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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老 莊子
무감어수 감어인(無鑑於水 鑑於人) | - 老 莊子 2017-06-0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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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에세이

 무감어수 감어인(無鑑於水 鑑於人)

입력 2015-10-12 18:30:19 | 수정 2015-10-13 04:59:33 | 지면정보 2015-10-13 A37면

 

 문철상 < 신협중앙회장 mcs@cu.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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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 ‘여름 징역살이’란 글을 읽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단지 37도의 열 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 이것은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원시적 우정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형벌 중의 형벌입니다”란 구절은 인간관계가 입장 차이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정곡을 찌른 말이라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는 무한 경쟁과 세분화된 전문성으로 인해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일을 해야만 한다. 관계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지만, 잘못된 관계 때문에 고통받는 사례도 그만큼 늘고 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바라보는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바꾸기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성경엔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른 결과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사례가 나온다. 예수를 누구보다 많이 따라 다녔고, 그만큼 예수를 잘 알고 있다고 믿었던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장면이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눈앞에서 보고도 믿지 못했다. 같은 사실을 보고도 입장이 다를 때 얼마나 극명한 차이를 나타내는지 깨닫게 한다. 

‘묵자(墨子)’에는 ‘무감어수 감어인(無鑑於水鑑於人)’이 적혀 있다. “자신의 모습을 물에 비추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비춰 보라”는 뜻이다. 스스로의 행동이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고, 그에 대한 타인의 입장을 알아야 서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의미다. 

   

지금 당장 옆에 있는 사람의 눈동자와 그의 생각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부터 바라봐야 한다. 많은 사람이 스마트폰 화면에 갇힌 채 살아가고 있다. 타인에겐 방관자로 살아가면서 자기 입장만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욕심이다. 내가 먼저 상대방의 눈을 보고, 손을 내밀고, 안아줘야 한다.

얼마 전 한 아웃도어 의류 브랜드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한국인의 마음 온도는 영하 14℃’란 결과가 나온 걸 보고 참으로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계절과 마음에 따스한 온기가 필요해지는 요즘, 누군가를 통해 나를 비춰보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우리네 마음의 온도가 0.1도쯤은 올라가지 않을까 싶다.

문철상 < 신협중앙회장 mcs@cu.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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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가르침과 묵자 천제론 일맥상통” | - 老 莊子 2016-07-07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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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가르침과 묵자 천제론 일맥상통”

 

등록 :2016-07-06 19:04수정 :2016-07-06 20:29

 

 

 

짬] 동양고전 저술가 기세춘 선생

 

기세춘 선생
기세춘 선생

 

동양고전 저술가이자 재야 운동가인 기세춘(81) 선생은 5년 전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다. 그 뒤 출판사들과 맺었던 출간 계약을 해지하고 의사 권고에 따라 술, 담배도 줄였다. 다행히 암세포는 번지지 않았다. 지금은 걷기 불편한 것을 제외하고는 생활에 큰 어려움은 없다. 지난 5년 병마와 싸우면서도 놓지 않은 일이 있다. 다산 정약용의 주역 해석을 토대로 자신이 14년 전 쓴 주역 저술의 개정판을 내는 일이다. 최근 3천장이 넘는 원고를 마무리하고 출간 방식을 고민하고 있다. 9일 중국 산둥성 등주에서 열리는 국제묵자학술대회에서 기조발제도 할 예정이다. 기 선생을 지난달 28일 대전 자택에서 만났다.

 

그의 호는 묵점이다. 중국 고대 사상가 묵자와 고향인 전북 정읍 먹점마을에서 한 자씩 땄다. 그는 1992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묵자를 완역 출판했다. 고 신영복 교수는 묵자를 두고 “반전, 평화, 평등 사상을 주장하고 실천한 기층 민중 출신의 좌파 사상가”라고 썼다. 묵가 사상의 핵심은 겸애와 교리다. 모두를 차별없이 사랑하고, 서로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묵자는 유교가 예와 악을 과도하게 중시해 민중의 삶을 힘들게 한다고 공격했다. 유교적 질서가 충만한 조선에서 묵자가 이단 중의 이단이 된 이유다. 묵가는 중국 전국시대만 해도 유가와 쌍벽을 이뤘지만 기원전 1세기 이후 유교에 밀려 자취를 감췄다. 2천년 뒤인 1894년 청나라 학자 손이양이 <묵자한고>를 펴낸 뒤에야 묵자의 사유가 다시 실체를 드러냈다. 이 땅에선 묵자 완역본이 나오기까지 100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는 11회째인 이번 학술대회를 위해 두 개의 글을 준비했다. 기조발제에선 ‘묵자의 경제사상과 자본주의’, 10일 분임토론에서 ‘묵자는 기독교 개혁의 불씨일까’란 제목의 글을 발표한다. 동양철학을 두루 섭렵한 그이지만 기독교와의 인연도 깊다. 전주사범학교에 다닐 땐 목사를 꿈꾸며 기독학생회 회장을 지냈다. 아버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할머니와 어머니를 위해 고향 마을에 교회당을 짓기도 했다. 고 문익환, 홍근수 목사와 함께 <묵자와 예수>란 책을 쓰기도 했다.

 

이번 발표에서 묵자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유사성을 밝히고, 기독교가 ‘포악한 전쟁의 신’ 야훼와 결별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칠 생각이다. “종교와 이념과 경제체제의 모든 근본주의를 경계하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에 전세계 지도자들이 화답해야 한다는 점도 강조할 예정이다.

 

“묵자는 어록에서 천제를 300여차례나 언급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천제의 자식이므로 천제는 천하 만민을 자애하고 차별하지 않는다는 게 묵자의 평등 사상이죠. 예수의 산상수훈을 읽을 때마다 묵자의 말로 착각할 정도로 감명을 받습니다.”

 

9일 등주 ‘국제묵자대회’ 기조발제
원고에 ‘교황의 북한 방문’ 희망
중국쪽 ‘수정요청’ 등 민감 반응

 

14년 전 ‘주역 해설서’ 스스로 절판
“다산의 새로운 해석 알고 자괴감”
개정판 전자출판해 무료공개 검토

 

그는 기독교 문명의 뿌리엔 전쟁신 야훼가 있다고 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정치적 의도로 예수를 전쟁신 야훼의 아들로 만들었어요. 야훼는 예수가 믿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제국주의 패권국가와 전쟁신의 결합은 ‘평화의 사도’ 예수의 바람과는 반대로 세상을 약육강식 전쟁터로 만들었다고 했다. 십자군 전쟁이나 히틀러의 광기, 세계화의 폐해 등이 그 보기라고 했다.

 

“해방신학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혁명으로 군산종 복합체에 균열이 생기고 있어요. 교황의 가르침은 묵자의 천제론과 일치합니다. 인류가 살려면 열린 사고가 필요합니다. 묵자는 다름이 있어야 같음이 있다고 했죠.”

 

기세춘 선생이 최근 다산 정약용의 주역 해석을 바탕으로 탈고한 주역 저술 초고.
기세춘 선생이 최근 다산 정약용의 주역 해석을 바탕으로 탈고한 주역 저술 초고.

국제묵자학술대회는 2년에 한번씩 열린다. 한·중을 비롯 미국과 독일, 일본, 대만, 홍콩 등의 학자들이 참석한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중국에서 ‘좌파 사상가’ 묵자는 어떤 대접을 받고 있을까? “중국에서 묵자는 반전평화 사상가라기보다는 무기를 만든 기술자로 추앙받고 있어요. 중국 학술계도 우리와 비슷하게 정치 영향을 받지요. 기술만 너무 강조해 기분이 나빠서 10회 땐 불참했어요.” 묵자는 전쟁은 결코 이익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직접 무기를 만들어 방어 전쟁에 뛰어들었다. 이런 반전 평화 사상은 빼고 ‘기술의 비조’란 점만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중국 묵자학회는 묵자와 동시대에 공격무기를 만든 공수반을 조명하는 학회와 공동으로 국제학술대회를 열고 있다. “중국 쪽은 이번 기조발제에 포함된 ‘인민 통제를 벗어난 자본주의 비판’, ‘교황의 북한 방문 요청’ 대목 등도 수정해줄 것을 요청해왔어요. 다른 건 몰라도 교황 방북 건은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그는 2002년 주역 해설서를 출간한 뒤 1년 뒤 절판시켰다. 다산의 주역 해석(주역사전)이 그가 권위를 의심하지 않았던 북송 유학자 정이와 주희의 해석과 다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다산의 주역 해석을 접한 뒤 “자괴감에 며칠 동안 멍때리기에 빠졌다”고 했다. “정이와 주희는 주 문왕과 주공의 말씀을 봉건왕조에 맞게 의리(義理)학으로 풉니다. 다산은 의리를 떠나 문왕과 주공의 생각을 형상으로만, 즉 도그마가 없는 상징으로만 해석합니다.” 첫 권은 정이와 주희, 다산의 주석을 배치하고 둘째 권은 주역점을 치는 사전으로 꾸밀 생각이다. “다산의 주역을 널리 알리기 위해 책을 전자책으로 무료 공개하는 방안도 생각하고 있어요.”

 

대전/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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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益生曰祥, (익생왈상) | - 老 莊子 2015-07-13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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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益生曰祥, (익생왈상) .... 억지로 하려하면 재앙이 따른다

 

含德之厚者,                 덕이 중후한 사람은,

比於赤子.                    마치 갓난아기 같다
.
蜂蠆蟲蛇弗蜇,                벌,전갈,벌레,뱀들도 물지 않고,

攫鳥猛獸弗扣.               사나운 새나 맹수도 그에게 덤벼들지 않으며,

 

骨弱筋柔而握固,            뼈도 약하고 근육도 부드럽지만 잡는 힘이 세며,

未知牝牡之合然怒,        남녀의 교합은 모르나 기세가 왕성한 것은

精之至也.                        정기가 지극하기 때문이다.

終日唬而不優,               온종일 울어도 근심이 없는 것은

和之至也.                       화기(和氣)가 지극하기 때문이다.

和曰常,                           화기를 상(常)이라 하고

知和曰明,                       화기를 아는 것을 명(明)이라 한다.

益生曰祥,                       억지로 잘 하려하면 재앙이 따르는데

心使氣曰强.                   마음이 氣를 강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物壯則老,                      사물이 강해지면 곧 시들어 지므로

是謂不道.                      이는 道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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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담일사(老聃逸事) [상] | - 老 莊子 2015-05-04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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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과 단심(丹心), 노자의 선택은?

