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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연재소설 <해적판을 타고>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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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은 해적판을타고 2017년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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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마치며 | 책 밖에서(안부) 2017-04-10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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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나는 24시간이 아니라 72시간 단위로 살고 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소설을 연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 , , 3일간 글을 쓰고 목요일에 소설을 올린 후, , , , 3일간 글을 쓰고 다시 월요일에 올린다. 목요일 하루 정도는 좀 느긋해지기도 하니, 일주일은 7일이라기보다 3+1+3의 합이 되어버렸다.

    

  3+1+3 시스템이라는 건 일단 일주일에 한번씩 손톱을 깎던 걸 일주일에 두 번씩 깎게 된다는 걸 뜻한다. 나는 여행하는 경우가 아니면 손톱에 뭘 칠하지 못하는데, 손톱까지도 노동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손톱이 민낯 그대로 숨을 쉬어야 좋은 아이디어가 나올 거라고 믿고 있다. 컴퓨터 자판 위의 활자를 반질반질하게 만드는 건 결국 손가락 끝이기 때문에 손톱의 길이도 중요하다. 너무 길면 안 된다. 그렇다고 바짝 깎아서 너무 짧은 상태도 곤란하다. 글이 안 써질 때마다 손톱을 깎으면 글을 더 잘 쓸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정작 글이 안 써질 때 손톱을 더 깎을 여지가 없다면 얼마나 절망스러운가. 아무튼 사흘에 한번씩 점검하느라 손톱조차도 대체 이게 뭔 일이래하는 요즘이다.

 

  내가 YES24-블로그에 소설 <해적판을 타고>를 연재하기 시작한 건 올해 1월부터였는데, 덕분에 새해 계획도 이미 무너졌다. , 매해 이월되는 재고품들 있지 않은가. 매일 운동하기, 매일 외국어 배우기, 매일 규칙적인 수면과 건강한 식사하기, 심지어 하루에 물 7컵 마시기까지. 다시 이렇게 나열하고 보니 뭐랄까, 중학교 졸업앨범을 펼쳐서 있는지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동창의 이름처럼 낯설다. 새벽 두 시에 크리스피크림도너츠를 먹었다면 다 설명되지 않는가. 이미 다른 건 다 끝장난 것이다. 외국어라니 사치스럽기도 하지, 연재물을 업로드하고나면, 한국어조차도 어버버버한 상태가 되고 만다. 최근에는 주민생터 앞에 마용이가라고 말을 해서 동행이 뒤집어졌는데, 원래 전하려던 뜻은 주민센터 앞에 야옹이가였다. 의지의 표현으로 운동복을 외투 속에 입고 나왔다가도, 카페에서 글을 쓰고 나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참고로 운동복의 근육 잡아주는 기능과 땀 흡수 기능은 글 쓸 때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이게 다 연재 때문이다. 이 긴장감이란 게 조금 과장하자면 결혼식을 앞둔 신부에 비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난 두 달 반, 그리고 앞으로도 남은 몇 주를 나는 주2회씩 결혼식을 올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결혼식 전날까지도 평소처럼 운동을 가는 사람은 설마 없겠지! 어딘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드니 좀 드물겠지!’로 정정하겠다.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들을 이렇게 구분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연재방식을 선호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나는 연재를 선호하는 편인데, 일단 마감일이 규칙적인 리듬처럼 다가오는 게 좋고(마감을 견디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책으로 묶기 전에 규칙적인 원고료를 받을 수 있어서다. 모든 작가들이 이런 이유로 연재를 선호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재가 조금 더 안정적인 창작환경을 만든다는 걸 부인할 작가는 없을 것 같다. 나로서는 소설을 쓰는 것만으로도 이미 안전벨트 없이 전투기에 올라탄 느낌이 들기 때문에, 글을 쓰는 환경은 좀 안정적이기를 바란다.

 

  소설 연재를 하는 작가들을 또 이렇게 나눠볼 수 있다. 어느 정도 완성된 원고를 가지고 시작하는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 소설이란 건 네모난 틀 안으로 반죽을 집어넣어도 둥근 형태로 출력될 수 있는 세계라, 원고가 애초에 있었냐 아니냐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기도 하지만. 나는 원고를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렇게 해본 적은 없다. 이번에도 그랬다. ‘사전 제작같은 건 하지 못했다. 어떤 방향과 스케치 정도만 갖고 시작한 거라 부담감이 너무 컸다.

 

  소설 연재가 처음은 아니었다. 몇 년 전에 장편소설을 세 차례에 나눠 계간지에 연재한 적이 있었는데, 온라인 연재는 또 다른 지면이었다. 일단 분량에서도 차이가 있어서 계간지 연재가 훨씬 많은 분량의 원고를 한번에 내고 그걸로 한 계절을 간다. 그에 비해 온라인 연재는 더 적은 분량을 더 자주 올린다. 정해진 규격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나는 대략 20-25매 사이로 1회분을 올리고 있다. 이렇게 조금씩 올리는 것도 연재의 부담요소 중 하나였다. 이른바 절단신공이 필요한 것 아닌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끊어야 할지에 대해, 그 절취선에 대해 고민했던 건 오히려 연재를 시작하기 전이었던 것 같다. 막상 연재를 시작하니 어느 지점에서 끊는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독자와 작가가 서로의 호흡을 알아채게 되어 어떤 전략 같은 건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이건 좀 예상 못했던, 놀라운 경험이었다. 마치 한 시간 내내 전화로 수다를 떨고서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만나서라고 말하는 친구 사이 같다고나 할까. 다음 회에 또 얘기를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온라인연재의 가장 큰 특징은 속도. 독자들의 반응 속도가 그렇고, 작가가 원고를 마무리한 후 지면에 게재하기까지의 속도가 그렇다. 어느 독자 한분은 내가 직접 원고를 업로드한다는 사실을 알고 최종적으로 클릭하는 순간 기분이 어떨까를 상상해봤다고 했다. 정말 이 세계에서는 클릭하는 순간 원고가 바로 독자에게로 가니까. 작가가 원고를 보내고 편집부의 교정 단계를 거쳐 인쇄되어 나오는 그 시간이 몽땅 증발한 것이다. 더 빠르고 더 쉽고 더 날것의 상태다. 온라인연재는 또, 이인삼각 달리기 같은 거여서 작가 혼자 뛸 수가 없다. 나는 오랫동안, 밤샘을 하지 못한다고 믿어왔는데, 지난 계절에는 밤을 통으로 열어둔 적도 꽤 있었다. ‘월요일과 목요일에 <해적판을 타고>로 아침을 시작한다.’ 던 댓글이 떠올라서였다. ‘혹시나 싶어서 새벽에 들어왔는데 원고가 있어서 반가웠다는 댓글은 약속한 시간보다도 좀더 일찍 원고를 올리도록 부추겼다.

