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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준, 「병신과 머저리」 | 소설 읽기 2019-06-2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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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병신과 머저리

이청준 저
문학과지성사 | 2010년 07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가짜 아픔을 진짜 아픔으로 생각하는 병신과 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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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청준, 「병신과 머저리」

 

 

 

형과 동생이 있다. 형은 의사이고, 동생은 화가이다. 이야기를 이끄는 서술자는 동생()이다. 의사인 형은 소설 쓰기를 통해 전쟁 때 입은 트라우마를 극복하려고 한다. 형은 달포 전 열 살배기 소녀의 수술을 실패한 뒤로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수술 실패가 형의 잘못은 아니다. 성공할 가능성이 없는 수술이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이후로 형은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오는 날이 많았고, 나중에는 아예 병원 문을 닫고 진종일 방안에만 틀어박혔다. 그렇게 방안에 틀어박혀 형은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소녀의 죽음에 대한 내용이냐고? 아니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맞지만 소녀를 다룬 이야기는 아니다. 형은 6.25 전쟁 때 패잔병으로 낙오된 적이 있다. 그때 형은 동료를 죽이고 살아남았다고 동생에게 말하곤 했다. 누구를 어떻게 죽였는지 형은 말하지 않았다. 다만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말할 뿐.

 

형이 쓴 소설을 몰래 읽으면서 동생은 도통 그림을 그릴 수가 없다. 눈앞에 펼쳐진 화폭이 갑자기 고통스러운 넓이로 변해 그림을 그리는 손을 마비시켜버린 것이다. 거기다 형은 동생이 무척 흥미를 느낀 부분에서 더 이상 소설을 진전시키지 않고 있다. 동생은 이야기의 결말을 상상해 본다. 그럴수록 그림을 그리는 일은 자꾸만 뒤로 미뤄진다. 여기에 덧붙여 동생은 고민거리 하나가 더 있다. 혜인과 관련된 문제다. 혜인은 형 친구의 소개로 화실에 나오게 된 여자다. 애인인 듯 아닌 듯한 묘한 관계. 오랜만에 찾아온 그녀가 동생에게 청첩장을 내민다. 동생은 애써 관심을 두지 않으려 한다. 떠날 사람을 굳이 붙잡지 않는 차가운 성격이어서가 아니다. 동생은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귀찮을 뿐이다. 오면 만나고, 떠나면 만나지 않는다. 혜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는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동생의 마음은 온통 형이 쓰는 소설에 닿아 있다. 소설의 서두는 형이 소년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노루 사냥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소설 속 가 사는 고향 마을에는 가을부터 이듬해 초봄까지 꼭꼭 사냥꾼들이 찾아들었다. 어느 겨울 날 는 몰이꾼들에 끼어 사냥을 따라 나선다. 한낮이 기울 때까지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실망한 채 어느 능선 부근 바위틈에서 언 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능선 너머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싸늘한 음향으로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는 곧바로 부질없는 호기심에 끌려 사냥을 따라 나선 일을 후회한다. 총알이 노루를 관통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상처를 입은 노루는 설원에 피를 뿌리며 도망쳤다. 흰 눈을 선연하게 물들이고 있는 핏빛에 보자 는 가슴이 섬뜩 내려앉는다. 마지못해 일행을 따라가던 는 어스름이 내릴 무렵 일행에서 떨어져 나와 집으로 돌아와서는 몸살을 앓는다.

 

사냥꾼들은 산을 세 개나 넘어가서 결국 그 노루를 찾아냈다. 소문으로 그 이야기를 들은 는 몇 번이고 끔찍스러운 몸서리를 쳤다. 형은 왜 사냥꾼에게 죽은 노루 이야기로 소설을 시작한 것일까? 노루 입장에서 보면, 총을 들고 있는 사냥꾼은 아주 무서운 적이다. 상처를 입고 세 개나 산을 넘으며 노루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걸으면 걸을수록 상처는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어느 순간 노루는 아마도 사냥꾼에게 잡히지 않아도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눈에 덮여 온통 흰색인 산에 누워 노루는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사신(死神)을 풀어진 눈으로 보진 않았을까? ‘는 노루가 처한 이 상황을 온몸으로 느낀다. 그만큼 공감 능력이 탁월하다는 얘기다. 타인의 아픔을 제 아픔처럼 공감하는 능력. 아무 생각 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이 보면 한없이 나약해 보이는 모습이다.

