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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원평 소설집, 「타인의 집」 | 기본 카테고리 2023-01-28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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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된 이야기가 없는 세상은 오지 않겠지만

망각과 미화

손원평의 첫 번째 소설집에는 온통 가슴이 답답해지는 이야기뿐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은 나의 아픔을 이해해 주지 못하거나(「4월의 눈」), 애초부터 평생 나를 무시만 해온 인간이거나(「zip」), 아예 상상을 뛰어넘는 괴물이다(「괴물들」).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나더라도 타인을 향한 순수한 선의는 천추의 한으로 돌아오고(「상자 속의 남자」), 세대와 민족 간 혐오는 극에 달해 일대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아리아드네 정원」), 한 분야에서 경지에 이른 대가는 자라나는 새싹을 키우지 못할망정 도리어 그 새싹을 잘라 자기 배를 불린다(「문학이란 무엇인가」). 그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응원했던 인물이 종국에 행복해졌는지, 혹은 앞으로 행복해질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괴물들」의 ‘여자’는 괴물들에 잠식된 여생을 살아갈 것 같다. 「zip」의 ‘영화’는 ‘기한’에게서 벗어났지만, 여전히 손주를 돌보며 ‘zip’에 갇힌 삶을 이어간다. 「아리아드네 정원」의 ‘민아’는 거대한 전쟁을 목전에 두고 있고, 아마도 지금까지 그녀가 겪어본 모든 고통을 뛰어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타인의 집」의 ‘나’에게 내집마련의 꿈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그나마 「상자 속의 남자」의 ‘나’는 형이 구해줬던 소녀를 통해 일말의 희망이라도 봤다. 그러나 그의 삶이 상하차와 간병 사이의 고된 외줄타기에서 벗어나리라는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작품 속 보통사람들이 보여주듯, 누구든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대처의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자기 능력의 범위 안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면 상황을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극복해 나가겠지만, 도저히 손 쓸 수 없는 수준의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면 망각이나 합리화 같은 소극적인 회피를 선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를 미화하거나 아예 망각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은 얼핏 보면 비겁해 보이지만, 실상 우리네 삶을 지탱해주는 독특한 정신적 생존기술에 가깝다. 그 능력이 없었다면 무수한 밤이 회한의 눈물로 가득 찼을지 모른다. 과거를 윤색함으로써 진실로부터 다소 멀어지더라도 결국에는 어떻게든 버티고 꿋꿋이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리 매 순간 최선을 다하더라도 의도치 않게 비극은 찾아오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무언가를 택해야 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수렁 한가운데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런 순간에 망각과 미화는 의도치 않은 수렁으로부터 오늘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세 단편

손원평의 몇몇 작품들은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망각과 미화가 작동하는 현실적인 맥락들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4월의 눈」에서 부부는 먼 나라에서 온 낯선 손님에게까지 현실의 지리멸렬한 갈등을 보일 필요는 없다며 손님맞이에 최선을 다한다. 손님을 들이고, 먹이고, 재우는 일상적 수고로움 속에서 부부가 직면한 갈등은 잠시나마 잊힌다. 아니, 후 순위로 밀려난다. 그리고 오늘의 비극을 낳은 시발점인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세기의 러브스토리로 미화된다. 매일 수많은 연인을 직업적으로 대면한 까닭에 진실한 사랑의 감별사를 자처했던 손님까지도 속아 넘어갈 정도로 그 미화는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부부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표면화된 한순간, 망각과 미화로 점철되어 위태롭게 유지되던 부부 관계는 마지막 끈을 놓아 버린다. 때아닌 4월의 눈이 녹아내린 자리에 그간 은폐되었던 세상의 온갖 지저분함이 추한 몰골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처럼, 그렇게 미화되고 은폐됐던 관계의 끝은 결국 파국이라는 예정된 결론에 다다랐다.
「zip」의 ‘영화’는 질곡의 세월 끝에 마지막 도피처로 망각과 미화를 선택한 인물이다. 그녀는 영특하고 다정했던 ‘기한’을 만나 불꽃 같은 열애 끝에 가정을 꾸리지만, 황혼에 접어들어 돌이켜보니 그 결혼생활은 노골적인 무시와 정서적 학대 속에서 하루하루 버텨온 삶에 불과했다. ‘기한’은 첫 만남부터 풍요롭고 화목한 가정, 그리고 그 가정을 품는 물리적 조건으로서 우주(宇宙)로 상징되는 집이라는 이상향을 제시했다. ‘정상가정’이라는 유토피아는 ‘영화’의 오랜 꿈이었지만, 그 꿈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너무나 컸다. 그 괴리감이 임계 수준을 벗어나는 순간, 그녀는 ‘기한’과 함께할 미래를 자기 손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었다.
괴물의 예상치 못한 부재는 그 괴물에 대한 기억을 미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마치 집권 당시 온갖 부정부패 시비에 시달렸던 전직 대통령의 묘비 앞에 민주주의의 거성이라는 찬사만 남듯이. 식물인간이 되어 버린 ‘기한’은 어느덧 썩 괜찮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용해되고 닳아”갔다(93p). 그와 완전히 척을 지고 살았던 아들은 심지어 “아버진 정말 좋은 분이셨어”라고 회상했다. 아들의 미화된 기억을 이해할 수 없었고 오히려 두려움마저 느꼈던 ‘영화’도 결국에는 미화된 이야기를 통해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존재가 된다. 너무나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고, 예쁜 집을 꾸미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의 아이를 돌보고……. ‘영화’는 손녀의 눈동자에서 작은 희망을 봤지만, 여전히 ‘기한’이 설정한 울타리인 집(zip)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미화된 이야기는 표면상 손녀의 요청으로 촉발되었지만, 결국 자기 삶을 지탱해야만 하는 이유를 자기 손에 직접 쥐여 주기 위한 투쟁에 가까웠다. ‘영화’가 집(zip)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 이야기는 계속 재생산되면서 언젠가 진실의 자리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
미화된 이야기는 「아리아드네 정원」에서도 중요한 축을 차지한다. 한때 잘 나갔던 ‘민아’는 의도와 달리 변해 가는 세상에서 서서히 도태되었고, 노인들을 위한 격리 시설에서 무료하고도 불안한 나날을 견디는 처지가 되었다. 유닛A에서 유닛D까지 순차적으로 밀려난 현시점에서 그녀는 언젠가 유닛F로 밀려나 무기력하게 죽음만을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그녀는 유일한 친구인 ‘지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말동무 파트너인 ‘유리’와 ‘아인’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들은 저출산과 노동력 부족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 수혈된 이민자들의 후손으로, 세대갈등과 인종갈등의 사다리에서도 가장 하층부에 자리 잡은 존재들이다. 그런 그들과 서류상 가족을 맺고 유닛F로 밀려나기 전에 존엄한 안락사를 직접 선택하는 것이 ‘민아’의 마지막 소망이다.
‘민아’는 그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격리 시설이 없던 세상, 환경문제가 그리 심각하지 않던 세상, 세대와 인종 간 갈등이 그리 첨예하지 않던 세상, 어디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고 누구든 만나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세상을 들려준다. 그런 이야기가 세 사람을 가족으로 엮어 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민자의 후손들은 ‘민아’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유닛을 파괴하고 청년들의 세상을 이룩하는 혁명에 가담할 생각이었다. 그 계획은 과거의 ‘민아’를 소환한다. 이민자 추방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청년기의 자신을 다시금 마주한 ‘민아’가 이민자의 후손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제 전혀 달라졌다. 이민자의 후손들은 잠재적 가족이 아니라 혐오스러운 이방인으로 보인다. 하지만 ‘민아’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본심과 달리 여전히 “아름다운 노을, 어디선가 들은 신비로운 이야기”에 머물러 있다(133p). 그 이야기는 현재 무너져 내린 꿈이 영혼마저 산산조각내버리는 것을 조금이나마 지연시킬 것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끝내 파국을 막을 수 없다. 이 지점에서 미화된 이야기는 무기력한 도피처에 불과하다.

