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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30 개설

- 연암 박지원
연암 박지원과 괴테 | - 연암 박지원 2018-11-1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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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 열하 일기

 

연암 박지원은 1780년 중국 열하를 다녀온다.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해 중국으로 간 사신단으로 갔는데, 정사인 박명원과 8촌 사이로 그는 8촌 형을 따라 사신단에 합류했다.

사신단으로 열하에 다냐온 연암은 열하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열하일기》로 남긴다. 

 

괴테 - 이탈리아 여행기

 

괴테는 1786∼1788년에 걸쳐 이탈리아를 여행한다.

이탈리아 여행 도중 고국 독일에 있는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와 일기 등을

엮어 책으로 냈다. 

 

묘한 것은 두 사람의 인연이다,

둘은 같은 시기에 여행을 통해, 여행기를 남겼는데, 그게 후세에 길이 남게 되는 작품이 된 것, 우연치고는 대단한 우연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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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문학속으로(시란) | - 연암 박지원 2018-04-1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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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문학속으로(시란)

2005. 1. 1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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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nn1953/60009282223
출처블로그 : 꿈큰아이가 사는 세상
 
 
 
 
 
 
 
 
 
 
 
 
 
 
 
 
 _ 연암 박지원과 그이 글씨              
 
<1>
억선형(憶先兄) _형님을 생각하며
 
我兄顔髮曾誰似(아형안발증수사)  형님의 모습이 누구와 닮았던고

每憶先君看我兄(매억선군간아형)  아버님 생각날 젠 우리 형님 보았었네. 

今日思兄何處見(금일사형하처견)  오늘 형님 그립지만 어데서 본단 말가 

自將巾袂映溪行(자장건몌영계행)  의관을 갖춰 입고 시냇가로 가는도다.

_연암 박지원이 죽은 형을 그리워하며 연암협 시냇가에서 읊은 
<연암억선형> 이라는 시다.
 
<2>
<열하일기>로 알려진 연암 박지원이 당대의 문장가로 유명했던
창애(蒼厓) 유한준(兪漢雋)에게 보낸 짧은 편지 중 이런 내용이 있다.

“마을의 꼬맹이에게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그 읽기 싫어함을 꾸짖자,
'하늘을 보면 푸르기만 한데, 하늘 천(天)자는 푸르지가 않으니 그래서 읽기 싫어요!'
라고 합디다.
이 아이의 총명함이 창힐을 기죽일 만합니다.”

 

_창힐은 중국 상고시대의 인물로, 한자를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런저런 일로 유한준은 연암에게 깊은 유감을 품어, 훗날 그는 연암의 <열하일기>를
오랑캐의 연호를 쓴 '노호지고(虜號之稿)'라고 극력 비방하는데 앞장섰고, 뒤에 연암이 포천에
묘지를 만들자 일족을 시켜 고의로 그 묘자리를 파내 집안 간에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대립을
빚기까지 하였다. 박종채(연암의 차남)는 <과정록>에서 이때 일을 두고 유한준이 젊었을 때
연암이 자신의 글을 인정해 주지 않았던 일에 원망을 품어 꾸민 일이라고 적고 "이 자는 우리
집안 백세의 원수"라고까지 적고 있다.
                                                          
<3>
유인의 이름은 아무이니, 반남박씨이다.
 
그 동생 지원 중미는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 이택모 백규에게 시집가서 딸 하나 아들 둘이 있었는데,
신묘년 9월 1일에 세상을 뜨니 얻은 해가 마흔셋이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악곡인지라,
장차 서향의 언덕에서 장사지내려 한다.
 
백규가 그 어진 아내를 잃고 나서 가난하여 살 길이 막막하여,
어린 것들과 계집종 하나, 솥과 그릇, 옷상자와 짐궤짝을 이끌고
강물에 띄워 산골로 들어가려고 상여와 더불어 함께 떠나가니,
내가 새벽에 두포의 배 가운데서 이를 전송하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화장하던 것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갓 여덟 살이었다. 장난치며 누워 발을 동동구르며 새 신랑의 말투를 흉내내어
말을 더듬거리며 점잖을 빼니, 누님은 그만 부끄러워 빗을 떨구어 내 이마를 맞추었다.
 
나는 성나 울면서 먹으로 분에 뒤섞고, 침으로 거울을 더럽혔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 금벌 따위의 패물을 꺼내 내게 뇌물로 주면서 울음을 그치게 했었다.
지금에 스물여덟해 전의 일니다.
 
말을 세워 강 위를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은 바람에 펄럭거리고 돛대 그림자는 물 위에
꿈틀거렸다. 언덕에 이르러 나무를 돌아가더니 가리워져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강 위 먼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같고,
강물 빗은 누님의 화장 거울같고,
새벽 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그래서 울면서 빗을 떨구던 일을 생각하였다.
유독 어릴 적 일은 또렷하고 또 즐거운 기억이 많은데,
세월은 길어 그사이에는 언제나 이별의 근심을 괴로워 하고 가난과 곤궁을 근심하였으니,
덧없기 마치 꿈속과도 같구나.
형제로 지낸 날들은 또 어찌 이다지 짧았더란 말인가.
  
떠나는 이 정녕코 뒷 기약을 남기지만 
오히려 보내는 사람 눈물로 옷깃 적시게 하네.
조각배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꼬 
보내는 이 하릴없이 언덕 위로 돌아가네.
  
_박지원이 죽은 누님을 그리며 지은 묘지명이다.
 
<4>
연암 뒷 세대의 대표적 문장가였던
홍길주는 <연암집>을 읽고 나서 느낀 소감문을 이렇게 피력하고 있다.
 
이제 내가 거울을 꺼내 지금의 나를 살펴보다가
책을 들춰 그 사람의 글을 읽으니, 그 사람의 글은 바로 지금의 나였다.
이튿날 또 거울을 가져다 보다가 책을 펼쳐 읽어보니, 그 글은 다름아닌 이튿날의 나였다.
이듬해 또 거울을 가져다 보다가, 책을 펴서 읽어보니 그 글은 바로 이듬해의 나였다.
내 얼굴은 늙어가면서 자꾸 변해가고
변하여도 그 까닭을 잊었건만, 그 글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또한 읽으면 읽을수록 더욱 더 기이하니, 내 얼굴을 따라 닮았을 뿐이다.
 
_홍길주 <독연암집(讀燕巖集)>
 
<5>
그렇다면 끝내 비슷함은 얻을 수가 없는 것일까?
말하기를 대저 어찌하여 비슷함을 구하는가?
비슷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진짜는 아닌 것이다.
 
천하에서 이른바 서로 같은 것을 두고 반드시 '꼭 닮았다'고 하고
구분하기 어려운 것을 또한 '진짜 같다'고 말한다.
 
대저 진짜 같다고 하고 꼭 닮았다고 말할 때에
그 말 속에는 가짜라는 것과 다르다는 뜻이 담겨 있다.
때문에 천하에는 이해하기 어려워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고,
완전히 다른 데도 서로 비슷한 것이 있다.
 
통역과 번역으로도 뜻을 통할 수가 있고, 전서와 주문,
예서와 해서로도 모두 문장을 이룰 수가 있다.
왜 그럴까?
다른 것은 겉모습이고, 같은 것은 마음이기 때문일 뿐이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마음이 비슷한 것(心似)은 뜻이고,
겉모습이 비슷한 것(形似)은 피모(皮毛)일 뿐이다.
 
_박지원 <녹천관집서(綠天館集序)>
*그는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비슷한 것은 모두 가짜다.
 
<6>
한참 무더운 중에 그간 두루 편안하신가?
성흠聖欽은 근래 어찌 지내고 있는가?
늘 마음에 걸려 더욱 잊을 수가 없네.
중존仲存과는 이따금 서로 만나 술잔을 나누겠지만, 백선伯善은 청파교靑坡橋를 떠나고
성위聖緯도 운니동雲泥洞에 없다 하니, 이같은 긴 여름날에 무엇하며 지낼는지 모르겠구려. 듣자니 재선在先은 벼슬을 하마 그만 두었다던데, 돌아온 뒤로 몇 번이나 서로 만나보았는가 궁금하이.
저가 조강지처를 잃은데 더하여 무관懋官 같은 좋은 친구마저 잃었으니,
아득한 이 세상에서 외롭고 쓸쓸해 할 그 모습과 언어는 보지 않고도 가늠할 만 하네 그려. 또한 하늘과 땅 사이의 궁한 백성이라 말할만 할 것이오.
 
아아! 슬프다.
나는 일찍이 벗 잃은 슬픔이 아내 잃은 아픔보다 심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내를 잃은 자는 오히려 두 번, 세 번 장가들어 아내의 성씨를 몇가지로 하더라도
안될 바가 없다. 이는 마치 옷이 터지고 찢어지면 깁거나 꿰메고, 그릇과 세간이 깨지거나
부서지면 새것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
혹 뒤에 얻은 아내가 앞서의 아내보다 나은 경우도 있고, 혹 나는 비록 늙었어도 저는 어려, 그 편안한 즐거움은 새 사람과 옛 사람 사이의 차이가 없다.
 
벗을 잃는 아픔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다행히 내게 눈이 있다해도 누구와 더불어 내가 보는 것을 함께 하며,
귀가 있다해도 누구와 더불어 듣는 것을 함께 하며,
입이 있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맛보는 것을 함께 하며,
코가 있어도 누구와 더불어 냄새 맡는 것을 함께 하며,
다행히 내게 마음이 있다 해도 장차 누구와 더불어 나의 지혜와 깨달음을 함께 하겠는가?

 

종자기가 죽으매, 백아가 석 자의 마른 거문고를 끌어 안고

장차 누구를 향해 연주하며 장차 누구더러 들으라 했겠는가?

그 기세가 부득불 찼던 칼을 뽑아들고 단칼에 다섯 줄을 끊어 버리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 소리가 투두둑 하더니, 급기야 자르고, 끊고, 집어던지고, 부수고, 깨뜨리고, 짓밟고,

죄다 아궁이에 쓸어넣어 단번에 그것을 불살라버린 후에야 겨우 성에 찼으리라.

그리고는 스스로 제 자신에게 물었을테지.

     “너는 통쾌하냐?”

     “나는 통쾌하다.”

