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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 시집 읽기 2021-08-19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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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능소화

윤재철 저
솔 | 2007년 09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가야 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슬쩍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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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술값은 쟤들이 낼 거야

옆 자리 앉은 친구가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그래 죽을 때도 그러자

화장실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화장실 가서 안 오는 것처럼 슬그머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할 것도 없어

빗돌을 세우지 말라고 할 것도 없어

왁자지껄한 잡담 속을 치기배처럼

한 건 하고 흔적 없이 사라지면 돼

아무렴 외로워지는 거야

외로워지는 연습

술집을 빠져나와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 걸으며

마음이 비로소 환해진다.

- 윤재철,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

 

 

시 제목에 나오는 갈 때는 죽을 때를 말한다. 시인은 술자리에서 친구에게 들은 말을 통해 죽음에 대한 시적 사유를 시작한다. 옆 자리에 앉은 친구가 시인에게 말한다. “갈 때는 그냥 살짝 가면 돼라고. 술값 걱정을 하지 말라는 소리다. 지극히 일상적인 이 말에서 시인은 그때 나는 무슨 계시처럼/ 죽음을 떠올리고 빙긋이 웃는다”. 생명으로 태어난 존재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살아 있는 존재는 죽음을 체험할 수 없다. 간혹 죽음을 체험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을 확연하게 증명할 방법은 없다. 죽음이란 저편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편에 있는 사람들은 죽어야 저편으로 갈 수 있다. 죽음을 알려면 일단 저편으로 가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죽은 자가 되어버린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들은 산 자로서 죽음을 알고 싶어 한다.

 

죽음을 사유하는 일은 그러므로 온전히 죽음을 상상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 이 상상은 죽음 자체를 향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좀 더 편하게 죽는 상황을 상상한다. 구순(九旬)에 이른 부부가 잠을 자면서 저도 모르게 죽은 소식이라도 들으면 사람들은 감탄을 연발한다. 참으로 편안하게 죽은 구순 부부가 부러운 것이다. 돌려 말하면 이렇게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 떨며 비통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한다. ‘갈 때를 생각하는 시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시인은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죽고 싶다. 화장실에 가는 것은 일상이다. 인간은 죽음을 일상 너머로 밀어내려고 한다. 죽는 것은 어쨌든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일상 속에서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그러려면 일상인 듯 죽음을 느껴야 한다.

 

이순신은 전쟁터에서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부하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한 것이다. 어느 시인은 자신의 무덤 앞에 빗돌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은 이후에 세워질 빗돌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렇든 저렇든 두 사람은 죽음 이후를 말하고 있다. 죽음 이후에 펼쳐질 상황이 죽은 사람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시인은 이승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사라지고 싶다.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은 사람이 무슨 유언을 남길까? 산 자들은 산 자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죽은 자에 매이면 산 자들은 제대로 된 삶을 살 수가 없다. 죽음에 거대한 의미를 덧붙일 이유도 없다. 삶이 있으니 죽음이 있다. 시인은 그저 화장실에 가는 것처럼 슬그머니 지금 이 자리를 떠서 저편으로 가는 길에 들어서고 싶은 것이다.

 

사회적 명예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늘 죽음 이후를 걱정한다. 장례식장에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며 그들은 삶을 살면서도 자꾸만 죽음 이후에 집착한다. 한마디로 그들은 화장실에 가는 일처럼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 사방에 자신의 죽음을 알려 화려하게 저세상으로 가는 꿈을 꾼다. 거대한 빗돌을 세워 이 땅에 자신의 흔적을 뚜렷하게 남기고 싶다. 죽어서도 외롭지 않은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가능할까? 삶은 더불어 살 수 있어도, 죽음은 더불어 죽을 수가 없다. 죽음은 온전히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일 것이다. 시인은 외로워지는 연습을 이야기한다. 외로워지는 연습은 사람들과 맺는 관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고 어떻게 삶을 유지할까? 시인이 말하는 외로움이란 생명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외로워지는 연습이라도 시작한 것일까? 시인은 홀로 술집을 빠져나온다. 낯선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걸으며 시인은 마음이 비로소 환해지는 것을 느낀다.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시인은 죽음에 대한 시적 사유를 통해 풀어냈다. 더불어 해야 할 일이 있고, 홀로 해야 할 일이 있다. 죽음을 사유하는 일은 홀로 해야 하는 일이다. 죽음만큼 생명을 두렵게 하는 것이 어디에 있을까? 죽음에 맞닥뜨린 사람들은 뭉크의 절규에 나오는 사람의 얼굴로 비명을 내지른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자가 내지르는 이 비명을 시인은 마음 깊이 새겨 넣고 천천히 삭인다. 죽음과 싸워 이길 수 없으니 죽음을 끌어안고 사는 도리밖에는 없다. 그것을 시인은 외로워지는 연습으로 실천한다. 죽음으로부터 내빼지 않고 기꺼이 죽음을 맞이하려고 한다. 죽음을 향해 환하게 웃는 시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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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의 '화석' | 시집 읽기 2021-08-14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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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중세를 적다

