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블로그 | 랜덤블로그 쪽지
언어너머
http://blog.yes24.com/nyunghae
리스트 | RSS
태그 & 테마링 | 방명록
Memories
행동은 변화의 출발이고, 생각은 행동의 근원이다.
프로필 쪽지 친구추가
1월 스타지수 : 별84
댓글알리미 비글 : 사용함
전체보기
기본 카테고리
나의 리뷰
소식 전하기
나의 리뷰
기본 카테고리
국내소설
국외소설
고전문학
문화예술
정치사회
비문학
만화
인문
..시(詩)
영화/애니메이션
나의 메모
기본 카테고리
태그
내용이 없습니다.
2021 / 01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월별보기
최근 댓글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일찍 시인을 아셨군요 
ㅎㅎㅎ 저도 웹툰중에.. 
살아가면서 어렴풋이 .. 
마지막 단락이 이 리.. 
새로운 글

전체보기
더 나은 세상속에서 바라보는 근원적인 외로움 | 국내소설 2011-06-26 23:58
http://blog.yes24.com/document/4512916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도서]2011 제2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김애란 저
문학동네 | 2011년 04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인간은 자신이 담겨진 세상속에서의 '현재'에서 살아간다. 글자를 빚어내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작가들 또한 예외일수는 없다. 지나간 세기를 반추해 볼 수도 있을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모든 인간 앞에 놓여진 삶은 절대 다시 뒤로 돌아가지 않는다. 과거를 반성한다거나, 현재를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가 미약하게나마 좀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 꾸려나갈 수 있는 삶이 어제에 있지 않고 오늘과 내일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먼지쌓인 과거를 끌어오든간에) 작가는 오늘을 얘기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닐까. 그래서 문학과 예술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하지 않는가. 바로 지금, 바로 이곳에서, 나와, 내 앞의 인간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 그리고 그 주변을 무규칙적으로 둘러싼 수많은 타인들과 굵은실과 가는실로, 혹은 낚시줄이나 피아노줄처럼 눈에는 잘 비치진 않지만 강하게 엮어진, 사회와 세계를 말하는 것은, 가타부타 할 수 없는 자명한 일인지도 모른다.

 

현대라고 일컫는 지금의 사회는 종전과는 많은 것들이 달라진 것처럼 보이며, 실제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과 문화들은 그 시대를 둘러싼 여러 방면에서 소재를 발굴한다. 그 누가됐든, 가장 잘 알수 있는 것은, 자신이 들여다본 '지금' 이고, '여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세계가, 어제의 세계와는 조금 다른 모습, 다른 취향, 다른 관심을 갖고 있을지라도 인류의 보편적인 감성애는 이때까지 큰 변화가 없었다. 혹은, 인류의 진화가 (마치 멈춘 것 처럼)수세기에 걸쳐 아주 미세하게 진행되듯, 조금씩 이동하지만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세기의 고전들이, 여지껏, 그리고 앞으로도 읽힐 것이란 사실이야 말로 그것의 분명히 드러나는 증거이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작가들은 현재의 한국, 나아가 세계의 흐름과 딜레마를 반추하지만, 그 초석에는, 모든 인간을 쉼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여전한 숙제들이 담겨있다. 어떠한 제동도 없이 뻗어나가려는 상상력과 옭아매는 규칙들의 틈 사이로 뻗어나가는 문장들은 바깥으로써의 현재를 상징함과 동시에 그 속에서 여전히 꿈틀거리는 인간본연에 대한 성찰은 안으로써의 현재를 담아낸다.

 

 

