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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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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질주하는 프로들의 틈바구니에 끼인 아마추어의 꿈 | 소소한 잡담들 2007-06-02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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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책 읽기 말고 딴 게 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구입한 직소퍼즐. 두 개씩이나 한꺼번에 게다가 딸아이 퍼즐에 액자까지. 고흐 작품이 좋아 상당히 많이 했는데 빠진 게 바로 블러그를 장식하고 있는 <고흐의 방>이다. 500개 소품으로 할까 1000개로 할까 고민하다(그림 자체는 500조각 소품과 어울릴 듯하고 할 맛은 1000조각이 더 나기 때문에) 결국 1000조각을 선택했다.


사랑하는 님을 만난들 이리 반가울까? 오랜만에 만져보는 조각의 감촉은 아늑하고 해독되기를 기다리는 암호처럼 어지러이 섞여있는 그림 파편들은 도전의욕을 부추긴다. 완성된 아름다운 그림에 대한 기대감까지. 만사를 제쳐두고 몰두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한 고흐 작품 중에서 가장 쉬었다.(혹은 내 실력이 는 것?)


고흐 특유의 역동적이고 거친 붓터치로 작품의 대략 반쯤을 뒤덮은 공간들(구름이 떠다니는 푸른 하늘이건, 별이 빛나는 까만 밤하늘이건, 찬란한 별빛이 회오리처럼 하늘을 휘어감든)은 좀 과장하면 거의 죽음의 경지다. <고흐의 방>에도 푸른 벽과 노란 침대와 무슨 색이라 표현키 어려운 마루바닥 등 공간은 넘쳐나지만 어쩐 일인지 정말 딱딱 맞아 떨어졌다.


<고흐의 방>을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딱 하루 반. 놀라운 기록 갱신이다. 물론 최소한의 일을 제외하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퍼즐만 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면 당연 문제가 발생할테지.....아직 포장을 풀지 않은 샤갈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불붙은 열정은 가속으로 달려가지만 지금은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지 않을까? 눈과 허리는 고통을 호소하고 필요한 건 숙면이라고 아우성친다.


아마도 가장 순수한 즐거움에 가깝지 않을까싶다. 목적도, 평가도, 기대도, 책임감도, 증명해야 할 그 무엇도 없이 단지 즐기는 일, 아마추어의 강점이자 한계이다. 언제나 프로가 되기 두려워(한때 유행하던 카피문구로 말하자면 심지어 여자조차도 프로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그야말로 프로들만이 우글거리는 이 세상에서) 아마추어에 머물고 마는 나의 한계이기도 할터이다.


강력한 목적의식을 버리지 않고 넘어서는 즐김의 경지를 범인에 불과한 나는 알지 못한다. 더구나 현실이 보여준 프로들의 삶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한 술 더 떠 매력적이지도 않은 주제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을 것을 요구한다.


평범하고 소심하며 야망조차 없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패는 그저 버리는 것이었고 그 결과 직업과 자아실현의 분리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영위하고 싶은 삶을 끊임없이 갉아먹는 직업의 시간, 동시에 직업의 시간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내 삶, 이 모순에 부대끼며 생존 가능한 샛길을 걸어왔다.


뭐든지 늘이기보다 줄이는 것이 훨씬 어렵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이 밀려들 때, 성공의 지표로 보일 수도 있는 그 지점에서 일을 포기하기란, 다시 말해 돈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도 돈이 넘쳐나서 필요 없는 차원이 아니라(사실 이런 의식 자체가 현대의 삶에서 가능한지 의심도 들지만, 돈이야말로 다다익선 아닌가?) 내가 정한 수준이상의 욕심이라는 이유로 말이다.


더구나 개인적인 결단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치명적이다. 변하고 싶지 않아도 세상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고 할까? 전면적 경쟁사회에서는 일신우일신 가열찬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것, 어제와 똑같은 오늘, 그 자체가 죄악이며 도태이며 패배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원하는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살아남기 위해서도 현기증 나는 변화 속도에 내 몸을 맞출 수밖에 없다. 그도 아니라면 바닥까지 추락하든가.


도대체 누가 이 상황을 원하는 것일까? 끊임없이 자기 혁신의 깃발을 펄럭이며 전체의 부를

소수의 손에 몰아주는 살벌한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계를 누가 지탱하고 있는가? 20세기 혁명 기획이 실패 혹은 불충분으로 드러난 현실, 그럼에도 이 세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 싫은 수많은 개인들은 어떤 선택이 가능한가?


