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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하준 - 책과 토론
강한 개발국가 복원?…장하준의 새로움과 구태의연함 | - 장하준 - 책과 토론 2011-03-05 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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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프레시안 www.pressian.com>

강한 개발국가 복원?…장하준의 새로움과 구태의연함

[기고] 장하준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4)

기사입력 2011-03-04 오후 2:59:05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한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이 출간된 지 석달도 안돼 30만 부 가까이 팔리면서 한국사회에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시장주의를 신봉하는 한나라당에서도 장 교수를 불러 특강을 들을 정도로 '장하준 바람'이 거세다.

시장주의를 넘어서 복지국가로 가자는 장 교수의 주장은 큰 틀에서 진보적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을 감안하건데 그의 주장에는 '빈 구멍'이 있다. 이에 대한 글을 이병천 강원대 교수가 보내왔다. <편집자>

1. <23가지>의 제도론적 성장론: 정부-기업 협력론

장하준의 <23가지>는 자유시장주의의 맹점과 허구성을 비판한 책이다. 그렇지만 비판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더 나은 자본주의의 대안을 제시한다. 우리는 앞선 글에서 복지국가론을 중심으로 <23가지>의 더 나은 자본주의 대안에 대해 살펴 본 바 있다. 여기서는 성장론 자체로 좁혀 장하준의 더 나은 자본주의 대안이 무엇을 말했고 또 무엇이 빠졌는지 보려고 한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23가지> 성장론의 핵심이 "제도가 중요하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고, 그 요점은 성장 요소와 성장 요인을 구별하는 데 있다고 지적한바 있다. 그렇지만 제도라는 게 그리 간단한 게 아니다. 어떤 제도가 어떻게 중요한지, 제도들간의 상호관계는 어떤지, 개별 제도들을 하나의 페키지로 전부 묶어놓았을 때 어떤 모양이 나오는지, 제도와 정치, 제도와 권력, 제도와 문화의 관계는 어떤지, 그리고 제도는 어떻게 생겨나고 역사적으로 진화하는지 등을 따져 보아야 한다.

<23가지>에서 장하준은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여러 제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예컨대 기업의 중장기 투자와 리스크감수를 장려하는 제도, 유치산업을 보호 육성하는 교역정책, 장기적 생산성 향상을 위해 "인내 자본"을 제공하는 금융시스템, 자본가에게 기회를 주는 파산법과 함께 노동자에게도 동등한 의미를 갖는 복지제도, 연구 개발과 노동자 훈련에 관한 공공보조금 제도 및 규제정책 등이 그런 것이다(p.250). 이 이야기를 들으면 <23가지>가 제시하는 성장론의 기본틀이 어떤 것인지 독자들의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이 성장론의 틀에서 가장 중요한 기둥은 아무래도 기업 그리고 정부다. 그래서 필자 더러 저자의 제도론적 성장론을 한 마디로 요약해 보라고 한다면 "정부-기업의 협력"론이라 말하겠다. 이에 대해 장하준이 말하고 있는 중요 대목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Thing17: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구성원 개인의 교육수준이 얼마나 높은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각 개인을 잘 아울러서 높은 생산성을 지닌 집단으로 조직화할 수 있냐에 달려 있다. 이런 조직화의 결과는 거대기업일수도 있고 중소기업일 수도 있다"(250)
Thing 15: " 부자나라에서는 기업간의 협력이 가난한 나라보다 더 잘 이루어진다. 심지어 동일 업종에 종사하는 기업간에도 그러하다"(220)
Thing12 : " (유망산업을 선별하는) 가장 성공적인 경우는 기업과 정부가 협력해서 선택했을 때이다. 민간, 정부, 민-정협력 등 모든 형태의 유망주 선별에는 성공과 실패가 따르기 마련이고, 그 정도도 다양해서 가끔은 엄청난 성공을 부르기도 하고, 처첨한 실패로 끝나기도 한다. 민간기업의 유망주 선택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묻혀 그 너머를 보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정부가 주도하는, 혹은 정부와 민간의 협력으로 추진할 수 있는 경제발전의 거대한 가능성을 모두 놓치고 말 것이다"( 183).

위의 구절들에서 저자는 나라가 번영하는 데는 기업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영웅적 개인- 마이크로크레디트를 창안한 무함마드 유누스같은 사람이라해도-이나 엄청난 교육투자같은 개별 '성장요소'들도 기업 조직이 제대로 세워져야만 지속적인 성장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 따라서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되도록 정부가 각종 지원을 잘 해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이야기의 반쪽에 불과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지속가능한 성장과 번영에서 사기업의 적극적 역할에 대한 논의가 매우 적다는 것이다. 사실 기업의 지원에 대한 이야기도 별로 많지 않다. 이것은 독자들에게 좀 의외로 보일수 있다. 오히려 < 23가지>의 정부-기업 협력론은 정부의 주도적 역할과 기업의 자유에 대한 규제를 더 강조하고 방점을 찍고 있다. 그런 위에서 정부와 기업의 협력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23가지> 성장론의 아주 중요한 특징이 아닐수 없다. 구체적으로 적어도 다음 두 가지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장하준은 기업의 자유를 규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기업에 좋은 것은 나라경제에도 좋다, 따라서 기업에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장하준은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Thing18: " 기업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은 국민경제에는 말할 것도 없고 기업 자신에게도 좋지 않을 수 있다. 모든 규제가 기업에 해로운 것은 아니다. 때로는 천연자원이나 노동력과 같이 기업들 모두가 필요로 하는 공동의 자원이 파괴되지 않도록 개별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기업 부문 전체에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기도 한다. 또 개별 기업에 단기적으로는 손해를 끼칠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 기업 부문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는 규제도 있을 수 있다. 노동자 교육규정 같은 것이 그런 예이다".( 252-3).

둘째, 뿐만 아니라 저자는 민간기업보다 오히려 국영기업이 잘 운영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설명하고 있다. 대기업 및 재벌의 존재와 역할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GM을 빼고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심지어 한국의 경우조차도 현대삼성보다 주로 포스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thing12,"정부도 유망주를 고를 수 있다").
▲ 장하준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2. 장하준의 용기

장하준의 제도론적 성장론의 열쇳말은 정부주도와 공기업, "민-정 협력", 그리고 규제다. 이는 세계화 시대- 적어도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이전까지- 열쇳말인 민영화, 무한 경쟁, 규제 완화와는 정반대로 가는 노선이다. 세계화의 시대는 무한경쟁의 시대이고 각국은 저마다 해외자본, 다국적 기업을 유치하기 위해, 또 자국 자본의 경쟁력을 높힌다고 규제 완화 경쟁에 나섰다. 이른바 서로 "바닥을 향한 경주"( race to the bottom)를 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규제완화가 선(good)이고 규제는 악( bad)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게 되었다. 물론 <23가지>의 생각은 한국에서 규제완화 일변도로 나가는 "자유기업"론과 대립한다. 한국경제연구원을 비롯하여 보수시장주의자들이 이전에는 줄곧 장하준을 반기다가- 장하준도 때로 그들과 말을 섞기도 했지만- 이제는 비판하고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송원근 강성원, <계획을 넘어 시장으로-'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견해>를 보라).

자유시장주의자에 의해 "죽은 개"로 취급당한 국가를 복원시켜 세계화 시대에도 여전히 국가의 산업정책적 기능이 매우 중요하고 민영화가 능사가 아니며 공기업도 잘 운영될수 있다는 것, 국가와 기업의 협력이 발전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좋은 기업은 분명히 나라번영과 공동의 부 창조의 제도적 기초이지만 사기업에 좋은 것이 곧 나라경제에 좋은 것은 아니고 따라서 국가의 기업에 대한 규제가 필수적이라는 것, 세계화 시대에 이런 식의 주장이란 아무나 할수 있는게 아니다. 철없는, 물정모르는 바보로 취급당하기 일 쑤다. 따라서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또 마르크스의 <자본론>같은 걸 가져와서 주장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자로서 전문적 지식을 갖춰야 한다. 장하준교수 정도의 명성이 있고, 바야흐로 2008년 위기이후의 전환시대라서 <23가지>가 호응을 받고 자유시장주의자들도 만만하게 보기 어렵게 된 것이다.

일반 "경제 시민"을 염두에 둘 때, 장하준의 견해가 얼마나 시류를 거슬러 가는 논변인지는 예컨대 경제학 원론 시장을 거의 제국주의적으로 휩쓸고 있는 <맨큐의 경제학>과 비교해 보면 곧바로 알 수 있다. <맨큐의 경제학>은 전부 36 개장으로 분량도 무려 1000 페이지가 넘지만, 이 책에서 산업정책과 공기업, 정부와 사기업간의 협력, 정부의 사기업에 대한 규제 등의 문제에 대해 비중 있게, 긍정적으로 다룬 부분을 찾기란 마치 산에서 고기를 잡는 격이 될 것이다. 맨큐는 신케인즈주의 경제학 계열의 학자라고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맨큐의 경제학>의 내용은 대부분 자유시장 경제학으로 채워져 있다. 우리는 맨큐가 조지 부시 대통령 시절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직을 맡은 경력의 소유자며, 부자감세를 통한 경기부양을 지지한 인물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와 또 다른 예로서 이준구 교수가 쓴 <시장과 정부-경쟁과 협력의 관계>(다산출판사, 2004)를 들어 보자. 이교수는 자유시장주의자는 아니며 합리적인 "중도시장주의"적 견해를 펴는 학자로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 사업" 등 한국경제 여러 현안에 대해 지혜로운 발언을 많이 했다. 그는 시장과 정부는 경쟁과 협력의 관계에 있다고 보면서 특히 분배의 공평성과 경제의 안정성에서 정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함을 힘주어 강조한다. 이는 확실히 <멘큐의 경제학>과는 매우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가지>에 비한다면 <시장과 정부>는 정부의 역할에 대해 여전히 소극적임을 부정할 수 없다. <23가지>가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의 전통에 줄을 대고 있다면, <시장과 정부>는 여전히 주류 시장경제학의 전통에 줄을 대고 있다고 하겠다. 이런 비교를 통해서도 우리는 <23가지>의 제도론적 성장론이 얼마나 주류와 이질적인 "용기있는 선택"인지 알 수 있다.

3.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것

이제부터 <23가지>에 빠진 것, 불만스런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우선, 저자가 말하는 "유능한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23가지>는 여러 역사적 경험들을 제시하고 있다. 또 그동안 자유시장주의자들이 "국가 죽이기"로 일로매진했기 때문에 막대를 반대방향으로 굽혀 "국가 살리기" 논의를 폈다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떤 국가든 저자가 말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유능한 국가가 될수 있는 것이 아니고,중립적인 "공익"을 수행할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냥 "국가도 성공할 수 있다"가 아니라 유능한 국가를 가질 수 있는 역사적, 정치사회적 조건이 뭔지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있어야 할 것이다. 유능한 지도자를 만나면 되는가? 유능한 관료가 있으면 되는가? 관료와 사기업이 잘 맞추어 나가면 되는가? 혹은 잘못된 비유일지 모르지만, 청와대가 재벌총수들을 불러 엄포를 놓으면 되는가 ? 아니면 아래로부터 노동 세력의 강제나 시민사회의 감시 규율력이 있어야 되는 것은 아닌가? 즉 국가가 자체적으로 어떤 조건들을 가져야 하는지, 또 어떤 사회적 기반, 세력적 기반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것이다.

둘째, <23가지>가 제시하는 국가와 사기업의 협력('민-정협력')론 및 국가의 기업 규제론에서 열쇠말은 "협력"과 "규제"라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협력-규제론에 빠진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규율"의 문제다. 정확히 말해 공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미시적으로 기업조직, 거시적으로 자본계급을 규율하는 문제가 있다. 기업도 잘되고 나라경제도 잘되기 위해, 사기업에 좋은 것이 나라경제에도 좋는 것이 될수 있도록 이러저러한 규제가 필요하다고 말하기는 쉽지만 실행하기는 어렵다. 좋은 규제는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는 통상 정보경제학에서 말하는 "정보 실패" 수준의 문제를 넘어, 권력구조의 문제, 강제력의 문제가 개제되어 있다. 국가도, 자본도 구조화된 권력체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사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수단(예컨대 금융통제)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 성과가 미달하거나 기업이 스트라이크할 때 지원을 철수하고 자원을 재배분하는 정치적 강제력을 발동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국가의 조절 능력은 필수적으로 강제능력을 포함해야 하며, 성공적인 산업정책의 정치경제는 기업과 자본계급을 "규율"할 수 있는 '제도적 강제체제'( Institutional systems of compulsion)를 갖추어야만 하는 것이다.(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 M.H.Kahn & S.Blankenburg, " The Political Economy of Industrial Policy in Asian and Latin America" ,in M.Cimoli,G.Dosi, J.E.Stiglitz ( eds.) Industrial Policy and Development,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그리고 발전의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우리는 개발국가가 권위주의 국가이기도 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이 권력-규율 수준의 문제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할지 모른다. 잘 아다시피 권위주의 개발국가는 노동에 대한 통제국가인 동시에 자본에 대한 통제국가이기도 하다. 우리는 자본과 노동을 동시에 통제하는 개발국가가 권위주의국가가 아니고 어떻게 가능할지, 권위주의 국가가 아니고서 어떻게 자본권력에 대한 규율을 강제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민주적 사회기반이 약한 조건에 있을 때는 어떻게 될까? 해당 사회구성에서 국가와 시장, 기업의 관계와 함께, 국가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나는 <23가지>의 제도론적 성장론에는 이와 같은 권력과 규율 지점의 까다로운 논의가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는 단지 장하준에만 빠진 것이 아니다. 국제학계 전반의 개발국가론의 경우도 사정은 별 다를 바가 없는 것같다.

