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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제이 굴드’ 정치적 읽기 | 기본 카테고리 2021-06-14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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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판다의 엄지

스티븐 제이 굴드 저/김동광 역
사이언스북스 | 2016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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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의 엄지

: The Panda's Thumb (1980)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지음 | 김동광 옮김 | [사이언스북스]

 

 

스티븐 제이 굴드정치적 읽기

 

40여 년 전에 고생물학자 및 진화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쓴 자연사 에세이를 틈나는 대로 읽고 있다. 첫 번째 에세이집 다윈 이후(1977)를 읽고, 두 번째 책으로 판다의 엄지(1980)를 읽고 있다. 과학계에서는 10년만 지나도 새롭게 발견된 사실과 얻게 된 통찰이 쌓여 만만치 않은데, 이 시점에서 굴드의 에세이를 읽는 이유는 뭘까. 그의 에세이를 읽으면서 줄곧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굴드는 미국 자연사 박물관이 발간하는 월간지 자연사 Natural History에 매달 에세이 한 편씩, 한 번도 거르지 않고 27년 동안 기고했다고 한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았을까 싶지만, 그는 과학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학, 건축 등의 문화예술 분야,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에도 강한 호기심과 박식함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의 에세이에서는 주요 연구 분야인 고생물학을 비롯하여, 진화론, 현대 진화 생물학, 유전학 등을 글의 중심에 놓되, 언제나 인간이라는 요소를 잊지 않았다. 굴드가 글을 쓰며 줄곧 유지하는 자세는 과학 행위란 역시 인간이 하는 일이란 명제다.

 

여성의 뇌(14)라는 제목의 글에서 굴드는 여성에 대한 성차별적인 시각을 도마 위에 놀려 놓는다. 작가 조지 엘리엇의 작품 미들 마치 Middle March의 서문으로 시작하여 끝을 맺는 이 에세이는 유럽의 일류 과학자 집단이 여성의 열등성을 증명하기 위해, ‘과학이라는 이름의 정교한 장치를 활용한 역사를 짚어본다. 저자는 인간이 하는 과학이란 무엇인지 자신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과학은 추론을 통한 실천이지 무수한 사실들로 이루어진 목록이 아니다. 따라서 숫자 그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여러분이 무수한 사실들로 이루어진 목록이 아니다. 여러분이 그 숫자를 이용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206)

 

과학행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으로 이보다 더 명확하고 중요한 메시지가 있을까 싶다. 나는 다윈 이후에 이어 이제 두 번째 책을 읽고 있을 뿐이지만, 저자가 끊임없이 제기하는 문제들에서 보이는 일관된 성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상식이나 인간 사회에 줄곧 이어지는 편견과 오해를 붙들고 자세히 들여다보며 이야기했다. ‘라마르크는 과연 무능한 진화론자였을까?’, ‘다윈이 20년 넘게 자신이 완성한 자연선택설을 발표하지 않고 묻어 둔 이유가 보다 확실한 증거를 모으기 위함인가?’와 같은 질문들이 그러한 예다. 또 후손의 눈으로 조상의 지식과 결정을 소급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시대적·사회적 배경과 맥락 속에서 이들이 주장한 논리가 나름대로 타당하고 심지어 합리적이기까지 했다는 결론도 내린다.

 

하지만 굴드가 자신의 글에서 줄곧 드러내는 문제의식은 보다 근원적이며 강력한 영향력을 지닌 쟁점들이며, 나아가 서양 사회의 차별과 배제의 오랜 역사와 닿아있다고 본다. 보다 구체적으로, 굴드는 백인 남성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사회가 오랜 역사를 거쳐 구축해온 기득권 유지 장치의 단면을 끊임없이 조명한다. 서양사에 대해 아직 이해가 부족하지만, 개인적으로 인류사에서 기록으로 남아 있는 차별과 배제의 증거는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에서 이미 흔히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자신과 다른 존재들을 야만인이라고 부른 전통이다. 사실 야만인은 말 그대로 잔인한 짐승 같은 존재에 붙여진 이름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언어와 문화를 향유하는 자들에 대한 무지와 혐오에 오만함이 더해진 비하 행위의 다른 이름일 테다. 동양인들에 대해 유럽인들이 째진 눈제스처를 하는 행위, ‘흉노족훈족과 동일시한 사례는 단지 유럽의 백인 남성 기득권 사회가 끌어들여 활용한 장치의 곁가지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굴드는 서구 사회에서 이렇게 통용된 차별과 배제장치를 다양한 맥락에서 소환하며, 이러한 사회적·정치적 장치들을 과학적 태도로 비판한다. 진화론에 대한 왜곡된 해석으로 굳어진 우생학을 비롯해서, 인간중심적 우월주의, 백인(남자)의 인종적/성적 우월성, 유전자 결정론적 시각, 머리 크기와 지능의 관계 등을 끊임없이 글 속으로 끌어들인다. 굴드는 왜 이러한 주제들에 매달렸던 것일까? 에세이를 읽어가면서 점점 궁금해졌다. 아마도 그 이유는 이 소재들이 자신의 문제의식을 건드렸고, 이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듯 서구 사회의 편견과 여기에 기인한 차별과 배제의 행태를 예민하게 감지하고 반응했다. 바로 서구 문명사회가 은밀히 구축하여 규범화 하고 강요해온 구별짓기의 전략이다. 무엇보다 백인 남성이 전략적이고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왜곡하여 끌어들인 장치들을, 굴드는 과학자의 눈으로 직접 들여다보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굴드의 눈에 비친 서구문명의 차별과 배제전략은 왜/어떻게 생겨났던 것일까. 나는 그 이유에 대한 실마리가 백인 기득권층의 두려움과 혐오라고 본다. 예를 들면, 19세기에 미국의 일류 자연학자였던 루이 아가시(Louis Agassiz)의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보여준 16(빅토리아 시대의 숨은 결함)에서 그 단서를 엿볼 수 있다. 아가시는 보스턴 소재 래드클리프 대학의 창설자이자 초대 학장, 하버드 대학교 비교 동물학 박물관을 건립했던 명망 있는 지식인이자 인정받는 보스턴 시민이기도 했다. 역사탐정의 면모로 굴드는 아가시가 흑인을 처음 만난 후 남긴 기록의 무삭제 원본을 복원하여 에세이에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기록은 아가시가 이 글을 쓴 후 헌신적인 아내의 검열과 삭제를 거쳐 130년 넘게 아가시의 인종차별적 면모가 가려져있었다. 흑인에 대한 동정을 보내면서도 혐오 또한 숨기지 않았다. 그는 혼혈아를 만들어 내는 것은 (...) 자연에 대한 범죄입니다.”(238)라고까지 썼다. 굴드는 아가시가 남긴 기록을 다음과 같이 간단히 요약한다. “루이 아가시는 백인의 우월성이 희석되지 않도록 모든 인종을 따로 격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236) 나는 아가시의 글에서 상대방(흑인)에 대한 혐오뿐만 아니라 두려움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서구 사회의 기득권층, 특히 백인 남성들이 강렬하게 지녔던 이 두려움과 혐오의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유명한 공상과학영화의 한 장면에서 상징적으로 떠올릴 수 있겠다.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에 등장하는 다스베이더(Darth Vader)로부터 말이다. 그는 영화 대부분에서 줄곧 검은 가면과 망토 속에 가려진 상태로 등장한다. 강력한 악의 힘을 다루면서도 그가 줄곧 느끼는 두려움이다. 굳이 언어로 풀어 놓는다면 진실에 대한 두려움정도가 아닐까. 인간이 갖는 근원적인 감정으로서 이 두려움은 죽음과 같은 절대적 무지에 대한 두려움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와 더불어 자신의 비밀과 추악함이 밝혀지는 사태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다. 백인 남성이 구축해온 문명 속에서 공기처럼 누려온 이 기득권 유지와 둘러싼 비밀이 사실은 근거 없음으로 드러나게 된다면, 이러한 사태는 이미 힘을 가진 집단에게는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다.

