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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실질적인 조언│내가 바라는 나로 살고 싶다, 브라이언 리틀 | 내가 소설인지    소설이 나인지 2020-08-22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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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내가 바라는 나로 살고 싶다

브라이언 리틀 저/강이수 역
생각정거장 | 2020년 06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실제로 나에게 적용해볼 요소들이 많았으므로 나는 이 책이 몹시도 실용적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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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해왔기에 자아를 분석하는 모든 항목에 흥미를 느꼈다. 사주팔자나 타로점, 심리테스트, MBTI 등은 물론이고 내성적인 사람들이 쓴 에세이나 정신과 의사들의 유튜브, 범죄 프로파일러의 강의 동영상 등을 꾸준히 습득했다. 이번에는 하버드 학생들이 최고로 뽑았다던 교수의 심리학 강의였다. 나는 내가 여전히 나를 분석하고 싶어 한다는 생각에 약간 질려하면서도 모종의 기대를 가지고 책을 폈다. ‘이게 나다!’싶은 구절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질리지도 않고 나를 설레게 했다.


164쪽의 작은 책 안에는 브라이언 리틀 교수가 50년 가까운 세월을 바쳐 연구하고 터득한 내용의 정수가 담겨 있었다. 성격이 유전과 환경(책 속에서는 제1 본성과 제2 본성으로 설명된다)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므로 별반 새롭지 않았지만, 그 두 가지의 힘만으로 성격이 형성되는 건 아니라는 의견은 좀 흥미가 돋았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퍼스널 프로젝트’라는 말을 소개하는데, 말하자면 이것은 “크고 작은 삶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노력의 모든 것(10p)”으로, 자신의 타고난 성격의 바운더리를 벗어나 인간성을 재구성하는 일이며 이것으로 앞날이 결정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쉽게 말해 내가 만일 ‘나는 매일 45분씩 동네 산책로를 뛰겠다’라는 퍼스널 프로젝트를 설정하고 꾸준히 실천하면 아무리 모태 집순이에 움직이기 싫어하는 나라도 건강한 신체조건을 유지하며 나이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집순이’라는 선천적 성격에 3n년을 살며 정교하게 완성된 ‘움직이기 싫어하는 나’를 동시에 극복하는 일로, 바로 이러한 “변화 가능성”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가치라고 저자는 말했다.


그 때문에 우리는 “한 사람의 성격을 타고난 특성이 아닌 그가 수행하는 퍼스널 프로젝트로 정의(78p)”해야 하며, 쉽게 바꿀 수 없는 성격적 특성과 환경적 요인들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라고. 성격과 환경이 아닌 제3의 본성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으므로.


삶의 질이 하강곡선으로만 뻗어가는 요즘 같은 때에 모처럼 희망적으로 들리는 얘기들이었다. 나를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무언가를 하는 것까지 이끌어준다는 것이 이 책의 가장 좋은 효과였다. “웰빙Well-being이 아니라 웰두잉Well-Doing”이라더니 과연 책의 효과도 저자의 가르침대로였다. 당장 몇 개라도 퍼스널 프로젝트를 설정‘하게’ 됐다.


응당 알 거라고 생각했던 성격 관련 용어들을 바로 잡아주는 것부터 내 프로젝트에 방해가 되는 타인이나 환경에 대처하는 실질적인 방법까지. 막연하거나 진부하다고 느껴지던 순간들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실제로 나에게 적용해볼 요소들이 훨씬 많았으므로 나는 이 책이 몹시도 실용적으로 느껴졌다.


특히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부분은 강박에 대한 파트였다. “자신을 단 하나의 자아로 한정하는 것은 여러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는 것과 같다. (121p)”니. 평소 지나치게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습관처럼 나를 미워하던 나에게는 치료약과도 같은 가르침이었다. 역시 자신을 분석하고자 하는 열망은 옳았다. 이 책을 고른 나의 안목도 참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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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 우연한 사랑, 필연적 죽음 | 한줄 감상 2020-08-13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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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세상에 터진 열여섯 개의 웃음소리. 한 목소리인 듯 어울려, 재미있는 놀이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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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목소리를 드릴게요 | 한줄 감상 2020-08-13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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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최후의 순간에도 사람들의 이타심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녀는 희망으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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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만두기 싫었던 책│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패니 플래그 | 내가 소설인지    소설이 나인지 2020-07-28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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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패니 플래그 저/김후자 역
민음사 | 2011년 01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사람은 늙고 죽고 결국 사라지지만 그 자리에 있던 시간은 무심하게 핀 장미꽃처럼 여전히 아름답게 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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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을 다 읽은 날, 나는 독서 노트에 이렇게 썼다.


“오늘 하루에만 400페이지 가까이 읽었다. 평균 집중력 17분의 소유자인 나로서는 기적 같은 일에 가까웠다. 읽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만두기 싫었다.”


정말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다. 내가 《베어타운》같이 한 마을의 이야기를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 부분을 제외한다고 해도 나의 만족감이 줄어들 것 같진 않다. 이런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별 의심 없이 술술 읽어나갈 수 있을 만큼 별다른 장치가 없는데도 반전의 반전을 줄 수 있는.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사소하고 또 무난한 설정들을 증폭제로 쓸 수 있는. 으레 그럴 거라고 여기는 생각을 무심하게 터뜨려버리는 바늘. 더 없이 인간적인. 그러면서도 따뜻한.


