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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세계를 비추는, 어두운 빛 | 나의 리뷰 2011-06-26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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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프롤로그




 

 서울 동작구 상도4동 산65번지. 서울에서 얼마남지 않은 달동네. 재개발구역.
 2011년 4월 25일, 그곳에서 용역업체 직원과 주민 간의 충돌이 있었고, 강제철거가 집행되었다. 내가 사는 집에서 밖을 나가 몇 미터 거리도 되지 않는 곳이건만, 나는 그곳 소식을 인터넷 뉴스를 통해 접하고 있었다. 야근을 하고 집에 오면 지쳐서 그곳에 가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다 여유가 생겨 집에 일찍 올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그곳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제2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집었고, 김애란의 대상작을 읽었다.

 ‘세상에 적어도 한두 명은 이곳 철거 아파트에 사람이 산다는 걸 기억하리라 믿었다.’(p15) 부분을 읽을 때 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참지 못하고 그곳으로 간 것은. 전쟁터같은 풍경과 악취가 나에게 벌을 내리는 듯 했다. 이미 많은 일들이 휩쓸고 지나간 그곳에서 나는 한참동안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와 다시 책을 펴들었다.
   

 

1. 물속 골리앗 - 김애란


 대상 수상작인 김애란의 <물속 골리앗>은 그렇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읽었던 작품이다. 이 작품 초반부의 느낌은 마치 재개발 지역의 한 가정을 취재한 TV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것이었다. 그러다 22페이지 쯤, 엄마가 말을 한 마디도 안 하게 되는 시점부터 독립 자본으로 만든 저예산 재난 영화 같았다. 독자의 머릿속을 도화지 삼아 탄탄한 문장력으로 그려내는 구체적인 묘사와 암울한 분위기에서 나는 이 젊은 작가가 거장이 될 가능성을 보았다. 초반부터 독자를 휘어잡아 끝까지 집중력을 발휘하는 솜씨가 여간 대단하지 않았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소년과 엄마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기를 되도록 피한다. 대신 일상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통해 고통을 에둘러 표현함으로써 오히려 독자가 실감하도록 만든다. 복도를 뒹구는 쓰레기와 건축 자재, 빈집의 깨진 유리창 안으로 빈번하게 들어오는 빗물(p13), 누군가 버리고 간 애완견이 방에 갇혀 배가 고파 우는 소리(p13), 높은 습도 속에서 기승을 부리는 악취(p19) 등 시각, 청각, 후각을 자극하는 감각적 묘사로 모자가 겪는 고통에 구체적인 체온과 표정을 입혔다. 이러한 사실감으로 인해, 책을 읽는 현실의 나는 잠시 허공에 손 한번 쓸면 콘크리트 가루가 떨어져 내릴 듯 하고, 숨 한번 들이마시면 습기찬 곰팡내가 맡아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현실에서 두 눈으로 본 상도4동 재개발구역 철거 현장은 이 작품에 대한 몰입의 강도를 높이는 구실을 했다.


 <물속 골리앗>은 에피소드 간 여백이라는 스타일과 애매한 결말을 통해 작가가 그의 권위를 일정부분 내려놓으면서 그 틈새로 독자를 목격자로 끌어들여 책임의 상상적 연대를 통해 세계를 구원하려는 희망을 담은 작품이다. 해설 부분에서 김나영 평론가가 썼듯(p56), 이 작품의 단락 사이에 놓인 여백은 작품을 읽는 동안 독자가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절망적인 에피소드들 사이사이에서 독자인 나는 엄마와 소년을 가만히 목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공간이 독자에게 참여를 강요하는 것은 아니었다. 참여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능동적인 독자라면 얼마든지 작품 안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 여백은 결말에서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결말에서 비는 이제 전처럼 퍼붓지 않는다. 그렇다고 누가 구하러 올 것이 분명해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절절한 절망도, 그렇다고 확실한 희망도 아닌 애매한 상태. 이것이 나는 이 작품의 결말로서는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완전한 절망, 또는 완전한 희망으로 결말을 낼 경우, 두 경우 모두 앞의 에피소드 간 여백은 없는 것이 낫다. 독자의 참여 대신 작가가 확실한 결론을 혼자 알아서 내리는 방향이었다면 독자가 참여하는 그 여백의 공간이 있을 이유가 없다. 그렇게 이 작품이 쓰여졌다면 <물속 골리앗>은 하나의 ‘잘 쓴 작품’은 될는지 몰라도 ‘불편함’의 미덕까지 갖추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 작품을 다 읽은 후 며칠간 뒷머리의 불편함에 시달렸다. 출퇴근길에도, 직장에서 일을 하던 중에도, TV를 보던 중에도, 문득 반달 아래서 유성우 같은 맛이 나는 사이다를 들고 어서 구조되기를 기다리는 소년 생각이 계속 맴돌았다.

