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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찾아서 | 철학 공부 2018-09-09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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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불평등의 기원을 찾아서  

[인문견문록]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김창훈 민족미래연구소 연구실장

 

 2018.09.08 11:31:24

 

소득격차가 더욱 확대되었다는 통계청 뉴스로 온 나라가 들끓었다. 진보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이 정권을 잡았는데, 오히려 불평등이 더 커지다니…. 

불평등해소에 관심도 없던 보수세력이 앞장 서 문재인 정부 탓을 한다. 불평등한 한국사회를 개혁하자는 목소리는 크다. 하지만 '불평등' 그 자체를 사유하는 이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기득권들은 돈, 권력만이 아니라 지식으로도 자신들을 보호한다. 경제적 불평등이 경제성장을 촉발한다는 '유인(incentive)이론'이 대표적이다. 자본주의가 발달해 빈부격차가 고착화된 21세기도 이럴진대, 하물며 18세기 중엽은 어떠했을지 짐작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대에나 용기 있는 소수의 지식인들이 있었다. 그들 중심에 장 자크 루소가 있었다.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주경복 옮김, 책세상 펴냄)을 쓴 계기는 디종 아카데미의 논문 현상 공모전이었다. 디종 아카데미가 낸 주제는 '인간들 사이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정당화될 수 있는가'였다.

 

'자연상태의 인간은 선했지만 문명의 발전과 함께 타락했다'는 과격한 주장의 논문을 디종 아카데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수상에 실패하자 루소는 제네바공화국에 대한 헌사를 논문에 덧붙여 1755년 암스테르담에서 출간한다.

<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불평등의 기원을 탐색하기 위해 태곳적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루소는 왜 불평등한 상황을 해명하기 위해 태고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모험을 하는 것일까? 루소가 머나먼 과거로 돌아가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제도와 사회로 어지럽혀지지 않은 인간이 원래 품고 있던 본성을 찾는 것이 루소의 목표였다. 왜냐하면 현재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되는 많은 것들이 사회적 관계가 만들어진 후 사후적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경쟁·시기·폭력·사치와 같은 정념을 인간의 본성이라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루소에 의하면 그렇지 않다. 이런 정념들을 한 꺼풀씩 벗겨 가면 결국 이런 정념을 유도한 사회적 관계가 나온다. 이런 사회적 관계 이전으로 돌아가서야 진정한 인간의 본성과 맞닥뜨리게 된다. 태고의 역사로 올라가서 발견한 인간의 모습을 루소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나는 거기서 어떤 동물보다도 약하고 민첩하지 못하지만 결국 그 어떤 동물보다도 유리하게 조직된 한 동물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떡갈나무 아래에서 배불리 먹고 시냇물을 찾아 목을 축이며, 자기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해준 바로 그 나무 발치에서 잠자리를 발견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욕구는 충족될 수 있었다." 

루소가 그리는 태곳적 원시인은 무척 목가적이다. 장자가 말하는 절대 자유 '소요유(逍遥游)'의 경지에 있는 존재인 듯도 하다. 루소의 이런 주장에 당장 '원시인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데 무슨 황당한 소리냐?'라는 반대의 목소리가 나올 것 같다. 역사를 연구하려면 자료나 유물에 의존해야 한다. 루소는 독특한 방법을 취한다. 루소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추구할 수 있는 연구는 역사적인 진실이 아니라 다만 가설적이고 조건적인 추론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렇게 루소는 자신의 탐구를 가상적 추론이라고 적시한 후 글을 전개해 나간다.  

'가상적 추론'이기에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토머스 홉스가 설정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역시 홉스만의 가상 상황 설정인 것이다.

20세기 정치철학계의 슈퍼스타 존 롤스는 '정의론'에서 '무지의 베일'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 역시 가상이다.

 

가상임에도 그들의 주장은 한 시대를 흔들 정도의 파급력을 가졌다. 가상은 허구와 다르다. 가상은 주어진 조건을 고려할 때 가장 개연성 높은 상황을 추론하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루소가 사용한 방법이 '가상적 추론'이었다. 또한 정승옥 강원대 명예교수는 논문 '루소에 있어서의 자연과 역사의 문제'에서 가상적 추론이 단순 상상이 아님을 밝힌다. 정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루소가 가상적 추론으로 보아달라고 부탁한 것은 세력이 막강하던 기독교로부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루소는 인간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불평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하나는 자연적·신체적 불평등으로 선천적인 불평등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 안에서의 상호 간의 약속으로 성립하는 도덕적·정치적 불평등이다.

 

두 가지 불평등 중에 정치적 불평등만이 인간 자신이 만든 인위적인 산물이기에 진짜 불평등이라고 루소는 말한다. 이런 종류의 불평등은 자연상태의 인간에게는 없었다.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가는 미개인은 우리의 생각과 달리 행복하다. 루소는 미개인의 적은 연약함, 노화를 포함한 병뿐이었다고 주장하면서 병을 예로 든다. 현대인이 태곳적 인간보다 더 건강한가? 루소의 긴 항변을 인용해 본다.

"나는 의술을 정성 들여 연마하고 있는 지역보다 그것을 소홀히 다루고 있는 지역에서 인간의 평균수명이 짧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확실한 견해가 있는가 묻고 싶다. 의술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치료법보다 우리가 더 많은 병에 걸려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활에서의 극심한 불평등,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한 여가가 주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과중한 노동이 강요되는 것, (중략)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탓이며 따라서 우리가 자연이 명령한 소박하고 일정하며 고독한 생활양식을 간직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고약한 증거들이다." 

루소의 주장이 황당한가?

세계적 석학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이런 주장은 어떠한가? 그는 농경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라고 주장한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구석기 시대에 사람의 수는 더 적었어도 신석기 시대의 사람보다 신장이 평균 15센티미터 정도 더 컸고 뼈도 더 두꺼우며 골밀도 또한 높았다. 재레드는 생리학적으로 인류는 농경을 시작하면서 진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퇴화했다고 본다.

 

그뿐만이 아니다. 인류학자 마샬 살린스도 오랜 현장 연구를 통해 수렵채취 경제에서 살던 초기 인류가 못 살았으리라는 것은 오해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늘어난 것과 삶의 질은 정확히 비례하지 않는다. '고난의 행군' 20년간 북한의 인구는 약 200만 명이 늘어났다. 북한이 살기 좋았던 것인가?  

루소가 미개인의 건강함문명인의 비참함을 비교한 것 자체가 철학·사상적 도발이다. 루소는 왜 이렇게 인간의 본성에 관심이 많은 것일까? 이유는 단 하나, "불평등은 인간의 본성과 모순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불평등을 구체적 사례 하나하나에 개입해 개선하고자 하는 것이 루소의 목표가 아니다.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을 때 누군가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라고 하면 논쟁은 끝난다. 루소가 의도하는 바는 이것이다. 루소의 작업이 300년 전이나 통할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현시대의 탁월한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의 이론적 작업도 루소의 것과 거의 동일하다. 루소는 인간의 본성에 기대어 평등할 것을 주장하고 고진은 인간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평등 본능인 '억압된 것의 회귀'에 기대어 평등을 말하고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태초의 인간은 '고립된 인간'이었다.

이 시기 인간의 유일한 관심은 생존본능인 자기애였다. 이 시기를 거쳐 인간은 야만인의 단계로 들어선다. 낚싯줄을 만들어 고기를 낚고 활로 동물을 사냥한다.

관계에 대한 욕구도 커졌다. 일시적으로 자유로운 방식의 협동이 행해졌다. 야만인은 문명적 진화를 거듭해 미개인으로 진입한다. 돌도끼와 움집을 만들며 가부장적인 가족을 형성한다. 생존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문명이었고 삶은 순탄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신과 마음이 훈련됨에 따라 인류는 점차 순해지고 관계가 확대되고 유대가 강화되었다"라고 루소는 말한다.  

도구는 삶을 풍요롭게 했고 인간 사이의 유대도 꽃피던 시기였다. 미개인 시대 전기의 모습이었다. 이때를 루소는 "원시상태의 무위와 우리 이기심의 극성스러운 활동 사이의 중간에 위치한 인간 기능 발달의 이 시기가 가장 행복하고 안정된 시기"라고 말한다. 태초의 고립된 인간이 살아가던 자연상태 이후 다시 좋았던 제2의 자연상태였다. 공동생활은 이루어지지만, 사람 사이의 위계질서가 엄격하진 않았던 이 시대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평화롭고 목가적인 미개인'을 말하는 루소의 주장에 강력히 반박하는 학자들도 있다.

 '원시전쟁' 저자 로렌스 H. 킬리는 현장에서 얻은 연구를 토대로 원시시대는 잔혹한 전쟁의 시대였다고 주장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현대에 남아 있는 원시 부족의 사례를 찾아보면 될 것이다. 뉴기니의 두굼 다니(Dugum Dani) 부족은 약 5개월 보름에 걸쳐 일곱 번의 전면전과 아홉 번의 습격을 감행한 것이 관찰되었다. 남아메리카의 야노마뫼 부족의 어느 마을은 15개월 동안 무려 스물다섯 차례의 습격을 받았다. 이들의 전쟁을 관찰한 후 그가 내린 결론은 전쟁은, 결국 자원 확보 때문이라는 것이다.

킬리만이 아니라 비슷한 주장을 하는 또 다른 학자도 있다. <고결한 야만인>(강주헌 옮김, 생각의힘 펴냄)을 쓴 나폴리언 섀그넌도 유사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미개사회는 평화롭지 않았다는 킬리와 섀그넌의 연구 때문에 루소의 이론은 폐기되어야 하는 것일까? 문제는 간단치 않다. 고봉만 충북대 교수의 논문 '레비스트로스의 루소 읽기'는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인류학자들이 찾았다고 생각한 남미지역 밀림의 미개인들은 실제적인 미개인들이 아니었다. 고 교수는 논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지역에 대한 관찰과 항공사진들을 통해 사람들은 예전에 개간되고 경작됐던 공간들을 숲이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가 1950년대에 이야기했던 당시의 남비콰라 부족은 원시인들이 아니라 퇴화된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루소에 반박하는 주장들의 증거로 제시되는 많은 사례가 루소가 말한 시대 이후의 것이다. 평화로운 시대를 지나 폭력적인 시대의 사회의 유산을 보고 원시사회가 폭력적이라는 것은 정확하지 않은 판단이다.

갈등과 폭력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인간은 고립된 자연인에서 출발해 야만시대, 미개인시대로 진입한다. 미개인시대 전기를 지나 후기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인 야금술과 농업을 발견한다. 생산성의 발달을 가져온 두 발명으로 인해 인간 사이의 평등한 관계는 결정적으로 변화되었다.

루소는 야금술과 농업이 몰고 온 변화를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 순간부터 그리고 혼자서 두 사람 몫의 양식을 차지하는 것이 유리함을 알아차리게 되자마자 평등은 사라지고 소유가 도입되고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반복되는 토지의 점유는 곧 토지의 소유권으로 변한다. 또한 야금술은 인간사회에서 분업을 더욱 심화시킨다. 경작 대신 철을 만드는 대장장이의 몫까지 밀을 생산해야 했다. 

농업이 도입되면서 불평등이 증가한다. 루소는 이런 상태를 세밀히 묘사하고 있다.

"힘이 센 사람은 더 많은 일을 했고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자기의 노동을 더 교묘히 이용했으며 재간이 있는 사람은 노동을 절감시키는 방법을 더 많이 고안해냈다. 어떤 사람은 많이 벌었고 어떤 사람은 간신히 먹고살았다. 이리하여 자연적 불평등이 새로운 원인의 결합에 따른 불평등과 더불어 조금씩 전개되었다." 

소유권의 도입으로 인간의 이기심이 깨어나기 시작한다. 루소는 소유권의 등장에 대해 혹독히 비난한다.

"경쟁과 대항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의 대립이 있게 되는데 이 모두가 남을 희생시켜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려는 숨겨진 욕망일 뿐이다. 이 모든 악은 소유가 낳은 최초의 결과이며 이제 자라나기 시작한 불평등과는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동반자이다."

소유권의 등장으로 인류는 드디어 갈등과 폭력의 악순환에 빠져들게 된다.