 

결국 세상의 절반은 거대한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과학과 종교의 힘을 빌려, 여기에 맞는 논리를 만들어내야 했다. 오로지 자신의 비밀 유지를 위해서 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세상의 다른 절반의 삶을 좌우할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남녀만의 차별뿐만 아니라 모든 인종에 대한 차별도 고려해야 하므로, 우리의 삶은 절반에 훨씬 못 미치는 백인 남성 기득권 사회가 다른 모든 존재를 장악하고자 했던 시도의 영향을 받아온 셈이다. 굴드는 자신의 글에서 줄곧 인간우월주의적 시각, 유전자 결정론, 인종 및 성차별적 시각의 역사를 문제시한다. 저자의 양심의 눈에 끊임없이 비쳐진 것은 어쩌면 서양인들의 잠재의식 속에 흐르는 기만죄의식의 감정(곧 백인의 죄책감, white guilt)을 덮고자한 방어기제였다.

 

물론 굴드는 서양 백인들의 차별과 배제의 오랜 역사를 언급하지만, 이것이 서양 문화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게 되었다. 전 지구는 이미 서양화되어 있어서, 오늘날 각 민족, 각 인종의 다양성은 심각하게 줄어들고 획일화되어 버렸다. 때로는 서양인들의 편견일부를 우리는 아무런 문제없이 받아들이기도 하며 상식이 된 것들도 있다. 진화를 진보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미묘한 해석도 그러한 예다. 또 우리 중 많은 이들이 동남아시아인들을 바라보았던 시각을 떠올려볼 수 있다. 분명히 많은 이들이 백인을 보는 시선과도 크게 차이가 난다. 굴드는 이렇게 통용되며 사람들에 심어진 편견에 주목하고 꼼꼼하게 이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 행위를 바탕으로 자신의 관점에서, 직접 판단을 내린다. 따라서 그는 서양 기득권 세력이 구축해온 세계 질서를 비판하고 이 도도한 인식의 흐름을 바꾸어보고자 했던 사람, 양심적이고 반성적인 서구 지식인의 한 명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작가 제인 오스틴은 정교하고 정확한 언어, 섬세한 시선과 재치로 18세기 영국의 중상류층 여성들의 삶을 다루었다고 한다(아직 그녀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했다). 그녀의 작품과 생애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몇 편 보면서 느끼는 점은, 오스틴의 작품에는 영국 사회가 마련해놓은 질서 안에서 여성들이 겪었을 삶의 모순을 치밀한 심리와 함께 묘사해 놓았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큰 흐름에서 볼 때, 여성 주인공들은 백인 남성이 구축하고 강요하는 사회의 규범 내에서 발생한 오해와 이해 부족에 결과한 편견으로 고통을 받는다. 작가 오스틴의 삶도 이런 배경 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오스틴이 이러한 규범과 편견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기록했으며 이에 저항했다는 점이다. 단순히 더 좋은 조건을 가진 남자들을 만나기 위해 여성들이 겪는 에피소드가 아닌, 여기에 오스틴이 지녔으며 작품을 통해 드러냈던 정치성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제인 오스틴의 이야기를 불쑥 꺼낸 이유는 굴드 역시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인 편견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이에 반응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에세이에서 서양 기득권자 집단이 자신들의 목적에 맞추어 왜곡하고 이용했던 진화론또는 다윈주의에 얽힌 스캔들을 소재로 삼되, 미묘하면서도 때론 유쾌하게 문제제기를 한다. 그렇다면 스티븐 제이 굴드가 고생물학계의 제인 오스틴과 같은 면모를 지녔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앞에서 굴드가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언급했던 내용을 인용한 바 있다. 굴드의 과학은 결국 이 행위가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한다. 서양의 기득권 집단이 줄곧 주장해온 논리 역시 무지’, ‘죽음’, ‘비밀에 대한 두려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여기에 뿌리를 내린 편견이 만들어낸 정치성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굴드를 읽는다는 것은, 과학이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우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적으로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묻는 일이 될듯하다. 과학이란 내가 어떤 근거와 자료로 대상 혹은 현상을 바라보고 해석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을 포함한다. 나는 어떤 문제에 대해 어떻게 대처 할 것인가, 나아가 세상을 바라볼 때 나는 어디에 발을 딛고 설 것인가 하는 위치 선정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굴드 읽기는 내가 어디에 받을 딛고 설지를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수정하는 과정이라고 읽힌다. 이점이 굴드를 읽으면서 중립적으로 읽을 수는 없다고 판단한 이유다.