대단히 이기적이지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조용히 빠져나가고 싶다. 강력한 체제는 전체의 전복을 허용하지 않지만 특정 소수의 성공과 탈출을 모두 허용함으로써 그 유연성과 생명력을 유지한다. 성공한 특정 소수가 될 수 있다는 현실적 환상의 힘이 우리의 전투력을 끌어내듯이 탈출의 특정 소수가 되어서라도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결국 누군가 내 자리를 대신할 뿐 이 체제의 견고함에 손톱만큼의 파열도 낼 수 없을지라도 말이다. 그만큼 현재의 삶은 너무 피곤하고 너무 가파르고 너무 숨이 차고 욕망이 차고 넘쳐 너무 번들거린다.


하늘에 턱이 닿도록 쌓아올린다 해도 이 숨막힘은 아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깎아 내리는 것, 비우는 것, 줄이는 것, 버리는 것에 오히려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도 샛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볼 일이다. 나의 탈출구는 어디에 있나 유심히 살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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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필요한 것은 브레이크인가? 가속인가? | 소소한 잡담들 2007-05-22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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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당 있는 집, 흙을 밟고 좀 욕심을 내면 텃밭이라도 일구는 여유, 바로 코앞에서 숨 막히게 압박하는 담벼락을 벗어난 확 트인 시야, 오전에는 노동을 하고 오후에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삶의 전면적 통일성을 많은 사람들이 꿈꾸듯 나도 갈망한다. 문제는 그 꿈이 언제고 유예된다는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하지만 언젠가는.....


과연 그 때가 언제일까? 오긴 하는 걸까? 그저 현실의 팍팍함을 위무하는 달콤한 환상은 아닌지 자문하곤 한다. 내 발목을 잡는 많은 것들의 핵심, 그 원초적 불안은 결국 돈일 것이다. 필수불가결한 불안만으로도 벅차거늘 현실은 불안을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한다.


2. 막연한, 정체가 불분명한 미래는 그 자체로 위협이다. 언제까지고 계속 대비해야 할 것 같은, 아무리 준비해도 여전히 부족한 불안감에 저당 잡힌 현실이 나를 짓누른다. 이만하면 되었다는 한계 없음이야말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강화시킨다.


백만원을 벌다 이백만원을 벌게 되면 삶이 좀 나아질까? 시간에 쫓기지 않고 여유와 품위를 갖출 수 있을까? 내 경험은 그리 간단하게 정비례가 성립하지는 않는다고 가르친다. 수입이 늘면 그만큼 욕망이 늘고 따라서 지출도 는다. 달성된 목표는 그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중간 역에 불과하다. 전세를 살 때면 내 집만 사면 만사 오케이일줄 알지만 집을 사면 이제는 평수가 중요해진다. 목표는 늘 상향조정되고 우리의 시선은 행복한, 그러나 너무도 애매한 그 미래에 고정된다. (수입의 증대 자체가 언제나 초과지출의 아슬아슬한 경계에 걸쳐있다는 사실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과장 진급은 늘어난 수입보다 약간 상회하는 지출의 증가를 동시에 가져온다. 결과적으로 수입이 늘어도 우리의 빡빡한 일상의 무게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언제나 2% 부족한 상태, 새록새록 움트는 욕망들, 밑 빠진 독에 들이붓는 물처럼 채워지지 않는 허기. 출발은 수단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끝없는 증식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렸다. 주객이 전도되었다고 할까? 


한 달로 끊어서 관리되는 시간, 그것은 돈의 들고남의 규칙성과 일치한다. 내 한 달의 시간은 나에게 무엇이었는가? 어떤 무게로 어떤 감촉을 남겼는가? 벌어들인 돈의 묵직함이야말로 구체적 현실적 생생한 기억인 것이다.

   

3. 가공할 적과 맞선 절대적 생존의 갈림길, 나의 무기는 내 한 몸뿐, 누구도 나의 편이 아니다. 물리쳐야 할 적들에 둘러싸인 외로운 세계. 맞물려 있는 현실과 이미지는 서로를 강화시킨다. 현실은 이미지를, 이미지는 다시 현실을 증폭시키면서 전력질주만이 살 길임을, 멈추는 순간 죽음임을 부추긴다.


더 이상 세련되게 미화시키지도 않은 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약육강식의 살벌한 전쟁터에서 나의 편은 어디에 있는가? 내 한 몸 기대고 마음의 위로를 받을 곳 어디인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나는 헐벗은 채 싸워야 하는가? 모두 다 외롭고 지치고 내 편이 필요하다. 가족이 반짝이는 별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렇게 우리는 잘게 나누어진다.


