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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타자들을 위한 불교경제학과 기술윤리-이상헌, 『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과학과 불교』 | 인문사상 2017-11-25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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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과학과 불교

이상헌 저
살림출판사 | 2017년 05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불교의 시선으로 우리 시대 첨단과학의 윤리를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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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타자들을 위한 불교경제학과 기술윤리

- 이상헌, 『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과학과 불교』

 

 

 

이상헌은 『철학자의 눈으로 본 첨단과학과 불교』(살림, 2017)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윤리적·철학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인류의 삶을 풍부하게 했지만, 그 이면에서 인류는 다양한 윤리적 문제에 직면했다. 이를테면 인간은 풍요로운 삶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좀 더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 산에 터널을 예사로 뚫고, 사회 위생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상황이 발생하면 가차 없이 동물을 살해한다. 인간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펼쳐지는 자연 파괴의 실상은 인간의 문명이 철저히 인간중심적 세계관에 갇혀 있음을 예시한다. 지은이는 이러한 인간중심의 세계관에 불교적인 세계관을 맞세우고 있다. 불교에서 지은이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인간 문명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윤리적·철학적 힘을 찾고 있는 셈이다.

 

근대문명은 의식과 대상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한 서양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지은이의 말을 따른다면 서양적 사고에서 생각은 마음의 작용이며, 의식적인 활동이다.”(20) 마음을 지닌 존재만 사고할 수 있다는 서양적인 사고 맥락에서 볼 때 자연=대상의 한계는 명확하다. 우리 신체와 비슷하고, 우리 행동을 가능한 한 흉내 낼 수 있는 기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진정한 인간일 수 없다(19)는 데카르트의 말이 암시하듯 자연=대상=기계는 결코 인간이라는 존재에 이를 수 없다. 자연에서 인간을 떼어낸 후 자연을 지배하는 자로 인간을 설정하는 근대의 인식구조는 현대의 과학기술을 판단하는 문제에도 그대로 개입되어 있다고 하겠다.

 

불교적 관점으로는 이런 자연=대상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지은이는 우선 불교가 물질적 사고를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의식을 수반하여 사고하는 물질로 두뇌를 예로 들 수 있고, 의식 없이 사고하는 물질로 심장을 꼽을 수 있다.”(23) 의식과 대상(물질)을 정확히 나눈 서양적 사고와는 다르게 불교적 사고는 의식과 대상=물질의 경계를 확연하게 나누지 않는다. 인간과 자연의 경계를 나누고,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준거로 불교적 사고가 사용될 거점이 마련되는 셈이다. 지은이는 불교적 사고에 내포된 반()이분법적 사고에 근거하여 과학기술로 이룩된 문명의 현황을 윤리적으로 탐색하는 길을 열어젖힌다.

 

 

불교는 서양철학과 달리 왜 인간이 창조되었는가?’,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등의 형이상학적 물음에 관심이 없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라는 실천적인 물음에 관심을 둔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가장 우선시해야 할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주어진 고통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고통이 모든 문제의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고대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했다. 불교 역시 이와 다르지 않게 생각한다. 우리 자신과 우리 삶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본능적 욕구와 그에 따르는 고통, 번뇌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지혜를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적 관점에서 볼 때, 인공지능이 수단으로 가장 잘 쓰일 수 있는 길은 바로 인간의 모든 문제의 원인이 되는 고통을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는 것이다. (42)

 

 

서양철학이 형이상학적 물음에 관심을 두고 있다면, 불교는 지금 이곳에서 펼쳐지는 개인들의 고통에 주목하고 있다. 서양철학의 원조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현상 너머에 있는 진리를 평생토록 탐구했다. 불교 또한 넓게 보면 현실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깨달음의 세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서양철학의 사고방식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지은이의 말마따나 불교의 목적은 태어나면서 생명에게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고통을 제거하는 데 있다. 불교는 서양철학에서 실체화한 자아를 이정하지 않는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언명에 드러나는 대로 서양철학은 생각하는 나를 실체화하여 대상의 진리를 파악한다. 불교는 서양철학의 핵심 개념인 자아, 생각하는 나를 고통의 뿌리로 본다.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불교가 자아를 절대화하는 서양철학과 갈라지는 지점은 무엇보다 이 지점에서 분명히 드러난다고 하겠다.