 

 

 

[책 속으로]

[1] "과거에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태로 자주 인용되는 사례가 하나 있는데, 핀의 머리에 천사가 몇 명 올라갈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 하나의 핀이 유한의 수를 수용할 수 있는지 아니면 무한의 수를 수용할 수 있는지를 놓고 논쟁을 벌인것이라는 사실... 한 신학 체계에서는 천사의 실체 여부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201)

 

[2] "브로카와 그의 학파는 (...)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개인이나 집단보다 우수한 이유를 설명하는 문제를 뇌의 크기와 지능의 상관관계를 통해 해결 할 수 있음을 입증하고 싶었던 것이다." (201)

 

[3] "과학은 추론을 통한 실천이지 무수한 사실들로 이루어진 목록이 아니다. 따라서 숫자 그 자체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여러분이 그 숫자를 이용해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206)

 

[4] "우리는(특히 타처럼 키가 작은 사람들은) 높은 지능이 키가 큰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212)

 

[5] "트리소미 21은 대개 몽고 백치, 몽고증, 다운 증후군 등의 이름으로 불려 왔다." (219)

 

[6] "그들은 익살꾼 연기자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뛰어난 모방력을 가지고 있다." (224)

  "아시아인의 지적인 힘은 인정하지만 그 능력은 혁신적인 천재의 능력이라기보다는 남의 것을 잘 흉내 내는 능력에 불과하다는 식의 설명을 분인 것이다." (225)

- 다운증후군을 연구했던 다운 박사의 아시아인에 대한 시각

 

[7] "브로카의 발언은 실제로는 특정 시대의 사회적 차별에 불과한 것을 생물학적으로 이미 결정되어진 것인양 호도하는 보편론이라는 전체 맥락에서 판단할 필요가 있다." (212)

"저는 이 퇴보하고 퇴화한 인종을 보면서 연민의 느낌을 받았고, (...) 그 운명에 동정심을 느꼈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들이 우리와 같은 혈통이 아니라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 신이시여, 이러한 접촉으로부터 저희를 지켜 주소서!" (235)

- 미국 래드클리프대학의 창설자이자 초대 총장, 하버드 대학교 비교 동물학 박물관을 세운 루이 아가시의 메모

 

[8] "굴복하지 않고 용맹무쌍하고 자긍심이 강한 인디언, 그들은 유순하고 비굴하고 모방하기 좋아하는 니그로에 비해, 또는 교활하고 잔꾀에 능하고 겁쟁이인 몽골 인종과 얼마나 다른가!" (233)

- 루이 아가시가 <크리스천 이그재미너 Christian Examiner>(1850)에 발표했던 글 중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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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및 문학과 함께 아들에게 들려주는 물질의 문화사 | 기본 카테고리 2021-06-11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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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문명과 물질

스티븐 L. 사스 저/배상규 역
위즈덤하우스 | 2021년 0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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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물질

: 물질이 만든 문명, 문명이 발견한 물질

스티븐 사스(Stephen L. Sass) 지음 | 배상규 옮김 | [위즈덤하우스]

 

 

역사 및 문학과 함께 아들에게 들려주는 물질의 문화사

 

이 책은 재료공학을 공부한 저자가 자신이 평생 연구해온 대상인 각종 재료에 관해 아들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책이다. 아쉽게도 이 한 권이 그의 첫 책이자 유일한 결과물로 남게 되었지만, 독자는 이 책이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세심한 공부의 결과물임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인류의 조상이 구할 수 있었던 최초의 자연물인 돌과 흙에서 시작하여, 여러 금속 및 복합 소재의 발견과 활용의 역사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어져 왔는지 꼼꼼하게 짚어주는 책이다. 재료의 구조와 같은 과학적 설명을 자세히 일러주는 부분에서는 다소 건조할 수도 있지만, 곧이어 재료와 관련한 역사와 종교, 호메로스와 같은 고전 문학 이야기를 들려준다. 읽는 동안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차근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마지막 장인 실리콘의 시대에 이른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 책의 성격이 인간과 환경, 특히 물질적 환경과 상호작용한 문명사, 인간이 물질과 관계를 맺으며 공진화해온 문명의 역사로 읽힌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나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같은 책들에는 금속 무기와 제기 등에 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 특히 청동기와 철기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 데, 저자는 금속의 시대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이러한 에피소드를 잊지 않고 들려주어 다소 지루할 것 같은 부분에서 줄곧 흥미로운 지점을 만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노래했다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만 해도, 언제나 창과 칼, 화살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전투가 끝나면 전사들은 언제나 적국의 전리품 수거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사망한 장수들의 금속갑옷과 투구를 잊지 않는데, 이러한 전통은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당대 문화에 대한 이해를 더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지금에 비해 상당히 조잡했던 제련기술과 부족했던 채굴기술로 금속자원이 매우 귀했던 것이다. 이렇게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시대와 문명에 따른 인류의 행동양식을 보다 더 현실감 있게 바라보고 깊은 이해로 접근이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재료의 종류에 따라 나누어 책을 구성했다. 따라서 각 소재의 특성에 따라 이것이 문명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조망한다. 인간 사회가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정복의 역사는 금속의 출현(특히 구리와 청동)으로 가능해졌다는 설명도 가능하겠다. 나아가 금과 은을 발견한 사건은 철의 제련 및 무기 제조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제국주의시대를 견인한 주요 요인이 되었다고 지적해볼 수 있겠다. 역사 분야에서 흔히 어떤 현상의 궁극적 원인근접 요인을 제시할 때, 인류 역사에서 분명히 새로운 재료의 발견과 활용은 강력한 근접 요인으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재료들이 지구인들에게 더 빈번하고 강도가 높은 충돌혹은 작용과 반작용의 역사를 일구어 냈다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듯싶다. 중국에서 먼저 발달했던 화약 기술, 종이, 인쇄술을 보면 중세 이전까지는 서양보다는 중국으로 대표되는 아시아지역이 더 앞서 있던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현대의 문명을 규정하다시피 하는 콘크리트나 폴리머 등의 인공합성소재, 기존의 원소들로 이루어졌지만 오히려 극한 조건에서 유용한 복합재료 등은 사실 재료에 대한 성질을 잘 모르면서도 친숙하게 느껴진다. 반면 유리나 다이아몬드는 재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어보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유리는 비결정 상태로 이루어져 있으며, ‘낮은 온도에서 오랜 시간 놓아두면 탈유리화가 진행되어 내부에 결정이 생긴다’(130)는 설명은 상상하기도 힘든 특성들이다. 여기에 더하여 모든 유리창은 결국 뿌옇게 변하고 산산조각이 나게 되어 있다’(130)는 언급은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도시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 부식이나 풍화작용을 고려하지 않아도 이러한 운명을 맞게 된다는 의미가 아닌가. 물론 상온에서 결정이 생기는 데 수천 년이 걸린다고 하니, 지금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또 유리와 달리 분명한 결정 구조를 갖지만 다이아몬드에 관한 이야기 역시 흥미롭다. 이 물질은 숯이나 우리가 학창시절에 쓰던 연필심(흑연), 그리고 다이아몬드가 모두 탄소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임을 안다. 우리에게 익숙한 지식이지만, 탄소로 이루어진 물질이 각각 다른 결정 상태를 갖게 되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질(다이아몬드)이 되거나, 연료가 되어 에너지를 방출하기도하고(), 혹은 그림 또는 글씨는 쓸 수 있는 연필 재료(흑연)가 된다는 사실은 곰곰이 생각해보면 놀라운 일이다. 이 사실이 나에게만 놀랍고 흥미로웠던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100여 년 전 어느 철학자도 자신의 책에 이렇게 적어 두었기 때문이다.

