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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하는 검은 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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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근소근, 안녕 | 안보윤의 '천 개의 혀' 2011-03-05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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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원고를 넘긴 뒤, 동해로 갔습니다.
 
                        
 
폭설 때문에 한참 시끄러웠는데
다행히 도로는 깨끗했고 날씨도 좋았어요. 바다도 보고,
 
                                              
 
눈 덮인 설악산에도 올랐습니다(물론 제가 아니라 케이블카가요^^;;)
눈에 파묻힌 개울이며 나무, 바위들이 너무 예뻐서
타인의 불행이 어째서 이렇게 아름다울까, 고민도 했고요.
 
 
                                                      
 
촛대바위를 보거나,
 
                                               
 
남들 다 타보는(특히 모 프로그램에 나온 뒤 더더욱)
갯배를 탔지요. 아바이마을에서 생선구이도 먹고요.
 
                                     
 
올라오는 길에는, 제가 죽인(!)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 가서 좀 빌었답니다.
 
          
 
<질주하는 검은 혀>를 끝내놓고
십 년간 줄곧 긴 머리였던 것을 짧은 단발로 잘랐어요.
목덜미가 드러나자 겸허해지더군요^^;;
아직 바람이 차서, 누가 목덜미를 차가운 손으로 꽉 움켜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매사에 조심하고 있습니다.
 
<질주하는 검은 혀>를 쓰면서 많은 생각을 했고
그 생각들이 글 속에 드러나지 않을까 봐 매번 조바심을 쳤고
스스로의 능력부족에 매번 실망했고
그러면서도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님 덕분에 매번 힘을 얻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죽은(혹은 제가 죽여버린) 아이들 때문에 가장 힘들었던 글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그리고 쓴 다음에
계속 어딘가를 떠돌아야 했던 것은 그 때문이었어요.
아이들은 계속 제 양어깨에 앉아 저를 책망하겠지요. 그리고
그 또한 우리가 짊어져야 할 시대의 얼룩일 테고요.
 
자아, 이제 소설이 끝났습니다.
저를 비롯, 모두들  
 
 
 
 
느긋하게 앉아서, 그간 연락 못했던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며, 과자를 드시자고요^^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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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회 | 질주하는 검은 혀 2011-03-04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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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누구야?

―씨발, 이건 또 뭐야.

여자아이가 꼬고 있던 다리를 탁 내려놓았다. 용수철마냥 튕긴 몸이 형사와 눈이 마주치자 의자로 도로 떨어졌다.

―알았다고요. 하면 되잖아요.

여자아이가 무릎을 붙이더니 머리를 푹 숙였다. 다리 위에 얹은 주먹이 터무니없이 고집스러워 보였다. 여자아이는 형사를 흘끔 바라보더니 입을 뗐다. 준비해둔 말인지 억양이 서툴고 부자연스러웠다.

―잘못해앴습니다아. 장난으로 그런 거지 악의는 없었어요. 이번마안 용서해주시면 앞으로 학교도 열심히 다니고 펴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며 살겠습니다아.

똑같은 짓을 몇 번이나 하라는 거야. 툴툴거리는 여자아이 뒤통수를 형사가 가볍게 내리쳤다.

―조사하면서 얘기해보니까 애가 입이 험해서 그렇지 나쁜 애는 아니더란 말입니다. 맞벌이 부모 밑에서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기니까 인터넷만 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사람 대하는 게 서툴러지고, 뭐 요즘 애들 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게 애가 나쁘다기보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거든요.

―저도 애를 둘 키웁니다만, 걔들 키울라면 뼈가 다 휘어요. 국어 수학 과학 영재교육에 어학원 다녀야지, 여자애는 호신용으로 남자애는 필수로 검도니 태권도니 배워야지, 어학원이며 논술, 독서교육, 피아노까지 해야지. 맞벌이를 하지 않고는 당최 애를 키울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애들 교육시킬라면 돈 벌어야 되고, 돈 벌라니 애들은 방치되고, 결국 악순환의 반복이다 이겁니다.

