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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영 디카시 「공룡발자국 화석」 | 디카시 읽기 2019-08-27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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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영 디카시 「공룡발자국 화석」

 

 

  

  

  멀리서 온 기억에 발을 넣고

  먼 곳의 기억에게로 걸어가 본다

  먼 곳의 파도 소리, 먼 곳의

  바람 소리, 쿵쿵쿵 발소리 내며

  떠나가 버린 먼 곳의 사람에게로

  - 박서영, 「공룡발자국 화석」

 

 

65백만 년 전만 해도 지구에는 공룡이 있었다. 몸이 큰 짐승의 비애로 공룡은 지금 지구상에서 사라졌지만, 그 화석은 남아 공룡이 산 흔적을 보여준다. 공룡은 그러니까 인간으로 보면 태초의 기억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과 더불어 산 시대가 없는데도 우리는 공룡 앞에 선 인간을 자꾸만 상상한다. 흔적은 보이지 않는 대상을 상상하게 만드는 묘한 특성이 있다. 시인이 사진이미지로 제시한 공룡발자국 화석을 보며 우리는 지금이 사라진 공룡을 상상한다. 바위 위에 새겨진 저 흔적이 우리를 머나먼 세계로 데려간다. “멀리서 온 기억에 발을 넣고시인은 먼 곳의 기억에게로걸어간다. 기억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동반한다. 공룡발자국 화석이라는 이미지로 우리는 먼 곳을 향해 떠난다. 몸은 이곳에 있지만 마음은 저곳에 있다. 이곳과 저곳을 하나로 잇는 흔적이 참 흥미롭지 않은가? 공룡은 무심결에 바위에 새긴 흔적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헤아리기 힘든 시간이 지난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이 흔적을 보고 실체를 상상하는 즐거움에 빠진다.

 

먼 곳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바람 소리도 들려온다. 쿵쿵쿵 발소리를 내며 어딘가로 내닫는 공룡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물론 상상이다. 상상은 우리를 현실 바깥으로 이끌고 간다. 여기에 없는 공룡을 여기로 불러내는 힘이 상상에는 있다. 돌려 말하면 상상에 빠진 존재는 사물들이 내보이는 경계를 허문다. 경계를 세우면 상상은 한계에 갇힌다. 한계에 갇힌 상상을 상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상상 속에서는 인간과 공룡이 함께 산다. 상상하는 사람은 공룡이 되어 먼 곳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바람을 느끼며 공룡이 살았던 그 시절을 느끼기도 한다. 어린아이들이 왜 공룡을 좋아하겠는가? 아이들은 의미에 갇혀 있지 않다. 공룡을 그 자체로 본다는 얘기다. 시인 또한 다르지 않다. 공룡발자국 화석을 보며 시인은 온전하게 공룡을 느낀다. 화석을 보는 순간 공룡은 이미 이곳에 와 있다.

 

시인은 떠나가 버린 먼 곳의 사람에게로가는 길에 공룡발자국 화석을 배치하고 있다. “먼 곳의 사람이라고 시인은 말하지만, 굳이 사람이라는 대상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은 떠나간 사람일 수도 있고, 죽은 사람일 수도 있다. 먼 곳은 달리 말하면 저곳=저승의 의미를 내포한다. 수천만 년을 거슬러 온 공룡발자국 화석을 보며 시인은 인간의 시선으로는 다가가기 힘든 어떤 세계를 떠올린다. 생명은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진다. 생명과 생명을 잇는 고리는 인연 줄이 되어 우리 마음에도 어김없이 새겨져 있다. 먼 곳을 향한 열정은 이리 보면 우리가 떠나온 원초적 세계를 그리워하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저곳이라고 해도 좋고, 저승이라고 해도 좋다. 죽음이 아니라면 어떻게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겠는가? 지금은 화석으로 남은 이 먼 곳의 흔적을 보며 시인은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로 그녀는 떠나가 버린 먼 곳의 사람에게로가는 길을 연다. 자기이면서 자기가 아니고,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먼 곳의 사람. 거추장스런 육체를 버리고 저세상으로 삶터를 옮긴 시인은 과연 그곳에서 그 사람 아닌 사람을 만났을까? 대답이 없는 질문만 훌쩍 던져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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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중 디카시 「업그레이드(upgrade)」 | 디카시 읽기 2019-08-16 2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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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석중 디카시 「업그레이드(upgrade)」

 

 

  

  

  밟히고 굴러다니던 막돌들이

  서로 얼싸안고 한 몸이 되었습니다.