인간의 본성을 악한 것으로 보고 무질서가 초래할 위험에 대해 경고한 홉스는 사회발달단계에서 바로 이 지점을 보았던 것이다. 여기서는 루소 역시 홉스와 같은 의견을 갖고 있다. 루소는 이런 사회를 "부득이 먹고살 것을 부자에게서 얻거나 빼앗아야만 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 각자의 다양한 성격에 따라 지배와 굴종 또는 폭력과 약탈이 발생하기 시작했다"고 묘사한다. 루소는 홉스적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발생하는 사회가 원초적 공간이 아니라 잘못된 방향으로 많이 진행된 사회라고 홉스의 오류를 지적한다.

불평등에 이어 무질서가 뒤따라온다.

"이렇게 해서 가장 강한 자 또는 가장 궁핍한 자가 그의 힘이나 욕구를 타인의 재산에 대한 일종의 권리-그들이 볼 때 소유의 권리와 동등한 권리-로 생각함에 따라 평등은 깨지고 뒤이어 가장 끔찍한 무질서가 초래되었다."

무질서가 일으키는 공포감조차 부자들은 이용했다. 무질서에 대한 두려움은 부자와 지배계급에 의해 증폭된다.

 "부자들은 절박한 필요에 따라 가장 교묘한 계획을 생각해냈다."

부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지만 민중에게는 불리한 제도를 도입하자고 백성들을 꼬드긴다. 불평등 사회에서 안전을 확보하지 못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약자를 억압에서 보호하고 야심가를 제지하며 각자에게 소유를 보장해주기 위해 단결하자. 정의와 평화를 위해 단결하자. 우리의 힘을 하나의 최고 권력에 집중하자.' 이렇게 부자들에게 권력이 넘어간다. 인민은 권력의 노예가 된다.  

자연상태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본래 모습과 본성을 제시함으로써 현재의 불평등을 완화시키려는 루소의 의도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루소가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황당한 주장을 한 것으로 안다. 루소는 그의 글 어디에서도 원시적 자연상태로 돌아가자고 말한 적이 없다. 또한 과거의 인간성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도 보지 않았다.

루소의 본심에 대해 칸트는 "루소가 원한 것은, 인간이 다시 자연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처한 단계에서 자연상태를 되돌아보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헤겔 연구의 대표적 연구자 나종석 연세대 교수는 "근대의 정치이론은 근본적으로 계약이론적"이라며 사회계약론의 창시자는 홉스라고 말한다. 그런데 또 다른 사회계약론자인 루소는 홉스적 인간이해는 그릇된 것이라며 딴지를 건다. 성악설과 무질서가 결합된 홉스의 생각은 결국 질서 유지를 위해 강력한 리바이어던만이 해결책이 된다. '본원적 인간'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구성되어야 할 인간 사회의 청사진을 그려내기가 어렵다. 사회계약론의 주창자인 두 사람은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서는 확연히 갈린다.  

루소는 홉스에 대해 예리하게 비판한다.

"그(홉스)는 미개인의 자기보존을 위한 노력 속에, 그 자체가 사회의 산물이며 법률 제정을 필요하게 만든 수많은 정념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까닭 없이 넣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 말을 하고 있다."

 

루소가 지적하는 홉스의 오류는 사람들을 갈등으로 몰아넣는 과도한 욕망은 자연적 욕구가 아니라 사회가 구성된 후 새롭게 증폭된 욕망이라는 것이다. 루소는 홉스가 말하는 인간의 '강렬한' 욕망은 미개인의 욕구가 아니라 근대인의 욕망을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 본다. 욕망이 강렬하기에 갈등도 처절해진다. 욕망이 아닌 욕구가 되면 갈등은 낮은 수위로 완화된다.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토로하자면, 욕망은 분명히 한 사회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다. 젊은 시절 뉴질랜드와 한국을 오가면서 살았는데 그때 무척 특이한 경험을 했다. 뉴질랜드에 살다 한국에 돌아오는 즉시 정념들이 꿈틀대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뉴질랜드로 가면 정념은 다시 잠잠해졌다. 필자 몸 안의 정념은 같건만, 필자가 느끼는 강도는 확실히 달랐다. 사회에 따라 정념을 증폭시키기도 하고, 누그러뜨리기도 한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루소가 정확했던 것이다.  

루소의 주장은 매력적이다. 지금 비록 이렇게 살지만 원래의 우리는 다른 모습이었다. 솔깃해지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울림이 있다. 루소적 영향은 2011년 출간되어 학계에 작지 않은 파장을 일으킨 김유동 경상대 교수의 <충적세문명>(길 펴냄)까지 연결된다. 지난 1만 년 역사를 천착한 보기 드문 역저이지만, 산업사회의 도래를 문명적 퇴보로 평가하면서 김 교수는 루소와 마찬가지로 고대로 향한다. 학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책의 기저에 루소주의가 스며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루소는 지금도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책을 읽으면서 그의 '천재다움'에 참으로 감탄했다.

루소의 책에는 에리히 프롬의 사회적 성격, 르네 지라르의 모방 욕망, 애담 스미스의 연민, 지배계급의 거짓 선전인 이데올로기, 언어 발달 기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기제로서의 종교 등 후대에 중요하게 된 많은 개념들이 맹아적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특히 '제네바공화국에 바치는 헌사'에 나오는 지정학적 통찰은 해퍼드 매킨더도 울고 갈 수준이다.  

루소의 주장에 대해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한다. 루소 본인은 역사의 진행이 '우연'이라고 주장하지만 책 속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근원적 힘을 이미 밝히고 있다. 루소는 "인간은 안락의 추구가 인간행동의 유일한 동력임을 경험으로 배웠다"고 적고 있다. 인간의 '안락 추구'가 가장 중요한 역사의 추동력인 것이다. 역사의 전개는 결국 선택압이 작용한 결과다. 대부분의 사회가 원시시대로부터 출발해 비슷한 단계에 도달했다면 이 역시 '안락'이 역사의 최종 심급에서 선택압으로 작용한 덕분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안락 추구'를 가장 중요시하는 인간이 노력한 결과, 인간의 '안락'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사회를 만들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전제와 결과가 전도되는 지점이다. 루소를 읽으면서 이 점이 매우 아쉬웠다.

자연상태를 동경한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한가한 지식인의 몽상으로 치부할 사람도 많을 것이다. 사회계약론까지 포함한 루소로부터 비(非)마르크스적 혁명의 전망을 읽어내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로서는 '루소는 몽상이기에는 너무나 정치(精緻)하고, 혁명적 설계이기에는 너무나 몽상적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는 18세기가 허용할 수 있는 마지막 경계까지 자신의 사고를 밀고 나갔다. 역사의 동인은 '안락'이지만, 루소의 동인은 인간에 대한 '연민'이었다. 책의 마지막 문장은 루소가 이 책을 왜 썼는지, 루소가 어째서 위험스러운 인물이 되었는지 잘 보여준다. 책은 이렇게 끝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마저 갖추지 못하는 판국인데 한줌의 사람들에게서는 사치품이 넘쳐난다는 것은 명백히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209987&utm_source=naver&utm_medium=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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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G. Deleuze)로 욕망 다시 읽기 | 철학 공부 2018-09-02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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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민트존 시리즈9
제목: 들뢰즈(G. Deleuze)로 욕망 다시 읽기
글쓴이: 이근무(HA연구소장)
 
타율이 저조한 프로야구 선수가 있습니다. 득점 찬스가 되자 감독은 그를 대신하여 대타를 내보냅니다. 선수는 감독에게 하소연합니다. “모든 인간은 욕망하는 존재이다. 행간의 숨은 뜻을 풀이하면 나도 안타를 치고 싶다. 말리지 마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야구선수의 말처럼 인간의 역사는 욕망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신화와 전설의 가장 오래된 주제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이블에 등장하는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취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신들의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가져다 주고 싶은 욕망을 지녔고 판도라(Pandora)는 인류의 비밀이 담긴 상자를 열고 싶어 했습니다. 이카로스(Icarus) 역시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을 지녔습니다.
 

성경과 신화속의 주인공들은 모두 욕망을 성취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모두가 다 알고 있듯이 낙원에서의 추방, 끔직한 재앙, 형벌, 추락이였습니다. 욕망의 이러한 이중성 때문인지 철학자들은 욕망을 인정하면서도 절제 또는 욕망의 승화를 요구합니다.
 

타자의 윤리학자로 지칭되는 레비나스(E. Levinas)는 욕망을 단순한 욕구와 형이상학적 욕망(Metaphysical desire)으로 분류했습니다. 전자는 개인의 존재 보존과 발전의 욕망이라고 할 수 있고 후자는 자신을 넘어 타자의 고통을 떠맡고 그들에 대해 관심과 배려를 하고 종국에는 무조건적인, 즉 아브라함적 환대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이드(S. Freud)역시 욕망(Drive)을 인정하면서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비의적 개념체를 통해 욕망을 억제하고 질서와 권위를 내면화함으로써 순치되어 가는 인간의 삶을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욕망은 인간의 보편적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금단의 영역속에 위치하고 있기에 욕망 앞에서 인간은 군침만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맹자의 공손추(公孫丑)편에 나오는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 감히 두려워 청할 수는 없지만 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란다)이라는 고사가 적절한 비유가 될 수 있을 듯 합니다. 니체(F. W. Nietzsche)역시 욕망 앞에 주저하는 인간을 푸줏간 앞의 개로 비유했습니다. 즉 푸줏간 안의 고기가 탐나지만 주인의 칼이 무서워 배회하는 개의 형상을 초인(Ubermensch)이 아닌 범인(Dasman)의 존재양식으로 보기도 했습니다.
 

니체 철학의 재해석자로도 불리는 들뢰즈(G. Deleuze)는 기존의 철학자들처럼 욕망을 결핍, 또는 관리기술로 보지 않고 창조와 생산의 원천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유를 진행시키기 위해 욕망하는 기계”(machine desirante)라는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들뢰즈에 의하면 기계는 아무런 목적도 윤리의식도 없이 생산만을 반복할 뿐입니다. 제품이 과잉생산되도 기계는 여전히 작동하고 고장이 나도 기능합니다. 고장난 기계의 부품을 교체하고 수리를 하면 이전보다 더 잘 작동하는 경우가 있듯이 욕망이라는 기계는 자기가 유발한 위기와 모순을 먹고 더욱 성장하기도 합니다. 들뢰즈의 욕망개념은 인간의 무한하고도 때로는 파괴적인 욕망을 찬양하는 윤리적 무정부주의 상태를 추구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들뢰즈는 욕망에서 생성의 조건을 보라는 의미에서 욕망하는 기계개념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들뢰즈의 이같은 모순은 신약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모순적 공표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인류의 대속자, 평강의 왕이라 지칭되는 예수는 경천동지할 말을 합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식구니라”(신약성서, 마태복음, 1034~36).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다수는 예수의 사역으로 인해 새롭게 인간들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과 불협화음 때로는 전쟁 등으로 해석합니다.
 