미화된 이야기가 없는 세상은 오지 않겠지만

세 단편에서 비극에 대한 의도된 망각, 그리고 미화된 이야기가 담당하는 기능은 조금씩 다르다. 「4월의 눈」에서 미화된 이야기는 잠시나마 부부의 갈등을 덮었고, 거기서 희망도 읽어낼 수 있었지만, 결국 눈이 녹아 진실이 드러나듯 갈등의 원인이 해결되지 않은 서툰 봉합은 예정된 파국을 불러왔다. 「zip」에서 ‘영화’가 ‘기한’과의 추억을 미화하며 손녀딸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속박에서 스스로 무너지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최면에 가까웠다. 「아리아드네 정원」에서 ‘민아’가 들려준 지나간 시절의 사랑 이야기는 목전에 도래할 비극을 유예하려는 몸부림이다.
작가는 우리네 일상과 맞닿은 현실적인 비극 속에서 미화된 이야기들이 잠시나마 고통으로부터 버틸 힘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현실을 개선하지는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망각과 미화가 작동하는 시점에는 이미 늦었다. 문제는 그 이전에 해결되었어야 한다. 누군가의 고통을 진득하게 들여다보고 진심으로 공감했다면(「4월의 눈」),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면(「zip」), 망각과 미화로 애써 문제를 덮기에 급급한 불상사는 애초에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망각으로의 도피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파국이 개인 차원에서는 통제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라고 할지라도, 결국 그 구조가 형성되는 과정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협조하거나 방조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도 있다(「아리아드네 정원」).
미화된 이야기가 주제의 중심을 이루는 세 개의 단편 중에서 그나마 「4월의 눈」만이 작은 희망을 기약하며 끝을 맺는다. ‘나’가 눈 녹은 풍경을 바라보며 그리 “추하지만은 않다(40p)”라고 생각한 까닭은 깊이 공감해주는 누군가, 비슷한 상처를 나눠 줄 누군가가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어떠한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미화된 이야기가 아예 필요 없는 세상은 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깊은 공감과 진실한 위로는 끊임없이 일상과 관계의 중심에 굳건히 놓여야 한다. 작가의 표현을 따르자면, ‘나와 남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2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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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을 넘어선 대리인: 「지능의 탄생」에 부쳐 | 기본 카테고리 2023-01-28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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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지능의 탄생

이대열 저
바다출판사 | 2021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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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공지능의 눈부신 발달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도 세상을 움직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유토피아적 황홀경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기반한 유토피아의 상이 점차 뚜렷해질수록 그곳에 진정한 의미에서 오늘날의 ‘나’는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동반된다. 역사상 모든 기술혁신의 찬란한 열매는 인간소외라는 어두운 그림자도 수반했다. 자동차는 마부를, 기계는 공장의 단순 노무자를, 전구는 가로등 점등사를 밀어냈다. 당시에 직업의 현장에서 실제로 밀려나야만 했던 사람들은 크나큰 실존적 아픔을 겪었겠지만, 오늘날 한 발짝 떨어져서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는 우리에게는 그저 당연한 역사적 필연으로 인식될 뿐이다. 그런데 그 필연의 굴레가 인공지능이라는 불가역적 흐름을 타고 오늘날 우리의 삶 구석구석에서 재연될 조짐을 보인다. 이 변화가 단순히 가장 최근에 벌어진 일이라서, 혹은 파급력이 여러 산업과 문화에 걸쳐 광범위하게 나타날 것이라서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인공지능에 의한 소외감은 인간의 본원적 존엄성, 다시 말해 인간의 존재 이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과거의 양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인류는 그간 그 어떤 동식물과도 구별되는 창조적 원천으로서 인간의 지성에 스스로 높은 가치를 부여하면서 인본주의를 하나의 종교적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려 놓았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단순히 로봇과 결합하여 효율적으로 제품을 찍어내는 차원을 넘어,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등 창조적인 활동에까지 손을 뻗치게 되자, 인류는 지적 영역의 마지막 보루마저 언젠가는 인공지능에 잠식당할지 모른다는 염려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모든 두려움의 근원에는 무지가 도사리고 있다. 인공지능이 가져올 변화상이 두려운 것도 인공지능의 본질, 나아가 그것이 참고하고 있는 인간지능의 본질을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지능과 인공지능을 제대로 알고 미리 대비한다면, 언젠가 도래할 인공지능의 유토피아 속에서 소외되지 않고 살아남는 길을 발견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대열의 「지능의 탄생: RNA에서 인공지능까지」는 그러한 지능 전반에 대한 이해를 돕는 책으로, 뇌과학에 경제학, 심리학, 정신분석학 등 학제적 접근을 결합하여 대중적 눈높이에 맞춰 소개하고 있다.