     “너는 울고 싶지?”

     “그래, 울고 싶다.”

소리는 천지를 가득 메워 마치 금석金石이 울리는 것 같고, 눈물은 솟아나 앞섶에 뚝뚝 떨어져 옥구슬이 구르는 것만 같았겠지. 눈물을 떨구다가 눈을 들어 보면 텅 빈 산엔 사람 없고 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어 있다.

“너는 백아를 보았니?”

“나는 보았다.”

 

_<여인與人〉 즉 벗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편지에 나오는 성흠聖欽은 이희명李喜明(1749-?)의 자이고,

중존仲存은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1751-1809)이다.

백선伯善은 누구의 자인지 분명치 않다.

성위聖緯는 이희명李喜明의 형인 이희경李喜經(1745-?)이고,

재선在先은 박제가朴齊家(1750-1805), 무관懋官은 이덕무李德懋(1741-1793)를 말한다.

젊은 시절 함께 어우러져 즐거운 시간을 나누었던 벗들이자 제자들이다.

 

앞서 세상을 떴다던 이덕무는 일찍이 한 사람의 지기,

단 한 사람의 ‘제 2의 나’를 그려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글을 남겼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을 이룬다면, 50일만에 다섯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7>

연암은 글쓰기의 방식을 혁신함으로써

선입견과 편견, 진부한 언어와 상투적 사고를 넘어서서 있는 그대로의 현실,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직시하고자 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그 누구보다도 언어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준다.

요컨대

언어를 쇄신함으로써 언어와 사물사이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것이

그가 도달한 생각의 골자다.

그는 사물 그 자체야말로 가장 참신한 언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언어는 끊임없이 사물에 수렴해가고,

사물을 통해 자신을 쇄신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언어의식은 그의 현실주의적 사고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그는 또한 글쓰기의 핵심적 원리로서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 것을 배워 새 것을 창조한다는 명제를 제기하였다.

이 명제는 학문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_박희병 <선인들의 공부법>  

 

<8>

 선군(연암)이 영남 고을에 계실 때,

하루는 낮잠에서 깨어나 초연한 기색을 띠고, 대숲속 그윽하고 조용한 곳에 장소를 정돈하고 자리를 마련하여 큰 술 한 병과 생선. 고기. 과실. 포를 성대하게 차려 술자리를 만들게 하셨다. 그리고 지팡이와 짚신 차림으로 가서 몸소 술잔을 잡아 가득 따라 올리고 아무 말없이 조용히 앉았다가 한참 만에 슬픈 표정으로 일어나서, 상을 거두어 수직(守直)하는 아전과 종들에게 대접하게 하셨다. 나(연암의 차남 박종채)는 마음 속으로 이상하게 생각되어 뒤에 가만히 여쭈었더니 선군은 말씀하시기를,

"얼마 전 꿈에서 서울 도성 서쪽의 오래 교유한 몇몇 사람들이 찾아와 내게 말하기를,

'자네, 산수 좋은 고장의 원이 되고서도 어찌 술자리를 마련하여 우리를 대접하지 않는가'

하는데, 잠을 깨어 가만 생각해보니 모두 이미 죽은 사람들이었다. 몹시 마음 아파서 한번

대접하는 일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예에는 없는 것이고 다만 마음이 내켜서 차린 

것일 뿐이니, 말할 것은 없다" 하셨다.  

_<역주 과정록> 박종채 짓고 김윤조 역주

[출처] 연암 박지원|작성자 강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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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문학’ 20여년만에 한글 완역 | - 연암 박지원 2018-04-14 09:36
http://blog.yes24.com/document/10299644복사Facebook 보내기 트위터 보내기

조선시대 최고의 산문작가’ 연암 박지원의 문집이 사제간의 20여년에 걸친 노력 끝에 온전히 번역됐다.

 

 한학자 고 우전 신호열 선생과 한문학자 김명호 성균관대 교수는 ‘연암집’을 우리말로 옮긴 ‘국역 연암집’ 제2권을 최근 출간했다. 고전국역기관 민족문화추진회가 전2권으로 펴내는 ‘국역 연암집’은 제2권에 이어 오는 10월쯤 제1권이 출간되면서 마무리될 예정이다. 그동안 연암의 글은 북한의 홍기문, 남한의 이익성·이가원 등에 의해 선집 형태로 번역됐으나 완역본이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국역 연암집’은 연암 사후 200년 만에 선보인 완역본이라는 점 이외에 국내 최고의 한학자와 연암 연구자의 공동작업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우전 신호열 선생(1914~93)은 생전에 고 이가원·임창순·성낙훈 선생 등과 함께 손꼽혔던 한학의 대가. 민족문화추진회 교수로 재직하며 ‘완당집’ ‘하서집’ ‘퇴계시’ 등의 국역서를 출간했으며, 이승만 정권 때에는 이대통령이 장제스 대만 총통에게 보내는 한문 편지를 기초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은 한학자였다. 공역자인 김명호 교수(52)는 ‘열하일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박지원 문학 연구’ 등의 저서를 낸 연암 연구의 권위자. 둘의 만남은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문학 박사과정에 입학하던 81년 3월쯤이었어요. 앞서 78년부터 시작된 우전 선생님의 ‘연암집’ 강독 모임에 처음 들어갔는데, 당시 문하생 가운데 제일 어렸습니다. 만득(晩得) 제자인 셈이지요.”

 

 김교수는 우전 선생의 첫 인상을 “신선 같았다”고 밝혔다. 선생의 타고난 한학 실력과 ‘학 같은 선비의 풍모’에 반한 김교수는 93년까지 우전 선생을 찾아가 ‘연암집’을 배웠다. 당시 강독회 참가자는 김교수 외에 정양완(전 정문연), 임형택·송재소(성대), 김혜숙(충북대), 정학성(인하대) 교수 등 10여명. ‘국역 연암집’은 우전 선생의 강독 모임에서 초고가 마련됐다. 당시 제자들은 선생이 구술한 내용을 노트에 옮겨 적었고, 김교수가 이를 바탕으로 연암집 번역 원고를 작성했다.

 

 사제간의 공동작업으로 출간된 ‘국역 연암집’에는 연암의 한시, 편지글, 제발(題跋·서문 및 발문), 소품체 산문, 한문소설 등이 빠짐없이 담겨 있다. 특히 198행에 달하는 장편 ‘해인사’를 비롯한 40여편의 한시가 처음 번역 소개돼 ‘시인’ 박지원의 면모를 새롭게 보여준다. 또 제주도 사람 이방익의 표류 내용을 담은 ‘서이방익사’에서는 해외 지리에 대한 연암의 해박한 지식을 접할 수 있다.

 

  역자들은 이와 함께 선집에 나타난 많은 오역을 바로 잡았다.

 

예컨대 한문소설 ‘양반전’에서 양반의 행실을 묘사한 ‘수구무과’(漱口無過)를 ‘냄새 없게 이 잘 닦고’라고 번역했다. 기존 선집에는 ‘양치질할 때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아야 한다’(홍기문 역)고 돼 있다.

김교수는 “우전 선생님이 강의할 때 ‘과’(過) 자를 ‘입냄새’라고 해석했는데, 어떤 사전에도 그런 풀이가 없어 의심을 품다가 당나라 송지문의 시화(詩話)를 읽고서 선생님의 해석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우전 선생의 한문 실력에 경탄했다.

 

또 ‘민옹전’에 나오는 ‘삼백나산’(蔘伯羅産)에서 나산을 종전의 ‘나주 산(産)’(홍기문), ‘신라 산’(이가원) 대신 전거를 밝히며 ‘영남에서 나는 것’이라고 바르게 옮겼다.

 

 1932년 출간된 박영철본 ‘연암집’을 번역 대본으로 한 ‘국역 연암집’은 국립중앙도서관본, 연세대본, 영남대본, 김택영본 등 10여종에 달하는 필사본과 활자본을 대조해 원문의 오류까지 바로잡았다.

 

서화담과 소경의 일화가 실린 ‘창애에게 답한 두번째 편지’(答蒼厓之二)의 첫 구절 ‘환타본분’(還他本分)을 ‘환수본분’(還守本分)으로 고친 것이 대표적 사례.

김교수는 “초서로 ‘守’와 ‘他’가 비슷한 데서 빚어진 잘못같다”며 ‘본분으로 돌아가 지키라’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국역 연암집’은 스승의 원숙한 번역에 제자의 한문학적 지식이 총동원된 학술 번역의 전범을 보여 준다. 특히 연암의 시문이 빠짐없이 번역, 연암 문학의 전모를 드러냈다는데 의미가 적지 않다. 연암집 번역 작업을 ‘돌아가신 스승과의 대화’에 비유한 김교수는 “20년 전에는 일방적으로 배우기만 했는데 이제는 선생님의 실수도 바로잡을 수 있게 됐다”면서 “웬만큼 연암 연구가 이뤄진 상태에서 선생님의 번역원고를 정리할 수 있게 돼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했다.

 

〈조운찬기자 sidol@kyunghyang.com

 

 

 

 

 

 

 

: 2005년 04월 12일 17:21:30 / 최종 편집: 2005년 04월 12일 20:2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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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 (4) 나가사키 | - 연암 박지원 2017-05-14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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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에서도 정성공 모자의 흔적이…

 

등록 :2017-05-11 20:03수정 :2017-05-11 20:45

 

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
(4) 나가사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94412.html#csidx2ac89d11cf013af9e710554da1aafcf

 

지난 회 요약

 

박제가(1750~1805)가 그렸다는 <연평초령의모도>(이하 의모도)는 많은 의문을 지닌 그림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정성공(1624~62)과 그의 어머니였다. 정성공은 명나라를 지키려고 만주족인 청나라에 끝까지 대항했던 인물이었다. 박제가와 정성공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러던 중, 이 그림에 중국 화가 나빙(羅聘, 1733~99)의 필봉이 가미됐을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접한다. <의모도>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사연을 간직한 그림일지도 몰랐다. 그림의 주인공 정성공은 1624년 일본 규슈의 작은 섬 히라도에서 태어났다. 당시 히라도는 네덜란드 상관이 있던 국제무역항이었다. 그래서 <의모도>에 2층의 서양식 석조 건물이 그려질 수 있었다. 수많은 외국의 무역선이 오가던 히라도에서 국제무역을 주장하던 박제가를 떠올렸다. 1630년 일곱 살의 정성공은 히라도를 떠나 아버지 정지룡이 있던 중국으로 간다.