추리소설보다 더 ‘소오름!’하면서 읽은 책이었다. 이 책의 유일한 단점은 우리나라에 번역된 저자의 딱 한 권뿐인 책이라는 점이었다.



2

남편과 함께 요양원으로 시어머니를 문병하러 온 에벌린 카우치에게선 어쩐지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두 사람을 피하듯 방문객 휴게실에 들어가 앉는 모습도 그렇고 단 음식을 집착적으로 먹는 모습 역시 불안증이나 도피 욕망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그때만 해도 에벌린은 자신의 옆에서 쉬지 않고 떠드는 스레드굿 부인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요양원에서 생활하는 노인의 젊은 시절 이야기 같은 게 타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매주 같은 행위를 반복하게 되면서 두 사람의 거리가 달라진다. 에벌린은 스레드굿 부인의 몫까지 먹거리를 챙겨오고 스레드굿 부인은 에벌린을 친구처럼 반긴다. 이제 에벌린은 남편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나타나면 낙심하게 됐다. 지금 집에 가면 일주일을 기다린 후에야 그녀의 이야기를 이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신기한 일이다. 에벌린은 어쩌다가 스레드굿 부인의 이야기에 그토록 푹 빠지게 된 걸까?



3

“왜지? 왜 나한테 그렇게 대하냐니까?”(310p)


“마흔 여덟 살인 에벌린은 살아오던 중 어디쯤에선가 길을 잃고 말았다(60p)”. 모든 것이 너무도 빠르게 변했고 에벌린은 노력해도 따라갈 수 없었다. ‘착한 여자’고 ‘숙녀’고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지금은 그냥 딸보다도 섹스에 대해 모르는 엄마일 뿐이었다. 슈퍼에서 제 어깨를 밀치고 지나간 남자아이에게 “지랄하네, 미친년!(308p)”이란 소리를 듣는 중년여성일 뿐이었다.


에벌린이 그 아이의 트럭에 쫓아가, “날 왜 그렇게 상스럽게 대하는 거니? 내가 너한테 뭘 어쨌는데? 너는 날 알지도 못하잖아!(310)”라며 매달리는 모습은 처절해보이기까지 했다. 에벌린은 답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착하게만 살아온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지금의 세상은 어째서 나 자신을 늙고 뚱뚱하고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으로 느끼게 만드는지.


니니 스레드굿 부인의 이야기는 그런 틈으로 스며들었다. 에벌린이 살고자 하는 세상, 되고자 하는 사람 모두 그 이야기 속에 있었다. 에벌린은 자신의 무력감과 우울, 불면을 견디기 위해 스레드굿 부인의 이야기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면 그 이야기 안에 들어가 있는 자신이 보였다. 이야기 속 인물들이 미소 띤 얼굴로 에벌린을 보며 안부를 건넸다. 에벌린은 점점 잠자는 시간을 늘릴 수 있었다.


대부분 여성들이 20년 전에 겪었을 분노를 이제야 경험하며 ‘토완다’라는 엄청난 자아를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결국 에벌린이 선택한 것은 “분홍색 캐딜락 뒤에 서 있는 날씬하고 행복한 자신(467p)”이었다. 니니의 이야기가 가져다 준 선물 같은 변화였다.


“그러나 매주 스레드굿 부인과 함께했던 근래의 몇 달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기 시작했다. 니니 스레드굿은 에벌린에게 젊다는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에벌린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반이나 남은 여자로 자신을 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친구는 진심으로 에벌린이 메리케이 화장품을 판매할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이전에는 에벌린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우선 그녀 자신부터가 그랬다. 스레드굿 부인이 그런 이야기를 자꾸 하자 에벌린은 점점 더 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467p)


그런데 니니는 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쉬지 않고 들려줬던 걸까?



4

에벌린이 자신의 옆에 앉기를 기다렸다는 듯 시작되는 니니의 이야기는 두 페이지, 세 페이지를 너끈히 넘어갈 만큼 고속으로 내달린다. 에벌린의 대답이나 반응 같은 것을 기대하지 않고 저만의 이야기를 계속해 이어가는 니니의 태도는 혹시 그가 쉬지 않고 말해야 하는 병적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조심스럽게 의심의 눈을 떠 볼 정도다. 그러나 나는 이런 열렬한 말하기를 이미 목격한 적 있다. 나를 가장 어여뻐 하는 고령자들이 종종 내게 그런 모습을 보이곤 했다.


