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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고독의 시간 | 비소설 2016-02-27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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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이하준 저
책읽는수요일 | 2016년 01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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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것들은 생성과 소멸을 겪는다. 책도 마찬가지다. 어떤 책은 소멸의 시간을 아주 오래 연장한다.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책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책은 직사각형 모양의 종이로 만든 책이 아닌 글로 표현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가의 생각이다.

 

고전은 오랜 시간 독자들이 찾아 읽는 책이다. 변화가 많은 세상에서 오랜 시간 살아남았다는 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뭉클한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고전 읽기는 어렵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와 삶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충실한 번역도 중요하다. 같은 책이라도 번역자에 따라 어떤 책은 쉽게, 어떤 책은 난해하게 읽힌다. 그나마 쉽게 고전을 접하는 방법으론 인문학자들이 고전을 읽고 해석한 책들을 읽는 방법이 있다. 이하준 교수의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도 그런 책 중 하나다.   

 

저자는 고전 읽기는 ‘언제나 내게 멈춤과 긴 호흡, 그리고 다시 보기라는 훌륭한 처방책을 내려주었다(7쪽, 프롤로그)’라고 했다. 내게도 다르지 않다. 계획을 잘 짜도 실행까지는 시간이 걸려 힘이 드는데 예상 못 한 삶의 간계들이 툭툭 튀어나와 괴롭힌다. 그럴 때 다 던져 버리고 도망가고 싶다. 고전을 읽는다고 삶의 정답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이하준은 고전 읽기에 대해 ‘오래된 생각과 나의 생각 사이의 대화’(12쪽, 프롤로그)라고 했다. 고전 읽기는 생각을 확장해 해답을 찾아가도록 이끌어준다 러셀은 ‘자신의 상태와 상황을 즐기면서 해야 할 일을 하라’(198쪽)고 했다. 어차피 겪어야 할 삶의 간계들이라면 마음을 편히 먹고 겪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은 불편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삶의 중심은 나이지 그들이 아니라는 말한다. 좀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번 보고 말 사람이면 내 의견을 분명히 피력하겠지만 가까운 사이인 경우엔 쉽지 않다. 곧장 서운하다는 말이 돌아올 테니까. 침묵의 시간이 길어진다. 어둠에 숨는 시간이 길어진다. 나는 자율적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에 실린 타인 지향형 인간의 심리적 특성 설문(178~179쪽)을 표시해 보니 나는 타인 지향형 삶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나는 자율적 인간이고 싶은(어처면 자율적 인간인 척 하는)타인 지향형 인간이었다. 쇼펜하우어의 고독은 외로움이 아니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 살아가는 존재지만 가끔은 관계를 정지하고 자신만의 시간으로 들어가 오롯한 자신을 만나야 한다. 외로움이 시간이 아니라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다.

 

어른은 과거를 사랑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멈춘 사람이며, 형이상학적 이념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지배받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위버멘쉬의 관점에서는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자들은 잠들어 있는 어른 전체, 그러니까 인류 전체를 의미한다. 즉 ‘사람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개별적 인간 전체이다. 결국 초인은 기존의 모든 가치를 전복시킴으로써 잠에서 깨어난 사람, 자기 자신을 극복한 사람, 자기 삶을 신이나 종교 이념의 도움 없이 오직 스스로 새롭게 창조한 사람인 셈이다. 니체는 누구나 그렇게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나와 당신도 초인이 될 수 있으며, 그 과정은 삶의 연속적인 과정처럼 ‘과정의 연속’이다.(34-35쪽)

 

20대의 나는 새로운 일에 시도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지금의 나는 그때만큼 용기가 없다. 하기도 전부터 실패를 생각하기도 한다. 직접 겪은 경험, 옆에서 본 타인의 경험은 시도하지 않고 미리 실패를 재단하는, 시간 낭비라고 판단하는 안 좋은 능력을 주었다. 니체는 니체의 ‘초인’을 꿈꿨던 나는 ‘최후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니체의 초인을 만나며 다시는 정체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옆길에 샜던 걸음을 돌려 다시 걸을 준비를 한다. 여전히 앞은 안개로 뒤덮여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걸어보리라 다짐한다. 걸으면서 필요한 것은 데카르트가 말한 방법론적 의심일 것이다.

