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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화 | 마담 블루 2011-04-08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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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안경하고 헤어스타일만 바꾸면 됐어요. 사람들은 구분하지 못했다. 그녀가 그녀인 줄 알았다. 용기를 얻은 그녀는 거침없이 그녀로 변했고 며칠 안 돼 완벽한 그녀가 됐다. 꼭 제 사진 같잖아요. 신기했어요. 어쩜 이렇게 닮았을까. 제이는 그때의 신기했던 기억을 얼굴에 떠올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제이와 제니퍼는 쌍둥이라 해도 믿었을 거다. 얼굴 생김새는 판박이고 키도, 덩치도, 몸매도 꼭 닮았다. 서양 사람들의 눈에 이 두 한국 여성을 구분하기란 참 어려웠을 거다.

 

닮으니까 금세 친해졌어요. 제니퍼가 나보다 두 살 많아요. 언니라고 부르면서 따랐죠. 친자매처럼 지냈어요. 그때만 해도 나는 진주라는 이름을 썼고요. 한국 사람이라면 분명히 구분했을 거다. 두 살 어린 진주의 눈가에 쌓인 그늘을 알아차렸을 거다. 저는 짧은 머리고 제니퍼는 길었어요. 헤어스타일로 구분한 거죠. 어느 날부터 제니퍼가 안경을 쓰면서는 헷갈릴 게 없었죠. 제니퍼가 죽은 뒤, 머리카락을 기르고 안경을 쓰고 나갔어요. 다들 저를 제니퍼로 알더라고요.

 

집에서 도망친 진주는 단숨에 서쪽 해안 도시에 도착했다. 태평양의 파란 바람과 황홀한 태양에 진주는 환호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딱 하루만 그랬다. 배고픔과 빈 주머니의 일상이 시작됐다. 어떤 일이든 닥치는 대로 해야 했고, 닥치고 주는 대로 받아야 했다. 힘들거나 괴로울 건 없었다. 살아 있는 걸로 족했다. 포르노도 찍었다. 술집 종업원으로 일하다가 포르노 감독을 만났다. 땜빵을 찾던 포르노 감독은 진주의 얼굴과 몸이 마음에 들었다.

 

세 편을 찍었다. 감독은 더 하자고 꼬드겼지만 한 줌의 미련도 없었다. 진주는 자신의 몸에 자부심이 대단했다. 벗은 몸을 보여주는 건 두렵지 않았다. 단지 그 길로 나섰다가는 그 길에서 썩을 것만 같았다. 썩기엔 아직 젊었다. 포르노는 누드모델로 연결됐다. 옆 집 사는 여자가 포르노 배우라니. 그 지역 최고 미술대학을 다니던 대학생이 그녀를 알아보고, 누드모델로 섭외했다. 멀리 태평양과 멋진 다리가 내려다보이는 학교. 19세기에 지어진 스페인 스타일의 건물 곳곳엔 학생들의 빛나는 창의력이 생생히 살아 있다. 학교는 작은 편이지만 실력은 언제나 시대를 앞서갔다. 누드모델을 하러가서 제니퍼를 만났다. 서로의 얼굴을 보고 둘 다 깜짝 놀랐다. 주위 학생들이 먼저 놀라 웅성웅성거렸다.

 

4년 동안 함께 지냈어요. 제니퍼의 집에서요. 제니퍼는 생후 3개월 때 입양됐다. 열여섯 살짜리 여자아이의 아이였다. 갤러리를 운영하던 미국인 부부에게 입양됐다. 화가 아빠와 큐레이터 엄마. 제니퍼는 자연스레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고, 천생연분인지 타고난 솜씨도 있었다. 열두 살 되던 해 부모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적지 않은 돈과 갤러리를 물려받았다. 늘 쓸쓸하던 제니퍼는 자신과 똑 닮은 진주를 보고 가족이 되자고 말했다.

 

제니퍼는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했어요. 약을 끼고 살았죠. 제가 수발을 들었죠. 진주는 집안일을 하고, 수시로 갤러리 일도 도왔다. 누드모델도 열심히 해서 돈도 모았다. 어렵지 않게 미술 쪽에 눈을 뜨게 됐다. 시간이 나면 캔버스에 실력을 발휘했다. 진주의 솜씨가 보통이 아니란 걸 제니퍼가 알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론과 실기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했다. 학교에도 자주 데리고 다녔고, 교수를 설득해 청강도 시켰다. 진주는 제니퍼의 친구들과 어울렸고, 몇몇 교수는 진주의 솜씨에 눈독을 들였다.

 

아름다운 시절이었어요, 지금도 학교가 눈에 선해요. 학교에 가면 밤늦게까지 머물렀어요. 여기저기 만져도 보고, 냄새도 맡고, 학생들 작업하는 거 몰래 훔쳐도 보고요. 내가 미대에 있는 거예요. 미술을 공부하는 거예요. 방법은 달라도 엄마가 바라던 삶이잖아요. 내가 무엇을 어떻게 그리던 뭐라 하는 사람 아무도 없었어요. 제니퍼는 진주에게 큐레이터를 권했다. 사교적이고 활달한 성격이라 그게 맞을 것 같았다. 자신의 갤러리를 맡기고도 싶었다. 진주는 미국 검정고시인 GED 준비에 들어갔다.

 

진주가 처음부터 나쁜 마음을 먹었던 건 아니다. 그 상황에서 하필 나쁜 마음이 생겼을 뿐이다. 제니퍼가 역할 바꾸기란 말만 안 했어도, 나쁜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느 날 제니퍼의 제안으로 둘은 서로를 바꿨다. 제니퍼는 머리를 짧게 잘랐고. 진주는 긴 머리 가발을 썼다. 학교 모임에 제니퍼는 진주 흉내를, 진주는 제니퍼 흉내를 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제니퍼가 너무 좋아서 펄쩍펄쩍 뛰었다. 몇 번 더 그랬다. 참하게 살던 그녀에겐 천지개벽적인 재미였던 거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하나만 알아차렸어도 진주가 나쁜 마음을 먹지 않았을 거다.

