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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4. 콜레라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구인가? | 세균에 사람 있다 2022-07-25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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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누구인가?

 

로날트 D. 게르슈테의 질병이 바꾼 세계의 역사에서는 콜레라균과 관련하여 “1883, 콜레라의 정체가 당대 최고 세균학자의 현미경을 통해 드디어 밝혀졌다.”고 쓰고 있다. 여기서 당대 최고 세균학자는 다름 아닌 로베르트 코흐이다. 그밖에도 아노 카렌의 전염병의 문화사나 윌리엄 맥닐의 전염병의 세계사등에서도 콜레라균의 발견자는 코흐로 기술되어 있다. 이미 코흐는 1876년 탄저균(Bacillus anthracis)의 정체를 밝혀내고 1882년에는 결핵균(Mycobacterium tuberculosis)을 발견해서 명성이 하늘을 찌르던 과학자였다. 코흐는 이집트에서 콜레라가 발병했을 때 독일과 프랑스가 모처럼 힘을 합쳐 파견한 연구팀의 책임자였다. 연구팀이 이집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콜레라가 잠잠해진 후라 콜레라를 찾아 인도로 갔다(이집트에서 콜레라균을 찾아냈다고 기술한 책들도 꽤 있다. 아노 카렌의 전염병의 문화사나 윌리엄 맥닐의 전염병의 세계사등과 같은 권위 있는 책들도 그렇다). 코흐는 인도 캘커타에서 콜레라로 사망한 환자의 시신을 부검하여 끝부분이 쉼표처럼 약간 구부러진 균, 콤마균(comma bacteria)’을 발견했다. 콜레라균의 발견이었다. 그렇게 콜레라균의 발견은 코흐의 업적 중 하나로 기술되고 있고, 그렇게만 알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어떤 기록들은 다른 사람의 이름을 언급한다. 바로 이탈리아의 해부학자인 필리포 파치니(Filippo Pacini, 1812-1883)이다. 파치니의 삶은 스노의 삶과 매우 유사하다고 평가받는다. 둘 다 의사였고, 의사로서 남긴 업적도 있었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둘 다 콜레라와 연관되어 있다.

 

파치니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의 도시인 피스토이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신부가 되길 원했으나 결국은 의사로서의 삶을 살았다. 삼십 대 중반이 이미 피렌체 대학 해부학과장이 되었고 그의 경력 내내 그 지위를 유지했다. 특히 그의 특기는 현미경 관찰이었다.

 

그의 초기 업적으로 대표적인 것은 그의 이름을 딴 파치니소체(Pacinian corpuscles) 발견이다. 지각 신경의 말단 장치에서 피부 깊숙이 존재하면서 강한 압력과 빠른 진동을 감지하는 구조인데, 특히 손바닥이나 발바닥에 많이 존재한다.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그가 익숙하게 사용했던 현미경으로 찾아내고 기술했다. 1835년에 이미 이를 발표했는데, 토스카나 대공은 파치니가 사용할 수 있도록 피렌치 대학에 더 훌륭한 현미경을 기증하기도 했다.

 

1864년 피렌체에 콜레라가 유행했다. 1846년부터 1863년에 이르는 세 번째 콜레라 팬데믹의 영향이었다. 파치니는 의사로서 콜레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콜레라로 사망 환자의 시신을 부검하고 자신의 특기인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그는 특히 장 점막을 면밀하게 조사했는데, 바로 그곳에서 쉼표 모양의 세균 찾아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세균에 Vibrio라고 명명했다. ‘Vibrate’, 즉 흔들린다는 뜻으로 운동성이 많은 세균이라 이런 이름을 붙였다. 1854년에 자신이 발견한 세균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의 연구는 과학자 집단에서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존 스노도 자신이 죽기 4년 전에 발표된 이 논문을 몰랐던 것으로 보이고, 30년 후의 코흐 역시 이 논문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파치니는 이후에도 콜레라에 대한 논문을 여러 편 발표한다. 그는 세균에 의해서 장 점막이 파괴되어 유체 전해질이 대량으로 빠져나가면서 치명적인 상태가 된다고 하여 아콜레라라는 질병에 대해 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또한 환자들에게 소금물을 많이 마실 것을 권고했다. 현재의 처방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그는 파스퇴르와 코흐 이전부터 세균병인론의 굳건한 옹호자였고, 그래서 콜레라가 전염성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미아즈마(miasma) 이론을 옹호하는 이탈리아 의사들과 대립했고, 그래서 더더욱 그의 콜레라 발견은 잊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존 스노와 유사한 삶을 살았다고 했는데, 둘다 평생 결혼하지 않고 지낸 것도 포함할 수 있을 것 같다. 파치니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아픈 여동생들을 치료하는 데와 함께 과학 연구에 쓰고 거의 무일푼의 상태로 1883년 사망했다.

 

죽을 때까지 파치니가 콜레라균을 발견했다는 업적은 인정받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해에 코흐가 콜레라균을 ()발견했고, 콜레라균 발견의 업적과 명성은 오롯이 코흐에게 향해 있었다. 하지만 1965년 국제명명위원회는 콜레라균의 정확한 이명법 명칭을 Vibrio cholerae Pacini 1854”로 확인하면서 파치니의 업적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2003년에는 고메즈-길 등이 그의 이름을 기려 Vibrio pacinii라는 세균 이름을 만들었다. 위대한 업적은 언젠가 인정받는다.

