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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30 개설

-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추천사 - 조문자 | -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2012-11-1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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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 조문자

 

언제부터인지 복음이 식상해지고 있다. 주일이면 교회에서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한 10년만 교회 나가면 듣고 또 들어 이제는 거의 세뇌화가 된 허공을 치고 마는 말, 말들. ‘아, 그거!’, “ 들었던 이야기네”

 

강단에서 외치는 말씀은 홍수 때처럼 넘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목이 마르다. 교회는 성도의 갈증에 알 바 없고 사람들은 생수 같은 말씀으로 채우는 것보다 교회 마당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몸이 부서져라 봉사하는 쪽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 한다. 못쓰고 못 입어도 아낌없이 헌금한다. 교회는 성도가 행여 신천지로 빠질까봐 불안하고 사람들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불안하다. 우리는 모두 다 불안하여, 작은 심지도 끄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으신다는 말씀을 잊고 말았다.

 

여기 <삭개오의 크리스마스>에 실린 글은 무릎을 칠만한 내용이 있다. 아!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이 곳곳에 묻어난다. 무엇보다도 오목사님의 따뜻한 눈길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실하게 말해준다.

 

<‘예수님은 우리가 혼자인 것을 아신다. 우리가 성격이 원만치 못하여 다른 사람과 통하지 못함을 아신다.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그 바쁜 걸음을 멈추고 우리의 사정을 다 들어주신 분이다.> (믿음은 두려움을 물리친다. )

 

오목사님의 성경을 보는 눈, 현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이번에 한진중공업의 해직자 복직뉴스로 여실히 증명되었다. 해직자 복직 뉴스를 들으면서, 여기 실린 글을 다시 한번 읽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작년의 일입니다. KBS 방송 <추적 60분>이란 프로를 통해서 참으로 가슴 아픈 소원 하나가 소개되었습니다. <추적 60분>, 그 때의 주제는 한진중공업 사태였는데, 여러가지 이야기가 나왔지만 그 중에 저를 감동시킨 장면, 한진 중공업 해고 근로자 부인의 소원입니다.

 

그 여자의 남편이 떡볶이를 맛있게 잘 만든답니다. 남편이 부엌에서 등을 보이면서 떡볶이를 만들고 있는 그 모습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여인은 대답합니다. “ 남편이 만들어주는 떡볶이를 먹으면서 TV 프로그램 <일박이일>을 보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 땅을 내려다보시며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고 한다면, 그 부인의 소원을 들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 .

 

오목사님의 따뜻한 시선은 해직자 부인의 조그만 소원을 지나치지 않았고, 그 소원은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장점은 읽기도 쉽고 이해하기도 쉽다는 점이다. 어렵게 말하려고 애쓰는 신학용어는 찾아 볼 수 없다. 올레길을 걸어가는 듯 글을 읽다보면 가슴이 뻥 뚫리는 기쁨을 맛볼 수 있다. 성서에 숨어있는 보석을 찾을 수 있다. 말씀을 들으면서도 이유도 모른 채 목말랐던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그게 바로 <각주 없이 성경읽기> 의 매력이다.

 

산삼이나 인삼 같은 유명한 보약은 아닐지라도, 오래 오래 먹으면 병을 몰아내는 호박 같은 말씀이다.

 

 

조문자 (수필가, 예수 뜰 대표)

 

한일 장신대학교 신학과 졸업, 30년간 전도사로 교회 시무

들소리 문학상, 기독여성 문학상, 통일문화제 문학대상, 경남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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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 다시 만드는 우리'에 대한 반론 | -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2012-11-1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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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 다시 만드는 우리'에 대한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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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 정용섭 목사 | -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2012-11-05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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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그로브시티 대학교에서 종교학과 미디어 생태학을 가르치는 데이비드 고든(T. David Gordon) 박사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 교회에서 평범한 설교나마 할 수 있는 목사들의 비율은 30퍼센트 미만이라고 합니다. 뛰어난 설교가 아니라 최소한의 기본조차 안 된 설교가 태반이라는 겁니다. 그 이유를 그는 새로운 미디어 환경 가운데 놓인 젊은 설교자들의 글 읽기와 쓰기 능력이 턱없이 떨어졌다는 데서 찾았습니다. 우리나라 설교자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읽기와 쓰기 능력이 떨어졌다는 것은 논리적인 사유의 능력이 없다는 것이고, 사유의 능력이 없다는 것은 곧 성서의 세계를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성서텍스트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해석해서 선포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저는 오세용 목사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젊은 설교자들이 배워야할 글쓰기의 모범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 목사님의 글은 막힘이 없습니다. 내용적인 면이나 형식적인 면에서 어색하거나 비약되는 대목이 없습니다.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듯한 글입니다. 이런 글쓰기의 내공은 쉽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해서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 성숙한 안목이 필요합니다.

하나는 세상을 보는 안목입니다. 그것은 인문학적 통찰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서텍스트의 깊이를 보는 안목입니다. 이것은 해석학적 통찰입니다.

 

오 목사님은 스스로 ‘각주 없는 성경읽기’라고 자신의 글을 규정했습니다. 저는 그런 성경읽기가 바로 인문학적 성경읽기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 목사님의 글에 막힘이 없다는 것은 그의 글이 에세이의 특징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에세이는 단순히 평이한 글이 아닙니다. 자신의 정신세계에 완전히 소화된 내용을 소화된 언어로 표현하는 장르가 바로 에세이입니다. 이 책은 물론 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당신에게 충분히 소화된 신학을 일상 언어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이게 쉬운 게 아닙니다. 많은 설교자나 기독교 저술가들이 자신도 모르는 말을 합니다. 들은풍월을 읊든지, 교언영색에 빠집니다. 독자들께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깊으면서도 재미있는 성서의 세계로 들어가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오 목사님이 보내주신 파일에 담긴 이 책의 내용을 출판되기 전에 읽으면서 책읽기의 즐거움에 흠뻑 빠졌습니다. 성서기자들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어떨 때는 바이셰델(Weischedel)이 서양 철학자들을 에세이 식으로 소개한 <철학의 뒷계단>을 읽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평소에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들이 새롭게 살아나곤 했습니다. 한국과 미국에서 법학을 전공한 전력 때문인지 검사가 피의자의 죄를 조목조목 따져가듯이 성서텍스트의 구석구석을 목사님의 영적인 시각으로 들추고 있습니다. 재미있고, 유쾌하고, 흐뭇하고, 또 영적으로 감동이 밀려들었습니다.

 

팁(tip)을 하나 드립니다. 여기에 실린 25편의 모든 글은 내러티브 설교의 한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서의 인물들이 마치 애니메이션의 생동감 넘치는 장면처럼 오늘 우리에게 살아있는 이야기로 재구성된 설교입니다.

 

“오 목사님, 좋은 글을 읽고 추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정용섭 목사 
- 영남신학대학 교수, 샘터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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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송아지 다시 만드는 우리 / 출32:1-6, 출 35: 20-29 | -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2012-11-03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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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脚註) 없이 성경 읽기>
금송아지 다시 만드는 우리 / 출32:1-6, 출 35: 20-29


출애굽기 32장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출애굽기 35장
20.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세 앞에서 물러갔더니
21.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22.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23. 무릇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이 있는 자도 가져왔으며
24. 은과 놋으로 예물을 삼는 모든 자가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며 섬기는 일에 소용되는 조각목이 있는 모든 자는 가져왔으며
25. 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빼고 그 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을 가져왔으며
26.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으며
27. 모든 족장은 호마노와 및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왔으며
28. 등불과 관유와 분향할 향에 소용되는 기름과 향품을 가져왔으니
29.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오늘 본문은 영화를 통하여서도 많이 알려져 있는데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러 시내산에 가 있는 동안 산 밑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산밑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금붙이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 대신에 자기들을 인도하는 신이라 부르며 한바탕 잔치를 떠들썩하게 벌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시내산 위로 올라갑니다. 거기에서 40일간을 지냅니다. 그 내용이 출애굽기 24장 마지막 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산 위에 올랐으며 모세가 사십 일 사십 야를 산에 있으니라”(출 24:18)

그 곳에 있으면서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모두다 기록하여 두는데, 그 내용이 25장부터 시작해서 31장까지 이어집니다. 31장 마지막 절인 18절에,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I. 모세, 돌판을 던져 부시다.

