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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적인 나의 삶을 마련하는 법 -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기본 카테고리 2017-02-28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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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빌헬름 슈미트 저/장영태 역
책세상 | 2017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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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빌헬름 슈미트 지음  |  장영태 옮김  |  [책세상]



(소풍 - 철학으로의 초대)

'남녀 두 사람이 같은 한 침대에서 서로 등을 지고 반대 방향으로 어긋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자는 손에서 책을 놓고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듯하다.' 이 책 <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의 저자 빌헬름 슈미트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철학으로의 소풍]을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림 속에 포착된 어느 한 순간의 실존적 고독이 고스란히 부각되어 있는 듯하다. 슈미트는 소외의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소외는 근본적이며, 속일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다.”(25면) 이 그림은 호퍼의 다른 작품처럼 정적과 부조리할 정도로 느껴지는 햇빛과 고독으로 가득한 한 삶의 에피소드를 표현해내는 듯하다. 어쩌면 그림 속의 남자가 손에서 책을 놓고 생각에 잠겨있는 순간이야 말로 비로소 ‘철학으로의 소풍’이 가능한 순간이 아닐까. 


왜 호퍼는 [철학으로의 소풍(Excursion into philosophy)]라는 제목을 이 그림에 붙였을까. 소풍은 우리의 흔한 일상은 아니지만 우리 삶에 친숙한 요소이다. 나아가 익숙한 일상을 벗어난 여행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소풍은 ‘매우 짧은 여행’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우리가 사는 ‘다른’ 현대 속의 바쁜 스케줄(삶이 아닌) 속에서 익숙하지 않은 구조를 잠시 벗어나 ‘나’를 찾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다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본다. 호퍼가 ‘사실주의 화가’라고도 불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의 그림이 마음에 드는 것은 그림의 인물과 배경이 어우러져 내뿜는 정적, 고요함의 정서가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묘하게도 그림은 너무나 ‘사진적’이란 느낌을 주고있다. 사진에는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배경의 사물이 담긴다. 사진 작가는 자신이 보는 대상의 어느 한 프레임만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만 보이는 액자, 일부만 보이는 창문, 조각나있는 햇빛. 이렇게 호퍼는 실존적 삶의 한 순간을 담았다. 이 순간을 저자 슈미트는 다음과 같이 첨언한다. “이 정지의 순간이, 철학과 성찰의 순간으로서의 정지가 본보기로 포착되어 있다.”(22면)

이 정지의 순간은 슈미트가 호퍼의 그림에서 지적한 ‘의미없는 햇빛’이 충만한 공간과 이를 가득 채운 시간을 의미하는 것 같다. 따라서 이 ‘무의미한’ 햇빛은 결코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이 ‘정지한 순간’의 중요성은 슈미트 역시 사소한 것이 아닌 오히려 매우 소중한 시간임을 재인식하고 있다. “빈 시간은 자신의 일관성을 회복하고, 새롭게 형상화할 수 있는 자기의 시간인 것이다.”(124면)


결국 호퍼의 그림에서 그림 속 남자가 책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긴 이 순간은 그림 속 다른 한 곳에서 무심히 보이는 창 밖의 풍경처럼 자신을 밖에서 바라보게하는 시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슈미트는 이 ‘빈 시간’을 통해서 비로소 주체는 ‘시간을 소유’하기에 이르며 “자기 자신 및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리고 다른 일들을 위한 시간을 갖게 된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시간을 소유한다는 것’을 ‘편안하게 살아온 실존의 형식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곧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한편, ‘시간 소유하기’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모든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마치 우리가 <어린 왕자>중에서, 여우와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대목을 흔히 떠올리듯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저자가 ‘익명성과 보편성을 떨쳐’버리고, ‘특수성’을 갖게 됨을 의미할 것이다. 이름을 지어주고, 이름으로 서로를 불러주는 것이 곧 ‘나의 시간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소품)

