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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S. 앨런의 「집은 어떻게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나: 신경인류학이 말하는 우리의 집」 | 기본 카테고리 2022-11-20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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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집은 어떻게 우리를 인간으로 만들었나

존 S.앨런 저/이계순 역
반비 | 2019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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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보다 무서운 정신적 노숙

“‘집’은 결국 물리적 또는 경제적 의미와는 별개로 정서적 함축성을 지닌 단어이다.”

토머스 소얼(225P)

 

 

집은 집이로되, 집이 아닌 시대다. 집은 단순히 사람이 들어가 사는 구조물도 아니고, 움직일 수 없는 고가의 재산도 아니고, 행복하고 단란한 보금자리도 아니다. 집은 그 모든 것이 될 수 있고,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집은 모든 재산의 층위를 압도하는 가장 강력한 권위를 지닌다.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집은 부당하게 신화화되고 있고, 본연의 가치라고 우리가 은연중에 믿고 있었던 어떤 영역으로부터 점점 떨어져 나가고 있다. 집은 모든 욕망과 가치와 꿈을 잡아먹는 괴물이 되고 있다. 이게 모든 문제의 원인인지, 혹은 온갖 문제가 이러한 결과를 야기한 것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오늘날 우리 삶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뉘는데, 첫째는 요람에서 나와 집을 얻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시기이고, 둘째는 집값을 갚기 위해 아등바등하다 무덤에 들어가는 시기다.

신경인류학자인 존 S. 앨런(John S. Allen)은 진화와 뇌과학의 이론을 총동원하여 집의 의미와 기원, 그리고 동시대적 가치를 규명하였다. 그의 연구를 요약하자면, 인류는 일개 유인원 수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인지적 혁명의 태동기로부터 여타의 동물들과 달리 집의 특별한 가치에 주목하면서 그것을 발전시켜 나갔다. 인류 초기의 집은 오늘날 유인원이 나뭇가지를 엮거나 큰 잎사귀들을 바닥에 겹쳐 깔아 하루 혹은 며칠간의 임시 잠자리를 마련하는 수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호모속의 주거지에는 화로를 중심으로 취사와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며, 눈과 비를 피할 수 있었고, 작업과 휴식을 병행할 수 있었다. 하나의 주거지는 가족이나 이웃의 주거지와 연결되어 집단의 생활권을 형성하였고, 소집단을 하나로 이어주는 의례, 예컨대 장례나 제의 같은 절차도 주거지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정신의 발달이 이러한 집을 가능하게 한 것인지, 안정적인 주거지의 형성이 정신의 발달을 촉발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안정적 주거지의 발전과 종으로서 호모속의 지배력 확대는 상호보완적 영향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인다. 즉, 인류는 안정적인 주거지의 발전을 통해 생존력과 번식력을 확충할 수 있었고, 호모속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은 집의 발전을 이끌었다.

이처럼 집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틀이다. 우리가 집에 너무 익숙해져서 그 소중함을 잊는 순간에도 집의 가치는 퇴색되지 않는다. 집은 온갖 자극으로 충만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거의 유일하게 멍한 시간을 허락한다(그 한 줌 정도 되는 시간으로부터도 벗어나려 애를 쓴다는 게 문제지만). 긴장을 풀어주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항상성을 유지하게 도와준다. 우리는 삶을 위한 분투 속에서 흩어지고 부서져 버린 정신의 파편들을 집으로 돌아와서야 비로소 다시 꿰맨다. 저자는 이러한 집의 기능, 그리고 집에서 느끼는 정신과 감각의 상태를 집느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집느낌은 여행지의 특급호텔에서는 채울 수 없는, 오직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정신적 상태이다.

우리는 집이 마치 공기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탓에 그것의 소중함을 종종 잊는다. 집의 소중함은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문제들을 접할 때 비로소 체감된다. 저자는 현대적 의미에서 집이 없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사례로 노숙인, 위탁아동, 조현병, 저장장애 등 네 가지 유형을 든다. 노숙인은 스스로 집을 거부했거나, 주택제도라는 울타리에서 거부되어 집 없이 길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위탁 아동은 친부모라는 우산에서 의도치 않게 벗어나 공적 시설이나 임시보호 가정에 맡겨진 아이들이다. 조현병 환자는 번듯한 집이 있더라도 정신이 그곳을 종종 탈주하여 집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상태가 되곤 한다. 치매 환자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는다. 저장장애는 집을 과도하게 물건으로 가득 채우면서 정작 자신은 집이 주는 안락함에서 밀려나는 현상인데, 주로 정서적 상실감과 외로움에 시달리는 고령층을 대상으로 발현되곤 한다. 최근 고령화와 핵가족화가 저장장애를 급격하게 증가시키는 요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처럼 집이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 노력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지고 있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신자유주의의 열매를 탐스럽게 맺은 부자나라일수록 집이 없는 사람들에 관한 병리적 문제가 심화하는 양상이다. 미국 주택도시개발부에 따르면, 2020년의 미국 노숙자 수는 58만 명으로, 전년 대비 2.2% 증가하였으며, 4년 연속으로 증가세가 유지되고 있다(출처). 나도 시차를 두고 워싱턴, 뉴욕, 샌프란시스코를 짧게 둘러봤지만, 미국의 노숙자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우리나라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집이 주거 본연의 기능이 아닌, 경제적 욕망의 종착역 역할을 떠맡는 경향이 심화될수록 정상궤도의 집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증가할 것이다. 집을 소유해야만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으며, 사회적 관계에서 밀려나지 않을 수 있고, 부동산 가격은 언젠가 반드시 올라가기 마련이라는 믿음이 기형적인 부동산 시장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러한 현실은 하루아침에 짠하고 도래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스멀스멀 똬리를 틀고 앉은 현실을 묵도하며 이게 정상이겠거니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간다. 부동산 문제는 나라님이 아니라 그 할애비라도 해결 못 한다는 것이 이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충분히 입증되었다. 집은 무조건 소유해야 하고, 그 집은 가능한 한 번듯해야 하고, 내 돈으로 소유할 수 없다면 최대한의 금융상품을 끌어들여 미래의 소득과 꿈과 희망과 건강까지 저당 잡힐만한 가치가 있다는 신화는 금융업과 건설업과 정치지도자들의 카르텔이 만들어낸 밈(meme)에 불과하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지 말자. 부추겨진 불안감을 실존적 불안감과 구분하자. 이제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해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자. 누가 듣건 말건 ‘이건 정상이 아니다,’라고 미친 듯이 되뇌는 보통사람들이 늘어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나도 여기 미약한 먼지 한 톨을 쌓는다. 이건 정상이 아니다.

