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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방구석 미술관 2: 한국 | 2020.review 2020-12-05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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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조원재 저
블랙피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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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사적이고 개인적 공간에 미술 전시회가 열린다면' 하고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준 도서다. 해당 도서는 조원재 작가가 한 신사분과 미술에 대한 담소를 나눈 일을 계기로 탄생했다. '반 고흐 예찬론'을 펼치던 그에게 작가는 '김환기는 어떠세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신사는 이렇게 말했다. '모르는데...' 이때 작가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서양미술에 열광하면서 한국미술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런 무관심은 어디에서 어떻게 비롯된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하여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20세기 근대화 과정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아닌 서구 주도로 이루어진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의 문화적 유산은 과거의 진부한 것으로 치부되며 단절되었습니다. 반면 서구의 문물은 새롭고 진보된 것으로 여겨지며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현상이 20세기 내내 일어났죠. 그런 근대화 현상은 서구에서 만든 것이 우리가 만든 것보다 좋다는 착오를 만들었습니다. 그런 근대화의 잔재가 현재까지도 사회문화 전반에 남아있으며, 미술에 대한 인식에도 남아있습니다. 우리가 미술하면 서양미술을 먼저 떠올리고, 서양 미술만 즐기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비판적으로 판단해 볼 겨를 없이 문화적, 예술적 편식이 생기고 만 것입니다. p.6

『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 에서는 열 명의 화가이자 예술가를 소개한다. 그 시작을 연 인물은 '소를 사랑한 화가' 이중섭이다. 그는 필자에게 가장 친숙한 이름이었다. 반면 가장 낯선 이름은 마지막장을 장식하고 있는'이우환' 이었다. 그는 돌조각을 예술로 만든 철학자이자 미술가이다.


《소를 사랑한 화가, 이중섭》 

중섭에게 소는 민족의 상징이자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렇기에 그가 그린 소는 민족의 힘찬 기상이나 당시 그가 처한 상황에 따른 감정상태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죠.

평안남도의 부유한 대지주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 '이중섭'은 친숙하고도 민족의 정신을 담긴 소를 사랑한 화가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에게 '소' 말고 또 다른 사랑이 있었다고 한다. 소 말고 그가 사랑한 또 다른 대상은 '야마코토 마사코' 조선 이름은 '이남덕' 바로 이중섭의 아내다. 《소를 사랑한 화가, 이중섭》 에서는 소와 아내 이남덕과의 이야기를 서술한다. 도쿄 문화학원에서 선후배 사이로 만난 마사코와 이중섭은 캠퍼스 커플이 되는데, 이 둘의 사랑은 아주 열정적이고 뜨거웠다고 한다. 그 증거로 3년 동안 주고 받았던 엽서화의 일부가 도서에 실려있다. 말도 글도 아닌 그림으로 전하는 사랑, 어쩐지 어려워 보이지만 로맨틱한 사랑이다. 그런데 이 사랑의 행복도 잠시 부부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그건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험난하고 비참한 날들이 계속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중섭은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김환기의 축사와 함께 열린 개인전, 그리고 대구에서의 전시회 이후 '자신의 그림은 가짜'라며 스스로를 비난하며 모든 것을 포기한다. 그가 모든 것을 놓게 만든 이유는 그가 사랑한 존재에 대한 상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시대의 비극 속에 이중섭은 우울증, 피해망상 등으로 추정되는 정신질환을 겪다가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필자 개인적으로 《소를 사랑한 화가, 이중섭》 파트를 가장 슬프게 읽었다. 가장 친숙한 이름이었지만 그의 아픔을 너무 몰랐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원조 신여성, 나혜석》 


선택과 세월과 환경이 사람을 얼마나 다르게 만들어 놓더냐. 예부터 우리는 뜻이 굳으면 환경따위는 문제가 안 된다고 들어왔지만, 그 말을 믿지 말거라 환경이야말로 우리의 마음과 그리고 영혼까지도 주무를 수 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p.97