그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받고 돌판을 들고 내려오는데, 산 밑에서는 모세를 기다리던 백성들이 다른 신을 만드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그게 바로 32장의 기록입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태에 당연히 하나님이 진노하셨지요. 진노하셔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그 후속작업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34장에 걸쳐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또한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돌판을 던져 부수어 버리지요. 그래서 다시 모세는 다시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 말씀을 받아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출 34장 1-3절)

그래서 산에 다시 올라갔다 내려온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하는 장면이 35장입니다.

그럼 다시 본문인 32장으로 돌아와 볼까요. 이 일이 다름아닌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일어났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들의 고통을 다 헤아리시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도중에 이런 일이 생겼으니, 그런 좋으신 하나님을 결국 없다고 부정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입니까? 이 본문은 우리 믿는 자로서 생각해 볼 때, 절대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일어난 것으로, 이 사건을 저지른 자들은 마땅히 비난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 그럼 32장을 살펴보면서 금송아지 사건이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었는가 살펴봅시다. 우선 겉으로 나타난 모습을 보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금들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금을 모으는 주관자인가 하면, 실망스럽게도 모세의 형인 아론입니다. 32장 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그런 일을 말려도 부족할텐데, 오히려 백성들로 하여금 그런 일을 하도록 방조한 책임이 아론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이 사건의 뼈대는 아론 – 제사장이 되는 사람 – 이 백성들에게 금붙이를 바치라 하고, 그 금들을 모아서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이 사건을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씀드렸는데, 이것은 일단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건을 굳이 비난할 이유가 없습니다. 참 신과 우상의 관계를 논하는 것은 기독교에 해당되는 사항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아니라면 우상을 만들기 위해 금붙이 즉 헌금을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문제가 된다면, 35장의 사건도 같은 맥락에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
II. 성소를 위해 헌물을 바치다

그래서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의 의미를 자세하기 살펴보기 위하여, 35장의 상황과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 의미를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25장부터 31장까지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내용은 성소를 짓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다 놓고 일일이 설명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 말씀을 간직한 모세는 산밑으로 내려가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산 밑으로 내려가 말씀을 전해주어야 하는데, 그만 사고(32장)가 생겨서 전하지 못하고 다시 올라가 돌판을 받아오느라(34장) 늦어졌습니다.

그래서 35장에서야 비로소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전달하게 되는데, 성소를 짓기 위하여, 모세가 백성들에게 명령을 한 구절을 살펴봅시다.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일이 이러하니라 이르시기를 너희의 소유 중에서 너희는 여호와께 드릴 것을 택하되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릴지니.”(개정개역) (출35: 4- 5)

성소를 짓기 위한 헌물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기본 원칙은 어떤 것일까요?
“마음에 원하는 자는”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자원해서’입니다. 강제적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게 바로 백성들에게 바치라고 할 때의 하나님의 원칙입니다. 모세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35장 20절 이하입니다. 백성들이 금붙이들을 가지고 몰려옵니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예물을 바칠 때의 모습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32장의 사건과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35장에서 ‘성소를 만들기 위해 헌물을 바친 것’과 32장에서 ‘자기들의 신을 만들기 위해 금고리 등을 바친 것’과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겉으로는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겉으로는 모두다 헌물을 가져다 바친 것,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속마음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들의 속마음을 살펴봅시다. 먼저 성소를 만들기 위해 바치는 35장의 경우입니다. 
바치는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가? 바칠 때의 마음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출35:21)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 (출 35:29)

35장에서 성소를 짓기 위해 헌물을 바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원함’입니다. 그렇다면, 32장에서 금송아지를 만들려고 금을 바치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32장에는 거기에 대하여 아무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강제로 바쳤습니까?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금송아지를 만들기 위해 바치는 그들의 마음이 어땠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적어도 그들이 마지 못해서 가져왔다거나 억지로 가져왔다는 기록은 없으며 그런 때에 오히려 자발적으로, 열성적으로 바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두 사건은 두 가지 측면, 즉 겉과 속마음 모두 동일합니다.
자원하여, 열성적으로 재물을 바친 것, 모두 똑 같습니다. 각자 그들이 신이라고 믿는 존재 – 하나님과 송아지 - 에게 재물을 ‘자원하여’ 가져다 바친 것, 모두 같습니다.

그런데 두가지 사건- 32장과 35장의 헌물 사건 - 이 살펴 본 것처럼 똑 같은 것이라면, 아무래도 마음이 좋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는 그래도 뭔가 하나님에게 재물도 드리고 또한 시간도 드리면서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 한다고, 출애굽기 35장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도 열과 성을 다하여 하나님에게 충성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금송아지 만든 사건(32장)과 똑 같은 모습이라니, 이 얼마나 섭섭한 일입니까?

그래서, 아무리 그래도 그 두 사건 사이에 무언가 차이가 있어야 하겠는데, 차이가 보여야만 우리 마음이 놓일 것인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두 가지 사건에서 차이는 무엇이며, 그 차이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35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21절)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22절)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29절)

여기에서 ‘여호와께’ 라는 말이 두 사건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호와께’ 라는 말이 있으니 35장에서 드린 헌물은 분명 하나님에게 드린 것이고.
32장의 사건에서는 그게 아니라. 사람에게 주고 사람을 위해 쓰인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명쾌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32: 7-8)

III. ‘자기를 위하여’ 대(對) ‘하나님께’

어떻습니까? 확실히 구분되지요? 그렇게 성경상으로는 확실히 구분이 가능합니다. 객관적인 기록에 의해 확실하게 구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 세계에서 그 구분이 가능할까요? 하나님을 위해 드린 것이냐, 자기가 만든 신에게 드린 것이냐? 현실상에서 그런 구분을 할 수 있을까요?

현실에서 그런 구분이 가능한지, 따져볼까요?
첫째, 옆에 있는 사람, 김집사 이집사가 드린 헌물이 과연 하나님께 바친 것인지, 어떤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남이 하는 종교적인 행동, 헌금이라든지 열성을 내어서 봉사하는 것이 과연 하나님에게 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다른 사람 제 3자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옆의 사람이 낸 헌물이 그런지 아닌지, 제 3자는 알 수 없습니다. 오직 그 사람, 본인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 마음 속에 과연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겉으로만은 알 수 없기에 우리는 결코 남의 경우는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그 다음. 나 자신, 본인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알 수 있을까요?
일단 알 수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바치는 것이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이다, 아니다, 라는 확신이 있다 없다, 알 수 있지요. 그렇게 오직 내가 바치는 경우  내 마음을 내가 알 수 있길래 나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참, 아니지요? 나만 아는 것이 아니라, 바치는 나와 받으시는 하나님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문제가 있습니다.
실상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은 경우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다행하게도, 이단 종교에 빠지지 않아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지만,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뭐 자기들이 이단의 잡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믿는 것은 또한 아니니, 문제입니다.

그러면, 나도 모르는 내 마음, 그것을 확실히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32장 1절을 보십시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IV. 부재(不在)가 더 잘 보인다. 

개정개역 성경에서 재미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우리 말이 재미있지요?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이 말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후로 보이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한동안, 오랫동안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그들이 조바심이 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더디 옴을 보고’라고 재미있게 표현해 놓았습니다. 보고. 본다는 말 아시지요? 눈으로 본다, 는 말입니다. 영어 성경도 마찬가지로 ‘본다’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When the people saw that Moses was so long in coming down from the mountain> (NIV)
<Now when the people saw that Moses delayed to come down from the mountain> (NASB)

이 ‘본다’는 말, 잠깐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려고 하는 그 어떤 것, 그것을 우리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며, ‘보라’ 하시는데, 그래서 평소에 하나님을 보기는 하지만 그 역사 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가 나중에서야 비로서 그게 하나님의 역사였구나, 하면서 하나님을 알아보게 되고 결국,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어서, 그 살아계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애가 타서 ‘보라, 제발 좀 봐라’ 하시는데, 우리들은 정작 보라는 것은 보지를 않고 엉뚱한 것을 보는 경우가 오히려 더 많으니 문제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니까, 그 대신 뭐가 보입니까? ‘더디 옴을 보고’
보는 것도 두 가지 있습니다. ‘봐야 할 것을 보는 경우’가 있고 ‘볼 필요가 없음에도 그것을 쓸데 없이 보는 경우’, 그렇게 두 가지입니다. 모세가 더디 옴을 보고, 라는 말은 쓸데없는 것을 본 것이지요.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모세가 존재하지 않는 것, 곧 모세의 부존재가 눈에 확 띈다 그런 말입니다.
우리 말에도 같은 말이 있습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우리말 속담.
평소에는 있는지 없는지도 인식하지 못하다가, 사라지면 그때서야 비로소 소중함을 알게 된다는 뜻이죠. 떠난 사람의 빈자리는 항상 크게 다가오는 법.