이 책은 학술적 객관성에 대한 지나친 강박으로 논점이 흐리멍텅해지는 지점이 많아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도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든 지점은 있었으니, ‘정신적 노숙’ 상태에 대한 언급이었다. 정신적 노숙은 분명 집이 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집에서 안락감, 애착, 휴식 등 본연의 기능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예컨대 학대받는 아이는 외형적으로는 멀쩡한 가정에서 잘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속내는 가정에 돌아가더라도 의지할 곳이 없이 불안하고 겉도는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 장기간 놓여 있는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반사회적(예를 들어 너무 과민하거나 이중적이거나 불필요하게 반박하는)이 되거나 무분별한 애착을 형성하기 쉽다.”(269p) 이 말이 내 심장을 푹 찌르고 들어왔다. 나도 자 자신이 왜 어쭙잖게 반사회적 태도를 취했는지, 왜 무분별한 애착에 과도하게 집착했는지 대략은 알고 있었지만, 그 배경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학술적 개념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정신적 노숙’. 이 개념 하나만으로도 내가 줄곧 자책했던 내면의 문제들에 대한 원인의 큰 줄기가 규명되는 기분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그토록 스스로 다그치며 밖으로 돌기만 했던 시간들이 사실은 정신적 노숙의 일종이었다니. 지난날의 나를 조금은 가여워 해줘도 될는지.

너무 늦었지만,

내게 아무런 선택권 없이 그저 주어졌던,

정신적 노숙은 끝났으니,

이제는 그저 지금 여기를,

머물고 싶은 가정으로 꾸려나가는 일에만 신경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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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 키이우, 이태원 : 타인의 고통 | 기본 카테고리 2022-11-0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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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타인의 고통

수전 손택 저/이재원 역
이후 | 2004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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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Susan Sontag(2003), Regarding the Pain of Others

무더위 속에서 이 책을 읽고 이제야 글로 정리한다. 진작 썼어야 하는 데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덧 낙엽이 쌓인다. 먹고 살기 위한 글에 쫓기다 보면 사적으로 쓰는 글도 일처럼 느껴진다. 미뤄뒀던 글감이 어떤 사건을 만나 구체적 형상을 입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일이 오늘 벌어졌다.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에, 그것을 어떻게 생산하고, 보고, 유통해야 하는지에 관한 자기 생각을 이 책에 눌러 담았다. 그의 주장은 늘 구체적인 사례들, 실재하는 이미지들과 결부되어 있다. 독자로서 우리는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며 자기가 경험한 최근의 사례들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을 읽던 여름에 내 마음속에서 종종 소환되었던 비근한 사례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던 사건이었다. 2022년 2월에 시작된 그 비극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이제는 해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비극이 시작되었던 그때, 세계 유수의 매체들은 여느 때처럼 현장의 모습을 실어 나르기에 바빴다. 황량한 우크라이나 국토를 휘젓는 Z표식의 장갑차, 반파되어 철근-콘크리트 골조를 드러낸 건물들, 피로와 슬픔이 뒤엉킨 눈빛으로 폴란드 국경을 넘는 난민들… 모든 비극의 장면들은 최신의 통신기술과 구석구석 보급된 고화소의 렌즈들을 힘입어 그 어느 때보다 생생하게 전세계의 안방으로, 또 각자의 손바닥 위로 전송되었다.