경기도 수원의 '나 부잣집' 2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난 '나혜석' 그녀는 최초의 근대 교육을 받게 되면서 전근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신여성 운동을 한 인물이다. 책에 의하면 나혜석은 신여성 그 자체이지만,  남편 김우영과 결혼 당시 내걸었던 조건들만 본다면 필자의 입장에서 나혜석은 나쁜 페미니스트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원조 신여성, 나혜석》 에서는 그녀가 신여성 운동을 하게 된 계기부터 훗날 수전증과 함묵증에 걸리는 등 사회 최상류층에서 사회 최하류층까지 떨어지게 된 그녀의 삶의 궤적을 따라간다.


그런데 필자는 나혜석에 관하여 읽으며 많은 부분이 조심스러웠다. 책에 의하면 나혜석이 3.1운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책 밖에서 나혜석의 독립운동은 논란이 존재한다. 실제로 몇 개월 전 경기도 수원에서 나혜석을 독립운동가라며 소개한 책자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다. 헌데 책을 읽으며 필자는 나혜석에게 보내지는 독립운동에 관한 논란이 일부 이해갔다. 책을 통해서 확인 할 수 있는 몇 가지 중 하나는 일본 외무성 외교관이었던 남편 김우영 과 최린과의 관계였다. 최린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지만 훗날 변절자가 되어버린 인물이다. 남편 김우영이 만주의 일본 외교관으로 갔고 임무를 마쳤을때, 일본은 김우영, 나혜석 부부에게 포상을 준다. 그 포상으로 나혜석은 김우영과 해외로 나가는 기회를 갖게 된다.만주에 있던 일본의 외교관이 갖고 있던 실질적 업무 특성과 더불어 일본의 포상으로 해외로 나가게 된 나혜석이 미술에 대한 식견을 더 넓힐 수 있었고 훗날 최린과의 금전적인 관계와 소문들을 볼 때 그녀가 '독립 운동을 했는가'에 대하여 조심스러울 필요성이 있다고 보이게 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원조 신여성, 나혜석》 파트에서 아쉬웠던 점도 있다. 바로 박인덕에 관한 이야기다. 책에 의하면 박인덕은 나혜석과 함께 이화학당 지하 비밀아지트에서 3.1운동을 함께 도모한 인물로 나온다. 훗날 나혜석의 딸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딱 여기까지만 언급괸 박인덕에 대한 부분이 아쉬웠다. 필자가 저자라면 박인덕의 좋은면 뿐 아니라 3.1운동 이후 박인덕이 변절자가 되었으며, 현재 친일 인명사전에도 올라있음을 첨언 했을 것이다. 


《한국 최초의 월드 아티스트, 이응노》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도와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림을 못그리게 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말했지만, 나는 남몰래 가벼운 마음으로 줄곧 그리고 또 그렸다. 땅 위에 담벼락에 눈 위에, 검게 그을린 내 살갗에, 손가락으로, 나뭇잎으로, 나뭇가지로, 혹은 조약돌로 그러면서 나는 외로움을 잊었다. p.105 