“판자가 덧대진 채로 스러져 가는” 스레드굿 가家의 저택에는 “창문마다 불이 환히 켜지고 웃음소리와 소란스러움이 가득하(17p)”던 시절이 남아있다. 외양이 어떻든 간에 “70여 년 전의 그 수많았던 밤들”은 그 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니니는 그 시절 그 순간들을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남편과 아들을 포함하여 그 시절에 함께 살았던 사람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고 없는 지금에도 그때의 일들을 그려보고, 그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생각해본다고. 그러면서 웃으며 덧붙이기를, “그것이 지금 내가 살아가는 힘이에요, 에벌린. 꿈, 내가 보낸 시절에 대한 꿈이죠.”(294p)


니니의 꿈같은 시절은 1920-30년대, 앨라배마주에 있던 휘슬스톱이라는 작은 마을에 있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가 어이없게 죽고 차별이 난무하고 전쟁도 일어나지만, 마을 사람들은 스레드굿 가家, 그중에서도 이지 스레드굿(과 그녀가 반려자와 함께 운영하는 카페)을 중심으로 저마다의 안정감과 즐거움을 꾸려나간다. 어릴 적부터 남달랐던 이지는 커서도 그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데, 괴짜나 고약한 인간 같은 평가를 즐기면서도 해결사나 사랑꾼이란 말에 더 충실한, 그야말로 반전의 매력을 뽐내는 마을의 스타라고 할 수 있었다. 장사꾼임에도 자신의 가게 앞에 나타난 사람이라면 모두 먹이려고 하는 이지 스레드굿. 그녀의 태도는 상대가 흑인이든 백인이든 상관없이 ‘안 돼’라고 말할 줄 모르는 스레드굿 가家 사람들을 대표하며, “누가 달라고만 하면 입고 있던 셔츠도 벗어 주었을(42p)” 것 같은 그들의 집에 객식구가 끊이지 않는 모습과 그때를 회상하며 너무도 그립다고 말하는 노인의 애틋한 얼굴을 동시에 떠올리게 한다.


동성애자, 흑인, 장애인, 떠돌이, 여성. 모두가 어떤 차별이나 편견도 없이 서로 어울리며 더 나은 즐거움을 위해 나아가는 세상. 니니 스레드굿이 그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려주었던 것은 그것이 자신이 남길 가장 큰 유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늙고 죽고 결국 사라지지만 그 자리에 있던 시간은 무심하게 핀 장미꽃처럼 여전히 아름답게 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누군가의 인생을, 이를테면 자신을 잃고 고통 속에 살던 에벌린 카우치의 인생을 바꿀 수도 있다고. 작가가 그런 의도로 이 책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소개하고 싶다.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한 이 책에 대해 오래도록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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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세상에 터진 웃음소리│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푸른약국 | 내가 소설인지    소설이 나인지 2020-06-02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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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 우연한 사랑, 필연적 죽음

박이서 등저
푸른약국 | 2020년 05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노련한 작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동시에 언젠가 이 날을 기다리며 마음에 꽁꽁 숨겨왔을 신인작가들의 아껴둔 문장을 읽는 재미가 쏠쏠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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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석이 부캐를 하나씩 늘릴 때마다 나는 묘하게 안도했다. 내 속엔 내가 너무 많다며 여러 이름으로 불리길 바라는 내가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정반대의 기분을 느끼기도 했다. 한 사람이 그 모든 역할을 다 하겠다니 진짜 별난 사람 아닌가.


김밥천국 옆에 붙은 작은 약국에선 책을 파는데 이번엔 아예 책을 내버렸다, 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내 반응도 비슷했다. 나는 좀 벙벙해져서 평소 입버릇처럼 하곤 했던 말을 되새겼다. 인간, 대체 뭘까. 사람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동물인 걸까.


‘푸른약국’의 약사님은 책을 만들었고, 푸른약국은 ‘푸른약국 출판사’가 되었다. 푸른약국 출판사가 야심차게 출간한 첫 책은 약국 내에 자리한 ‘아직 독립 못 한 서점(이하 아독방)’을 연상시키는 제목을 달았다.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


본체를 여실히 드러내는 이름 안에 ‘변화’의 느낌이 실려 있는 게 인상 깊었다. ‘독립 못 한’에서 ‘독립한’으로, 약국에서 태어난 서점이 이제는 저만의 지평을 열며 새롭게 달려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말하자면 ‘아독방의 2막’ 같은 느낌이랄까.


이 한 권의 책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2막이 되어주고 있는가는 애정하는 두 작가의 추천사를 읽을 때부터 알았다.


이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꽤 오랜 시간 내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나는 고백해야겠다. (……) ‘독자들의 책’은 그 자체로 무섭도록 놀라운 서사이자 세계다. 6p


한 번도 노면에 직접 닿은 적 없는 바퀴의 안쪽 면과 이 땅을 드디어 접촉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책을 쓰고 읽는 모든 사람이 연루된 상태가 아닐까. 놀랍게도 이 상태는 “한번 장착하면 거의 무한대로 쓸 수 있게” 된다고 한다. 9p



염승숙, 윤고은 작가의 추천을 나란히 받은 책 안에는 무려 열여섯 편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우연’, ‘사랑’, ‘죽음’이라는 키워드를 주제로 한 ‘아무거나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품들이었다.


