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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본위제의 역사 | 경제경영 2011-01-13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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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금, 인간의 영혼을 소유하다

피터 L. 번스타인 저/김승욱 역
작가정신 | 201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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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인은 금과 은에 사로잡힌 유럽인의 지칠 줄 모르는 탐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안데스 산맥을 뒤덮은 눈이 온통 금으로 변한다 해도 이들은 만족을 모를 것이다.’ 잉카인들은 피사로와 그 일행에게 은이란 단순히 광택 나는 장식용 귀금속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사실도 이해할 수 없었다.” (니얼 퍼거슨)

잉카인들이 망나니 스페인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이 돈 없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돈이 무엇인지 모르던 그들은 금과 은이 화폐가 되고 가치를 저장하는 수단이 되며 원하는 무엇이든 가져다 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역사상 최초의 골드러시는 스페인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스페인은 인디언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결코 지속적인 보상을 거두지 못했다. 금은 한쪽으로 들어와서 다른 한쪽으로 신속하게 빠져나갔다.

금이 대량으로 들어오기는 햇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생산보다는 소비에 더 능햇다. 쏟아져 들어온 금과 은은 사람들의 소비심리를 자극함과 동시에 생산의욕을 떨어트렸다. 스페인은 도박판에서 커다란 횡재를 하고 난 다음 자신에게 그런 행운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늘 따를 거라고 믿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16세기 말 스페인 의회는 ‘금이 더 많이 들어올수록 왕국이 보유하고 잇는 금이 더 적어진다. 우리 왕국이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다. 왕국이 (금과 은이) 적들의 왕국으로 가는 데 다리 역할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발표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인들이 모르는 돈의 위력을 알았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은 진정한 부란 금과 은이 아니라 금과 은을 얻는 능력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스페인의 피에 젖은 골드러시는 화폐공급량을 늘렸을 뿐이다. “화폐 공급량 증가는 화폐 발행을 독점하는 정부를 부유하게 해 줄지 몰라도 사회를 부유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통화 팽창은 단지 가격만 높일 뿐이다.” (퍼거슨)

화폐란 그리고 화폐로 통용되던 금과 은이란 “다른 사람이 그것을 받고 무엇을 내줄 때 의미가 있다. 서구인들이 오랫동안 화폐를 금속과 동일시했던 것은 역사적 우연일 뿐이다. 화폐는 금속이 아니다. 화폐는 신뢰를 새겨놓은 대상이다.” (퍼거슨)

금과 은은 언제나 희귀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금과 은의 희귀성은 부의 상징이 되었고 부의 저장수단이 되었으며 지불수단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귀금속이 화폐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저자는 아시아의 사례를 들면서 금화와 은화의 역사적 우연을 설명한다.

“재산의 저장은 보험에 가입하는 것과 비슷하다. 보험처럼 금을 저장하는 데도 비용이 든다. 이 쓸모없는 금속이 아무 것도 벌어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워 하는 재난에 대비해서 일종의 대비책을 마련해놓았다는 생각을 하면 좀더 편안하게 잘 수 있다.”

귀금속을 교환수단으로 더 주목했던 유럽과 달리 아시아에선 가치저장수단 또는 보험의 기능에 더 주목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금과 은은 아시아에서 과시의 수단이자 폭동과 전쟁에 대비한 보험으로서 무한한 시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시아인의 이런 특성 때문에 금과 은은 “계속 동쪽으로만 흘러가고 향료와 비단 같은 유용한 소비재는 계속 서쪽으로만 흘러가던 이상한 평형상태”가 수천년동안 계속되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경제사가인 얼 해밀턴은 ‘동양은 로마시대부터 유럽의 보물의 무덤이엇다’거 지적햇다. 오늘날에도 인도는 세계 최대의 금 구매자이며 인도에서 금은 ㅜ아직도 이동이 용이한 재산으로서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인도인들은 자동차, 바퀴가 두개 달린 교통수단, 냉장고 등을 사는데 쓰는 돈을 모두 합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금을 사들이는데 쓴다.”

저자는 아시아인들은 서구인들과 달리 금을 돈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시아의 통치자들은 “금의 아름다움과 금이 상징하는 권력을 즐겼다는 점에서는 서구인들과 같았으나 더럽고 비천한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지는 화폐로 쓰기에는 금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대중 사이에서 유통되도록 금을 방출하면 국가의 권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본 것이다. 그 결과 중국에서 만들어진 대부분의 화폐 재료는 거의 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금을 주화로 만들어 “금을 민주화시켰다”고 저자는 말한다.