그때까지는 모세가 있든 없든 별로 상관하지 않았었는데, 모세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사람들이 불안해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모세의 부재가, 모세의 지체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불안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가 더디 옴을 보고 나서, 그래서 결국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쓸데 없는 것을 본 결과, 그들은 모세를 넘어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대신에 ‘눈에 보이는 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모세가 더디 오는 것 하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었습니다.
관계가 있어도 많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정확한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님을 똑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려 했고,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이 이제 안 계시는구나, 하면서 다른 신을 찾았던 것입니다. 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이런 질문에 그들은 똑바른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기 눈으로 볼 수 있는 우상을 만들어 거기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서두에 이 사건이, 이 일이 다름아닌 이스라엘 민족가운데 일어났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들의 고통을 다 헤아리시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이끌고 내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도중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을 유의해야 하는데,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그래서 하나님의 인도 하에 이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임이 분명한데, 잠시 우리 앞에 보여야 할 무엇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 대신 다른 신을 만들어 섬기는 것이 아닌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우리 안에 과연 하나님이 계신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소(35장)를 만드는 대신에 사람 눈에만 번지르한 금송아지(32장)만 만드는 결과를 낳는데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을 만들고 있지는 않는지, 극히 조심해야 할 것이며,
또한 바른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이 누구인지, 어떤 분인지를 확실히 아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 입니다.

그렇게 확실하게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야. 비로소 오늘 말씀,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는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출 35:21)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출 35:22)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라”(출 35: 29)는 말씀이 우리에게 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려면, 무언가 바치려면 우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먼저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아무리 적은 것을 드릴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아시고 기쁘게 열납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하나님에게 드릴 때에 기쁘게 열납되는 우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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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 두 번째 이야기 / 마 22: 34- 40 | -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2012-10-25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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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脚註) 없이 성경읽기

네 이웃을 사랑하라, 두 번째 이야기 / 마 22: 34- 40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I. 마당있는 집과 이웃

예전에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그 마당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심하다가 거기에 고추를 심었습니다. 그렇다고 뭐 전문적인 농사일을 한 것이 아니, 자세한 일은 기억이 없지만 그래도 하나 기억이 나는 것은 고추 등등 채소들을 내가 먹을 거니까, 조심에 조심을 해서 키웠다는 것, 농약은 안하고 거름 아주 재래식 거름으로 지력을 보충하는 작업도 하고, 그렇게 거둬들인 것들을 이웃들과 나눠먹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누어 주더라도, 조금더 싱싱한 것을 골라 이웃에게 주고 우리는 조금 덜한 것들로 먹었던 기억도 납니다. 그렇게 이웃과의 교제나누던 일을 떠올리면서 본문을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본문 36절에 율법사가 등장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강조하신 두가지 계명을 살펴보면 대상은 다르지만 ‘사랑’ 이라는 공통인자(共通因子)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을’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대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사랑하라,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 당연한 일이지요. 이웃을 사랑하되 네자신 같이 하라 하셨으니, 나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기본이구요.
그런데 예수님은 왜 사랑의 대상을 세 가지 – 하나님, 이웃, 나 - 로 한정해서 말씀하셨을까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라, 그러면 되는데 왜 하나님, 이웃, 나, 이렇게 열거해서 사랑의 대상을 한정하는 것처럼 말씀을 하셨을까요?

II. 하나님, 나, 그리고 이웃 ‘만’ 사랑하라
.
예수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이 세상에서 사랑해야 할 대상을 세 가지로 구분했습니다. 이밖에도 더 많이 있겠지만, 예수님은 특별히 세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이웃, 그리고 나.

그런데 아무리 자의적으로 한다고 해도 그렇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을 그렇게 간단하게 나눌 수 있을까요? 아니 나눈다는 말은 어폐가 있고, 사랑해야 할 대상을 그렇게 한정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 이웃, 그리고 나, 이렇게 세가지로?

다른 존재는 왜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까요? 사랑해야 할 대상이 모두다 이 셋 속에 포함된다는 것일까요? 사랑해야 할 다른 대상이 분명 더 있을 것인데, 왜 그정도만 말씀하셨을까요? 혹시, 예수님이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아니 단순한 것이 아니라, 너무 편협한 것이 아닐까요?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을 우리가 다양한 방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고작 나, 이웃, 그리고 하나님으로 구분해 놓고, 그 세 종류만 사랑하라. 그러면 그 나머지는?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요?

믿지 않는 사람들 말처럼, 그런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그래서 편협한 사람들이고, 기독교는 편협한 종교인가요? 아니면 예수님은 우리를 그정도로 밖에 보시지 않는 것일까요? ‘너희들 뭐 그 정도면 되지 않겠느냐, 더 이상 사랑한다는 것은 너희들에게 무리다’ 라는 의미일까요?

그렇다면 이웃 말고 저 멀리 있는 타지역 사람은 이 셋 중 어디에 포함되며, 우리나라 국민은 어디에,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디에 집어 넣어서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인가요?

‘이웃’이란 개념은 국어사전적 의미에 의하면 ‘나란히 또는 가까이 있어서 경계가 서로 붙어 있음’이란 말이니 ‘우리 집에 이웃하고 있다’는 식으로 쓰이며, ‘가까이 사는 집. 또는 그런 사람’이란 의미로 쓰입니다. 따라서 사전적 의미에 의하면 국가도, 다른 외국도 일단은 이웃의 개념에서 벗어나기에 그런 사람들은 사랑할 필요가 없는 것들입니다. .

그러나. 이런 저의 생각은, 이렇게 해석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의 뜻과는 무언가 다르지 않습니까? 이웃, 나, 하나님만 사랑의 대상으로 말씀하시고, 나머지는 언급하지 않으시다니, 그렇다고 예수님이 그 셋만 사랑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니 그렇다면 본문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나, 이웃, 하나님만 언급하시고는 나머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이웃이란 말의 뜻을 다르게 사용하셨거나,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의 참 뜻을 잘 모르거나, 그러지는 않을까요? 그러니 본문을 다시 살펴봐야만 합니다.

III. 이웃은 누구를 말하는 것인가?

본문에서 ‘하나님’, 그리고 ‘나’ 라는 말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 ‘이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웃이란 말을 모를리 없었을 것이니,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이란 개념에 뭔가 착오가 있다는 말이지요.

먼저 ‘이웃’은 어떻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사랑의 대상을 세가지로 한정해서 열거한 것처럼 보이나, 그게 아니라면, 예수님이 이 세가지 대상속에 사랑해야 할 대상을 모두다 집어넣은 것이라면, 본문은 해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아까 살펴본 것 같은 사전적 의미의 이웃과는 달라야 하기에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가정하고, 이 구절이 우리가 단순하게 몇 몇을 사랑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을 모두다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라면 <나 =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제외한 그 무엇>이고, <이웃 =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나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이 되어 이웃이란 말의 범위가 무한대로 바뀌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이웃이란 존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는데, 서두에 고추 농사를 지었다는 말씀드리면서 이웃과 나누어 먹었다는 그 이야기, 기억나십니까? 그 정도의 이웃과 지금 말하려는 이웃의 범위가 차이가 나는 것을 느끼셨지요? 서두에 말씀드린 이웃은 좌, 우측으로 서너집, 그중에서도 조금 친한 집만 말한 것입니다. 다행하게도 집 앞에는 공지였기 때문에 망정이지, 앞에 집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나마 전부 나누어 먹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웃이란 누구를 말합니까? 이 세상에서 나를 뺀 나머지 모두를 이웃이라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자면, 본문에서 나오는 이웃을 그저 우리가 알고 있는 낱말의 뜻, ‘가까이 사는 집. 또는 그런 사람’이란 의미로만 생각했기에, 자연히 예수님의 말씀을 편협하게 해석할 수 밖에 없던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본문에 의하면, ‘나’가 있으면 ‘이웃’은 누구인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이웃이라 정의할 수 있고, 결국은 ‘이웃’이란 단어의 개념을 확장시킬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웃’이라는 말을 하신 이유는 우리가, 우리 사람들이 이웃이라는 말을 그저 옆집으로만 생각하고 있길래, 그래서 그정도만 사랑을 하길래 예수님은 그것을 깨기 위하여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 눈에는 나, 그리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은 모두다 이웃으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이 세상을 좁게 보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웃이란 말에 홀려서 잠시 오해를 한 것입니다. 이웃이란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며, 그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IV. 네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면 과연 그런 저의 해석이 맞는 것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생각처럼 단순히 거리적으로 이웃하고 있는 사람의 이웃이란 의미가 아니라,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이웃이라 한다는 그 해석이 과연 맞을까요?

