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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좋음의 이데아를 향한 올바른 길을 모색한 철학자 | 기본 카테고리 2020-11-18 0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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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강대진,강성훈,김유석,김주일,이강서,이기백,정준영,한경자 공저
아카넷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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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 플라톤을 읽는 8가지 시선

강대진 7 지음 | [아카넷]




플라톤: 좋음의 이데아를 향한 올바른 길을 모색한 철학자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 헤드(A.N. Whitehead) 서양철학사 2천년은 플라톤 철학에 대한 주석에 불과하다라고 언급했다고 한다. 표현은 상당히 알려져있긴 하지만 누군가 그런지를 물으면, 막상 명확하게 대답하기 쉽지 않은 화두다. 표현대로라면 2500 과거의 어느 철학자가 정리한 사상이 우리가 현재 세계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방식과 자리를 규정해주었기 때문이라고 이해해도 지나치지 않을 같다. 소크라테스의 제자로,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로서 플라톤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철학 문외한인 독자에게는 멀게만 느껴진다. 최근에야 고대 철학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되었지만, 인류의 역사 속에 수많은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출현했고, 과학기술이 발전하여 과거의 편견과 상식을 전복해왔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고대 철학자들의 세계관과 사유에 빚을 지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철학자 뿐만 아니라 호메로스와 같은 시인들과 희곡작가들의 작품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논의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시간이 흘러도 고대 철학자들의 철학은 현대의 전문연구자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조명되고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인간의 철학과 역사는 이렇게 현재 진행형이다.  



     오늘은 국내의 고대 철학을 연구하는 정상급 연구자 8명이 저술한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만나본다. 책은 저자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특강을 기반으로 한다. 특히 고대 사상서를 전문적으로 출판하고 연구자의 강의를 공유하기도 하는 출판사에서 나왔다. 책은 다양한 관심사와 연구분야를 선택한 플라톤 연구자들이 플라톤의 철학 그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고대 그리스의 문화에 대한 독법을 제시한다. 현대의 관점에서라기 보다는 현대인에게 낯선 고대 그리스 당대의 문화 가운데에서 그리스 사회를 바라보고자하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연구자의 연구 주제와 관심사에 따라 8가지 키워드로 나누고, 이를 분석해가며 고대 서양문화의 단면을 읽어내고자 한다. 전문 연구자인 저자들은 주석 작업을 포함한 원전의 번역 뿐만 아니라 함께 모여 공동 독회 토론을 거쳐 번역본을 완성해냈기에 더욱 신뢰를 준다. 이책은 플라톤의 시기를 전후한 고대 그리스 사회, 서양 문화의 기원이 현장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책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문화를 다양한 각도에서 파고들지만, 문화라는 현상을 독립적인 주제로 떼어놓고 이해하는 작업은 불완전한 시도로 남을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시대를 달리해도 다양한 측면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구성되기 때문이다. 한편 책은 고대 서양 문화와 철학의 입문자에게는 플라톤 저서의 핵심적인 주제를 선보이고 개념 익숙해지기 기회를 제공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플라톤의 대화편 현대의 연구자들 사이에서 숱한 논쟁이 이루어져 왔으며 과정이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철학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하는 플라톤 철학이 여전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는 것은 그의 저술이 거의 대부분 대화형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울러 대화편에서 논의되는 중심 주제 혹은 질문에 대한 답이 명료한 결말로서 정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플라톤의 철학은 일종의 열린 철학이라는 특징에 주목해본다. 그러므로 책의 저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플라톤을 읽는 가지 방법은 대화편의 결론이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등장인물이 주고 받은 사유의 방식에 주목하는 일인 같다. 대화와 토론을 어떤 논리 구조를 통해 사유를 발전시켜 나가는지를 눈여겨볼 있을 같다.



     재미있는 것은 플라톤의 저술이 단순히 철학서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당한 문학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의 대화편 저마다의 개성을 지닌 등장인물이 나와 토론과 대담을 벌이며 주제에 대한 논의를 심화시켜간다. 과정에서 어떤 인물은 자신의 논리가 먹혀들지 않자 화를 내기도 하고, 마지못해 상대방의 논리에 동의하기도 한다. 플라톤의 저술은 상당부분이 극적 요소가 갖추어진 훌륭한 문학작품, 혹은 철학극이기도 하다. 그런데 책의 3장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플라톤은 선대의 서사시인 호메로스의 작품과 시인을 비판하고,국가에서는 소크라테스 입을 빌어 시인을 추방해야한다 과격한 논리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있을 것이다. 짙은 문학성을 보여주는 저작의 저자이자 철학자가 시인을 싫어한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지점에서 나는 플라톤의 논리 이면에,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했다. 플라톤은 젊은 시절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정치가가 준비를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학업을 위해 10 후반에 아테나이로 왔다.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스스로 독배를 마시고 사망한 사건을 목격했을 것이다. 불합리한 다수결에 의해 사람의 철학자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플라톤은 허깨비같은 정치가의 자리를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정치 무대로 나갈 계획을 접고 플라톤은 대신 아테네에 학당을 열었다. 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따르면, 플라톤은 그의 중기 저작인 국가에서 철인 정치가가 통치하는 최선자 정체 주장하지만, 후기 저작 《법률》에서는 민주정과 귀족정이 섞인 혼합정체 지향했다. 플라톤은 기본적으로 민주정을 옹호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승 소크라테스는 민주정 성격을 갖춘 환경에서, ‘다수결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죽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주정 하에서 융성했던 그리스 비극은 상당히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비극을 통해 토론교육의 역할이 이루어지는 것을 좋게 바라보진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비극시인을 포함한) 시인을 아예 추방해야한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을 것으로 이해한다.  



     한편 책에서는 에로스에 대해 논의하는 향연(2), 용기라는 주제로 논의하는 라케스, 플라톤의 우주관 철학적 자연관을 보여주는 티마이오스 같이 저자들은 플라톤의 저작 편에 집중하기도 하지만, 국가 법률처럼 여러 저자의 논의에 교차되며 논의되기도 한다. 물론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저자가 논하는 주제에 맞는 관점에서 분석을 시도하기 때문에 보다 풍부한 해석을 접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런 해석 방식은 호메로스의 서사시 작품 일리아드, 오디세이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 그리고 그리스 비극 오레스테이아 3부작처럼 여러 맥락에서 그리스 문화에 접근할 있는 여지를 주는 것이 흥미로웠다. 예를 들면 3장에서 오레스테이아의 비극을 논의의 소재로 하면서, 비극의 형식에 주목하여 비극의 정치성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저자는 그리스 비극이 아테나이를 찬양하는 기능, 그리고 토론 기술을 가르치는 역할도 했음을 언급한다. 반면 그리스의 법과 제도 대해 이야기하는 7장에서는 오레스테이아 이야기 그리스 사회에서 획기적인 재판 제도의 성립을 알려주는 논의에  활용하기도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플라톤의 저작 중에서 가장 생소하고 흥미있게 다가온 논의는 플라톤의 자연철학이 담긴 티마이오스였다(8). 책의 번역을 담당했던 저자는 플라톤의 관심이 그의 저작에서 대우주 천체에 대한 그의 이해를 전달하면서 동시에 소우주인 인간에 대한 이해로 돌아오고 있음을 이야기 한다. 부분이 흥미로운데, 저자는 자연과학자의 시선이라기 보다는 철학자의 눈으로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인간을 작은 우주로 보았던 플라톤의 신선한 시선에 새삼 놀라게 된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플라톤이 천체와 인간의 , 그리고 건강 등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보다 훌륭한 인간 공동체의 설명적 기반 확립하고자 했다는 설명이었다. 이건 분명히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이나, 개별적인 인간 신체에 대한 궁금증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플라톤은 바로 어떻게 하면 인간이 공동체를 이루어 좋은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고 찾았을 같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볼 부분은 바로 좋은 이라는 지점이다.