 

  언젠가부터 겨울이 오는 걸 꽤 두려워했는데, 일조량 때문일까 겨울엔 좀 무기력해졌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에 점등했던 불을 끄는 순간 내 기분도 서서히 갈변되는 것 같았다. 그런 계절의 한복판에서 연재를 시작하게 된 것이 내 스스로도 참 의아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이 연재가 겨울을 견디게 했다. 3+1+3의 계산법으로 지내오는 동안 어느새 겨울을 건너왔던 것이다. 매일 아침, 갓 구운 빵을 내놓는 기분이 이런 걸까 하면서.

     

(3+1+3Vogue 4월호 수록)

 

  

    

#

잘 지내시지요, 윤고은입니다.

최근 해적판을 타고연재에 대해 쓴 글이 있어 가져왔어요.

 

지난 목요일에 마지막 이야기를 올렸고,

이제 월요일. 같은 패턴으로 예스블로그에 들어왔지만

목요일과 월요일 사이에 엄청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 기분입니다.

아마 이야기를 마무리했기 때문이겠지요.

꽃이 올 때까지 함께 산책하자고 말씀드렸는데,

아침 꽃과 저녁 꽃이 다르더라고요. 점점 더 활짝. 정말

꽃이 제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뒤로 빠지라는 손짓을 하네요^^

 

 

연재 중에 공간 배경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댓글을 봤는데

혹시 방해가 될까봐 답을 달지는 못했고요.

이제 말씀드리자면,

풍력발전단지의 이미지는 탄도항(경기도 안산시 단원구)에서 빌려왔어요.

물론 풍송동이란 지명과, 그 동네의 분위기는 상상의 산물이지만

갯벌과 등대, 바닷길, 풍력발전기는 실제로도 존재하는 풍경이에요.

 

풍력발전기를 담고 싶어서 제주도부터 강원도까지 여러 곳을 고려했는데 

탄도항, 세 기의 소박한 풍력발전단지가 마음에 들어왔답니다. 

 

 

풍력발전기 날개의 그림자 같은 건 그곳에 가서야 발견한 장면이었습니다. 

날개의 그림자가 리드미컬하게 돌아가는 걸 보며 위안을 받았어요.

 

 

두두두두 소리를 내는 생떽쥐베리도 제가 어느 오후, 눈에 담아둔 풍경이고요. 

 

#

해적판을 타고, 는

절반은 카페에서, 절반은 집에서 썼습니다.

 

 

주문하는 커피 사이즈에 따라 그날의 작업의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쓰다보면 커피가 맹독성 우물처럼 보일 때도 있고, 너울성 파도처럼 위험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카드도 만들었죠.

 

그리고 집에서는,

제 책상 위를 보니 차마 사진을 찍을 수가 없어서 

책상 위의 물건 중 상징적인 걸 딱 하나만 올리기로 했습니다. 

 

 

 

고무망치입니다.

아마도 조립식 가구 뭔가를 주문할 때, 이 망치를 열심히 두드렸던 것 같은데 

그게 왜 제 책상에 무임승차를 하고 있었을까요.

제 책상 위가 정글 같다는 걸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고무망치 캐스팅!

결과적으로 이 고무망치도 소설을 함께 쓴 걸로요. 몰래!

고무망치는 확실히 소음을 적게 동반하지만, 그래도 힘을 실어 전달합니다.

고무망치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건 작위적일 수 있으니, 관두기로^^

   

 

#

해적판을 타고, 는 다음 계절에 책으로 나올 거예요. 

지난 계절부터 함께 산책해주신 분들 덕분에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댓글을 볼 때마다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막연히 기다리다가, 답장을 받는 느낌이었어요.

 

봄에 헤어지게 되어 그래도, 다행이에요. 

계절 타령이라니, 좀 감상적인가 싶기도 하지만 

겨울을 통과할 때마다 어떤 강을 건너는 느낌이 나서요. 

세 달간의 산책 함께 해주신 분들, 건강하시고요.

 

어떤 산책은 이렇게 마무리되지만

산책자들은 늘 걷고 있으니, 언제든 마주치겠지요^^

편안한 봄밤 보내세요.

 

-윤고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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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26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4-06 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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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만의 사전에 원심력을 추가했다. 우리 마당의 흙에서 비소 입자를 걸러낼 때 사용된 힘이 원심력이라고 했는데, 원의 중심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간다던 그 말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원심력

-마당을 벗어나는 방법

 

생각해보면 원심력에도 이중적인 의미가 있어서, 밖을 바라보고 있지만 여전히 그 중심점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비로소 그 마당을 떠나게 되었지만, 마당을 아주 잊을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어디로 가든 마당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졌는지를 가늠하며 계속 마당을 의식할 테니. 그런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이사 갈 새 집은 옛 마당에서 차로 40분쯤 걸리는 곳에 있다고 했다. 더 멀리 가지 못한 건 식구 모두가 얽혀있는 기존의 동선 때문이었다. 그 중에는 아빠의 센터 복직 문제도 있었다.

 

나는 아빠가 센터로 복귀하는 걸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다시 센터에서 같은 일을 하는 걸 상상하는 게 어려웠으니까. 아빠에게 센터가 그 저장고 같은 공간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 그러나 아빠는 센터로 돌아갔다. 소장3의 말처럼 혁신을 믿어서일 수도, 마티할머니 말대로 일말의 양심때문일 수도, 우리 셋이 빨간 신호등처럼 서있어서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관성일지도 몰랐다. 어딘가를 아주 떠난다는 게 내 생각보다 훨씬 쉽지 않은 것일 수도. 우리 가족이 굳이 사택을 떠날 필요가 없어졌지만, 이사는 통과의례였다. 이사할 날짜를 잡아 놓으니 그제야 긴 터널이 끝난 느낌이 들었다.

 

   둘째가 학교에서 누가 필기 빨리 하나시합을 하다가 선생님한테 혼났다는 얘기를 했다. 옆에 앉은 애들이랑 칠판을 보면서 누가 빨리 필기하는지를 겨뤘는데 우승자는 둘째였다. 둘째는 어마어마한 비결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했다.

 

칠판만 보면서 쓰면 되는 건데! 으흐흐. 노트 확인하려고 고개를 숙이면 늦거든. 앞만 봐야 돼.”