'한국 최초로 예술가가 된 사람은?' 이라는 질문으로 시작된다. 백남준 보다 먼저 작품을 인정받아 세계 무대에서 활동한 '이응노' 그러나 우리는 그를 잘 모른다. 그런데 책은 이렇게 말한다. '카멜레온도 울고갈 변신의 귀재' 였다.' 그는 충남 홍성의 작은 시골 양반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서당을 이어왔고, 아버지는 대쪽같은 선비였다. 아버지에게 한문과 서예를 배우며 유년기를 보낸 그는 어릴적부터 그림을 그리고 글씨 쓰는 것을 사랑했지만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했다. 그러던 1910년 국권피탈로 인해 신식학교가 들어서자 서당을 찾는 이들이 줄었고, 서당으로 생계를 이어오던 이응노의 집은 생활고를 겪게 된다. 이때 이응노는 '해강 김규진'을 찾아 서울로 간다. 김규진을 찾아간 것! 그것은 그의 미술 인생이 시작된 것임을 알리는 것이었다. 낮에는 일을 했고 밤에는 김규진에게 미술을 배웠다. 하지만 김규진의 집을 나오게 되면서 이응노는 다시한번 생활고를 겪게 되고,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한 이응노는 고군분투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필자는 '왜 카멜레온도 울고 갈 변신의 귀재'라 했는지 납득할 수 있었다. 카멜레온 뿐만 아니라 사업적으로 천재성을 보인 유영국도 그가 변신의 귀재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국 최초의 월드 아티스트, 이응노》파트를 읽다보면 반가운 부분이 나온다. 쓰레기통을 뒤져 발견한 종이들을 잘개 찢어 캔버스에 요리조리 붙리는 새로운 콜라주 양식에 도전한 이응노의 모습에서다. 쓰레기통을 뒤진게 반가웠다고 오해하면 금물이다. 종이를 잘개 찢어 붙였다는 것이 반가웠다는 의미니까. 읽는 순간 유치원 시절 신문지를 물에 불려 흩어지고 조각난  신문지를 뭉쳐 탈 모형의 물건에 붙였던 장면이 떠올랐다. 수업의 일부이기도 했고 그때는 그냥 하라니까 했다. 그런데 원조가 이응노였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예술이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고 권력의 시녀가 된다면, 자신이 아무리 사랑하더라도 예술을 영영 포기하겠다. p.157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난 유영국, 그는 공부까지 잘하는 우등생이었는데, 1934년 열아홉의 나이에 돌연 자퇴를 결심한다. 이유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때문이었다. 일제의 왜곡된 교육과 억압된 자유를 피해 자퇴를 한 유영국은 돌연 일본의 도쿄로 유학을 간다. 그러나 이내 고향으로 돌아 온 그는 어부가 되어있었고, 어부에서 다시 양조장 사업을 이끌게 된다. 이중섭을 마음아프게 읽었다면 필자에게 유영국은 모호하지만 어떤 존경심 같은 것이 스민 인물이다.


유영국은 1977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면서 심장박동기를 착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십여차례의 심장 수술과 고관절 수술, 그리고 2002년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뇌출혈로 번번히 쓰러지게 되는데, 무너져 가는 육체적 고통 속에서도 그림을 놓치 않았다. '프리다 칼로' 이상을 보여주는 유영국의 모습 속에서 필자는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필자였다면 그런 고통의 반복 속에서 그림을 포기하지 않을수 있었을까?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유영국》 은  그림에 대한 숭고한 열정을 생각하며 읽어보면 좋을 파트이다. 

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너무 행복했어, 세상에 태어나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는 것이 나는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간섭받지 않으면서, 그리고 싶은대로 그리면서 평생 자유로운 예술을 할 수 있어서 나는 정말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p.181

《아이의 낙서처럼, 장욱진》 

행복은 채운 곳이 아닌 비운 곳에 있다. p.196

어린시절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던 장욱진, 그는 가족들에게 혼나며 제지당하는 고초 속에서도 그림을 그린다. 그러던 1932년 열여섯의 욱진이 고모에게 맞은 후 성홍열과 신장염을 앓게 된다. 이에 고모는 병의 치료를 위해 장욱진을 충남 예산의 수덕사에 보내게 되는데, 그곳에서 욱진은 서른 중반의 나혜석을 만나게 된다. 이들의 관계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원조 신여성, 나혜석》 를 통해 살짝 확인 해 볼 수 있다. 아주 살짝 언급이 되기 때문이다.


