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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영구평화론 | 생각들 2019-04-1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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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추방

한병철 저/이재영 역
문학과지성사 | 2017년 02월

 

 

 

 

 

이성에 의해 세워진 영구 평화에 대한 칸트의 관념은 무조건적인 환대에 대한 요구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이에 따르면 모든 이방인은 다른 나라에서 체류할 권리를 지닌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평화로운 태도를 유지하는 한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고 머무를 수 있다. 칸트에 따르면 어느 누구도 지구상의 어떤 장소에 있을 권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갖고 있지 않다.” 환대는 유토피아적 표상이 아니라 이성이 강요하는 관념이다. “앞선 조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인간애가 아니라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고 환대(손님으로 머무를 권리)는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타지 사람에 의해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를 말한다.” 환대는 법에 대한 공상적이거나 과장된 표상 방식이 아니라, 공적인 인권 자체를 위해, 따라서 영구 평화를 위해 국내법과 국제법의 성문화되지 않은 법전을 보충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조건을 충족시킬 때만 우리는 영구 평화를 향해 지속적으로 접근해가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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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타자의 추방』 | 사회사상 2019-04-18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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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타자의 추방

한병철 저/이재영 역
문학과지성사 | 2017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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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가 없는 시대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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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다른 것으로 진입하는 사유의 방식

- 한병철, 『타자의 추방』

 

 

 

타자는 어디에나 있다. ‘를 상정하는 순간 바깥에는 언제나 타자들이 있다. 타자들이 있어야 도 있다는 논리. 지은이는 이런 타자가 존재하던 시대는 지나갔다고 말한다. 타자들이 사라진 시대에 는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오늘날의 성과주체는 자기 계발을 중시한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은 오직 자기를 계발하는 길뿐이다. ‘자기타자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두 사람은 자기이면서 동시에 타자이다. 자기=타자가 되면 우리는 타자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타자를 함부로 대하면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 경쟁 사회를 이끄는 성과주체는 바로 이러한 타자를 무시한다. 타자를 내쫓은 자리에 성과주체는 자기를 채워 넣는다. 성과주체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타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성과주체는 대화를 할 줄 모른다. 대화는 타자를 전제로 이루어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성과주체는 오로지 자기와 대화를 한다. 타자가 없는 대화는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다. 성과주체는 그래서 틈만 나면 우울증에 빠진다.

 

우울증에 빠진 주체는 언제나 자기를 파괴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인다. 지은이는 타자의 폭력만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의 추방은 아주 다른 파괴 과정을, 즉 자기파괴를 작동시킨다.”(8)라고 말한다. 성과주체는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한다. 성과를 내면 살아남지만, 성과를 내지 못하면 금방 도태가 된다. 성과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무한 경쟁은 목숨이 걸린 문제이다. 경쟁에서 이기면 살아남고, 경쟁에서 지면 죽는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전쟁상태를 성과주체는 날마다 경험한다. 그는 조직에서 활동을 하지만, 조직은 그를 책임지지 않는다. 성과도, 책임도 성과주체 스스로 져야 한다. ‘자기 계발담론이 왜 신자유주의 사회를 휩쓸고 있겠는가. 자기 계발을 하면 성과를 낼 수 있다. 돌려 말하면 성과를 내지 못하는 주체는 자기 계발을 하지 않은 사람이다. ‘해야 한다는 당위만으로는 이제 성과를 낼 수 없다.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져야 무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포르노에서는 모든 몸이 똑같다. 이 몸들은 또한 똑같은 몸의 부분들로 분열한다. 일체의 언어를 빼앗긴 몸은 성적인 것으로 환원되고, 이 성적인 것은 성별의 차이 외에는 아무런 차이를 알지 못한다. 포르노그래피적인 몸은 더 이상 그 안에 꿈과 신성이 각인되는현장도, “호화로운 무대, “동화와 같은 표면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유혹하지 않는다. 포르노는 몸뿐만 아니라 소통 자체의 완전한 탈서사화, 탈언어화를 추동시킨다. 바로 이 점에서 포르노는 외설적이다. 벌거벗은 육체를 가지고 유희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유희에는 가상, 진실이 필요하다. 벌거벗은 포르노그래피적 진실은 어떠한 유희도, 유혹도 허락하지 않는다. 성과로 간주되는 성 또한 모든 형태의 유희를 몰아낸다. 성은 완전히 기계화된다. 성과, 성적 매력, 피트니스를 명령하는 신자유주의는 궁극적으로 몸을 최적화해야 하는, 기능적 대상으로 획일화한다. (16~17)