 

【논어명장면】노자, 그 잃어버린 이야기

 노담일사(老聃逸事)<상>

 


이 이야기는 고대 중국 주(周)나라 경왕(景王) 연간(B.C 545~520)에 왕실 사관(史官)을 지낸 노담(老聃)이라는 사람의 약전(略傳)이다. 나, 이생이 공자께서 ‘노자’(老子)를 만났다는 전래 설화의 진위를 추적하던 중에 듣게 된 전승을 토대로 작성한 것이다. 노담은 생애의 전모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사람이다. 따라서 그에 관한 전승들도 대부분 그 신빙성을 자신할 수 없다.① 그래서 약전의 제목을 노담의 ‘잃어버린’, 혹은 ‘잊혀진’ 이야기란 뜻의 <노담일사>(老聃逸事)라 하고 <공자, 노자를 만나다> 편의 부록으로 삼는다. 한 편의 ‘문화사’로 읽는다면 시간의 낭비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생(李生) 

 


1. 내력(來歷)

노담은 어릴 때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태어날 때부터 귀 모양이 특이했던 듯 하다. 그의 자(字)로 여겨지는 담(聃)은 ‘귓바퀴가 없을 정도로 귀가 늘어졌다’는 뜻의 글자이다. 그의 관직으로 추정할 때, 공자보다 한 세대 위, 즉 약 15~20살 정도 나이가 위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담의 출신지는 중국 남방의 초(楚)나라 고(苦)현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 고현은 원래 진(陳)나라 상(相)땅이다. 진나라는 소국으로 초나라의 보호국이었다가 서기전 479년(공자가 돌아가신 해이기도 하다) 초나라에게 합병 당했다. 담은 상 땅이 진나라에 속한 시절에 태어난 사람이다. 이 상 땅이 나중에  초나라에 흡수되었기에 후대 사람들은 노담을 초나라 사람이라고 여겼다.

 

노담의 성씨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약소국 진나라 출신으로 주왕실의 태사(太史;고대 중국에서 천문역법(天文曆法)을 관장하는 벼슬)라는 고위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최소한 서민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나라 공실의 성은 규(女+爲)씨이다. 규는 고대의 성스러운 왕인 순(舜)의 성이다. 어쩌면 그의 집안은 낙양으로 진출한 진나라 공족의 후예였을지 모른다. 또는 중원의 공력 높은 무사(巫史) 가문이었을 수도 있다.

노담의 집안이 언제부터 주나라 수도 낙양에 살게 되었는 지도 알 수 없으나, 고조나 증조부 대부터 주왕실의 사(史)를 세습하였던 것 같다. 이 집안에는 비전(秘傳)하는 양생술(養生術)이 있어서 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함께 장수하였다. 그런 탓에 늙도록 왕실에 충성한 할아버지는 귀족들로부터 장로(長老)의 예우를 받았다. 담의 아버지는 태사의 지위에서 은퇴한 뒤에도 후배 사관들에게 ‘노사’(老師)라 불리었다. 이런 자랑스런 가계 때문에 담은 어렸을 때부터  ‘장로의 손자 담’,  ‘노사의 아들 담’이라고 불리었다. 나중에는 그 자신도 매우 장수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담을 존칭하여 ‘노담 선생’이라 불렀다. 노자(老子)라는 존칭은 아마 여기서 처음 유래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노담의 직책은 왕실 사관(史官)이었다. 사(史)는 본래 고대 원시사회의 무축(巫祝)에서 비롯되었다. 무축은 모계(母系) 중심의 원시농경사회에서 신에게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고 사냥과 전쟁의 유불리를 점치는 사제자(司祭者)이자 주술자였다.

이 제사장 집단에서 무사(巫史)가 나왔고 유(儒)와 사(史)가 분화 되었다. 유가가 이 집단에서 제전(祭典)을 실행하는 층의 후예라면, 사는 축도문을 낭송하고 이를 기록(정확히는 기억)하는 층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들은 고도의 상징과 의식을 통해 자신들이 신과 닿아있음을 자부했다. 그들이 사용한 은유로 가득 찬 주술적인 언어들은 집단의 ‘공동기억’으로서 가문 안에서만 전승됐다. 이들은 무축의 시대가 가고 왕권의 시대가 오자 세력을 잃고 하층계급으로 전락해 갔다. 그러나 소수는 그 비전(秘傳)한 지식으로 권력을 가까이서 보좌했고, 정치력을 갖춘 자는 권력의 한 축이 되기도 했다. 왕실의 사(史)가 본래 모계(母系) 사회의 성직자였음을 암시하는 노담의 시가 지금도 전해진다.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일컬어 신비한 암컷이라 한다.

 신비한 암컷의 문이여!

 이를 일컬어 만물의 근원이라 한다. 

 이어지고 이어져 영원한 듯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는다.  

 谷神不死(곡신불사)/是謂玄牝(시위현빈)/玄牝之門(현빈지문)/是謂天地根(시위천지근)/綿綿若存(면면약존)/用之不勤(용지불근)②

 

제사자에서 왕의 정치적 자문관이 된 사는 일상적으로는 조정과 왕실의 제례와 의전에 관한 전거와 기록의 관리를 담당하며, 유사시에 천문(天文)과 복서(卜筮), 점사(占辭)를 행하고 해석함으로써 정치에 참여하였다. 사관으로서 노담이 맡았던 주요 직책 중에는 왕실도서관인 수장실(守藏室)의 장관직도 있었다. 당시 왕실 도서관이 소장한 하은주(夏殷周·고대 중국의 3대 왕조) 시대의 전적과 기물들은 오직 왕실과 왕명을 받은 자만이 열람·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수장실 장관의 권위는 매우 높았다. 노담은 또 ‘주하사’(柱下史)라는 직책을 겸하였다. 주하사는 말 그대로 ‘기둥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왕의 자문에 응하는 시어사(侍御史)의 직책’이었다. 왕을 정치적으로 보필하는 근신(近臣), 나아가 특별한 사랑을 받은 총신(寵臣)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요직이었다.  노담과 같이 높은 지위를 부여받은 사관은 그 광범위한 지식과 충성심을 바탕으로 현실 정치에 깊숙히 개입하기도 했다. 왕실 소속의 세습 사관 겸 정치자문관으로서 담의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잠언이 있었다.

 

 도(道)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 하지만,           

   하지 않음이 없다.                                         

 만약 임금이 이를 잘 지킨다면                       

 만물은 저절로 교화되리라.                        

 교화를 억지로 하려고 든다면                     

 우리가 이름없는 통나무가 되어 못하게 하리라.

 이름없는 통나무는

 대저 또한 욕심이 없을지니,                            

 욕심내지 않고 고요하여                                 

 천하는 저절로 안정하리라.                             

 道常無爲(도상무위)/而無不爲(이무불위)/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化而欲作(화이욕작)/吾將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無名之樸(무명지박)/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不欲以靜(불욕이정)/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③

 

nojaedit.jpg

*노자. 출처 : 위키피디아


2. 영광의 시절

노담이 태사일 때 주나라 국왕은 경왕(景王)이었다. 그는 27년간 재위하며 군왕의 자질을 발휘했던 아버지 영왕(靈王)으로부터 군주의 도를 배웠다. 노담은 이런 경왕에게 두 가지 특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첫째는 일종의 비밀업무로서 ‘제왕학’과 ‘군사학’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주나라는 외적을 피해 낙양으로 동천(東遷)하면서 사실상 천하의 주인으로서 권위와 힘을 상실했다. 왕국은 작은 영토로 축소되어 이웃한 강력한 제후국인 정(鄭)나라와 진(晉)나라에 의지하여 겨우 천자(天子)의 지위를 유지했다. 따라서 지각 있는 왕이라면 왕자(王者) 본래의 권좌와 위력을 되찾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미 영락한 작은 나라에 불과한 왕실이 몇배나 힘이 센 제후국들을 별다른 무력도 없이 통어(統御)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왕은 부왕인 영왕의 뜻을 이어받아 주왕실의 이런 서글픈 처지를 바꿔보고 싶었다. 노담 집안은 그런 왕실의 ‘비밀 두뇌’였다.

“왕실이 저 사나운 제후들을 말과 개처럼 부릴 지혜를 강구하시오! 왕도(王道)를 회복할 길을 반드시 찾아주시오!” 그런 지침을 받은 노담 집안이 찾아낸 치도(治道)는 무엇이었을까? 

 

 없는 힘으로 있는 힘을 다스린다

  

바로 성인(聖王)의 도(道), 즉 무위(無爲)의 치(治)였다. 무력(無力)으로 유력(有力)을 아우르고, 없음(無)으로 있음(有)를 덮고, 부드러움(柔)으로 굳셈(剛)을 감싸고, 약함(弱)으로 강함(强)을 이끄는 고도의 정치술이었다. 노담이 간절한 마음으로 왕에게 무위(無爲)의 덕의 중요성을 가르친 글 한편이 전해진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으나       

 굳고 강한 것을 공격하여 이기는데              

 물과 바꿀만 한 것이 없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긴다.                    

 천하에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나            

 능히 행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이런 까닭에 성인이 말하기를                 

 나라의 오욕을 짊어지는 자                     

 그를 일컬어 사직의 주인이라 하며              

 나라의 불행을 떠매고 가는 자                      

 그를 일컬어 천하의 주인이라 한다.                

 天下莫柔弱於水(천하막유약어수)/而功堅强者莫之能勝(이공견강자막지능승)/以其無以易之(이기무이역지)/弱之勝强(약지승강)/柔之勝剛(유지승강)/天下莫不知(천하막부지)/莫能行(막능행)/是以聖人云(시이성인운)/受國之垢(수국지구)/是謂社稷主(시위사직주)/受國不祥(수국불상)/是謂天下王(시위천하왕)④

 

또한 노담은 강력한 제후의 군사력을 역용(逆用)하여 약한 왕실의 안녕을 지키고, 제후의 군사지휘권을 왕의 통제하에 두어 그것으로 제후를 복종시키는 용병술도 깊이 연구하였다.

“도(道)로써 덕(德)을 넓혀 지(智)와 무(武)를 복종시켜라!”

“제후가 병기를 제멋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라! 제후가 함부로 행군하지 못하게 하라! 제후가 병권을 성왕에게 바치게 하라!”

  

 무릇 아무리 좋은 병기(兵器)라도                                   

 상서롭지 못한 기물(器物)일 뿐이다.                               

