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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메이킹 스토리 3. 나밖에 쓸 수 없다. | 김영하 style essay 2013-07-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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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밖에 쓸 수 없다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으로 등단은 했지만 『리뷰』라는 잡지가 정통 문예지가 아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작품이 시원찮아서 그랬는지, 통 원고 청탁이 오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나는 아름답다」라는 단편을 써서 신생 문예지인 『문학동네』에 투고를 했다. 이틀 만에 연락이 왔다. 원고를 싣고 싶은데 그전에 얼굴을 한 번 보자고 했다.
당시의 ‘문학동네’는 혜화여고 인근의 우유보급소인지 신문보급소인지 하는 가게 2층에 세 들어 있는 작은 신생 출판사였다. 직원도 아마 7, 8명밖에는 안 됐을 것이다. 갔더니 편집위원들이 모여 있었다. 그때는 그들도 삼십대 초반의 젊은 평론가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이 내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사람을 너무 많이 죽이는 것 아닙니까?"

 

단 두 편의 단편에서 세 명이 죽는데, 그중 둘은 자동차 트렁크에 갇혀 죽고, 나머지 하나는 사람이 죽는 장면을 촬영하고 싶어하는 사진작가가 독살한다.
그 질문을 받고 '아, 문학계에서는 소설에서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을 싫어하는구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어려서 탐독했던 코난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에서는 매 단편마다 최소한 한 명이 죽는다. 그런 소설에 익숙해서인지 내 소설에 살인이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눈이 예리한 그 평론가는 단 두 편의 단편만 읽고도 내 어떤 부분을 꿰뚫어보았던 것이다.

그 평론가의 말도 있고 해서 좀 자제할까 생각을 했지만 그후로도 그런 경향은 변하지 않았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는 세 명의 여성이 자살안내인을 만나 자살을 감행하는데 법적으로는 자살방조겠지만 문학적으로는 살인에 가깝다. 「내 사랑 십자드라이버」 「사진관 살인사건」 「크리스마스 캐럴」, 그리고 「비상구」까지 살인 사건들이 이어진다.

 

나는 왜 이렇게 살인에 관심이 많았을까.
살인에 관해 직접적으로 질문을 받은 일은 또 있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프랑스에서 출간될 때, 출판사 대표가 이메일로 질문을 보내왔다. "살인충동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역시 소설의 자살은 자살이 아니라 살인이라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질문을 며칠 전, 베를린에서 온 독일 기자로부터 받았다. 홍대 앞 카페에서 만난 그는 1998년의 프랑스 편집자와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15년 사이에 변화가 있었다. 1998년의 나는 정면으로 부인했고, 2013년의 나는 부분적으로 인정했다. 무엇이 나를 더 솔직하게 만들었을까. 아니, 솔직하게 만들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나는 내 자신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을 뿐이다. 이십대의 나는 격렬한 공격성에 사로잡혀 있었다. 부수고 때리고 질주하고 욕하고 공격했다. 그런 내면에 살해충동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사람이 사람을 살해하는 문제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앵무새는 다른 앵무새를 죽이지 않는다. 나무늘보도 다른 나무늘보를 죽이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인간을 아주 자주 살해한다. 일간 신문의 사회면은 언제나 살인 사건으로 장식된다. 인류의 오래된 이야기들, 구약성서와 그리스‧로마 신화, 그리스 비극 등은 살해와 관련된 이야기로 가득하다. 왜일까? 인간이 앵무새가 아니라 영장류로부터 진화해왔기 때문에? 영원한 수수께끼다.
소설을 왜 쓰느냐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여러 대답이 나와 있다. 그중에서 요즘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답은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한 편을 써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러 편을 오랫동안 써나가다보면 작가는 분명한 진실에 직면하게 된다. 지금까지 써온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살인이라는 주제와 나라는 작가를 떨어뜨려놓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살인을 제외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써온 11권의 소설을 통해 가장 집요하게 건드려온 주제는 기억일 것이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는 자살안내인이자 소설가인 작가가 자살하는 이들, 곧 잊혀질 사람들의 이야기를 대신 기록해준다. 『검은 꽃』은 1905년에 멕시코로 떠났다가 한일합방 이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깨끗이 잊혀졌던 1033명의 이야기다. 그들은 완전히 망각되었고 세대를 거치며 멕시코 사회에 흡수돼버렸다. 『빛의 제국』은 남파된 뒤 20년이 넘은, 잊혀진 스파이의 하루를 다룬 이야기다.