홍일표 저
민음사 | 2021년 01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하느님으로 여는 시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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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

 

 

너는 가고 있고

가면서 변신하고 있고

아무도 몰래 얼굴을 감추고 사라지면서

어디서 맑은 개울물 소리

 

날아다닌 꽃을 잡으러 다니는 아이들 손끝에서 하느님이 웃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심심하여

지상에 내려와 아이들과 놀아 주고 있는 것

허공 안팎을 들락거리던 나비 한 마리

네가 없는 붉은 우체통 같은 오후의 정수리에 앉아 있다

 

신의 지문이 묻어 있는 버드나무잎 하나

우편엽서처럼 날아와

가만히 들여다보면

햇살이 새겨 놓고 간 오돌도돌한 불립문자

더듬더듬 손끝을 타고 올라와 소곤거린다

 

소곤거리는 봄볕과 함께 산림문화관에서 버드나무잎 화석을 읽는다

돌과 이파리의 경계 너머

사라진 네가 숨어든 곳

유리관 안에서 모른 체하며 앉아 있는

돌도 나뭇잎도 아닌

하느님도 나비도 아닌

너였다가 너의 미래였다가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다만 지금은 황홀한 한때

- 홍일표, '화석'

 

 

가고 있는 를 시인은 가면서 변신하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시간 속에서 변하지 않는 존재가 어디에 있을까? 몰래 얼굴을 감추고 사라지는 저 맑은 개울물 소리또한 시간의 흐름을 따라 끊임없이 어딘가로 흐른다. 사방에 깔려 있는 무수한 생명들은 저마다 시간을 살고 있다. 이들이 사는 시간은 물론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날아다닌 꽃을 잡으러 다니는 아이들 손끝에서 하느님이 웃고 있다는 시구에 나타나는 대로, 시인은 생명과 생명을 하나로 이어주는 하느님을 상상하고 있다. 시인이 상상하는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은 생명이 있는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 정확히 말하면 생명 하나하나가 하느님을 품고 있다. 맑은 개울물 소리에도 하느님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만물에 깃든 하느님도 가끔은 심심하여 지상에 내려와 아이들과 놀아주고는 한다. 지상에 내려온 하느님을 굳이 인격체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하느님은 인격일 수도 있고, 기운일 수도 있다. 이리저리 해석할 여지는 다분하지만, 단 하나의 의미로 해석될 수 없는 존재가 하느님이다. 허공 안팎을 들락거리던 나비 한 마리에도 하느님이 깃들어 있다. “신의 지문이 묻어 있는 버드나무잎 하나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맥락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는 햇살이 새겨 놓고 간 오돌도돌한 불립문자가 새겨져 있다. 불립문자는 인간의 시선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문자이다. 인간의 의미를 뛰어넘은 자리에 있는 문자라고 해도 좋겠다. 그런 불립문자가 더듬더듬 손끝을 타고 올라와 소곤거린다”. 아무나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물을 향해 귀를 활짝 연 존재들만이 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생명이 있는 존재라면 그 속에 하느님을 품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도 왜 사물이 소곤거리는 소리를 누군가는 듣고, 누군가는 듣지 못하는 것일까? 사물이 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다는 말이다. 사물에 깃든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햇살이 새겨 놓고 간 이 하느님=불립문자를 읽으려면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느낌에 주목을 해야 한다. 하느님의 소리는 귀로 듣는 게 아니라 몸으로 듣는 것이다. 머리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그 감촉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 느낌으로 버드나무잎 화석을 읽는다. “돌과 이파리의 경계 너머에 있는 이 화석을 시인은 사라진 네가 몰래 숨어든 곳으로 표현한다. 겉으로 보면 유리관 안에서 모른 체하며 앉아 있는 듯싶지만, 버드나무잎 화석이 결코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돌과 이파리의 경계를 넘은 화석을 따라 시인 또한 경계를 넘은 자리에서 그와 마주하고 있다. 화석은 돌도 아니고 나뭇잎도 아니다. 하느님도 아니고 나비도 아니다. 동시에 화석은 돌이고 나뭇잎이고 하느님이고 나비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이 화석을 시인은 온몸의 감각으로 느낀다. 온몸의 감각을 사용하려면 몸 깊이 숨어 있는 하느님을 밖으로 끌어내야 한다. 가끔은 심심한 하느님을 불러내 아이들과 더불어 놀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느님은 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편엽서처럼 날아온 사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존재에게만 그 모습을 나타낸다. 아무 때나 드러날 하느님이라면 구태여 사물의 소리를 듣는 귀를 만들 필요가 없지 않은가?