 

성과주체가 사는 사회는 투명성을 지향한다. 투명사회는 개별성을 부정한다. 개별성은 다른 것을 가리킨다. 모든 것이 같은 사회는 전체주의일 따름이다. 인간은 공장에서 생산되는 똑같은 상품이 아니다. 투명사회는 이러한 개별 존재들을 똑같은 몸으로 만들려고 한다. 지은이는 똑같은 몸을 포르노에 비유한다. 포르노에 나오는 몸은 성별의 차이 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살덩어리들이 만나 벌이는 유희 없는 몸짓들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포르노는 사람들을 유혹하지 못한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포르노는 소통 자체의 완전한 탈서사화, 탈언어화를 추동시킨다. 포르노가 예술이 아니라 외설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거기에는 벌거벗은 육체들만이 있다. 포르노 속 벌거벗은 육체들은 어떠한 유희도, 유혹도 허락하지 않는다. 기계화된 성, 기계화된 몸.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포르노의 논리로 성과주체를 기계로 만든다. 기계가 되어야만 성과주체는 성공이라는 길에 이를 수 있다.

 

지은이는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드는 세계화에도 이러한 포르노 논리가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세계화는 모든 것을 서로 교환할 수 있는 것, 비교할 수 있는 것vergleichbar으로, 따라서 같은 것으로 만드는 폭력적 힘이 있다.”(21) 교환할 수 있는 것만이 세계화 전략에 포섭된다. 교환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규정에 매여 있다. 아무것이나 함부로 교환할 수는 없지 않은가. 교환법칙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타자를 타자로서 인정하지 않는다. 타자는 언제나 교환과정에 포섭되는 대상으로 변주되어야 한다. 자본의 순환을 방해하는 타자는 이 세계에서 당연히 배제된다. 같은 것이 같은 것과 만나는 지점에서 세계적인 것은 최고 속도에 도달한다.”(21)는 말로 지은이는 세계화에 내재된 폭력성을 무엇보다 강조한다. 세계화는 모든 나라를 비교 대상으로 삼는다. 비교 대상은 언제나 교환법칙에 종속된다. 교환이 가능하면 세계화에 포섭되고, 교환이 불가능하면 세계화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 법칙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자본을 손에 움켜쥐고 있는 강자들이다.

 

지은이는 세계화 논리를 이끄는 사상으로 신자유주의를 제시한다. 착취와 배제가 신자유주의 논리를 구성한다. 신자유주의는 반옵티콘banopticon,” 즉 추방의 옵티콘을 구축한다. 판옵티콘panopticon이 훈육을 위해 작동한다면, 반옵티콘은 안전을 위해 작동한다. 세계화 경향에서 내몰려 국경을 넘은 난민들을 떠올려 보라. 이들을 받아들이는 국가는 거의 없다. 그들은 잠정적인 괴물들이다. 괴물들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신자유주의는 같은 것과 더불어 사는 사회를 지향한다. 같은 것과 더불어 살려면 다른 것을 배제해야 한다. 같은 것을 위해 다른 것을 차별하는 걸 신자유주의는 당연하게 여긴다. 한국사회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외국인노동자나 연변 조선인은 같은 것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괴물과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은 바깥에서 온 타자들을 질서를 파괴하는 괴물로 인식한다. 사회를 지키려면 괴물을 내쫓아야 한다. 배제는 언제나 차별/추방과 이어진다. 타자인 괴물과 같이 살면 우리 또한 괴물=타자가 된다는 논리.