기독교 발전사에서 나타난 박해, 순교와 같은 것들이 예수사역의 또 다른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들뢰즈 역시 욕망의 무한한 팽창 그 자체가 아니라 욕망 추동의 결과로서 야기된 또 다른 생성을 포착할 있는 사유의 전환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질적연구자들이 접하는 연구참여자들 중 많은 경우가 욕망에 매혹된 사람들입니다. 가톨릭교부 신학자들이 모든 죄의 근원으로서 지목한 일곱가지 대죄(septem peccata mortalia), 즉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음욕, 탐욕, 나태 이 모두가 욕망과 관계되어 있고 질적연구자들이 많이 다루는 중독, 폭력, 편견, 차별, 황금만능주의, 가족해체 등의 주제가 역시 욕망과 관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욕망을 다룸에 있어 그것을 정상적이고 바람직한 욕구와 구분하고 또한 욕망의 끝을 파멸로 미리 간주하여 욕망은 파멸로 귀결된다는 단선적인과론에 입각하여 기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욕망에 대해 절제라는 도덕율적 권면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동향은 질적연구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질적연구는 발견적 연구입니다. 따라서 주류관점에서 보면 일탈적이고 때로는 비정상적인 욕망을 옹호하고 승인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결과로 나타난 또 따른 생성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학교 밖 창소년들이 학교 밖이라는 공간에서의 일탈과 방황을 보는 동시에 그들에게 새롭게 생성된 인식이나 삶의 정향, 가족을 외면하고 도박이나 알콜중독이라는 욕망의 끝을 향해 치닫는 개인들이 욕망추구 과정에서 나타난 자기반성이나 가능성, 이외에도 자살, 쇼핑, 일 등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무수한 욕망, 그 욕망의 끝에 대한 기술이나 도덕적 판단보다는 욕망과 욕망의 중간 또는 욕망의 끝에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틀을 생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식이 외부로 표출되는 것을 선과 악, 무기(無記)로 구분합니다. 이 중 무기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선악 중의 어떠한 결과도 끌어오지 않는 것을 지칭합니다. 필자는 욕망 역시 선도 악도 아닌 무기라 생각합니다. 무기적 사유는 끊임없는 생성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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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 [Zygmunt Bauman] | 철학 공부 2018-08-11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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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바우만 (1925 ~ 2017) Zygmunt Bauman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근대성에 대한 오랜 천착으로 잘 알려진 폴란드 출신 사회학자다.

1925년 폴란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를 피해 소련으로 도피했다가 소련군이 지휘하는 폴란드 의용군에 가담해 바르샤바로 귀환했다.

폴란드 사회과학원에서 사회학을 공부했고, 후에 바르샤바대학교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1954년에 바르샤바대학교의 교수가 되었고 철학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등과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 활동했다. 1968년 공산당이 주도한 반유대 캠페인의 절정기에 교수직을 잃고 국적을 박탈당한 채 조국을 떠났다. 이스라엘로 건너갔지만, 시온주의의 공격성과 팔레스타인의 참상에 절망을 느낀다. 이스라엘 텔아비브대학교에서 잠시 가르치다 1971년 리즈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부임하며 영국에 정착했다.

1990년 정년퇴직 후 리즈대학교와 바르샤바대학교 명예교수로 있으면서 활발한 학문 활동을 하고 있다.

우만은 1980년대 초까지 정통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영국 노동운동과 계급 갈등을 중점 연구했다. 이후 안토니오 그람시, 게오르그 짐멜의 영향을 받아 관심 영역을 확장했고, 이어 자크 데리다, 한나 아렌트, 테오도르 아도르노, 조르조 아감벤 등의 이론을 폭넓게 수용하며 홀로코스트, 근대, 탈근대, 계급, 세계화, 소비주의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발표했다. 방대한 연구 성과에 비해 다소 늦게 주목을 받았다.

 

 64세 때인 1989년에 발표한 『근대성과 홀로코스트(Modernity and The Holocaust)』라는 책을 펴낸 뒤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90년대 탈근대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며 명성을 쌓았고,

2000년대 현대사회의 ‘유동성(액체성)과 인간의 조건을 분석하는

유동하는 근대(Liquid Modernity)』 시리즈

[『Liquid Modernity』(2000),

Liquid Love』(2003),

Liquid Life』(2005),

Liquid Fear』(2006),

Liquid Times』(2007)]로 대중적 인지도를 높였다.

 

‘유동하는 근대’란 기존 근대사회의 견고한 작동 원리였던 구조ㆍ제도ㆍ풍속ㆍ도덕이 해체되면서 유동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하는 국면을 일컫는 바우만의 독창적인 핵심 사상이다. 이러한 사상은 탈근대의 조건을 모호성, 불확실성, 상대성으로 꼽는다는 점에서 다른 포스트모던 사상가들과 궤를 같이 하면서도, 마르크시즘의 문제의식을 이어나가며 회의주의가 아닌 실천적 전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정평을 얻고 있다.

1992년에 사회학 및 사회과학 부문 유럽 아말피 상을, 1998년 아도르노 상을 수상했다.

2010년에는 프랑스 사회학자 알랭 투렌과 함께 “지금 유럽의 사상을 대표하는 최고봉”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아스투리아스 상을 수상했다.

 

오늘날 가장 주목받는 탈근대 사상가 중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는 바우만의 학문 이력은 2002년 국내에 『자유』가 처음 번역되면서 알려졌다. 바우만의 시선은 전 지구를 포괄할 정도로 넓고, 인간 심리의 저 어두운 밑바닥까지 꿰뚫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요 발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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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는 같아지려는 ‘모방 욕망’ | 철학 공부 2018-07-28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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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는 같아지려는 ‘모방 욕망’

 

등록 :2006-07-06 20:53수정 :2006-07-07 14:51

 

 

욕망의 삼각형’ 르네 지라르 대담
“문화는 창조가 아니라 모방”
사상 너머 서구우월주의 엿보여

‘모방적 욕망’과 ‘희생양’은 프랑스의 문학평론가 겸 문화인류학자 르네 지라르(83)가 고안한 대표적인 개념들이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과 <희생양>(1982)이라는 그의 양대 저서가 그 개념들이 발아한 태반이었다.

욕망의 삼각형’ 도식으로 설명되는 지라르의 욕망 이론은, 욕망이 자발적·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매개자를 통한 간접적인 성격임을 강조한다. 욕망의 주체는 매개자 또는 모델을 좇아서 대상을 욕망한다는 것이다. 이런 모방적 욕망이 급증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욕망의 대상을 둘러싼 갈등과 그에 따른 폭력이 나타난다. 갈등과 폭력이 격화되어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위기로 치달을 때 공동체는 그 폭력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시키는 방식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할 때 선택된 폭력의 대상이 바로 희생양이다. 지라르의 이론에서 대표적인 희생양은 예수 그리스도다.

지라르의 이론은 문학은 물론 인문학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열렬한 찬사와 그에 못지않은 비판을 낳았다. 그를 가리켜 ‘인문학계의 다윈’으로까지 떠받드는 추종자들이 한쪽에 있는가 하면, 그의 이론이 입증 불가능한 허구적 가설일 뿐이라거나 그의 이론의 귀결이 결국 보수적 기독교도의 신앙고백이라며 타매하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새롭게 번역돼 나온 <문화의 기원>은 지라르가 케임브리지대학의 이탈리아어학과 교수 피에라파올로 안토넬로와 리우데자네이루대학 비교문학 교수 주앙 세자르 데 카스트로 로샤와 나눈 대담집이다.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만큼 지라르의 사상과 생각을 평이하면서도 내밀하게 접할 수 있다. 대담의 거의 모든 장 머리에 지라르는 찰스 다윈의 <자서전>에서 뽑은 구절들을 배치했는데, 이는 다윈의 주저 <종의 기원>을 떠오르게 하는 책의 제목과 함께 ‘인문학계의 다윈’이라는 평가에 대한 그의 은근한 애착을 보여주는 듯하다.

 

 

대담의 앞부분에서 지라르는 자신의 학문적 생애를 회고한 다음 모방 메커니즘과 기독교, 그리고 테러 위기에 노출된 현대 사회에 대한 견해와 같은 핵심 주제로 넘어간다.

 

그는 우선 흔히 혼동하기 쉬운 본능과 욕망을 구분할 것을 요구한다. 음식물과 섹스를 향한 본능은 아직 욕망이 아니며, “어떤 모델에 대한 모방에 따라” 비로소 욕망이 된다는 것. 그는 나아가 “모방적 욕망만이 자유로우며 또 진정으로 인간적”이라며 “인간은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모방한다”고 단언한다. 지라르의 이론체계에서 모방이 부정적·소극적인 개념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모방이 없다면 교육도 없고, 문화 전수도 없고, 평화로운 관계도 없”다.

 

 

다음으로, 그는 신화와 기독교를 구분한다. 기독교를 포함한 넓은 의미의 신화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굳건한 믿음이다.

그런데 신화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는 신화가 가해자의 편인 데 반해 기독교는 희생양의 편이라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는 희생양 메커니즘의 정체를 처음으로 폭로한, 종교 이상의 종교이기도 하다. “기독교는 예수를 통하여, 폭력에 휩싸인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무고한 희생양을 살해하는 이 메커니즘의 정체를 널리 알립니다.” 그는 “(제가)기독교인이 된 것은 제 연구결과가 이렇게 인도했기 때문”이라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광신적인 반기독교주의나 반종교적인 몽매주의 때문일 것”이라고까지 단언한다.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보기에는 ‘이론에서 신앙으로의 투항’으로 보일 법한 대목이다.

 

테러가 ‘차이’ 때문이 아니라 ‘차이의 소멸’ 때문에 발생한다는 통찰은 일견 참신해 보인다. “테러의 원인은 그(=‘차이’)보다는 오히려 서로 하나로 수렴되면서 같은 것이 되고자 하는 지나친 욕망에 있”다는 것이 지라르의 견해다. 그러나 그가 세계화를 가리켜 “원래 부를 생산하여 사회 안정에 도움이 되는 경제 발전”이라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테러의 원인을 다만 뒤쳐진 경쟁자들의 비뚤어진 모방 욕망의 발현으로만 이해하는 데에서는 맹목적인 서구 및 기독교 우월주의의 냄새조차 맡아진다. <문화의 기원>은 지라르 사상의 기원과 전개, 특장과 한계를 두루 보여주는 책이다.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bong@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139219.html#csidx6a81e04888a5fb4aae6f1b78c6d9c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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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 유럽에선 ‘기독교를 구한 사람’으로 언급돼” | 철학 공부 2018-07-28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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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지라르, 유럽에선 ‘기독교를 구한 사람’으로 언급돼”

 

입력 : 2017.11.12 17:55

 

[크리스찬북뉴스 인터뷰] 르네 지라르 전문가 정일권 박사

 

현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인 르네 지라르 연구 전문가이지, 최근 <르네 지라르와 현대 사상가들의 대화>를 출간하신 정일권 박사님을 강도헌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이 만났습니다. -편집자 주

 

 

 

-먼저 박사님의 학위와 저서, 그리고 자기 소개를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독일 마르부르크(Marburg) 대학을 거쳐 유럽에서 르네 지라르 이론에 대한 학제적 연구 중심지로 성장한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교 조직신학부 기독교 사회론(Christliche Gesellschaftslehre) 분야에서 신학박사(Dr. theol.) 학위를 받았습니다.

 

저는 대체로 국내에서 2005년 '불멸의 40인'으로 불리는 프랑스 지식인의 최고 명예인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 종신회원에 선출된 르네 지라르의 이론을 중심으로, 동서양 사상을 문명 담론의 차원에서 비교 연구하는 학자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저는 지라르를 직접 2번이나 만나 연구와 관련해 학문적 대화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지라르는 프랑스 사상가로서 21세기 기독교 부흥을 이끌고 있다고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지라르가 기독교를 구했다고까지 말해집니다.

    

박사학위 이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교 인문학부 박사 후기 연구자(post-doctoral research fellow) 과정으로 학제적 연구프로젝트 '세계질서-폭력-종교(Weltordnung-Gewalt-Religion)', '정치-종교-예술: 갈등과 커뮤니케이션'에서 연구하고 귀국했습니다.


 

저서로는 지라르의 이론으로 불교 문명의 역설을 분석해 불교 연구의 신기원을 이루는 연구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독일어 단행본 <세계를 건설하는 불교의 세계포기의 역설- 르네 지라르의 미메시스 이론의 빛으로(Paradoxie der weltgestaltenden Weltentsagung im Buddhismus. Ein Zugang aus der Sicht der mimetischen Theorie Rene Girards(Wien/Münster: LIT Verlag, 2010))>가 있습니다. 이 독일어 단행본은 비서구권 학자로서는 최초로 르네 지라르의 미메시스 이론 연구 시리즈(Beiträge zur mimetischen Theorie) 제28권으로 출판됐습니다.


 

또한 박사학위 논문 '세계를 건설하는 불교적 세계 포기의 역설'은 획기적 혹은 신기원을 이루는(bahnbrechend) 연구로 평가받아 '세계질서-폭력-종교' 학제적 연구프로젝트로부터 출판비를 지원받아 출판됐습니다. 붓다가 은폐된 희생양이라는 최초의 주장이 이 책에 실려 있습니다.


