중국의 보험회사라는 것은 세계 자본의 헤게모니를 누가 쥐고 있는가?를 굳이 물어 볼 것도 없음의 증거이다.

 

이제 중국은 자신들의 이익에 토대를 둔 국제 규칙을 만든다. 중국 투자에 대한 제한 강도를 높이려던 유럽연합은 대규모 부채의 부담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에 중국의 압력에 굴복했다. 중국의 거대한 투자를 받아들이고, 중국식 전체주의 체제를 수입하기 시작한 헝가리, 체코, 그리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에스토니아, 알바니아..., 세계화의 덫에 서구 자신이 급사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일례로 전 세계에서 벌어들이는 영업이익의 50퍼센트를 중국에서 거둬들이고 있는 다임러가 자신들의 생산시설에서 스파이 노릇을 할 중국의 사이버보안법을 받아들이고, 자국(독일)의 법규를 개정하는 데 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자본가의 탐욕과 중국의 퇴행적 시스템이 결합하는 고리가 됨을 보여준다.

 

런던정치경제대학, 케임브리지대학의 교수가 중국 공산당의 요구로 자리를 언제든 박탈당할 수 있다면 이를 믿겠는가? 이것이 현실이란 것이다. 중국은 세계인권선언(UDHR)’의 내용 중 의사표현의 자유와 고문금지규정을 자신들의 인권규정에 포함시키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외교부장 왕이는 중국은 여러 인권 조약을 실천하는 본보기로 꾸준한 인정을 받고 있다.”라며 거리낌없이 거짓 주장을 편다. 중국은 그 누구에게도 민주주의를 허락하지 않겠다며, 우리만의 역사를 쓸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새로운 세계 권력을 제재하려는 미국에 유럽의 국가들이 동조하지 않는 속사정이 여기에 있다. 중국이 실패하면 자신들에게 경제적 파장, 정치적 변화의 심각한 고통이 직접적이기 때문이다. 세계는 중국의 자본주의적 감시공산주의를 전면 수용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형국이란 것이다.

 

지금 미중 무역전쟁이 심화되고 있다. 그 파급에서 우리 또한 결코 안전하지 못하다. 이 거대제국이 뒷걸음질 치고, 붕괴되는 것이 과연 이롭기만 한 것인가? 아니면 그 변화가 몰고 올 새로운 질서를 위한 고통의 감수가 필요한 것인가? 이것은 경제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치와 체제적 가치의 문제를 포함한다. “2017년 이후 전 세계에서 기업경기 실사지수(BSI)와 구매관리자지수(PMI)가 뒷걸음치고 있다고 한다. 급기야 20201월 이후 세계적 경기침체를 야기한 코로나 팬데믹은 세계 경제 질서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변화된 경제 환경은 정치 행태, 정책의 변화, 새로운 방향의 사고를 요구한다. 한국 사회의 격화되는 적대와 갈등이 이러한 세계 경제와 정치질서의 현상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경시할 수 없는 이유이다.

 

 

우경화와 권위주의의 부활

 

 

이미 프랑스를 비롯한 이탈리아, 덴마크, 벨기에, 오스트리아...유럽 나라들은 우파 또는 극우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난민유입이라는 정체성의 문제로 촉발되고, 자본의 탐욕을 헤집고 침투한 중국의 자본은 경제위기와 불평등의 확대심화, 게다가 신기술의 발달로 인한 일자리의 감소로 대중적 불안을 확산시킨다. 이는 수구세력의 부활 가능 도구로 이용되고 신민족주의라는 변화된 극우 세력을 출현시켰다.

 

유럽 사회가 이렇게 우경화되고 있는 원인의 역학에 대한 저자의 분석은 오늘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양상으로 인해 주의가 집중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유럽사회는 난민의 유입으로 인한 민족적 정체성이 대두되었지만, 한국 사회는 지역적 정체성이란 현상으로 혐오와 적대감이 표출되고 있다. 선거 행태는 정체성의 확립과정이라고 한다. 한국사회의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거대 여당과 지역당에 가까운 야당으로 끝났다. 정체성이라는 기본 감정을 자극하고 부추겨 원망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보수 세력의 오래된 전술이라는 점에서 유럽이나 한국이나 그 차이가 없다.

 

행동경제학자인 취리히대학의 에른스트 페르교수의 연구 결과처럼 정체성 표현의 통로였던 선거 결과의 패배는 무시당했다는 근거없는 맹목적 분노를 고착시킨다는 것이다. 이 맹목성은 원망으로 자의식을 형성시키고 개인적 인정 욕구가 부인되었음으로 연결되어 거부 역학을 강화하며, 이 충족되지 못한 인정욕구의 실체는 복수심으로 발현된다고 지적한다. 이 원망 집단은 형성된 적대 감정을 그대로 사회에 투사하는 데, 수구 우파 세력에게는 집권 세력의 비난 도구로 더할 나위없는 동조 세력이라는 것이다. 집권 세력의 모든 정책에 대해 부정과 악의를 쏟아내는 것은 이러한 정체성의 역학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농부는 이웃의 소가 늘어날 때, 하나님, 제발 이웃의 소가 줄게 해주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처럼 부정의 메커니즘에 침몰되는 이 정서적 현상은 감정의 정치를 돌아보게 한다.

 

이처럼 정체성의 맹목성은 우파세력 성장의 중요한 영양분이 된다. 여기에 어떠한 진실이나 올바름은 문제되지 않는다. 그저 유일한 동기는 같은 지역, 혈통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며, 우리가 미워하는 자를 그들도 미워한다.”는 기본감정만으로 충분히 작동한다는 데 있다. 경계해야 하는 이 부정의 메커니즘을 내면화한 사람들, 원망 집단이 토해내는 거짓과 호도의 성격이다.

 

이들은 자신들만이 정의롭다고 주장한다. 자기 인지 범위를 바탕으로 정의를 이해하기에 가능한 것인데, 이것을 실행할 때 자신에게 유리한 해석을 덧붙이며 이 자기기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자신에게 공정한 것만을 고려할 뿐 타자의 이로움에는 무관심할 뿐 아니라 제3자 심판의 입장에서 공정을 묻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 혐오와 갈등의 촉발, 분열이라는 부정성으로 분노를 해소하는 것, 그 맹목성, 가치에 대한 목표가 애초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인한 사회적 가치 실현의 지연과 후퇴 등 사회적 비용을 가중시키고 자유라는 명목으로 책임을 회피, 전가하기에 그 피해를 고스란히 공공에게 떠넘긴다는 것이다. 사실 이들의 집단화, 혹은 정치적 권력화는 이러한 현실을 외면한 대중의 몫이니 굳이 그 정치적 결과를 논의하는 것이 사족에 불과할 듯하다.