 

 이 결말의 상황을 다르게 치환시켜 보자. 소년이 물에 빠져 있고, 그 장면을 뭍에 있는 독자가 발견했다고 하자. 이 상황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은 독자 나 혼자이다. 그 소년이 물에 휩쓸려서 거의 저쪽으로 떠내려가는 지경에 있다면 나는 그 소년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운 생각이 들면서도 이건 내 능력 밖이라고, 나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 어쩔 수 없다면서 합리화를 하고 말 것이다. 잠시 소년 때문에 눈물을 흘릴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때뿐일 것이다.

 

 반대로 소년이 물에 빠졌지만 웬만하면 거의 구조될 수 있는 상태에 있을 경우. 즉 희망이 좀 더 확실히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나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지나가던 다른 누군가가 조금만 힘들이면 금방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내 갈길이 바쁘다는 핑계로 지나쳐 간다 해도, 그리 위태로운 상태도 아니었는데 누가 구해줬겠지, 하면서 금세 소년에 대한 생각을 잊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애매한 상태에 놓일 경우 독자로서는 참 골치가 아프게 된다. 상당히 위험한 상태지만 아직 휩쓸려갈 정도는 아니고. 잘 하면 구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쉽게 될 것 같지도 않은, 그런 아주 애매한 ‘중간’. ‘세상에 적어도 한두 명은 이곳 철거 아파트에 사람이 산다는 걸 기억하리라 믿었다’(p15), ‘쉽게 구조되리란 생각에 먹을 것도 전혀 챙겨오지 않은 상태였다’(p35) 그리고 ‘“누군가 올거야’(p47)의 문장까지 목격한 독자에게 이 소년을 기억에서 지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에피소드 사이마다 한 줄씩의 여백이 있다가, ‘칼바람이 불자 골리앗크레인이 휘청휘청 흔들렸다’(p47)의 마지막 문장으로 작품이 끝나면서 이어지는 빈 여백이 사막처럼 한없이 막막하고 넓어보였다. 마치 그 한없는 여백에 작가가 보이지 않는 글씨로 ‘이제 여기서 당신은 무엇을 어떻게 할텐가?’라고 묻는 듯 했다.

 

 무릇 좋은 작품이란, 좋은 답변이 아니라, 좋은 질문을 담고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에서 독자들이 따로 또 같이 느낄 불편함, 그 여운이 소년을 구조할 수 있는 희망일 것이다.

 

  
 

2. 여름 - 김유진

 

 김유진의 <여름>은 <물속 골리앗>과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여름이 계절적 배경으로 공통분모라면, 날씨와 서사는 대척점에 있다. 이를 기준으로 두 작품을 비교해 볼만하다. 서사가 뚜렷한 <물속 골리앗>에서는 한달 넘게 비가 오는데(p23), 서사가 은근슬쩍 숨겨진 <여름>에서는 20일 넘게 비가 오지 않는다.(p83) 서사라는 것에 채도가 있다면, 서사의 채도가 ‘진하고 원색에 가까운’ <물속 골리앗>의 배경은 내내 ‘흐린’ 날씨이고, 서사의 채도가 ‘엷고 흐린’ <여름>의 날씨는 비 없는 ‘맑음’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여름>은 수챗구멍의 벌레와 체리주를 만드는 과정, 시멘트 위로 쏟아지는 피 등의 강렬한 이미지가 독자를 사로잡는 작품이다. 뛰어난 관찰력으로 생생한 그림을 그려내는 묘사력은 이 작품의 백미이다. 더불어 은근히 리듬이 담겨 있는 문장들은 작품에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불완전해 보이는 서사의 빈자리를 메운다. 산문시의 내재율과 같은 율격이 부여되어 있다. 나에겐 작품 내 한 문장, ‘의도는 모호했으나, 행동에는 단호함이나 절실함마저 느껴졌다’(p78)가 작가가 이 작품을 쓰는 본심같이 느껴졌다.

 

 한편, 소통의 문제는 <여름>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Y는 인터뷰 내용을 녹취하는 일을 하면서 언어의 틈새라는 세계를 경험한다. 입술에서 떨어진 말들은 대체로 불구에 가까웠고, 대부분의 말들은 문법에 어긋났다. 말들은 종결되지 않은 채로 남겨지거나, 끝없이 이어졌다. 사람들은 서술어를 쉽게 생략했고, 문장의 앞뒤를 바꾸거나 이미 말한 단어를 전혀 뜻이 다른 단어로 반복하기도 했다. 생략된 말들을 찾아 문맥에 맞게 끼워넣는 것이 임무(p68)인 인물 Y를 통해 작가는 서사가 불분명한 이 작품을 위한 독법을 독자들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못을 박는 드릴의 소음 때문에 B의 말을 Y가 절반밖에 알아듣지 못했다(p70)고 하는 부분은 불완전한 소통의 맨얼굴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작품집의 다른 작품들과 그 결을 같이 한다고 하겠다.