책을 다 읽고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을 다시 살펴보니 저자는 독자들을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하는 시간으로 초대하기 위해 이 그림을 제시한 것 같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은 탁상공론과 같은 ‘철학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삶에 활용될 수 있는 ‘도구’로서의 기능성을 염두해둔 듯하다. 이 책에는 ‘쾌락누리기’, ‘쾌활함’, ‘분노’, ‘반어와 멜랑콜리’와 같은 다양한 주제로의 ‘짧은 여행’을 의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생각되는 점은 저자 빌헬름 슈미트가 책 전반에 걸쳐 ‘주체적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한 소품으로서의 철학하기’를 줄곧 말하려는 듯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나를 낯설게 바라보기’가 아닐까.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 두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으로의 소풍]일 것이다. 


빌헬름 슈미트는 성찰적, 철학적 ‘삶의 기술’을 이야기하기 위해 세네카, 아리스토넬레스,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고대 철학자 뿐만 아니라 몽테뉴, 니체, 키르케고르, 쇼펜하우어, 하이데거, 아도르노, 빅토르 프랭클, 미셸 푸코와 같은 익숙한 이름의 철학자, 사상가를 소환한다. 책을 읽는 도중에 받은 느낌은 어쩌면 이 책은 몽테뉴의 <수상록>과 재독철학자 한병철 교수의 저작들 사이의 어느 한 지점 즈음인 인상을 준다는 점이었다. 흥미롭게도 역자 후기에서 책의 역자도 역시 한병철 교수를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무한 긍정의 성과 사회’나 근대를 ‘부정성의 제거’와 연관지어 설명하고, ‘부정성의 긍정’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한병철교수의 스타일을 떠올리게 하는 점이 있다. 반면 에세(essai)라는 자기 탐색적이고 성찰적인 글쓰기 장르를 처음 시도했던 몽테뉴 처럼 저자 자신의 개인적 성찰을 담고 있지는 않으나 주제의 선정 및 책의 구조가 몽테뉴의 <수상록>을 떠올리게 하는 특징은 분명히 존재한다. 아울러 ‘성찰적 삶의 기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만큼, 몽테뉴의 글쓰기 방식은 은연중에 이 책의 저술과정에도 분명 영향을 준 요소라고 볼 수 있을것이다. 




(가상공간에 대한 사유의 확장)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슈미트는 과거의 철학자, 사상가들을 소환하여 삶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들에 대해 성찰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 나아가 과거의 철학자들이 다루어 본적없는 ‘가상공간’을 이야기 하기도 한다. 한병철의 저작에서 ‘정보’와 ‘지식’의 구별짓기를 시도하며 그 특징을 설명하듯, 슈미트도 ‘정보’와 ‘주체적 지혜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슈미트는 ‘정보’를 ‘일상의 사물을 밀어내버리는 기형적인 물건들’이라는 빌렘 플루서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 ‘기형적인 물건들’인 정보가 떠다니는 무한한 가상공간의 현실을 긍정할만한 점이 있다면 이는 ‘탈중심적 정보 전달 공간’으로서의 기능일 것이다. ‘정보의 바다’로서 긍정적으로 평가해본다면, 우리는 무한에 가까운 정보를 담고있는 이 공간을 하나의 사전, 나아가 도서관으로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지구 반대편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을 가상공간에 마련된 상거래 플랫폼을 통해 구입하거나 조달할 수 있다는 장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정보를 ‘어떻게 얻고, 정보의 중요도의 순위를 결정하는 일’이 중요해진다는 점을 슈미트는 지적하고 있다. 곧 우리의 삶이 충만해지도록 이러한 행위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보의 ‘관리’는 여전히 주체의 몫으로 남는다는 것이다. 가상공간에서 정보의 사용 주체로서 우리에게는 의무가 주어지는데 그것은 “정보와 통신이 한도를 넘어설 때 그 양을 줄이고 성찰의 공간을 다시 획득하는 것이 삶의 수행에서 의무가 된다.”(224면)라는 점이다. 우리가 정보를 관리하는 주체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 주체성을 상실하게 될 것을 슈미트는 다시금 경고한다. “타자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려면 자신의 고유한 정보능력을 획득해야만 한다. 그렇지 못하면 ‘정보 엘리트’에게 자신을 내 맡기는 길밖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229면)라는 것이다. 곧 우리가 정보의 ‘수문지기’가 되라는 주문일텐데, 이 주장은 ‘정보’에 관해 의심을 갖고, 근거를 찾아내며, 독자적으로 판단하라고 말하던 언어학자 촘스키의 입장과도 일치한다. 정보로 넘쳐나는 가상공간을 만약 몽테뉴가 21세기를 살면서 목격하고 체험해 보게 된다면, 아마도 ‘삶의 주체’로서 이와 같은 입장을 표명했을 것같다. 