 

 

지금,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성공적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는 정확한 겉모습을 내 보일 줄 아는 기술이 필요하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

 

 

상황에 자신을 최적화시키는 약삭빠른 자들, 배후에서 나온 음모론을 믿고, 조작된 인터넷 게시판에서 위안을 찾으며, ‘저 윗놈들에 대한 분노에서 자양분을 얻어”, 거짓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이라는 황당한 담론을 쏟아내는 자들 역시 언론 산업 주요 분야의 배후 엄호를 받으며 자신들의 입지 형성에 열을 올린다. 역시 자신들만이 정의의 전도사란 듯이. 마키아벨리의 말은 틀렸다. 누구나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성공적 정치가라 할 수 없다. 진짜배기는 속 알맹이, 진정성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그 지향성에 대한 사유와 이해를 요구하며, 기술이 아니라 오늘날 시민적 가치에 대한 공감의 정책이다. 무능한 이라는 수식어를 마치 독점적으로 사용할 권한을 지닌 것인 냥 비난의 언어에 실어 뱉어내는 자들의 기회주의적인 무책임성은 이러한 포퓰리즘에 기인하는 듯하다.

 

아마 도널드 트럼프만큼 이에 능한 자도 없을 것이다. 예의와 문명이 그어놓은 한계선을 무용화시킨 사람, 대중의 맹목적 감정을 부추겨 정치에 이용할 줄 아는 사람, 우파 극단주의자들이 환호작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트럼프 역시 정체성 정치를 끌어들였다. 백인 중심주의, 그래서 나머지는 적이 되고 백인집단은 똘똘 뭉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아무런 정치적 견해도 없는 자, 다만 자기 이익 실현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한다는 탐욕스런 의지만 있다.

 

무역전쟁을 본격화한 것은 대통령 재선을 위한, 즉 권력의 연장을 위한 이기심을 기반으로 한다. 역사 경험이 무역전쟁은 패자밖에 없다는 것을 그의 똘똘한 참모진들이 모를 리 없지만 대중을 향한 행동으로서는 이만한 포퓰리즘적 성과가 있을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기에 시작된 것이다. 시간이 지난 뒤 무역전쟁의 희생이 드러날 때면 새로운 전쟁으로 통화 전쟁을 예고하고 있다는 저자의 선견은 다가 올 세계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음모기획과 가짜뉴스가 활개치는 환경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이는 우경화된 수구세력의 전체주의적 의지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준다. 우파 극단주의자들의 폭력적 시위의 예고, 이들의 경찰력 무력화 시도를 통한 공권력의 훼손 유발, 폭력 격화의 도화선을 만들어내려 하는 반사회적 행위가 대중의 삶을 얼마나 피폐화시키는 지, 앞선 유럽사회들의 현실이 반면교사가 되어준다.



 


한스 페터 마르틴은 바로 오늘, 세계에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나라가 한 줌도 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그는 전 세계가 한국에 희망을 걸었습니다.”라고 한국어판 서문을 열고 있지만 한국사회의 현실은 한 줌의 나라에 더 이상 버텨내기 어려울 정도로 폭력적 언어의 무자비함으로 무장한 사회 근간을 흔드는 기득권 세력과의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함께 살아가는 전체의 가치를 존중하는 다양성, 균형잡힌 부의 합리적 분배추구, 의사표현의 보편적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부르짖지만 사회적 결속에 대한 거부와 불평등, 불안정을 항구화하려는 수구 정치 집단의 끊임없는 이러한 갈등 국면의 조장은 뉴노멀을 향한 새로운 가치 정립의 실행을 지연시키고 좌절시킨다.

 

나라를 흔들어놓기 좋은 전술은 이 같은 지속적인 언어 공격이다. 황색신문으로 자리매김한 조중동을 비롯하여 아무나 개설할 수 있는 각종 온라인 채널들, 사유를 요구하지 않는 단문 메시지의 용이함 등은 인간의 자의식을 공격하기 위한 기막힌 터전이 되어준다. 공격 비용은 거의 들지 않지만 방어에는 엄청난 비용이 소용된다. 저자는 과연 민주주의는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인가? 이를 무력화시키려는 극우주의와 포퓰리즘, 책임없는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는 기회주의자들이 판치는 현실을 계속 좌시만 할 것인지를 묻는지도 모른다. 게임 오버의 선언을 할 때는 이미 모두 추락한 뒤일 것이다. 어느 누가 이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오늘 기만적 언어를 쏟아내며 선동하는 수구 세력과 이에 황색언론이 키워 낸 기생하는 소수 담론 계층 등 소위 엘리트층 이라 불리는 자들의 악취 나는 배설된 언어가 시민 대중의 마음에 가닿지 않으리라. 백서를 쓴 자, 흑서를 쓴 자들, 시민 대중의 황폐한 삶을 보듬을 줄 모르는 자들,  모두 입을 다물라!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대중과 소위 엘리트층이라 불리는 논객들의 언어와 믿음과 가치의 괴리가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고 여겨진다. 이제 저자의 제안처럼 추첨으로 구성된시민위원회를 출범시켜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 세계의 파멸적 현실을 넘어서고자 하는 이들에게, 사회적 연대의 회복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그 출발 가능 지점을 들려 줄 것이라 확신한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2)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10        
드러나는 자본의 정체 | 인문,사회 2020-09-01 04:40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2950673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자본의 재생산

고병권 저
천년의상상 | 2020년 08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마르크스의 『자본』 1권을 읽어나가는 〈북클럽  『자본』〉시리즈의 10 권째이다. 이제 막바지에 이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1권 제 7편  「자본의 축적 과정」중  제 21장  "단순 재생산"과   제 22장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화"라는 2개의 장을 다루고 있는데,  '자본의 생산'을 높은 봉우리에서 조망하는, 즉 생산 과정의 반복이라는 자본의 자기 갱신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비로소 드러나는  '자본의 정체를 폭로'하는 장이라 할 수 있다.

 

전체로서 자본주의의 재생산,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을 고려하는 관점에 서면 생산수단과 노동력 구매, 생산, 유통(판매)이라는 하나 하나 개별일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커다란 틀 안에서 움직이는 것, 그것들이 내재하고 있는 계기와 과정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된다. 이 관점으로부터 드러나는 주목할 만한 것은 '자본가는 결코 임금 지불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자본가가 노동자 자신에게 지불한 가치를 생산물가치에 담고, 생산물을 판매하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지불했던 임금을 회수한다. 애덤 스미스가 말했듯이  "사실 고용주(자본가)는 아무런 비용도 들이지 않았"다고 해도 그릇되다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여기서 단순 재생산이나 확대 재생산을 설명할 생각은 없다. 자본가가 잉여가치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즉 생산에 투입할 것인지, 개인적으로 모두 소비하거나 그저 화폐 축재에 탐닉할 것인지에 따른 분류일 뿐이다. 다만 자본주의의 속성상 자본가는 확대재생산을 통해 잉여가치를 더욱 늘려나갈 것이라는 이해로 족할 것 같다. 잉여가치란  "등가물 없이 취득한 가치 내지 지불하지 않은 타인의 노동"이라는 불불노동(不拂勞動)이므로 이것을 극대화하려는 탐욕을 걱정할 까닭이 없다고 할 것이다. 