셋째, 위와 관련되는데 나는 <23가지>가 국가의 능력에 너무 과도한 짐을 지우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는 한국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들의 정치적 민주화이후 경과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정치적 민주화이후 자본세력에 대한 규율력 그리고 갈등 조절의 능력은 어디서 나오나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국가에 조절 부담과 규율 부담이 과도하게 집중되고 노동과 시민사회를 통제,억압해 왔다면, 민주화이후 자본세력을 통제,규율할 역사적 힘이 형성되기 어렵게 된다. 노동세력이나 시민사회의 힘이 미약할 때, 그래서 민주화이행이후 약한 국가, 약한 노동-시민사회, 강한 자본세력의 구도가 될때 재벌권력은 고삐풀린 자본의 자유를 주장하고 나설 수 있다. 민주화가 오히려 국가의 조절-규율 능력의 후퇴를 가져오고 그래서 대자본을 통제할수 있는 새로운 민주적 규율체제,제도적 강제체제를 수립하지 못하면, 나라경제와 국민대중의 삶이 대자본의 볼모로 붙들릴 위험이 있다. 한국의 경우, 바로 여기에 정치적 민주화이후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어렵고 경제적 자유화와 양극화가 진행되는 이른바 "민주화의 역설"이 나타난 조건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소급한다면 그런 역사적 함정을 파놓은 "개발국가의 딜레마"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노동세력이 미약한 한국 및 동아시아 "개발주의"와 다른 한편으로 노동세력이 정치적 주체로서 진출하고 노사정 합의가 제도화된 유럽의 "사회적 합의주의"는 근본적으로 정치적 구도가 다르고, 복지국가로 가는 길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23가지>에는 이 질적 차이에 대한 논의가 빠져 있다. 성장,분배, 복지의 선순환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정치경제적 구도가 크게 다른 유럽과 아시아를 미국과 대비하여 대체로 같이 묶고 있을 뿐이다. 저자의 복지국가 선순환 논의가 우리에게 "리얼"하게 와 닿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넷째, <23가지>는 국가와 사기업간의 협력을 통한 시너지, 그 건설적 효과를 말하고 있지만, 그 협력이 권력동맹이라는 것, 그래서 협력의 다른 이면에서 국가-대기업의 지배블록 안에 있는 인사이더와 그 바깥쪽으로 배제된 아웃사이더 간에 장벽을 쌓을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23가지>에서 기업과 기업간의 협력, 대기업-중소기업간의 협력에 대한 언급은 매우 미약하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중소기업의 활기찬 창업과 발전, 기업과 기업간의 개방적인 네트워크 협력, 풀뿌리 사회적 기업의 발전, 그리고 이에 활력을 불어 넣는 국가의 능동적 "지원과 규율"이 양극화를 극복하는 역동적인 선진혁신-학습경제의 길을 위해 그리고 양질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얼마나 사활적으로 중요한지에 대해 <23가지>는 잘 말하지 않는다. 요컨대 <23가지>는 폐쇄적 협력과 개방적 협력을 구분하지 않고 있다. 또 이와 직결되는데 수직적 협력과 수평적 협력도 잘 구분하지 않는다. 성숙한,역동적인 선진 혁신-학습경제란 폐쇄- 수직적 협력에 비해 한층 더 개방-수평적 협력 그리고 공정한 경쟁이 발전한 경제이며, 아래로부터 다채로운 자율적 활동과 풀뿌리 창의가 피어 나는 경제이다. 따라서 국가가 개방-수평적 협력과 공정 경쟁질서를 키우도록 "제도증진적"( Institution augumenting) 방식의 개입을 해야 하는데 <23가지>는 이에 대해 잘 말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나는 제도증진 능력을 도외시하는 저자의 국가능력론이 일면적으로 치우져 있다고 생각한다.

4. 장하준과 로드릭

마지막으로, 장하준의 제도론적 성장론을 필자가 이전 글에서 잠깐 소개한 바 있는 대니 로드릭(D.Rodrick)의 논의와 비교해 보자. 로드릭 또한 장하준과 비슷하게 자유시장 경제학 및 워싱턴 컨센서스와 싸우면서 제도론적 성장론을 전개하고 있는 세계적인 학자여서 경제 시민의 공부를 위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로드릭은 "고품질 성장을 위한 제도론"에서 "어떤 제도가 중요한가"라는 묻고, 다음과 같은 다섯가지 제도를 제시하고 있다. ( D.Rodrick, One Economics Many Recipes, 2007, pp.153-183):
- 소유권,
- 규제 제도,
- 거시경제 안정화를 위한 제도,
- 사회적 보험(-보장)을 위한 제도,
- 갈등 관리를 위한 제도.


이상 다섯가지 제도와 별도로, 또 로드릭은 개별 제도를 넘어서는 "메타제도"로서 "참여 정치"를 빼놓지 않는다. 로드릭은 장하준처럼 <23가지>나 되는 많은 이야기를 풀어 놓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의 제도론은 경제시민에게는 별로 친절하지 못하다고 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읽기로는 로드릭의 5가지 제도론에는 장하준의 23가지 제도론에 빠져있는 중요한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다. 특히 소유권, 갈등 "관리", 참여 정치에 대해 잘 짚고 있다. "관리"라는 말이 여전히 거슬리지만, 이 점에 대비라도 한 듯이 로드릭은 참여 정치를 제시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소유권문제에 대해서만 간단히 추가 설명을 해 보자. 이에 대해 로드릭은 세가지 정도를 강조하고 있다. 첫째, 고품질 성장을 위해서는 단지 형식적, 법률적 소유권("ownership")이 아니라 실질적 통제권("control")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중국 개혁의 경험에서 보듯이 이 통제권은 반드시 사적일 필요는 없고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 더 큰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유재산권을 제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장하준이 정부의 산업정책과 공기업, 정부의 기업에 대한 규제를 말할 때 사실상 그도 소유권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주로 주주가치 문제와 관련해서만 제한적으로 다루었고 본격적으로, 충분히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소유권-통제권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면, 사기업에 어느 정도로 통제권을 용인할지, 어느 정도로 규제하고 규율할지, 통제권과 규제간의 타협은 어디가 적정 지점이 될지, 역사적으로 특정사회에서 그 타협지점은 어떻게 설정되어 왔는지, 또 도래할 "접속의 시대"(제레미 리프킨)에는 소유-통제권이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그리고 사적 자본과 공적 자본을 어떻게 배합하는 "공사 혼합경제"를 구성해야 할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자와 히로후미저,이병천역, <사회적 공통자본>을 참고)등등 매우 중요한 논점이 제기된다.

이 문제들을 논의하기에는 로드릭의 논의조차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그의 제도론조차 여전히 거시적 권력구조, 자본 권력에 대한 문제의식과 논의가 미약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로드릭의 제도주의 정치경제학도 "정치"가 약한 것같다. 아무튼 나는 이로써 장하준의 <23가지>가 본격적으로 말하지 않는 또 한가지, 그래서 우리들이 대한민국 경제시민과 소통하며 공부해 나가야 할, 아주 중요한 또 한가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 <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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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복지국가론은 '리얼'하지 않다…왜?" | - 장하준 - 책과 토론 2011-03-05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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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프레시안 www.pressian.com>

"장하준의 복지국가론은 '리얼'하지 않다…왜?"

[기고] 장하준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3)

기사입력 2011-01-24 오전 8:48:27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한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이 출간된 지 석달도 안돼 30만 부 가까이 팔리면서 한국사회에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시장주의를 신봉하는 한나라당에서도 장 교수를 불러 특강을 들을 정도로 '장하준 바람'이 거세다.

시장주의를 넘어서
복지국가로 가자는 장 교수의 주장은 큰 틀에서 진보적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을 감안하건데 그의 주장에는 '빈 구멍'이 있다. 이에 대한 글을 이병천 강원대 교수가 보내왔다. <편집자>

1. 장하준의 제도경제학: "제도가 중요하다"

<23가지>의 첫머리를 장식한 thing1은 "자유시장이란 것은 없다", 다시 말해 "정치가 중요하다"라는 이야기였다. 이어 thing2에서는 "기업은 소유주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된다"라고 하여 "소유가 중요하다"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 thing3은 뭘까. thing3은 "잘 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얼핏보면 thing1,2에 비해 비중이 한참 떨어지는 이야기 같고 엉뚱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로는 오히려 thing3 부터 <23가지>가 진짜 재미있고 장하준 제도경제학의 진가가 나타난다. 독자들이 이 책에 푹 빠져들게 된 것도 여기부터가 아니었을까. 나는 이제부터 thing 한개씩이 아니라 여러 things를 넘나드는 읽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왜 " 잘 사는 나라들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는 걸까. 상식적으로 생산성이 그만큼 높기 때문에 임금을 더 많이 받는 게 아닌가? 그런데 장하준은 그게 아니라면서 통상적 상식을 뒤엎는다. 그의 답은 역사적으로 축적해온 다양한 "제도들" 덕분이다. 달리 말해 "시스템"의 차이 때문이다. thing3은 "길 따라 똑바로 운전하기 대 길로 뛰어드는 소, 달구지, 인력거 등을 피해서 곡예 운전하기" 등등 기상천예의 예들을 들면서 독자들이 책에서 눈을 뗄수 없게 만든다. 유사한 이야기는 thing 11, 15, 17 등으로 이어진다. thing11은 "아프리카의 저개발은 숙명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thing 15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고 말한다. 또 thing 17은 "교육을 더 시킨다고 나라가 더 잘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모두 보통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지만 특히 thing17 교육 상식 뒤집기는 엄청 파격적이다.

글로벌 경쟁시대는 곧 교육 경쟁시대다. 무엇보다 세계톱의 교육열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경우, 오래전부터 미국 유학대열이 줄을 잇고 죽기 살기로 "열공"하고 엄청나게 '스펙쌓기' 경쟁을 하는데도 청년실업이 장난이 아니고, 다수 대학졸업생들은 '88세대'의 덫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런데 장하준 왈 이 문제는 구성원 개개인이 발버둥 쳐서 풀 수 있는 일이 아니란다. 문제는 개인과 나라 생산성을 연결 짓는 제도로 귀착된다. 즉"제도 빈곤"이 못살게 하고 제도 능력이 잘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도가 중요하다". <23가지>의 핵심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장하준의 이 메시지는 제도경제학의 핵심 포인트를 훌륭하게 풀어 말한 것이다. 제도경제학 용어를 빌려 말해보라면 그 요점은 "성장 요소"( source of growth)과 "성장 요인"(cause of growth)을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장 요소는 자본, 교육, 기술혁신 등인데 반해, 성장요인은 이들 성장요소들을 전체적으로 묶어내는 제도적 틀 또는 제도형태다. 이때 성장 요소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 개별 성장 요소들을 성장 요인인 제도 틀 안에 제 자리 잡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성장 잠재력은 유실(流失)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 장하준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2. 장하준의 더 나은 자본주의: " 부자- 더 부자 서민-거지 전략"을 넘어서

그러나 만약 <23가지>가 여기에 그쳤다면 ,이는 일반 '경제 시민'들에게 참신한 이야기가 될지 모르지만 , 제도론적 성장론 이야기의 평범한 한 토막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매우 고무적인 일은 <23가지>가 단순한 제도론적 성장론을 뛰어넘어 진보적 제도론, 그리하여 더 나은 자본주의 대안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장하준은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 그 떡고물이 흘러내리게 하는 자유시장주의 "트리클다운"(trickle-down) 전략에 대항하여 성장과 분배 및 복지가 선순환하는 "보텀업"(bottom-up)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진보주의 정치경제학에서는 트리클 다운 전략 대 보텀업 전략을 흔히 "저진로"(low road) 전략 대 "고진로"(high road) 전략으로 바꾸어 부르곤 한다.

장하준의 더 나은 자본주의론, 또는 제도주의 고진로 전략은 간단히 말하면 thing3 더하기 thing13으로 구성된다. thing13은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든다고 우리 모두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이야기다. 장하준이 도마 위에 올린,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어 대중들은 거지처럼 떡고물이나 얻어먹게 하는 전략은 우리가 지금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것으로, 세계전역에 널리 전파된 자유시장주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다.

미국 부시정부의 전략이 그랬고 한국 이명박 정부의 전략이 그렇다. 이명박 정부는 같은 입으로 '공정사회'운운하며 혹세무민하는가 하면 또 보편적 복지를 공짜 퍼주기, 인기영합주의(populism)라고 모함하고 있는데, 알고 보면 그 정체란 '부자- 더 부자, 서민-거지 되기'의 파당적 전략을 휘두르며 한 배를 타고 가려는 우리들을 '두 국민'으로 쪼개고 갈등을 조장, 심화시키고 나라를 '두 개의 대한민국'으로 분열시키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장하준은 오늘날 자유시장주의 전략이 붕괴이전 소련의 역사상 신경제정책(NEP)을 비판한 극좌파 공산주의 전략과 닮았다고 말한다. 부시와 이명박 씨가 스탈린과 아주 많이 닮았다니, 참 재미있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부자를 더 부자 되게 해서 대중은 거지처럼 얻어 먹게 하는 그 정책조차 실패로 끝났다. 사실 "부자-더 부자, 대중-거지"정책의 파탄은 미국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이명박 정부시기에 입증됐다고 해야 한다. 그 때문에 우리 국민들도 다시 눈을 떠 깨어났고 이 정부도 당황하고 급한 나머지 자기들 족보와는 무관한 "공정사회"를 입에 담게 된 게 아닌가.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소득재분배가 경제성장도 촉진시키는 이유는 뭘까. 장하준이 제시하는 이유는 많다. 가난할수록 소비성향이 높아 부자감세보다 경기활성화효과가 크다. 임금이 최저생계수준이상이라면 추가소득을 교육이나 건강투자해 노동생산성을 높인다. 그리고 소득분배가 평등하면 사회적 평화가 이뤄져 투자가 촉진된다는 "정치"경제적 이유도 있다. 나아가 thing13에 thing21을 더해보자. thing21은 "큰 정부는 사람들이 변화를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고 말한다. 즉 '복지국가 펌프'를 설치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들"에 따르면, 부자에게 세금을 거둬 복지를 높이면 가난한 사람들은 게을러지고 부자들은 투자의욕을 잃는다. 따라서 경제 전체가 활력을 잃는다. 이에 대항하여 장하준은 말한다: 복지가 잘 갖추어지면 사람들은 변화에 개방적이고, 일자리와 관련된 위험을 감수한다. 복지는 "노동자들을 위한 파산법"이다. 이 파산법을 갖추면 성장도 더 빨리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장하준은 인간이 자기 이익만 챙기는 이기적 존재인 것만은 아니고 다른 본성도 가진 도덕적 존재라는 말을 한다(thing5). 또 더 많은 소득이상의 '좋은 삶'을 생각해야 한다는 말도 한다(thing10). 심지어 기회의 균등이 항상 공평한 것은 아니다, 일정수준이상 결과의 균등도 보장돼야 한다는 상당히 '과격한'이야기까지 한다.(thing20). 이는 그의 복지론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생각된다.

위와 같은 <23가지>의 복지국가론은, 저자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전 책 <사다리 걷어차기>의 논지와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사다리 걷어차기>를 잘 보면 대중의 민주적 요구를 이전에 선진국의 역사는 그러지 않았다는 식으로 답하면서 거부하는 논지를 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걷어차기>는 패권적 자유시장주의에 대한 발전론적 대응이면서 동시리스트식 경제적 민족주의의 대응이 얼마든지 보수주의와 결합될 수 있는 내용도 갖고 있다. (다음을 참조. 신정완,"프리드리히 리스트의 경제적 주체화 전략에 대한 비판적 검토", <우리안의 보편성>,한울; 이병천, "경제성장의 역사와 자유시장 패권주의 비판",강원대 신문, 2004/ 6/ 7 ).