 만물이 다 싫어하는 바이니,                                         

 도(道)를 지닌 자는 병사(兵事)에 몸을 두지 않는다.    

 병기는 도무지 상서롭지 않은 것이니                            

 군자의 기물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을 때 쓰는 것이니                                         

 사용함에 초연하고 담담해야 한다.                          

 이겨도 아름답지 않으니                                     

 승리를 찬양하는 자는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것이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가                                             

 어떻게 천하의 지지를 얻겠는가.                                 

 사람을 많이 죽였으면                                                   

 슬픔과 자비로 애도해야 하니                                        

 전승(戰勝)의 의식,                                                    

 상례(喪禮)를 따르는 것이 도리일진저.                       

 夫佳兵者(부가병자)/不祥之器(불상지기)/物或惡之(물혹오지)/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兵者 不祥之器(병자 불상지기)/非君子之器(비군자지기)/不得已而用之(부득이이용지)/恬淡爲上(염담위상)/勝而不美(승이불미)/而美之者(이미지자)/是樂殺人(시락살인)/夫樂殺人者(부락살인자)/則不可得志於天下矣(즉불가득지어천하의)/殺人之衆(살인지중)/以哀悲泣之(이애비읍지)/戰勝(전승)/以喪禮處之(이상례처지) ⑤

 

경왕은 주실 중흥(周室 重興)이란 자신의 염원이 태자 시대에서는 꼭 이뤄지기를 희망했다. 경왕은 태자를 담에게 맡겨 가르치도록 했다. 이때 경왕이 태자 수(壽)에게 노담을 교부(敎父)라 부르게 하니, 노담이 경왕 부자 앞에서 태자에게 바친 시가 전해진다.

 

 사람이 싫어하는 바가 셋이 있으니                         

 어려서 부모를 잃는 고(孤·고아)요,                      

 같아 살 배필이 없는 과(寡·과인)요,                            

 사람으로서 굶주리는 불곡(不穀·먹을 곡식이 없음)이니 

 그래서 왕공(王公)은 이를 자신의 칭호를 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물의 이치란                                           

 덜어내면 더해지고                                                   

 더하려면 오히려 줄어듭니다.                                     

 이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가르침이지만                        

 지금 다시 이를 가르치고자 합니다.                           

 교부(敎父)의 이름으로                                              

 오직 이 한 말씀을 그대에게 바칩니다.                        

 人之所惡(인지소악)/唯孤(유고)/寡(과)/不穀(불곡)/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故物(고물)/或損之而益(혹손지이익)/或益之而損(혹익지이손)/人之所敎(인지소교)/我亦敎之(아역교지)/吾將(오장)/以爲敎父(이위교부)⑥

 

태자는 총명하여 충실한 학업으로 왕의 기대에 부응했다. 왕실은 평안했고 미래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바야흐로 주왕실 중흥의 시대가 곧 도래할 것 만 같았다. 노담의 가슴에도 뜨거운 자부와 웅지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3. 비극의 시작

“담 선생!”

“노담 선생!”

수장실(守藏室)로 당직 사관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왔다

“무슨 일이길래 이리 급히…”

“큰일났습니다. 태자 전하께서 급서하셨다고 합니다!”

노담의 손에 들려있던 도필(刀筆)이 쨍그러니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서기전 522년 주나라 경왕 18년, 태자 수(壽)가 왕후에 이어 갑자기 죽었다. 노담의 나이 40대 후반 때 일어난 사건이었다. 태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 자체로 왕실의 큰 슬픔이면서 노담에게도 커다란 좌절이었다.

“그동안 제후들 몰래 연구한 제왕학(帝王學)을 꽃피워 줄 성군의 재목이었는데… 아, 주실(周室)의 천록(天祿)이 진정 여기까지인가…” 

태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면 만개할 것이 분명했던 노담의 영화도 꽃을 피워보지 못한 채 사라지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더욱이 태자의 죽음이 장장 17년에 걸친 골육상쟁의 서막이 될 줄이야…

  

경왕은 태자와 왕후가 잇따라 죽는 슬픔 속에서도 군왕으로서 사고의 중심을 잃지 않았다. 우선 새로 정비를 맞아 적자를 생산하는 일을 서둘렀다. 경왕에게는 태자 말고 여러 명의 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 맏아들 조(朝)는 장자로서 책임감이 강하고 기상도 늠름했지만, 경왕은 왕위만큼은 적자로 이어지길 원했다. 그래서 경왕은 곧 새 왕후를 맞아 새로 2명의 아들을 얻었다. 맹(猛)과 개(빌 개)였다. 그런데 이 무렵부터 경왕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경왕은 자신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음을 느끼자, 비로소 태자가 어린아이에 불과한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맹은 이제 겨우 세살박이가 아닌가. 이리같은 제후들과, 호시탐탐 왕권을 노리는 노회한 공족들 틈바구니에서 저 아이가 제대로 임금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까…”

게다가 왕후 집안을 중심으로 새 외척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 몇몇 탐욕스런 귀족들이 작당(作黨)을 부채질하고 주도했다. 왕은 불안감으로 잠 못이루는 날이 늘어만 갔다.

 

“노담, 어찌하면 좋겠소?”

“…”

노담은 죽은 태자의 스승으로서 다른 왕자들이 태자의 지위를 논하는 문제에는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친구이자 서장자(庶長子) 조의 사부인 빈기(賓起)를 추천했다.

“그런 일은 저보다 빈기가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장자의 스승이니…”

태자가 죽은 후 맏아들 조에게 허전한 마음을 의지해온 경왕은 마침내 서자이나 이미 장성한 성인인 맏아들로 태자를 교체하기로 결심했다.

“조의 기상이 실로 할아버지 영왕(靈王)을 닮았다. 왕실의 중흥을 도모하려면 이 길뿐이다…” 

경왕은 조를 태자로 삼기 전에 중단한 결단을 하나 더 내렸다.

“태자의 외척들이 순순히 찬성할 리는 없을 터…”

태자 맹 형제를 에워싼 외척과 귀족들을 먼저 제거하지 않으면 태자 교체는 말도 꺼내기 전에 수포로 돌아갈 것이 뻔했다.

그들은 강력한 제후국인 진(晉)나라를 배후세력으로 갖고 있었기에 왕으로서는 더욱 두려운 존재였다.

고민하는 경왕의 귀에  빈기가 속삭였다.

“폐태자를 하려면 우선 맹 왕자의 훈육을 맡고 있는 하문자(下門子)의 입부터 막아야 합니다. 다른 죄를 씌어 하문자를 먼저 내치십시오. 그런 다음 망산에서 여름 사냥대회를 열어 공경(公卿)들을 모두 초대하십시오. 왕의 부름에 선(單)공과 유(劉)공(외척의 후견 세력)도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냥하는 틈을 보아 둘을 처단한 뒤 즉시 태자의 교체를 명하신다면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그렇게 왕의 비밀작전이 착착 진행되어 마침내 사냥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경왕은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궁을 나와 사냥터와 가까운 왕족 집에 머물렀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경왕이 갑자기 심장발작을 일으켜 죽고 만 것이다.

왕자 조와 빈기의 입장에서 보면 이 ‘붕어’(崩御)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었지만, 암살의 증거 또한 없었다.

“살해자가 있음에 틀림없건만…”


사자굴에 들어갈 뻔 한 사실을 깨달은 태자당은 즉시 왕자 맹을 새 왕으로 추대하고 선씨와 유씨가 섭정이 되었음을 공표했다. 그리고 바로 군사를 보내 빈기를 척살하고, 조정 안팎에 포진해 있던 선왕의 측근과 총신들은 물론 서왕자들과 가까운 백공(百工· 왕성 안에 살며 왕족과 귀족들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제작·공급하는 세습적인 상공(商工)집단을 말한다.)들까지 축출하고 그 자리에 자기 세력을 배치했다.

전광석화처럼 새 왕 체제가 들어서고 2달 뒤 경왕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이 끝나고 새 왕의 정식 즉위식이 거행되기 전에 또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장자 조를 지지하는 왕족들과 숙청된 백관 및 백공 세력이 연합하여 왕궁을 기습 공격한 것이다. 선대 두 왕의 직계 왕자들도 모두 조의 편에 가담하니 전세가 단숨에 서장자 쪽으로 기울었다. 선씨와 유씨 등은 맹과 개 형제를 들쳐업고 이웃한 제후국인 진(晉)나라로 달아나 구원을 요청했다. 이 내전의 와중에 태자 맹이 놀라 죽자 척신들이 동생 개를 추대하니 이 사람이 경왕(敬王)이다. 호족들이 어린 이복동생 개를 즉위시켰다는 소식을 들은 조도 즉각 왕위에 오르니, 주나라 수도 낙양에 두 명의 왕이 동시에 들어서게 되었다. 낙양에는 두 개의 성이 있는데 서쪽에 본래의 왕성(王城)이 있고  동쪽에 새로 쌓은 성주(成周)성이 있었다. 사람들은 왕성에서 즉위한 조를 서왕(西王), 동쪽 성주에 들어간 개를 동왕(東王)이라 불렀다.


한쪽은 비록 서자이긴 하나 선왕이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는 명분이 있었고, 한쪽은 선왕의 유지가 없는 갓난아이지만 정비 소생의 적통이란 명분이 있었다. 약점과 명분이 뒤섞여 어느 쪽도 온전한 정통성을 주장하기 어려웠다.

낙양사람들은 두 왕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줄을 잘 못 섰다간 온 집안이 역적으로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기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어느쪽이든 빨리 승부가 나기만을 바랐다. 노담의 상황은 더욱 안좋았다. 개인적인 친분으로는 서왕자들과 가까운 사이였지만, 태사로서 서자들에게 적통의 계승자를 제치고 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선왕의 총애를 받은 사람으로서 어린 왕자를 허수아비삼아 권력을 농단하는 귀족들을 추종하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동왕 세력이 불러들인 진나라 군대가 낙양에 진군했다. 낙양은 진나라 군대를 사이에 두고 왕성의 서왕파와 성주의 동왕파로 갈려 사활을 건 대치에 들어갔다. 오늘 서왕파의 군대가 기세를 올리면 내일은 동왕파가 만세를 부르는 격이었다.

어느 쪽에도 가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진나라 군대의 노략질까지 당하게 된 백성들은 남부여대하여 피난을 떠났다. 노담의 가족도 전화(戰禍)를 피해 낙양을 떠났다가 전선(戰線)에 가로막히자 고향인 남쪽 진(陳)나라를 향해 피난길에 올랐다.

