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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독자의 팩트체크와 번역가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다 | 기본 카테고리 2021-05-19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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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독자의 팩트체크와 번역가의 일에 대해 생각해보다

- 조지 오웰의 평론(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을 중심으로

 

몇 달 전에 어느 블로거분이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 주셨다. 내가 딱 1년 전(2020516)에 올린 글에서 잘못된 부분(사실 내가 크게 실수한 것)에 대해 지적하고 수정해주신 것이다. 내가 이 댓글을 그동안 발견하지 못해서 몇 달간 방치되었다. 내가 올린 글은 조지 오웰의 평론집 책 대 담배(민음사, 2020)중에서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이란 글을 읽고 적은 글이었는데, 바로 아래 부분이 문제가 되었다.

 

반면 작가들은 혹독하게 탄압받고 있다. 일리아 에렌부르크나 알렉세이 톨스토이 같은 문학 매춘부들이 막대한 돈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들에게 가치 있는 유일한 표현의 자유 같은 것은 박탈당하고 만다.”(책 대 담배, 38)

(내가 올렸던 글 자유로운 지성인의 모습을 읽다 - 조지 오웰의 《책 대 담배》

(blog.yes24.com/document/12498876)

 

여기서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조지 오웰이 비판한 사람이 레프 톨스토이로 착각하고 글을 썼던 것이다. 난 이 대목을 읽고 계속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글을 올릴 때까지도 나의 의혹에 대해 아무런 확인을 하지 않았다.

 

내 블로그에 댓글로 친절하게 알려주신 블로거의 설명을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알렉세이 톨스토이와 레프 톨스토이는 다른 분이에요. 알렉세이 톨스토이가 문단의 창부라고 비난 받은 요인은 스탈린 정권을 찬양해서인데, 레프 톨스토이는 재정러시아 시대 사람입니다.

 

... 이 대목을 읽은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과거에 내가 남긴 독후기며 리뷰에서 자신 있게써댄 여러 의견들에는 또 얼마나 많은 오해와 헛발질이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글을 쓰면서 내가 떠올린 의혹들에 대해 확인하고 검토할 생각을 그동안 게을리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인해야겠다. 여기에 나는 한술 더 떠서 역시 조지 오웰은 대문호 톨스토이까지 비판하는 것처럼 이 사람 앞에는 비판의 사각지대는 없었다라는 식의 어처구니없는 평까지 달아놓았던 것이다. 너무나 부끄럽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내가 틀린 부분을 알았으니, 이를 바로잡아야겠기에, 다시 기본적인 사실을 조사하여 나의 잘못을 바로잡기로 한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는 온라인 서점의 서재든 개인 블로그이든 아무리 편하게 글을 올리는 공간이라고 해도, 글쓰는 사람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불문율을 지켜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조금의 의혹이라도 있다면, 스스로 검증하고 검토해볼 것. 그리고 답을 알아내지 못하더라도 검토하는 시늉이라도 할 것. 나아가 전혀 자신이 없다면 내 글에 집어넣지 말 것! 나는 최소한의 의무도 소홀히 했던 것이다. 내 블로그에 댓글을 달아주셨던 분은 출판 분야에서 일하시는 분일까, 아니면 문학 전공자가 아닐까 싶다. 아무쪼록 나의 무지와 실수를 지적하고 바로잡아주신 점에 대해 감사를 드린다.

 

조지 오웰의 책은 많이 읽지 못했는데, 공교롭게도 나는 이번에 문제가 된 부분을 언급한 조지 오웰의 평론이 실린 평론집을 몇 권 소장하고 있었다. 나는 첫 번째 책으로 책 대 담배(민음사, 2020,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제목의 글, 38), 두 번째 책으로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실천, 2013, 첫 번째 책에 실린 글과 동일한 제목의 글, 341),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 문학 예방이란 제목의 글, 239)를 서로 비교해보았다. 과연 이 부분에 대해 번역자는 주석이나 추가 설명을 하고 있을지부터 살펴보았다.

 

조지 오웰의 평론집 세 권에 실린 동일한 글을 비교해보니, 흥미로운 점 몇 가지가 있었다. 우선 가장 먼저 나온 나는 왜 쓰는가에 이 대목에 관한 충실한 주석이 실려 있었다. 번역자의 주석을 여기 그대로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주석13, 239) Illya Ehrenburg(1891-1967). 러시아 및 소련의 작가이자 언론인. 소련 시절 많은 작품을 썼으며, 2차 대전 당시에는 소련을 선전하기도 했으나 스탈린과 거리를 두는 대담한 글을 쓰기도 했다. 전후에는 검열을 비판하는 소설 해빙기(1954)를 출간했고, 스탈린 치하에 금기시됐던 인물들에 대한 언급을 담은 회고록을 내기도 했다.

 

(주석14, 239) Alexei Tolstoy(1883-1945). 공상과학소설과 역사소설을 특히 많이 쓴 작가. ‘백작 동지란 별명으로 불리곤 했다. 스탈린 체제를 옹호하는 선전 글을 많이 썼기에, 러시아 귀족 중 거의 유일하게 소련에서 귀족 칭호를 공공연히 쓸 수 있는 인물이었다.

 

어떤가?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15)의 번역가 역시 이 부분을 염두에 두고 자세한 주석을 남겨놓아 다른 독자가 나와 같은 오해의 소지를 명백히 없애주었다. 다만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본문에서 문단의 창부라고 언급하고 있는 대목은 해당 작가의 역할과 책임을 조지 오웰이 비판하고 있는 맥락이기 때문에, 에렌부르크의 경우 스탈린과 거리를 두었다는 행적 보다는 소련을 선전했던 과거 행적에 주목하여 좀 더 정리해주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설명만으로는 조지 오웰이 왜 에린부르크를 그토록 비판했는지 이해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두 번째 책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이론과실천, 2013)의 경우는 어땠을까? 흥미로운 점은 번역자가 같은 대목에서 예렌부르크한 사람에 대해서만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고 있다.