금의 민주화는 정치의 민주화와 마찬가지 논리에서 발전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금과 은 같은 귀금속이 화폐가 된 이유는 후버 대통령의 말대로 “우리가 (돈을 찍는) 정부를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만들어낼 수 없는 귀금속을 화폐로 한다면 귀금속의 신용이 정부의 신용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케인즈는 금본위제의 부활에 반대하면서 귀금속이 화폐로 쓰이는 것을 “금융과 신용의 진화과정에서 초보적이고 과도기적인 단계의 유물에 불과하다.”고 말햇다.

그러면 왜 은 대신 금이 화폐로서 지배적이 된 것일까? 금본위제로 압축된 것 역시 역사적인 우연이었다. 19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화폐제도는 금과 은을 모두 사용하는 복본위제였다. 그러나 복본위제의 문제는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금과 은의 교환비는 나라에 따라 다르고 정부의 공시비율과 시장의 비율이 다르게 마련이다.

다른 비율은 차익거래의 기회를 만들어 싼 곳에서 비싼 곳으로 금이나 은을 흐르게 만든다. 그런 일이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났다. 뉴튼이 조폐국장을 하던 시절 뉴튼이 계산한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우연하게 은값을 싸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금을 조폐국에 팔아 은을 사서 해외로 수출했고 은화가 영국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당시 금의 공급이 충분했고 경제규모가 금을 교환수단으로 해도 충분할 정도로 커졌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고 영국은 복본위제에서 사실상 금본위제로 옮겨갔다. 참고로 19세기 초 미국에선 반대 현상이 일어나 미국은 사실상의 은본위제였다.

그리고 19세기 영국에서 금본위제는 은행제도와 결합하여 새로운 도약을 이룬다. “영국의 화폐ㅔ제도는 영국의 정치제도와 마찬가지로 시행착오를 통해 발전해왔다. 영국에서는 공적인 화폐와 개인화폐가 함께 유통되면서 서로를 강화했다. 정부의 돈은 주화였으며 그중 대부분이 기니 금화였다. 그러나 1979년의 위기가 일어나기 100여 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발행된 지폐가 대규모 거래에서 주화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내내 은행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으며 은행이 대출금을 약속어음의 형태로 지불하는 것이 관례엿다는 점이다. 이 은행권은 기업들 사이에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돈처럼 유통되었다. 이처럼 계획 없이 성립된 구조의 결과는 엄청난 것이엇다. 많은 은행권이 정부가 발행한 주화를 대신하게 되자 돈의 공급량은 이제 은행의 신용대출금의 양과 직접 연결되었다.”

그러나 민간이 발행하는 지폐는 정부가 발행한 금화와 언제든 교환된다는 전제가 있기에 유통될 수 있었고 신용을 얻을 수 있었다. “다양한 형태의 개인지폐-환어음, 금세공인의 영수증, 영국 전역의 은행들이 발행한 은행권-는 언제나 (사실상의 중앙은행이 되어버린) 잉글랜드 은행의 은행권과 교환될 수 있었으며 잉글랜드 은행의 은행권은 언제나 금, 즉 정화로 교환될 수 있었다.”

굳이 이 은행권을 금화로 바꾸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은행권과 금의 가치가 바뀔 때는 사정이 달라졌다.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금의 시장가격이 상승하거나 외환시장에서 파운드화의 가치가 떨어질 때면 기니 금화 200개는 시티의 시장에서 210 파운드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었으며 해외의 금융시장에서도 201파운드 이상에 상당하는 가치를 가질 수 있었다ㅓ. 이럴 때는 금융시장에서도 201파운드 이상의 가치를 지닐 수 있었다. 이럴 때는 은행권 210파운드를 기니 금화 200개로 바꾼 다음 금융시장에서 기니 금화를 더 많은 액수의 돈과 바꾸면 더 높은 이윤을 올릴 수 있었다.” 이것은 비공식적이지만 강력한 통제 시스템이 되었다. 저자는 이것을 ‘금의 견제효과’라 부른다.

금의 견제효과 때문에 영국의회의 보고서는 금은 단순히 국내의 화폐만을 위한 기본이 아니라 선언한다. “금은 자국 화폐와 외환 환율의 가치를 모두 결정하는 진정한 조정자다.” 그렇기 때문에 “잉글랜드은행은 금값의 상승과 외환시장에서 파운드화의 약세현상이 보내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신호에 반응해야 한다. 이런 신호가 나타나면 잉글랜드은행은 신용대출을 즐여서 화폐 공급량의 증가를 제한해야 한다.” 중앙은행의 역할은 금본위제의 규칙에 따라 통화의 가치를 수호하는 것이란 말이다. “금값이 오르는 것은 돈의 양이 지나치게 많은 증거이다”

“금본위제의 근본은 자유시장이 금값의 변화를 통해 이 복잡한 작업을 정책 입안자들보다 더 잘 수행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엇다. 이런 구조 속에서 금은 통화량의 과잉이나 부족이 결코 발생하지 않도록 견제와 균형의 시스템을 떠받치는 것이어야 햇다.”