이와 반해서 <23가지>는 경제적 민족주의와 진보주의가 결합되는 논리구조를 보인다. 이처럼 "그들"에 대항하여 성장과 분배, 복지가 동행, 선순환하는 고진로전략을 제시함으로써 장하준의 경제학은 진보적, 평등주의 복지경제학이 되고 있다. 이와 함께 제도론에 유인(동기부여)문제를 집어넣을 뿐 아니라 임금을 단지 비용요소가 아니라 수요 요소로 봄으로써, 미시와 거시를 통합하는 진보적 제도경제학의 명품지식을 알기 쉽게 제공한다.

3.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것 (1) : 민주적 참여, 노동참여 없는 복지국가?

<23가지> 대 <리얼 진보>, <진보집권 플랜>


만약 <23가지>가 단지 제도가 중요하다, 제도가 잘 갖춰져야 성장을 잘할 수 있다고만 말했더라면, 나는 아마 이 책을 읽다가 덮었을 것이고 쓸데없이 아까운 시간을 들여 이 책에 대해 가타부타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23가지>는 이전 저작 <사다리 걷어차기>로부터 방향을 전환하여 "부자-더부자, 서민-거지되기"라는 저진로 전략에 대항하면서 성장과 분배,복지가 선순환하고 이를 통해 더불어 잘 사는 진보적 고진로 전략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진보적 제도경제학 틀을 가지고 '경제시민'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간다. 바로 이 점이 내가 장하준의 여러 책들중에서 특히 이 책을 높이 사는 이유다. 지금까지 나는 장하준의 고진로 전략에 대해 많은 칭찬을 했다. 이제 균형을 잡기위해 그 빈틈에 대해 말해야 할 차례다.

나는 장하준에 복지국가로 가는 "동력"은 뭔가, 그리고 여전히 "어떤 복지국가인가" 라고 묻고 싶다. 지금 한국에는 복지국가와 "진보의 재구성"에 대한 논의가 한창 진행 중이다. 예컨대 진보진당 상상연구소에서 기획한 <리얼진보>라든가,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한 <진보집권플랜>이라는 책이 있다. <23가지>를 이 두 권의 책과 비교해 보자.

장하준이 <23가지>를 내놓았다면, 상상연구소는 <19가지>를 제시했다. 상상연구소의 가지 수가 4가지 더 적다. 그러나 가지 수가 적다는 건 흠이 아니다. <리얼 진보>는 이렇게 말한다: 복지국가를 위시하여 20세기의 역사적인, 거대한 전환을 불러온 근원적 힘은 민주적, 진보적 대중운동이었다. 따라서 21세기에 세계와 한국에서 새 거대한 전환을 불러올 것도 바로 진보적 대중운동일 수밖에 없다. <23가지>에는 <리얼진보>가 말하는 "진보적 대중운동"이라는 이 알맹이가 빠져 있다. 다시 <진보 집권 플랜>을 보자. 여기서 조국은 진보 재구성의 핵심 어젠다로, 경제권력, 삼성권력을 어떻게 길들여야 할지, "나쁜 삼성"을 어떻게 "좋은 삼성"으로 만들어할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면서 장하준이 노조의 경영 참가를 빠트리고 있다고 지적한다.(pp.52-56,p.121-4). 이 또한 장하준의 핵심 빈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처럼 <23가지>에는 한국의 진보가 고투해온 핵심 지점에 대한 고민이 빈곤하다. 그래서 "리얼"하지 않다.

그렇지만 <23가지>와 <리얼진보>, <진보 집권플랜>을 다른 각도에서 볼 필요도 있다. 여러 개별 정책들을 엮어 하나의 패키지로 내놓았을 때 성장과 분배, 복지, 생태가 선순환하는 일관성을 갖는 발전 모델이 될 수 있을지,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로 굴러가도록 개별 정책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제도적 원리는 있는지 하는 문제가 있다. 내가 보기에 <리얼 진보> <진보 집권플랜>에는 이 지점이 취약한 것 같다. 물론 "사회경제"(<리얼진보>)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노동자 자주관리기업"( <진보집권플랜>)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이것은 진보재구성의 매우 중요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대안 모델플랜이 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리얼진보>도 <진보집권플랜>도 "2%부족"하게 보인다.

그런데 <23가지>를 읽으면 나름대로 발전 모델의 대강의 윤곽이 그려진다. <23>가지는 단지 가지 수만 많은 게 아니라 기업론과 산업론을 더 나은 자본주의의 핵심 기둥으로 세워놓고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면서 분배, 복지, 더 좋은 삶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23가지>의 강점이며, 경제 시민에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물론 <23가지>도 기업-산업-금융-노동-복지-교육 등을 모두 관통하는 통합 패키지를 제시했다고는 볼 수 없다.

민주적 참여, 노동참여없는 복지국가?

요컨대 우리의 요점은 더 나은 자본주의로 가는 장하준의 고진로 전략에는 지금 여기서 거기로 갈수 있게 하는 동력, 아래로부터 힘, 또는 '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이다. 지배 권력과 대중의 힘의 대치, 이들의 서로 부딪힘과 갈등, 그리고 이 갈등의 건설적 힘 속에서 생겨날 새 길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따라서 복지국가와 더 나은 자본주의에 대한 아름다운 그림은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거기로 갈수 있을지가 "리얼"하게 와 닿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장하준의 복지국가론은 "정치"경제적이지 않고, "역동적"이지도 않다.

생각해 보라. 한국 삼성전자의 경우 2007~2009년 평균 유효세율은 고작 10.48%다. 반면에 일본만 해도 소니는 43.87%, 토요타는 34.59%로 삼성전자보다 3~4배가 높다.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25.75%), 애플(29.26%)의 유효세율도 삼성전자의 3배나 된다. 삼성전자의 유효세율은 어지간한 중소기업 평균보다도 낮다. 뿐만 아니라 삼성전자는 가혹한 노동조건으로 고통받아 투신자살한 노동자 측에 사과 한마디 없이 사태를 덮으려 하는 냉혈 "기업권력"이다.( "삼성 통째로 얻고도 고작 16억으로 퉁친 이재용이 타깃", "자식이 삼성 다닌다고, 그저 좋아만 했던 저는 죄인입니다", 2001/1/21, www.pressian.com ). 이런 삼성에 누가, 어떤 힘이 고양이 방울을 달 수 있을까.

둘째, 장하준의 고진로 전략이 갖고 있는 빈틈은 리얼하지 않다는 데만 있지 않다. 복지국가로 가는 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어떤 복지국가인가" 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대로 그의 복지국가는 소득 증대이상의 더 '좋은 삶'까지 생각하는 깊이를 보인다. 그러나 이 논의에는 빠진 게 있다고 생각한다. 복지연대와 참여민주의 두 바퀴로 가면서 양자가 상호 의존하는 "시민적" 복지국가의 원리가 빠졌다. 보편적 복지국가의 길은 쉬운 길은 아니다. 두터운 불신의 덫을 걷고 보편적 복지를 모두의 "공공재"이게 하는 보편적 동의를 구성하고 무임승차를 통제할 수 있는 정치적, 도덕적 논리와 참여-협력의 제도형태를 가져야 한다. 완고한 기득권세력을 시민의 일원이 되게하는 과제는 두말할 것도 없다. 이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모든 아이가 모두의 아이"(신필균, 복지국가 스웨덴, 후마니타스,2011)가 될 수 있다. 그러지 못하면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적 계약"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보편복지국가라는 새 "계약"에서 복지연대를 공동체의 동등한 구성원으로 참여하는 시민의 지위, 그 권리 및 책임과 연결짓는 시민정치원리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 만만찮은 문제덩어리는 나중으로 돌리고, 여기서는 이와 관련되지만 좁혀서 장하준의 복지국가가 민주적 참여, 무엇보다 노동의 민주적 참여와 발언권을 보장하는 복지국가인지 모호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래서 그가 대중의 민주적 참여, 경제민주주의와 동행하는 복지국가가 아니라 비스마르크식의 위로부터 권위주의적 복지국가를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는 의심을 갖게 된다. 복지국가로 가는 대중적 동력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데 어떻게 대중 참여적, 시민적 복지국가가 나올 수 있겠나. 또 새삼스fp <23가지>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장하준은 주주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이해당사자의 이익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23가지> 전체에 걸쳐 노동을 한번도 <23가지> 무대에 단독 주제로 올려놓지 않는다. 그리고 장하준은 늘 그렇게 하듯이, 기업과 정부가 협력하는, 정부 주도의 더 나은 자본주의-이는 사실상 동아시아 자본주의로 보인다-에 대해 말하고 있으면서도 결코 노동 및 대중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협력, 그런 참여와 협력위에 서는 더 나은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thing12, p.18). 요컨대 장하준은 아래로부터 사회동력과 참여적 협력이 아니라 거의 국가물신이라 할 정도로 너무 국가에 과부하를 걸어 놓는다.

4.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것(2): 제도ㆍ권력ㆍ갈등, 그리고 "시민적 정의"와 연대

그런데 장하준의 위와 같은 빈틈은 그의 제도론 일반으로 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본다. 그가 "제도가 중요하다"고 역설할 때, 일반적으로 그 제도가 권위주의적, 공학적 제도인지, 이해당사자들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하는 참여적 제도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제도의 구성에는 권위주의적 길도 있고, 참여적 길도 있다. 예컨대 올리버 윌리엄슨 같은 사람은 2009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고 자유시장주의를 비판하지만, 권위주의적,위계적 제도론을 펴는 대표적인 학자다. 물론 장하준의 평등주의 제도복지론은 성장, 분배, 복지의 선순환에 대해 말해 윌리엄슨과는 같지 않다. 그러나 이해당사자들의 참여, 다시 말해 제도를 정치적으로 구성하고 운영하는 이해당사자 주체들의 평등한 참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장하준의 제도론이 제도와 복지에 대한 테크노크라트적, 공학자(engineers)적 견지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의 평등주의에 기본적 불평등은 없는지 묻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제도와 복지에 대한 참여정치적 담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장하준의 제도론에 빠진 또 다른 지점이 있다. 그것은 권력과 갈등, 역사의 차원이다. 이는 우리가 제도에 대한 정치적, 역사적 관점에 설 때 반드시 따라 나오는 필수적 지점들이다. 그런데 장하준의 제도경제학에는 이 지점들이 빠져 있고, 그래서 또 다른 측면에서 "탈정치적" 정치경제학이 된 게 아닌가 한다. 더불어 사는 사회경제적 진보의 길에서 협력은 아주 중요하다. 그러나 경제학이든 철학이든 단지 협력만 이야기하는 제도론은 권위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제도론이 되기 쉽다. 협력과 갈등을 같이 말하고 제도를 협력과 갈등의 혼합물로 파악할 때,또 제도의 구조와 역동적 진화를 같이 말할 때만 "정치"경제적,역사적 제도주의가 성립된다. 권력과 갈등이 없는 제도, "정치"경제란 없고, 제도와 "정치"경제란 질서이자 갈등이고 구조이자 역동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제도주의 "정치"경제란 주체적 정치적 행위자가 있는 것이고 이들이 동등하게 참여하여 더불어 살 자신들의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또 제도주의 정치경제란 권력과 지배가 있고 이에 대한 저항이 있고 갈등이 있다. 갈등이 없는 제도, 갈등이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 나는 "갈등이 정의다"라고 까지 말하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단지 갈등만 있는 게 아니라 갈등의 조절, 통합이 있다. 우리는 조절과 통합 속에서 불안정, 균열을 내장한 채 작동하는 그런 제도의 능력과 질, 역동적 진화 문제와 대면한다. 이런 의미에서 제도는 늘 지배권력과 대항 권력 간에 '제도화된 타협'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다시 또 단지 타협만 있는 게 아니다. 타협과 통합은 다르다. 타협해서 갈라먹고 아래로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사다리 위로 올라가야 한다. 통합이란 구성원에 등등한 참여를 보장하고 그 참여 속에서 대립하는 힘들의 다툼이 더 나은 제도구성과 공동체를 향해 해법을 찾는 것이다. 대립물의 통일은 통일이전보다 더 높은 균형에 도달해야하며, 더 높은 공동의 부를 창조하고 "좋은 삶"을 실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단지 원리만이 아니라 더 높은 균형, 높은 길(high road)의 현실적 제도형태를 수립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시민적 정의"(civic justice)와 "연대"의 정치경제학, 정의와 연대가 동행하는 "시민경제"론의 핵심이다.

5. 장하준과 스티글리츠

마지막으로, 스티글리츠가 제창하는 발전-제도 경제학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이번 글을 맺으려 한다. 케인즈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현대 제도주의 경제학의 프론티어에 서 있으며 "세계은행의 내부반란자"이기도 한 이 석학은 발전이라는 개념 자체를 사회전반의 민주적 전환으로, 그래서 아예 그 안에 민주적 참여, 다시 말해 투명성, 개방성, 참여 발언이 다 들어 있는 것으로 정의한다. ( Joseph Stiglitz and the World Bank The Rebel Within- Edited with a commentary by Ha-Joon Chang ,Anthem press, 2001).

그리하여 경제발전과 사회발전을 기계적으로 분리하지 않고 양자의 선순환을 역설한다. 뿐만 아니라 스티글리츠는 노동자와 자본가간의 계급갈등이 만연해 공멸로 떨어지는 사회랑, 노동자의 참여 발언위에 이들이 공동의 이해로 나아갈 수 있는 사회가 얼마나 질적으로 다른 사회인지에 대해 언급한다. 노동하는 인간- 이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이 주변화되고 그들의 발언권이 "배제"된 사회하고, 그들에 대한 존중이 있으며 그들을 "포용"(inclusion)하는 사회가 얼마나 다른지에 대해 힘주어 말한다.

스티글리츠는 "경제민주주의"야말로 민주주의 사회의 본질적 구성부분이고 경제효율성보다도 더 근본적 가치라고 본다. 그러면서 기업수준, 지역수준, 나라 수준, 그리고 글로벌 수준 ,이 모두에 노동의 강력한 참여권과 대표권을 보장하는 것이 경제민주주의와 민주적 경제발전의 열쇄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장하준은 스티글리츠 책의 서문까지 쓴 사람인데, 왜 <23가지>에서 스티글리츠의 이 귀중한 발전관은 빠트렸을까? 혹시 내가 <23>가지를 잘못 읽은 것일까?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 <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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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재벌권력엔 왜 눈 감는가? | - 장하준 - 책과 토론 2011-03-05 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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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프레시안 www.pressian.com>

장하준, 재벌권력엔 왜 눈 감는가?