  오다가다 합장을 받는 몸이 되었습니다.

  성스러운 몸이 되었습니다.

  - 나석중, 「업그레이드(upgrade)」

 

 

막돌들이 모여 탑이 되었다. 그 앞을 지나던 사람들이 탑 앞에서 합장을 한다. 막돌 하나 올려놓고 다시 합장을 한다. 합장(合掌)이란 무엇일까? 마음을 모아 기도하는 일이다. 막돌로 쌓은 탑에 사람들의 기운이 모인다. 막돌은 이제 그냥 막돌이 아니다. 사람들이 내놓은 소망과 정성이 모여 이루어진 정신이다. 산에 올라가면 어김없이 만나는 이 막돌로 쌓은 탑을 시인은 사진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막돌 주변에 마른 나뭇잎이 널려 있다. 때는 겨울인가 보다. 누가 먼저 저 위에 돌을 놓기 시작했을까? 돌 하나하나 놓는 그 마음이 모여 저 아름다운 탑이 만들어졌다. 누군가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탑인지도 모르지만, 합장하는 이들의 눈에 막돌 탑은 신령이 깃든 사물로 보일 뿐이다.

 

시인은 밟히고 굴러다니던 막돌들이라고 쓰고 있다. 어디에나 있는 막돌로 사람들은 어디에도 없는 탑 하나를 만들어냈다. 주변 풍경 생각하지 않고 쌓은 탑일 텐데, 탑은 이미 풍경 속으로 녹아들었다. 막돌들이 서로 얼싸안고 한 몸이 되자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돌탑을 향해 합장한다. 무엇을 비는 것일까? 막돌로 쌓은 저 탑에 무슨 기운이 있다고 사람들은 기꺼이 그 앞에서 제 옷깃을 여미는 것일까? 막돌 하나하나에 그것을 집어올린 사람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겹겹이 쌓은 막돌 탑이 저마다 다른 기운으로 한 몸을 이룬다. 크면 큰 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막돌들은 제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다. 말 그대로 자연이다. 욕심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세계.

 

오다가다 합장을 받는 몸이된 이 막돌 탑을 보며 시인은 성스러운 몸을 상상한다. 성스러운 몸은 서로 얼싸안고 한 몸이 된 상황에서 뻗어 나온다. 막돌 하나가 놓인 자리에서 합장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막돌은 모여서 돌탑이 되고, 한 몸이 된다. 막돌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이다. 막돌 하나에 온 세계가 담겨 있다. 그러니 저 돌탑을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성스러운 몸을 향해 합장을 하며 사람들은 성스러운 기운을 온몸으로 받는다. 사람들이 막돌에 준 기운을 또 다른 사람들이 온몸으로 받는다. 성스러움은 이리 보면 생명과 생명 사이에서 펼쳐지는 기운인 듯도 싶다. 성스러운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막돌은 서로 얼싸안는 힘으로 제 기운을 업그레이드(upgrade)’ 한다. 시인이라고 다를까? 시인은 막돌을 보며 성스러운 기운을 온몸으로 체험한다. 시는 바로 그 속에서 밀려나온다. 막돌과 더불어 시 또한 성스러운 언어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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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진 디카시 「나비의 꿈」 | 디카시 읽기 2019-07-13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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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운진 디카시 「나비의 꿈」

 

 

  

  

  꽃밭의 바깥에서

  나를 만난다

 

  꽃이라는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

  - 이운진, 「나비의 꿈」

 

 

나비 한 마리가 시멘트 바닥에 앉아 있다. 나비가 앉은 앞쪽 바닥에 물이 고여 있다. 물과 접촉이라도 하려는 듯 나비는 조심스레 물이 시작되는 경계에 서 있다. 시인은 이 상황을 꽃밭의 경계에서/ 나를 만난다라는 시구로 표현하고 있다. 물은 꽃밭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것일까? 물 너머에 있는 꽃밭을 외면하고 나비는 물속에 얼비친 자기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다. 시인은 지금 꽃밭이 아니라, 꽃밭의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비는 꽃밭에서 산다. 꽃밭이 나비의 삶터라는 얘기다. “꽃밭의 바깥은 그러므로 나비에게는 삶터의 바깥과 다르지 않다. 꽃밭을 벗어나서 나비는 과연 살 수 있을까? 시인은 나비의 꿈이라는 시 제목으로 바깥을 꿈꾸는 나비를 시 세계로 불러낸다. 나비는 바깥을 향한 꿈을 꿈으로써 물에 비친 자기와 마주한다.