본문은 마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이 말씀을 예수님이 하신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누가복음은 다릅니다.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눅 10: 25-28)

누가복음에서는 “(율법교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기록되어, 그 말을 율법교사가 하였고, 예수님은 그 대답을 들으신 다음에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율법교사가 또 다시 질문을 하는 바람에, 그 내용이 더욱 확실해 졌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눅10:29)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굳이 여기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누가 이웃이라는 말인가요? 강도만난 자, 그래서 여리고 여리고 길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누워있는 사람이 바로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그 이웃, 강도만난 사람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웃이 될만한 사람이었던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의 개념에 의하면 당연이 그는 이웃이 될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첫째, 민족이 다르지요. 더군다나 유대민족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원수처럼 지나는 사이인데 어찌 이웃이란 말로 서로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이일뿐더러 그 사람들은 (거리적으로) 이웃에 가까이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니, 우리가 말하는 이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이 이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비유는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이웃’의 구체적인 예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이웃이란 것이 그저 너의 옆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넓혀라, 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내가 말하는 이웃이다’ 라는 ‘이웃’ 개념의 확장, 그게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누가 누가 살고 있느냐? 내가 살고 또 이웃이 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그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 이런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너무 잘 아시니까. 우리가 이 세상 사람 모두다 사랑해야 한다면, 나무 막연해서 우리가 도저히 사랑을 하지 못할 줄 아니시까, 우리더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사랑해야 할 대상을 구체적으로 꼭 집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나의 이웃이 누구일까?’ 라고 의문을 갖는 사람에게는 바로 그 누구누구가 너의 이웃이다, 라고 구체적으로 꼭 집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무 비현실적인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끼리도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데, 나 아닌 이웃, 게다가 범위를 무지무지하게 확장한 이웃을 사랑하라니, 그게 될 법이나 한 말이냐, 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의 그런 생각을 그것부터 바꿔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난 번 묵상에서 이웃을 사랑하자고 했지만 그 때는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깊게 생각지 않고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결론은 지난 번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 더, 덧붙인다면 지금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끼리 끼리만 좋아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가 더 많은 사람을 우리 이웃으로 넓혀 생각하고 사랑하기를  바라시는데 우리는 그 이웃을 좁히고 좁혀서 예수님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방향을 바꿔서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이웃의 개념을 넓혀가는 연습을 해보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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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웃을 사랑하라 - 첫 번째 이야기 / 마 22: 34- 40 | -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2012-10-22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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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脚註) 없이 성경읽기

네 이웃을 사랑하라  - 첫 번째 이야기 / 마 22: 34- 40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성경을 앞에 두고, 사람마다 성경을 대하는 마음 자세는 다를 것입니다. 대개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겨, 그래도 예사롭게 대하지 않고 무언가 의미있는 책으로 생각을 합니다. 기독교 신자가 아닌 분들도, 한 종교의 경전이 되는 책이니 어느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생각조차도 없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문제는 믿는 사람들이 이 책을 어느 정도로 받아들이느냐에 차이가 있다는 데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말씀의 속 의미를 찾아 애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나타난 글자만 생각하고 그 속의 깊은 뜻을 헤아릴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그러한 차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I. 꽃밭에 물을 주어라

본문 35절에 율법사가 등장합니다. 여기에서 율법사라 함은 율법 전문가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해서 그 결과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율법을 따라 살도록 교육도 하고 또 율법의 세부적인 사항을 규정하는 사람들이 바로 율법사라 이름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자료를 보니까 그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 놓고 있습니다. 
<서기관들 혹은 율법사들 ; 성경을 필사하는 임무를 지닌 자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문제삼아서 그리스도를 모함하려고 언제나 바리새인들 곁에서 같이 행동하였다. 그들은 율법의 영적인 면보다 문자적인 면에 관심을 더욱 기울였다.>

그들이 하는 성경해석 방법을 비유하자면, 이런 식입니다.
< 어떤 부모가 여러 날 집을 비우면서, 애지중지하는 꽃밭을 아이들에게 돌보도록 부탁을 해놓고 갔습니다.
‘애들아, 이제 여름인데 꽃밭에 꼭 물을 주어야 한다.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부모님의 말씀을 아이들은 잘 순종하여 하루에 한번씩 화단에 물을 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느 날, 그날은 비가 내리는 것입니다. 비가 내리자, 아이들 간에 의견 충돌이 생겼습니다.
어떤 아이는 말하기를, ‘비가 오기는 하지만 부모님 말씀은 순종해야 하는 것이고 여하한 경우에도 거역할 수 없는 법이니 비가 오더라도 꽃밭에 물을 뿌려야 한다’ 했고 또 다른 아이는, ‘아니다. 부모님이 꽃밭에 물을 주라는 의미를 생각해 보자, 꽃밭에 심은 화초들이 물이 없으면 죽을까봐 물을 주라고 하신 것이니 비가 오는 날이면 물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두개의 의견이 충돌한 것입니다.
첫번째 의견을 내세운 아이들이 논리가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또 이런 주장을 내세웁니다. ‘그렇다면 비가 얼마나 와야 물을 주지 않아도 되느냐? 비가 어느 정도 오면 물주지 말라 그랬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으니, 그것 한번 따져보자,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어떤 분이냐? 엄격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운해 하실 분들인데 그분들이 우리가 비오는 날이라고 해서 꽃밭에 물을 주지 않는다면 일하기 싫어서 꾸며대는 핑계라고 하실 것이다. 비가 온다고 내린 비에 물을 더 주면 어디가 어때서 그러냐? 그러니 물을 주어야 한다.’>

이런 비유가 너무 과장이라고 생각되자만, 현재도 그런 경우 얼마든지 있으며,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에는 더욱 심했습니다. 지금 그런 예가 바로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율법사들입니다.

안식을 거룩히 지키라는 하나님 말씀을 그들은 충실하게 지킬 목적으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 등을 무수히 연구해서 발표했습니다. 안식일에는 얼마 정도 걸어가면 안되고, 심지어 밥을 지어도 안되고 불을 켜도 안되고, 그래서 안식일에는 다친 사람을 구해줘도 안되는 것으로 규정을 만들어서, 율법을 철저히 지키느라 무진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안식일 규정을 문자 그대로 지키느라 애를 쓰기는 했지만 정작 그 계명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참 뜻을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인 율법사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마22;36)

II.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참으로 어려운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덜 중요하느냐고 묻는데 이런 질문에는 대답을 잘해도 탈이고, 못해도 탈입니다.
어느 것 하나를 들어 그것이 제일 가는 계명이라고 대답한다면, 그럼 왜 다른 것은 중요시 하지 않느냐고 책을 잡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는 말의 뜻은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중에 우리가 지켜야 할 많은 계명이 있는데, 그중에서 이 두계명이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이며 이 둘은 그래서 다른 많은 계명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두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다른 계명은 지키나 마나 하는 것이며 고로 이 두계명의 정신으로 다른 계명을 또한 지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영어 성경에 보면 hang on이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그 뜻은 다른 많은 계명들이 이 두계명에 달려있다. 걸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두계명이 튼튼하게 유지 되지 않으면 다른 계명들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강조하신, 두가지 계명을 살펴보면 대상은 다르지만 사랑이라는 공통인자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

III.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그런데 여기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 범위가 넓으니까, 나중에 기회가 되면 살펴보기로 하고 두번째 계명인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사랑이 과연 무엇일까요?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우리 모두 각자 무언가 떠오르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사랑이란 말의 정의가 너무 다양하더군요.