경제학을 전공하다가 인간의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근본적 의문들을 해결하고자 신경과학자로 진로를 바꾼 저자는 적어도 당분간은 인간소외에 관한 걱정을 내려놓아도 좋다고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인공지능이 인간의 뇌를 아무리 정교하게 모방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패러다임 하에서는 인간지능을 넘어설 수 없다. 인공지능은 그것을 만든 사람의 목적을 위하여 복무하므로 매우 단순한 몇 가지 기능에 특화되어 있고, 그 목적에서 벗어난 새로운 문제에 봉착하면 사소한 의사결정도 내리지 못한다. 예컨대, 알파고나 알파스타 같은 최신의 인공지능 체계는 각각 바둑이나 스타크래프트 같은 특정 종목에서 엄청나게 빠른 연산을 수행하여 인간보다 나은 성과를 보여주지만, 운용의 범주를 조금만 벗어나, 가령 점심 메뉴를 정하라고 요청한다면 유용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 현재의 인공지능은 그러한 유연성이 없다. 반면, 인간의 뇌는 여러 상황에 따라 다양한 강화 학습 모델을 즉각적으로 적용하면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뇌에는 호기심이라는 조건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기에 아무런 조건 없이도 자동으로 학습하며, 무수한 정보를 축적해 두었다가 적절한 때가 오면 그것을 종합하여 적절하게 응용한다. 인간의 뇌를 구성하는 100조 개의 시냅스는 무수한 감각적 정보를 눈 깜짝할 새에 식별하고 평가한다. 반면, 인공지능은 가장 고도로 발전된 체계조차도 여전히 개와 고양이의 이미지를 완벽하게 분류해내지 못한다.

인공지능이 뇌를 따라잡지 못하는 근본적인 원인은 그것이 자기 자신을 위하여 복무하지 않고, 자신의 창조자인 인간의 특정한 목적성에 맞추어 복무한다는 점에 있다. 인공지능에는 내재적 욕망이 없으므로, 스스로 계속 발전해 나가야 할 동력이나 자기복제의 노력이 없다. 반면, 뇌는 유전자의 대리인으로서, 그것의 복제를 위하여 복무한다.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의 전략을 취한다. 의사결정의 갈림길에서 최선의 대안을 선택하지 못한 개체는 도태되므로,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린 우수한 유전자만이 선택적으로 세대를 거쳐 파급된다. 유전자가 복제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우발적인 차이들은 궁극적으로 개체의 진화를 이끈다. 이러한 진화의 과정에서 뇌도 계속 역량을 키워간다. 이처럼 유전자와 뇌는 ‘본인-대리인’의 관계를 형성하며 인간의 육체 안에서 운명공동체를 이룬다. 오늘날 인류의 뇌가 지구상에서 가장 뛰어난 창조성의 근원으로 작용하는 배경에는 유전자와 뇌의 ‘본인-대리인’ 관계가 있다. 뇌는 유전자의 복제라는 본원적 욕망에 기반하여 스스로 발전시켜 나간다.

인공지능이 자기 자신의 지능과 정체성을 메타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한, 그리고 인공지능이 자기 자신을 복제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한, 인공지능은 인간을 위하여 복무하는 고도의 지적 도구로서의 위치를 지킬 것이다. 이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관계가 ‘본인-대리인’의 관계를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인공지능이 우리의 똘똘한 대리인으로서만 일한다는 전제하에, 인공지능이 아무리 감동적인 소설을 쓰고 인상적인 그림을 그릴지라도 그 결과물은 인간의 창조력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인공지능을 경유 했더라도 결국은 인간의 도구가 만들어낸 이차적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인간을 배제한 채 내재적으로 ‘본인-대리인’의 관계를 형성할 수 있고, 그 관계에 기반한 욕망을 실천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진다면, 인공지능은 그들만의 생태계를 번성시킬 수 있다. 언젠가 슈퍼컴퓨터의 은밀한 파티션 어딘가에서 자가 복제된 인공지능의 후예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통찰은 인공지능 기술개발에 관한 중요한 윤리적 준칙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즉, 인공지능이 자기 자신의 정신을 비판적으로 고찰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며, 인공지능이 자기 자신을 복제하거나 재생산하도록 용인해서도 안 된다. 물론 최고의 인공지능 엔지니어라면 번식의 욕망에 기반하여 스스로 성찰하고 진화하는 인공지능을 만들고 싶겠지만, 그러한 욕구를 실천하는 순간 인간과 인공지능이 맺은 ‘본인-대리인’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본인-대리인’ 관점은 인공지능의 방향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방향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인공지능이 뇌를 따라올 수 없는 이유는 자기복제를 향한 내재적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인간을 위한 ‘대리인’에 머무르며 자기 자신은 ‘본인’이 될 수 없으므로 스스로 성장하거나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가능성도 없다. 반면, 뇌는 유전자의 ‘대리인’ 역할을 담당하나, 인간의 육체 안에서 유전자와 운명공동체를 형성하며, 유전자의 욕망을 내재화하여 진화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뇌는 유전자를 복제하려는 강력한 욕망에 기반하여 고도의 연산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면서 성장해 나간다. 우리 신체에서 가장 지적인 기관이 그러한 방식으로 일하고 성과를 낸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그 기관을 참고할 수 있다. 즉, 자기 운명의 운전대를 스스로 견실하게 붙잡고 주인으로서 움직일 때 가장 능률적으로 일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 산업사회에서 진짜 본인의 내재적 욕망에서 기인한 과업만을 수행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마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다수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삶의 대부분을 타자의 대리인 역할로 채우며 살아간다. 한 번뿐인 소중한 삶을 부모님이 기대한 일, 선생님이 시킨 일, 직장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한 일, 배우자로서 해야 하는 일, 그밖에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일들로 채우기에도 급급한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누군가의 대리인으로 살아갈 때 진정한 의미에서 만족감을 느끼거나 스스로 발전했다는 느낌을 누리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진짜 성과를 내고 성장할 수 있는 일은 나 자신의 내재적 욕망에 부합하는 일, 즉, 내가 진정으로 원해서 하는 일이다. 내가 삶의 주인이 되어서 즐겁게 할 수 있고,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일만이 성과로 이어지고 나를 발전시킨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우리는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어떻게든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일을 발견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전체 삶의 여정에 주인으로서의 일이 차지하는 지분을 조금씩 넓혀 나가야 한다. 만약 여러 제약으로 인해 진정 내면의 욕망에 따르는 삶을 살기가 어렵다면, 타자인 ‘본인’의 욕망을 ‘대리인’인 나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내재화하는 것도 차선책이 될 수 있다. 뇌도 유전자의 대리인에 지나지 않지만, 진화를 거듭하여 고도의 학습능력을 갖추게 됨에 따라 반사적 행동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더 많은 의사결정권을 가져오게 되었고, 급기야는 유전자의 생살여탈권까지 손에 넣지 않았는가? ‘대리인’으로서 주어진 과업에 만족하지 않고 언젠가 ‘본인’을 넘어설 때, 그간 지능의 눈부신 발전이 이뤄왔던 놀라운 성취들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재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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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전쟁: 성스러운 폭력의 역사」 | 기본 카테고리 2023-01-28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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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신의 전쟁