 

한때 나는 먹고사는 것보다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먹고사는 일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철없을 때 얘기다. 생존은 어떤 문제들보다 우선한다. 그렇지만 삶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행동하지 않는다면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삶에 대한 고민은 인간의 특권이다. 이하준은 프로이트가 우리에게 던진 말은 “당신 생이 끝나는 날까지 당신 자신의 행복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269쪽)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엔 공짜는 없다. 행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 뚝 떨어지지 않는다. 행복도 행복해지고 싶고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돌아온다.

 

관계를 맺으며 사는 일은 피곤하지만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삶에 관계 유지는 중요하지만 때론 고독(孤獨)의 시간이 필요하다. 웃는 얼굴이라는 가면에 가려진, 두꺼운 화장에 가려진 진정한 나를 만나기 위해선 그렇다. 또한 고독(孤讀), 홀로 책 읽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 일은 미혹되는 삶에 균형을 잡아준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를 읽는 동안 책에 대한 생각 말고는 다른 생각이 들지 않아서 좋았다. 다른 고전들도 좋지만 니체의 책들은 제대로 읽어보고 싶다. 오래된 생각과 대화할 시간을 늘여가고 싶다. 그것은 결국 좀 더 성숙한 내가 되는 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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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으로밖에 갈 수 없는 그들을 위한 변명 | 국내소설 2016-01-26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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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소각의 여왕

이유 저
문학동네 | 2015년 1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가벼운 문장 속에 담긴 쓸쓸함 혹은 삶의 비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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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얼었고 서울은 영하 18도를 기록했다. 제주도는 32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춥다”라는 말이 입에서 떠나지 않는 나날이다. 따뜻한 생강차가 찬 몸을 녹이기 전에 다시 한기가 살을 파고들었다. 추위를 견디며 읽은 책은, 아니 추위를 잊고 싶어 읽은 책은 이유의 『소각의 여왕』이다.

 

한쪽밖에는 보이지가 않아서 한쪽으로밖에 갈 수 없는 사람들. 죽음이 아니면 달리 편안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206쪽)

 

잘못된 선택이었다. 추위를 잊기에 적당한 책이 아니었다. 가벼운 문장은 의연함이 아닌 쓸쓸함을 품고 있었다. 죽음이 아니면 달리 편해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가뜩이나 추운 심신을 더 춥게 만들었다.

 

“아버지, 허파에 바람이 들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 줄 알아?”(9쪽, 첫문장)

 

‘허파에 바람이 들다’는 실없이 행동하거나 지나치게 웃을 때 또는 마음이 들떠 있을 때 쓴다. 이유의 『소각의 여왕』은 ‘허파에 바람이 들어 죽게 되는 남자 지창씨’와 그의 유전병, 허파에 바람이 부는 병을 물려받은 딸 해미의 이야기이다. 고물상을 하는 아버지와 유품정리사인 딸의 이야기로 버려진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그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운명적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이제 지창씨 앞에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개고생을 하며 의미 없이 보냈다고 생각한 날들이 하나의 위대한 결과물을 위해 바쳐진 순간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던 것이다. 되든 안 되든 그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분명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지창씨는 자신의 심장이 그렇게 힘차게 뛰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아침을 눈을 뜰 때마다,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76-77쪽)

 

아내가 죽은 지창씨는 딸 해미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는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고물상을 운영하며 딸 몰래 유품정리를 하고 있다. 가난한 삶은 어머니와 아내의 병원비로 바닥을 쳤다. 그 무렵 친구 정우성이 알려준 사업, 휴대폰에서 이트륨을 분리하는 기계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 타인에겐 ‘허파에 바람이 드는’ 일이었지만 그에겐 삶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생각해 보면 꿈이란 실현되기 전까지는 모두 ‘허파에 바람이 드는’ 일이다.

 

고물상이나 유품정리사는 사용 또는 보관가치를 상실한 물건들의 ‘죽음’을 돕는, 그러니까 소각하는 직업이다. 그런 일을 한다고 해도 죽음에 담담하진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삶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 지창씨는 그 기계를 만드는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하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삶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싶지 않은 마지막 몸부림이었기에. 그의 시간은 ‘발밑에서 모래알이 빠지면서 언제든, 누구든, 물속에 잠겨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온몸으로 실감하던 때’(194쪽)였으므로.

