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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럽고 은은한 북향의 빛 같은 소설, 《빛의 현관》 by 요코야마 히데오 | 기본 카테고리 2020-11-17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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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빛의 현관

요코야마 히데오 저/최고은 역
시공사 | 2020년 10월

내용     편집/구성     구매하기

위 상품을 구매하면, 리뷰등록자에게 상품판매대금의 3%가 적립됩니다. (상품당 최대 적립금액 1,000원) 애드온 2 안내


매년 1월 일본 서점대상 후보작 10편이 발표된다. 아마도 일어 원서 좀 읽는다는 분들, 번역/출판 종사자들은 많은 관심을 가지고 기다리는 시기일 것이다. 나도 다르지 않아서 가장 기다리는 시기이다. 올해 초 발표된 작품들 중 단연 이 작품이 눈에 띄었다. 미스터리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어서 대상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꽤 높은 순위를 차지할 것으로 기대했다. 일본 독자들의 평은 대부분 대단히 우호적이었지만, 반면 어렵다는 등의 반응도 있어서 더욱 궁금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소설은 시종 화사하고 따사로운 남향의 빛과는 달리, 원제인 북향의 빛(North light)와 같이 냉기를 잃지 않지만 부드럽고 은은한 겨울 햇살 같은 느낌을 준다. 저자의 다른 대표작인 <64>가 대단한 호평을 얻은 반면, 장광설이 견디기 힘들었다는 평도 적지 않았다. 나 역시 후자였다. 그러나 <64>로 저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예방접종'을 했기에 이 책을 접할 때는 숨막히게 전개되는 미스터리보다는 저자의 호흡에 맞춰 산책하는 기분으로 읽었다.



거품 경제기의 화려한 날을 보내고 터져버린 풍선처럼 삶의 의욕을 잃고 아내와도 이혼한 건축사 아오세에게 운명의 계시처럼 찾아온 의뢰인의 말.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어주세요." 예전의 열정과 영감을 발휘하여 북향의 빛을 최대한 살려 지은 Y 주택. Y 주택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것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아 헤매듯이 의뢰인을 찾아 나선다. 그러나 역시 Y 주택은 빈집이었다. 그리고 2층에 빛이 드는 창문 앞에 덩그라니 놓인 세월의 흔적이 담긴 낡았으나 풍격 있는 목제 의자 하나.


아오세의 동료이자 현재 일하는 건축사무소의 대표인 오카지마는 그 의자를 본 적이 있다며 근대 건축의 거장이자 일본에서 수년간 살았던 적이 있는 브루노 타우트가 일본에 거주할 때 만든 의자 같다는 것이다. 이 의자가 실마리가 되어 의자의 근원을 찾으며 의뢰인을 추적함과 동시에 브루노 타우트의 이야기가 전개되고 오카지마가 혼신의 힘을 다해 따낸 미술관 공모전의 이야기, 아오세의 원가족의 삶과 얽힌 과거 이야기, 마음 속에 아직 사랑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아내와 딸에 얽힌 현재 이야기 등이 복잡다단하게 얽혀 진행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64>에서 그랬듯이 아오세의 내면의 독백이다.



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에 살아야 하는가?

대학 시절, 친하게 지냈던 언니는 고위직 외교관인 아버지를 두어 일본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소녀 시절을 보내고 그외에도 수많은 나라를 거쳐 대학을 한국에서 다녔다. 언니는 그랬다. 자기는 고향이 '부모님 계신 곳'이라고 생각한다고. 유년시절, 댐 건설의 중요한 인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 떠돌았던 아오세는 집이라는 것에 누구보다 큰 의미를 두었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당신이 살고 싶은 집을 지으라는 해괴한 의뢰인의 요청사항. Y 주택은 아오세의 분신, 아오세가 자신의 자아와 동일시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있을 곳은 아직 애정이 남아 있는 아내와 딸이 있는 곳이었으며 그의 아내 역시 그 사실을 깨닫는다. 콘크리트든, 목조든 어찌 보면 물질에 불과한 것이 집이다. 우리가 있을 곳은 애정이 머무는 곳이 아닐까? 우리가 있을 곳이 어디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건축과 미술, 그 아름다움