 

꽃밭에서 나비는 꽃을 통해 자신을 보았다. 꽃과 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꽃밭이라는 내부를 벗어나야 물이라는 외부가 보인다. 꽃밭에 있으면 나비는 물을 볼 수 없다. 꽃밭을 나는 나비가 보는 것은 오로지 꽃들뿐이다. 꽃밭에서는 꽃과 나비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달리 말하면 꽃밭에는 경계가 없다. 꽃밭의 바깥으로 나가야 나비에게는 비로소 경계가 생긴다. 시인은 경계를 넘어서야 를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경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자기를 만나는 길 또한 막혀버린다. “꽃이라는 감옥에 표현되는 대로, 시인은 꽃밭을 나비의 감옥으로 생각한다. 감옥에 익숙한 존재는 감옥을 일상으로 여긴다. 구속이 곧 자유가 되는 공간이 감옥이라고 할까? 꽃밭을 자유로이 나는 나비를 떠올려 보라. 꽃밭에 익숙한 나비는 어떤 경우에도 꽃을 자기를 구속하는 사물로 생각하지 않는다.

 

사진이미지에 보이는 대로 나비는 지금 꽃밭을 나와 물이 만든 경계와 대면하고 있다. 한 발짝을 더 내딛으면 나비는 온전히 물의 세계로 들어선다. 시인은 꽃이라는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구절로 나비의 꿈을 펼쳐내고 있다. 나비가 꾸는 꿈은 물론 시인이 꾸는 꿈이다. 시인은 꽃밭이라는 안정된 세계를 나와 물속에 제 얼굴을 비추는 나비와 하나가 되고 있다. 나르시스는 물속에 비친 제 얼굴에 반해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끝내는 목숨을 버렸지만, 꽃이라는 감옥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결심한 나비가 나르시스의 전철을 밟을 리는 없다. 나르시스가 멈춘 자리에서 나비는 새로운 꿈을 꾸려고 한다. 꽃밭을 나와서야 비로소 자기를 본 나비는 경계를 넘어 어디에 이르게 될까? 꿈을 꾸는 자만이 나비가 이를 곳을 상상할 수 있다. 나비는 꿈을 꾸는 이들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여는 꿈을 펼쳐 보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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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디카시 「인생」 | 디카시 읽기 2019-05-02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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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디카시 「인생」

 

 

 

 

 

 

할아버지 두 명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 주변에 꽃들이 활짝 피어 있다. 꽃길이다. 할아버지들은 자전거를 타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인생이란 제목이 붙은 이 시에서 시인은 자전거를 타고 어딘가를 향해 가는 존재를 표현하고 있다. 태어난 사람은 어김없이 어딘가를 향해 간다. 그곳을 시간이라고 말해도 좋고, 죽음이라고 말해도 좋다. 시간은 우리를 죽음의 세계로 인도한다. 인생무상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상징이 아니라 사실이다. 언어가 아니라 현실이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죽음을 향해 여행을 시작한다. 가고 싶지 않다고 거부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죽음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거부하면 거부할수록 더 깊게 파고드는 인연 줄이라고 표현하면 어떨까? 사진이미지 바깥으로 보이지 않는 어느 곳에 죽음이 있다. 사진이미지 안에 있는 할아버지들은 시간이 흐르면 그 바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진이미지 안에 갇힌 저 할아버지들은 지금 살아있는 것일까, 죽은 것일까? 시인은 앞서거니 계절이 먼저 오고/ 뒤서거니 세월이 따라오고라는 진술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네 삶을 나타내고 있다. 시간을 산다는 건 곧 시간 속에서 죽는다는 걸 의미한다. 삶 속에 담긴 죽음의 역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안이 있으면 밖이 있다. 안과 밖은 그럼 둘이기만 한 것일까? 안이면서 밖인 경계는 없는 것일까? 당연한 얘기지만, 경계는 어디에나 있다. 안과 밖은 곧바로 안팎을 이룬다. 할아버지가 살아온 시간 속에 수많은 이들이 살아온 시간이 있다는 말로 풀어도 좋다. 할아버지가 처음부터 할아버지인 적은 없지 않은가? 누군가 태어나 청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고 중년이 되었다가는 이내 노년에 이르렀다. 한 사람 인생에 새겨진 수많은 시간들이 삶이면서 동시에 죽음인 생명의 역사를 이룩한다.