4. 내 편이라는 이름의 가족을 제외하면 만인이 만인에게 늑대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에서 우리의 위험대비 비용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국가의 허약하기 짝이 없는 사회보장시스템에 기댈 수도 없고, 타인에게는 더더욱 의지할 수 없다.


내가 쓰러지면 그걸로 끝인 비정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국 더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된다. 아무리 대비해도 부족한 것이다. 각종 보험과 저금, 투자 이것들만이 나의 방패요 안전판이 될 수 있다.  


5. 설령 현재 내 삶에 약간의 안락과 여유가 허락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유동적이다. 하루의 안위 이상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현실 (현실적이든, 잠재적이든) 그 자체가 내 삶을 일차적으로 규정한다. 발 딛고 선 토대 자체가 출렁거리는데 별 수 있겠는가?


현실화된 위험보다 더 막강한 것은 의식에 깊이 뿌리내린 항상적 불안감이다. 이제 현실을 통해 불안감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감의 렌즈를 통해 현실을 진단한다. 위기는 항상적이고 우리의 불안은 끝이 없다. 게다가 혼자 감당해야 하는 외로움까지. 


6. 지금 필요한 것은 브레이크인가? 가속인가? 결코 개인적인 시야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속으로 질주하는 고속도로에서 천천히 달리는 자동차는 분명 민폐다. 온갖 구박과 질책을 한 몸에 받을 것이며 결국 고속도로에서 퇴출될 것이다.


결국 내 삶의 속도를 내 맘대로 결정할 자유가, 용기가 있는가? 고속도로를 벗어나 느긋하게 국도를 달리는 삶이 현실적으로 가능해야 선택의 자유가 성립될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이 고속도로로 달려가도 초연히 국도를 선택할 수 있을 때 용기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나는 고속도로를 가능한 천천히 달리면서 국도를 훔쳐보고 있다. 고속도로에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더 뿌려야 가뿐하고 산뜻하게 국도로 옮겨갈 수 있을까 잔머리 굴리기 바쁘다. 그런데 과연 이게 가능한 꿈이기는 한 걸까? 자연스런 전이는 환상이고 필요한 건 단절이라고 누군가 내게 자꾸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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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과 특수의 공범관계.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나? | 기본 카테고리 2007-05-14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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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국민주의의 포이에시스

사까이 나오끼 저/이규수 역/이연숙 대담
창비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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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읽기 만만치 않고 그럭저럭 큰 테두리는 이해했으나 다시 풀어쓰기는 쉽지 않다. 이렇게 정리하면 될까나? 특히 현상학, 언어학, 기호학 등과 친하지 않은 나로서는(그렇다고 유달리 친한 뭐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분위기 적응이 그리 간단치 않다.


당연하다고 가정되는 전제들에 대한 집요하고 세심하고 꼼꼼한 추적, 명확성, 산뜻함과는 거리가 먼 다의적이고 불분명해 보이는 결론, 변화된 지형에서 다시 물어지는 질문 등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2. 서양이 차별적 구조를 갖고 구축되었다는 점을 인식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아시아인으로서 말할 수 있을까? 결국 저자의 문제의식은 이것이다.


서양의 자기정체성 확립 과정에서 외재성, 낯설음의 타자적, 대립적 존재로 강제 규정된, 아시아란 용어의 성립은(똑같은 논리가 서양에서 배제된 그 밖의 모든 지역에 적용될 수 있다. 남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아시아를 소리 높여 외칠수록 결국 서양을 이야기할 뿐이라는 모순을 발생시킨다. 이 지점에서 주체의 문제가 겹쳐진다. 아시아의 정체성이 주체에 기반하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진정한 주체의 성립인가? 주체 해체인가? 


결국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아닌가 싶다. 서구의 근대화가 보편성으로 해석되는 한 서구 그 밖의 모든 지역은 특수성의 범주로 묶일 수밖에 없다. 제 3세계 근대화 담론은 서구의 보편성에 근거한 자국의 특수성 탐구, 이를 통한 보편성 내지는 근대화의 달성을 그 목표로 설정했다. 근대의 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이 일각에서 대두되고 있지만 여전히 보편성과 특수성의 테두리 안에서 현실을 분석하고 목표를 지향하는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차이는 이런 것이다. 보다 정치한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 설정을 목표로 하느냐, 한 발 더 나아가 보편성과 특수성의 범주 자체를 폐기하느냐의 문제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폐기에 무게를 둔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공범관계, 구체적으로 미국의 보편주의와 일본 천황제라는 특수성의 상호의존성 분석을 통해 보편과 특수가 분리될 수 없는 세트라는 것, 결국 이항 대립적 구도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시아의 근대란 밖으로 서양에 저항하고 안으로 반동적인 유제를 극복하여 서양 근대의 정수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 다시 말해 서양의 침략과 자신의 과거를 부정함으로써 스스로를 근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p 52)