 

(341면 각주) 예렌부르크(Il'ya Grigor'evich Erenburg, 1891-1967). 우크라이나의 소설가이자 시인, 평론가.

 

이 책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의 번역가는 예렌부르크에 대해 간결하게 각주를 달아놓았다. 그러나 본문의 맥락에서 이 사람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를 알려주긴 해도, 맥락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지 여전히 정보가 많이 부족하다. 나를 더 당황하게 만든 지점은 알렉세이 톨스토이에 대한 주석이 아예 없다는 점이었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하나는 나처럼 알렉세이 톨스토이를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로 오해했을 가능성이다. 그러나 국문학을 전공한 번역자가 이 부분을 잘못 볼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가능성은 번역자와 해당 출판사의 편집자 모두 독자가 레프 톨스토이라고 오해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너무 명백하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번역가나 편집자는 독자가 해당 인물에 대해 자세히 조사할 필요도 없다고, 레프 톨스토이가 아니라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을 것 같다. 중년이 다 되어 문학을 읽기 시작한 나 같은 어설픈 독자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독자가 여기에서 과연 오해할 여지가 있을까 판단했을법하다. 다만 이 판본의 아쉬운 점은 예렌부르크에 대한 주석이 기계적인 부연 설명이 아니라, 독자가 맥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추가되었으면 하는 점, 그리고 알렉세이 톨스토이에 대해서도 주석을 달아주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내가 비교한 책은 민음사의 책 대 담배(민음사, 2020), 내가 직접 읽고 블로그에 독후기를 올리며 인용했던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작은 총서 쏜살문고로 나온 판본으로 해당 부분(38)을 비롯하여 주석은 아예 없다.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오스카리아나를 비롯하여 쏜살문고 시리즈를 좋아하지만, 조지 오웰의 이 평론집(책 대 담배)에는 아쉬운 점이 많다. 조지 오웰의 글에 아무런 주석이 없어서, 그래서 나의 게으름(팩트체크를 하지 않은 것)을 보완해줄만한 장치가 아예 없었다는 것. 또 하나 아쉬운 점은 이제 책 대 담배를 한 번 읽었을 뿐인데, 책이 말 그대로 해체될 위기에 있다는 점이다. 책을 구입하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책을 소장한다는 것은 누구나 여러 번, 언제나 읽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구입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 가벼운 판본들에 대해 열**들 출판사처럼 사철제본까지 바라지는 않겠지만, 여러 번 펼쳐보아도 책의 모양이 그대로 유지될만한 책을 만들어주셨으면 좋겠다. 내가 소장한 이 책은 한 번 읽었고, 이제 이 글을 쓰면서 여러 번 펼쳐보았는데, 종이들이 떨어져 나올 위기에 있다.

 

또 사족인 줄 알지만 오웰의 동일한 평론 제목에 대한 번역에도 할 말이 있다. 2010년에 처음 출간되어 2011년에 5쇄를 찍은 나는 왜 쓰는가의 해당 평론의 제목은 문학 예방(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이다. 물론 모든 번역 작업은 번역자의 경험과 가치관에 따라 결정되는 문제이므로, 여기에 정답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시작해야 겠다. 다만 이 제목은 개인적으로는 너무 간결하고 함축적이어서 이 표현을 보고 어떤 내용일지 짐작해보기가 쉽지 않다. 반면, 2013년에 출간된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2020년에 출간된 책 대 담배에 실린 해당 글의 제목은 문학을 지키는 예방책으로 공교롭게도 동일하다. ‘문학 예방보다는 글의 내용이나 성격을 추측하기 친절하게 풀어 번역이 된 것 같다. 다만 영어 제목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을 번역하여 이렇게 동일한 표현이 나왔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지점이다.

 

정리해보자. 조지 오웰이 자신의 평론 The Prevention of Literature에서 비판했던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레프 톨스토이와 다른 사람이며, 생존했던 시대마저 달랐던 인물이었다. 알렉세이 톨스토이는 스탈린 시대의 사람이었고, 레프 톨스토이는 재정러시아 시대 사람이었다. 독자마다 얇고 가벼운 판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충실한 주석을 더 좋아하는 독자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좋은지는 취향의 문제일 수 있다. 나는 후자의 취향에 가깝다. 다만 이번 기회에 배운 점은 아무리 가벼운 독후기를 쓰더라도 일말의 의혹이 있다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써야 한다는 점이었다. 당연한 과정인데도,나는 이를 소홀히 했다. 이건 글쓰는 사람의 기본적인 의무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책임의 필요성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참고로 나처럼 글의 맥락에 맞는 번역가의 주석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조지 오웰의 평론집에 한하여 다른 독자들에게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를 우선 권하겠다.

 

 

라틴어 서적의 한글 표기에 관해

 

여기서 조지 오웰의 같은 평론을 언급한 김에 한 가지 더 추가해보겠다. 해당 평론(‘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의 앞부분에서 조지 오웰은 존 밀턴의 책 아레오파지티카을 언급하는데, 이 책제목 대한 표기가 눈에 들어왔다. 이 책 제목 Areopagitica는 나의 짧은 언어 지식으로 판단해도 분명히 라틴어 제목이다. 그리고 라틴어에서 g는 모두 //소리가 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기서 나는 개인적으로 고전 라틴어 발음만 찾아보았다고 인정해야 겠다) 그런데 밀턴(1608-1674)의 시대에는 중세 라틴어를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므로, 이 시기에 g소리가 어떻게 바뀌거나 확장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중세 라틴어에서 g소리가 // 소리뿐만 아니라 // 소리로도 확장되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 대해 명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나의 부실한 고전라틴어 발음 지식만을 가지고 판단해본다면, ‘Areopagitica아레오파티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부분에 대해 명확한 답을 얻진 못했지만, 내 견해를 지지해줄만한 증거는 몇 가지 있다. 우선 박상익 교수가 연구하고 옮긴 아레오파기티카(인간사랑, 2016)였다. 박상익 교수(역사학)는 밀턴 연구로 학위를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고, 언론자유의 경전이라고 불리는 이 책을 전면재번역하여 개정판을 낸 분이다. 내가 중세라틴어 발음에 대한 지식이 없긴 하지만, 밀턴 전공자가 아레오파티카로 발음을 옮긴 것이 한 가지 간접적인 증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참고해볼만한 증거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 나오는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라는 문장이다(데카르트가 이 문장을 썼을 161911월 즈음). 여기서 이 문장은 코기토 에르고 숨으로 읽힌다. 따라서 g'에 대응하는 소리는 모두 //소리임이 분명하다. 데카르트의 시대 역시 분명히 중세 라틴어의 전통을 이어받아 사용했을 것이므로 Areopagitica의 발음표기는 아무래도 아레오파티카로 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 내 견해다.