자동화시스템의 등장과 더불어, 경제/산업기반 형성의 바탕이 되는,가장 권위적이고 위협적인 모습의 구조물로 자리잡은 '타워크레인'을 떠오르게끔 하는 김애란의<물속 골리앗>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재개발 예정지역에 살고있던 한 가정, 아버지가 돌아가고 장마가 시작된다. 거주자들이 하나둘씩 떠난 곳에 남은것은 모자뿐이며, 비는 멈추질 않는다. 경제적인 수입을 벌어들이는것이 남성에만 의존하지 않기 시작한 움직임은 이미 한창 진행중임에도 한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남성이 갖는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죽음과 때를 같이해서 시작된 장마는, 표면적인 재난과 동시에 근원적인 내재적 재난과 맞물려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바깥에선 비가 멈추질 않지만, 안에서는 고갈될지도 모를 물을 여기저기 받아놓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숨이 턱 막히는 절망과, 그 사이에서 삶을 유지하려는 소박한 몸부림은 존재하지만, 결국 엄마마저 숨을 거두고, 화자는 이제 엄마의 시체를 짊어지고, 망망대해가 되어버린 밖으로 향한다. 모든것이 죽음으로 뭉쳐진 '집' 안에서 화자는 더이상 누군가와 온기를 나눌 수 없었으니깐. 하지만 화자가 집 안에서, 집 밖에서 맞닥뜨린 외로움과 고립감은, 타인과 한 공간에서 (적당히) 공감함으로써 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이제, 김유진의 <여름>은 인물의 행동묘사 만큼이나 (먼지가 쌓여있는) 건조하고 메마른 공간 속에서 결국 타인(B)와의 어떤 투명한 경계를 체험케 한다. B가 경험했던 과거가 부재한 Y.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맛을 만들어야만 하는 Y는 각혈을 토하는 B를 얼음처럼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어쩌면, 그저 공포에 대한 극복을 어둠속을 응시하는 것으로 떨쳐내야만 하는 수동적인 Y와, B의 관계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도 없고, 그저 이물감과 무기력한 순응의 관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가, B의 부재 속에서 떨어진 체리들을 보며, 아예 체리'나무 가지' 를 꺾는 것이 치닿는 정점은 긍정일까 부정일까.

 

나아가, 이장욱의 <이반 멘슈코프의 춤추는 방>은 아예 직접적으로 화자를 방에 홀로 둔다. 자살할지도 모른다며 집을 잠시 내놓은 공포소설작가의 집에서, 그는 일련의 모호한 체험들을 하게된다. '집'안이 주는 안도감은 사라지고, 바깥에서의 물리적 위협과 하등의 차이가 없게끔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집을 소개시켜준 친구는 마치 그의 악몽을 잘 알고 있는 듯 보인다. 결국, 빈 공간속에서 울려퍼지는 존재의 그림자를 이기지 못하고 열어본 방은, 호기심의 충족이 아니라, 혼란이 더욱 더 그를 휘감을 뿐이다. "이봐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는 것은 누구인가 (106p)"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이미지와 소리, 모든 감각, 그리고 그것의 총체인 세상을 어떻게, 얼마나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지, 똑바르다는 정의는 어떻게 내려지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제, 고립된 인간은 다시 바깥으로 뻗어나오는 듯 보인다. 

 

김사과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는 너무나 똑바르게 뻗어나간 선로위에서 한번에 이탈하는 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내면의 심리묘사를 끈덕지게 파고들어가, 마치 소크라테스식 질문법으로 그 근원을 찾아나가는 과정처럼 보였다. 반복적인 생활, 그속에서 반복되는 억압을 끊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오랫동안 가두어뒀던 분노는 그 속에서 빠져나오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간의 쌓였던 것들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곳에 풀어내기 시작한다. 마치 꿈속에 있는 듯, 마약에 취한듯 일그러지고 왜곡된 그의 시선은 곧 그의 행동이 '똑바름'에서 어긋난 지점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리고 분노는 다시 '집 안'으로 향한다. 그의 분노는 거기서부터 형성되어 왔으니깐. 그리고 마치 그의 유년과 똑 닮았을 소년이 여기 등장한다.

 

김성중의 <허공의 아이들>은 배명훈의 단편 <크레인 크레인>을 떠올리게끔 하는 이야기다. 물론 외적인 이미지와 행동의 변화를 제외하고 상징적인 부분에서 더 큰 유사성을 갖는 것은 역시 맨 앞에 실린 김애란의 <물속 크레인>이지만 말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들은 소년과 소녀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져버리고, 부패된다. 지면은 그대로인 채 집은 하늘로 조금씩 점진적으로 상승한다. '주전이 될 수 없고, 고등학교에서 야구부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세상이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소년의 바람이 이루어진 듯 세상은 적요로 둘러쌓여 있다. 상승하는 고도 만큼이나 점진적으로 투명해져가는 소녀, 그를 바라보는 소년. 마치 누군가의 상실을, 무언가의 소멸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되는 것이 '성장'의 한 과정이라도 되는것 마냥 소녀가 사라진 시간속에서 다시금 발견하는, 사라진 생명의 흔적들. 하지만, '성장'과 같은 소멸이 이루어지는 허공. 그리고 그 아래서 '소멸'로 치닫는 성장은 계속된다.