 

할아버지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저 꽃길은 시인의 말마따나 곧 끝날 것이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시작과 끝은 둘이면서 하나라는 말이다. 생명을 휘감고 있는 역설은 사실 인생 자체에 내포된 역설과 이어져 있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죽음을 산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으며=살며 우리는 한 살 한 살 죽음으로 다가간다. 열심히 달려온 길이 아득해지는 순간에도 이러한 역설은 변하지 않는다. 활짝 핀 저 꽃들이라고 무엇이 다를까? 할아버지가 꽃길을 지나가면 어떻고, 눈길을 지나가면 어떤가? 꽃길이든, 눈길이든 시간의 흔적에 싸여 있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꽃길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눈길이 되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눈길이라고 슬플 리 없고, 꽃길이라고 기쁠 리 없다. 할아버지라고 슬플 게 없고, 청년이라고 기쁠 게 없다. 꽃길이 끝나도 마음은 여전히 청춘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이 시를 읽으며 우리가 지금 인생의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한번쯤 생각해 봐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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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화 디카시 「가을」 | 디카시 읽기 2019-04-07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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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화 디카시 「가을」

 

    

  

  

  그래서는 안 될 놈들도 그러고

  그러지 않을 것 같은 놈들도 그러고

 

  빨강으로 멋을 내거나

  노랑으로 흉내 내거나

  - 김해화, 「가을」

 

 

가을이면 온갖 잎들이 색색으로 물든다. 담쟁이라고 예외가 될 리 없다. 붉고 노랗게 물든 담쟁이를 사진 이미지로 제시하며 시인은 가을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쓴다. 봄이 희망을 주는 계절이라면, 가을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까? 가을 잎들은 색색으로 물들며 땅으로 떨어질 준비를 한다. 생이 있으면 죽음 또한 있는 것이니 잎이 떨어지는 일을 슬퍼할 까닭은 없다. 단풍(丹楓)은 나뭇잎들이 마지막으로 태우는 생명의 불꽃이라고 하던가? 마지막으로 태우는 생명이 저토록 아름다운 것이라면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과정 또한 기꺼이 받아들일만한 하지 않은가? 시간이 흐르면 사람의 몸에는 쭈글쭈글 주름이 생기는데, 나뭇잎은 어떻게 저리 화려한 몸치장을 하는 것일까? 사람과 나뭇잎 사이에서 죽음에 이르는 생명들을 생각한다. 가을이면 제 몸을 붉게 물들임으로써 나뭇잎들은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주저 없이 맞이한다.

 

시인의 말마따나 가을이 되면 그래서는 안 될 놈들도, 그러지 않을 것 같은 놈들도 제 몸을 색색으로 물들인다. 빨강으로 멋을 내든, 노랑으로 흉내 내든 이놈 저놈이 펼쳐내는 색색의 향연으로 하여 사람들은 한없는 즐거움을 느낀다. 가을이 되면 왜 모든 사물이 자기 몸을 색색으로 물들이는 것일까? 사람으로 치면 가을은 나이가 들어가는 걸 서서히 느끼는 시절이다. ‘중년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이 시절에 사람들은 과연 저 나뭇잎처럼 화려한 모습을 뽐낼 수 있을까? 나이를 거슬러 오르려는 욕망으로 사람들은 제 얼굴을 꾸미기에 바쁘다. 늘어가는 주름이 싫어 가면을 쓰는 형국이라고나 할까? 죽음으로 가는 도정 속에서 제 몸을 물들이는 나뭇잎에 비한다면 우리 사람들이 꾸며내는 얼굴은 지나치게 화려하기만 할 뿐이다.

 

담쟁이를 물들인 저 빨강과 노랑은 담쟁이가 살아온 계절의 뜨거움을 에둘러 보여준다. 빨강으로 멋을 내든, 노랑으로 흉내 내든 담쟁이는 자기가 있는 곳에서 후회 없는 생을 살아왔다.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면 담쟁이는 더 이상 자기 생을 펼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담쟁이에게는 지금이 유일한 삶이라는 얘기겠다. 과거를 생각할 겨를도 없고, 미래를 계획할 시간 따위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일까, 담쟁이는 지금 이 순간 자기를 온통 드러내고 싶은 열망에 들떠 있다. 후회 없이 자기를 표현하며 사는 삶이란 바로 이와 같은 담쟁이의 모습에 그대로 들어 있지 않을까? 맨얼굴로 자기 죽음과 마주하는 것이라고 돌려서 말해도 좋겠다. 보여주고 싶은 것은 다 보여주었으니 무슨 후회가 있을까? 보이는 것마저도 애써 감추려고 하는 우리네 사정을 엿보노라면 보일 것, 못 보일 것 온통 내보이는 저 붉고 노란 담쟁이 잎이 그저 부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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