 

사실 이 발음표기 문제는 먼저 언급한 인명을 착각한 상황만큼 중대한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언어 지식이 빈약한 이공계 전공자가 이 문제로 한 번 고민해봤다면, 이 평론을 번역한 어문학 전공자, 교수님은 당연히 이 점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특히 언제나 글을 쓰고 글을 다듬고 하는 인문계 전공자들이야말로 나보다 훨씬 더 민감하게 이런 부분을 검토하고, 라틴어 발음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시지 않았을까 추측만 해볼 뿐이다.

 

 

책 대 담배

조지 오웰 저/강문순 역
민음사 | 2020년 03월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조지 오웰 저/조지 패커 편/하윤숙 역
이론과실천 | 2013년 01월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저/이한중 역
한겨레출판 | 2010년 09월

아레오파기티카

존 밀턴 저/박상익 역
인간사랑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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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주체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묻다’ | 기본 카테고리 2021-04-02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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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계간 창작과비평191(봄호)

대화: ‘청년, 한국사회를 말하다‘를 읽고

 

삶의 주체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묻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돈과 관련 된 모든 것이 화두가 되었다. 뉴스를 보면 주식과 부동산 이야기, 그리고 비트코인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인 듯하다. 대학생들과 젊은 직장인들의 주요 화제는 주식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어느 유명 연예인이 일반인들의 주식 모임에 가서 주식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모습을 TV를 통해 본 적도 있다. 최근에 잠시 들린 어느 책방에서는 직원들이 주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걸 듣게 되었다. 마치 내가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기서 새로운 문제는 사회의 분위기가 주식을 하지 않거나, 내 집 마련에 굼떠 보이는 사람을 보는 시선이다. 주식에 대한 대화에 참여하지도 못하는 사람은 마치 바보가 된 느낌을 받기 쉽다는 점이었다. 이 점은 청년 활동가의 대담에서도 지적된 문제점이다.

 

지인 중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있다.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소득 수준이 대체로 좋은 지역의 아이 중에는 부모가 자신의 이름 앞으로 국내 대기업이나 해외 유명 스마트폰 회사의 주식을 사주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들었다. 대학교에는 주식투자를 연구하는 소모임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대담 참여자들의 문제제기처럼 경제가 최고의 가치 중심이 된 사회에서, 나아가 코로나19로 사회의 구성원들이 봉쇄, 혹은 특별 제제 및 관리의 대상이 된 상태에서, 우리 삶의 국면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현실에 직접 예민한 감각의 촉수를 내리고 보다 나은 삶을 꾸려나가고자 도전하는 젊은 활동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든든했다.

 

앞으로의 문제는 팬데믹이 이번 코로나19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과 우리 삶을 지배하는 자본의 영향력이 더 줄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삶이, 그리고 우리가 믿고 있던 모든 가치가 마치 자본을 기준으로 재편되고 있는 것 같다. 활동가 공현의 지적처럼, ‘내가 이렇게 (주식/부동산) 공부를 했으니 보상을 받아야 한다, 보상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가치관이 세대를 막론하고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본다. 이번 대화편을 통해 모든 참여자들의 진단이 나에겐 새롭게 환기된 사항들이었고, 큰 배움을 주었다. 그 중에서 활동가 공현이 교육 문제를 잠시 언급하며 학생들이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관리의 대상이라는 취지로 한 언급이 기억에 남았다. 다시 돌아보니 모든 참여자들의 활동은 각자의 영역에서 스스로 삶의 주체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우리의 삶은 본래적으로 결핍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은 한 사람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으며, 무리를 이루고 사회를 구성하는 이상, 각기 다른 욕망들이 충돌하게끔 되어 있다. 이럴 때 구성원들이 마주하게 되는 이런 문제들은 정부가 왜 이걸 해결해주지 않는가?’라고 묻는 것에서 끝나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대담에 참여한 청년 활동가들의 모습은 삶의 주체가 되는 인간되기를 몸소 실천하고 배우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대화자들의 한국사회 진단을 보면서, 나는 사회의 주체적인 구성원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청년 활동가들은 사회 곳곳에서 관행에 균열을 내고 변화를 일구어내는 이들이었다. 고심하는 활동가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한편 개인적으로 관심을 많이 갖게 된 주제는 에너지 정책 관련한 사항이었다. 아울러 기후/환경 문제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져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 이와 관련하여 내 머릿속에서 떠오른 생각은 우리 사회에 근본적인 에너지 정책은 어떠해야 할까?’하는 문제다. 이 문제는 기후 위기를 비롯하여 우리 삶의 질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여기에 구체적인 문제의 진단과 논의를 더하여, 우리 사회에 좀 더 필요한 것들도 보인다. 우리 가 삶의 주체가 되기 위해 각각의 참여 활동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다양한 목소리가 많이 나올 수 있어야 하고, 이를 귀담아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필요성은 코로나19로 전 세계인들이 각자 고립된 하나의 섬으로 되어버린 지금, 모든 사회에 필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다시금 청년 활동가들의 활동을 응원해본다.