 

 

 

독특한 옛 건물이 늘어선 데지마(出島)는 원래 육지와는 동떨어진 인공의 섬이었다. 나가사키의 오랜 시가지를 관통하는 나카시마가와(中島川)의 하구에 바다를 메우고 부채꼴 모양의 섬을 만들어 외부세계와 격리시켰다. 처음엔 포르투갈의 상인들이 데지마에 머물렀다. 잘 알려졌다시피 그들은 단순히 무역만을 위해서 이 먼 곳까지 온 것은 아니었다. 배에는 대포가 실려 있었고 선교사가 동행했다. 포교에 대한 그들의 신념은 확고했다. 일본인 신자가 늘어가는 만큼 그들에 대한 탄압도 심해졌다. 가혹한 형벌과 무거운 세금을 견디지 못한 주민들이 1637년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시마바라의 난’(島原の?)이라 불렸다. 나가사키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수만명의 사람들이 성을 점령하고 저항했지만 막부에서 보낸 진압군에 의해 무참히 도륙되었다. 이후 포르투갈의 배는 입항이 금지되었다. 대신 히라도에 있던 네덜란드 상관이 이곳 데지마로 자리를 옮겼다. 네덜란드에서 지금의 자카르타를 거쳐 중국 광저우를 잇는 기나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해상무역로의 동쪽 끝에 나가사키가 있었다. 

 

정비된 관광지가 된 데지마.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여성들과 사무라이 복장을 한 남자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신상웅
정비된 관광지가 된 데지마.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여성들과 사무라이 복장을 한 남자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 신상웅

 

#개를 안은 여인

 

데지마는 이제 잘 정비된 관광지다. 알록달록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젊은 여자들이 어디서나 사진을 찍었고 에도시대 사무라이 복장을 한 남자들은 도시 속 섬을 찾아온 사람들을 안내했다. 히라도에서 보았던 네모난 우물이 있었고 네덜란드인들이 사용했다는 동전에는 동인도회사의 마크가 선명했다. 그들이 일본으로 들여온 것은 중국산 옷감들과 사슴이나 상어 가죽, 후추와 설탕, 상아와 물소 뿔 등이었다. 술과 약품도 있었다. 그것들을 주로 일본의 은과 바꿨다. 일본 막부 입장에서 보면 데지마는 북쪽에 놓인 다리가 유일한 통로인 고립된 감옥과 같았지만 그들은 데지마를 작은 왕국처럼 여겼던 것 같았다. 하루에 두번 식사를 했고 일년에 서너번 성대한 연회를 열곤 했다. 소와 돼지를 길렀고 닭요리를 즐겼다. 작은 식물원이 있었고 포도도 심었다. 앵무새와 공작도 길렀다고 전하는데 그들이 가져온 애완용 동물에는 크고 작은 개가 많았다.

 

그림 <의모도>에는 서양식 건물만큼 눈에 띄지는 않지만 다른 그림에선 보기 힘든 특별한 장면이 있다. 바로 엄마 다가와와 정성공이 가슴에 안고 있는 작은 개다. <의모도>와 같은 그림에서 의미 없는 상징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무슨 이유로 개를 안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데지마의 전시실에는 이것과 꽤 유사한 그림이 있었다. 그림 속 여인은 네덜란드 상관장의 부인이라는 설명이었는데 그녀는 다가와와 마찬가지로 가슴에 작은 애완용 개를 안고 있었다. 사실 히라도에 머무는 동안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느냐고 자주 물어보곤 했다. 돌아온 대답은 비슷했다. ‘그들은 결코 일반인이 아니라는 것.’ 애완용 개를 기르는 것은 귀족이나 기녀에게 해당되는 경우라는 것이 중론이었다. 박제가는 <의모도>에 쓴 글에서 정성공의 엄마 다가와를 ‘일본인 종녀(宗女)’라고 했다. 그렇다면 안고 있는 개를 통해 그들의 신분을 표현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박제가도 언급한 나가사키
17세기 조성한 인공섬 데지마
당시 각국 문화 용광로 구실

 

강아지 안은 정성공의 어머니
박물관서 비슷한 그림도 발견
정성공 모습 본뜬 등 축제행렬

 

데지마의 전시실에 걸린 그림. 네덜란드 상관장의 부인이라는데, 품에 개를 안고 있다. 사진 신상웅
데지마의 전시실에 걸린 그림. 네덜란드 상관장의 부인이라는데, 품에 개를 안고 있다. 사진 신상웅

 

#박제가와 박지원

 

박제가와 교류를 나누었던 백탑파들 중에 이곳 나가사키를 언급한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그중 내 주목을 끈 글은 연암 박지원이 쓴 <허생전>이라는 짧은 소설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밤낮으로 책만 읽던 가난한 선비 허생에게 배가 고픈 아내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줘!’ 허생은 그 길로 변씨라는 부자에게 돈을 빌려 장사에 나선다. 큰돈을 번 허생은 변산반도의 도적들을 이끌고 무인도에 정착하지만 자신의 포부와는 달라 그들을 남겨두고 뭍으로 나온다. 때는 오랑캐 만주족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해가던 절체절명의 시기. 부자 변씨가 어영청 대장 이완과 허생을 찾아와 북벌의 계책을 구한다. 그러나 허생의 제안에 모두 손사래를 치는 이완. 실질보다는 고루한 예법에 얽매인 사대부의 위선에 일갈을 하고 홀연히 사라진 의문의 남자 허생.

 

그런데 소설 속 허생이 도적들을 이끌고 찾아간 무인도가 하필이면 나가사키와 멀지 않았던 것. 섬에서 수확한 농작물을 내다 팔던 곳도 다름 아닌 나가사키였다. 박지원이 ‘삼십일만호가 살던 큰 고을’이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적어가며 <허생전>에 나가사키를 등장시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실 박제가의 <북학의>에도 나가사키가 언급된다. 그것도 외국과의 국제무역을 통해 조선의 경제를 부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글에서다. <북학의>의 서문을 쓴 사람이 바로 박지원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열하일기>와 <북학의>가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다’고 썼을 정도로 두 사람의 생각은 가까웠다. 그런데 <허생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정성공이 군사력을 모아 청나라에 대항하던 시기와 겹친다. 박지원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하필 왜 그 시기였을까. <허생전>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허생은 묵적골에 살았다.’ 박제가의 집도 남산 아래 묵적골에 있었다. 그래서 혹시 소설 속 주인공 허생이 박제가를 모델로 한 것은 아닐까 하는 뜬금없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것이다.

 

나가사키 거리에는 온통 붉은 등이 내걸렸다. 말로만 듣던 등 축제 행렬에 바다의 왕이라 불리던 정성공이 거짓말처럼 서있었다. 사진 신상웅
나가사키 거리에는 온통 붉은 등이 내걸렸다. 말로만 듣던 등 축제 행렬에 바다의 왕이라 불리던 정성공이 거짓말처럼 서있었다. 사진 신상웅

 

#‘문화의 용광로’ 나가사키

 

데지마가 네덜란드인의 거주지였다면 현재 차이나타운이 있는 시가지 뒤편 언덕에 중국인들이 모여 살았다. 단순히 상인들 몇몇이 아니었다. 인구가 많아서 흡사 중국의 마을 하나를 통째로 옮겨온 듯했다. 그들 대부분은 중국의 남쪽 푸젠성(福建省) 출신이었는데 그곳은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의 세력권에 속한 곳이기도 했다. 사실 정지룡뿐만 아니라 당시 바다를 오가던 무역상인들은 해적과 다름없었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확보해 비공식적인 정부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들의 무역선에 실려 기회의 땅 나가사키로 중국인들이 모여들었다. 박제가 역시 ‘일본이 중국과 직접 통상한 이후로 새로 교역한 나라가 30여 개국에 이르렀으며 천하의 진귀한 물건들과 중국의 골동품과 서화가 나가사키로 몰려들고 있다’고 적을 정도였다. 그렇게 네덜란드와 중국에 의해 촉발된 각국의 문화가 나가사키란 용광로로 흘러들고 있었다.

 

나가사키 거리에는 온통 붉은 등이 내걸렸다. 말로만 듣던 ‘등 축제’(Lantern Festival)가 열리고 있는 줄은 까맣게 몰랐었다. 축제의 중심은 역시나 차이나타운. 좁은 거리로 몰려든 사람들은 제자리걸음이었다. 잘 익은 사과처럼 탐스런 붉은 등이 산 아래 절까지 이어졌다. 유명 맛집 앞은 그야말로 인산인해. 기다리는 줄과 오고 가려는 사람들이 뒤엉켜 이리 끊기고 저리 몰려도 그저 즐거운 얼굴이었다. 인파를 뚫고 시장에 들어선 내 앞을 가로막은 것은 색색의 빛을 뿜어내는 정성공이었다. 기린과 용과 관우와 공자가 늘어선 등 행렬에 바다의 왕이라 불리던 정성공이 거짓말처럼 나가사키 거리에 서 있었다.

 

<나가사키 고판화> 중 데지마. 나가사키 역사박물관 소장. 작가 미상.
<나가사키 고판화> 중 데지마. 나가사키 역사박물관 소장. 작가 미상.

 

일곱 살 정성공이 어미 곁을 떠나는 것으로 <의모도>와 다가와의 인연은 끝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애비 없이 혼자 낳아 애지중지 기른 아들을 먼 타국으로 보내야만 했던 그녀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눈물을 쏟는 한이 있더라도 권력과 부를 거머쥔 아버지 정지룡 곁으로 보내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이라고 판단했었는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일본 땅에서 정성공은 혼혈인이었다. 제목으로 본다면 어린 정성공이 <의모도>의 주인공이었지만 그림 자체로만 판단하면 오히려 엄마 다가와가 <의모도>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인물의 위치나 묘사 등 모든 면에서 그랬다. 아직은 그림 속에 그녀에 대한 못다 한 이야기가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10여년 전 히라도에서 어린 아들을 떠나보내야만 했던 다가와는 이곳 나가사키에서 배를 타고 아들 성공이 살고 있는 푸젠성 취안저우(泉州)로 떠난다. 1645년 4월의 일이었다.