―우리도 어릴 때 여자애들 고무줄 끊고 아이스케키 하고 놀았잖습니까? 그게 따지고 보면 성추행에 재물손괴죄거든요. 법대로 했으면 우리 다 깜빵갔습니다. 애들이야 다 실수하면서 크고 그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같이 애들 키우는 입장에서, 어른답게,

―한 번만 용서해주시죠.

형사가 말을 이으며 아빠 앞을 막아섰다. 아빠는 반대쪽으로 책상을 빙 돌아 여자애 앞에 섰다. 여자아이는 여전히 주먹을 쥐고 앉은 채였다. ? 아빠가 여자아이 양 어깨를 붙들고 물었다. 여자아이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아빠 손을 뿌리치거나 하진 않았다.

―왜, 왜 그런 거냐.

―심심해서요. 잘못했습니다.

―이유가 고작…… 그것뿐이냐?

―잘못했다고요. 너무 심심해서 그랬어요. 제사라 어른들은 바쁘고 우린 뭐 할 것도 없고, 게임방은 시시하고, 마침 걔가 혼자 지나가길래. 이런 거 인터넷에 되게 많아요. 노숙자 패고 튄 애도 있고 왕따 괴롭혀 죽인 애도 있고 개랑 토끼를 불태운 애도 있는데 그깟 애 한 번 걷어찬 게 뭐 대수라고 나한테만 이래요?

―왜,

―썅. 잘못했다고. 다신 안 그런다니까?

여자아이가 소리치자 형사가 황급히 달려와 아빠를 붙잡았다. 양 팔이 불편하게 뒤로 꺾인 아빠가 왜, 라고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일단 진정하시고. 형사가 아빠를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자리를 뺏긴 여자아이가 책상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나는 아빠와 다른 이유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예상과 달랐다. 그리고 너무 빠르게, 정신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혹시 싶어 주머니에 넣어왔던 열쇠고리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쳤다. 강수찬에게 USB를 건넨 뒤 줄곧 책상 속에 처박아뒀던 것이었다. 김도준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긴 했지만 모양만은 동영상에 찍힌 것과 똑같으니 상관없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정일호가 김도준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너, 이게 뭔지 알아?

―열쇠고리잖아.

―그거 말고. 이거랑 똑같은 거 본 적 있냐고.

―있지 그럼. 저 아저씨한테 줬는데? 무슨 증거물이라고 사진 찍고 그러던데.

―너도…… 이게 있다고?

―병신. 그거 드라마에 나왔던 거라 아무 데서나 다 팔아. 이니셜 주문하면 그 자리에서 만들어준다고. 삼천 원쯤 하나? 아저씨, 나 이제 가도 돼요? 사과 다 했잖아요.

―이름. 너 이름이 뭐야?

―구인혜.

여자아이 대신 형사가 대답했다.

―이름 이니셜대로 K. I. H가 새겨져 있는 걸 우리도 확인했다. 동영상 말미에 나오는 열쇠고리라 확보는 해놨다만 워낙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있는 거라 증거물로 삼기는……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었다.

동영상을 찍은 사람은, 다연을 저렇게 만든 사람은 정일호였다. 정일호여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껏 내가 해왔던 일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나는 경찰서 밖으로 뛰어나왔다. 건물 앞 좁은 정원과 주차장을 새하얗게 덮은 눈이 익숙하게도, 낯설게도 느껴졌다. 두껍게 언 눈을 밟을 때마다 아찔한 국화향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눈밭 위로 새까만 날개를 푸득거리며 내려앉는 까마귀 떼가 보였다. 노랗고 빨간 눈알과 기묘한 방향으로 돌아간 목. 까마귀들이 내려앉는 곳마다 푹푹 땅이 꺼지고 거미줄처럼 금이 간 바닥이 드러났다. 어디에 있을까.