 

【본문 65 쪽 전체 발췌

 

 

이것은 곧 노동력만 구매할 수 있다면 자본가는 계속해서 "대가없이 취한 돈으로 대가를 지불하며" 부를 늘릴 수 있다는 의미와 같다. 누군가 100억이라는 돈이 있다고 하자. 그 돈이 어떻게 그의 소유가 되었는지는 무시하고, 그가 1년 동안 생산수단 구입비로 80억을, 노동력 구입에 20억을 써서 120억을 벌었다고 할 때, 잉여가치는 20억이다. 단순재생산, 즉 잉여가치를 그가 사적으로 모두 소비(치부)하고, 다시금 100억으로 동일한 생산을 5년간 하면 그는 총 100억의 잉여가치를 다 써 버려도 역시 100억으로 재생산을 반복할 수 있다. 그리곤 이 100억이 자기 것이라고 한다. 그는 최초의 100억을 이미 모두 회수하였으며, 단순 재생산에 투입된 100억은 사실 그의 것이 아니다. 즉 최초의 자본과 5년 후 자본의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의 법은 이것을 자본가의 재산이라고 한다. 여기에 어떤 모순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가?

 

이는 소위 '사적 소유의 원칙'에 근거한 것이기에 합법적이요 정당화된다. 자본가의 잉여가치 취득의 핵심 기제인 '타인의 노동력 소유', 다시 말해서 "내가 노동하지 않았지만 타인의 노동을 내 것으로 사용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가 노동한 것과 마찬가지이며, 그 생산물은 내 것이라는 논리"의 성립 때문이다. 일례로 '이 생산물은 내가 몇 명 고용해서 만들어 낸 거야'라고 말하는 자본가의 말 속에서 노동력의 소유, 상품화된 노동을 읽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에 더해 노동하는 시간을 벗어난 노동자의 여가시간은 그렇다면 생산과 무관한 시간일까? 자본주의는 노동자 스스로 노동자를 생산하도록 한다. 즉 노동자의 소비는 자본가의 '낭비적 소비'와는 달리 '생산적 소비'라고 부른다. 노동자는 일하기 위해 먹고, 아니 일하는 중에도 밥을 먹을 뿐만 아니라 근육과 뼈와 뇌를 재생산한다. 자기계발을 하고 보다 쓸모있는 노동력이 되기위해 스스로 관리한다. 자본가는 노동자가 생산한 것으로 가치를 지불하고 더불어 잉여가치까지 얻으며 기계나 그 어떤 설비처럼 관리비도 들이지 않으니 돌멩이 하나로 두 마리의 새를 잡는(一石二鳥) 정도가 아니라 가상의 돌 혹은 던진것 처럼 착각만 일으켜도 두 마리의 새를 잡는(幻二鳥) 격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출현하는 역사적 조건이라는 '가난'은 노동의 지속적 공급을 보장해주기까지 하며, 최저임금이라는 기막힌 도구가 한 몫 거들어주기까지 한다.

 

 

【본문 81쪽 중 부분 발췌】

 

저자 고병권의 이 책을 모두 옮겨 적어 많은 이들과 생각을 같이하고 싶을 정도이지만 노동의 소외와 노동력의 착취분이 곧 잉여가치임을, 또한 이 노동력 착취분이 자본이 되는 것임을, 노동자에게 지불되는 임금 역시 착취된 자기 노동 가치임을 아는 것만으로 , 자본주의의 순환, 자본주의 생산양식이란 바로 이 체계의 반복임을 이해하는 것으로 맺기로 하자. 이 책이 설명하는  『자본』 1권 제 7편인 '자본의 축적'이란 곧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통한 잉여가치의 무한 축적, 노동력의 끊임없는 착취를 토대로 작동하는 것임을 확인하는 다음 책의 예고 문장이야말로 맺음말로 맞춤인 듯하다. 

 

【본문 180쪽 중 부분 발췌】

 

어쩌면 '절대적이고 일반적인 사회법칙'이 되었기에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고 있는 왜곡된 자본의 이해를 불식시키고 그 어느 시기보다 새로운 가치를 요구하는 바로 오늘을 돌파하는  사유의 작은 순(筍)을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수많은 모순을 지니고 있음에도 자기 동력화된 자본 생산의 순환체제를 멈 출 수 있는 길을 우리는 기필코 발견해 내리라는 믿음을 가져보게 된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5        
당신을 아껴요 | 인문,사회 2020-08-09 19:59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2843305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한 공기의 사랑, 아낌의 인문학

강신주 저
EBS BOOKS | 2020년 07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일체가 모두 고통이다."라는 싯다르타의 가르침인 일체개고(一切皆苦)로 시작하는 이 사랑의 인문학은 시(詩)와 불교와 철학이 어우러져 행복하게 산다는 것,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기쁨인지, 그것에 이르는 지혜들, 그 사유와 행동을 배우도록 돕는다. 그것은 바로 모두 고통인 것을 아는 것, 그래서 타인의 불행이나 고통을 아파하고 그 고통을 어떻게든 완화시키려는 자비(慈悲)의 마음이 곧 사랑임을 깨우치는 것이다. 이 책은 내게 지금까지 읽었던 여느 책이 아니다. 생의 전환을 야기한 어떤 사무침, 생의 독본이기에 자성에 대한 쓰기를 피할 수 없을 듯하다.


1.  고통, 무상(無常), 무아(無我)


아마 나라고 일컬어지는 존재자는  "사랑은 타인의 고통을 완화시키려는, 타인의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의지이자 감정"이라는 이 가르침의 정의 만큼 '사랑'을 알았던 적이 없다. 여기에는 그릇된 앎이 진실을 보지 못하게 했던 오만과 자기기만이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텅 비었음에도 마치 앎이 그득하다고 착각했던 그 천박한 지성의 무지말이다. 인생의 무상(人生無常)함을 고작 공허와 의미없음으로 받아들였으니 , 정작 무상(無常)에 직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으며, 도처에 모든 것이 무상함을 분출하는 것 - 언젠가부터 눈가에  주름살이 얼핏 스치는 아내의 얼굴, 갓난아이 티를 벗은 손주의 언행 ... - 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상을 느끼지 못했으니 내 마음에 사랑이 싹트지 않았음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세상의 무상함에 마음을 여는 것, 일상의 작은 변화에 주목하는 것, 타인의 무상함, 그 보이지 않는 고통에 사무치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며, 자신의 번뇌와 망집에 매달려 고통스러워하곤, 세상과 관계하지 않으며 그저 무덤덤하게 풍경으로만 바라보는 습관으로 스스로를 마비시키고 있었음을 와락 깨닫는다. 그리곤 고집스럽게 굳어져있던 마음의 벽이 무너져내린다. 아~ 내가 사랑할 줄 모르는 이유가 있었구나! 