하지만 출발부터 모방일 수밖에 없었던 근대화, 아직 달성되지 못한 근대화로 허덕이는 후발주자들의 고민, 전략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과도한 특수성 강조와 보편성 맥락의 결여라는 비판의식을 통해, 세계 체제적 관점과 식민지 일반에 근거한 경험 분석을 시도하려는 우리의 경우, 이 논의는 어떤 문제의식을 던져주는가?


보편성과 특수성의 올바른 관계 정립과 그 자체의 폐기는 당분간 공존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의 논의를 앞지르는 학문적 성과에 언제나 끌려 다니는 것은 아닌지, 민족 문제가, 그렇고 근대화의 문제가 그렇고, 특수성의 문제가 그렇다.  


저자는 성급히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보편과 특수의 관계를 통해 근대 인식체제의 본질을 드러내는 일에 집중한다. 결코 가치중립적일 수 없는 언어, 근대성의 가장 강력한 표상인 언어를 통해 근대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애매모호하고 다의적이고 불분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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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성거리를 걸어보자 | 기본 카테고리 2007-05-13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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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모던뽀이, 경성을 거닐다

신명직 저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 2003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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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 책은 안석영의 만문만화 분석을 통해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 한국 근대 풍경을 읽어낸다. 만화가 풍자성과 비판의식으로 금지처분을 당한 후 그 공백을 메꾼 표현매체가 바로 만문만화며 그 특징은 한 컷짜리 만화와 짧은 줄글의 결합이다.

 

2. 무엇보다 눈에 띠는 것은 근대의 이중성이다. 갓 쓰고 구두신고, 양장하고 고무신 신고, 도포자락 휘날리며 게다 신은 사람들의 풍경, 조선인이 주로 거주하던 빈곤한 북촌과 일본인 중심지역인 화려한 남촌으로 분리된 경성, 전차와 아스팔트와 질서와 청결과 풍요의 환상과 발목을 붙들어 매는 현실의 곤궁함의 강렬한 대비, 저자의 말처럼 화려하지만 뿌리 없는 꽃과 같은 허망함과 절망감. 


3. 근대적 주체로서 전면에 등장하는 모던보이와 모던걸. 하지만 이들을 바라보는 안석영의시선은 흔들린다.  노출패션에 대한 거부감과 육체적 해방이라는 긍정성을 동시에 내포한 근대의 평가는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근대문물을 향유할 수 있는 계층의 협소함으로 모던보이, 모던걸과 지식인은 상당 부분 겹쳐진다. 머리의 급진성을 따라잡을 수 없는 현실의 전근대성과 궁핍함은 특히 여성 지식인에게 엄청난 압박이었을 것이다. 경제적 독립이 원천 봉쇄된 사회에서 여성에게 어떤 근대화가 가능하겠는가? 다양한 형태의 기생성으로 연명할 수밖에 없는 삶의 비루함, 게다가 고루한 남성주의 시각의 가세는 그들을 더욱 힘들게 했을 것이다.


이상은 높고 자유와 속도와 발전을 향해 꿈은 날아가지만, (아마도 개인적 독립과, 취향의 세련화, 즉 서구화와 높은 이층집과 아기자기 행복한 가족 등의 꿈) 고급인력 절대 다수의 실업이라는 암울한 상황에서, 적극적 친일과 거리를 두지만 비밀결사의 독립운동에 가담하지는 않았던 그 많은 지식인들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을까? 가난에 허덕이다 고물상에서 구입한 중고양복을 입고 커피 한 잔으로 카페문화에 흠뻑 취하는 가끔의 외출로 근대적 욕구를 채웠는지도 모른다.


더구나 이 시기 일본의 식민지 통치는 효율성과 안정성에서 단연 독보적이었으며 조선 독립은 너무도 요원한 꿈이었을 것이다. 


4. 오늘날 우리의 병폐 중 상당수가 이 시기에 벌써 보이기 시작한다. 근대화란 곧 서구 문명, 백인의 문화라는 인식, 성과 결혼의 상품화, 근대적이라는 미명아래 서구 유행의 맹목적 추종, 그 결과 동일한 패턴의 거리잠식 등등. 안석영의 풍자 솜씨도 놀랍거니와 그 문구를 지금 그대로 써도 시대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동일한 구석이 많다.