 

왜 이렇게 기억이라는 문제에 집착하는가에 대해서는 개인사적인 필연이 하나 마련돼 있다. 내가 열 살 때 겪은 연탄가스 중독으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이다. 새벽에 집주인에게 발견돼 어머니와 함께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고압산소통 처치를 받고 깨어난 후로, 내게는 그 이전의 기억이 없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이전의 기억을 상실했다는 것을 발견한 시점이 내가 작가가 된 이후라는 것이다. 작가가 되자 나도 다른 작가들처럼 유년의 기억에 대해 쓰고 싶었다. 그러나 없었다. 내 기억은 둑에 다다른 나룻배처럼 어느 순간까지만 거슬러올라가다가 멈춰버렸다. TV 드라마에서 보면 기억상실이란 참으로 간단하고 편리하고, 심지어는 우아한 사고처럼 보인다. 약간의 충격이 가해지면 마술처럼 사라졌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화상처럼 보기에 끔찍한 사고도 아니어서 아름다운 주인공들이 겪기에 적당한 일처럼 보인다. 실제로 겪으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몽타주처럼 과거의 기억이 플래시 터지듯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지는 TV 드라마 같은 일은 겪어보지 못했다. 나는 기억을 잃었고, 기억을 잃었다는 것 자체를 모른 채 살았다. 즉 망각을 망각했던 것이다. 유년의 기억, 즉 과거의 어떤 부분이 깡그리 없다는 것은 자아에 대한 확신을 불가능하게 한다. 게다가 나처럼 직업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1년에 한 번씩 거주지를 바꿨다면, 그래서 고향이라는 것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거슬러올라가 나 자신의 기원을 확인하거나 거짓으로라도 재구성할 방법이 없다. 우리 가족이 살았던 슬라브지붕의 장교용 관사들, 날림으로 지은 셋집들은 모두 접근 불가능이거나 헐려 버렸다. 나는 단 한 명의 초등학교 동창생 친구도 없다. 그들은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유령처럼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내가 결국 소설가가 되고 만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처럼 보인다. 문학, 특히 소설은 기억의 예술이다. 누군가의 유명한 말마따나 소설은 황혼에 쓰여지는 것이다. 모든 것이 지나간 후에 기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소설가들이 기억의 문제와 씨름했다는 것, 소설의 바로 그런 부분에 내가 언제나 매료된 것 역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이 모든 개인사적 필연 속에 제목이 결정되었다: 살인자의 기억법.
일기에 따르면 2013년 3월 21일부터 제목을 궁리하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 탈락한 후보들은 다음과 같다.

 

푸른 수염
칼과 뼈
나를 잊지 말아요
아포리즘을 사랑한 살인자
시인―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너무 오래 사는 위험
신부의 아버지―어느 살인자의 고백
내 고통엔 자막이 없다

 

이미 정해져서일까. 아무리 봐도 『살인자의 기억법』이다. 다른 제목은 생각할 수 없다. 문득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오랫동안 자기 가게를 준비해온 요리사가 마침내 새로운 식당을 오픈한다. 메뉴를 정하고 인테리어를 하고 같이 일할 직원을 뽑는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가 마지막으로 하는 일은 바로 간판을 거는 일이다. 간판이 제대로 걸렸는지를 보기 위해서는 몇 발짝 뒤로 물러나야 한다. 요리사는 그렇게 한다. 지금의 내 마음이 딱 그와 같다. 제목을 붙이면서 모든 것이 끝났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꿈에 부푼 요리사와 달리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로부터 즉시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소설가는 이런 직업이다. 