 

새파란 하늘을 보다 그랬어요. 이글이글 거리던 7월의 태양을 보다 그랬어요. 방학이었다. 진주와 제니퍼는 북쪽의 깊은 산으로 캠핑을 떠났다. 차를 세우고 산 속으로 들어가다 제니퍼가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급히 약을 찾던 진주에게 한순간에 나쁜 마음이 생겼다. 약을 찾지도, 주지도 않았다. 제니퍼는 고통 속에 죽어갔다. 진주는 산만 바라봤다. 제니퍼를 차에 싣고 산 안쪽으로 깊이, 깊이 들어갔다. 길이 끝난 곳에서 제니퍼의 시신을 업고 비탈을 한참 내려갔다. 밤새 땅을 팠다. 진주의 키보다 더 깊이. 시체 냄새가 나지 않아 동물들도 냄새를 맡지 못한다는 깊이 6피트보다 더 깊이. 제니퍼를 묻었다. 진주는 제니퍼가 되기로 했다. 방학 동안 머리를 기르고 안경을 썼다. 아무도 몰랐다. 제니퍼가 된 진주는, 진주는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태연히 말하고 다녔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제니퍼가 된 진주는 그곳을 떠났다. 갤러리를 처분하고 제니퍼의 23년 인생과 신분증과 돈을 갖고 동쪽으로 갔다. 이름도 진주에서 제이로 바꿨다. 제니퍼의 풀 네임이 제니퍼 진 잭슨이다. 진은 입양 전 이름이었다. J가 세 개인 제니퍼는 JJ로 불렸다. 진주는 이상하리만치 그게 부러웠다. 동쪽 대도시 작은 갤러리에서 제이의 제2의 삶이 시작됐다. 아주 이상한 제이의 전성기가 시작된 거다.

 

아무도 몰랐어요. 마이크만 알았어요. 마이크가 알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이번에 만나고 가슴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어요. 진주가 도망친 다음 날부터 마이크는 제이를 찾아 나섰다. 미국이 좀 넓은가. 혼자 힘으론 불가능했다. 마이크는 경찰학교에 지원해서 경찰이 됐다. 오로지 진주를 찾으려는 염원에서다. 마이크는 몰래몰래 경찰 데이터를 통해 진주를 찾았다. 진주 또래와 관련된 거면 일일이 다 살폈다. 막무가내식 조사라 쉽지 않았다. 5년째 되던 해 찾았다. 마이크와 친한 동료가 사연을 듣고 포르노 쪽을 뒤져서 찾아낸 거다.

 

진주가 살고 있다는 도시로 전근을 신청했다. 1년여를 추적하다 제니퍼를 알게 됐다. 주인이 바뀐 제니퍼의 갤러리에서 제니퍼의 사진을 보게 된 거다. 마이크는 제니퍼와 진주가 꽤 닮아 보이지만 다르다는 걸 대번에 알았다. 죽도록 사랑한 여자였다. 작은 살점 하나만으로도 제이인지 아닌지 알 것이다. 사진을 보다 뭔가 냄새가 났다. 경찰의 감이었다. 제니퍼를 파고드니까 제이에 다다랐다. 진주가 제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었다. 한국에서!

 

 

64.

 

제이가 긴 이야기를 마쳤다. 그녀의 표정은 온화했다. 다 까발렸다.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38년 인생. 19년은 눌렸고, 19년은 누렸다. 거짓 삶이었다고? 너희와는 다르게 살았을 뿐이야. 온전히 내 삶이라고. 내가 가꾸고 내가 이룬 삶이란 말이야. 꼭 하고 싶었던 말, 가슴에 담고 있던 말. 가슴에서 삭인다.

 

제이와 원 형사는 올망졸망 모여 있는 바위 위에 올라 있다. 기암괴석 칠형제다. 눈앞에 바다다. 파란 남쪽 바다가 끝도 한도 없이 펼쳐져 있다. 점점이 섬들 몇 개 보인다. 통쾌하게 맑은 날씨. 수평선 너머에 있는 먼 나라도 보일 것 같다. 논스톱으로 달려왔다. 마이크는 죽지 않았다. 아주 심하게 다쳤다. 오랜 기간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 실신한 제이를 깨워서 그녀의 파란색 쿠페에 태웠다. 원 형사가 직접 몰았다. 심하게 다친 갈비뼈 통증 때문에 진통제를 한 움큼 털어 넣었다. 달렸다. 밟았다. 쿠페만 신났다. 평일 늦은 아침 고속도로는 뻥 뚫렸다. 발목에 힘을 더 주었다. 손쉽게 시속 180킬로미터를 넘겼다. 그는 분노와 허무를 담아 밟았다. 격정과 혼란스러움을 담아 밟았다. 삶의 고통과 일상의 지긋지긋함을 담아 밟았다. 죽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교각을 들이받던, 다리 난간을 부수고 날아가던. 옆좌석의 제이는 아무 말 없이 앞만 바라봤다.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남쪽 끝 곱게 솟은 산의 바다 쪽으로 늘씬한 벼랑 끝 바위. 떠나세요. 바위 위에 까만 새처럼 보이는 원 형사가 파란 새처럼 보이는 제이에게 말한다. 바다가 빚은 바람이 벼랑을 타고 올라와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잠시 두 사람이 눈을 감는다. 바람이 빠져나간다. 머리가 다 헝클어졌다 제이가 슬픈 눈빛으로 원 형사를 바라본다. 두 눈이 마주친다. 왜 모든 걸 잃으려고 해요? 제이가 눈으로 묻는다. 마음 변하기 전에 당장 떠나세요. 다른 곳에서 다르게 살아요. 자기 삶을 찾아요. 기회가 생긴 거니까 놓치지 말아요. 원 형사는 눈으로 말하지 않는다. 진심이 담긴 목소리다. 흐트러짐 없다. 기회를 주는 겁니다, 제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지나면 다시 찾으러 갈 거니까요.

 

제이의 슬픈 눈빛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뀐다. 찾다니요? 눈이 아닌 입으로 묻는다. 제이라는 여자가 누구인지 찾을 겁니다. 누구인지 찾게 되면 어디 있는지도 알게 되겠죠. 그때 찾게 되면 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고요. 그러니까…… 멀리, 멀리 가세요. 찾을 수 없는 곳으로.

 

제이는 갑자기 흥분된다. 섹스가 하고 싶을 정도로 호르몬이 들썩인다. 생긋 웃는다. 화색이 돈다. 일어나 원 형사에게 다가가 볼에 키스를 한다. 기다릴게요. 원 형사는 담담하다. 제이가 떠난다.

 

*

 

원형사는 산 아래로 내려왔다. 바닷가는 고즈넉하다. 바람도 잦다. 꼬물거리는 파도 소리가 가늘게 들린다. 백사장을 걷는다. 구두도 벗어서 든다. 셔츠 소매와 바지춤을 걷어 올리고, 바닷물을 첨벙대며 걷는다. 햇살이 눈부시다. 따갑다. 이마에서 땀방울이 솟는다. 마음이 홀가분하다. 휴대폰이 울린다. , 배 형사. …… 아니, 떠났어. …… 나야 모르지. 두 발 달렸으니 어디든 못가겠어? …… 내 일처리가 마음에 안 들면 당신이 해라. 나 손 땔게. …… 내 걱정은 안 해도 돼. 너나 잘해. …… 시끄럽고, 난 좀 쉬었다 갈 테니까 나중에 보자. 일방적으로 끊어버린다. 휴대폰을 바다에 던진다.