 


필리포 파치니

 


파치니가 제작하여 콜레라균을 관찰한 현미경 슬라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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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3. 존 스노와 감염 지도 | 세균에 사람 있다 2022-07-25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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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노와 감염 지도

 

1854년 영국은 세 번째 콜레라 팬데믹으로 많은 사람이 고통받고 있었다. 영국은 이미 1831년부터 콜레라라 상륙한 지역이었다. 세 번째 팬데믹 와중에도 사람들은 콜레라의 원인을 잘 몰랐다. 전파되는 양상을 보았을 때 전염성이 있다는 게 명백해 보였지만 확실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몸속에 탄소가 과다하게 축적되어 생긴다고 생각하여 침실 문을 열어놓고 자거나, 담배나 대마초를 피우고, 야채, 샐러드, 피클 등을 피하거나 하는 치료법들이 제안되기도 했다. 그런데 1854년에 영국의 의사 존 스노(John Snow, 1813?1858)가 콜레라에 관한 혁신적인 견해를 내놓고, 또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존 스노는 클로로포름이라는 마취제를 이용해 빅토리아 여왕의 출산을 돕는 등 당시에 의학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의사였다. 그는 세 번째 콜레라 팬데믹이 영국을 덮쳤을 때 런던 남부의 발병 양상을 면밀하게 추적했다. 런던은 두 군데의 상수도 회사로부터 탬스 강의 물을 공급받고 있었지만, 1848년의 콜레라 발생 이후에 한 회사는 다른 지역의 물을 끌어와서 공급하고 있었다. 스노가 조사한 결과 1848년과는 달리 식수원을 바꾼 회사의 물을 마신 이들이 사망률이 8~9배 가량이나 낮았다. 그는 콜레라가 물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스노가 그 다음으로 주목한 지역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런던의 웨스트엔드였다. 브로드 가()에 위치한 지역에서 사망자가 700명이 나오고 있었다. 스노는 목사인 헨리 화이트헤드의 도움을 받으며 브로드 가와 인근 지역의 현관문을 일일을 두드렸다. 각 집마다 사망자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물었고, 어디에서 오는 물을 마셨는지를 조사했다. 그리고 그것을 지도에다 꼼꼼히 표시했다. 사망자들은 대부분 브로드 가 중심에 식수를 공급하는 펌프를 이용하고 있었다. 브로드 가에서 멀리 떨어진 집에서도 사망 사례가 나왔는데, 조사해 봤더니 평판이 좋은 그 펌프에서 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던 집이었다. 그리고 450명이나 수용된 구빈원은 콜레라로 인한 사망자 수가 다른 지역보다 굉장히 적었는데 그곳은 자체적으로 이용하는 우물이 있었다. 그리고 한 양조장 역시 콜레라로 죽은 이가 없었는데, 이곳의 직원들은 밖에서 퍼온 물을 마시는 대신 양조장에서 만든 맥주를 마셨던 것이다. 존 스노는 확신을 갖고 당국에 펌프의 손잡이를 제거하고 사용을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런던 지역의 콜레라는 잦아들었다. 이후 존 스노의 펌프 손잡이는 뉴턴의 사과나 와트의 물주전자와 마찬가지로 과학사에서 전설이 되었다. (참고로 존 스노의 이름을 딴 세균도 있다. Snowella litoralis라는 세균인데, 1988년에 명명되었다.)

 

이후에도 아시아에서 발생한 콜레라가 유럽에까지 전파되는 팬데믹이 여러 차례 있었는데, 이 콜레라에 의해 희생된 유명인들도 많다. 철학자 헤겔, 군사이론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미국 11대 대통령 제임스 녹스 포크,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등이 그런 희생자들이다.

 

하수 시설과 깨끗한 식수를 제공하는 등 위생 시설이 정비되면서 선진국에서는 콜레라의 유행은 거의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도 위생 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거나 자연 재해나 전쟁 등으로 위생 상태가 악화된 경우 콜레라는 언제든지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 1961년 엘 토르(El Tor) 형이라고 하는 새로운 변종 콜레라가 인도네시아에서 비롯되어 방글라데시, 인도, 중동, 북아프리카를 거쳐 1973년에는 이탈리아까지 전파되었고,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아프리카에서 발생하여 수만 명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또한 2010년에는 지진 피해를 입은 아이티에 콜레라가 발병하여 70만 명이 넘는 환자가 생기고 9,000명 이상이 사망하는 비극이 초래되기도 했다. 아직도 콜레라는 우리 곁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존 스노

 


존 스노가 제작한 브로드 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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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2. 콜레라, 혹은 호열자 | 세균에 사람 있다 2022-07-25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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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혹은 호열자

 

콜레라가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괴질(怪疾)로 불렸다.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민간에서는 쥐통이라 불렀다. 이 질병은 발뒤꿈치 근육의 경련을 수반하는 증상을 보였는데, 사람들은 쥐에게 물려서 이런 병이 생긴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쥐통이라 부른 것이다.