 

둘째는 승리의 흔적을 보여주었는데, 엄청난 악필이 노트 위를 너울성 파도처럼 휩쓸고 있었다. 노트를 벗어나 책상 위로 추락한 글자들도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둘째는 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자들과 나란히 선생님으로부터 꿀밤을 맞은 게 억울하다고 했지만 혼날 만도 했다. 얘기를 들으면서는 뭐 그런 괴상한 시합을 하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리 낯설지도 않았다. 요즘 내가 딱 그렇게 살고 있었다. 앞만 보고, 경주마처럼.

 

터널을 통과한다는 생각으로 가을을 보냈다. 숨을 참고, 풍경을 보겠다는 생각은 접고, 오로지 저 앞에 보이는 출구 형태의 빛만 보며. 매미가 벗어놓은 껍질을 밟는 건지, 낙엽을 밟는 건지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한 계절을 통과했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겨울이었다. 모든 게 헐벗는 계절, 인간만 껴입는 계절. 겨울 역시 터널 통과하듯 달리면 되는 것 아닌가. 틈새 없이 짠 시간표가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러나 가끔 내게 똑똑, 노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기어코 내 고개를 돌려 옆을 보게 만드는 사람들, 시선을 맞추는 사람들. 이를테면.

 

   첫눈이잖아!”

 

   뒤뒤의 메시지를 받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거리에 눈이 어지럽게 쏟아지고 있었다. 함박눈이었는데 세상에, 첫눈이 아팠다. 마치 누군가를 구타하듯, 펑펑, 이었다. 여린 사람들은 몸 안쪽까지 멍이 들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걸어간다. 가장 약한 부위를 서로에게 밀착한 채로.

 

   열두 살 이후로 나는 책 안에 나뭇잎 같은 걸 넣지 않았다. 단지 나뭇잎이 아니어도 책속에서 압사하는 게 많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책장을 하나씩 넘기면 지나간 면은 모두 공평하게 응달이 되고, 누구든 면과 면 사이에서 순식간에 압사할 수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책 사이에서 압사한 사람을 한 명 쯤 알고 있는 것도 같았고.

 

   루에 대해 남은 사람들은 여러 얘기를 했다. 책임, 압박감, 충동, 애인과의 결별, 여러 요인들로 루의 선택을 설명해보려고 했다. 아마 집계조차 되지 않겠지만, 나는 책 때문이라고 믿었다. 이사 갈 때는 책도 버려야한다고 말했던 루, 머릿속에 책을 넣으라고 말했던 루, 그가 결국 머릿속 두 페이지 때문에 죽었을 거라고 말이다. 루의 선택 때문에 나는 제거된 두 페이지에 대해서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 켜는 남자가 명령을 이행하다가 고장 나는 결말을 상상했다. 어린왕자가 스카프로 가로등에 목을 거는 모습을 상상했다. 어느 쪽이든 흉기가 될 법한 결말이었다.

 

   시간이 좀 지난 후, 나는 부산 보수동의 한 서점에 있었던 그 해적판의 원형을 이미 사간 사람이 뒤뒤라는 것을 알았다. 나와 관계없이 뒤뒤도 미완성의 책을 읽었을 테니 궁금했겠지. 그렇게 가까운 곳에 진짜 결말이 있다고 생각하자 마침내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 마지막 책장이 내가 기어코 열어보아야 할 어떤 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뒤뒤가 그 책을 내 앞에 가져오자 단지 종이 한 장을 넘기는 게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그 다음 페이지가 나를 달랠 수 있을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라졌던 두 페이지는 다시 돌아온 두 페이지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두두두두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글라이더. 그리고 그걸 바라보며 걷는 두 사람이 있었다. 갈매기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앉아있고, 저만치서 풍력발전기의 그림자가 시계 바늘처럼 돌아가는. 낯익은 풍경이었다. 오늘 분위기로 봐서는 저 사람 생떽쥐베리 쯤 되려나, 뒤뒤가 그때 그렇게 말했었지. 사라진 두 페이지가 이렇게 뒤뒤 식으로 되돌아온 거였다. 글라이더의 입에서 나온 몇 줄 대사가 글자로는 전부였는데 위로(up)! 위로! 위로!” 였다. 위로라는 말의 반복이 단지 방향성만을 나타내는 게 아닌 것 같아서, 정말 마음을 다하는 위로인 것 같아서 나는 울다가, 웃었다.

 

   편집이 아주 감쪽같지는 않았다. 새로 끼워 넣은 두 페이지의 재봉선이 또렷하게 보였다고나 해야 할까, 종이 재질과 이음새가 그랬다. 그래도 그 삽화의 디테일을 살피는 맛이 있었다. 여자애와 남자애의 차이는 머리 길이와 귀의 길이 정도였는데, 어떤 면에서 남자애의 축소판처럼 생긴, 그 여자애의 가방도 볼 만 했다. 열린 가방 사이로 컵라면이 반쯤 삐져나와 있었다. 이런 깨알 같은 뒤뒤! 엉뚱했던 건 삽화 속의 날짜였다. 삽화 속에는 2078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2078년이라니! 우리의 산책은 그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너 내가 날짜 세지 말랬지!”

  나는 괜히 그런 사족을 붙였다. 뒤뒤는 핫팩으로 데워둔 것 같은 손으로 내 볼을 만졌다. 왜 만지냐고 했더니, 뒤뒤는 단지 손에 뭐가 좀 묻어서 닦은 것뿐이라고 해명 아닌 해명을 했다.

 

   그래? 나도 손에 뭐가 좀 묻은 것 같은데.”

   그러고서, 나도 뒤뒤의 볼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내 손바닥이 좀 차가울 것 같아서 미안했는데, 뒤뒤는 , 시원해.’라고 했다.

 

   겨울과 봄 사이, 우리는 이삿짐을 꾸려야 했다. 마침 어느 도서관에서 책을 받는 행사를 한다는 얘기를 들어서, 나는 그곳으로 책을 많이 보내기로 했다. 언젠가 누군가가 했던 조언대로, 책을 덜어내기로. 라면박스로 스무 개가 넘는 분량을 포장해두었다. 그 안에 루의 어린왕자도 넣었다. 책을 그렇게 큰 박스에 담아두면 운반하기가 힘들다는 것까지는 미처 몰랐다. 책을 받는 쪽에서 소형 트럭을 보내주기로 했는데, 약속에 착오가 있어서 하필 우리 셋뿐일 때 트럭이 왔다. 엄마가 엘리베이터 없는 4층이라고 분명히 말했다는데, 책을 가지러 온 아저씨는 날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다고 말을 했어야지!”