 

멈춰 서서 옷을 벗는다. 훌훌 팬티만 남기고 다 벗는다. 바다로 들어간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게 일탈이냐, 아니면 지금 내가 일탈하는 거냐. 풍덩, 바다에 몸을 던진다. 5월의 바다는 차다. 얼얼하다. 개의치 않고 힘차게 헤엄을 친다. 수평선을 향해서.

 

 

65.

 

The-J의 옥상에 비치의자가 놓였다. 양 회장이 누워 있다. 아이스박스에 캔 맥주가 가득이다, 제이가 사라진지 정확히 1년 만에 The-J를 오픈했다. 제이가 다 준비한 걸 매무새만 해서.

 

문을 활짝 열었다. 열자마자 세상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제이에 대한 온갖 소문이 여전히 돌고 도는 중이었다. 소문과 논란이 시너지로 폭발했다.

 

The-J 1층의 테마는 ‘수수께끼’. 진품 알아맞히기다. 회화든, 조각이든, 프린트든 똑같은 작품이 나란히 두 점씩 전시됐다. 어떤 게 진품일까요? 진품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스티커를 붙이세요. 사람들은 작품 앞에 설치된 보드에 스티커를 붙인다. 놀라운 건 진품이 Artra 소장품이라는 것. Artra가 내준 게 아니다. 제이가 Artra 전시장과 보관실에서 몰래 빼돌려 가져나온 것이다. 진품과 위작을 바꿔치기한 거다. 이 주장에 Artra는 즉각 반박 성명을 냈지만, 당장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진품, 위작 검증에 들어갈 경우 자칫 Artra는 망한다. 실제 진품으로 둔갑한 위작도 있다. 제이가 빼돌렸다는 게 진품일 수도, 위작일 수도 있다. 논란과 의혹은 증폭될 대로 증폭돼 우주까지 부풀어 올랐다. The-J에는 구름 관객이 몰렸다. 향서마을에 도둑이 들었다. 마을이 흉흉해졌다.

 

전시장 2층부터 5층까지 벽엔 온통 QR 코드뿐이다. 직접 와서 QR 코드를 확인하면 Artra 소장품들을 죄다 다운받을 수 있다. 잘만 편집하면 아주 훌륭한 E-도록을 만들 수 있다. 이미 누군가 Artra 소장 E-도록을 인터넷에 올렸다. 진품을 보기는 힘들어요. 날마다 전시하는 것도 아니고, 액자에 갇혀 있잖아요. 카피면 어때요. 늘 볼 수 있어서 좋잖아요. 프린트만 잘하면 그런대로 벽에 걸어놓을 수도 있고요. 작품을 즐기는 방식은 여러 가지랍니다. 작품은 나누고 돌려서 봐야 더 맛이 난답니다. QR 코드를 열면 제이의 방울 같은 목소리가 굴러 나온다.

 

양 회장은 맥주를 마시며 그림엽서를 보고 또 본다. 제이가 보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파란 입술을 찍고, ‘사랑해요^^’라고 썼다. 앞엔 파란색 바다뿐이다. 양 회장이 웃는다. 하늘을 본다. 엽서의 바다만큼 파란 하늘. 제이야, 잘 지내지? 보고 싶구나.

 

*

 

The-J 의 남쪽과 북쪽 벽은 그라피티 공간이다. 낙서장이다. 아무나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다. 날마다 수백 명씩 몰려들어 벽에 붙어서 열심히 뭔가를 남긴다. 정문이 있는 서쪽 벽 전면은 제이의 그림이다. 어릴 적 그렸다가 담임한테 무자비하게 혼났던 그림. 온통 파란 하늘이고 오른쪽 아래 아주 자그맣게 회분을 그린. 그걸 벽에 다시 그렸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도 보이는 파란색이다. 반대편 동쪽 벽엔 세계 각국의 수배 전단을 표현한 꼴라주다. 별별 수배 전단으로 제이, 자신의 수배 전단을 만들었다. WANTED J’ 아래 제이다. 멀리서, 아주 멀리서도 보이는 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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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 마담 블루 2011-04-07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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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사진. 마이크와 제이다. 한국의 사진관에서 찍은 거다. 제이는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아름답다. 행복해 보인다. 둘 다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사진 아래 날짜가 표시됐다. 1992 3 29.

 

제이와 마이크가 만난 지 6개월 되던 날, 둘은 결혼했다. 수도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미군기지. 마이크는 첫눈에 제이에게 반했다. 예뻤다. 영어도 곧잘 했다. 말이 통하는 한국 여자는 처음이었다. 마이크는 성격이 불같다. 사고뭉치였다. 군인으로서 자질이나 기량은 훌륭한데 참을성이 심히 부족했다. 동료들과 주먹다짐이 잦았다. 전역을 권고받았다.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은데, 누가 다혈질 마이크와 얘기하고 싶겠나.

 

혼자 술 마시며 궁상을 떨다가 제이를 만났다. 제이는 마이크의 하소연을 다 들어줬다. 그녀 앞에서 마이크는 얌전한 고양이였다. 마이크는 급속도로 제이에게 빠져들어갔다. 한국을 떠나고만 싶었던 제이는, 어떻게든 미국으로 훨훨 날아가고 싶었던 제이한테는 마이크가 동아줄이었다. 흑인인 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제이가 만 열여섯 살 되던 해, 당시 법으로 결혼해도 되는 나이가 되자 두 사람은 결혼했다. 마이크는 기꺼이 전역을 하고 제이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제이는 마이크의 첫 여자였다.

 

클럽 엘비스 사진. 클럽 엘비스 앞에서 찍은 제이의 빛바랜 독사진. 아직 소녀다. 앳된 얼굴에 짧은 단발머리. 수줍게 웃고 있다. 촌스러워 차림이어도 타고난 미모다.

미군 전용 클럽 엘비스는 제이의 직장이었다. 먹고 자고 하면서 청소, 설거지, 심부름에 때때로 웨이트리스까지. 전천후 종업원이었다. 기지촌에서 도망쳐 기지촌으로 간 거다. 태어나서 줄곧 살아온 게 기지촌. 기지촌 아닌 곳은 너무 낯설고, 이질적이어서 무서웠다. 한 발짝도 들여놓을 자신이 없었다. 물어물어 다른 기지촌으로 흘러들어갔다.