 

다만 지금은 황홀한 한때라는 시구에 표현된바, 마음속 하느님과 노니는 이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진다.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존재가 아무 때나 나타날 리 없지 않은가.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황홀한 한때는 시적 순간이 펼쳐지는 현재를 의미한다. 시적 순간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현재로 표현된다. 이 순간을 놓치면 하느님은 저 멀리로 사라지고, 동시에 시적 순간 역시 허망하게 허물어진다. 시인은 너였다가 너의 미래였다가라는 시구로 현재 속에서 펼쳐지는 수많은 시간들을 포괄한다. 시간을 사는 하느님은 시간 속에서 시간을 넘어선다. 시간을 살기에 하느님은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시간을 넘어서기에 하느님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수 있다. 홍일표는 모든 것이자 아무것도 아닌 하느님을 통해 시적 현재로 들어가는 순간을 열어젖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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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나의 '오후 세 시' | 시집 읽기 2021-08-11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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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당신은 나의 높이를 가지세요

신미나 저
창비 | 2021년 03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당신과 높이를 같이 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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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

 

 

쟁반에 무당벌레가

날아들었다

 

갸웃거리는 더듬이의 궁리

시고 붉은 향로를 따라

 

보라, 이 고요한 집중을

무당벌레는

자신의 무늬를 조롱하지 않고

앞으로 간다

골똘히 간다

 

과도를 세워

무당벌레를 막는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뒤에서 앞으로

일어서는 벽

물러서지 않는 벽

 

그는 잠시 멈춘다

불행을 희롱하는 신을 마주친 듯이

깊고 작은 숨을 고른다

 

실밥처럼 가는 다리

저 등에 수수 한알도

버거울 것이다

 

무당벌레가 간다

금방 뒤집혀버릴

불안마저 데리고 간다

방향이 의지가 된다

- 신미나, '오후 세시'

 

 

모든 생명은 생에 대한 의지를 본능적으로 지니고 태어난다. 배가 고프면 생명은 무조건 먹을거리를 찾는다. ‘무조건이라는 말에는 위험을 무릅쓰고라는 맥락이 내포되어 있다. 목숨을 걸고 먹을거리를 구한다고 말해도 좋겠다. 살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은 어찌 보면 먹어야 비로소 살 수 있는 생명의 절대적인 조건 속에서 뻗어 나올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생명의 진실을 쟁반에 날아든 무당벌레 한 마리를 통해 다시금 깨닫는다. 시고 붉은 향로를 따라 무당벌레는 더듬이를 갸웃거리며 대상을 향해 다가간다. 대상에서 풍기는 냄새에 무당벌레는 완전히 빠져 있다. 시인의 말마따나 무당벌레는 지금 고요한 집중에 빠져 있다. 무당벌레와 대상 사이에는 아무것도 들어설 수 없다. 무당벌레는 오로지 앞으로 간다/ 골똘히 간다”.

 

시인은 과도를 세워 무당벌레가 가는 길을 막는다. 무당벌레가 쉬이 물러날 리 없다. 무당벌레는 제 본능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본능은 생명력과 직결되어 있다. 본능을 잊으면 생명이 위태롭다는 말이다. 살기 위해 무당벌레는 과도를 무서워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과도가 오른쪽에 세워지면 왼쪽으로 옮기고, 왼쪽에 세워지면 오른쪽으로 옮긴다. 무당벌레가 움직이는 방향을 따라 시인도 과도를 계속해서 옮긴다. 말 그대로 무당벌레에게 과도는 뒤에서 앞에서/ 일어서는 벽/ 물러서지 않는 벽이다. 어떻게 해야 무당벌레는 이 벽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을까? 무당벌레는 잠시 발을 늦춘다. 깊고 작은 숨을 고르며 불행을 희롱하는 신을 마주친 듯이어떻게든 가야 할 길을 살핀다.

