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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작가 표류기 | 한국소설 2011-06-26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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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2011 제2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김애란 저
문학동네 | 2011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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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소설에서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료로서의 위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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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젊은작가상이 2회째를 맞이했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나는 가수다>가 이미 가수로서 증명된 베테랑들의 각축장이라면 케이블채널의 <슈퍼스타K>는 베테랑이 될 소지가 있는 가수들을 발굴해내는 프로그램이다. 어느 프로그램이 더 의미 있다거나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저 각자의 자리로서의 의미를 찾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일 게다. 다만 좀 더 다양하고 깊이 있는 베테랑을 만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신인배출구가 열려있을수록 유리할 것이 분명하다. ‘좁은 문’이 많으면 많을수록 관객이나 독자의 눈과 귀가 즐거울 확률이 높아지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젊은작가상>은 확실히 나의 소설읽기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익히 알고 있으며 사랑해마지 않았던 김애란이나 김사과에 대해 더욱 깊이 있는 ‘사귐’을 제공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걸출한 5명의 소설가와의 만남을 주선해주었다. 한 소설 읽기를 끝마치고 다음 소설로 넘어가기 전의 공백은 마치 소개팅 전 날의 흥분을 상기할 만큼 격동적이었다. 그리고 그 격동은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잔잔해지는가 싶더니 마지막에 이르러서 또다시 격랑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는 다음 소설을 읽을 준비에 들어가는 것이다.  


확실히 젊은작가의 소설을 읽는 방식은 기성작가를 대하는 그것과는 완연히 다르다. 같은 ‘젊음’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작가’라는 칭호가 더 나붙은 그들에게 나는 곁눈질로 질투어린 빔을 쏘아 보낸다. 그들은 나보다 많은 세포를 할애해 세상을 바라볼 것이 분명하다. 나와 같은 세상을 바라보고 같은 연대기의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들이 세상의 비척거림에 더 민감한 것은 ‘작가’라는 호칭에 가닿으려는 욕망에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욕망을 소비한다. 나는 나의 시선과 그들의 시선을 끊임없이 비교한다. 이는 기성작가의 작품에 내 평가의 잣대를 감히 잘 들이밀지 않는 온순함(?)과는 다르다. 그래서 젊은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이 더욱 비판적 독서에 가까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렇게 확언할 수 있는가? 모르겠다. 결국은 내가 읽고 싶은 대로 읽게 될 것이다. 다만 확실한 건 작가성과는 무관하게 그들의 소설에서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동료로서의 위안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래, 문학은 누구 시선이 더 나으냐를 가늠하는 척도가 아닌 만큼 말이다.

 

 



묵시록의 표지는 울트라마린

김애란, 「물속 골리앗」

 

“아버지가 죽었잖니!”

 


사실 여기서부터 모든 파국이 시작된다. 성인이 아닌 소년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없다는 말은 거쳐야할 장애를 거치지 않고 세상과 생짜로 마주한다는 뜻이다. ‘장애를 만나지 않으면 오히려 좋지 아니한가?’라고 묻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그렇지 않다. 세상과 부합하지 않는 나만의 질서를 구축해야 하는 과정에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고난과 역경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쩜 그 과정에서 파멸할지도 모르고 말이다.

김애란은 <달려라 아비>에서부터 아버지 없는 스스로만의 질서 짓기를 시도해왔다. 그간 위트와 유머 속 단단한 질서를 별 무리 없이 지어왔다면 이 단편소설에서 시도하는 질서 짓기는 그리 녹록치만은 않아 보인다. 내부가 아닌 외부세계의 골리앗을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새벽 세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 겠다구요” - 고 정은임 아나운서

 

우리는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장마가 끝나기를. 혹은 나쁜 일이 생기기 전에 구조대가 오기를. 세상에 적어도 한두 명은 이곳 철거 아파트에 사람이 산다는 걸 기억하리라 믿었다. (15쪽)

 

소년은 험악한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으나 누구도 그를 구하러 오지 않았다. 이제 소년은 스스로 배를 만들어 세상의 질서 속으로 향해야 했다. 어머니의 양수(羊水)를 벗어나는 태아의 모습이 연상되는 것은 왜일까? 「물속 골리앗」은 온통 물의 이미지로 흥건한데 그 물의 느낌은 뱃속의 태아가 느끼는 안락함과는 다르다. ‘어둠 속 물빛은 검고 끈적였다.’(26쪽)