이 내란이 장기화되면서 궁중의 관리, 악사, 공장(工匠)들도 낙양을 떠나 중국 전토로 흩어져 갔다. 음악을 사랑한 공자도 사방으로 비산(飛散)한 악사들의 운명을 전해 듣고 안타깝게 여긴 마음이 <논어>에 전해질 정도였다.


‘태사지는 제나라로 가고, 아반간은 초나라로 가고, 삼반료는 채나라로 가고, 사반결은 진(秦)나라로 가고, 고방숙은 하(河)로 들어가고 파도무는 한(漢)으로 갔고, 소사양과 격경양은 발해 너머 갔느니… -<논어> ‘미자’편 9장

 

이복형제간의 맹렬한 왕위 다툼은 5년을 끌었다. 싸움은 진(晉)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장기전을 펼친 동왕의 승리로 끝났다. 서기전 516년 서왕은 주왕실의 내전을 종식시키기로 한 진나라의 대공세에 밀려 지지세력을 이끌고 마침내 초나라로 망명했다. 주왕실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음을 확신했던 서왕은 이 때 주나라 왕실 수장고에 있던 창업이래의 수많은 전적(典籍)을 가지고 초나라로 갔다.  주나라 왕실 전적의 남천(南遷)은 중국문화사의 일대 사건이었다.⑧ 당시까지 중원 문화권의 밖에 존재하는  ‘오랑캐’ 지역(초나라)이 갑자기 쏟아진 높은 수준의 외래문화와 문물을 흡수하여 급속하게 ‘중화’(中華)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서왕 조는 비록 왕위싸움에 져서 주나라 봉건질서 밖의 초나라로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으나, 자신이 그토록 자부한 `천자의 나라’가 그 문화적 영토를 양자강 이남의 남쪽 지방까지 확장시키는 예기치 못한 기여를 ‘중국’에 한 셈이 되었다.

서왕은 망명하면서 각 제후국에 이러 조칙을 내리고 떠나갔다.

“왕실이 혼란할 때 선씨와 유씨의 무리들이 천하를 착란시켜 한결같이 불순한 짓만을 자행하면서 ‘선왕의 후사에 어찌 정해진 규정이 있었던가? 오직 내 마음내키는대로 할 뿐이니 누가 감히 나를 토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하늘의 버림을 받은 무리들을 거느리고서 왕실에 혼란을 조성하고(…) 선왕의 명을 가탁해 거짓을 자행하는 데도 진나라는 부도(不道)하여 저들을 도와 그 끝없는 탐욕을 멋대로 부렸다. 지금 나는 난리를 피해 형만(荊蠻·초나라)으로 도망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으니, 나의 형제친족인 제후들은 하늘의 법을 따라 나의 성공을 돕고 교활한 자들을 돕지 말라. 선왕의 명을 따라 하늘의 벌을 부르지 말고서 부덕한 나를 용서하여 위난의 평정을 도모한다면 나의 소원이 이뤄질 것이다…”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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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목숨과 바꾼 단심(丹心)

내전이 끝나자 전장으로 변했던 낙양에 오랫만에 평화가 찾아왔다. 낙양을 떠났던 사람들도 하나둘 돌아와 본래의 생업을 되찾았다.  한편에선 피바람이 불었다. ‘줄을 잘못 선’ 많은 사람들이 반역죄와 부역죄로 처단되거나 투옥과 유형을 감수해야 했다. 비록 구체적인 혐의는 없다할지라도 서왕파와 조금이라도 가깝다고 의심되는 사람들은 목숨이 위태로왔다.

낙양으로 불려들어온 노담의 목숨은 풍전등화였다.

“적통을 폐하고 서자를 받들려고 했던 ‘역적 중의 역적’ 빈기란 놈과 가까운 사이가 아닌가? 너도 그와 한패가 틀림없으렸다!”

그런 의심 속에서 노담은 제발로 낙양에 온 것을 천번만번 후회했다.

‘차라리 서왕을 쫓아 초나라로 갈걸 그랬나…아, 동쪽 바닷가로 가서 이름을 바꾸고 숨어살았다면 이런 위태로움은 없을 것을…’

서기전 515년 노담이 나이 50대 중반에 맞이한 인생최대의 위기였다. 그런데 이 위기 속에 노담을 구한 건 다름아닌 그가 지닌 ‘지식’이었다.  서왕이 수많은 왕실 전적을 가지고 망명하는 바람에 새로운 지배세력은 권위와 정통성을 과시할 의전과 제례의식 거행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른 시일 안에 왕실 전적을 보완해 제후국들에게 체통이 깎이는 일을 최대한 막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고전에 정통한 학자들이 다수 필요했는데, 노담은 그 대표적인 학자였다.

용케 화를 피한 동료들이 노담에게 권했다.

“노담선생.  서왕쪽과 맺었던 과거 친분은 모두 부인하세요. 낙양을 떠난 것도 진나라 군대의 약탈을 피해 떠났다가 서왕파의 군대에 막혀 돌아오지 못한 것이라고 사정하세요. 거짓말로라도 서왕을 따라가지 않은 것이 금상(今上)을 사모한 증거가 아니냐고 하세요. 사람은 일단 살고 볼 일이 아니요?”

“나는 선왕의 지극한 은총을 입은 몸. 그 아들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는데 내가  어느 편을 들어야 옳았단 말이요? 나는 그저 선왕을 기리며 여생을  살고 싶을 뿐이오.”

“선생의 마음을 우리가 왜 모르겠소. 그러나 금상은 여기 낙양에 있고 서왕은 천리밖 오랑캐 땅에 있소이다.”

제자들도 노담을 붙들고 간청하다시피 조언한다.

“선생님! 텅 빈 수장실을 전적으로 채우라는 성화가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애꿎은 사관 하나가 매를 맞아 죽기도 했습니다.”

“…”

“지금 섭정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제후들에게 뽐내고 싶어하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전고(典故)를 몰라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후들에게 비장한 전적을 보내달라고 읍소를 해야할 지경인데, 우리 수장실에서 이 업무를 감당할 분은 선생님 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한번 허리를 굽혀 주신다면 미력한 저희들은 겨우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디 이 점을 살펴주십시오.”

죄인의 신분으로 낙양에 끌려오다시피했던 노담은 결국 서왕을 공개적으로 부인했고, 그 대가로 사면을 받아 수장실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일실된 전적을 보충하고 새로 바쳐지거나 복사된 전적을 감수하는 일을 맡았다. 그것은 매우 깊고 넓은 지식을 요하는 작업이었지만, 노담에게는 더이상 `학문‘이 아니었다. 비루한 목숨값이었다. 그에게 독서와 연찬은 목숨을 유지하는 수단이 아닌 한, ‘누군가의 찌꺼기를 핥는’  부끄럽고 비루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5. 늙은이의 노래

어느 화창한 봄날 성주성의 축성이 끝났다.  여러 나라에서 차출돼 온 역부들은 고향에 돌아갈 기쁨에 성을 돌며 ‘성주풀이’를 지어 불렀다. 왕과 신하들은 제단을 쌓고 신에게 축성을 고한 뒤 군신(君臣)이 더불어 영화를 누리게 해달라고 빌었다. 서약식이 끝나자 대부 이상의 관리 출신 ‘사면자’들은 왕실이 베푸는 잔치에 참석하라는 명을 받았다. 왕과 섭정들 앞에서 충성스런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시간이었다. 함께 나온 수장실의 동료가 노담에게 넌즈시 말했다.

“까짓 웃으라면 웃고, 춤을 추라면 춥시다. 기왕이면 왕이 직접 보고들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요.”

또다른 친구가 말했다. 

“하늘에도 눈이 떠다니고 땅밑에도 귀가 있소. 괜한 소리말고 주는 술이나 받아마시고 조용히 있다가 갑시다.”

노담은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래, 더이상 ‘학문’도 없고, 학문으로 봉사할 성왕도 없다. 내가 무엇때문에 형편없는 왕자들의 개같은 싸움에 내 소중한 목숨을 던져주랴. 만세를 부르라면 실컷 불러주자, 만세! 만세! 만만세…’

이 잔치날에 노담이 지어 불렀다는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뭇사람들은 즐거워하네                  

  큰 잔치상을 받아 들고                       

  봄날의 누대에 오른 듯 하네.              

  나는 홀로 조용하네                            

  아무런 느낌없이                             

  아직 웃는 것을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나는 홀로 우두커니 서 있네                

  마치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처럼.         

  뭇사람들은 다 잔치를 즐기는데           

  나는 홀로 떨어져 있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 사람              

  세상사람들은 다 밝다 하는데              

  나는 홀로 깜깜하고                            

  세상사람들 다 총명하다 하는데          

  나만 홀로 어둡네.                              

  고요하기가 바다같고                         

  맑은 바람처럼 머무는 곳 없네.           

  뭇사람들은 다 높이 받들건만             

  나의 뜻은 홀로 낮은 곳에 처하는 것    

  나는 홀로 뭇사람들과 다르니             

  산다는 것의 본질을 귀히 여기노라.      

  衆人熙熙(중인희희)/如享太牢(여향태뢰)/如春登臺(여춘등대)/我獨泊兮(아독박혜)/其未兆(기미조)/如孀兒之未孩(여상아지미해)/루루兮(루루혜)/若無所歸(약무소귀)/衆人皆有餘(중인개유여)/而我獨若遺(이아독약유)/我愚人之心也哉(아우인지심야재)/沌沌兮(돈돈혜)/俗人昭昭(속인소소)/我獨昏昏(아독혼혼)/俗人察察(속인찰찰)/我獨悶悶(아독민민)/澹兮其若海(담혜기약해)/요兮若無止(요혜약무지)/衆人皆有以(중인개유이)/而我獨頑似鄙(이아독완사비)/我獨異於人(아독이어인)/而貴食母(이귀식모)

  

잔치에 참석은 하고 있지만, 마음은 진심으로 즐겁지 않다. 그래서 아직 웃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갓난아이처럼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술을 마신다. 잔치가 무르익어 흥청거리자 노담은 조용히 따로 떨어져 나와 홀로 술잔을 기울인다. 우두커니 서서 춤추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또 한 잔, 또 한 잔을 마신다. 바람이 따스하게 불어오니 꽃이 흐드러진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흰구름은 어디선가 일어나 어디론가 흘러간다.

  

      학문을 끊어 근심의 뿌리를 잘랐으니    

  이제 나에게 ‘네’와 ‘예’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                             

  선과 악의 차이는 또 얼마란 말이냐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바를 나도 두려워 한다.                            