“‘아’독방 ‘무’명 작가들 ‘거’리낌 없이 ‘나’를 표현하다”는 프로젝트 명이 단박에 납득이 될 정도로 정말이지 어디서도 보기 힘든, 거리낌 없는 이야기들이 순차적으로 자신의 매력을 뽐냈다. ‘죽음’만 하더라도 저마다 얼마나 다른 톤의 분위기를 보여주던지, 이쯤 되면 작가들끼리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자고 미리 짜기라도 한 건 아닌지 의심이 다 들 정도였다.


의심은 곧 놀라움으로 잊혔는데, 내가 지금 뭘 읽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순간이 수시로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연인이 죽어버려서 ‘뭐야, 진짜 죽은 거야?’는 말이 튀어나오는가 하면 서서히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에 나도 모르게 발가락이 오그라들기도 했다. 정부에서 권고 사망을 추진하는 시대가 오는가 하면 한 클럽에선 죽은 자들이 술잔을 부딪치고 춤을 췄다.


어떤 젊음은 늙음이 꿈이자 희망이었는데 어떤 늙은이는 바로 그 뒷면에서 꿈도 희망도 없이 집을 떠나고 있었다. 낯선 이와의 상상어린 대화 뒤에 속이 꽉 조이며 답답해지는 망상이 곧바로 따라붙던 걸 기억하면, 이 책은 구성 면에서도 남다른 센스를 발휘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치켜세우려고 하는 말이 아니고 실제로 “어떻게 이런 글을 쓰지?” 다음으로 내가 많이 한 말이 “어떻게 이 글 뒤에 이 글이 나와?”였다. 한 권의 책이 독자의 마음에 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디디며 나오는지를 알면서도 그 노력의 일부를 실감할 수 있던 순간은 특별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은 언제나 선물 같다. 그 이야기가 이제껏 만나보지 못한 맛인 동시에 조금도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를 끌고 간다면 그보다 더 신이 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제 막 독립한 이야기》는 기성작가와 신인작가, 심지어 처음 글을 쓰는 사람도 함께했다고 들었다. 노련한 작가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는 동시에 언젠가 이 날을 기다리며 마음에 꽁꽁 숨겨왔을 신인작가들의 아껴둔 문장을 읽는 재미가 쏠쏠한 책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이런 말을 하다 보니 윤고은 작가의 추천사가 눈 안에서 떠오른다. 아독방이라는 하나의 문 안으로 졸졸졸 걸어 들어가는 열여섯 편의 소설이. 문 밖으로 나온 소설들이 어깨를 맞댄 채 함께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도.


익명의 얼굴은 도저히 그려볼 수 없지만 소리는 들을 수 있다. 이제 막 세상에 터진 열여섯 개의 웃음소리가 “국경 열 개를 단숨에 넘”을 수 있을 듯 즐겁게 울려 퍼지는 것을. 한 목소리인 듯 어울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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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경각심에 대해 오래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내가 소설인지    소설이 나인지 2020-02-10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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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시녀 이야기 + 증언들 세트

마거릿 애트우드 저/김선형 역
황금가지 | 2020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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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억압이 싫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만, 하고 싶은 걸 할 수 없는 부자유의 상태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자유를 잃은 나는 아마 100%의 확률로 망가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들이 굉장한 행운 같고 항상 감사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고마운 걸 일상처럼 잊고 사는 여느 사람들같이 나도 그렇게 크고 특별하고 당연한 일에 대해선 무심하게 산다. 그러다 뒤통수를 맞는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강한 펀치의 소유자였다. 나는 이 경각심에 대해 오래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녀 이야기》는 그야말로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래픽 노블로 접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시각적 효과를 제외한다고 해서 여성을 걸어 다니는 자궁으로 보는 세계에 대한 충격이 줄어들 것 같지도 않다.


이 세계의 여성들은 ‘여성’과 ‘비여성’으로 구분된다. ‘비여성’들은 ‘콜로니’로 옮겨가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하거나 죽도록 노동을 한다. ‘여성’은 기능에 따라 구분되는데, 알아보기 쉽도록 정해진 색상의 옷만 착용한다. 푸른색은 ‘아내’, 초록색은 ‘하녀’란 식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빨간색을 입고 있다. “피의 색, 우리를 정의하는 색(19p)”. ‘시녀’다.


‘시녀’는 오로지 출산을 위해 존재한다. 그들은 자신을 소유한 남자와 그의 ‘아내’의 아이를 낳는다. 출산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 가 다른 남자의 소유가 된다. 그리고 또 출산을 노력한다. 출산을 아주 못하게 되어 ‘비여성’으로 분류되고 ‘콜로니’로 옮겨질 때까지 그 과정을 반복한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싶겠지만 그 말 같지도 않은 일이 계속해 일어난다.


이 일을 증언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오브프레드다. 오브프레드, ‘프레드의 (것)’이라는 뜻. 여성은 소속된 남자에 따라 수시로 이름이 바뀐다. 이 말도 안 되는 세계를 ‘길리어드’라고 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세계는 전쟁과 환경오염, 각종 성질환과 출산율 급감 등으로 혼란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태어났다.


《증언들》에서는 보다 더 확장된 시각에서 길리어드를 보여준다. 시녀에 한정되어 있던 렌즈가 시녀를 육성하는 ‘아주머니’와 사령관의 ‘딸’, 국경 밖의 소녀로 늘어나면서 나라 안팎은 물론 길리어드의 핵심부를 시대를 초월해 조망한다. 말하자면 길리어드의 역사서라고도 볼 수 있다.