"본래 아무것도 없는데(本來無一物), 어디에 때가 끼겠는가(何處惹塵埃)! "  - 선종 육조, 혜능선사


현재의 희생과 소비를 통해 미래의 행복과 구원을 향해 달린다는 변명으로  "불꽃의 무상함에 하염없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아이"의  감탄하는 그 직면을 알지 못했다. 그리곤 자기 동일성, 본질이라는 허깨비에 집착해서 존재하지도 않는 '나'를 얼마나 핥아대며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의미의 부재를, 공허만을 축적하여 왔는가를 이제야 알아 차린다. 본질에 대한 집착, 그래서 항시 구속된 듯한 감정에 휩싸여 옴짝달싹 하지 못했다. 혜림사(寺) 목불(木佛)을 태워 추위를 벗어난 단하소불의 일화로부터 선종의 여섯 번째 스승이 되는 혜능 스님의 지수(止水), 그 대비(大悲)의 한 가르침은 그릇된 내 마음의 둑을 일거에 무너뜨린다. 배고파 밥 달라고 엄마에게 칭얼대던 아이가 아파 누운 엄마를 보곤 혼자 라면을 끓여먹을 때, 자신의 배고픔이 아니라 엄마의 아픔에 사무쳐 수고스러움을 자신이 할 때, 그 아이에 깃든 부처의 모습, 그것이 자비이며 사랑인 것을.




2.  연기(緣起),애(愛),생(生)


어떤 존재가 만들어지려면 복수의 연(緣)들이 화합하거나 마주쳐야 한다. 그러니 여기에 무슨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말인가?  "니 뭣고?"라며 "너는 무엇이냐?"고 묻는 큰스님의 저자 강신주를 향한 당혹스런 질문에 나라면 무어라 답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그는 "저는 지금 방을 휘돌아 나가는 바람이 좋아요. (...) 스님은 연세가 드실수록 귀여우세요."라고 답한다.  바람이 좋다고, 스님이 좋다고 한다. 


그는 나가 아니라 너에 대해 생각한다.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 그가 나와의 관계에서 행복을 느낄 가능성을 크게 하려한다. 세상에! 사람 사는 이치가 이것인 것을. 나를 이루는 작은 '나'들, 너를 이루는 작은 '너'들, 너가 좋아하는 것들,  좋은 연, 긍정적인 연을, 새로운 마주침을 향하는 이의 마음이란 것을 넌즈시 넘보게 된다.


내 고통에 관심 없는 아내, 아이들 ...이라며 타인의 사랑없음을 비난한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너희들이 사랑하지 않는다고. 이제 나는 그들을 진정 사랑하고 있는 것인가를 자문하게 된다. 인간 정신의 항목들인 "용기, 자유, 사랑, 지혜 ... 모두 몸으로 증명되어야만 의미가 있다."고 한다. 위험한 상황에서, 풀리지 않는 난제에서, 억압적인 상황에서와 같이 위기가 찾아올 때 증명의 의무가 수면위로 떠오른다. 부모님이 치매에 걸렸을 때, 배우자가 실직하였을 때, 아이의 성적이 추락하였을 때와 같이. 자신의 사랑이 진정인지, 아니면 거래관계에 불과했는지를.  "상대의 고통을 덜어 내게로 가져오는 일을 행복으로 느끼지 않는데 그것이 어찌 사랑이겠는가?" 라는 물음에 다시금 내 마음은 천길 낭떠러지로 추락한다.


【본문 287쪽에서 발췌】


사랑 '애(愛)'에는 '아낀다'는 뜻이 있다. 즉 너를 아낀다!, 나는 너를 함부로 부리지 않는다. 나는 너를 쓰지 않고 모셔두겠다는 아낌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내 곁에 오래 있어주기만 하는 바람, 너의 무상함과 너의 고통을 보았으며 덜어주고 싶고 그저 아껴주고 싶기만한 그런 마음을 언젠가부터 잃어버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나를 이제사 되돌아본다.


총 8개의 챕터로 나뉜 이 책과 조응하는 김선우 시인의 시집 『녹턴』에서 인용된 8개의 시(詩)중 「花飛,그날이 오면」은 마지막 장인 '생(生)'의 의지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가슴 시리게 깨닫게 한다. "꽃의 은하에 무수한 눈부처와 / 당신 눈동자 속 나의 눈부처를 / 눈 속에 모두 들여야지", 라는 대목은 눈에 밟히는 무언가를 아무것도 뗘 올릴 수 없는 내 메마름, 무덤덤함, 공허의 현주소를 말해준다. "그날이 오면 / .... / 당신뿐 / 대지여 " 라고 나는 쓸 수 없음을 발견하는 것은, 걸어 온 삶의 길 전반의 경로를 바꾸어야 함을 가리킨다.  


저자의 에필로그 속 독자에 대한 기대말 처럼, "최소한 하나의 타자에게 만큼은 시인이었으면, (...) 부처였으면, (...) 철학자였으면 좋겠다는 마음", 그것의 행동이 얼마나 커다란 세상의 변화인줄 알기에 아마 지금 나는 아내의 무상을, 좋아하는 것을 적어내려 갈 것이다.  그녀의 눈동자 속 눈부처를 볼 것이다. 사람이 가진 사랑의 뿌리, 그것, 고통의 감수성이 무엇인지 내게 지속하여 말 할 것이다. 세상에, 일체개고인 것을!  온 몸을 다시 만드는 일, 심장과 머리를 통째로 바꾸는 일이 바로 내게 벌어졌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22)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21        
대중의 무지와 반지성의 계급적 에토스(Ethos) | 인문,사회 2020-07-18 21:38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2747419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반지성주의 시대

수전 제이코비 저/박광호 역
오월의봄 | 2020년 07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적극적 무지에 대한 정치 (...) 대중의 무지를 먹고 자란다."   -  P 470 에서


책은 반지성주의을 말하는데 있어서  반합리주의, 대중의 일반적 무지, 정크(junk)사상, 근본주의 등을 이용하여 그 편협성과 거짓말로 점철된 건국에서부터  트럼프 시대의 미국사회를 돌아본다.  '사상과 이성, 논리, 정확한 언어를 황폐화시켜' 특정 집단이나 계급적 이해관계에 복무케 해왔으며, 여전히 그 근본적 양상들이 위력을 발하는 요인들을 분석, 비판하고 있다. 