 

죽음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안 된다. 여러 명의 의지가 하나의 죽음을 이끌어낸다. 누군가의 의지와 누군가의 동의와 누군가의 묵인.(64쪽)

 

한때 ‘9988234’라는 말이 유행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 2~3일 앓고 4일째 되는 날 죽는다는 뜻이다. 열심히 살다 편안히 생의 마지막을 맞는다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누군가는 스스로, 누군가는 타인에 그릇된 욕망으로 삶을 마감한다. 한 사람의 흔적이 쓰레기고 그마저 소각될 운명이라는 사실은 서글프다.

 

허파에 바람이 드는 일에 빠진 지창씨를 대신에 해미는 유품정리를 시작한다. 유품을 정리하는 일은 고인의 마지막 인사를 하는 일이다. 영어는 만날 때와 헤어질 때의 인사가 다르다. 아침 인사, 점심 인사, 저녁 인사가 다르다. 우린 만날 때와 헤어질 때 모두 ‘안녕’이란 단어로 통한다. 만남이 중요한 만큼 헤어짐도 중요하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도 유품 정리도 부모의 몫이었다. 그때 생각했다. 부모 보다 앞서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이구나. 유품 정리를 맡긴 사람들에겐 그럴 만한 사정이 있고 지창씨나 해미처럼 그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안다. 일반인보단 전문가의 손길이 닿으면 한결 깔끔하게 정리될 거라는 것도. 하지만 슬프면 슬픈 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원망하면 원망하는 대로 고인과 이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허리케인 파티라는 게 있대.”

해미가 희뿌연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게 뭔데?”

지창씨가 고개를 숙인 채 미소를 지었다.

“태풍이 가장 세게 몰아칠 때를 기다렸다 파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담도 크네.”

“태풍이 절정에 이르면 꼭 지구가 죽음의 고통 속에 허덕이는 것처럼 느껴진대. 그 순간을 기다렸다 파티를 하는 거지.”

“그러고도 무사해?”

“무사하겠어? 많이 죽는대.”

다시 정적이 흘렀다. 정적이 깨지는 일은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죽음의 파티네.”

지창씨가 말했다.

“인생을 완전히 쫑내는 파티지. 그래도 멋지잖아. 사람들이 지하대피소에서 숨죽이고 있을 동안 촛불을 켜고 수영복 입고 미친 듯이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는 거야.”(200쪽)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죽음은 삶의 끝이다. 죽음의 순간에 직면했다 해도 삶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기에 허리케인 파티를 즐기는 것을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 선택이 오답이라고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쩌면 파티는 삶을 놓아버리겠다는 뜻이 아니라, 거대한 힘을 가진 당신에게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지도 모른다.

 

어떤 날 읽으면 좋을까?, 생각하니 딱히 적당한 날이 떠오르지 않는다. 회피하고 싶은 일은 소각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불가능하다. 고통의 시간만 연장될 뿐. 살아있는 우리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다. ‘소각’은 예정된 운명이고 ‘여왕’의 삶은 이룰 수 없는 꿈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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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국외소설 2016-01-20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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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알랭 레몽 저/김화영 역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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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떠올리면 부모에 이어 형제가 떠오른다. 지금은 혼자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원래 집은 가족이 함께 사는 곳이었다. 낯선 세상에서 가족은 최초의 내 편이다. 가족이라도 함께 사는 일은 쉽지 않다. 즐거운 날도 많지만 전쟁의 날도 숱하다. 함께 즐겁게 사는 것이 불가능한 건 가족이라도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집은 이렇게 정의할 수 있다. 가족이 동상이몽 하며 지지고 볶으며 사는 곳이라고.

 

알랭 레몽의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에는 두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책 제목과 같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과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가 그것이다. 두 소설은 작가인 알랭 레몽의 자전적 소설이다. 소설의 화자이기도 한 알랭 레몽은 오십 년이 흐른 후 가족과 함께했던, 때로 가족과 분리되어 혼자였던 그 시절을 떠올린다. 두 편의 소설은 정치·사회적 변화의 물결 속에 그와 가족이 살고 머물렀던 집과 꿈을 찾아 방황했던 스무 살 무렵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난 이야기들은 기억의 왜곡과 상실 덕에 대부분 과장되기 마련이다. 지독하게 불행하거나 그리울 만큼 아름답거나. 그의 소설은 어느 쪽도 아니었다. 모두에겐 지나간 시절이 있다.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고 이젠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살았던 시절이지만 오늘의 나를 만든 시간이다.