정일호는,

장기주와 김도준은,

다연은, 그리고 나는,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사방이 다 캄캄했다. 내가 밟고 있는 것이 눈인지 까마귀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날의 정자 바닥이 그랬던 것처럼 발이 떨어지는 곳마다 끼익꺽 끼익꺽 땅이 울렸다. 요란한 땅울림과 함께, 불길하고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겨울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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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 질주하는 검은 혀 2011-03-0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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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판길을 뚫고, 무수하게 쏟아지는 불빛을 거스르며 안양까지 내려간 것은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동영상을 찍어 유포한 범인이 잡혔습니다. 와서 확인하시겠습니까?

엄마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연휴인데도 아빠는 회사에 나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사건이 꽤 전이라 기억이 안 나시는 모양입니다. , 종종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피해 사실 자체를 인식 못 할 때가요. 피해자가 아동일 경우 특히 그렇지요. 아무튼 와보시면 알 겁니다. 확인, 필요 없으십니까?

범인이라니. 범인이 잡혀 있는 곳까지 피해자더러 오라고 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더 이상한 건 그들이 의기양양하게 잡았다고 말하는 범인이었다. 거침없이 하이킥 동영상이 경찰 조사에 들어갔다는 말은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일호가 죽고 없는 지금 범인을 확인하러 오라니.

―그러니까 내 딸이, 난생처음 보는 사람에게 길거리에서 걷어차였다?

―그러니까 내 딸이, 걷어차여 기절하는 모습이 동영상에 찍혔다?

―그러니까 내 딸이,

곧장 집으로 돌아온 아빠는 크게 동요해 내 딸이, 만 반복했다. 형사에게 정황을 전해들은 뒤 정도가 더욱 심해져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상의 끝에 엄마는 다연의 곁에 남고 아빠와 내가 안양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혼자 다녀오겠다는 아빠 곁에 필사적으로 따라붙은 건 나였다. 내겐 꼭 확인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간 아빠는 이내 운전을 포기하고 택시를 불렀다. 차 열쇠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연을 포기할 때조차 냉정하게 굳어 있던 손이었다. 나는 택시 안에서 아빠의 소매를 잡았다가 아빠가 도리어 손을 꽉 붙잡아오는 통에 놀랐다. 악력만 남아 있을 뿐 온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손이었다.

―피해 아동 신원 조사에 애를 좀 먹었습니다. 아무래도 시일이 좀 지난 사건이라 말입니다. 원래는 편의점에서 물건 훔치다 걸린 모양인데 털어보니 이래저래 걸리는 게 있더라 이겁니다. 참나, 물건 훔치는 건 물론에다가 지구대로 끌려가는 모습까지 휴대폰으로 찍어서 유튜브에 올렸더라고요.

―유튜브……?

―그런 게 있습니다. 뭐 중요한 건 아니고요. 여기 찍힌 아이가 그 댁 자녀 맞지요? 여기, 지금 넘어진 애요. 좀 있으면 얼굴이 클로즈업 될 겁니…… 이 부분이요. 맞죠?

―……

―애들 좀 넘어지는 게 뭐 큰일이냐 싶으시겠지만 이게 또 따지고 보면 범죄거든요. 안 그래도 요즘 이런 거 찍어 올리는 애들 때문에 우리만 죽겠습니다. 범인 잡는 것도 일이지만 피해자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거든요. 다행히 이 부근엔 CCTV도 많고 초등학교 근처라 학교로 직접 가 신원 확보를 한 경웁니다만, 구시가지 골목이면 이게 또……