 

신상웅 염색가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94412.html#csidx6a3332e3a9431c6941efb2a58f13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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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린 ‘바다의 길’ | - 연암 박지원 2017-04-2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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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새 시대의 시작을 알린 ‘바다의 길’

 

 등록 :2017-04-20 22:16수정 :2017-04-20 22:26

 

 

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
(3) 히라도
지난회 요약

 

박제가(1750~1805)가 그렸다는 그림 <연평초령의모도>(이하 의모도). 그림을 처음 접하고 20년 동안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그림 속의 주인공은 정성공(1624~62)과 그의 어머니였다. 정성공은 명나라를 지키려고 만주족인 청나라에 끝까지 대항했던 인물이다. 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박제가가 왜 명의 충신 정성공을 그렸을까. 게다가 그림은 박제가의 것이라고 하기 힘든 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 그림에 중국 화가 나빙(羅聘, 1733~99)의 필봉이 가미됐다는 주장을 접했다. ‘읽는 그림’ <의모도>의 실마리는 그림 안에 있으리라. 오랜 의문을 품고 마침내 그의 발자취를 따라 나선다. 그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서울 광통교와 탑골공원의 백탑…. 세상의 지식이 모인 그곳에서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그림의 무대가 된 일본 히라도로 건너갔다.

 

 

400년 전 일본의 첫 국제무역항 히라도에 새로 복원된 2층의 네덜란드 상관. 사진 신상웅
400년 전 일본의 첫 국제무역항 히라도에 새로 복원된 2층의 네덜란드 상관. 사진 신상웅

 

의문은 컸어도 해답은 의외로 쉽게 다가왔다. 히라도는 작고 조용한 항구도시였고 골목마다 눈에 띄지 않는 팻말들이 유난히 많았다. 긴팔원숭이처럼 가지를 땅으로 늘어뜨린 늙은 소철나무가 있었고 고색창연한 절 뒤로 교회의 뾰족한 지붕이 보였다. 풍경이 긴장을 유발했다. 어떤 것들은 유물이라 부르기도 어색할 정도였는데 볼품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일상과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다는 말이었다. 도시의 가운데에 돌로 만든 긴 무지개다리가 놓였는데 그것이 오래전 서양의 토목기술로 만들어졌다는 말에 좀 의아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다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중국 명나라 상인의 집터가 있었고 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무역을 위해 이곳에 머물던 영국인들의 상관(商館) 유적지를 발견하고 나서야 나는 걸음을 멈췄다. 고요한 골목 어디선가 이국의 사내들이 불쑥 얼굴을 내밀 것만 같았다. 푸른 이끼에 쌓인 육각형의 중국풍 우물이 있었고 골목이 바다와 만나는 모퉁이에 새로 복원된 2층의 네덜란드 상관이 길을 막았다. 그러니까 히라도는 대략 4백 년 전 일본에서 처음 문을 연 국제무역항이었던 것.

 

<의모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 대부분은 서양식 건물에 집중했고 투시 원근법을 이야기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선에선 처음이었으니까. 이채로운 건물처럼 서양에서 건너온 낯선 기법이었고 그 바탕엔 과학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빠뜨리고 있었는데 바로 왜 <의모도>에 ‘서양식’ 건물을 그려야 했느냐는 물음이었다. 원근법은 대상을 그리는 방법이었지 그 자체가 그림의 주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정성공의 어린 시절 그림에 난데없이, 그동안 동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석조기둥의 2층집이 등장해야만 했던 것일까.

 

정성공이 살았던 곳은 히라도에서 남쪽으로 10㎞가 좀 못 되는 가와우치(川內)라는 작은 어촌이었다. 정성공기념관은 정성공과 엄마 다가와가 살던 집터였다. 기념관 앞의 조각상. 사진 신상웅
정성공이 살았던 곳은 히라도에서 남쪽으로 10㎞가 좀 못 되는 가와우치(川內)라는 작은 어촌이었다. 정성공기념관은 정성공과 엄마 다가와가 살던 집터였다. 기념관 앞의 조각상. 사진 신상웅
히라도의 거리를 천천히 걸으면 그 이유가 저절로 눈에 들어온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신라시대 김유신의 어떤 역사적 사건을 그림으로 옮긴다고 치자. 배경은 경주다. 그렇다면 화가는 경주를 어떻게 한눈에 보여줄 수 있을까. 경주의 랜드마크를 찾아라. 그런데 첨성대는 되고 석굴암은 안 된다. 석굴암은 김유신이 죽고 나서 만들어진 건물이기 때문이다. <의모도>의 배경은 ‘일본의 히라도’다. 그래서 멀리 눈 덮인 후지산은 일본을, ‘서양식’ 건물은 히라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히라도는 일본에서 처음 서양식 건물이 세워진 곳이었으니까. 네덜란드 상관은 정성공이 히라도에 살았던 시기와 정확히 겹친다. <의모도>, 그냥 상상력만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림으로 들어가는 문이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최초의 국제무역항이라니,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항구가 좀 근사해지기 시작했다.

 

‘의모도’ 그려진 2층집 건물은
히라도 상징하는 서양식 건축

 

그림 주인공 정성공과 어머니
정성공 기념관은 그들의 집터

 

중국과 서양 배 오가던 바닷길
날치 먹으며 박제가를 떠올리다

 

정성공에 관련된 재료들은 이곳에 많았다. <의모도>에 쓰인 내용처럼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은 중국의 무역선을 따라 1622년 이곳 히라도에 온다. 히라도의 번주(藩主)가 그를 아껴 신하의 딸 다가와(田川)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1624년 정성공이 태어났을 때 그는 이곳에 없었다. 정지룡은 고향 중국의 푸젠성(福建省)으로 돌아가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무역상인으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정성공은 엄마 다가와와 함께 섬에서 살았다. 여느 아이들처럼 검술을 익혔고 유교식 교육을 받았다. 히라도를 오가는 정지룡의 무역선을 통해 양측의 소식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히라도에선 ‘아고(あご)’라 불리는 날치. 사진 신상웅
히라도에선 ‘아고(あご)’라 불리는 날치. 사진 신상웅

 

승객은 나와 중년의 맹인과 커다란 안내견이 전부였다. 버스는 해안가를 따라 달렸다. 정성공이 살았던 곳은 히라도에서 남쪽으로 10㎞가 좀 못 되는 가와우치(川內)라는 작은 어촌이었다. 고기잡이배들이 마을 앞바다에 정박해 있었고 어디나 그렇듯 마을 입구에는 오래된 신사가 숲속에 자리했다. 정성공기념관은 마을 제일 안쪽, 그가 엄마와 살던 집터였다. 혹시 <의모도>에 그려진 서양식 석조건물이 이곳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뜬금없는 생각을 해 보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건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화가의 상상력이었을 것이다. 집터는 양지라 눈이 부셨고 껍질이 붉고 단단한 나무가 텅 빈 마당에 있었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돌아섰다. 멀리서 바다가 다가왔다.

 

바다였다. 저 먼바다를 건너 중국과 서양의 배가 이곳으로 왔다. 육지의 길이 아닌 바다의 길, 그건 아마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징조였을 것이다. 정성공은 집이 아닌 이곳 바닷가에서 태어났다. 조개를 주우러 나갔던 엄마 다가와가 별안간 진통을 느껴 바닷가 바위 옆에서 그를 낳았다. 정지룡은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에 기뻐 선물을 보냈다. 붉은 천으로 싸인 작은 목조상이 기념관 안에 있었다. 바로 바다의 여신 마조상(?祖像)이었다. 바다에 삶을 걸었던 그들에게 바다의 바람과 파도를 관장하는 마조여신은 절대적인 신앙이었다. 땅의 길이 그렇듯 바다의 길도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다. 그 길이 있어 정성공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바다가 낳은 인물인 셈이었다.

 

<의모도>를 보면 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림의 제목처럼 아비는 떠나고 엄마와 둘이 살아가는 정성공의 어린 시절이다. 그렇다면 화가는 일부러라도 친밀한 상황에 있는 두 사람을 그리는 것이 마땅했다. 적어도 어린 아들 성공을 품에 안고 있는 엄마 다가와 정도. 그런데 왜 1층과 2층에 따로 떨어져 서로 다른 곳을 보는 두 사람을 그린 것일까. 박제가의 글이 아니라면 엄마와 아들 사이라는 걸 누가 짐작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 눈에 <의모도>는 ‘엄마에 의지해 살고 있는 어린 성공’이 아니라 ‘이별을 앞둔 어미와 자식’으로 읽히기도 했다. 누구는 2층의 정성공이 후지산을 바라보는 것이라 했지만 나는 더 먼 서쪽, 곧 아비가 있는 중국으로 떠나야 하는 어린 성공을 그린 듯했다. 역사적 사실이 그랬다. 1630년, 일곱 살의 정성공은 어미 다가와의 곁을 떠나 중국으로 갔다.

 

연평초령의모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평초령의모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히라도에 머무는 동안 저녁이면 늘 작은 ‘파티’가 열렸다. 숙소 주인 구로의 친구들이 오거나 숙박 손님들이 합세하기도 했다. 이야기는 그야말로 종횡무진. 그중에 얀(Jan)도 있었다. 키가 커 늘 문틀 앞에서 움찔 하는 그는 시청에 근무하는 네덜란드인이었다. 그를 보면 참 어이없고 신기했다. 나는 종종 1653년 제주도에 표류했던 하멜과 일행들을 떠올렸다. 또 그들보다 먼저 조선에 머물던 벨테브레이, 한국 이름 박연도 있었다. 조선의 관리들은 그들을 가두거나 희롱했을 뿐 교역이나 교류나 새로운 시대에 대해선 눈을 감았다. 박연은 조선에 남겨졌고 조선을 탈출한 하멜 일행의 배가 고난 끝에 닿은 곳도 이곳 히라도였다. 그들은 1640년 히라도 항구가 폐쇄된 뒤 새로 열린 무역항 나가사키(長崎)로 가던 길이었다. 그렇게 얀은 종종 나의 시간을 수백 년 전으로 되돌리곤 했다.