 

그 집으로 이사 갔을 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그렇게 따져보니 한 이십 년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십오 년도 넘었다. 그렇대도 그 집은 우리 집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그러니 불청객들은 나가라, 감히 어디라고! 꺼지란 말야! 그 집은 당신네 집이 아니야. 우리 집이란 말야. 그 집에 살면서 겪은 일들이 너무 많고 너무 지독하고 너무 찐해. 거기서 우린 너무나 행복했어. 그리고 때로는 여지없이 절망에 빠지기도 했지. 열 명이나 되는 우리 형제들 전부. 그리고 부모님들도. 지금 나는 트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 오래전부터. 집에서 먼 곳에. 그 모든 것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러나 가끔 브르타뉴로 다시 돌아가 트랑을 지나기도 하고 거기서 걸음을 멈추는 때도 있다. 떨리는 가슴으로 그 집을 지나는 때도 있다. 모르는 체하며 슬며시 창문 저쪽으로 눈길을 던져 그 안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보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창 쪽으로 가까이 가려고 하면 꼭 화상이라도 입을 것만 같다. 쳐다볼 수가 없다. 정말이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18-19쪽)

 

옛집에 간 적이 있다. 그 집은 새로 지어져 있었다. 태어난 집은 아니지만 여덟 살 여름부터 스무 살 봄까지 그 집에서 살았다. 여러 집에서 살았지만 ‘집’이란 단어에 떠오르는 집은 그 집뿐이다. 당시에는 그 집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에선 아버지가 술을 마시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 이야기가 나온다. 옛집에서의 내 부모님 역시 그랬다. 그것은 나에게 슬픔을 넘어 절망이었다. 잊었던 건 아니지만 그리움 앞에 절망은 무뎌졌다. 안 좋았던 기억들은 다른 집에서도 계속됐지만 특별한 기억은 그 집에서만 유일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집은 작았지만 있을 것이 다 있는 집이었다. 훗날 넓은 친구 집에 놀러 가기 전까지는 그 집이 작은지도 몰랐다. 그 집에는 마당과 옥상과 지하실과 다락방이 있었다. 그 집은 숨바꼭질하기 좋았고 보물찾기하기 좋았고 틀어박혀 책읽기 좋았다. 함께 했던 가족과 이웃들이 살지 않는 그 골목은 낯설었다. 다행이랄까. 그 골목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많은 골목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그 골목 역시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 남은 내 기억의 조각도 사라질 것이다.

 

골목이 사라지는 건 차라리 낫다. 맘에 들진 않지만 다른 집들이 세워지니까.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의 ‘나’는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 너머의 회상》에서 ‘나의 모든 하루하루는 작별의 나날이었다.’라는 글을 읽었다고 했다. 살아오면서 많은 이들과 이별을 했다. 어떤 이별은 언젠가 만날 거라는 기대를 품거나 잘살고 있겠지 여기며 살았지만, 어떤 이별은 영원한 이별이었다.

 

조금씩 잊혀져 간다 / 머물러 있는 사랑인 줄 알았는데 / 또 하루 멀어져 간다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김광석의 노래 <서른 즈음에>의 일부다. 산다는 건은 결국 이별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지나온 시간과. ‘나’의 부모님은 세상을 떠나셨다. 나의 부모님도 언젠가 세상을 떠나실 것이다. 노년의 아버지는 건강이 좋지 않지만 재작년 가을 무렵부터 작년 봄까지는 아주 나빴다. 게다가 어머니의 건강 역시 안 좋았다. 아버지를 보며 돌아가실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자식으로 제대로 해드린 것이 없다는 죄송함과 ‘내 속에서 나를 무섭게 하는, 나를 부끄럽게 하는 어떤 존재’(93쪽)가 있어 마음이 복잡했다.