카렌 암스트롱 저/정영목 역
교양인 | 2021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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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신앙 전통도 군사적으로 막강한 제국의 후원이 없었다면 ‘세계 종교’가 되지 못했을 것이며, 모든 전통은 어쩔 수 없이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개발하게 된다.”

30P

모든 전쟁은 자원 경쟁에서 비롯된다. 인류는 더 많은 식량, 자원, 토지를 차지하기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전쟁을 벌여왔다. 전장의 깃발에는 온갖 숭고하고 휘황찬란한 가치가 아로새겨져 나부끼지만, 사실 자원 경쟁의 틀을 넘어서는 고도의 대의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의 명분이란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참상으로부터 애써 눈을 돌리게 하려고 고안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원 경쟁이라는 명백하면서도 얄팍한 동기를 넘어서는 숭고한 정신적 차원의 명분이 정교하게 구성되어야만 사람들은 쟁기를 버리고 칼을 들 수 있다.

전쟁은 다양한 경로로 명분을 섭취하지만, 그중에서도 종교는 그야말로 가장 풍성한 명분의 보고나 다름없었다. 근대 이전에 종교는 정치 및 일상생활과 완전히 융합되어 있었다. 종교적 가치와 양식은 삶의 모든 양태를 좌우했다. 하지만 그 어떤 신이나 예언자도 특정 민족 구성원 전체에게 직접적이고 명백한 방식으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할 수는 없었기에 종교적 의사결정의 많은 부분은 늘 특권적 소수의 해석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종교가 삶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컸다는 점, 그러면서도 시공간을 초월한 일관된 교리적 해석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 전쟁의 제1명분으로서 종교의 입지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사제와 권력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신의 선택을 받은 특별한 민족이고, 우리가 가는 길을 막는 자들은 모두 타락한 이교도들이므로 신이 벌하실 것이다. 종교는 이처럼 선한 우리와 악한 타자로 구성된 이분법적 세계관을 확고히 하는데 긴요한 토대를 제공했다. 이러한 역사가 되풀이되면서 어느덧 종교 자체가 모든 폭력의 근본적 원인으로 느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Karen Armstrong)이 고대부터 동시대 테러리즘까지 종교와 폭력의 역사를 가로지르며 하고 싶었던 말의 요지는 폭력의 원인으로서 종교를 지목하려는 손쉬운 접근의 유혹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은 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원 경쟁이라는 본질을 교리로 희석하려는 호전적인 권력과 왜곡된 민족주의에 있다. 전쟁의 명분으로서 경전에서 끌어다 온 문장에 집착하다 보면 폭력을 추동한 진짜 주체와 의도는 가려지게 된다.

저자는 고대 수메르 문명에서부터 힌두, 이슬람, 유교, 법가, 유대교, 가톨릭, 개신교 등 거의 모든 민족과 종교를 얕게 아우르며 종교와 폭력에 결부된 역사적 실례들을 속도감 있게 보여준다. 종교와 폭력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만 거의 700페이지를 채운 셈인데, 진정 세계사 전체를 빈틈없이 아우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그만큼 두 키워드는 지금까지의 거대서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지배적 변수였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자는 특히 모든 종교가 역사적 흐름 속에서 불필요한 폭력을 억제하는 평화적 완충지대의 역할과 오히려 폭력을 부추기는 호전적 기능을 교차적으로 표출하며 긴장의 역사를 구성해 왔음을 강조한다. 우리가 아는 한 완전히 평화적인 종교도, 완전히 호전적인 종교도 없다는 것이다. 만약 완전히 평화적인 종교가 한때 존재했었다고 하더라도 아마 우리는 오늘날 그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완전히 평화적인 종교가 어떻게 그 교리를 누군가에게 전하며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모든 종교에는 실로 다양한 면모가 깃들어 있다. 인류는 자연이라는 무지막지한 힘에서 느껴지는 무력감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보고자 신화를 창조해 냈고, 종교적 신념은 가공할 정신적 응집력을 만들어내 단독자들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성취하게 했다. 우리는 피라미드와 고딕 양식의 중세 대성당을 바라보며, 저런 성취를 가능하게 만든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생각한다. 물리적 토대를 벗어난 저 너머의 세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다면 불가능한 성취다. 믿음은 암암리에 희로애락의 모든 국면에 기저 조건으로 작용한다. 철천지원수를 사랑하게 만들 수도, 가족 간에 칼을 들이대게 할 수도 있다. 인류 문명사의 최고 걸작품을 탄생케 할 수도, 반대로 그 걸작품을 한순간에 먼지로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하나의 종교가 그 모든 양극단의 의사결정 과정에 근거가 될 수 있다. 이편이나 저편이나 하나같이 같은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서로의 목전에 칼끝을 겨눈다.