 

물의 파문은 아름다운 동심원을 그리며 소년에게 와 닿지만 소년은 세계의 이치를 알 듯 알 듯 알 수 없었다. 물대포를 온몸으로 받아낸 아버지에게도 이 동심원은 닿았을 테지만 내 몸으로 받아내지 않은 그것에 대해서는 더욱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동심원에 실려 목적 없이 노를 저어감에 지쳐갈 때 쯤, 소년은 무언가를 보고 한 가지 확신을 얻는다. ‘세상에 이렇게 많은 타워크레인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잦은 출현이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비로소 전 국토가 공사 중이었음을 깨달았다.’ (34쪽) 이것이 바로 세상의 질서였다.


국토개발의 의지. 삽이 떠낸 자리에 날카로운 물살이 깔리고 거기에 소년이 던져져 있다. 아버지를 잃었고, 살던 곳에서 떠나야 했으며 어머니를 물살에 흘려보내야 했던 소년이 기적처럼 회생하기를 바라보지만 점차 패이는 네 개 강의 땅만큼 절망감은 깊어만 갈 뿐이다. 하지만 소년은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심지어 재난의 인간적 원인인 골리앗크레인에 의지하는 수모를 감내하면서 까지도 살아남았다. 왜냐면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소년은 아버지가 가르쳐준 수영법과 하늘바라보기를 떠올렸다. 소년은 굳이 혼자가 아니었다.

 

이토록 묵시록적인 세계에 주인공을 던져놓고 그 안에서 희망을 찾는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김애란은 주인공만이 아닌 독자들마저도 바다 속 깊은 곳까지 함께 침잠시킨다. 숨이 막혀 사방이 깜깜해질 때 쯤 불쑥 수면위로 끌려 올라졌을 때 하늘을 강제로 바라보게 한다. ‘자, 어떠니?’, ‘응, 세상이야 어찌됐건 하늘은 울트라마린이네.’

 

 



사랑은 비극이어라

김유진, 「여름」

 


일본의 걸출한 철학자 가라타니고진은 문학에서 풍경의 발견은 곧 인간내면의 발견이라고 한 바 있다. 김유진의「여름」은 내면을 드러내지 않은 채 풍경을 묘사하는 데 에너지를 집중한다. 하지만 그 풍경의 묘사가 도리어 인물의 내면을 향해 있다는 점에서 묘한 아이러니를 풍긴다. Y가 응시하는 대상들은 전체로서의 풍경이라기보다는 파편화된 작은 것들에 한한다. 먼지, 벌레, 체리, 화분 등 일상에서 흔히 포착되지 않는 아니 포착하지 않는 것들에 응시를 보내는 것이다. 소설을 읽어나감으로써 독자인 우리는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공간에 놓인 듯 새로운 감각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느낌이 조금 다른 건 왜일까? 일상이라는 무게감에 짓눌려 사소한 아름다움을 놓치는 우리들에게 색다른 시각을 씌워준다면 고마운 일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 디테일한 감각의 소여들은 전체 속 물질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체를 지워버리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나아가 일상을 잠식하기까지 한다.

Y는 벌레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 며칠 전 개수대에서 마주쳤던 벌레의 모습이, 세제 거품이 묻은 등껍질이 머릿속 어딘가에 남아 있다. (71쪽)

Y와 B는 동거를 하고 있으며,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B는 만들고, 깎고, 부수는 일을 하는 사람이며, Y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녹취록을 작성하는 사람이다. 소설 내에서는 이 둘의 갈등이 드러나지 않지만 나는 둘의 관계가 위태로운 지반위에 간신히 버티고 있다고 상상한다. 특히 B의 자아는 Y의 자아와 동화되지 못하고 오히려 Y 전체를 잠식해 들어간다. B가 만들고, 깎고, 부수는 동안 생성된 먼지는 차단막을 뚫고 온 집안에 내려앉는다. Y는 먼지를 하루에 두 번씩 매일 닦아내지만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먼지는 집안 전체를 덮을 것이다. 그리고 반복.