① 아끼고 위하는 정성스런 마음. 또는 그러한 마음을 베푸는 일. ¶ 어머님의 ~. 나라와 겨레에 대한 ~.
② 남녀가 서로 정을 들여 애틋하게 그리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 ¶ ~을 맺다. ~에 빠지다. ~을 속삭이다.
④ 어떤 사물을 몹시 즐기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러한 일. ¶ 자연(동물)에 대한 ~. 예술에 대한 .

그런 정의를 따라 사랑이 무엇인가 살펴보니, 무언가 알듯도 합니다. 그런데 국어사전에는 그런 사랑의 개념 외에도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사랑의 의미가 별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 하느님이 사람을 불쌍히 여겨 구원과 행복을 베푸는 일.

국어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란 ‘하나님이 사람에게 베푸는 사랑’이니,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명의 사랑과는 다른 사랑입니다. 본문을 살펴볼 때에는 사람들이 ‘하는’ 사랑의 개념을 적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자, 다시 두번째 계명으로 돌아옵시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지금 이 말씀을 받는 상대방은 본문에서는 율법사이지만 지금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우리들이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시대를 건너 바로 우리들에게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는 사랑이란 행위가 가야 할 곳이 두군데 있숩니다. 하나는 이웃이고 또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그러니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사람도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자존(自尊)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만드신 귀한 생명이구나, 하나님은 나를 세상에 보내셔서 나를 통하여 무언가 일을 하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가질 때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세를 가지고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여기에 딜렘마가 있습니다. 과연 다른 사람을 나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제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경험을 해보기는 한 것 같은데, 바로 이것이 그거다,라고 샘플로 내세울만한 경험이 없기에 망설였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에 그냥 그런 것이 있으니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자신처럼 사랑하십시오, 꼭 하셔야 합니다,라고 말 할 수 없어서 고민하던 차에, 아주 좋은 그리고 효과있는 사례를 발견했습니다.

조선시대 실학자로 유명한 정약용의 일화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다산 정약용이 외출을 했다가 집에 돌아오니 무언가 집안 분위기가 다른 게 느껴집니다. 집에서 허드렛 일을 하는 계집 종이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서있고 아내 홍씨는 안색이 상기된 표정입니다. 아내 홍씨는 깐깐한 성품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아닌지라 사연을 물어본즉, 오랜 장마로 끼니가 끊긴지 오래되어서 호박죽을 끓여서 겨우 연명을 했는데 이제 그 호박마져도 다 떨어져 끼니가 간데 없어지니 그것을 보다 못한 계집종이 옆집 텃밭에서 호박 하나를 몰래 따와서 그것으로 죽을 끓여 왔고. 
그것을 알게 된 홍씨가 잘햇다는 말 대신 매를 들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너더러 도둑질을 시키더냐?”
그런 이야기를 들은 다산 정약용은 매를 때리려는 아내를 말리며 탄식을 합니다.
“만권 책을 읽으면 무엇하나? 아내가 배부를 수 없으니 그것도 소용이 없다. 두 이랑 밭만 있어도 계집 종이 죄를 짓지 않을 것을,,,,,”
다산은 그의 공부와 생각을 거기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이 생활 자체에서 내가 무언가 겪어내지 않으면 안된다. 이자리를 피할 수는 없지만 또한 벗어나야만 하는 그런 진퇴양난의 처지를 그는 오히려 이용합니다. 내 아내와 자식들이 배고파 굶주리는 것을 알았으면 다른 사람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내가 내 처자식만 살린다고 내 것만 챙긴다면 역시 그런 굶주림을 겪는 옆집은 누가?
그래서 그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내 자식의 굶주림을 못 보아 넘기니, 그 때문에라도 남의 자식의 굶주림도 헤아려보자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그가 낳은 아이들은 모두 6남 3녀인데 그중 4남 2녀을 잃었습니다. 원인은 천연두.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의 아이들을 천연두로 잃은 슬픔을 겪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마과회통>이라는 의학서를 지었습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남의 아픔을 마치 자기 것인양 생각하며 백성들의 고초와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하여 그는 갖은 애를 썼습니다. 결국 그런 것을 시기한 보수 세력에 의해 그의 인생은 영광의 자리보다는 험난한 곳에 많이 섰지만, 역사는 말합니다. 그의 인생이 백성과 국가를 위한 진정한 선각자였다고. >

저는 바로 그런 정약용의 삶이 바로 네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또한 그 당시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학, 즉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IV. 내 가정의 행복이 나의 경쟁력(?)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을 일생동안 자기 삶으로 실천한 사람도 있는 반면에 요즈음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풍조는 바로 경쟁입니다. 경쟁이라는 말은 다름 아니라 남이 나보다 못해야만 내가 산다는 논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서로 같이 살아가는 상생(相生)이 아니라 내가 살고 남이 죽은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를 보시면 네 이웃을 네몸처럼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그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신 예수님이 무어라 말씀하실까? 실로 궁금합니다.

얼마전에 이곳 전주시에서 주관하는 교양강좌가 있었는데, 자기들은 좋다고 그렇게 제목을 정했는지 모르겠으나 그 제목을 듣는 순간 가슴에 섬뜩한 그 무엇을 느꼈습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서울에서 강사를 초청해서 하는 강좌 타이틀이 <내 가정의 행복이 나의 경쟁력>입니다. 물론 그 취지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밖에 나가서 가족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가장들에게 포근한 안식처가 되어서, 가정이 행복해야만 된다는 이야기이지만 이 제목에는 엄청난 모순이 들어 있습니다.

내 가정은 행복해야 한다. 왜? 왜라는 질문에 그 강좌 제목은 치명적인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내 가정이 행복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 전체의 행복을 만드는 기초가 되니까, 가 아니라 내 가정의 행복은 밖으로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기 위한 기초가 된다는 것입니다. 내 가정이 행복해서 가장이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런 편안한 마음으로 가정 밖으로 나가서 다른 가정의 가장들과 경쟁해서 이기고 돌아오라.

물론 현대는 경쟁사회입니다. 약육강식의 동물적 논리가 철저하게 지배하는 곳이 바로 이 사회이기는 하지만 회사에서 경쟁하서 모두 일등할 수 없고 또한 회사끼리 경쟁해서 모두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니, 실패하는 많은 가장들이 그래도 가정에서만은 평안을 찿고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웃의 슬픔과 아픔을 감싸주는 것 또한 내 가정의 행복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가정의 행복이 나의 경쟁력’이라는 구호는 그 타이틀 자체가 내 이웃을 나의 경쟁 상대로 여기라는 부추김이며, 이웃을 사랑의 대상의 아니라 경쟁의 대상으로 삼고 이겨야만 하는 경쟁자 이웃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우리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철저하게 다릅니다.

그런 경쟁의 마음에서 벗어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에 자기 사랑에서 이웃사랑으로 흘러가고, 그 흘러간 이웃사랑은 다시 자기 사랑으로 흘러옵니다. 그렇게 두개의 사랑은 서로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서 더욱 큰 사랑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 모두는 나의 행복이 이웃의 행복이 되는 그러한 시절이 찾아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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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크리스마스, 설교를 도둑맞았습니다. | -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2012-10-18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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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크리스마스, 설교를 도둑맞았습니다.

 

제가 이번에  <다비아>와 <뉴스앤조이> 그리고 이 불로그에  <각주없이 성경읽기>라는 타이틀 아래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어보려고 정리를 하고 있는 중인데, 재미있는 일을 만났습니다.

이런 일에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요?,

 

책의 제목을 <삭개오의 크리스마스>로 하기로 하고, 허실 삼아 그 제목을 인터넷 검색창에 넣었더니, 이게 웬걸 제가 쓴 글도 있지만 다른 분이 그 제목으로 설교를 하신 것이 있더군요. 그 제목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습니다. '이거 내가 다른 분이 쓴 글의 제목을  내 글의 제목으로 삼았나?' 염려되어 자세히 검색해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제가 올린 글을 그대로 -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 자기가 한 설교처럼 하셨더군요, 설교를 했고, 그리고는 그것을 버젓이 인터넷에 올려 놓았습니다.

 

제가 그런 글을 공적인 매체에 올려놓았으니 망정이지, 개인 불로그 정도에 올려놓았더라면  그분이 한 설교를 제가 그대로 했다는 소리를 들을뻔 했습니다.