―……

―그 동네가 가해자 친척이 사는 곳인 모양입니다. 제사 때문에 친척집에 갔다가 충동적으로 한 짓이라는데, 어른들이야 제사 중한 줄 알지만 요즘 애들은 뭐 절하는 법도 잘 모르니 말입니다. 마냥 기다리고 있자니 심심도 했겠지요. 워낙 어린 애들이라…… 열다섯, 열여섯 살 먹은 사촌 남맵니다. 일단 다른 피해자 가족들은 합의를 해주셨고……

―사촌 남매라니…… 그럴 리가요. 이걸 찍은 사람은

벌써 죽었는데요. 나는 뒷말을 필사적으로 삼켰다. 아빠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나를 저지하는 건지 스스로의 몸을 기대는 건지 잘 알 수 없었다. 무겁고 차가운 느낌만이 선명해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만나봐야겠습니다.

아빠 목소리가 신음처럼 울렸다.

―아까도 그렇게 말씀하셔서 불러놓긴 했습니다만, 그게 꼭, 만나셔야겠습니까? 그쪽 부모님과 만나서 합의를 하시는 방법도

―봐야겠습니다.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뉴스에서 보았던 산산조각 난 유리창과 볼품없이 찌그러진 차 지붕을 떠올렸다. 아빠의 얼굴은, 아무 곳도 깨지고 찢어지지 않았지만, 딱 그랬다. 형사가 난감한 얼굴로 일어섰다.

―한 명은 울산에 산답니다. 그쪽 관할서에서 조사받는 중이라 굳이 보시겠다면 그쪽으로 가셔야 하고요. 여기 있는 건 한 명뿐입니다. ……일단 여기는 경찰서라 말입니다. 방과 복도에 전부 CCTV가 달려 있습니다. 혹시라도 폭력 사태가 일어난다면 바로 구속된다는 점 유념하시고요. 그쪽은 미성년자인 데다가……

복도를 걷는 동안 형사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빠와 내가 가해자를 해치러 오기라도 했다는 듯한 태도였다.

책상이 두 개 놓인 좁은 방 안에 그가 있었다. 나는 문을 들어서다 말고 흠칫 놀라 그 자리에 섰다. 정일호였다. 옷걸이처럼 뾰족한 어깨와 마른 등, 앞으로 길게 뽑은 목줄기와 뼈마디가 불쑥불쑥 솟은 손가락. 스마트폰 화면을 쓸어내리며 끊임없이 구물대는 손가락을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씨. 도대체 몇 번을 오라 가라 하는 거예요, 진짜.

생경한 목소리. 불퉁하지만 현저히 톤이 높고 얇은 목소리. 나는 황급히 뛰어 들어가 그 앞에 섰다. 정일호가 아니었다. 얼굴이, 이목구비가 확연히 다른 얼굴이, 무엇보다 여자아이임이 확실한 얼굴이 내 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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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 질주하는 검은 혀 2011-03-02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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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한여름의 정자.

집요하게 머리 위로 떨어지던 날벌레 소리. 끼익꺽 끼익꺽 사신이 걸어오는 발짝 소리. 그 속에서 나는 한 번 죽었다.

내겐 다시 한 번의 기회가 있었으나 김도준과 장기주는 아니었다. 그들은 정일호가 누웠던 바로 그 칸에, 검고 흰 지하 계단 아래 누웠다. 향과 국화와 텅 빈 복도가 그들을 배웅했다. 친척과 지인보다 기자와 경찰이 더 많이 참석한 장례식이었다.

나는 그들이 운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2010 10

 

정자에서 우리들을 살해한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아주 나중에 알려졌다.

청량산 어딘가에서 목매달아 죽은 정일호 아버지가 이미 부검실에 누워 있던 때였다. 배와 얼굴, 손이 심하게 망가진 채라고 했다. 사체를 훼손한 것이 피해자들의 유족인지 산짐승인지에 대해 말이 많았지만 딱히 결론을 내리려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날 아빠 휴대폰을 무수히 울렸던 번호들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아빠는 철저하게 그들의 접근을 막았지만 음울한 그림자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다연은 끈질기게 숨을 이어갔다.