병이 완치 된 이후에도 집안에 반대는 끝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그림을 그리던 그는 스물 두 살에 전조선학생 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 <공기놀이>로 최고상인 사장상과 중등부 특선상을 받게 되면서 마침내 집안의 인정과 승낙을 얻게 된다. 그렇게 장욱진은 일본 도쿄에 있는 제국미술학교로 유학을 가게됐고 화가로서 정식교육을 받는다. 이후 대학을 졸업한 후 얼마 뒤 조선은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 이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아내는 혜화동 부근에 서점을 차렸으며, 욱진은 서울대 미술대학 대우 교수로 일을 시작하지만 그는 6년만에 교수직을 내려놓고 취화선의 삶을 살기로 선택한다. 그가 취화선의 삶을 선택한 것 보다 필자는  《아이의 낙서처럼, 장욱진》 를 읽으며 더 궁금했던 부분이 있다. 그가 그림에 제목을 거의 짓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왜 제목을 안지었을까?' 하지만 이 점은 정확히 확인할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필자는 김환기를 만났다.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 김환기》 

그림으로 인간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화가인 내가 소작인들의 피눈물로 호의호식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p.234

2019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그의 말년 점화 작품 <우주>가 약 132억원에 낙찰되면서 한국 작가 중 가장 비싼 작품가를 기록한 주인공 '김환기' 그는 유영국과 함께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단색화 탄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화가이다. 안좌도의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김환기, 1932년 그는 고향 안좌도에서 <쇼생크탈출>을 연상케하는 탈출극을 벌인다.  탈출 이후 니혼대학 예술학원 미술부에 입학하여 그림을 그리기 위한 기본기와 유화를 익혔고, 아방가르드양화연구소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책에 의하면 이 연구소에 들어간 것이 당시 그의 활동 중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한다. 작가가 무엇보다 중요했다고 본 이유는 무엇일까? 또한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어 안좌도를 탈출했던 그가 1937년 스물다섯이 되던 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후 1942년 아버지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소작인들의 빛을 탕감해주고 땅문서까지 돌려주기에 이른다. 그 재산이면 돈 걱정 없이 그림만 그려도 되었을 텐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필자라면 그렇게 못했을 것이다. 


사람의 인연이란 것이 참 신기한게 김환기 편을 읽다보면  26세에 한국근대문학의 별이된 작가 '이상'이 언급된다. 김환기와 이상은 어떤 연결고리가 있었을까? 그보다 변동림에서 김향안이 된 김환기의 아내는 성을 버리고 이름을 바꿨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예전에는 가능했나?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 김환기》 파트는 부모님의 결혼 반대로 성을 버리고 선택한 김향안과 김환기의 사랑부터 한국에서 가장 비싼 화가이자 추상미술의 선구자였던 그가 척추디스크 수술 이후 뇌사 상태에 빠져 세상을 떠나기 까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사랑이란 믿음이다. 믿지 않으면 사람은 서로 사랑할 수 없다. 믿는다는 것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는 거다. 곧 지성이다. (향안) p.264

《서민을 친근하게 그려 온 국민화가, 박수근》 

나는 인간의 선함과 절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p.270

인간의 선함과 절실함을 담은 그림을 그린 박수근, 그가 그런 그림을 그린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 여기에는 20세기 초중반 한국 서양화가들이 대부분 갖고 있던 공통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대부분의 서양화가들은 부잣집 자제들이었다. 그런데 박수근은 달랐다. 돈도 없고 빽도 없었다. 단지 그는 그림이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양화를 독학했다.  사실 그가 태어났을때만해도 약간 부유한 집안이었으나 아버지의 광산 사업 실패와 홍수로 인해 가지고 있던 논밭이 떠내려 가면서 가난이 시작되었으며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연이어 닥쳐왔다. 그럼에도 박수근은 그림 그리는 것을 놓지 않았고 그림 재료를 살 돈이 없으니 뽕나무 가지를 태워 만든 목탄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날부터 그에게 '스승'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세번째 스승은 박수근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었으나 서민들에게 깊은 연민과 동정, 끈끈한 동질성을 느끼게 하는데 영향을 끼친다. 이는 곧 서민들에게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발견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서민을 친근하게 그려 온 국민화가, 박수근》 은 그가 만난 스승을 통해 그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파트이다. 왼쪽눈을 실명하고 훗날 간경화와 응혈증으로 세상과 작별을 고하기까지 박수근의 삶은 씁쓸함과 허망함으로 점철된 듯 느껴진다. 그러나 도판되어 있는 그의 그림은 어쩐지 따듯하고 포근한 느낌을 준다.