 

먼저 제가 쓴 글은 <뉴스앤조이(www.newsnjoy.or.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제목은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입니다. 

본문은 누가복음 19:1-10 으로 게재 날짜는 2004. 12. 12입니다.

원문은 다음 링크를 클릭하시면 볼 수 있습니다.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0143

 

 

같은 본문에 같은 제목의 설교문이 며칠후인  2004. 12. 31자에  올려져 있습니다.

http://renochurch.x-y.net/cgi-bin/board/board.cgi?id=12&action=f&f=0&p=32&n=373&l=12258468

 

내용이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데, 다만 그중에 몇가지 바뀐 게 있습니다.

제 글에 제가 목회 하기 전에 회사 생활하면서 겪은 일을 삽입해 놓았는데, 인용해 보겠습니다.

 

<제가 회사를 다닐 적, 신입사원이었을 때 세무서 출입을 한 적이 있습니다. 부가세신고를 하고 세금을 납부하는 것인데, 회사가 국영기업체라서 세금을 적게 신고할 것도 없고 세무서에서 우리 회사에 대하서 뭐 이래라 저래라 할 것도 없는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담당자인 세무서 직원과 별 말 건넬 것도 없이 그냥 서류만 제출하는 정도였는데 어느 해 여름에 제가 서류를 가지고 세무서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별 대화도 없었던 담당자가 얼굴에 미소를 잔뜩 머금은 채 자기 옆자리에 앉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날따라 너무 너무 살갑게 이것저것 이야기하더니 갑자기 종이를 한 장 내 앞에 내밀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뭐라고 쓰는 데, 읽어보니 거기에는 "이번에 저 휴가갑니다"고 써 있었습니다. 그때 제 대답이 그랬어요, 아! 좋겠습니다, 휴가도 가시고, 그래 어디로 가십니까? 그러고 난 뒤 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다시 회사에 들어갔습니다.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휴가 이야기를 상사에게 했더니 빙긋이 웃으면서 저에게 말하기를 그게 무슨 의미인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제가 왜 그 말에 숨어 있는 의미를 모르겠습니까? 저는 다만 그렇게 말하는 그 얼굴이 미워서 그러니 그냥 지나갑시다 하니 상사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돈으로 해결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면 된다. 세상에는 돈 얼마 쥐어주면 그대로 끝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자네도 이제 사회생활을 하게 되는데, 그런 사람이 제일 대하기 만만한 사람이다. 그냥 웃으면서 얼마 만들어서 갖다 줘라. 그리고 경멸해주면 된다. 그런 사람은 돈 몇 푼에 자기를 파는 사람이니 마음껏 경멸해도 된다. 어떤 면에서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인생의 가치를 돈에 두는 사람처럼 이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이 없다. 더 무서운 사람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람이다. 자네만 그런 사람이 되면 된다.

그래서 돈을 얼마 만들어서 가져다 준 적이 있습니다. 그 일이 거의 20여 년 전 이야기이니까, 지금쯤 그 세무서원은 아마 부자가 되었거나 아니면 비리 공무원으로 짤렸거나 했겠지요.>

 

다른 분 설교에서는 그 부분을 이렇게 조금 바꿔 놓았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사업을 할 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경리과 직원이 세무서에 가서 부가가치세 신고를 하고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 때가 초여름쯤인 거 같은데 우리 직원이 세금을 내려고 담당자에게 갔더니 그 날 따라 담당자가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친절하게 안내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사생활이 어떤지 이것저것 친한 것처럼 얘기하더니 갑자기 메모지를 내놓고 거기에다가 "다음 주에 저 휴가 갑니다"라고 쓰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물었더니 우리 직원은 그 옆에다가 "아! 좋겠습니다, 휴가도 가시고, 그래 어디로 가십니까? 잘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써 놓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장님! 그 사람 속보이더라고요. 여러분 세무 직원이 "휴가 간다는 말을 종이에 써 주는 깊은 뜻을 혹시 아시겠습니까?"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때만 해도 그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돈으로 해결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면 된다. 세상에는 돈 몇 푼 쥐어주면 끝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자네도 이제 사회생활을 하는데, 사실은 그런 사람이 상대하기 제일 만만한 사람이다. 여행 중에 식사라도 한번 하라고 용돈 좀 갖다 주고 오라. 그리고 그 사람을 경멸해주면 된다. 그런 사람은 돈 몇 푼에 자기를 파는 사람이니 마음껏 경멸해도 된다. 어떤 면에서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인생의 가치를 돈에 두는 사람처럼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이 없다. 진짜 무서운 사람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이다. 자네만 그런 사람이 되면 된다.
그 일이 벌써 20여 년 전 이야기이니까 지금쯤 그 세무 직원은 큰 부자가 되었거나 비리 공무원으로 잘렸거나 했을 겁니다.>

 

대조하여 보시면 어떤 것이 차이가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저의 설교를 가져다 자기 것을 만드느라, 얼마나 수고하셨을지......

제가 겪은 경험이 자기에게는 없었을 것이니, 자기 (회사 사장님이셨나 봅니다)  회사의 경리직원이 경험한 것처럼 만드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을까요? 예컨데  <우리 직원은 그 옆에다가 "아! 좋겠습니다, 휴가도 가시고, 그래 어디로 가십니까? 잘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써 놓고 왔다는 것입니다> 라는 부분 말입니다. 저는 구두로 한 것인데 그 경리직원은 글로 써 놓고 왔다니 , 그것을 지어내느라 얼마만큼의 창작의 고통이 따랐을지, 참으로 수고 많으셨군요.....

 

차라리, 그런 수고를 하는 대신에 말씀 공부나 하셨으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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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설교를 그대로 가져가신 분 | -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2012-10-18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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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크리스마스

 

http://renochurch.x-y.net/cgi-bin/board/board.cgi?id=12&action=f&f=0&p=32&n=373&l=12258468

  김백석목사
   http://godislove.net/goodnews/ When : 2004/12/29,16:31:32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눅 19: 1~10)
2004년 성탄절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아멘.