호흡기를 떼면 여덟 시간 이내 사망할 거라는 의사의 진단과 달리 다연은 8일을, 80일을 살아냈다. 거칠고 위태로운 숨이었지만 가만히 귀 기울이면 희미한 열기가 느껴졌다. 생명을 뽑아내는 소리가 아닌, 조금씩이나마 생명을 빨아들이는 그런 소리가.

의사는 노골적으로 곤란하다는 기색을 내비쳤다. 이렇게 되면 이식수술을 기다리던 환자들이…… 나는 그제서 내가 칼에 찔리는 사고와 실종 때문에 결단이 미뤄졌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간 살인마들은 차근차근 준비를 해왔던 것이었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그들의 계획을 저지하고 있는 건 다연 자신이었다. 미지근한 나무토막처럼 누워 있다고만 생각했던 다연이 안쓰럽고, 또 가여웠다.

어쨌든 다연은 살아 있었다. 나는 다연의 손을 꽉 잡았다. 다연을 이렇게 만든 원흉이라면 이미 죽어버렸다. 남은 건 다연이 깨어나는 것뿐이었다.

 

2011 1

 

연말에 쏟아진 폭설로 도로는 엉망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산 밑에서, 고속도로에서 쏟아져 나온 사고 소식으로 사방이 분주했다. 빙판길에 미끄러진 차량의 추돌, 충돌 사고는 약과였다. 승객이 가득 찬 고속버스가 다리 밑으로 떨어지거나 승용차가 화물차에 깔려 샌드위치처럼 납작해지는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고속도로 갓길을 가득 메운 견인차와 경찰차가 무질서하게 불빛을 쏟아냈다. 뉴스는 산산이 부서진 자동차 앞 유리창과 쿠킹호일처럼 볼품없이 찌그러진 지붕 같은 것을 집요하게 꾸려 내보냈다.

사고 소식 틈틈이 연말을 장식하는 수상 소식이 전해졌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레드카펫에 올라 우아하거나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수상자들이 웃으며 눈물 흘리는 장면은 괴이할 정도로 현실감이 없었다. 날카로운 바람 아래 한가롭게 나풀거리는 그들의 시폰드레스처럼.

우리의 연말은 무료했다.

지난해를 배웅할 기력도, 새해를 맞이할 희망도 없었다. 좀처럼 끝나지 않는 싸움에,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가 너무 위태롭고 거대한 존재란 사실에 우리는 시시각각 절망하고 지쳐갔다. 엄마와 둘이 지하식당에서 떡만두국을 시켜 먹고 다연의 병실에 앉아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아빠는 집과 회사를 오갈 뿐 병실에 오지 않았다.

우리는 얇은 종이 몇 장으로 나뉘어 팔락거렸다.

삶의 접점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아빠는 서재와 안방 화장실을, 엄마는 주방과 거실을, 나는 내 방과 욕실을 오갔다. 소파에 앉아 느긋이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은 없었다. 텔레비전과 다탁에 쌓인 먼지가 묵묵히 더께로 변해가는 중이었다. 우리는 안절부절못한 채 서로가 보지 않는 틈을 타 바퀴벌레처럼 움직였다. 서럽고,

쓸쓸한 새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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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 질주하는 검은 혀 2011-02-28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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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 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지금이라면 달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의 질주가 결코 끝날 리 없다고.

 

2010 6

 

학급생을 대상으로 한 경찰 조사가 두 차례 있었다.

시작은 인터넷에 유포된 고등학생 구타 동영상 때문이었다. 인터넷 검색 순위에 오른 동영상이 수사망에 오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여대생 엉덩이에 깔려 압사한 토끼나 코와 귀가 잘린 고양이, 산 채로 화형당한 개 등 이력이 화려했다. 그러니까 정일호는 토끼와 고양이, 개들이 만들어놓은 억울함의 계보를 이은 셈이었다.