 

 

 

3.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 - 이장욱

 

 <여름>에서 제기된 소통 불가능성의 화두는 이장욱의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에서 ‘고독’으로 전이되어 이어진다. ‘나’가 빌린 집의 주인이었던 작가, 이반 멘슈코프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 산 탓에 집과 대화하는 버릇이 있었다.(p100) 깊은 적막을 견디지 못할 때면 화면 없이 소리만 나오는 텔레비전을 켜두곤 했다.(p101)


 신학을 공부했던 안드레이 역시 이반 멘슈코프와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 그는 혼자서도 말했고, 창문에게도 말했으며, ‘나’에게도 말했다. 말들에는 두서가 없었고, ‘나’는 취한 그의 말을 절반밖에 알아듣지 못했다. 그는 술잔을 든 채 지나치게 진지하고 추상적인 문장들을 쏟아내며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기도 한다.(p106)

 

 그리고 안드레이도 이반 멘슈코프처럼 공포소설을 쓰고 있다. 그는 호러의 초점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에 있으며, 그래서 호러의 영혼은 비관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이 공포를 대면하지 않으면, 인간은 진정한 자신과 만날 수 없다고 얘기한다.(p109) 그가 설명하는 보이지 않는 힘에 휘둘리는 존재, 인간은 무엇보다 멘슈코프 그리고 안드레이 자신이 아니었을까.

 

 이반 멘슈코프. 그는 1990년대 이전에는 전위적인 반체제 작가였으나, 199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물결이 러시아를 휩쓸면서 환멸을 느끼고 절필을 선언했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21세기, 그는 대중적인 공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사람들은 이반 멘슈코프라는 이름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p110)

 

 집과 대화할 정도였던 멘슈코프의 깊은 고독은 다른 누군가가 곁에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외로움의 진원지는 그가 그 자신이 아닌 것에 있었다. 자본주의가 휘몰아치는 실망스러운 상황에 절필까지 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불안을 생산함으로써 움직이는 자본주의(p102)에 공포소설만큼 잘 어울리는 장르는 없다. 책은 팔리지만 기억의 장소에 작가는 없을 때, 멘슈코프의 자아는 이중적 형상을 갖춰갈 자리를 마련해 간 것이다.

 

 생사조차 불분명한 멘슈코프의 집에서 머무르는 주인공 ‘나’에게 시간은 모호하기만 하다. ‘나’는 먼 공간이 아닌 먼 시간을 건너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p102) 그도 그럴 것이,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얼마 안 된 1994년 겨울 이후 십 삼 년 만에 방문한 러시아는 신학생 안드레이가 베스트셀러를 써내지 못해 스시집의 매니저로 일할 만큼 달라져 있었다. 그 괴리감은 흐린 날의 정오 같은 자정, 백야 속에서 ‘나’에게 사물들이 움직이는 현상으로 변형되어 다가온다.

 

 그러한 이상 현상들은 비슷한 현상을 경험한 안드레이에 의해 수면제 과다 복용에 의한 ‘나’의 이상 행동에 의한 것으로 결론 내려진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하자면 인간을 흔드는 보이지 않는 힘이란 것의 실체 또한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말에 가깝다. 불안을 생산하여 움직이는 자본주의 역시 인간의 발명품이니까. 그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나’ 역시 안드레이처럼 불안으로 요리하는 장르, 공포 소설을 쓰고 있다.

 

 작품의 마지막 질문들. 이 악몽이 과연 누구의 것이며 무엇의 악몽인지에 대한 자문은 그 자체가 공포일 수 있다. 그러나 안드레이의 말처럼 그 공포와 대면한 인간만이 진정한 자신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반 멘슈코프의 소설 속 소녀처럼 자신도 모르게 사랑하는 사람을 살해했던 진실까지도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4.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 김사과

 

 김사과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이하 <...신기한 날이다>)에서 ‘나’가 세계에 대해 느끼는 환각은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에서의 그것과 닮아 있다. ‘나’는 갑자기 거리가 ‘나’를 향해 무너져내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p147), 거울 속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지기도 한다.(p164) <...신기한 날이다>의 무너지고 왜곡되어 가는 세계에서 개인의 악몽은 이장욱보다 약간 더 현실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불안을 생산함으로써 움직인다는 명제는 <...신기한 날이다>에서도 유효하다.