이 책의 원서를 읽은 지인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책 뒤의 참고도서를 보면 저자의 집필 기간 7년도 짧게 느껴질 정도이다. 두 달에 한 권씩 찍어나오는 책들도 있는데 그야말로 정성이 깃든 장인의 걸작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야기의 중요한 한 축을 담당하는 브루노 타우트에 관해 찾아봤는데 유리 파빌리온(Glass Pavillion)으로 유명한 근대 건축가이자 도시계획자였다고 한다. 그는 애인과 일본으로 망명와 있는 동안은 건축 활동보다는 공예 등에 주력했으며 일본의 전통문화에 심취했던 것 같다. 브루노 타우트의 의자라는 중요한 실마리를 통해 이 책의 예술성을 높이 끌어올렸던 것 같다. 그리고 나카지마 히데토시 주연으로 영화로 제작된다고 하는데 Y 주택의 모습을 어떻게 구현해냈을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어떻게 채광창을 냈을지, 북향의 빛을 어떻게 끌어들였을지 궁금하다.


속죄와 용서, 회복과 재생의 이야기

아무리 분위기가 좋아도 서사가 맥이 빠진다면, 재미가 없다면 소용이 없었을 텐데 역시 스토리텔링의 대가이다. 의뢰인이 그런 의뢰를 할 수밖에 없었던 아오세의 과거의 이야기, 속죄와 용서가 일어난다. 그러면서 Y 주택을 매개로 아오세는 자신의 현재와 화해하고 가족을 회복하고 재생하려는 시도한다. 다시금 잃어버린 열정과 자신감을 되찾는다. 그것은 허황되고 텅 빈 껍데기 같았던 거품 경제기의 것과는 다른 영글고 단단한 것이었다. 부드럽고 은은하게 들어오는 북향의 빛처럼 그의 인생에도 빛이 서서히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동료였던 오카지마의 죽음은 마음이 몹시도 아팠지만 그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그의 설계도면을 가지고 오카지마의 필생의 꿈이었던 공모에 그대로 진출하기로 한다.


이 책의 편집자 후기도 읽어봤는데 역시 하나하나 꼼꼼히 작업했다고 한다. 읽으면서 느꼈다. 모든 과정에 정성이 깃들어 있음이. 벌써 2쇄를 찍었다고 하니 정말 축하할 만한 일이다.


이 책은 시각적 이미지가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영화가 나오면 영화를 보고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다. 7년간 썼는데 한번 휙 읽고 놔두긴 너무 아깝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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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고 아름다운 뇌 속의 세계, 《톱 나이프》 by 하야시 고지 | 기본 카테고리 2020-11-15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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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톱 나이프

하야시 고지 저/김현화 역
오렌지디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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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인 오늘날에도 사람의 뇌는

인류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지의 영역이다.

50억 년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자 신경세포 1천 억 개가 모인,

우주가 만들어낸 가장 복잡한 창조물.

(6쪽)


아름답고 공들여 만든 느낌이 전해지는 양장본의 책이 얼마나 맘에 드는지 계속 손에 붙들고 있었다. 의료 소설에 관한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및 일본 배우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배우인 아마미 유키의 오랜만의 드라마 컴백을 기대했던 작품의 원작이어서 기대가 무척 컸다. (이 작품 원서 출간이 2019년 12월, 드라마 시작이 2020년 1월이었다.) 바빠서 드라마는 보지 못했지만, 캐스팅된 배우들의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여 네 명의 천재 신경외과 의사들의 모습이 책을 읽어가며 머릿속에 3차원 입체 영상으로 재생되었다.




☆워크 라이프 밸런스에 실패한 돌싱 50세 여의사 미야마.

- 일을 놓을 수 없어 딸의 손을 놓아버렸지만, 십대 소녀가 된 딸과의 시간을 보내며 내면의 모성을 발견하지만 딸을 위한 최선이라고 생각하여 전남편의 가정으로 딸을 보낸다.


☆일본 최초 '톱나이프' 칭호를 받은 화려한 싱글 53세 구로이와.

- 어려서 가정 학대를 받는 외로웠던 소년이 아직 그 속에 살아 있다.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난 친자라는 다섯 살짜리 남자아이 다모쓰와의 일주일을 통해 어린 날의 자신과 화해한다.


☆재능을 끊임없이 고민하는 젊은 천재 34세 니시고오리.

- 엘리트 의사 집안에서 끊임없이 폭주 기관자처럼 자신을 다그쳐 젊은 천재라는 명성을 얻었지만 늘 경직되어 있고 관계 맺기에 서툰 덜 큰 어른이다. 서번트 증후군에 걸린 환자와의 교감을 통해 조금은 마음의 긴장을 내려놓는다.