 

김이환의 <너의 변신>은 현재, 인간의 외향에 대한 욕망과, 자본의 필요가 맞물려 불고있는 성형의 대한 관념으로 시작된다. 시나리오 쓰기의 그것처럼, 포스트잇을 다닥다닥 이어놓은 듯한, 마치 짧은 소제목 같기도 한, 굵은 글자의 개념과 함께 펼쳐진 이야기들은, 신기하게도 결국 이야기를 앞으로 끌어간다. 자신의 희망하는 외향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려는 이러한 광적인 붐은, 자신이 선택하지 못한 표면적 성(性)과, 정체성으로써의 성(性)을 조정하려하는 동성애자들로 인해 더 단단하게 뻗어나간다. 효율이라는 명제 아래 인간은 필요에 의한 성형에서 진화를 향한 성형을 시작하고, 그리고 그 끝은 결국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존재로 귀결되기에 이른다. 일반적인 성형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보다 이롭게 하기 위해서 거행한다면, 성형이 주는 감각진화가 동반하는 쾌감의 끝은 결국, 이론만 존재할 뿐 실제는 증명될 수 없는 지점이었다. 자신을, 그리고 그 자신을 그대로 사랑해줄 상대를 인정하지 못한 인물이 만들어가는 희극과도 같은 비극을 만났다. 만약, 삶을 퇴화시키듯 보이는 결점들을 긍정하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내가 가진 일부임을 인정한다면?

 

정용준의 <떠떠떠, 떠>는 자신에 대한 수긍과, 타인에 손길에 대한 이해가 낳을 수 있는, 우리가 지향하지만 쉬이 가 닿을 수 없는 지점을 보여준다. 간질과 같은 증상을 가진 여성과 말더듬과 같은 증상을 가진 남성. 사회가 규정짓는 정상의 범위에서 조금 밀려난 그들은 결국 사회안에서 각자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가기 위해 '탈'을 쓰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무관심은, 모든이들이 탈속의 진실과 고통에 관심갖지 않고 탈바깥의 웃음에만 치중하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래서 그녀는, '탈'아래 숨겨진 모습이 드러났을 때, 무관심 혹은, '찰나의 관심'보다는 그저 옆에 있어줌으로써, 아무일 없다는 듯, 괜찮다는, 괜찮을 것이라는 표정을 지어주기를 바란다.

 

말을 더듬거리던, 혹은 그 과정을 더듬거리던, 우리를 그대로 '인정'해주는 존재를 조금씩 '이해'해 나간다는 것이,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발달된 통신으로 인해 우리 각자, 자신보다 더 나은 이들을 발견하는 일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어딘가에 막연하게 존재할, 혹은 우리의 주변에서, 혹은 먼곳에서 간혹 마주치는 자신보다 '더 나은'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은 너무 손쉽다. 그만큼 삶의 기회를 부여잡은 이들이 보여주는 '가능성'은 그 좁은 가능성에서 필연적으로 밀려날 수 밖에 없는 이들을 좌절시키기에 충분하다.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는 듯 보이는 그 가능성이라는 문은, 실제로는 매우 비좁은 통로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을 지나가야만 하는 숙명에 이끌릴 수 밖에 없다. '각자의 가능성'이라는 이상을 매장시키고, 허황된 '모두의 보편적인 가능성'에 달라들어야 하는, 그것을 강요하는 세상. 그로인해 무너지는 우리의 존재감과 열등감은 그 어느때보다 크다. 현상 유지가 필요한 존재의 가치와, 개발되어야 할 특성들의 경계는 너무나 불분명하고, 때로는 전복되어, 역전된다. <너의 변신>이야말로 그런 경계구분의 실패한, 무엇을 안으로 지켜내고, 무엇을 바깥으로 뻗쳐나가야 할 것들의 혼란이 만든 종착점이지 않을까. 치밀하게도, 그 다음이자 마지막 순서의 작품인<떠떠떠, 떠>는 그 반대편에서있는 작품이다. 드러내야 할것과, 들여야 할 것, 지켜내야 할 것들의 경계를 세워줄 이가 비록 불분명 하다해도, 그 경계가 허물어지지 않도록 지켜내줄 수 있는, 내 앞의 타인을 지켜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며 말이다. 