 

왜 그렇게 단단한가?” 언젠가 숯이 다이아몬드에게 말했다.

우리는 가까운 친척이 아닌가?”

왜 그렇게 연약한가? , 나의 형제들이여, 나는 이렇게 묻는다.

그대들은 나의 형제가 아니던가?

 

이 대목은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자신의 사상을 집약한 철학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펭귄클래식, 홍성광 옮김)에서 써놓은 부분으로, 숯과 다이아몬드와 나누는 상상의 대화일 뿐이다. 내가 이 대목을 떠올렸던 이유는 니체 역시 당시에 이미 숯과 다이아몬드가 같은 성분으로 되어 있다는 지식과 다이아몬드의 경도에 관한 지식을 잘 알고 활용했다는 점이다.

 

물질과 문명의 저자 스티븐 사스는 여기에 같은 성분의 물질이 이렇게 다르게 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다. 숯은 탄소로 이루어져 있지만 흑연과 달리, 유리처럼 뚜렷한 결정구조가 없는 상태의 물질이다. 반면 흑연은 뚜렷한 결정구조를 갖지만, ‘육각결정구조’(290)가 평면처럼 형태를 이루어 쌓여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와 대조적으로 다이아몬드는 입방결정구조를 통해 3차원 망구조(290)를 이룬다고 한다. 이 미묘한 차이가 강도 및 탄성계수 특성을 비롯하여 물질 사이에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점이 신기하기만 하다. 또 다이아몬드에 대해 몰랐던 사실 중 흥미로운 점은 금속이 열전도성과 전기전도성이 모두 좋은 반면, 다이아몬드는 열전도성이 매우 높지만 전기전도성이 매우 낮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열전도성과 전기전도성은 그 경향을 대체로 비슷하게 나타내기 때문에 내게는 이 점도 눈여겨보게 되는 지점이었다.

 

저자가 15장에서 실리콘의 시대를 언급할 때, 이 흑연이 갖는 구조의 탄소체가 최근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등에 큰 관심을 모으는 소재로 연구되고 있다는 점을 함께 언급해주었으면 더 흥미로웠을 듯하다. 다만 마지막 장이 재료의 높은 활용도와 현대 문명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반도체 산업의 초기 역사에 집중된 느낌이라 다소 아쉬운 점이다. 이처럼 저자는 재료 고유의 특성 및 제약과 관련하여 재료가 인간 사회와 상호작용 해온 장면을 보다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실마리를 제공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물질에 대한 새로운사실을 역사와 문학을 곁들여 재료 변천의 역사를 유기적으로 묘사한다.

 

저자는 책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강의하던 기억을 떠올린다. 수업 중에 그는 재료에 대한 건조한 지식을 전달하는 자신의 모습을 의식하고 교과서를 덮는다. 그리고 당시에 설명하던 재료가 우리의 문명에 어떤 영향을 주고받아왔는지, 그 재료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학생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저자가 설명하는 지식은 학생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이제 살아있는지식이 되었다. 재료에 관한 사실들이 학생 각자의 관심사 그리고 나아가 이들의 구체적인 삶과 연결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렇게 딱딱하고 어려워 보이는 물질에 관한 지식을 학생들의 구체적인 삶의 맥락 속으로 가져다 놓았다. 이 책은 저자가 무미건조해 보이는 물질의 문명사를 담은 그릇이지만, 현재 우리가 있기까지 인류의 조상이 세상과 상호작용 속에 형성해온 수많은 연결고리들의 역사를 담은 것이기도 하다. 저자가 평생 만들어온 지식의 연결고리를 두 아들에게도 들려주고자 했다고 한다. 이런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공부가 훨씬 흥미롭고 세상이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싶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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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로부터 갇힌 자가 바라본 자신의 몸과 세계, 그리고 존재증명’ | 기본 카테고리 2021-06-07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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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잠수종과 나비

장 도미니크 보비 저/양영란 역
동문선 | 2015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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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종과 나비

: Le Scaphandre et le Papillon

장 도미니크 보비(Jean-Dominique Bauby) 지음 | 양영란 옮김 | [동문선]

 

내부로부터 갇힌 자가 바라본 자신의 몸과 세계, 그리고 존재증명

 

사랑스러운 가족과 사회적 성공을 거머쥔 한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불가항력의 사건으로 이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면 당사자는 어디에서 어떻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게다가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단지 왼쪽 눈꺼풀을 깜빡이는 일과 왼쪽 부분의 입으로 반쪽짜리 미소를 지을 수 있을 뿐이라면 말이다. 이 불가항력의 사건은 실제로 한 남자에게 발생한 일이었다.