 

노루 사냥 이야기는 뒤에 이어질 김 일병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단서로 작용한다. 김 일병은 에게 노루와 같은 상황에 처한 인물이다. 형이 쓰는 소설이 구체적인 아픔과 연결되어 있다면, 동생은 그림을 그리며 인간의 근원이라는 다소 추상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하여 에덴으로부터 그 이후로는 아벨이라든지 카인, 또 그 인간들이 지니고 의미하는 속성들을 논리 없이 생각해보곤 하였다.”라는 진술에 나타나는 대로, 동생은 지금 이곳에서 펼쳐지는 구체적인 삶보다 그 너머에 있는 본질을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욕망에 들떠 있다. 본질을 찾으려는 열망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정작 문제는 혜인을 대하는 동생의 행동에 드러나는바, 본질을 찾으려는 동생의 열망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그는 형처럼 아파하지만, 그 아픔에 어디서 오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동생에게 아픔은 겉멋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모든 것을 아는 척하는 겉멋.

 

그렇지만 정말로 저는 선생님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었어요. 6.25의 전상이 자취를 감췄다고 생각하면 오해라고, 선생님의 형님은 아직도 그 상처를 앓고 있다고 하시는 그 분의 말을 듣고 저는 선생님을 생각했어요. 그렇다면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부를 지닌, 어쩌면 처음부터 환부다운 환부가 없는 선생님은 도대체 무슨 환자일까고요. 더욱이 그 증상은 더 심한 것 같았어요. 그 환부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그것이 무슨 병인지조차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선생님의 증상은 더욱더 무겁고 위험해 보였지요. 선생님의 형님은 그 에너지가 어디에 근원했건 자기를 주장해 왔고, 자기의 여자를 위해서 뭔가 싸워 왔어요.

 

결혼식을 하루 앞둔 혜인이 동생에게 보낸 편지의 한부분이다. 환부다운 환부가 없이 아파하는 동생을 혜인은 이해하지 못한다. 6.25의 전상이 트라우마가 된 형은 분명한 환부가 있지만, 그래서 그 환부와 두 눈 똑바로 뜨고 마주하면 벗어날 길이 있지만, 처음부터 환부가 없는 동생은 도대체 어디서 길을 찾아야 하는가. 동생은 오로지 환부가 없는 자기 아픔만 본다. 환부가 없는 아픔은 말 그대로 허상이다. 가짜라는 얘기다. 아프지 않은데 억지로 아픈 척을 해야 하니 그만큼 철저한 연기가 필요하다. 아픈 것도 연기한다고? 동생은 일부러 아픔을 연기한다. 그는 그 연기를 예술가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진짜 아픔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보면 어이가 없는 일이다. 진짜 아픔으로 괴로워하는 형은 화폭에 둥그스름한 얼굴 윤곽을 그린 상태로 전혀 진전이 없는 동생의 그림에서 상처가 없는 가짜 아픔을 들여다본다.

 

형이 진짜 아파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동생은 소설의 결말을 제 마음대로 써버린다. 형이 쓴 소설에는 김 일병과 오관모, 그리고 가 나온다. ‘는 노루 사냥에 따라갔다가 열병을 앓았던 그 인물이다. 이등중사 오관모는 냉혹한 인물이고, 김 일병은 얼굴의 선이 여자처럼 고운 유순한 인물이다. 오관모는 계급으로 김 일병을 내리누르며 괴롭힌다. 그런데 괴롭힘을 당하는 김 일병의 태도가 참 묘하다. 김 일병은 어떤 경우에도 저항을 하지 않는다. 때리면 그저 맞는다. 한번은 오관모에게 맞던 김 일병이 머리를 들어 를 올려다 본 적이 있다. “그때 가 김 일병에게서 보았던 것은 김 일병의 눈빛이었다. 허리 아래에서 타격이 있을 때마다 김 일병의 눈에서는 파란 불꽃같은 것이 지나갔다는 것이었다.” 모질게 구타를 당하는 김 일병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는 눈으로 파란 불꽃을 내뿜으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폭력에 물든 오관모는 결코 볼 수 없는 눈빛이다.