 

책을 좀 더 진전시켜 <붓다와 희생양: 르네 지라르와 불교 문화의 기원(SFC, 2013)>을 출간했고, 이 책은 제30회 한국기독교출판문화상 목회자료(국내) 부문 최우수작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르네 지라르와 불교 연구에 있어, 저는 부족한 가운데서도 국제적 인지도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 독일어와 영어 단행본과 논문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하는 연구로 책이 인용되고 있으며, 독일어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와 한국어 위키백과, 나무위키 같은 온라인 백과사전에 주요 연구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또 니체 이후 100년 동안의 포스트모던-디오니소스적 전환을 비판적으로 분석한 <우상의 황혼과 그리스도. 르네 지라르와 현대사상(새물결플러스, 2014)>, <십자가의 인류학. 미메시스 이론과 르네 지라르(대장간, 2015)>, 그리고 <르네 지라르와 현대 사상가들의 대화: 미메시스 이론, 후기구조주의 그리고 해체주의 철학(동연, 2017)>을 출판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반신화다. 르네 지라르와 비교신화학>이 올해 11월 초반 혹은 중순에 출판될 예정입니다.

지라르 이론의 빛으로 폭력과 종교(Violence and Religion)에 대한 연구를 넘어, 최근에는 과학과 종교(Science and Religion) 분야도 연구하여 인문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통섭과 융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 연구는 우주의 기원과 문화의 기원을 화두로 빅뱅 우주론과 양자물리학, 미메시스 이론을 통합학문적으로 논의한 단행본도 출판 과정에 있습니다.


 

번역서로는 칼빈의 성령론에 대한 고전으로 평가되는 크루쉐(Werner Krusche)의 'Das Wirken des Heiligen Geistes nach Calvi'n를 번역한 <칼빈의 성령론(고신대학교 개혁주의학술원, 2017)>이 있습니다.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빙교수로 지라르를 강의했으며,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가르쳤습니다. 그 동안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이화여자대학교 대학교회를 통해 지라르를 소개했으며, 한동대학교, 고신대학교, 브니엘신학교 대학원에서 강의했습니다. 국내 많은 인문학, 철학, 신학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을 포함해 그 동안 20여 편에 가까운 논문을 출판했습니다. 그 외에 청어람아카데미, 현대기독연구원, 목회자 포럼, 인문학 서원과 여러 연구공간 등에서 르네 지라르의 이론과 사회인류학적 불교연구에 대해 강의했습니다."


 

 

르네 지라르 정일권
▲르네 지라르 박사와 함께한 정일권 박사. ⓒ정일권 제공

 

-원래 삼위일체에 관해 관심을 갖고 있다가 지라르 쪽으로 옮기신 걸로 아는데, 그 계기가 무엇인지요.


 

 

"저는 교의학과 조직신학 전공자로서 가장 고전적 신학 분야라 할 수 있는 삼위일체론, 특히 현대 삼위일체론의 르네상스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칼 바르트와 칼 라너, 위르겐 몰트만 등과 같은 신학자들의 삼위일체론을 연구했으며, 특히 삼위일체론적 존재론 그리고 삼위일체론과 양자역학 등의 관련성을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르네 지라르의 사유를 접하면서 큰 지적 충격과 도전을 받게 됐습니다. 특히 20세기 후반 풍미한 포스트모더니즘, 종교다원주의, 문화상대주의, 세속화 신학, 사신신학 등으로 수세적 위치로 밀리게 된 기독교 신학이 보다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자세로 자신감을 갖고 주류 인문학과 철학과 소통하고 대화하면서도, 보다 학문적으로 세련되게 기독교를 변증할 수 있는 큰 미래의 가능성을 미리 보았습니다.


 

2003년부터 시작된 오스트리아 알프스 중턱에서의 르네 지라르 이론에 입각한 불교 연구는 당시 저에게는 지적 모험과 도전이었습니다. 하지만 2005년 지라르가 '불멸의 40인'으로 불리는 프랑스 지식인의 최고 명예인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 종신회원에 선출되면서, 보다 안정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르네 지라르와 현대 사상가들의 대화>를 쓰시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 인문학과 철학계를 위해서라면 이 책이 제일 먼저 나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신학자이기에, 먼저 한국교회와 신학계를 위해서 저의 개인연구 분야인 <붓다와 희생양>, <십자가의 인류학>, <우상의 황혼과 그리스도>를 먼저 출판했습니다.


 

<르네 지라르와 현대 사상가들의 대화>는 보다 본격적이고 전문적으로 르네 지라르의 사상을,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로 분류되는 프랑스를 비롯한 일부 유럽 철학자들과, 포스트모더니즘과 니체주의를 점차 벗어나 유대-기독교적 사유를 철학적으로 재발견하고 있는 지젝, 바디우 그리고 아감벤 등과의 드라마틱한 대화 속에 소개하고자 했습니다.


 

지라르는 프랑스의 전 대통령인 사르코지 대통령과 올랑드 대통령이 자랑하고 추모하는 프랑스의 국민적 대학자입니다. 21세기 유럽과 서구 인문학과 철학의 이론 논쟁 중심에 서 있는 지라르의 근본인류학적 사유는 20세기 철학의 언어학적 전환 그리고 데리다를 비롯한 학자들의 사유에서 볼 수 있는 기호학적 전환 이후의 새로운 사유를 보여줍니다.


 

1990년대부터 프랑스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에 자리잡고 있는 니체주의가 점차 비판적으로 성찰되고 극복되고 있습니다. 프랑스 현상학 분야에서는 신학적 전환(theological turn)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014년부터는 니체를 계승하고 있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일기장인 <블랙 노트(Schwarze Hefte)>가 출판되기 시작함으로써, 프랑스 일부 학자들의 담론이었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더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20세기 철학에서 일어난 언어학적 전환 이후 혹은 데리다의 경우처럼 기호학적 전환 후 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전환에 대해 지라르의 이론을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기독교적 사유가 여전히 가장 생산성 있는 사유임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르네 지라르와 현대 사상가들의 대화

-2장에서 지라르를 '인문학의 다윈'이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라르 이전과 이후 인문학의 차이와 변화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지라르의 <문화의 기원>이라는 책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습니다. 20세기 후반 많은 학자들이 기호학과 언어철학에 몰두하고 있을 때, 지라르는 인류학자로서 보다 야심차게 인류 문화의 기원, 발전 그리고 개현, 언어의 기원 등에 천착했습니다.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최근 현대철학은 죽었다고 비판해서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책에서 다룬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적 사기에 대해 지적한 앨런 소칼과 같은 이론물리학자도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현대철학이 지나치게 언어철학에 천착 혹은 집착하고 있다고 지적했는데, 어느 정도 옳다고 봅니다.


 

지라르는 인류학적 깊이가 없는 현대 사유는 공허하고 허무주의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지라르 이후 21세기 인문학과 철학은 기호학적 전환과 언어학적 전환 이후의 포스트모던적 허무주의와 반실재주의(anti-realism)를 극복하고, 다시금 언어의 지시성을 회복하고 현실 세계의 '레알'을 사유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지라르는 '사회과학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지라르 이후 인문학은 보다 통합학문적 그리고 융합적으로 사유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던 학자들이 패러독스적 텍스트에 자의적 감명만 받으면서 '숨겨진 희생양'을 보지 못했다는 지적이 매우 날카롭게 느껴졌습니다. 역설적 논리 속에 숨겨진 폭력에 대해 간략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구조주의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도 '신화는 곧 언어'라고 하면서 신화를 언어구조주의적 관점에서 해독하려다 실패했고 신화 속 숨겨진 희생양을 보지 못했다고, 지라르는 비판합니다. <십자가의 인류학>에서 소개했듯, 폴 리쾨르도 자신의 신화이해에 있어 '빠진 고리(missing link)'는 바로 지라르가 말하는 희생양이라고 지라르와의 대화 속에서 인정하기도 했습니다.


 

지라르는 '신화의 수수께끼'를 자신의 희생양 메커니즘 이론 속에서 마침내 해독해 냈는데, 신화는 결국 희생양, 보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희생염소(scapegoat) 스토리이기에, 본질적으로 역설적이고 모순적이고 야누스적인 수수께끼입니다. 그래서 세계 신화의 논리는 일그러져 있는데, 그것은 신화가 고차원적인 지혜여서 역설적이고 모순적인 수수께끼가 가득한 것이 아니라, 마녀사냥의 텍스트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철학과 선문답에 가득한 온갖 종류의 '헛소리'와 패러독스들도 20세기 후반 반문화 운동과 포스트모던적 반대철학 운동 등의 영향으로 매우 고차원적인 것으로 새롭게 오해됐지만, 저의 불교연구에 의하면 그것은 희생염소(scapegoat) 역할을 하는 붓다들과 보살들의 보살행과 관련돼 있기 때문입니다."


 

-5장의 슬로터다이크를 다룰 때 불교의 창조적 포기(세계포기)를 질투의 글로벌화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독일의 국가적 철학자로 평가되는 위르겐 하버마스 이후 가장 대중적인 철학자로서 잘 알려져 있지만, 계보학적으로는 니체와 하이데거의 노선에 서 있는 학자입니다. 또 인도에서 요가 수행을 직접 했던 학자로서 니체를 따라 불교의 지혜를 철학적으로 낭만화하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슬로터다이크는 지라르의 독일어 번역본 후기(Nachwort)를 쓴 사람으로서 지라르에 대해 관심이 많은 학자입니다. 그는 지라르의 모방적 욕망이론을 언급하면서 사회심리학적·문화심리학적으로 질투의 글로벌화라는 새로운 현상에 대해 사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지라르 이론에 기반해 인도학과 불교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저로서는, 슬로터다이크는 불교의 '포기의 지혜'를 주는 희생양 역할을 하고 있는 세계 포기자들(world-renouncer, 붓다들과 보살들)의 희생제의적이고 비극적인 삶을 불교 텍스트 속에서 보지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 책은 포스트모던 사조의 황혼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 중 하나인 다원성과 상대성(다원주의, 상대주의와 다르다)은 앞으로 계속 영향력을 발휘할텐데, 지라르의 문화인류학이 절대성을 변호할 수 있을까요.


 

"글로벌화된 세계 속에서 다양한 종교와 인종이 소통하는 시대에, 문화적·종교적 상대성과 다원성은 온건한 의미에서 존중돼야 합니다. 지라르가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것은 상대주의의 독재처럼,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 같은 강한 의미에서 다원주의와 상대주의입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 철학 등과 같은 사조는 서구 대학이 그 존재 이유로 여겨왔던 진리(Veritas) 개념 자체를 부정할 만큼 반문화적이었고 반철학적이었습니다.


 

지라르가 전개한 이론논쟁을 통해, 20세기 후반 잠시 풍미했던 포스트모던적 반대철학(counter-philosophy) 운동과 반문화(counter-culture) 운동의 허무주의적 급진성은 21세기 유럽 인문학과 철학에서 점차 극복되고 있습니다. 지라르뿐 아니라 지젝과 바디우 같은 현대 주류 인문학자들이 그 동안 지나치게 추방됐던 유대-기독교적 텍스트와 가치를 사유적으로 재발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유대-기독교적 전통이 추구해 왔던 진리, 윤리, 논리, 그리고 이성이 철학적으로 재발견되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신지오.


 

"11월 초 르네 지라르와 비교신화학을 다룬 책이 출간됩니다. 그리고 우주의 기원과 문화의 기원을 화두로 빅뱅 우주론과 양자물리학, 미메시스 이론을 통합학문적으로 논의한 책도 출판할 생각입니다.


 

가능하다면 이후 영미권 학자들에게 지라르 이론에 기초한 불교 연구를 소개하기 위한 준비단계로, Scribd에 온라인으로 출판한 저의 책 <'무'의 불교철학을 해체하기: 르네 지라르와 불교문화의 폭력적 기원(Deconstructing the Buddhist Philosophy of Nothingness: Rene Girard and Violent Origins of Buddhist Culture)>을 다듬어서 단행본으로 출판해 보고 싶습니다."