 

실밥처럼 가는 다리로 무당벌레는 거대한 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앞만 보고 간다. 아름다운 향기가 여전히 무당벌레를 유혹하고 있다. 유혹하는 대상이 살아 있는 한 무당벌레는 그 대상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이 무당벌레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설사 그리로 가는 길이 죽음이 도사린 길이라고 해도 무당벌레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무당벌레에게 삶과 죽음은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향기 나는 먹이를 놓치면 무당벌레는 어차피 죽을 수밖에 없다. 요컨대 무당벌레에게 대상이 있는 곳은 생을 위해서는 반드시 가야 할 장소이다. 과도보다 더 큰 칼이 길을 막아도 무당벌레는 그래서 발길을 멈추지 않는다. 시인 또한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저 등에 수수 한알도/ 버거울 것이다라는 구절을 가만히 들여다보라.

 

무당벌레의 의지를 알고 있는 시인은 왜 과도로 자꾸만 무당벌레가 가는 길을 막는 것일까? 시인은 무당벌레를 통해 생명의 길을 엿보고 있다. 무당벌레에게 생명의 길이란 금방 뒤집혀버릴/ 불안마저 데리고가는 길과 다르지 않다. 여기저기서 일어서는 벽이 어느 순간 무당벌레를 짓누를지 모른다. 수수 한 알도 버거울 저 몸으로 무당벌레는 날이 선 과도를 이리저리 피해 향기가 나는 목적지를 향해 묵묵히 걷고 있다. 무당벌레는 죽음이 무섭지 않은 것일까? 본능적으로 생을 지향하는 무당벌레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리는 없다. 다만 무당벌레는 죽음보다 더한 본능을 기운 삼아 향기가 피어나는 방향으로 옹골찬 발걸음을 옮긴다. 시인은 방향이 의지가 된다는 시구로 무당벌레의 생을 표현한다.

 

방향이 의지가 되는 생은 생명으로 태어난 존재가 내보이는 본원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다. 무당벌레에게 방향이란 향기가 피어오르는 장소를 가리킨다. 이곳으로 가야 무당벌레는 생명을 이을 수 있는 먹이를 얻을 수 있다. 인간이라고 다를까? “불행을 희롱하는 신을마주쳐도 인간은 자신이 설정한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아간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와도 그()는 결코 그리로 가는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바로 거기에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 근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이러한 생명의 길을 포기하지 않기에 비로소 생명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아무리 거대한 문명을 세울지라도 인간이라는 생명 역시 이 길을 비켜갈 수 없다. 본능만큼 강력한 의지를 그 어느 생명이 거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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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의 '약속'과 '갈대' | 시집 읽기 2021-08-06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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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천상병 전집 시

천상병 저
평민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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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의 시에는 '인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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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천상병 시 두 편

 

 

한 그루의 나무도 없이

서러운 길 위에서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토길인데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 천상병, <약속>

 

 