다양한 보도 이미지 중에서도 내가 가장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콘텐츠는 MBC가 유튜브에 실시간 스트리밍 방식으로 올렸던 <끝까지LIVE>라는 코너였다. 이 화면에서, 전면에는 키이우 광장의 현재 전경을 담은 CCTV 화면이 송출된다. 좌하단에는 MBC가 러시아 침공을 특보 형태로 보도한 화면이 ‘화면 속 화면’으로 담겼다. 이 뉴스는 TV 보도를 실시간으로 띄워주는 것이 아닌, 이미 방영된 특보를 일정 구간 잘라 반복재생하는 형태로 보인다. 보도 화면에는 온갖 섬광과 포격음이 반복되고, 앵커와 리포터와 안보전문가 들은 긴박한 상황임을 강조하는 리포트를 쉴새 없이 쏟아낸다. 그러나 이 보도는 어디까지나 ‘화면 속 화면’일 뿐이다. 진짜 중요한 것, MBC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는 키이우 광장의 현재 모습이다. 광장의 지평선 너머로 안개 혹은 연기가 뿌옇고 차량의 왕래는 드물어 스산한 느낌이다. 저 먼 곳 어딘가에서 쿵쾅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다. 하지만 평상시와 무엇이 다른지, 침공으로 인해 이 장면의 무엇이 특별해졌는지는 불분명하다. 우리 중 그 누구도 그것을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평시의 키이우’에 대한 충분한 사전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가 우크라이나의 수도를 이해하는 평균적인 수준은 딱 그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콘텐츠가 노골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전시의 키이우가 평소와 달리 이렇게 바뀌었으니 눈 여겨 보시오’가 아니다. <끝까지LIVE> 제작진은 분명 자신들이 생중계하는 키이우 광장에 당장이라도 무언가 어마어마한 큰일이 벌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당장 벌어지지 않더라도, 조만간 벌어질 것이니 이 콘텐츠에서 눈을 떼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참을성 없는 누군가가 눈을 뗄 수도 있으니, 그동안 심심하지 말라고 애써 만들어둔 격양된 특보를 ‘화면 속 화면’으로 끼워파는 섬세함도 잊지 않았다. 이제 <끝까지LIVE>를 틀어 놓고 밥을 먹고 있는 우리는 당장이라도 키이우에 대량 폭격이 쏟아지기를 끝까지 기다리는 공모자가 되었다.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 실은 에세이들을 통해 주장하고자 했던 바는 간단하다. 충격적인 장면을 보고 싶은 우리의 본원적 욕망, 자본과 정치권력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즐기는 미디어 산업의 구조, 객관적으로 존재했던(혹은 존재했을 것으로 강력히 추정되는) 무언가를 쏘아(shoot) 영구적인 이미지로 확증하며 객관성이라는 과분한 아우라를 덧입는 사진의 메카니즘, 날로 발전하는 이미지 생산 및 전송의 기술력 등을 고려할 때, 타인의 고통을 다룬 이미지들에 더 자주, 더 깊게 노출되는 경향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런 이미지들을 다루는 방법과 윤리학에 대하여 충분한 고민과 성찰이 필요하며, 가능하다면 일정 수준 이상으로 대중의 문해력을 높일 방안도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해서는 안 되며, 그 경중을 멋대로 평가해서도 안 된다. 그런 이미지를 생산하고 전송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면, 그 이미지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향한 최소한의 맥락적 예의를 갖춰야 한다. 실존하는 고통의 이미지를 그저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일 뿐만 아니라, 그 고통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문제들까지 등한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고통을 당한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갖는 동시에, 그 고통을 구조적 혹은 영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을 찾고, 올바른 정치적 의사결정에 어떤 방법으로든 적극 참여해야 한다. 이 모든 주장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223p).”

어젯밤에 이태원에서 또 하나의 큰 비극이 벌어졌다. 지난밤에 거기 사람들이 많이 몰렸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고, 상투적인 뉴스거리라고만 생각했다. 그 정도야 매년 있었던 일이니 그러려니 하고 손흥민 경기를 본 후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깨서야 비보를 구체적으로 접했다. 아침 식사를 하며 여느 때처럼 유튜브에 “뉴스”라는 검색어를 쳐보니 아니나 다를까 <끝까지LIVE>가 다시 시작됐다. 메인 화면에는 녹사평역 CCTV를 통해 바라본 이태원 대로가 펼쳐져 있고, 화면의 중앙 위쪽으로 구급차와 경찰차 몇 대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사상자 후송은 어느 정도 일단락되었는지 거리는 고요하다. 고요한 거리와 달리 좌하단의 ‘화면 속 화면’은 거리로, 병원으로, 대통령실로 분주하게 움직인다. 후송이 완료된 거리를 비추는 <끝까지LIVE> 제작진은 어떤 새로운 시각적 스펙타클을 기대하고 있나? 지하에 봉인된 거대괴수가 아스팔트를 뚫고 솟구치기라도 바라고 있는 것일까? 이 화면을 보고 있는 나는 무엇을 기대하고 있나? 아니, 무엇을 기대하기를 요구받고 있나?

이처럼 ‘화면’과 ‘화면 속 화면’은 서로 그 지위를 바꾸기도 한다.

자극적 이미지의 파노라마에 매몰되어 있을 시간이 없다.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서서, 구체적인 질문을 던지고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요구해야 한다.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한 지역의 좁은 골목길에 몰리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런 충분히 예측가능한 상황에 대해 누군가는 사전에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현실적 대응책을 내놓았어야 한다. 핼러윈에 젊은이들이 이태원에 모여든 상황 자체가 특정한 ‘주최측’이 없는 시민들의 자발적 유동의 결과라는 사실 정도는 누구나 안다. 주최측이라는 명확한 책임소재가 부재하므로, 행정 관서에 공문을 보내 의료진이나 교통통제 인력의 파견을 요구할 주체가 없다는 것, 그리고 재난안전 주무 부처와 산하 조직이 그러한 파견을 지시할 의무가 없다는 것도 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요청하지 않아도 예측하고 준비하는 것은 행정의 당연한 의무라기보다 적극행정의 영역에 속한다. 적극행정은 그 원리상 잘하면 칭찬받고, 안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민의식은 고양되었고, 행정력도 고도화되었으며, 최근 몇 년간 정부의 적극적 역할에 대한 기대치도 어느 때보다 커진 상황이다. 적극행정을 선택하지 않은 결과가 행정적 비효율 정도라면 우리는 적극행정을 선택하지 않은 자를 크게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적극행정을 선택하지 않은 결과가 청년 153명의 목숨이라면, 이제 적극행정이라는 선택은 단순한 옵션의 범위를 초과하여 권력을 위임한 시민사회의 강력한 명령이 된다. 인파가 몰릴 것이 뻔한 곳에 미리 통제인력을 보낼 생각을 왜 아무도 못 한 것일까? 10~20미터 간격으로 경찰이 한 명씩만 배치되어 서로 무전하면서 유동 인구의 방향만 통제해 줬더라도 우리는 153명의 청년을 살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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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다 노클린의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 기본 카테고리 2022-11-05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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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린다 노클린 저/이주은 역
아트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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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da Nochlin(1971), 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