[기고] 장하준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2)

기사입력 2011-01-17 오전 10:23:32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한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이 출간된 지 석달도 안돼 30만 부 가까이 팔리면서 한국사회에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특히 시장주의를 신봉하는 한나라당에서도 장 교수를 불러 특강을 들을 정도로 '장하준 바람'이 거세다.

시장주의를 넘어서
복지국가로 가자는 장 교수의 주장은 큰 틀에서 진보적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자본주의의 특수성을 감안하건데 그의 주장에는 '빈 구멍'이 있다. 이에 대한 글을 이병천 강원대 교수가 보내왔다. <편집자>

바로가기 : 장하준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1)

1. 주주 자본주의론, "그들" 대 장하준

나에게 thing1에 이어 23가지를 엮고 있는 또 하나의 중심생각이 뭐냐고 묻는다면 서슴치 않고 thing2를 골라 잡겠다. 장하준은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를 <23가지>의 우두머리로 내세운 데 이어 thing 2에서 그 못지 않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다. thing 2는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 thing2 또한 thing1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와 한 패가 되어 자유시장주의를 화들짝 놀라게 할 주장이며 "그들"과의 공방에서 진검 승부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기업의 목적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좋은 기업"이 될 수 있나, GM에 좋은 것이 미국에도 좋은가, 삼성에 좋은 것이 한국에도 좋은가, 삼성에 좋은 것이 한국이라는 나라경제와 한국인 다수대중에도 좋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는 참으로 중요한, 경제의 기본 문제다. 동시에 앞글에서 말했듯이 순수한 경제는 없고 경제 안에 정치가 있는 만큼 thing2 경제 문제는 동시에 정치문제이기도 하다. thing2 및 관련 things에서 장하준은 기세등등해 보이던 미국 자본주의가 망가졌고, 이를 따라가던 세계 다른 나라들도 길을 잃게 된 근본 이유를 소유론의 각도에서 해명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대안 자본주의의 소유론적, 경영론적 기초도 제시한다.

"그들"은 말한다: 기업의 주인은 주주들이다. 기업은 주주의 이익을 위해 경영되어야 한다. 주주는 고정수입이 없고 다른 이해당사자들이 부담하지 않는 위험을 진다. 그래서 주주는 기업실적을 극대화하는 동기가 강하다. 또 그래서 주주를 위한 경영을 하면 기업이윤도 극대화되고 기업의 사회적 기여도 극대화된다.

참 환상적인 이야기다. 주주가치 경영을 하면 만사형통이다. 사익을 추구하면 저절로 공익이 실현된다는 저 "보이지 않는 손" 의 마법을 소유론의 측면에서 바꾸어 풀어놓은 것과 같다. 정말 이렇게만 된다면 경제 유토피아가 따로 없겠다. 그런데 장하준은 이 환상적인 주주자본주의 유토피아론, 신성한 주주 주권론을 잭 웰치의 말을 빌어 '세상에서 가장 바보같은 아이디어'로 시궁창에 처박는다. 사실 확인부터 하는데, 주주들의 압박과 이에 부화뇌동한 전문경영자의 '비신성동맹'의 결과 미국은 분배, 복지는 물론 지속적 성장에도 실패했다. 그래서 거품 띄우기와 부채 키우기로 이를 만회할 수작을 하다가 2008년 대실패를 자초한 것이다. 세계경제 패권국의 위상이 기울게 된 것도 이 "바보 같은 아이디어"탓이 아주 크다. 그러면 왜 주주주권론의 장미빛 유토피아가 음울한 디스토피아로 변했을까.

장하준은 말한다: 주주가 위험부담을 가장 많이 지고, 그래서 기업의 장기적 실적에 제일 관심이 높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오히려 주주들이야말로 기업의 이해당사자들 중에서 가장 쉽게 손을 뗄 수 있고, 기업의 장기전망에 가장 관심이 없는 집단이다. 그래서 주주가치극대화는 해당기업의 장기적 성장 잠재력을 훼손하고 경제전체도 망치는 것이다. 유한책임이라는 제도혁신 자체가 유례없는 물질적 진보를 가능케 한 이면에 그만큼 주주가 쉽게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을 제공했다.

내가 읽기에 thing2는 thing1에 비해 훨씬 명쾌하고 설득력이 높다. 물론 주주자본주의론에 대한 장하준의 비판은 그의 독창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장 교수도 언급한 라조닉 등, 이미 많은 선행 연구들이 축적돼 있다. 그러나 장하준이 이를 <23가지>를 엮는 머리 생각으로 올려 놓고 설득력 있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2008년 금융위기 이후라는 시점도 중요하다. 그러나 thing1에 이어 thing2에 대해서도 나는 불만이 있다. 장하준이 논의를 끝까지 밀고 가지 않고 중도반절에 그칠 뿐 아니라, 소유문제의 중요한 대목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thing2에서 제기된 기본문제, 즉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하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장하준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2.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것(1) : 다시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

장하준은 무엇을 말하지 않았나. 그가 제기한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와 결판을 짓지 않고 끝냈다. 장하준은 "주주들이 법적으로는 기업의 주인일지는 몰라도"라든가," 주주들이 기업의 법적 소유주이기는 하지만"이라고 말한다. 법적으로는 주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니라는 이야기 같기도 하다. 또 thing2의 결론부분에서는 "부동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불공평할 뿐 아니라 효율적이지도 않다"라는 말도 한다. 그래서 장하준은 주주주권론의 문제점을 효율성만은 아니고 공평성 관점에서 보고 있기는 하다. 노동자나 납품업체 등 주주이외의 다른 이해당사자들의 이해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걸 보면 이해당사자 기업론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이야기는 중도반절로 멈쳐 있다. 또 법적이라고 하지만, 주주가 소유자임을 너무 쉽게 인정한다.

바로 이 때문에 장하준은 "기업의 주인은 주주다"라는 "그들"의 주장을 정면으로 논박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대로라면 "그들"은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면 효율성- 이 개념도 여전히 문제다- 이 떨어질 수 있다고 한발 물러서면서도 여전히 기업의 주인은 주주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 주인이 자기 소유물(기업)을 잘못 사용한다 해도 극단적으로는 남이 참견하고 간섭할 일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장하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시장자유주의는 여전히 기업에 대한 주주의 소유권, 나아가 사적 소유권을 '하늘이 내린' 자연권으로 주장할 것이다. thing1에서처럼 thing2에서도 "그들"과 장하준의 공방은 여전히 열려 있다.

그렇다면 주주자본주의론을 넘어서는 대안 기업론은 무엇인가. 장하준에 따르면 기업의 이해당사자들 중에는 주주처럼 가장 쉽게 빠져나가 기업의 장기적 가치 생산에 무관심하고 무책임한 집단이 있는가하면, 노동자나 납품업체처럼 기업의 장기적 생존과 성장에 헌신하는 집단이 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을 장하준처럼 중도반절 논의로 그칠게 아니라 소유론의 문제로 밀고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소득과 부에 대한 권리는 사회적으로 유용한 생산적 기여 또는 기능에 우선권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그 기여에서 유리된 '기능 없는 소유'(functionless property)에 우선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이는 홉하우스, 토오니(R.H.Tawney), 크로스랜드 등의 영국 진보주의자에서 유래하는 기능적 소유론으로서 나는 이를 이어받아 시민경제 소유론 또는 이해당사자 소유론으로 바꾸어 부르고 싶다. 그 핵심은 소유와 가치생산에 대한 헌신(commitment)간의 상호성(reciprocity) 원리에 있다. 참여하고 위험을 공유하고 헌신해야 소유에 대한 권리도 있다는 말이다. 필자는 이전 글에서 정치란 참여하고 구성하는 것이며 시민경제란 이 정치를 내장한 경제라는 말을 한바 있는데, 기능적 소유론은 시민경제론의 소유론적 번역이라 해도 좋다. 이처럼 상호성 원리에 입각한 기능적 소유론에 설 때 비로소 경영자, 투자자만이 아니라 노동자, 납품업자 들도 이해당사자로서 실질적 권리지분(stake)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영국 진보주의자들의 기능적 소유론은 스웨덴 사민주의자들의 기능사회주의론과 매우 친화적이며, 이들이 소유권을 배타적,독점적인 것이 아니라 '권리의 다발'로 보는 생각과도 친화적이다.(필자의 다음 글 참조, "양극화의 함정과 민주화의 깨어진 약속", <시민과 세계>,7호,2005, p.49 ).

3. 장하준이 말하지 않은 것(2) : 기업권력, 재벌권력

그런데 기업을 둘러싼 소유 문제는 결코 주주자본주의론을 비판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Thing2에서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 된다"는 말은 소유문제의 절반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형식적, 법적 소유권과 실질적 소유권 또는 통제권을 구분하게 되면 기업의 이해당사자와 동시에 "기업 그 자체"를 만나게 된다. 이때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는 경우든(미국) 그렇지 않든(한국), 법인기업 그 자체가 거대권력으로 출현한 '법인자본주의', '법인자유주의'( corporate liberalism), 또는 "코포크라시"(corpocracy)( 찰스 더버, <히든파워>,두리미디어)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강도귀족'(Robber Baron)으로 불리기도 했던 미국의 록펠러, 카네기나 한국의 삼성, 현대와 같은 재벌집단은 뛰어난 조직능력을 갖고 높은 성장 성과를 내는 기업"제도"일뿐 아니라 그 자체 하나의 거대자본 "권력"체다. 그런데 장하준은 thing2에서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단지 유한책임제도와 경영자 자본주의의 출현으로 거대한 물질적 진보가 성취될 수 있었다고 말할 뿐이다. 그리고 thing1의 후반부에서 "시장은 1달러당 1표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고 말해 시장에서 돈이 지배함을 지적하긴 했지만, 이는 소유문제를 매우 단순화시킨 것이다.

사실 이런 결함은 단지 장하준에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광의의 케인지언 흐름에 속하는 멘큐는 물론이고 심지어 스티글리츠 같은 석학에도 나타난다. 필자는 스티글리츠의 경제학원론을 번역하기도 했지만, 그의 경제학에서 기업 권력,자본 권력의 형체는 매우 흐릿하다. (필자의 글, "스티글리츠의 제도경제학과 포스트워싱턴 컨센서스",<경제와 사회>, 58,2003 참조). 케인지언과는 또 다른 흐름으로 슘페터, 챈들러, 암스덴(그녀는 한국을 주제로 한 '아시아의 다음 거인'이라는 명저로 유명하다)같은 학자들의 경우에도 재벌권력, 대기업 집단이 얼마나 골치 아픈 문제의 덩어리인지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 케인지언, 슘페터리언들은 기업권력, 자본권력, 계급구조 문제를 이론의 핵심 구조에서 주제화하지 않으며, 그것이 경제시스템과 나라정책 전반을 얼마나 심각하게 왜곡하고 대기업과 부자들에 유리하게 파당적으로 만드는지 잘 보지 않는다.

그러나 소수 경영자가 무책임하게 통제권을 행사하는 대기업과 재벌 집단은 1달러당 1표 원칙에 따라 작동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1달러 1표는 오히려 양반이라 할 정도다. 나아가 재벌 권력의 문제는 미시적인 '기업지배구조'(영어로는 governance structutre로 '통치구조'가 적절한 번역어인데 이상하게 '지배구조'라는 번역어가 통용되고 있다)의 문제를 넘어 나라경제 전체의 거시적 지배구조, 심지어 '정치지배구조'를 쥐락펴락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기업권력 자체"에 시선을 돌리면, 장하준이 멋들어지게 이름 붙인 '비신성동맹'이란 것도 단지 주주와 경영자라는 "인격적" 주체간의 동맹이상으로 구조화된 익명적 권력체제의 동맹, 금융권력체제와 산업권력체제가 얽히고 설킨 지배권력 "체제"들로 나타날 것이다.시장자유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자유와 유연화를 극도로 보장하는 과두제적 계급지배"체제"로 파악되어야 한다.(유철규,"신자유주의",<현대마르크스 경제학의 쟁점들>, 서울대출판부).

재벌 권력, 기업권력이 역사적으로 보여왔고 지금도 나라 안팎에서 부리고 있는 횡포와 무책임성, 비민주성에 대해서는 굳이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김용철 변호사가 쓴,2010년 또 하나의 베스트 셀러 <삼성을 생각한다>로 미룬다. 공교롭게 <23가지>와 <삼성을 생각한다>가 나란히 베스트셀러가 되어 '경제시민'이 공부하기 딱 좋게 됐다. 이와 함께 <한국사회 삼성을 묻는다>(조돈문 이병천 송원근편) , <히든 파워>(찰스 더버), <기업권력의 시대>(마이클 페렐먼)등을 읽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나는 말한다. 소유와 소유주의 문제는 단지 주주 무책임의 문제만은 아니다. 우리는 선출되지 않은 소수 경영자의 특권과 그 실질적 통제권 하에 놓인 기업권력, 재벌권력 자체의 무책임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 고삐 풀린 무책임 특권권력의 "사적 소유권"에 어떻게 이해당사자에 대한 책임과 사회적 책임 규율을 부과할 것인가. 어떻게 신자유주의에 개발독재 유산이 중첩된 삼성공화국이라는 고도의 무책임특권 권력체제에 민주적, 시민적 규율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삼성에 좋은 것이 민주공화국과 시민 대중에도 좋게 할 것인가. 이에 응답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자유시장주의적 공사이분론을 깨트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다시 말해 기업을 단지 사적인, 사인들간의 계약물이 아니라 공적 제도, 사회공동체안의 시민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애당초 법인기업에 대해 자연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법인기업을 공동체안의 시민적 구성원, 즉 "시민기업"으로 자리 잡게 하여 민주적 자기통치권이 그 '사유재산권'에 우선되게 해야 한다.( 로버트 다알, <경제민주주의>, 인간사랑; 필자의 글, "삼성과 한국 민주주의", <한국사회 삼성을 묻는다>, 후마니타스 수록 ). 그리하여 공장의 입구에서 멈춰 반신불수가 된 인민주권이 공장안으로 들어가도록 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기능적 소유론에 이어, 시장자유주의 공사이분론을 넘어서는 시민경제 소유론의 제 2원리다.(이후 우리는 다시 복지국가와 관련하여, 복지국가의 시민정치원리, 즉 "복지와 참여의 상호성 윈리"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다).