“1800년대 초에 영국이 금본위제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후 금본위제가 점점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재산 축적을 위한 금의 수여는 엄청나게 늘었다. 그리고 이때 재산 축적용으로 금을 원한 것은 개인이 아니라 중앙은행들과 미국 재무부 등이었다. 금을 비축해 두는 것은 투자자본의 갑작스런 유입이나 다른 금융센터로의 갑작스러운 유출에 대비하기 위한 중요한 방어수단이었다. 경제활동과 국제 무역 및 투자가 엄청나게 확대되고 있는 상황에서 금을 비축하는 것은 국가가 행동의 자유를 확보하고 새로운 자본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는데 필수적이었다. 창구에 와서 금을 요구하는 사람에게 즉시 금을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은 ‘안전한 돈’과 ‘안전한 은행’을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금을 벌어들이는 나라는 높은 평판을 얻은 반면 금을 잃는 나라는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 곳으로 여겨졌다.”

금을 얻고 잃는 것은 요즘식으로 말하면 무역적자를 내는가 흑자를 내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그 나라의 경제력과 신용의 척도로 여겨진 것이다. 금본위제는 영국이 만든 모든 제도가 그렇듯이 시행착오의 우연을 통해 창조되었다. 그러나 그 우연의 창조물은 일단 자리를 잡은 후엔 일종의 종교가 되엇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가 유럽의 정체성을 상징했듯이 금본위제는 유럽의 정체성이 되었으며 유럽의 번영을 보장하는 축복이며 번영을 위해선 지켜야만 하는 교리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금본위제를 채택한 국가들은 일종의 친목회 같은 것으로 발전했다. 이 그룹은 회원들이 국경 너머에 있는 세상이 강요하는 위험과 불확실성으로부터 서로를 보호해주는 배타적이고도 부러운 집단이었다. 영국은 이 그룹에서 특권을 가진 회원이었다. 아니 이 그룹을 만든 나라였다.”

이 클럽이 만들어진 과정은 이런 식이엇다. “독일은 대영제국의 식민지로부터 수입하는 원자재 대금을 지불하는데 점점 더 많은 파운드화가 필요해지자 이 수요를 맞추기 위해 영국과 똑 같은 시스템을 채택하고 싶어햇다. ‘우리는 금을 선택햇다. 금이 금이기 때문이 아니라 영국이 영국이기 때문이다'”

“화페들은 특정 무게의 금에 붙여진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화폐는 국경을 넘어 아무 문제없이 유통될 수 잇었고 화폐를 따라 상품과 사람이 자유롭게 어디든 이동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를 말할 때 세계화란 말을 쓴다.

금은 1차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세계경제를 관리했다. “정부가 아무런 안전망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체제 속에서 금본위제가 투기, 과잉투자, 지나친 경쟁으로 인한 불가피한 위기의 확산을 막아주었다. 금의 유출은 위험 신호 역할을 해서 중앙은행들이 곧 금리를 올리는 방어적인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만약 이런 조치가 상황을 제어하는 데 실패하면 중앙은행들이 개입해서 서로를 돕는 경우가 비일비재햇다. 신용에 대해선 의문을 품을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기 전에 다른 나라들이 신용대출을 해주겠다고 나선다는 것을 의미햇다. 그 결과 위기가 완화되면 이러한 대출금을 되갚는 것이 가능해졋고 시스템 전체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중앙은행들이 “서로 협조한 것은 고정된 교환율로 태환성을 유지하는 것이 경제정책의 기초하는 전제 때문이었다. 이 전제 앞에서는 다른 모든 문제들이 일단 뒤로 물러나야 햇다. 금본위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은 신용도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한 나라가 금본위제를 버리거나 금의 등가성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믿음-와 그러한 신용도가 보증하는 협조에 대한 믿음이엇다.”

당시를 말하는 벨르 에포크(Belle Epoch)란 말 그대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시스템은 국가의 통화량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사람보다 금을 위에 놓은 것”이라 말한다.

