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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률 제 1 원리에 대하여 | 나의 리뷰 2020-07-1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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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관이 충돌할 때 하나의 근본 원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 J.S. 공리주의에 대해서

 

삶이란 무수한 선택의 과정이며, 사회적 사건 또한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연속을 요구한다. ' J.S.'의 직관주의처럼 "인류는 경험에 의해 행동의 경향을 익혀왔기"에 대부분의 일상적 선택에서 사람들 개개인은 즉각적으로 도덕적인 옳은 방향의 선택을 하지만, 그것이 그 개인에게도 항상 옳은 것이 아닐 뿐 아니라 타인이나 사회라는 집단적 측면에서는 그른 행위가 될 여지가 있다. 특히 도덕관이 충돌할 때에는 어떤 도덕관이 보다 우위인가, 즉 모든 도덕의 뿌리가 되는 하나의 근본원리 혹은 법칙의 필요성이 절실해 진다. 두 옳음 중에서 현재의 인간 사회가 합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도덕 기준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러한 도덕기준의 '1원리'로서 공리주의자들, 그리고 이들의 계보를 잇는 실용주의자들은 "사회 구성원 전체의 최대 행복", 이라는 '공리(utility:;효용, 유용)'를 주장한다. '행복이 도덕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것이다. "행복을 하나의 목적으로서 욕망할 만한 것 혹은 유일하게 목적으로서 욕망할 만 것"이라는 의미이다. J.S. 밀은 그의 저술 공리주의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어떤 행위가 행복을 증진시켜주는 것이라면 그 증진의 정도에 비례하여

옳은 행동이 되며, 만약 불행을 증진시키는 것이라면 그 증진의 정도에 비례하여

그른 행동이 된다. (...) 행복은 어떤 의도된 쾌락이며, 고통이 없는 상태이다."

 

이와같은 공리주의가 말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 밀은 "긍정이 부정을 압도하고, 전체 삶의 밑바탕으로서 인생이 제공할 수 있는 것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 순간들, 바로 그런 만족의 순간들을 가리켜 행복이라 하는 것이며", "만족하는 인생의 두 가지 주된 요소는 '평온(tranquility)과 흥분(excitement)'이라는 충분한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의 행복은 사회구성원 전체의 행복과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즉 사회효용의 극대화를 이루는 '제레미 벤담'이 말하는 '최대 행복 원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에서와 같이 행복은 쾌락(즐거움)이며, 이에 더해 밀은 "유익이 곧 유쾌함이요, 장식이다."라고까지 그 의미를 확장한다. 그런데 서로 다른 도덕관만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다. 쾌락도 충돌하는데, "더 바람직하고 가치 있는 쾌락을 측정할 때 (...) 오로지 수량에 의존한다면 아주 어리석은 일이다." , "양과 질을 동시에 고려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쾌락의 질적 차이란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질적 우수함"이라고 질은 수량에서 나온다고 선언한다. 결국 공리주의의 도덕 근본원리는 다수가 좋아하는 쾌락이라는 의미이다.

 

1.  공리주의에 내재하는 도덕적 한계들

 

(1) 만족 총량주의의 문제

 

개인의 공리와 다수의 공리가 합치하지 않아 다수의 쾌락으로 사건의 판단이 이루어질 경우 개인은 고통에 빠진다. 그러나 사회전체의 쾌락이 개인의 불쾌를 훨씬 상회하므로 도덕적 옳음이 된다. 여기에서 시작하여야 할 것 같다. 오늘의 사회가 안고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부의 불균형한 분배로 인한 양극화라는 불평등의 심화이다. 사회전체의 부(쾌락)가 증대하지만 개인의 부는 감소하는 이 현상에 대해서 공리주의는 '옳음'이라고 하지만, 현실은 '그름'이지 않은가? 개인의 만족을 소외시키고 최대의 만족만을 추구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에 대해 회의를 갖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지점이다.