 

김 일병의 파란 불꽃은 사냥꾼에게 쫓기는 노루가 내보였을 눈빛일 것이다. 생명의 불꽃. 이야기는 이 세 사람이 전쟁터에서 낙오되는 장면으로 바뀐다. 김 일병은 오른쪽 팔이 겨드랑 부근에서 동강난 채로 발견되었다. 오관모는 김 일병을 보자마자 쓸모없는 인물로 평가한다. 김 일병은 두 사람이 없으면 시체나 다름없다. 오관모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한다. 먹을 것이 점차로 줄어들자 그는 에게 입을 줄여야 한다는 말을 계속한다. 김 일병을 죽여야 두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이다. 생사가 오가는 와중에도 오관모는 김 일병을 통해 들끓는 성욕을 해소한다. 김 일병이 성욕을 해소하는 도구가 되는 한, 그는 김 일병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김 일병의 상처가 썩어 들어가자, 오관모는 김 일병의 쓸모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김 일병을 죽여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오관모는 는 제쳐놓고 첫눈이 오는 날 김 일병을 죽이기로 스스로 결정한다. 첫눈이 오는 날, ‘는 뜻 없이 천장의 한 점을 응시하는 김 일병을 보며 그때 나는 김 일병이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형은 쓴 소설은 여기서 끝난 채로 있었다. 동생은 형이 예전에 한 말을 생각한다. 누군가를 죽이고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그것이 김 일병과 관련된 것은 분명한데, 누가 김 일병을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도통 알 수가 없다. 동생은 형이 그 상황을 떠올리면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의 처음에 노루 이야기를 내세운 것도 이러한 죄책감과 연관되리라. 동생은 형이 마무리하지 못한 소설을 스스로 마무리한다. “나는 화풀이라도 하는 마음으로 표범 토끼 잡듯 김 일병을 잡았다. 김 일병의 살해범이 누구인지 확실치도 않은 것을 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니까 ’(여기서 형이라고 해야 좋겠다)가 관모가 오기 전에 김 일병을 끌고 동굴을 나와서 쏘아버리는 것으로 소설을 일단 끝내버렸다.” 다음 날, 동생은 화폭에 약간 손을 댄다. 오랜만에 제법 손이 풀린다. 타자의 마음을 자기 식대로 쉽게 판단해버리는 동생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화실에서 혜인의 편지를 읽고 집에 돌아온 동생은 형이 내일부터 병원 일을 재개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일을 다시 한다는 건 형이 소설 쓰기를 끝냈다는 것이다. 동생은 형의 방으로 뛰어 들어가 소설 내용을 확인한다. 동생이 쓴 부분은 찢겨나가고 그 자리에 형이 쓴 내용이 들어갔다. 형은 어떤 내용으로 결말을 맺었을까? 오관모가 김 일병을 일으켜 끌고 동굴을 나간다. ‘가 불현듯 관모의 팔을 붙잡는다. 관모가 를 쏘아본다. ‘는 관모의 팔을 슬그머니 놓는다. 조금 뒤 골짜기에서 울리는 한 발의 총 소리가 적막을 깬다. “어린 시절, 노루 사냥을 갔을 때의 설원에 메아리치던 그 비정과 살의를 담은 싸늘한 음향이었다.” 어린 시절에 는 그저 몸을 앓기만 했다. 지금은 어떨까? 또 한 발의 총 소리를 듣고 는 동굴 구석에 남은 한 자루의 총을 걸어 메고 노루 핏자국을 따라 골짜기로 내려간다. 오관모와 맞닥뜨린다. 참새 가슴은 보지 않는 게 좋다고 말하는 오관모.

 

는 이를 악문다. 오늘은 꼭 피 흘린 노루를 볼 거라고 다시 다짐한다. 김 일병에게로 가려는 를 오관모가 총을 들이대며 막는다. ‘가 돌아서자 오관모도 총을 내린다. 그 순간 는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총으로 오관모를 겨눈다. 오관모도 땅으로 몸을 숙이며 총을 겨눈다. 거의 동시에 두 발의 총 소리가 골짜기를 울린다. 오관모의 가슴께서부터 피가 번져 나온다. ‘는 두려운 눈으로 관모의 움직임을 지켜본다. 입으로 짠 것이 흘러든다. ‘는 천천히 총대를 받쳐 들고 오관모를 겨눈다. ! 하는 총 소리가 다시 고요한 골짜기를 울린다. 탄환이 다 떨어지고 나서야 총 소리가 멎었다. “피투성이의 얼굴이 웃고 있었다. 그것은 나의 얼굴이었다.”라는 진술로 형은 소설을 맺었다. 형은 오관모를 쏘면서 동시에 자신도 쏘았다. 김 일병을 죽인 것은 오관모와 자신이라는 것을 형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생이 예상한 결말과는 완전히 다른 결말을 형은 이야기한 셈이다.