     좋은 이라는 표현은 1장에서 논의되는 좋음의 이데아 연결지을 있다고 본다. 저자에 따르면 플라톤의 좋음이란 영혼이 조화를 이루어서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46)이라고 알려주기 때문이다. 플라톤이 바람직한 정치체제를 언급하며 철인통치자를 내세웠던 것이나, 시인추방론을 주장한 것도 결국 좋음의 이데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2장에서 에로스(eros) 언급한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있지 않을까.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 누구나 어떤 형태와 모습으로든 결핍 있게 마련이다. ‘이데아와 그림자의 관계처럼 인간이 자신의 결핍을 해소할, 좋음의 이데아 나아가고자 하는 욕구로 에로스를 이해해볼 있기 때문이다. 점은 현대의 동성애와 달리 중장년의 연장자가 청소년인 연소자 사이의 사랑을 통해 젊은이를 이끌어주기도 했던 관계, 파이데라스티아(소년애) 이해하는데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볼 있겠다. 아직 미숙한 소년이 경험과 지혜를 갖춘 연장자의 보살핌과 조언을 통해 보다 훌륭한 인간으로 성장할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고나니 나만의 오독인지 모르겠지만, 플라톤의 사상이 향하는 맥락은 플라톤의 이데아 관련하여 검토해볼 있을 같다. 플라톤의 종교에 대한 논의로 시작한 1장에서 플라톤이 상당부분 계승하는 종교 사상이 바로 디오니소스-오르페우스 비교(批敎) 관련 있다고 했다. 영혼 불멸을 믿었던 그의 영혼관에 당시의 비교(批敎) 내세에서의 좋음 다가가는 방안을 제시해주는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예로,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사인 현실 세계에서 결핍을 느끼는 인간이 잃어버린 반쪽 찾는 본성을 떠올려 있다. 범죄의 교정가능성을 믿고 모든 부정의한 행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보았던 플라톤의 인간관 정의관 역시 이런 이데아로 향하는 인간의 노력을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앞으로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 언급된 플라톤의 대화편 읽어나갈 입문자는 책을 통해 해당 저작의 이해에 핵심적인 윤곽을 파악할 있겠다.



     물론 플라톤 해석이 여전히 학문적으로 완전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활발히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그의 저서는 명료한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는 플라톤의 의도를 따라가며 가지 대안으로서 저자의 관점을 받아들이고 참고해볼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번 독서를 통해 짐작해볼 있는 점은, 플라톤이 인간의 좋은 으로 향하도록 하기 위해 검토할 있는 모든 사항을 따져물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혼자만으로 생존할 없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인간들 삶이 좋은 이르기 위해서 플라톤은 종교와 , 사랑, 우주와 인간, 용기에 대한 모든 항목을 우선 철저하게 검토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나만의 주제넘은 해석일지 모르지만, 이번 독서를 통해 내가 이해한 플라톤 철학의 핵심 하나는, 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 향하는 올바른 길로 나아가고자 시도했다는 점이다. 나의 오독은 앞으로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어나가며 새롭게 검토를 하며 바로잡히길 기대해본다.  



 [참고]

책을 읽으면서 플라톤의 저서들이 집필 시기에 따라 보통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플라톤의 그리스 문화 읽기에서 언급되는 플라톤의 대화편들을 초기, 중기, 후기로 분류한 것은 다음과 같다.


초기

《리시스》, 《라케스》, 《변론》, 《크리톤》, 《고르기아스》, 《프로타고라스》, 《에우튀프론》

중기

《국가》, 《파이드로스》, 《파이돈》, 《향연》

후기

《티마이오스》, 《파르마니데스》, 《필레보스》, 《노모이(법률)》, 《소피스트》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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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꼭 드는 날 - [오우아(吳友我)]를 다시 읽으며 | 기본 카테고리 2020-11-07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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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오우아 : 나는 나를 벗 삼는다

박수밀 저
메가스터디북스 | 2020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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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꼭 드는 날

<오우아(吳友我)>를 다시 읽으며

- 박수밀 글 | [메가스터디북스]

 


코로나19가 급속하게 퍼지던 지난 여름에 읽었던 책을 다시 펼쳐본다책 미치광이라는 의미의 간서치로 불리는 이덕무 선생의 단상을 모아놓은 책이다. ‘나는 나를 벗 삼는다는 의미의 <오우아(吳友我)>이덕무 선생은 호를 여러 개 갖고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오우아거사(吳友我居)’라고 한다당대의 신분적 제약으로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지독히 가난한 환경에서 지내야 했다그 삶의 고단함은 지금 내가 속한 환경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일 테다그에게도 친분을 나누던 박지원홍대용 등 선배친구가 있었지만 결국 자신의 고난은 다른 이들과 공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지붕이 뚫려 있고 기둥마저 기울어가는 초가집 단간 방에서 한겨울 엄습해오는 외풍을 막기 위해 책을 뜯어 막고이 책들로 이불삼아 지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였다.


슬픔이 닥치면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해서 그저 한 치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 싶고살고 싶은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어진다.

-이덕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중에서 재인용(43)


그럼에도 이덕무는 다행히’ 두 눈이 있고책을 읽을 수 있어 절망을 가라앉히고 마음의 고요를 찾을 수 있었노라고 말한다.


나 역시 나의 부족함 때문에나와 가족이 어려운 환경에 놓이기도 한 것 같아 그저 막막하고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다그나마 책을 읽곤 하는 것이 다행인지 모른다때론 내가 더 열심히 살지 않아서일까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무기력감을 느끼기도 한다사람들은 나의 고민과 죄책감과 미안함때론 땅 깊숙이 꺼질 것 같은 좌절감을 알 길이 없다그저 나의 좋은 환경만을 보거나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는지를 보라고 할 뿐이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나는 사람들 앞에서 실없는 소리만 하는 별난 사람이기 때문이다자문해본다나는 타인의 삶을 제대로 공감한 적이 있는지혹은 노력이라도 해본 적이 있는지 말이다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내 삶을 지금까지 되돌아보면 좋은 가족과 친구지인들에 둘러싸여 유복한 삶을 살았다하지만 언제나 나는 이 세상에 홀로 던져져서 나의 힘으로 생존해야만 한다는 두려움과 강박이 있었던 것 같다세상엔 홀로 ’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텐데 말이다무엇이 두려워서 타인의 친절을 거부하거나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걸 그토록 두려워했을까가장으로서 막막한 심정을 이덕무의 글에서 만난다.