 

 

 

 

 

 

[예약판매]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저
문학동네 | 2013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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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메이킹 스토리 2. 내가 써야 한다. | 김영하 style essay 2013-07-1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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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써야 한다

 

 

 


머릿속에 인물이 떠오르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인물의 입으로 말을 시켜보는 것이다. 스토리 라인이나 플롯, 주제는 다음 문제다. 반드시 그 인물이 입을 열어 말을 해야 한다. 그것은 작가와 인물이 치르는 일종의 면접 같은 것이다. 소설을 언제 구상하게 되었는지는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만 집필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특정할 수 있다. 바로 등장인물이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을 작가가 받아적는 순간이다.
나는 모니터의 텅 빈 공간을 바라본다. 초고를 쓸 때의 나는 ‘writeroom’이라는 프로그램을 쓴다. 이 프로그램은 모니터 화면 전체를 새카맣게 덮어버린다. 마치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의 서문에서 묘사한 막막한 우주공간을 보는 기분이다. 이번 소설은 일인칭시점 화자인 만큼 더더군다나 주인공의 말로 시작되어야한다. 한참을 이 텅 빈 우주와 씨름한 끝에 마침내 첫 문장이 나온다. 오랫동안 내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인물이 마침내 입을 여는 순간이다. 이런 순간들은 언제나 경이롭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인물이 마음에 들었다. 그를 신뢰할 수 있다고, 내 소설의 주인공으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13년 2월 초의 일이다. 나는 본격적으로 집필에 들어갔다. 속도는 매우 느렸다. 하루에 한 문장, 혹은 두 문장밖에 쓰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답답해하다가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기억을 잃어가는 늙은 연쇄살인범의 속도에 내가 맞춰야 한다는 것을. 그러자 마음이 좀 편해졌다. 조금씩 쓰고 오래 쉬었다. 쉴 때는 니체를 읽었다. 최승자 시인이 오래전에 번역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을 써나갈 때마다 나는 내 인물들에 대해 상세한 정보들을 ‘수집’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그 인물이 읽었을 법한 책의 목록’들이다. 『빛의 제국』의 주인공 기영은 바쇼의 하이쿠를 읽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제이는 사람들이 재활용품 수거함에 던져놓은 책들을 마구잡이로 읽는다. 그런데 이번 소설의 주인공은 니체와 그리스 비극을 읽을 것만 같았다. 먼지 쌓인 책들을 꺼내 책상 한쪽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들춰본다. 소설에는 인용하지 않았지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

 

“보라! 나는 나의 지혜에 지쳤으니, 흡사 지나치게 많은 꿀을 모은 한 마리 벌과도 같다. 이제 내겐, 달라고 내미는 손들이 필요하다.”
“피와 경구로 쓰는 사람은 읽혀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외워지기를 원한다.”
“실로, 우리가 삶을 사랑함은, 우리가 사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분명히 내가 만든 인물이지만 그가 읽었음직한 책, 예컨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어나가면서 그에 대해 훨씬 더 분명하게 알아간다는 느낌이 든다. 묘한 기분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머릿속에 들어 있는 뭔가를 종이에 옮기는 게 아니다. 훨씬 미묘하고 복잡한 과정이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이미 쓴 것과 아직 쓰지 않은 것 사이의 끝없는 되먹임 과정이다. 이미 쓰여진 것들이 앞으로 쓰여질 것들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라 하더라도 이미 쓴 것들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소설은, 소설 속의 인물은 손님처럼 찾아와 서서히 작가를 지배한다. 소설을 시작할 때 100의 자율성을 갖고 있던 작가는 마지막 문장을 쓸 때는 0의 자율성을 갖는다. 작가는 이미 쓴 문장에 위배되는 그 어떤 문장도 쓸 수 없는 존재다. 소설이 막바지로 치달을수록 작가는 더욱더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데, 어떤 작가는 이 상태를 좋아하고 어떤 작가는 싫어한다.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를 연재하던 막판에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 이렇게 하소연했다고 한다. 톨스토이는 후자였던 것 같다. “안나라는 이 여자, 정말 끔찍하다. 이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나는 전자다. 나는 인물과 이미 설정된 전제들에 복종하고 그것의 노예가 되는 것을 좋아한다.

신인작가 시절에는 내가 한 세계를 창조하는 창조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마르코 폴로처럼 낯선 땅을 찾아가는 여행자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겨우 허락을 받고 들어간 그 도시에서 나는 인물들을 알아가고 그곳의 풍습을 익힌다. 그런데 언젠가는 그곳을 떠나야 할 운명이다. 그러니 도시에서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아쉬워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제는 친숙해진 인물들로 가득한 그 도시를.