 

몇 날을 굶고 헤매다가 클럽 엘비스 뒷골목에서 쓰러졌다. 주인아줌마가 거두었다. 천성이 남을 돕고, 베푸는 걸 좋아하는 여자다. 고깃국에 밥 말아 먹고 기운 차린 제이는 곧바로 빗자루를 잡았다. 씻기니까 미모가 더욱 도드라진 여자아이는 매사 적극적이고 일도 잘했다. 주인은 딸처럼 수족처럼 부렸다. 클럽 엘비스는 미군 전용 클럽이어서 한국인은 출입이 금지된 곳이다. , 미군과 함께 들어오는 한국인 여자는 예외였다. 주말이면 클럽 앞에는 대도시에서 몰려든 여자들로 붐볐다. 제이가 듣기론 대부분 대학생이고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가려고 하는 여자들이라는 거다.

 

제이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다! 길이 보였다. 여대생들이라지만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다. 이미 영어가 되는 제이는 더더욱 영어를 배웠다. 말이 되니까 미군에 접근하기는 쉬었다. 대도시에서 온 여자들은 성숙하고 세련됐고 부티가 줄줄 흘렀다. 영어가 되는 제이가 경쟁력에서 밀리는 이유였다. 몸도 가꾸고 치장도 하면서 호시탐탐 때를 기다렸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을 되씹으면서. 하늘이 도왔다. 마이크가 나타난 거다.

 

보안관 Sheriff 사무실 앞 사진. 미국의 작은 마을 Sheriff 사무실 앞. 보안관과 제이 부부, 마이크의 부모가 함께 찍었다. 다들 함박웃음인데, 제이는 다소 긴장된 표정이다.

 

마이크의 고향은 미국 중부의 시골 소도시다. 몇천 명 안 되는 주민들이 사는 곳. 마이크는 부보안관이다. 군 경력을 살린 거다. 마이크의 부모는 구멍가게를 꾸려나간다. 평범하고도 평범한 마을에 평범하고도 평범한 사람들이다. 범죄랄 것도 없고, 옹기종기 모여 살면서 때 되면 교회에서 만나 경건히 기도하고 담소를 나눈다. 마이크의 부모는 제이에게 잘해줬고, 이웃들도 친근하게 굴었다. 마이크는 정성을 다해 제이를 모셨다.

 

마이크는 삼남매 중 맏이다. 착한 성격에 허우대도 좋고 운동도 잘했다. 킹카의 자질이 충분했는데 사교적이지 못했고, 무엇보다 분노조절능력이 떨어졌다. 허구한 날 싸움질하다, 제 풀에 방에 틀어 박혀 있다를 반복했다. 여자를 사귈 기회도 주변도 안 된 것이다. 하루는 심하게 싸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며칠 뒤였다. 이웃집 서른 살 먹은 뺀질이를 늘씬하게 팬 거다. 전치 8주가 나왔다. 마이크를 좋게 봐온 보안관이 적극 중재에 나서 가까스로 합의를 봤다. 보안관의 충고를 받아들여 마이크는 군에 입대했다. 돌아와서는 보안관의 부하가 됐다. 그때의 보안관이 지금의 보안관이다.

 

그곳에 간 지 1년 되던 해 제이는 도망쳤다. 답답해서 못 살겠는 거다. 갇힌 것만 같다. 평화롭기만 하고 경건한 곳이지만 제이한테는 맞지 않았다. 자신의 끼와 열정을 발산시킬 곳이 필요했다. 언젠가는 엄마한테도 돌아가야 한다. 극심한 두통과 아토피가 생겼다. 약으로 치료될 수 없는 병. 떠났다.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배낭 하나 달랑 매고 떠났다. 밤새 걷고, 새벽녘에 히치하이크를 하면서 서부로, 서부로 갔다.

 

*

 

원 형사가 길게 한 숨을 내쉰다. 표정은 애써 담담하다. 백여 장이 넘는 사진들은 제이의 과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진만으로도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헤아리고도 남는다. 그녀는 주한미군과 결혼한 한국 여자다. 지금까지 알려진 그녀의 삶은 가짜다. 그녀는 참으로 천연덕스럽게 거짓 삶을 살아온 거다. 이제 믿겠어? 마이크가 툴툴거리며 묻는다. 내가 왜 이러는지 알겠지? 내 마음 이해할 수 있겠지? 그녀는 내 여자야. 우리는 운명이야. 살아도, 죽어도 같이 있어야 한다고!

 

원 형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할 말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머릿속이 정리가 안 된다. 휴대폰이 울린다. 주머니에 없다. 싸울 때 떨어졌나 보다. 소리를 쫓아 휴대폰을 찾는다. 침대 아래에 들어가 있다. 울리다 멈춘다. 곧 문자가 왔다는 울림. 찾았다. 배 형사다. 제이 실장은 입양된 게 아닙니다. 미군기지촌에서 태어났고 10대 때 도망갔답니다. 모친은 매춘부였고요. 수사 방향을 바꿔야 할 것 같습니다. 저 지금 가는 중입니다. 전화주세요.

 

그녀 삶의 퍼즐이 착착 맞춰지고 있다. 갑자기 코끝이 찡해온다. 슬프다. 참 힘들게 살아왔구나. 뜬금없다. 아무래도 원 형사의 이성선(理性線)이 붕괴된 것 같다. 그녀한테 연민이 생긴다, 지독한 연민이. 이 연민 때문에 내가 붕괴되겠구나. 쿨럭, 마른기침을 하자 가슴 통증이 온몸으로 전달된다. 아프다. 고통스럽다.

 

문이 열린다. 제이가 들어온다. 잠시 동안의 소강상태와 산만함은 사라지고 다시 긴장감이 감돈다. 제이는 온통 파란색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볼 때마다 새삼스럽다. 파란색 재킷에 파란색 스커트, 파란색 스타킹, 파란색 힐, 파란색 스카프에 파란색 장갑까지. 머리카락을 파란색으로 물들였고, 파란색 립스틱에 파란색 마스카라. 유난히 빛나는 파란색 귀고리, 파란색 선글라스, 파란색 토트백. 하얀 얼굴만 빼고는 온통 파란색이다.