 

장티푸스를 장질부사라고 불렀던 것처럼 콜레라도 부르던 명칭이 있다. 바로 호열자(虎列刺)’인데, 호랑이처럼 무섭다는 뜻도 있지만 이 질병에 대한 명칭이 일본을 거쳐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변형된 사연이 있는 말이다. 일본에서는 1822년 콜레라가 처음으로 유행했는데, 이후 콜레라를 음역해서 고레라(コレラ)’라고 했다. 그러다 1867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이를 한자로 쓰면서 호열랄(虎列剌)’이 공식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리고 1879년 조선에 이 말이 들어왔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이 호열랄이 호열자가 된 것이다. 신동원의 호환 마마 천연두에서 그 사정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에서는 한자 虎列剌을 조선어로 읽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을 거의 비슷한 글자인 ()’로 읽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전혀 들어보지 못한 신조어였기 때문에 어떻게 읽어야 할지 알 수 없었고, ‘보다는 가 조선인에게는 훨씬 익숙한 글자였으며,”

 

이는 당시 신문의 인쇄 상태도 한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 이후로 한반도에서 콜레라는 호열자라 불리게 되었다. 해방 이후의 신문에서도 호열자라는 명칭이 심심찮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꽤 오랫동안 사용된 셈이다.

 

대한제국 시기 정부와 의학교가 발행한 호열랄예방주의서’ - 이때까지는 ()’가 아니라 ()’로 적혀져 있다.

 

1946년 부산 일대 콜레라(호열자) 발생을 보도한 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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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1. 세계화와 함께 정체를 드러내다 | 세균에 사람 있다 2022-07-25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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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라, 세계화와 함께 정체를 드러내다

 

Vibrio pacinii라는 이름을 가진 세균이 있다. 2003년 새우 유충, 농어, 대서양 연어 등 해양 생물에서 분리된 세균 균주들에 대해서 고메즈-(Bruno Gomez-Gil) 등이 연구해서 붙인 이름이다. Vibrio라는 잘 알려진 속명에 이은 종소명 pacinnii는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필리포 파치니(Filippo Pacini, 1812-1883)의 이름을 기린 것이었다. 필리포 파치니는 바로 1854년 콜레라의 원인균을 찾아내 Vibrio cholerae라는 이름을 붙인 과학자이다. 콜레라에 관해서는 코흐의 연구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 30년 전에 이미 이를 연구하고 이름까지 붙인 과학자가 있었던 것이다.

 

라틴어에서 온 말로 지나친 설사를 뜻하는 콜레라(cholera)는 오랫동안 인도의 갠지스 강 하류 벵갈 지역에 국한된 풍토병이었다. 이 질병이 인도 밖으로 나와 전 세계로 퍼지게 된 것은 이른바 서양의 선박들이 세계 곳곳을 누비며 무역과 함께 점령을 일삼던 대항해 시대라 불리는 시기의 부산물이었다. 부산물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만.

 

1800년대 초 영국이 인도에 교역로를 개척하고 군대를 파견하면서 콜레라는 인도를 빠져나와 전 세계 교역로를 따라 전파되기 시작했다. 1817년 인도에서 발생하여 1824년까지 지속된 첫 번째 콜레라 팬데믹은 네팔, 아프가니스탄, 이란, 이라크, 오만, 태국, 미얀마, 중국, 일본, 아마도 우리나라까지 마수를 뻗쳤다. 당시 유럽은 신문 등을 통해 아시아의 비극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에게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은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콜레라가 유럽에는 상륙하기가 쉽지 않았다. 콜레라는 배를 통해서 순식간에 유럽에 상륙한 페스트와는 양상이 달랐다. 콜레라는 잠복기가 길어야 사흘에 불과했기에 아시아에서 콜레라에 걸린 선원이나 승객이 배를 타고 유럽으로 간다고 한다면 이미 배 안에서 그 중상이 나타났을 것이고, 당시 방역 체계로도 그 정도는 막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방어선은 금방 무너졌다. 1826년 인도에서 시작된 두 번째 팬데믹은 세계 곳곳의 전장을 누비던 군인들에 의해 첫 번째 팬데믹보다 훨씬 빨리 확산되었다.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이집트의 카이로와 알렉산드리아를 집어삼키고,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거쳐 폴란드, 불가리아, 라트비아, 독일로 번져나갔다. 당시 독일 베를린의 인구가 24만 명 안팎이었는데, 그중 2,250명이 콜레라에 감염되고 1,417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2,200명이 콜레라로 목숨을 잃었다. 1831년에는 영국에까지 전파되었고, 이듬해에는 아일랜드까지 건너갔다. 그리고 아일랜드 이주민들은 이 전염병을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져갔다.

 

19세기 말까지 콜레라 팬데믹은 여섯 차례나 전 세계를 휩쓸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일곱 번째, 1993년 경 여덟 번째 팬데믹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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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마법 탄환 - 에를리히와 에를리키아 3. 파울 에를리히와 마법 탄환 | 세균에 사람 있다 2022-07-20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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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에를리히와 마법 탄환

 

에를리히는 병원균이나 암세포를 파괴하기 위하여 화학 물질을 사용한 최초의 과학자이기도 하다. 바로 화학요법(chemotherapy)’라고 불리는 치료법이다. 노벨상을 수상한 후에는 급격히 연구력이 떨어지는 요새의 과학자들과는 달리(사실 노벨상의 업적을 낸 후 너무 오래 있다 노벨상을 받기는 한다) 에를리히는 노벨상 수상 바로 다음 해에 최초의 자우버쿠겔(Zauberkugel), 마법 탄환(magic bullet)’을 만들어냈다(모든 질병을 한 방에 없애준다는 의미의 마법 탄환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사람도 에를리히였다).