(죽음을 부정하는 시대-우리는?)

언젠간 다가올 ‘죽음’에 대해 독특한 견해를 피력한 몽테뉴의 <수상록> ‘죽음에 대하여’를 보면,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정온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면 만족한다는 몽테뉴의 독특한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엄연한 자연의 질서인 반면, ‘죽음’에 대한 관점 및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다. 특히나 현대는 ‘죽음’이 거부당하는 시기라고 서경식 교수는 지적하고 있지 않은가. 나의 조부/조모만 해도 모두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공간이 병원/요양원이 되어 버렸다. 가정에서 ‘죽음’은 금기시되어 버렸고, 거부당하는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슈미트는 “삶의 기술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지 죽음에 이르는 존재가 아니다.”(43면)라고 강변한다. 곧 타인의 죽음은 곧 나의 유한성 내지는 한계를 자각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고 이해된다. 앞서 슈미트가 제시했던 에드워드 호퍼의 [철학의로의 소풍]도 역시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삶의 한계’에 대한 인식의 순간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이유는 슈미트가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한계의식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44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기도하다.


아울러 슈미트는 죽음의 순간을 다음과 같이 ‘낯설게 이야기하기’를 시도한다. “죽음은 솔직함의 극단적 지점이며, 더 이상 회피를 용납하지 않는 진리의 순간이다.”(109면) 곧 죽음이란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개인의 삶이 ‘완성’되는 시점일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죽는다. 우리는 모두 생명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슈미트는 우리가 죽음의 면전에서 제기되는 마지막 질문을 상상한다. “그것(나의 삶)은 아름다운 삶, 충만한 실존이었나?”(109면)라고 말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20여 년 전 나의 학창 시절에 읽어본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의 마지막 연을 떠올려본다.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의 시에서 나는 ‘죽음’에 대한 염려, 두려움, 또는 부정성을 발견할 수 없다. 자신의 ‘짧았던 인생’을 ‘소풍’으로 보았던 시인은 바로 자신에게 ‘아름다운 삶’을 살았노라 말하길 희망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의 한 장인 ‘죽음을 동반하는 삶에 대하여’에 표현한 슈미트의 의도는 천상병 시인의 이 싯구에 모두 담겨있다고 본다. 



(오늘의 소풍을 끝내며)

이 책은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하룻밤에 읽어내는 책이라기보다 독자의 일상에서 독자의 눈에 띄는 주제 하나를 읽어보고, 다시 책을 내려 놓은 다음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한 문장, 한 문장 긴 호흡으로 텍스트를 따라가며 음미해보면, 급한 마음에 빨리 읽을 때 전혀 다가오지 않았던 문장들이 어느 순간 일어나서 나에게 다가오기도 했다. 이 책이 한병철 교수의 저작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점 또 하나는 이 책이 한병철 교수의 책보다 조금 더 ‘추상적’(혹은 막연함)이라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슈미트는 독자와의 적절한 ‘거리두기’를 의도함으로써 ‘독자 나름의 소풍’으로 초대하고 싶었을 수도 있겠고, 혹은 우리 각자의 보다 긴 삶이 이러한 ‘짧은 여행’인 소풍들을 통해 더욱 아름답게 가꾸어 질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도 오늘의 ‘소풍’을 마무리하고, 다음 ‘소풍’을 새롭게 기대해본다. 






(이 리뷰는 예스24 리뷰어클럽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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