독자의 질문에서 영감을 받았다던 이 책은 《시녀 이야기》를 읽는 동안 의문스러웠던 점들을 속 시원히 풀어주며, 기괴한 세계를 붕괴시키는 과정으로 독자의 애정과 바람과 기대 모두를 충족시킨다. ‘독자를 위한 종합선물세트’ 내지는 ‘고구마 다섯 개 먹은 후 마시는 사이다’ 정도로 비유할 수 있겠는데, 그만큼 만족감이 높은 후속작이라는 뜻이다.


소설이 진행될수록 밝혀지는 인물들 간의 관계는 폭죽 같고 길리어드 밖으로 나가려는 여성들의 움직임은 주먹을 불끈 쥐지 않고는 볼 수 없다. 국경 안과 밖에서, 아니 심지어는 같은 길리어드 내에서도 상충하는 가치관으로 서로 다르게 굳어져버린 여성들의 대화를 듣는 건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들이 뜻을 모으고 하나로 움직이기로 했을 때 주먹 쥐어있던 손이 저절로 깍지를 낀 것도 당연했다. 열렬한 응원의 마음을 가눌 수 없게 된다. 가자, 정상正常의 땅으로. 자유로, 인간적으로.


정상, 자유, 인간적. 시녀이야기 시리즈는 이런 말들이 얼마나 쉽게 지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비정상의 세계는 그토록 쉽게 건설되었으며 지극히 폭력적인 방식으로 군림함과 동시에 그 명분을 피지배인에게 돌린다. 이것은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며, 과거의 너희가 저지른 잘못을 수습하기 위함이고, 신의 뜻과 결코 다름이 없고.


여성을 끔찍하게 묘사한 포르노가 판을 치고 강간이 성행한다,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했다. 길리어드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내 뒤통수에선 강렬한 통증과 함께 불꽃이 번쩍 튀었다.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우리는 망가뜨리는 명분이 될 수 있다. 그건 내 목에 내 손으로 올가미를 채울 수 있으며 그 밧줄은 이미 손에 들린 건지도 모른다는 뜻과 같았다.


따라서 나는 애트우드를 환상이라고 읽지 않는다. 예언이라고도 읽지 않는다. 현실로 읽는다. 어영부영 해결하지 못하고 날을 넘기고 있는 문제들을 잡아채라는 메시지로 읽는다. 애트우드를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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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잘 닿는 곳에 두고, 두고두고 꺼내 읽겠다는 말밖에는 | 내가 소설인지    소설이 나인지 2020-01-19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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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올해의 책 리뷰 이벤트 참여

[도서]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조,임경선 공저
문학동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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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의 근간을 바꾸었고, 그 사실만으로도 '2019년 올해의 책'이라는 타이틀이 몹시 작아 보이는데 달리 덧붙여줄 말이 생각나지 않아 원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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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 주고받는 교환일기에 좋아하는 애 이름을 쓰기로 했을 때 무려 열다섯이 넘는 이름을 적어 넣던 나에게 단 하나의 무언가를 정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괴롭다. 하지만 ‘2019년 올해의 책’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는 놀랍게도 딱 한 권의 책만이 떠올랐다.



─────


2019년. 나는 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일도 쉼도 모두 집에서 해결하던 나에게 외출은 큰 이벤트였다. 한 달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또 세 번씩 서울에 가서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과 같은 책을 읽고 사고 보러 다녔다.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를 들으러 갔고 영화도 봤다. 얼결에 시작하게 된 독서모임은 그야말로 내 일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나는 내가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던 곳에 갔고 할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일들을 했다. 나의 세계는 맹렬한 속도로 팽창했고 나는 내가 훨씬 더 나은 사람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도착했다. 모든 걸 정체시킬 혼란의 시기에. 검은 점에 불과했던 그것은 내가 자람에 따라 덩달아 커졌다. 어느새 나를 한입에 삼킬 만큼 혼자 커 있었다.