 

에를리히가 마법 탄환, 혹은 화학요법의 대상으로 삼은 질병은 매독이었다. 매독은 트레포네마 팔리듐(Treponemma pallidum)이라는 세균에 의해 생기는 질병으로 성적 접촉에 의해 전염된다. 논란은 있지만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바에 따르면, 15세기 무렵 유럽에 전파되었고, 이후로 헨리 8세에서 작가인 오스카 와일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을 괴롭히며 악명을 떨쳤다. 매독에 걸리면 아픈 것뿐만 아니라 몰골이 흉해져 더욱 괴로운 질병이었으며, 미치게 하다 결국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살바르산이 나오기 전까지 매독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는 독성을 지닌 수은이었는데, 수은은 매독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단지 병의 진행을 늦출 뿐이었고 부작용도 심했다. 그래서 베누스(비너스)와의 하룻밤, 수은과의 한평생이라는 말도 나왔다. 에를리히는 비소(As) 성분에 기초해서 화학 물질을 합성해냈는데, 바로 살바르산(salvarsan)’이라고 하는 물질이었다. 처음에 이 물질에는 ‘606라는 번호가 붙여져 있었는데, 에를리히가 606번째 만들어 시험한 물질이라는 의미다. 최초의 실질적인 매독 치료제, 아니 감염에 대한 화학요법이었다.

 

그는 자신의 수용체 이론에 근거하여 특정 염료가 세포의 특정 성분에 결합해서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다면, 세균의 특정 성분에만 결합하는 물질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 물질이 결합한 부분을 파괴하거나 작용을 막는다면 세균을 죽일 수도 있을 것이라 주장하면서 염료로부터 각종 화학 물질을 만들어 시험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지금도 세포 염색약으로 널리 쓰이는 메틸렌블루를 이용해서 효과를 관찰했고, 어느 정도 가능성을 보기도 했다. 메틸렌블루에서 희망을 본 에를리히는 다른 염료를 찾아나섰다. 늘 염료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그에 대해 토머스 헤이거는 감염의 전장에서에서 파랑, 노랑, 빨강, 초록 손가락의 남자라고 하고 있다.

 

살바르산은 에를리히에게 노벨상 수상보다도 더 큰 명성을 안겨주었다. 매독이라는 질병으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으니 그럴 만도 했고, 이제 다른 감염질환도 정복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갖게 한 업적이었다. 그가 죽은 후이긴 하지만 1940년에는 그의 이야기를 다룬 <에를리히 박사와 마법 탄환>이라는 장편 영화가 만들어져 개봉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러 군데서 에를리히에 대한 비난도 있었다. 매독이라는 부도덕한질병으로부터 사람을 살려내는 게 마땅한가라는 비난도 있었고, 비소 자체가 원래 독약이기 때문에 그 독성 성분으로 생겨난 부작용을 에를리히에게 전가하는 경우도 있었다. 에를리히는 살바르산의 부작용으로 고생하고, 심지어 죽는 사람이 생기는 기록들을 모두 보관할 정도로 괴로워했다. 그는 결국 술독에 빠졌고 61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하고 만다.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묘지에 묻혔지만, 훗날 나치가 훼손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물질을 마법 탄환이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마법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조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사용법도 복잡했다. 그리고 다른 감염에는 듣지 않았다. 페니실린과 같은 항생제가 등장하면서 곧 무대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에를리히는 종종 성공을 위해서는 4개의 ‘G()’가 필요하다는 말을 했다. ‘4G’란 모두 독일어로 G로 시작하는 단어인 인내(Geduld)’, ‘기술(Geschick)’, ‘행운(Gluck)’, ‘(Geld)’를 의미한다. 그에게 살바르산 개발 성공의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7년의 불운, 잠깐의 행운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 행운의 전제는 인내와 기술이었음은 누구나 알고 있다. 물론 돈도 필요하다(폴 드 크루이프는 미생물 사냥꾼에서 에를리히가 살바르산 개발 당시 돈을 물 쓰듯이했다고 쓰고 있다. 그 돈은 독일의 제약회사 회히스트가 댔다).

 

에를리히는 꿈을 꾼 사람이었다. 질병을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약이 있다는 것을 믿었으며, 그것을 찾기 위해 강박적으로 일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얼토당토않은 몽상가는 아니었다. 탄탄한 토대를 지닌 아이디어가 있었으며, 정확히 관찰하고, 측정하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의 기법은 혁신적이었다.

 

파울 에를리히가 들어간 유로화 사용 이전 독일 지폐. 중간의 분자 구조는 살바르산의 모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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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마법 탄환 - 에를리히와 에를리키아 2. 파울 에를리히와 노벨상 | 세균에 사람 있다 2022-07-2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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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에를리히와 노벨상

 

파울 에를리히는 혈액학, 면역학, 약리학, 화학요법 등의 다양한 분야에서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긴 과학자다. 각 분야에서 생물학적인 원리를 정의했으며, 그 정의에 기초한 실질적인 의미와 의학적인 적용 가능성을 보여주어 이른바 중개 의학(translational medicine)의 창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아이디어 중에는 후대의 과학자들게 영감을 주어 새로운 발견을 이루도록 한 것이 적지 않았다. 그중 하나가 측쇄이론(side-chain theory)’인데, 그는 이 이론을 통해 세포에는 외부 분자와 결합하는 특정한 세포막의 구조가 존재한다고 제안했다. 이 이론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수용체-리간드 개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에를리히의 가장 큰 업적을 들라면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하나는 인체의 면역 반응을 설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원균을 죽이는 화학요법에 대한 공헌이다.