 

(2) 편의적, 직관적 도덕으로서의 문제

 

밀은 편의(expediency)"어떤 즉각적인 목적 또는 일시적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유용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유익함을 낼 수 있는 규칙을 위반하는 것"이라 정의하면서 이것은 "문명과 미덕 등 인간의 행복에 기여하는 모든 것들을 퇴화시킨다."고 비난하고, 공리주의는 결코 '편의적 부도덕한 도덕'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마이클 샌델'정의란무엇인가의 한 사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망망대해에 조난당한 네 사람이 있으며,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이 없어 쾌락의 총량이 큰 선택으로 동료 한 명을 살해하여 식용하였다. 이 공리주의적 선택이 도덕적 올바름인가하고 묻는 것이다.

 

아마 공리주의의 편의성을 이보다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다. 피살된 희생자 가족의 고통, 나아가 식인이라는 인간 존엄에 대한 문명적 파괴라는 인류전체에 대한 도덕적 상처 등 세 명의 생존이라는 쾌락이 인류전체의 고통으로 인해 최대행복을 최대고통으로 역전시키고 만다. 밀의 항변에도 불구하고 공리주의는 편의적 부도덕성의 외피를 벗기 어려워 보인다.

 

(3)쾌락의 성격이 지닌 문제

 

쾌락의 순수 잔여량 극대화가 도덕의 근본원리라면 자유를 구속당하는 사람들을 보고 즐거워하는 것, 다른 사람의 손실을 보고 기뻐하는 것처럼, 노예제는 공리주의 도덕기준에서 옮음이며, 노동 착취를 통해 자본가의 부의 독식 또한 옳음이 된다. 행복의 총량주의에 기초한 공리가 뉴노멀, 새로운 가치와 표준을 창출해야하는 오늘의 인류는 미래를 향해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퇴화와 소멸의 도덕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외에도 인간을 최대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도구주의와 같이 공리주의는 무수한 도덕적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이쯤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의 우리들을 위한 진정한 도덕 근본원칙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2. 진정한 도덕률 제1원리는 무엇이어야 하나?

 

J.S.밀은 그들의 도덕율 제1원리인 공리와 충돌하는 도덕가치들에 대한 비판과 폄하를 위해 그의 책 절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다. '미덕', '정의', '자유', '안전'에 대해 이들 모두는 '행복(쾌락)'의 종속적인 도덕가치에 불과하다거나, 그 도덕 가치의 자기 제재 내용이 애매모호하며, 수학적 논증에 의문이 있다는 식이다. 특히 정의(justice)에 대해서는 혹독할 만큼 도덕원리가 될 수 없다는 증명에 많은 지면을 채우고 있다.

 

아마 '존 롤스'가 그의 책 정의론에서 칸트 윤리학의 핵심인 '옳음의 우선성' 논리에 의거한 좋음에 대한 옳음의 우선이라는 도덕의 기본구조에 대한 이해를 상기한다면 왜 쾌락이 아니라 정의가 도덕의 근본원칙, 도덕 최고의 기준이어야 하는지 오랜 사유를 통하지 않고서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미덕은 결코 쾌락과는 무관한 심리적 동인을 지닌 도덕적 가치이며, 안전(safety, security)은 이것이 없으면 인간은 매순간 살아갈 수 없는 중대한 가치이다. 만일 안전이 상시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라면 인간의 생존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가 부인되고 만다. 안전의 욕구는 절대적 욕구이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작금의 세계에서 안전이야말로 최고의 도덕원리, 모든 도덕 가치의 기준이어야 한다고 주장해도 쾌락, 최대행복 이상의 논거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3.  마무리 ; 2020년 오늘을 생각하며

 

끊임없이 수구집단과 진보집단은 저마다의 도덕관을 들이밀며 도덕적 정당성을 주장하고, 시민을 설득, 자기 집단화하려 싸움을 벌이고 있다. 물론 집권세력이 되겠다는 권력의 욕심이 있겠으나 차치하고, 순수한 도덕적 대결로 좁혀 이 사회에 들끓는 갈등 이슈들을 보면, 그 기반 논리, 혹은 표면적 주장에는 자신들의 믿음에 기초한 도덕성이라는 잣대가 있다. 이를테면 고위 공직자 자녀의 군복무 의무에 대한 시비, 위계를 이용한 성 추행 또는 성 폭행에 대한 시비, 국가적 재난에 따른 재난지원금 지급이나 향후 기본소득 지급에 대한 시비의 근저에는 명료한 도덕관이 있다.