학급생들은 구타 동영상 속 피해자가 정일호란 사실을 금세 알아챘다. 턱이나 배에 내리꽂히는 주먹이 누구 것인지는 알지 못했고 그닥 궁금해하지도 않는 눈치였다. 구타 동영상은 호기심과 경악, 수치심과 분노 등등을 급물살로 갈아타며 퍼져나갔다. 경찰은 피곤한 얼굴로 교실에 들어섰다. 학생 몇과 담임선생에게 피해자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는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수사기관의 협조하에 학교폭력피해실태조사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소화기를 뿌려 정일호 사물함을 채웠던 아이1과 목공풀 스프레이를 정일호 뒷머리에 뿌렸던 아이2, 체육복 머리구멍을 꼼꼼히 박음질했던 아이3이 차례로 교장실로 불려갔다. 사복을 입은 형사 두 명이 학교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녔다. 하루는 음악실이, 하루는 과학실이, 하루는 정보화교육실과 교실이 폐쇄되는 식이었다.

출석부는 나날이 두꺼워졌다. 심신피로와 고열감기, 갑상선염과 위염을 증명하는 진단서들이 사이사이 끼어들어간 덕분이었다. 결석과 지각 수가 매일매일 이전의 기록들을 갱신했다. 이렇다 할 증명서를 얻지 못한 아이들이 상담실과 교장실로 불려갔다. 모의장례식을 주관했던 방은정과 여학생들은 물론 김도준과 장기주도 참고인 격으로 자주 불려갔다. 강수찬과 그 무리는 일찌감치 경찰서로 넘어간 모양이었다.

기자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교로 숨어들었다.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시민단체와 어머니회도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선생들은 더 이상 학생들의 교복 개조나 흡연에 관여할 틈이 없었다. 기자들을 솎아내기 위해 교문 출입은 철저히 통제되었고, 모든 사람이 교장 직인이 찍힌 신분증을 목에 걸었다. 학급생들에게는 침묵이 요구되었다. 휴대폰 사진이나 통화 기록을 검열당하기도 했다. 쥐죽은 듯 보름만 버티면 다 끝날 테니까. 담임선생은 주문처럼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리고 그것은 이내,

현실이 됐다.

소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지나치게 역겹고 잔혹한 사건들이 전국 각지에서 터진 탓이었다. 강직하지만 깡마른 손을 가진 남자가 40톤의 물과 몇 점의 혈흔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졌고, 만삭의 부인이 욕조에 구겨져 죽은 채 나타났다.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부패한 고깃덩이로 전락해 쓰레기장에 버려졌으며, 자기보다 예순 살이나 많은 여자와 결혼한 이십대 청년이 아내를 살해한 뒤 정신병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인터넷 뉴스는 매시간 헤드라인과 검색 순위를 갈아치우느라 바빴다. 허무한 순위 쟁탈전이 이어졌고, 정일호의 기사는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학급생들은 굳은 뺨을 움직여 급식을 먹고 영어회화를 연습했다. 끝났나 봐. 학급생들이 소곤거리며 숨을 쉬듯 가만가만 기지개를 켰다. 곰팡이꽃처럼 번진 웃음이 창틀과 책상 여기저기 피어났다. 정일호 장례식 이후와 똑같은 순서였다.

무슨 이유에선지 정일호 아버지가 모든 고소를 취하하고, 원만한 합의를 제시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학교와 부모들은 당연히 반색하며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학급생들은 학교 차원의 체벌에 그쳤다. 각각 사흘에서 일주일간의 유기정학과 벌점 50, 봉사활동 한 달에서 석 달이 전부였다. 학교와 교육청, 구청, 시청을 모두 쑤석거린 사건은 순식간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오므라들었다. 그리고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학교 경찰 교육청, 어디에서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로 걸어 다니는 꼴을 멀찌감치 지켜보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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