 

장 도미티크 보비는 1995128일 당시까지 세계적인 패션잡지 <Elle>의 편집장이었다. 멋지게 차려입을 줄 알고, 문학과 스포츠카를 사랑했으며, 사회에도 영향력을 가졌던 남자였다. 사건 당일 그는 BMW신차의 시운전을 하며 비틀스의 노래 내 삶 속의 어느 하루 A day in the life'를 듣고 있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 모습은 보비가 정상인으로 기억하는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며 쓰러진 그를 살펴본 의사는 뇌일혈이란 진단을 내렸다. 3주 동안의 혼수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의식을 되찾았지만, 전신 마비 상태로 깨어났다.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번개를 맞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일명 -인 신드롬 locked-in syndrome'으로 불린 이 증상으로, 의식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전신이 마비된 몸속에 영원히 유폐되었다.

 

의식이 깨어난 후 사망에 이르기까지 전신마비 상태로 15개월이라는 짧은 생애를 더 살았던 보비는 대략 반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자신이 글자들의 빌보드 차트라고 유머스럽게 부른 글자배열판과 왼쪽 눈꺼풀을 깜빡거리는 행위만으로 사람들과 소통했다. 오늘 만난 잠수종과 나비는 이렇게 태어났다. 이 책은 한 순간에 자신이 누리던 모든 것에서 멀어진 한 인간이, 고집스럽게 자신을 찾고 세상과 소통하고자 했던 희망과 비통의 기록이다.

 

의사들이 자신의 증상을 -인 신드롬이라 불렀을 때, 저자는 자유로운 의식을 상징하는 나비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흐느적거리는몸을 심해 다이버들이 사용하는 잠수종(diving bell)에 비유했다. 엄청나게 무거운 잠수종 속에 들어가면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 물 밖에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겠다. 43년 동안 온전한 신체로 살다가 어느 날부터 이 무거운육체 속에 갇힌 영혼으로 지내야만 했을 저자의 삶을 상상해내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몸 혹은 육체라고 불리는 대상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리고 나의 의식 혹은 마음이라 불리는 개념도 떠올려본다. 나는 흔히 나의 몸과 마음/정신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나의 육체가 갑자기 제 기능을 멈추는 사태를 겪었다면, 나는 무엇인가? 내 코에 앉은 파리 한 마리도 쫓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들을 곁에서 만지고, 끌어안을 수도 없다면 말이다. 게다가 정상적으로 침을 삼킬 수조차 없어서, 가족과 지인들 앞에서 흘러내리는 침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다면, 과연 나라는 존재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대로 우리의 은 그저 하나의 그릇에 불과한 것일까?

 

이 책은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을 바라본 시선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를 보여주는 보기 드문 기록이다. 특히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자는 오랜 시간 비장애인의 영역에 있다가, 그 경계를 넘어 장애인의 영역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운명의 장난이라도 이런 비통한 사태가 있을까. 한순간에 뒤바뀐 한 사람의 시선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관점의 전환을 보여주었다. 장애를 안고 살았던 짧은 시기에 저자가 남겼던 체험의 기록은 내부로부터 감금된 자가 자신의 몸과 주변을 돌아보고, 세상을 향해 소통하고자 했던 한 사람의 존재증명이었다.

 

일상을 누리지 못하게 되면서 저자의 의식이 마주한 것은 심연과도 같은 깊고 광막한 절망감이었다. 그는 불구가 된 자신의 몸을 바라보고, 전신마비를 겪고 있는 장애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에 대해 말한다. “날개 꺾인 새, 목소리를 잃은 앵무새. 불길한 전조의 새로 자신을 표현하는 동시에, “우리들이 병원의 풍경을 망치고 있음을 나도 잘 안다”(53)라고 잠수종 속의 의식은 표현했다.

 

병원에서 어느 날 유리에 비친 자신의 끔직한몰골을 보고 저자는 미친 듯이 웃어댄다. 그러나 육체라는 굴레에 갇힌 상태에서, 그가 그렇게 웃어댔다는 사실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고개를 젖히고, 호탕하게 소리 내어 웃을 수도 없었을 테니까. 그는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이 감당해야 했던 불운을 농담으로라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44)라고 고백한다.

 

저자가 냉혹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며 또 배워야 했던 것은 일종의 체념을 배우는 일이었다. 자신의 몰골을 거울에서 발견했을 때 웃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일요일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기에 그는 더욱 고립된 자신의 모습을 기록했다. 비장애인으로 살아가던 시절, 아마도 저자는 신랄한 유머감각을 보유한 사람이었을 듯하다. 거대한 불운의 한 가운데에서도 그는 완전히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가 물리치료사의 안마를 받는 날, 자신을 국제 사이클 대회를 앞둔 자전거 경주계의 다크호스로 상상한다. ‘물리치료사가 고된 전지훈련으로 파열된 자신의 근육을 불어주고 있는 중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다만 이 유머 감각은 점차 새로운 체념으로 바뀌어 간다.

 

극적인 삶의 격변 사태를 경험한 사람에게 그 이전에 누리던 일상은 이제 이례적이고 소중한 순간이 된다. 아버지의 날에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아들 딸의 축하를 받은 그는 이 강요된 기념일이 얼마나 소중해지는 순간인지를 일러준다. 자신이 새로운 곳으로 떠나기 전에, 이런 말들을 가족들에게 꼭 해주고 싶었을 듯싶다. 다만 팔을 들어 아이들을 안아줄 수 없다는 좌절감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에서 그가 짊어지게 될 삶의 무게를 간접적으로나마 공감하게 되었다. “일요일은 지루한 사막과 다름없다”(146)라고 언급했을 때, 그는 이미 일요일마다 찾아오는 극한 고립감과 두려움에 체념하고 받아들이기를 배워야 했던 것이다.