 

 

하지만 으레 우리가 스스로 감당해야만 하는 그런, 경계를 붙잡아 줄 수 있는 타인을 만나기까지, 얼마나, 어디서 방황하는가. 나는 아래 언급하는 작품들속에서, 그것이 가족이란 울타리 였지는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하게된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에서 보여주는 한 인간의 비뚤어진 분노는 애초부터 그가 가족의 울타리에서 살아갈 때부터 존재한 듯 보인다. 아버지의 말대로 열심히 살아온 화자에게 그 열심의 대가인 '성취감'은 끝내 쥐어지지 않는다. 결국 그는 가족에게 향하고, 자신의 존재가 뿌리박힌 가족을 짓밟지 않는가? 서로를 맞대며 이야기 한들, 그 이면의 벽을 향해 소리치는 것과 같은 그들의 대화는, 그 가정이 예전에, 앞으로 뻗어나가게끔 함양해야 하는 가치들과 스스로를 존재시키기 위한 자존감을 구분하지 못했을 것이란 의구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자신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그 성실과 노력은 이미 그 자신의 근원부터 뒤덮어 버렸을 것이다. 자신을 자신으로써 존재케하는 신선한 공기와 마주하지 못한 것들은 부패되어 분노로 치닫는다. 그렇지만, 그때서야 그 근원을 깨부신다 한들, 그제서야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허공의 아이들>에서의 소년이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차라리 집이 아닌 마트에서 생활하기를 희망한다. 소년이 기억하는 집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는 울타리'가 아닌, '외부로 벗어나지 못하게끔 하는 울타리'였던 것을 드러내는 셈이다. 이것은 묘하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가족에게 온 책임을 돌리는 것으로 모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허공의 아이들>의 소년은 어떠한가, 본질적인 외로움이 그 선행된 이유이건만, 결과적으론 소녀의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 집들은 통째로 하늘로 향한다. 모두에게, 가족이 있든 없든, '집'이란 존재는 여성의 자궁과도 같은 시작점인 동시에, 끝내 돌아가야만 하는 흙과 닮은 셈이다. 더불어, 그가 다시 돌아간 집이, 자신이 집이 아니었다 한들, 결국 다시 돌아온 그 보편적인 집에서, (마치 집의 상승처럼) 소년이 성장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세상에서 사라진 모든것들이 가르쳐준 고독과, 소녀의 존재가 그 이유였겠지만.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디를 집으로 규정짓느냐 하는 것일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화자는, 존재의 시작과 끝을 바라보았지만, 그 사이의 숱한 사회적 문제들은 간단히 넘어버렸다. 그러니, 가족의 영향과 더불어 사회의 매트릭스 안에서 허우적대던 인간이 가진 분노가 다시 가족으로, 집으로 향한 것은 완벽히 이해될 수 없는 하나의 딜레마인 셈이다. '시작점'이 갖는 상징성과 질량이 그 이후의 것들을 얼마나 책임져야만 하는지 사실, 내겐 혼란스럽다. 짧은 단편으로 말미암아, 모든것을 가늠할 순 없었다. 분노가 어떻게 엮이게 되었는지는 화자인 자신만이 완벽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완벽히 이해될수 없다고 했던 궁극적인 이유는, 가족과 사회를 통해 쌓아진, 그래서 책임을 전가시켰던 가족과 사회 속에서, 정작 그 자신은 없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그 자신의 책임은 가족, 사회가 갖는 책임에 비례해서 너무 작은 먼지와 같았더라 한들, 분노의 '배출'이 아닌 '표출'의 비극은 너무나 끔찍하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문제와 해결의 길 자체와 그 위에 서있는 인간을 붕괴시켜 버린것은 확연한 '모두의 비극'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책임을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 범위를 규정짓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 자신을 채운것이 무엇인지 끝내 깨닫지 못하고, 그저 자신을 존재시켰던 수많은 시간과 물질과 상념들 마저도 투명하게 사라지는, 한 존재를 바라볼 수 밖에 없던 <허공의 아이들>의 소년은 여전히 성장하고, 홀로남은 그 시간들이 맞닥뜨리는 외로움과 마주해야 한다. 마치 <물속 크레인>의 화자처럼 말이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오늘은 참으로 신기한 날이다>의 화자처럼 제 스스로 파괴한 가족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가족과 그것을 둘러싼 모든이들 소멸은, 오늘날의 숱한 '소통 가능성'에서 역설적인 절망을 체험하는 한숨처럼 깊은 근원적인 외로움의 표상이 된다.