 

활력을 부여해주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부정성은 정신의 삶에 영양을 공급해준다. 정신은 절대적인 분열 속에서 자신을 발견할 때 비로소 자신의 진실을 획득한다. 균열과 고통의 부정성만이 정신을 생생하게 유지해준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는 긍정적인 것으로서의 이 아니다. 정신은 부정적인 것을 똑바로 쳐다보고, 부정적인 것의 곁에 머무를 때만 이 힘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정적인 것 곁에 머무르는 대신 그것을 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긍정적인 것을 고수하면 같은 것만 재생산된다. 부정성의 지옥만 있는 것이 아니라 긍정성의 지옥도 있다. 부정적인 것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것도 테러를 낳는다. (49~50)

 

같은 것은 같은 것을 긍정한다. 같은 것이 모이면 천국이 될 것 같은가? 아니다. 같은 것이 모이면 지옥이 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생각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같은 것을 긍정하는 사람들은 바깥을 인정하지 않는다. ‘바깥이라는 말만 들어도 그들은 치를 떤다. 틈만 나면 빨갱이라는 말로 사람들을 옥죄는 세력을 생각해 보라. 그들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모든 이들을 빨갱이로 몰아붙인다. 빨갱이가 진짜로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모두 빨갱이라는 자기관념일 뿐이다. 같은 것을 중시하는 사회는 그래서 타자의 부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같은 것이 진열된 쇼윈도에서는 활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른 것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정신은 같은 것 속에 다른 것이 끼어들 때 활력을 얻는다. 활력을 갈등이라는 말로 표현해도 좋겠다. 갈등이 없는 사회는 같은 것들이 지배하는 사회이다. 오늘날 우리는 부정적인 것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한다. 부정적인 것은 사유의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것을 외면하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같은 것들로 가득 찬 지옥으로 변해버린다.

 

신자유주의는 타자의 부정성이 사라진 자리에 성공이라는 긍정성을 배치한다. 사회를 긍정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논리로 신자유주의는 기존 사회를 철저하게 보호한다. 신자유주의의 지배하에서 착취는 더 이상 소외나 자기 탈현실화가 아니라 자유와 자기실현, 자기최적화로 진행된다.”(61) 더 이상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착취자로서 타인은 없다. 자기 계발을 믿는 성과주체는 오히려 를 실현한다는 믿음 속에서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한다. 성공신화를 이룩하기 위해 성과주체는 자기 몸을 죽음에 이르기까지 소진시킨다. 말 그대로 성과를 내기 위한 신체로 자기 몸을 최적화하는 것이다. 성과주체는 이런 상황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자유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선택했으니 실패를 해도 저항할 대상은 자기밖에 없다. 성과주체들이 왜 쉽게 우울증에 빠져들겠는가? 성과주체는 오로지 자기만 본다. 타자를 전혀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소통 도구로서 디지털 매체가 있지 않느냐고? 트위터나 페이스북, 혹은 카카오톡 등을 생각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상에서 우정을 나누고 있는 듯도 하다. 하지만 디지털 매체는 탈육체화하는 작용을 한다. 디지털 매체는 음성으로부터 거칢, 육체성을, 나아가 공동空洞과 근육, 점막, 연골의 심층을 빼앗는다.”(90) 디지털 매체에서 펼쳐지는 소통에는 에로스가 부재하다. 에로스는 유혹하는 타자를 가리킨다. 디지털 매체를 떠도는 존재들은 자기가 변형된 존재들이다. 같은 것의 무수한 반복. 앞서 말한 대로 같은 것의 반복은 그 누구도 유혹하지 못한다. 유혹은 상대에게서 다른 것을 느낄 때 이루어진다. 사랑도 그렇지 않은가. ‘와 다른 무언가가 상대에게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래서 연인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제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도 연인은 언제나 그 의미를 빠져나간다. 매끄러운 타자가 아니라 거친 타자로서 연인은 자신을 증명한다. 사랑이 언제나 두 사람의 만남으로 정의되는 이유라고 하겠다.