대담: 강도헌 크리스찬북뉴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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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만들기의 정치학-르네 지라르 타계에 부쳐 | 철학 공부 2018-07-28 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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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양 만들기의 정치학-르네 지라르 타계에 부쳐

 

등록 : 2015.11.06 20:00
수정 : 2015.11.06 23:03

 

르네 지라르가 4일(2015.11. 04)  타계했다.

이 프랑스 사상가의 이름과 사상을 처음 접한 것은 1987년 출간된 김현의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를 통해서였다. 그 후 그의 책들을 읽으며, 나는 그의 생각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로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책은 많이 읽었지만, 세상이 “이렇게 돌아간다”고 말하는 책들 중 나는 지라르 이상의 탁견을 보여준 책을 별로 알지 못한다.

 ‘희생양’, 아마도 요즘말로 ‘이지메’ 혹은 ‘왕따’라 불러야 할 이 끔찍한 현상에 대한 이 이상의 탁월한 분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쉽지 않을 것이다. 이후로 나는 이 탁월하고도 정교하며, 실은 대단히 서구중심적이고 가톨릭적인 분석을 기회가 닿는 대로 글에서, 강의와 강연에서 소개했다.

 

지라르는 누구이며, 그의 이론은 어떤 것일까.

르네 지라르는 1923년 프랑스 아비뇽에서 태어났다. 지라르는 ‘15세기 후반 아비뇽인들의 사생활’에 대한 논문을 내고 파리의 명문 그랑제콜 국립고문서학교를 졸업한 후, 미국의 인디아나대에서 ‘1940-1943년 미국인들의 프랑스관’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다. 이후 존스홉킨스대, 버팔로의 뉴욕주립대, 스탠포드대 등에서 프랑스문학을 가르쳤다.

 

지라르는 라캉과 데리다 등을 초청해 미국에 최초로 포스트구조주의 사유를 소개한 것으로 평가 받는 1966년 존스홉킨스대 콜로키움 ‘비평언어와 인간과학’를 주관한 인물 중 하나다.

 

미국에 거주함으로써 동시대 프랑스 주류 사상계와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대서양을 오가며 활발히 활동하던 지라르는 2005년 엄격한 회원 선출 규정으로 유명한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종신회원에 선출돼 학문적 업적을 프랑스에서도 공적으로 인정받았다.

 

지라르의 대표작으로는 그를 문학비평가로 세상에 널리 알린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1961년), ‘폭력과 성스러움’(1972년), ‘희생양’(1982년), 대담집 ‘문화의 기원’(2011년) 등 30여 권이 있으며, 이들을 포함한 주요 저작 몇 권이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지라르의 사상은 문학비평으로 시작하여 일종의 사변적 인류학을 거쳐 문화와 종교의 기원에 관한 가히 문명비평적 연구로 끊임없이 확대되며 진화한다.

 

초기작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은 ‘모든 욕망은 모방적이다’ 곧 ‘욕망의 삼각형’의 테제를 세르반테스, 사드, 스탕달,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 프루스트 등의 문학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 입증하려 한 작품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충족되면 일정기간 동안 사라지는 동물적 ‘욕구’에 비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모든 인간적 ‘욕망’은 모방적이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은 중간의 ‘매개자(매개물)’를 가질 수밖에 없으며, 지라르는 이를 ‘인간의 욕망은 타인의 욕망을 모방한다’라는 테제로 정리한다. 지라르는 이러한 ‘불변의’ 진실을 보지 않으려는 자아의 유치한 욕망을 ‘낭만적’이라 부르면서 ‘참다운 소설’은 이러한 ‘끔찍한 진실’을 있는 그대로 우리 앞에 드러내어 보여준다고 말한다.

 

지라르는 대표작 ‘희생양’에서 이러한 주장을 전 인류와 문명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희생양 이론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온전히 희생양 곧 피해자의 입장에서 기술된 유일한 책인 그리스도교의 성서를 제외한 이제까지의 모든 책들은 가해자의 기록이다. 모든 인간사회는 동물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결정적 한 걸음에 해당되는 ‘초석적(礎石的)’ 폭력을 숨긴다. 달리 말해, 모든 인간 사회는 자신의 유지와 생존, 나아가 안정과 번영을 위해 사회 구성원들 중 일부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이 희생자는 다수와 다른 자인 동시에 약한 자, 곧 ‘실은 죄가 없으나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만 하는’ 자이다.

 

이 경우 가해자들이 ‘희생양’은 ‘실은 죄가 없는 희생양’임을 인식한다면 그를 ‘희생양’으로 몰 수가 없으므로, 가해자들의 의도적 혹은 무의식적 ‘무지’는 필수적이다. 가해자인 나는 피해자가 실은 죄가 없는 자라는 것을 몰라야 한다. 이제 사회의 불안정은 이 희생양에 의해 초래된 것으로 간주되고, 전체는 희생양을 희생시킴으로써 사회의 불안정한 상태를 타개하고 나아가 안정을 도모한다. 이러한 상태는 다음 번 위기가 올 때까지 유지되지만, 위기가 발생하면 사회는 또 다시 희생양을 선택하여 위기를 넘어선다. 이것은 물론 폭력의 구조이다.

 

지라르에 따르면 끔찍한 진실을 직시하고 이를 ‘있는 그대로 기술한’ 가톨릭의 입장만이 진실을 적어 내려간 것이다. 성서는 예수가 아무 죄도 없이 죽임을 당했으며, 이러한 일이 결코 반복될 수 없도록 그 실상을 기록한 유일한 진리이다. ‘문화의 기원’은 바로 이러한 ‘성스러움의 초석적 폭력’으로 작용하는 ‘희생양’의 논리에 의한 것이다. 오직 가톨릭의 진리, 예수만이 이러한 폭력의 만연 상태를 근본적으로 타파할 수 있는 구세주임을 받아들이는 그리스도교만이 진리이다.

 

서양인도 아니며, 더구나 종교가 없는 나로서는 가톨릭과 관련된 지라르의 논의를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인간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바깥 혹은 안에 자기와 다른 것, 곧 ‘악’으로서의 타자를 발명하여 그에 모든 문제를 전적으로 돌리고 마치 자신은 죄가 없는 듯이 행동한다는 지라르의 통찰은 받아들인다. 지라르의 ‘타인을 악한 희생양으로 만드는’ 세상에 대한 비판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나의 ‘순수’가 나와 다른 모든 타자들을 ‘불순한 악’으로 만든다는 통찰이다.

 

허경 대안연구공동체 파이데이아 교수ㆍ프랑스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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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마인드맵으로 보는 서양철학이야기 | 철학 공부 2018-07-12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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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간지 [-奸智, List der Vernunft ] | 철학 공부 2017-09-19 0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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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간지 [-奸智, List der Vernunft ]

 

 

헤겔은 역사를 현실 세계에서 인간의 행위들이 축적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이성이라는 보편적 이념이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목적 실현을 위한 방법을 헤겔은 이 '이성의 간지'라는 말로 표현했다. 역사는 '자유 의식의 진보'이며, 그 궁극목적은 세계에서의 자유의 실현이다. 자유의 실현은 확실히 특수한 관심과 정열에 기초한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실현되지만, 그 결과는 인간의 원망과 의도와는 다른 양상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역사는 인간의 행위로부터 독립된 자립적 운동을 전개한다.

이러한 모순을 헤겔은 역사의 배후에 자리 잡고 있는 이성이 스스로는 침해됨이 없이 인간의 정열을 제멋대로 활동시켜 자기의 목적 실현을 위한 수단으로 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인간도 전체의 한 계기에 불과한 것으로서 역사의 필연성이 관철되는 것을 역사의 본래적 과정이라고 간주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성의 간지는 주관적 목적이 어떤 객관에 관계하여 자기의 힘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다만 그 목적이 직접 다른 객관을 수단화하여 규정하는 직접적 관계에서는, 목적과 객관이 자립적인 다른 본성을 지니는 한에서, 그 규정 방식은 폭력처럼 보일 수 있고, 또한 그 직접적 관계에서 목적이 객관의 외면성에 맡겨지는 경우에는 목적의 규정 자체가 우연성에 맡겨진다. 이성의 간지는 이와 같은 객관과의 직접적 관계에서 객관을 폭력적으로 강제하는 것이나 단지 객관에 자기를 위탁하여 우연성에 맡기는 것이 아니다.

간지가 간지인 까닭은 "자기와 객관 사이에 다른 객관을 삽입하는 것"[『논리의 학』 6. 452]에 놓여 있는바, 다시 말하면 "자기는 과정에 들어가지 않고서 이러저런 객관을 그것들의 본성에 따라 서로 작용하고 지치도록 활동하게 하여, 더욱이 다만 자신의 목적만을 실현하는 매개적 활동에 놓여 있는 것이다"[『엔치클로페디(제3판) 논리학』 209절 「보론」].

-미즈노 다츠오(水野建雄)

[네이버 지식백과] 이성의 간지 [-奸智, List der Vernunft] (헤겔사전, 2009. 1. 8., 도서출판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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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세미나로 읽는 ‘윤리를 위반하는 윤리’ | 철학 공부 2017-06-23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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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세미나로 읽는 ‘윤리를 위반하는 윤리’

 


등록 :2017-06-22 19:23수정 :2017-06-22 19:33

 

 

미번역된 라캉 <세미나7> 강해서
‘텅빈 공백’으로서 주체·세계 탐구
안정화 아닌 ‘위반’ 추구하는 윤리

라깡의 인간학-<세미나7> 강해
백상현 지음/위고·2만5000원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란 구호를 내건 자크 라캉(1901~81)은 1953년부터 27차례에 걸쳐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을 가다듬은 내용으로 공개강연을 꾸준히 열었다. 강연록인 <세미나> 시리즈는 유일한 저작인 <에크리>(1966)와 함께 라캉의 사유를 들여다볼 수 있는 주된 경로다. 국내에는 <세미나1> <세미나11>만 완역 출간된 상태다.

 

라캉을 깊이 연구해온 정신분석학자 백상현이 <세미나7>에 대한 강해서를 펴냈다. 지은이 스스로 밝히듯 아직 국내에 번역조차 되지 않은 텍스트를 분석하고 강해한다는 것에 의문이 들 수 있다. 왜 이미 번역된 텍스트의 강해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지은이는 “<세미나7>이 라캉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텍스트이기 때문”이라며, “미번역된 텍스트이지만 이것을 소개하고 강해하는 것이 국내 학계를 떠도는 라캉에 대한 오독과 몰이해를 일소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해줄 것이라 믿는다”고 밝혔다. 지은이는 “지식이 아닌, 인간을 보는 관점”으로서 라캉 사유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어한다.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가 고향 테바이에서 추방당해 콜로노스에 들어서는 장면. 샤를 프랑수아 잘라베르 그림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연도 미상). <한겨레> 자료사진
안티고네와 오이디푸스가 고향 테바이에서 추방당해 콜로노스에 들어서는 장면. 샤를 프랑수아 잘라베르 그림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연도 미상). <한겨레> 자료사진

 

 

 

<세미나7>은 1959~60년 사이 24차례 연 세미나를 묶었는데, ‘정신분석의 윤리’라는 제목이 달렸다. 거칠게 말해, 정신분석에서 ‘주체’는 언어처럼 구조화된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환각이다. 인간은 쾌락을 소망하는 근원적인 충동(‘주이상스’)과 이에 대한 억압이라는 역설적인 관계 속에서만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라캉은 인간 심리의 중핵에 이런 역설을 불러일으키는 대상 또는 자리가 있다고 봤는데, 프로이트의 표현에 따라 그것을 ‘큰사물’(Das Ding)이라 부른다. 큰사물은 근원적 충동이 추구하는 쾌락의 대상이지만, 결코 기표로서 모습을 드러낼 수 없고 철저히 은폐된다는 점에서 모순적인 속성을 지닌다. 곧 “큰사물의 존재론적 위상은 공백”이다.