 


복숭아 나무아래서 붓가는 대로 쓰다


다시 <오우아>를 뒤적이다가 또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한다이덕무 선생이 아이의 손을 잡고 복숭아 나무 아래로 갔다나뭇잎을 따고아이와 함께 나뭇잎에 붓으로 글씨를 썼다마음이 가는대로이덕무 선생의 생각이 이어진다. ‘형편이 좋은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누구나 근심 걱정은 있기 마련이라고 말이다.


일 년 아니 한 달에 마음에 딱 맞는 날이 얼마나 될까?

-이덕무 <만제정도(?題庭桃)>중에서 재인용(44)


지금으로부터 358년 전인 1762년 6월 21일의 기록이다아이의 손을 잡고 나뭇잎에 마음 가는 대로 쓴 글자들을 보며 미소 짓는 두 부녀의 모습을 상상해본다가난가족들의 병치레에 근심이 끊이질 않았을 그의 서글픔을 느끼다가도이 찰나의 행복감을 잊지 않은 선생의 마음을 읽어본다<오우아>의 저자가 한 상상대로 이덕무는 아이와 저물녘 마루에 앉아 순간의 평화로움을 즐겼을 것이다문득 사람이 일생을 마칠 때이런 일상의 추억 하나 남아 있지 않다면 얼마나 허무할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의 소똥'을 아끼다


이덕무 선생의 고난과 근심을 들여다보면서 사람이 자신을 긍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깨닫는다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시하고 포장하는 나의 모습도 발견한다나 자신을 너무나 오랫동안 불신해왔던 것이 한 가지 이유가 될 것이다나를 드러내고나의 견해를합리적인 근거에 의해 도출된 견해를 단정해보는 일이 익숙하지 않을 것인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나의 두려움나의 무지를 제대로 마주보고 들여다 본 적이 거의 없는 것 같다나의 감정을 느끼는 수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 감정이 과연 어떤 것인지 거리를 두고 들여다보는 일을 말한다바쁜 사회생활에 매몰되어 생각 없이 산다는 것은 이런 나의 두려움무지나의 결핍을 제대로 인식해보고 나의 입장을 정하는 것나름의 답을 구하는 과정일 것이다그리고 나는 이 과정을 줄곧 회피해온 것은 아닐까이 작업은 누구나 홀로 해내야 하는 것이지만이 과제의 양상이 나만의 것임이 아니라는 점에 약간의 위안을 얻기도 한다


다만 내가 책을 읽는 일은 나의 결핍을 자각하고 위로를 받기 위해서는 아니었는지 자문해본다책을 통해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나만의 문제에 대한 정답이 책에 쓰여 있을 리 없다다만 수많은 이들이 남긴 사유의 기록만이 내 앞에 주어져 있을 뿐이다그러나 이것이 단지 기록만은 아니고개별적인 의식의 수준을 넘어서 공유되는 보다 보편적인 의식이 있을 것 같다선배들이 지나온 과정을 통해 내가 내 문제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내가 어떤 방향으로 난 길을 갈지 보다 구체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을 것 같다문득 이덕무 선생이 당신의 호를 오우아거사로 한 것이 어떤 어려움과 고난에도 자신을 긍정하고 아끼겠다는 다짐과도 같이 느껴진다.



소똥구리는 소똥 경단을 스스로 아끼기에 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덕무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중 재인용(189)


이덕무의 <선귤당농도>는 그가 20대 중반에 쓴 산문집이라고 한다. ‘선귤당’ 또한 이덕무 선생의 호다. ‘매미와 귤이 어우러진 집에서 활짝 웃는 이덕무 선생을 상상해본다일상에서 길어 올린 아름다운 문장들로 씌여 있다오늘 무언가에 근심과 서글픔을 느꼈다면용의 여의주를 부러워했기 때문이 아닐까내가 발견하고나에게 주어진 나만의 소똥이 있을 것이다. ‘나의 소똥을 아끼는 것이게 오늘 나에게 주어진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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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성 회복을 위한 단호한 선언 -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 기본 카테고리 2020-11-01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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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장 지글러 저/유영미 역
갈라파고스 | 2016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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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La Faim Dans le Monde Expliquee a Mon Fils)

: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 아들에게 들려주는 기아의 진실

지글러(Jeon Ziegler) 지음 | 유영미 옮김 | [갈라파고스]




‘인간성 회복을 위한 단호한 선언’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를 읽고



가을에 발표된 노벨평화상은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me, WFP)에게 주어졌다. 조직은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 관련조직으로, 1963년에 창설되어 기아와 식량 안보를 책임지는 인도주의 기관으로 성장했다. 이들의 수상은 굶주림을 전쟁과 갈등의 무기로 활용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분쟁지역에서 평화의 조건을 마련 공로로 결정되었다. 한편 이러한 국제조직의 존재와 활동은 우리가 해결해야할 과제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있음을 알려주기도 한다. 지금도 누군가는 배고픔 속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반면, 다른 누군가는 태어나서 삶을 마감할 때까지 가난과 배고픔이란 단어를 평생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대체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누구나 한번쯤은 의문을 가져보았을지 모른다. 이런 의문을 던져본 적이 없다면, 이를 당연하게 생각해왔다는 것일까 자문해본다. 역사 속에서 찬란했던 문명을 일군 아프리카와 남미의 고대 왕국이 오늘날 굶주린 아이들로 넘쳐나는 곳이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이룩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약속한 물질적 풍요는 지금도 10 미만의 아이들이 5초에 1 굶어 죽어가는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하는지 궁금했다. 지글러의 저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이러한 물음들을 나에게 던졌주었고, 책을 읽으며 나만의 답을 찾고자 했다.    


     지글러는 스위스 출생의 제네바 교수로 사회학자이자 기아문제 전문가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앞서 언급한 유엔의 WFP(세계식량계획)에서 조사 자문 활동을 하며 기아로 고통받는 세계의 아이들과 만나고 현장을 목격했다. 책을 이후에는 유엔의 식량특별조사관으로도 활동했다. 저자가 집필하던 당시에는 사막화 방지 협약에 소속되어 지구의 사막화 방지 활동에도 참여하는 중이었다.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유엔 기구에서 일하는 아빠와 아들이 나누는 대화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간결한 대화로 이루어져 있어서 복잡하고 다양한 주제에 대해 독자가 접근하기 쉬우며, 저자가 염두에 두고 있는 문제들의 본질을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선 저자는 오랜 현장 경험을 통해, 대를 이어 고착화된 불평등에 의문을 품었을 같다. 소들에게 주는 곡물 사료는 남아도는데 인간은 굶주려야 할까? 무고한 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생존의 위기에 처하고, 고통받으며 죽어가는 현실이 과연 정의로운 세계일까? 저자는 스위스인이면서 스위스 다국적 기업 네슬레의 문제를 곧바로 비판하기도하고, 유럽인이면서도 유럽을 식민지 약탈자라고 서슴없이 표현한다. 세계 현장을 누비며 목격한 인류의 삶의 단면 고스란히 저자의 문제의식을 통해 책에 진지하게 때로는 도발적일 정도로 솔직하게 담겨있다.