 

지은이는 이러한 불교적 세계관으로 현대문명의 첨단기술을 수용할 근거를 세운다. 인간의 고통을 줄여줄 수 있다면 기술은 그 나름의 분명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인 품성을 지닌 초지능, 혹은 보살의 마음을 지닌 초지능은 인류에게 진정 구세주와 같은 존재가 될지 모른다.”(58)는 지은이의 주장은, 기술은 결국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윤리와 맞닿아 있다는 주장과 통한다. 요컨대 지은이 입장에서 보면 기술 자체가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기술을 누가 어떤 마음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첨단기술에 내포된 윤리적 딜레마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 문제는 이렇듯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인간에게 집중된다. 자연을 파괴함으로써 문명의 풍요로움을 이룬 근대 과학문명은 이로 보면 하나의 반면교사로 우리 앞에 정립되어 있는 셈이다.

 

 

불교는 생명공학을 어떻게 바라볼까? 불교는 신을 조물주로 상정하고 생명을 신의 피조물로 여기는 기독교와 다른 관점을 보여줄 것이 분명하다. 현재 생명공학에 대해 가장 강력한 반론을 펴고 있는 것이 종교 진영인데, 불교는 좀 더 수용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불교에서는 인간을 포함하여 일체 중생을 고정된 실체로 가정하지 않으며 창조자로서의 신을 상정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불교의 기본 정신이 생명공학 같은 기술의 긍정적 목적을 지지한다. 붓다가 세상에 온 목적은 일체 중생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인간에게는 수많은 고통이 있지만 그 가운데 생로병사의 네 가지 고통이 가장 크다. 생명공학은 의료적 목적으로 사용되어 인간에게서 이 네 가지 고통을 줄여줄 것이다. 대의왕(大醫王)으로서의 붓다의 이미지, 그리고 약사여래불은 이런 생각의 근거가 된다. 불교의 실천사상인 자비정신은 생명공학이 인간에게 혜택을 가져다주고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면 생명공학을 옹호할 것으로 기대된다. 생명이 있는 것, 즉 일체 중생에게 행복을 주는 여약(與藥)이 자()이며 불행을 없애주는 발고(拔苦)가 비()이다. 그러므로 생명공학이 중생의 행복을 증진시키고 고통을 감소시킨다면 생명공학 연구를 자비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96~7)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의 대상은 인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지은이는 불교의 자비를 사랑과 구별하고 있다. 사랑이 인간중심적인 감정에 가깝다면, 자비는 살아 있는 일체 중생을 대상으로 한다. 자비는 인간과 동물에 차이를 두지 않고 두루 작용한다는 말이다. 언뜻 생명공학은 불교의 이런 자비정신과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생명공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이루어지는 그 숱한 실험동물들의 비극을 생각해 보라. 다른 동물의 장기를 인간의 몸에 이식하는 이종 이식만 해도 불교의 팔정도(八正道) 가운데 하나인 불살생(不殺生)’의 원칙을 어기는 일이 아닌가? 지은이는 불교의 평등관에 나타난 독특한 점을 이야기한다. 불교가 일체 중생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건 분명하다. 하지만 불교는 한편으로 도덕적 탁월성의 정도에 따라 인간의 생명이 동물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취급될 수 있다.”(106)고 본다. 지은이는 이에 따라 불교적 관점에서 이종 이식을 비롯한 생명공학기술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불교는 기술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첨단기술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제거한다면, 달리 말해 기술을 통해 자비가 실현된다면 불교는 기꺼이 첨단기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문제는 불로장생을 꿈꾸는 인간들의 욕망을 우리 스스로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느냐는 점에 있다. 지은이는 냉동인간문제를 다루면서 불멸을 향한 인간의 꿈을 불교적으로 접근한다. 냉동인간 문제는 사실 투명인간의 윤리를 해석하는 문제와도 이어져 있다. 투명인간을 만드는 기술 자체보다 그것을 통해 개인의 부적절한 욕망을 이루려는 마음이 문제라는 것이다. 냉동인간 기술만 해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이 세계의 소수만을 위한 기술을 어떻게 인류 전체의 행복을 이끄는 기술과 동일시할 수 있겠는가?