장하준은 기업권력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주주주권론을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아이디어"로 내동댕이쳤고 나아가 복지국가에 표를 던졌다. 그러나 그는 말을 하다 말았고 중요한 대목을 빠트렸다. 복지국가와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몸부림이 압축성장기 이래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 "괴물"같은 재벌 권력과 그들의 '자본 파업'(새뮤얼 보울스외,< 자본주의 이해하기>, 후마니타스, 2009,p. 653)에 의해 얼마나 심각하게 상처입고 봉쇄당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thing2는 물론 <23가지> 전체에서도, 나아가 그의 경제학 전체를 통해서도 좀처럼 읽기 어렵다. 이는 그의 경제학 전체의 무게가 걸려 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의 경제학에는 단지 제도만이 아니라 지배권력의 실존, 이 권력을 민주적, 시민적 구성원으로 자리잡게 할 소유론의 원리 문제, 그리고 대자본의 권력에 발전 규율 및 민주적 규율을 부과함으로써 어떻게 경제성장과 사회경제적 진보가 동행할 수 있을지의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빈곤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멀리갈 것 없이 <23가지>가 대기업권력, 재벌권력과 복지국가를 정합적으로 설명해야 할 과제를 갖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 <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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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시민'은 '시민경제'를 요구한다 | - 장하준 - 책과 토론 2011-03-05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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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프레시안  www.pressian.com>

장하준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기고] '경제시민'은 '시민경제'를 요구한다

기사입력 2011-01-11 오후 3:05:56

 

 

 

 

 

1. 진보 경제학, 시민과 만나다.

새해를 맞아 장하준 교수의 새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생각한다>와 함께, 장교수의 <23 가지>가 2010년 대한민국 최고 베스트셀러라는 소식은 진작 들어 알고 있었다. 이 흥겨운 소식은 새해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그 동안 발등에 떨어진 불 때문에 미처 이 책을 읽을 시간을 갖지 못했다. 새해 들어서야 겨우 한숨을 돌리고 <23가지>를 읽게 됐다. 경제학으로 밥을 먹고 산다면서 일반 독자들보다 형편없이 후진 부대로 쳐졌으니 많이 미안하다. <23가지>를 읽어 보니 과연, 왜 이 책이 독자들로부터 그토록 큰 반향을 얻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무엇보다 딱딱한 경제학 책인데도 너무 쉽고 재미가 있다. 장 교수는 이전 책들에서도 대중에 다가가는 글쓰기로 뛰어난 문필력을 보여 왔지만 이번 책은 정말 대단하다. 그동안 '경제학 콘서트'라는 문패를 단 이런 저런 책들이 많이 나왔는데, <23가지>야말로 명실상부한 경제학 콘서트, 그것도 고급 콘서트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내 머리로는 기껏 5~ 6 개 정도 뽑아 낼 수 있을까 싶은데 무려 23가지 주제를 뽑아내서, 삭막하고 결코 쉽지 않은 우리 시대 최대 경제 및 경제학의 문제를 너무 쉽고 재미있게 풀어냈다. 둘째, 2008년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의 의미와 교훈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러 각도에서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23가지야 말로 이 문제에 대해 시의적절하게 잘 응답했다고 생각된다. 만신창이가 된 오늘의 세계경제문제와 그것이 경제학에 주는 교훈을 이처럼 쉽고,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고급, 명품 지식을 담아 제공하고 있는 책은, 국내외를 통틀어 결코 흔치 않다.

셋째, 단순 분류법으로 말하자면 23가지는 보수 경제학이 아니라 진보 경제학 책에 속한다고 생각된다. 한 세대를 풍미한 자유시장주의가 성장복지모두 실패했음을 비판하고 성장과 복지를 함께 이룰 수 있는 복지국가의 진보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3가지는 장 교수의 이전 책과 비교해도 중요한 변화를 보여 준다. 예컨대 이전에 쓴 <사다리 걷어차기>나 신장섭 교수와 함께 쓴 <주식회사한국구조조정>과 같은 책들은 주로 성장 중심론이었고, 자유시장주의와 개발주의를 대비시키는 경향을 보였다. 그래서 사실 내가 읽기로는 재벌과 외국자본을 이항대립으로 놓는 논법 등 보수 쪽 주장과 중첩되는 내용도 적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주식회사 한국의 구조조정>에 대한 필자 서평 참조. <서평문화>, 2004 겨울, 제 56집). 그런데 이번 책은 성장, 복지 나아가 공정가치까지 함께 언급하면서 복지국가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박정희 개발국가 모델의 성과를 칭송하는 사람들중에는 개발연대이후 시기가 되면 자유시장주의로 변하거나 여전히 재벌체제 장점만을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하는 논자들이 대다수다. 이와 달리 장 교수는 복지국가에 깃발을 꽂고 있다. 이는 흔치 않은 경우다. 한국의 진보와 진보경제학으로서는 큰 우군을 얻은 반면, 보수와 보수경제학으로는 큰 적수를 만난 셈이다. 이곳저곳에서 장하준에 대한 보수적 비판이 개시되고 있음을 보는데 이는 그만큼 이번 책이 이전 책과는 흐름이 다름을 반증한다.

나는 물어 본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비롯한 번역서는 빼고, 지금까지 한국 경제학의 역사상 <23가지> 만큼 많이 팔린 진보경제학 책이 이전에 있었던가. 아니, 진보와 보수를 통틀어 이 정도로 시민 대중의 큰 호응을 얻은 책이 있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23가지>의 성공은 결코 보통 성공이 아니다. 저자는 '경제시민'의 권리 증진을 위해, 자유시장주의를 넘어서는 경제학의 시민적 계몽을 위해 <23가지>를 썼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목표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음이 분명하다. 비록 늦었지만 큰 박수를 보낸다. 나의 이 박수는 저자에게 보내는 박수일 뿐 아니라, 한국의 진보경제학이 시민 대중과의 만남에 성공한 것에 대해 보내는 박수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단지 박수만 치고 만다면 이는 경제학으로 밥 먹고 사는 내 몫을 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또 하나의 이유는<23가지>에 대해 몇 마디 보태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를 통해 한국의 진보경제학이 시민과 더 나은 만남을 가지는 데 도움이 되기 위해서다.
▲ 장하준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2. 시장과 정치 - 어떤 시장, 어떤 정치인가

장하준의 이번 책이 유례없이 큰 호응을 얻은 것은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더 나은 대안 자본주의로 갈 수 있음을 23가지로 요점 정리해서 잘 보여준 데 있지만, 가지 수가 많다고 해서 늘 좋은 것은 아니다. 확실히 23가지는 한결같이 알찬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나는 23 가지가 나열되어 있는 게 아니라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 <23가지>의 많은 가지들을 펼치게 하는 중심 생각, 생각의 기둥주춧돌은 어떤 것인지에 관심을 갖는다. 날더러 이 책의 things 23을 관통하는 중심 생각을 한 가지만 집어 보라고 한다면 맨머리 부분, thing 1을 선택하겠다.

thing 1에서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시장은 자유로워야 한다. 정부가 개입하면 자원이 적재적소에 쓰이지 못하게 된다. 이에 대해 장하준은 이렇게 말한다.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모든 시장에는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칙과 한계가 있다. 자유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된다. 구체적으로 어떤 규제가 있는가. 장하준은 시장에서 무엇을 사고 팔수 있는지, 누가 참여할 수 있는지, 거래와 관련된 조건은 어떤 것인지, 가격은 어떻게 결정되는지 등등, 이 모두에 규제가 있다고 설명한다. 나는 자유시장이 정치적으로 정의된다고 들고 나온 장하준의 비판이야말로 자유시장주의에 대한 정문의 일격이며, 거의 강령적 수준의 대항 포지션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thing1의 논의가 미흡하다고 느낀다.

첫째, 공방이 좀 엇갈린 것 같다. "그들"은 정부개입이 자유시장의 효율성을 해친다고 주장하는데, 장하준은 이를 반박하는 게 아니라 자유시장이라 해도 거기에는 모종의 규제가 있어서 알고 보면 자유시장이 아니라 규제된 시장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건 자유시장 효율성론에 대한 논박은 아니다. "그들"은 장하준의 말을 상당 부분 수용하면서 "규제된 자유시장"이 "규제된 비자유시장"보다 더 효율적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토론은 엇나갔다. 뿐만 아니라 신고전파경제학이 시장 "효율성 독재"론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자유시장주의를 효율성론에 한정하는 것은 좀 일면적이다. 마이클 샌델의 책과 강의를 들어봐도 알지만, 자유시장이 자유와 정의를 보장한다는 주장이 있다. 또 자유시장이 가치중립적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 모두를 다루면서 광의의 "시장실패"론을 구성해야 한다. 따라서 토론은 여전히 열려 있다.

둘째, 장하준이 말하는 규제에는 여러 것들이 뒤섞여 있다. 그렇지만 그 상이한 규제들의 성격을 명확히 구분하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시장의 경계를 객관적, 과학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하다 보니, 정작 중요한 문제, 즉 왜 규제가 필요한가 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하버드대학의 대니 로드릭(D.Rodrick)같은 사람은 시장을 창조하는 일, 규제하는 일, 안정화하는 일, 정당화하는 일 등을 구분한다. 그래서 이런 일들을 위해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고 비시장적 제도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로드릭, "지속가능세계화위하여", <시민과 세계>,9호,2006). 내게는 이 설명이 훨씬 명료하게 들린다. 로드릭이 말하는 규제에는 장하준과 달리 반독점규제가 들어 있는 부분도 빠트릴 수 없다. 이 문제는 특히 '삼성공화국'과 마주하고 있는 한국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로드릭 이전에 칼 폴라니로부터 배워야 한다. 그는 다름아니라 자유시장이 인간 살람살이의 실체적 터전인 노동, 토지, 화폐를 무리하게 허구적 상품으로 전락시켰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자기 조절 능력이 없다고, 지속불가능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또 자유시장에 내장된 이런 근본 모순 때문에 시장화에 대한 사회보호적 대항운동, 그리하여 이중운동의 역사가 전개된다고 갈파했다. 또 자유시장(주의)의 허구성에는 폴라니 문제과 함께 잘 알다시피 마르크스 문제가 있다. 장하준은 thing1의 마지막에 가서야 "시장은 1달러당 1표 원칙에 따라 작동"한다, 그래서 규제철폐의 주장인즉 "돈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권력을 주자는 의미"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 시장에서는 돈이 말하고 지배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먹"이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이런 정도로 언급하고 넘어가기에는 너무 중요하다. "자유"시장이 실질적으로는 "부자유"한 자본권력시스템, 기업권력 시스템이라는 사실이야말로 "자유시장이란 것은 없다"의 근본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장하준이 제창하는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은 자유시장에 대한 이 폴라니, 마르크스 문제를 그 핵심 구조 안에 가져와야 할 것이다.

3. "경제시민"은 "시민경제"를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장하준은 23가지의 머리부분에서 시장이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라는 정말 중요한 주장을 잘 내세웠지만, 이 때 정치를, 국가를 너무 규제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정치라는 것, 국가의 할 일을 규제 중심으로, 달리 말해 무엇을 제한하는 소극적 역할 중심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러나 국가의 할 일은 규제 훨씬 이상이다. 또 정치란 국가의 할 일 훨씬 이상이다. 국가는 아무래도 위로부터 통치와 직결되지만 정치란 아래로부터 구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여러 분면을 갖고 있으나 필자 더러 말하라면 정치의 근본은 공동체다. 정치란 무엇보다 참여하고 구성하는 것, 공동체를 구성하고 같은 배를 타고 가는 자로서 열려 있는 "우리" 자체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즉 이해당사자 구성원들에게 주권자로서 명실상부한 참여의 지분(stake, part)을 쥐어주고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삐풀린 월가 금융권력도, 재벌권력도, 강남 부자도 비용은 사회적으로 전가하면서 이익은 독차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공동체의 시민적 구성원으로서 응분의 책임을 갖고 헌신하고 그런 조건부로 권리도 행사케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사익 특권세력에 대해 민주적이고 시민적인 통제력 또는 규율력을 확보해야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정치는 구성하는 것이지만 사익 지배세력을 규율할수 있는 힘과 권력없는 구성의 정치란 없다. 그런 구도속에서 구성원들이 더불어 협력하고 "공동의 부"(commonwealth)를 창조하고, 공동선과 개인성, 개인적 자유와 공적 연대가 선순환하는 것, 이것이 정치이고 능동적이고 생동하는 정치의 활력이다.

그런데 강조해야 할 것은 이렇게 공동의 부를 창조하고 공유하는 정치, 즉 '활사활공'(活私活公)의 시민정치가 결코 경제바깥에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순수한 경제란 없고 바로 경제안에 정치가 들어가 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이해하는 "시민경제"다. 단지 소극적으로 자유시장은 객관적,과학적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멈출 것이 아니라, 참여하고 협력하고 창조하고 공유하고 연대하는 정치를 내장한 "시민경제"론을 구성할때 비로소 로빈슨 크루소적 경제인(호모 에코노미쿠스)과 무한 경쟁의 허구적 경제학, "합리적 바보"(A. Sen)의 자유시장 경제학- 캠퍼스를 제국주의적으로 휩쓰는 <멘큐의 경제학>도 여기에 포함된다-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경제시민의 권리 증진은 시민경제론을 필요로 한다.

 


 

/이병천 강원대 교수, <시민과 세계> 공동편집인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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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교수 싫어하지 않습니다, 틀렸다는 거죠 | - 장하준 - 책과 토론 2011-03-01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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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교수 싫어하지 않습니다, 틀렸다는 거죠
[재반론] 박윤우 부키출판사 사장의 '장하준은 아무나 두들겨도...'에 대해
11.02.18 14:02 ㅣ최종 업데이트 11.02.18 14:02 김기원 (kimkywon)
김기원 방송통신대학교 경제학과 교수가 도서출판 부키의 박윤우 대표가 가 쓴 '장하준은 아무나 두들겨도 되는 동네북인가' 글에 반박하는 글을 보내와 싣습니다. <편집자말>

서로 허술함 지적하면서 발전하는 것

 

필자는 한 달쯤 전 장하준 교수에게 논쟁을 제기했다.(삼성이 뭐라고요? 장하준 교수 틀리셨습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장 교수 본인이 아니라 장 교수 책을 출판한 박윤우 사장이 나서더니(관련기사: 장하준은 아무나 두들겨도 되는 동네북인가), 장 교수는 나중에 제대로 된 글이 아니고 말로 자신의 의견을 단편적으로 밝혔다. <서울신문>, <중앙선데이>, <시사IN>의 인터뷰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박 사장이 비판한 사안 중엔 필자가 사하라 이남 지역을 저소득국 그룹과 중소득국 그룹으로 정확히 구분해서 서술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는 오해를 야기할 소지가 있는 부분인지라 <창비주간논평>의 원래 필자 글에다 문장을 보충한 바 있다.

 

이렇게 자신은 허술하면서 남의 허술함을 비판할 자격이 있느냐는 질책도 가능하다. 다만 서로의 허술함을 지적하는 가운데 모두가 발전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박 사장이 언급한 그 외의 사안은 필자 글을 곡해한 것이므로 여기서 해명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장 교수 인터뷰에선 필자의 비판에 대해 아예 답하지 않은 부분도 있고, 답한 것 같지만 사실은 답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이것들을 정리하면서 지난 번 글에서 필자가 지면사정상 논쟁의 취지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내용을 보완함으로써 논의를 진전시켜보고자 한다.