 

부서지고 어질러진 실내에 개판 몰골의 두 남자. 아침에 봐야 할 풍경이 아니다. 제이는 선글라스를 벗고 풍경을 감상한다. 무슨 일이에요? 두 분 얼굴이 왜 그래요? 불안한 목소리. 제이는 직감이 안 좋다. 원 형사한테 간다. 사진을 감추려 하지만 늦었다. 제이가 사진을 본다. 뭉텅이로 들어서 하나, 하나 본다. 제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이내 눈물이 흐른다. 맥이 풀려 침대에 걸터앉는다. 꼭꼭 숨겨온 자신의 과거가 오롯이 담긴 사진들. 제이를 보는 원 형사의 마음이 안 좋다. 표정도 안 좋다. 마이크는 미안한 마음이 드는지 시선을 떨어뜨린다.

 

싸우는 과정에서 부서진 탁자는 튼튼한 원목이다. 떨어져 나간 탁자 다리는 속이 꽉 차 묵직하다. 제이가 그것을 본다. 벌떡 일어나 다리를 집어 든다. 마이크한테 달려가 닥치는 대로 다리를 휘두른다. ! ! ! ! 머리, 몸통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팬다. 퍽큐! 퍽큐! 퍽큐! 퍽큐! 그녀의 모든 에너지가 몽둥이가 된 탁자 다리에 전이됐다. 그녀의 눈은 뒤집어졌고 목소리엔 살기가 서려 있다. 가뜩이나 성치 않은 몸에 기습 공격, 마이크는 일방적으로 당한다. 저러다 죽겠다.

 

원 형사가 몸을 가누고 그녀한테 간다. 그만해요, 큰일 나겠어요. 뒤에서 안는다. ! 제이의 팔꿈치가 원 형사의 가슴을 친다. 심하게 다친 갈비뼈를 된통 건드렸다. ! 원 형사가 비명을 지르고 주저앉고 만다. 마이크가 제이의 하체를 감싸 안는다. 필사적이다. 제이의 스윙이 작아져 힘이 떨어진다. 제이의 눈은 여전히 뒤집어졌다. 제이는 몽둥이를 세워 마이크의 등짝을 찍어댄다. ! ! 마이크는 제이를 쓰러뜨리려 한다. 힘겹다. 심하게 맞아 동작이 굼떠 보인다. 몽둥이가 목덜미를 가격한다. 정밀 타격. 목뼈 속 운동신경을 작살냈다. 마이크가 풀썩 엎어진다. 그만해요! 원 형사가 소리 지른다.

 

그 소리가 제이의 분노를 더 자극하고 말았다. 제이는 최선을 다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마이크의 뒤통수가 박살났다. 제이도 실신하고 만다. 쓰러진 제이 옆으로 사진 두 장이 구른다. 제이의 포르노 사진과 제이와 똑 닮은 여자의 얼굴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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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 마담 블루 2011-04-06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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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라곤 지지리도 없는 년. 어느 날 남편이란 놈이 출장 간다고 본토로 가더니 소식을 끊어버린 거야. 머나먼 이국 땅에서 졸지에 버림받은 거지. 어쩌겠어.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거기서 몸 팔 수밖에. 75년인가. 월남전 끄트머리에 월남에 남아 있던 한국 사람들이 일단 괌으로 철수한 거 알아? 그때 송씨라고 진주 아버지를 만났어. 송씨도 고아 출신이라 만나자마자 마음이 통했지. 아주 아삼륙이 된 거야. 그때 진주가 생겼어. 진주를 배고 송씨 따라 한국으로 돌아왔어. 돌아오니까 이번엔 송씨가 변했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거야. 허구한 날 술과 도박이고, 뭐라 하면 마누라 개 패듯이 패고. 아무튼 수컷들이란! 참다못한 복희가 송씨 불알을 걷어차고 야반도주했어. 기지촌 출신이 기지촌 말고 갈 데가 어디 있겠어. 먹고는 살아야 하고, 아이도 키워야 하고. 흘러, 흘러 여기까지 온 거야. 오로지 진주 하나에 희망을 걸고 말이야. 진주는 엄마를 누가 죽였는지 몰라. 한국 사람이 죽인 줄로만 알아. 우리도 부러 말 안 했어. 미군 천지인 곳에서 미군에 원한 품어봤자 자기만 손해잖아. 진주 성깔에 뭔 일 저지를지도 모르고. 엄마 죽은 뒤에 한번은 진주가 또래 남자아이를 만신창이 될 때까지 패서 경찰서에 끌려간 적이 있어. 소년원에 보낸다는 걸 우리가 울며불며 빌고 빌어서 데려왔거든. 말 안 하길 잘했지.

 

걔가 좀 조숙했어. 열네 살 적에 이미 나올 데 다 나오고. 들어갈 데 다 들어갔거든. 우리가 봐도 탐나는 몸이었으니 남자들이 가만 놔두겠어. 그때는 기지촌에 무슨 자치기구라고 있었거든. 명목은 여자들 돌봐주라는 곳이라는데 개뿔, 완장이었다고 완장. 얼마나 어깨 힘주고 다녔다고. 되레 여자들 겁탈이나 하고 말이야. 완장이 진주도 노렸지. 애첩처럼 데리고 놀려는 심보였던 거지. 나쁜놈. 갖고 놀다가 나이 들면 몸 팔게 하는 거고. 용기를 냈지. 진주를 도망시켰어. 돼지저금통 깨고, 다들 십시일반 보태서 진주 손에 쥐여줬어.

 

당장 도망가. 어디든 멀리멀리 가. 돌아올 생각은 하지 마. 여기는 잊어. 잊고 좋은 데서 살아. 이런 곳 다시는 발 들이지도 말고. 알았지?

 

편의점 아줌마는 과거 그때 그 상황처럼 말을 했다. 눈엔 눈물이 가득하고 목소리는 떨렸다. 그날이 마지막이야. 진주 본 건. 진주 예쁜 눈에서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지. 아줌마는 꾹꾹 참던 울음을 기어코 터트리고 말았다. 지긋지긋했던, 지옥 같던 젊은 시절의 기억이 소름 돋도록 오롯이 떠오른 거다. 서럽고 억울하기만 했던 시절. 편의점 아줌마는 깡촌 화전민의 딸이었다. 지독한 가난과 굶주림이 싫어 가출했다. 대도시에서 봉제 공장 여공으로 일하다 하도 두들겨 맞아 도망쳤다. 돈 많이 번다는 전단을 보고 찾아갔다가 기지촌으로 팔려간 거다. 진주가 떠난 뒤 근처 술집 종업원이던 남자와 만나 한때 그곳을 벗어나기도 했다. 남자가 동네 양아치와 싸우다 죽지만 않았다면 더 나은 살았을 지도 모른다. 다시 기지촌으로 돌아와 마흔다섯이 될 때까지 그 짓을 했다. 아랫도리가 썩어 문드러져서 자궁이 아작 난 탓에 아이도 못 갖는다. 어느 날 미련 없이 그곳을 탈출해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짝퉁 팔며 돈 좀 벌었다. 나이 들어 그래도 정들었다고 다시 돌아와 구멍가게를 하나 차렸다. 짝퉁 팔다 만난 시계방 남자와 함께. 남자는 읍내에서 시계를 팔고 있다.