 

구로가 선물로 들어온 술을 내왔다. 그 양조장도 수백 년의 역사가 있었다. 맛있었다. 마시다가 나는 혹시 히라도 사람들이 즐겨 먹는 안주가 따로 있느냐고, 이 술과 어울릴 만한 것이 있을 것 같다고 그를 보챘다. 메구 짱이 손뼉을 치며 일어났다. 말린 날치였다. 아가미 아래 긴 지느러미가 제 몸만 했다. ‘도비우오’(トビウオ)라는 표준어 대신 이곳 사람들은 ‘아고’(あご)라 불렀다. 화로에 올려 천천히 구웠다. 구로가 익은 ‘아고’를 내밀었다. ‘어떻게 먹는 거야?’ 말없이 눈빛으로 물었다. 그는 머리부터 꼬리까지 남김없이 먹었다. 나는 투명한 지느러미를 제거하다가, 때론 희망 같고 상처 같은 날치의 지느러미를 보다가 문득 박제가를 떠올렸다. 어쩌면 정작 이곳에 왔어야 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였다.

 

신상웅 염색가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91675.html#csidxda8bfff28a368cca351c8186875c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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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여행 (2) 박제가와 그의 친구들 | - 연암 박지원 2017-04-08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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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통진의 농가에서 쓰다

 

등록 :2017-04-06 20:31수정 :2017-04-06 20:42

 

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여행
(2) 박제가와 그의 친구들

본래의 자리에서 북쪽으로 옮겨져 복원된 광통교(廣通橋)는 그대로 서울의 역사다.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중심이었고 도성 안에서 가장 컸던 다리였다. 광통교 난간에 서서 돌짐승의 깨진 다리를 본다. 저것은 사자일까. 사진 신상웅
본래의 자리에서 북쪽으로 옮겨져 복원된 광통교(廣通橋)는 그대로 서울의 역사다.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중심이었고 도성 안에서 가장 컸던 다리였다. 광통교 난간에 서서 돌짐승의 깨진 다리를 본다. 저것은 사자일까. 사진 신상웅
 

지난회 요약

 

오랜 시간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이 있다. 박제가(1750~1805)가 그렸다는 그림 <연평초령의모도>(이하 의모도)도 그랬다. 하지만 그림을 처음 접하고 20년 동안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대상을 그리는 기법, 화면을 지배하는 분위기도 그의 것이라고 하기 힘든 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이 그림에 중국 화가 나빙(羅聘, 1733~99)의 필봉이 가미됐다는 주장을 접했다. 자세히 보게 된 <의모도>는 ‘읽는 그림’에 가까웠다. 의문의 실마리 역시 그림 안에 있으리라.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비로소 그림 <의모도>와 본격적인 대화를 나누어야 할 때가 온 듯했다.

 

 

어디일까. 남산순환도로를 내려와 필동주민센터 옆 빈터에 서서 지도를 본다.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여기 산자락 어딘가에 십대의 박제가가 살던 집이 있었다. 어느 봄날, ‘책에 미친 바보’ 이덕무는 냇가를 따라 걸어가던 한 청년에게 눈길이 머문다. 이마가 훤칠하고 낯빛이 환한 남자였다. 흰 겹옷에 초록 허리띠를 두른 청년도 그를 쳐다봤다. 그가 박제가라는 것을 이덕무는 한눈에 알아봤다. 둘은 만나자마자 마음이 통했다. 즐거움을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박제가가 문집을 만들자 책의 서문에, ‘박제가의 시는 담백하고 시원스러운 것이 그 사람과 꼭 닮았다’고 책만 보는 서생 이덕무는 적었다. 이제는 어느 땅속을 흐르고 있는지 알 길 없는 그 냇가가 두 사람이 처음 만나던 자리였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계곡을 따라 저 아래 청계천으로 갔다.

 

# 광통교와 박제가, 이덕무

 

본래의 자리에서 서쪽으로 옮겨져 복원된 광통교(廣通橋)는 그대로 서울의 역사다.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대로의 중심이었고 도성 안에서 가장 컸던 다리였다. 그러나 시절은 늙은 돌다리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1910년 도로 밑에 묻혀 수십년 오물 냄새를 맡다 2005년 청계천 복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광통교 아래로 내려간다. 광통교는 내겐 작은 야외 조각 전시장이기도 하다. 단단한 화강암을 쪼아 새긴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바닥에 쌓인 모래를 걷어내고는 그 사실을 애써 새긴 글이 지금도 기둥에 선명하다.

 

당시 서울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 바로 광통교 일대였다. 다리 주변엔 그림을 팔던 가게도 있었다고 전한다. 바야흐로 양반들끼리 방안에서 감상하던 그림들이 시장으로 나와 상품이 되기 시작했다. 박제가의 친구들도 이 다리로 자주 몰려와 술을 마시고 달빛에 젖었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 속에 사라진 개를 부르던 술에 취한 모범생 이덕무가 있었고 거위를 희롱하던 유득공이 있었다. 무얼 하든 그들은 좀 유별나 보였다.

 

박제가가 그렸다는 ‘의모도’
그의 발자취 따라 나선 길

 

광통교와 탑골공원의 백탑
박제도 이덕무...친구들 함께

 

북경서 온 박제가 집필에 몰두
세상 지식 모인 곳서 무엇 느꼈나

 

광통교 난간에 서서 돌짐승의 깨진 다리를 본다. 저것은 사자일까. 박제가는 <의모도>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는 정성공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평생토록 우정을 나눴던 이덕무의 글에는 정성공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있었다. 그는 정성공이 군대를 이끌고 청나라가 점령한 도시를 공격한 일과 이후 대만을 점거한 네덜란드인을 몰아내고 그곳에 정권을 세우게 된 사실도 적었다. 박제가도 이런저런 책을 보았고 어디서든 정성공에 대한 정보를 들었을 것이다. 모두 그가 격렬하게 싸우던 전성기에 해당하는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의모도>는 그런 것들과는 동떨어진 그의 어린 시절을 그리고 있었다.

 

이제는 백탑이란 아리따운 이름보다 검정색에 가까운 처량한 모습으로 유리 안에 갇혀있지만 내 눈엔 여전히 빛나는 ‘백탑’이다. 백탑파(실학파)가 남긴 글도 글이려니와 그들의 행위 속에는 어떤 진솔한 떨림이 있었다. 사진 신상웅
이제는 백탑이란 아리따운 이름보다 검정색에 가까운 처량한 모습으로 유리 안에 갇혀있지만 내 눈엔 여전히 빛나는 ‘백탑’이다. 백탑파(실학파)가 남긴 글도 글이려니와 그들의 행위 속에는 어떤 진솔한 떨림이 있었다. 사진 신상웅

 

# 백탑을 두고 어울린 그들

 

박제가가 자주 어울렸던 사람들, 흔히 실학파라 불리는 그들을 나는 백탑파라 부르기를 선호한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 내 눈엔 가장 그들다워 보였다. 오늘처럼 광통교를 지나 이곳 탑골공원에 이르면 이전 시대와는 전혀 다른 변화의 물결에 누구보다 먼저 예민하게 반응하던 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 중에 박제가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저 백탑을 가운데 두고 먹고 쓰고 마시고 뒹굴었다. 이제는 백탑이란 아리따운 이름보다 검정색에 가까운 처량한 모습으로 유리 안에 갇혀있지만 내 눈엔 여전히 빛나는 ‘백탑’이다. 그들이 남긴 글도 글이려니와 그들의 행위 속에는 어떤 진솔한 떨림이 있었다. 그게 나를 매료시켰다. 서로 간에 나이를 잊은 사귐을 망년지교(忘年之交)라고 했다. ‘나이는 잊자.’ 그랬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감에 살아온 시간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당파도 상관없었다. 2백 수십 년 전 하늘 위를 높이 솟구친 저 백탑을 바라보며 그들은 무슨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일까.

 

종묘 앞을 지나 혜화동을 거쳐 낙산에 오른다. 박제가는 남산자락을 떠나 낙산 아래로 이사를 왔다. 저 아래 방송통신대학 앞 어디쯤 장경교(長慶橋)가 있었고 다리에서 서쪽으로 십여 발짝 떨어진, ‘능금나무 두 그루’가 있던 곳이 그의 집이었다. 혜화문을 지나온 사람들과 물건들은 모두 다리 앞을 지났다. 광통교보다는 못했지만 이곳도 제법 술렁이는 상가가 늘어섰다. 복사꽃이 피는 봄이면 박제가는 거리에 나가 쑥과 민물복어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는 음식과 요리를 남다르게 여겼던 것도 같다.

 

낙산 마루에 서자 멀리서 인왕산이 다가왔고 북한산의 끝자락인 백악산이, 남쪽에는 안개에 가린 남산이 있었다. 그렇게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한복판에 저 홀로 우뚝하던 것이 백탑이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죽순이 삐죽 솟은 것’ 같다던 백탑은 이제 빌딩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장경교도 흙 속에 매몰되었을까. 박제가가 ‘그윽하고 아름답기가 서울에서 으뜸’이라던 그 다리가 보고 싶었다.

 

 

# 틀어박혀 글쓰기를 마치다

 

도성을 따라 걷는다. 성벽은 쌓은 시기에 따라 색과 다듬은 모양이 달랐다. 그렇게 돌의 벽에 시대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그토록 바라던 북경을 다녀온 뒤 박제가는 집을 나와 광흥나루로 갔다.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새벽배로 강물을 따라 내려가 운양나루에 내렸다. 지금은 철새도래지가 되어 무성한 억새밭에 전망대가 서있는 곳. 그는 자주 그 나루로 갔다. 시골집이 있던 통진(通津)으로 가는 길은 늘 그랬을 것이다. 서른의 그는 북경에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꼈던 모든 것들을 싸들고 가서 방문을 닫아걸고 썼다. ‘지친 여행을 마치고 농가에 앉아 글 쓰는 시름만 안고 있었다.’ 때론 울적했고 때론 열기가 치솟았다. 낙산에 서서 서해로 빠져나가는 한강을 바라보면 그의 뒷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광통교 다리처럼 낙산 성벽의 구석에도 어느 석수가 새긴 글자들이 있었다. 그들이 저렇게 시간을 돌에 새기듯 박제가의 시간도 성벽 어딘가에 스며있을 것만 같았다.