가리키는 곳을 보지 말고 그 손가락을 분질러라

「아트뉴스」 紙 1971년 1월호에 실렸던 에세이다. 미술사와 미술비평을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글이다. 그만큼 많이 인용된다. 만약 본인이 미술사를 공부했는데도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라는 이름이 생소하다면 자신의 식견이 68혁명 이전 어딘가, 심지어 반 고흐의 노란집 어느 귀퉁이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미술에 관하여 뭔가를 쓰려고 하는 자가 페미니즘에 살짝 발가락이라도 걸칠라치면 “린다 노클린 曰”을 피해갈 도리가 없다. 본격적인 페미니즘 비평이 시작된 글이기 때문이다.

너무 많이 인용되는 글의 특징은 그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사람이 정작 별로 없다는 것이다. 고전의 정의 자체가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안 읽은 책’이라고 하지 않나? 그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실 나부터도 이 에세이를 읽은 적이 없었지만, 누구보다 꼼꼼히 읽은 척하면서 인용할 자신은 있었다. 그럴 수 있었지만 그래도 양심이 있기에, 이번에 출간된 50주년 기념 에디션의 번역본을 놓치지 않고 책장에 꽂아 두었다.

책은 크게 세 파트로 구성되었다. 중심이 되는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만 실으면 소책자 분량조차 나오기 어려우므로, 캐서린 그랜트의 머리글이 서두를 열고, 말미에는 2006년에 저자가 30주년 기념으로 저술한 후기 성격의 짧은 에세이도 한데 묶었다. 이 최근 글에서, 평생을 페미니즘 비평에 헌신한 저자는 기념비적 에세이를 작성한 1970년대와 오늘날을 비교해보며 얼마나 많은 진보가 있었는지를 감격적으로 상기한다. 진심인지 형식적인 안배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이제 미술계 전반에 걸쳐 페미니즘, 퀴어, 다양성의 논의가 모든 의제의 한 꼭지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고, 페미니즘이 주류 미술사에 편입된 차원을 넘어, 역으로 남성 미술가들과 주류 미술제도에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과 영감이 지대한 변화의 촉매로 작용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목격된다는 것이다. 겸손한 저자는 그러한 변화의 출발선상에서 자신의 허를 찌르는 에세이가 진지하고도 결정적인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을 굳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남긴 공헌을 충분히 알고 있다. 노클린은 파묻힌, 아니 오해로 점철된 관점을 수면 위로 끄집어내 연대의 장을 마련했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다.

만연한 어떤 질문에 그가 적절한 답을 내려서 성공을 거뒀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핵심은 답에 있지 않다. 오히려 해묵은 질문과 함께 어딘가를 가리키는 손가락 자체를 분질러 버렸기 때문에 효과가 발현되었다.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라는 질문에 ‘아냐,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왜 없어, 저 위대한 젠틸레스키(Artemisia Gentileschi)를 봐’라던지, ‘넌 지금 위대함이라는 단어를 편협하게 정의하고 있군. 진정한 위대함은 이렇고 저런 가치란 말이야’라고 답한다면, 우리는 그 답과 함께 질문이 가리키는 전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 개싸움을 펼치게 된다. 그 개싸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개털뿐이다. 논쟁의 본질에 다다라 뭔가 하나라도 생산성에 이르고자 한다면, 질문이 발을 딛고 있는 복잡한 구조와 맥락, 나아가 기초적 전제들을 파고들어 저의를 의심해야 한다. 노클린은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나올 수 없었던 부계 세습 사회의 가부장제, 교육훈련 기회의 불공정성, 명문화된 제도의 압력과 그 제도를 둘러싼 갑절의 문화적 압력을 돌이켜 봤고, 구체적 실례로서 설득력 있게 논증했다. 적이 설정한 전장을 뒤집어 생산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새로운 영토를 제시한 것이다.

노클린의 성공은 판을 뒤엎는 복합적이면서 맥락적인 사고의 필요성을 잘 보여준다. 오늘날 누군가가 당신의 실패를 지적하며 손가락질한다면, 그러한 지적이 튀어나오게 된 배경과 저의를 낱낱이 까발리면서 그 손가락을 과감히 분질러라. 적이 깔아 놓은 멍석을 걷어찬 후 생산적인 논쟁의 장을 새로 깔아라. 적이 초대에 응하면 좋고, 응하지 않아도 그만이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광범위한 시공간을 망라한 복합적 인과관계의 사슬이 머릿속에 들어차 있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쉽게 가질 수 있는 거라면 누구나 노클린이 됐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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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의 「현대의 신화」 | 기본 카테고리 2022-08-22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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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현대의 신화

롤랑 바르트 저/이화여대 기호학연구소 역
동문선 | 200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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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and Barthes, Mythologies (1957)

 

“언어의 이름으로 한 사람에게서 그의 언어를 훔치는 것, 바로 이런 행위를 통해 모든 합법적인 살인이 시작된다.”