 

190854세이던 해에 에를리히는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에게 노벨상을 안겨 준 건 면역학에서의 업적이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는 물리학이 격변을 겪고 있듯 미생물학이 등장하고 있었고, 동시에 면역학의 기초가 세워지던 시기였다. 미생물학과 면역학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일례로 당시 면역학 발전을 선도하던 두 기관이 세균병인설을 확립한 파스퇴르와 코흐의 연구소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기관은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국가의 경쟁 관계 못지 않게 세균학은 물론 면역학에 관해서도 아주 적대적인 경쟁 관계였다.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대표적인 면역학자는 우리에겐 유산균 음료 때문에 잘 알려진 러시아 출신의 메치니코프였고, 코흐 연구소에서는 에를리히가 가장 대표 연구자라 할 수 있었다. 메치니코프는 식균 현상을 발견하여 현재 자연 면역, 혹은 세포성 면역이라고 부르는 것이 면역 반응이라고 주장했고, 에를리히는 항원-항체 반응, 즉 지금은 체액성 면역, 혹은 적응 면역이 면역 반응의 요체라고 봤다. 서로가 한치도 물러서지 않으며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증거를 찾는 것과 동시에 상대방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다. 루바 비칸스키는 메치니코프에 대한 평전 메치니코프와 면역에서 이렇게 논문 한 장 한 장에 적힌 글로 신랄한 평가가 오가는 전쟁터 같은 분위기 속에서, 면역학이라는 새로운 과학이 세상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라고 쓰고 있다.

 

아직은 면역의 구체적인 메커니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시대였다. 노벨상 위원회는 이처럼 중요한 주제이자, 또 계속 놀라운 논문이 나오는 분야에 대해서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하였으나 파스퇴르 연구소와 코흐 연구소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기가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노벨상 위원회는 묘안을 내는데, 메치니코프와 에를리히 둘에게 모두 노벨상을 수여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묘안이라기보다는 절충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묘안 내지는 절충은 결국은 옳은 결정이 되었다. 우리와 같은 척추동물의 면역 작용은 세포성 면역과 체액성 면역이 둘 다 작용하는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에를리히는 그렇게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되었다.

 

파울 에를리히는 1854년 베를린에서 남동부로 약 240 킬로미터 떨어진, 지금은 폴란드 영토가 된 작은 마을에서 여관을 운영하던 부유한 유대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여러 의대를 전전했는데, 당대의 보편적인 의과대학의 강의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은 탓이 컸다. 대신 인체 조직을 염색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의 사촌 카를 바이커트는 후에 병리학자가 되었는데, 인간과 동물의 조직을 염색하는 방법인 아닐린 염색법을 개발한 인물이었다. 에를리히도 자연히 염색법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는 사촌이 개발한 염색법을 발전시키게 되는데 바로 조직 표본에 있는 세포의 각 부분이 서로 달리 반응하여 서로 다른 농도를 나타내게 함으로써 윤곽을 뚜렷하게 만드는 방법인 선택 염색이라고 하는 기술이었다(이게 그의 박사 논문 주제였다). 당시 독일은 염료 산업이 매우 발달한 나라였다. 라인강을 따라서 많은 염료 공장들이 있었고, 그 염료 산업이 지금의 거대 화학기업이자 제약회사인 바이엘 같은 기업으로 발달했다. 그런 배경에서 염색법 연구가 활발했고, 그람 염색법 역시 에를리히의 염색법에 착안하여 개발된 것이었다.

 

그는 1891년 베를린의 코흐 연구소에 합류하여 코흐와 5년 동안 함께 연구했다. 코흐와 함께 결핵을 연구하는 도중 결핵에 걸려 이집트에서 2년간이나 요양해야만 했지만 다행히 회복됐고, 1896년 새로 만들어진 혈청연구소의 초대 소장이 되었으며, 1899년에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실험요법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그는 특정 미생물이 몸 안으로 들어왔을 때 환자의 몸에서 면역력이 생기는 원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였고, 면역 세포가 미생물과 외래 분자를 인식하는 원리를 규명함으로써 노벨상 수상의 영예를 얻을 수 있었다.

 

파울 에를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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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마법 탄환 - 에를리히와 에를리키아 1. 에를리키아, 주로 개에 감염되지만... | 세균에 사람 있다 2022-07-20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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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를리키아, 주로 개에 감염되지만...

 

에를리키아(Erhlichia)는 발진티푸스의 원인균인 리케차(Rickettsia), 쯔쯔가무시병을 일으키는 오리렌시아(Orientia), 아나플라즈마(Anaplasma) 등과 함께 리케차목(Rickettiales)에 속하는 세균이다. 이들 세균은 모두 세포 내에서 증식하지만 서로 조금 다른 특징을 지니기도 한다. 이를테면 리케차와 오리엔시아의 경우에는 진핵세포의 원형질에서 증식하는 데 반해(리케차과, Rickettiaceae), 아나플라즈마와 에를리키아는 진핵세포의 원형질에 있는 세포막으로 되어 있는 공포(vacuole) 안에서 증식한다(아나플라즈마과, Anaplasmataceae). 이들 세균은 모두 세균치고도 모두 크기가 매우 작아서 세균을 거르는 여과지를 통과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바이러스로 오인되기도 했고, 이후에는 꽤 오랫동안 세균과 바이러스 사이에 존재하는 생명체로 취급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분명한 세균으로 분류된다.