가수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라는 노래에 이런 가사가 있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그대의 추억은 나의 추억이 아니기 때문에 그대는 내가 아니다. 사랑은 본래 이런 비극에서부터 시작한다. 체리에 관한 추억은 온전히 B의 것이었다. B의 추억은 먼지처럼 온 집안을 뒤덮고 벌레처럼 Y에게로 슬금슬금 기어온다. ‘Y는 어두운 거실 한구석을 노려보았다. 어둠을 응시하는 것은 Y가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사용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71쪽) Y는 어둠을 응시하며 먼지나 벌레와 같은 강박을 없애는 연습을 했다. 나 역시도 그녀가 부둣가에서 불러도 오지 않는 B 대신 어둠을 부른 것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개별적인 것에 일일이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전체로서 개별적인 것을 감싸는 것이 훨씬 세상과 아름답게 관계 맺는 일일 것이다. 연애라고 다를까?

Y에게도 B의 체리가 아닌 ‘Y만의 체리’가 생긴 걸까?

 

 

구원=공포다?

이장욱,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이장욱이 배경을 러시아로 정한 것은 탁월한 선택인 듯싶다. 소설에 몰입한 순간순간마다 ‘아, 러시아가 배경이었지’, ‘아, 한국인이 주인공이지’라는 이물감을 머릿속에서 계속 공글리게 된다. 이 모호한 경계선에서 독자는 길을 잃기 십상이지만 바로 그 점이 이장욱이 의도한 바가 아닌가 싶다. 소설은 온통 모호함 투성이다. ‘꿈이냐, 생시냐’. ‘낮이냐, 밤이냐’. ‘자살이냐, 타살이냐’. 이러한 길항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의도한대로 ‘공포’였다.

 

술 취한 안드레이가 한 말 중 “구원이란 인간의 자유의지가 완전하고 궁극적으로 부정되는 순간을 의미한다는 걸 알고 있나?” (106쪽)에서 나는 ‘공포’를 상상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부정되는 순간, 자신의 상식을 벗어나는 순간이 극도로 치달아 올랐을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공포가 아니던가. 우리가 공포라고 느끼는 것들은 전혀 모르는 것에서 생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상투적인 것의 반전이 가장 큰 공포다. 소비에트가 붕괴된 뒤 루블화의 가치는 마구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 화폐의 본질 자체가 공포다. 주머니에 천 원을 가지고 있지만 내 주머니 속에 있는 천 원은 매일 그 가치가 바뀐다. 그것도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말이다.

 

또한 두 말할 것 없이 인간의 최대공포는 타인이다. 이반 멘슈코프의 성공작「꿈」은 이런 속성을 잘 드러낸다. 소녀가 다른 사람들의 꿈속으로 들어갔다 나왔을 때, 그녀가 느낀 공포를 상상해보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 속을 들어가 보고 싶어요.’의 엔딩이 과연 순정으로 끝날까. 우리가 늘 보고 있는 것들은 그 대상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심지어 윗 층에서 들리는 탭댄스 소리마저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자신의 감각마저 확신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바로 이 공포를 대면하지 않으면, 인간은 진정한 자신과 만날 수 없다.” (109쪽)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은 온통 미스터리한 공포로 점철되어 있다. 흔히 공포영화나 공포소설이 충격적인 장면을 삽입해 관객이나 독자에게 감각적인 놀라움을 선사하는 방식이 아니다. 이 단편소설은 끊임없이 존재에 대한 질문을 강제한다. ‘당신이 당신이 맞는가?’ ‘당신이 당신이 생각하는 당신인가?’ 이 질문은 그 자체로 공포이면서 구원의 방식이다. 자! 나는 단 한 줄의 시로 이 대답을 끝낼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할 것인가?

 



 

생선살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다

김사과,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의 질문을 더 밀고 나가면 이러한 답이 나오지 않을까? 이 소설에서는 지난한 과정이 생략되어 있다. 모든 과정을 지나왔으며 어느 절정의 꼭대기에서 일촉즉발의 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세계는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듯 팽창해 있다. 그래서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무언가가 터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해할 수 없으니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날 떨게 한다.” (150쪽)

 

이 소설의 세계관은 그저 공포와 두려움이다. 어떤 사람에게 세상은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걸어 다니는 것 자체가 밀도 높은 두려움을 이마로 밀고나가는 것처럼 버겁다. 주인공은 처음에 두 명을 살해한다. 한 명은 아무도 찾지 않는 국밥집을 운영하는 여자와 다른 한 명은 가난하여 쿠폰을 들고 아무도 찾지 않는 국밥집을 찾아온 아이다. 이 둘의 죽음장면은 마치 순교가 이뤄지는 순간처럼 장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마침내 해방되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 둘 중 누구도 세상이 정말 공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모른다. 때문에 주인공은 그것을 자각해주기 위해서라도 스스로 공포가 되어야 했다.