 

경청에는 정치적 차원이 있다. 경청은 타인들의 현존재에 대한, 그들의 고통에 대한 행동이자 적극적인 참여다. 경청은 사람들을 연결하고 매개하여 비로소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오늘날 우리는 많은 것을 듣지만, 타인들을 경청하고 그들의 언어와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능력은 갈수록 잃어버리고 있다. 오늘날에는 각자가 자기 자신, 자신의 고통, 자신의 두려움과 함께 어떤 식으로든 혼자 남아 있다. 고통은 사유화되고 개인화된다. 그래서 고통은 자격도 없이 자아와 자아의 심리를 고치겠다고 나서는 치료의 대상이 된다. 누구나 자신의 약점과 부족함을 부끄러워하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책임을 떠넘긴다. 나의 고통과 너의 고통 사이에 어떠한 연결도 생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고통의 사회성이 간과되고 만다. (115~116)

 

신자유주의 논리에 익숙한 성과주체들은 타자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 성과주체는 자기 아름다움에 빠진 나르시스처럼 오로지 자기만 보는 존재이다. 나르시스는 에코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얼굴, 자기 목소리에만 익숙하기 때문이다. 타자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는 그가 타자와 사랑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 나르시스는 시냇물에 비친 자기 얼굴만 바라보다가 굶어 죽는다. 나르시스의 고통은 아무도 이해하지 않는 개인의 고통일 뿐이다. 그는 자기만의 고통을 앓다가 외롭게 죽어간다. 오늘날 성과주체도 마찬가지다. 무한 경쟁에서 이기면 이기는 대로, 지면 지는 대로 그들은 자기 계발의 함정에 빠져 자기를 찬양하고, 자기를 질책하기에 바쁘다. 성과주체는 자기의 바깥을 인정하지 않는다. 당연히 타자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타자는 경쟁 대상으로만 나타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타자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저마다 큰 목소리로 떠드는 사회를 우리는 살고 있다. 더 큰 목소리로 더 많은 말을 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사람들은 외친다. 그 소란한 외침 속에서 타자가 겪는 고통은 묻혀버린다. 지은이 말대로 고통의 사회성이 간과되고 있는 것이다.

 

타자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사회에서만 고통은 사회성을 띠게 된다. 지은이는 시간혁명을 이야기한다. 시간혁명은 타자의 시간을 다시 발견하는 작업을 가리킨다. 신자유주의의 시간 정책은 언제나 타자의 시간을 제거한다. 타자의 시간을 인정하면 사회질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기 시간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자기 시간은 성과를 내기 위해 성과주체가 스스로 실천해야 하는 시간이다. 거기에는 규율사회처럼 강제가 없다. 몇 시까지 출근하고, 몇 시에 퇴근하는 시간 개념을 자기 시간은 인정하지 않는다. 자기 시간을 중시하는 성과주체는 대신 모든 시간을 일에 투자한다. 생산을 위한 시간만이 유일한 시간으로 인정되는 것. 신자유주의 시간 정책은 그래서 축제의 시간도 제거한다. 축제는 탈생산을 지향하기 때문이다(요즘 우리가 아는 축제는 정확히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 탈생산을 지향하는 타자의 시간이 도입되는 순간 자기(관리) 시간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리 보면 타자의 시간은 연대하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타자의 시간은 좋은 시간이다.”(120)라는 지은이의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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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평단 모집]★조국, 요조 추천★『희망 대신 욕망』 | 이벤트 2019-04-17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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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대신 욕망

김원영 저
푸른숲 | 2019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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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 삶에서 자격 없는 인간은 없으며, 

누구든 당당히 욕망해도 된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김원영 변호사의 첫 책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 2019 개정판 

나는 이제야 장애도 욕망도 제대로 주목하는 방법을 배웠다 -요조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으로 2018년 주요 언론 매체와 출판인이 뽑은 ‘올해의 저자’로 여러 차례 이름을 올린 김원영 변호사가 20대에 쓴 책 『나는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가 『희망 대신 욕망』이란 제목으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세상이 ‘잘못’ 태어났다고 취급하는 존재들의 존엄함을 ‘변론’한 김원영은 『희망 대신 욕망』에서 장애를 가진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며 자유와 연대의 힘을 ‘증언’한다. 개정판에는 서문과 후기를 추가하고 장애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부록 ‘장애 문제 깊이 읽기’ 내용을 보완했다. 