 

단핵구 내의 에를리키아

 

에를리키아의 숙주는 주로 진드기로, 진드기에 의해 척추동물 사이에 전파되면서 에를리키아증(ehrlichiosis)이라는 인수공통 전염병의 원인이 된다. 주로 단핵구(monocytes)에 침입하기 때문에 단핵구 에를리키아증(monocytic ehrlichiosis)라고 한다.

 

에를리키아증의 매개체인 진드기

 

개의 에를리키아증은 1930년대 중반 도네이션(Donation)과 레스토쿠아드(Lestoquard)에 의해 아프리카에서 첫 사례가 처음 보고되었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는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다 베트남전쟁 중 독일산() 셰퍼드가 많이 감염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역시 전쟁!). 지금도 주로 Erhlichia canis에 의해 개가 감염되는 사례가 많이 보고되는데, 미국의 경우를 보면 사람이 감염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람의 경우엔 Erhlichia canis에 의한 감염도 보고되지만 Erhlichia chaffeensisErhlichia ewingii와 같은 종에 의해 의한 감염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에를리키아라는 속명은 독일의 면역학자이자 미생물학자 파울 에를리히(Paul Erhlich, 1854?1915)를 기려 명명한 것이다. 1945년 소련의 모시코프스키(SD Moshkovski)가 러시아로 쓴 논문(초록은 영문)에서 도네이션과 레스토쿠아드가 리케차 속에 포함시켰던 세균을 빼내 새로운 속으로 만들면서 에를리히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모시코프스키를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1960년대에 WHO에 보고한 말라리아에 관한 논문이 나오는데, 이 때의 소속은 모스크바에 위치한 의학기생충학 및 열대의학 연구소((Institute of Medical Parasitology and Tropical Medicine)로 나온다. 그 외에는 에를리키아라는 속과 연관되어 이 속명을 처음 사용했다는 내용만 검색될 뿐이다. 모시코프스키가 에를리히의 이름을 쓰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다행히 모시코프스키가 에를리키아라는 이름을 지었기에 이렇게 에를리히의 삶과 업적을 알아볼 수 있게 하였지만, 에를리히는 한 세균의 학명에 이름을 남기는 걸 넘어 많은 사람이 기억할 만한, 아니 기억해야 하는 위대한 미생물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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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케차 프로바제키이(Rickettsia prowazekii) 3 - 프로바제크와 로샤 리마 | 세균에 사람 있다 2022-07-16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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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바제크와 로샤 리마

 

1875년 보헤미아에서 태어난 프로바제크는 세균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동물학자이자 기생충학자였다. 그는 브라질 출신의 병리학자인 로샤 리마와 함께 발진티푸스의 병원체를 발견하였다.

 

그는 프라하 대학에서 동물학을 전공했고, 빈대학에서는 동물학자인 베르톨드 하첵과 함께 물리학자이자 극단적 주관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마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면역학자 파울 에를리히와 동물학자 리차드 헤르트비히 지도 하에 연구를 수행하며 연구 경력을 쌓았다. 초기 그의 연구 업적 중에는 눈의 결막질환인 하나인 트라코마를 일으키는 트라코마 클라미디아(Chlamydia trachomatis)에서 봉입체(inclusion body)를 발견한 것이다. 1908년에는 남미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연구 활동을 했고, 1910년에는 수마트라, 사모아, 사이판 등지에서 감염병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프로바제크는 이미 세르비아와 이스탄불 등지에서 발생한 발진티푸스에 관한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전쟁 초기부터 그는 로샤 리마와 함께 러시아포로 수용소의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유행하는 발진티푸스를 어떻게 물리칠 것인지 알아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연구 도중 프로바제크와 로샤 리마 모두 발진티푸스에 걸렸다. 다행히 로샤 리마는 회복되었으나 프로바제크는 사망하고 만다. 겨우 마흔의 나이였다.

 

로사 재니케는 그의 삶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는 끝내 결혼하지 않았고, 글을 잘 썼으며, 정확한 그림을 그렸다. 철학적으로는 이상주의자였지만, 그의 과학은 그의 모든 체력과 시간, 야망을 모두 희생시킨 삶의 중심이었다.”

 

  프로바제크

 

 

이제 끝으로 발진티푸스의 병원체를 발견하고, 자신이 발견한 세균의 학명에 그 세균에 감염되어 죽은 두 과학자의 이름을 붙인 로샤 리마에 대해 알아볼 차례다.

 

로샤 리마는 브라질 출신의 의사이자, 병리학자, 감염학자였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 자격증을 딴 후 그는 오즈와우두 크루스 연구소 설립에 참여하여 병리학 교수로 일하면서 미생물학, 면역학, 감염의학 연구를 한다. 이후 독일로 건너가 여러 기관에서 의사로서, 연구자로서 활동하는데, 1909년 프로바제크의 초대를 받아 함부르크에 있는 해양열대질병연구소(Tropeninstitut)에 합류한다. 이 연구소는 독일에 질병이 유입되는 막기 위해 설립된 기관이었다. 로사 리마는 1927년까지 이 연구소에서 일했다. 이 시기는 그가 가장 과학적으로 생산력이 높았던 시기였다. 이곳에서 황열병에 대한 연구를 통해 황열병의 조직병리학적 특징에 대한 분석을 수행했고, 브라질에서부터 해오던 샤가스병에 대해 추가 연구도 했다.