 

두 번째 살해는 집에서 일어난다. 집에서의 풍경은 회사에서보다도 국밥집에서보다도 더욱 혼란스럽다. 결국 모든 공포의 근원은 여기라는 듯 주인공은 자신을 어둠에서 빛으로 꺼낸 부모님을 살해한다. 나름 모든 것을 소거하였다.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질 때까지 난자한 후 남은 것은 무엇인가? 언뜻 본 아이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동태찌개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165쪽) 거기엔 뭉개져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생선살이 가득 들어 있었다. (...) 뭉개진 살이 내 혀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180쪽)

 

형상을 파괴하니 순수한 질료만 남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가 형상이 되어 그 어떤 목적성을 갖는다고 했다. 하지만 김사과의 이 소설은 그 목적성을 거세해 버렸다. 우리의 목적이 공포나 분노이며, 우리의 삶이 그것으로 들끓는 삶이라면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형상이 파괴되고 남은 질료는 갓 익힌 생선살처럼 뜨끈뜨끈하다. 소설이 식기 전에 어서 이 생선살을 먹도록 하자.

 

 


 

성장이라는 이름의 재난

김성중, 「허공의 아이들」

 

건반을 두드리는 소녀와 야구배트를 휘두르는 소년이 만났다. 마치 인류가 끝나가는 시점에서 그들은 다시 인류를 잉태하려는 아담과 이브 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만드는 세상은 유토피아가 될 것인가? 디스토피아가 될 것인가? 문제는 어떤 토피아가 됐든 그들의 토픽이 시기마다 확연히 엇갈린다는 슬픈 현실이다. 처음 그들이 만났을 때 소녀에게 소년은 그야말로 ‘즉자’에 지나지 않았다. 사물과 같이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인 무존재였던 것이다. 예쁜 옷을 입어도 보여줄 이 없는 세상은 그야말로 디스토피아가 아닌가? 물론 연애소설이 성립하기 위해서 결국 소녀는 소년을 사랑한다. 물론 소년도 소녀를 사랑하긴 한다.

 

“지금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창세기인 셈이지. 우린 선택된 걸까, 아님 누락된 걸까?” (204쪽) 시드(seed)라는 손에 의해서 이 쪽 세상의 퍼즐이 저 쪽 세상으로 옮겨지나 보다. 이제 둘 만의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이 지점에서 내려야 할 결정은 단 두 가지다. 둘만의 퍼즐을 맞출지 각자의 퍼즐을 맞출지. 의논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도 전에 소년은 한심한 소녀를 두고 떠날 결심을 한다. 둘이 함께하는 퍼즐 판은 부서졌다. 둘만의 세계에서 성장은 아무 의미 없었지만 그것 자체로 좋았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소년의 뼈는 자라고 있었다. 성장이 필요했을까? 소년의 뼈가 자라는 소리와 땅이 무너지는 소리는 완벽한 화음을 일으킨다.

 

그리고 소년의 재난은 다름 아닌 소녀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저는 아무생각 없는데요

김이환, 「너의 변신」

 

환멸(幻滅)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환상에서 깨어남을 의미한다. 아마 환상에서 깨어난 후의 느낌은 그리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환멸감을 느낀다’는 말의 뉘앙스가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니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원빈, 이효리를 희망하지만 거울 앞에 선 순간 깊은 환멸을 느낀다. 이 환멸이 열어준 틈을 파고드는 것이 성형기술이다. 환멸을 막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유보할 수는 있는 인간의 새로운 조물주.

 

「너의 변신」은 인간의 이 어쩔 수 없는 욕망의 궤도를 보여준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현대사회에서 타인의 욕망이 되고 싶은 자들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 이미 사랑하는 사람의 욕망을 획득했음에도 사회적 욕망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이다.

 

새로운 성형기술을 발명한 사람은 아담S고, 그 수혜를 받은 사람은 이브A다. 자신의 뼈조차 희생하지 않은 아담은 수많은 이브를 양산함으로써 부와 명예를 얻는다. 배역마다 얼굴을 바꾸는 배우라든지 죄수의 신체를 각목과 연결하는 획기적인 시스템이 이루어지는 것은 마치 진화론이 ‘美는 곧 유용성’이라며 강하게 역설하는 바와 같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순수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는 왜 나를 좋아하니?” “왜 좋아하면 안 되는데?” (231쪽)같은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이 유용성에 따라 자신을 서슴없이 바꾸는 것은 그저 자신만을 위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관계의 배치가 바뀌기 때문에 그렇다. ‘너’가 ‘나’의 의견과 상관없이 온 몸을 바꿔버린 순간 둘의 순수한 관계는 헝클어져 버렸다.