     책의 원저가 출판된 해는 1999년이고, 국내에 번역 소개된 것이 2007년이다. 이로부터 13년이 지난 지금, 세계의 기아 문제가 얼마나 개선되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전세계의 빈부격차가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다는 단서나, 끊이지 않는 테러와 난민의 증가는 인간에만 주목해봐도 삶의 조건이 나아졌다는 확신을 갖기 어렵다. 특히 저자의 언급에 따르면, 2005 기준으로 세계인구의 7분의 1 달하는 8 5 명이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에 놓여 있다. 분명히 지구의 일정 인구는 더욱 가혹한 생존조건 속에 처해있다. 올해 전세계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몸살을 앓았다. 이것은 기본적인 생존 여건 속에서 살지 못했던 이들이 팬데믹 이후, 보다 어려운 생존 여건으로 밀려났음을 암시한다. 많은 이들이 관심과 돌봄의 사각지대에 놓여 내일을 기약하지 못한 생활을 이어나가야 한다는 의미다. 지글러의 책은 우리가 회피하고 외면하며 추상으로만 머물던 기아문제를 독자의 안에서 느낄 있는 구체적인 모습과 질감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얼마나 심각한 부조리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지구에서 그토록 많은 (인간에 의한) 비극이 발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눈물이 마르지 않은 아이의 얼굴이 담긴 표지를 보면서 여러 가지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책에 담긴 진실을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장을 넘기기 전에 내가 저항감을 느꼈던 점이 바로 질문이었다. 지금 당장 나와 무관해보이는 불편한 진실을 알아야 할까? 지글러의 책을 읽으며 줄곧 질문이 나를 따라다녔다.



인간은 배양접시의 미생물이 아니다


     지글러는 기아가 순수하게 문제 자체로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북한의 사례처럼 기아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국가 테러의 도구로서 사용되기도 한다. 네슬레의 사례처럼 일개 국제 기업이 국가와 영토의 경계를 넘어, 굶주리는 아이들을 담보로 기업의 경제적 이윤을 보호하는데 기아를 이용하기도 한다. 뿐만아니라 이와 관련하여  미국의 CIA 같은 권력기관이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고 쿠데타를 유도하고 내정 간섭을 하도록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  분명한 것은 이렇게 기아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고통받으며 살아가야하는 이들을 이용하는 주체가 역사적으로 언제나 존재해왔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내고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한 인물로 토마스 맬서스를 지목한다.


     18세기 영국의 성직자인 맬서스는 단순한 수학을 분별없이 적용하여 인구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논문에서 맬서스는 인구수가 가난과 기아같은 현상으로 자연스럽게 조절될 있다는 자연도태설 주장했다. ‘세계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25 마다 수가 두배로 성장하지만, 식량의 증가는 산술적으로 증가할 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가 생존 환경의 여러 조건에 의해 자연스럽게조절된다는 것을 말했다. 질병과 배고픔, 그밖의 환경적인 제약에 의해 인구수가 조절될 것이라는 믿음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고 지식인들 사이에 전파되어 크게 공감을 얻었다. 맬서스가 주장의 이면에는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가 반영되어 있다. 주장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이유는 생존하는 인구집단에 속한 관점에서 도태되는 인구 집단의 고통을, 그럴 수밖에 없는 당연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론은 여기에 동조하는 이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이론으로 기능했다. 유럽의 백인우월주의적 관점이 노골적으로 담긴 이론이었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 이론이 보여준 영향력은 실제로 엄청났다. 이론의 기저를 이루는 시각은 인간을 마치 시험실에서 배양하는 미생물로 바라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보인다. 하지만 인간은 특정한 의도로 배양접시 속에서 수가 조절되는 미생물이 결코 아니다.   


     프랑스 혁명이 발생했던 1789년에 영국에서는 성직자였던 맬서스가 인구법칙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맬서스의 이론은 인류가 인간다움을 지킬 기회에서 한층 멀어지는데 영향력을 발휘했다. 이론에 동의하는 자본가 권력자들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무의식적인 인종차별주의에 정당성을 인정해준 셈이었다. 인간을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내몰게 현실을 외면하고, 이들에게 죄책감을 덜어주게 계기가 것이다. 여기에서 맬서스의 자연도태설 자본가와 권력자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준 이론적 근거가 것은, 프로테스탄티즘이 북미의 자본주의 형성에 미친 과정을 떠올리게 한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금욕적인 도덕관에 기반한 프로테스탄티즘이 기업인들의 제한없는 부의 창출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심리적인 불편함을 덜어주는 결과를 낳았다는 데에 주목했다. 기업가들이 신의 소명과 섭리 개념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여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결과 근면 성실한신자이자 자본가들이 기업활동을 통한 부의 창출과 축적 행위를 신의 축복으로 바꾸어 놓은 셈이었다. 이것은 북미의 기업인들이 성실하게 일한 결과 획득한 부는 신의 섭리에 의해 부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렇기에 부유해진 자본가들은 수익의 10분의 1 혹은 이상을 기꺼이 교회에 내놓았을 것이다. 칭찬과 존경을 몸에 받으면서 말이다.


      맬서스의 이론 역시 자본 증식에만 눈이 거대기업가들의 책임과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는 이론적 수단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미국의 자본주의 형성에 미친 프로테스탄티즘의 역할과도 일면 유사한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생각해볼만한 점은 맬서스의 자연도태설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적 해석의 실질적인 수혜자들이 시대를 넘어 상당 부분 겹쳐 보인다는 점이다. 자본 권력과 정치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이들에게 가지 이론은 매우 유리하게 활용될 있는 근거를 제공했다고 이해된다. 저자에 따르면 분명히 지구에는 모든 사람이 먹고 남을 있는 식량이 충분히 있다고 한다. 심지어 120 명까지도 먹여 살릴 있는 충분한 식량이 존재한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남는 식량을 공평하고 고르게 나누지 않고 있는 이유는 사회구조의 문제에 있었다. 소말리아의 사례처럼 소수의 군벌 세력이 사람들의 식량과 부를 가로채어 독점하거나, 브라질의 금융과두제에 속한 이들은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제대로 보고 있지 않았다. 알면서도 무감각하게 회피하는 것이다. 생존의 어려움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에 대한 자본 정치 권력의 무감증은 맬서스와 동조자들이 지니고 있던 인종차별적, 백인우월주의적 시각의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문제를 곧바로 해결할 있는 이들에게 당장 내일의 삶을 기약하기 힘든 10 여명의 운명은 추상에 불과했다. 지금도 선진국의 소들은 넘쳐나는 곡물로 배를 채우고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인간이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당연하거나 우연한 사건이 아니다