 

창작과 비평 (계간) : 191호 (2021년 봄호)

창작과비평사편집부 편
창비 | 2021년 03월

 

 

"2020년에 코로나19 관련해서 등교 여부 등을 결정할 때, 정부가 학생들의 의견을 묻지 않았던 것처럼 학생들을 교육의 주체로 생각하지 않는 모습이 여전합니다."
- 청소년인권 활동가 공현의 말 (77)

 

"누구나 나이가 들고 아플 수 있고 다양한 이유로 취야한 상황에 놓일 수 있는데 이를 시설 수용으로 해결하려는 방식이 구조적 폭력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활동가 김주온의 말 (79)

 

"코로나19를 계기로 자본 입장에서 눈엣가시였던 사업들을 가장 먼저 정리해간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모두가 힘든 코로나19 상황에서는 이런 결정에 저항하는 목소리를 내기도 힘드니까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듭니다."
- 영화감독, 작가 이길보라의 말 (76)

 

"예전에는 정치 냉소주의에 반대했다면 지금은 정치를 제도권 내 정당 혹은 정치인의 지지자나 팬이 되는 것 정도로 인식하는 데에 반대하게 되었다고 할까요? 정치를 냉소하거나 혐오하는 것은 문제이지만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것도 정치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로 이 사회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 누군가를 지지하고 투표하는 것보다 더 큰 힘을 지니는 정치행위인 것 같습니다."
- 공현의 말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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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2] | 기본 카테고리 2021-02-24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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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 전집 1

파울 첼란 저/허수경 역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파울 첼란 전집 2

파울 첼란 저/허수경 역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한 생애의 발자국들 뒤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2]

 

지난 글에서는 파울 첼란의 발자국을 상상하며 따라가 보았다. 오늘은 다른 작가의 글에서 ‘우연히’ 발견한 파울 첼란의 흔적을 더듬어 본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독일문학비평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는 폴란드 유대인으로서 20세기 전반이라는, 인류사의 유례없는 굴곡을 살아낸 인물이었다. 그런 까닭에 말년에 그가 남긴 회고록 《나의 인생 Mein Leben》을 인상 깊게 읽었다. 그런데 우연히 다시 그의 회고록을 넘기다가 라니츠키가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언급한 대목을 발견했다. 사실 우연히 《파울 첼란의 전집》이 나온 것과 비슷한 시기에 라니츠키의 회고록을 읽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 시의 발견을 출발점으로 삼아 첼란의 삶을 좀 더 이해해볼 수 있을까 했던 것이 이번 기획(?)의 동기다.

 

라니츠키의 회고록 중에서 나의 눈길을 붙들었던 대목은 이렇다.

 

“이튿날 토지아(결혼 전의 아내) 아버지의 장례가 치러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들은 땅에 묻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얼마 후면 유대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에 나오는 “공중 무덤”뿐일 것이다. 유대인의 자살이 아직은 생소하던 때라 묘지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나의 인생》, 178면)

 

다시 이 부분을 읽어보니 무척이나 생소하다. ‘공중 무덤’이 어떤 의미인지 모르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나는 자살을 미화할 의도는 없다. 다만 모든 자살에는 ‘메시지가 있다’고 믿는다. 이 메시지의 앞에는 ‘세상을 향한’, 혹은 ‘사회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더해질 수 있다는 말이다. 행동함으로써 언어로 이야기되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일이다. 여기에 인용한 대목은 나치의 위협과 굴욕적인 대우를 받던 폴란드 망명 시절 이웃집에 살던 랑나스씨가 자살한 사건을 언급한 부분이다. 어머니의 요청으로 랑나스씨의 딸을 위로해주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지만 랑나스씨의 죽음으로 두 사람의 인연은 결혼으로, 그리고 정말로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하게 된다. 삶과 죽음 사이를 지나는 역사의 굴곡 속에서 맺어진 인연이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다.

 

마침 전영애 교수의 번역으로 출간된 적 있는 《죽음의 푸가》(민음사, 2011)를 먼저 구하게 되어, 이 ‘공중 무덤’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시를 찾아보았다. 이 시는 1952년에 출판된 첼란의 시집 《양귀비와 기억》에 실린 ‘죽음의 푸가’라는 제목의 시다. 그리고 이 시는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삼고 있으며, 이 시집에서 가장 유명해진 시라고 한다. 참고로 《시인의 집》에서 전영애 교수는 이 시집이 1953년에 출판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97), 큰 문제는 아니겠으나, 출판연도가 1952년인지 아니면 1953년인지 정확한 것으로 수정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이 시집은 이미 첼란이 파리에 정착한 1948년에 적은 부수로 출판한 시들을 재수록한 것이라고 한다.

 

죽음의 푸가’는 그다지 길진 않은 시지만, 번역자의 저자권 문제도 있으므로 여기에서 전문을 인용하지는 않는다. 이번 글에서는 시에 대한 소개와 출처를 밝히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

우리는 너를 마신다 낮에 또 아침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  (《죽음의 푸가》, 민음사, 전영애 옮김, 2011, 40-41면)

 

내가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온 시인이 무엇을 보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너무나 어두운 얘기만 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 시를 상상해보기 위해 아버지를 화장하던 날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가던 검은 연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딛고 있는 땅에 나를 낳아 준 존재가 매여 있다는 느낌, 더듬을 수 있는 형체가 사라져버렸다는 황망함이란 대체불가 한 것이었다. 그렇게 비쩍 마른 한 몸도 편안히 누울 수 없었을 수용소의 유대인들은 매일 가스실로 향하는 행렬과 굴뚝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검은 연기를 목격해야 했을 테다. 그들은 수용소에서 매일의 의식처럼 이들의 재를 들이마셔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동포들의 재를 들이마셨던 수용소 생존자들이 하나 같이 우울증으로 고통 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나치의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나 파울 첼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화해서는 안 되겠지만, 어떤 면에서는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과 같은 것은 아닐까라고 자문한 적도 있다. 이런 경험을 했던 사람들의 의식을, 경험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다만 상상할 뿐이다. 맥락은 다소 다르지만, 첼란의 시는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가 쓴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라는 글을 읽었던 기억으로 이어졌다. 식인 부족의 문화를 연구하기도 했던 그는 서양인들이 이 부족들을 미개인이라고 치부해버리는 편견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오히려 야만적인 자신의 문화를 돌아보았다. 식인 행위에는 여러 층위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근본적인 동기는 부모나 지인을 태운 재를 마심으로써 이들을 자신의 내부에 ‘모시는’ 의식에 더 가깝다.