 

거대도시 서울의 시장이 직원 성추행 고소일 직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참담한 일이 발생했다. 그의 죽음과 성추행 인과관계의 진의는 논외로 하고, 장례와 관련하여 그 형식에 대한 갈등에서 진영마다 내세우는 도덕적 잣대의 다름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우린 어떤 결정이 올바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민주주의를 위한 오랜 헌신과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복지의 증대, 불균형의 해소를 위한 행정적 수완 등 그의 공적 행적에 마땅한 형식을 주장하는 이들은 고인의 미덕과 생명의 소실이라는 안전이라는 도덕가치에 의존하고 있다. 한편 고소인인 성추행을 주장하는 이들은 정의, 즉 공평성에 근거한 인간존엄의 도덕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어떤 도덕관이 더 우월적 도덕 가치를 지니는가?

 

한 인간의 죽음과 성적 추행이란 사실에서 한 사회가 도덕적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하는가는 너무도 중요한 미래를 낳는다.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정의인가? 아니면 성추행 피해 주장자를 위로하는 것이 정의인가? 무엇이 우위인가? 전체 쾌락의 크기로 도덕적 우위를 결정하는 공리주의자는 애도 집단과 미투 집단의 수를 비교해서 많은 쪽이 옳다고 결정할 것이다. 그러나 매킨타이어와 같은 인간존재의 서사성이라는 삶의 이야기, 즉 우리 공동체가 써왔으며 쓰려하는 서사축에 무게를 두게 되면 우리가 오늘 어떤 이야기, 어떤 시대를 만들고자 하는가를 판단하면 될 것이다. 망자를 두고 시비를 가리는 것에 외람됨을 떨치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여전히 우리들을 둘러싸고 있는 어떤 행동의 경향일 것이다. 이 직관적 도덕률 또한 외면할 수 없는 도덕원리이다.

 

도덕률의 근본원리, 모든 도덕 가치의 기준이 되는 원칙을 수립하는 것은 그 사회의 합의이다. 밀이 비록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칸트의 도덕의 보편적 제 1원리인 "그대 행동의 바탕이 되는 법칙이 모든 합리적 존재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 법칙이 되도록 하고, 그 법칙에 따라 행동하라." 는 정언명령을 새기면서 마쳐야 할 것 같다. 사실 합리적 존재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낸 것이 법(, 規則, 制度) 아니겠는가? 도덕이 법에 물어야 하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음에 거북한 흥분을 느낀다.



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 저/이종인 역
현대지성 | 2020년 06월


정의론

존 롤즈 저/황경식 역
이학사 | 2003년 03월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저/김선욱 감수/김명철 역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덕의 상실

A. 매킨타이어 저
문예출판사 | 1997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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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거시적, 미시적 물리학 | 나의 리뷰 2020-06-20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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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의 위상학(Topologie der Gewalt) - 사회 면역학적 긍정성이 내재한 폭력에 대해서