70P

“신화의 기능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키는 것이다.”

282P

신화에 거하거나, 벗어나시오

책은 크게 두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 장은 바르트(Roland Barthes)가 현대의 신화들을 구체적 실례로 살펴보고 그 내막을 샅샅이 분석한 내용이다. 1950년대 현재, 프랑스의 사회, 문화, 예술, 경제, 법률 등 전반에 걸쳐 보통사람이라면 그저 흘려버리기 쉬운 신화의 단서들이 섬세하게 포착되었다. 이어지는 뒷 장은 신화란 무엇인지 그 개념과 영향, 그리고 그것을 다루는 신화학의 정체성을 밝히는 대목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이론과 실재”라는 어순에 비춰 본다면, 실재가 먼저 나온 후 이론이 뒷받침하는 형국이다.

신화란 무엇인가? 신화의 개념은 언어활동과 메타 언어활동의 차이를 통해 구체화될 수 있다. 언어활동은 언어가 현실에 직접 관여하는 것이다. 예컨대 농부들이 밭에 나가기 전에 날씨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주고받는 말은 실질적인 경작 활동에서의 실효적인 노동 행위로 이어진다. 이것이 언어활동이다. 메타 언어활동은 특정한 언어활동에 관하여 그 활동의 경계 밖에서 만들어내는 말이다. 농부들이 날씨에 대하여 주고받은 말을 문학작품으로 옮긴 시인의 활동은 메타 언어활동에 속한다. 시인은 농부의 일차적 언어를 재료로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언어활동은 무엇을 말한 것이고, 메타 언어활동은 무엇에 관하여 말한 것이다. 언어활동은 의미를 만들어내고, 메타 언어활동은 의미작용을 만들어낸다.

신화가 그저 메타 언어활동이라는 가치중립적인 정의에 그친다면 바르트가 그렇게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고, 신화학이라는 학문을 주창하지도 않았으리라. 또한, 신화를 메타 언어활동이라고 정의하고 끝나면 바르트가 가장 싫어하는 신화적 작동방식 중 하나인 ‘동어반복’이 된다. 모든 신화에는 저의가 있다. 그 저의를 밝히는 것이 신화학자의 책무다. 기표가 형식이고, 기의가 개념이라면, 신화는 의미작용이다. 의미가 자명한 무언가라면, 의미작용은 자명함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신화는 지칭하면서 통고하고, 이해시키면서 강요한다(275p).”

신화는 단순히 어떤 의미를 덮거나 사라지게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신화의 기능은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시키는 것이다(282p).” 신화는 파롤을 훔치는 것이다. 신화는 의미를 훔쳐 변형시키고 그것을 제자리로 가져다 둔다. 그래서 대다수는 그 의미에 뒤틀림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신화는 역사적인 의도를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으로 둔갑시키고, 우연히 발생한 어느 사건으로 뒤틀려버린 역사의 궤적은 영원과 필연으로 만든다. 인류가 시대와 장소를 넘어 보편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는 착각을 일반화시키고, 자명한 차이들과 고유한 특징은 지워버린다.

이처럼 강력한 의미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이 신화이건만, 여기에도 한계는 있다. 신화는 이미 생산된 것에만 관여할 분, 직접 생산하지는 못한다. 생산은 신화와 대비된다. 앞서 말했듯, 신화는 언어활동이 아닌 메타 언어활동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생산해 낼 수 있는 활동은 오히려 혁명이다. 그렇기에 혁명은 신화와 양립하지 못한다(320p). 바르트의 이러한 지적이 1957년에 발간되었고, 그로부터 약 10년 후에 ‘그 사건’이 벌어졌다.

바르트는 “자명한 것으로 포장된 진술 속에 숨겨져 있다고 생각되는 이데올로기적 오용을 다시금 포착(3p)”하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 이 목표를 위해 그가 선택한 전략은 학자적 객관성과 작가적 주관성을 통합하는 것이다. 말이 쉽지 대단히 어려운 과제다. 「현대의 신화」의 두 장은 각각 작가적 주관성과 학자적 객관성을 적절히 대표하는 데 성공했다.

바르트가 주목한 프랑스의 현대적 현상들이 포용하고 있는 범주는 놀라울 정도로 넓고 다채롭다. 그는 프로레슬링 속 극명한 선과 악의 연기가 애매모호한 세상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살아가는 대중을 단박에 사로잡는다고 지적한다. 아르쿠르 스튜디오의 촬영용 소품들이 기호학적으로 갖는 의미들을 풀어낸다(28p). 로마 시대를 재현하는 헐리우드 영화 속 배우들의 헤어 스타일과 땀도 놓칠 수 없는 소재다(33p).