 

배 형사는 권총에 남은 미지의 지문을 추적하다 여기까지 왔다. 정진주가 어린 시절 폭행 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가는 바람에 지문이 기록된 거다. 이 사람 좀 봐주세요. 배 형사는 제이의 사진을 아줌마에게 보여준다. 누구야 이 사람? 참 예쁘네. 정진주 닮지 않았어요? 이 여자가 정진주라고? 글쎄…… 20년도 훨씬 전인데 기억이 나나. 내가 친엄마라면 모를까. 얼굴 윤곽이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잠깐만, 이 여자 유명한 여자 아냐? 텔레비전에도 나온 거 같던데. 진주가 이렇게 근사해진 거야? 복희가 하늘에선 맘 편히 지내겠다. 복희야, 보고 싶다. 잘 지내지? 정진주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세요? 모르지. 서로 살기 바쁘니 연락이나 제대로 했겠냐고. 그렇군요. , 진주 걔 미국 간다고 했다. 내 정신하곤. 전화가 한번 왔었어. 미군 만나서 결혼해서 미국 들어가게 됐다고. 걔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하도 큰 소리로 얘기해서 내 귀청이 다 떨어지는 줄 알았거든.

 

 

62.

 

175센티미터 72킬로그램. 완전 근육질은 아니더라도 군살 없는 탄탄한 몸. 꾸준한 운동과 단련이 빚어내는 민첩함. 빈틈없는 완벽한 폼. 가만히 서 있어도 절로 우러나오는 내공의 아우라. 상대를 제압하는 눈빛. 형사 생활 15년 동안 원 형사한테 호기롭게 덤벼든 깡패가 없는 이유다.

 

원 형사가 멱살을 잡혔다. 두 발이 공중에 뜨는 가 싶더니 휙— 날아간다. ! 등짝이 벽에 부딪히고 반동으로 앞으로 고꾸라진다. 온몸에 고통이 엄습하고 숨통이 막힌다. 몸도 마음도 추수를 겨를도 없이 또 잡힌다. 목덜미와 허리춤이 들리더니 앞으로 날아간다. 우당탕! 원목으로 만든 탁자 위로 떨어진다. 탁자가 부서진다. , 온몸을 쥐어짜는 신음이 목구멍으로 기어 나온다. ! 마이크는 널브러진 원 형사의 허리를 거세게 걷어찬다. 이러다가 죽겠다. 원 형사는 안간힘을 써서 데굴데굴 굴러 마이크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 겨우 일어나 자세를 잡는다. 아프고 쑤시고 저리다. 힘들게 호흡을 가다듬는다. 포식자가 먹이 쫓듯 다가오던 마이크가 원 형사의 자세를 보고 멈칫한다. 고수가 고수를 알아본다. 늘 진정한 복싱인임을 강조하는 원 형사의 원숙한 폼에 긴장한다.

 

잡히면 안 돼. 원 형사가 빠르게 눈을 굴린다. 거리를 주면 안 돼. 격투기에 능한 마이크가 빠르게 머리를 굴린다. 서로 상대를 살펴가며 약점을 찾는다. 다혈질의 마이크가 참지 못하고 먼저 덤빈다. 원 형사가 날랜 푸트워크로 피하며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마이크의 코와 입술 사이, 인중에 정확히 꽂는다. 손이 맵고 단단한 원 형사. 마이크의 무릎이 접힌다. 틈을 주지 않고 원 형사의 왼손 훅이 작렬한다. 마이크가 엉덩방아를 찧는다. 자존심이 상한 마이크, 벌떡 일어난다. 제대로 성격 나온다. 의자를 집어 던지고 동시에 자신도 던진다. 191센티미터 93킬로그램. 속수무책 원 형사를 덮친다. 마이크는 원 형사를 들어 올려 메다꽂는다. 걷어차고 밟는다. 의자로 내려친다. 잠시 숨을 고르는 마이크. 원 형사가 비틀비틀 일어난다.

 

원 형사의 얼굴이 피와 멍과 상처로 마블링 됐다. 마이크가 원 형사를 벽에 밀어붙이고 팔뚝으로 목을 누른다. 눈에서 살기가 돋는다. 리버펀치. 상대의 오른쪽 몸통 위를 가격하는 펀치. 간에 치명적 충격을 줘서 엄청난 고통을 야기한다. 마이크가 격한 신음을 토하며 물러선다. 원 형사의 강력한 리버펀치가 마이크의 간에 닿은 것이다. 상체를 숙인 마이크가 두 팔로 몸통을 감싼 채 절절 맨다. 오랜만에 손맛을 본 원 형사가 펀치를 퍼붓는다. 라이트훅, 레프트훅, 라이트어퍼컷. 꽈당! 마이크가 자빠진다. 기운이 다 빠진 원 형사도 주저앉는다.

 

원 형사는 제이와 약속한 시간보다 훨씬 빨리 마이크가 머무는 호텔에 왔다. 벌써 그의 신상을 파악한 상태였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 경찰이며 현재 휴직 중이라는 것. 2년 전부터 한국에 여러 차례 들락거렸으며, 7개월 전부터는 한국에 눌러 있다는 것. 호텔이나 신용카드 동선이 주로 Artra 주변이라는 것 등등.

 

뜻밖의 손님에 마이크는 좀 놀랐지만 순순히 문을 열어줬다. 원 형사는 단도직입적으로 얘기했다. 너 아무래도 스토커 같은데 이제 그만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라. 지금 돌아가면 다 없던 일로 할 거니까. 싫다면? 마이크의 반응은 예상대로였다. 체포해야지. 무슨 죄로? 무단 침입, 폭행, 특수공무집행방해, 많지. 웃기는군. 마음대로 해봐라. 난 할 일이 있으니까. 진주를 데리고 가기 전엔 떠날 수 없거든. 제이 말하는 거야? 진짜 이름은 진주지. 너 모른다잖아. 엉뚱한 여자 건드리지 말고 돌아가! 멍청하긴. 경찰이란 작자가 이용이나 당하고, 사실도 제대로 모르고 말이야. 이거 완전 꼴통이군. 원 형사가 수갑을 꺼내 들었다. 정말로 체포할 마음이었다. 마이크, 당신을……. 미란다원칙을 말하려는데 멱살을 잡힌 거다.