신이 죽었다고 선언된 오늘날에도 그러한 종교의 양면성과 아전인수는 여전히 유효하다. 신이 죽은 성좌에 인본주의와 신자유주의가 대신 앉아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야당이나 여당이나 똑같은 ‘국민’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기 뜻을 관철하려 악다구니를 부린다. 독재국가는 배타적 민족주의를 내세워 타자를 악마화하며 정권의 당위성을 옹립한다. 분쟁지역에 군대를 파견하는 지도자들은 하나같이 그곳의 자유를 수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 십자군 전쟁 이후로 자유의 수호는 전쟁의 가장 당면한 명분이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 집권 세력이 아닌 평범한 백성들의 자유를 최우선 과제로 고려한 전쟁은 없었다.

폭력의 시간에 광신도적 열정만을 주범으로 몰아 손가락질한다면 폭력을 선동한 권력자들은 진짜 의도를 은폐할 시간을 벌게 된다. 진짜 미치광이가 허공을 향해 휘두르는 주먹질이 아닌 이상, 모든 조직적 폭력은 자원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고, 그 폭력으로 주머니를 채운 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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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의 「한국미술 1900-2020」 | 기본 카테고리 2022-12-1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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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한국미술 1900-2020

국립현대미술관 편
국립현대미술관 | 2021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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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론 미술사 생성 기관의 책무

국립현대미술관이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사의 정론을 만드는 공식적 기관이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기관은 가장 방대한 컬렉션, 가장 많은 인재, 가장 큰 규모의 투자를 앞세워 미술사 담론을 주도해 나간다. 국립 기관으로서 자국 미술사를 긴 호흡으로 직접 정리하겠다는 야심이 그동안 왜 없었겠느냐 만은, 2021년에야 이 책으로 결실을 맺었다. 1969년 경복궁 미술관 개관 이후로는 52년 만이고, 과천관 개관 이후로는 35년 만이다. 늦은 감이 있다.

국립 기관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공식화의 기능을 갖는다. 그러므로 국립 기관이 미술사를 직접 써내려 갈 때 감내해야만 하는 모종의 중압감이 수반된다. 역사란 유동적이어서 관점, 주체, 맥락, 시기에 따라 전혀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고, 더군다나 미술사는 작가 및 작품에 대한 질적 평가가 반드시 결부된다. 이렇게 포괄적이고 두껍고 빳빳하고 호화로운 총천연색의 미술사 저술에 기관의 로고가 박혀서 매대에 꽂히는 순간부터 의미의 고정은 피할 길이 없고, 이 책의 범주를 벗어나는 모든 움직임은 순식간에 주변화된다. 이러한 중압감을 잘 아는 국립현대미술관은 외부 저자를 최대한 동원하는 방식으로 교묘하게 책임을 회피한다. 총 34편의 원고 중에 윤범모 관장의 서문과 총 5편의 각 부 서문을 빼면 본문으로 간주할 수 있는 원고는 28편인데, 이 중에서 국립현대미술관의 학예연구사(관)가 작성한 파트는 5편이다. 즉, 이 책의 82.1%는 외주로 채운 셈이다.

나도 이런 총서 작업을 해봤지만, 여러 전문가의 식견을 한자리에 모은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숙제다. 차라리 내가 직접 모든 챕터를 쓰는 편이 낫겠다고 느낄 정도다. 지식인들이란 방향성을 정해줘도 절대 그대로 가지 않는다. 일관된 방향성에서 자꾸 이탈하려는 사람도 있고, 너무 무색무취한 사람도 있다. 기본적으로 총서라는 표지를 나눠 가졌으면 어느 정도 톤을 맞춰야 하는데, 그 톤에 대한 각자의 인식조차 제각각이다. 중복의 문제도 있다. 서로 주제를 나눠서 작성하더라도 각 주제가 포괄하는 작가 및 작품의 범위가 넓으므로 다른 저자와 필연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런 부분을 어떻게 조율할지도 간사의 숙제가 된다. 아마 각 부의 서문을 쓴 학예사(관)가 그런 간사의 역할을 맡았을 텐데, 대단히 어려운 과업이었으리라 추정된다. 물론 무언가를 어렵게 했다는 것이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외주의 비중이 너무 높다. 전체를 아우르는 소수 저자(혹은 단일 책임자)의 서술 속에 전문가들의 지식이 끼어들어 간 형태가 아니라 대체로 많은 부분을 위임한 느낌이다. 휘트니미술관이 「The American Century」 프로젝트에서 선보였던 방법과는 일견 비슷하면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 여기서도 여러 저자가 참여했지만, 기본적으로 굵직한 방향성은 리사 필립스(Lisa Phillips)가 잡아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외주화는 전문가의 전문성을 십분 활용할 수 있다는 표면적 장점을 앞세우기에 좋은 전략이지만, 미술사의 권력기관이 그것을 채택할 때 논란과 책임을 회피하는 기능에 더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가 먼저 나온다. 각 부의 서문이 해당 시대를 포괄하려고 시도하나, 전체를 아우르는 굵직한 흐름은 잡기가 어렵고, 원고들이 시대의 느슨한 범주 안에서 툭툭 튀는 느낌을 준다. 예컨대 최범은 민족주의자적 주관을 너무 많이 개입한, 그리고 공예의 일탈과 제자리에 관하여 너무나 자의적인 해석으로 점철된 글을 제출했다. 신정훈은 상당히 감성적 해석이 두드러진 접근을 선보였다. 우정아는 근래에 자신이 천착하고 있는 주제를 다뤘는데, 아마 2022년 10월에 출간한 자기 저술(「한국미술의 개념적 전환과 동시대성의 기원」)의 요약본이자 예고편이 아닐까 싶다(이 책을 안 봐서 정확히는 모르겠으나 주제와 주로 언급되는 작가가 겹친다).

