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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김혜나의 술 맛 멋] 새하얀 도화지에 무엇을 그릴까? | 당신의 문장 2023-03-22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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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h.yes24.com/article/view/53937

 

술 좋아하는 이들이 요즘 유행하는 막걸리라며 권해주던 술이 있다. 가까운 지인 또한 가장 좋아하는 막걸리라며 강력 추천하던 술, 바로 '꽃잠'이다. 주변에서 추천을 하도 많이 받은 데다가 '꽃잠'을 생산하는 지리산옛술도가는 감미료 무첨가 탁주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곳이라 더욱 기대감이 커졌다. 시중에 유통되는 무감미료 막걸리가 꽃잠 하나뿐인 것은 아니나, 세세한 양조 과정까지 알리며 홍보하는 모습이 인상 깊은 까닭이었다. 멥쌀을 손으로 직접 씻어 고두밥을 찌고 누룩을 섞어 단번에 10일간 발효한 전통방식 단양주(單釀酒).1) 술 빚는 과정을 사진까지 넣어 세세하게 설명해둔 것을 보니 기대감과 신뢰감이 한껏 밀려들었다.

 

전통주를 함께 즐기던 지인이 지리산옛술도가를 다녀와서 전해준 말은 기대를 넘어 놀라움을 선사했다. 평소 막걸리를 자주 마시던 분이 당뇨가 심해 금주하던 중, 꽃잠은 괜찮을 거라는 지인의 추천을 받아 속는 셈 치고 마셔 본 뒤 혈당 체크를 해보았다는 이야기였다. 놀랍게도 꽃잠을 마신 뒤에는 혈당에 변화가 없었고, 그 덕에 일생의 낙이었던 막걸리를 다시 마실 수 있게 되었다며 양조장으로 감사의 전화를 걸어온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커다란 기대 속에 꽃잠의 뚜껑을 돌리는 순간 강한 탄산과 함께 술병 아래쪽 침전물이 훅 솟아올랐다. 넘치기 일보 직전에 뚜껑을 다시 돌려 닫고 기다리기를 서너 번 반복해 천천히 열어주었다. 이런 종류의 탄산 막걸리는 병을 45도 각도로 기울여 뚜껑을 아주 조금씩 열어준 뒤 손가락으로 병목을 눌러 탄산을 빼주면 좋다.

 

정성 들여 열어놓은 꽃잠을 잔에 따라 한 모금 맛보았다. 강한 산도와 탄산 그리고 묽은 탁도가 존재감을 뽐내는 술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당도와 탁도가 높은 막걸리를 선호하다 보니 꽃잠의 밋밋한 맛과 가벼운 질감을 맛있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탄산수에 보급형 막걸리를 섞은 듯한 맛이어서 어떻게 이런 술이 수많은 애주가의 입맛을 사로잡았을까 싶었다. 그래도 그토록 추천받은 술이니 조금씩 더 맛보며 숨은 맛을 찾으려 해보았다. 하지만 마시면 마실수록 정말이지 무미에 가까운 술이었다. 무감미료 탁주라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그동안 마셔온 다른 종류의 무감미료 탁주에도 저마다의 단맛과 신맛, 구수한 맛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술은 단양주라서 이토록 싱거운 걸까? 마시면 마실수록 실망스러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는데, 함께 맛본 친구는 “이거, 내가 어렸을 때 우리 할머니가 만들어주던 단술 같다!”라고 외쳤다. 어릴 때 집에서 단술 빚는 할머니가 없었던 나로서는 그 맛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쌀, 물, 누룩만 가지고 집에서 단양주를 빚는다면 딱 이런 맛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양조장에서 설명하는 바에 의하면 꽃잠은 조금씩 홀짝이기보다는 쌀밥을 한 수저 듬뿍 떠서 입안 가득 채우고 씹듯이 커다란 잔에 따라두고 벌컥벌컥 마시는 게 좋다고 한다. 그래야만 쌀막걸리 본연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그 맛은 과연 무엇일까? 나에게는 이 막걸리가 마치 새하얀 도화지처럼 다가왔다. 그 위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려 넣으려면 새콤달콤한 양념이 강한 회 무침, 달고 짜고 매콤한 고기볶음 혹은 기름진 전류와 함께 먹어야 할 듯했다. 그래야만 새하얀 도화지 위로 다채롭고 풍성한 그림이 완성되리라 싶었다. 다만 곧장 요리를 할 수가 없어 막걸리를 따라놓은 잔에 벌꿀을 한 수저 떠 넣었다. 그러자 마치 흰쌀죽에 간을 치기라도 한 것처럼 막걸리의 풍부한 쌀맛이 훅 뿜어져 나왔다.

 

남은 술은 냉장고에 두고 하루에 한두 잔씩 맛보았다. 꽃잠의 맛은 매일 달라졌다. 저온에서 오래 보관할수록 톡 쏘는 산미가 줄어들고 은은하게 올라오는 곡물의 단맛이 바로 꽃잠의 매력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알아갈 수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 직접 빚는 막걸리는 만드는 날의 날씨와 환경에 따라 맛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봄에 빚은 꽃잠과 가을에 빚은 꽃잠 맛이 다르고, 어제 빚은 꽃잠과 오늘 빚은 꽃잠 맛이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란다. 이토록 다양한 맛을 가진 꽃잠은 마시면 마실수록 더 자주 찾게 되는 마성의 매력을 지녔다.

 

오래전, 설탕이 귀해 함부로 맛보기 어렵던 시절에는 멥쌀에 누룩을 넣어 빚은 단양주만으로도 단맛을 충분히 느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과거의 시간을 재현해낸 탁주가 바로 꽃잠이 아닐까? 꽃잠을 입안 가득 머금고 꿀떡꿀떡 넘기니 쌀이 주는 풍성하고 다양한 맛에 눈이 떠졌다. 이것이 진짜 우리의 술이구나, 과거에 마시던 탁주가 딱 이런 맛이겠구나 싶어 왠지 모르게 아득한 감상에 빠지고 말았다.

 

입안 가득 차오르는 꽃잠을 벌컥 들이켠 한낮. 창밖으로 새어드는 햇살을 맞으며, 산자락이 어린 영산홍 꽃잎 아래 낮잠 든 소실댁을 떠올렸다. 술 한 잔, 시 한 수 읊다가 나도 모를 꽃잠에 혼곤히 빠져들고 말았다.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

산자락에 낮잠 든

슬푼 소실댁(小室宅)

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산 넘어 바다는 

보름 살이 때

소금 발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_서정주, 「영산홍」

 


1) 단양주 : 고두밥과 누룩을 섞어 한 번에 담근 술. 단양주에 고두밥과 누룩을 더하는 것을 '덧술'이라고 하고, 덧술을 한 번 더하면 이양주, 두 번 더하면 '삼양주'라고 부른다. 이런 방식으로 사양주, 오양주를 빚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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