 

인간 심리는 이 큰사물을 중심으로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이 서로 교차하며 마치 건축물처럼 형성되는데, 여기서 라캉이 집중하는 대목은 그것이 윤리적인 구조를 지녔다는 점이다. 쾌락과 억압이라는 양극점이 현실을 만들어내는데, 여기서 억압은 ‘도덕의 명령’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쾌락원칙’이 끊임없이 쾌락의 좌표를 찍는 방향으로 주체를 움직인다면, ‘현실원칙’은 도덕에 기대어 큰사물을 악으로 가정하고 끊임없이 거짓말로 이를 감추려 한다. 인간 문명의 역사는 주체를 안정화하기 위해 이 두 가지 원칙을 서로 교차시키며 쾌락과 타협해온 역사라 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분석에 의해 커다란 구멍이 뚫리기 이전 문명이 자신을 지탱해온 축으로 삼아온 도덕과 윤리의 실체라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라캉의 구호는, 이처럼 주체를 안정화시키고 성숙시키는 데 골몰해온 ‘목자’의 도덕과 윤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로이트의 발견을 다시 되새기자는 취지라고 지은이는 주장한다. “주어진 도덕관념을 따르는 것은 결코 도덕적이지 않다는 사유는 프로이트가 아니었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윤리학과 심리학의 터닝포인트”라는 것이다. 때문에 주체가 자신이 사로잡힌 도덕규범과 초자아의 환상들을 넘어서는 것이 정신분석 이후 윤리의 과제가 된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한겨레> 자료사진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 <한겨레> 자료사진
   

그렇다면 라캉이 말하는 정신분석학의 윤리는 무엇을 향하는가? 그것은 도덕이 아닌 ‘위반’을 목표로 삼는, ‘위반의 도덕학’이다. 프로이트는 ‘승화’라는 개념을 통해 결코 만족될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 다른 대상으로 적절히 대체되는 상태를 말한 바 있다. 라캉은 이 ‘승화’ 개념을 아예 “욕망의 대상을 큰사물의 수준으로 승격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큰사물 자체를 욕망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충동이지만, “끝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다시 시작될 수 없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에 대한 분석은 이런 위반의 도덕학을 잘 드러내준다. 폴리네이케스의 매장을 금지하는 크레온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지상의 법’을 대표하지만, 그의 강박신경증적인 집착 속에서 가문과 국가는 몰락해간다. 반면 안티고네는 ‘지상의 법’ 속에 맴돌지 않고 오빠를 매장하겠다는 자신의 욕망으로 직진한다. 크레온보다 안티고네가 매혹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욕망을 규정하는 중핵(큰사물)을 실제로 보여주기 때문”이며, “그것은 이제까지 발화될 수 없었던 미스터리함을 내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지은이는 “죽음을 욕망하지 않는다면, 삶을 고정시키는 환영적 욕망의 기둥들을 무너뜨리지 못한다면, 새로운 삶은 시작될 수 없음을 주장하는 윤리”, 곧 ‘창조론적·발생론적 윤리”라고 말한다.

 

결론 부분에서 지은이는 <세미나7>을 포함한 20여년 동안 라캉의 지적 여정 전체가, ‘공백으로의 회귀’라는 움직임을 반복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라캉의 이론 속에서 우리가 진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특정 이론의 ‘의미’가 아니라 그런 운동 자체”라는 것이다. “라캉의 의미는 공백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는 무한 반복의 시시포스적 윤리를 실천하자는 의미를 가질 뿐”이라고도 말한다. 정신분석은 결코 환상의 봉합을 통해 증상을 소멸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으며, 법과 초자아가 무의식에 남긴 장벽을 위반하고 넘어서려는 반복적 시도들을 통해 주체가 끝내 자신의 증상을 즐길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99917.html#csidx21b013e34c3399d8db28ccfdaeb9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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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철학 | 철학 공부 2017-06-18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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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철학

       

최근 수정 시각:

이렇게 해서 우리의 발기 기관은 <향유>의 자리를 상징하게 됩니다. 그 자체로서도 아니고, 이미지의 형태로서도 아니고, 바라는 이미지에 결여된 부분으로서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발기 기관은 위에서 형성된 의미 작용의 (-1)^(1/2)에 해당하는 것이고 기표 (-1)의 결여가 가지는 기능에 대한 진술의 계수만큼 발기 기관이 복원시키는 <향유>의 (-1)^(1/2)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 첨언 : 말이 어려워보이지만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방법이 있다.
발기라 함은 여기서 상식적인 단어인 '고추'를 말하지는 않는다. 정신분석적 용어로 팔루스, 혹은 욕망의 대상,으로 보면 된다.


즉 첫 문장은 -> 이렇게 해서 우리의 욕망의 대상은, 향유, 즉 주이상스를 상징해서 우리의 정신에 놓이게 됩니다 -> 로 볼 수 있다.
다음 문장은 -> 팔루스, 즉 발기는 그 자체로서 (프로이트의 아버지 살해 이론을 참조)도 아니고, 이미지의 형태(상상계)도 아니고, 바라는 이미지의 결여된 부분 ( 즉 결여된 부분이 핵심인데, 비어있는 부분과 욕망을 배태하는 부분으로서의 상징계를 의미)으로서 말입니다.
여기서 라캉은 비어있는 부분을 지적함으로써 팔루스, 즉 욕망을 탄생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결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다음 문장 -> 그렇기 때문에 욕망하고자 하는 대상은 위의 형성된 의미를 무효화하면서 미끄러지는(허수)에 해당하며,
그 자체로는 아무런 기능이 없는 기표가 가지는 기능(즉 아무 것도 아니면서 욕망하게끔 유인하는)에 대한 진술의 정도만큼 욕망의 대상이 상징하고 유인하는 향유,(원초적 즐거움, 죽음 충동과 밀접한 욕망의 원인)에 해당합니다.

말이 굉장히 어렵고 난해해보이지만, 이는 기표를 가지고 장난을 치기를 좋아하는 라캉식 서술 때문에 그렇다.
간략히 정리하면 우리의 욕망은 상상계라는 이미지의 세계에서 탈피해 불완전하고 결여로 가득한 상징계로 내쫓기다시피 한다.
그러나 상징계로 우리를 유인하는 것은 동시에 우리의 환상을 완전히 만족시켜줄 수 있다는 팔루스, 즉 욕망의 대상 때문이다.
욕망의 대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차일 수도 , 여자일 수도, 직업일 수도 있다. 여하간 그걸 소유하면 우리는 완벽해져..라는 착각, 즉 실제로는 팔루스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바로 그 아무 것도 아님에 우리는 온갖 환상을 그려 넣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며 그 환상이 충족되는 꿈, 몽상, 소망, 염원에서 우리는 향유를 그려낸다.
하지만 이 향유는 완벽하게 충족될 수 없다. 그것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 이에 대한 서술은 후술됨.
그러나 이 아무 것도 아니면 완벽한 충족도 아닌, 즉 어중간한, 결여도 아니며 그렇다고 완벽도 아닌 이 어중간이 바로 상징계이며 정신분석의 목표는 바로 이 어중간함을 견디고 나아가는, 신경증 너머의 인간을 창조하는 것이다.

자크 라캉(Jacques Lacan, 1901. 4. 13~1981. 9. 9)의 철학.


혹은 그의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 라캉주의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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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자적 시선으로 보면 라캉철학이라기보다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재해석한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관점, 이라고 보는 게 더 타당하다. 라캉의 정신분석적 치료와 철학은 크게 보면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라캉이 많은 철학자들로부터 사유를 빌린 것은 맞지만, 상상계와 실재계 등 철학적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을 후기에 가서 자신의 중심으로 놓고 정신분석을 연구하였기 때문에 엄연한 관점에서는 철학이라 보기에 무리가 많다. 철학자들이 그의 사상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주변부만을 돌거나 일부분만을 맹공격한 들뢰즈-가타리의 사상만으로 라캉-지젝을 재단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1. 라캉은 누구인가?

2. 라캉철학의 근본 개념

2.1.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

2.2. 거울단계
2.2.1. 거울단계에 대한 논란

2.3. "성관계는 없다"

2.4. 주이상스

2.5. 증세
3. 한계

4. 국내 상황
4.1. 국내 분석
5. 국외 상황

1. 라캉은 누구인가?[편집]

라캉은 정신과 의사에서 시작하여 철학 및 정신분석학계에 손을 뻗친 사람으로, 그 스승격인 프로이트를 방법론적으로 채용, 보충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라캉은 프로이트의 미비한 부분을 보완하며, 다시 해석함으로서 프로이트를 계승하고 있다. 그의 강좌를 받아 적은 세미나[1] 시리즈에선 프로이트로의 귀환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있다.

프로이트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욕망, 무의식이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지표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즉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는 것이다. 욕망이란 틀 속에 억눌린 인간의 내면세계를 해부한다고 하여 정신분석학계는 물론 철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2. 라캉철학의 근본 개념[편집]

라캉철학은 그 논란성을 제쳐두고서라도 굉장히 난해하기로 유명하지만, 이는 본격적인 철학적 저술 중에 그렇지 않은 것들이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렇게 특이한 것도 아니다. 한국에서의 라캉주의는 라캉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 없이 2차, 3차 문헌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근본 개념들을 서술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사실 라캉이 까다로운 것은 그 사람이 몰고 다녔던 스캔들을 감안하면서 그 저작들을 판단하지 않기가 어렵기 때문인데, 자기가 앞장 서서 연구소를 만들었다가 해체를 시켜버리지 않나 당대의 유명 인사와 식사를 하면서 그들을 당황시킬만한 언동을 보이질 않나 기존까지 지켜왔던 룰을 자의적으로 바꾸질 않나, 그 기행들로 인해 그의 사상에 접근하는 것은 그런 것들도 함께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상의 시발점이 되는 개인 중에 자기가 살아온 방식과 관계가 없는 사상을 펼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이를 신경쓰지 않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라캉의 경우에는 그게 다른 비교적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삶을 살아온 사상가들의 그것보다는 확실히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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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의 사상은 세미나에 따라 나뉘는데 (권택영 저서, 자연과 인간 참조) 초기 세미나인 1에서 10에서는 주로 신경증자들이 상징계에 적응하고자 하는데 있어 어떻게 정신분석이 치유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들이다. 후기 세미나인 11에서 20은 라캉의 중점이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이동하며, 단순히 상징계에 안착시키는 것만이 정신분석의 목표가 아니라 그것을 와해하고 무마시키는 실재계에 대해 탐구하게 된다. 이후 21에서 23 세미나에서는 기존의 상징계로의 회귀뿐만 아니라 이를 넘어서는, 즉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넘어 자신만의 상징계를 창조하는(조이스의 생톰) 기제에 대한 일련의 연구 결과들이다.

또한 위의 서술에서 어렵지 않다, 고 하였지만 바로 그 어려움이 바로 라캉이 경계했던 '기표와 기의가 영원히 일치해 더 이상의 의미를 생산하지 않는, 즉 0, 죽음 자체'이다. 라캉의 사유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진동하며, 심지어는 과거의 확정적이라고 여겼던 의미들도 파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고정된 의미와 죽은 의미 하나로 물처럼 흐르는 사유를 재단하고 굳게 해 안정성을 느끼는 경향이 많다. 라캉에 대한 주된 비판들이 모든 세미나들이 동일한 흐름에서 지속된다는 착각 아래 거울 단계에 주목하는 이유도 그것.

2.1.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편집]

라캉은 자신의 정신분석학에 세 가지 계를 설정한다.

먼저 상상계는 사회와 구별되는 개인의 주체적인 영역을 가리킨다. 인식이 없으면 어떠한 사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모두 상상계의 인식을 통해 개인에게 받아들여진다. 이런 의미에서 상상계는 인간 개인에게 가장 근본적인 영역이다.