  아, 생(生)의 도(道)                           

  아득하여 다 깨달을 수 없구나…

     絶學無憂(절학무우)/唯之與阿(유지여아)/相去幾何(상거기하)/善之與惡(선지여악)/相去若何(상거약하)/人之所畏(인지소외)/不可不畏(불가불외)/荒兮(황혜)/其未央哉(기미앙재)⑩

 

진심으로 충성하는 ‘예’와 마음을 감추고 대답하는 ‘예’의 차이가 굳이 얼마나 된다고 이러나? 저마다 선을 주장하는 데 과연 그 선이 말하는 악과는 또 얼마나 차이가 지나? 나는 또한 그 이치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나, 담은  ‘예’든 ‘네’든 개의치 않으련다. 이제 더는 선악을 묻지 않으련다. 나는 지금 승자를 따를 뿐이다. 나도 별 수 없는 인간, 뭇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을 나도 두려워 한다.

 

그렇다, 나도 남들처럼 죽음이 두려웠을 뿐이다. 인생이란 아직 다 건너지 못한 강, 다다르지 못한 평원을 가는 것과 같다. 나의 삶은 천명을 따르고 있는가? 거스르고 있는가? 옳다는 것은 무엇이고, 틀린 것은 또 무엇인가? 나는 아직 그 멀고 깊은 끝을 보지 못했다. 삶의 여정(道)이여, 이치(道)여, 참으로 멀고 아득하여 나는 알 수가 없구나….


<하편 계속>



<원문 보기>


① 노담의 신상에 관한 최초이자 가장 유명한 기록은 사마천의 기록이다.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이다.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 자는 담(聃)이다. 주나라 수장실의 관리였다. 공자가 주나라에 갔을 때,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 老子者, 楚苦懸여(갈 여)鄕曲仁里人也, 姓李氏, 名耳, 字聃, 周守藏室之史也. 孔子適周, 將問禮於老子.(하략) -사마천, <사기> ‘노자한비열전’

그러나 사마천 자신도 당시 전해져 온 노자에 관한 전승을 사실로 확신하지 못했다. 일례로 노담의 성이 이씨라는 것에 대해서는 ‘한나라 초기에 이씨 성을 가진 실세 가문이 노자의 가계를 차용한 ’것’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이다. 사마천은 또 공자 사후 1백여년 뒤의 인물인 주나라 태사 담이 노자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여 그에 관한 사록(史錄)을 함께 기록해 놓았다.

 “공자 사후 129년 후 기록에 따르면, 주나라 태사 담이 진헌공을 배알하고 말하였다.(…) 어떤 사람은 바로 이 태사 담이 노자라 하고, 혹자는 아니라고 하였다. 세상사람들도 그것이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自孔子師之後百二十九年, 而史記周太史담見秦獻公曰(…) 或曰담卽老子, 或曰非也, 世莫知其然否. -사마천, <사기> ‘노자·한비열전’

 

   ② <노자> 6장 전문

 

 ③ <노자> 37장 전문

 

 ④ <노자> 78장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이하《 》이 완결된 부분이다.)

 天下莫柔弱於水(천하막유약어수)/而功堅强者莫之能勝(이공견강자막지능승)/以其無以易之(이기무이역지)/弱之勝强(약지승강)/柔之勝剛(유지승강)/天下莫不知(천하막부지)/莫能行(막능행)/是以聖人云(시이성인운)/受國之垢(수국지구)/是謂社稷主(시위사직주)/受國不祥(수국불상)/是謂天下王(시위천하왕)/《正言若反(정언약반)》

 

   ⑤ <노자> 31장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

 夫佳兵者(부가병자)/不祥之器(불상지기)/物或惡之(물혹오지)/故有道者不處(고유도자불처)/《君子居則貴左(군자거즉귀좌)/用兵則貴右(용병칙귀우)》/兵者 不祥之器(병자 불상지기)/非君子之器(비군자지기)/不得已而用之(부득이이용지)/恬淡爲上(염담위상)/勝而不美(승이불미)/而美之者(이미지자)/是樂殺人(시락살인)/夫樂殺人者(부락살인자)/則不可得志於天下矣(즉불가득지어천하의)/《吉事尙左(길사상좌)/凶事尙右(흉사상우)/偏將軍居左(편장군거좌)/上將軍居右 (상장군거우)/言以喪禮處之(언이상례처지)》/殺人之衆(살인지중)/以哀悲泣之(이애비읍지)/戰勝(전승)/以喪禮處之(이상례처지)

 

 ⑥ <노자> 42장 부분. 전문은 다음과 같다.

 《道生一(도생일)/一生二(일생이)/二生三(이생삼)/三生萬物(삼생만물)/萬物負陰而抱陽(만물부음이포양)/沖氣以爲和(충기이위화)》/人之所惡(인지소악)/唯孤(유고)/寡(과)/不穀(불곡)/而王公以爲稱(이왕공이위칭)/故物(고물)/或損之而益(혹손지이익)/或益之而損(혹익지이손)/人之所敎(인지소교)/我亦敎之(아역교지)/(强梁者不得其死(강양자부득기사))/吾將(오장)/以爲敎父(이위교부)

 

   ⑦ <좌전> 노소공 22년조

  

 ⑧ 김학규, <공자의 생애와 사상>

 

 ⑨ <좌전> 노소공 26년조

 

 ⑩ <노자> 20장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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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공자의 스승이었을까? | - 老 莊子 2015-03-27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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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는 공자의 스승이었을까?

 

http://well.hani.co.kr/587161?_fr=mb2

 

논어명장면】공자, 노자를 만나다<상>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자왈 무위이치자 기순야여 부하위재 공기정남면이이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억지로 하지 않으면서 저절로 다스린 이는 순임금이시라!   

대저 무엇을 하셨겠는가? 몸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면하

시어 임금의 자리를 지키셨을 뿐이다!

-‘위령공’편 4장 


 

 

 

 

1. 공자의 스승

공자는 박학다식한 사람이었다. 그는 묵묵히 이해할 뿐(默而識之-술이편 2장), 결코 아는 체 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그의 지식은 저절로 밖으로 드러났다. 수십년을 함께 한 제자들은 그런 스승을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生而知之者)이 아닐까 여겼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는 제자들이 타고난 재능을 믿고 공부를 소홀히 할까 염려하여 자주 이렇게 말했다.

 

 열 집이 사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나만큼 성실하고 신의있는 사람이 있겠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十室之邑 必有忠信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①) -‘공야장’편 27장.

 

 나는 결코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구하는 자일 뿐이다.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술이’편 19장.

 

어떤 이들은 공자의 학문적 배경과 교수법의 원천을 궁금해 하기도 했다. 공자는 이런 의문을 가진 제자들에게 진지하게 말하곤 했다.

 

 그대들은 내가 감춰놓고 가르쳐 주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나는 결코 그런 일이 없네. 나는 그대들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그것이 바로 나, 구(丘)의 본모습일세.

(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 吾無行而不與二三子者 是丘也) -‘술이’편 23장.

 

공자에게는 따로 계통을 지을만한 스승이 없었다는 사실을 종내 믿으려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공자 자신도 이런 질문이 종종 지겨웠던지, “어려서 비천하게 살았기 때문에 이것 저것 줏어들은게 많았지(吾少也賤 故多能鄙事-‘자한’편 6장)”라고 말하며 웃어넘기곤 했다. 누군가 그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물었을 때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스승을 삼을 만한 사람이 있는 법, 좋은 점을 보면 본받아 배우고 나쁜 점을 보면 반성하면서 배운다.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②)-‘술이’편 21장.

 

스승이란 어떤 사람인가라고 물었을 때는 이렇게 말했다.

 

 옛 것을 익히고 그것으로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안다면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③)-‘위정’편 11장.

 

훗날 제자 자공은 공자가 학문적 문파가 없음을 의아해 하는 어떤 자와 이런 대화를 남겼다.

 

 위나라 대부 공손조가 자공에게 물었다. “공자께서는 어디서 배웠습니까?”(仲尼焉學)

 “문왕과 무왕의 가르침이 아직 땅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그 가운데 큰 것을 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도 작은 것을 배우게 되지요. 위대한 성현의 도가 없는 곳이 없는데, 왜 선생님이 배울 곳이 없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따로 스승이 없으셨습니다.” (

子貢曰 文武之道未墜於地 在人 賢者識其大者 不賢者識其小者 莫不有文武之道焉 夫子焉不學 而亦何常師之有)-‘자장’편 22장.

 

공자28.jpg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중에서


2. 노자는 공자의 스승인가

자공의 분명한 회고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공자에게 스승이 있었다는 주장이 생겨났다. 공자에게 예(禮)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는 사람은 노자(老子)라고 존칭되는 어떤 인물이다. 훗날 도가(道家)에 의해 자신들의 비조(鼻祖)로 추앙된 바로 그 철인(哲人)이다. 노자가 공자의 스승이었다는 설은 노자를 높이고 공자를 낮추려던 도가우위 시대의 산물임은 불문가지이다. 그러나 사상투쟁이 낳은 조작이라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노자가 ‘공자의 동시대인으로 실존한 인물’이라는 믿음은 매우 오래동안 지속되었다. 어떤 설화가 생겨나 수천년을 전승할 때는 반드시 그럴만한 ‘실체적 진실’이 계기가 되었기 마련이다. 나, 이생도 그 ‘설화의 실체적 기원’이 궁금하여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후, 여러 지방을 여행하며 전설의 진원(震源)과 진위(眞僞)를 추적한 적이 있다.

 

동양사상의 양대 거봉인 공자와 노자는 정말로 조우한 적이 있는가? 그랬다면 두 사람은 어떤 영향을 주고 받았을까? 노자는 역사와 설화가 공히 전하는 ‘노담(老聃)’이라는 바로 그 인물인가? 이 이야기는 이런 궁금증을 좇아 중원 일대를 떠돈 한 늙은 순례자의 기록이다.