'폭력의 비가시성'에 대한 담론은 그 이론적 배경을 달리하면서 갈퉁의 구조적 폭력, 부르디외의 상징적 폭력, 지젝의 객관적 폭력 혹은 사회적-상징적 폭력 등으로 정의되면서 무수한 서사를 이루어왔다.  아마  철학자 '한병철'의 『폭력의 위상학(Topologie der Gewalt)』이 이들의 인식과 다른 지평에 있다면 표제가 시사하듯이 '위상(位相)'이라는 공간의 상대적 관계성으로 상징되는 어떤 현상이나 상황, 사물간의 관계성, 즉 타자로부터 자아로, 외부에서 내부로, 적에서 경쟁자로와 같이 물리적 공간의 이동에서 폭력의 은폐성, 비가시성을 파악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그 위상을 결정짓는 것, 즉 폭력의 가시성과 비가시성 또는 폭력의 거시물리학과 미시물리학의  경계에  '사회에 대한 면역학적 부정성과 긍정성'이 놓여있다. 즉 외부로서의 타자가 자아에 침입할 때 그것에 대한 자기 내부의 반응에 따른 구분이라 할 수 있다. 이 구분은 면역학적 반응에 따라 법을 초월한 권력으로서의 주권 사회와 규율과 금지를 통해 지배하는 규율사회는 '부정성',  그리고 오늘날 과다와 과잉의 산만성과 자기 소진에 시달리는 성과사회는 '긍정성'으로 설명된다. 폭력이 가시적일 때,  이를테면 갈등과 적대관계 속에서 자기 내면화할 수 없는 타자가 자아에 침입하고 침투하여 굴종과 예속, 죽음을 요구하는 폭력의 작동방식은 외부화되어 누구나 볼 수 있다. 즉 부정성은 외부적이고 전시적이며 지배와 억압이라는 타자 강제의 산물이다.




이와달리 면역학적 부정성이 사라지고 긍정성만이 남은 오늘의 성과사회는 명령하는 타자 없이 자기 자신에 귀 기울이는 사회이다.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되어 끊임없이 더 많은 성과를 올리기 위해 강박에 시달리고 자발적인 자기 착취에 마침내 소진되어 우울증에 휩쓸려있는 사회이다. 따라서 타자라는 침입이 존재하지 않기에 면역학적 부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긍정성의 사회이니, 내재화된 폭력이 보일리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다.  이렇듯  '성과사회'의 속성들을 해독하여 21세기 오늘에 대한 진단을 하는 저자의 주장에 거시적 견지에서 이의의 여지 없음은 물론이다. 


특히  「폭력의 미시 물리학」에서 중점적으로 논의되는 '긍정성,  투명성, 대량생산되는 미디어, 끊임없는 접속적 연합적 관계의 분열증적인 리좀, 그리고 지구화'가 내면화시켜, 직접적 의식이 불가능한 비가시성의 폭력에 대한 성찰은 "과열과 과부하로 시스템의 파열을 목전에 둔 바로 지금"의 우리네 삶의 태도에 강력한 반성적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할만큼 빼어난 비판적 통찰력에 몰입하게 한다.


왜 지금의 세계, 사람들이 면역학적 저항을 하지 않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왜 타자의 침입에 반항하지 않는가? 라는 물음이 될 것이다. 아마 오늘의 사회를 '과잉의 시대'라 일컫는 데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동의 할 것이다. "극도의 과잉생산, 과잉 성과, 과잉 소비, 과잉 커뮤니케이션, 과잉 정보 (...), 비만은 내 쫓을 지방이 없으며 다만 줄 일 수 있을 뿐"인 것처럼, 동일한 것은 긍정적이다. 동일한 것에는 항체가 형성되지 않으니 이 '동일성의 폭력'에 저항력을 강화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며, 무한한 자기 소진만을 촉발한다. 긍정성의 폭력이 곤혹스러운 것은 이처럼 내재성의 테러, 부정성이 없는 폭력이기에 효과적 방어 수단이 없다는 데 있다. 