 

낙산 마루에 서자 멀리서 인왕산이 다가왔고 북한산의 끝자락인 백악산이, 남쪽에는 안개에 가린 남산이 있었다. 그렇게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한복판에 저 홀로 우뚝하던 것이 백탑이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죽순이 삐죽 솟은 것’ 같다던 백탑은 이제 빌딩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사진 신상웅
낙산 마루에 서자 멀리서 인왕산이 다가왔고 북한산의 끝자락인 백악산이, 남쪽에는 안개에 가린 남산이 있었다. 그렇게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한복판에 저 홀로 우뚝하던 것이 백탑이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죽순이 삐죽 솟은 것’ 같다던 백탑은 이제 빌딩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사진 신상웅

 

그가 북경을 다녀와 바라보던 통진의 바다는 더 이상 이전의 바다가 아니었다. 북경에서 바라본 현실은 그의 삶을 밑바닥부터 뒤흔들었다. 세상은 요동의 들판처럼 넓고 또 넓었다. 대륙을 차지한 만주족 청나라는 승승장구했고 주변국들은 모두 그 앞에서 쩔쩔맸다. 그들의 천하였고 세상의 지식은 북경으로 모였다 흩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저 먼 바다 끝 어딘가에서 수많은 것들이 오고 가고 있다는 것을 박제가는 알고 있었다. 새로운 물결이었다. 자신과 조선이 그 세상에서 소외되는 것을 그는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글쓰기를 마친 박제가는 서문 끝에 이렇게 적었다.

 

‘비 내리는 통진의 농가에서 쓰다.’

 

나는 이 구절에 오래 머물렀다. 그가 있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저 먼 바다로 떠나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그가 보이는 듯했다. 그 간절함을 누군가는 지지하기를 바랐다. <의모도>에는 정성공과 엄마의 사연만이 아니라 좀 더 긴 이야기가 그림 밖에 있었다. 그림은 때론 스스로를 증명하기도 한다. <의모도>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그림이었다. 화가는 그런 사실을 근거로 자신의 경험과 상상력을 녹여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다. 그림의 배경이자 정성공이 태어난 곳은 일본 규슈(九州) 서쪽의 작은 섬 히라도(平戶)였다. 그리로 가야 했다.

 

글·사진 신상웅 염색가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89691.html#csidxcbd091478e09274b27c26c32ed9e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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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 (1) 들어가며 | - 연암 박지원 2017-04-08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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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초령의모도’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등록 :2017-03-23 20:02수정 :2017-03-27 13:37

 

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 (1) 들어가며 

 

 

신상웅의 미스터리 그림기행’을 15회(격주) 연재한다. 글쓴이 신상웅은 1968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한 뒤 고향으로 돌아와 쪽을 길러 염색을 하고 무늬를 넣은 화포를 만든다. 2016년 서울과 청주에서 두 번의 전시회를 열었고 동아시아 쪽빛의 현장을 찾아 떠난 책 <쪽빛으로 난 길>(마음산책)을 펴냈다. 몇 년째 그림 ‘연평초령의모도’에 관련된 나라와 지역을 찾아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 편집자주

 

 

오랜 시간 내게 말을 걸어오는 그림이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유명한 화가의 그림도 아니고 뛰어난 예술성을 뽐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 눈엔 다른 어느 그림보다도 많은 사연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떤 그림은 짧은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매일매일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도 있다. 그림이 가진 마술이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그림 한 점이 바로 그런 경우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을 담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책 <북학의>(北學議)를 쓴 바로 그 사람, 박제가가 그렸다는 이 그림의 제목은 <연평초령의모도>(延平髫齡依母圖·이하 의모도)다. ‘어린 연평이 엄마에게 의지해서 살다’ 쯤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연평’은 정성공이라는 좀 특별한 인물을 부르는 여러 호칭 중 하나다.

 

연평초령의모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연평초령의모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가 그렸다는 그림 몇 점이 지금도 전해진다. 직업 화가의 그림이 아니라 취미나 심심풀이로 붓을 잡았던 당시 문인들의 흔한 그림들과 다르지 않았다. 물고기나 꿩을 그렸고 소를 탄 목동과 별 특징 없는 산수화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전문분야는 글이지 그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의모도>는 좀 달라 보였다.

 

20년이 더 지났어도 이 그림을 처음 만나던 순간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흑백의 흐릿한 도판이었지만 박제가의 그림 <의모도>는 여러모로 눈에 띄는 그림이었다. 그림 위에 박제가의 이름이 쓰여 있었지만 한국회화사에서는 보기 드문 이채로운 형식으로 평가되었다. 그래서 <의모도>는 서양의 원근법이 조선 화단에 처음 도입된 사례 중 하나로 소개되기도 했다. 당시로 보면 혁신적인 주장을 펼쳤던 박제가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시대를 앞서간 그림. 그럴듯했다.

 

이전의 그림과는 확연히 다른 서양풍의 그림이었지만 나는 스타일의 차이만이 아니라 작가인 박제가에게 더 눈이 쏠렸다. 이상했다. 그의 이름이 분명한데도 나는 그가 그렸다는 사실에 얼마간 의심이 일었다. 당장 확실한 증거를 내밀 수는 없었지만 내 눈엔 일반적인 문인의 솜씨가 아닌, 오랜 기간 훈련을 거친 전문화가의 붓질이 군데군데 보였기 때문이었다. 뭔가 이상했다. 대상을 그리는 기법뿐만이 아니었다. 화면을 지배하는 분위기도 그랬다. 하나의 그림 안에 이질적인 무엇이 섞여 있었다. 그가 썼다는 화제의 내용도 또 다른 의문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명나라 말엽에 정지룡이 일본에서 장가들어 아들 성공을 낳았다. 지룡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성공은 어머니와 함께 일본에서 살았다. 우리나라 최씨(崔氏)가 예술로 일본에서 노닐다가 이를 위해 그림을 그리고 초고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제 최씨는 없고 그 초고가 내 선생님 댁에 남아 있어 이를 보고 그렸다. 붉은 옷을 입고 단정하게 앉은 사람은 지룡의 처인 일본인 종녀(宗女)다. 머리카락을 풀어 헤친 채 칼을 차고 놀고 있는 아이가 성공이다. 박제가 그리고 적는다.’

 

 

그림의 주인공 정성공(鄭成功, 1624~62)은 쓰러지기 직전의 명나라 황실을 일으켜 세우고자 만주족인 청나라에 끝까지 대항했던 인물이다. 그는 중국 남쪽 해안을 근거지로 싸우다가 결국 청의 군대에 밀려 대만으로 물러나고 그곳에서 죽는다. 그러니까 당시 청의 입장에서 보면 정성공은 자신들에게 무력으로 저항하던 골칫거리이자 적대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셈이다. 그런데 왜 그런 인물을 소재로 박제가가 그림을 그린 것일까. 당시는 청나라의 정치와 문화가 가장 융성하던 시기였다고 말해진다. 그래서 이를 배워야 한다고 누구보다 앞서서 주장했던 사람이 박제가였다. 그 탓에 욕도 먹고 손가락질도 당했다. 오랑캐를 배우라니. 그런 박제가가 정성공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에는 마땅한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았다.

 

박제가(1750~1805).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로 4차례 중국을 다녀왔고 <북학의>(1778·정조2년)로 유명하다. 그는 ‘중국을 배우자’고 주장하며 강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박제가(1750~1805).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로 4차례 중국을 다녀왔고 <북학의>(1778·정조2년)로 유명하다. 그는 ‘중국을 배우자’고 주장하며 강한 개혁 의지를 나타냈다. <한겨레> 자료사진

 

그 뒤로도 <의모도>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지만 원화를 볼 방법도 없었고 그림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찾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조선에 도입된 최초의 서양화풍의 그림이라거나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을 잇는 국제적인 내용의 그림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답답했다. 어느 날 일본에 소장돼 있던 이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들어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원화를 볼 수만 있다면 그림 <의모도>의 진실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회는 오지 않았고 그저 막연한 의구심에 마음만 애가 탔다. 다시 내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미술사학자 이동주의 짤막한 글이었다.

 

 

‘박제가의 작품으로 전하는 <정성공초령의모도>는 진부에 대하여 물의가 분분한 작품이나, 나빙의 필봉이 가미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면이 있다.’(이동주, <한국회화소사>, 범우사, 1996.)

 

 

짧은 내용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의견에 대한 이유를 따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빙(羅聘, 1733~99)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박제가는 사신단의 일원으로 북경에 4차례 다녀왔다. 1778년이 처음이었고 1790년 여름과 겨울의 연이은 북경 행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 중에 나빙이 있었다. 그는 제법 이름난 화가였다. 나빙은 당시 유명한 문인들뿐만 아니라 고위 관직에 있던 자들과도 친분이 각별했다. 길지 않은 만남이었지만 서로간의 사귐이 깊었는지 나빙은 박제가와 헤어지면서 초상화와 매화그림 한 폭을 그려주었다. 몇 통의 편지글도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북경에서 만나는 동안 무슨 대화를 나눴던 것일까. 그 대화 속에 혹시 정성공에 대한 은밀한 이야기도 있었던 것일까. 만약 그의 도움이 있었다면 <의모도> 탄생의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질 것도 같았다. 그림은 정말 두 사람의 공동작품일까.