 

소설이 마무리될 무렵에 10년이 넘도록 내 소설을 편집해온 편집자와 저녁을 먹었다. 편집자가 물었다.
“새 장편은 언제 시작해요? 이제 슬슬 시작할 때 안 됐어요?”
“실은 짧은 장편 하나를 마무리하는 중이에요.”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편집자가 내심 깜짝 놀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원고 언제 볼 수 있어요?”
“곧이요.”

 

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었을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점점 더 나는 새로운 소설을 시작했다는 것, 쓰고 있다는 것에 대해 함구하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 비밀로 하고 싶었다. 나만 알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밝히는 순간이 바로 내가 그 도시를 떠나야 할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내가 영원히 그 도시에 머물 수는 없다는 것도.

 

 


 

[예약판매]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저
문학동네 | 2013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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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메이킹 스토리 1. 이것은 내 소설이다 | 김영하 style essay 2013-07-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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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내 소설이다

 

 

 


분명히 어디선가 읽은 것 같은데 막상 인용하기 위해 구글링을 해보니 찾을 수가 없다. 내가 기억하기로, 한 편의 희곡을 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는 어느 인터뷰어의 질문에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의 작가 에드워드 올비는 이렇게 답했다.  

"평생(All my life)."

멋진 대답이어서 누군가 웹에도 올려놓았음직한데 없다. 내 기억이 틀렸거나 의외로 사람들이 에드워드 올비에게 관심이 없거나, 둘 중의 하나겠지만 어쨌든 찾아내지는 못했다. 

 

한 편의 소설을 쓰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느냐는 질문을 나 역시 받는다. "소설마다 다르다" 정도가 내가 생각해낸 최상의 대답이었는데, 대가 올비는 역시 달랐다. 짧고 분명하게 창작의 비밀을 요약한다:

All my life.

 

이번에 찾아본 또다른 인터뷰에서 올비는 좀더 친절하게 대답하고 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어떤 희곡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게 됩니다. 다시 말해, 무의식적으로 그것에 대해 매우 오랫동안 생각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게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니까 희곡 한 편을 쓰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 역시 모릅니다. 한번 내가 어떤 희곡을 구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기 시작하면, 나는 계속 그것을 생각하고, 그러다보면 그 생각이 다시 무의식 속으로 잠겨들었다가, 다시 의식으로 튀어오릅니다(pops up). 그러다 마침내 어떤 순간, 더이상은 그 생각을 무의식 속으로 되돌려보내고 싶지 않은, 의식 속에 머문 채 이것을 다루고 싶은, 어떤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때쯤에는 나는 내 인물들에 대해 좀더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내가 내 인물들을 얼마나 잘 아는지 가늠하기 위해 나는 좀 흥미로운 일을 해봅니다. 절대로 그 희곡에 넣지 않을 어떤 장면들을 떠올려보는 겁니다. 내 인물을 그 장면에서 오래 걷게 하고, 즉흥적인 대사를 하게 합니다. 그게 잘되면, 내가 내 인물들을 극에 투입할 수 있을 정도로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알고 있는 겁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나는 집필을 시작합니다."

 

아내의 기억에 따르면 『살인자의 기억법』의 구상을 처음 들은 것은 10년 전, 우리가 마포구 성산동에 살던 시절이라고 한다. 나는 깜짝 놀라 묻는다.
"그렇게나 오래됐어?"
자신의 정확한 기억력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아내는 주저하지 않고 정확한 시점과 장소까지 특정한다. 그제야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그 10년 동안 뭘 했을까? 다른 소설들을 썼다. 『검은 꽃』 『빛의 제국』 『퀴즈쇼』 그리고 『너의 목소리가 들려』 . 네 권의 장편을 쓰는 동안에도 내 무의식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그대로 품고 있었다. 그러다 올해 초에야 그 이야기가 내 의식 위로 (올비 식으로 말하자면) '튀어올랐'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은 늘 이런 식으로 시작된다.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시간, 방바닥에 누워 이런저런 잡념에 잠겨 있다가 문득 생각지도 않은 택배의 방문처럼, 다음에 써야할 소설이 무엇인가를 단박에 알게 된다.