 

넌 내가 소설을 불태우는 이유를 묻지 않는군…….”

너무나 정색을 한 목소리여서 형의 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형의 손이 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너도 읽었겠지만, 거 내가 죽인 관모놈 있지 않아. 오늘 밤 나 그놈을 만났단 말야.” (……)

불을 보면서 형은 계속 중얼거렸다.

내가 이제 놈을 아주 죽여 없앴으니 내일부턴…… 일을 하리라고 생각하고 자리를 일어서서 홀을 나오려는데…… 그렇지 바로 문에서 두 걸음쯤 남았을 때였어. 여어, 너 살아 있었구나 하고 누가 등을 탁 치지 않나 말야.”

형은 나를 의식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놀라 돌아보니 아 그게 관모놈이 아니냔 말야. 한데 놈이 그래 놓고는 또 영 시치밀 떼지 않아. 이거 미안하게 됐다구…… 두려워서 비실비실 물러나면서…… 내가 그 사이 무서워진 걸까…… 하긴 놈은 내가 무섭기도 하겠지. 어쨌든 나는 유유히 문까지는 걸어 나왔어. 그러나…… 문을 나서서는 도망을 쳤지…… 놈이 살아 있는데 이런 게 이제 무슨 소용이냐 말야.”

 

형은 소설 뭉치를 태우며 동생에게 오관모는 여전히 살아 있다고 외친다. 소설 제목 병신과 머저리는 바로 이 장면에서 나온다. 형은 소설에서 오관모를 죽임으로써 마음속 죄책감을 털어냈다고 생각한다. 허구적인 살해로 현실에 적응할 힘을 얻으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소설에서 분명히 죽인 오관모가 버젓이 살아 형 앞에 나타난다. 형 등을 탁 하고 치는 걸 보면 유령이 아니다. 지금까지 형은 무슨 일을 한 것인가? 소설 쓰기란 게 과연 무엇인가? 허구 속에서 길길이 날뛰어봤자 현실을 사는 사람에게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오관모는 자신을 보고 경악하는 형의 얼굴을 보고 상황을 눈치 챘을 것이다. 형이 자신이 벌인 일을 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소설 속에서는 오관모를 무수히 죽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에서 과연 형은 오관모를 죽일 수 있을까? 형의 소설 쓰기는 결국 병신과 머저리들이 벌이는 자위행위에 불과했던 셈이다.

 

형은 동생 또한 자신과 똑같은 짓을 저질렀다고 판단한다. 동생은 로 하여금 김 일병을 죽이게 만들었다. 동생은 빨리 김 일병을 죽임으로써 마음 속 진실과 어떻게든 거리를 두려고 했다. 소설은 허구다. 소설에서 김 일병을 거듭 죽여도 현실에 미치는 영향은 전혀 없다는 얘기다. 형은 바로 이 진실을 깨닫는다. 진실이란 밖에 있는 게 아니다. 오관모를 죽이고, 김 일병을 죽여서 진실을 알 수 있다면, 소설 속에서 형은 그들을 수없이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현실과 맞닥뜨리지 않은 채 머릿속으로만 그리는 진실이란 게 과연 무슨 소용이 있는가. 형은 그래서 소설을 불태워버린다. 그리고 멀뚱히 쳐다보는 동생을 향해 이 참새 가슴 같은 것, 뭘 듣고 있어. 썩 네 굴로 꺼져!”라고 형은 외친다. 참새 가슴은 형이기도 하고 동생이기도 하다.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병신과 머저리들이 소설 속에서는 마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꼴이라니.