이러한 분석은 단편적이며 암시적인 차원에 머무른다. 언론에 보도된, 휴가 중인 작가가 독서하는 이미지는 한층 더 정치적이다(38p). 대단한 창조의 세계를 만들어 낼 것 같은 문인들조차 휴가지에서는 보통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며, 동시에 일상에서 벗어난 초월적 세계에 작가들이 머무르는 것이 이상적임을 상정한다. 현실의 지리멸렬한 정치적 의미들을 다투기보다는, 초탈한 세계관에 작가들이 계속 머물며 승인된 범주 안에서만 말할 수 있도록 그들을 교묘하게 길들이는 것이다. 유사한 맥락에서 바르트는 자신이 멍청해서 마르크스주의적 작품을 제대로 비평할 수 없다고 자인하는 비평가들에게 날선 비판을 돌린다(46p). 이러한 비평가들은 마르크스주의나 실존주의 같은 현실 정치에서 위험해 보이는 사상에 대하여 자신의 무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말을 돌리는 데, 이러한 태도는 사실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의 문제이며, 만약 능력의 문제가 맞다면 비평가의 자격조차 없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밖에도 화성인, 주방용 세제, 화장품, 장난감, 사법체계, 빌리 그레이엄 목사, 자건거 경주, 이국취향, 플라스틱 등 종잡을 수 없이 일상에 산재한 소재들이 부르주아 및 프티부르주아의 신화화에 맞서는 바르트의 작업에 포섭된다.

그렇다면 신화는 우파만을 위해 존재하는가? 한편으로는 맞고, 또 한편으로는 틀리다. 만약 이 질문을 이렇게 고친다면 맞다;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서 우파가 생산한 신화만이 효과적으로 재생산되었는가?” 그렇다. 바르트는 이렇게 말한다. “통계적으로 신화는 우파의 신화이다. 우파에서 신화는 본질적이다. 매우 알차고, 빛나고, 팽창적이고, 수다스러운 그 신화는 끊임없이 만들어진다(324p).” 우리가 오늘날 자발적으로, 부지부식간에 향유하는 모든 신화는 우파의 신화다. 좌파에도 물론 신화가 있었고, 신화화의 시도가 계속 이어져 왔다. 쿠파의 뒷골목에서 발견한 체 게바라의 이미지, 만수대의 김일성 부자 동상, 디에고 리베라의 벽화, 시위 현장에서 산화한 모 열사의 걸개그림…. 하지만 좌파의 신화는 일회적 이벤트에 그친다. 그것은 폭넓은 대중의 일상 속으로 파고들지 못하고 빈곤하다. 거기에 철학과 미학이 부재하다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그냥 사람들이 그것을 원치 않는 것 같다. 신화에 눌어붙은 정치 체제가 시장에서 고객들의 수요에 의해 선택되는 하나의 상품이라고 단순화해본다면, 그것의 수요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은 이미 역사가 증명해 버린 것일지 모른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누군가 내게 아주 성공한 좌파의 신화 하나를 들고 와 예를 들며, “이것 보라, 좌파의 신화에도 성공의 사례는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가?”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첫째, 그 신화를 만든 좌파는 이미 그들의 세상에서 사실상의 우파가 되었습니다. 둘째, 그 신화가 좌파에 의해 탄생한 것일 수는 있으나, 현재는 우파에 의해 전유되어 그들의 영속적 통치를 위해 복무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답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좌파의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결국 우리는 우파의 신화 속에서 살고 있음이 자명하다. 태어나 처음으로 말을 뗄 즈음에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고,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곧바로 그리스 신화 속 제우스의 난잡한 성생활을 배운다. 자기 용돈을 모아 극장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아마 마블 히어로에 열광할 것이다. 이러한 신화는 우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제국의 승전보다. 하지만 이러한 신화는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고, 이내 우리의 이야기로 동화된다. 이제 제국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다. “압제자는 메타 언어활동의 독점권을 갖는다(324p).” 제국은 영원할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신화의 목적은 바로 세계를 고정시키는 것(333p)”이다.

바르트는 신화학자의 딜레마를 분명히 직시했다. 신화학자는 신화를 그저 파괴해서 보여줄 뿐 유토피아를 제시하거나 스스로 세우지 못한다. 그러한 활동은 그의 능력 밖에 있다. 신화학자도 신화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입자일 뿐이다. 그저 그 구조의 메카니즘 하나를 볼 수 있는 섬세한 눈과 풀어낼 수 있는 논리를 갖고 있을 뿐이다. 누구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고, 그 둘의 이상적인 종합이 가능할 것 같지만, 그 종합이 현실 세계에서 구현된 결과물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화해의 지점을 찾는 끝없는 여정이 놓여 있을 뿐이다.

바르트는 분명 개념적인 차원에서 혁명을 긍정했지만, 이 책을 쓴 시점,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마지막 혁명의 기회에서 10년 앞선 현시점에 진짜 혁명의 가능성을 예견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우리에게 우파의 신화를 해독할 수 있는 일곱 가지 지침을 줬다. 즉, 우파가 신화를 창출하고 재생산하는 데 활용하는 일곱 가지 유형의 전략을 우리에게 폭로해 줬다. 이제 대기 중에 유동하는 기호의 파도 속에서 이 전략들을 식별하고 올바로 독해할 책임은 우리에게 온전히 주어졌다. 여기에는 바르트가 몸소 보여줬듯, 작가적 주관성과 학자적 객관성이 모두 동원되어야 한다. 독해하고 경계할지, 아니면 그저 흘려버릴지는 물론 각자 신념에 달린 문제다. 주어진 신화 속의 삶과 그래도 나름대로 선택하려고 노력한 삶 사이의 차이는 충분한 시간이 축적된 후에야 비로소 밝혀질 것이다.