다음으로, 상상계의 반대에 상징계가 서있다. 상징계는 말그대로 현실의 영역이다. 라캉은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사회의 의미화를 벗어나려는 개인의 투쟁으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 라캉은 상상계가 상징계에 처음 포섭되는 과정은 상징계의 일방적인 우위로 이루어지며, 이후에도 상징계는 상상계보다 앞서 상상계의 의미를 규정지으며 절대적인 위치에 남아있는 듯 보인다. 다른 한편, 라캉에 있어 '욕망'이라는 개념도 이 지점에서 등장한다. 상징계가 상상계를 포섭하는 과정은 상징계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상계가 궁극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위치는 남아있지 않게 된다. 다시 말해, 상상계는 '결여'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그렇기에 상상계는 자신과 세계의 안정적인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지점을 꿈꾸게 되고, 이것이 바로 욕망이라는 형태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첨언하자면 라캉에 있어 '욕구'와 '욕망'은 아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욕구는 말하자면 상징화에 앞선 지점에 있고, 욕망은 상징화 이후에 등장한다. 간단히 말해 "밥을 먹고 싶다"처럼 본능적이고 필수적인 것은 욕구라 할 수 있고, "누구누구와 같이 즐겁게 밥을 먹고 싶다. 그러면 정말 행복할텐데.."는 것은 욕망이라는 것. 욕망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영원히 충족될 수 없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실재계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실재계는 상징계의 의미화 작용이 실패로 돌아가는 지점을 가리킨다. 상징계가 말할 수 없는 영역을 통해 상상계는 거꾸로 스스로 절대적인 위치라고 말하는 상징계를 '의심'하게 된다.

문제는 이 개념의 정확한 위치인데, 이 개념이 상상계(개인)과 상징계(사회)를 모두 넘어선 지점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슬라보예 지젝등은 이 개념이 상징계와 상상계 사이의 지점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즉, 상징계의 의미화 작용이 실패하지만 상상계가 인식할 수 있는 장소에 실재계가 서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앞서 욕망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바 있는데, 욕망이 향하지만 상징계가 충족시켜 줄 수 없는 지점, 바로 그곳에 실재계가 위치한다고 해석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헤겔주의적인 해석이라 할 수 있겠는데, 자세한 것은 슬라보예 지젝의 대부분의 저작을 참고.뭐라고요?

권택영 저서의 라캉과 자연을 정리.
'실재계란 텅 빈 죽음이다. 인간은 텅 빈 해골을 역으로 아름다운 것으로 도치시켜 미화한다. 그래서 종국적으로 인간은 죽음과 하나가 되고자 한다. 삶이란 지나치게 빨리 죽음으로 가지 않는 것이다. 도착적인 반복이 이에 해당한다. 삶충동이란, 죽음충동을 늦추고 다양하게 변주함으로써 삶을 살아가는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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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정신분석 전공자의 철학적 의미로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를 완전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항상 '자기 자신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하였기 때문인데, 철학을 구성하는 원리는 이성적 사유만으로 구성된 '또 하나의 상상계'에 가깝기 때문이다.
http://blog.naver.com/dali5804/220521513257
김서영 교수의 일반인을 위한 정의를 참고하면,
' 상상계는 그냥 '척'하는 거예요. "이미지에 살고 이미지에 죽는 것“ 강박적인것 히스테리 적인것 둘 다 약한 거거든요. 그게 다 상상계적인 전략이에요. 상상계는 약한 거, 상징계는 이 현실 자체를 상징계라고 불러요.'

+ 추가적으로 라캉은 상징계를 약화시키고 헐거워진 상상계와 실재계를 대체하는 개념으로서 '조이스의 생톰' 고리를 세미나 23에서 말한다.

2.2. 거울단계[편집]

라캉은 상상계 등의 근본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도둑맞은 편지의 비유 등 많은 예시를 덧붙여 놓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논란이 되는 비유가 바로 '거울단계'라는 개념이다. [2]

"거울 속 이미지를 마주하고 있는 아이는 아직 신체적으로 미숙하여 자기 몸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하는데 거울 속 이미지는 완벽함과 통일된 상으로 다가오고 아이는 그것이 자신의 이미지라는 것을 지각한다. 자신의 이미지를 대면하면서 아이는 외부 공간 속에 가시화되는 자신의 형상을 감각적으로 확인하기 때문에 커다란 환희와 안도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아이는 완벽한 모습으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형상에 도취되는데 이는 나르시시즘의 최초 순간이기도 하다. 아이는 환호하지만 아이가 이미지를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거울단계는 실제 몸의 감각과 그것에 대해 투영하는 이미지의 괴리가 은폐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시기 아이는 아직 운동신경과 몸의 운동 조절 능력이 미숙하여 실제 몸의 느낌은 통일되지 못함에 반하여 이미지는 완벽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 (김석, 『에크리』, 2006)

'거울단계'의 가장 근본적인 맥락은 아직 상상계적 작용에만 자신을 맡기는 아이가 처음으로 상징계가 제공해주는 이미지에 자신을 맞추는 데에 있다. 그렇지만 상징계의 이미지는 유동적인 것이고, 상상계는 그 앞에서 끊임없이 좌절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맥락은 이후의 라캉의 논의에서도 이어지기 때문에 라캉을 접해보려 한다면'거울단계'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2.2.1. 거울단계에 대한 논란[편집]

라캉이 스스로 자신의 철학을 "과학과 철학 사이"라고 말한 바, 라캉은 언제나 수많은 과학도들과 철학도 사이에서 논란거리가 되어왔었다. '거울단계'라는 개념 역시 논란들을 피할 수 없었는데, 이 항목에서는 과학도들과 라캉주의자들이 대립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선들에 대해서만 설명하기로 한다.

과학도들은 아이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자각하고, 또 소외된다는 실증적 근거가 없음을 지적한다. 한편, 라캉주의자들은 '거울개념'을 구성하는 상상계와 상징계라는 개념이 이미 과학의 방법론으로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등 이에 대한 반박을 시도한다. 라캉에 대해 과학과 철학이 대립하는 지점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전선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에 대한 논란에서,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은 라캉의 거울단계 이론이 등장한 것은 1936년으로, 이 시기까지 거울에 비친 상을 보고 자기를 인식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특질이라는 게 과학계 일반의 인식이었다. 인간 이외의 동물도 거울상을 보고 자기인식을 할 수 있다는 것은 1970년 고든 갤럽의 침팬지 실험에서야 확인되었다.[3]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런 식으로 과학적인 일단락이 있고 나서부터는 거울단계를 비유로써 보는 게 적합하다는 지적이 뒤를 이었다. 주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인데, 그런 이유로 과학이 아니라는 것. 나중에는 정신분석학을 수학에 비유해서 썼지만 이조차도 정확하게 그런 개념들을 설명하진 못했다.

2.3. "성관계는 없다"[편집]

"성관계는 없다"라는 문장은 라캉 욕망 이론의 핵심을 간단하고도 명확하게 표현한다. 리비도 등의 개념을 통해 욕망을 생물학적 방향으로 환원시키려 한 프로이트와 라캉이 바로 이 지점에서 갈라서기도 하는데, 라캉이 이 문장을 통해 말하려 하는 것은 "남녀는 모두 고자다"(...)는 게 아니라 "남녀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안정적인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성관계를 넘어, "존재와 세계는 절대 안정적인 합일을 이룰 수 없다"는 라캉의 철학적 맥락은 이후의 논의에서도 이어진다.

라캉이 말한 성관계는 없다는 것은 이상적인 그 자체로서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인데, 그 내용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회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면 그렇게 벌어진 일과 관계를 하게 되는데, 이렇게 관계를 하면서 개인들은 가능한 쾌락의 형식에 자기 자신을 집어 넣게 된다. 이를 쾌락원칙이라고 불렀는데, 이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을 타자에 종속된 주체로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타자에 종속된 개인들은 가능한 쾌락의 바깥에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존재하려고 하는데, 이를 정신분석학의 성욕에 대한 원리에 맞춰 성관계=존재로 보아, 존재는 개인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서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라고 본 것.

그래서 성관계는 없다는 것은 (개인이 원하는 방면으로 인식이 가능한)존재는 없다고 풀어 쓸 수 있다. 사실 이 발상 자체는 그렇게 낯선 것이 아닌데, 대표적으로 테오도르 아도르노부정변증법이라는 개념을 통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 그런 건 없다고 라캉과 비슷한 시기에 이야기한 바 있다.

이 문장에 한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인간이 성관계를 할 때의 상대방은 물리적으로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상대방이 아니라 자신이 상정한 객체라는 것이다. 쉬운 예로 성행위를 하며 다른 사람을 떠올린다거나,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체위나 성적 지향 등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다. 라캉은 이 예들에서 착안하여 무의식 중에라도 인간은 성행위를 하며 상상적 쾌락을 가미(사실상 상상적 쾌락 위주로)하여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약간 위의 말들이 꼬인 것 같은데, 간략하게 말하면 성관계는 완벽한 충족이자 만족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그것에서 도망친다. 완벽한 만족이란 곧 죽음이며, 욕망의 소멸이자 실재계=무, 0와의 합일이기 때문. 그러므로 인간은 끊임없이 성관계를 통해 만족을 추구하지만, 그러나 동시에 만족에서 도망치려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관계는 상상적이다. 완벽한 무언가를 추구하는데, 실은 이것은 해골(권택영 저서의 라캉의 자연과 인간 참조)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다. 아무 것도 아닌 해골에서 인간의 기표는 시작되며, 그러므로 인간은 해골을 해골 아닌 아름다움으로 보아야 한다. 완벽은 곧 완벽한 아름다움이며,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면 아름다움은 해골로 변질된다. 즉 죽음이다. 완벽한 성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나를 완전히 만족시키는 타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기를 인간은 원하지도 않고, 만족하는 순간 인간이 그 만족을 택할지도 의문이다. (택한다면 스스로 죽음으로써, 죽음 충동을 완성하려는 것이라 하겠다.)

2.4. 주이상스[편집]

라캉철학의 핵심 개념은 그래서 이 총체적인 흐름을 넘어서는 단 하나의 가능성을 찾는 것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뭐든 그렇게 총체적인 흐름으로 환원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 주이상스jouissance는 프랑스어로 즐긴다는 의미를 가진 영어 enjoyment와 유사한 의미를 가진 명사인데, 라캉에게 주이상스는 정해져 있는 쾌락을 넘어서는 것을 통해 찾아오게 되는 것이었다.

이 바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주체화의 욕동이 존재하는데, 이는 주체가 자기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판단하는 순간을 통해 찾아오게 된다. 이를 라캉은 환상의 횡단, 혹은 환상을 가로지르기라고 불렀는데 이를 통해 정해져 있는 쾌락원칙을 따르고 있던 개인은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판단하게 되고, 이를 통해 역사의 거대한 흐름에 일방적으로 종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기를 선택함으로써 역사의 흐름에 종속되기를 거부했을 때, 기표에 종속 되어 동물과 같은 순수한 쾌락이 불가능해진 인간에게 가능한 일말의 쾌락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캉은 바로 이 쾌락을 선택하는 것을 윤리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윤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될 수 있는 이상적인 지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정신분석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두산 백과의 정의를 참고하면, 주이상스는 역설적으로 완전한 번역이 불가능하다. 주이상스를 가리키는 기의 자체가 그렇기도 하지만 동시에 라캉 또한 완전하게 해석됨으로써 기표와 기의의 완전한 결합을 경계하였기 때문.
위의 주이상스에 대한 해석들은 라캉의 세미나들, 특히 세미나 23과는 무관하고 라캉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철학적 사유에 가깝다.
좀 더 정확하게는 라캉은, 상상계와 상징계가 아닌 실재계에 주목하였으며, 자신의 실재에 도달한 자만이 새로운 자신만의 상징계에 도달함으로써 현실을 재구성하고 현실을 변화할 수 있다고 보았다.
김서영 교수의 세미나 23에 대한 논문 참조 바람.
http://blog.naver.com/gradiva72?Redirect=Log&logNo=220652634648&from=postView

-위위의 설명과는 반대로, 우리는 주이상스를 어느 정도 억제해야 한다. (거세) 여기서 주이상스란 다름 아닌 죽음충동에의 합일에의 충동을 의미한다. 자기를 파괴하거나 엉망으로 만드는 것들도 모두 주이상스에 포함된다.( 마약이라든가, 난교라든가, 기타 등등 혹은 일반적인 증상들도 모두) 그러므로 증상은 곧 죽음을 지연함으로써 삶을 누리고자 하는 삶충동인 셈이다. 반대로 주이상스는 이를 가속화시키고 더 큰 짜릿함-고통을 느껴 그 한계를 돌파하려는 것, 즉 상징계에서 벗어나서라도 죽음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근원적인 충동을 말한다.

