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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스크랩] 사랑은 어떻게 잃어버려야 하는가? -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 | 정혜윤 2008-12-29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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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정혜윤 PD의 어느 날 …을 알게 되었다
가장 아름다운 신화들조차 불길함을 풍기는 이유, 그건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그 불안은 개인이 만들어내는 게 아니고 한 사회가 은밀하게 함께 만들어내고 나누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잃어버리는 것은 개성이다. 어느 날 깊은 밤을 날아온 에로스가 프시케에게 말한 것은 딱 하나, ‘눈을 뜨지 마세요, 눈을 뜬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난 어려서 이 이야기를 읽고 기겁을 했다. 어떻게 눈을 뜨지 않을 수 있겠어요? 보고 싶은걸요. 내가 에로스와 프시케 이야기를 읽고 교훈을 얻어 눈을 뜨지 않았더라면 뭔가를 찾아 헤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돌아보지 않았더라면 눈물 흘리는 소금기둥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처럼. 하지만 어떻게 그게 가능했겠는가? 내가 믿지 않은 것은 불안이었고 내가 믿은 것은 고생담이었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순수함이었고 내가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개성이었다. 내가 싫어한 것은 공허였고 내가 좋아한 것은 긴 손가락과 손을 꽉 잡는 공모와 획책이었다.

『순수의 시대』의 올렌스카 백작부인이 눈을 뜨고 본 것은 고르곤(메두사)의 눈이다. 신화 속에서 메두사를 본 사람들은 누구나 돌이 돼버린다.

“아 그래야만 했어요, 난 고르곤을 보아야만 했어요.”
“흠 그것이 당신을 눈멀게 하지는 못했소. 당신은 고르곤이 별 볼일 없는 늙은 요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던 거지.”
“고르곤은 아무도 눈멀게 하지 않아요. 하지만 사람들의 눈물을 말려버리죠.”

- 올렌스카 백작부인과 뉴랜드 아처의 대화 중에서

영화 <순수의 시대>(1993)의 한 장면

『순수의 시대』를 휙 던져버릴 수 있는 사람은 뭘 모르는 사람이거나 행복한 사람이거나 내부의 균열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살면서 아직 그런 사람들을 한 명도 만나 보지 못했다. 이 글은 상상력의 힘으로 읽는 글이 아니지만 읽는 동안 상상으로 채워야 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평온하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이 글은 사람을 행동하도록 자극한다기보다는 슬픔에 젖어 사색하게 하는 글인데 그 근본 감정은 애절함이다. 엄밀히 말하면 사랑의 애절함이라기보다는 사랑을 잃는 ‘방법’의 애절함이다. 이 글은 원하는 것을 절대 갖지 못하게 되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인데 가장 비통한 것은 누구라도 그런 일을 겪고 난다면 자주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즐겁게 웃는 사람들 속에서, 어스름 풍경 속에서, 예의 바른 대화 속에서, 기차역에서, 백화점에서, 눈밭에서, 극장에서, 브라운관 앞에서, 그러다 결국은 인생에 눈을 감게 되는 것이다.

1870년대 1월 어느 날 뉴욕, 파우스트 공연 날, 뉴랜드 아처는 오페라 하우스 박스석 문을 열고 들어설 순간을 마음속으로 정해 두었다. 마르그리트가 “그는 날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라고 영혼으로 절절하게 노래 부르며 데이지 꽃잎을 뿌리는 바로 그 순간이 아니라면 도대체 다른 어떤 순간일 수 있겠는가?

뉴랜드 아처는 명문가의 아들인데 머리글자 이니셜을 푸른색 에나멜로 새긴 은빗 두 개를 사용해 가르마를 타고, 사람들 앞에 나타날 때는 반드시 단춧구멍에 꽃을 꽂고 나타나는 수려한 용모의 멋쟁이 변호사다. 그는 조용하고 자제할 줄 아는 젊은이로 작은 사회에서 규범에 순응하는 것이 제2의 천성이 된 지 오래라서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튀는 행동은 기품있게 조절할 줄 안다. 오페라 하우스엔 그의 사랑스러운 약혼녀, 뉴욕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메이가 조각처럼 앉아 있었다. 그가 메이를 몹시 사랑하긴 하지만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은 개성적이라기보다는 전형적인 표정이라서 그리스 여신의 모델로 포즈를 취하도록 선택된 인간 같았다. 그녀의 사물에 대한 관점은 늘 변함없이 똑같았는데 그것은 그가 자라온 세계의 모든 사람들의 관점이었고 그가 늘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무시해 왔던 바로 그 관점이었다. 메이는 대단히 단순하고 평범한 결혼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항상 성실하고 용감하게 잘 해나갈 것이다. 그녀는 전통을 따르고 옛날부터 이어받은 사고방식으로 판단하는 것의 수호여신 같았다. 뉴랜드 아처는 가끔은 메이가 그를 전혀 꿰뚫어보지 못해서 실망했다.

그런데 그날 밤 오페라 하우스의 뉴욕 상류층들은 한 인물의 등장으로 경악을 금치 못했고 술렁댔다. 그 언짢은 소동의 주인공은 메이의 사촌 언니인 엘렌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수 년 전 파리 튈를리 궁전의 무도회에서 대단히 부유하고 유명한 올렌스카 백작을 만나 결혼했는데 몇 년 뒤에 비서의 도움을 받아 궁궐과도 같은 집을 탈출했고 그리고 어쩌면 그 비서랑 동거를 했을지도 모른다는 추문이 돌고 있었다.

뉴욕 사교계는 그녀의 등장에 일사분란하게 행동했다. 남부끄러운 꼴이 되는 것은 명문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용납할 수 없었다. 자기가 속한 부족의 관습과 예절 하나가 온 세상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문제인 그들에게 가장 상상할 수 없는 일은 누군가가 예법을 어기는 것이었고 예법을 어긴 자는 추방되어야 한다. 뉴랜드 아처만큼은 주위 사람들이 그런 문제로 복닥거릴 동안에 어딘가에 진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진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한다는 점에서 좀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메이의 부탁을 받고 엘렌 올렌스카를 돌봐주던 뉴랜드 아처는 엘렌 올렌스카 백작 부인의 말이나 행동, 반응이 그의 가치를 뒤집고 있으며 그에게 놀라움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아처가 속으로 혼자 동경하고 적절히 타협하던 정열에 몇 마디 말로 간단히 인간의 얼굴을 부여해 버렸다. 어느 날 밤 그가 책장을 뒤적이며 매 페이지마다 엘렌 올렌스카란 여인의 환영을 부여하는 장면은 사랑에 빠진 사람에겐 낯익은 풍경이다. 그녀가 아름다웠을까? 글쎄 어쨌든 그녀는 다르다고 아처는 생각했다. 어느 날 사교계의 견고한 벽에 부딪혀 외로움에 지친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아처에게 이곳의 모든 사람들과 똑같아지고 싶다고 말을 한다. 그러자 아처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아무리 해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지는 않을 거예요.”