 

3. 공자가 존경한 노팽

공자가 따로 스승이 없이 대성(大聖)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공자 생전에도 그렇고, 사후의 사람들에게도 매우 경이롭게 여겨졌던 것 같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자의 어록과 행적을 근거로 공자가 영향을 받았음직한 사람들을 꼽아보기도 했다. 공자가 고대 관제(官制)에 밝은 것은 젊어서 담(炎+방)자에게 배운 탓이고, 음악에 정통한 것은 장홍(장弘)과 사양자(師襄子)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또 공자가 존경한 현자로는 주(周)나라의 노자(老子), 위나라의 거백옥(거伯玉), 제나라의 안평중(晏平仲·안영), 초나라의 노래자(老萊子), 정나라의 자산(子産), 노나라의 맹공작(孟公綽) 등(<사기> ‘중니제자열전’)이 꼽혔다. 이 가운데 특별히 주목되는 사람이 ‘노자’이다. ‘노자’는 열거된 ‘현자’ 가운데 유일하게 실존 자체가 의문시되는 사람임에도, 공자에게 직접 ‘예(禮)를 가르치고, 일종의 도덕적 각성까지 촉구한 언술을 남긴 사람’으로 사서(史書)에까지 올라 있다. 게다가 유가와 쌍벽을 이룬 도가(道家)의 비조로 추존되고 있으니, 만약 그가 공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사상을 교류하였다면 이는 인류문화사의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후대 사람들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정작 선생님의 어록에는 노자라는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논어>에는 이름이 비슷해 후대의 일부 사람들이 이 사람이 바로 노자가 아닐까 추정한 노팽(老彭)이라는 사람이 딱 한번 등장한다.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서술하되 짓지 않음은 옛 것을 믿고 좋아하기 때문이니, 나는 이를 몰래 우리 노팽과 견주어보노라.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④)-‘술이’편 1장.

 

내가 노팽이라는 사람에 대해 고제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유사(儒士) 출신의 제자들은 대개 이 노팽이라는 ‘고대인’을 알고 있었다. “노팽은 선생님이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고대 무축(巫祝;원시 제정일치 사회의 군장이자 제사장. 무당의 원류이다)의 한 사람이다. 그는 유명한 열명의 대무(大巫) 중 네번째 서열을 가진 무팽(巫彭)이란 분이며⑤, 축도문을 낭송하고 이를 전승하는 집단인 사무(史巫)의 원조격이다. 고천의식(告天儀式)을 치를 때 훌륭한 무사(巫史)는 하늘의 뜻을 정확히 전달할 뿐, 사사로히 의미를 더하거나 빼지 않았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전통은 여기서 비롯되었으니, 선생님께서는 저 위대한 현자에 당신의 구도(求道) 정신을 견주어 겸손하게 자부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노팽(老彭)의 노는 무팽(巫彭)의 존칭인가요?”

“노(老)란 나이가 많고 경험과 지식이 풍부해 남의 스승이 될만한 사람을 뜻하지. 주 왕실에서도 임금의 스승을 ‘삼로’(三老)라 했다. 여러 제후국에서도 주나라의 예를 따라 종종 ‘나라의 삼로(三老)를 존중한다’며 고을의 현명한 노인들을 우대하였는데, 이때의 ‘삼로’ 역시 ‘나이 많은 현자들’을 가리켰다. 민간에서도 농사 경험이 많은 지혜로운 농부를 `노농'(老農)이라 했는데, 선생님께서도 그런 표현(子曰 吾不如老農 -`자한'편 4장)을 쓰신 적이 있으셨지."

 

그럼 노팽이 노자가 아니라면 노자는 그러면 누구를 가리키는가?

 

4. 사실(事實)과 사실(史實)

선생님의 어록에 언급이 없음에도, 노자라는 사람이 존재하여 공자에게 예를 전수했다는 이른바 ‘문례(問禮)설화’가 역사적 사실로 ‘공인’된 데는 역사가 사마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사마천은 중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역사가로 꼽히는 인물. 그가 자신의 사서에 노자를 실존인물로 다룬 후부터 사마천을 신뢰하는 후학들이 대부분 그 기록을 따랐다. 만약 사마천이 문례설화를 역사적 사건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면, 공자와 노자의 조우(遭遇)설은 필시 하나의 ‘설’로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 ‘공자세가’에서 이때의 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노나라의 남궁경숙(南宮敬叔)이 노나라 군주에게 말했다.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고자 청합니다.” 이 말을 듣고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 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갖추어 주고 주나라(낙양)에 가서 예를 물어보게 했다. 공자는 이때 노자를 만났다고 한다. -<사기> ‘공자세가’

 

   노자는 초나라 고현 여향 곡인리 사람으로 성은 이(李)씨,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시호는 담(聃)이다. 그는 주나라의 장서를 관리하는 사관(史官)이었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 머무를 때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

(孔子適周 將問禮於老子) -<사기> ‘노자·한비열전’

 

이를 종합하면, 노자는 주나라 사관(史官)을 지낸 사람으로, 공자가 노나라 군주의 명을 받아 주나라 낙양에 갔을 때 만나게 되어 그로부터 예를 배웠다는 사람을 가리킨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예를 배웠다는 이 ‘문례(問禮) 설화’는 매우 유명하여, 역사가 사마천이 생존했던 시대에도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말하는 사람치고 한두번 화제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장주(莊周;<장자>의 저자. 서기전 369~289?)를 비롯한 후대 사상가들이 공자와 노자의 대화를 내세워 자신의 논지를 전개하게 되면서 사상사의 측면에서도 노자의 실존이 확고해졌다.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의 쟁명을 거쳐 진한(秦漢) 시기의 통치이념 수립 과정에서 공자와 노자의 사상은 치열하게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고, 공자 사후 3백여년 뒤의 사람인 사마천이 살던 한나라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양립불가(兩立不可)의 세계로까지 여겨졌다. 사마천은 당시 두 학파간의 대립이 얼마나 심했는 지를 이렇게 기록해 놓고 있다.

 

 “세상에서 노자의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유가 학문을 내치고, 유가 학문을 배우는 이들은 역시 노자의 학문을 내쳤다. ‘길이 다르면 서로 도모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정말 이러한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世之學老子則출(물리칠출 絲+出)儒學 儒學亦출老子 道不同不相爲謀 豈謂是邪) -<사기> ‘노자· 한비열전’⑥

 

그러나 나, 이생이 공문의 일꾼이 되어 여러 문도들과 생활할 때 그 누구로부터도 노자라고 존칭되는 현자에 대해 들은 적이 없었다. 만약 공자보다 나이가 많고 대중적으로 인기가 높은 노자라는 저명한 현자가 있어서 공자에게 특별한 가르침을 전수하였다면, 민간 학숙으로서 학생들을 유치해야 하는 공문(孔門)의 입장에서 이를 적극적으로 선전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텐데 말이다.

선생님 생전이든 사후이든 노자라는 인물이 존숭되거나 혹은 폄하된 흔적이 선생님의 어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노자가 후대에 도가 사상의 비조로 떠받들어졌을지라도, 적어도 이 시기에 노자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설령 그런 현인이 있었다 해도 그는 ‘여러 현인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그의 사상도 당시에는 공자 사상과 대립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우호적인 통섭의 관계였을 것이다. 현대의 학자들이 논구한대로 공자가 살던 시기는  여러 사상들이 아직 완전히 분화되기 전이었다. 유가와 도가는 후대로 가면서 점차 사상적 분화과정을 밟았지만, 한동안은 자신들도 어쩌지 못할 동출이명(同出異名;이름이 다르지만 연원을 같이 함)의 ‘혈통’을 나눠가지고 있었다. 


아무튼 사마천이 <사기>에서 말한 노자는 도가의 원조가 된 노자, 바로 그 사람이지만, 도가의 원조인 노자라는 사람이 공자와 같은 시대를 살며, 공자에게 예를 교수한 바로 그 사람이라고는 사마천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 사마천은 노자가 공자와 동시대를 산 주나라 사관 노담이라고 해놓고 뒤에 가서는, 어쩌면 초나라 사람 노래자, 혹은 훗날의 주나라 태사 담이 노자일지 모른다는 식(周太史 담…或曰담卽老子 或曰非也-상동)의 여운을 남겼다. 사마천의 시대에 벌써 노자는 그 실존 여부를 규명하기 어려운 인물이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실을 기록해야 할 사가로서 노자라 불리는 대사상가의 생몰조차 적시할 수 없자, 그를 그냥 은군자(隱君子), 즉 ‘숨어사는 군자’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이상 <사기> ‘노자·한비열전’)

 

나, 이생의 추적 결과, ‘최초의 노자’는 분명 노담이었다. 내가 여러 고제들의 증언을 종합한 결과, 공자가 주나라 수도 낙양에 갔을 때 노담을 만났으며, 그가 훗날 노자라는 인물을 형성하는 최초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비록 사마천은 시대적 한계로 인해 노자의 실체를 얼버무리고 말았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결론은 ‘노자’가 여러 세대에 걸쳐 창조된 ‘역사화된 인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최초에 실존한 노자’는 ‘최후에 완성된 노자’가 아니지만, 노자라는 인물의 기원이 된 것은 역사적 사실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란 것이 나, 이생의 결론이다. 그렇지 않다면 ‘노담=노자’라는 등식이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성립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 것이며, 공자 사상에 비판적이었던 경쟁자들이 노담의 존재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활용하지는 않았으리라.


노담이 ‘최초의 노자’일 것이란 ‘물증’도 있다. <노자>(<도덕경(道德經)>이라고도 한다)라는 5천 자의 짧은 책의 존재이다. 이 책 내용을 분석해 보면, 공자보다 훨씬 후대에 여러 사람의 참여로 형성된 위작(僞作)임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많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책의 기본 뼈대나 원천 사상의 표현방식은 한 사람의 일관된 관점이나 집필이 아니면 나오기 어려운 측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는 적어도 이 책이 최초에 쓰여질 때는 단일 저자의 작품으로 출발했음을 의미한다. 그 ‘최초의 저자’가 바로 ‘최초의 노자’라면, 그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현재까지 노담을 제외하고는 달리 상정할 만한 인물이 없다.(김용옥, <노자철학 이것이다>)

 

그렇다면 노담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으며, 공자를 만났을 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공자는 그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이에 대한 사서의 언급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유가의 경쟁자들이 남긴 진술은 일방적이어서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 나는 두 사람이 나눈 육성이 궁금해 한동안 잠을 못이룰 지경이 되었다. 견디다 못해 어느날 부터인가는 자로와 안연 등 당시 낙양에 함께 갔던 고제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질문하기 시작했다.

“고제님들, 공자님과 함께 낙양에 갔던 이야기를 해주세요. 저도 낙양에 꼭 한 번 가보고 싶군요.”

“선생님과 함께 주례를 수입하려고 갔던 주나라 낙양에서의 일 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때가 언제였나요?”

 

공자7.jpg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 중에서


5. 공자, 낙양에 가다

다시, 사마천의 기록에 주목해 보자.