《독보적 여인상을 그린 화가, 천경자》 

뱀이란 주제가 내 생명과 예술을 연장시켜 준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p.325

한국 전쟁으로 인해 밥줄이던 교직은 끊기고, 첫번째 남자 이철식은 행방 불명이 되었다. 두번째 남자 김남중 또한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 극한의 처지에 내몰린 천경자는 '박수근의 그림속 여인 그 자체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특히 '눈'에 자신의 오묘하고도 미묘한 감정들을 선명하게 그려나간 인물이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이외에도 인생 가장 중요한 순간에 본능적으로 꼭 그리던 X가 있었다고 하여 놀라웠다. 놀란 이유는 X가 뱀이었다는 사실때문인데, 정확히 '찔레꽃 향기 밑을 스치는 두 마리 실뱀, 비단 허리띠 같은 독사.'를 그렸다. '왜 하필 뱀이었을까?'  어릴적 친구 '화자'가 산나물을 캐다 독사에게 물려 죽은 기억이 뇌리에 남아있는 만큼 경자에게 뱀은 행복한 추억과는 거리가 먼 '저주를 불러오는 악한 것' 이었는데 말이다. 35마리의 뱀이 그려진 <생태>의 경우, 1952년 기괴하고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부산 칠성다방에서 열린 대한미협전 유로 전시에서도 제외되었다. 그럼에도 천경자는 뱀을 고집했다. '왜 뱀을 고집하였을까?' 책에 의하면 아이러니하게도 뱀은 천경자가 본격적인 화가 활동을 하는데 도움을 준 효자 작품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시작점엔 김환기가 있었다. 《독보적 여인상을 그린 화가, 천경자》 파트는 그녀가 뱀을 그리게 된 이유와 뱀을 그리고 난 후 천경자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천경자가 뱀을 그리기 시작했지만, 어느덧 뱀이 그림을 그리게 하고 있습니다. p.326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날 자꾸만 서양에서 다 배운 사람인 줄 아는데, 사실 내 인생을 결정지은 사상이나 예술의 바탕은 이미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모두 흡수한 것이지.p382

필자에게 이중섭 다음으로 가장 친근한 이름의 비디오아티스트 선구자 '백남준' 그는 조선의 섬유업을 좌지우지하는 거상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그가 비디오아트의 선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부유함 덕분이 아닌 타고난 인복 덕분 때문이었다한다. 도대체 어떤 인복이 백남준을 비디오아트의 선구자로 만들어준것일까? 그에게는 어릴적 누나의 음악선생님 피아니스트 신재덕과 작곡가 이건우를 시작으로 프리페어드 피아노(조작된 피아노)를 만들어 연주한 '존 케이지', 둘도 없는 소울메이트가 된 '요셉 보이스', 서양 전통 클래식 첼리스트 였던 '샬롯 무어만' 그리고 그의 아내가 있었는데, 바로 이들이 백남준을 비디오아티스트 선구자로 만들어준 사람들이다.


샬롯 무어만 경우는, 샬롯 무어만이 슈톡하우젠의 악명높은 전위음악극 <괴짜들>를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서 '동양에서 온 미친 행위예술가' 배역을 어떻게 할것인가에 대한 문제로 슈톡하우젠을 찾아간다. 이것이 샬롯 무어만과 남준의 인연 시작점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언급한 아내이자 비디오 아티스트 '구보타 시게코' 경우는 그녀와 백남준의 결혼 히스토리마저도 흥미롭다. 건강보험을 사용하기 위해 결혼했다니 막장소재 드라마 같지만 실상은 로맨틱한 이야기가 스며들어있어 선한 미소를 띠게 했다.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파트는 그가 만난 인물들을 통해 어떻게 예술에 접근했고 어떻게 예술을 창조해 내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서술한다.