 

우선 장 교수가 답하지 않은 주요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한국은 총수자본주의로 봐야 하는데 장 교수가 주주자본주의로 파악하고 있는 점. 삼성을 비롯한 재벌에 대한 상황파악이 잘못 되어 있는 점. 소액주주 폐해론에 입각해 사실상 주식시장을 부정한 점.

 

이런 사안들을 답할 가치가 없는 시시한 문제로 본 것인지, 인터뷰라는 한계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기 싫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장 교수가 이런 쟁점들을 피하지 말고 답해준다면 논쟁이 더 생산적으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

 

다음으로 장 교수가 답한 것 같은데 사실은 제대로 답했다고 보기 힘든 것을 조목조목 따져보면서 박 사장의 곡해도 풀어보기로 하자.

 

사하라 이남 지역 경제 악화, 시장만능주의 외에 다른 요인도 영향 미쳐

 

  
장 교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경제가 시장만능주의를 채택한 1980년 이전에는 잘 나갔는데 그 이후부터 오늘날까진 엉망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지역 경제의 성적표엔 이것 말고 다른 요인들도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시장만능주의

첫째로, 장 교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경제가 시장만능주의를 채택한 1980년 이전에는 잘 나갔는데 그 이후부터 오늘날까진 엉망이 되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필자는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나빠졌고, 1980년 이후도 똑같은 게 아니라 1995년 이후엔 그전과는 달리 좋아졌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랬더니 박 사장과 장 교수는 1995년 이후엔 석유와 원자재 가격이 상승했으며, 또 1980년 이후 오늘날까지 전체를 보면 성장률이 낮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한마디로 동문서답이다. 필자가 95년 이후 성장의 원인을 물은 것도 아니고 80년 이후 전체 평균수치가 나쁘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1995년 이후에 석유가 상승 등의 요인으로 경제가 좋아졌다는 사실은 바로 장 교수의 책처럼 시장만능주의를 결정적 변수로 삼는 데 문제가 있다는 증거다. 1970년대 후반의 석유파동에 따른 사하라 이남 지역의 경제악화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박 사장은 1980년에서 90년대 전반까지 시기에 시장만능주의에 따른 폐해가 없었다는 주장을 필자가 하는 것이냐고 따진다. 필자는 그런 주장을 한 적이 없다. 지난 글 서두에서 시장만능주의의 폐해를 인정한다는 점을 분명히 한 바 있다.

 

1980년부터 진행된 시장만능주의에 따른 환율인상이나 민영화 등의 구조조정정책이 사하라 이남지역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있다. 다만 그 지역 경제의 성적표엔 이것 말고 다른 요인들도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석유파동, 원자재가격, 외채탕감정책, 내부사회구조 등 여러 가지가 해당지역 경제에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장 교수는 책에서 1980년 이후 한동안 시장만능주의가 악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지나치게 '확대 해석'해서 1980년 이전과 이후의 경제성적표를 단순하게 시장만능주의라는 잣대만으로 처리했다.

 

이게 무슨 커다란 사실의 왜곡이냐고 반론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이나 90년대 후반 이후처럼 시장만능주의로 설명할 수 없는 시기까지를 시장만능주의로 덮어씌우는 식으로 사안을 잘못 설명하면 처방전도 제대로 나올 수 없다.

 

제국주의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만사형통이라는 예전 종속이론의 오류가 바로 이런 데 있었다. 장 교수를 종속이론가라고 부르기는 뭣하지만 논리의 단순성은 비슷하다.

 

한국의 진보파들이 '신자유주의 반대' 타령에 몰두했던 것도 장 교수와 마찬가지 오류였다. 경제든 교육이든 아무 데서나 신자유주의 운운했다. 그런데 교육계의 부패나 체벌이 신자유주의 문제인가.

 

주주자본주의의 모델인 GE의 건재는 어떻게 설명한 건가?

 

  
지난 2009년 4월 6일 한나라당 국민소통위원회 초청으로 장하준 교수가 국회 의원회관에서 '이래도 신자유주의인가'를 주제로 강연하고 있다.
ⓒ 남소연
장하준

둘째로, 장 교수는 GM의 파산이 주주자본주의 탓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 노조의 문제를 지적하자 그는 노조 문제도 있지만 주주자본주의가 가장 크게 작용한 요인이라고 한발 물러섰다.

 

그런데 '가장 크게 작용'했다는 걸 도대체 뭘로 알 수 있을까. 아마도 장 교수보다는 필자가 자동차산업에 대해 더 많이 조사했겠지만 필자는 GM 파산의 결정적 원인이 무엇인지 단정적인 결론을 내릴 자신이 없다.

 

그리고 주주자본주의가 다른 요인을 압도하는 결정적인 변수라면 주주자본주의의 모델인 GE의 건재를 설명할 수 없다. 장 교수는 GE 회장이었던 잭 웰치가 주주자본주의를 비판했다는 걸로 여기에 답한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답이 아니다. 잭 웰치의 발언은 퇴임 이후이고 재직 중에 경영방침을 크게 바꿨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 또 그는 주주자본주의를 무조건 부정한 게 아니라 단기적 수익지표에 과도하게(heavily)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주주 특히 소액주주가 기업발전에 장애를 초래한다는 장 교수의 극단적 주장에 접하면 잭  웰치는 쇼크를 받지 않을까 싶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거듭 강조하지만 필자는 주주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주주자본주의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주주자본주의냐 아니냐가 기업과 나라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결정적 변수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장 교수의 논리로는 일본과 유럽의 성장률 변화를 설명할 수 없다. 그는 반론에서 국제통계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지만, 바로 그 국제통계를 볼 때 일본과 유럽의 변화를 장 교수 식으론 설명할 수 없음은 이미 지난 글에서 지적했다.

 

요컨대 주식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나라경제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성립 가능하지만, 장 교수처럼 주주의 의의를 부정하고 주주자본주의 여부로 기업과 나라의 운명을 설명하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논리라는 것이다.

 

재벌개혁론자들의 글, 제대로 읽어보셨나?

 

셋째로, 장 교수는 "재벌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면 삼성 응원단이냐"고 반론했다. 그런데 소수의 극좌파를 제외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재벌의 긍정적인 면을 인정하지 않는 재벌 개혁론자는 없다.

 

이는 장 교수가 재벌개혁론자들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증거다. 읽고서도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그건 더 큰 문제다. 재벌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공유한 야누스의 얼굴 같은 존재다.

 

재벌개혁론자들은 재벌의 긍정적인 면은 살리되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고자 한다. 즉 성장의 주체라는 면은 살리고 재벌총수의 부패나 무능이라는 부분과 재벌이 사회를 오염시킴으로써 시장의 공정성을 해치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자고 한다.

 

이러한 시민단체 활동에 대해 장 교수가 재벌과 보조를 맞춰가며 공격했기 때문에 그를 수구적 진보라고 비판한 것이다. 이는 지난 글에서도 밝힌 내용인데 반론은 역시 동문서답인 셈이다.

 

또 장 교수는 재벌개혁운동이 주주자본주의를 부추기는 효과를 초래했다고도 반론했다. 총수에 의해 깡그리 무시당한 일반 주주에게 정당한 권리를 찾아주는 게 주주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주주자본주의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박정희 전두환 같은 독재자에게 짓밟힌 노동자의 권리를 찾아주자고 하면 프롤레탈리아 독재를 하자는 거냐고 몰아치던 수구적 보수파와 마찬가지 논법이다.

 

아무리 대가라도 타국의 구체적인 사안에 정통할 수는 없어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장하준 저/김희정 역/안세민 역).
ⓒ 부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이쯤 해서 논의를 종합해보자. 장 교수와 같은 오류는 다른 학자들에게서도 종종 발견된다. 장 교수가 책(308면)에서 칭송한 미국의 크로티 교수는 대우차는 해외매각해서는 안 된다고 한 바 있다. 도대체 그가 대우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이런 경우에 그가 해야 할 말은 "나는 모른다"였을 것이다.

 

필자를 비롯해 한국의 진보파가 좋아하는 스티글리츠 교수는 노벨상까지 탄 세계적인 교수이지만 그의 책에서(Globalization and Its Discontents p. 118) 한국은 IMF 요구에 반대되는 정책을 취함으로써 구조조정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IMF에 복종함으로써 한국경제가 엉망이 되었다는 일부 진보파의 주장도 지나치지만 스티글리츠 식의 정반대 주장도 한국 현실과 괴리되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리 대가라도 다른 나라의 구체적인 사안에 정통할 수는 없다.

 

장 교수의 오류도 이와 같은 차원이다. 물론 필자의 글에도 찾아보면 오류가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조심해야 한다. 특히 장 교수처럼 영향력이 클수록 조심의 필요성은 더 크다.

 

그리고 한국의 특수성을 감안하면서 좌파-우파, 수구-개혁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 장 교수는 반론에서 좌파는 급진적 변화를, 우파는 점진적 변화를 추구한다고 한다.

 

서구의 사민당 같은 좌파가 급진적 변화를 추구하는가. 방향감각이 어째 이상하다. 급진좌파-온건좌파, 급진우파-온건우파로 구분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리고 압축적으로 발전한 한국에선 수구-개혁의 구분도 필요하다.

 

일부 언론은 장 교수에 대한 좌우협공 운운하는 선정적인 이야기를 퍼트렸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의 수구·보수파와 합작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장 교수와 힘을 모아 수구·보수 세력과 대항하고 싶다. 다만 그러려면 장 교수가 갖고 있는 수구적 부분이 지양되어야 한다.

 

재벌개혁이 재벌의 긍정적 측면을 살리고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는 것이듯이, 장 교수 비판도 장 교수가 자신의 긍정적 측면을 살리고 부정적 측면을 극복해 주기를 바라는 것임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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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이 동네북인가? | - 장하준 - 책과 토론 2011-02-07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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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프레시안 www.pressian.com>

장하준이 동네북인가?

[기고] 김기원 교수의 왜곡을 고발한다

기사입력 2011-02-07 오후 4:37:26

 

 

 

영 쓰고 싶지 않은 글이 있다. 지금 쓰는 이 글이 바로 그렇다. 솔직히 이런 류의 글은 자중지란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자칫 사방에서 "누구 좋으라고 그런 글을 쓰느냐"는 비난이나 덮어쓰기 딱 좋은 것이다.

그렇다고 이 글이라도 쓰지 않으면 장하준 교수가 "현실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고 논리를 현실에 꿰어 맞추는" 데다가 "사실을 왜곡하는", 다시 말해 학자로서 기본 자질조차 갖추지 못한 형편없는 인물이 될 판이다.

발단은 이렇다. <창비 주간 논평>이라는 곳에서 방송통신대학교 김기원 교수의 "장하준 논리의 비판적 해부"라는 글을 실었다. 그 글에서 김기원 교수는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23가지>)에 내재된 문제점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사실의 왜곡이요, 둘째는 재벌 문제의 오해와 극단적 주주 배척론이요, 셋째는 한국 사회 특유의 개혁 과제마저 무시한다는 것이었다.

이중 둘째 및 셋째 문제는 여기에서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김 교수 개인의 의견이자 자신의 주장을 펼친 것이니 말이다.

통계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의 왜곡이 문제다

하지만 첫 번째로 지적한 '사실의 왜곡'에 대해서는 사정이 다르다. 이는 학자로서 기본 자질이 부족하다는 비난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결론이 도출된 근거가 김기원 교수 본인이 장 교수의 책에 인용된 통계를 잘못 읽은 데에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히기 위해 당초 김기원 교수가 <창비 주간 논평>에서 <23가지>를 비판한 해당 문장을 확인하도록 하자. 단, 밑줄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 필자가 임의로 추가한 것임을 밝혀 둔다.

"첫째로, 사실의 왜곡이다. 그는 책(107, 160~62면)에서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 연평균 1인당 소득성장률이 1960~70년대에는 1.6%로 나쁘지 않았는데 1980년대 이후론 IMF 등의 요구로 자유 시장, 자유 무역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1980~2009년엔 0.2%로 나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통계를 찬찬히 뜯어보면, 이 지역은 1973~74년의 석유 파동과 그에 따른 세계 불황의 여파로 80년대가 아니라 이미 1975년부터 해당 성장률이 크게 떨어졌다. 1975~79년엔 -0.4%였다.

1980~2009년 사이의 모습도 똑같은 게 아니라 1990년대 후반부터 사정이 나아져 1995~2009년의 해당 성장률은 2.3%였다. 이전의 이른바 '자유 시장 노선'이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도 말이다.

사실 그의 다른 책 <사다리 걷어차기>(241면)를 보면 이 지역의 1960년대 해당 성장률이 1.7%이고 1970년대는 0.2%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인용했던 통계와도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펴고 있는 셈이다.

왜 이리 허술할까. 그건 현실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고 논리를 현실에 덮어씌우기 때문인 듯싶다. 시장만능주의를 만병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모든 환자에게 다 적용하는 꼴이다."


하지만 정작 허술한 것은 김기원 교수 자신이다. 김기원 교수가 지적한 장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 241면에 게재된 '표 3.2 개발도상국들의 연간 1인당 국민총생산(GNP) 성장률(1960-1980년)'에서는 아래에서 보듯이 사하라 이남의 국가들을 두 부류로 나눠져 있다. 바로 저소득 국가들과 중소득 국가들이다.

ⓒ부키

김기원 교수는 이 중 (파랗게 표시된) 저소득 국가들의 경우만을 인용하면서 장하준 교수가 '이전에 인용했던 통계와도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펴고 있는 셈'이라고 비난했다. (빨갛게 표시된) 사하라 이남 중소득 국가들의 1960년대 성장률 2.3%, 1970년대 성장률 1.6%를 도외시한 것이다. 이 둘을 합치면, 즉 저소득 국가와 중소득 국가의 통계를 합치면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국가들의 1960~70년대 연평균 1인당 소득성장률은 보면 장하준 교수가 <23가지>(107, 160~62면)에서 '올바로' 썼듯이 1.6%이다.

요약하자면 장하준 교수는 <23가지>에서 사하라 이남 국가 전체를 대상으로 나온 통계 수치를 제시했다. 그런데 김기원 교수는 그 중 저소득국 그룹만의 통계 수치를 토대로 장하준을 반박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타당한가?

장하준은 아무나 되는 대로 두들겨도 되는 동네북인가?

처음에는 이 문제를 가능하면 조용히 끝내고자 창비 측에 이러한 사실을 알리고 원고에서 바로 잡아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김기원 교수는 "통계 문제는 본인의 논지와는 상관없는 사안"이며, 단지 "논란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아래와 같이 밑줄 친 부분만 추가하겠다고 알려 왔다.