 

고고학자 강인욱의 책 《테라 인코그니타》에서도 식인 행위의 첫 번째 배경을 ‘사랑의 발로’라고 언급했다. 곧 “떠나간 가족, 친구를 보내는 환송 의식의 하나로 그 사람의 신체 일부를 먹음으로써 죽은 사람이 우리 곁에 영원히 함께 한다고 믿는 사랑의 발로”(63)라는 해석이다. 물론 첼란이 경험했던 비통하고 비인간적인 경험과 레비-스트로스의 관점, 그리고 일반적인 식인 행위의 시각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려는 것이 나의 목적은 아니다. 첼란이 ‘살아남의 자의 죽음’을 증언하는 언어를 따라가다 보니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내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문제가 나에게 주어진 삶의 과제 같은 것으로 다가왔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겠다. 곧 다른 동기에서지만, 타인의 재가 내 몸 안에 들어온다는 것의 경험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마주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청년 파울 첼란의 무대로 돌아온다. 지난 글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청년 시인 첼란과 미래의 문학비평가 라이히라니츠키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유럽을 관통했던 역사를 기록했다. 1938년 11월, 독일에서는 나치가 유대인의 건물을 파괴하고 재산을 빼앗았으며, 폭력을 자행했던 ‘수정의 밤’ 사건이 발생했다. 조국에서 유대인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길이 막힌 파울 첼란이 프랑스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기위해 프랑스로 가던 시점에, 라니츠키의 가족은 불과 며칠 전에 독일에서 추방당했다는 것은 앞선 글에서 언급했다. 

 

폴란드로 쫓겨 간 라니츠키의 가족은 나치군인들이 자행하는 폭력적인 위협을 경험한다. 라니츠키의 증언에 따르면 독일군은 할례를 받는 유대인들을 색출하기 위해 남자들의 바지를 내리게 했고, 여자들에겐 관공서 바닥을 닦을 때, 이들이 입던 속옷을 벗어 걸레로 사용하게 했다. 어느 날 독일군에 호출된 라이츠키 형제는 “우리는 유대인 개새끼들이다. 우리는 더러운 유대인이다. 우리는 인간도 아니다.”라는 구호를 수도 없이 복창해야 했다. 우리는 수많은 자기계발서에서 인간의 놀라운 ‘회복탄력성’을 이야기하지만,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선 경험은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생각도 해본다. 망가져버린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지 그들은 살아가는 동안에는 상황에 따라 다른 페르소나로 연기하는 것일뿐인지도 모른다.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결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못한다. 여기에 의문의 여지는 없다. 인간의 기억은 신체 전체를 통해 각인되니까. 그리고 의식은 신체와 분리가능한 대상이 아니다. 그저 몸과 하나를 이루는 몸의 일부이면서 몸의 전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존자들의 경험과 기억이야말로 비가역적 법칙을 따른다. 이런 행위를 강압에 의해 따라야 했던 이들뿐만 아니라, 이를 강요했던 이들까지도 말이다. 이들의 경험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보려면 이들이 남긴 증언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히틀러의 건축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이라면 가해자의 입장을 조금은 상상해볼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가 남긴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증언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 같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 정권의 전쟁 물자 생산을 총괄한 군수장관이었기에, 나치의 범죄 행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의 내밀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일부의 비판처럼 ‘자기 방어에만 급급한’ 책인지는 읽어보면서 판단해볼 일이다. 최소한 리영희 선생이 이 책을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달은 정황이 있으니,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다.

 

이번엔 다른 작품에서 파울 첼란의 시를 살펴보려 한다. 그의 시 ‘죽음의 푸가’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작가가 이 시를 분명히 읽었음직한 정황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 작가 홋타 요시에의 장편소설 《시간 時間》에서 그 정황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일본군이 자행한 ‘난징 대학살’의 면모를 그려내었다. 공교롭게도 난징 대학살이 발생했던 시기(1937년 12월 - 1938년 2월) 역시 독일에서 발생했던 ‘수정의 밤’(1938년 11월)과 시간적으로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 소설의 두드러진 특징은 가해국(일본)의 작가가 피해국(중국) 장교의 시선으로 썼다는 점이다. 그는 난징 대학살을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이야기를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가며 가해국의 만행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여기에 첼란의 시를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 나오는 것이다.

 

검은 점 하나로 응축된 검은 세발솥이 내 시선을 끌어당겼다. (...) 세발솥은 옛사람들이 우주를 본떠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우주를 데우기 위해서 수탄(獸炭)을 썼다고 한다. 세 개의 두꺼운 다리 옆에 시체 두 구가 너부러져 있다. 시체 두 구를 숯으로 해서 우주가 데워지고 있다.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피와 기름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의 난징을 상징하는 듯이.

