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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브라이언 페이건 저/남경태 역
예지(Wisdom) | 2007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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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고고학자들은 기후변동이 인간사회를 변화시켯다는 것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기후변동이 농경이나 문명 같은 중대한 발전의 주요한 원인이라 보는 환경결정론은 오래전부터 학계에서 금기엿다.” 결정론은 언제나 극단성 때문에 오류로 증명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환경이, 기후변화가 무시되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생존을 위한 농경의 역학이다. 12천여년전 농경이 시작된 이래 사람들은 춥고, 습하고, 온난하고, 건조한 기후가 교대되는 주기 속에 살아왔다. 생존을 좌우하는 것은 농작물의 생산량과 다음해에 파종할 씨앗의 양이었다.”

 

인간도 먹어야 사는 동물이다. 인간 역시 먹이의 증감에 따라 인구가 결정된다고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먹이의 증감을 결정하는 가장 큰 변수가 기후의 변동이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기후의 변동이 식량의 증감에 영향을 주는 정도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능력을 취약성의 정도라 본다.

 

나는 인간이 장단기적 기후변동에 점점 더 취약해졌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기후변동에 대응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고 비용도 커졌다. 수만년 동안 인구는 거의 늘지 않았ㅆ고 모두 수렵과 야생식물의 채집으로 살았다. 생존하려면 기동력이 더 뛰어나고 기회를 잘 포착해야 했다. 하루를 살아가기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기후의 충격을 완화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 이를테면 무리 전체가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든가 무리의 일부를 나누어 다른 지역으로 보낸다든가 원치 않는 음식도 먹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취약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움직여왔다고 저자는 본다. 저자는 농업이 시작된 것 자체가 기후변화와 취약성의 정도를 높이는 사이클 때문이었고 역사는 그 사이클이 계속 강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고 말한다.

 

농업이 처음 시작된 곳은 중동지역이다. 빙하기가 끝난 기원전 13000년 이후 서남아시아는 온난한 환경으로 바뀌면서 도토리를 품은 참나무 숲이 크게 늘었다.” 식용식물이 많아지면서 사람들은 이제 임시 근거지에 살지 않고 제법 큰 규모의 영구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도토리와 피스타치오를 많이 수확했다. 그 두 견관는 무엇보다 저장이 용이했다. 도토리와 피스타치오는 한 장소에서 오랜기간 머물기에 충분한 식량을 생산했다. 그러나 풍요에는 대가가 따랐다.” 도토리를 먹을 수 있게 가공하는데 막대한 노동력을 지출해야 했다. 일곱시간을 투여한 뒤에야 가족이 며칠 먹을 음식재료를 만들 수 있었다. 도토리가 주식이 되면서 공동체의 생활이 달라졌다.” 긴 노동을 할 정주지가 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나 식량공급이 안정적이 되면서 인구가 급증했고 소폭의 기후변동에도 매우 취약한 한계환경을 유발했다. 그들은 환경적 취약성의 문턱을 넘은 것이다.”

 

기원전 11000년경 마침내 심한 가뭄이 닥쳤다. 북미에서 빙하가 녹은 민물(아가시호)이 대량으로 래브라도 해로 방출되엇다. “아가시의 녹은 물은 명분 농도가 짙은 멕시코 만류의 위로 떠올라 일시적으로 뚜껑처럼 작용하면서 난류가 식어 가라앉는 것을 막았다.” 대서양 순환이 멈춘 것이다. “추위는 1천년 동안 지속되었다. 1천년의 기간을 영거 드리아스기라 부른다. 북쪽이 다시 빙하로 변하고 대서양 순환이 차단되자 멀리 서남아시아에 즉각 기후변화가 일어났다.

마지막 빙하기처럼 차가운 역선풍이 다시 불었다. 서남아시아는 1천년동안 길고 심한 가뭄에 시달렸다.”

 

그리고 숲이 사라졌다.그러나 사회적 유연성과 기동성의 고전적 전략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오랜기간 평안하게 살았던 결과 촌락 인구는 300~4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인구 밀도는 떠돌이 생활을 하던 시절에 비해 훨씬 높았다.” 그러나 영구정착지는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식량사정만 더 악화될 따름이엇다.” 많은 촌락이 버려졌다.

 

물론 처음부터 버려진 것은 아니다. 뭔가 방법을 찾으려 했고 기원전 10000년경부터는 합당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식물을 재배하여 수확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터키 동부에서 외알밀의 재배는 급속히 퍼져나갔다. 닭과 나비나물도 마찬가지엿다. 그밖에 에머밀, 완두콩, 렌즈콩, 아마 등도 아주 짧은 기간에 길들여졌다.” 그러나 그정도로는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엔 부족했다. 사람들은 흩어졋다.