 

 ‘나’의 아버지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열심히 살지 않으면 뒤처지고 뒤처지면 끝장이라고 말했었다. ‘나’는 언제나 그게 개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결국 그 말대로 살아왔다. 단지 뒤처지지 않는 데 인생을 바쳐온 것이다.(p141) ‘나’는 아버지의 말을 굳게 믿고 그가 얻어내야 한다고 말한 모든 것을 얻어냈지만 남는 것은 분노뿐이다.(p142) 이런 사회는 상품으로서의 가치와 톱니바퀴의 구실을 강요할 뿐, 개인이 진정한 자신을 만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전리품 같은 A의 값비싼 학위들은 불안을 해소하려는 노력의 결과물에 다름 아니다.

 

 내가 나 아닌 것으로 사는 상태가 오랜 시간 지속되면 중첩된 불안은 공포로 발전한다. 고장난 복사기처럼 끝도 없이 비슷한 말을 쏟아내는 A. 스스로의 의지로 뭘 해본 적이 한번도 없이 모든 것을 타인의 의지에 따라 해온 ‘나’. 이들의 눈은 똑같은 공포로 차 있다. 공산품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쉴새없이 선전하는 A가 그 공포의 회로도에 기꺼이 순응하고 만다면, ‘나’는 자신을 셀로판지에 비유하며 지금껏 존재성이 상실된 삶을 살아 왔음을 자각한다.(p143) 셀로판지 같긴 하나, 셀로판지라기엔 너무 두껍고 인간이라기엔 너무 얇은 ‘나’. 정체성의 위기는 공포를 분노로 환원시키고, ‘보이지 않는 힘’이 지배하는 세계에 폭력적 방식으로 균열을 일으키려는 욕망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나’는 - 국밥집 여자를 살해하기 전부터 이미 - A의 엉덩이를 찢고 뼈를 뽑아내거나 펜으로 사람들의 눈을 찌르고 싶다는 상상을 한다.

 

 ‘나’는 국밥집의 버려진 듯한 분위기를 마음에 들어한다. 그곳은 끝없는 변화가 일어나는 바깥에 비하면 마치 죽어가는 것처럼 보이고, ‘뒤처지면 끝장’이라며 ‘나’의 등을 떠밀지 않아서 내게 태어나 처음으로 평화를 느끼게 해준다. 국밥집을 자주 찾아가던 어느 날 교회를 다니는 국밥집 여자는 ‘나’에 대해서도 기도한다고 말한다. 내가 좋은 여자랑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한다고. ‘나’에게 처음으로 찾아왔던 평화가 금이 가는 것은 여자의 기도 이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좋은 여자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기’란 그 의무는 ‘뒤처지면 끝장’이란 말에 떠밀려 살아온 ‘나’를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타의에 의해 보호되어 왔었다. 해롭고, 더럽고, 불길한 정적, 그러니까 세계 전체로부터. 여자를 살해하고 마는 ‘나’의 분노의 근원은 두께를, 무게를, 색깔을 갖고 싶었던 욕망이 끝내 좌절된 것에 있다.

 

 국밥집 여자를 죽인 후, 남자애와의 대화는 연극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와 아이의 대화는 마치 부조리극처럼 무의미한 언어들의 나열이다. 이것은 귀가 후 가족들과의 소통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가족의 말에 대답하지 않거나, 일부만 듣거나, 혼잣말 같아서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알아채지 못한다. 이러한 소통의 단절은 작품 초반에서 잠시 엿보이기도 했다. ‘나’는 나의 분노에 대해서 아버지와 상의해본 적이 없었다.(p142)

 

 왜냐하면 기성세대로 대변되는 아버지는 ‘나’의 문제가 ‘나’가 나약하기 때문이라면서 ‘나’에게 원인을 전가하고, 하지만 어쩔 수 있겠냐, 라면서 합리화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가 불현듯 개처럼 짖고 싶다고 생각하는 데에는, 그런 세상을 구축한 것에 책임을 전혀 지지 않으려는 아버지와의 소통이 절망적이라는 판단 하에 차라리 인간이 아닌 짐승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이 소통 불능의 당위성을 획득한다는 점에서는 더 낫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나가 돼지 취급 받는 처지를 불평 없이 흡수하는 것 역시 아버지가 강요하는 인생관을 비판 없이 수용해 소통 불능을 합리화한다는 점에서 비극적이다.

 

 ‘나’는 태어나서 누굴 때려본 적이 없다. 심지어 단 한번도 화를 내 본적도 없다. ‘나’의 분노가 존속살인으로까지 나아가고 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의 분노는 분노로서 온전히 인정받으며 표출된 적이 없던 것이다. ‘뒤처지면 끝장’인 세상에서 모든 것이 나의 탓인 삶을 사는 인간에게 분노를 명확한 소통의 도구로 이용할 심리적 여유가 있을 리 없다. 세계를 입체적으로 경험하며 성장하지 못한 인간의 분노는 적의의 과정을 거쳐 살인으로 귀결되고, 이 폭력의 발전 과정에 지속적으로 연료를 공급해 주는 것은 부재하는 소통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노의 고착 현상은 무자비한 살인과 폭력으로도 해소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지겨울 정도로 나 자신이었고, 분노는 여전히 내 몸을 꽉 채우고 있다. 그래서 공포가 박힌 눈을 한 누나에게서 생선살을 받아먹는 이 작품의 결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생선살을 먹는 장면은 이미 172페이지에서 제시된 적이 있다.