코로나바이러스19의 확산 방지에 대한 한국 정부의 제일 준칙이 '투명성'이었음은 모두가 아는 바이다. 투명한 정보와 실천 방안을 통해 국민에 대한 심리적 안정감과 방역의 효율성을 확보하려는 모범적 사례로 국민적 자부심까지 안겨준 정책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투명한 사회, 이 긍정성의 사회는 모든 것을 균질화하고 문턱이라는 경계를 사라지게 한다. 이렇게 전면적 투명성이 장악하게 되면 어떤 상황이 될까? 궁극적으로 모두가 동일한 것으로 획일화되고 이질성이 제거되는 양상이 드러날 것이며,  정치적, 기업적, 사적 비밀이라는 개체의 존엄성과 같은 배타적 공간이 들어서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기능화되고 기계적, 수치(數値)적 , 노골적인 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모든 것을 가시화의 과정 속에 던져 넣으려는 강박은 외설적이다."  이것은 자유와 통제가 하나가 된 자기 감시의 저항할 대상 없는 폭력으로 몰아 넣는다. 그것은 고통의 늪이 된다. 오늘의 우리네 사회를 이보다 철저하게 묘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에 더해, "동일한 것의 무더기에서, 긍정적인 것의 대량화에서 태어난다."는 새로운 언어 폭력의 실체인 언어와 커뮤니케이션의 스팸화, 일말의 정보적 가치도 없으며, 소통적이지도 않은 쓰레기 더미는 자아의 비대화와 함께 공허한 커뮤니케이션만을 낳는다. 타자의 주의를 끌어보려는, 그러나 진정한 타자는 없고 소비자와 구경꾼의 무관심이 스쳐지나갈 뿐이다. 자발적 전시의 강박이란 이 과도함은 산만함과 지각의 둔감함을 재촉하고 정작의 진실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  "과잉 커뮤니케이션이란 곧 존재의 결핍"이라는 진단에서 '미디어 무더기 시대(Mass-Age)'의 동영상 속, 발가벗음을 서슴치 않는 사람들의 수단과 목적 사이의 파괴된 경제적 관계를 읽는 것은 이제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모든 것은 "더 열광적으로 시장의, 탈코드의, 탈영토의 운동속으로 뛰어들고", 현재의 한계를 넘어 진행되도록 추동할 뿐이다. 폭력의 내재성은 정면으로 싸울 상대를 소멸시킨다. 전지구적 차원의 과잉  가속화는 지구라는 시스템의 전소(Burnout)상황이 되어서야 멈출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 자신과 전쟁을 치루며 스스로에게 폭력을 가하는 자기 착취적 관계가 우울증이란 병리현상을 오늘의 사람들을 점령하는 것은 불가피한, 아니 필연적인 현상일 것이다. 마침 코로나19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시대의 정신, 새로운 삶의 태도를 요구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이들 긍정성, 과잉의 욕망이 휩쓰는 비가시적 폭력을 잠깐 가시권역에 드러내준 자연의 선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기도 한다.


성과사회라는 오늘의 진단 속에 내재한 이러한 비가시적 폭력성의 모습들을 드러냄으로써 나르시시즘에 마비된 우리네를 차갑게 깨워댄다. 그러나 이 자극적인 비판적 통찰에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성과사회라는 오늘이 면역학적 저항이 부재하는 자기관계적, 자타의 동일성만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머리를 치켜드는 것이다. 21세기 오늘, 규율사회, 면역학적 패러다임이 여전히 암약하는 사회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이 책은 칼 슈미트, 벤야민, 아감벤, 푸코, 지라르, 들뢰즈에 이르는 사회와 인간의 관계적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 터 잡아 면역학적 부정과 긍정성에 기초하는 독창적 폭력의 실체 해부론이라 할 수 있다. 이들 모두에 대한 비판 배경을 옮길 생각은 없다. 다만 시대착오적 사상이라며 아감벤이 여전히 면역학의 시대에 머물고 있다는 지적에 동의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과연 오늘의 사회가 오직 자기소진에만 매달리는 성과사회이기만 한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이렇게 오늘의 사회를 단절적으로 면역학 전후의 시대로 명쾌하게 분리,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획일화된 규명이 아닐까?


"아감벤은 주권사회도, 규율사회도 지나온 사회, 면역학 이후의 사회에 속하는 사람이다. 이런 결정적 패러다임 전환에도 불구하고 (...) 부정성의 형상을 긍정성의 사회에 (...) 잘못된  투사로 면역학 이후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  P 99 中에서