수시로 뼈가 부러지는 골형성부전증을 안고 태어난 김원영은 방 안에서 할머니가 사다준 아이스크림을 먹고, 마당의 강아지를 바라보며 무료한 오후를 보내고, 누나의 사회과부도에 점을 찍으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열다섯 살이 되어서야 검정고시를 보고, 재활학교에 들어가 처음 세상 밖으로 나간 그는 단지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로 입학 원서도 팔지 않았던 일반 고등학교의 높은 장벽을 겨우 넘어 ‘일반’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뒤 노력 끝에 서울대학교에 입학해 장애인 인권운동에 뛰어들고, 로스쿨에 진학한다. 『희망 대신 욕망』은 ‘보이지 않는 존재’였던 한 유약한 소년이 세상이라는 무대에 등장하기까지를 다룬 한 편의 성장기다. 하지만 이 책은 ‘인간 승리 드라마’와는 거리가 멀다. 저자는 오히려 ‘누구나 의지만 있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의 서사를 거부한다. 

김원영은 이 책에서 장애인을 ‘미물(微物)’ 취급하는 사회의 동정 어린 시선과 차가운 편견 앞에서 장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쿨한’ 태도를 유지하는 대신, 뛰고 싶다고 말하고, 사랑하고 싶다고 말하며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고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뜨거운 존재가 되자고 말한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된 2010년, “차가운 희망보다 뜨거운 욕망이고 싶다”는 그의 선언은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는 치밀할 정도로 솔직하고 촘촘하게 써내려간 개인적 서사와 풍부한 사례를 통해 ‘장애인은 순수하다’, ‘장애인은 불쌍하다’ 등 장애인 개개인의 개성을 무시하거나, 장애인은 욕망이 없는 존재라고 여겨왔던 편견에 당당하게 마주한다. 2019년, 그의 선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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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택, 「소」 | 시집 읽기 2019-04-15 2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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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김기택 저
문학과지성사 | 2005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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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하고 동그란 감옥에 갇힌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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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소의 커다란 눈은 무언가 말하고 있는 듯한데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

  소가 가진 말은 다 눈에 들어 있는 것 같다.

 

  말은 눈물처럼 떨어질 듯 그렁그렁 달려 있는데

  몸 밖으로 나오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 보지만

  말은 눈 속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

 

  수천만 년 말을 가두어 두고

  그저 끔벅거리고만 있는

  오,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서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배에서 꺼내어

  다시 씹어 짓이기고 삼켰다간 또 꺼내어 짓이긴다.

  - 김기택, 「소」

 

 

시인은 소의 커다란 눈을 들여다본다. 무언가 말하는 것 같아서다. 소는 눈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듯싶은데, 문제는 나에겐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없다.”는 점에 있다. 소의 말을 알아들으려면 특별한 귀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 어쨌든 소가 눈으로 하는 말을 인간의 언어로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돌려 말하면 우리는 인간의 언어를 벗어나야 소의 눈에 깃들인 말을 들을 수 있다. 인간의 언어로는 왜 소의 말을 들을 수 없느냐고? 인간의 언어에는 인간이 사물에 부여한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물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인다. 이름은 의미와 다르지 않다. 의미가 없는 이름은 없다는 말이다. 사물에 붙은 의미는 따라서 사물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사물의 의미는 인간이 사물에 부여한 의미일 뿐이다. 우리는 소를 라고 부르지만, 사물로서 소는 라는 언어를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소가 인 이유는 우리가 그것을 그렇게 부르도록 약속을 했기 때문인 것이다.

 