     책을 읽고나서 생각은 세계를 지배하는 소수의 정치 권력과 자본 권력이 언제나 피지배층의 삶을 손안에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팽창주의적 제국주의 시대에서부터 현재까지만 보아도 이름과 모습을 달리 왔을 여전히 피지배세력에 대한 지배세력의 영향력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이들의 영향력이 더욱 커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 권력은 제국주의 시대 이후 냉전구도를 만들어 세계를 장악했고, 신자유주의를 도입하여 이윤을 얻기 위한 자유시장의 자유 지키기 위해 지구환경 생명의 다양성을 극단적으로 이용했다. 결과 생태계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해왔고, 극심한 빈부격차를 양산해냈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를 이어 물려주는 빈곤과 기아, 테러리즘과 환경 난민을 포함한 제반 문제는 결국 자본과 권력을 지닌 세력이 만들어 하나의 패키지 상품처럼 보인다. 이런 현상들은 결코 신의 결정이나 신탁에 의해 주어진 운명도, 혹은 우연한 사건들이 아니었다. 힘을 가진 소수 혹은 집단이 기획한 일들의 결과물이었다. 이들은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혹은 국제통화기금, 시카고 곡물거래소나 월가의 금융자본가들 같이 시대와 지역별로 다른 이름과 모습을 하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집단에 결탁하여 이들의 손발이 되고 이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소말리아의 군벌과 같은 정치 권력이 이들에 힘을 더할 뿐이었다.


     분명히 해두자면 나는 기관들 자체를 단순히 악마화하는 것이 아니다. 기관들의 권력자들이 보여주는 판단, 그리고 이들의 행보를 비판하고자 한다. 이들은 지금 당장 세계의 기아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으면 해결할 있는 자들이다. 자신과 같은 존재들에 대한 존중과 관심 없이 이윤극대화라는 가지 원칙에만 충실한 이들의 처신을 문제삼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에서 개별적으로 보이는 현상들이 사실은 이렇게 거미줄처럼 밀접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세계를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자장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인간성의 위기에 도전을 받는 모든 현안들이 서로가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이는 사건들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자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세계화/글로벌화, 공기업 민영화, 불평등,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테러, 난민 발생, 도시와 농촌 사회의 격차 증가, 도시인구 빈민화, 그리고 우리가 매일 관찰하는 도시의 젠트리피케에션 마저도 모두가 누군가의 이윤극대화라는 목적에 부합하는 하나의 패키지 기획의 결과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압력으로 세계 은행 총재의 자리에서 사임한 김용 총재의 사례를 보아도, 기관들이 자본 권력의 이익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있다. 전체에서 빛을 발하는 지글러의 통찰은 사실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불편한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책은 이해하기 쉽고 가벼운 대화체 형식으로 쓰여 있지만 저자가 전달하는 진실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책을 읽기 전에 나에게 물었던 질문은 우리가 이렇게 불편한 진실을 알아야 할까?였다. 나름의 이유를 찾아본다면, 우선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학교에서는 결코 배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날마다 기아와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아이들에 관한 진실은 유럽인들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 나에게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처한 삶의 조건은 인류가 처해있는 인간의 조건 생태계 모두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삶과 나의 삶은 결코 무관할 없다. 하지만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다 이유로, 그리고 우리의 무지로 인한 책임 회피를 당연시하고 이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굶주림과 관련한 문제는 복합적인 문제의 가지 단면일 뿐이다. 조금만 따저보면 많은 사람들이 점에 동의할 것이다. 기아문제는 우리가 빈곤의 문제, 보건 위생 문제, 그리고 인권 문제 그리고 생태계 환경문제 등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현상을 파악하는 단계를 넘어 다양한 현상들을 보다 시각에서, 하나의 복합적인 양상으로 바라보아야 같다. 영양섭취, 기아 문제는 결국 일상에서 발생하는 개별적이고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지구적인 규모의 사회정치적 권력의 문제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진실을 제대로 안다는 , 또는 최소한 알려고 노력하는 마음가짐은 자본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다. 이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과 연대를 지켜내기 위한 출발점이며, 결국 나를 돌보고 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린 불편한 진실들을 알아야 한다. 알고자 노력하는 일이 하나의 사명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저자인 지글러는 세계의 현장을 돌아보면서 목격한 진실을 간결하게 책에 담았다. 당장 다음날의 생존을 기약하기 힘든 아이들을 수없이 보았겠지만, 저자는 마지막 희망을 결코 놓지 않는다. 최근에 카뮈의 소설페스트 읽었는데, 소설 속의 주요 인물이 나눈 대화 구절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 의사에게 당신에게 페스트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의사는 그건 끝없는 패배라고 답했다. 불가항력의 페스트 앞에 인간은 어김없이 패배하는 존재다. 의사는 이를 알고 있으면서도 진실로 투쟁을 중단할 이유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팬데믹 뿐만 아니라 인간의 , 우리의 존엄을 위협하는 빈곤과 기아 문제 역시 소설 속의 페스트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빈곤과 기아라는 페스트 자본가 정치 권력자들에 의해 좌우되고, 고통받는 이들이 여전히 수많이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가 좌절스러운 진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고통받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을 중단하게 만드는 이유는 되지 않는다. 지글러는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언급한 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아픔으로 느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23) 그리고 희망을 위한 출발점은 바로 공감(진실을 아는 ) 연대(손을 내미는 )로부터 시작할 같다. 지글러의 마디는 인간성 회복을 위해 독자에게 외치는 단호한 선언이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낄 줄 아는 유일한 생명체인 인간의 의식 변화에 희망이 있다." (23면)

"현재로서는 문제의 핵심이 사회구조에 있단다. 식량 자체는 풍부하게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것을 확보할 경제적 수단이 없어. 그런 식으로 식량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바람에 안타깝게도 매년 수백만의 인구가 굶어죽고 있는 거야." 

(37면)

"가격은 단 한 가지 원칙에 복종해. 바로 이윤극대화라는 원칙이지."
- 시장 가격의 본질에 대해 (75면)

"지금 전 세계는 ‘농촌사회의 종언과 지구 규모의 도시화‘라는 혁명 와중에 있단다."
-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되는 인구가 빈민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며 (125면)

"기아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 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고 아빠는 생각해." (152면)

"무엇보다도 인간을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게 된 살인적인 사회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엎어야 해. 인간의 얼굴을 버린 채 사회윤리를 벗어난 시장원리주의 경제(신자유주의), 폭력적인 금융자본 등이 세계를 불평등하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어. 그래서 결국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나라를 바로세우고, 자립적인 경제를 가꾸려는 노력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거야." (153면)

"이 이데올로기(신자유주의/시장원리주의)는 특히 위험하다. 중심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 (...) 이런 시장원리주의의 주장은 그야말로 넌센스다."
- 저자는 이 ‘자유‘를 ‘자본을 위한 자유‘, ‘자유시장을 위한 자유‘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163면)

"기아에 관한 한 시장의 자율서을 맹신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못해 죄악이다. 우리는 기아와 투쟁해야 한다. 기아 문제를 시장의 자유로운 게임에만 방치할 수는 없다." (169면)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고 썼다.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 서구 정치가들을 눈멀게 만드는 어리석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폐지되어야 한다." (169면)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171면)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부족한 것은 연대감이며, 국제 공동체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하는 진짜 의지다." (176면)

"소리 없이 매일 많은 사람을 죽이는 기아에 대한 범세계적 투쟁이 어려운 것은 또한 세계은행,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의 무차별적인 신자유주의 정책 때문이다." (18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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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블루문 데이, 이 보름달을 보라! | 기본 카테고리 2020-10-31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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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달빛 아래 과학 한 움큼

장수길 글
전파과학사 | 2020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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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과학  움큼

장수길 지음 | [전파과학사]





오늘은 블루문 데이 보름달을 보라!