 

앞서도 썼듯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로바제크와 함께 한 발진티푸스를 연구하다 함께 감염되었다. 프로바제크와는 달리 그는 회복되어 1916년 함부르크에서 발진티푸스의 병원체를 발견했다고 발표할 수 있었다.

 

로샤 리마에게 있어서 가장 큰 좌절 중 하나는 노벨상 수상 불발이지 않았을까 싶다. 1928년 스웨덴의 노벨 재단은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발진티푸스의 전염과 전파되는 데 이의 역할을 밝혀낸 니콜을 수상자로 지명했다. 하지만 정작 그 병원체를 발견한 로샤 리마는 제외했고, 심지어 한 마디 언급도 없었다. 노벨상 수상 선정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도 못했고, 늘 공정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세간의 평가에 위안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후 로샤 리마는 폴란드에서 참호열(trech fever)을 연구하였고, 이 질병이 발진티푸스와 유사한 병원체에 의해 생긴다는 것을 보였다. 1928년 브라질로 돌아온 이후 여러 연구 기관 및 단체에서 연구와 행정을 수행했고, 다양한 사회 활동으로 존경을 받았다. 1956년 상파울루에서 사망했다. 그의 이름에서 온 세균도 있는데, 2007년 처음 발표된 Bartonella rochalimae가 그것이다.

 

리케차 자체는 세균으로서도 매우 작은 생명체다. 극단적으로 유전자가 적어 기생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이 세균이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데는 세균 자체의 특성도 있지만,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놓은 환경과 행동 때문이었다. 이 세균의 학명을 접할 때마다 이 세균에게 희생된 과학자들을 만날 수 밖에 없다. 이 세균에는 정말 많은 목숨이 걸려 있는 것이다.

 

  로샤 리마 - 발진티푸스에 걸렸다 회복된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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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케차 프로바제키이(Rickettsia prowazekii) 2 - 리케츠 | 세균에 사람 있다 2022-07-16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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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케츠

 

발진티푸스는 이(lice)에 의해 매개된다. 이 사실을 알아낸 것은 프랑스의 샤를-쥘-앙리 니콜(Charles Jules Henri Nicolle, 1866 ? 1936) )이었다. 이 공로로 그는 1928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발진티푸스 환자가 병원 안팎에서 다른 환자를 감염시킬 수 있고, 또 환자의 옷만으로도 질병을 퍼뜨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반해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거나 옷을 갈아입으면 더 이상 전염되지 않는 것을 보고 이가 발진티푸스의 매개체일 것으로 추론했다. 니콜은 사람 대신 침팬지를 이용해서 이를 증명했다. 1909년 침팬지에게 발진티푸스를 감염시키고, 이를 회수한 후 다시 건강한 침팬지에 이를 옮겼다. 열흘이 되지 않아 건강했던 침팬지도 발진티푸스를 앓았다. 니콜은 이와 같은 실험은 여러 차례 반복하였고, 기니피그를 이용한 실험에서도 똑같은 결과를 얻었다.

 

이와 같은 니콜의 발견은 발진티푸스의 발병과 전파를 억제하는 데 이를 집중적인 타겟으로 삼아 면도와 의복 소각 같은 위생 기준을 정할 수 있게 하여 공중 보건의 측면에서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되었고 수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었다.

 

  샤를 니콜

 

 

하지만 니콜은 발진티푸스의 병원체에 대해서도 몰랐다. 발진티푸스는 리케차 프로바제키(Rickettsia prowazekii)라고 하는 세균이 병원체인데, 이 리케차라고 하는 세균은 이에 기생하며 이의 배설물에 섞여 나와서 사람의 몸으로 전달되어 병을 일으킨다. 이 세균을 발견한 사람은 브라질의 엔히키 다 로샤-리마(Henrique da Rocha Lima, 1879-1956)였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세균의 이름을 바로 발진티푸스를 연구하다 죽은 두 명의 연구자의 이름으로 짓는다. 바로 하워드 리케츠(Howard Taylor Ricketts, 1871-1910)과 자신의 친구이자 동료 연구자였던 스태니슬라우스 폰 프로바제크(Stanislaus von Prowazek, 1875-1915)다.

 

국 오하이오 주에서 태어나 노스웨스턴 대학교 의과대학을 나온 하워드 리케츠가 처음 연구한 것은 Blastomyces라고 하는 병원성 곰팡이였다. 파리의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잠시 연구하며 실험 기법을 익히고 미생물학 이론을 갖춘 후 시카고 대학의 교수로 돌아왔는데, 여기서 로키산 홍반열(Rocky mountain spotted fever)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리케츠는 로키산 홍반열을 연구하면서 이 질병과 발진티푸스 사이의 유사성에 주목하게 되었었는데, 로키산 홍반열 역시 진드기를 매개체로 하는 감염질환이며, 나중에 리케차 속하는 세균(Rickettsia rickettsii로 속명, 종명 모두 리케츠의 이름에서 왔다)에 의해서 생기는 것으로 밝혀졌다는 점에서 두 질병이 유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리케츠는 1909년 시카고대학을 비롯한 여러 기관으로부터 지원을 받고 발진티푸스를 연구하기 위해서 멕시코로 떠나게 된다. 당시 멕시코시티는 발진티푸스가 대량으로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멕시코에 머무르는 동안 펜실배니아 대학 병리과 과장으로 제안을 받고 이를 수락하여 잠시 떠나기도 했지만, “그 길이 놀라운 발전으로 통하지 않는다”며 금방 멕시코로 돌아와 발진티푸스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리고 발진티푸스를 일으킨다고 믿었던 병원체를 분리하고 며칠 후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한다. 1910년의 일이었다.