 

박제가가 그렸다는 ‘의모도’
서양풍에 전문화가 느낌 뚜렷

 

청나라 배워야한다 했던 박제가
왜 청에 맞선 정성공 그렸을까

 

이동주·정민 교수도 의문 제기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사실일까

 

그렇게 나빙과 박제가의 만남과 교류에 대한 궁금증이 더해가는 중에 <의모도>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문학동네, 2014)에서 지은이 정민 한양대 교수(국문학과)는 이 그림이 박제가가 그린 것이 아니라고 했다. 글씨도 그의 것이 아니며 그림 상단에 첨부된 청나라 말의 학자 초순(焦循, 1763~1820)의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림 아래에 찍힌 수장인의 도장도 위작이라는 것이었다. 결론은 이랬다. ‘누가 그렸는지 알 길이 없는 그림 외에 나머지는 다 가짜다.’ 다만 지은이는 화제의 내용 중 ‘최씨’(崔氏)를 언급한 대목이 아무래도 걸린다고 했다. 여기서 최씨는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조선시대 괴짜 화가 최북(崔北, 1712~86?)을 말했다. 그는 1748년 통신사의 일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기록이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그렇다면 <의모도>는 박제가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말과 같았다. 오랫동안 이 그림에 의문을 품어온 내게는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결말이었다. 좀 억울했다. 그림에 쓰인 글씨가 박제가의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그의 주장대로 <의모도>의 글씨와 도장 모두 위작이라 해도 문제는 여전해 보였다. 바로 누가 그렸는지 모르는 그림 때문이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이 그림 <의모도>를 그리고 박제가의 이름을 빌렸다면 목적은 경제적인 이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돈을 목적으로 했다면 굳이 문제 생길 것이 자명한 정성공을 소재로 그림을 그릴 이유가 있었을까. 차라리 사군자나 산수화를 한 폭 그리고 그 위에 박제가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린 정성공의 일본 이야기라니.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다행히 <의모도>의 파일을 구할 수 있었다. 흑백의 작은 도판으로만 보다가 실물에 가까운 원색의 그림을 마주하니 감개무량이었다. 실로 수십년 만에 만나는 친구 같았다. 박제가의 글씨도, 나중에 보태진 초순의 글씨와 수장인의 도장도 눈에서 지웠다. 오로지 그림만 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귀를 기울였다. 구석구석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부분을 살폈고 먼발치에서 그림이 말하는 특별한 순간이 오기를 낚시꾼처럼 기다렸다. 긴 시간이었다. 드디어 그림으로부터 내게로 무언가가 건너오기 시작했다.

 

염색가 신상웅. 마음산책 제공
염색가 신상웅. 마음산책 제공
<의모도>는 예상보다 복잡했고 알 수 없는 상징들로 넘쳤다. 모호한 상징뿐만이 아니었다. 조선과 중국 혹은 일본의 서로 다른 그림 스타일이 그 안에 혼재했다. 박제가가 썼다는 화제의 내용과 밀접하게 연관되는, 그의 글이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었다. 책만 읽는 게 아니었다. <의모도>는 ‘읽는 그림’에 가까웠다. 20여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말을 건네고 있었고 의문의 실마리 역시 그림 안에 있어 보였다. <의모도>는 여전히 내겐 현재진행형이었다.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또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궁금했다. 이젠 그림 <의모도>와 대화를 나누어야 할 때가 온 듯했다.

 

신상웅 염색가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87809.html#csidxa3dd27669bbffdb823431d668ce3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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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초본은 자유분방하게 기술 | - 연암 박지원 2017-03-08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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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초본은 자유분방하게 기술

양진하 입력 2017.03.08 16:49 수정 2017.03.08 18:08 댓글 3

 

 

박지원 정조 때 '문체반정' 분위기에 자기검열해 수정한 듯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친필 초고본으로 분류되는 '행계잡록'에는 박지원이 먹으로 까맣게 지운 구문들이 등장한다. 정재철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 제공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1737~1805)의 대표 저작인 ‘열하일기(熱河日記)’의 친필 초고본에는 양반 체면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로운 문체를 구사했던 연암의 면모가 반영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단국대가 소장 중인 ‘열하일기’ 친필 초고본 9종과 필사본 5종을 정밀 분석한 결과다.

 

7일 단국대에 따르면 이 대학은 1990년대 연민 이가원(1917~2000) 선생이 기증한 ‘열하일기’ 초고본 14종을 대상으로 한문학자와 국문학자 등 3명의 연구자가 참여해 내용을 분석해 왔다. 3년여에 걸친 ‘열하일기’ 해제 작업을 5년 전에 마치고 이를 바탕으로 연구를 진행해왔다.

 

‘열하일기’ 분석 작업에 참여한 정재철 단국대 한문교육과 교수는 “친필 초고본과 이후 이본을 비교해 본 결과 초고에 있던 서학(천주교) 관련 내용, 양반 체면에 어긋나는 표현 등이 이후에 많이 삭제됐다. 여성에 대한 성적 묘사나 하인들과 주고받은 농담 등 구어체로 적힌 자유분방한 표현들이 지워졌다”고 설명했다. 예컨대 ‘열하일기’ 친필 초고본 중 하나인 ‘행계잡록’ 속 ‘도강록’ 편을 보면 결혼 행차 중 수레에 탄 젊은 청나라 여인을 묘사하면서 “그중 한 소녀는 자못 자색(姿色)을 지녔다”고 표현했는데 이후에 나온 이본에서는 “옷차림이 우리나라의 당의와 비슷하나 조금 길다”고 바꿨다.

 

당시 천주교에 대한 탄압과 정조가 강조한 ‘문체반정’ 분위기 속에서 연암이 자기 검열 차원에서 내용을 수정했거나 이후 후손들이 지운 것이라는 분석이다. 정 교수는 “친필 9종도 같은 내용, 같은 제목을 옮겨 쓴 것이지만 일부 표현을 연암이 직접 먹으로 지우거나 수정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1780년 조선 정조 때 청나라 건륭제의 고희를 축하하는 사절단에 포함돼 한양을 떠나 열하(현재의 중국 허베이성)를 다녀온 156일간의 여행을 기록한 기행문이다. 단국대는 국내 외에 흩어져 있는 ‘열하일기’ 이본 등 180권의 책을 비교 연구해 원본을 구현하는 정본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mailto:realha@hankookilbo.com)

단국대가 소장 중인 연암 박지원 '열하일기' 초고본으로 분류되는 '행계잡록'. 단국대는 국내외에 흩어져 있는 이본과 초고본을 비교 연구해 원본을 구현하는 정본화 사업을 추진 중이다. 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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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열하일기] 따라가기... 중국으로 떠났다 | - 연암 박지원 2016-05-24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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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열하일기> 따라가기...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의 고대문화 들여다보기 ①] 열하 대신 서안으로

16.05.23 14:51l최종 업데이트 16.05.23 14:51l /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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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11590&PAGE_CD=N0002&CMPT_CD=M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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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토의 금각사

 

우리는 해외답사 주제를 '일본 고대문화 찾기'로 정하고 일본의 간사이(關西) 지방을 여행할 계획이었다. 나라와 교토의 문화유산을 찾아 일본문화를 알아보고, 한일간의 문화교류를 확인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원이 안 되어서 취소한 바 있다. 성원이 안 된 이유 중 하나가 한일간 외교 갈등이었다. 위안부에 대한 일본 측의 진정한 사과를 요구하는 우리와, 한일협정 체결로 모든 문제가 일단락되었다는 일본의 대립으로 일본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아지던 때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중국으로 눈을 돌렸고, 주제를 '조선 사신의 연행기 따라가기'로 잡았다. 조선시대 연행기라면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가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열하일기>를 따라가는 여행 코스를 계획했다. 이 길을 제대로 따라가려면 10일 정도 걸린다. 신의주 건너 단동(丹東)에서 출발 북경까지 간 다음, 열하를 따라 승덕(承德)까지 갔다 오는 긴 여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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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양 고궁의 봉황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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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열하일기> 따라잡기는, 연암 박지원이 지나가며 기록을 남긴 장소를 찾아가는 인문학여행이다. 기록 속의 현장을 찾아 당시를 상상해 보고, 현재와 어떻게 달라졌나를 비교하는 시공여행이기도 하다. 여행이라는 것은 이처럼 과거를 찾아가는 역사여행이기도 하지만, 거기서 현재를 이해하는 시간여행이기도 하다. 더 나가 미래를 예측하는 상상여행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차원의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회원을 모집했다.

그런데 방학이나 휴가 기간이 아닌 5월 달에 10일씩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일주일짜리 프로그램으로 축소해 만들어보았다. 출발을 단동이 아닌 심양(瀋陽)에서 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여행의 큰 축은 심양-북경-승덕이다. 심양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가 만리장성 밖의 요녕성(遼寧省) 지방이다. 심양은 누르하치(努爾哈赤)에 의해 1625년 후금(後金)의 수도가 되었고, 1644년 청(淸)나라가 명(明)나라를 물리치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후에도 고도(古都)로서 가치를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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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나라 황실의 상징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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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심양은 중국 동북지방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심양에서 산해관까지 가는 데 3일을 잡았다. 그리고 북경에서 하루를 보낸다. 이때는 북경성을 중심으로 연행 자취를 찾아볼 예정이었다. 북경은 금(金)나라 때인 1153년 중도(中都)라는 이름으로 중국의 수도가 된 이래 원(元), 명(明), 청(淸)까지 800년 이상 수도로서의 위상을 지켜오고 있다. 그러므로 볼거리가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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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 승덕을 다녀오는 데는 이틀을 잡았다. 중간에 고북구(古北口)와 구도하(九渡河) 같은 역사적인 장소를 지나게 된다. 이곳에서 연암 일행은 시간에 쫓겨 많은 고생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승덕에서는 여름 황실인 피서산장(避暑山庄), 티베트 불교사원인 외팔묘(外八廟), 경추봉(磬錘峰)을 볼 예정이었다. 이들이 청나라 황실의 역사와 지리, 문화와 예술을 아는 데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마지막날 북경에서 우리는 연암이 북경에서 열하를 오며가며 드나든 문인 덕승문(德勝門)과 동직문(東直門)을 찾아볼 것이다. 또 그가 북경에 머물며 방문한 장소를 찾아보려고 한다. 북경 최대의 티베트 불교사원 옹화궁(雍和宮), 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 공자사당인 공묘(孔廟), 청나라 최대의 황실정원 원명원(圓明園), 가톨릭 교회인 천주당(天主堂)이 대표적이다. 