그리고 보름달은 완전히 둥글지 않다.


10월의 마지막 날이다양력으로 이번  1일이 우리의  명절인 한가위였다이번 명절 때는 구름이 많이  편이었고게으름을 피워 보름달을 보진 못했다기상센터에서 제공한 정보에 의하면이번 한가위 보름달은 사실 명절 당일 다음 날인 10 2일에 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달의 모양은 태양지구 사이의 운동에 따라 만들어내는 우주의 과학인데우리가 달을 보는 저녁 시간대에   천체가 정확히 직선 상에 있지 않은 까닭이다그러니까 보름달이 언제나 완벽한 원형일 것이라는 믿음은 사실이 아니었다대개 1-2%정도는 부족한 셈이다우리가 보는 보름달은 완전히 둥근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달의 모양에 따른 주기(보름달에서 다음 보름달까지) 30( 29.5)  되지 않는다고 한다그러므로 경우에 따라 같은 달에 보름달을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다시 말해매달  1 혹은 2일에 보름달이  경우같은  말에  번째 보름달을   있다는 의미다    보름달을 블루문 blue moon이라고 한다이렇게 같은 달에  번의 보름달이 뜨는 경우는 쉽게 짐작할  있듯이 매우 드물다영미권에서 흔히 사용하는 표현 중에 once in a blue moon이란 표현이 매우 드문 빈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경험적 사실에 기반한 것이다인간이 발견한 사실이 인간의 문화와 언어 속에 스며들어 활용된 사례라고   있겠다.



     앞서 언급한 보름달과 블루문에 관한 이야기는 달에 관한 과학책 달빛 아래 과학  움큼으로부터 알게  사실이다  책의 저자는 30여년  고등학교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쳐온 과학교사다저자는 오랜 시간동안 학교라는 현장에서그리고 교실 안에서 학생들과 만나며 과학을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전달할  있을지 고민해왔을 것이다때로는 건조해 보이는 과학지식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과학시간에 저자는 종종  책에 나오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주지 않았을까 싶다문화 속에서 관용적으로 사용되어온 once in a blue moon이란 표현이 과학적인 기준에서 실제로 어느 정도의 빈도를 의미하는지 알고 싶다면베테랑 교사가 이어가는 흥미로운 설명을 따라가보면 쉽게   있다  권의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관한 과학과 문화에 관한 상식이 간결한 설명과 함께 곁들여 있다달이 이렇게 풍부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었는지 알게 되어 나에게는 새롭고 놀라운 발견이었다 책을 읽고서 달의 탄생에 관한 여러 가지 가설이나지구와 달이 모두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지구에서 달의 뒷면을   없다는 사실이 다시금 새롭고 신기하게 느껴졌다.



     다소 엉뚱한 생각이긴 하지만 블루문 blue moon 있으니 곧바로 레드문 red moon 없을까 상상해본다그런데 레드문이란 표현은 없어도 달이 붉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도 책에서 발견했다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바로 개기월식  달이 붉게 보인다고 한다월식이라고 하면 지구가 태양과  사이의 직선 상에 위치하여 태양의 빛을 가리게 되고지구의 그림자 속에 달이 숨게 되는 상황이다그런데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개기 월식이라면 그림자에 달이 완전히 가리는데달이 붉게 보인다는 말은  무슨 까닭일까궁금증이  커졌다저자의 설명에 따르면이것은 지구의 대기를 지나는  중에서 파장이  붉은  계열의 빛이 대기에서 일부만 굴절되어 달이 숨어버린 지구의 그림자 내부까지 상당 부분 도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반면 파장이 짧은 푸른  계열의 빛은 대기에서 붉은 색의 빛보다 산란이 심하게 일어난다고 한다그러면 산란된 푸른 빛은 지구의 그림자에 이르기 전에 사방으로  많이 흩어져 버린다는 것이다다시 정리해보면개기월식 붉은  계열의 빛이 지구의 그림자가 생기는  표면에  많이 도달하기 때문에 달이 붉게 보이는 것이다다음 월식이 있을 정말  표면이 붉게 보일지 확인해보고 싶다이렇게 서양에서는 붉은 색을 띠는 달을 재미없게 레드문이라고 하지 않고 블러드문 blood moon이라고 하는 모양이다달과 관련한 신비로움달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이 가미된  같아 달이 보다 감각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역사적으로 혹은 우리의  속에서 발견되는 달에 관한 이야기들이 담긴 부분이었다우리가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아도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권에서 달에 얽힌 전설이나 전래동화가 많다는 것을   있다 시를 포함한 문학의 형식에서도 혹은 불교나 유교 등의 동양적인 종교와 문화에서도 달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대상이다 책의 마지막 장은 이렇게 동서양의 문화 속에 남아 있는 달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려준다영화 <첨밀밀>에서 등려군이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 연인에게 달을 보라고이렇게 소름 돋는(?) 대사가 나왔던가기억이  나지 않는다언젠가 한번  영화를 보고 확인해보겠다저자가 알려주듯이 달은 이태백의 시나 윤선도의 시에서도 시인들의 벗이자 술친구이기도 했다인류문화사에서 달이 갖는 위상과 역할을 문학 속에서도 찾아볼  있는데특히  베른의 과학소설 달나라 탐험 지구에서 달까지 담긴 과학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에 주목해본다이러한 과학소설에 등장하는 작가들의 상상력이 오늘날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현실로 이루어 졌는지 알게 되면과학소설이 단순히 허구가 아님을 인정하게  것이다인류의 발전에 달에 관한 작가의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 요인이었는지   있다달에 가고자 하는 꿈과 열망이 결국은 현실로 이어진 것이다   