 

어쩌면 아버지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가 작년 가을 뉴욕에 머물고 있을 때, 아버지가 구강암 4기 진단을 받으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항암치료와 3차에 걸친 대수술이 이어졌다. 회복 역시 길고 고통스러웠다. 내가 귀국했을 때는 수술은 모두 끝났지만 오랜 마취의 후유증으로 섬망증세를 보이고 계셨다. 헛것을 보고 침대에서 벌떡벌떡 일어나고 사람을 잘 못 알아보셨다.

 

아버지는 백마부대의 일원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 부상 한 번 입지 않고 무사히 복귀하셨고 그후로는 감기 한 번 앓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셨다. 치아마저 튼튼해서 얼마 전까지도 소주병 정도는 이로 따셨다. 그런데 환갑 직후 갑자기 뇌졸중이 찾아왔다. 뇌졸중은 명확한 인과관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보훈처에서는 고엽제, 일명 에이전트 오렌지의 후유증으로 폭넓게 인정해준다. 그 보상으로 소액의 연금도 지급한다. 아버지가 베트남에 있었을 당시에도 미군은 엄청난 양의 에이전트 오렌지를 공중 살포했고 어쩌면 아버지도 그것에 노출되었을 것이다. 고엽제의 또다른 후유증 중 하나가 후두암이다. 아버지는 구강암이지만 발견 당시 암덩어리는 편도선과 후두까지 뻗어 있었다. 고엽제 때문인지 평생 계속해오신 흡연 때문인지, 아니면 그밖의 다른 원인이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당신 몸속에 있을지도 모를 죽음의 스위치를 떠올렸다. 후쿠시마의 방사능이나 베트남의 고엽제나, 언젠가 때가 되면 누군가의 몸속에서 죽음의 스위치로 작동하게 된다. 얼마 전 안젤리나 졸리는 이 죽음의 스위치를 아예 제거하기 위해 아직 아무 문제도 없는 자신의 유방을 모두 떼어냈다.

 

며칠 전, 대한민국의 대법원은 19년에 걸친 고엽제 소송의 최종 판결을 내렸다. 에이전트 오렌지의 미국 제조사를 상대로 베트남 참전 군인들이 낸 이 피해배상소송에서 법원은 '염소성 여드름'의 연관성만 인정하고 나머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상 패소한 것이다.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식물을 단번에 말려 죽이는 그 무서운 독이 인간에게는 오직 여드름만을 야기한다는 말을 누가 믿겠는가마는, 증거가 불충분할 때는 무죄로 추정한다는 법의 정신에 비추어보면 법원으로서도 무작정 인과관계를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과거에 고엽제전우회가 벌인 격렬한 시위들을 기억하는 경찰들이 겹겹으로 대법원 주변에 배치되었지만 이미 칠십 줄에 접어든 늙은 원고들은 이미 패배를 예감했던 듯 조용하게 법정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그렇다. 그들은 패자였다. 에이전트 오렌지 제조사에 진 게 아니라 시간에 졌다. 19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나는 동안, 고엽제의 직접적 피해로 죽을 사람은 이미 다 죽었다. 남은 이들은 지금 당장 세상을 떠나도 호상이라는 소리를 들을 나이가 되어버렸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제사로 쓰기도 했지만, 어쩐지 그 소설의 제사로보다는 이번 소설에 더 맞춤해 보이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이 떠오른다.

"오로지 태어난 것만이 죽으니, 탄생은 죽음에 진 빚이다."

 

죽음의 스위치가 어찌 방사능 피폭자나 고엽제 피해자 내부에만 있겠는가. 증권거래인들의 유명한 농담처럼, 우리는 '장기적으로' 모두 죽는다. 죽음은 바이러스처럼 우리 안에 잠복해 있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를 쓰러뜨린다. 혼미한 정신으로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내 안에 있는 또다른 스위치를 켰을지도 모른다. 무의식 속에 잠겨 있던 이야기가 의식 위로 튀어오르도록 말이다. 2013년 1월 12일의 일기에 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새 장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올비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새 장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을 깨달았다."

 

 

둘은 아마 같은 말일 것이다.

 

 

 

 

[예약판매] 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저
문학동네 | 2013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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