 

잠수종이 한결 덜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하면, 나의 정신은 비로소 나비처럼 나들이 길에 나선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다.” (16)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 내 잠수종을 열어 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188)

 

저자 장 도미니크 보비는 갇힌 의식이 되어 짧은 병원 생활을 했다. 오로지 눈꺼풀만을 움직여서 한 인간의 몸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며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그의 비통한 기록은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시선에 대해 가르쳐주었다. 그가 잠수종으로 표현한 육체의 욕구와 바람, 몸에 새겨진 기억의 편린을 이야기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하루아침에 바뀌어버리는 유일무이한 사태 앞에서 저자는 자신을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살아 있는 한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았던자신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그에게 지금 내가 꺼낼 수 있는 건 숙연함과 경외의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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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정원사의 신학, 행복한 경험의 시론’ | 기본 카테고리 2021-06-05 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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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땅의 예찬

한병철 저/안인희 역
김영사 | 2018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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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의 예찬 (Lob der Erde)

: 정원으로의 여행

한병철 지음 | 안인희 옮김 | [김영사]

 

 

 

철학자-정원사의 신학, 행복한 경험의 시론

: -정원-꽃에 대한 사랑 고백

 

 

니체와 하이데거, 푸코와 베냐민을 이야기하고, 아름다움과 에로스에 대해,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인간의 소외의 문제, 고전과 현대문학을 넘나들며 우리가 사는 세계를 진단하던 재독철학자 한병철이 이번에는 정원사가 되었다. 언젠가 매일 정원 일을 하기로마음먹은 저자는 3년 동안 땅을 일구며 자신만의 비밀 정원을 가꾸어나갔다. 땅의 예찬은 저자가 정원을 가꾸면서 경험한 땅에 관한 명상이다. 철학, 미학, 문학을 이야기하던 철학자가 정원사로서 자신의 내밀한 생각을 고백한 기록이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을 땅-정원-꽃을 키워드로 하여 읽어보고자 했다.

 

 

: 구원의 관문

 

철학자에게 땅은 무엇인가? 그에게 땅이 예찬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땅이 행복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다른 저서에서 지적했던 신자유주의의 영향, 특히 디지털화를 다시 소환한다. ‘디지털 digital손가락을 의미하는 디기투스 digitus'에서 온 말(75)이다. 하나, 둘 셀 수 있는 것, 헤아리기에 기반한다. 그러므로 디지털화는 모든 대상을 정량화하여 비교가능하게만든다(29). 저자에 따르면 땅과 관련하여 고려할 때, ‘디지털화완전한 땅을 사라지게’(28) 하여 인간을 땅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 결과 우리는 조상이 지니던 땅에 대한 섬세한 감성을 잃고, 땅이 무엇인지 더는 알지 못하는’(31)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저자는 땅이야말로 인류가 디지털화에 저항하고 우리의 감각과 기억을 되돌려줄 수 있는 대상이라고 본다. 곧 철학자에게 땅은 예술가, 놀이하는 여인, 유혹하는 여인이면서 감사의 감정을 일으키는 존재’(182)이기에, 그에게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여기에서 구원에 관해 저자가 인용한 하이데거의 한 마디는 의미심장하다. “구원이란 위험에서 구해낸다는 뜻만이 아니다. 무언가를 풀어주어 본래의 본질로 되돌린다는 뜻이다.”(32) 그러므로 정원사가 된 철학자에게 땅은 본래의 본질로 되돌아갈 수 있는 구원의 관문이 된다. 저자가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며 한국에서 많은 식물의 씨앗을 가져와 심고 키운 일 역시 병든 아버지가 존재하는 고향, 자신의 본질에 되돌아가고자 하는 자연적인 행위일 것이다. 이렇게 철학자가 땅을 만나고, 땅과 연결되는 공간이 바로 정원이다.

 

 

정원: 사랑을 배우는 공간

 

정원사가 된 저자에게 정원이란 장소는 감각성과 물질성이 넉넉한공간(22)이다. 다양한 관목과 꽃을 돌보면서 삶과 죽음, 소멸과 부활을 마주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또 정원은 노동을 통하지만 오히려 삶의 고난에서 벗어나 원기를 얻는’(79) 공간이다. 책의 정황으로 볼 때, 저자가 겪는 삶의 고난은 머나먼 한국에서 소멸해가는 아버지와 관련이 있을 테다. 그래서였을까.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부터 기호학자, 문학이론가였던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을 떠올린다. 이 책은 바르트의 어머니가 사망한 직후, 다섯 살이던 어머니가 겨울 정원에 서 있는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된 애도의 노래다. 사진을 통해 사랑하는 존재의 부재를 인식하며, 떠나간 사람에 대한 사랑을 고통스럽게 확인한다. 바르트가 어머니의 사진을 끌어안고 숭배하듯, 정원사도 병상에 있는 아버지 곁에서 머물며 산에서, 길에서 만난 꽃들을 신령들께 제물로 바치고, 온 마음을 다해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철학자가 정원일을 하면서 배우는 것은 단연코 사랑하기이다. 정원에서의 시간은 타자의 시간’(23)이며, ‘사랑을 담은 인식이야말로 꽃을 구원한다(25). 나아가 꽃에 물주기는 꽃들과 함께 머무는 것’(76)을 배우는 일이다. 정원일은 단순한 일이 아니라 명상이며, 정적 속에 머무는 일’(175)이기도 하다. 정원사는 대지를 체험하며 땅과 만난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인의 신은 이다. 흔히 물신이라 부르는 이 상징적 존재는 땅, 아름다움, 선을 완전히 파묻어버렸다. 반면 정원사-철학자에게 정원은 디지털화로 잊힌 현실을 되찾게 해주고, 경험과 기억의 언어가 머무는 곳, 나아가 신을 발견하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정원사가 정원에서 배우는 사랑하기는 원자화되고 소외된 인류가 대지()와의 관계를 새로 맺는 일, 단절된 연대의 부활을 의미할 것이다.