뉴랜드 아처와 엘렌 올렌스카는 서로 사랑했다. 올렌스카 백작부인이 경이로울 만큼 서슴없이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세계에 있는 것을 흥분감으로 지켜보던 아처는 그녀 때문에 자신의 인생 전체가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생각했고 올렌스카 백작 부인은 아처가 불성실과 무관심, 잔인함으로 얻은 행복을 싫어한다는 점 때문에 그를 사랑했다. 그의 친절함을 사랑했다. 그러나 가족들이 상처받는 것을 원치 않았던 올렌스카 백작부인의 주장대로 뉴랜드는 메이와 결혼한다. 결혼식장에서 그는 하객들을 보면서 ‘이건 오페라 하우스랑 똑같잖아!’라고 생각한다. 신혼기간 동안 뉴랜드 아처는 훌륭한 남편이자 사위였다. 정해진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안 봐도 환히 알 수 있는 집이 그의 집이었다. 그 문을 열면 메이와 습관, 명예, 그와 주변 사람들이 한결같이 믿어온 오래된 예의범절이 그득했다. 메이는 평화, 안정, 도망칠 수 없는 의무가 주는 안정감을 상징했다. 메이는 남편을 위한 내조라면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는 여자였다. 살면서 겪은 경험이 그녀 얼굴에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고 고요히 사라져 버리는 게 놀라웠지만 최고의 경지에까지 이른 세련됨은 내면에 커튼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순수를 상징했다. 그 순수는 훈육과 전통의 결과였기 때문에 견고했다. 메이의 투명에 가까운 순수한 푸른 눈동자는 세상을 담거나 반영하는 반사창이 아니라 도덕, 윤리, 예법을 반영하는 반사창이었다. 뉴랜드는 끝없이 공허한 시간을 견디면서 아무런 사건도 겪지 않은 채 늙어갈 남자가 될까 두려웠지만 자기 역할을 잘했다.

결혼 후에 올렌스카와 아처 둘이서 스치듯 만나 나눈 사랑의 대화들은 혼자서 수 만 번 상상하고 되뇌 본 것이다. 선언문 같고 단 한 번뿐인 올렌스카의 키스 장면은 너무 짧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치맛단의 사그락거리는 소리, 눈빛, 웃음소리, 마차 소리, 파도 소리, 포크 소리까지 모조리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 모든 소리들이 오로지 그들의 마음속의 격렬한 격정을 대신 전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당신은 나에게 진짜 삶을 처음으로 엿보게 해주었으면서 동시에 가짜 삶을 계속 살라고 부탁했소. 그건 인간이 인내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거요.”
“아,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난 견디고 있는데….”
“당신도 그랬다고… 당신도 지금까지 죽 견디고 있었다고? 그렇다면 당신의 인생은 뭐란 말이요?”
“아, 내 삶이 당신 삶의 일부인 한….”
“그러면 내 삶은 당신 삶의 일부가 되고?”
“그러면 완전해진다. … 어느 쪽에게나?”
“예.”


(이 말을 들은 아처는 세상 천지에 자기 홀로 있던 것 같은 외로움을 싹 잊어버렸다.)

“왜 (유럽으로) 돌아가지 않는 거지?”
“당신 때문인 것 같아요.당신은 적어도 이런 지루함 속에 아름답고 섬세하고 정교한 어떤 것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 주었어요. 내가 다른 삶에서 가장 좋아했던 것조차도 그에 비하면 싸구려로 보일 정도였어요. 당신에게는 아주 솔직해지고 싶어요. 저 자신에게도 오랫동안 이런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어요. 당신이 나를 어떻게 도와줬는지, 당신이 나를 어떻게 바꿔 놨는지 말할 수 있도록.”


(사람의 핏속까지 바꿔놓지 않는 사랑은 사랑도 아니다. 핏속까지 바꿔놓지 않은 윤리는 윤리도 아니다.)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서로 가까이 있는 거예요. 그때는 우리 자신으로 있을 수 있죠.”

(이 말을 하고 올렌스카 부인은 떠날 생각을 한다.)

올렌스카 백작 부인이 갑자기 몸을 돌려 양팔을 벌려 아처를 부둥켜안고 그의 입술에 자기의 입술을 포갰을 때 바로 그 순간 가스등 불빛이 창문 안까지 비추고 깜짝 놀란 그들이 순식간에 떨어져 앉던 것만큼이나 애틋한 장면들은 책 속에서 모두 낮고 희미한 분위기를 배경으로 한다. 올렌스카의 얼굴이 창 너머로 휘날리는 눈발과 함께 짙어가는 어스름을 배경으로 점점 흐릿해져가는 것, 아처의 눈물이 겨울바람 때문에 얼어버리는 것, 아처가 어스름이 깔리는 황량한 정원, 쓰러져 가는 집, 떡갈나무 숲을 보면서 올렌스카 부인을 꼭 찾아낼 것만 같은 장소라고 생각하는 것, 아처가 침대에서 메이의 옆에 누워 창으로 비스듬히 새어 들어온 달빛을 보면서 달빛이 희미하게 빛나는 해안을 지나 홀로 마차를 타고 귀가했을 엘렌 올렌스카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것, 서재에 혼자 앉아 있는 것, 낮은 등불이 있던 올렌스카의 거실을 생각하는 것.

영화 <순수의 시대>(1993) 포스터
‘사랑한다.’ 환희에 넘친 마르그리트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메아리치는 파우스트 공연을 다시 보러갔을 때 뉴랜드 아처는 그 옛날의 뉴랜드 아처가 아닌데, 마르그리트가 파우스트의 팔에 쓰러질 때 예법을 벗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기 때문이다. 올렌스카는 가문의 보이지 않는 압력과 음모로 파리로 떠나게 되는데 뉴랜드 아처는 올렌스카 백작부인을 따라 파리로 가고 싶어 한다. 그런데 모든 것을 알고 있던 메이는 임신임을 알린다. 메이가 연 올렌스카 백작 부인을 위해 연 작별 만찬 풍경은 정확히 이렇다.

그들은 아직 그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수단을 써서 그와 불륜 상대자를 성공적으로 갈라놓았다. 이제 일족 전체가 그런 내막은 알지도 못하고 상상해본 적도 없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뗐다. 그것이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빼앗는 옛 뉴욕식의 방식이었다.