서 언 ; 반지성이란 무엇인가?


'반지성'이란 용어는 문자 그대로 지성에 대한 반어로서  의심과 혐오, 그리고 두려움이 결합한 기이한 어휘다. 그런데 반지성을 알아보는 것이 그리 수월한 것이 아닌 이유는  이것이 어떤 성향이나 취향이라는 일견 순수한 것 뒤에 숨어 자기 이익적 집단체계와 분리될 수 없는 관습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결국 지적 게으름이나 무지에 편승한 편협성의 토양에서 자라는 교활함, 사악함, 보이지 않는 구조적 폭력의 한 양식이라는 점이다.


지성을 혐오하는 반지성과 대중의 일반적 무지가 뿌리내린 미국사회의 역사적 토양을 읽는 것이 우리들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반문이 있다면 혹여 반지성주의에 침윤된 것이 아닌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반지성은 미국사회만의 독특한 현상이 아닐뿐 아니라 한국사회 역시 현재 진행형인 양태이며, 이것이 정치사회적 퇴보는 물론 인간의 도덕적 역량과 문명적 퇴화를 재촉하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삶의 질적 양적 후퇴로 이어지는 그 실재에 도사린 요인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며, 더구나 미국이라는 강대국 대중의 무지는 물론 그 리더의 반지성이 다른 세계, 약소국에 특히 위험하다는 까닭에서 그 중요함을 가볍게 물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우스를 클릭하면 반합리주의 세계가 열린다."   - P 336 에서


"디지털 환경이 추동하고 문자메시지와 트윗이 촉진한 언어의 황폐화"가 양산하는 가짜뉴스의 사례로 시작하는 서문은 "비디오 영상과 끊임없는 소음으로 가득한 무지몽매의 대중문화와 공생하는 혼미한 정신의 신종 반합리주의로 악화"되는 오늘의 문화와 정치의 급증하는 반지성주의의 위험을 지적한다. 이 위험이란 소셜미디어와 결합한 편협성의 증가인데, 이것은 견해가 같은 이들만의 집결로 편견을 강화하고, 그것의 무엇이든 믿어버리는 편협성 충족의 공간 역할 이외에는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이며, 오류와 거짓을 빠른 속도로 거리와 무관하게 확산시켜 갈등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는 데 있다.




아마 지금 바로 유튜브를 클릭하면,  많은 정치적, 문화적 동영상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내세우기 위해 근거없는 유언비어에서부터 조금만 시간을 들여 알아보면 사실과 다름이 드러날 거짓말, 근거가 빈약하기 그지없는 데이터, 합리적 해석과 일치하지 않는 부조리한 사례를 거리낌 없이 구사하여 사람들과 사회를 자신들의 욕구와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몰아 불의한 소음을 계속하는 것을 목격하는 것에 아무런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대중의 무지를 먹고 사는 것이다.  실제적 오류의 간파는 기초지식과 비판적 사고력을 요구한다


140자의 단문과 조금만 긴 문장이면 읽기를 중단, 회피하는 진지한 읽기의 쇠퇴, 줄임말의 난무와 심각한 문법적 오류 투성이 문장, 자신의 무지를 자랑스워하기까지 하는 부끄러움 상실의 현실은 반지성이 활동하는 비옥한 토양이 되어준다. 정치인, 연예인 등 유명인의 뒤나 캐는 화젯거리와 가십에 클릭이 모이고, 심각한 것은 피하고 싶어하는 열망에 부응하는 무용(無用)의 것들에 손놀림을 하느라 분주하지만 책 읽을 시간은 없다고 말하는 자기기만을 깨닫지 못한다. 이에비하면 지성에 노골적인 반감을 보이며 책을 읽지 않는다고 자랑하는 도널드 트럼프의 반지성은 자기 이해라도 있다고 해야할 것 같다.


본 론 ; 기독교 근본주의자들,  사회적 다윈주의,  빨갱이와 좌익분자들,  정크 과학과 사상 ...


18세기 건국기부터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의 21세기 오늘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반지성과 반합리가 사회적 주류였음을 주장하는 책의 저자 '수전 제이코비'"영국의 학자, 예술가, 작가들에 의존하여 자신들의 지식을 축적하려 애쓸 필요 없이 지식의 보고를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었기에 지적 추구를 무시하면서도 야만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며 미국 건국기의 '유사 식민지적 종속성'이라는 당대 특징으로 반지성 역사의 포문을 연다.


계몽주의 이성의 시대가 열리자 전통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근본주의(종교 문서의 문자적 해석에 기초한 믿음)적 신념을 파괴하는 지성에 의심과 혐오, 반감을 드러냈으며, 이들의 근거지역과 흑인 노예와 무식한 백인 하층 노동자들을 부리는 대농장주가 중심인 남부지역 등은 연방정부에 의한 전국적인 공교육을 반대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오늘에까지 이어져 공교육의 심각한 불평등과 문화적 분열로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이들은 남의 아이들 교육에 세금을 내는데 관심이 없었으며, 자신들 지역(state)만의 종파적 교과서를 만들어 근본주의적 신앙을 위해 합리적 이성과 지성을 배제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 사회의 절반이 넘는 사람들이 진화론을 믿지 않으며, 신이 4000년 전에 세심하게 인간을 창조하였다는 믿음을 여전히 고수하는 과학적 문맹으로 생물학, 지질학 등의 과학은 물론 합리적 이성과 관련한 여하한 인문 사회적 통찰도 교과서에서 실리지 못하는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진화론이 자연으로서의 인간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자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이 지적설계론이라는 사이비과학에 열광한 것이 당연한 귀결이었음은 자명하다 할 것이다. 아마 오늘날 우리사회에도 범람하는 자기계발서들의 모태라 할 수 있는 '허버트 스펜서'의 사회적 다위니즘에 입각한 '적자생존의 사회선택'이라는 황망한 사이비 이론의 시작에 이러한 미국사회의 배경이 있었음에서 반지성의 그 적나라하고 견고한 뿌리를 보게된다.


찰스 다윈은 '적자생존'이란 말을 한 적도 없을 뿐더러, 그의 저서 『인간의 유래; The Decent of Man』에서 "인간이 자연상태에서 문명 상태로 바뀌면 환경 요인과 도덕적 사안이 자연선택에 우선하게 된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도금시대로 불리는 19세기 독점 자본가들과 빈곤의 만연을 합리화하기 위해 다위니즘을 산업 자본가들과 대농장주, 개신교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사상적 토대로 제공한 사이비 과학의 전형이랄 수 있다. 즉 반지성이 사회를 잠식하고 오늘에도 재생되는 현실처럼 특정 계층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한 거짓 이론의 끈질긴 생명성을 확인할 수 있다.