 

 

: 그늘에서 피는 꽃과 늦둥이 꽃에 대한 애착

 

철학자-정원사인 저자는 정원이 신을 믿게 만든 성스러운 장소’(128)라고 말한다. 그는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면서 겨울에도 꽃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겨울꽃을 심고, 겨우내 동백꽃에는 천으로 감싸주며 돌보았다.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은 저자가 겨울꽃, 특히 그늘을 좋아하는 꽃과 느릿느릿 조심스럽게 피어나는 늦둥이꽃을 좋아한다는 점이다. 그늘을 좋아하는 꽃은 이른바 그늘식물인데, 저자는 수국과 옥잠화를 여러 번 언급한다. 그가 이 꽃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이유는 이들이 그늘을 환하게 밝히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밝은 빛이란 의미를 지니는 저자의 이름을 떠올리며, 그가 수국을 특히 닮았단 생각을 했다.

 

늦둥이 꽃은 옥잠화처럼 계절에 늦게개화하는 꽃을 가리킨다. 죽음과 탄생의 멜랑콜리가 뒤섞이는 낙엽 쌓인 정원에서 대부분의 꽃들이 시든 후 두 번째로 개화하는 이런 꽃들에 저자는 무엇보다 애착을 보인다. 이들은 겨울 한복판에 두 번째 봄을 정원에 불러들이는 존재들이다. 수국을 비롯하여 옥잠화는 함께 있는 다른 존재들을 압도하며 몰아내거나 무성하게 자라지 않는다. 기꺼이 낯선 타자들과 함께하며 제 존재를 스스로 밝히는 존재이기에, 저자는 수국과 옥잠화를 기꺼이 사랑한다. 저자에게 정원이란 공간이 신을 믿게 만든 성스러운 장소가 되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겨울꽃들은 숭고하다 못해 신적이다. 그들은 내 정원에서 신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126). 그러므로 저자에게 꽃(특히 겨울꽃)은 신의 현현(顯現)인 셈이다. 땅의 예찬이 정원사의 신앙고백이자 철학자의 신학이 되는 이유다. 하지만 무엇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꽃과 정원의 존재, 그리고 땅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철학자-정원사인 저자는 이 책에서 우리가 땅으로 되돌아가, 땅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땅과 연결되기를 희망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 희망하기가 바로 정원사의 시간방식(180)이다. 정원사는 새로 심은 씨앗이 내년에 싹을 내고 꽃이 피기를 희망하며 기다린다. 이 희망은 정적 속에 머물며 기다리는 가운데 미래의 시간, 타자의 시간에 머문다. 그렇기에 저자는 내 땅의 찬가는 다가오는 땅을 향한 것”(180)이라고 단언한다. 책을 읽으며 문득 우리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많은 이들이 땅을 투기의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우리는 땅을 착취하고 경외심을 거둠으로써 땅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자연과의 교감이나 연결고리가 끊어진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저자는 대지에 대한 감성, 상상력의 언어를 잃은 현대인들을 위해 그가 정원일을 통해 배운 아름다움과 경험한 것들을 땅에 대한 사랑의 찬가로 노래하는 것이다.

 

 

[책 속으로]

[1] "오늘날 우리는 땅에 대한 섬세한 감성을 모두 잃어버렸다. 땅이 무엇인지 더는 알지 못한다." (31)

 

[2] "땅으로 돌아가기란 행복으로 돌아가기가 된다. 땅은 행복의 원천이다." (32)

 

[3] "우리가 땅에서 떨어져나간 것의 쓰라린 대가가 어쩌면 죽음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67)

 

[4] "디지털 문화는 인간을 작은 손가락 존재로 축소시킨다. 디지털 문화는 헤아리는 손가락에 기반을 둔다. 하지만 역사는 이야기다. 역사는 헤아리지 않는다. 헤아리는 것은 역사 이후의 범주다." (75)

 

[5] "오늘날 헤아릴 수 없는 것은 모조리 존재하기를 멈춘다. 하지만 존재는 이야기이지 헤아리기가 아니다. 헤아리기에는 역사이자 기억인 언어가 없다." (76)

[6] "꽃에 물주기는 꽃들과 함께 머무는 일이다." (76)

 

[7] "땅의 낯섦, 다름, 그 독자적 생명에 나는 자주 놀라곤 했다. 육체노동을 하면서 비로소 나는 땅에 내밀히 알게 되었다. (...) 정원에서 나는 삶의 고난에서 벗어나 원기를 얻는다." (79)

 

[8] "그늘을 환하게 밝히는 것은 수국이다. 수국은 도취시키는 꽃이니 나는 그것을 사랑한다." (106)

 

[9] "겨울꽃들은 숭고하다 못해 신적이다. 그들은 내 정원에서 신을 체험하게 하는 것" (126)

 

[10] "우리는 고요함과 침묵을 잊었다. 나의 정원은 고요함의 장소. 정원에서 나는 고요함을 만든다." (146)

 

[11] "땅은 아름답다, 아니 거의 마법을 지녔다. 우리는 땅을 보호해야 한다. (...)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보호라는 의무를 지운다. 나는 그것을 배웠고 경험했다." (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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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일기] 스티븐 제이 굴드와 처음 만나다 | 기본 카테고리 2021-05-2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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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다윈 이후

스티븐 제이 굴드 저/홍욱희,홍동선 공역
사이언스북스 | 2009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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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 이후 (Ever Since Darwin)

: 다윈주의에 대한 오해와 이해를 말하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지음 | 홍욱희·홍동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독서일기] 스티븐 제이 굴드와 처음 만나다

 

최근에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1941.09.10-2002.05.20)의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다. 여러 책에서 끊임없이 언급되어 이름만 익숙했던 과학자였는데,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처음 읽을 책으로 1977년에 출간된 굴드의 첫 에세이집 다윈 이후 Ever Since Darwin을 골랐다. 굴드의 프로필을 보다가 그의 기일이 바로 오늘(05/20)인 것을 알게 되어, 짧은 독서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오늘이 19주기가 되는 셈인데, 굴드는 암으로 만60세를 막 넘은 시기에, 활발히 글을 쓰고 연구하던 학자로는 안타깝게 일찍 세상을 뜬 셈이다.