시인은 소의 눈에 눈물처럼 떨어질 듯 매달려 있는 말을 본다. 하고 싶은 말을 몸 밖으로 내보낼 길이 없어 소는 마음이 한 움큼씩 뽑혀 나오도록 울어 보지만말이 눈 밖으로 나올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수천만 년을 소는 눈에 말을 가두어 두고 살아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소는 그저 눈을 끔벅거리며 제 눈 속에서 누군가 말을 뽑아내기를 기다렸다. 세상을 향해 눈을 활짝 열고 있는데도, 눈으로 하는 그 말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소는 얼마나 갑갑할까? 시인은 , 저렇게도 순하고 동그란 감옥이여.”라고 외치고 있다. 감옥은 무언가를 가두는 곳이다. 억압이 이루어지는 곳을 시인은 왜 순하고 동그란이라는 시구로 표현하고 있을까? 소는 눈에 갇힌 말에 연연하지 않는다. 말에 집착한다고 세상에 내보낼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존재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아무리 말을 쏟아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자 소는 드디어 말이 가는 방향을 자기 마음으로 돌린다. 소는 여러 번 씹었던 풀줄기를 다시 배에서 꺼내어 씹는 일을 반복한다. 되새김질이다. 안으로 들어온 말을 끊임없이 되새김질함으로써 소는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스스로 갈무리한다. 요컨대 소는 눈으로 하던 말을 완전한 침묵으로 대신한다. 침묵에 빠진 채로 소는 무심하게 풀줄기를 씹고 또 씹는다. 씹어 삼킨 것을 밖으로 끌어내서는 또 다시 씹는 일을 반복한다. 씹는 일이 지겨우면 음매, 소리로 눈에 갇힌 말을 세상에 내보내기도 한다. 말이 말을 낳는 인간 세상과는 달리 소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말을 안으로 되새겨 침묵에 빠지는 선법(禪法)을 시행한다. 선법은 침묵으로 말을 전한다. 말하는 사람도 침묵하고, 말을 듣는 사람도 침묵한다. 부처는 침묵으로 가섭에게 도를 전하고, 가섭은 침묵으로 그 도를 받아들였다고 하던가.

 

시인은 소를 통해 선()에 깊숙이 빠진 선사(禪師)를 본다. 선사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설사 말을 한다고 해도 인간이 만든 언어 규범에 익숙한 사람들은 선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선사의 눈에는 언제나 눈물처럼 깨달은 말들이 달려 있지만, 세파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애써 선사가 내지르는 침묵의 외침을 피하려고 한다. 선사는 그래서 소처럼 마음속을 오가는 말들을 씹고 또 씹는다. 말을 씹고 씹다 보면 말에 붙은 의미 역시 사라져버린다. 인간은 말의 의미로 사물에 다가서려고 했지만, 사물은 의미의 감옥에 갇히지 않기 위해 어떻게든 언어 밖으로 뛰쳐나가려고 했다. 인간이 언어를 들이대면 사물은 아예 침묵했다. 침묵을 지키는 사물을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 것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모든 사물을 언어로 표현하려는 욕망은 말 그대로 인간의 욕심일 따름이다. 인간의 욕심이 클수록 인간과 사물의 거리는 더욱 더 멀어지는 법이다.

 

소는 침묵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시인에게 전한다. 시인은 소가 하는 말을 어떻게 우리에게 전할까? 시어(詩語)는 일상 언어와는 다른 기능을 지닌다. 일상 언어가 보이는 사물에 집중한다면, 시어는 보이지 않는 사물에 집중한다. 보이지 않는 사물을 보려면 특별한 눈이 있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특별한 눈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눈이라는 점에서, “소의 커다란 눈과 닮았다. 수천만 년 동안 소는 자기가 보는 세계를 더불어 보는 존재를 기다려 왔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자마자 소는 눈 속에 있는 말을 안으로 돌려 씹고 또 씹는 되새김질을 시작했다. 시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시인은 일상 언어로는 들여다볼 수 없는 세계에 특별한 눈을 들이댄다. 특별한 눈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하는 눈이다. 소의 말을 듣는다는 건 곧 소의 말을 상상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소가 내보이는 말을 듣기 위해 시어를 씹고 또 씹는다. 언어의 한계에 갇혀 있으면서도 언어를 넘어서려는 드높은 열망을 시인은 소의 되새김질과 비슷한 언어의 되새김질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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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건, 「고향」 | 소설 읽기 2019-04-14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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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운수 좋은 날

현진건 저/김동식 편
문학과지성사 | 2008년 02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비참하고 음산한 조선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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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진건, 「고향」

 

 

 