 

 ‘나’는 죽은 아이의 손가락 같은 질감임에도 생선살을 꾹 참고 씹어삼킨다. 견뎌내는 것이다. ‘나’는 견뎌내는 것이라면 익숙하다.

 

 그 모든 살인과 폭력에도 변함없이 ‘나’는 ‘나 자신’일 수 밖에 없고, ‘나’에게 끝내 삶이란 견뎌내는 것으로 남는다. 아버지의 세계로부터 ‘나’는 결국 탈출하지 못한 것이다. <...이상한 날이다>의 결말이 어딘가 모르게 우울해 보이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5. 허공의 아이들 - 김성중

 

 <허공의 아이들>의 소년과 소녀는 <...이상한 일이다>의 ‘나’와 DNA를 공유하고 있으며 두 작품 속의 세상은 비슷한 구석이 있다. 소년은 단순한 생활을 하면서 해결되지 않을 문제에는 되도록 의문을 갖지 않으려 하는 쪽이다.(p194) 재난이 갑작스럽게 닥친 왜곡된 세상을 제대로 설명할 어른이 없다는 것(p196) 역시 공통이며, 존재감이 거의 없는 소녀의 부모가 점점 투명해진다는 상상력은 <...이상한 일이다>에서의 셀로판지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주전이 되지 못하면 고등학교에 가서는 야구를 할 수 없는 <허공의 아이들>의 세상은 <...이상한 일이다>의 ‘뒤처지면 끝장’인 세계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세상이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던 소년의 생각(p199), 예전에 살던 집은 물론 골목 전체를 태워버리는 소년과 소녀의 유희(p202)는 잃어버린 분노의 권리를 살인과 폭력으로 배출한 <...이상한 일이다>의 ‘나’의 욕망이기도 하다. 한 번도 어머니가 선택해 주지 않은 상황에 놓인 적이 없는 소녀(p200)는 아버지의 말을 굳게 믿고 그가 얻어내야 한다고 말한 모든 것을 얻어낸 <...이상한 일이다>의 ‘나’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어차피 이 집에서는 좋은 일이 하나도 없었어.”(p202)라고 변명처럼 덧붙이는 소년에게서 <....이상한 일이다>의 ‘나’의 가족과의 불화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작품에서 자주 들리는, 땅이 무너지고 세상이 부서지는 소리들이 반드시 ‘끝’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소녀의 꿈 속에서 시드는 이 세상을 거두고 다른 세상을 건축하려는 신이었다.(p203) 투명해져서 사라진 사람들은 다른 세상 어딘가에 옮겨지고 있는 중인 것이다. 다시 말해 지진이 일어날 때 들리는 것과 같은 소리들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징조인 것이다. 여기서 소년과 소녀가 점점 떠오르는 허공의 집 때문에 선택의 기로에서 서로 대립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자주 다투지만 화해하는 방법을 배워가기도 한다. 이것은 소년과 소녀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의 통과의례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는 과도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은유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녀가 말하는 미지의 신세계라는 것이 소년에게는 현재의 모든 것이 소멸된 후에 오는 것이라는 점에서 공포로 기능한다. 그 공포는 시간에 대한 감각에서 기인하므로 소년은 달력과 시계를 모두 버린다.(p208) 그러나 시간의 관념을 생산하는 것은 달력과 시계뿐만이 아니었다. 성장하는 소년과 소녀의 몸 자체가 시간의 일부였던 것. 이쯤에서 소녀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의미심장하다. 사라지는 세계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p209) 어쩌면 성장이란 세계의 사라짐으로 인해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것은 한 세계의 소멸이면서 새로운 세계의 생성이라고 할 수도 있을테니 말이다.

 

 구름층에서 빠져나온 집에서 하얀 구름이 만들어놓은 새로운 대지를 보며 소녀는 꼭 천국같다고 중얼거린다.(p211) 천국이란 죽음 이후의 세계이므로 이때부터 소녀가 본격적으로 소멸의 궤도에 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투명해지기 시작하면서 소녀는 삼천 피스짜리 퍼즐 조각을 채워넣는다. 증기를 내뿜는 구식 기차와 나들이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손을 흔드는 풍경이 그려진 그 퍼즐에는 ‘모든 것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소녀의 이상이 담겨 있다.그래서 소녀가 완전히 투명해졌을 때 식탁 위에는 삼천 피스짜리 퍼즐이 마침내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소멸의 순간을 똑똑하게 인지하고 싶다는 소녀의 희망은 재탄생의 순간을 목도하고 싶다는 소망이기도 하다.