 

 

대승불교에서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보살이라고 한다. 보살은 산스크리스트어인 보디-사트바(bodhi-sattva)를 소리나는 대로 읽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이다. 여기서 보디(bodhi)깨달음이라는 뜻이고, 사트바(sattva)중생을 뜻한다. 그래서 보디-사트바는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혹은 구도자정도의 뜻이다.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는 자리행(自利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이타행(利他行)을 추구한다. 칸트의 용어를 빌리면, 자리행은 자신 안에 있는 인간성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에 해당할 것이고, 이타행은 타인 안에 있는 인간성의 완성을 돕는 행위에 해당할 것이다. 보살이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上求菩提下化衆生).”는 말은 먼저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중생을 교화한다는 뜻이 아니다. 깨달음을 구하는 것 자체가 중생 교화이고, 중생 교화가 곧 구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간단히 말하면, 보살에게는 중생 구제가 우선한다. (217)

    

 

보살은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보살은 혼자만의 깨달음에 집착하지 않는다. 고통에 빠진 이 세상 중생들을 위해 깨달음을 전파한 부처처럼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는 자리행(自利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하는 이타행(利他行)을 추구한다.” 자리행과 이타행을 구분해서 이야기했지만 보살에게는 중생 구제가 우선이다. 정확히 말하면 보살은 중생 구제의 서원(誓願)으로 깨달음에 이른다. 지은이는 보살의 이런 마음을 이 시대의 첨단기술과 연결시키려고 한다. 그는 디자이너 폴 폴락(Paul Polak)이 주창한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에서 이 시대의 첨단기술이 지향해야 할 기술윤리를 발견한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은 말 그대로 고통 받는 다수의 인간들을 위한 디자인을 중시한다. 소수의 10%를 위한 디자인은 자본의 확대를 위한 디자인 산업을 부추길 뿐이다(패션모델들의 몸매를 생각해 보라. 이 세상 10%도 아니고 1%를 위한 디자인이 판을 친다). 거기에는 다수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한 자비가 없다. 지은이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할 때, 우리 내면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욕망으로부터 잠시라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고통 받는 타인을 자비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폴락의 디자인 혁명은 시대적인 요구로 들릴 것”(213)이라고 이야기한다. 타자에 대한 배려가 없이 소수를 위해 기획된 기술 혁명을 지은이는 윤리적 관점에서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셈이다.

 

소외된 90%를 위한 정수기인 생명빨대(Lifestraw)’나 가난한 나라에 사는 아이들을 위해 기획된 물 긷는 기구 큐드럼(Q-drum)’ 등을 예시로 들며 지은이는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은 에른스트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에 구체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슈마허는 팔정도(八正道)에 근거한 불교경제학을 통해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세계를 새로이 정립하고 있다. ‘팔정도는 무엇보다 탐욕을 끊어내는 길로 가는 인간의 마음에 주목한다. 소박함과 비폭력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불교경제학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동등하게 생각하는 마음=자비와 직접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다. 지은이는 기술 유토피아의 토대를 이러한 마음에 두고 있다. 기술 윤리는 결국 마음의 윤리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과학기술을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살 미래사회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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