 

   가만히 보니 아저씨보다는 할아버지뻘이었는데, 4층 계단을 올라온 것만으로도 벌써 힘을 다 소진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두 차례 박스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더니 이렇게는 안 되겠다며 새로운 제안을 했다.

 

   저기 말이지, 내가 밧줄에 바구니를 매달아서 내릴 테니까 학생이 저 밑에서 그 줄을 잡아끌어봐. 그럼 트럭 위로 자연스레 바구니가 내려가게 된다고, 알겠지?”

 

   갑작스러운 청유형 문장에 내가 응하기도 전에 아저씨는 벌써 베란다 창을 열고 있었다. 그리고 밧줄을 저 밖으로 늘어뜨리더니 이쪽 끝에는 노란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매달았다. 바구니 안에 두툼한 책 박스 하나를 담아서 베란다 창틀 위로 올리는 과정에서 벌써 창틀이 휘청거리는 듯 했다.

 

   저 아래에서 줄만 트럭 쪽으로 살짝 잡아끌면 되는 거야. 예전엔 다 이렇게 했어. 계단으로는 이거 다 못 옮긴다고, 학교에서 도르래 원리 배웠지? 진짜 도르래가 있다면 좋겠지만 없으니 이런 식으로.”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전혀 이 일에 동원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결국 우리 셋은 그가 시키는 대로, 계단을 내려가 1층 바닥에 섰다. 아저씨가 바구니를 아래로 내리기 시작했다. 바구니가 퉁퉁, 하고 3층 창문을 건드렸다. 2층 창문을 건드렸다. 2층인지 3층인지 한 사람이 베란다 창문을 열더니 위아래로 두리번거렸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이었을 것이다. 책이 밧줄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덜컹거리면서 한 층씩 낙하하는 책 더미. 한 세계가 쿵쿵거리며 내려오고 있었다.

 

   지금, 지금!”

   그의 고함소리에 놀라 밧줄을 놓칠 뻔했다. 거대한 책 아래 압사되거나, 그 책들이 아랫집의 유리창을 박살낼 것 같은 공포로 나는 완전히 질려 있었다. 우리가 밧줄을 당기자 바구니가 트럭 근처로 착지했다. 트럭 위는 아니었지만 4층 베란다 밖으로 고개를 내민 아저씨는 손으로 오케이 표시를 해보였다.

   그렇지! 아주 좋았어!”

 

   그 말과 같은 타이밍으로 내 입에서 못하겠어요. 안 할래요!” 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막내와 둘째는 은근히 이 상황에 몰입하고 있었지만, 이건 미친 짓이었다. 엄마와 겨우 통화가 되었다. 그 통화 후에야 아저씨는 다시 도르래를 그만두겠다고 했지만, 어처구니없게도 동생들이 뭔가를 쑥덕쑥덕하더니 아저씨에게 딱 한번만 더 하자고 제안했다.

 

   이번에는 진짜 트럭 위로 올려둘 수 있을 것 같아요!”

   둘째는 그렇게 말했고

 

   그 바구니에 제가 올라타면 안돼요?”

   막내는 이렇게 말했다.

 

   아저씨는 막내의 바구니 탑승은 가볍게 거절하면서도 그 시스템의 효용을 알아봐준 사람이 있어 기분이 좋은 듯 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한 번 더, 특별요청에 따른 바구니를 4층 베란다에서 내려 보냈다. 나는 마지못해 밧줄의 한 끝을 잡고 있으면서도, 관리실에 신고해야 할까 생각했다. 항의하는 주민이 없는지도 살펴야 했다. 산만하게 눈을 돌리는 사이에 마침내, ! 바구니는 트럭 근처에 가지도 못하고 더 먼 지점에 착지했다. 1m 쯤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바람에 책 박스의 일부가 터진 채로.

 

   나는 눈을 의심했다. 책 더미 안에서 뭔가가 바스락바스락, 구겨지는 소리가 나더니 놀랍게도 활자들이 떼를 지어 밖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개미처럼, 지렁이처럼, 모든 살아있는 것들처럼 화단으로. 그걸 정말 벌레로 본다면, 내가 목격한 것 중에 가장 크고 징그러운, 그러나 정교한 종류였다. 활자들이 도마뱀처럼 꼬리를 끊으며 탈출했고, 남은 책은 마치 텅 빈 마당 같았다. 처음의 그 마당만 두 페이지로 덜렁, 남아 있었다.

 

   동생들이 다가와 그 책을 보았다. 표지야 어떻든, 수많은 면으로 이루어진 책의 속살은 대부분 밝은 색이다. 책의 속살은 일종의 반사판 역할을 하는 것이다. 펼쳐진 책이 그걸 바라보는 얼굴들을 환하게 만드는 걸, 나는 꿈처럼 지켜보았다.

 

 

 

 

    

-

 

 

(월요일 새벽에 인사 드리러 다시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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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25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4-03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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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임자로 정리된 사람들은 풍송동 사람들에게 정신적, 물질적으로 최선을 다해 보상하겠다고 말했고, 그 방편 중 하나가 그 일대를 사들이는 거였다. 우리도, 마티할머니도 집을 팔기로 했다. 비소는 공기 중 어디에나 떠도는 것이며, 땅을 파서 그런 게 안 나오는 곳 있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 는 댓글이 따라붙을 만큼, 우리 골목 사람들이 받은 보상이 너무 과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그러나 선택하라고 한다면 누구도 애초에 아무 일이 없는 쪽을 택하지 않을까. 위안이 되는 건 내가 자라왔던 그 골목이 거대한 꽃밭의 일부가 될 거란 사실이었다. 센터와 지자체가 함께 세운 재건계획 중에는 2만 평에 가까운 해바라기밭도 포함되어 있었다.

 

   골목 뿐 아니라, 우리 가족도 재건 중이었다. 엄마는 우리의 새 집을 알아보고 있었고, 센터에서는 아빠에게 복직을 제안했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다시는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도와달라면서아빠는 고민에 빠졌다.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달라고, 소장3이 말했다. 그는 우리 가족을 사무실로 초대해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흙은 세 차례에 걸쳐 정화 작업을 마쳤습니다. 풍송동 일대를 해바라기밭으로 조성하는 게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고요. 해바라기가 중금속으로 오염된 토양을 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도 하고, 또 이 시의 상징이기도 하니까요.”