아감벤을 이처럼 비판하는 것은 성과사회는 온통 긍정성의 사회이며, 결코 부정성은 존재하지 않음을 주장하기 위한 토대이다. 배제와 금지를 바탕으로하는 부정성의 폭력은 오늘의 사회에 존재치 않다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오히려 오늘날의 폭력은 조지 플로이드 사건처럼  합의의 순응성보다 이의의 적대성이 여전히 주가되는 사회이지 않은가? 아감벤이 성과사회 특유의 긍정성의 폭력을 포착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언정 부정성의 폭력이 사라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지배와 영광이 자본의 내부공간으로 옮겨왔다고 사회가 빈틈없이 자기착취만 기능하는 것도 아니며, 폭력과 법을 분간할 수 없는 지점의 사태가 더욱 극명하게 대두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기도 하다.  "무대에 등장하기 위해 미디어 속 스펙터클의 가상 속에 몸을 숨기는 정치, 속이 텅빈 공허한 내용없는 정치"의 현실이 물론 현존하지만, 권력과 지배의 형태는 달라졌지만 보다 큰 정치 또한 실재하고 있음을 오늘 한국 사람들은 경험하고 있다. 즉 부정성의 폭력과 긍정성의 폭력이 상존하고 있음이다. 


지나치게 긍정성의 폭력만 상정할 경우, 모든 의무와 책임을 개인에게 몰아 넣어 권력화된 것들, 사회 시스템이 지닌 폭력성에 문제를 제기치 못하게 하는 면죄부가 될 수도 있다. 지금 우리는 새로운 가치와 표준의 창출을 위한 시험 무대에 서있다. 진정 패러다임의 전환, 과잉의 성과사회라 표현되는 자기 소멸적 시스템의 전환을 화급히 모색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서있다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워진다. 무한 욕망의 무한 긍정, 스스로 불타버릴 때까지 스스로를 착취케하는 성과사회의  내재적 폭력,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한 이 도발적인 저술은 목적 없는 합목적성의 공허, 불가능한 무한성의 환상적 삶에서 우리를 깨워댄다.



폭력의 위상학

한병철 저/김태환 역
김영사 | 2020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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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 | 나의 리뷰 2020-06-03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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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PIKETTY'의 『자본과 이데올로기』 with Essence Book



'토마 피케티'의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본책과는 별도로 에센스 북(Essence Book)이란 것이 더불어 출간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 긴요한 참조 문서집, 혹은 핵심 요약집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소유주의 이데올로기라던가 삼원주의, 다중엘리트체제, 사회토착주의, 보편적 자본지원 등의 비교적 낯선 (1)용어들에 대한 핵심 개념의 설명, 노무현 정부에서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경제학자  '이정우' 전 경북대 교수의 (2)해제, 그리고 (3)본문 주요 참조 도표들과 그에 대한 발췌내용이 있다. 


피케티를 일약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돋움하게 했던 전작인 『21세기 자본』은 "도래하는 21세기는 불평등이 커지는 '세습자본주의'로의 회귀"라는 우울한 전망이었다. 특히 자본수익율(r)이 경제성장율(g)보다 높아지는 것, 즉 자본/소득 비율(일명 피케티 비율)이 높아져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을 토대로 "과거가 미래를 잡아먹는다"는 명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불평등의 크기와 변동 추세를 분석했던 것에 이어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불평등 체제의 역사와 정치,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전면에 세운 다분히 정치 사회적인 분석과 대안적 모색을 중심으로 한 저작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류의 역사는 그 구조적 형태나 논리에 있어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담론과 제도로 구성되어 있었다는문제의식의 제기이며, 이에대한 경제적 지표들과 통계 및 사회를 지배하는 법과 제도를 역사적 맥락에서 읽어내는 일련의 여정이다.  여기에 소유권을 사회적 안정의 핵심적인 필수조건으로 옹호하는 '소유주의'와 사제, 귀족, 노동자(제3신분)의 세 기능으로 분할되어 작동했던 '삼원사회(三元社會, Societe ternaire)'가 오랜 역사의 기간 인간사회의 체제였음과,  21세기 자본주의 오늘의 학력 엘리트와 자산 엘리트의 유착 메커니즘인 '다중 엘리트 체계'로 그 모습이 변형되어 불평등주의체제를 고착화시키는 모습 등 정치 사회적 통찰이 더해진다.