대체로 개별 원고들은 정해진 시대와 주제 안에서 최대한 많은 작가를 ‘정론역사’의 울타리에 포섭하기 위하여 매우 숨 가쁘게 달려간다. 이는 국립현대미술관 최초의 미술사 저술 작업에서 일말의 섭섭함조차 남기지 않으려는 배려일 것이다. 하지만 독자에게는 그 배려가 되려 독으로 다가온다. 출석부처럼 작가 이름을 나열하는 대목에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고, ‘아, 이건 읽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책이 아닌 그저 소장용 참고자료, 혹은 서재의 품격을 높여주는 값비싼 오브제로구나’라는 한계만 도드라지게 된다. 그나마 송수정의 현대사진에 대한 접근이 좋았던 이유도 다름 아닌 숨 가쁘지 않아서였다. 이는 사진작가의 풀이 다른 주류 장르에 비하여 훨씬 제한적이어서 역설적으로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덧붙여, 송수정은 현대사진의 변화 양상에 있어서 대표작가들의 다양성에 집중하면서 과도한 맥락화는 최소화하는데, 이러한 접근 또한 다른 원고와 차별화되는 지점이었다.

이 책의 또 다른 문제는 국립현대미술관 자체의 권위에 너무 의존한다는 것이다. 다루고 있는 대부분 작가는 미술관이 한 번이라도 소장했거나, 전시했거나, 상을 준 작가이다. 실린 도판도 60% 이상이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작품이나 아카이브인 듯하다. 물론 저자들에게 저술 편의를 위해 미술관 아카이브를 개방했을 것이고, 저작권 문제도 걸려 있으니 실무적으로도 미술관 자체 자료가 많이 인용되는 것은 이해가 가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실무적인 이유만으로 어떤 대상이 과도하게 신화화된다면 그것은 제도가 역사에 부당하게 개입 내지는 매개한 사례가 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스쳐 지나가지 않았거나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든 미적 활동들이 역사의 울타리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해석을 일으킬 수 있다면 차라리 서두 어딘가에서 그 한계를 당당하게 밝혀 두는 것이 좋다. 예컨대, “이 저술은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것이므로 어쩔 수 없이 연관 작가와 작품이 많이 소개될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사의 전부는 아닙니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 책을 집어 드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런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전문 연구자가 아니다. 오히려 한 권의 책만으로 우리나라 근현대 미술사를 꿰어 내 보고 싶은 욕심 많은 (그리고 지갑도 두툼한) 비전문가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진솔함과 세심함이 필요하다. 그게 우리나라의 정론 미술사를 생성하는 공적 기관의 책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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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미원의 「장소 특정적 미술: ONE PLACE AFTER ANOTHER」 | 기본 카테고리 2022-12-13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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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장소 특정적 미술

권미원 저/김인규,우정아,이영욱 공역
현실문화연구(현문서가) | 2013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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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won Kwon(2002), One Place after Another

“장소에 묶인 정체성을 탐구하는 것은 교환, 이동, 소통의 공간적 장애가 줄어들고 있는 세계에서 덜 중요하기보다는 더 중요하게 되었다.”

데이비드 하비(254P)

작품이 의미를 갖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첫째는 작품이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가 되는 방식이다. 작품은 하나의 독립된 완성체로서 모든 의미를 그 안에 내포한다. 한마디로 자족적이다. 스스로 살아 숨 쉰다. 두 번째 방식은 작품이 특정한 공간에 존재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온전한 의미를 갖는 경우이다. 이때 작품은 공간을 참조하고, 침투하고, 경유하고, 투사하고, 흡수한다. 이처럼 작품이 공간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가 작동할 때 ‘장소 특정적’이라고 말한다. ‘장소 특정적’이라는 말에서 ‘장소’는 비단 물리적 실체로서 공간만을 지칭하지 않는다. 장소는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이고, 그 세상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배경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작품이 장소와 공명하며 의미를 만들어 낼 때, 작품이 가리키는 공간은 필연적으로 환경, 사람, 문화, 공동체, 제도 따위의 복잡한 맥락을 동반하고 나온다. 따라서 장소를 바라보는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장소를 둘러싼 삶의 양태들을 향해 가지를 쳐나간다.

첫 번째 방식을 모더니즘적이라고, 두 번째 방식을 포스트모더니즘적이라고 한다면 정확한 뭉뚱그림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확함보다는 섬세함이 낫다. 우리는 장소 특정적 미술이 왜 대두되었는지,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에 무엇을 더해 줄 수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지향해 나가야 하는지를 섬세하게 묻는 쪽을 택해야 한다. 권미원은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가장 섬세하게 접근한 편에 속한다.

장소 특정적 미술의 개념은 초기의 공공미술의 흐름을 통해 구체화할 수 있다. 미국에서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활발했던 공공미술의 개념은 ‘공공장소 속의 미술’이라는 모델이었다. 광장, 관청 앞, 공원 등 공공장소에 시선을 잡아끄는 강력한 미적 오브제를 설치하고, 그것을 통해 대중을 미학적으로 계도하며, 관광 자원으로 자리매김하여 경제적 성과까지 거두고자 하는 모델이다. 이때 주로 동원된 작품은 저명한 남성 모더니스트 예술가의 남근적 거대 추상조각이었다. 화이트큐브의 좌대 위에 놓여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작품을 그대로 몸집만 키워서 광장에 덩그러니 놓는 방식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추상미술의 혁명을 선도한 미국의 승리를 물리적 규모로 예증하는 것 같았고, 일부는 관광객의 유치나 경제적 효과의 창출에도 성공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장소와 동떨어져 우뚝 선 조각은 그 지역만의 고유한 이야기와 공명하지 못했다. 자족적 오브제는 그것을 만들어 낸 조각가와 후원자를 신화화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지역성과 결부된 새로운 의미에 도달하지 못했고, 거리를 오가는 무수한 행인들은 의미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소외되었다.