      책은 어깨에 힘을 넣고 장황하고 어렵게 달의 과학을 설명하지 않는다우리에게 오랫동안 익숙했던 달에 관한 일상의 과학을 이야기한다때론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바로  지점에서  걸음  나아가  가지를 덤으로  얻을  있다학생들과 함께 오랫동안 소통해온 교사의 경험에서 그만큼 청소년들이 읽기에도 접근성이 좋은  같다다만 달이라는  가지 주제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  가지 제약일 수는 있겠다한편 이를 달리 보면 하나의 대상에 대해 이렇게 풍부한 이야기를   있고달이 이렇게 우리의 삶에 깊이 관련을 맺어 왔음을 새롭게 확인하고 배울  있었다우리에게 친숙하고 익숙하다고 해서 우리가 대상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님을 깨닫는다그리고 무엇보다 오늘은 매우 드문’ 블루문 데이다한가위 보름달은 놓쳤지만오늘 밤에는 블루문을 보러 창밖을 봐야겠다오늘 놓치면 다음 블루문은 언제   있을지는 책에서 확인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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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을 발견하는 경험과 기억의 전염병 연대기’ | 기본 카테고리 2020-10-29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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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초판본 페스트

알베르 카뮈 저/변광배 역
더스토리 | 2020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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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트 La Peste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지음 |  변광배 옮김 | [미르북컴퍼니]




순간부터 페스트는 우리 모두의 문제였다고 말할 있다.”(91)


전염병의 정체가 확인된 도시가 봉쇄되면서 도시에 갇힌 사람들은 모두 배를 공동운명체가 된다. 막연한 공포의 정체가 밝혀지면서 거주자들의 삶이 추상에서 구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우리는 이미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 전염병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는지 지난 9개월 넘게 구체적으로 목격한 있다.  70여년 전에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가 발표한 페스트 우리가 겪은 상황, 구체성과 함께 비교하여 읽으니 우리의 경험과 깜짝 놀랄정도로 닮아 있음을 알게 되었다. 1947년에 발표된 소설은 34세의 카뮈가 연대기적 방식으로 실감나게 써내려간 전염병에 관한 작품이다. 프랑스령 알제리 해변에 위치한 오랑이라는 중소도시를 9개월 남짓 휩쓸어버린 페스트에 관한 이야기이다. 코로나19 감염병뿐만 아니라 페스트 역시 오랜 생명체의 역사를 거쳐 신중하게 진화해온 작동하는 하나의 체계였다. 소설이 단순히 허구의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은 이유는 전염병이 군림하는 봉쇄된 지역의 공동체가 겪는 구체적인 양상이 아주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얻은 인간의 경험들이 모두의 기억으로 전달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러한 전염병은 지구가 존재하는 결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전염병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단지 사람들만 사라져갈 뿐이다. 이런 까닭으로 소설의 화자는 봉쇄된 도시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기억을 이야기하기 위해 연대기를 남기게 것이리라. 사람이 사라지면 이러한 기억 또한 단절되기 때문이다.



     소설의 중심 화자는 30 중반의 의사 베르나르 리외다. 아마도 소설을 당시 작가의 나이와 비슷한 젋은 의사를 상상했을 법하다. 이야기 속에 묘사되는 의사와 의료 시스템에 대한 정보는 아마 카뮈가 10 후반부터 오랫동안 작가를 괴롭히던 폐결핵의 경험과도 무관하지 않을 같다. 병원이나 요양소, 병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소설에 상당히 반영되었을 것이다. 한편 2 세계대전 당시 기자 활동과 레지스탕스 조직 신문 편집자를 지낸 경험은 소설 속에서 기자로 등장하는 레몽 랑베르에게 적용되었을 것이다. 소설을 읽은 느낌을 간결하게 표현해보면 인간의 존엄에 대한 호소 아닐까. 다만 이와 관련한 정서가 오늘날 독자들의 정서에 거부반응이 없는지 확신하진 못하겠다. 카뮈의 시대와 비교해서 우리는 이미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극도로 파편화된 현대인들에게 인간에 대한 카뮈의 관심과 애정이 다소 부담스럽게 다가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삶을 다시 추적해보면 작가의 작품에 대한 이해의 실마리를 찾을 수는 있을 것이다. 카뮈는 1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 (1913) 출생했다. 그러니까 그는 20세기에 가장 참혹했던 전쟁을 모두 겪은 셈이고, 특히 2 대전 당시에는 30 전후의 청년으로 현실에 적극 참여하는 지식인으로의 행보를 보여주기도 했다. 게다가 신문 편집자로서 전쟁 상황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이를 전달한 경험을 통해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숱하게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인간이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면 인류에게 무엇이 남을지 명명백백하게 자각한 사람이 바로 카뮈가 아닐까.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점을 놓치지 말고 따라가볼 있을 같다.      



구체성으로 경험되는 페스트(우리 밖의 페스트)


     소설에서 전염병은 구체적으로 감지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도시 전역에서 쥐들은 이미 죽어있거나 피를 토하며 죽어갔다. 뒤이어 사람들은 하얗게 변해버린 , 거친 숨소리와 헛소리, 몸에 드러난 종기, 구토 병의 징후는 진화된 병원균의 치밀한 계획을 보여주었다. 번식하고 주변으로 퍼져나가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숙주인 인간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페스트가 경험되는 감각은 달라진 도시의 소음과도 관련이 있었다. 가게들은 문을 닫고, 차량은 제한되어 거리는 침묵 속에 놓여 있다. ‘침묵의 소리역시 사람들이 경험하는 전염병의 구체적인 사회적 징후였다. 병을 진단받은 환자는 경적소리를 내는 앰뷰런스에 실려 격리되고, 페스트에 걸린 환자는 적막 속에 고통스런 신음을 내며 죽어간다. 거리는 다시 적막 속에 이따금씩의 차량 소음과 기계 소음이 간간이 들릴 뿐이다. 그나마 전염병이 나타나기 전에는 항상 들리던 소음이었을 텐데 말이다. 이렇게 전염병은 다양한 모습으로 지각되며 실체를 드러낸다.