미셀 파이퍼가 올렌스카 백작부인으로 나오는 영화 <순수의 시대>에서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백작부인이 유럽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작별 만찬장을 나와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대형 란다우 마차 안의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앞만 똑바로 보는 그녀의 목의 힘줄과 안간힘이 내 눈에 보이는 듯해 내 혈관이 터지는 줄 알았지만 책에서 아처는 그저 그녀의 갸름한 얼굴과 빛나는 눈을 희미하게 보았다고만 말한다.

삼십 년이 흐른 뒤 뉴랜드 아처의 삶은 이렇게 표현된다.

그는 선량한 시민이었다. 뉴욕에서 지나간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은 자선 활동이나 시정, 예술에 새로운 움직임이 있으면 언제나 그의 의견을 구했고 그의 이름을 빌리고 싶어 했으며 장애 아동을 위한 최초의 학교개교, 미술관 개편, 새 도서관 건립, 새 실내악단 구성 등 문제가 있을 때마다 그에게 물어봤고 그의 매일 매일이 고상한 일로 빽빽이 채워졌다. 남자라면 누구나 살아볼 만한 삶이었는데 그가 놓은 것은 인생의 꽃이었다. 엘렌 올렌스카를 생각하면 책이나 그림 속 가공의 연인을 생각할 때처럼 막연하고 평온한 기분이 되었다. 그녀는 그가 놓친 것 전부를 한데 뭉뚱그린 환상이 되었다.

나는 뉴랜드 아처가 남자라면 누구나 살아볼 만한 삶을 살았다고 회상될 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의 삶은 결과적으로 수월한 타협이었고 중요한 어떤 것을 포기한 것이 명백한 것이기 때문에 내 맘이 복잡했다. 갈망에 가득 찼던 남자들이 어느 날 윤리나 도덕에 기댈 때 그가 찾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변명거리이다. 욕망은 포기하지 않는 게 제일 좋고 포기해야 하더라도 시련을 극복해낸 성공 스토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모름지기 진짜 아름다운 여자란 남자의 가슴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여자이고 남자를 어떤 확신에 사로잡히게 하는 여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여자를 잃어버린 남자에게 세계는 의무와 예법으로 가득 찬 낯선 집이 된다. 나는 그래서 자주 길을 잃는 남자들에게 무척 관대하게 굴 수밖에 없다. 『순수의 시대』에서 사회적인 외벽을 통과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삶보다 위대한 개인은 없었고 모두 자기 삶에 충실했다. 위대한 개인에 가장 근접한 사람은 엘렌 올렌스카겠지만 아마 그녀는 열정 때문에 무척 고독했을 것이다. 나는 왜 둘이서 단 하룻밤도 같이 보내지 못했을까 불만스럽다. 그들은 왜 하룻밤도 고함을 지르며 싸우지 않았을까? 비밀만이 영혼을 키운다는 것을 믿는 나는 그들이 단 하루도 피 흘리는 짐승이 되지 않고 선선히 받아들여서 안타까웠다. 그것 또한 사회적 예법이었을까? 궁금하다.

올렌스카 부인이 말한 사람들의 눈물을 마르게 하는 오늘날의 고르곤은 무엇일까? 순수? 갈망? 사회적 추방? 윤리? 전통?

어쨌든 한 번 사랑한 것을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게 된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 덕택에 역설적으로 세계는 별 큰 일 없이 해피엔드이다.

소설에서 잊지 못할 두 장면을 꼽는다면 다음의 두 개다. 첫 장면은 정체성의 상실과 사랑 혹은 사회적 연결망의 상실과 사랑의 관계에 대해 말해주기 때문에 좋다. 우리 모두 사랑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한 한정 치산자가 되는 영광과 모욕을 누려야하니까.

아처는 자기 마음 속에 일종의 성소를 만들어놓고 비밀스러운 생각과 열망 가운데 그녀를 간직해 두었는데 그곳이 그의 삶이자 이성이 활동하는 유일한 장소가 되었다. 거기에 읽은 책, 정신의 자양분이 되는 생각과 감정, 판단과 공상을 가져다 놓았다. 바깥의 실제 삶이 펼쳐지는 무대에서는 갈수록 비현실적이고 불만족스러운 느낌만 커져갔고 넋을 잃은 사람이 자기 방에서도 가구에 여기저기 부딪히듯이 익숙한 편견과 전통적인 관점과 이리저리 충돌했다. 넋이 나갔다. 가장 현실적인 것과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서조차 마음이 떠나 버려서 그들이 아직도 자기가 거기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리고 소설의 마지막에서 올렌스카 백작부인의 파리 아파트 창문 바람에 펄럭이던 흰 커튼을 보면서 아처가 돌아서는 장면.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어떻게 사랑을 잃어야 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한 번 사랑한 것을 영원히 사랑하는 방식으로만 잃어버리고 싶다. 혈관 안에 피만 흐르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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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침대와 책>을 시작하며 | 정혜윤 2008-12-0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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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정혜윤 PD의 침대와 책
어느 해 겨울, 나는 방콕에서 코사무이로 가는 방콕항공 비행기를 탔다. 갈색 피부의 타이 스튜어디스의 이국적이면서도 단정한 용모를 흘낏거리기도 무료해서 기내 잡지를 꺼내 읽었다. 타이의 수많은 섬에 흩어져 있는 고급 리조트 광고가 태반이었다. 내 목적지인 코사무이 리조트 광고가 유달리 많았다. 호텔 광고의 사진은 한결같이 세련되고 유혹적이었다. 에메랄드 바다, 태양, 야자수, 비치, 물이 철철 넘쳐흐르는 수영장, 잘 그을린 여자의 몸, 샌들, 슬리퍼, 식탁보, 음식, 와인이 이 각도 저 각도로 생생하게 찍혀 있어서 내가 그 사진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간다는 게 자랑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내 동공이 먼저 활짝 확장하는 사건이 생겼다(태고적부터 뻔뻔한 남자가 미인을 발견하는 그 방식으로 몸의 반응이 먼저, 정신의 각성이 나중이었다.) 한 장의 광고 사진(!) 때문이었다. 그 광고 역시 리조트 광고였다. 나를 놀라게 한 광고 사진은 딱 한 컷, 침대 사진이었다. 사진 속에는 검은 침대와 깨끗하게 정돈된 흰 시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리조트의 이름은? 바로 ‘라이브러리(도서관)’였다. 열대 리조트의 이름이 라이브러리인 것과 열대 리조트 광고가 달랑 침대 하나인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나를 자극했다. 우리가 기를 쓰고 바다를 찾아가는 이유를 그 광고가 다 설명해 버린 듯했다.