 

원 형사도, 마이크도 몸이 말을 잘 안 듣는다. 원 형사는 갈비뼈가 심하게 다친 것 같다. 숨 쉴 때마다 몸통이 빠개지는 통증이 일어난다. 마이크는 펀치의 충격에서 아직 못 벗어났다. 두 사람은 기댈 데를 찾아 기어간다. 원 형사는 입구 쪽 장식장에, 마이크는 침대에 몸을 기댔다. 마주 보고 앉게 됐다. 서로의 몰골을 감상한다. 오랜만에 싸움다운 싸움을 했다. 시원하기도, 허탈하기도 하다. 둘 다 입안이 터져 몹시 쓰라리다. 마이크가 침대 옆에 놓였던 자신의 가방에서 사진 다발을 꺼낸다. 크고 작은 사진들, 흑백사진도 보인다. 원 형사에게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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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 마담 블루 2011-04-05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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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녘 골목 풍경은 황량하기만 하다. 인적은 드물고, 쓰레기만 너저분하다. 건물에 부딪힌 햇빛이 골목으로 부스러기처럼 떨어진다. 계절의 여왕 5월이 좀체 체감되지 않는다. 을씨년스럽다. 배 형사는 골목의 좌우를 일일이 확인하며 조심스레 빠져나간다. 털이 다 빠지고 상처투성이인 말라깽이 개 한 마리가 차 앞으로 기어 나오더니 배를 깔고 엎드려버린다. 경적을 울려도 미적미적대자, 창문을 열고 냅다 소리를 지른다. 꽁무니를 뺀다. 길모퉁이에선 사지를 뻗고 자는 사람도 보인다. 남루한 행색이지만 노숙자로 보이지는 않는다. 배 형사가 혀를 찬다. 좀비라도 나오겠군.

 

겨우 골목을 벗어났는데 좌우로 또 골목이다. 마침 바로 왼쪽에 찾던 곳이다. 24골목편의점이라는 아주 큰 간판이 보인다. 차를 세우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간다. 실내는 비좁았다. 구멍가게다. 간판이 훨씬 크다. 뽀글뽀글 파마머리를 한 60대 아줌마가 등받이 없는 의자에서 졸고 있다가 인기척에 눈을 빠끔히 뜬다. 아줌마 뒤로 툇마루가 딸린 방. 방문은 닫혀 있다. 어머 이 시계, 문워치네. 닐 암스트롱이 달나라 갈 때 찬 거잖아. 이거 비싼 건데. 그러고 보니 옷도 장난이 아니네. 다 명품이잖아. 구두도 그렇고. 내가 한때는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놀았거든. 짝퉁만 취급했지만 명품 볼 줄은 알지. 형사가 돈이 어디 있어서 온통 명품이래? 조상을 잘 뒀거든요. 물려받은 게 좀 됩니다. 돈 많은 사람이 왜 형사가 됐대? 힘들게. 예전에 형사 나오는 영화에 이런 대사가 있었죠. 폼 나잖아요. 배 형사가 액션까지 쓰면서 대사 흉내를 낸다. 나 같으면 그 폼 딴 데 가서 쓰겠다. 그래도 뭐 젊고 멋진 형사가 오니까 좋긴 하네.

 

그래 맞아, 걔 이름이 진주야. 정진주. 엄마 성을 따랐거든. 엄마 이름은 정복희. 복희, 그 이름 어떻게 잊겠어. 나랑 엄청 친했다고. 친자매처럼 지냈거든. 진주, 걔는 이름처럼 예쁜 아이였어. 진주처럼 빛나고 똘망똘망했지. 애가 하나를 알려주면 정말로 열 개, 스무 개를 아는 거야. 우리가 얼마나 귀여워했다고. 영어도 아주 잘했어. 혀가 잘도 굴러가서 미군 뺨쳤다니까. 걔가 기억력이 좋아서 한번 들으면 절대 잊어먹지 않는 거야. 혼자서 빨빨거리며 미군들한테 영어 한마디씩 들으면 다 외워. 놀랍지 않아? 예쁜 데다 영리하니까 미군들이 좀 좋아했겠어. 일주일에 한두 번씩 굳이 시간을 내서 가르친 군인도 있었고, 공부할 수 있게 책도 사주는 군인도 있었지. 물론 나쁜 놈들도 있었어. 그 어린 걸 여자로 보는 놈들. 걔를 어떻게든 해보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거라.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았지. 미친 개 쫓아내듯 쫓아냈지. 악을 바락바락 쓰면서 죽일 듯이 덤볐거든. 그러면 꼼짝도 못 하고 줄행랑치는데 가관이었지. 아무리 우리가 양갈보 소리 들어도 그런 꼴은 못 보지. 어떻게 감히 아이를. 애들은 우리처럼 살아선 안 되잖아. 복희가, 진주 엄마가 걔를 어떻게 키웠는데…….

 

복희는 진주를 큰 도시로 보내려고 했어. 거기서 고등학교, 대학교 다 마칠 수 있게 말이야. 미대 보내겠다고. 진주가 그림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거든. 누구든 걔 그림 보면 화가 되라고 했으니까. 말이 미대지 우리 수준에 어림 반 푼어치나 되는 소리냐고. 그래도 복희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어. 죽어라 돈을 번거야. 남들보다 배는 더 미군을 상대했을걸. 몸은 날마다 걸레짝이 됐지만 진주 크는 거 하나로 버틴 거야. 진주 없었으면 목매달고 죽었을 지도 몰라. 우리도 그 정성에 전염됐어. 진주가 대도시로 유학갈 수 있게 도와주려고 돈을 모았으니까. 커다란 돼지저금통 배 터지도록 말이야. 우리 가게서 일하던 애들이 열 명 정도 됐거든. 복희가 천성이 착하고 성실해서 애들이 다 좋아했어. 나하고 복희가 나이가 많은 편이었는데 애들이 복희를 잘 따랐지. 진주가 언제부터인가는 우리를 위해 통역도 하는 거야. 얼마나 기특했겠어.