 

   센터의 새 임원 몇 명, 그리고 구청에서 몇 명, 기자 몇 명도 함께였다. 마티할머니도 있었다. 어느 소속이었는지는 몰라도 누군가가 체르노빌에서도 해바라기밭이 오염된 땅을 정화하는데 효과적이었다고 말했다. 해바라기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는 잘 전달되었지만, 자칫 의도하지 않은 것도 읽힐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시비를 걸자면 충분히(“그러니까 여기를 체르노빌처럼 만들었다는 거죠?”) 걸 수 있었지만,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 눈치 없는 어른은 자신도 어릴 때 흙을 밟으며 자라서 마당이 얼마나 귀한지 안다고 했다. 양계장을 했던 터라 닭들의 생태도 아주 잘 알았다고 했다. 분위기를 부드럽게 한답시고 이런 말을 꺼내기도 했다. 목 잘린 채 돌아다니던 닭 정도는 부지기수로 봤다던가. 그 입을 좀 때려주고 싶었다. 섬세하지 못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애초에 별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실망하지도 않았다. 다만 시끄럽고 피곤할 뿐이었다.

 

   해바라기는 그렇게 시끄러운 마음을 정화하는데도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지난 계절의 끝에 봤던 그 해바라기들을 떠올려봤다. 그게 아름다웠던 이유는 군락을 이루고 있어서였다. 2만 평이라니,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노란 무리가 빳빳하게 고개를 쳐드는 상상을 하는 건 좋았다.

 

   유나 생각은 어때요? 마음에 들어요?”

   소장3은 아까부터 우리에게 존댓말을 했다.

 

   좋아요. 그런데, 어떻게 믿어요? 이렇게 될지, 아닐지.”

 

   내 말에 허허, 하고 소장3이 웃었다. 다른 누군가가 여기에 얼마나 많은 예산이 들어갔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얼마나 많은 인력과 신기술이 투입되었는지도.

 

   내가 말했다.

   남의 집에 물을 엎질렀으면, 그 자리를 닦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그걸 천 원 짜리 걸레로 닦든 천만 원 짜리 기계로 닦든, , 생색낼 건 아니죠.”

 

   엄마가 내게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내 입은 오히려 조금 늦게 열린 편이었다. 식도 아래, 배꼽 아래, 항문 아래, 모르겠다, 인간에게도 보이지 않는 뿌리 같은 게 있다면 그 뿌리에서 부릉부릉, 시동을 거는 느낌이 나고 있었다.

 

   중딩들도 그 정도는 아는데요.”

 

   허허, 하고 소장3이 또 웃었다. 몇 사람이 따라 웃었고, 몇 사람은 웃지 않았다. 몇 사람은 나를 음지에서 지나치게 웃자란 식물처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은 굳이 분류하자면 안타까움이나 동정이나 연민에 가까웠다.

 

   얘가 책을 좀 좋아해서.”

   엄마가 또 그 말을 했다.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엄마가 소장2의 차를 들이받은걸 잊었냐고, 그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았다. 그러니까 이렇게 산통 깨는 말을 하는 건, 아니 할 말은 해야 하는 건, 책 때문이 아니라 유전자 때문인 것이다.

 

   따님이 아주 야무지네요, 공부도 잘 하죠?

   목 잘린 닭 얘기를 한 어른의 말이었다. 나는 공부 못한다, 공부 못 하면 이런 말도 못 하냐고 말하려 했는데, 둘째가 내게 재빨리 귓속말을 했다. 귓속말임에도 잘 들리지 않았지만,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종류의 말 같았다.

 

   이번에는 소장3이 내게 눈을 맞추며 말했다.  

   못난 어른들이 한 일에 대해 진심으로 부끄럽게 느끼고 있어요. 미안합니다. 상처가 컸을 거예요. 제가 이미 벌어진 일들, 그리고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책임지고 처리할 거니 믿고 맡겨주겠어요?”

 

   소장3은 확실히 소장2보다 나아보였지만, 뭐든 확실한 게 좋았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저기. 명함 한 장만 주세요.”

 

   명함?”

 

   소장3은 아직 새 명함이 나오지가 않아서 어쩌지, 하고 중얼거리더니 내게 옛 명함을 내밀며 메일주소나 휴대전화 번호는 똑같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왔다더니 소장3의 옛 명함에는 알파벳이 가득했다. 내게 필요한 건 현재의 자리여서, 옛 명함은 불필요했다. 소장3은 준비물을 가져오지 않아 혼나는 학생 표정이 되었다. 그는 지금의 명함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사과한 후, 명함이 나오는 대로 바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엄마와 아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두 분이 너 집에 가서 혼날 줄 알아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아서 애초에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때 저 책상 위에 놓인 명패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소장 김종수라고 적혀 있었다. 명함은 아직 오지도 않았으면서 명패는 뭐 저렇게 빨리 와 있담,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명패가 내게 윙크를 해오는 것 같았다. 저기서 나를 기가 차다는 듯이 보고 있는 몇몇 어른들 때문에 더 보란 듯이, 이 주도권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게 피구라면 지금 공은 내 가슴팍에 와 있는 것이고, 나는 우리 편을 지켜야 했다. 내가 이 팀의 에이스인 것처럼, 단지 생존자로 살아남은 게 아니라 상황을 전복시킬 히어로처럼,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냈다.

 

   명함 말고, 그럼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소장3물론입니다.’ 라고 대답했는데, 내가 저쪽으로 가서 그의 책상 위에 있는 명패를 들고 오자 다소 놀란 듯 했다. 내가 한손으로 그 명패를 소장3의 턱 아래에 두고, 다른 한손으로 휴대폰 버튼을 조작하려 하자 동생 둘이 벌떡 일어나 명패의 양끝을 잡으려고 했다. 소장3은 허허, 하고 웃었다. 엄마와 아빠는 어쩔 줄을 몰라 했는데, 그때까지 별 말도 없던 마티할머니가 이 상황을 간단히 정리해버렸다. 꽤 새겨들을 만한 말이었다.

 

   웃으쇼. 이왕 찍는 거.”

 

   나는 열심히 내 폰에 소장3의 사진을 담았다. 그의 상반신과, 돌에 새긴 직함과 이름을. 찰칵, 찰칵, 30장은 넘게 찍은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내게 뭐라고 하면 아니, 이게 총도 아닌데 뭘 그러세요.’ 라고 대꾸하려고 했지만, 준비된 상황까진 흘러가지 않았다. 그 즈음 되었을 때는 누구도 우리를 말리지 못했다. 소장3은 할머니의 주문대로 웃고 있었고, 심지어 본인 스스로 명패를 들고 있기도 했다. 나는 촬영을 끝낸 후 이렇게 말했다.