그 광고를 보니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호텔방>이 떠올랐다. <호텔방> 그림 속엔 홀로 있는 여자가 나온다. 그 여자는 여행 중인 듯 침대 옆에는 여행 가방이 놓여있다. 그런데 그녀는 여행 가방을 풀지도 않은 채 붉은 속옷만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걸터앉은 그녀가 하는 일은 두툼한 책 한 권을 읽는 것이었다. 책 읽기에 꽤 몰두한 그녀의 방은 어두웠고 가구는 무미건조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고개 숙인 목선만큼은 어두운 방안에서도 오롯이 아름다웠다. 나는 그 그림에 몹시 마음이 끌렸다. 여행지의 낯선 호텔에서 샤워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책을 읽는 그녀의 모습은 현실 속의 나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피곤과 불안과 염려와 설렘과 기대와 내일의 일을 책으로 대치해 버리는 것은 나의 가장 오래된 버릇이니까.

내 직장 바로 앞에 있는 작은 내 침실엔 거대하고 납작하고 아주 낮은 다다미 침대가 놓여 있다. 그 침대는 삼면이 검은색 나무 프레임으로 둘러싸였다. 발치 부분 나무 프레임의 한가운데는 은도금이 되어 있어서 가끔 얼굴을 비춰볼 수도 있다. 헤드 부분엔 푸른 하늘과 불안정한 하얀 구름과 작고 검은 새가 그려진 커튼이 벽화처럼 붙어 있다. 침대의 프레임엔 수많은 책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다. 나는 마지막 졸음이 쏟아지는 순간 손을 뻗어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책을 읽는 버릇이 있다. 그 나무 프레임을 채우려고 새가 모이를 집어 나르듯 많은 책을 사 날랐다. 그러므로 내 침대는 내 둥지였던 셈이고 밤마다 나는 나 스스로 나 자신을 키우는 어미 새 역할을 했던 것이다. 옆으로 누워 책을 읽다가 가끔 골반 한쪽이 내려앉을까 자세를 바꾸는 것 말고는 오로지 눈동자만 움직이는 그 시간이(!) 내 내장 지방이 쌓이는 시간이었던 동시에 내가 간신히 인생의 해답을 얻어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처음 이 침대를 들여놓던 날, 잠들 때 잊지 않으려 중얼거렸던 문장은 백석의 문장이었다.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라는 시의 첫 구절을 기억하고 그 다음 날 거울에다 아름다운 나타샤가 나귀를 타는 장면을 분홍 립스틱으로 그려놓았다. 그 다음 날 읽은 책은 『인간 등정의 발자취』였다. 그 책에는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도약하기 직전의 사진이 인간의 고매한 정신의 비약을 설명하는 상징으로 나온다. 그 책을 읽고 잠든 날 아침, 나는 도약하는 자세를 한 내 사진을 찍어 보았다.(사진은 요샛말이 각이 안 잡혀서 민망했다.)

침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콜레트라는 프랑스 작가가 생각난다. 어떤 이가 그녀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녀는 평생 자신의 독서에 충실했다. 곳곳에서 그리고 삶의 모든 단계에서 그는 방해받지 않을 장소, 오로지 책하고만 있을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얻으려고 애를 썼다. 생의 마지막 몇 년간, 질병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그녀는 애정에 차서 뗏목이라 불렀던 침대를 스스로 거의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방문객을 맞이했고 80회 생일을 축하했으며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나의 80회 생일날 이벤트를 미리 정해놓았다. 나는 레이스가 잔뜩 달린 잠옷을 입고 포근하고 부드러운 거위털 이불을 덮고 가냘픈 손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나의 침대 곁으로 불러들일 것이다. 그 주의 신간 정보도 빼놓지 않고 물어볼 것이다.

맛집을 추천하는 책도 있고 술집을 추천하는 책, 와인과 커피와 옷과 자동차와 여행지와 박물관, 온갖 것을 추천하는 책이 있고 나도 그 책들 덕에 인생의 풍요를 좀 맛봤다. 그래서 나도 어느 날 오후에 불현듯 생긴 사소한 욕구에 답해주는 책에 대한 글로 보은하려 한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걸려올 단 한 통의 전화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하루키의 『스푸트니크의 연인』을 추천하며 심신을 안정하라 말해주겠다. 첫사랑 애인이 전화해서 만나자 했다고 난리치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마담 보바리』를 손에 쥐여줄 것이며 수학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을 쥐여줄 것이다. 맹추 같은 남자에게 빠져 허우적대는 눈먼 바보에게는 『노트르담의 꼽추』를 줄 것이다.

나에게 모든 책은 이렇게 읽힌다. ‘존재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라기보다는 현실에서 즉각적으로 나에게 도움을 주고자 전 세대, 전 지역의 현자가 수만 가지 스토리를 동원해 윙크를 하며 내게 인생의 힌트를 주는 것으로 말이다. 끝없이 응시하다 보면 무의식적 영감이 생기게 마련(!)이라고들 말한다. 끊임없이 책을 읽다 보면 나 역시 인생에 대해 영감을 얻을 것을 믿고 있다(!).

더구나 침대야말로 인생과 사람을 가장 궁금해하는 곳 아닌가? 거기서 겉옷쯤은 벗어던지고 그다음 그다음을 궁금해하며 책장을 넘기는 그 순간, 나의 일상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나의 영혼은 호기심과 설렘으로 충만하다. ‘나와 같이 가자’고 이끄는 억센 손을 잡고 봄밤에 담을 넘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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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랑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면… | 정혜윤 2008-12-07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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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정혜윤 PD의 침대와 책
나는 가끔 침대 속에서 라라를 생각한다. 바로 이 문장이다.

“지금 라라는 자기의 키를 침대 속에서 두 점 -왼쪽 어깨 죽지와 오른발의 엄지발가락- 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한쪽 어깨와 한쪽 발이었고, 나머지 모든 것은 그녀 자신, 한 외형 속에 맵시 있게 짜 넣어져 있는 미래로 민감하게 돌진하고 있는 그녀의 영혼 혹은 본질이었다.”

이건 내가 소설 속 여주인공 중 가장 사랑하는 『닥터 지바고』의 라라가 7월의 어느 휴일 아침에 침대 속에서 기지개를 켜며 ‘조금만 더 자야지’라고 생각하는 장면이다. 이런 표현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자기를 긍정하는 사람에게만 어울리는 표현이다.

침대 속에서 어깨를 당기는 시간이 동시에 나의 본질이 미래로 힘차게 돌진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걸 느끼는 건, 침대 속에서 내가 뒹구는 동안에도 나와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니, 한 마리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일으킨다는 것만큼이나 경이롭기도 하다. 사랑의 본질도 이와 비슷하다. 내가 몸을 쭉 펴고 나를 고양할 준비만 되어있다면 나는 미래로 돌진할 것이다.