Merry Christmas!
성탄을 맞아 여러분 가정에 은혜와 평안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따라하십시다. '삭개오와 크리스마스' '삭개오와 크리스마스'
여러분! '삭개오와 크리스마스' 하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성경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연결이 안 되는데요" "삭개오와 크리스마스는 아무 공통점이 없어요" 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전혀 연결되는 점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아요. 예수께서 탄생하실 때 삭개오가 목자들을 따라 베들레헴에 가서 경배했다거나 동방박사를 따라갔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성경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좀더 확실해지는데요. 3절을 읽겠습니다. "저가 (삭개오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보고자 하여…" 삭개오는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전혀 몰랐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오신 날이 예수님의 생일이라는 기록도 없어요. 그런데 본문 말씀을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묵상하면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크리스마스의 요소가 다 들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서에 소개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어떤 기사보다 크리스마스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에서 우리는 이 땅에 예수님이 오신 이유, 더 나아가 우리 개인의 마음에 찾아오시고, 생활속에 예수님이 찾아오시는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성탄절은 이 세상 사람 모두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역사는 예수님이 오신 날을 중심으로 하여 BC<주전=Before Christ>와 AD<주후=Anno Domini> 로 나누어지고, 구약과 신약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뉘어 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을 보면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예수님이 오신 후가 완전히 다르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예수님이 오신 후에 어떻게 구분이 되고 어떤 점이 달라지고 있는지를 염두에 두시고 본문 누가 19: 1~10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읽도록 하겠습니다.
(1) 예수께서 여리고를 들어 지나 가시더라.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 저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수 없어 (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니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라. (5)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로다. 아멘.
먼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어떠한 상황이었습니까? 거기에는 죄악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간에 갈등과 불화가 있었습니다. 여리고라는 동네에 삭개오란 사람이 살았는데 그 사람은 세리장이라고 했고 연이어 그는 또한 부자라…고 설명합니다. 여기 '세리장이요'란 말과 '또한 부자'란 말 사이에는 수많은 사연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문장에는 원인과 결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세리장이었으므로 그는 부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무슨 뜻인지 그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한국에서 사업을 할 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경리과 직원이 세무서에 가서 부가가치세 신고를 하고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겁니다. 그 때가 초여름쯤인 거 같은데 우리 직원이 세금을 내려고 담당자에게 갔더니 그 날 따라 담당자가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고 친절하게 안내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회사생활이 어떤지 이것저것 친한 것처럼 얘기하더니 갑자기 메모지를 내놓고 거기에다가 "다음 주에 저 휴가 갑니다"라고 쓰더라는 거지요.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물었더니 우리 직원은 그 옆에다가 "아! 좋겠습니다, 휴가도 가시고, 그래 어디로 가십니까? 잘 다녀오십시오!" 그렇게 써 놓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장님! 그 사람 속보이더라고요. 여러분 세무 직원이 "휴가 간다는 말을 종이에 써 주는 깊은 뜻을 혹시 아시겠습니까?"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 때만 해도 그런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돈으로 해결되는 사람에게는 돈을 주면 된다. 세상에는 돈 몇 푼 쥐어주면 끝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자네도 이제 사회생활을 하는데, 사실은 그런 사람이 상대하기 제일 만만한 사람이다. 여행 중에 식사라도 한번 하라고 용돈 좀 갖다 주고 오라. 그리고 그 사람을 경멸해주면 된다. 그런 사람은 돈 몇 푼에 자기를 파는 사람이니 마음껏 경멸해도 된다. 어떤 면에서 그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인생의 가치를 돈에 두는 사람처럼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이 없다. 진짜 무서운 사람은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람이다. 자네만 그런 사람이 되면 된다.
그 일이 벌써 20여 년 전 이야기이니까 지금쯤 그 세무 직원은 큰 부자가 되었거나 비리 공무원으로 잘렸거나 했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 '세리장이요'와 '그는 부자라' 말 사이에 저희 회사 직원과 세무서직원 사이에 오갔던 비슷한말이 얼마나 많이 오고 갔겠습니까? 그 결국로 그는 부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때 저에게 멸시를 당하던 세무서 직원처럼, 삭개오도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돈을 바치지만 돌아서서 얼마나 멸시하고, 욕을 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그 당시 사회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죄인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삭개오에 대한 이웃사람들의 평가가 7절에 나와 있습니다. "죄인의 집에 들어 갔도다." 사람들 삭개오를 죄인으로 인정하였습니다. 그 죄 때문에 그 가정에, 그리고 그가 속해있는 공동체에는 뭔가 모를 긴장이 흐르고, 언제나 갈등이 있고 결과적으로 평화가 없어졌습니다. 평화가 파괴 된 곳, 바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상황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세상도 바로 그랬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제 정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모든 인류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김백석 한 사람을 위하여,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오셨습니다. 여기 삭개오를 위해서 오셨다는 기록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삭개오에게 오셨습니까? 예수님이 먼저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3, 4, 5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저가 예수께서 어떤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예수님이 먼저 네 집에 가겠다 하셨습니다. 삭개오의 집은 부정한 죄인의 집입니다. 그런 사람의 집에 예수님이 먼저 '내가 너의 집에 가야겠다' 하시면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갈 것이 있어요.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는 것이 그 당시 상황으로 어떤 일이었는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생각과 관습을 알아야 이 부분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이해가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부정한 곳에는 아예 들어가지를 않았습니다. 그 정도가 어느 정도로 심했느냐 하면, 요한복음에 이러한 사실을 아주 극명하게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요 18:28).
29절, 그러므로 빌라도가 (관정) 밖으로 저희에게 나아가 말하되
33절,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말하되
38절,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말하되….
이 말씀은 예수님은 빌라도의 관정 안에 계시고 유대인들은 밖에 있습니다. 관정이 부정한 곳이라 여기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절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라를 다스리는 총독이 어떻게 거기에 대응하느냐 하면 유대인더러 들어오라고 하지 않고 자기가 친히 관정 밖으로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서 심문을 하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총독조차도 유대인의 관습을 그렇게 존중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과감하게 무시하고 깨 부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의 표현은 자연스런 거지요. "뭇 사람이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들어갔도다." 여기서 비난의 초점은 삭개오가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삭개오를 비난하는 것이라면 이렇게 말했겠지요. "죄인인 주제에 예수님 좋은 것은 알아 가지고." 뭐 이런식으로 했겠지요? 예수님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으면서까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갔을 때에, 삭개오의 마음에 들어 오셨을 때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삭개오의 고백을 직접 들어봅시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무슨 얘기입니까? 삭개오의 고백에 담겨진 뜻을 살펴볼까요? 삭개오는 지금 자기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막연히 하나님 앞에 용서해달라고 그저 입으로만 습관처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내어놓는 고백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죄를 고백하는 그 증거로 자기 재산의 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내어놓겠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회개운동이 1907년 평양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당시 미국 선교사들 자기의 죄를 교인들 앞에서 고백하며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그동안 사역을 하면서 다른 선교사보다 더 잘 보이려고 다른 선교사를 시기했습니다." 이런 죄를 구체적으로 하나씩 고백하기 시작할 때에 성령님께서 강력하게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한 선교사가 회중들앞에서 구체적으로 눈물로 고백하며 회개할 때에 그 회개 운동은 온 교회에 불이 번지듯 번져나갔고 나아가 평양 전체 지역이 죄를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부흥의 큰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 각 교회마다 회개하고 자기가 훔친 물건들을 가지고 왔는데 그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다는 것입니다.
바로 삭개오의 마음속에도 회개의 물결이 소용돌이 친 것입니다. 그 물결에 삭개오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합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내 가슴이 너무 너무 아픕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다음 말을 계속 들어봅시다. "만일 내가 뉘 것을 토색했으면…." 이제 삭개오의 돌덩이처럼 굳었던 완악한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솜처럼 부드러워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세금을 걷을 때 어느 누구 사정 한번 봐준 적 있습니까? "조금만 여유를 주세요, 내일까지만 말미 주시면 세금을 꼭 내겠습니다." 하고 애원하는 이웃의 하소연에 단 한번 귀 기울이지 않던 악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건 네 사정이고 나는 내 일에 충실할 뿐이니까 살림을 차압해야겠다면서 자기 이웃을 착취하던 그러한 마음이 이제 솜처럼 부드러워진 것입니다. 주여! 예수님, 제가 만일 누구를 괴롭힌 적이 있다면, 내 말이 그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면, 제가 그 벌을 받겠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 있었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그 가정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음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삭개오의 변화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지어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할렐루야!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마음에 변화를 받아, 삭개오는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 이게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받고 그 마음에 평화가 이루어지고, 이웃에게 그 평화를 가져다주는 바로 그것이 크리스마스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에 천군 천사들이 부른 노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2장 13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중에 평화로다." 땅에서의 평화를 노래했는데 그 말은 죄인이 구원을 받는 순간, 이제 이 땅에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군 천사의 노래 중에서 주의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평화가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사람들 중'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너와 나 사이에, 사람들 중에, 이웃과 이웃사이에 평화가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개인 한 사람에게만 평화가 있는 게 아니라, 그 공동체에 평화가 임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진정한 평화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매 맞은 사람은 발뻗고 자지만 때린 사람은 웅크리고 잔다는 게 있습니다. 비록 맞은 사람은 발뻗고 자면서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으나 그것이 한 사람만의 평화로 끝난다면 그 공동체에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너와 나 사이에 평화가 흘러야 합니다. 지금 앉아있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나와 너 사이에 평화가 흘러야 진정한 크리스마스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이 이 땅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결론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로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 땅에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구원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 가야 할 말이 있습니다. '잃어버린'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잃어버린 사람이란 무슨 말입니까. 그 말의 주어를 알아보면 그 말의 의미를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잃어버린'이란 동사의 주어는 누구입니까? 누가 그 사람을 잃어 버렸기에 잃어버린 사람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잃어버린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잊지도 않으십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그렇게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찾으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 10절에서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로다." 오늘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상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비록 크리스마스에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니지만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 변화되었기에 저는 오늘 설교제목을 '삭개오의 크리스마스'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남의 집, 이웃에게만 오신 것이라면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모시고 영접했을 때 그 마음에, 그 집에, 그리고 그 이웃에 평화가 임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마음에, 우리 가정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영접해 모셔야만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말씀이 이 땅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크리스마스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고, 그것을 마음에 새기고, 기념하기 위해 우리가 오늘 이렇게 모였습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입니다.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아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죽어 마땅한 죄인을 구원하시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님께서 이 시간 우리 각 사람을 찾아오시고 우리를 향하여 말씀해 주신 것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모신 삭개오가 결단하고 변화된 삶을 산 것처럼 우리도 철저히 회개하고 주님의 능력으로 변화를 경험하는 은혜로운 성탄절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를 통하여 우리의 가정이 평화를 회복하게 하시고 우리의 공동체가 하나님의 평강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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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개오의 크리스마스] 드디어 탈고 | -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2012-10-13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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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책이며,

[각주없이 성경읽기] 시리즈, 두 번째 책인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드디어 끝내다. 이름하여 탈고,라는 것.