☆평생 1등만 했지만 공감능력이 턱없이 부족한 신출내기 26세 여의사 고즈쿠에.

- 사랑해 본 적이 있느냐, 라는 사람 좋은 외과 부장의 말 한 마디에 피리부는 사나이를 따라 갔던 아이들처럼 신경외과로 왔지만, 실수투성이로 하루도 무사히 넘어가는 날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왼팔과 사랑에 빠진 70대 남성 환자와 그의 아내를 보며 조금은 '사람의 마음'에 다가간다.




천재 신경외과 의사들의 삶 속의 아픔, 트라우마와 함께 이들이 만나는 환자들과의 공명이 가슴 찡하게 그려진다.


'왼팔과 사랑에 빠진 남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어 왼손잡이 천재 신경외과 의사 이야기가 나오나 보다 했는데, 읽고 나니 신경외과 의사이자 작가인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와 같은 맥락의 뇌 질환에서 비롯된 망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뇌의 이상으로 나타나는 미스터리한 증상들이 무척 흥미로웠다. 한쪽 반을 인식하지 못한다거나 자신의 엄마를 외계인으로 인식하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음악 전체를 머릿속에 재현해내는 서번트 증후군을 앓기도 하고, 자신의 왼팔을 사랑하기도 하는 등 매우 신비로운 증상으로 인해 미지의 영역인 뇌에 관한 호기심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그야말로 0.1밀리리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며 지금도 전신을 지탱하는 뇌가 고맙다고 해야 하나, 조물주의 능력에 경외심을 품게 된다고 해야 하나?


천재지만 밉상인 구로이와가 친자인 줄 알았던 다섯 살짜리 꼬마 다모쓰와 보낸 자상한 시간, 그리고 구로이와를 지켜주기 위해 자신이 아끼던 열 개의 장난감을 구로이와의 집 곳곳에 남겨두고 떠난 다모쓰의 모습에 눈물이 왈칵했다.


흥미로운 뇌의 이야기, 게다가 캐릭터가 살아 있고 에피소드 하나하나에 깊은 감동이 있어서 읽으며 행복했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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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진진한 한국형 디스토피아 영어덜트 문학, 《스노볼》 by 박소영 | 기본 카테고리 2020-10-3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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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스노볼

박소영 저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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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1회 창비×카카오페이지 영어덜트 장르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스포 없음)


전쟁문명이 끝난 후, 지구는 영하 41도의 혹한의 세계가 되었다. 돔 형태의 따뜻한 스노볼을 중심으로 이 스노볼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영하 41도의 추위에 떨며 발전소에서 전기를 만드는 일을 해야 하는 바깥사람들이 있다. 동경의 대상인 스노볼에서의 삶은 전부 TV 중계가 된다. 그들은 '액터'이다. 그 액터들의 삶을 보며 바깥사람들은 그들을 동경한다. 그리고 바깥사람들은 스노볼의 일원이 되기 위해 액터 스쿨을 다녀 오디션을 본다. 우리의 주인공 십대 소녀 전초밤은 액터가 아닌 디렉터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오디션에 도전 중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전설의 디렉터인 차설이 그녀를 찾아온다. 스노볼 최고의 연예인 고해리가 갑자기 죽었다며 2년간 대역을 하라는 것이었다. 가족까지 돌봐주겠다는 말과 고해리에 대한 동경으로 전초밤은 스노볼에 입성하는데, 거기서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음모와 추악한 진실이 밝혀진다.


디스토피아 영어덜트 소설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한국인의 정과 의리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디스토피아 영어덜트 소설의 공식이란 암울한 미래, 희소해진 자원을 독점한 권력자들과 인간다운 삶을 잃은 피권력자들, 그들에게 변화를 가져오는 몇 명의 똘똘한 10대 소년소녀, 그리고 인간성을 잃지 않고 그들에게 조력하는 소수의 건전한 어른, 그들의 반란, 그 속에서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흐름이랄까? 원류라고 할 수 있는 로이스 로리의 <기억전달자> 4권 시리즈에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공식이라고 보인다.


이런 책을 읽으며 어떤 장치가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메타포를 찾는 것이 다소 피곤할 때가 있지만, 이 책은 무척 편하게 47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을 순식간에 읽어내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가 동경하고 선망했던 것들이 한낱 허상에 불과할 수도 있고, 그것이 반드시 행복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진정한 내 모습으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메시지도 읽어낼 수 있었다.