 

흩어진 곳에서 ,들은 야생 식물의 채집을 보충하기 위해 재배 실험을 계속했을 것이다. 몇 세대가 지나자 경작된 밭의 산출량이 늘기 시작했고 이 임시 전략은 곧 온전한 농경으로 변모했다. 영거 드리아스기가 끝나고 온난화가 재개되자 농경은 생활의 기둥이 되었다. 이윽고 기원전 9500년경 버려졌던 언덕에 새롭고 전혀 다른 거주지가 탄생했다.” 도토리와 피스타치오도 돌아왔다.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농부가 되었기 때문이다.농업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농업과 함께 취약성의 사이클이 다시 시작된다.

 

메소포타미아 남부는 경작 가능한 밭, 습지, 사구가 많으나 대부분은 염분이 섞인 황량한 사막이다. 강우량은 거의 없다. 자연의 극단적인 힘들이 사방에서 압박해오는 곳이다.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여름, 모진 겨울바람, 사나운 폭풍, 게다가 강물이 범람해 삽시간에 촌락을 쓸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원래 이 지역이 그렇지는 않았다. ‘기원전 10000~기원전 4000년에 이 지역은 여름 기온이 높았고 강우량도 많았다. 당시 메소포타미아의 강우량은 지금보다 25~30% 많았을 것이다. 강우량의 대부분은 여름 몬순에서 나왔는데 강우의 상당 부분이 증발했기 때문에 전반적인 습기의 양은 일곱 배나 많았다. 소빙하기가 끝나고 갑자기 온난화가 재개되자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목축을 병행하는 농경사회들이 퍼져나갔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최초의 거주지가 등장한 것은 소빙하기가 끝난 기원전 5800년경이었다.”이 당시의 메소포타미아의 삶은 “1천여년 동안 작고 분산된 사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3800년경 기후가 갑자기 건조해졌다. 실은 1천년전부터 서남아시아와 지중해 동부지역에 있었던 추세였다. 지구표면의 일사량이 줄어들었다. 동시에 서남아시아 몬순의 여름 강우량이 줄었고 경로도 동쪽으로 이동했다. 비는 양도 줄었을 뿐 아니라 시기도 늦게 내리기 시작해 빨리 그쳤다. 여름의 범람은 수학이 끝난 뒤에 발생했고 규모도 훨씬 작아졌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강우량에 상당히 의존해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관개시설에 의존해야 했다. 잉여식량은 없어졋고 오히려 식량부족에 시달렸다.”

 

농업이 시작되기 전이나 농업이 막 시작된 무렵이라면 방법이 있었다. 이동하는 것이다. 실제 메소포타미아인들도 그렇게 대응했다. 농업을 버리고 유목민이 되거나 고지대로 옮겨가 농업을 계속하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눌러앉아 수렵채집을 농업과 병행했다. 그러나 농업덕분에 늘어난 인구가 너무 많았다. 성공이 재앙의 원인이 되었다.

 

해법은 사회조직을 재편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1년 내내 관개가 필요했다. 수로를 통해 귀중한 물을 주변의 사막으로 돌릴 수 있는 위치의 더 큰 도시나 마을로 전략적이고도 현명한 이주를 감행했다. 우르처럼 성장하는 도시는 인간생활의 요충지가 되었다. 관개시설은 엄중하게 감독했다. 새로운 유형의 관리가 신전의 창고에 배치되어 농작물 생산량과 곡식 비축량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이때까지 물공급은 중앙정부가 아니라 가정과 사회의 관심사였으나 도시의 힘이 강력해짐에 따라 사정도 달라졌다. 수확기가 되면 신체건강한 모든 사람이 밭에 나가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며 농작물을 수확했다. 많은 관리들이 수확된 농작물을 세금으로 거두어 (가뭄에 대비해) 정부 식량창고에 비축했다. 사람들은 점차 국가를 위해 일하고 그 대가로 곡식을 받아 생활하게 되었다.”

 

기후사정은 더욱 악화되어갔다. 그러나 사회조직을 바꾼 대응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기원전 3100년경 남부 도시들은 세계최초의 문명권을 이루었다. 수메르 문명은 경쟁이 심한 도시국가들로 구성되었는데 각도시들은 고도 조직된 후배지를 거느리고 이웃한 도시들과 영토를 놓고 각축을 벌였다. 각 도시들은 관개수로를 단단히 방비했다. 물에 대한 권리와 관개된 토지가 평화와 전쟁을 가름하는 세상이었다. 도시가 생존의 수단이 되자 전역에서 도시화의 물결이 거세게 일었다. 기원전 2800년 무렵에는 수메르인의 80%이상이 도시에 살았다.”

 

도시화는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이었고 그것은 성공했다. 그러나 한가지를 해결했지만 동시에 취약성의 수준을 더 높였다.