 

처음 읽기 시작한 다윈 이후(1977)는 굴드가 1974년부터 2001년까지 27년간 미국자연사박물관에서 발간하는 월간지 <자연사>에 연재한 300편이 넘는 에세이 중 초창기 글에 해당한다. 이 책이 나온 1977년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초판(1859)이 나온 지 118년 째 되던 해였다. 책을 읽으면서 놀랐던 대목은 다윈이 주장한 자연 선택 이론이 사실상 논쟁의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 1940년대였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는 이미 유전자의 존재와 역할에 대해 많은 것이 알려져 있던 시기였음에도 말이다. 나아가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발견(1953)되기 불과 10여 년 전이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처럼 많이 언급된 주제이면서도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오해를 낳았다는 의미로도 읽을 수 있겠다. 다시 말해서 당대에는 다윈조차도 진화의 보다 포괄적이고 명료한 이해를 위한 지식(이를테면 분자수준에서의 진화 현상에 대한 이해)이 아직 온전하지 못했던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다.

 

이 책에서 굴드는 다윈과 진화론에 얽힌 오해를 다시금 의혹의 눈길로 검토한다. 또 지질학과 고생물학을 연구하는 학자답게 생명의 진화에 대한 주제뿐만 아니라, 인류의 진화, 그리고 지구의 진화에 대한 논의도 이어나간다. 다윈의 진화론 이후 격렬한 논쟁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보다 정교하고 이해의 폭이 넓어진 이론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굴드는 기본적으로 이런 작업을 30년 가까이 지속했다. 그는 무엇보다 다윈주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했던 것 같다. 매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놀라운 과학적 사실들이 발견되어 기존의 과학지식에 더해진다. 80년대 이후 새롭게 더해진 과학적 사실과 이해를 반영한 굴드의 견해는 이후의 저서를 계속 읽어나가면서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오늘 읽은 부분(주로 1부 다윈주의)에서는 다윈 이론의 핵심을 이야기한 부분을 기억해두기로 한다. “다윈 이론의 핵심은 자연 선택이 단순히 부적자(the unfit)를 제거하는 것이 아닌, 진화의 창조적 추진력이라는 점에 있다. 더구나 자연 선택은 반드시 적자(the fit)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8)

 

굴드는 4장에서 이 표현을 조금 바꾸어 다시 언급한다.

 

다윈주의의 본질은 자연 선택이 적자를 창조한다는 주장에 담겨 있다. 변이는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그 방향은 임의적이다. 그것은 소재를 공급해줄 뿐이다. 자연 선택은 진화라는 변화의 방향을 지시한다. 그것은 선호되는 변이 종들을 보전하고 점진적으로 적응도를 쌓아 올린다.”(57)

 

자연 선택은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국지적 적응(local adaptation) 이론이다. 거기에는 완성의 원리가 없으며, 전반적인 개선의 보장도 없다.”(58)

 

이처럼 굴드는 다윈주의에 주목하는데, 자연 선택 개념의 핵심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개체들을 제거하는 부정적인 역할보다는 이 개념의 창조성에 방점을 둔다. 나아가 진화의 메커니즘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대한 국지적 적응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오늘은 처음 굴드의 책을 읽기 시작했으므로 이 점만 언급하기로 한다.

 

독자는 각자의 관심사와 당면한 문제를 책에서 발견하기 마련이다. 굴드의 글을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그의 (다윈주의 Darwinism가 아니라) ‘다원주의’(pluralism)적 시각이었다. 대개 과학자들은 종교와 과학을 대립적인 구도에 놓고 종교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반면 굴드는 처음부터 비판 대상을 배제하지 않고, 고려할만한 주제들을 모두 링 위에 끌어들이고 있었다. 굴드의 에세이에서는 대상의 어떤 점들이 설득력이 떨어지는지를 하나하나 검토해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예를 들면, 인류의 진화를 이야기하는 2부에서 저자는 진화적 변화의 은유 장치로서 사다리론관목론을 언급한다. 굴드는 진화가 종분화’(speciation)과정으로 새로운 종이 갑작스럽게출현하는 과정이 반복된다는 관목론을 지지한다. 반면 찰스 다윈의 관점은 사다리론에 해당하는데, 이 이론은 진화가 느리고 지속적인 변형을 통해 새로운 종이 나타난다는 시각이다. 저자는 이 두 개념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이론과 대척점에 있는 이론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자신의 이론이 왜 더 설득력을 가지는지 차근차근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저자의 학문적 자세는 비판 대상이 다윈과 같은 대가의 주장이기 때문에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관점으로 봤을 때 말이 너무나 안 되어 보이는 이론에도 똑같이 적용하고 있었다.

 

굴드는 1장을 마무리하며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신에 대한 외경과 자연 과학적 지식은 다 같이 소중히 다루어져야 한다. 생물계의 완벽한 조화로움이 사전에 계획되지 않았다고 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이 감소하는가?”(30) 처음 읽을 때는 주목하지 않았지만, 독서일기를 기록하면서 다시 훑어보니 이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과학자로는 보기 드문 모습인데, 굴드의 에세이에서 계속해서 드러나는 태도이기도 하다. 이 부분이 굴드의 글쓰기에서 하나의 특징으로 볼 수도 있겠다. 비판하는 대상의 위상을 단순히 축소하고 배제하지 않고, 대상 혹은 현상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정말로 이해하고자하는 노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자는 이런 과정을 거쳐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굴드의 책은 절판이 많이 되어 구하기가 쉽지 않지만(절판되었다고 원가보다 높게 중고책을 판매하는 분들....그러지 마시길... 여러 출판사에서 절판된 책을 다시 출간해주셨으면 좋겠다), 앞으로 더 읽게 될 굴드의 에세이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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