어깨에 대해서라면 떠오르는 남자가 하나 있다. 그는 늘 어깨를 움츠리고 다니는 남자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날씬하고 어깨가 좁은 여자에게 전해 들었는데, 처음 만난 날 그는 부서질 것 같은 그녀의 어깨를 바라보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단다. “당신은 참으로 떡 벌어진 어깨를 가지고 있군요.” 그래서 그녀는 딱 한마디만 했단다. “만져봐요” 그 말에 그는 웃었고, 팔을 뻗어 어깨를 만지는 그 동작과 동시에 그의 영혼은 미래로, 사랑으로 돌진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북미를 여행하면서 보낸다’라는 한 구절의 프로필로 나의 여신이 되어버린 애니 프루의 단편 『브로크백 마운틴』. 브로크백 마운틴의 배경은 물론 브로크백 마운틴이다. 여름에도 눈이 내리는 산이다. 그 산에서 두 청년 잭과 애니스가 1963년 여름을 난다. 잭은 뻐드렁니가 인상적인 로데오광이며 그 어디라도 다른 곳에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열아홉 살 청년이다. 애니스는 좁은 얼굴에 매부리코이고 추레한 용모지만 길고 가는 다리에 유연한 몸을 가진 열아홉 살 청년이다.

둘은 1963년 팜 앤드 랜치 직업소개소에서 처음 만났고, 여름 방목지인 브로크백 마운틴 수목 한계선에 있는 양치기와 야영지 감시인 고용계약을 맺는다. 둘은 함께 산에 올라가지만 한 사람은 야영지에서, 한 사람은 양 옆의 좁고 냄새 나는 텐트에서 코요테를 쫓으며 자야 한다. 둘은 불가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온갖 이야기를 나누고 담배를 피우고 술병을 나누고 가끔 모닥불에 오줌을 눈다.

그 둘은 말과 로데오 사고와 상처, 승무원 전원이 사라져 버린 잠수함 트레셔호의 마지막 불운의 순간, 두 사람이 키웠던 개와 알고 있던 개들, 징집, 잭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운영하는 고향 목장, 몇 년 전 부모가 죽은 후 접은 애니스 가족 목장, 결혼한 누나 등등 온갖 이야기를 나누며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곳에 동지가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애니스는 이렇게 좋은 시간은 평생 처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때를 이렇게 표현한다. “발을 뻗으면 달까지도 닿을 수 있을 듯한 느낌을 가졌다.” 잭이 애니스를 인식하는 방법은 이랬다. “어두운 텐트에서 잭은 거대한 검은 산 덩어리에 밝게 빛나는 단 하나의 불빛으로 애니스의 존재를 알아보았다.” 잭의 이 문장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첫 순간을 묘사하는 수만 가지 표현 중에서도 절창이다. 사람에 빠지는 순간의 사람은 자기 사랑을 인식하는 자기만의 고유한 눈을 갖게 된다. 브로크백 마운틴 야영지에서는 그게 한 점 불빛이었다.

밀란 쿤데라의 『농담』에도 대단한 절망에 빠졌다가 미칠 듯한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그의 절망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공부, 일, 우정, 사랑, 사랑을 찾아 헤매는 것이 다 끝났다. 한마디로 의미 있는 인생 전체가 끝났다. 나에게 남은 것은 시간뿐이었다. 이제 나는 결국 아무 가망 없이 내가 지금 놓여있는 곳에서 살아가는 길밖에 없다”라고 토로한다. 그러다가 그가 일하게 된 탄광 도시에서 한 여자를 본다.

“그때 나는 루치에를 처음 보았다. … 그녀의 모습은 평범했다. 나중에는 이 평범함 자체가 나를 감동시키고 마음을 끌게 되었지만 처음에 그녀가 나를 멈추어 세운 것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오스트라바의 거리에서 그런 평범한 아가씨들을 자주 마주치지 않았던가? 아무튼 나는 그 아가씨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원래 걷던 그대로 진열창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나서 여전히 서두르지 않으면서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다. 그토록 나를 매혹시켰던 것은 루치에의 그 특이한 느림 때문이었다. 서둘러 돌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란 없다고, 무언가를 향해 초조하게 손을 내미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체념한 마음을 발산하는 그 느림 때문이었을 거다. 그랬다. 그 아가씨가 매표소로 가서 동전을 꺼내고 표를 사고 관람실을 한번 보고는 다시 마당으로 나오는 동안 계속 나로 하여금 그녀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은 아마도 정말로 그 우수에 가득 찬 느림 때문이었을 거다.

… 첫눈에 반한다는 말들을 한다. 나는 사랑이 자기 자신의 전설을 만들어 내거나 그 시작을 나중에 신비화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지금 그것이 그렇게 돌연히 불붙은 사랑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분명 어떤 예시 같은 것이 있었다. 루치에의 본질, 나는 그것을 한순간에 깨달았다고 느꼈고 보았던 것이다. 마치 누가 밝혀진 진리를 가져와 보여주듯이, 루치에가 가져와 드러내 보인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이 또한 사랑에 빠지는 순간에 대한 통찰력으로 나를 흥분케 한다. 사람은 누구를 왜 사랑하는가? 엄밀히 말하면 그 대답은 추리소설 한 권 분량이 될 것 같다. 그 추리소설의 첫 문장은 사랑을 선택했던 순간의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설명하는 데서 출발하는 게 좋을 듯하다. 지금 내 옆의 사랑이 정말로 시시하다면, 견딜 수 없는 그 어떤 면을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랑을 선택한 순간의 내가 그 정도만을 허용하고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끝낼까 말까 머리가 복잡할 땐, 역설적으로 사랑을 선택했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그 시절의 나를 지금의 나는 견딜 수 있는가?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 시절로부터 도망치고 싶은가? 지금의 이 빛바랜 사랑은 그 시절 자신의 모습이었으므로, 그 시절에서 출발해 어느 해안으로 밀려왔는가를 따져 봐야 할 뿐.

『브로크백 마운틴』의 끝 장면은 이렇다. 애니스와 또 다른 한 남자와의 동성애 때문에, 잭은 얼굴이 짓이겨진 채 살해당한다. 잭이 애니스의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애니스는 때때로 비탄에 잠겨, 때로는 환희의 사정의 감각에 휩싸여, 때로는 베개가, 때로는 시트가 젖어 깨어났다. 아는 것과 믿으려 했던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었지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칠 수 없다면 견뎌야 한다.” 눈물뿐이 아니고 정액뿐이 아니고, 눈물과 정액이 함께 나오는 이 장면이 내겐 너무나 따뜻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눈물과 정액 둘 중에 한 가지만 골라 바칠 수 있겠는가?