 

비로소 몸 전체가 까지는 듯한 아픔이 전해왔다.”라는 동생의 진술을 우리는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동생은 이제 형의 아픔이 진짜라는 걸 이해한다. 형은 오관모를 죽임으로써 자신까지 죽이는 모험을 소설 쓰기를 통해 감행했다. 오관모를 현실에서 만나는 순간 그것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래도 형은 마음속에 새겨진 검고 무거운 것과 직접 대면하는 성과는 거두었다. 김 일병을 죽이고, 화폭에 미완성 얼굴을 그리는 동생은 어떤가? “나의 아픔은 어디서 온 것인가.”라고 동생은 생각한다. 혜인이 편지에 밝힌 것처럼 동생은 상처 없는 상처를 허구로 느끼며 지금까지 살아왔다. 상처가 없으니 당연히 치료할 약도 없다. 동생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나의 아픔 가운데에는 형에게서처럼 명료한 얼굴이 없었다.”는 진술은 이로 보면 아주 진실에 가까운 말이다. 나뭇잎 배 하나를 타고 드넓은 바다로 들어가야 하는 이 상황을 동생은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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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미,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 시집 읽기 2019-06-23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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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손미 저
민음사 | 2019년 05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사람이 죽어도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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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밤을 두드린다. 나무 문이 삐걱댔다. 문을 열면 아무도 없다. 가축을 깨무는 이빨을 자판처럼 박으며 나는 쓰고 있었다. 먹고사는 것에 대해 이 장례가 끝나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해 뼛가루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나왔는데 식도에 호스를 꽂지 않아 사람이 죽었는데 너와 마주 앉아 밥을 먹어도 될까. 사람은 껍질이 되었다. 헝겊이 되었다. 연기가 되었다. 비명이 되었다 다시 사람이 되는 비극. 다시 사람이 되는 것. 다시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생각하지 않아도 될까. 케이크에 초를 꽂아도 될까. 너를 사랑해도 될까. 외로워서 못 살겠다 말하던 그 사람이 죽었는데 안 울어도 될까. 상복을 입고 너의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 밤을 두드리는 건 내 손톱을 먹고 자란 짐승. 사람이 죽었는데 변기에 앉고 방을 닦으면서 다시 사람이 될까 무서워. 그런 고백을 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계속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라고 묻는 사람이어도 될까.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나무 문을 두드리는 울음을 모른 척해도 될까.

  - 손미,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

 

 