서술자 는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에서 매우 특이한 복장을 한 사내를 만난다. 동양 삼국(한국, 중국, 일본)의 옷을 한 몸에 감은 그는 일본말을 곧잘 하고, 중국말 또한 서툴지 않다. 일본인에게는 일본말을 하고, 중국인에게는 중국말을 하는데, 누구도 그에게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재주 좀 들여 봐 달라는 듯 웃으며 나를 본다. 나는 쌀쌀하게 그의 시선을 피한다. 하는 짓이 밉살스러워서다. 말하기 싫어도 옆자리에 앉은 이를 무작정 홀대할 수만은 없다.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는 그의 얼굴을 스치는 신산스러운 표정에 눈길이 간다. 말하는 품새로 보아 지식인은 아니다. 하긴 배운 사람이 동양 삼국의 옷을 그냥저냥 막돼는 대로 입었을 리 없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노동이나 하는 사람이리라. 그의 얼굴에 드리워진 쓸쓸함을 외면할 수 없어 서술자는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내 고향 이야기를 한다.

 

신세타령이다. 그가 살던 곳은 대구에서 멀지 않은 KH란 외딴 동리이다. 마을 사람들은 역둔토(驛屯土)를 파먹고 살았다. 역둔토는 나라 땅이다. 개인 땅을 소작하는 것보다 떨어지는 것이 후했단다. 그래 넉넉하지는 못해도 그냥저냥 살만 했는데, 조선이 일본에 강탈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나라 땅인 역둔토는 동양척식회사의 소유가 되었고, 회사와 소작인 사이에 관리인이 끼어들면서 소작인에게는 생산량의 삼 할도 떨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나하나 고향 마을을 떠났다. 그의 집안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구 년 전, 그러니까 그가 열일곱일 때 그는 부모를 따라 서간도로 이사를 갔다. 쫓겨 가는 신세가 어디에 간들 편하겠는가. 이태 만에 병이 든 아버지는 타국의 외로운 혼이 되었고, 사 년이 못 되어 심한 노동에 지친 어머니는 영양실조로 죽고 말았다. 이후 그는 일본 구주 탄광에서 일을 했고, 대판 철공장에서도 일을 했다. 벌이는 이전보다 나았지만 방탕한 생활을 하다 보니 돈이 한 푼도 모아지지 않았다.

 

삶이 힘드니 고향 생각만 간절해졌다. 고향에 간다고 무어 뾰족한 대책이 있는 건 아니지만,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이 생기자 도저히 이국 생활을 견딜 수가 없었다. 오래간만에 고향을 둘러본 그는 지금 기차를 타고 벌이를 구할 겸 서울로 올라가는 중이다. 서술자는 그에게 고향 간 일을 묻는다. 얼마나 그리워한 고향인가. 구 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고향도 아마 많이 변했으리라. 그는 한숨을 먼저 쉰다. 변하고 뭐고 간에 고향이 아주 없어졌단다. 집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개 한 마리도 얼씬을 않더란다. 그가 살던 집도 터만 남았다. 썩어 넘어진 서까래, 뚤뚤 구르는 주추는! 꼭 무덤을 파서 해골을 헐어 젖혀 놓은 것 같더마.”라고 읊조리며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쉰다. 굵직한 눈물까지 떨어뜨린다. 백여 호 살던 동리가 십 년이 못 되어 아예 사라져버린 것이다.

 

서술자는 폐허가 된 고향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그의 얼굴을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이라고 표현한다. 스물여섯의 젊은이는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사십이 넘어 보이는 얼굴로 울먹이고 있다. 고향에 돌아가도 그를 반겨줄 이 하나 없다. 사람만 없는 게 아니다. 그가 살던 집은 터만 남아 황량함을 더한다. 무엇이 그가 살던 고향을 이리 폐농으로 만들었는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조선의 얼굴을 작가는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떠돌며 근근이 목숨을 잇는 비참한 민중의 모습으로 펼쳐낸다. 사람들이 떠난 고향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이미 황폐화된 고향을 누가 다시 찾을 것인가. 생활의 뿌리를 잃은 민중들은 고향을 떠나 다른 나라에 터를 잡는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이제 고향마저 잃는다. 갈 곳이 마땅히 있는 것도 아니지만, 다시 돌아올 곳 또한 마땅치 않아졌다. 고향이 사라졌다는 건 돌려 말하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장소가 사라졌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서술자는 침울한 목소리로 이번 길에 고향 사람은 만나지 못했느냐고 묻는다. 단지 한 사람만 만났다고 그는 대답한다. 이웃에 살던 여자란다. 그냥 아는 여자가 아니라 혼인 말이 오가던 여자란다. 보통 인연이 아닌 여자를 그는 황무지가 된 고향에서 신산스러움이 묻어나는 얼굴로 만난 셈이다. 여자는 그보다 두 살이 위였다. 열네 살 적부터 부모 사이에 혼인 말이 오갔는데, 어린 마음에도 그는 여자를 탐탁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왜 맺어지지 못했느냐고? 가난이 원수다. 여자는 열일곱 살 된 겨울에 별안간 사라졌는데, 나중에 들으니 그 아비 되는 자가 이십 원을 받고 대구 유곽에 팔아먹은 것이었다. 유곽은 술을 파는 곳이다. 유곽에 팔려가지 않았다면 그와 여자는 아마도 혼인을 했으리라. 술집에 팔려간 여자가 어떻게 고향으로 돌아온 것일까?