《돌조각을 예술로, 모노파 대표 미술가 이우환》 


20세기 후반, 돌 하나로 현대 미술의 신세계를 연 '이우환' 필자에게 이우환은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생소하고 낯선 인물이었다. 이우환은 철학자인 동시에 미술가로 학창시절부터 예술적 호기심이 유난히 강했다. 음악, 미술, 문학 다양한 분야에 관심이 많았는데 무엇보다도 서양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 하지만 스스로 음악적 재능이 부족하다고 느낀 그는 음악가 대신 문학가를 꿈꾼다. 그러나 삼촌의 병문안을 계기로 이우환은 엉뚱하게도 니혼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런데 엉뚱하고도 엉겹결에 시작한 철학은 그를 전 세계 현대미술의 지형을 바꿔놓게 하는데 일조한다. 《돌조각을 예술로, 모노파 대표 미술가 이우환》 파트는 철학이 그의 미술 인생에 어떤 영향을 어떻게 끼쳤는가를 중점에 두고 읽어보면 좋은 파트다.


《이 책을 읽고..》


책은 필자와 당신이 그간 이름만 알았던, 혹은 이름 조차 몰랐던 한국 미술가를 다룬다. 그들의 고향부터 활동지,  그가 만난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 삶의 궤적을 따라 이동한다. 이때 저자 조원재의 글은 친근하고 쉽게 서술된다. 뿐만 아니라 도판을 실어 어렵지 않게 화가의 그림을 접할 수 있다. 


여기에 서술된 화가들은 인생에 있어 사회 상류층에서 최하류층까지 경험한다. 씁쓸한 건 자의가 아닌 시대가 낳은 비극이 그들의 굴곡진 삶을 더했다는 점이다. 시대적 비극 속에서도 이들에게 돈은 그림을 그리는데 목적이 아닌 수단일 뿐이었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정신을보여주며 그림 앞에선 가장 솔직한 자신을 표현했다. 그래서일까 그들의 곁에 항상 좋은 스승, 좋은 인연이 이어진다. 그 숭고한 열정에 감탄한듯, 


하지만 필자는 박수근을 통해 이 책의 가장 씁쓸한 미술계 단면을 확인하게 된다. 당시에도 유학파가 국내파를 무시했다는 점, 미술계의 비주류로써 유학생들이 만든 어떤 단체에도 소속될 수 없었던 박수근은 학연, 지연으로 뭉쳐 서로를 도와주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평가 절하되었던 점. 그의 모습을 통해 필자는 작금의 좁은 예체능계를 떠올려 보았다. 시대가 흘렀음에도 무엇이 달라졌는가? 혹시 차별은 더 심화되지 않았는가? 필자로서는 예체능계의 현실을 미디어 매체에서 확인하는게 전부이긴 하나 미디어를 통해 보여지는 단면이 전혀 거짓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디어만 보고 어떻게 판단하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말하겠다. 예체능계의 현실을 모른다. 그러나 이건 안다. 예술은 예술로만 평가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수가 노래로 평가받고, 배우가 연기로 평가받듯 화가는 그림으로만 평가받으면 된다는 것 정도는 안다. 이를두고 사회를 모른다고 하면 그건 사회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왜 학력이 그림에 대한 편견으로 작용해야할까?


『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의 표지에는 '서울시립미술관'이 그려져있다. 처음 책을 펼쳤을 때, 필자는 방구석에서  '서울시립미술관'을 유영하는 기분이었다. 책을 덮을 때 쯤엔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 마음이 무거웠던 이유는 책의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들이 겪었던 시대적 비극 때문이었다. 조금 일찍 태어났다는 이유로 그런 고통을 감내하며 그려야하는 삶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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