 

예쁘고 잘생긴 사람이 더 많은 연봉을 받는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이 연구결과에 나는 승복한다. 하지만 행복의 저 깊숙한 곳에도 아름다움이 그렇게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까? ‘너’는 결국 육체마저 버렸다. 아름다움의 욕망보다 더 나아간 것이 ‘돈’에 대한 욕망이던 걸까. 과학과 기술이 연계된 산업사회에서 세상은 매우 박잡하게 돌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 욕망과 직접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돈’이라는 간단한 동력이다. 더 무서운 것은 뭔지 아는가? 바로 다음의 대화다.

 

“먹지도 자지도 않아도 되고, 다른 걱정 할 필요도 없고, 영원히 오르가슴만 느끼잖아요. 이 사람들이 부럽진 않으세요?”

 

“저는 아무 생각 없는데요.”

 

 

 

상처로 상처를 덮다

정용준, 「떠떠떠, 떠」

 

「떠떠떠, 떠」의 은유는 매우 정직하다. 사람들은 모두 탈을 쓰고 있고 그 안에 상처를 감추고 있다. 탈을 쓰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상처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상처는 상처를 알아본다. 상처를 주는 사람의 상처는 어떻게 알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정확하게 가격할까. 매월 숫자 7이 들어가는 날만 되면 선생님은 ‘나’의 상처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마치 그러한 행위를 함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듯 말이다.

 

홉스는 “언어가 없었다면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늑대다”라는 말을 했다. ‘나’는 상처를 가릴만한 언어조차 제대로 구비할 수 없었기에 세상 모든 사람들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늑대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자탈을 쓴 건 어쩜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자에게 판다가 다가왔다. 그들의 만남은 자칫 안일해 보일만큼 낭만적이다. 하지만 이 둘이 상처로 상처를 덮는 방식만은 안일하지 않다. 타인의 상처는 나의 상처로 치유되는 게 아니다. 내 상처가 그대로 타인에게 받아들여지길 원하듯이 나 역시도 타인의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것은 치유가 아니다. 그저 상처로 상처를 지긋이 덮는 일이다.

 

“부탁이 있어. 앞으로 내가 또 쓰러질지도 몰라. 아니 갑자기 또 그렇게 되겠지. 입에 거품을 물고 눈이 하얗게 뒤집힐 거야. (...) 허둥대지도 말고 놀라지도 마. (...) 내가 너의 얼굴을 보고 슬프거나 놀라지 않도록. (...) 만약 또다시 네 눈이 지금처럼 눈물로 가득하다면 나는 너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아.” (295쪽)

 

소설의 마지막은 긴 여운을 남긴다. 발작을 일으킨 판다와 그런 판다에게 더듬거리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자. 이 두 상처의 치열한 부딪힘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사랑’이었다.

 

 

나가며

 

이렇게 읽은 단편들을 쭉 정리하고 나니 내가 얼마나 읽고 싶은 대로 읽었는지 알겠다. 그들이 쓰고 싶은 대로 썼듯이 나는 읽고 싶은 대로 읽었고 나름 ‘젊음’이라는 공집합 안에서 서로의 문양을 견주었다. 세상의 고난이 일곱 작가에게는 무척이나 크게 느껴졌나 보다. 그만큼 현재의 사회적, 심리적 고난은 재난이라 할 만큼 스케일이 크다. (물론 스케일이 크다고 해서 꼭 고난의 크기도 큰 것은 아니다.) 고난의 스케일이 크면 몸과 맘으로 부대껴야 할 면적이 커진다. <물 속 골리앗>의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고난은 공포와 살의, 분노 등 다른 에너지로 다시 방출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새로운 희망과 사랑이라는 이정표로 나타나기도 한다. 공포든 사랑이든 그것은 쉽고 간단한 방식으로 사색되어야 할 것은 아니다.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나는 7명의 작가와 7개의 표류기를 보았다. 모두 각자만의 방식으로 젊음을 표류하고 있었다. 그들이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표류를 하던 나는 그들의 항해에 동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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