"사실 그의 다른 책 <사다리 걷어차기>(241면)를 보면 이 지역 저소득국 그룹의 1960년대 해당 성장률이 1.7%이고 1970년대는 0.2%로서 이미 70년대부터 성장률이 나빠졌다. 중소득국 그룹의 경우도 70년대 들어 나빠진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인용했던 통계와도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펴고 있는 셈이다."

결국 장하준 교수의 학자로서 기본 자질을 비난한 표현들인 "사실의 왜곡", "왜 이리 허술할까"와 같은 문장들은 손도 대지 않은 것이다. 장하준 교수는 통계적 사실을 올바로 인용했고, 오히려 김기원 교수 본인이 잘못 읽고 그렇게 허술하게 결론을 내린 데에서 모든 문제가 비롯되었다는 점을 지적받은 이후에도 말이다.

김기원 교수는 또 "(장하준 교수) 자신이 이전에 인용했던 통계와도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펴고 있는 셈"이라는 문구도 전혀 수정하지 않았다. "왜 이리 허술할까" 하는 인격적 비난의 표현도 그대로 <창비 주간 논평>에 실었다. 이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런 식의 원고 수정은 옳지 않다는 항의에 대해 김기원 교수는 오히려 "또 오독하고 있다", "장 교수가 자료를 변조할 정도로 비양심적인 학자라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가진 적 없고, 그렇게 읽는 것은 과다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장하준 교수가 통계적) 자료를 허술하게 본다"는 것은 사실 아니냐고 반응하면서, "이런 종류의 논쟁은 더 이상 하면 감정싸움만 되기 마련"이니 "(더 이상) 답하지 않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기까지 했다. 그것도 "(이런 종류의 논쟁) 대신 장 교수가 (김기원 교수 자신의 글에 대해) 제대로 된 반론을 쓰는 게 어떨까"라고 권유하면서 말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장하준 교수가 동네북인가? 이 사람 저 사람, 말이 되든 안 되든 비난과 비판을 늘어놓으면 장 교수는 그런 말에 일일이 대응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간의 과정을 투명하게 밝히기 위해 서로 간에 오간 메일을 공개하면 다음과 같다. (☞바로 보기)

왜 그간 장하준 비판에 답하지 않았는가?

김기원 교수는 일관되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나라들의 가난과 저성장은 자유 시장 노선의 도입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싶어 한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사하라 이남 지역 국가들의 성장률이 1975년도부터 하락한 것에 대해 "73~74년의 석유 파동과 그에 따른 세계 불황의 여파"에 원인이 있다고 밝혀 놓았다. 이들 나라에서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이 본격 도입된 것은 1980년대 이후이니, 이들 나라의 성장률 정체가 자유 시장 책임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장하준 비판이다.

이어 김기원 교수는 "자유 시장 노선이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은" 1995년 이후부터의 사하라 이남 지역 국가들의 성장률은 2.3%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와 관련 김기원 교수는 1990년대를 전후해 앙골라, 적도 기니 등 여러 나라들이 유전 개발로 산유국의 대열에 들어섰다는 사실, 불변 달러화 기준으로 볼 때 국제 원자재 가격은 1980년대에 5.2% 하락한 데 이어 1990년대에도 0.4% 떨어졌으나, 2000년대엔 7.5%나 상승한 사실, 특히 아프리카의 주요 수출 항목인 광물(Minerals, ores and metals, 원유 포함) 부문을 보면 1980년대와 1990년대엔 각각 1.1%, 2.1% 하락했으나 2000년대 들어서는 12.2%나 상승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관련 자료)

설령 김기원 교수의 통계를 그대로 받아들여도 문제는 남는다. 이들 나라의 1980~2009년의 30년간 연평균 성장률은 0.2%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1980~95년 기간에는 이들 나라가 심각한 마이너스 경제 성장 상태였다는 말이지 않은가? 그런데도 198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경제 노선이 이들 국가에서의 심각한 저성장과 무관하다는 주장이 가능한가?

그렇다면 혹시 김기원 교수는, 자유 시장 경제 노선을 이들 나라가 굳건히 믿고 따른 결과 초기의 15년간은 마이너스 성장은 겪었을지 몰라도 1995년부터는 2.3%라는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률을 구현하게 되었으니 세계은행과 IMF 등이 이들 나라에 요구한 자유 시장 노선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고 싶은 것인가?

게다가 중소득국 그룹의 성장률은 1960년대가 2.3%이고, 1970년대가 1.6%이다. 반면 저소득국의 성장률은 1960년대가 1.7%이고 1970년대가 0.2%이다. 중소득국의 경우 1970년대의 성장률이 1960년대에 비하면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졌으나, 저소득국의 경우 거의 10분의 1 수준으로 급락한 것이다. 그런데도 김기원 교수는 중소득국 그룹의 경우도 저소득국 그룹과 사정이 비슷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타당한가?

▲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장하준,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부키 펴냄). ⓒ부키
<23가지> 출간 이후 해당 책에 대한 비판, 그리고 책 외의 다른 곳에서 장하준 교수가 한 이야기들에 대해 여러 가지 비판들이 많이 나왔다. 진지하고 건설적인 비판도 있었지만 사실을 왜곡하거나 인신공격성 발언을 하는 글들도 많았다. 장하준 교수가 이러한 글에 대해 어떤 기회에 어떤 식으로 대응을 하는가는 본인이 판단할 문제이다. 그러나 이번 경우에 출판사가 굳이 나서서 반박을 하는 것은, 김기원 교수의 글이 다른 글과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김기원 교수는 장하준 교수를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 자기주장을 합리화하는, 더구나 자기 책에 사용한 통계마저 일관성 없이 자의적으로 인용하는 엉터리 학자로, 한마디로 학자로서 기본 소양이 의심되는 인물로 묘사하였다. 정작 통계를 잘못 읽은 것은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는 한 학자의 저서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말하는 수준을 넘어 그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그 때문에 굳이 이 자리를 빌려 김기원 교수의 장하준 비판의 오류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박윤우 도서출판 부키 대표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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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뭐라고요? 장하준 교수님 틀리셨습니다 | - 장하준 - 책과 토론 2011-01-27 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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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뭐라고요? 장하준 교수님 틀리셨습니다
장 교수 논리의 비판적 해부... 극단적 소액주주 배척론의 위험성
11.01.26 21:32 ㅣ최종 업데이트 11.01.26 21:32 김기원 (changbi)
  
장하준 교수.
ⓒ 권우성
장하준

장하준 교수의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재미가 있고 문체도 경쾌하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 중엔 필자 역시 동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우선 시장만능주의의 폐해에 대한 지적을 들 수 있다. (시장만능주의를 그는 자유시장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라는 좋은 어감의 단어로 나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은 언어의 정치적 효과에 둔감한 소치이고, 아울러 시장의 긍정적 기능을 경시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 글에선 시장만능주의로 쓰기로 한다.)

 

또한 불균형적으로 발달한 금융부문에 대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복지의 중요성에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세탁기 발명의 의의, 탈산업화 신화의 맹점, 과도한 대학교육열에 대한 비판 같은 것들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처럼 그의 논리는 꽤 괜찮은 내용들을 담고 있지만 여러가지 큰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다. 이 중 일부는 우리 사회 '진보파'의 한계이기도 하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장 교수의 다른 글들도 곁들여서 검토해 보자.

 

시장만능주의가 만병의 근원?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부키
장하준

첫째로, 사실의 왜곡이다. 그는 책(107, 160~62면)에서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지역의 연평균 1인당 소득성장률이 1960~1970년대에는 1.6%로 나쁘지 않았는데 1980년대 이후론 IMF 등의 요구로 자유시장, 자유무역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1980~2009년엔 0.2%로 나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통계를 찬찬히 뜯어보면, 이 지역은 1973~1974년의 석유파동과 그에 따른 세계불황의 여파로 80년대가 아니라 이미 1975년부터 해당 성장률이 크게 떨어졌다. 1975~1979년엔 -0.4%였다.

 

1980~2009년 사이의 모습도 똑같은 게 아니라 1990년대 후반부터 사정이 나아져 1995~2009년의 해당 성장률은 2.3%였다. 이전의 이른바 '자유시장 노선'이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도 말이다.

 

사실 그의 다른 책 <사다리 걷어차기>(241면)를 보면 이 지역의 1960년대 해당성장률이 1.7%이고 1970년대는 0.2%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인용했던 통계와도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펴고 있는 셈이다.

 

왜 이리 허술할까. 그건 현실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고 논리를 현실에 덮어씌우기 때문인 듯싶다. 시장만능주의를 만병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모든 환자에게 다 적용하는 꼴이다.

 

장 교수의 자의적 수치해석은 사하라 이남의 경우에서만이 아니다. 그는 미국의 연평균 1인당 소득성장률이 1960~1970년대엔 2.6%였는데 주주자본주의가 득세한 1990~2009년엔 1.6%로 하락했다고 한다(41면).

 

하지만 주주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먼 일본의 해당 성장률도 1950~1973년에 8.1%였으나 1973~1998년엔 2.3%로 급락했다. 그 이후엔 1%도 될까 말까 했다. 서유럽도 마찬가지로 4.1%에서 1.8%로 급락했다.

 

그러니까 주주자본주의와 미국경제의 성장률 하락을 곧바로 연결짓는 건 무리인 셈이다. 장 교수식 논법이라면 일본과 서유럽이 주주자본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장률 급감을 겪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GM 파산을 주주자본주의 탓으로 설명하는 방식도(45, 258면) 설득력이 약하다. 장 교수는 주주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잭 웰치가 이끌었던 GE의 건재는 어떻게 설명할까. 모든 문제를 좌파 탓으로 돌리는 한국의 한심한 보수파처럼 인과관계를 과도하게 단순화해서야 되겠는가.

 

재벌 문제의 오해와 극단적 주주배척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3일 오전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린 삼성그룹 신년하례회에 참석하기 위해 행사장으로 향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뒤쪽으로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기획 부사장이 보인다.
ⓒ 연합뉴스
이건희

둘째로, 장 교수는 한국 현실 특히 재벌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그는 <프레시안> 인터뷰에서(2011.1.4) 삼성 문제와 관련해 "경영권세습을 인정할 테니 노동조합을 인정하라. 이사회의 40% 정도를 정부,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에 할당해 사회의 감시를 받아라"라고 했다.

 

이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인가. 이미 특검 기소에 대한 2009년 법원판결로 삼성총수의 경영권세습 문제는 끝났다. 그저 총수자녀 사이의 영역다툼이 남아 있을 뿐이다. 노조 인정 등등 다 좋은 말씀이지만 장 교수는 우선 상황파악부터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또다른 인터뷰에서(<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수록, 138면) 그는 2008년 4월 이건희 회장의 '대국민 사과 및 경영퇴진 성명'에 대해 "삼성가문 측에서는 드디어 기업집단을 해체하겠다는 거잖아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 성명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물론 삼성가문이 그럴 의도도 없었으며, 나중엔 성명서의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다.

 

장 교수의 재벌관은 그의 주주자본주의관과 관련이 있다. 그는 주주자본주의에서 중시되는 주주, 특히 소액주주는 배당의 극대화 등 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구만 한다고 한다(33~46면). 그래서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 된다"라는 표제까지 달았다(32면).

 

그렇다면 장 교수가 원하는 기업체제에선 소유주들이 기업을 소유할 이유가 없게 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경영되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해서 주주 특히 소액주주는 모두 기업을 떠나야 마땅하다. 장 교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주식시장엔 사망선고가 내려진다. 이게 그가 추구하는 바인가.

 

필자는 주주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극단적 주주자본주의론보다 모든 기업관련자를 균형적으로 배려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론을 선호한다. 하지만 장 교수의 주주배척론은 마찬가지로 잘못된 극단이다.

 

그리고 소액주주, 특히 한국의 소액주주는 장 교수의 생각만큼 그렇게 힘이 세지 않다. 기껏 시민단체가 소액주주의 지분을 모아 소송을 걸 수 있을 뿐이다. 장부 조작하고 회사 돈 빼돌리는 총수를 고발하는 시민단체 활동이 뭐가 잘못됐다는 말일까.

 

기업경영에 대해 그나마 발언권을 행사하는 건 기관투자가들 정도인데, 한국에선 이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기관투자가들이 자신과도 거래하는 재벌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근래 금호나 현대가 무리하게 건설사를 인수하려 했을 때 기관투자가들이 도대체 손쓸 수 있었는가.

 

장 교수는 소액주주들이 배당금을 높이도록 요구한다고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선 소액주주가 그럴 힘도 없고 배당금보다 주가차익에 훨씬 관심이 많다. 주가가 빠질 것 같으면 그냥 팔아치운다. 그리고 배당성향(배당금/당기순이익)도 오늘날보다 1970년대에 더 높았다.

 

주주자본주의에선 주주를 위해 기업이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한다고 장 교수는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주주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시사IN> 2011.1.8) 요즘 한국에서 오직 일반주주들 압력 때문에 노동자를 대량 해고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오히려 박정희나 전두환 때 더 함부로 노동자 목을 쳤다.

 

한국은 주주자본주의가 아니라 총수자본주의다. 회사재산이 총수(지배주주)의 호주머니 장난감 비슷하게 취급되며, 일반주주나 종업원은 총수의 이익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고려대상이다.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총수비리를 보라.

 

장 교수는 참여연대 공격에서 재벌들과 보조를 맞췄다. 아마도 참여연대가 외국자본과 한통속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작용한 듯싶다(<쾌도난마 한국경제> 82~94면). 그러나 이는 장 교수가 삼성 문제를 헛짚었듯이 참여연대 활동도 제대로 따져보지 않은 결과다.

 

총수비리를 따지는 소액주주권을 행사하고자 참여연대가 지분을 모은다든가 할 때 외국자본이 참가한 경우는 있다. 이게 비난거리일까. 또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한 게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게 바로 참여연대에서 분가한 경제개혁연대다.

 

물론 장 교수 말마따나 정체가 불분명한 외국투자자가 우리 기간산업을 함부로 주무르는 건 좋지 않다. 그렇다고 모든 외국자본을 마녀사냥할 필요도 없다. 외국자본은 우리가 주체적 선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더욱이 민족주의 감정을 악용해 부패하거나 무능한 '재벌총수' 문제를 덮어선 안 된다. 그것은 '재벌기업' 나아가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또 총수 문제를 덮으면 오히려 재벌의 부도확률을 높여 외국자본에 기간산업을 잘못 넘겨줄 가능성도 커진다.