 

 소녀를 잃은 소년은 구덩이를 내려다보며 오로지 추락밖에 없는 삶, 아찔한 속도 속에서 어른이 되고 주름살이 생기고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p214) 그러한 구세계의 실상을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맞이하는 소년의 태도로 볼 수 있는 것이 완성된 퍼즐판에서 퍼즐 조각 하나를 빼내는 것이다. 바로 소년 자신인, 어떤 그림도 될 수 없는 단 한 조각. 불완전하지만, 전체 중의 일부가 아닌 일부 그 자체로서 전체라 할 수 있는 조각 하나. 이것은 ‘보이지 않는 힘’에 흔들리지 않고, 단지 뒤처지지 않는 데 인생을 바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장욱과 김사과의 작품 속 ‘나’의 이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고독한 성장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 소녀가 없는 세계에서 그리움의 지옥을 지나야만 한다는 것. 그런 기억의 소멸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질 때, 마지막으로 남은 땅은 무너지고 뼈는 자라며, 구세계는 소멸하고 신세계가 도래한다는 것.

 

 

 

6. 너의 변신 - 김이환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의 1980, 90년대 영화들이 연상될 정도로, 김이환의 <너의 변신>은 도발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의 물결이 일렁이는 작품이다. 전통적인 소설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상상력의 파격 수준이 상당해서 반감을 부를 수도 있을 듯하다. 특히 ‘평범한’이나 ‘정상적인’ 같은 표현(p229)에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에게는. 그러한 우려를 작가도 모르지 않는 듯, 작품 속 한 문장은 그에 대한 작가의 답변처럼 들리기도 한다.


...나는 달라서 좋았으나, 너는 달라서 싫었던 모양이다.(p232)

 

 <너의 변신>은 내용만큼이나 형식에서도 실험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의 형식은 내용과 밀접하게 연결되는 면이 있다. 인간의 신체 일부가 자유자재로 분리, 결합이 가능해진 시대적 상황이라는 아이디어는 텍스트의 구성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제각각 소제목을 포함하면서 분절된 단락들이 서사적으로 느슨하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체가 분리, 결합하는 끝모를 여정에서 어디까지를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형식상으로도 소설이란 무엇이고, 어디까지를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가, 라는 의제로 연장되어 있다. 그것은 정신 속의 몸과 실제 몸을 일치시키려는 작중 인물 P, 그리고 ‘너’의 욕망과 같다.(p235)

 

 ‘너’가 품고 있는 성형에 대한 욕망은 그의 정체성과 연관되어 있다. 그는 욕망 섞인 시선을 받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고, 이것은 욕망의 대상이 되고 싶은 욕망이다. “그렇게 다 고치고 나면 너는 뭐가 남아?”(p236)라고 묻는 나와 다르게 ‘너’에게 이런 욕망이 가능한 이유는 ‘너’의 정체성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너’의 성적 정체성의 경우 ‘너’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양성을 다 갖고 싶은 것도, 중성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닌 상태인 것.(p247)

 

 이렇게 심리적 정체성이 애매한 사람들의 욕망을 따라 사회도 전반적으로 변화한다는 점은 시사적이다. 노화방지와 생명연장을 위한 기술이 성형수술을 위해 쓰이면서, 변화하는 사회 인식에 따라 관련법도 제정되거나 개정된다.(p235, 240) 그러한 성형 기술 발전을 위해 정부 예산 일부가 책정되며, 종교단체의 저항은 점점 줄어든다.(p241, 248) 지속적인 욕망의 이데아가 사회제도와 국민 의식, 국가예산의 배분 문제까지도 ‘성형’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욕망의 소용돌이에 동참하지 않는 자에게는 소외의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아담S와 의사, ‘너’ 사이에서 ‘나’가 동떨어진 느낌을 갖고, ‘너’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다.(p242~244) 그리고 ‘너’는 ‘나’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의, 애초보다 더 광범한 수술을 감행하고, ‘너’와 ‘나’는 결별의 길로 들어선다. 어쩌면 종교단체가 경고하던 성형의 부작용이란 성형으로 인한 신체의 이상 징후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욕망의 끝없는 연쇄에 따른 관계의 해체를 그들은 염두에 두었던 것이 아닐까.

 

 <너의 변신>에서 세계는 점점 구분이 어려워지도록 변해간다. 영원히 헤어지기 싫어 한몸으로 접합 수술을 하는 연인의 사례가 나타나고, 죄수의 신체와 감옥을 직접 연결하는 법안이 추진된다.(p252~253) 개체성이 말살되고, 인간과 동물과 사물의 경계가 사라지는 세계는 바라는 대로 모든 신체 개조의 욕망이 현실화되는 곳이다. 실현되지 않아 오히려 존중되는 욕망은 없고, 개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존중 역시 요원하다.