5. 일본의 주도아래 단행된 근대화, 직접 수입이 아니라 일본을 거쳐 수용된 서구 문화, 지배자 일본에 대한 분노와 정비례하여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 본 서구 문명에 대한 턱없는 갈망, 모던보이와 모던걸을 압도했을 수많은 전근대 농민들과 근대적 주체로 막 성장하기 시작한, 그러나 결코 주력으로 나서지 못했던 노동자 계급, 잔재가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근대와 공생했던 전근대, 이것이 식민지 근대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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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것을 의심하라. 만들어진 괴물 국민, 민족 | 기본 카테고리 2007-05-13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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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국민이라는 괴물

니시카와 나가오 저/윤대석 역
소명출판 | 200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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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평안북도 강계출생, ‘만약 유.소년기를 보낸 장소를 고향이라고 부른다면 저의 고향은 틀림없이 조선입니다’는 작가의 이력이 눈길을 끈다. 더불어 ‘제 자신의 전쟁 체험과 전후 체험의 일체, 즉 지금까지의 전 생애와 그 전 생애를 좌우했던 것에 대한 반성과 분노에서 나온 통한의 담론’이라는 저자의 고백 은 비장하기까지 하다.


이 책의 주장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근대, 국가, 국민 비판이다. 근대에 대한 비판은 다각도에서 진행되고 있다. 근대의 철학적 토대인 주체에 대해, 인식과 판단의 기초로서 사유하는 존재, 자명하고 통일적인 주체가 과연 진실인가? 라는 의심을 거쳐 그 특성은 자기와 타자의 구별과 배제, 동일화의 포섭논리라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산업화의 요구에 따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따라서 의도적이고 만들어진 국가, 민족, 국민의 개념 역시 동일한 특성을 공유한다. 공간, 시간, 습속, 신체, 언어와 사고의 통합을 통해 근대 국민이 탄생되는 것이다. 국어, 애국심, 국문학, 복장, 인사, 노동, 호적, 근대공원, 대중문화, 여가, 분, 초를 다투는 시간 감각, 익명의 풍경, 국기, 국가, 경찰 등이 근대를 분석하는 핵심 소재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더구나 자본주의는 출발부터 세계체제로서 작동했다는 세계체제론과 결합하면 국민국가의 폐해는 현 체제 안에서 해결 방법을 찾을 수가 없다. 요즘의 대세, 세계화를 보고 있자면 이 논리는 더욱 설득력이 있다. 제국주의적 민족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제 3세계 식민지 국가의 저항적 민족주의마저 현실에서 유사 파시즘의 형태로 귀결(우리로 말하자면 박정희식의 국가주도 경제개발이 여기에 해당될 터이다.)되고 마는 비극적 결말 역시 국민국가 체제의 한계에 기인한다. 결국 한정된 의자 뺏기 싸움이 반복될 뿐인 것이다. (일본 역시 저항적 민족주의에서 출발했으나 결국 확대적, 침략적 민족주의로 전환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에 일순 당혹한다. 아니 일본이 언제 저항적 민족주의였단 말인가? 시간이 흐르지 않는, 언제나 일제 식민지 기억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교점인 나의 일본관이 새삼 드러나는 순간이다.)


국민국가, 민족이란 단어의 배후에는 동일성, 편 가르기, 순수성, 기원 등의 광폭한 열망이 어른거린다. 그런 의미에서 잡종, 하이브리드, 혼혈, 경계 허물기, 다민족, 다문화, 다언어에서 근대를, 국민국가를 넘어서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화의 상충된 이중성 역시 이런 측면을 강화시킨다.


문명과 문화, 국민과 민족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결합했는가? 작가의 참신한 설명이 돋보인다. 문명, 문화, 근대, 민족, 국민이란 단어가 언제, 어떤 경로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형식으로 수용되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용어는 서구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한자를 조합하여 중국, 한국, 대만 등으로 수출되었다. 특히 민족이란 단어는 고유한 한자어가 아니며 일본이 만들어 낸 신조어이다. 


우리의 민족주의는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지금 우리에게 자명한 단군의 자손, 한민족 한겨레라는 민족의식은 필시 개화기와 식민지 시대를 통해 만들어졌을 것이다. 또한 한글의 강조와 국문학의 탄생, 애국적 역사서의 저술, 근대교육 등 민족주의 이름으로 실행된 근대화 프로젝트, 국민의 형성과정은 어떤 경로를 거쳤는가? 보다 넓고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시 물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여전히 저항적이고 진보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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