2.5. 증세[편집]

역사적 흐름 앞에서 개인은 무언가를 하려고 선택할 수 없는데, 자신에게 주어진 그 현실을 마주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삶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고 믿게 된다. 그렇게 한계가 정해져 있으니 어떤 것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그 한계 안에서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한계 안에서 살아가기를 선택하는 것은 라캉은 이것이 인간이기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믿을 뿐이라고 보았다. 이 믿음을 증세라고 하는데,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과정이란 이 믿음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다고 좌절했지만 라캉은 그것이 바로 프로이트가 발견한 정신분석이라는 방법론의 정수라고 보았다.

이를 넘어가는 최소한의 쾌락으로서의 주이상스를 설정한 것은 그렇다고 한들 다시 그것을 선택하는 것으로부터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라캉철학은 아도르노의 그것과 차이를 보이는데, 아도르노는 그렇기 때문에 이로부터 벗어나기를 선택해야 한다고 보았지만 라캉은 그렇게 살게 된 과정을 주체적인 차원에서 다시 긍정하는 것이야말로 윤리적인 결정이라고 보았던 것.

이 지점에 라캉철학이 지니는 윤리학적 의의가 있다. 정신분석을 통해 분석을 받는 개인[4], 분석주체가 자기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선택한 삶을 긍정하고 그 삶이 던지는 문제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이것과 마주할 수 있도록 분석가가 지속적으로 분석주체가 만들어낸 증세라는 환상과 마주하게 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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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환상을 가로질러야 한다. 여기서 가로지른다 함은, 본래부터 환상이라 함은 유아기때부터 부모의 욕망( 혹은 세계의 욕망)을 이해할 수 없는 분석주체가 그것들을 설명하고 하나로 엮기 위한 사유들, 관점들인데, 신경증자라 함은 바로 이 환상이 자기파괴-혹은 신경증적으로 자기를 파괴하거나 조화되지 못해서 오는 고통들이다. 가로지른다는 의미는 곧 자신의 환상을 파기하고, 또 환상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것에 불과하며, 또 동시에 아무 것도 아닌 것들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다 (부모가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한 것 같지만, 그러나 결국 그것은 나의 해석에 불과하며, 또 부모 또한 자녀인 나에게 무엇을 욕망하는지 본인조차도 모르는)는 진실에 직면함으로써, 공백 앞에 서고 동시에 그 공백이 오는 근원적인 공허함을 견디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캉에 의하면 사실이란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어떤 현상에 대한 해석들의 다양한 판본들밖에 없다. 하지만 스스로 그 판본을 창조하고 그것을 책임짐으로써(즉 그것이 거짓이고 환상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살겠다-라고 결심함으로써) 인간은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고 신경증에서 탈피해 자신만의 증상(즉 생톰)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게 된다.

3. 한계[편집]

라캉은 정신분석학, 철학 모두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하지만 이는 라캉의 지나친 교조화 때문에 영향력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남미에서는 라캉주의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5] 한국에서는 이상한 종교 집단처럼 되어버린 식이다.

프랑스 철학계에서는 포스트 구조주의로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다. 구조주의가 대세였을 시절, 라캉은 레비스트로스, 바르트, 푸코 등과 함께 구조주의의 거두로써 구조주의를 비판하며, 포스트 구조주의를 일으켰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정신분석은 정신분석 따로, 구조주의를 비롯한 철학적 사조는 그것대로 따로 움직이고 있는 데에다, 구조주의 자체에 대한 비판은 너무나 평범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라캉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프래그머티즘 철학에는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했다. 그리고 미국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에 북미의 경향을 따라가는 한국의 철학에도 비교적 협소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장 미국의 유수 대학의 철학과 교수들이 편집한 주요 현대 철학 논문들을 엮은 핸드북에서 라캉의 이름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애초에 철학과 대립중인 정신분석학은 프래그머티즘 철학 조류에서는 언급 될 가치조차 없는 것. 굳이 라캉의 연구주제를 미국에서 현재 분류하고 있는 분류법에 맞춰 분류하자면 심리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현대 심리철학의 최대 쟁점 중 하나인 물리주의 논쟁에 라캉이 기여한 바는 전혀 없다. 물론 라깡이 살았던 시기가 시기인만큼 현대 논쟁에서 비껴서 있는 건 어쩔 수 없다.

이 같은 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학이나 철학계에서는 잘만 쓰이는데, 문학의 특징상 상상이나 실제 등과도 관련된 상징체계(언어)를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학계에서도 상징계나 초자아나 다 도덕적인 행동들을 설명하기 적확하다. 특히 욕망의 의미를 셋으로[6] 나눈 점 등에서 철학적 의의가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장 정신분석학과 철학이 대립하게 된 직접적 계기가 라깡철학 때문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로 인해 비평에 대한 공부를 한다면 한번쯤은 접하게 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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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은 정신분석학자이며 철학자가 아니다. 라캉의 정신분석, 즉 신경증자나 정신병자를 치료하기 위해 사유한 방법론이나 고찰들을 철학계에서 '사실상 일방적으로' 끌어다가 비판하고 물어뜯고 한 것이다. 라캉과 정신의학이라는 책에서 인용한 바로 라캉은 항상 '나의 목적은 정신분석가를 양성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지금도 그렇다.'라고 한데서 알 수 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라캉의 의도한 바를 참고해서 적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라캉은 철학, 즉 라캉의 주인담론이나 대학담론을 위해 정신분석을 연구한 것이 아니다. 환자를 치료하고 환자가 자신의 신경증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한 것들이지, 철학자들의 상상계에 적용하기 위한 것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의 평들은 조잡하다고 볼 수 있다. 라캉의 의도가 아니라 라캉에 대한 해석들이나 아류들을 라캉이라 착각하고, 또 영향력만으로 재단하고 있다.

김서영 교수의 논문을 인용.
"라깡의 글들은 대게 정신분석의 임상과정에 연결되어 있으며 심지어 그는 『햄릿』과 같은 문학 작품의 분석에 있어서도 히스테리, 또는 정신 강박 등의 임상적 소재를 다루고 있으므로 앞에서 거론된 라깡의 삼계를 임상과 무관한 사회학적 또는 정치적 맥락에서 다루는 것은 라깡 자신의 정신분석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임을 밝혀둔다."
[출처] 김영하론을 위하여: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는가>|작성자 gradiva72

4. 국내 상황[편집]

정신분석학덕에 갑자기 한국일본에서 교양있는 사람의 필수 덕목이 되었다.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문학과에서 더 유명한 학문이 되었고, 철학으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국내에 제대로 번역도 되지 않았을 뿐더러 라깡의 사상은 라깡의 개인적 구어에 종속되어 있기에, 문어로써 변환이 불가능하고, 다른 언어로의 이행 또한 불가능하다고 한다. 언어의 본질적인 속성상 라깡의 사상이 전달되는 것도 100%는 불가능하다고는 하는데, 일단 라캉이 생전에 했던 말이나 썼던 문장이 그리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 본인이 직접 에크리와 같은 저서에서 말하기를, 내 글은 읽혀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럼 대체 뭘 위한 것이라는 거냐

사실 이는 컨텍스트를 생각하면 그럴만 하다. 대체로 어떤 사건 속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것들은 그 사건 자체를 바깥에서 바라보고 난 이후에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건데, 헤겔의 말마따나 이런 건 그 일이 끝나고 나서야 판단이 가능하다. 생전에는 그 말과 행동이 판단 대상이 안 된다는 걸 이미 전제해 두고 있었던 것이라고 보면 그럭저럭 납득할 수는 있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사실인 건데, 굳이 그걸 부각했을 뿐이니.이런 경향 때문에 헤겔이고 라캉이고 간에 영미 쪽에서는 개소리하지 말라고 화낸다.

4.1. 국내 분석[편집]

라캉철학의 유입 경로는 철학 영역이라기보다는 영미의 문학/문화비평 계통이다. 물론 비평이론을 철학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고, 또 비평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철학 이론가라는 점을 들어볼 때, 이는 어찌 보면 상당히 당연한 것이다.[7] 문화비평을 하는 영미 계통의 인문학자들에게 이른바 "라캉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그대로 한국으로 넘어온 셈이다. 그러나 국내 기준으로 얘기하자면 역시 들뢰즈, 데리다, 롤랑 바르트, 라캉 등의 학자들을 철학이라고 하거나, 철학과 교수나 학생들에게 이들에 대해 물어본다면 ㅡㅡ;; 같은 반응이 보편적이다. 즉 비평이론과 철학이 분리가 안 되는 것은 맞지만 비평이론이 곧 철학이라기에는 상당히 애매한 측면이 있다. 더군다나 국내에서 이들 학자들이 부각되는 부분은 이들의 철학적 부분보다는 문학이나 문화비평 부분이다. 즉 뭐 이런 학자들은 철학으로서 연구되기보다는, 문학이나 문화비평 쪽에서 도구적으로 이들의 철학 중 일부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들을 언급하는 한국어 텍스트는 철학적인 부분이 많이 결여되어 있다. 요컨대 이들의 학문이 철학이 아니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이들에 대한 한국어 텍스트는 철학적인 성격이나 검증이 상당히 미진하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재언하지만 문학이나 비평 쪽에서 이들의 이론에 대해 철학 쪽에 종종 물어보는 경우가 있지만 철학 쪽에서도 별로 대답하지 못한다. 애초에 프랑스 철학을 하겠다고 유학가는 사람도 상대적으로 드물고...

5. 국외 상황[편집]

슬라보예 지젝이 라캉을 열렬히 옹호하며 헤겔과 연역하여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사상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남미에서는 라캉을 포함한 유명 정신분석학자들의 영향력이 상당하다고 한다. 남미 특유의 정치 상황이 소규모 단위를 통해 진행되는 민주주의 운동의 시발점이 되고 있다는 것. [8] 여기서 정신분석을 진행하는 분석가가 지역 사회의 문제에 중심에 뛰어들 수 있는 매개로서 작용하는데,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적인 유물론적 접근법이 시행되고 있다는 이야기.

이에 따르면 분석가에게 분석을 받는 개인들이 이를 통해 자신의 문제와 마주할 수 있게 되는데, 이 문제라는 것이 소규모 단위에서 진행되는 감정의 교류가 막혀 있는 상황을 풀기 위한 매개가 되고, 이를 통해 특수한 유물론적 문화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개개인이 자기 스스로의 욕망을 분석하고 타협된 선에서 실행하는 사회는 실제로 라깡이 제시한 유토피아에 가깝다.

세계정신분석학회나, 한국 정신분석학회에서 프로이트 이야기가 나오면 필연적으로 라캉의 이론과 결부시켜서 논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현대 정신분석학에서 프로이트가 갖는 위상에 대해 의문을 표시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학회들이 정통 프로이트 주의를 표방하지는 않는다. 거기에 심리학에서는 공식적으로 정신분석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실험과 통계를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지며 자연과학에 가까운 연구방식을 채택하는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분석학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연구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정신분석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심리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주류 철학은 정신분석과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 애초에 전제 자체가 판단 불가능하다는 무의식을 깔고 들어가는 정신분석학과 판단 가능한 것인 자아에서 시작하는 현상학, 그리고 이해 불가능한 것을 세분화하는 정신분석학과 이해 가능한 것을 총체화하는 체계화 철학이 서로 부딪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극렬하게 나타나고 있는 나라가 프랑스.

[1] 사위인 자크 알렝 밀레가 주도를 해서 출판중.[2] 이는 후기 라캉에서는 별로 중요한 개념은 아니다.[3] 물론 인간과는 달리 자기인식 이후에 더이상 거울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4] 라캉주의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분석주체라고 부른다[5] 하지만 남미 라캉주의자들조차도 영미로 수학하러 떠났다가 라캉주의의 실증성에 회의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6] 각각 '타인이 욕망하는 대상'(불필요한 명품 및 사치품 등)을 욕망, '타인의 욕망'(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 등이 누리는 인기)을 욕망, '타인'(애정이나 소유욕 등)을 욕망한다고 보았으며, 이를 모두 함축하여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하였다.[7] 데리다, 들뢰즈, 바르트 등 대부분의 프랑스 현대 철학자는 비평가를 겸하고 있다.[8] 출처 : Marx and Freud in Latin America: Politics, Psychoanalysis, and Religion in Times of Terr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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