 

기원전 2200년경 북쪽 멀리에서 대규모 화산분출이 일어났다. 지중해 동부의 방대한 지역에 그뒤 278년동안 지속될 가뭄이 시작된 시기였다. 아나톨리아 고지에는 비와 눈이 내리지 않아 강은 더 이상 범람하지 않았다. 가뭄은 비옥했던 하부르 북부 평원을 사막으로 바꿔놓았다.”

 

도시화는 이런 수준의 변화에는 견디지 못했다. “농업경제는 비틀거리다 이내 붕괴했다. 기원전 2000년경 도시에 사는 수메르인의 수는 50%를 밑돌았다.”

 

생존에 중요한 것은 규모다. 석기 시대의 소규모 무리는 새 사냥터를 찾아 이동하여 그곳에 최대한 머무는 방식으로 가뭄에 대처할 수 있었다. 또 농경촌락은 이웃 촌락에서 비상식량을 얻거나 교역 관계를 통해 알려진 물사정이 나은 지대로 이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르 같은 대도시는 혹독한 가뭄의 파급효과로 인해 꼼짝없이 대규모 탈주와 기근을 겪을 수 밖에 없었으며 적응이나 회복이 쉽지 않었던 탓에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소규모 재앙은 거뜬히 방어할 수 있을만큼 성장했으나 대규모 재앙에 대해서는 오히려 취약성이 더 커졌다.”

 

취약성의 사이클은 판돈이 더 올라가 로마시대에 재현된다. 로마는 야만족과의 투쟁과 함께 성장했다. 첫번째 적은 켈트족이었고 켈트족을 제압하면서 로마는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저자는 켈트족과 로마의 대결을 기후대의 대항으로 해석한다. 켈트족의 농경은 대륙성 기후대에 적합했다. 대륙성 기후대가 남하할 때 켈트족도 같이 남하했고 로마는 이탈리아로 남하란 그들과 만났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경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 사이의 추이대가 이동하기 시작해 지금의 부르고뉴까지 북상했다. 그 결과 켈트 지역의 남쪽에 온난건조한 여름과 습한 겨울의 지중해성 기후가 자리를 잡았다. 많은 도시 인구를 위해 밀과 기장 같은 몇가지 작물을 광범위하게 재배하는 로마식 농경은 건조한 남유럽 환경에 매우 적합했다. 추이대가 북상함에 다라 고마의 힘이 급격히 증대했다. ‘로마의 평화는 북상하는 추이대를 따라가며 꾸준히 켈트족의 땅을 잠식햇다. 기원전 2세기 중반 켈트족의 땅은 로마의 속주가 되엇다. 온난한 기후 조건은 로마 제국의 전성기 내내 지속되었다. 로마의 장점은 3가지, 즉 잘 조직된 군대. 도로와 해로 같은 기반시설, 군대와 도시 주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효율적인 농업생산력이었다.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비롯한 모든 속주들은 로마인들을 부양했다. 결국 모든 것은 사회의 주식이 된 곡물을 대량생산하는 능력에 달려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국가와 튼튼한 경제에 어울리지 않게 기후에는 놀랄만큼 취약했다. 문명의 조직도가 낮았더라면 오히려 제국은 기후의 압박을 거뜬히 이겨냈을 것이다. 일반적인 추위와 가뭄주기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대규모 엘니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유럽의 기후대가 크게 변동하고 그에 따라 기온과 강우량이 달라지자 로마의 지배는 큰 타격을 받았다. 500년에 서유럽의 날씨는 더 추워지고 습해졌으며 갈리아는 곡식의 대량생산이 전보다 훨씬 더 어려워졌다. 대륙성 기후대와 지중해성 기후대의 경계는 또다시 북아프리카로 내려갔다.”

 

산업혁명 이후 우리는 잠재적 격변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시대로 성큼 들어섰다. 더구나 그 위험성은 지구를 온난하게 하고 극단적 기후변동의 가능성을 증대하는 우리 자신의 능력 때문에 더욱 커졌다. 만약 그린란드의 빙상이 녹으면서 그 많은 물이 북대서양으로 흘러들어 영거 드리아스기처럼 멕시코 만류가 갑자기 끊긴다면 어떻게 될까? 유럽은 수십년쯤 지나면 북극권 기후가 되지 않을까? 기후는 문명의 형성을 돕지만 자비로운 방식으로 돕지는 않는다. 충적세의 예측할 수 없는 기후 변덕은 인간 사회를 압박하여 적응하거나 사멸하게 만들었다. 기원전 10000년경 영거 드리아스기에 서남아시아에서 농경으로 전환한 경우처럼 성공적인 적응도 있었지만 가뭄으로 멸망한 티와나쿠처럼 실패한 사례도 있었다. 예전의 많은 문명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드물게 일어나는 대규모의 재앙에 취약하며 단기적 가뭄과 이례적인 호우 같은 작고 평범한 압박에 대처하는 능력만 나아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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