(《시간 時間》, 박현덕 옮김, 글항아리, 73-74면)

 

일본군이 수 개월간 유린한 난징의 모습을 시내로 나간 화자가 관찰하는 대목이다. “아지랑이처럼 사람의 피와 기름이 증기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라는 대목에서 나는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를 떠올렸다. 그 이유는 홋타 요시에가 이 소설을 발표한 것이 1955년이라는 시점과, 1918년생인 그가 30년대 말 혹은 40년대 초에 게이오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했다는 것을 바탕으로 상상해볼 뿐이다. 나아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 「죽음의 푸가」가 실린 시집 《양귀비와 기억》이 1952년 혹은 1953년에 출판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미 1948년에 자비로 소량 출판한 책에 실려 있었기에 추정해보는 것이다. 요시에는 대학시절(30년대 말, 40년대 초) 이미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서 활동을 시작했기에,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당대의 시인들에 대해서도 큰 관심을 가지고 주목해보았을 법하다. 물론 첼란은 파리라는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독일어로 시를 쓴 시인이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요시에가 첼란의 시를 읽었는지 여부를 밝히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첼란이 세상에 내놓은 ‘살아남은 자의 증언’을 요시에가 읽었다면, 그리고 첼란의 부모와 지인을 죽인 자들의 언어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그 정황을 요시에가 인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았던 것이다. 소설을 쓰기 전에 선체험으로 요시에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말이다. 나는 그 가능성에 주목하고 상상해보고자 했다. 요시에가 《시간 時間》을 씀으로써, 어쩌면 자신의 신변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을 이러한 글쓰기를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첼란의 언어가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상상해보는 것이다. 반성적인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첼란(1920년생)과 라이히라니츠키(1920년생)과 동년배인 요시에(1918년생)가 겪은 세계사적 사건들을 함께 바라볼 때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시인의 마지막 길 역시 평범하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은 보편적이면서도 동시에 특수한 그의 삶을 닮았다. 시인은 투병을 시작하고, 가족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판단으로, 센 강 근처의 집을 얻어 따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70년 4월 어느 날 그는 파리 센 강에 투신한다. 투병 중이던 그의 방에는 카프카의 책이 펼쳐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고독 속에서 병마와 싸웠을 그는 “당신이 나를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버림받은 느낌이고 외롭습니다”(《시인의 집》, 69면)라는 카프카의 구절에 밑줄을 쳐놓았단다. 언젠가 파리에 가게 된다면 시인이 보았을 거리와 파리 식물원의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았으면 한다. 그의 경험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플라타너스의 잎뿐”(《시인의 집》, 89면)이라던 시인의 시선을 떠올릴 수는 있을 테니까.

 

추가로 파울 첼란의 삶과 작업에 보다 가까이 가기 전에 두 가지 작품에 주목해본다. 하나는 첼란의 후기 시집 《숨결돌림》 중 ‘숨결수정’이라는 시에 관심이 간다. 이 시는 아내 지젤의 판화작업과 나란히 영감을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진 공동작업이라고 한다. “이 공동작업은 아름다운 부부애의 예로 꼽힌다”(93)라는 전영애 교수의 말을 기억해두기로 한다. 시인과 화가 부부가 만들어낸 판화 시화집이 나온다면 꼭 소장하고 싶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나온 《파울 첼란 전집》 제2권에는 《숨전환》(1967)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것 같다. 전영애 교수가 《시인의 집》에서 언급한 시집 《숨결돌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숨결수정」이라는 시가 《파울 첼란 전집》 제2권에서는 어떤 제목으로 소개가 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또 주목해보고 싶은 첼란의 작업 하나는 독일 시인 잉에보르크 바하만(1926-1973)과 파울 첼란이 주고받은 편지 묶음 《마음 시간 Herrzeit》이다. 전영애 교수에 따르면, 이 제목은 첼란이 바흐만에게 써준 스물세 편의 시 중 ‘쾰른, 암 호프’라는 시에 나오는 표현이다. 이 시는 《파울 첼란 전집》 제1권에 실려 있다. 시 ‘쾰른, 암 호프’는 두 사람이 쾰른에서 재회했을 때 첼란이 써준 시다. 시인의 말년에 두 사람은 시를 매개로 하여 많은 교감을 나누고 사랑했던 사이라고 한다. 두 사람은 전후 독일 문인들의 모임인 ‘47그룹’에서 서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그룹에는 독일 문학계의 기라성 같은 문인들이 모여 있었다. ‘47그룹’은 첼란과 바흐만을 비롯하여 귄터 그라스, 하인리히 뵐, 문학비평가 라이히라니츠키까지 참여하던 모임이었다.

 

시를 떠나 두 시인의 배경을 살펴보면 두 사람이 얼마나 이질적인 조건을 지닌 사람들인지 알 수 있다. 첼란은 나치에 의해 부모를 잃고, ‘살인자의 언어’인 독일어가 모국어인 까닭에 독일어로 시를 써야 했던 시인이었다. 국적을 잃은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야 했던 첼란과는 달리, 바흐만은 골수 나치 당원의 딸이었으며 독일 문단과 문화계의 주목을 받기까지 했던 시인이라고 한다. 이들은 오로지 시를 매개로 교감을 나누고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도 대조적이다. 첼란은 센 강에 투신했고, 바흐만은 로마의 집에서 화재로 목숨을 잃었다. 길지 않은 이 시인들의 삶 후기에 이루어졌던 작업들을 이 작품으로 접근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참고: 함께 언급한 책들]

시인의 집

전영애 저
문학동네 | 2015년 07월

죽음의 푸가

파울 첼란 저/전영애 역
민음사 | 2011년 07월

나의 인생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저/이기숙 역
문학동네 | 2014년 03월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

알베르트 슈페어 저/김기영 역
마티 | 2016년 06월

우리는 모두 식인종이다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 저/강주헌 역
arte(아르테) | 2015년 09월

테라 인코그니타

강인욱 저
창비 | 2021년 01월

시간

홋타 요시에 저/박현덕 역
글항아리 | 2020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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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1] | 기본 카테고리 2021-02-23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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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 첼란 전집 1

파울 첼란 저/허수경 역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파울 첼란 전집 2

파울 첼란 저/허수경 역
문학동네 | 2020년 12월

 

‘한 생애의 발자국들 뒤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

: 시인 파울 첼란의 흔적을 찾아서 [1]

 

 

작년(2020년) 말에 《파울 첼란 전집》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시 전집은 1920년에 출생한 첼란의 탄생 100주년, 사후 50주년을 기념하는 기획으로 나오게 되었다. 특히 이 작품은 시인 허수경의 유고 번역작업이기도 하여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파울 첼란이라는 시인의 이름은 익숙하지만 내가 그의 시를 읽어본 것은 없다. 아, 한두 편은 있을 것이다. 독문학자 전영애 교수가 독일어권 시인들의 자취를 찾아다니며 써내려간 《시인의 집》에 인용된 시 몇 구절과 만난 인연은 있다.