"W.부시의 뇌로는 예일대, 하버드 경영대학원은 연줄이 없었다면(부시 가문의 부와 권력) 

근처에도 못 갔을 것, (...) 노력 없이 얻은 특권...."     - P 439 에서


미국사회를 지배하는 반지성주의의 이 질긴 생명력의 근간에는 이처럼 개신교 복음주의 근본주의자 집단이 놓여있다. 이 종교적 믿음에 기초한 대중들(창세기에 대한 문자적 믿음, 진화론의 부정)은 지성, 엘리트에 대한 불신과 혐오에 싸여있기에 반지성이 권력화되고 부를 축적하기에 훌륭한 기초가 되어준다. 이러한 사회의 바탕은 아이젠하워, 닉슨, W.부시로 이어지는 무식함과 개신교 복음주의 바탕의 대통령을 탄생시키고, 급기야는 "상스럽고 무지를 숨기지조차 않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기까지 한다. 

 

"세계지도에서 자신의 골프장들 외에 다른 무언가를 찾을 수 있으리라는 증거는 거의 없다."고 까지 지적 능력을 의심받는 도널드 트럼프의 트윗 단문은 대중의 일반적 무지에 부응하여 누구나 쉽게 알아볼 수 있는 패턴의 사용이라는 반지성적 성향의 증거이며, 이는 곧 대통령(국가 리더)의 스타일은 대중의 지식(지식의 부족)에 의해 형성됨을 의미한다고 역설하기까지 한다. 


근본주의 종교의 이데올로기와 정크과학이 결합하여 유독한 효과를 내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트럼프의 코로나19에 대한 엉터리 의학적 권고와 처방의 난발, 대대적인 바이러스 확산에도 불구하고 마스크 착용과 같은 확립된 과학 지식의 거부와 이러한 자기 결정에 대한 열렬한 정서적 확신은 반지성과 반합리주의의 전형적 위험의 표상이랄 수 있을 정도이다.


정크과학은 정크사상으로 영역을 확장하여 자기계발이라는 반합리주의를 팔기 시작했는데, 미국의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한국 사회의 미국에 대한 유사식민지 근성은 그대로 이식되어 서점가를 누빈다. 이것이 잘 팔리는 이유는 늘 손쉬운 방법을 담고 있기 때문인데, 그만큼 사유와 숙고라는 노력, 지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까닭이다. 정크사상, 자기계발 따위의 책이 팔리는 사회라면 반지성의 적신호임을 알아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허섭 쓰레기들을 쓰는 자들의 지적능력은 매우 높은데, 자신들의 필요 논리를 포획하는 능력이 출중하다는 것이다. 다만 그곳에는 과학적 언어를 사용하지만 과학적 증거도 없으며, 수학적 논리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우연의 일치와 인과관계도 구별하지 못한다. 전문가가 이따금 틀린 사실에 기초해 자신의 주장을 진실화 하기도 하는데, 이미 틀렸으므로 반론의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를 악용하는 반지성적 지식이 있는 것이다.


반지성의 횡행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빨갱이, 좌익분자라는 낙인찍기이다. 1950년대를 전후한 미국사회에서 지식인들의 목을 조르는 데 이보다 좋은 도구는 없었던 듯하다. 이를 그대로 이식하여 한국의 수구집단들 역시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 수단으로 오늘까지 지겹도록 활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는 사회전체의 지성이 정치적 공격에 취약하게 한다. 애국주의와 국가반역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는 것인데 반지성의 대표적 형상이라 할 것이다. 우파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의 반공 히스테리와 결합하여 자본과 기득 권력은 대중의 반지성을 구태여 비판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미국 사회의 가속화된 문화적 대중성 추구는 '미들 브라우(middle-brow)'라는 일종의 지적 중간층을 해체케 함으로써 모든 지적 척도의 하향화를 재촉하여 전체 사회의 반지성, 반합리주의를 고착시키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결 어 ; 오늘의 미디어 - 반지성의 비옥한 토양


미국 백악관의 최고위급 정치인의 인터뷰 일화로 시작해야겠다. 그가 한 발언이 거짓말임이 백일하에 드러나자,  왜 그런 거짓 발표를 했는가고 기자가 질문했단다. "아, 그건 거짓이 아니라 '대안적 사실'이에요." 사실(fact)에 대한 대안(代案)이란 이 황당한 답변이야말로 반지성의 표상(?)이라 할만하다. 소셜 미디어가 생활 플랫폼의 주류가 된지 이미 많은 시간이 지났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단문 메시지에서부터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와 같은 사진과 짧은 영상, 그리고 검색 엔진을 통한 텍스트의 무수한 링크 정보들, 이러한 것들이 생산하는 정보의 양은 그야말로 무한대로 증식하고 있다. 누구나 쓰고, 게시할 수 있는만큼 그 모든 것들이 가치있는 정보, 진짜 정보, 사유를 낳는 정보는 아니다. 왜곡과 거짓과 위선과 기만의 언어와 이미지들로 가득한 것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이곳에서 진지한 사고와 정보를 획득한다는 것은 자기 기만이거나 망상일지도 모른다.


실제 독서및 글쓰기와 인터넷의 텍스트 접근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한편, 소셜미디어에 장황한 비평이나 서술의 문장 따위에 주의를 기울일 시간이나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항변하는 이들도 있다. 더구나 상업성 추구가 최대 목적인 대중 문화의 폄하에 발끈하며 엘리트 문화주의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는 이들도 있으며, 인터넷 뉴스사이트의 코흘리개 편집자가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며 지성적 자기 검열의 책임을 외면하기도 한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지적 돌팔이 짓을 하며 그릇됨을 추궁하면 그저 견해가 다른 것이라며 일축하고 사실 증명의 어려움을 악용하기도 한다.


"그가 입을 열면 늘 인간의 지적 능력은 총량이 줄어들고 만다."  - 토마스 리드 1890년 美 하원의장


소셜 미디어나 인터넷 플랫폼만이 이런 형국은 아니다. 주요 일간 신문이나 이명박 정권이 기업자본가들을 위해 선물한 우후죽순의 종합편성 채널과 같은 TV역시 지적 측면에서 이미 품질이 낮아질대로 낮아져 있다. 산만하기 짝이없는 반사적 인포테인먼트가 주를 이루고 뉴스는 진위의 확인 없이 아니면 그만 식으로 적대적이고 악의적인 정보나 가십, 뒤캐기 식의 화젯거리 중심의 쓰레기를 쏟아낸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는 사용하는 이들, 시청하는 이들의 분별 능력 없음이라는 무지(無知)에 터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TV만 틀면 한국인들의 지적 능력 총량이 줄어드는 형국인 것이다.