우파의 일곱 가지 신화화 전략

  • 첫째는 예방접종이다. 체제의 부수적인 악을 미리 고백함으로써 일시적인 안심을 가져오고 더 큰 구조적인 악을 숨겨 전복의 위험을 줄이는 전략이다. “고백된 약간의 악은 감춰진 많은 악을 인정하지 않아도 되도록 해준다(58p).”
  • 둘째는 역사의 제거다. 신화의 대상이 되는 주체의 고유한 맥락들을 일시에 제거하고 단편화시켜 개념적으로 소유하기 용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들은 순수한 동태복수이며 오직 그것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양식이란 이상적 세계를 반격이라는 직접적 메커니즘들로 축소시키는 정신의 이러한 선택적 반응이다(120p).”
  • 셋째는 동일화다. 특정한 대상을 프티부르주아와 동일화시켜 공통적 본질이 있음을 상정하고, 위해를 가하지 못하게 만든다.
  • 넷째는 동어반복이다. ‘A는 A이다.’와 같이 하나마나한 동어반복적 정의는 그 대상 자체 외에 다른 대안적 가능성을 손쉽게 묵살할 수 있게 한다.
  • 다섯째는 양비론이다. 두 개의 대립적 가치나 대상을 모두 거부하면 더이상 선택지는 없고 계속 받아들이는 방법밖에 없다.
  • 여섯째는 질의 양화이다. 질의 문제를 양의 문제로 치환시켜 중요한 질문은 파묻어 버리고 오직 주어진 양으로 인해 헛배부름을 느끼게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 일곱째는 확실한 사실이다. 누구나 알고 있으며, 반론이 불가능한 하나의 확실한 사실을 세워 놓고, 그것을 격언화하여 부동의 행동규범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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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 「호모 데우스」 | 기본 카테고리 2022-07-06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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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피엔스·호모 데우스 50만부 기념 한정판 세트

유발 하라리 저
김영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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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val Noah Harari, Sapiens & Homo Deus

하라리는 왜 이 책을 썼나?

“역사란 다른 모든 사람이 땅을 갈고 물을 운반하는 동안 극소수의 사람이 해온 무엇이다.”

사피엔스, 153P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의미의 그물망들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보고, 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호모 데우스, 207P

베스트셀러는 한 시대의 욕망을 투영한다. 많은 사람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성공적으로 들려준 책이 베스트셀러 서가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 가령 「언어의 온도」는 따뜻한 말을 (잘) 건네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을 팔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저성장이 완연한 뉴노멀 시대에 나도 그럭저럭 잘 버티고 있다는 위로에 대한 갈망을 팔았다. 의외로 「ETS 토익 정기시험 기출문제집 1000 Vol.3」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카페의 마케팅 기법, 출장 가는 상사의 하소연, 지역사회 유력 봉사단체장의 성공신화 등 단순히 건수로 따지면 그 어떤 베스트셀러도 압도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토익 900점에 기반한 취업 성공이라는 매우 직관적인 욕망의 재료가 된다.

화려한 마케팅과 껍데기로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한 발을 걸칠 수는 있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결코 오래 못 가고, 스테디셀러 칭호까지는 아예 꿈도 못 꾼다. 만약 누더기 같은 내용의 책을 마케팅의 힘만으로 베스트셀러 3위 안에 올려 4주를 버텼다면, 사실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려야 할 것은 책이 아니라 기획자다. 그런 사람은 알레스카에서 에어컨을 팔 수 있다(기후위기 때문에 이 비유를 쓸 수 있는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의 「사피엔스」가 꽤 오랜 기간 베스트셀러로 군림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늘 그렇듯 나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 자리에서 내려와 스테디셀러로 전환 된 후에 읽게 되었다(2022년 7월 현재 YES24 스테디셀러 44위에 위치한다). 이 책이 투영한 동시대의 욕망은 무엇인가? 몇 가지 차원이 존재하는데, 가장 단편적인 층위에서는 인류 역사의 장대한 서사시에 대한 개괄적 이해를 통해 인간의 본질 따위에 관해 언제 어디서나 몇 마디 말을 보태며 잘난 척하고 싶다는 얄팍한 욕망을 꼽을 수 있다. 좀 더 진지한 층위에는 나와 내 주변인, 나아가 사회를 이해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에 관한 몇 가지 전망을 얻으려는 욕망도 있을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그 모든 욕망의 층위에 적절히 부응하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일단 탄탄한 역사학적 기초 위에 생물학, 생태학, 심리학 등을 넘나드는 식견도 대단하지만, 자기가 주장하는 바에 관한 명확한 근거들을 주장의 적절한 맥락 속에 배치하는 능력, 그리고 그것을 일반인도 알기 쉽게 풀어내는 능력, 거기에 적절한 위트와 손에 잡히는 예시까지 곁들이는 능력이 참으로 대단하다. 그의 논지는 검증할 수 없는 영역(수렵채집 단계에서 농경사회로 막 접어든 인류의 심리상태에 관해 우리가 무슨 수로 논박할 수 있겠나?)을 다루되, 현재 수준에서 가장 신뢰할만한 학계의 정설이라는 범주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여러 학문 영역에 걸친 실체적 진실들을 수집하고, 적절한 맥락을 부여하여 연결하고, 풍성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부풀리는 능력은 모든 인문사회 계통 글쟁이들에게 귀감이 될만하다.