어쨌든 사랑을 시작하거나 끝내려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아름다운 명제는 오직 하나!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의 분신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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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장님께 깨진 날 읽는 책 | 정혜윤 2008-12-0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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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정혜윤 PD의 침대와 책
대학 시절 자발적인 소외 상태였던 적이 있다. 여름 소나기가 퍼붓던 어느 날부터 그 이듬해 벚꽃이 질 때까지, 일주일에 두 번 아르바이트 하러 가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없이 집에만 있었다. 가끔 친구들이 찾아오면 집 앞 부대찌개 집에서 소주를 마시거나 낮에도 어둠침침한 레스토랑에서 김치볶음밥을 먹으며 맥주를 마셨다. 아르바이트 월급을 타면 방배동 카페 골목까지 걸어가 로바다야끼에서 삼치구이를 먹었다.

그 시절의 한 주는 월요일이 아니라 목요일에서 출발했다. 내게 목요일은 타임지가 배달되던 날로 기억된다. 목요일 아침엔 새벽부터 긴장해서 타임지를 기다렸다. 언제나 제일 먼저 찾아 읽는 페이지는 에세이였다. 에세이에는 항상 like(‘좋아하다’라는 의미 말고 ‘00처럼’으로 해석될 때의 like 말이다)로 연결되는 문장이 있다는 걸 발견해서였다.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처럼, 스푸트니크 충격처럼, 에밀졸라와 샤갈처럼, 소련에 진군하는 독일군처럼, 매카시 치하의 찰리 채플린처럼, 우드스탁의 젊은애들처럼...' 이런 문장들을 난 거의 이해하지 못했었다. 영영사전을 옆에다 펴놓았지만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 동어 반복적으로 요약, 정리되는 세계를 잘 믿지 않는다.

‘00처럼’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나는 내 고통이 유일한 고통이 아님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세계를 확장하고 갈등을 푸는 나름의 방식을 개발하게 되었다. 갈등을 푸는 내 방식은 고전적이고 아름다운 ‘역지사지’가 아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내가 바꿔보고 싶은 것은 처지가 아니라 상황이다. 처지를 바꾼다는 것은 그 인격까지도 바꿔볼 수 있을 때만 공정한 것이고 인격을 바꾼다는 것은 어쩐지 내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되어서 문제를 풀어버리는 것 같아서 싫다. 하지만 ‘00처럼’의 세계에서는 조금은 더 익숙한 방식으로, 그다지 놀라거나 흥분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게 된다.

우리 부장님들은 내게 말하곤 한다. “너도 부장이 되어봐라. 그럼 안다.” 그러면 나는 (부장이 된 나를 상상하는 대신) 속으로 말한다. ‘부장님은 꼭 멕시코의 판초 빌라 같군요.’ (그렇게 말하자마자 나는 우국충정은 있으되 조직이 탄탄치 못해 절망한 끝에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반란군 대장에 감정이입 한다. 즉각 탄탄한 조직원이 되고 싶어 한다.)

요즘엔 갈등을 인체에 받아들이는 방식에 관한 멋진 문장을 찾아내 실용화하는 중이다.

“매일의 작은 모욕감은 간이 맡는다. 췌장은 사라진 것들에 대한 충격을 관장한다. 췌장이 얼마나 많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당신이 안다면 놀랄 것이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은 오른쪽 신장이 맡는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느끼는 실망은 왼쪽 신장이 맡는다. 개인적인 실패는 창자의 몫이다.”

이 문장은 뉴욕의 떠오르는 별 니콜 크라우스가 『사랑의 역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차례차례 몽땅 다 잃고 혼자 살아남은 폴란드계 유대 노인이 고통을 처리하는 방식을 설명한 글이다. 국장님께 혼났을 땐 오른쪽 신장이, 부장님께 혼났을 땐 왼쪽 신장이, 동료 PD와 싸울 땐 작은창자가 고통을 받는다. 이런 식으로 분할해 놓으면 온몸이 아프고 부서질 것 같다는 감정의 과장은 사라진다.

하지만 『사랑의 역사』 최고의 명문장은 역시 고독에 관한 문장이다. 나 같은 확신범은 갈등이 생기면 분노하거나 절망하기보다도 고독을 느낄 때가 많다. 문제가 생겼을 때 고독해지는 이유는 타인이 우리를 이해하는 폭이 우리 세계의 폭이 된다는, 즉 우리는 상대가 인식하는 범위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어울리지 않는 순간에 떠올려서다. 상황의 문제를 인격의 문제로 대체해 버리면 할 수 있는 말은 ‘나를 뭐로 보고?’고 그 질문은 던지는 순간 펑하고 터지는 일만 기다리는 폭탄과도 같다. 나치 학살에서 살아남아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 뉴욕으로 왔지만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열쇠장이가 된 노인은 이런 가짜 고독 말고 제대로 된 고독에 대해 내게 이렇게 말해준다.

“어느 날 저녁인가는 영화를 보러 나갔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유대인 마술사 후디니의 탈출 묘기를 보여주었다. 후디니는 땅속에 묻혀도 탈출할 수 있었다. 쇠사슬로 꽁꽁 묶인 궤에 들어가 물에 빠진 후에도 튀어나왔다. 그는 연습을 거듭하다가 몇 초 만에 빠져나왔다. 그 후 나는 내 일에 더욱 자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가장 열기 힘든 자물쇠를 집에 가져와서 시간을 재보았고 연습 끝에 결국 시간을 절반으로 줄였다. 잠자리에 누워 더욱 어려운 도전 과제를 떠올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다른 사람의 아파트 열쇠를 딸 수 있다면, 카네기홀의 문을 따고 들어간다고 해서 누가 날 막을 수 있을까? 몇 주 동안 계획했다. 시도해 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새벽에 56번 거리에서 카네기홀 뒷문으로 들어가는 데 103초가 걸렸다. 집에서 같은 열쇠로 연습할 때는 겨우 48초가 걸렸는데, 날이 추워서 손가락이 곱은 것이다. 그런 짓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 스스로 입증해 본 것으로도 충분했다.”