처음엔 단지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나는 늘 긴장했고 그 상태를 온종일 유지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 버거운 일이었다. 모임 초반 때는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와 이틀 내리 누워만 있던 적도 있었다. 휴식이 절실했다. 외부활동에 취약한 나에겐 여러모로 단련시켜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하지만 곧 그보다 더 근원적인 곳에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내가 말을 잘 못해서 괴로운 거였다. 해야 할 말이 있는데 그걸 몰라서 답답하고 피하고 싶은 주제가 있는데 그걸 꼭 대면해야 해서 난처한 거였다. 한 주제에 관해서 사람들과 두세 시간씩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성향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럴싸하게 잘 떠들고 좋아하는 얘기가 나올 때면 흡사 아웃사이더가 랩을 하듯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활기찬 말을 토해냈지만 예민하다고 느껴지는 주제 앞에서는 애매하게 몸을 틀었다. 그럴 때마다 아는 게 없어서라는 핑계를 댔고 논쟁을 어려워한다고 자신을 두둔했다. 다툼을 어려워하는 건 사실이었다. 싸우던 때의 공기마저 고스란히 다 기억하며 사는 나는 회복되지 않는 인간이었다. 조금만 언성이 높아져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애초에 그 자체를 감당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싸움의 발화점마다 짓이겨 끄거나 내가 증발한다는 식의 극단적인 선택지를 품고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런 얘기를 주절주절 다 떠든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그날이 바로 내가 혼란에 머리부터 삼켜진 날이었다. 얘기를 하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구질구질하고 비겁하게 느껴져서 다음날 눈뜰 자격이나 있을까 싶었다. 가을이 깊어지던 때였다. 나는 벌써 폭설에 깔린 것만 같았다. 끙끙거리며 나란 인간에 대해서 하루도 빼먹지 않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하루하루씩 내가 더 싫어졌다. 생각할수록 분명해졌다. 몸과 말이 따로 노는 인간이 나였다. 세상 모든 일에 기여할 것처럼 온갖 다짐만 번지르르하게 프린트한 포장지가 바로 나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런 때 이 책을 만났다. 썩 좋은 만남은 아니었다.



처음 이 책의 이름을 들었을 때 나는 무심히 흘렸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의 이름이 아니었다. 북토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책을 구매한 후에도 난처한 마음은 계속됐다. 예나 지금이나 ‘여자’는 나에게 너무도 부담스럽고 막막한 단어였다. 당시는 페미니즘을 대하는 나의 여러 모습과 지난한 씨름을 벌이고 있던 터라서 더 그랬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머리가 쪼개질 것 같았다. 책 표지를 젖히는 것만으로도 끄응 하는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 책을 읽은 지 약 10분 후 나는 이런 글을 썼다.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요조와 임경선이 쓴 교환일기였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문자메시지와 텔레그램 등 어디서건 문자 대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두 사람이 이 대화로 차라리 영양가 있는 뭐라도 만들어보자며 나온 게 바로 이 책이었다.


교환일기를 쓰면 일상의 전반을 차지하는 대화도 좀 줄지 않을까 싶었는데 전혀 나아지는 게 없었다는 위트 섞인 대화 속에 꼭꼭 씹어 소화시키고 싶은 지침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구질구질한 나를 탈피하고 싶다고 머리를 쥐어짜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니 어떻게 하면 내가 좋아하는 나로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약 같은 책이었다. 임경선의 냉철하고 확고한 처방과 요조의 나른하면서도 예리한 처방을 번갈아 읽다 보면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조금 보이는 듯도 했다. 뜨끔하고 반성하고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담요 같은 문장 안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기운이 났고 더 많이 나를 돌아보고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나는 다른 것보다도 네가 그날 보고 느낀 바를 속으로 눌러두거나 외면하지 않고, 어떤 형식으로든 표현을 해줘서 고맙고 다행이라고 생각해. 64p


인생의 어떤 국면에 고통이 찾아온다고 해서 미리부터 체념하거나 지고 들어가기엔 우리의 젊음이, 인생이, 너무 아까운 것 같아. 고통이 동반되지 않는 기쁨에 깨작대느니 고통이 동반되더라도 끝내 원하는 걸 가지는 기쁨을 누리고 싶어. 96p


늘 깨어서 세상을 바로 보고 옳은 편에 서야 하지만, 옳은 편에 서 있으면서도 깨어 있어야 해요. 옳은 편에 섰다고 안심하면서 내가 뭘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옳은 편이라는 명분에 취해서 옳지 않은 편에 선 사람들보다 더 깜깜한 혐오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 나 자신을 의심하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117p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공정한 방식으로 소통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함께 일하면서 여러 가지 것들을 신뢰하게 될 거야. 124p


별생각 없던 북토크도 열렬한 마음으로 달려가게 됐다.



그곳에서 나는 혼란을 완전히 덜어낼 수 있었는데 역시나 두 작가의 조언 덕분이었다.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해서 내는 화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면 싸움도 안전하다는 요조 작가의 말과 시스템 탓만 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다며 불편한 게 있으면 솔직하게 표현을 하는 게 좋다는 경선 작가의 말이 내 마음에 단단한 주춧돌을 세웠다.


남과 하하 호호하기 위해 나를 죽이면 안 되며, 갈등보다는 화합과 공존이 좋다고 생각하기에 서로를 이해해주고 보듬어주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 그 위로 차곡차곡 쌓였다.


생각해보면 나는 무언가 허락을 기다렸던 것 같았다. 다툼도 괜찮다는, 더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는 그런 격려가.


다만 말이란 얼마든지 악해지고 악용될 수 있기에 더 많이 배워야 한다는 책임을 스스로 안 자고 다짐했다. 한 계절 내내 휘청거리던 두 다리가 어느 때보다 굳건하게 서 있는 걸 느꼈다.