 

다들 감격해서 눈물까지 흘렸는데 며칠 뒤에 복희가 죽은 거야. 누가 봐도 미군이 죽인 게 분명한데 범인을 못 잡는 거야. 안 잡은 거겠지. 그때야 우리 같은 년 하나 죽는다고 눈도 깜빡 안 하던 시절이니까. 죽은 년만 불쌍하지. 그년 팔자가 참 기구해. 복희는 열네 살 때 기지촌에 들어왔거든. 서쪽 어딘가 고아원에서 살았다는데 원장이 개새끼였나 봐. 여자아이들은 보는 대로 강간했다는 거야. 복희는 자기 차례가 되자 벽돌로 원장 대가리를 깨부수고 도망쳤대. 걔가 강단이 있거든. 진주도 엄마 닮아 그런 구석이 있지. 아무튼 복희가 며칠을 굶고 도망치다가 걸려든 게 인신매매단이야. 그땐 그런 게 널렸으니까.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하는 여자애들 잡아다가 창녀촌이든 기지촌이든 팔아먹는 놈들. 그것들도 개새끼들이지. 강간 피해서 온 게 결국 기지촌인 거야. 쓰레기차 피하다가 똥차에 치인 거지. 두들겨 맞으며 몸 팔다가 스무 살 무렵에 미군 하나랑 결혼을 했네. 기지촌 여자라면 누구나 꿈꾸던 일이 복희한테 생긴 거야. 더구나 남편 따라 괌에 갔으니까 이제 잘 살 일만 남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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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 마담 블루 2011-04-04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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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연센트럴경찰서 이준수 서장은 쾌재를 불렀다. 두 마리를 토끼를 잡았다. 꺼림칙하고 찜찜했던 두 건의 살인 사건이 해결된 거다. 파파라치 안동현은 자살한 채동석이 죽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안동현을 살해한 권총과 채동석이 스스로 자신의 머리통을 박살 낸 권총은 같은 거다. 권총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미지의 지문이 있었지만 무시했다. 민정의 죽음이 마음에 걸렸다. 안동현과 민정의 죽음은 연관된 듯, 아닌 듯 헷갈렸다. 수수께끼 같다. Artra가 열쇠인 것만 분명해 보인다. 채동석이 민정을 살해한 것으로 몰고 가고 싶었지만 확증이 없다. 민정의 살인 사건이 해결되지 않으면 안동현 살인 사건도 원점으로 돌아갈지 모른다. 두 살인 사건이 연관되지 않았다는 정황이 필요했다. 정활 살인 사건은 뜻밖의 낭보였다. 강수진과 민정이 잘 아는 사이이면서, 정활을 둘러싸고는 삼각관계였다. 질투는 두말할 것 없이 강한 동기다. 강수진은 정신적으로도 큰 문제가 있다. 살인 사건의 논리로 충분하다. 이제 안동현과 민정의 죽음은 개별 사건으로 봐도 무방하다.

 

서장에게 문제는 원 형사다. 한순간에 원 형사가 골칫거리가 됐다. 사화산인 줄 알았는데 휴화산이었고 이번에 폭발해서 활화산으로 변신했다. 억눌러 왔던 감정이, 잘 억눌러서 재가 된 줄만 알았단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감정은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아내의 죽음. 원 형사한테 아내의 죽음은 마그마였다. 자신을 담금질하면서 단단한 껍질로 가두어왔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원 형사는 연약한 지반이었을 뿐이고, 마그마가 터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여자 하나에 완벽히 무너졌다. 이 서장은 감찰반에 보고할 것이다. 원 형사가 더 이상 경찰로서 적격이 아니라고. 권고사직이든 전직이든 원 형사는 떠날 것이다. 그 자리는 배용남 형사의 몫이다. 새롭게 팀도 하나 꾸리게 할 것이다. 젊고 야망이 넘치는 녀석이다. 배 형사는 원 형사와 제이의 관계를 캐고 있다. 서장의 배 형사 길들이기다. 정활의 소식을 듣고 새벽에 경찰서로 나온 이 서장은 이제야 흡족하다. 스크린골프장으로 갈 것이다. 몸 좀 물고, 고기 좀 실컷 먹어야겠다. 경찰서를 나서는 이 서장의 얼굴이 환하다. 윤기가 흘러 햇빛에 반짝인다. 손 안대고 코 풀었어. 서장은 혼자서 실컷 껄껄거렸다.

 

(3)

 

최 회장의 뮤즈는 지금 상황이 좀 이상하고, 좀 흥미롭다. 민정은 강수진이 죽인 게 아니다.

 

민정은 마이크가 죽였다. 자신이 설치한 감시카메라에 다 잡혔다. 정활과 민정의 섹스 장면, 민정이 살해당하는 장면, 다 녹화됐고 파일로 갖고 있다. 두 장면을 정활과 원 형사의 휴대폰으로 전송했다. 마이크가 민정의 살해범이란 건 밝히지 않았다. 뮤즈만 아는 사실이다. 마이크가 누구인지 왜 민정을 죽였는지 궁금했다. 언젠가 그를 조커로 써먹을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강수진이 다 덮어쓰게 생긴 건 안타깝긴 하지만 세상이란 게 그런 것. 너 하나 죽으면 다 살거든. 뮤즈는 민정이 죽은 것도 슬프지도 불쌍하지도 않다. 이용당하면서도 끝끝내 그걸 몰랐던 여자,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던 여자, 신의를 짓밟은 여자, 죽어도 싼 건 아니지만 네 무덤을 판 건 사실이다.

 

 

61

 

배용남 형사는 새벽에 가연시를 출발해 3시간여 만에 수도 동북쪽의 소도시에 도착했다. 도시의 이미지는 배 형사의 오래되고 낡은 승용차와 중첩된다. 드문드문 높은 건물이 보이지만 그나마 5층 안팎짜리들이다. 한때 반짝 발전했던 모습이 언뜻언뜻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 도시는 수십 년 전에 멈춰 있는 모습이다. 배 형사는 읍내를 벗어나 쇠락한 태가 역력한 상가 골목으로 차를 몬다. 한때의 기지촌. 기지가 철수하고 나서는 낙동강 오리알이 된 곳. 새로운 상권으로 재개발하겠다는 소문만 무성한 채 몇 년째 방치된 상태다. 영문 간판과 화려한 색깔로 이국적 정취를 빚어내며 불야성을 이루던 건물들. 지금은 당장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싼값에 월세를 놓고 있다. 뜨내기와 범죄자들, 불법체류 외국인들과 쫄딱 망한 사람들이 짱 박혀 있거나 숨어 지내는 곳이 됐다. 세조차 못 놓는 일부 빈 건물은 노는 아이들이 접수했다. 만날 모여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본드를 흡입한다. 툭하면 싸움이 일어나고, 성폭행도 하루건너 일어나지만 경찰은 소 닭 보듯이 한다. 이래저래 흉흉한 게토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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