여행 일정 줄이고, 또 줄이고... 우여곡절 끝에 서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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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시황 병마용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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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프로그램 역시 성원 미달로 더 이상 추진하질 못했다. 그래서 여행지를 중국 고대문화의 중심지 서안(西安)과 함양(咸陽)으로 바꾸고, 여행기간을 5일로 줄여 프로그램을 다시 만들었다. 이것이 '중국의 고대문화 들여다보기'다. 이 프로그램은 진(秦), 한(漢), 당(唐)의 수도였던 서안과 함양의 문화유산을 찾아보는 것으로 짜여졌다. 그중 22곳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릉이다.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황제의 능과 그것을 지키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이 1순위다. 두 번째가 이곳 장안(長安)에서 출발해 서역으로 이어진 실크로드(Silkroad) 문화유산이다. 실크로드는 이름처럼 비단이 오고 간 길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동서 문명교류를 가능케 한 소통로(Communication Road)였다. 그중에서도 불교의 유입은 정신사적 일대 사건이었다. 이번 기회에 서안에 남아 있는 불교의 흔적을 찾아보고 그 주역들을 만나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여행을 성사시키기 위해 문호를 개방, 외부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원래는 우리 회원만으로 팀을 꾸려보려고 했지만 16명이 신청해 비회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비회원 8명을 받아들여 24명이 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회원들은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고 학술답사를 좋아한다. 비회원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역사기행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우리는 5월초 여행자들을 소집, 사전 설명회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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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동박물관의 사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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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답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박물관 방문이 많다는 점이다. 서안과 함양에 있는 역사박물관은 물론이고, 사원(寺院)의 발굴 유물을 전시한 법문사 박물관, 임동박물관을 찾을 것이다. 성격이 다르긴 하지만 비림박물관과 진시황 병마용갱도 박물관이다. 그런데 서안의 섬서역사박물관 방문 일정이 둘째 날인 월요일(휴관)로 잡혀 있어 부득이 셋째 날로 연기해야 했다.

비회원 중 불교미술 전문가가 여행을 신청했다가, 다른 일정 때문에 동행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회원 중 왕릉전문가가 있어, 진·한·당시대 황제릉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필자도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양 문명교류에 대해 어느 정도 알기 때문에 역할 분담을 잘 할 수 있었는데 아쉽다. 여행사에서 유능한 현지 가이드를 배정해주겠다고 했으니 믿어보는 수밖에.  

또 한 가지 호텔에 변화가 생겼다. 처음 우리는 4일 밤을 한 호텔에서 자는 것으로 계획을 짰다. 그런데 회원 중 호텔을 바꿔보자는 제의가 있어, 원래 계획했던 호텔에서 이틀을 자고, 다른 호텔에서 나머지 이틀을 자기로 했다. 그 이유는 잠자리보다는 음식 때문인 것 같다. 음식이 안 맞는 경우, 4일 동안 아침이 부실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데,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렇지만 짐을 두 번 싸야 하는 불편은 감수해야만 한다.

서안과 함양, 두 번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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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숭산 소림사를 방문했을 당시 회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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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패키지여행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여행한 때가 2002년이다. 그때 중국문화 답사라는 이름으로 서안과 함양을 찾은 적이 있다. 그때는 상해(上海)로부터 시작해서 개봉(開封)-정주(鄭州)-낙양(洛陽)을 거친 다음 서안-함양을 탐방하는 5박6일 일정이었다. 상해에서 개봉까지, 낙양에서 서안까지 두 번이나 야간열차를 타는 일정이지만, 그 때문에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그때도 26명의 회원이 여행에 참가했다.

개봉-정주-낙양은 황하(黃河)강 중류로 당나라 이후 송(宋)나라까지 역사의 중심에 섰던 도시다. 개봉에서는 송나라 황궁을 재현한 용정공원을 보고, 대표적인 절 상국사(相國寺), 판관 포청천의 사당인 포공사(包公祠)를 찾았다. 정주에서는 하남성박물관을 관람하고 황하를 찾았다. 또 숭산(嵩山) 소림사(少林寺)를 방문, 달마대사의 흔적을 찾아보고 무술공연도 관람했다.

낙양에서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용문석굴(龍門石窟)을 찾았다. 용문석굴은 돈황의 막고굴(莫高窟), 대동의 운강석굴(雲岡石窟)과 함께 중국의 3대 석굴로 유명하다. 낙양 인근에 있는 백마사(白馬寺)는 후한(後漢) 명제(明帝: 57-75) 때 세워진 중국 최초의 절이다. 마지막으로 낙양박물관에서 당삼채(唐三彩)를 실컷 보았다. 그때만 해도 우리를 위해 박물관 폐관시간을 연장해 주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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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방문한 낙양박물관의 당삼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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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릉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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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에서는 진시황릉, 병마용갱, 화청지를 보았다. 그리고 대안탑, 비림박물관, 성곽 등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섬서역사박물관을 관람했다. 여기서는 관련 책자를 몇 권 사기도 했다. 당시에 이미 <진시황제 지하대군단. 세계의 제8기적>이라는 우리말 책이 팔리고 있었다. 번역의 정확도도 굉장히 높아 정말 좋은 책이었다. 일본어와 영어로 설명한 <섬서역사박물관> 도록도 아주 유익한 책이다. 이번 답사에서 다시 활용할 예정이다.

함양에서 본 것은 당 고종(高宗)과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무덤인 건릉(乾陵)이었다. 진시황릉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규모뿐 아니라 주변의 석물과 비석에 압도당했던 기억이 난다. 건릉 주위에는 자식과 첩 그리고 신하의 무덤인 배장묘(陪葬墓)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의덕태자묘(懿德太子墓), 영태공주묘(永泰公主墓), 장회태자묘(章懷太子墓)다. 그중 우리는 뒤의 두 기 무덤을 보았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2002년에 보지 못한 서안과 함양의 문화유산을 여럿 더 볼 예정이다. 서안에서는 성벽에 올라 성벽돌기를 할 것이다. 이슬람사원인 청진대사(淸眞大寺)를 보고, 밀교사원인 흥선사(興善寺)도 볼 것이다. 2002년에는 대안탑(大雁塔)만 보았는데, 이번에는 소안탑(小雁塔)도 보려고 한다. 그리고 실크로드 출발지를 찾아 낙타조형물도 볼 예정이다. 그 외 임동(臨潼)박물관도 찾을 것이다.

함양에서는 함양박물관을 보고, 법문사(法門寺)를 찾아갈 것이다. 법문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안치된 곳으로 유명하다. 사리가 현재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박물관도 찾을 예정이다. 그리고 법문사 경내에 있는 진신보탑(眞身寶塔)도 13층으로 대단히 높다. 1988년 재건되어 문화재적 가치는 덜하지만, 현재 법문사의 상징으로 관광객을 맞이한다. 무릉(茂陵)과 곽거병묘(霍去病墓)도 이번에 처음 찾는 중요 유적이다. 무릉은 한무제의 능이고,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알려진 곽거병은 흉노를 물리친 장군으로 유명하다. 이번에는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여행에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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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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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도 열여덟엔 ‘방콕 폐인’으로 지냈단다 | - 연암 박지원 2016-01-2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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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도 열여덟엔 ‘방콕 폐인’으로 지냈단다

 

등록 :2016-01-28 19:05수정 :2016-01-29 11:34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28338.html

 

칩거시절 연암의 글에서 찾은
마음의 문 닫은 십대 치유법

 

 

연암이 나를 구하러 왔다
설흔 지음/창비·1만1000원

 

 

<열하일기>를 남긴 연암 박지원은 한때 집에 틀어박힌 ‘은둔형 외톨이’였다. 친구 많고 세상 나돌기를 좋아한 연암이? 첫번째 은신은 열여덟살 때였다. “밥을 잘 못먹고 잠을 잘 못 자는 병”으로 무얼 해도 시들했다. 그를 방 밖으로 꺼낸 건 식욕을 돋우고 잠을 부르는 신기한 이야기 선생 민옹이었다.

 

‘미노’도 열여덟을 지나 열아홉이 되도록 ‘방콕’이다. 주방 뒤쪽의 다용도실과 베란다 공간을 합쳐 만든 방 한구석에 놓인 드럼세탁기 옆이 칩거장소다. 3개월 진한 우정을 나눈 유일한 친구에게서 느낀 배신감, 자신을 괴롭히고 폭력을 휘두른 녀석에게 합의해준 아버지에 대한 분노, 야구선수의 꿈이 좌절된 절망 등이 얽혀 틀어박힌 지 2년이다. 민옹의 환생일까? 어느 날 미노에게도 거구의 이빨 빠진 이야기 선생이 찾아왔다. 방에서 무조건 꺼내려는 상담사, 사회복지사, 교회 여성전도회 회장과는 달리 그는 미노에게 밖으로 나가라고 등떠밀지 않는다. 대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박지원과 폐인들’ 이야기를 들려준다.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로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대상을 받은 저술가 설흔이 박지원의 글에서 마음의 문을 닫은 십대들의 마음 치유법을 찾아냈다. <연암이 나를 구하러 왔다>는 황해도 연암협에 은신했던 시절 연암의 글을 현대인의 시선으로 변용해 성적 고민과 가족갈등, 왕따 등으로 자기만의 동굴로 피신한 청춘들에게 용기를 준다.

 

책 말미까지 긴 서문 형식을 취하는 구성이 특이한데, 미노의 내면 깊은 곳의 상처의 뿌리를 조심스레 드러내는 데 유용해 보인다. 미노의 이야기와 이야기 선생이 전하는 박지원 일화가 켜켜이 쌓일수록 미노 마음 속에선 “성우야 빨리 나와” 하는 그리운 목소리가 더욱 커진다. 성우는 자기부정을 뜻하는 미노(me no)로 바꾸기 전 이름이다. 비석 무덤(버려진 안식처)→ 2층 벽돌집(마음이 통했던 친구집)→ 고시원(사업망한 부모의 일터)을 돌아오는 외출 반경도 서점과 학교 인근으로 확장돼 간다.

 

박지원은 국가에 희생당한 친구 이희천의 죽음과 정적의 위협을 계기로 또다시 집안에 틀어박힌다. 세수도 하지 않고 손님이 와도 입 한번 벙긋하지 않고 책만 보다 잠들길 반복했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해 주지만은 않아. 예나 지금이나 그건 똑같지.” 이야기 선생은 이성계 모독글이 실린 중국책을 읽었다는 죄목으로 죽임 당한 친구의 비명횡사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건 국가의 부도덕성이었으리란 해석을 덧붙인다. 이야기 선생은 박지원이 만난 절망의 끝에서 홀로 고통을 견뎌낸 옛 사람들을 불러온다. 방구석 폐인의 빗장을 움직일 이야기 선생의 선문답. “맞서서 주먹을 주고받지 않는 한 결정적인 한방을 날리지 않는 한 고통은 절대 물러나지 않는 법이더구나.”

 

권귀순 기자 gskw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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