 

 <너의 변신>이 그려내는 신세계는 금기로 시작되는 어떤 윤리도 남아 있지 않은(p212) 장소라는 점에서 <허공의 아이들>의 허공과 닮긴 했지만, <허공의 아이들>의 ‘성장’과는 다르게, 그곳은 진보의 이름을 뒤집어쓴 퇴화의 공간이다. 최초의 신체개조자 아담S가 그의 노동생산성을 증명해 신체개조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것은 그래서 눈여겨 볼만하다.(p261) 그는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사회, 또는 새로운 방식의 자본주의 사회를 여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자본주의 사회에 더 많이 봉사하는 전략으로 사람들의 호감을 산다. 인간 본연의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인간의 상품적 가치에 더 많이 집중하는 사회는 후퇴할 수 밖에 없다.

 

 <너의 변신>의 결말에서 ‘너’는 신체를 버리고 액체상태의 유기물질이 된다. 이 부분은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나오는 ‘인류보완계획’(불완전한 인류를 신의 경지에 이르게 하여 완벽한 개체로 만들기 위한 계획. 개개인의 마음의 벽을 없애고, 인간 정신을 하나로 합치면서, 모든 사람들의 육체를 소멸시키는 것. 전 인류는 태초의 상태인 생명수 LCL용액이라는 것으로 환원됨)과도 유사하다. ‘나’에게 안내원은 “먹지도 자지도 않아도 되고, 다른 걱정할 필요도 없고, 영원히 오르가슴만 느끼는”(p264) 이 상태가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쾌감”(p263)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작가는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게 진보란 무엇이며, 무엇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의 최종적 목표가 ‘비인간’이 되고, 극단의 진보가 결국 퇴보로 종결되는 미래의 모습은 현재를 사는 독자들에게 주는 암시성이 강하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로 인해 오프라인의 인간관계와 소통이 줄어드는 현 추세를 고려한다면, 이 작품이 제기하는, 과학 발전과 기술 혁신의 속도전에 매몰되는 인간성에 대해 우리는 숙고할 필요가 있다.

 

 

 

7. 떠떠떠, 떠 - 정용준

 

 정용준의 <떠떠떠, 떠>는 이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 중 가장 평범해 보인다. 과감한 상상력과 파격적인 실험으로 다른 작가들이 최첨단 신기술의 하이테크 시장을 선점하여 걷고 있는 듯해서 상대적으로 이 작품이 촌스럽고 투박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떠떠떠, 떠>의 우직한 진지함, 그 정직함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것은 마치 TV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에서 다들 한계를 모르는 듯 고음을 내지르고, 화려한 코러스와 세션을 동원하고, 드라마틱한 구성과 갖가지 퍼포먼스를 전시하는 와중에, 건반 하나 달랑 놓고 제 깜냥만큼만 조용히 노래하는 것과 같다. 세상에는 그런 가수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떠떠떠, 떠>의 세계는 김사과의 <...이상한 일이다>의 세계와 어떤 점에서 겹치는 면이 있다. 따라서 두 작품의 주인공도 비슷한 상상을 한다. <...이상한 날이다>의 ‘나’가 펜으로 자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들의 눈을 찌르고 싶어하듯(p146), <떠떠떠, 떠>의 ‘나’도 자신에게 잊지 못할 모멸감을 안기는 선생의 목에 연필을 찔러넣고 싶어 한다.(p280) <...이상한 날이다>의 세계의 교리는 ‘뒤처지면 끝장’으로 요약되는 합리주의이다. 합리주의가 지배하는 세계는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다. 그러한 세계에서 약자는 배려의 대상이라기보다 교리에 어긋나는 이단일 뿐이다. 말하려고 시도하기 전까지 외관상 장애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떠떠떠, 떠>의 ‘나’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회의 적이다. 따라서 <...이상한 날이다>의 세계를 닮은 <떠떠떠, 떠>의 세계, 그 세계의 권위자인 선생은 합리성의 원리에 따라 ‘나’의 장애를 무시하고 방치하며 모욕감을 준다.(p282) 그러한 곤경에서 ‘나’를 구하는 것이 ‘붉은 원피스’의 발작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장애 때문에 생기는 난관으로부터 ‘나’를 탈출시키는 것이 또 다른 장애인의 장애 덕분인 것.

 

 두 남녀가 노동자가 되어 다시 만난 뒤에도, 세계는 변하지 않았다. 그 곳은 말을 하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나 말을 하지 않거나 못하는 사람에게 일을 주지 않는 곳, ‘말을 더듬는다’라는 상상의 문장으로 장애인을 함부로 인식하는 곳이다.(p285) 이러한 세계에서 그들은 동물의 탈을 쓰고서야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이것은 김사과의 <...이상한 날이다>에서 ‘나’가 ‘개처럼 짖고 싶다’(p170)라던 부분을 떠올리게 한다. 장애가 이해될 수 없이 확인만 가능한, 합리주의의 세계에서 소통이라는 희망은 차라리 불편한 의무이다.