영어덜트 대상인데, 10대도 20대도 아닌 나는 이 등장인물 중 누구에 가까울까 생각해 보았다. 영어덜트 소설을 무척 좋아한다. 어설프고 부족하면서도 동료와 함께 좌충우돌하면서 우정을 쌓고 사건이 대단원에 이를 무력 이전보다 한 뼘 성장해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흐뭇함에 여전히 자주 읽는 장르이다.


우리나라 영어덜트 문학의 새 지평이 열린 듯하여 뿌듯하고 독자가 될 수 있어 기쁘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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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덕업일치, 너무나 부러운 방랑가, 『방랑가 마하의 어슬렁여행』 by 하라다 마하 | 기본 카테고리 2020-10-06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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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방랑가 마하의 어슬렁여행

하라다 마하 저/최윤영 역
지금이책 | 2020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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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다 마하 작가는 소설로만 접하다가 이렇게 에세이로 접하니 말할 수 없이 감회가 새롭다. 소설로는 더없이 진지하고 여성의 성장을 응원하고 큐레이터이자 미술 컨설턴트로서의 전문적인 '완전 멋진' 면모를 엿볼 수 있었는데 이토록 발랄하고 통통 튀며 엉뚱하다니 얼마나 박장대소하며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는지 모른다. 이게 진정한 에세이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게다가 평소에 애정이 있던 작가이기에 더더욱 몰입하여 읽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과 확산의 반복으로 모두가 폐색감과 짜증이 머리 끝까지 찬 이 시점에 하라다 마하 작가의 여행 에세이가 적시에 나와서 큰 기쁨을 주었다. 모두들 대리 체험 및 대리 만족의 극치를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방랑가! 편집자 혹은 역자가 방랑'자'가 아닌 방랑'가'라고 이름 붙인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저 헤매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방랑'이라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헤매는 사람, 어떤 의미에서는 직업인 같은 뉘앙스까지 풍기기 때문일 것이라고 심중을 헤야려 본다. (우리나라에서는 전문 용어(^^; ㅋㅋ)로 '역마살'이라고 한다고 하라다 마하 작가님께 알려드리고 싶다.)


각설하고, 너무너무 부러웠다. 제목은 '방랑가 마하의 어슬렁여행'이지만 실제로 저자의 여행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제목에서 표방하고 있는 '어슬렁여행'이다. 대학 동창이자 여행 친구인 지린 씨와 함께 "다음에는 ~ 에 가볼까?" 이렇게 방랑이 기획되고 가방 챙겨 떠나서 어슬렁어슬렁 맛있는 것을 찾아, 멋진 예술품을 찾아 거니는 여행 본위의 여행이다. 인생에 이런 친구가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고 이득인 것 같다.(나도 있다, 이런 친구!!)


둘째, 의뢰받은 일과 통합된 겸사겸사 여행이다. 40줄까지 미술 컨설턴트로 구찌로 빼입고 또각또각 하이힐 신고 멋지게 세계를 활보하며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이후 프리를 선언한 후, 멋지게 소설가로 데뷔한다. 이후, 소설가로서도 엄청난 성공을 거머쥔다. 에세이나 잡지 기사 등의 의뢰가 들어오면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여행과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다니 진정한 성덕이요, 덕업일치로다.


셋째, 당신의 책 집필을 위한 취재여행이다. 고 장영희 교수님의 아버지 고 장왕록 교수님은 정성들인 번역과 그렇지 않은 번역은 독자가 알아본다고 하셨기에 장영희 교수님은 조사를 게을리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하라다 마하 님 역시 엄청난 조사와 취재를 하신다고 했다. 너무 존경스럽다. 개인적으로는 좋아하지 않으셨다는 반 고흐에 관한 책 (아마도 2018년 서점대상 4위 <흔들릴지언정 가라앉지 않는다(국내 미출간)인 듯>을 쓰시기 위해 반 고흐의 삶의 여정을 그대로 밟아보는 여행까지 하셨다고 했다. 일견 광인 같은 반 고흐의 감정선을 이해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이 세 가지가 모두 부럽고 부럽다. 함께 여행할 수 있는 '시간'과 '금전'의 여유가 맞고, '마음'이 맞는 여행 친구가 있다는 것도 부러워 죽겠고, 일이 여행이 되는 것도 부럽고 이 책을 이렇게 멋진 문체로 쓸 수 있는 재능도 부럽고... 이 책을 읽고 하라다 마하 작가님이 더욱 좋아졌다.