마르크스의 『자본,Das Kapital』이 출간된 1867년, 영국의 소득분배가 최악의 정점에 도달한 시기와 일치한다는 것은 결코 역사적 아이러니만은 아니었으리라.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 마르크스가 주장했다면, 피케티는 '불평등의 역사'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분석의 망라를 통해 부의 분배가 왜 불평등하게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는지, 또한 어떤 특정의 역사적 사건이 빈부의 격차를 감소 시키거나 증가시켰는지를 규명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가공할 노고의 결과물이 곧 『자본과 이데올로기』이다.


이정우 교수가 피케티의 정치경제적, 나아가 인류사회적 기여는 "정치와 이데올로기를 바꾸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라고 하였듯이, 불평등의 축소를 통해 더불어 사는 인류사회를 염원하는 어떤 소명의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침 코로나 팬데믹이 전 지구적으로 기존의 생활양식을 바꿀 것을 강제하고 있다. 이제 인류는 좋던 싫던 새로운 시대를 마주해야 하게 되었고, 우리 한국사회 역시 생존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만 한다. 성장의 논리는 어불성설이 되었으며, 긴급구호와 공공사업을 통한 일자리 마련과 같은 생존 정책이 최우선의 과제가 되었다. 한국 정부의 그린뉴딜 정책은 피케티가 예시하는 20세기 대공황 이후의 뉴딜정책이 소득불평등을 축소하고 경제의 실질성장율 증진에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대 사건으로서의 성공적 정책이었음과 마침 그 궤도를 같이 한다.


불평등주의체제를 완화하기 위한 피케티의 대안은 일견 급진적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과연 지금의 자본주의체제를 넘어서는 '참여사회주의'를 우리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가와 '기업 내부 권력의 분유를 확대'하고 '누진세 정책을 적극적 시행'하여 '사회적 소유'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또한 일정 연령의 청년들에 '보편적으로 자본을 지원하는 제도'를 도입하여 소유집중과 자본의 순환을 이루어 낼 수 있는가? 나아가 초민족적, 초국가적 규제를 시행하기 위한 '금융자산의 소유에 대한 범세계적 등록 강제제도'의 도입 등은 분명 점차 심화되는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요구하는 코로나 팬데믹은 어쩌면 도달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이러한 정책들을 시도하고 실현할 수 있는 인류 역사의 대전환적 운명인것만 같다는 생각을 갖게한다.


코로나19 사태와 이후 전망에 대한 프랑스 〈르몽드 지〉에 올린 피케티의 기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중대한 정치적-이데올로기적 격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실증적 경제분석을 토대로 한 사회과학적 성취의 최고 산물이라는 표현에 어떠한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운 시대의 역작이라 하고 싶다. 자본주의의 한계를 초월하여 세계적 신질서의 창출을 위해, 인류의 공존을 위한 더할나위 없는 통찰과 제안으로 가득한 이 책은 그의 전작의 명성을 훨씬 능가한다고 감히 말해도 누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자본과 이데올로기

토마 피케티 저/안준범 역
문학동네 | 2020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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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와 칸타의 장을 읽으며(1) | 나의 리뷰 2020-05-28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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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와 칸타의 장

이영도 저
현대문학 | 2020년 04월


1) 04:40 ~ 05:20


2) 처음 ~ P 130


3)  섬망에 빠진 인류의 환각?


     현대문학의 핀시리즈에서 시도된 첫 환상문학 작품이다. 생각이라는 노동을 요구하는 소설이어서 감상이 양 극단으로 표현되고 있지만, 핵 파멸 이후의 지구에 생존해 있는 열 아홉 살 소녀의 냉소적 신념이 뿜어내는 언어와 서사적 무대에서 펼쳐지는 상징적 배경들의 자극성은 사유의 노고를 상쇄하고 남을 만큼 소설적 재미를 선사한다.


   환상종인 요정 '데르긴'과의 필사적인 대화에서 시작하여 자기 생존조건을 자기 손으로 파괴해서 멸망의 문턱에 선 마지막 인류에 대한 묘사들과  "빈사 상태에 빠진 인류의 환상"이 어울려 빚어내는 인간의 자기기만의 현상들은 섬망에 빠진 오늘의 인간을 깨워댄다.   