 

시는 언제나 읽어보고자 하면 번번이 높은 장벽을 마주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전문 번역자에게도 매우 난해하다고 알려진 첼란의 시에 굳이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시인의 집》을 통해 알게 된 시인의 삶을 조금 들여다보고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인들이 마주해야 했던 삶을 조금이나마 상상해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 여러 번 읽어보았던 책이지만, 다시 파울 첼란이 살던 집과 자취를 찾아간 대목을 읽어보니 처음 읽는 것 같이 새롭다. 언젠가 허수경 시인의 번역으로 만나는 《파울 첼란 전집》을 읽어보길 바라며, 충동적(?)으로 첼란의 삶을 가능한 한 조사하고 기억해두고 싶었다. 오늘은 전영애 교수의 《시인의 집》을 기반으로 하면서, 그동안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를 앞서 지나 간 첼란의 흔적을 밟아 따라가 보고자 한다.

 

먼저 파울 첼란은 루마니아의 끝자락인 부코비나에서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1920년 11월). ‘너도밤나무숲’ 혹은 ‘너도밤나무가 많은 곳’을 의미한다는 부코비나에서 성장했단다. 하지만 가혹한 역사는 식물을 유난히 사랑하던 유대인 청년을 가만히 놔주지 않았다. 나치에 끌려간 부모는 그가 23세일 때 목숨을 잃었다. 그가 18세 일 때(1938년) 의대로 진학하고 싶었으나 루마니아에서는 이미 유대인에 대한 엄격한 정원제를 실시했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스에 있는 의대로 진학하기 위해 프랑스로 가던 중 독일을 지나게 되는데, 그 다음날이 바로 나치가 유대인들의 건물을 급습하여 파괴를 일삼았던 ‘수정의 밤(1938년 11월 9일)’이었다고 한다. 이 ‘수정의 밤’이란 이름은 깨져버린 수많은 유리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밤의 불빛에 반짝반짝 빛났던 광경에서 나온 명명이라고 알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수정의 밤’이 발생하기 며칠 전에, 훗날 평론가로 이름을 날리게 될 또 다른 유대인 청년이 독일에서 추방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바로 독문학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가족이 추방당해 폴란드로 갔던 것이다. 게다가 라니츠키는 파울 첼란과 동갑인 1920년 생이었다. 수정의 밤 사건이 발생하던 시기,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인 청년은 프랑스가 있는 서부로,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청년은 다시 폴란드가 있는 동부로 이주해야 했던 기구한 운명을 떠올려보게 된다. 수정의 밤 이후 나치는 10,000명에 가까운 유대인을 독일 부헨발트 수용소로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전영애 교수에 따르면 이 ‘부헨발트’라는 이름 역시 ‘너도밤나무숲’ 혹은 ‘너도밤나무가 많은 곳’을 의미한다고 한다. 순간, 같은 의미를 지닌 부코비나에서 출생한 첼란의 삶이 교차한다. 그에게 이 나무의 의미가 어떻게 다가왔을지 짐작해볼 뿐이다.

 

나치의 손에 부모를 잃고, 노동수용소에서 ‘우연히’ 살아남은 시인은 전후 파리에 정착하게 된다. 1948년 7월부터 파리의 센 강에 몸을 던졌던 1970년 4월 까지 22년 간 이곳에서 ‘국적 없는 유대인이자 철저한 이방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독일에는 평생 한 번도 살아 본 적도 없지만, 독일어가 모국어였던 시인이다. 달리 말해 자신의 부모를 죽인 이들의 언어를 모국어로 해야 했던, 뒤엉켜버린 실타래 같은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시인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부모를 수용소에서 잃고, 부모를 죽인 이들의 문학을 이들의 언어로 평생 글을 써야 했던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삶이 다시 소환되는 지점이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거대한 운명의 물결을 누군들 거스를 수 있었을까? 라이히라니츠키는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첼란과 라이히라니츠키의 운명을 일별해보니 이들과는 또 다른 대척점에 있는 한 유대인의 삶을 떠올린다. 바로 독일의 과학자 프리츠 하버다. 그는 무엇보다 질소고정법으로 공기에서 질소를 얻고, 이 질소로 암모니아를 합성하는 방법을 발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합성비료를 만드는 데에 하버의 발견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하버는 이 공로로 191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친구이기도 하며 역시 유대인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하버가 살충제 개발을 한다는 명목으로 청산염 개발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과학저술가 에른스트 페터 피셔의 《금지된 지식》에 따르면, 이 청산염은 ‘세포의 신진대사를 방해해서 신체 내부 질식’(175)을 일으키는 물질이다. 나치가 대량 학살에 사용했던 치큰론베라는 독가스의 원리를 하버가 만들었던 것이다. 유대인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독가스가 자신의 형제자매를 학살하는데 사용되었던 모순적인 역사의 진실을 읽을 수 있다.