시인은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고 묻고 있다. 곁에 있던 사람이 죽었는데, 우리는 여전히 밥을 먹고 누군가를 사랑한다.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말로 이 상황을 정리할 수 있다. 시인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산 사람이다. 죽은 사람은 먹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산 사람은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밥을 먹는다(먹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죽을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살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승으로 보내고 시인은 지금 시를 쓰고 있다. “가축을 깨무는 이빨을 자판처럼 박으며 나는 쓰고 있었다.”에 나타나는바, 사랑하는 이를 잃은 아픔을 시인은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언어로 표현하려고 한다. 죽은 자는 시를 쓰지 못한다. 오로지 살아 있는 사람만이 시를 쓸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달래는 장례식이 끝나면 살아 있는 사람은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너와 마주 앉아 밥을먹어야 한다. “뼛가루를 빗자루로 쓸고 있는데 내가 거기서 나왔는데 식도에 호스를 꽂지 않아 사람이 죽었는데라는 생각이 여전히 뇌리를 맴돌지만, 시인은 여전히 시를 쓰고 밥을 먹는다. 시를 쓰면서도 시인은 죽은 이를 생각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시인은 죽은 이를 생각한다. 저승으로 간 사람은 아직도 시인의 마음을 헤젓고 있다. 시인은 껍질이 되었다가 헝겊이 되었다가 연기가 되었다가 이내 비명으로 되살아나는 사람이 된다. “다시 사람이 되는 비극이라는 시구로 시인은 죽은 이와 더불어 사는 마음의 고통을 표현한다. 사람은 죽었어도 그 영혼은 여기에 남아 있다. 이곳에 영혼으로 남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인은 거듭해서 될까라는 시어를 쓰고 있다. 죽은 이를 잊어야 편안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걸 시인은 잘 알고 있다. “될까라는 시어에는 죽은 이와 함께 하지 않는 새로운 일상이 과연 가능할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이 서려 있다. 케이크에 초를 꽂고, 너와 사랑하는 일상을 시인은 아무렇지 않게 살 자신이 없다. 죽은 이에 매인 이 마음을 그저 멜랑콜리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멜랑콜리에 빠진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죽은 사람은 아직도 이곳에 살아 있다. 자기 마음에 그린 이미지로 현실과 단절하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시인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에서 멜랑콜리에 빠진 존재와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시인은 여전히 그 사람을 마음에 품고 있다. 밥을 먹을 때마다 시인은 그 사람과 밥을 먹던 기억을 떠올린다. ‘타자의 흔적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시인은 지금 타자가 남긴 흔적을 일상 속에서 거듭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상복을 입고 너의 침대에 엎드려 있을 때시인은 누군가가 밤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밤을 두드리는 존재는 내 손톱을 먹고 자란 짐승.”이다. 시간이라는 짐승. 죽은 이가 남긴 기억이라고 표현해도 좋겠다. 변기에 앉아 있을 때도, 방을 닦을 때도 시인은 이 짐승이 밤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는다. 나무 문이 삐걱거리고 이내 문이 열린다. 어둠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아무것도 없다. 정확히 말하면 어둠 너머에는 어둠이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어둠.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은 어둠 저편에서 한없이 밀려온다. 잊고 싶다고 잊을 수 있는 기억이 아니다. 그것이 잊힐 때까지 시인은 내 손톱이 먹고 자란 짐승이 떠올리는 기억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 “사람이 죽었는데 계속 사람이어도 될까.”라고 시인은 묻는다. 죽은 사람을 마음에 품고서라도 살아 있는 사람은 살아야 한다. 죽음을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삶 역시 어찌할 수 없다.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을 사랑해도 될까라는 지독한(?) 질문에는 이리 보면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사랑=삶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맥락이 내포되어 있다. 사람이 죽어도 우리는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하며 산다. 한편으로 사람이 죽어도 우리는 다른 사람과 밥을 먹으며 산다. 다만 사랑을 하며, 밥을 먹으며 우리는 죽은 사람을 기억하고 애도할 뿐이다. “나무 문을 두드리는 울음을 모른 척해도 될까.”라는 시구로 시인은 시를 맺고 있다. 지나간 시간이 끊임없이 나무 문을 두드린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나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때가 되면 기억은 의식으로 올라와 살아 있는 사람을 괴롭힌다. 기억에 매일수록 그만큼 현실감은 떨어진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의 현실을 갉아먹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시인은 망설임이 담긴 시어를 반복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대면한 자의 서글픈 마음을 실감나게 표현한다. 멜랑콜리와 애도 사이에서 우리는 죽음을 기억하고 동시에 일상을 살아간다. 멜랑콜리에 빠지면 현실이 사라지고, 애도에 충실하면 마음속에서 죄책감이 밀려온다. 나무 문을 두드리며 우는 이는 분명 멜랑콜리와 애도를 오가는 시인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하지만 그 허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시인은 자기 앞에 펼쳐진 일상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요컨대 시인은 살기 위해 끊임없이 망설임이 섞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람이 죽어도 시인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 아니, 사람이 죽어도 우리는 변함없이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고 시인은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죽은 이를 애도하는 까닭이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새로운 삶이 피어날 수 있다는 이 마음이 참으로 눈물겹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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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 | 인문사상 2019-06-20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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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

홍창성 저
불광출판사 | 2019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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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인 논리로 접근하는 불교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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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과 저쪽에 다리를 놓는 불교철학

- 홍창성, 『미네소타주립대학 불교철학 강의』

 

 

 

불교는 논리와 비논리 사이를 오간다. 부처를 묻는 제자에게 선사(禪師)뜰 앞에 잣나무라고 말하면, 이것은 논리인가 비논리인가? 표면으로 보면 선사는 비논리로 부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처와 뜰 앞에 잣나무를 논리적으로 연결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떤) 제자는 곧바로 깨달음에 이른다. 스승은 뜰 앞에 잣나무를 말했을 뿐인데, 제자는 깨달음을 얻었다. 같은 말을 들어도 누구는 깨달음을 얻고, 누구는 깨달음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지은이는 기독교 전통이 강한 미국의 대학에서 불교철학을 강의하고 있다. 불교가 유일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유일신을 인정한다. 모든 것이 유일신으로 환원되는 기독교 사회에서, 한편으로 기독교 밖에서는 합리적 논리를 중시하는 미국 사회에서 지은이는 논리와 비논리 사이를 오가는 불교철학을 강의한다. 이성을 중시하는 학생들에게 합리적 직관에 바탕에 둔 불교사상을 지은이는 어떻게 전하고 있을까?