하라리 이전에 비슷한 맥락의 시도로 우리나라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채사장이라는 작가가 생각난다. 그도 문명의 거대 서사와 사상적 흐름을 매우 단순화된 구도로 쉽게 풀어 설명했다. 그런 접근은 여러 현실적 제약에도 최소한의 지적 소양은 갖추고 싶은 현대인들의 얄팍한 지적 열망에 효과적으로 조응했다. 하지만 너무 넓은 범위로 전선을 구획하다 보니 일반화의 도가 지나쳐 거의 흑백논리 수준으로 귀결되는 위험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책에서는 마음을 울리는 하나의 메시지가 부재하였다. 그러다 보니 책을 덮어도 현재 내 삶을 돌아본다거나,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실질적 행동으로 옮길만한 구체적인 지점들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지금 채사장의 책은 YES24 스테디셀러 80선 목록에 없다.

하라리는 왜 이런 책을 쓴 것일까?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잘 모르지만, 이스라엘 출신으로 영국에서 수학한 역사학자이면서 무엇보다도 퀴어인 복잡한 정체성이 문제 인식의 중요한 발단 중 하나라고 감히 짐작한다. 그는 인류가 무지와 맹목에서 벗어나 과학적 사고에 기반하여 호모 데우스로 나아가려는 과정에서 과거와의 결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동성애를 자주 거론한다. 동성애는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그 자체로 인류 역사의 출발점부터 존재했으며, 아마 종말의 순간까지 존재할 것이다. 인간이 존재하는 모든 시공간에는 일정 비율의 이성애자와 퀴어가 반드시 공존한다. 그것을 비정상으로 보는 시대가 무지와 맹목의 시대라고 전제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무지와 맹목의 사상적 우산 아래 살고 있다. 하라리는 삶의 여정 속에서 불합리한 배제와 무시를 빈번히 경험했을 것이고, 자신이 이토록 명철한데도 불구하고 퀴어라는 정체성 탓에 특정한 맥락에서 배척당하거나 의기소침해야 했던 대목들을 부당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서, 학문적 관심사에 성적 정체성을 결합한 주제를 심화시킬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고, 여전히 퀴어에 대한 강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다수 대중을 일정 수준 계몽시켜야 한다는 책임감도 느끼게 되었으리라 본다. 단순화하자면, ‘왜 퀴어가 배척받는가? 아, 오랜 시간 축적된 종교적 편견이 문제구나. 그렇다면 왜 종교가 발흥하게 된 것인가? 아, 불확실성 속에서 사상적 결집과 협력을 위해서구나’ 이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자기만의 ‘빅 히스토리’ 얼개가 갖춰졌을 것이다.

현재가 행복하고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사람은 참신한 문제의식을 떠올릴 수도, 그 문제를 파고들 수도 없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동인이 없다. 현재가 불만족스러운 사람이 똑똑하기까지 하다면, 그 사람은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분별할 수 있고,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독려할 수 있다.

“21세기에 허구는 소행성과 자연선택을 훨씬 능가하는,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호모 데우스, 215P
 

과거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퀴어적 정체성이 중요한 발단이 되었다면, 미래를 예측하는 과정에서는 지식인으로서 정체성이 중요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하라리는 인간의 심오한 마음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고, 모든 의사결정의 메카니즘은 뇌 기능상의 알고리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물학적 견해에 손을 들어주는 편이다. 빅데이터와 AI가 스스로 학습하여 인간의 알고리즘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게 된다면, 개인의 감정을 믿는 인본주의의 신화는 종언을 고할 것이고, 초인간과 AI가 권력의 중심에 설 것으로 전망했다. 이때 축출되는 것은 초인간이 될 재력과 능력이 없으며, AI에 의해 생산기능도 대체될 보통 사람들이다. 하라리는 매우 똑똑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초인간이 될 정도의 재력은 없어 보인다. 현재로서는 그가 하는 일이 AI에 의해 대체될만한 성격의 일은 아니라고 판단되나, 먼 훗날은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세계의 거의 모든 책과 논문을 집어삼키고 있는 구글이 인문학적 맥락화 역량과 기가 막힌 서술 역량을 갖추게 된다면 ‘AI하라리’가 가까운 시일 안에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라리는 오직 객관적 연구결과들에 근거해 냉철하게 역사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이론가 같지만, 그의 미래 전망을 따라가다 보면 미묘한 두려움이 읽힌다. 그것은 자신의 명석함이 언젠가 무의미해지리라는 두려움, 그로 인해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이미 자신이 무의미한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일종의 대체공포다. 적당히 똑똑한 사람들은 이런 두려움을 가질 수 없다. 자신의 알량한 똑똑함이 영원할 줄 안다. 하지만 매우 똑똑한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똑똑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자기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AI하라리’가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언젠가 필시 등장하리라는 것을 하라리는 알고 있다. 이 책은 그 날에 대비한 생존신고다. 저자 스스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지식세계 속에서 자기 위치를 노정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하라리의 미래 예측이 디스토피아에 가까운 것은 최악의 시나리오를 생각해야 최선의 결정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백만 년 동안 우리는 성능이 향상된 침팬지로 살았다. 그리고 미래에는 특대형 개미가 될지도 모른다.”

호모 데우스, 497P

인간의 모든 의식이 알고리즘으로 대체된 미래의 어느 날, 알고리즘에 먹통이 생기면 우리는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때는 이미 우리가 스스로 사고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상실한 후일 태니까. 하라리가 이런 예측에 도달한 순간, 그는 자신이 그런 세상에서 마지막까지 깨어 있는 의식이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도 그런 의식이고 싶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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