인생은 곧 선택이고 선택의 순간에서 애매하게 몸을 틀거나 어물쩍 묻어가는 식의 삶은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분명하게 주장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슬퍼요, 내 감정에 충실해보기도 전에 마음의 일대를 엉금거리며 의심하고 있는 게. 그러다 식어버린 애초의 감정을 망연자실 바라보는 게. 249p


슬퍼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


좋은 책의 기준이란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었다. 나만 해도 여러 이유들로 내 마음의 별표 다섯 개를 붙인 책들이 적잖이 있었다. 그럼에도 올해의 책이란 말에 이 책 딱 한 권이 떠오른 건, 그 책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좋은 책의 기준’을 가장 잘 반영했기 때문일 터였다.


나를 주저앉히는 책, 생각하라고

나를 바꾸는 책, 더 나은 방향으로


매해 고만고만하게, 흡사 구렁이 담 넘어가듯 새해를 시작하던 내가 1월 1일을 몹시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2019년보다 더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런 용기를 주는 책이었다. 자신을 미워하지 않고 더 많이 말할 수 있게 하는. 똑똑하게 자신을 지키는 동시에 타인에게 다정할 수 있는. 이토록 ‘다정하고 감동적인 침범’이 가능한 한 세상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보였다. 나로서는 보기 드문 긍정의 에너지였다.


흔들리던 묵은해를 잡아주고 힘찬 새해를 열어주던 책이었다고 기록하고 싶었다.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은 나의 근간을 바꾸었고, 그 사실만으로도 '2019년 올해의 책'이라는 타이틀이 몹시 작아 보이는데 달리 덧붙여줄 말이 생각나지 않아 원통할 따름이었다. 손 잘 닿는 곳에 두고, 두고두고 꺼내 읽겠다는 말밖에는.





─────

북토크는 아직 독립 못 한 책방(일명 아독방, @a_dok_bang)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아(주)편(한)책(이야기)행사였다. 현장 사진은 원재님 작품(@sib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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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에서, 스티븐 킹 | 내가 소설인지    소설이 나인지 2019-12-2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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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고도에서

스티븐 킹 저
황금가지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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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레즈비언이 아니라 결혼한 레즈비언이기 때문에 안 된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가 싶다. 이익은 안 주고 이용만 하려드는 세상에 디어드리가 마음을 닫아버린 것도 이해가 된다. 하루에 0.5킬로그램씩 몸무게가 줄어드는 이상한 병에 걸린 스콧은 그녀의 마음을 열기 위해 열심히 헤딩한다. 《고도에서》는 그들 모두를 품에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하는 소설이다. “마음 단단히 먹어요, 덩치 큰 양반아. 지금 포옹을 할 참이니까.”(154p) 세상에서 가장 다정하게 화해하는 법을 알려주는 소설.


이상한 병에 걸린 스콧이 왜 디어드리와 매콤부부의 일에 집착했는지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그는 하루에 0.5킬로그램 이상씩 중력을 잃었고 그를 지구에 묶어둘 체중이 사라진다는 건 썩 반갑지 못한 결말을 연상시킨다. 원치 않게 고도가 달라진 그는 적어도 한 가지는 바로 잡고 싶었고 그것이 바로 디어드리 부부의 일이었다. 하지만 독자는 안다. 그 일은 구태여 스콧처럼 이상한 병에 걸리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중력을 잃지 않아도 우리는 고도를 바꿔 볼 수 있다. 그만한 시력을 지녔다. 스티븐 킹의 조언을 기억하며 더 나은 길로 나아가자.


“더 많은 걸 보고, 더 많은 걸 품어요. 지금보다 더 나은 무언가가 될 수 있어요.”(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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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어느 날, 조지 실버 | 내가 소설인지    소설이 나인지 2019-12-17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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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12월의 어느 날

조지 실버 저/이재경 역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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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나는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는다. 오래 전, 좋아하던 친구가 전화통화때마다 동일한 가사의 노래를 불러주던 경험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그건 “당신이 상상할 수 없다고 세상에 없는 것으로 만들지는 말아줘”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187p) 라는, 마음에 문신처럼 새겨둔 문장을 구태여 곱씹어보지 않아도 허용되는 일 중 하나였다. 내 안에 남아있는 낭만, 마른 낙엽처럼 바스러져 형태를 잃는 감정들 속에서도 끝내 촉촉한 손톱 크기의 불가침 구역.


그 불가침 구역이 모처럼 자극을 받았다. 버스에 타고 있던 로리가 정류장에 앉아 있던 남자를 보고 한눈에 반한 순간이었다. 그 남자, 잭 역시 그녀를 봤다. 로리와 비슷한 눈빛이었다. 오 마이 갓. 죽도록 피곤하다로 정리되는 로리의 우중충한 일상이 갑자기 뒤바뀌는 것 같았다. 조명이 차례로 들어오고 뒤늦게 등장한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능청스럽게 손을 흔든다. 사람들이 밝은 표정으로 서로의 어깨를 스쳐가고 랄랄라 캐롤이 울려 퍼지면, 아아. 이토록 반짝반짝한 크리스마스 시즌!


아쉽게도 두 사람은 버스에서 내려야 할, 혹은 올라타야 할 타이밍을 놓쳐서 헤어지고 말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우리의 주인공 로리는 무려 1년이나 그 ‘버스 보이’를 찾아 헤매는 의지의 주인공이니까. 진짜 끝내주는 “로맨스형 인간(33p)”이 주인공인 로맨스 소설이라니 진짜 끝내준다!