 

다시 첼란의 파리로 되돌아온다. 전영애 교수는 시인의 자취를 따라간 기록에서, 시인의 시선을 상상하며 시인이 보았을 법한 풍경을 바라본다. 교수는 주소 몇 개와 지도 한 장만을 가지고 시인이 살았던 집들과, 걸었음직한 장소를 찾아 길을 나섰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플라타너스의 잎뿐’이라는 첼란의 문구를 기억하는 교수는 시인이 바라봤음직한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들을 발견한다. 문득 시집 한 권과 지도를 들고 길을 찾아 헤매던 전영해 교수의 시 읽기가 궁금해졌다. 나도 시를 읽는 방법과 관련하여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까해서다. 전영애 교수는 ‘파울 첼란을 읽는 일로 시 공부를 시작했다’고 하며, ‘(첼란의 시가) 쉽게 읽히지 않지만 소중히 읽을 수밖에 없는 시’라고 말한다. 《시인의 집》을 펼칠 때마다 느끼는 점이지만, 교수는 시인의 흔적을 따라가는 과정이 또다시 새로운 이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 생애의 발자국들 위에 내 발자국을 얹어본다.”(66) 한 줄 한 줄 시를 읽어나가는 과정뿐만 아니라, 길 위에서 만나는 인연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유독 시와 거리가 먼 유형의 사람이지만, 시인의 삶과 이들이 지나간 길을 따라가다보면, 이들은 자신의 작업물을 발견하고 따라가는 이들에게 ‘초라하고 작은 삶을 소중히 하라’는 복음(?)을 전하는 임무를 지닌 이들이 아닐까도 생각해보았다. 다음 글에는 여러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첼란의 흔적으로 이어가보려고 한다. ‘역사와 언어에 대한 회의’를 표현했다고 하는 첼란의 언어를 일부나마 들여다보려고 한다.

 

 

나의 인생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저/이기숙 역
문학동네 | 2014년 03월

시인의 집

전영애 저
문학동네 | 2015년 07월

금지된 지식

에른스트 페터 피셔 저/이승희 역
다산초당 | 2021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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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균,쇠] 읽다가 발견한 흥미로운 단어와 셰익스피어의 언어유희 | 기본 카테고리 2021-02-17 14:06
테마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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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대표 저서 <Guns, Germs, And Steel>(원서)를 천천히 읽고 있습니다. 영어책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서 시도했는데, 벌써 6개월 넘게 읽고 있네요(다시 따져보니 10개월 째입니다 -,-;;). 틈나는 대로 읽기에 언제 끝날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이제 17장을 읽고 있으니, 나머지 두 장만 읽으면 끝이 날 것 같습니다.

 

어제는 17장을 읽다가 발견한 한 단어를 발견했는데요, '암양'을 의미하는 ewe라는 단어의 발음[ju:]이 재미있어서 기억해두고 있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잡다하게 조사한 내용을 정리해봅니다.

참고로 숫양을 의미하는 단어는 ram이네요.

 

Guns, Germs, and Steel: The Fates of Human Societies

Diamond, Jared
W.W. Norton & Company | 2005년 07월

 

우선 <총,균,쇠>에서 단어 ewe가 나온 문장은 이렇습니다.

 

For instance, the words meaning "sheep" in many languages of the Indo-European language family, distributed from Ireland to India, are quite similar:

"avis," "avis," "ovis," "oveja," "ovtsa," "owis," and "oi" in Lithuanian, Sanskrit, Latin, Spanish, Russian, Greek, and Irish, respectively. (The English "sheep" is obviously from a different root, but English retains the original root in the word "ewe.") Comparison of the sound shitfs that the various modern Indo-European languasges have undergone during their histories suggests that the original form was "owis" in the ancestral Indo-European language spoken around 6,000 years ago. That unwritten ancestral language is termed Proto-Indo-European.

 <Guns, Germs, and Steel> 1997 ed., 343p

 

일반적인 양 sheep이란 단어의 인도-유럽어족에 관한 설명을 하는 대목입니다.

 

ewe의 발음[ju:]이 재미있는데요, 더 재미었었던 것은 

셰익스피어의 <The Merchant of Venice> 1막 3장에서 

ewe단어로 언어유희하는 장면을 '발견(?)'해서 여기에 모아봤습니다. 

 

 

<The Merchant of Venice> 1막 3장에서 ewe가 나오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Antonio(안토니오): (...)

                     Was this inserted to make interest good? 

               (이자를 정당화하려고 그 얘기가 성경에 쓰였다는 거요?)

                     Or is your gold and silver ewes and rams

               (아니면 당신의 금화와 은화가 암양과 숫양이라는 거요?)

 

Shylock(샤일록): I cannot tell. I make it breed as fast. 

                 (그건 모르지만, 내 돈도 그만큼 빠르게 새끼 치지요.)

                  (...)

                              [번역은 펭귄클래식버전, 강석주 역]

 

여기서 this는 <창세기>  30장 25-43절에 보면 야곱이 장인 라반으로부터 검은 양을 자기 몫으로 달라고 해서 재산을 불리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이야기를 가리킵니다. 다시 보니 야곱이 이렇게 의도적으로 검은 양을 낳도록 구별해서 사육한 이야기는 성경에서 '사육에 의한 변이 생산'을 기록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으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합니다.

 

참고로 다윈은 <종의 기원> 1장에서 바로 '인간의 사육에 의한 변이'를 이야기하고, 2장에서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변이'에 대해 이야기 한 다음 '자연선택' 개념을 도입합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성경에서 생물학 지식을 이용하여 재산을 불린 최초의 인물이라고 이해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재미있는 것은 위의 대사에서 셰익스피어가 암양의 복수인 ewes[ju:s]의 발음과 샤일록이 유대인(jews)인 것, '사용하다'는 의미의 use를 떠올리게 하면서 셰익스피어의 특징적인 동음이의어식 언어유희(pun)를 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견해는 미국 노트르담 대학 방송연극영화과 교수 피터 홀랜드의 작품 해설(펭귄클래식 버전 <베니스의 상인>, 181p)에서 참고했습니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부분은 암양을 통해 새끼를 치는 것과 이자로 재산을 불리는 현상을 기가막히게 병치시키고 있다는 부분이 재미있는 표현입니다.

 

베니스의 상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저 /강석주 역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4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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