 

   이래야 안심이 돼서요.”

 

   사실이었다. 휴대폰에서 나는 셔터음이야말로,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을 박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도왔다. 다행스러웠다. 뭔가 도장을 찍는 것 같지 않은가. 이 순간에 대해서. 나중에 둘째가 휴대폰 속의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근데 이걸로 뭘 하게?”

 

   기억해야지. 우린 똑똑히 보고 듣고 기억해두면 돼.”

 

   ?”

 

   지금을.”

    

 

 

(다음이 마지막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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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24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30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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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이 끝났다. 그 골목에는 풍송동 재건 공사라는 안내문이 붙었다. 재건이라는 말이 불러오는 이중적인 감정(우리는 이미 무너졌고, 또 일어설 것이다)이 지금 내 마음과 겹쳤다. 제일 먼저 허물어진 건 우리집 담벼락이었을 것이다. 거기엔 3년된 채송화부터 슈퍼지렁이, 지롱이가 그려져 있었고, 내가 작게 끄적였던 문장-‘안에 사람 있어요도 있었다. 그걸 적을 때의 마음을 떠올려보면 지금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이제 안에 사람 있어요를 떠올리면 무서워지고 슬퍼졌다. 혹시 루도 그걸 봤을까.

 

  공사 과정에서 좋은 뉴스와 나쁜 뉴스가 생겼다. 나쁜 뉴스가 더 생길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쁜 뉴스를 먼저 듣기로 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희망이 꼴찌로 나온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니까.

 

  나쁜 뉴스는 폐기물을 담은 컨테이너박스가 지하 10m가 아닌 지하 7m 지점에 있었다는 거였다. 생각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습니다-차 조수석에 탈 때마다 눈에 들어오던 그 활자들이 떠올랐다. 사이드미러마다 적혀있는 바람에 도로 위를 가장 자주 달리는 문장이 된  셈인데, 그 내용이 운전할 때만 적용되는 건 아니었다.

 

   좋은 뉴스는 지하에 묻혀있던 게 자루들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래에 있던 컨테이너박스를 들어 올렸을 때, 그 안에는 이 일과 관련된 서류 한 장이 마치 택배 운송장처럼 들어있었다. 지퍼백 안에서 습기와 시간과 싸우면서. 아빠는 본 적도 없는 서류였는데, 거기엔 모두 세 사람이 서명한 흔적이 있었다. 한 명은 이전에 좌천된 소장이었고, 다른 두 명도 임원급이었다. 루가 이 모든 일의 책임자였다는 식으로 말하던 센터의 주장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어서 기자가 흥분했다.

 

    오래전에 좌천된 소장(소장1이라고 칭한다)은 자신도 보고를 받았을 뿐, 누가 지시를 처음에 내렸는지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다른 두 명도, 실제로 자루를 육안으로 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단지 그들은 보고를 받았고, 그 비소로부터 한참 떨어진 책상에 앉아 보고를 더 아래로 전달했을 뿐이다. 다음 칸으로, 또 다음 칸으로 전달하는게 업무의 전부라고 믿는 게 편했을지도. 브레이크 페달이 오래 전에 거세된 사람들처럼. 그들은 자루를 본 적도 없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자루들이 그들의 이름표를 달고 나옴으로써 출처를 모두에게 알린 셈이 되었다.

 

   서류를 그 안에 넣어둔 이가 누구였을까, 그것도 궁금했지만 종이 몇 장이 뭘 바꿀 수 있을까도 궁금했다. 나는 약간 회의적인 기분이 되어 있었는데, 그 종이 몇 장이 흐름을 바꾼 게 예상 밖이었다. 그 서류가 조금만 더 빨리 나왔더라면, 그랬다면. 그러나 그건 결국 자루를 들어내고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서류에 서명한 사람들을 포함해서 두어 명의 책임자가 더 수면 위로 끌려나왔다. 슈퍼지렁이를 모른 척 했던 소장(소장2라고 칭한다)이 자신이 부임하기 전에 이미 벌어졌던 일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으나 그 역시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은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센터의 임원진이 모두 교체되었고, 소장(소장3이라고 칭한다)이 새로 왔다. 센터에 새로 부임한 소장은 지금까지 악순환된 고리를 끊기 위해 노력할 거라고 말했다. 뒤틀렸던 모든 걸 바로 잡아 지역민의 신임을 얻는 걸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고도 말했다. 그는 아빠의 사표에 어떤 외압도 있었음을 충분히 짐작한다면서 우리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

 

   가끔 두 동생이 부러웠다. 루가 죽은 걸 몰랐고, 어차피 루의 빈자리도 느끼지 못할 테니까. 저 앞 동 어느 창문에서 더 이상 아무런 불빛도 새어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프지도 않을 테고. 그러나 완벽한 밀폐라는 게 가능할까, 냄새의 입장에서 그건 단지 방향 같은 것이었다. 정말 완벽하게 밀폐할 수 있는 건 없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막내의 그림 때문이었다.

 

   언젠가 안내문으로 본 적 있었던 어린이 그림대회가 열렸고, 많은 유치원들이 단체로 참가한 모양이었는데, 놀랍게도 막내가 2등을 했다. 수상작을 포함한 몇 점의 그림들이 크리스마스 때까지 등대전망대 1층에서 전시될 거라고 했다. 하필이면 그림대회의 주제가 어린왕자라는 게 좀 공교롭긴 했지만, 막내의 수상소식은 우리 식구들에게 오랜만에 싱거운 농담을 하게 했다. 아빠는 어릴 때 꿈이 화가였던 적이 있었다면서 아빠의 영향일 거라고 말했다. 엄마는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을 전공하고 싶었던 사람이라고 했다. 그러니 엄마의 영향일 거라는 말이었다. 막내는 사랑 받는 걸 제 스스로 인식하고 있는, 그런 표정을 지었다. 사실이 그렇기도 했고.

 

   전시회가 시작되고 첫 주말, 우리 식구는 모두 차 한 대에 올라타고 등대전망대를 향해 갔다. 가는 동안 우리는 전시회가 왜 크리스마스 때까지 지속되는지에 대해 얘기했다. 별로 중요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둘째가 궁금해 했고, 우리에겐 이런 소소한 질문이 필요했다. 아빠는 도시의 레이아웃이 어쩌고, 하고 얘기했다. 무슨 공사 때문에 내년 초부터는 달라지는 것이 있으니, 그에 맞춰 올해 말까지만 하는 거란 얘기였다. 엄마는 보통 세 달 정도씩 많이 하더라, 고 말했다. 아무래도 내 것이 정답인 듯 싶었다. 나는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의 삽화가 원래 크리스마스 선물로 시작되었다는 말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거지! 너 산타가 된 거야.”

