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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골든아워 #03 가벼운 사랑싸움이라는 말에 구역질이 났다 | 살아가는 힘이 되는 책 2018-10-17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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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아워』

 

생과 사의 경계, 중증외상센터의 기록
: 남과 여

 


 

 

 

혼절한 채 누워 있던 여자는 창백했다. 응급실에서 연락을 해왔을 때, 가정폭력으로 보인다고 했다. 환자의 발치에 한 남자가 잔뜩 웅크린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그가 보호자라 짐작했다.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 기척을 했지만 남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미동 없는 검은 뒤통수를 쏘아보았다. 침대 위 여자의 의식은 혼미했다. 옹송그린 남자의 등을 흔들었다.

보호자분, 정신 차리고 묻는 말에 답해주세요.
 
남자는 일그러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굵은 손톱자국으로 난 상처가 피부 위로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여자가 낸 절박한 저항의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내 눈길을 피했다. 얼굴 위 붉은 줄이 내 시야 밖으로 벗어났다.
 
자기 발에 걸려 넘어졌어요.
 
남자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갈 듯 작았다. 나는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손상기전을 수없이 들어왔다. 외과 의사 초년 시절에는 보호자라 말하는 남자들이 뱉는 말을 믿었다. 그 말을 손상기전으로 분석해 수술을 시작했다가 전혀 다른 문제를 발견하곤 했다. 무언가에 맞고 찔려 망가진 환자의 장기를 수술하며, 그런 말 같지 않은 말을 더는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침대 위의 여자 몸에서 굵은 상처 자국이 꿈틀거렸다. 손에도 아문 지 오래된 상처 자국이 있었다. 나는 상처에 관하여 묻지 않았다.

 

 

 

 

들고 있던 차트를 펼쳤다. 응급의학과 의사들이 이미 CT촬영을 마친 후였다. 결과를 확인했을 때 이미 쇼크 상태인 환자의 내부 장기는 파열돼 출혈이 심했다. 남자의 거짓말을 일일이 짚을 시간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는 일이다. 급히 기관삽관을 하고 마취과에 도움을 청했다. 항생제 반응 검사와 수술에 필요한 기본 검사를 했다. 가해자가 분명할 남자에게 수술 동의서를 받았다. 욕지기가 치솟았다. 남자는 여자의 생명에 지장이 있는지 반복적으로 물었다. 그의 불안이 환자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아니면 형사적 책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니었다.
    

환자를 수술방으로 올리고 갱의실에서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수술방 앞에서 소독약이 묻은 솔로 손끝과 손가락 사이사이를 문질렀다. 머릿속에 드는 생각들도 비벼 뭉개보려 애썼다. 드물지 않은 일이고 내가 개입할 문제도 아니다. 책임을 피하려는 치졸함이 아니라 경험에 의한 결론이었다.
   

연인이 연인을 칼로 찔렀고 부모가 자식을 밟아댔다. 자식의 주먹질에 부모가 쓰러졌고 손자의 발길질에 노인이 의식을 잃었다.

   
환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작은 대부분 경미했다. 밀어젖히다 가볍게 주먹을 휘둘렀고, 그것이 심각한 구타로 이어졌다. 폭력은 그렇게 깊어지며 번져나갔다. 밖에서 일어나는 주먹다짐과 칼부림이 집 안에서도 빈번했으나 피해자들은 대개 침묵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그들은 상대를 벌하지 않았고, 생계가 상대에 달려 있어 벌하지 못했다.
 
마음이 닳아빠진 이후로 나는 웬만하면 이런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컨베이어 벨트에 서서 나사를 조이듯 환자가 죽지 않도록 수술만 했다. 시급하고 중요하게 처리해야 하는 의료적인 일들이 쌓였고, 타인의 삶에 깊이 관여하기에는 일상이 너무 피곤했다. 손끝에서 소독약을 헹궈내며, 나는 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며칠 후 여자가 깨어나고 사고 경위는 뒤바뀌었다. 처음에 남자에게 맞았다고 했던 여자는 문고리에 배를 부딪혔다고 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의사로서 해야 할 말만 전했다. 사고 경위는 여자의 실수인 것으로 하여 사건은 종결되었고, 여자는 잘 회복해 퇴원했다.
 
여자가 남자 없이 혼자 외래 진료를 받으러 왔던 날 나는 실제 사고 원인을 물었다. 여자의 대답은 같았다. 대부분의 경우 그랬다. 나는 다시 물었다.
 
저는 경찰이 아닙니다. 그러니 제게 말씀하셔도 법적구속력이 없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사실 치료가 잘 되었으니 제가 더 관여할 부분도 아닙니다. 하지만 환자분 같은 상황을 너무 많이 봐왔습니다. 혹시라도 도와드릴 부분이 있나 해서 그렇습니다.
 
여자는 말을 할 듯 말 듯 하며 망설였다. 이 또한 예상했던 바였다.
 
저는 정말로 이 일을 문제 삼지 않을 겁니다. 이미 의료보험도 잘 받으실 수 있게 처리되었습니다.
 
맞아서 생긴 사고로 치료받는 경우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진료비를 보조해주지 않는다. 가정폭력에 대한 사실을 숨기다 보험 처리가 확인되고 나면 대부분 구체적인 경위를 털어놓는다. 여자 또한 같았다.
 
— ……생각하시는 게 맞아요. 제가 배운 것도 딱히 없고 애들도 아직 어려서 아빠가 필요해요. 이걸 문제 삼으면 이혼해야 하는데, 막상 이혼하면 먹고사는 것도 막막하고……. 가정을 지키고 싶어요.
 
비교적 정교한 오차범위 안에 들어 있던 여느 답들과 다름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여자들로부터 듣는 사고 경위는 대략 이러했다. 지나가던 남자가, 처음 만난 남자가, 연인이나 남편이 술을 마시고 때리고, 제정신으로 칼로 찔렀다. 여자를 잡아 던지고 가구를 들어 여자에게 던졌다. 가구 모서리는 여자의 약한 몸을 짓이기고 들어가 내부 장기를 찍어내며 터뜨렸다. 그럴 때 오로지 제일 질긴 신체 조직인 피부만이 온전히 붙어 있다. 폭력의 강도는 점차 세졌으나, 서서히 끓어가는 물 온도에 익숙해져 죽는 줄도 모르고 죽는 개구리처럼, 여자들은 앞으로 더 맞고 살이 썰려 나갈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가벼운 사랑싸움이라는 말에 구역질이 났다. 십중팔구는 점차 더 심하게 맞겠지만 당사자는 그것을 짐작조차 못해 유감이었다. 그러면서도 함께 사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인내를 높이 볼 수도 없었다. 그런 문제들에 고작 의사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지에 선 말단 노동자로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내 업의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일 뿐이었다.

 

 

 


 

 

 

 

 

 

골든아워 1

이국종 저
흐름출판 | 2018년 10월

 

골든아워 2

이국종 저
흐름출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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