 

 하워드 리케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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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케차 프로바제키이(Rickettsia prowazekii) 1 - 감옥열, 혹은 전쟁열, 그리고 안네 프랑크 | 세균에 사람 있다 2022-07-16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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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열, 혹은 전쟁열, 그리고 안네 프랑크

 

‘감옥열’, ‘전쟁열’, ‘기근열’ ‘아일랜드열’, ‘캠프열’, ‘선박열’, ‘병원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질병. 바로 발진티푸스(typhus fever 또는 epidemic typhus)다. 감옥열, 전쟁열, 캠프열, 선박열, 병원열 등의 이름은 밀집된 환경에서, 그리고 위생이 열악한 상황에서 잘 발생하고 전파력이 높았던 사정을 반영하고, 기근열이라든가 아일랜드열은 1840년대 아일랜드의 감자대기근 당시 이 질병이 창궐했던 데서 나온 이름이다.

 

매독에 대해서 각국이 자신들이 싫어하는 나라의 이름을 병명으로 삼았다면 발진티푸스는 질병이 나타나는 상황을 반영해서 불려진 셈이다. 사소한 범죄도 사형으로 다스리던 수백 년 전 영국에서 올가미에 의한 죽음보다 티푸스에 의해 죽는 죄수가 더 많았다고 하니까 밀집된 환경에서 벌어진 이 질병에 의한 참상이 짐작이 간다. 일례로 1577년 영국 옥스퍼드의 한 죄수가 510명에게 죽음의 천사가 되었는데, 당시 죽은 이들 가운데는 판사 두 명, 군수와 부군수 각 한 명, 치안관 여섯 명, 대부분의 배심원들, 수 백명의 대학원생들이 포함되었다. 이때부터 영국에서는 판사가 감염을 막기 위해 코가리개를 쓰는 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발진티푸스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스페인 군대가 이슬람교도가 점령하고 있던 그라나다를 공략했을 때이다. 이른바 레콩키스타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이다. 스페인은 그라나다 공략을 위해 키프러스의 용병을 수입하였는데 그들이 군대에 합류한 직후 스페인 군인들이 앓아눕기 시작했다. 두통, 고열, 전신 발작으로 시작해 얼굴이 검게 부어오르면서 헛소리를 하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혼수 상태에 빠져 죽었다. 이때부터 이 병은 ‘티푸스(typhus)’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연기 자욱한 ’, ‘희미한’, 또는 ‘흐릿한’이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티포스(typhos)에서 유래된 말이다. 당시 스페인 군은 약 2만 명 가량의 군인이 목숨을 잃었는데, 3,000명은 전투로, 1만 7,000면은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고 한다.

 

그라나다에서 출발한 발진티푸스의 진군은 스페인, 프랑스를 거쳐 전 유럽을 휩쓸게 된다. 1528년 나폴리를 공격하던 프랑스 군대가 발진티푸스의 공격을 받아 2만 8,000명의 병사 중 절반 가량이 숨졌고, 그 결과로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가 이탈리아의 지배권과 클레망소 7세의 교황권까지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클레망소 교황이 헨리 8세의 이혼 요구를 거절한 이면에는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의 분노가 두려워서라는 얘기가 있다. 이후 교황의 간섭을 뿌리치고자 헨리 8세는 영국국교회를 만들어 스스로 수장에 오르게 되는데 그렇게 본다면 발진티푸스는 간접적이지만 영국 종교 개혁에 기여한 셈이다.

 

발진티푸스가, 아니 감염병이 역사의 행로 변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례로 대표적으로 드는 것이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정벌이 이 질병으로 좌절된 것이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추위와 굶주림에 떠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많은데, 그보다도 나폴레옹 군대를 괴롭힌 것은 모스크바에 도착하기도 전에 기승을 부린 발진티푸스였다고 볼 수 있다. 덥고 건조한 기후 속에 출발한 50만의 대군은 위생 조치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러시아를 향해 진군하던 군대가 폴란드를 가로지를 때 즈음부터 병사들이 발진티푸스와 이질로 쓰러지기 시작했다. 약 5분의 1이 죽거나 병에 걸려 병사로서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러시아로 들어선 나폴레옹에게는 겨우 13만 명의 군대밖에 남지 않았다. 러시아에서 전투를 거치면서 발진티푸스 환자가 더 늘어 9만 명의 군대만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진격할 수 밖에 없었다. 전염병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오합지졸과 같은 군대가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는 불타고 있었다. 폐허 속에서 먹을 것도 없었고, 질병은 더욱 만연해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의 세계 정복의 야망을 꺽은 데 발진티푸스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발진티푸스에 의한 희생자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안네 프랑크다. 유태인 소녀로 나치를 피해 2년 동안 숨어 지내며 쓴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가 아우슈비츠에서 독가스에 의해 죽었다고 알고 있을지도 모르나 직접 사인은 발진티푸스였다. 안네와 그녀의 언니 마고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베르겐-벨센 강제수용소로 옮겨진 후 감염되어 사망했고, 며칠 수 그들의 어머니도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안네 프랑크가 단지 감염 때문에 죽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안네 프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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