 

한파가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추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당연히 있었을 것이다. 지독한 현실 앞에 기억은 때로 길은 잃는다. 추운 날들이 이어지는 것을 제외하면 고요하다.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의 ‘나’는 ‘산 사람들, 그리고 죽은 사람들, 그들 모두와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148쪽)고 했다. 지금의 나는 이 평화가 지속하길 바란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러길 바란다. 산다는 건 결국 이별하는 것인데 이별은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녜스, 자크, 마들렌, 베르나르, 그리고 나. 커버리고 나면 아이들은 더는 놀이를 하지 않는다. 아녜스는 어느 날 놀이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자크도. 어느 날 문득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되는 것이다. 비밀을 잊어버린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걸 어떻게 하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온갖 삶들을 마음속으로 지어내고 그것을 굳게 믿는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게 끝나버린다. 그냥 그렇게 갑자기 딱 멈춰버린 것이다. 놀이의 상실, 놀이의 망각, 나는 그게 바로 일생 중 최악의 날이 아닌가 싶다. 누구나 그런 날을 거치게 마련이다. 어느 날 내 차례가 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마지막 날까지, 마지막 순간까지 남김없이 즐겼다. 내가 기록을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가장 오랫동안 즐긴 것이다. 하늘이 내린 선물이다. 생생하게 기억난다. 어느 날 내 또래의 친구 하나가 나를 찾아서 마당으로 왔다가 내가 마들렌, 베르나르와 함께 놀고 있는 것을 보고는 쏘아붙였다. 아니 그 나이에 아직도 이런 놀이를 하는 거야? 그렇다. 아직도 그런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런 놀이를 할 줄 모르게 된 그를 동정했다. 나중에, 그 울타리를, 그 경계를 넘어와버리면 끝이다. 다시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결코.(「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40-41쪽)

 

파티는 끝났다. 내 몸이 겪는 고통의 여름. 그리고 나 자신으로부터의 부재. 목숨을 부지하고 견디는 일이 남았다. 세상이 무너져 내린다. 깊이 생각하고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다. 이 사고가 나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던져놓은 것이다. 이것이 눈앞의 현실이다. 몽유병자나 자동인형같이 된 나는 이미 정상이 아니다. 나는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이다. 삶이 딱 소리를 내며 부러져버렸다. 사고가 나기 전의 삶과 후의 삶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생트 크롸, 나의 소명, 이런 것은 이제 다 지워져버렸다. 죽은 것이다. 끝난 것이다. 그건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아직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이 기적이다. 나를 지탱해주는 유일한 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한 발, 다시 한 발, 하루가 지나가고 다시 또 하루. 내 나이 스물두 살. 삶은 전진한다.(「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255쪽)

 

그 시절은, 우리가 트랑에 살던 그 시절은 끝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집이 팔렸다. 나 역시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넘어간다. 나는 이제 트랑에 살지 않고 생트 크롸에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물렝 베르를 떠난다. 물렝 베르에 살던 사람들 각자는 저마다의 시절을, 저마다의 시간을 마감하고 결국은 떠나버린다. 자신의 내면에서 작업이 끝났다. 다른 더 바쁜 일들이 생겼고 다른 욕구가 생겼다. 이제 나는 내 삶을 만들어가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안느, 나를 사랑하는 안느와 함께. 이렇게 행복을 꿈꾸었던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생생하고 살아 있고 싶어 했던 한 젊은이가 살아서. 그러니 이젠 어서, 어서. 삶이 전진한다.(「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295쪽)

 

우리가 밭에 도착하는 바로 그 순간, 숲에서 암사슴 두 마리가 불쑥 나타나더니 바로 집이 있던 그 자리에 잠시 멈추어 선다. 정확하게 집이 있었던 바로 그 자리다. 그놈들이 바르르 떨면서 우리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빗속으로 저만큼 달아나버린다. 달려라, 달려라, 삶이 전진한다.(「한 젊은이가 지나갔다」, 304쪽)

 

내가 살아왔던 시간과 ‘나’가 살아왔던 시간은 다르다. 내가 살고 머물렀던 곳과 ‘나’가 살고 머물렀던 곳 역시 다르다. 그럼에도 읽으면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나’도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작별의 나날 혹은 잠재된 작별의 나날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알랭 레몽은 말한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고 사라진 것들은 다시 소생하지 않지만 삶은 여전히 기적이라고.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린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한다. 기나긴 여정의 끝에 있는 것이 작별일지라도. 파티는 끝났다. 그러나 다른 파티가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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