 

   막내는 어깨에 뽕이라도 집어넣은 것처럼 한껏 우쭐해졌는데, 한 시간 후 나는 크리스마스와 연관 지은 걸 후회했다. 막내의 그림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적합하지 않은 그림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보는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 가족에겐, 적합하지 않았다.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 막내가 그린 어린왕자는 필요 이상으로 길게 늘어진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아니, 그건 두르고 있다기보다는 스카프에 매달려 있다고 해야 할 정도로 기묘했다. 어린왕자는 허공에 떠 있었고, 절대 날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심사위원은 그 그림을 두고 어린왕자의 비상을 익살맞게 표현했다. 아이다운 발상이 돋보이는 그림이라고 평했다는데, 내게는 저 노란 스카프가 흉기처럼 느껴졌다.

 

   그림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는데, 내 의지가 아니라 거기에 갇혀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저렇게 천에 목이 졸려 죽은 사람을 둘 알고 있었다. 하나는 이사도라 던컨. 그녀는 막 출발하는 자동차 바퀴에 스카프 자락이 걸려서 죽었다. 다른 하나는 우리 저장고 안의 그 사람.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 엄마가, 엄마가 가까스로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동안 나는 해적판의 원형을 찾고 있었다. 해적판이라는 것 자체가 불법 복제된 것인데, 어떤 사람들에겐 그 해적판이 고스란히 원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나와 뒤뒤에게 그랬다. 우리는 서울부터 부산까지, 중고책 파는 곳에 글을 남기거나 전화를 걸어보곤 했고, 그렇게 어린왕자 해적판을 가진 곳들의 지도를 나름대로 그려보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그날 이후 멈췄다. 나는 루가 죽은 이후로 그 책을 찾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그가 일부러 버렸다는 두 페이지에 대해 알기가 겁났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뒤뒤가 드디어 찾았어!’ 라고 했을 때 그냥 묻어두자고 했다. 알고 싶지 않았다. 두려움은 호기심도 잡아먹는다.

 

   그런데 가끔은 내가 거부한 페이지가 바람에 날려서 눈앞에 떡하니, 그 두 장이 세계의 전부인 양 펼쳐지기도 했다. 전혀 예상 못한 경로로. 막내는 누구의 죽음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그 애의 그림을 보면 우연과 천진난만함이 빚어내는 잔인함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막내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엄마에게 크게 혼이 났다. 신나서 방방 뛰다가 집의 화분 몇 개를 엎어버렸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닐지도 몰랐다.

 

   우리는 이제 각자 마음에 구멍 하나를 뚫고, 저장고를 만들었다. 끌어올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을 그 안에 넣고, 자물쇠를 걸었다. 물론 도로를 달리는 그 문장처럼, 모든 게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을 가능성은 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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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23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27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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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둥근 문은 이 세계의 마지노선인 양 꿈쩍도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문을 억지로 뜯어내는 동안, 그 너머가 완전히 진공상태 아닐까 생각하게 될 정도였다. 우리의 자물쇠들이 바닥에 지푸라기처럼 가볍게 흩어져 있었는데도, 나는 저장고 안에 누군가가 들어갔을 거라는 생각을 얼른 하지 못했다. 문을 뜯어낸 다음, 아빠가 먼저 저장고 안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문을 뜯어내는 걸 도왔던 구청 직원, 엄마, 그 다음 나. 우리는 기차처럼 일렬로 내려갔는데, 아빠가 멈춰 섰다. 그 앞에 이미 탈선한 객차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아빠의 고함에 나는 계단을 다 내려가지도 못했다. 지하도 아니고 지상도 아닌 채로, 엉거주춤 멈춰 선 그 찰나에도 내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검은 물체-기둥처럼 보였다. 우습게도, 컨테이너박스로 급조된 그 저장고 안에 기둥 따위가 있을 리 없는데도, 나는 그걸 검은 기둥으로 봤다. 엄마가 나를 돌려세우며 내 눈을 가렸고, 내 등을 반대쪽으로 떠밀었고, 그렇게 암전이 됐다.

 

   그 다음부터는 연속적인 시간이 아니라, 시간이 의도적으로 잘라낸 파편을 줍는 것 같았다. 모든 게 툭, , 끊어졌다. 내 머릿속에는 진자 운동같은 단어가 남았는데, 왜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단지 무언가가 조금씩 좌우로 움직이던 느낌. 아니다. 그건 기둥이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엄마가 119에 전화를 걸 때까지도, 나는 저 안에 매달린 게 사람이라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건 기둥이었다. 제발, 기둥이었다. 곧 저장고 안에서 쿵,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언젠가 이 마당으로 매미껍질이 추락하던 소리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다. 배롱나무가 그 소리를 기억한다는 듯 나를 쳐다봤다. 엄마가 나를 향해 뭐라고 말했는데 세상에,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마티할머니가 내게 다가와 뭐라고 하는 것도 역시 소리 없는 율동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할머니는 입술도 아주 얇고 입도 아주 자그마했는데, 입을 아주 크게 확장하고 있었다. 주름살이 다 없어질 만큼 크게, 크게, 그러다가 갑자기 오므라들며 소리를 냈다. 내 귀를 뚫고 들어올 만큼 또렷하게 그 말이 들렸다.

 

   우리 집으로 가자.”

 

   시간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의 지배를 받는 걸까. 막혀있던 배수구가 뻥 뚫려 고인 물이 빠져나갈 때처럼 시간이 빠르게 소용돌이쳤고,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줄기가 가느다란데도 잘 흔들리지 않는, 꼬장꼬장한 나무 같았다. 그 나무를 이정표 삼아 우리 셋은 마당을 벗어났다.

 

   마티할머니네 소파는 아주 낡았으니, 오래 전 골목 앞에서 못된 언니들을 만났을 때도 나는 이 소파에 이렇게 앉아 있었겠지. 지금은 두 동생도 함께였다. 저장고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동생들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불안이란 건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코로 맡는 것에 가까웠다. 어떤 기운을 미리 감지한 것인지 둘째와 막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막내가 도둑이야?’ 하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구급차가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둘째가 누가 다친 거야?’ 하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치지 않았다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나 때문이야? 문 꼭 잠그고 나왔는데. ?”

 

   둘째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우리 셋이 이 골목에 다녀가고 며칠 후에 또 다시 이 골목에 왔었다고 말이다.