 

처녀는 어떤 일본 사람 집에서 아이를 보고 있었다. 궐녀는 이십 원 몸값을 십 년을 두고 갚았건만 그래도 주인에게 빚이 육십 원이나 남았었는데 몸에 몹쓸 병이 들고 나이 늙어져서 산송장이 되니까 주인 되는 자가 특별히 빚을 탕감해 주고 작년 가을에야 놓아 준 것이었다. 궐녀도 자기와 같이 십 년 동안이나 그리던 고향에 찾아오니까 거기에는 집도 없고 부모도 없고 쓸쓸한 돌무더기만 눈물을 자아낼 뿐이었다. 하루 해를 울어 보내고 읍내로 들어와서 돌아다니다가 십 년 동안에 한 마디 두 마디 배워 두었던 일본 말 덕택으로 그 일본 집에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암만 사람이 변하기로 어째 그렇게도 변하는기오? 그 숱 많던 머리가 훌렁 다 벗어졌더마. 눈은 푹 들어가고 그 이들이들하던 얼굴빛도 마치 유산을 끼얹은 듯하더마.”

 

여자의 얼굴에도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얼굴이 그대로 비쳐든다. 그와 여자가 결혼을 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까? 그럴 리가 없다. 유곽에 팔려가지 않은 여자는 가난에 찌들어 살다가 그의 부모처럼 다른 날에 속절없이 생을 놓았으리라. 그 숱 많던 머리가 훌렁 다 벗겨질 정도로 여자는 고생을 했다. 몹쓸 병이 걸려서야 유곽을 나온 여자는 아무도 없는 고향에 돌아와 남은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살고 싶어 사는 삶이 아니다. 죽지 못해 사는 삶이라는 말은 그와 여인의 삶에 참으로 딱 들어맞는다. 일본 우동집에 들어간 두 사람은 정종만 열 병 나누어 마시고 헤어졌다.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백성 하나 지키지 못하는 음산하고 비참한 조선의 상황을 한탄했을까? 그런들 무슨 소용이랴. 그나 여인이나 운명이라는 말로 자신들의 삶을 갈무리했는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이 소설의 말미에 당시 유행하던 노래 하나를 인용한다. 볏섬이나 나는 전토는 신작로가 되었고, 말마디나 하는 친구는 감옥소로 갔다. 담뱃대나 떠는 노인은 공동묘지로 갔고, 인물 좋은 계집은 유곽으로 갔다. 일제는 신작로를 만들어 조선에서 나는 농산물을 일본으로 빼돌렸다. 그것을 비판하는 조선 사람들은 모두 감옥에 갇혔다. 가난한 아비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딸들을 유곽에 팔았다. 담뱃대나 떠는 노인들은 공동묘지로 갈 때를 기다리며 시간을 죽인다. 누구도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는커녕 고향에서 목숨을 잇는 일조차 어렵다. 수많은 사람들이 뼈를 묻은 조선이라는 고향은 이렇게 황무지가 되었다. 떠나는 사람만 있고, 돌아오는 사람은 없는 이곳에서 작가는 미래가 없는 조선의 앞날을 본다. 미래가 없다는 건 현재도 없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를 바라보는 작가의 암울한 시선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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