 

첫 시간에 학생이 지은이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붓다라면 오래전 인도에 살았던 고타마 싯다르타를 지칭할 텐데, 누구나 깨달으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누구나 고타마 싯다르타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25) ‘붓다고타마 싯다르타가 다른 존재라는 걸 아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사상에 투철한 미국 학생들은 붓다=고타마 싯다르타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동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학생들은 논리로 불교사상에 접근하려고 한다. 물론 지은이도 불교사상에 드리워진 합리성에 주목하며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한다. 논리적 질문에는 논리로 답변해야 한다는 게 지은이의 생각이다. 앞서 말했듯이, 선사들은 비논리로 제자들을 대한다. 스승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깨우침을 얻을 때까지 수행을 계속한다. 비논리로 깨달음에 이르느냐, 이르지 못하느냐는 이제 제자의 문제이다. 목마른 말을 냇물까지 데려갈 수는 있지만, 물은 말이 마셔야 한다고 하던가.

 

불교의 가르침은 논리적으로 정교하게 따라가야 이해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불교가 다른 종교나 철학보다 어렵다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가끔 석가모니가 성불 당시 그가 이 세상에 더 이상 남아 있을 이유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가르침을 망설인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다. 특히 그 오랜 옛날 문맹률이 99퍼센트를 넘었을 때 이런 첨예한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진리를 도대체 누구에게 가르칠 수 있었겠는가. 오늘날 서양에서도 불교학자들 가운데 논리와 비판적 사고에 취약한 사람들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대해서 서술해 놓은 부분이 거의 없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논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석가모니가 그렇게 한 이유가 지극히 자명하다. ‘번뇌와 집착의 불길이 꺼진 상태라는 부정적 표현으로밖에 가리킬 수 없는 상태에 대해 도대체 어떤 긍정적인 표현이 가능하단 말인가. 어떤 긍정적 표현도 열반의 상태를 왜곡되게 기술할 수밖에 없으니 석가모니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러한 석가모니의 깊은 의도를 고만고만한 서양학자들이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는가. (81)

 

열반(Nirvana)은 열락과 아무 관련이 없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열반은 번뇌와 집착의 불길이 꺼진 상태이다. 번뇌와 집착에서 벗어났으니 열락을 느끼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고? 열락은 또 다른 번뇌이고 집착이다. 기쁘고 즐거운 것만큼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어디에 있으랴. 기쁨이나 슬픔에 빠진 사람은 결코 열반에 이를 수 없다. ‘이를 수 없다고 말하니 마치 열반이 어느 장소에 있는 것처럼 들린다. 아니다. 열반은 어느 장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라고 상상하는 존재를 내려놓은 상태가 바로 열반이다. ‘를 내려놓은 사람은 세상을 분별심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분별심은 끊임없이 세상을 나누고, 사물들을 나눈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마음은 무엇보다 분별심에서 뻗어 나온다. 열반은 그러니까 이러한 분별심을 내려놓은 상태를 가리킨다. 어떻게 하면 그런 상태에 이를 수 있느냐고? 답은 이미 나왔다. 분별심에 빠진 나를 내려놓는 것이다. 무명(無名/無明)을 떨치면 열반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

 

지은이는 열반은 있지만 열반하는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수행하는 사람이 열반에 이른다고 생각한다. 수행자라는 주체는 열반이라는 깨달음의 장소에 이르기 위해 고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고타마 싯다르타만 해도 왕궁을 나와 오랜 세월 고행을 하지 않았는가. 깨달은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모두 허상이다. 깨닫지 못한 눈으로 볼 때만이 이 세상이 진실처럼 보인다. 지은이는 무아의 진리에 철저해야 할 깨달음의 관점에서 본다면, 깨달음을 통해 열반이 이루어진 상태에서는 그 열반을 통해 정진했다는 수행자가 처음부터 주체로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 분명하다.”(92)라고 이야기한다. 수행자는 깨닫지 못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가 마음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가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깨달은 자는 깨달음에 이르러서야 이 세상이 공()이라는 걸 알게 된다. 애초부터 수행을 하는 주체는 없었던 셈이다.