 

자의든 타의든 가족의 울타리에서 '상징적'으로 벗어남과 동시에 더욱 더 깊이 갈망하게 되는 타자와의 '소통'. 그리고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 만큼이나 늘어나고 있는 역설적인 외로움의 가능성이 산재한 시대.

 

 

<물속 골리앗>을 읽는 내내,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덮고, 이 리뷰를 쓰기까지 내내 나는, 잊었던 한 인간의 농밀한 '외로움'을 다시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제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예전에, 한 친구가 내게 보내준 하나의 링크. 지금은 고인이 된 정은임씨가 방송하던 FM 영화음악의 오프닝, 그리고 다시한번 그때의 먹먹함이 내 외로움을 조용히 틀어막는다.

 

 

새벽 세시,
고공 크레인 위에서 바라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100여일을 고공 크레인 위에서 홀로 싸우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의 이야기를 접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올 가을에는 외롭다는 말을 아껴야 겠다구요.

진짜 고독한 사람은
쉽게 외롭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세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겨우 매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 제 목소리 들리세요?

 

 

누군가가 이미 스러져간 자리에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눈이 닿지않는 곳에서 누군가 다시 홀로 싸우고 있다. 이것은 어떤 회상도 아니고 상징도 아닌, 작금의 현실이다. 그때의 호기어린 다짐은 이제 온데간데 사라지고, '외롭다'는 말은 스스로도 지겨워하리만큼 일상적인 감각이 되었고, 여전히 누구나 말하는 흔한 감상이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외로움'을 나는 한낱 감정의 굴곡으로, 흔한 감성으로 치부될 순 없을 것이다. 모두의 외로움은 저마다의 밀도를 갖으며, 쉽고 가벼운 마음으로 그것을 판단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나는, 우리는, 정말 외로운가. 아니면 외롭다고 내뱉는순간 외로워지는가. 우리의 외로움은, 가족의 주검마저 짊어질 만큼 절박한가.

 

나 자신을, 내가 인정하지 못하며 괴로워하고, 나아가 나를 인정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들이 외롭지 않을리 없다. 우리는 외롭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를 먼저 인정해야 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할련지 모른다. 그리고 외롭다고 말함과 동시에, 외롭다는 말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내 입을 통해 흘러나간 외로움만이 다시 나의 귀로, 가슴으로 들어오게끔 해서는 안된다. 나의 외로움과 너의 외로움이 허공에 흩뿌려지는데 누가 그것을 거둬갈수 있겠는가.

 

허공에 솟은 크레인만큼 향상되는 삶의 질 위에서 우리는 외롭다. 우리의 공간은 좁다. 우리는 각자의 크레인 위에서 타인과 무전기로 소통한다.

 

우리가 서로의 외로움을 오롯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온전히 토닥일수 없는 현실만큼의 재난이 어디있겠는가?

 

장마가 시작되었다. 세상 모든 외로움이 가득 녹아있는 망망대해 속에서 우리 모두가 언제쯤 서로를 보듬어 줄 수 있을까. 웃고있는 '탈' 속, 상대방의 진심을 향해 손을 뻗어보자.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들 사이의 서글픈 여백이 한뼘 줄어들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글이 좋으셨다면 SNS로 함께 공감해주세요.
댓글(0) 트랙백(0)
이 리뷰를 | 추천 1        
진행중인 이벤트
나의 북마크
이벤트 세상
많이 본 글
오늘 8 | 전체 22795
2007-01-19 개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