한 그루의 나무도 없는 길을 시인은 서러운 길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길 위에 시인은 홀로 서 있다. “무엇으로 내가 서 있는가라는 시구에 나타나는 대로, 시인은 지금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묻고 있다. 이 길은 어디로 이어져 있을까? “새로운 길도 아닌/ 먼 길이라고 시인은 쓰고 있다. 먼 길로 표현되는 이 길은 가도가도 황토길이다. 나무 한 그루 없는 길이니 이 길은 생명이 없는 길이라고 해도 된다. 저승길과 무엇이 다를까? 저승길은 죽음과 이어져 있다. 동시에 저승길은 아주 먼 길이기도 하다. ‘먼 길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을, 그것도 황톳길을 시인은 어떻게든 가야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걸었지만 그 길을 되짚어 온 사람은 없다.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먼 길이 아닌가. 쉬이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시인은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시인은 노을과 같이/ 내일과 같이이 길을 걷는다. 노을이나 내일이나 시간을 나타내는 기호들이다. 노을과 같이 걷다 보면 밤이 오고, 다시 새벽이 올 것이다. 내일과 같이 걷다 보면 다시 오늘이 오고 내일이 올 것이다. 길이란 걸으라고 있는 길이다. 사람들이 왜 길 없는 곳에 길을 냈겠는가? ‘길 없는 길이라는 역설로 사람들은 길이 아닌 곳에서도 길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길이 있는 곳만을 걷는 게 아니다. 걷다 보면 새로운 길이 생기는 법이다. 길을 내면서까지 시인은 왜 먼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필연코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는 시구에 그 까닭이 나와 있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은 시인이다. 기다리는 사람이 스스로 길을 떠난다. 시인에게 기다림은 수동적인 행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기다리는 무엇을 향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시인은 길 위에서 무엇을 기다리는 행위를 노을내일에 비유하고 있다. 노을이나 내일이나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니다. 시간 속에서 노을은 이내 스러지고, 시간 속에서 내일은 또 다른 내일로 이어진다. 마찬가지로 시인은 시간 속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다. 시간이 흐르듯이 길도 흐른다. 길을 걷는 것은 시간을 사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그 길을 통해 반드시 올 무엇을 시인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기다리는 무엇과 만나려면 시인은 끊임없이 그 길을 걸어야 한다. 시 제목인 약속은 무엇보다 이러한 맥락을 그 속에 품고 있다.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자신과 맺은 약속이다.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는 길이 끝나봐야 아는데, 길이 끝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노을이 노을을 기다리는 것처럼, 내일이 내일을 기다리는 것처럼, 시인은 묵묵히 자기 앞에 놓인 길을 가야 한다. 자기와 싸우지 않고 어떻게 이 약속을 이룰 수가 있단 말인가?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 천상병, <갈대>

 

 

달빛이 환하게 비추는 들판에서 시인은 갈대와 나란히 소리 없이 서있다. ‘나란히라는 시구에 암시된바, 시인과 갈대는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갈대는 시인이 함부로 의미를 부여할 대상이 아니다. 돌려 말하면 시인은 갈대라는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는다. 갈대 그 자체와 환한 달빛 아래 서 있다고 말하면 어떨까? 갈대를 친구라고 말해도 좋고, 연인이라고 말해도 좋고, 타자라고 말해도 좋다. 타자는 하나의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갈대가 있고, 시인이 있다. 갈대와 시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나란히 서 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도 둘은 꿋꿋이 서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무엇이 그리 안타깝고 무엇이 그리 애터지는 것일까? 둘은 지금 하나가 되고 싶은 것일까?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이들이 모를 리 없다. 갈대는 갈대의 길을 가야 하고, 시인은 인간의 길을 가야 한다. 이 거리를 유지해야 갈대는 갈대로 남을 수 있고, 시인은 시인으로 남을 수 있다. 달빛은 여전히 환하다. 시인과 갈대 또한 환한 달빛 아래서 서로를 안타까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라는 시구로 시인은 시를 맺는다. ‘눈물이라는 시어가 눈에 띈다. 갈대와 시인은 슬픔의 감정에 매몰되어 버린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갈대나 시인이나 자기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다. 이 한계 지점을 알기에 둘은 서로를 애터지게 바라보며 서 있는 것이다. 천상병은 인간과 갈대가 나누는 공감의 세계를 감각적인 이미지로 구현하고 있다. 그는 감정에 휩싸여 사물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스스로를 절제하는 이 마음이 그를 천생 시인으로 만드는 힘이라고 할 수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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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과 위반으로서의 에로스 | 생각들 2021-08-02 2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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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저/김태환 역/알랭 바디우 서문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과잉과 위반으로서의 에로스는 노동도, 벌거벗은 삶도 부정한다. 따라서 벌거벗은 삶에 매달려 노동하는 노예는 에로틱한 경험을 하지도 못하고, 에로틱한 갈망을 품을 줄도 모른다.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헤겔의 노예와 유사하다. 다만 주인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주인인 동시에 노예이기도 하다. 그것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이야기한 헤겔도 생각하지 못한 치명적인 통일성이다. 자기 착취의 주체는 타자 착취의 주체만큼이나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자유의 역사로 파악한다면, 지금 역사의 종언을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까지는 아직 먼 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인과 노예가 통일을 이루고 있는 역사적 단계에 처해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우리는 노예 주인 혹은 주인 노예일 뿐, 결코 자유로운 인간은 아니다. 자유로운 인간은 역사가 종말에 이를 때 비로소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역사를 자유의 역사로 이해한다면 말이다. 역사는 우리가 정말 자유로워질 때, 우리가 주인도 노예도 아니고, 주인 노예도, 노예 주인도 아닐 때 비로소 종언을 고할 것이다. (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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