 

()’은 텅 비어 있는 게 아니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는 말에 드러나는 대로, 공은 언제나 색과 더불어 있다. 공과 색을 나누는 것은 분별심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분별심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다.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라는 역설은 분별심을 넘어선 자리에서 뻗어 나온다. 합리적인 논리를 중시하는 미국 학생들은 어찌 보면 이러한 역설에 대한 감각이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붓다는 마하가섭에게 미소로써 도를 전했다. 붓다는 꽃을 들어 올렸고, 마하가섭은 그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논리적인 이 사건으로 붓다는 마하가섭을 깨달은 자로 인정했다. 논리가 미치는 자리가 있고, 논리가 미칠 수 없는 자리가 있다. 지은이는 비논리를 논리적으로 해석하면서 논리를 중시하는 미국 학생들을 대한다. 역설은 이쪽과 저쪽에 다리를 놓는 일이다. 논리와 비논리를 오가는 불교철학 역시 넓게 보면 하나로 묶기 힘든 사상에 다리를 놓는 데서 그 가치가 피어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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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소송

프란츠 카프카 저/박제헌 역
별글 | 2019년 0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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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저는 저런 괴물을 오빠라고 부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저것을 없애야 해요. 저것이 그레고르라는 생각을 버리셔야 해요. 우리가 이제껏 그렇게 믿어왔던 것이 그저 불행일 뿐이었어요. 당장 내쫓아야 해요!” _ 『변신』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끝까지 침착하고 분별력 있는 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단 하나의 정당한 목표 없이 언제나 스무 개의 손을 가진 자처럼 세상에 도전했다. 그것은 옳지 않았다. 이렇게 우둔한 인간인 채로 사라져야 할까?” _ 『소송』


평소와 다를 바 없던 평온한 아침, 잠에서 깨어난 그레고르 잠자는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다. 자신의 몸이 하루아침에 흉측한 벌레로 변해버린 것.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왔지만 변해버린 그의 모습을 받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가족과 직장, 세상에 철저히 외면당한 채 파멸로 향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의 또 다른 걸작 『소송』속 주인공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한다. 미완의 소설로 불리는 카프카의 대표작 『소송』의 주인공 요제프 K는 자신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 알지 못한 채 재판에 넘겨진다. 누명을 벗기 위해 1년 여의 시간 동안 팔방으로 애를 쓰지만 결백이 밝혀지기는커녕 점점 더 미궁 속에 빠지고, 처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모든 것을 제시하지만 아무것도 확증하지 않는 것이 『소송』의 위대함이다”라고 한 알베르 카뮈의 말처럼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들은 불안과 혼돈으로 가득하다. 하루아침에 인간이 벌레로 변해버리고,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처형을 당하고 마는 작품 속 주인공처럼 카프카는 극도로 비현실적인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불편하다. 하지만 이 불편함이야말로 우리가 카프카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 명확한 이유가 된다. 불안하고 부조리한 오늘 속에서도 우리는 내일을 꿋꿋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프카의 소설은 우리가 사는 세계를 파헤치고 그 안에서 인간이 지닌 가능성을 발견해내는 가슴 벅찬 경험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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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왜 칸트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가?

칸트의 ‘3대 비판서’를 통해 이뤄낸 위대한 철학 혁명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서양철학사에서 최고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칸트는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궁극의 물음 속에서 생각의 대전환을 이루어낸 서양철학의 아이콘이다. 흔히 오늘날까지 철학사를 수놓은 많은 사상과 사조는 칸트가 발견한 대지 위에 있다고 말할 만큼 칸트 철학은 ‘초월론적’ 차원 위에 있다. 이 책을 통해 현재 우리에게 칸트 철학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부 칸트 인식론 혁명

2부 칸트의 윤리 혁명-덕 윤리에서 의무의 윤리로

3부 칸트의 미학 혁명-근대 예술의 정초

4부 칸트의 생태 혁명-기게론에서 유기체론으로


저자 소개 

김상환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현대철학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연세대학교 철학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았고 프랑스 파리제4대학교 철학과에서 데카르트의 제1원리(코기토)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고등과학원 초학제독립연구단 연구책임자와 한국프랑스철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네이버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에서 자문위원 및 강연자로 활동하고 있다.

저자는 인문학적 사유로 우리 사회와 인간을 통찰하는 글을 쓰고 강연을 해오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칸트의 위대한 업적을 통해 철학이 시대의 고민을 어떻게 다루고, 인간에게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저서로는 『근대적 세계관의 형성』, 『김수영과 논어』, 『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 등이 있으며 함께 쓴 책으로는 『고전 강연 1, 4』, 『융합 인문학』, 『문화의 안과 밖 3, 4』, 『사유의 공간』, 『라깡의 재탄생』 등, 옮긴 책으로는 『탈이데올로기 시대의 이데올로기』, 『차이와 반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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