 

 작중 ‘그녀’는 발작에서 깨어나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대해 달라고 ‘나’에게 부탁한다.(p294) 이것은 약자 간에도 서로의 이해 가능성을 섣부르게 점치기보다 차라리 보류하고, ‘확인만 가능한’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다시 말해 각자의 고통에 침투하기보다 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겠다는 것. 살아 오는 동안 세계의 원리를 체득한 ‘그녀’만의 처세술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꿈속에서 ‘그녀’의 발작을 보고 나도 나만의 방식으로 괴로워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p295) 책을 읽어보려고 더듬거리는 ‘나’의 시도는 장애를 극복해보려는 노력인 동시에 ‘그녀’에게 침투하지 않으면서 ‘그녀’와 고통을 공유하려는 고독한 몸부림이기도 하다. ‘나’의 더듬거리는 소리가 그녀에게 들렸으면 좋겠다는 ‘나’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결핍의 소통을 통해 사랑을 전달하려는 기도인 것이다.

 

 ‘그녀’와 연인이 된 ‘나’는 ‘그녀’가 갑자기 잠이 들었을 때 나만의 방식으로 애정을 표현한다. ‘판다’에게 쏠린 관심을 돌리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는 것.(p299) 잠이 들어버린 그녀는 알지 못할, 외로운 배려들을 통해 그녀의 고통에 모욕감이 부가되지 않도록 하려는 노력에서 사랑의 진정성이 엿보인다고 하겠다.

 

 ‘그녀’와 사랑을 나눈 후, ‘그녀’는 ‘나’에게 말을 해보라고 한다. 어린 날의 상처는 매번 말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유령 같은 사람들을 나타나게 했고, 그것은 ‘그녀’와 둘만 있는 방에서도 여전했다.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그들과 달랐다. ‘그녀’는 활짝 웃는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가볍게 윙크를 했고 입술을 앞으로 내밀어 키스를 보냈다.(p303) 그가 오랜 시간 실패만 거듭했던 말하기가 성공하기 위한 충분조건은 바로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순간 그녀가 몸을 비틀고 발작을 일으킨다. 그녀가 홀로 싸우는 전투에서 ‘나’는 ‘그녀’의 외로움을 존중하며 ‘나’도 자신만의 싸움을 감행한다.(p304) ‘나’를 보았어도 진짜 ‘나’를 보지 못했던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나’의 말을 듣지 못해도 들을 것이다. 소통이 불가능함을 그대로 드러내려는 이 움직임은 작가의 야망으로도 읽힌다.

 

 갑자기 잠이 들기 전까지 그녀는 비록 “떠, 떠, 떠”밖에 듣지 못했지만 끊겼던 말은 평화롭고 따뜻한 꿈 속에서 들리고야 말 것이다. 이전에는 안개 때문에 볼 수 없었지만 사랑의 언어가 안개를 걷어낼 것이다. 그리고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그들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서로의 고독을 존중함으로써 고독하지 않게 되는 아이러니는 이렇게 완성될 것이다.

 


   

8. 에필로그


 일곱 편의 작품들을 다 읽고 나니 어떤 기류나 흐름 같은 것이 발견됐다. 부모의 부존재, 소통의 부재와 단절, 악몽과 위험한 욕망, 고독과 공포가 그것이다. 젊은 작가들 작품의 공통성이 이런 어둠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것이 의아해보일 수도 있다. 어쩌면 젊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어둠을 말하기가 더 쉬운 것은 아닐까. 암흑의 시대를 찢고 어둠을 어둠 그 자체로 드러내고, 희망을 노래한 주역들은 다름 아닌 ‘젊음’, ‘젊은이들’이었음을 역사는 말하지 않던가.

 

 독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물속 골리앗>으로 시작해 ‘불가능의 희망’을 노래하는 <떠떠떠, 떠>까지. 무너지고 왜곡되어 가는 세계를 사실적으로, 때로는 파격적인 상상으로 말하는 이 어둠들은 하나의 빛이며 검은 색의 희망이다. <물속 골리앗>의 절망적인 에피소드들 사이의 여백에 참여하는 독자들처럼, 그것은 어둠을 토해내는 작가와 어둠을 목격하는 독자가 만날 때 빛이 될 것이다.

 

 불가능해 보였던 희망은 그렇게 온다.

 오고야 말 것이다.

2011 제2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김애란 저/김이환 저/김사과 저/김유진 저/이장욱 저/김성중 저/정용준 저
문학동네 | 2011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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