기술적 요령만 비대해지고 시와 노래를 잃은 상실되어가는 인지능력으로 인한 무지와 환각에 지배당한 종족들의 갈등은 지금 우리네가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반면 교사인것만 같다. 멸종위기인 동물인 인간을 보존하고 부활할 의무를 스스로 부과하고 시(詩)의 완전한 문답으로 생사를 결정하는 드래곤 헨리(아헨라이즈)의 설정은 돋보이는 은유의 광채이다. 



4)

"바로 앞에 있는 반대 증거도 못 알아보는, 또는 소망을  전망으로 착각하는", 그런 불치의 인류에 대한 자기 환기인 것 같다. 사랑을, 인간의 증산을 혐오하는 소녀 '시하'와 사랑의 묘약을 제조하려는 요정, 역사의 기록자인 소년 '칸타'의 결합이란 과연 가능한 것인지 내쳐 읽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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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발의 Sylvie, Aurelia를 읽으며(2) | 나의 리뷰 2020-05-22 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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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오렐리아

제라르 드 네르발 저/최애리 역
문학과지성사 | 2020년 05월


1) 05:00 ~ 05:50


2) P 89 ~ 마지막


3) 『오렐리아(Aurelia)』

     

   소설 「실비(Sylvie)」가 젊은 날의 사랑하는 연인들 사이에서의 방황, 안개 같은 현실에서의 불가능한 성취에 대한 회한의 추억이었다면, 이 작품은 흐릿한 현실이 꿈과 환상의 지대로 옮겨져 이상화된 여인, 그 신성에 다가가기 위한 길을 찾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단테의 베아트리체에 비견되는 네르발의 오렐리아인 여배우 '제니 콜롱(1808~1842)'을 향한 지고한 욕망의 추구는 강박적 성향에서 이윽고 정신착란, 분열증에 이르게 된다.


반복되어 등장하는 자기 소멸(죽음)에 대한 두려움, 불멸과 윤회에 대한 신비주의의 귀의는 사랑이라는 자기 욕망의 실현이 무화(無化)되는 것에 대한 정당한 반발로 보인다. 그래서 작중 화자(네르발의 현현일 것임)의 정신이 향하는 지하세계의 어둠 속, 본격적인 심연의 마주함을 위한 꿈과 몽상의 이야기는 새로운 삶을 살아내기 위한 치열한 영혼의 분투가 된다.  이 작품의 많은 평자들은 오렐리아를 네르발의 이상화된 여인, 궁극의 여신, 우주 단일성의 총체로 해석하고 있지만 내겐 그가 두 살 남짓했을 때 사망한 기억할 수 없는 '어머니'였으리라 속삭인다.


"성모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를 생각한다. 쏟아낸 눈물이 내 영혼을 진정시켜주었다." 는 소설 속 의 짧은 문장이 왜 그의 욕망이 달성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를 가늠하게 되는 단서로만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의 의도를 예고했던 그의 또 다른 소설 『불의 딸들』서문에서 말하는  "나의 이야기, 나의 모든 꿈들과 모든 느낌을 옮기기 시작했으며, 나를 내 운명의 밤 속에 홀로 버려두고 달아난 저 별에 대한 사랑..."역시 어머니에 가 닿기 위한 안타까움 아니었을까?하고 생각게 된다.




4) 자기 분신과의 경쟁을 비롯한 온갖 비의적 환상으로 채워진 '광인의 기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작품의 무수한 다의적 갈구에도 불구하고 현실과 이상의 조응, 마침내 그 불가능에 잇닿는 길인 '아리아드네의 실'을 발견하는 데 이르도록하는 그의 기억 저편 어딘가 무의식에 새겨져 있을 어머니를 향한 애끓는 외침으로 여겨진다. 그의 외로운 주검의 발견은 절망의 고백도, 신비적 예식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마침내 영혼의 여신,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실천의 길이었다고 믿고 싶게된다. 내겐 상상계를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의 부재가 남긴 여린 영혼의 삶을 지배했던 고통에 대한 연민으로 음울한 고뇌의 심상함이 더욱 마음을 휘젓게 하는 그런 작품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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