일 년에 인문, 사회과학, 자연과학, 문학예술의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이들이 인구의 절대 다수라는 것은 새삼스런 자료가 아니지만, 많은 지적 에너지를 요구하는 독서가 지닌 사유의 힘을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얻어들은 자기 편향적 클릭의 정보는 편견과 무지를 확대할 뿐이다. 인터넷에서 특정 정보를 찾고자 두리번 거리는 것에는 사유가 불필요하다. 그리고 발견한 텍스트에서 집단지성 덕분에 한 권의 고립된 책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엮어낸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지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짜깁기(remix)와 표절 생산이 판치는 이유이다. 


베토벤과 비틀스의 음악을 모두 사랑할 수 있지만 그 둘의 음악이 같은 수준의 음악적 천재성을 의미하지 못한다. 심미적 감각과 이성적 사고 능력의 엄청난 차이를 무시하려는 마케팅적 발상은 그야말로 무지의 소산일 것이다. 반지성은 항상 반합리주의와 함께한다고 한다. 자신의 주장에 공명하지 않는 목소리를 들으려하지 않는 경향이 한국 사회에 폭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 다른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정말의 사실이란 무엇인가, 대체 정의와 지켜야 할 도덕가치는 무엇인가, 삶에서 지켜내야 할 진정한 안전과 자유란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아야 하지 않는가? 반지성주의의 본질은 게으른 정신과 함께한다고 한다. 무지라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은 늘 악덕이다. 오늘 나와 우리들, 이 사회의 주체들은 과연 지금의 오늘을 이끄는 가치가 옳은 것인지 반성적 사유를 위해서라도 이 한 권의 책 읽기를 권하고 싶어진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6        
풀, 문학에 투영된 정서와 영혼의 역사 | 인문,사회 2020-06-10 19:12
테마링
http://blog.yes24.com/document/12603476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풀의 향기

알랭 코르뱅 저/이선민 역
돌배나무 | 2020년 06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풀(艸)하면 내겐 한창의 청년시절 담채색의 고요한 여인을 부르던, '풀같다'라는 의미로 지은 '초여(艸如)'를 떠올리게 된다.  꿋꿋하게 솟아오르는 생명력과 함께 온화함과 깨끗함, 그리고 기이한 충동, 어떤 일렁임을 느끼게 하는 '푸른 진실'같기만 했던 한 존재를.   '알랭 코르뱅'의 『풀의 향기』는 숨어있던 기억을 길어 올리게 한다.  초록의 물결이 흐드러지게 펼쳐진 그 어느 들녘의 이름없는 야생초, 고요한 상념(想念)의 세계로 이끄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이며 후각적인 풀의 세계에 심취하며, 영혼의 어떤 위안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었을 것이다.


"한 장의 풀잎에 대한 이야기에 무수한 사랑을 담아낼 수 있겠지요."라고 말했던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말처럼, 책은 총 12장에 걸쳐 풀에 투영된 인간의 오랜 욕망의 역사를 그 본질적인 태초의 정취에 대한 이야기의  시작으로, 기억과 감각사이의 상호작용이 이끌어내는 유년의 추억, 원형적 욕망의 모습들을 거쳐 자연으로서의 풀에서 사람에게 복종된 인위적 풀 - 화단(정원), 잔디밭 - 의 질서와 분류가 발하는 욕망, 그리곤 풀밭 위를 걷는 하얀 맨발과 목신(牧神) 판(Pan)의 에로티시즘,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의 '행복한 요람'에 대한 관능적 쾌락의 세계, 마침내 병적인 푸르름, 죽음이라는 초월성의 상징에까지 내 닫는다.


1. 풀, 태초의 언어 - 원형의 기억 


"풀이 건네는 말이 곧 자연의 말이다....대지의 수많은 비밀을 담고 있으며, 

땅 그 자체를 담아낸 것..., 풀은 감정의 물질이다."    - P 10 에서(변형 발췌 인용)


옛 시인들의 이 상징적 표현만큼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묘사할 수는 없으리라. 우리는 풀을 탐하고 자신의 기억 속에 새긴다. "여기가 바로 나의 고향이로구나."라고 외친 시인 '랄프 에머슨'은 풀의 생명력과 소멸, 삶의 온갖 감각의 근원을 발견하였던 모양이다. 초록의 풀은 분명 시원적인 세계로 이끄는 무궁한 깊이와 풍요로운 언어를 가진 듯하다.  아마  "아린 행복감을 가장 잘 느끼게끔 하는 것도 나 홀로 풀밭을 거닐었던 순간들이다."라고 의식 깊숙한 곳에서 길어올린 '헤르만 헤세'의 표현처럼. 풀은 우리네 심연에 켜켜이 새겨진 태고의 기억을, 그 근원을 사유케한다. 


아, 과장되게 풀의 비의적 측면에 취해 코르뱅의 의도를 소홀히 한 것 같다. '풀의 역사', 보다 세심하게 묘사하자면 '풀을 향한 인간 욕망의 역사'를 고대에서 중세, 근대의 걸출한 문인(시인)들의 문학작품에 다채롭게 배어있는 문장들을 통해 화려한 초록의 향연을 펼쳐낸다.  


2. 전원, 목가적 환희


16세기 프랑스 시인중의 왕자로 불렸던 '롱사르(Pierre de Ronsard) '의 전원적 쾌락, " 미친듯이 들판으로 달려 나가/  한껏 숨을 들이마시며 아름다운 초원을 바라보네." 라며 초록의 초원이 불러일으키는 전원(田園)과 목가(牧歌)적 정경에 대한 환희와 찬양은 어떤 야생적 기쁨, 삶의 에너지를 끌어내는 영양분이 바로 거기에 있음을 이야기하는 '데이비드 소로'의 눈부신 금빛 물결이 되어 몸을 담그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그는 풀밭에 누워 (...) 자신 앞에 깔린 안개 낀 어둠을 오랫동안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 

순간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비밀의 문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문 너머 세상은 고요히 자라나는 싱그러운 식물들로 뒤덮인 곳일 듯 했다."   - P 99 中에서


영국 시인 '존 쿠퍼 포이스'가 쓴 위의 감상처럼 내겐 시각적 기쁨에서 발흥하는 즐거움보다는 그것과 직접 접촉하며 온 몸에 스며들고 마침내 정신을 고양시키고 몽상과 아득한 침묵의 세계로 향하게 하는 대상으로서의 풀에 보다 마음이 동했던 모양이다. 세기의 시인들이 노래하던 '로쿠스 아모이누스(locus amoenus)', 즉 지상낙원, 혹은 에덴동산이라는 태고이래 인간에 새겨진 근원에 대한 동경의 세계로.