이토록 격양된 어조로 로리를 소개한 것은 사실 다 예방 주사가 필요해서다. 그렇다고 로리의 매력이 과장됐다는 건 아니지만, 첫눈에 반한 운명의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단짝 친구의 남친이 되어 나타나는 건 별로 듣고 싶은 얘기가 아닐 테다. 나처럼 주인공에게 몰입되어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식의 독서를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왜 그런 문제를 생각해봐야 하는가?


하지만 사랑이란 복잡하고 운명은 장난을 좋아한다니,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다는 CM송을 듣고 자란 사람이 가진 이해심으로 소설의 마지막 문장까지 달렸다. 사실 문장이 꽤 취향이어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꽤 재미있어서 생각보다도 빨리 읽었다. 만남이 크게 꼬여서 그렇지 그 안에서도 최선을 다해 관계를 지켜가려는 인물들의 노력이 가상해보였다. 간혹 우리의 주인공 중 한쪽이 “속 좁은 또라이”처럼 굴어서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거야 사랑이 부리는 신경질 나는 요술 중 하나이고. 이렇게 듣기만 해도 피곤한 관계 설정만 아니라면 작가의 다음 작품도 읽고 싶을 정도였다.


2008년에서 2017년. 근 10년의 세월을 두고 가까워졌다 멀어지며 저마다의 자리를 찾아가는 인물들을 보면 삶은 곧 사랑이라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네 자리는 어딘가가 아니야. 네 자리는 누군가야(479p)”라는 세라의 말이 유독 마음에 남는 까닭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해 헤맸다. 단순히 소속감을 주는 자리가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자리, 몸을 앉히면 마음도 따라 눕는 그런 자리를.


헤매는 자가 여전한 한 로맨스가 멈추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이 겨울에 딱 어울리는 캐롤 같은 소설이었다.


─────

자, 지금 두 가지 선택이 있어요. 되든 안 되든 고백하든가, 너무 늦을 때까지 기다리든가. 그렇게 꾸물대는 동안 다른 사람이 먼저 그 여자분한테 사랑한다고 말하겠죠. 그럼 기분이 어떨까요? 487p


나는 역겨웠고, 너는 멋졌어. 내가 나를 망각했을 때 네가 다시 기억하게 해줬어. 그런데도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이 없지. 지금 하고 싶어. 고마워, 너는 인생을 쿵쿵대지 않고 걸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은 채우기 힘든 깊은 발자국을 남기는 사람이야. 3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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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 내가 소설인지    소설이 나인지 2019-11-08 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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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시녀 이야기

마거릿 애트우드 글/르네 놀트 그림/장성주 역
황금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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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너무 충격적이다. 읽고도 믿기지 않아서 첫 장만 다섯 번을 읽었다. 숨을 멈추고 느리게, 개미의 등을 훑듯 꼼꼼하게 그림을 살폈다. 소름이 배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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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너무 충격적이다. 읽고도 믿기지 않아서 첫 장만 다섯 번을 읽었다. 숨을 멈추고 느리게, 개미의 등을 훑듯 꼼꼼하게 그림을 살폈다. 소름이 배로 늘어났다.


“이러다가 진짜 어디까지 가려고 그럴까”와 “결국 다 망하겠네”라는 말이 버릇인 비관주의자로서 디스토피아라는 장르는 낯설지 않았다. 어쩐지 퍽 잘 아는 사이처럼 느껴질 때가 외려 많았다. 그래서 더 접해보지 못했던 건지도 몰랐다. 아는 얘기라고 생각해서.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고 자만해서.


다 틀려먹었다. 나는 여성이 ‘오직 자궁이라는 생식기관을 가진 도구’ 취급받는 세계를 몰랐다. 가진 모든 것을 강탈당하고 최소한의 자유마저 빼앗긴 통제된 삶을,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고 언제든 숙청당할 수 있는 공포의 일상을. 그런 것에 익숙해지는 인생을. 평범했던 지난날들이 불가능한 꿈처럼 아득해지는 감각을. 외로움과 고독, 그리움과 위기, 죽음의 냄새가 파도쳐오는 밤을.


알지 못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내 상상으론 닿지도 않는 곳이었다. 일찍이 마거릿 애트우드의 이름을 알게 된 걸 비로소 납득했다. 이렇게 충격적인 걸 봤는데 다들 가만있을 리가 없었다. 나 역시 한참 더 얘기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의 다른 작품들을 줄줄이 결제하며.


소설을 구매하는 차에 그래픽 노블을 받게 된 터라 어느 쪽을 먼저 읽을지 고민이 있었다. 결국 그래픽 노블을 먼저 읽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론 좋은 선택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는 두루뭉술하게 떠올려봤을 이미지들이 더할 수 없이 강렬하게 각인되었다.


화려하고도 다채로운 색들이 변주하며 우울하고 몽환적인 장면들을 완성해갔다. 무엇보다 연출력이 기발해서 그림만 보고도 등줄기가 오싹오싹해지곤 했다. 애트우드를 시작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가장 강렬한 문을 통해 디스토피아 세계에 들어선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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