이번 11월엔 서점에서 볼 수 있기를 ..


해서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삭개오를 생각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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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주시려는 하나님 / 렘29:10-14 | - 삭개오의 크리스마스 2012-10-10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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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을 주시려는 하나님 / 렘29:10-14

우리 흔히들 인사 나눌 때 쓰는 말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편히 주무셨습니까? 안녕히 계십시오, 편히 계십시오, 등등. 그런 인사말에 들어있는 기본적인 생각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안녕’입니다. 평안하고 무사하고 탈없고 등의 의미를 지닌 ‘안녕’.

그렇게 사람들은 안녕, 평안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디 사람만 그런가요, 하나님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평안에 대하여 관심을 많이 가지고 계십니다.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본문에 등장합니다. 11절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

그런데 하나님은 ‘누구의’ 평안에 관심이 많을까요? 바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11절은 우리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그리고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좋은 것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의 앞길에 재앙이 아니라 평강을,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은 우리 사람이 평안을 누리며 사는 것이라 했는데, 그 평안은 어떻게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을까요? 본문 12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하면 평안을 얻을 수 있을까요? 과연 그러한지, 그것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10절, 11절, 12절 세 절을 분석해 보도록 합시다.

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그야말로 하늘에서 복이 뚝 떨어진 것 같은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적지로 끌려간 유다 민족이 해방되어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글성경에서는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없도록 번역되어 있습니다. (물론 다른 구절을 통하여 그 이유를 알아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10,11,12절 세 개 절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있으니 그 세 개 절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  다시 말씀 드리면, 10절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사건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앞 절인 9절 그리고 뒤에 나오는 11절에서는 10절의 사건이 생기는 이유를 찾아 볼만한 연결고리가 제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오해할만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3개 절을 합하여 읽어보면, 이렇게 이해가 되기 쉽습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성경에 ‘기도’라는 말이 나오면, 조건반사적으로 ‘그래,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실 거야. 그렇지,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먼저 기도하고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셔서 그들을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며 결국 이스라엘 백성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시는 거야’ 라는 식으로 이해를 하기 쉽습니다.

백 보 양보해서 그렇게 이해해도 별 지장이 없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해석해 버리면 항상 같은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와 같이 같은 교훈만 얻고 말뿐입니다.
‘기도하라! 하나님을 찾으라!’
과연 이 본문이 그런 기도를 하라는 이야기인가요? 그래서 기도하라, 하나님을 찾으라,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평안한 길로 인도하신다는 뜻일까요?

좋은 해석 같지만 그 정도에서 그치면 더 깊은 뜻은 그냥 스쳐 지나가버리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지요. 무엇이 우리를 그렇게 만드는가 하면 10, 11, 12절 이렇게 세 절의 관계를 우리가 따져보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만큼만 해석을 해버립니다.
‘아, 기도라는 말이 나왔으니 당연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우리를 평안의 길로 인도하시는 거야,’ 끝!!  그러면 새로운 내용을 우리가 배우지 못합니다.

우리가 말을 할 때, 그리고 글을 쓸 때 앞 문장과 뒷문장은 반드시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아무런 관련이 없게 각각 뜻이 다른 문장을 이어간다면, 아무렇게나 하는 말이지 제대로 뜻을 전하려고 하는 문장은 아닐 것입니다.

예컨대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 ‘영희는 예쁘다’. 이런 두 개의 문장이 있다 합시다.
이런 두 개의 문장이 서로 관련이 있으려면, 그 가운데 접속사나 관련을 맺어주는 말을    집어 넣어야 합니다.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 영희는 예쁘기 때문이다.’ 또는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영희가 예쁘기 때문이다.’ 이렇게 두 문장 사이에 연관을 맺어주는 말이 들어가야 하는데 오늘 10절, 11절 그리고 12절은 제각기 제 할 말만 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한글번역으로 살펴보아서는.

그래서 어떤 식으로 흔히들 이해하는가 하면 10절은 그냥 그대로 홀로 놔두고, 11절과 12절을 원인과 결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11절을 결과로, 12절을 원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그래서
너희가 나에게 와서 기도한다면, 내가 기도를 들어주어서 너희 장래에 평안과 희망을 줄 것이다’ 라고 해석하기 쉽습니다.

표준새번역의 경우도 개정개역과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그러나 영어 성경으로 이 세 절을 살펴보면 그게 아닙니다.
10절에 나오는 내용, 바벨론에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바로 그 다음절 11절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For I know the plans I have for you, declares the Lord, “ plans to prepare you and not to harm you, plans to give you hope and a future.>

<왜냐하면,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영어 성경에는 그 절의 성격을 분명히 해 놓습니다. For가 11절의 맨 앞에 등장합니다. For가 ‘왜냐하면’이란 뜻입니다. 앞 절에 나오는 사건의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다, 왜냐하면 하나님인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다음 절인 12절은 어떤 관계일까요?
<Then you will call upon me and come and pray to me, and I will listen to you.>
<그 다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Then,이라는 말이 앞에 등장합니다. Then은 ‘그리고 나서’, 또는 ‘그런 후에’ 라는 뜻이니, 너희들이 고향에 돌아간 다음에 기도하고 부르짖고,의 순서가 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이 세 절을 문장간에 원인과 결과를 정리해서 다시 한번 읽어본다면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0절)
왜냐하면,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기(때문이다) (11절)
그런 후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12절)>

이렇게 해석을 하고 보니, 우리가 맨 처음 생각한 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해석은 우리가 열심히 기도하니 하나님이 우리를 평안한 길로 인도하시는데 반하여
제대로 살펴본 해석은 하나님은 원래부터 우리에게 그러한 평강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 주시어서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 나라에서 통용되는 은혜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무언가 해서, 하다못해 기도라도 해서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하나님이 응답하셔야만 그제서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원래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평안의 길을 허락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를 들어볼까요?
고향 시골에 살고 계시는 할아버지는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랑스러운 손자를 애타게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추석 명절을 맞이하여 아들과 손자가 고향집에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 소식에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줄 용돈과 맛있는 과일 등등을 선물로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추석이 되어 아들 식구들이 다 내려왔습니다. 그래서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에, 할아버지가 손자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마악 꺼내주려는 순간, 손자가 말합니다. “할아버지, 나에게 뭐 주실 선물 없어요? 주세요”
자, 이렇게 되어서 할아버지는 준비한 선물을 손자에게 주기는 했지만, 그렇게 해서 선물을 주고 받은 경우, 선물을 받은 손자나 건네준 할아버지가 느끼는 감정은 다를 것입니다. 손자는 할아버지가 미리 준비한 그 마음은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가 입을 벌려 주시라고 했기에 할아버지가 주신 것으로 이해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그 선물은 손자가 달라하지 않았어도 할아버지가 손자를 주려고 준비한 것입니다, 굳이 손자가 입을 벌려 말하지 않았어도, 주려고 계획한 것이니 할아버지는 할아버지대로 섭섭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손자에게 주려고 한 것인데, 손자가 달라고 해서 마지 못해 준 것같이 보였을 것 같아서 마음이 서운한 것입니다. 그만 손자가 순서를 어긋나게 만드는 바람에 할아버지의 그 마음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도 흔히들 해석을 잘못하여, 평강을 주시려는 하나님이 그만 사람들이 간청을 하니, 마지못해 허락하시는 것 같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드린 잘못된 해석, 천편일률적인 해석이 나오게 되는 것이지요. 그게 아니라 하나님은 원래 우리들에게 평강을 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평안의 길로 인도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 다음부터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고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믿음으로 생활을 영위해나가야 한다는 말이지요. 이게 바로 이스라엘 백성을 평안의 길로 불러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민족을 그렇게 은혜를 베푸셔서 평안의 길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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