이 아름다운 문장의 끝은 이렇다. “고독할 때 세계의 문이 아무리 잠겨 있다 하더라도 절대로 나에게는 잠긴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었다!” 이 문장은 나에게도 어마어마한 위안이 된다. “세계의 문이 아무리 잠겨있어도 절대로 나에게는 잠긴 게 아니라고 생각하면” 이 문장을 몇 번 따라 읽으면 누군가 등을 쓸어주는 기분이 된다. 그게 부장님의 손이어서는 안 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정말 멋진 상사가 나오는 글도 있다. 물론 『야간비행』이다. 리비에르는 야간 비행 조종사들을 책임진 사람으로 자기에게나 타인에게나 아주 엄격하고, 명분이 뚜렷한 실수라도 용서하는 법이 없다. 부하들을 사랑하되 그들이 알지 못하게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 고통도 기쁨도 함께 따르는 인생이라면 큰 의미가 있는 의연한 삶을 살도록 부하들을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야간비행』의 서문을 써준 앙드레 지드는 리비에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리비에르가 단련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결점인 듯하다’라고. 리비에르 자신은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그는 외롭단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고독의 귀중한 가치를 깨달았다. 화내지 않으리라. 나는 잔걸음으로 인파 속을 걸어가는 병든 아이의 아버지와도 같다. 그 아버지 마음속에는 집안에 흐르는 무거운 침묵을 간직하고 있다. 엄격함으로 직원들을 억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줄 생각이었다.”

상사와의 갈등은 많은 경우 이렇게 정리된다. ‘의도는 좋았는데 방식이….’ 그럼 우리 관계는 셜록 홈즈와 괴도 루팡의 관계처럼 팽팽하다. 의도도 좋고 방식도 맘에 든다면? 남은 일은 입안의 혀처럼, 눈의 눈동자처럼, 신을 따르는 욥처럼! 의도는 좋았는데 결과가 꽝이라면? 모든 길은 옳았으나 우리가 옳지 않았다고 말하는 『장미의 이름』 윌리엄 수사처럼! 의도도 나쁘고 결과도 나쁘다면 당분간 광야를 헤맬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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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꽃 같은 그대가 울고 있을 때 읽는 책 | 정혜윤 2008-12-07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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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예스 > 정혜윤 PD의 침대와 책
며칠 전에 나의 사랑하는 후배가 문자메시지를 한 줄 보냈다. 그 메시지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언니언니언니언니언니’ 시계를 보았다. 열 시 반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전화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언니, 매일 새벽 세 시에 내가 우는 것 알고 있었어? 언니가 알아? 아느냐고? 그러고 나서 그녀는 우주 전체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엉엉엉 한없이 울었다.

우리는 5년 전에 처음 만났다. 그 5년 동안 그녀가 내게 보여준 세계는 너무나 다채로운데도 나는 그 순간 그 모든 걸 너무나 생생하게 어제 일처럼 한꺼번에 회상했다. 그녀와 있으면 시간은 서서히 흐르지 않고 빅뱅의 그 순간처럼 한꺼번에 폭발하듯 흐른다. 그녀가 수화기 너머로 우는 동안 5년 동안의 시간이 다 우는 것 같았다.

영화 <쥴 앤 짐> 포스터
야구선수 이상훈이 은퇴하고 기타를 들었을 때, 그의 은퇴 이유 “쪽팔려서”가 얼마나 인간적인 말인지 알려준 것도 그녀고, 박지성이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 달리는 순간의 그의 가슴팍이 얼마나 시골 소년의 순결을 간직하고 있는지 알려준 것도 그녀며, 우주인이 되려면 러시아어를 공부해야 함도, 장국영과 이과수 폭포 이야기를 들려준 것도 그녀다. 영화 <비포 선셋>에 나왔던 파리의 셰익스피어 서점에서 잘생긴 청년에게 하루키의 책을 주문해 사다준 것도 그녀며, 그리니치 천문대의 망원경으로 하늘을 보면 뭐가 보이는지 알려준 것도 그녀다. 우리가 언젠가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게 되면 빅토리아 사막에 별을 보러 가자고 말한 것도 그녀다. 내가 머리를 짧게 잘랐을 때, <쥴 앤 짐>의 잔 모로에 대해 말해준 것도 그녀다. 며칠 전엔 그녀는 나의 자연사 박물관이 되어주겠다 약속했다. 영원히 함께 하자는 그녀식의 어법이다. 5년 동안 그녀와 나의 삶은 수면 밑의 비밀 통로처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울음이 잦아들 무렵, 나는 1945년 프랑소와 트뤼포와 로베르 라슈네라는 두 친구가 주고받던 편지의 한 문장을 떠올렸다. 아직 열세 살이던 그들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었다.

“매일 너에게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어. 너도 그렇게 해다오. 나도 세비네하고 너도 세비네하고 우리 함께 세비네하자 .내게 편지해. 내게 편지해!” (세비네 후작부인은 시골로 시집간 딸을 위해 베르사유 궁과 온갖 주위의 사소한 일을 적은 수천 통의 편지를 보냈고, 그 편지는 부인이 사망한 지 30년 되던 1725년에 책으로 나왔다.)

그날 목련이 핀 밤길을 걸어 돌아온 나는 언제나처럼 나를 이해해주는 침대에 엎드려 트뤼포 전기를 읽었다. 어린아이처럼 울던 그녀를 위해 내가 해주고 싶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나는 그녀가 우는 이유를 알지 못했으므로 적절하고 실천적인 위로를 해줄 수 없었다. 내가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은 (할 수만 있다면 꼭) 세상을 재해석해 재편해주는 것뿐이었다.

‘인생, 그것은 스크린이었다!’라는 말로 수많은 영화팬을 영화관으로 끌고 간 트뤼포의 인생에 끌린 이유는 100가지는 족히 되지만 그래도 그날 밤 그 순간만큼은 내가 기억하는 그의 표현 하나를 그녀에게 바치고 싶어서였다. 그 표현은 바로 ‘새로운 이상한 나라의 현대적 엘리스’였다. 그래서 나는 니나 시몬의 노래를 들으며, 트뤼포의 책을 읽으며 세상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이상한 나라의 현대적 앨리스가 새벽 세 시에 잠들 수 있는 세상을 위해서.

프랑스의 영화감독
프랑수와 트뤼포(1932-1984)
트뤼포는 미혼모의 아이였다. 갓난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결혼한 엄마는 트뤼포 말고는 다른 아이를 낳지 못했고 결국 그를 가정에 받아들이지만 그에게 사랑을 주지는 않았다. 성장기의 트뤼포는 들릴락말락 종이 스치는 소리마저 나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면서 의자에 앉아 몇 시간씩 책을 읽으며 엄마 눈에 띄지 않기만을 바라던 아이였다. 부모에게 사랑받으려고 부모가 외출한 사이 벽과 천장과 문에 새로 페인트칠을 하거나 낡은 전기 회로를 고치려고 플러그를 꽂고 선을 이어보기도 하는 아이였다.