 

한국사회 특유의 개혁 과제마저 무시해선 곤란

 

  
지난 2010년 11월 25일 오전 11시 영국 런던의 한 호텔에서 김승유 하나금융 회장(오른쪽에서 세 번째)과 존 그레이켄 론스타 회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외환은행 지분 인수를 위한 주식매매계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 하나금융 제공
론스타

셋째로, 장 교수는 한국사회가 진보의 과제만이 아니라 개혁의 과제도 안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무시한다.

 

한국의 이념과 정책을 평가할 땐 '진보와 보수'라는 기준과는 별개로 '개혁과 수구'라는 구분이 필요하다. 전자를 가로축에 놓는다면 후자는 세로축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시장과 국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진보파와 보수파의 구별은 시장과 국가의 크기(量)에 관련된다. 진보파는 국가의 영역을 확대하려 하고, 보수파는 반대로 시장을 확대하려 한다.

 

한편, 개혁파는 시장과 국가의 질(質)을 높이려는 세력이고 수구파는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다. 시장의 질 제고란 시장의 투명성과 공정경쟁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국가의 질 제고란 국가의 민주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장 교수는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점에서 진보파다. 그러나 재벌개혁운동을 왜곡 비난해온 점에선 수구파에 가깝다. 수구·진보파인 셈이다. 그는 국가와 재벌이 짝짜꿍이 되었던 박정희시대가 정치적 독재 빼고는 너무나 좋은 시대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중상주의적 박정희 시대의 국가역할을 인정하더라도 바람직한 선진국을 지향하는 오늘날엔 진보뿐만 아니라 개혁의 중요성도 간과해선 안 된다.

 

장 교수는 재벌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재벌이 정계, 관계, 언론계, 학계, 법조계를 오염시키고 그리하여 기업 사이에 불공정경쟁이 지속되는 현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선진국이라고 이런 문제가 전혀 없진 않지만, 장 교수도 지지하는 북유럽을 보라. 어디 한국만큼 국가가 부패하고 시장이 불공정한 경우가 있는가. 장 교수와 필자가 바라는 복지사회를 위해서도 진보만이 아니라 개혁이 필요하다.

 

증세를 통한 복지확대가 국민적 설득력을 가지려면 국가가 비효율적이고 비민주적이어선 안 된다. 그리고 대기업정규직과 비정규직(및 중소기업근로자) 사이의 부당한 격차라는 노동시장의 불공정경쟁 문제는 복지확대를 통한 실질임금 격차해소가 현실적 처방이다. 진보와 개혁의 이러한 상호보완관계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지면사정상 이쯤에서 글을 정리해 보자. 장 교수의 주장엔 옳은 것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념에 사로잡혀 자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선 안 된다. 이번 책에서처럼 중대한 오류가 있으면 다른 좋은 주장마저 신뢰성을 잃는다.

 

그리고 시장과 주주를 우상숭배해선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우습게 보거나 죄인취급해서도 곤란하다. 시장만능주의와 주주자본주의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다루는 단순한 환원론으로부턴 올바른 해법이 나올 수 없다. 특히 한국처럼 개혁과 진보가 동시에 필요한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덧붙이는 글 | 김기원님은 방송통신대 경제학과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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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논리의 비판적 해부 | - 장하준 - 책과 토론 2011-01-27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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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 논리의 비판적 해부

[창비주간논평] 재벌 문제의 오해와 극단적 주주배척론

기사입력 2011-01-26 오전 10:15:08

 

 

장하준 교수의 책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 재미가 있고 문체도 경쾌하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 중엔 필자 역시 동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우선 시장만능주의의 폐해에 대한 지적을 들 수 있다. (시장만능주의를 그는 자유시장주의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자유'라는 좋은 어감의 단어로 나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은 언어의 정치적 효과에 둔감한 소치이고, 아울러 시장의 긍정적 기능을 경시하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이 글에선 시장만능주의로 쓰기로 한다.)

또한 불균형적으로 발달한 금융부문에 대해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에도 많은 이들이 동의할 것이다. 복지의 중요성에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세탁기 발명의 의의, 탈산업화 신화의 맹점, 과도한 대학교육열에 대한 비판 같은 것들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처럼 그의 논리는 꽤 괜찮은 내용들을 담고 있지만 여러가지 큰 문제점도 내포하고 있다. 이 중 일부는 우리 사회 '진보파'의 한계이기도 하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장 교수의 다른 글들도 곁들여서 검토해보자.

시장만능주의가 만병의 근원?
▲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 ⓒ프레시안(손문상)

첫째로, 사실의 왜곡이다. 그는 책(107, 160~162면)에서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지역의 연평균 1인당 소득성장률이 1960~70년대에는 1.6%로 나쁘지 않았는데 1980년대 이후론 IMF 등의 요구로 자유시장, 자유무역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1980~2009년엔 0.2%로 나빠졌다고 한다.

그런데 통계를 찬찬히 뜯어보면, 이 지역은 1973~74년의 석유파동과 그에 따른 세계불황의 여파로 1980년대가 아니라 이미 1975년부터 해당 성장률이 크게 떨어졌다. 1975~79년엔 -0.4%였다.

1980~2009년 사이의 모습도 똑같은 게 아니라 1990년대 후반부터 사정이 나아져 1995~2009년의 해당 성장률은 2.3%였다. 이전의 이른바 '자유시장 노선'이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도 말이다.

사실 그의 다른 책 <사다리 걷어차기>(241면)를 보면 이 지역의 1960년대 해당성장률이 1.7%이고 1970년대는 0.2%다. 그는 자신이 이전에 인용했던 통계와도 부합하지 않는 주장을 펴고 있는 셈이다.

왜 이리 허술할까. 그건 현실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않고 논리를 현실에 덮어씌우기 때문인 듯싶다. 시장만능주의를 만병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모든 환자에게 다 적용하는 꼴이다.

장 교수의 자의적 수치해석은 사하라 이남의 경우에서만이 아니다. 그는 미국의 연평균 1인당 소득성장률이 1960~1970년대엔 2.6%였는데 주주자본주의가 득세한 1990~2009년엔 1.6%로 하락했다고 한다(41면).

하지만 주주자본주의와는 거리가 먼 일본의 해당 성장률도 1950~73년에 8.1%였으나 1973~1998년엔 2.3%로 급락했다. 그 이후엔 1%도 될까 말까 했다. 서유럽도 마찬가지로 4.1%에서 1.8%로 급락했다.

그러니까 주주자본주의와 미국경제의 성장률 하락을 곧바로 연결짓는 건 무리인 셈이다. 장 교수식 논법이라면 일본과 서유럽이 주주자본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에 성장률 급감을 겪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GM 파산을 주주자본주의 탓으로 설명하는 방식도(45, 258면) 설득력이 약하다. 장 교수는 주주자본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잭 웰치가 이끌었던 GE의 건재는 어떻게 설명할까. 모든 문제를 좌파 탓으로 돌리는 한국의 한심한 보수파처럼 인과관계를 과도하게 단순화해서야 되겠는가.

재벌 문제의 오해와 극단적 주주배척론

둘째로, 장 교수는 한국 현실 특히 재벌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그는 <프레시안> 인터뷰에서(2011.1.4) 삼성 문제와 관련해 "경영권세습을 인정할 테니 노동조합을 인정하라. 이사회의 40% 정도를 정부, 노동조합, 시민단체 등에 할당해 사회의 감시를 받아라"라고 했다.

이 무슨 뜬금없는 이야기인가. 이미 특검기소에 대한 2009년 법원판결로 삼성 총수의 경영권세습 문제는 끝났다. 그저 총수자녀 사이의 영역다툼이 남아 있을 뿐이다. 노조 인정 등등 다 좋은 말씀이지만 장 교수는 우선 상황파악부터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또다른 인터뷰에서(<한국사회와 좌파의 재정립> 수록, 138면) 그는 2008년 4월 이건희 회장의 '대국민 사과 및 경영퇴진 성명'에 대해 "삼성가문 측에서는 드디어 기업집단을 해체하겠다는 거잖아요"라고 했다.

하지만 그 성명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다. 물론 삼성가문이 그럴 의도도 없었으며, 나중엔 성명서의 약속조차 지키지 않았다.

장 교수의 재벌관은 그의 주주자본주의관과 관련이 있다. 그는 주주자본주의에서 중시되는 주주 특히 소액주주는 배당의 극대화 등 기업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구만 한다고 한다(33~46면). 그래서 "기업은 소유주 이익을 위해 경영되면 안된다"라는 표제까지 달았다(32면).

그렇다면 장 교수가 원하는 기업체제에선 소유주들이 기업을 소유할 이유가 없게 된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경영되는 것이 아니니까. 그리해서 주주 특히 소액주주는 모두 기업을 떠나야 마땅하다. 장 교수 주장에 따르면 결국 주식시장엔 사망선고가 내려진다. 이게 그가 추구하는 바인가.

필자는 주주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극단적 주주자본주의론보다 모든 기업관련자를 균형적으로 배려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론을 선호한다. 하지만 장 교수의 주주배척론은 마찬가지로 잘못된 극단이다.

그리고 소액주주 특히 한국의 소액주주는 장 교수의 생각만큼 그렇게 힘이 세지 않다. 기껏 시민단체가 소액주주의 지분을 모아 소송을 걸 수 있을 뿐이다. 장부 조작하고 회사 돈 빼돌리는 총수를 고발하는 시민단체 활동이 뭐가 잘못됐다는 말일까.

기업경영에 대해 그나마 발언권을 행사하는 건 기관투자가들 정도인데, 한국에선 이것도 거의 불가능하다. 기관투자가들이 자신과도 거래하는 재벌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근래 금호나 현대가 무리하게 건설사인수하려 했을 때 기관투자가들이 도대체 손쓸 수 있었는가.

장 교수는 소액주주들이 배당금을 높이도록 요구한다고 하지만, 적어도 한국에선 소액주주가 그럴 힘도 없고 배당금보다 주가차익에 훨씬 관심이 많다. 주가가 빠질 것 같으면 그냥 팔아치운다. 그리고 배당성향(배당금/당기순이익)도 오늘날보다 1970년대에 더 높았다.

주주자본주의에선 주주를 위해 기업이 노동자를 함부로 해고한다고 장 교수는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주주자본주의라고 주장하는(<시사IN> 2011.1.8) 요즘 한국에서 오직 일반주주들 압력 때문에 노동자를 대량 해고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오히려 박정희나 전두환 때 더 함부로 노동자 목을 쳤다.

한국은 주주자본주의가 아니라 총수자본주의다. 회사재산이 총수(지배주주)의 호주머니 장난감 비슷하게 취급되며, 일반주주나 종업원은 총수의 이익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고려대상이다.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총수비리를 보라.

장 교수는 참여연대 공격에서 재벌들과 보조를 맞췄다. 아마도 참여연대가 외국자본과 한통속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작용한 듯싶다(<쾌도난마 한국경제> 82~94면). 그러나 이는 장 교수가 삼성 문제를 헛짚었듯이 참여연대 활동도 제대로 따져보지 않은 결과다.

총수비리를 따지는 소액주주권을 행사하고자 참여연대가 지분을 모은다든가 할 때 외국자본이 참가한 경우는 있다. 이게 비난거리일까. 또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인수한 게 잘못되었음을 지적한 게 바로 참여연대에서 분가한 경제개혁연대다.

물론 장 교수 말마따나 정체가 불분명한 외국투자자가 우리 기간산업을 함부로 주무르는 건 좋지 않다. 그렇다고 모든 외국자본을 마녀사냥할 필요도 없다. 외국자본은 우리가 주체적 선별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더욱이 민족주의 감정을 악용해 부패하거나 무능한 '재벌총수' 문제를 덮어선 안된다. 그것은 '재벌기업' 나아가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또 총수 문제를 덮으면 오히려 재벌의 부도확률을 높여 외국자본에 기간산업을 잘못 넘겨줄 가능성도 커진다.

한국사회 특유의 개혁 과제마저 무시해선 곤란

셋째로, 장 교수는 한국사회가 진보의 과제만이 아니라 개혁의 과제도 안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무시한다.

한국의 이념과 정책을 평가할 땐 '진보와 보수'라는 기준과는 별개로 '개혁과 수구'라는 구분이 필요하다. 전자를 가로축에 놓는다면 후자는 세로축에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시장과 국가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진보파와 보수파의 구별은 시장과 국가의 크기(量)에 관련된다. 진보파는 국가의 영역을 확대하려 하고, 보수파는 반대로 시장을 확대하려 한다.

한편, 개혁파는 시장과 국가의 질(質)을 높이려는 세력이고 수구파는 이에 저항하는 세력이다. 시장의 질 제고란 시장의 투명성과 공정경쟁을 발전시키는 것이고, 국가의 질 제고란 국가의 민주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다.

장 교수는 복지확대를 주장하는 점에서 진보파다. 그러나 재벌개혁운동을 왜곡 비난해온 점에선 수구파에 가깝다. 수구·진보파인 셈이다. 그는 국가와 재벌이 짝짜꿍이 되었던 박정희 시대가 정치적 독재 빼고는 너무나 좋은 시대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중상주의적 박정희 시대의 국가역할을 인정하더라도 바람직한 선진국을 지향하는 오늘날엔 진보뿐만 아니라 개혁의 중요성도 간과해선 안된다.

장 교수는 재벌이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문제에 별 관심이 없다. 재벌이 정계, 관계, 언론계, 학계, 법조계를 오염시키고 그리하여 기업 사이에 불공정경쟁이 지속되는 현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 것이다.

선진국이라고 이런 문제가 전혀 없진 않지만, 장 교수도 지지하는 북유럽을 보라. 어디 한국만큼 국가가 부패하고 시장이 불공정한 경우가 있는가. 장 교수와 필자가 바라는 복지사회를 위해서도 진보만이 아니라 개혁이 필요하다.

증세를 통한 복지확대가 국민적 설득력을 가지려면 국가가 비효율적이고 비민주적이어선 안된다. 그리고 대기업정규직과 비정규직(및 중소기업근로자) 사이의 부당한 격차라는 노동시장의 불공정경쟁 문제는 복지확대를 통한 실질임금 격차해소가 현실적 처방이다. 진보와 개혁의 이러한 상호보완관계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지면사정상 이쯤에서 글을 정리해보자. 장 교수의 주장엔 옳은 것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념에 사로잡혀 자료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선 안된다. 이번 책에서처럼 중대한 오류가 있으면 다른 좋은 주장마저 신뢰성을 잃는다.

그리고 시장과 주주를 우상숭배해선 곤란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우습게 보거나 죄인취급해서도 곤란하다. 시장만능주의와 주주자본주의를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다루는 단순한 환원론으로부턴 올바른 해법이 나올 수 없다. 특히 한국처럼 개혁과 진보가 동시에 필요한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김기원 방송통신경제학과 교수 메일보내기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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