이탈리아의 시인 '야코포 사나자로'가 1504년 발표한 시집 『아르카디아』의 목가들에서부터 『나무를 심은 사람』으로 잘 알려진 '장 지오노'의 풀에 관한 최고의 소설로 불리는 『소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육감과 풀의 본능적 연결은 시인 '이브 본느푸와'의  "여기가 바로 내가 있을 자리이니. 결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곳"이라는 외침, 어떤 원형의 기억에 가닿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코르뱅이 이처럼 고답(高踏)적인 감상만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인간의 욕망이 한 방향으로만 지속되기만 하던가? 자연의 변화무쌍함이란 혼돈과 무질서 아니던가. 우아하고 고상한, 혹은 조화와 질서라는 차별화를 향한 욕구와 함께 복속의 욕망이 투사되기도 한다.


3. 사회적 욕망이 된 풀


'잔디밭(pelouse)'이라는 용어가 14세기 말에 등장하고 16세기에 이르면  "가까이에 짧게 깎은 풀을 두고 보는 것보다 보기 좋은 것은 없다."라는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처럼 풀이 귀족의 사회적 위신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기 시작했던 모양이다. 정돈된 광경, 여기에 후각의 즐거움을 고려한 화단의 배열까지 더해  "제왕적 권위를 상기시키기 위한 감정의 그물들을 엮기 시작"했단다. 이에 깃든 욕망이란 무릇 풀들이 서로 뒤섞이지 않는 품종의 분류는 물론 "자신의 줄에서 벗어나는" 풀을 용납하지 않는 복종과 지배라는 계급화, 권력화의 의지일 것이다.


이 매끈하고 반듯하게 깔린 카펫같은 귀족적 정원이 주는 세련된 시각적, 후각적 즐거움과 함께 자연으로서의 식물이 지닌 약동감이라는 원시적 그리움, 자유에의 의지라는 비판과 경합하며 욕망의 모순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에밀 졸라 '나 '조리스 카를 위스망스'의 소설 작품에는 이러한 양가적 감정이 꽤나 산재해 있는 모양이다.  풀의 자연성은 인간의 욕망에 복속되어 새로운 엘리트, 부르주와의 감성에 맞도록 틀이짜인, 연출된 대상으로서, 다분히 장식적인 인공화된 물질이 되었음이다. 



21세기 오늘은 물론 내 어린 시절 고궁이나 공공시설의 잔디밭에는 항시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결코 가까이 접근하거나 밟아서는 안되는 진열장 속 접촉이 금지된 것이었다. 아이들은 푸른 잔디밭을 보면 그 위에서 마구 뛰놀며 꺄르륵 대고 싶어하지만, 오로지 "눈으로 만져보는 법을 배우며,  '거의 무가치한 것의 존엄함'까지 배우도록" 한다.  이에대해 코르뱅의 시선은 의외의 긍정성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희생과 구속의 도리, 또는 자유로운 순간의 통제와 침착성을 배우는 역할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하, 하나의 현상과 물질에 대해 그 상징적, 은닉된 의미를 해독하는 인간 반응의 다양성이란 이처럼 종잡을수 없는 것인 모양이다.


오늘날 도시화된 공간에서 발견 할 수 있는 풀, 혹은 화단이나 정원, 공원의 초록은 절제와 긴장과 희생정신이라는 곤혹감을 안겨준다. 더구나 이들 제한된 공간 이외에 자라난 풀은 '잡초'가 되어,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로 불온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럼에도 쐐기풀, 민들레, 토끼풀, 쓴쑥 뭉치들, 이들 잡초 무리들은 이러한 인공의 권위에  반란이라도 일으키듯 보도 블럭, 건물 벽의 작은 틈바구니, 차도의 균열에서도 질긴 생명력으로 솟아난다. '민초(民草)'로 불리는 서민 대중의 호칭이야말로 아름답게 승화된 잡초의 본성 아니겠는가.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서구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이식한 거대한 방목지와 골프장 잔디야말로 식민지 공간을 재정립해 지배하려는 '지리적 폭력'이며, 엘리트 계층의 '불평등주의 원칙의 의지'라고 인용하는 대목에서는 풀이 인간에 의해 오욕을 듬뿍 뒤집어쓰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풀, 고유의 식물성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인간 욕망의 역사 속에서.


4. 관능과 쾌락, 풀밭위의 점심


이 책의 백미, 아니 코르뱅 특유의 감각적 문화사의 절창이라 할 수 있는 후각과 촉각, 온 몸이 느끼는 풀과 인간이 접촉하는 세계는 무한한 상상의 지평으로 이끌어댄다.  소박하고 영롱한 자연의 풍광과 생동하는 젊음이 약동하는 시인 '네르발'이 실비와 산책하며 취했던 건초더미와 숲의 향기, 그리스 신화 속 뮤즈들이 거닐던 파르나스 풀밭, '페트라르카'가 심취했던 관능적인 초록 색 풀을 밟는 하얀 여성의 발이 있다. 또한 '빅토르 위고'가 본 푸른 풀밭위의 격정적 사랑과 '에밀 졸라'의 풀밭을 더럽히는 삶의 무대에 이르기까지 풀이 발산하는 내밀함, 자연과의 조화와 일치, 욕망과 쾌락의 형태들을 발견하는 여정은 문학의 일대 카니발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땅의 푸른 혀들 사이를 유연하게 오가며 (...) 여인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열기의 부드러운 진동...” - P 222 (클로드 시몽의 소설 ) 중에서

 

순결의 상징이자 치명적으로 유혹하는 음험한 존재이며 목가의 무대이자 과오의 목격자이며 징벌의 형상이기도 한 풀과 인간의 교묘한 줄다리기에 한껏 심취하며 고단한 도시의 시름을 잊고 켜켜이 쌓였던 기억의 한 페이지를 열어보는 잠깐의 멋진 외도의 시간이었다고 해야 할까? 풀과 맺는 인간 개체의 감성적 관점에서 사회화된 욕망에까지 그 상념의 폭이 무한하게 확장되는 지성의 노고를 만끽케 되는 기회였다고... ()


YES24 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2)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6        
1 2 3 4 5 6 7 8 9 10
진행중인 이벤트
트랙백이 달린 글
내용이 없습니다.
스크랩이 많은 글
[서평단 모집]『사랑 광기..
해석에 대하여
[서평단 모집]『반지성주..
법의 무지
많이 본 글
오늘 46 | 전체 422082
2007-01-16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