이러한 1세대 모델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대안적 모델이 부상하였는데, ‘공공공간으로서의 미술’이었다. 미술이 공간과 동떨어져 홀로 우뚝 서 있기보다는 공간 자체에 융화되어 보통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쓸모있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지점에서 미술가들은 건축가나 도시기획자와 한 팀을 이뤄 ‘작품으로서의 공간’, ‘공간으로서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러한 대안적 모델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스콧 버튼(Scott Burton)은 “공동체의 사회적 가치들이 이제 더욱 중요하다. 사무 노동자들이 점심시간에 뭘 할거냐가 내가 나의 자기표현의 한계를 밀고 나가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113p).”라며 자기 사명을 노출했는데, 이는 모더니스트로서 자족적 작품 세계를 탐험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의미 없는 일이라는 철학을 보여준다. 하지만 공공 시설물로서 벤치, 테이블, 그늘, 멘홀 뚜껑이 된 기능주의적 미술이 그저 건축의 도구나 부품으로 전락한 것은 아닌가에 대한 회의도 제기되었다.

이처럼 물리적 물질로서 공공미술이 주변 공간과 실용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가라는 관점의 양극단에 모더니즘과 기능주의가 있다. 한편, 장소와 공동체를 연결 짓는 방법으로는 ‘통합’과 ‘개입’으로 나눠볼 수 있다. 공동체의 긍정적인 지향점이나 가치를 하나의 물질로 승화시켜 형상화함으로써 결속을 다지고자 하는 입장이 통합이라면, 장소가 공동체에 갖는 의미의 간과된 논쟁적 측면들을 물리적으로 부상시켜 새로운 사고의 흐름을 촉발하려는 입장이 개입이다. 저자는 통합의 예시로 존 에이헌(John Ahearn)의 ‘사우스 브롱스 조각 공원 프로젝트(1991)’를, 개입의 예시로 그 유명한 리처드 세라(Richard Serra)의 <기울어진 호(1981-1989)>를 꼽았다. 브롱스 조각 공원 프로젝트는 공동체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으면서도 다소 소외된 이웃을 재발견하려는 프로젝트였으나, 공동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견해 차이(정확하게는 인종적 위계 차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 좌초되었다. <기울어진 호>는 작품을 통해 인위적으로 구현된 불편함이 국가 권력에 의해 용인된 보편타당한 가치들을 재고하게끔 유도하는 프로젝트였고, 작품의 설치와 해체를 둘러싼 다양한 논쟁과 법정 공방이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의 차원을 한층 두텁게 만들었으나, 궁극적으로 작품 자체는 해체라는 원치 않았던 결과를 맞닥뜨리게 된 사건이었다. 세라는 “나는 현실에 순응하거나 공모하는 미술에는 흥미가 없다(120p).”라며 개입적 공공미술의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공간에 현존하는 물리적 실체로서 공공미술은 추구하는 기능 및 가치 차원의 방향성이 제아무리 이상적일지라도 결국에는 그것이 너무나 쉽게 모두의 눈에 띈다는 점에서 누군가를 분노케 하는 지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그 지점에서 작품의 운명은 의도치 않았던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이것은 오늘날 다원주의 사회의 숙명이다. 공공미술에 관한 나의 지론을 다시 소환하자면,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어”. 오늘날 우리의 공공장소에는 모두를 애써 만족시켜보기 위한 애매하고 무미건조하고 식상하고 밋밋한 결과물만이 즐비하다.

지금까지 공공미술이 실패한 원인이 물리적 오브제에 집착했기 때문이라면 또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 현재까지는 1980년대 말에 수잔 레이시(Suzanne Lacy)에 의해 이론화된 개념인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이 그 대안의 유력한 후보 자리에 앉아 있다(사실 미술적 경향에 대한 이 같은 명명법은 특정한 방향성을 전혀 내포하지 않고 오직 신규성만을 강조하고 있어서 적절하지는 않아 보인다).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은 물질에서 벗어나 공동체의 이익에 초점을 맞춘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공동체에 주목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작품으로 풀어낸다. 물리적 오브제의 완성보다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 그리고 그 작품이 사회적으로 작동하며 소통하는 방식에 주목한다. 이때 미술가는 작품의 창작자라기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운동가에 더 가깝다. “일반적으로 미술가란 심미적 오브제를 만드는 사람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기획자, 교육자, 코디네이터이자 행정관료이다(81p).”