이전에 번역 기획서로 공을 들였던 작품은 끝내 성사되지 못할 모양이지만 앞으로 또 멋진 작품이 나온다면 언젠가는 하라다 마하 작가님 작품의 역자가 되고 싶다는 높고 높은 포부를 키워본다.


읽기는 재미있고 재치 넘치지만 결코 번역하기는 쉽지 않았을 작품인데 말맛과 글맛을 잘 살려 멋지게 번역해 주신 역자님 성함 꼭 기억해두겠다. 출간해 주신 편집자님께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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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전, 가인에 공명하다, 《만요슈 선집》 by 사이토 모키치 | 기본 카테고리 2020-09-30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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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만요슈 선집

사이토 모키치 저/김수희 역
AK(에이케이 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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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요슈>는 <만엽집>이라고도 불리는 일본 최고(最古)의 가집 즉 노래 묶음이다. 시가문학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고전도 잘 읽지 않고 학창시절 배운 게 다인데 일본의 고전문학을 꼭 읽어봐야지 생각했던 것은 번역할 때 은근히 본문에 많이 인용된다. <만엽집>뿐만 아니라, <고금와카집>, 바쇼나 잇세이의 하이쿠도 그렇다.


그래서 시간 날 때 미리 공부해 두려고 하이쿠 관련 책은 두 권 정도 샀고 이번에는 <만요슈>를 읽어보았다. 사실 만요슈는 그 수가 방대하여 전체를 다 읽을 수 없는데 가장 대표적인 시가를 선별하여 수록하고 자세하게 해설해주어 소장가치가 매우 높은 책이다. 한번에 읽기보다는 몇 수씩, 하루에 한두 수씩 음미하며 읽어도 좋을 만하다.


드넓은 바다 웅대한 구름 위로 석양 비치니

오늘 밤 뜨는 달은 분명 청명하리니


오늘처럼 달이 차 올라 대보름달을 향해 가는 한가위에 읽기 좋은 시 같다. 자연을 바라보며 탄복하는 시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동쪽 들녘에 동트는 새벽 햇살 환히 빛나서

뒤돌아 바라보니 서쪽에 달 기우네


석양을 보는 일은 많아도 아침에 해가 뜰 때 한켠에서 지는 달을 바라보는 일은 여간 부지런한 사람 아니면 발견하기 힘든 자연의 풍경 같다.


가을 들녘에 이삭 위를 감도는 아침 안개여

내 사랑도 어딘가로 사라질 수 있으리오


천 년 전의 사람들도 이렇게 애절한 사랑을 했던 걸까. 사라질 수 없는 사랑을 이렇게 노래한 가인의 안타까움과 애절한 사랑이 느껴진다.


둘이 넘어도 넘어가기 힘겨울 이 가을 산을

어찌하여 그대는 홀로 넘고 있을까


이 시처럼 표면적으로는 누군가를 향한 염려, 애정을 그리고 있지만 내면적으로는 모반 즉, 반역의 실패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


마음에 다가왔던 몇 편을 소개해 봤다. '하이쿠'는 읽으면서 그 정도의 고어에는 적응하며 공부해 볼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만요슈>는 솔직히 좀 어려웠던 것 같다. 해석을 음미하며 공부보다는 감상에 초점을 맞췄더니 마음이 편안했다. 그리고 시를 읊고 싶은 것은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시를 잘 보존해 천 년 전 사람의 마음에 공명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예전에 당시(한시)를 중국 교포인 이웃님과 함께 나눴던 적이 있다. 한참 독학으로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했던 시기여서 포부 넘치게 했었고 내가 읽어서 녹음해서 보내면 이웃님이 발음까지 짚어주셨다. 새로운 언어 배운다고 모든 에너지를 쏟지 말고 원래 하던 언어나 잘하자 싶어서 인생의 우선 순위가 아니었던 중국어는 내려놨지만 국가와 시대를 초월하는 '시'라는 것이 참 좋았다.


<만요슈>는 곁에 두고 하이쿠, 고금와카집 등과 함께 하나씩 다시 음미하며 읽고 싶다. 깊어가는 가을과 겨울에 특히 읽기 좋은 시가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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