 

 노나라의 남궁경숙이 노나라 군주에게 말했다. “공자와 함께 주나라에 가고자 청합니다.” 이 말을 듣고 노나라 군주는 그에게 수레 한 대와 말 두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갖추어 주고 주나라에 가서 예를 물어보게 했다. 공자는 이때 노자를 만났다고 한다. -<사기> ‘공자세가’

 

공자가 노자를 만났다는 사실을 고증하기 위해서는 이 기록이 제시하는 역사적 장면들을 꼼꼼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기록에서는 특정되지 않았으나 공자 일행이 낙양에 간 시기가 언제인지도 매우 중요하다. 시점에 따라 공자와 노자의 나이 차이, 학문적 수준 정도 등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인데, 이는 사상의 전수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분석 조건이다.

 

“저, 이생이 듣기로 선생님이 주나라 수도 낙양에 가서 노자를 만난게 17~30살 사이거나, 34, 35살 때의 일이라고 하던데, 그것이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다. 선생님이 20대를 전후한 시기에 유(儒)의 일원으로 여러 지방을 다니며 상례(喪禮)를 수집하신 적이 있는데 그때 낙양에도 들렀을 수 있겠지만, 남궁경숙과 함께 낙양을 공식방문한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또 선생님이 34살 때는 맹손씨의 수장인 맹희자의 3년상이 치러지던 때라 그의 아들인 남궁경숙이 먼 여행을 할 수 없었던 때였다.”

  

나, 이생이 고제들의 여러가지 증언과 당시 시대적 상황, 공자의 행적 등을 종합해 보건대, 선생님이 주례를 배우러 낙양을 방문한 시기는 노정공 4년 즉 서기전 506년 즈음이었다. 이때는 선생님이 제나라 망명에서 돌아와 곡부에 학숙을 다시 연지 4년째 되던 해로, 선생님의 나이 45~46살 때였다.⑦

 

서기전 507년 노정공이 즉위한 지 3년째 되던 해 노나라는 각종 국가의식을 치르기 위한 예법과 시설물을 다시 상고(尙古)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노나라 집권당인 계손, 맹손, 숙손씨 등 삼환(三桓)은 내부 논의 끝에 주나라 왕실이 비전(秘傳)하고 있는 주례(周禮)에 관한 고례전장(古禮典章)을 구해 올 사절단을 낙양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때의 일을 자로는 이렇게 회고했다.


“당시 조정과 삼환은 심각한 정통성의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돌아가신 소공께서 7년을 망명해 있는 동안 조정과 공실의 예법이 많이 망실되거나 흐트러져 있었고, 임금 자리에 세자 대신 소공의 동생인 금상(노정공)이 계씨의 손에 옹립되면서 임금의 정통성도 많이 취약해져 있었다.”

염백우가 수염을 쓸며 말을 이었다.

“정공이 즉위한 이듬해 궁궐 남문의 양관(兩觀)이 불에 탔지.(<좌전> 노정공 2년) 알다시피 궁궐의 남문인 치문 양쪽에 망루가 있지 않은가. 양관은 국법과 조정의 정령(政令)을 게시하는 곳인데 이곳을 방화했다는 것은 명백한 반체제 시위였지. 게다가 임금께서 진(晉)나라에 조공을 갔다가 황하도 건너지 못하고 되돌아오자 삼환도 더 이상 이 상황을 방치해선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지.”

삼환 세력은 민심 회복을 위해 무엇보다 취약해진 공실의 정통성을 조속히 안정시킬 필요성에 공감하게 되었고, 그 방책의 하나가 국가 예법의 복구였던 것이다. 주례(周禮)를 다시 전수해 옴으로써 주공(周公)의 아들 노공(魯公;이름이 백금이다)이 봉건된 나라라는 전통을 새롭게 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주나라로서도 노나라 사절의 방문은 환영할 일이었다. 주나라는 십여년 전 왕실 내란에서 패배한 서왕 세력이 주나라 왕실의 고대 전적들을 가지고 초나라로 망명하는 바람에 예법시행에 중대한 공백을 맞고 있었다. 주왕실은 내란이 수습되고 낙양이 안정되자 동성(同姓)의 제후국들이 소장한 주왕실 관련 전적들을 왕실도서관에 바치도록 했다. 주나라 왕실 입장에서 보면 주공의 봉국으로 유일하게 왕례(王禮)로 제사하고 있는 노나라의 사례는 가장 밀접한 상고 대상이었을 것이며, 삼환의 입장에서도 노나라 역사서인 <노춘추(魯春秋)>와 천문·역법을 담은 <역상(易象)>등 노나라가 개찬한 전적을 바쳐 주나라 왕실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리라.


“아, 그렇게 되어 노나라 사절단이 주나라 도읍 낙양에 가게 된 것이군요. 그런데 그 일을 남궁경숙과 공자가 맡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때 집정대신인 계평자는 낙양사절단의 임무를 삼환의 큰집인 맹손씨에게 일임했다. 맹손씨가 대대로 사공(司空)의 벼슬을 세습하는 집안이었기 때문이지. 사공(오늘날의 건설부장관과 상공부장관 정도를 겸직하는 벼슬이다)은 국가 주요시설들인 궁궐과 성곽, 조정의 묘당과 묘역 등의 건설과 보수를 담당했으므로, 그에 따른 예법을 정비하고 관리하는 업무와도 무관할 수 없었다. 맹손씨가 주례를 수집하는 일을 맡은 것은 이런 연유때문이지.”

“정공 원년(서기전 509년)에 낙양의 성주(成周) 성을 새로 쌓을 때 여러 제후국들이 역부(役夫)와 물자를 바쳤는데, 우리 노나라에서는 사공인 맹의자가 이 일을 맡았던 것도 같은 이유였지.”

“선생님이 이 일에 참여하게 된 것은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맹의자와 남궁경숙은 쌍동이 형제로 이때 나이가 25~26살이었습니다. 맹의자는 이 중요한 임무를 동생 남궁경숙에게 맡겼는데, 아직 예법 전반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던만큼, 사절단을 자문하고 지도할 예악 전문가가 필요했습니다. 그때 그들의 눈에 띈 분이 스승님 말고 누가 있었겠습니까?”

안연이 조용히 당시의 정황을 설명해 주었다. 


맹의자·남궁경숙 형제는 일찌기 아버지 맹희자가 임종하면서 자식 교육을 공자에게 맡길 것을 유언(<좌전> 노소공 7년)한 바로 그 형제이다. 즉 공자는 이들 형제의 스승이었던 것이다. 또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이 맹손씨가 주도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인연(<좌전> 노양공 10년)으로 두 집안이 친분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런 인연도 공자가 정부 공식사절단의 자문관으로 선발되는데 일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맹의자 형제가 사절단의 일원으로 공문의 참가를 정공에게 보고하자, 임금께서 선생님의 참가를 격려하시기 위해 특별히  수레 한 대와 말 두마리 그리고 어린 시종 한 명을 선생님에게 하사하기도 하였지.”

자로가 안연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어린 시종이 바로 저 사람 안연일세. 하하하.”

공자는 낙양 사절단에 공문의 여러 제자들을 데리고 갔다. 이때 공자를 수행한 제자로는 자로를 비롯해 염백우, 안연의 아버지 계로(안로) 등 초기 제자들이 있었고, 안연이 시종 자격으로 이 여행에 참가했다. 안연은 이때 나이가 15,16살로 곡부의 사족(士族) 사이에서는 이미 수재로 소문이 자자했다. 공자는 공문의 미래이자 자신이 아들처럼 사랑한 안연을 데리고 가 낙양의 높은 문물을 직접 보고 배울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훗날 안연의 후학들이 유가의 여러 유파 중 가장 ‘철학적’인 학단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어쩌면 안연이 이 여행에서 노담을 만났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6. 공자, 노담을 만나다

노나라의 문례사절단이 낙양에 도착한 것은 서기전 506년 공자 46살때였다. 낙양은 이때 동왕(東王)과 서왕(西王)간의 왕위 다툼이 동왕의 승리로 일단락된 지 10년이 지나고 있었다. 왕실 내부의 갈등이 진화되고 성주성 등 왕도의 주요 시설들이 재정비되는 등 전란의 후유증이 어느 정도 수습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사절단의 선발대로 먼저 낙양의 동정을 살펴본 자로가 보고했다.

“우리의 임무 상으로 볼 때 낙양에서 꼭 만나보아야 할 인물은 장홍이라는 대부가 될 것 같습니다. 그는 태사(太史)로서 천문과 귀신의 일에 능통해 3대에 걸쳐 왕실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입니다.”

남궁경숙이 말했다. “장홍이라면 3년 전 형님이 낙양 성주성 축성에 참가했을 때 축성 책임자였습니다. 그때 우리 집안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니, 그를 잘 활용하면 어렵지 않게 이번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입니다.”

장홍은 음악 분야에도 뛰어났는데, 이때 공자는 장홍에게서 주나라의 궁중음악과 주나라가 여러 제후국으로부터 수집한 시(詩)에 대해 많은 견문을 얻을 수 있었다.


“장홍이 현직에 있는 가장 뛰어난 지식인이라면, 재야 인물로는 노담이란 전직 태사가 으뜸이라고 합니다.”  

자로가 공자에게 따로 말하였다. 

“제가 낙양에 먼저 와보니 일반 사관들이 한결같이 노담을 대석학으로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편찬한 책들을 주왕실이 소장케 하는데는 노담의 감수가 지름길이라고들 합니다.”

공자도 낙양에 들어와 여러 경로로 노담에 대해 더 알아본 뒤  남궁경숙에게 말했다.

“낙양의 재야에 노담이라는 노사(老師)가 계시다는데,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가 옛 일을 넓게 알고 지금 일도 모르는 것이 없으며, 예악의 근원에 능통하고 도덕의 귀추에 밝다고 말합니다. 사절단이 가르침을 받을만 한 듯 하니, 노담과 따로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해 주시기 바랍니다.” -<공자가어> ‘관주’편

 

노담은 태사를 지낸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왕실로부터 장로(長老)의 예우를 받은 이래 자신도 그 존칭을 물려받아 ‘노담’이라 불리었다. 노담은 일찌기 정치에 환멸을 느껴 정계와 절연한 뒤 주왕실도서관장으로서 오직 고도(古道)를 지키고 전승하는 일에만 전념하다가 얼마전에 60여세의 나이로 은퇴했다고 한다.