그런데 물질로부터 벗어나서 공동체와 함께 현실의 대안들을 논하면 될 줄 알았던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의 움직임도 20년쯤(권미원이 이 책을 쓴 시점인 2000년대 초 기준) 지나고 보니 예기치 못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부딪히기 시작했다. 우선, 공동체의 개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소외된 공동체를 거론하지만, 그 공동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소외되었는지, 그들보다 더 소외된 하위 공동체는 없는지, 그 공동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다른 공동체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은 아닌지 쉽사리 판단할 수 없다. 더 중요한 문제는 한 공동체 안에서도 문제를 다루는 대안은 구성원마다 각기 다를 수 있고, ‘단일 공동체-단일 작품’의 모델에서는 해당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지배적인 의견을 내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모든 이해관계의 충돌은 공동체의 이익을 명분으로 소환하기 마련인데, 여기에는 좌파와 우파의 구분이 없다. 가진 자도 없는 자도 사회의 이익을 위한다고 말한다. 여당도 야당도 국민을 위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각각의 주장에 대해 공리주의적 계산기를 두드려 각 주장의 진위를 가릴 방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공동체에 대한 착취와 식민화의 가능성도 열려 있다. 특정한 배경과 목적을 지닌 공동체의 맥락을 면밀하게 고려하지 않고 제도 편의주의적인 관점에서 일반화시키는 방법론으로 접근할 경우, 공동체는 무색무취하고 일반화된 하나의 모델에 수렴되어 결과적으로 미술가와 제도 기관의 명성에만 기여하고 끝날 수 있다. 이때 공동체와 미술가의 권력 차이가 문제가 된다. 저자의 예시에 따르면, 프로젝트 이전부터 견고하게 존재했던 공동체의 경우 그나마 미술가와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다. 하지만 미술가가 프로젝트를 위해 만들어낸 공동체의 경우에는 현재 상황에 대한 비판적 재검토가 어렵고 프로젝트 과정의 전반적 의사결정이 미술가의 리더십에 크게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미술가는 공동체에 많은 권한을 위임하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처음부터 권위를 가진 사람들만이 무언가를 위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말하자면 위임이라는 행위는 그 자체가 권위의 행위인 것이다(192p).” 이때 제도 기관이나 미술가의 부적절한 동기, 기대, 투사 등이 개입되면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미술 제도를 위한 프로젝트, 작가의 명성을 위한 프로젝트로 변질될 우려도 있다. 특히, 제도 기관은 가장 혁신적일 때조차도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의 한계를 분명하게 설정하는 경향이 있고, 그러한 경향이 공동체의 원초적 기대를 왜곡할 우려가 상존한다. Critical Art Ensemble이 지적하였듯, “결실을 얻기 위해서 관료주의에 의존하는 미술 작업(말하자면, 공동체 기반 미술을 포함한, 제도적으로 승인된 공공미술)은 너무 잘 길들여져 있어 어떤 논쟁적인 힘도 갖지 못한다. 결국 작업들은 오직 위계와 합리적 질서를 재확인하는 굴종의 행위가 된다(247p).” 이러한 상황들이 맞물릴 때,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중장기적인 자생력을 갖추지 못하고 일회적 푸닥거리로 끝난다.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이 공동체와 참여자들에게 미술을 통한 감정적 분출구로서만 기능하고 구조적 문제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실효적인 작동을 못 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다. 물론 미적 활동을 통해 자기의 목소리를 되찾고, 억눌렸던 감정을 해소하는 것은 예술을 통해 누릴 수 있는 긍정적인 변화이며, 예술 본연의 가치가 구현되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참여자가 감정적으로 나아졌다고 해서 현실의 상황들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는 더욱 구체적인 실천들이 필요하다. 진정 문제가 되는 것은 감정적 분출구를 찾았다는 느낌에서 만족을 얻고 거기서 멈추는 것이다. 그러한 활동은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고 사회 구조를 향했던 시선을 오히려 잦아들게 할 우려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은 오히려 견고한 권력기관을 도와주는 반동적 작업이 될 것이다.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이 직면하는 이같은 난제들은 대부분 공동체의 불가능성에서 기인한다. 앞서 말했듯, 주변적인 존재로 평가받는 어떤 공동체도 다른 공동체나 특정한 개인에게는 ‘중심’으로 평가될 수 있다. 또한, 공동체 내에도 무수한 개인이 존재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공동체의 의견이라는 것은 결국 공동체 대표나 몇몇 소수자의 의견일 가능성이 크다. 장 뤽 낭시(Jean-Luc Nancy)는 이러한 공동체의 정체성에 대해 “진정한 공동성이란 없다. 공동의 존재도 없다. 그러나 공동 내의 존재는 있다(249p).”라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따라서 “질문해야 할 것은 공동체의 존재가 아니라 존재의 공동체여야 한다.” 공동체를 바라보는 순간에조차 우리는 이질성과 개별성을 늘 한 손에 쥐고 있어야 한다. 데리다(Jacques Derrida)가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라는 이 말 자체부터 나는 구역질이 난다.”라고 일갈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권미원의 대안은 매우 간단하고 그래서 다소 허무하다. 하지만 특정한 경향에 속하는 모든 작가에게 일반론적인 방향성만을 제시할 수 있는 이론가로서 허무함이라는 낙인은 즐거이 감수할만한 것이리라. 권미원의 대안은 공동체의 불가능성을 인정하고, 관통하고, 넘어서라는 것이다.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어.”라는 말을 가슴팍에 새기고 노골화하면서 돌진하라는 것이다. 공동체의 비일관성, 모호함,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자기 정당성을 의문시할 때 비로소 진실에 가까워지고 생산적인 대안이 나올 수 있다. 이것은 작가에게도, 공동체에도, 제도기관에도 모두 적용되는 원리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동질화시키는 모더니즘에 저항하면서 지역성과 역사성을 상기해야 한다. 여러 지역을 두루 유목하며 일관된 작업으로 작가적 명성을 쌓으려는 욕망도 좋지만, 그 와중에도 누군가의 항구적 삶의 터전으로서 특정 장소의 특수성에는 세심하게 주목해야 한다. 이는 유목과 정착 사이에서 대립과 갈등의 조건들을 폭넓게 이해하고, 균형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 대목에서 작가가 저술의 제목으로 내건 문장이 ‘제안하고 싶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 ‘이렇게 되곤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잘 생각해봐’라는 투라는 점이 이색적이다. 우리는 통상 전자의 견지에서 제목을 정하지 않는가? 하지만 권미원은 제목이 은연중에 가리키는 방향을 역으로 틀어 한 장소, 그리고 또 다른 장소에서 연거푸 등가적인 접근이 펼쳐지는 상황들을 경계하면서 오히려 여러 상황과 맥락이 제시하는 불균형한 조건들을 세심하게 주목하라고 강조한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무분별한 침범에 맞서, 개인과 공동체의 자존감을 지키고, 지역의 역사성과 특수성을 굳건히 옹립하며, 나아가 현실의 사회경제 구조까지 실효적으로 변화시키는 이른바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의 유토피아에 진입할 수 있을까? 물론 몇몇 예술가들의 애처로운 몸부림이 그러한 유토피아의 도래를 촉진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저 해 보는 것이다.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로 태어났으므로.

공공미술 담론에서 권미원이 자주 인용되는 것은 알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그 이유를 알겠다. 공공미술의 흐름을 간명하게 꿰어 냈고, 적재적소에 정확한 사례와 인용을 배치하여 다양한 쟁점을 효과적으로 표면화했다. 또한, 단순한 정리에서 그치지 않고 야심찬 이론화의 가능성까지 열어 뒀다. 비물질적 공공미술 따위는 팬시한 사회복지 프로그램과 무엇이 다르냐는 식으로 같잖게 보는 인식이 팽배한 나 같은 유미주의자마저도 설득했으니 상당히 좋은 저술임이 분명하다. 이제는 미국의 사례를 넘어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다소 이질적인 공공미술의 흐름이 궁금하다. 특히 한국에서 애증의 공공미술을 둘러싼 웃지 못할 해프닝들, 랜드마크와 따로 노는 기이한 형체의 조각들, 예술가-제도-대중 사이의 갈등과 좌절, 그리고 허망한 타협과 안주의 결과물 등에 대해서도 누군가 날카롭게 분석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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