트뤼포는 어느 날 친구를 발견하는데, 책에 대한 열정과 영화에 대한 관심에서 완전히 일치했던 로베르 라슈네를 ‘친구친구친구’라고 (마치 그녀가 ‘언니’란 단어를 다섯 번씩 내뱉듯이) 부르며 사랑했다. 그 둘 사이의 연대감에 대해서 트뤼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공통점은 우리 모두가 미래를 내다보는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가까운 미래였으며 가까이 있어야 할 미래였다.’ (이것도 그렇다. 우리는 만나면 음모를 꾸민다. 음모와 암중모색의 나날이었다.)

그렇다고 그들 앞의 생이 탄탄대로였던 것은 물론 아니다. 트뤼포는 젊은 날의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하늘을 오랫동안 쳐다보지 않는다. 나의 눈동자가 땅으로 되돌아올 때 세상은 내게 소름끼치는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항과 창조가 늘 함께했던 트뤼포야말로 자기 삶을 파괴적일 정도로 뜨겁게 살아나갔고 수많은 연애 사건(까트린 드뇌브…)과 수많은 필화 사건(고다르와의 싸움을 보라)과 수많은 불후의 명화(<쥴 앤 짐><400번의 구타> 등)를 남겼다. 마르크스는 해석이 아니고 변혁이 중요하다고 말함으로써 그 이전의 세계를 완전히 뒤엎어버렸지만 트뤼포는 변혁함으로 해석도 바꿔버린 셈이다. 나는 그의 전 인생을 읽으며 줄리안 반즈가 플로베르를 입체적으로 살렸듯 새로운 사전을 만들어 그녀에게 바침으로 그녀를 입체적으로 살려내고 싶었다.

* 상호연대감 - 현실과 맞서는 무기.

* 도덕 - 도덕임을 내세우지 않으면서 오로지 타인의 도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데 존재하는 것.

* 명예 - 하루 3편의 영화를 보고 일주일에 세 권의 책을 읽는 것.

* 연민 - 세상의 비난받는 자들 모두와 함께 나누는 감정.

* 부끄러움 - 우리는 손목에 수갑을 차고 샤워장으로 간다. 처음에는 병원을 통과해갈 때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당혹스러웠지만 나중에는 나의 부끄러움 자체에 대해 부끄러워했다. (매독치료를 받을 무렵.)

* 얼간이들 - 건방지고 불손한 내 시선 뒤에 어깨를 따뜻하게 두드려주기만 해도 금방 눈물을 쏟는 어린 소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 직업 - (5년에 걸쳐 528편의 글을 발표하며 본명과 필명을 섞어 일주일에 평균 두 편을 써가던 시절) 하루 한 편의 영화, 이틀에 한 편의 글, 매일 밤 강심제와 담배와 커피. 생활과 직업의 구분은 없었다.

* 권위 - 저는 자신을 증오하는 독학자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스스로 깨우치지 못합니다. 필요하다면 밤마다 일을 해서라도 저의 영역을 최대한 넓혀서 가급적 빨리 전문가가 되는 것만이 저를 구원할 겁니다. (즉 권위란 지적 우월성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 아는 상태에서 오는 것.)

* 카메라 - 브래지어의 섬유소재와 색상을, 마침내 그 안에 젖가슴이 지닌 생명력까지 드러내는 데 적절한 앵글을 잘 아는 숙련된 시선, 여성이 걸어갈 때 어렴풋이 나타나는 작은 팬티의 대각선 무늬와 그 가장자리 선을 날카롭게 포착하는 앵글에 대한 숙련된 시선. (즉,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 걸 잡아내는 능력.)

* 파렴치함 -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함.

* 인생 - 난 그 누구에게도 내게 스무 살 시기가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라는 말을 절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 시기는 불행했다기보다는 매우 무미건조했다. 우리는 희망으로만 살았을 뿐이고 어쩌면 아예 살아가지도 않았다. ‘무엇으로 살아가는가?’라고 묻는 사람에게 우리는 즐겨 대답했다. ‘우리는 살지 않는다’라고. 인생, 그것은 스크린이었고, 영화였고, 영화에 대한 토론이었고, 영화에 대한 글쓰기였다.

* 68년도의 대학생 - 나는 대학생들을 좋아하며 그들의 투쟁에 찬동한다. 나는 대학생이 될 행운을 갖지 못했다. 나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질 못했다. 나는 대학생이 될 행운을 갖지 못했다. 14세에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던 것이다.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학문의 추격을 받는다. 그 때문에 나의 교양은 도처에 구멍이 나 있으며 이해의 속도가 다른 사람보다 늦다.

* 야생과 문명 - 박해받은 유년기라는 치명적인 상처를 지닌 어른의 모습, 애정 생활에서의 환멸과 직업상의 실패에 대해 끊임없는 죄의식을 지닌 남자의 모습, 사회로부터 도망치는 고독자의 모습, 야생은 언제나 문명화된 분신에 대해 우월성을 지니고는 트뤼포를 성공의 한가운데서 추방자로 살도록 했고, 명성을 획득했음에도 주변인으로 살도록 몰고 갔다.

* 파트너 - 전천후 잡역부.

* 완성 - 암중모색과 시행착오를 목격해 왔다. 다시 말해 하나의 작품이 완성되는 과정을 보았던 것이다.

* 완벽과 성공 - 비천하고 부도덕하고 추잡한 용어.

* 뇌 - (뇌출혈 수술을 마친 후) 스무 해 전, 저의 두 번째 영화 <피아니스트를 쏴라>가 개봉되었을 때 평론가들은 제 머리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가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이제 뇌수술을 받았으니 아마도 저는 좀 더 그들의 마음에 드는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 장례식 추도사 - ‘자신이 꼭 필요한 인간이라고 느끼는 자는 누구라도 더러운 자다(샤르트르의 말)’라는 말이 채택될 뻔했지만 영화 <멋진 인생>을 패러디한 대사가 채택되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살을 시도하지만 천사에게 구출되어서 자신이 빠진 자기 가족과 친척, 친구들의 인생을 지켜보게 된다. 만일 그가 없었으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까를 보게 되는 것이다.) ‘만일 프랑수아 트뤼포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만일 그가 영화감독이 되지 않았더라면…’ 장례식장은 그 말로 넘쳐났다.

사전을 작성하다 보니 트뤼포 장례식장의 추도사야말로 그날 밤의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위로란 걸 알았다. “네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네가 내 옆에 있지 않았더라면….”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우리의 이야기는 우주로 간다. 왜냐하면 내게 ‘인생, 그것은 단파 라디오였다!’이기 때문에. 다음 회를 기대해 달라. 절찬 상영 중. 우리는 우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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