     도시가 봉쇄되자 도시에 남은 시민들의 또한 급변한다. 점은 이미 현재 진행중인 전염병으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70여년 전에 작가가 묘사한 삶의 변화 또한 지금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같다.  치료약이 부족해지고, 병실에는 환자가 넘쳐난다. 가게들이 문을 닫고 경제활동이 중단되어 실업자와 다름없는 휴직자들이 넘쳐나게 된다. 이들은 영화나 오페라를 보며 시간을 보내려 하지만 필름 유통이 중단되고, 레퍼토리에는 변화가 없다. 물자가 공급이 차단되니 차량 운행이 금지되고, 행정 당국에서 배급해주는 음식에 적응해야 했다. 우편물 반출이 안되니 통신수단마저 전보로 제한되었다. 이러한 문제는 물질적인 제약뿐만 아니라 가차없고 기약없는 이별을 겪은 모든 이들에게 심리적 고통으로 다가온다. 감옥 밖의 수감자와 다름 없는 생활을 감내하며 고독과 회한, 체념의 정서를 경험한다. 코로나 전염병을 겪으며 몸과 마음에 가해진 구속을 통해 경험한 것을 통해 소설의 상황이 실감나게 이해되었다. 사람과의 거리두리를 통해 환자와 보호자와의 강제 격리와 극단적인 고립과정을 통해 동정심에 피곤을 느끼고, 윤리 의식마져 변화가 찾아오는 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온전한 인간으로서 각자 자신의 삶에 집중하여 스스로를 돌보고 타인에게 공감하는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전염병이 오래 정체되면 결국 사람들은 인간되기의 과정에 스스로 탈진해버리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봉쇄된 지역의 사람들에게 삶은 이제 단단한 지면에 발을 딛지 못하고 부유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할 있는 인간은 스스로를 방치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인간이 경험하는 호락호락하지 않은 조건에서도 자신과 타인에게 손을 내미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화자인 의사 베르나르 리외 뿐만 아니라 조제프 그랑, 타루와 같은 인물들은 전염병이 한창 진행될 때에도 의료봉사대에 자원하여 활동했다. 뒤에서 타루에 대해 좀더 언급할 것이지만, 조제프 그랑 같은 인물은 작품에서 존재감이 크지 않아보이지만 실은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그랑은 50대의 시청서기로, 노란 콧수염의 키가 크고 구부정한, 다소 소심한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인물이다. 출세를 하기 위한 커다란 포부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전염병이 돌자 자신의 외에 의료보건대의 서기를 맡겠다고 인물이었다. 이런 그랑이 소설 속에서 나름의 위치를 차지한다고 이유는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 작은 역할이나마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이었다. 혈청을 개발하느라 힘을 쏟는 늙은 의사 카스텔처럼 그랑은 자신이 있는 일에 조용히 일상의 노력을 기울이는 존재다. 그랑(Grand) 이름과 대조적으로 보이는 사람의 작은 참여, 움직임을 통해 하나의 일상이 지닌 가치와 무게를 가만히 느낄 있었다.



     이런 국면에서 우리는 무엇을 달리 있을까. 아마도 절망적이고 단조로워 보이는 이런 노력들이 우리의 필연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든 것을 무시하고 병에 걸리지 않게 기도하거나 살아 남아 여생을 살던가, 그렇지 않으면 병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선택지가 있을까?  그랑이 자신의 역할을 흔들림없이 꾸준하게 완수해나가는 것처럼 주요 화자인 리외 역시 이런  행동에 대해 확고하고 구체적인 윤리 의식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리외는 무신론자로서 파늘루 신부와 달리 신의 섭리를 믿지 않는다. 대신 패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본분을 다하는 뿐이라고 믿는다. 도시가 봉쇄되기 직전 아픈 아내를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요양소로 보낸 리외는 의도치 않은 이별을 겪었다. 연락도 제대로 취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이 있는 일을 흔들림없이 해내고자 하는 인물이다. 물론 리외는 타루에게 자신이 가난한 노동자 가족 출신으로서 처음에 의사가 것은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직업이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제 치명적인 전염병의 가운데에서 리외는 도의로 페스트와 싸우며 헌신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랑과 리외는 페스트의 도래 이후 구체적인 가치관 행동 기준에 따르는 인물이다.  



추상성으로 기억되는 페스트(우리 안의 페스트)


     소설을 읽으면서 줄곧 문자 그대로의 질병인 페스트가 가져온 삶의 변화와 국면들을 실감나게 따라갈 있었다. 그런데 어느 지점에서 페스트가 새로운 의미를 지니며 의미가 확장되는 순간이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 흥미롭게 다다온 인물이 바로 타루이다. 타루는 결론적으로 말해 10 후반에 가출하여 오랑에 정착한 인물이다. 검사였던 아버지를 유복한 가정의 아들이었다. 타루는 어느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내린 공판을 보기 까지는 부자간에 사이도 좋았을 것이다. 타루는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내려 사람의 목숨을 결정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타루는 자신의 개인사를 리외에게 들려주는데, 자신은 오랑에 와서 전염병을 만나기 전에 이미 페스트 고통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곧바로 알듯말듯한 말을 리외에게 덧붙인다. “나는 그때 적어도 경우 세월 동안 끊임없이 페스트에 걸려 있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333) 실제로 페스트에 걸렸다는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런 상황에서 타루는 가지 실마리를 전해준다. 타루는 내가 간접적으로 수천 명의 사람들의 죽음에 동의했다는 , 숙명적으로 이런 죽음을 유도한 행위나 원칙을 ()이라고 여김으로써 그것을 야기하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다(333). 그러니까 타루가 자신의 개인사를 꺼내며 언급한 페스트 전염병으로서의 페스트가 아니었던 것이다. 우선적으로 파악되는 의미는 사형제도 인권과 관련 있다는 단서였다. 타루는 사형선고를 역겨운 도살 행위라고까지 표현하며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사형선고를 내리는 행위 자체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타루가 우리 모두는 페스트 속에 있다’, ‘내가 명명백백히 알고 있는 것은, 각자가 그것을, 페스트를 자기 속에 지니고 있다는 이라고 말했을 (336), 그가 사용한 페스트 의미를 좀더 분명하게 이해할 있었다. ‘붉은 법복을 입은 그들 최상급의 페스트 환자들이라고 표현한 것에서도 연관성을 뚜렷하게 확인할 있다. 다시 말해 타루가 언급한 페스트 사형선고와 같이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인간 사회와 문명의 야만, 제도의 폭력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인간이 저지르는 이런 잔악한 행위와 제도에 무감각한 , 이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 말로 타루가 말한 페스트 걸린 징후라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경험으로 다가오는 실체적인 질병으로서의 페스트는 타루의 경험과 기억을 거쳐 추상적인 페스트 거듭나게 되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질병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타루가 자신의 입으로 이야기하는 부분이 특히나 흥미롭게 다가왔다. 타루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만들어 놓은 관습과 억압의 폭력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함으로써 자신도 일종의 가해자임을 느끼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연대의식과 죄책감을 느끼는 예민한 양심의 소유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지성인이기도 했다. 인간이 인간임을 주정하는 행위,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행동과 관습을 돌아보게 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타루의 페스트 비가시적인 대상으로 다가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잠식하는 야만의 상태로도, 혹은 우리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 악마를 지칭하는 추상적 개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 읽다보면 이렇게 이질적인 개념의 페스트 등장한다. 하나는 구체적인 전염병으로서의 페스트라면, 다른 하나는 상징적인 하나의 추상적 개념으로서 페스트. 타루가 꺼내는 자신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추상은 분명히 사형제도로 대변되는 인권문제와 우선적으로 관련이 있음을 있다. 앞서 언급하긴 했지만, 카뮈가 소설을 시기는 2 세계대전과 겹친다. 전쟁터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제외하고도 나치 독일에 의해서만 600 이상의 유대인이 사망했으며,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독일인이 60 명이 사망한 시기다. 전쟁의 본성 인권이 유린당하는 야만의 시기였음을 잊지 말아야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조종할 있다는 개념 자체에 대해 수많은 지식인들이 좌절과 회의감에 빠지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인간으로서 싸워야하는 대상은 병원균과 바이러스 뿐만 아니라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으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각은 무엇보다 시대를 견디어온 당대 지식인의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카뮈에게 페스트 인간성을 파괴하는 인간의 무지와 몽매를 상징하는 단어로 자리를 차지했을 같다. 그러므로  페스트에는 때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