“만약 한 나라의 금이 외부로 유출된다면 외국의 자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하고 수입을 감소시키기 위해 국내경제를 억눌러야 한다.” 금이 유출된다는 것은 적자를 보고 있다는 말이다. 외환위기를 겪었을 때 IMF의 처방은 바로 적자를 보면서 흘러나가는 준비금을 끌어들이기 위해 금리를 올리는 금본위제 시대부터의 처방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겪었듯이 “여기에는 어떤 안전망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이윤이 급속하게 줄어든 기업은 물론 일자리를 잃거나 임금을 삭감당한 노동자들에게도 전혀 반갑지 않은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게임의 법칙이었다. 국내경제의 안정과 높은 고용률이라는 목적이 금 보유량을 방어한다는 목적보다 우위를 차지했더라면 금본위제 시스템은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금본위제가 다시는 부활할 수 없었던 이유이다.

“이때가 빅토리아 여왕과 에드워드 7세의 시대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이라면 터져나왔을 법도 한 정치적 항의는 19세기 유럽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앗다. 비록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될 정도에 불과햇다. 심지어 경제학자들 사이에ㅐ서도 거시경제학적인 견해와 경기순환 분석은 주류 이론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햇다. 이러한 관심을 표현한 것은 맑스 같은 재야의 인물들 뿐이었다.”

정치가들이 그런 재야의 목소리를 무시하기 힘들어졌을 때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더 이상 재야에 머물지 않게 되었을 때 금본위제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1차대전과 함께 금본위제의 조건들 대부분은 산산조각이 났다. “정치적 동맹, 정부의 재정, 대외채무, 세계금융에서 영국의 지도적인 위치, 산업 효율성의 상태 등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잇었다.”

그러나 “국제적인 금본위제는 마치 잃어버린 낙원의 추억처럼 과거 속에서 희미하게 반작이며 빅토리아 시대와 에드워드 시대의 안정, 조화, 우아함에 대한 모든 향수를 상징하고 있다. 이 향수에 덧붙여진 광채는 과거에 대한 헛된 환상이 아니라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 현실이 바로 눈앞에 있던 과거의 영광이었기에 금본위제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1918년의 휴전 이후에도 금본위제는 너무나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1차 대전이라는 피투성이 전쟁이 가져온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진에 의해 금본위제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버렷다는 생각을 감히 입 밖에 낸 사람은 없었다. 아니 이런 사실을 눈치챈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 거의 모든 나라가 금본위제를 회복하기 위해 엄청난 정치적 위험을 감수햇다.”

그러나 금본위제를 되살리려는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고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재난을 낳았고 금본위제는 자유주의 자본주의와 함께 사라지면서 벨르 에포크 시절의 첫번째 세계화는 막을 내린다.

“1930년대의 대공황은 1913년에 정점에 달했던 첫 번째 세계화의 종식을 가져왔다. (금본위제의 종말과 함께) 자본의 국제 이동은 사라졋고 국제무역을 위한 자금조달은 대단히 어려워졋으며 각국은 앞 다투어 보호주의 장벽을 구축햇다.” (아글리에타) 금본위제를 대체할 국제질서가 사라지면서 세계질서가 와해되었고 “다자주의는 종식되었으며 세계무역의 마비로 인해 금융위기로 초래된 경제위기는 더욱 심화되었을 뿐이다. 독일은 나치당의 지권과 더불어 경제 전반의 국가화를 선택햇다. 게인스식 해법을 채택한 미국은 뉴딜을 시행하고 대외 관세장벽을 더 높여 오로지 자국의 규칙에만 따르는 금융 시스템을 다시 구축했다. 다른 한편 프랑스가 주도하던 금 블록의 가맹국들은 디플레이션 함정에 빠졌다. 1929년의 위기는 세계경제의 완벽한 파멸, 국제관계ㅔ의 붕괴 및 각국의 민족주의로의 복귀로 귀착되엇다.” (아글리에타)

저자는 디즈레일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금본위제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린다: “1895년 그는 글래스고 상인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영국이 상업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누리며 번영할 수 있는 것이 금본위제 덕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망상일 뿐이다. 금본위제는 우리가 이룩한 상업적 번영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라고 말했다. 인류 역사상 여러가지 상황들이 한데 합쳐져서 세계적인 경제 시스템이 사람들의 기대대로 기능할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면 바로 이 시기가 그런 시대였다.

금본위제로의 회귀를 위한 몸부림에 자극이 되엇던 것이 전쟁 이전 시대에 대한 향수였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화폐의 역사에서 그 단순함과 우아함이 단연 돋보이는 시스템에 대한 욕망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금이 모든 것을 제대로 된 모습으로 되돌려줄 것이라는 생각은 앞뒤가 바뀐 생각이엇다. 금이 모든 것을 제대로 된 모습으로 되돌려줄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이 애당초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고 잇을 때만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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