훗날 자로가 회상하기를 “노담을 만나보니 석학이 따로 없었다. 선생님의 박학이야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노담의 박학 또한 대단했다. 나이많은 철인답게 사물을 초월적 경지에서 인식하는 심미적 직관도 빼어났다. 사관으로 오래 재직하면서 여러 정치적 사건을 경험한 탓인지, 치술治術)에도 남다른 조예가 있는 듯 했다.”(김용옥, <노자철학 이것이다>에서 인용하여 각색)


아직 어린 나이였으나 시종인 관계로 스승과 노담과의 대화를 곁에서 들을 수 있었던 안연도 노담에게 깊은 인상을 받은 듯 했다.

“제가 보기에 노사(老師)께서는 궁정생활을 경험하고 또 동시에 일반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여 정치의 양면에 대해 깊은 철학적 통찰을 얻은 듯 했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 분을 뵈었을 때는 이미 깊은 명상생활의 묘리를 체득한 듯 했습니다. 마치 끝모를 해저를 유영하는 바다용처럼, 구만리 장천을 나는 천룡처럼 도의 심연을 노니는 듯 했습니다.”

공자 일행은 노담과의 만남이 주선되자, 노담이 살고 있다는 낙양의 북망산 아래 초옥으로 찾아갔다. 공자와 노담은 이때 나이차가 20살 안팎⑧이었다. 이때 나눈 대화의 내용이 후세의 서책(<사기> ‘공자세가’와 ‘노자한비열전’, <장자> 외편 등)에 실려 전한다. 그러나 어떤 것은 가탁(假託)의 흔적이 농후해 진위 자체가 의심스럽고, 어떤 것은 너무 단편적이어서 전후 맥락을 알기 어려워 후대의 아쉬움을 사고 있다. 나, 이생이 가장 궁금했던 것도 바로 그 공백 속에 숨어 있는 진정한 주제와 내용이었다. 과연 두 사람은 무슨 말을 주고 받았을까?

일행의 수레가 북망산 아래 대나무숲에 이르자, 멀리서 시동이 일행을 맞이하러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낙양의 아침 해가 정오를 향해 가던 어느 날이었다. <하편 계속>

 

     


<원문 보기>


    *<논어명장면>은 소설 형식을 취하다 보니 글쓴 이의 상상력이 불가피하게 개입되었다.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논어를 새롭게 해석해보자는

글쓴 이의 취지를 살리면서 동시에 독자들의 주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을 돕기 위해 원문을 글 말미에 소개한다. 소설 이상의 깊이 있는 논어읽기

를 원하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2014년 11월호 연재부터 <논어> 원문보기에 인용할 한글 번역본은 <논어정의>(이재호 정해,솔)와 <한글세대가 본 논어>(배병삼 주석

, 문학동네)이다. 표기는 이(논어정의)와 배(한글세대가 본 논어)로 한다. 이밖에 다른 번역본을 인용할 때는 별도로 출처를 밝힐 것이다. 영문

L은 영역본 표시이다. 한문보다 영어가 더 익숙한 분들의 논어 이해를 추가하였다. 영역 논어는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 중국명 理

雅各)본을 사용하였다.

           ***<논어>는 편명만 표시하고, 그 외의 문헌은 책명을 밝혔다.

  

 ① ‘공야장’편 27장

 子曰 十室之邑 必有忠信 如丘者焉 不如丘之好學也(자왈 십실지읍 필유충신여구자언 불여구지호학야)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10호쯤 되는 조그만 고을에 반드시 성실하고 믿음직스럽기가 나, 구와 같은 사람은 있겠지만, 나처럼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열 가구의 작은 고을에도 나만큼 ‘자신에게 충실하고(忠)’ 또 ‘남에게 성실한(信)’ 사람이야 반드시 있을 터이지만, 나만큼 배우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있지 않을게다.

 L-The Master said, “In a hamlet of ten families, there may be found one honourable and sincere as I am, but not so fond of learning.”

 

 ② ‘술이’편 21장

 子曰 三人行 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자왈 삼인행 필유아사언 택기선자이종지 기불선자이개지)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세 사람이 행동할 때면 반드시 그 가운데 나의 스승이 있는 법이니, 그 중 착한 사람을 가려 살펴보고는 그 사람을 따르고, 착하지 못한 사람을 가려 살펴보고는 자신의 잘못을 고쳐야 한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ㅅ 사람이 길을 가도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게 마련. 그 가운데 잘난 것은 골라서 좇고, 잘못된 것은 고칠 일이다.

 L-The Master said, “When I walk along with two others, they may serve me as my teachers. I will select their good qualities and follow them, their bad qualities and avoid them.”

 

  ③ ‘위정’편 11장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옛날의 듣고 배운 것을 연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깨달아 안다면, 남의 스승이 될 수가 있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스승이 될만하리라.

  L-The Master said, “If a man keeps cherishing his old knowledge, so as continually to be acquiring new, he may be a teacher of others.”

 

 ④ ‘술이’편 1장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자왈 술이부작 신이호고 절비어아노팽)

 이-스승께서 말씀하셨다. “전술(傳述)하면서 창작(創作)하지 않으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믿고서 옛것을 좋아하기를 내 스스로 노팽에게 견주어 본다.”

 배-선생님 말씀하시다. 서술하되 짓지 않고, 옛것을 믿고 좋아함이여! 삼가 우리 노팽에게 견주련다.

 L-The Master said, “A transmitter and not a maker, believing in and loving the ancients, I venture to compare myself with our old P’ang.”

 

 ⑤ 일본의 저명한 한문학자인 시라카와 시즈카는 노팽이 고대의 유명한 무축이었다고 주장한다. 시라카와는 노팽이 <산해경> ‘대황서경’에 등장하는 고대의 십무(十巫) 중 네번째 서열인 무팽일 것으로 본다. 무팽은 축도문의 낭송과 전승을 담당하는 사무(史巫)의 원조이다. 참고로 <산해경>에서 십무는 열 개의 태양의 신을 뜻하는데, 무함(巫咸), 무즉(巫卽), 무분(巫분(月+分), 무팽(巫彭), 무고(巫姑), 무진(巫眞), 무례(巫禮), 무저(巫抵), 무사(巫謝), 무라(巫羅)를 말한다.

 

  ⑥<사기> ‘공자세가’, ‘노자·한비열전’ (김원중 옮김)

 

  ⑦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예를 배운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주장이 있다. 사마천의 <사기> 공자세가는 이때를 공자 17~30세 사이의 일로, <궐리지연보>는 34,5세 때로, 역도원의 <수경주>는 17세 때로, 사마정의 <사기색은>은 34세의 일로 주장한다. 허동래의 <공자연보>는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하여 이때를 공자 나이 46세의 일이라고 주장한다.(김학주, <공자의 생애와 사상>) 나는 허동래의 설을 지지한다. 

 

  ⑧ 근대 중국 철학자 호적(胡適·1891~1962)의 주장이다.

 

  ⑨ ‘공자, 노자를 만나다’편(상·하 2편)은 <논어> <사기> <예기> 등을 비롯한 전적들과 후대 학자들의 연구서를 기본 토대로 스토리를 구성하되, 이야기 전개상 필요한 부분에서는 지은이의 상상력이 가미되었다. 전거가 있는 것은 괄호 등의 방식으로 그 출처를 모두 표기하였으며, 지은이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이라고 여기는 부분과 지은이의 독자적인 견해(또는 추정, 해석 등)는 따로 출처를 표시하지 않았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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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을 읽은 기념으로 | - 老 莊子 2015-03-03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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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을 읽은 기념으로 다시 읽을 책들

 

최진석 교수의 책을 다시 들었다.

 

- <인간이 그리는 무늬> 2013. 10. 5  一讀

- <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도덕경>2013. 11.10 一讀

-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이번에 구입 (2015.3. 3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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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선비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한다. | - 老 莊子 2015-03-02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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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41장 중에서

 

上士聞道,勤而行之;
中士聞道,若存若亡;
下士聞道,大笑之,
不笑不足以為道!

 

훌륭한 선비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한다.
평범한 선비는 도를 들어도, 긴가민가 한다.
못난 선비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웃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

 

-

이런 모습이 단지 도에만 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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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을 언제든지 참조해 볼 수 있는 사이트 | - 老 莊子 2015-03-02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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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을 언제든지 참조해   볼 수 있는 사이트

 

http://ko.wikisource.org/wiki/%EB%8F%84%EB%8D%95%EA%B2%BD

 

위키문헌 - 도덕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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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 41장 - 大器晚成 | - 老 莊子 2015-03-02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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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士聞道,勤而行之;
中士聞道,若存若亡;
下士聞道,大笑之,
不笑不足以為道!
故建言有之:

明道若昧,
進道若退,
夷道若纇,
上德若谷,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建德若偷,
質眞若渝,
大方無隅,
大器晚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道隱無名,
夫唯道,善貸且成。

 

훌륭한 선비가 도를 들으면, 부지런히 행한다.
평범한 선비는 도를 들어도, 긴가민가 한다.
못난 선비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웃지 않으면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
따라서 이를 굳이 말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밝은 도는 어두운 듯하고,
나아가는 도는 물러서는 듯하며,
평평한 도는 어그러진 듯하고,
훌륭한 덕은 계곡과 같으며,
크게 깨끗한 것은 더러운 듯하고,
넓은 덕은 넉넉하지 못한 듯하며,
말로 설명한 덕은 구차한 듯하고,
성질이 참된 것은 변하는 듯하며,
크게 모난 것은 귀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천천히 만들어지며,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 ,
큰 모양은 형태가 없다.

도는 숨어서 이름도 없지만,
오직 도만이 (스스로를) 잘 빌려주고 (일을) 잘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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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만성(大器晩成) - ‘대기면성(大器免成)’ | - 老 莊子 2015-03-0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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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insnews.co.kr/issue/Hissue_hot_view.php?num=26276&firstsec=2&secondsec=21

 

대기만성(大器晩成)의 사전적 의미는 두말할 나위 없이 ‘큰 그릇을 만드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으로, 크게 될 사람은 늦게 이루어짐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최근 그 고사 성어는 대기만성이 아닌 ‘대기면성(大器免成)’이었다는 주장이 나와 설득력을 얻고 있다.

풀이해보면 “큰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공자라면 모를까 노자의 가르침일진데,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를테면 ‘소년이노 학난성(少年易老 學難成)’ 즉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라고 한 이치와 마찬가지라는 것.

영어에서 ‘완벽한 사람은 없다(Nobody is perfect)’와 비슷한 논리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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