 

   혼자 여기 왔었다고?”

 

   현철이랑, 승호랑, 여기서 만났어.”

 

  둘째의 이 동네 친구들이었다. 나는 둘째가 혼자서 풍송동에 다녀갔다는 게 믿기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유독 꼼꼼하게 저 집에서 이 집으로 오는 길에 대해 되새김질했던 게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다시 한번 지롱이를 잡으러 왔었다고 했다. 결국 잡지는 못했지만. 둘째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정말이야, 자물쇠도 세 개 다 똑바로 확인했고, 열쇠도 애들이 망봐줘서 사람들 없을 때 내가 숨겼는데.”

 

   알아. 너 잘못 아닌 거.”

 

   나는 잠시 후에 이렇게 덧붙였다.

 

   며칠 전에도 아빠가 다녀가셨는데 그때 멀쩡했대. 걱정하지 마.”

 

   둘째의 표정에 안도감이 어렸다. 아빠가 다녀가신 건 거짓말이었지만, 둘째가 문을 허술하게 열어두고 나온 게 아님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 실은 나도 저장고 문을 열어봤던 것이다. 불과 며칠 전에. 그러니 오늘 이전에 저 저장고를 들여다본 사람은 내가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뒤뒤와 함께였다. 나는 뒤뒤에게 저장고 안에 웅크린 우주를 보여주고 싶었다. 문을 열면 빛의 통로를 따라 먼지들이 은하계를 이루기도 한다는 것, 단지 조금 더 아래라는 이유로 피부에 닿는 공기도 꽤 서늘해진다는 것. 그때 저장고 안엔 누구도 없었다. 다시 나올 때 자물쇠 세 개를 똑바로 채웠던 것도 분명히 기억한다. 친구와 저장고를 같이 봤다는 얘기를 엄마에게 털어놓았는데, 엄마는 내가 둘째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해주었다.

 

   네 잘못이 아니야. 공간이 문제겠니, 그게.”

 

   부모님은 그 죽음에 대해 입을 다물었지만, 나는 인터넷 기사를 통해 남은 이야기들을 읽었다. 저장고에서 발견된 낯선 침입자는 센터에서 배출되는 폐기물을 총괄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유서엔 제 몫의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고 적혀있었다. 확실한 건 그가 죽음으로써, 최근에 센터가 연관된 일련의 사태에 대해 담당자가 자신임을 증명해냈다는 것이었다. 센터 안팎의 모두가 암묵적으로 기다리던 그 책임자 말이다. 단지 그가 루라고 생각하면, 루라면, 모든 게 돌연 낯설어졌다. 그가 몇 줄 기사로 남았다는 게.

 

  루의 유서에 나열된 사건이 모두 세 개였는데, 다른 두 개는 모르겠고, 내가 아는 건 우리 집 일뿐이었다. ‘제가 비소에 오염된 동물 사체를 직접 운반했습니다.’ 라고 적혀있었다. 루를 처음 본 날, 그가 우리에게 다가와 했던 말은 뭐라고 했지? 누가 죽었다고?’였다. 나야말로 그렇게 되묻고 싶었는데 대체 어디로?

 

   기자가 해준 말대로 그런 짧은 마디와 마디가 모여서 모든 일이 벌어지는 거라면, 루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자루를 운반한 사람이 저렇게 벌을 받으면, 자루의 행방을 결정했던 사람들은? 수거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그 사람들도 아파해야 하지 않은가. 모두가 제 몫의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은가.

 

   눈을 돌려 오른쪽 창밖을 보면, 같은 사이즈로 나열된 액자들 중에서 꼭 하나-내가 가장 많이 바라봤던 그 창문이 새까만 암흑으로 멈춰 있었다. 나만의 사전을 펼쳐 에 대해 적어보려고 했지만, 그 페이지는 그저 축축하게 젖기만 했다. , 라고 발음하면 자꾸 눈물이 나서 사전을 찾아보니 정말 그 라는 말에 눈물의 의미가 있었다.

 

   지금은 천천히 흐르지? 앞으로 시간이 점점 빨리 흘러갈 거야.” 

   언제였지. 언젠가 루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지금 이렇게 한 장 한 장 읽고 있는 거라면, 나중에는.” 

   루는 그렇게 말하면서 책을 한 장씩 넘겼고, 어느 시점에서는 남은 분량을 뭉텅이로 잡고 후루룩 넘겨 보였다 

   이렇게 지나가지.”

 

   그러더니 다시, 양손으로 책의 양끝을 잡고 한 끝에서 다른 한 끝까지 질주하듯 넘겼다. 책장 사이에서 바람이 불어올 수 있는 속도로. 아마 풍송동 집에서였을 것이다. 막내가 네 살, 혹은 다섯 살이었을 때. 딱히 웃긴 장면은 아니었는데 막내는 루가 책을 넘길 때마다 깔깔거렸다. 말끔한 손님이 우리를 위해 쇼를 한다고 생각한 건지도 몰랐다. 책은 펼치는 각도에 따라 아코디언처럼 보이기도 했고, 꽉 다문 입술처럼 보이기도 했다. 막내가 웃거나 말거나 루는 나를 보며 말했다. 어른이 되면 한 장씩 페이지를 넘길 짬도 없어진다고.

 

   루의 시간은 이제 완전히 멈췄다.

 

   내가 그를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기둥으로 본 건 착각이었지만 어떤 면에서는 진실이기도 했다. 그 사람을 빼내고 나자, 그 공간은 마침내 무너져버렸으니까. 저장고만을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 마당의 오염을 제거하는 큰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우리는 그 공사가 끝나도 더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사용기한이 남았지만 엄마는 하루 빨리 사택을 떠나자고 했다.  이제야 비로소 정말, 이사를 해야 했다.

 

  방학이 끝났고, 나는 놀랍게도 평소처럼 학교에 갔고, 이 일에 대해 아는 아이가 거의 없다는 게 예상 밖이었고, 누구도 내게 뭔가를 묻지 않아서 조금은 안도했고, 그러다 학교로 가던 버스 안에서 왈칵 눈물이 터져 목적지에 닿기 전에 내리기도 했다. 여전히 경유노선을 택하고 있던 뒤뒤가 나를 따라 내렸다. 내리고보니 거대한 해바라기 밭의 초입이었다. 절정을 조금 넘긴 해바라기들. 얼굴 가득 까만 씨를 박고, 노란 머리카락 몇 올을 겨우 달고, 그들은 서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도 같았고, 기다리는 이유를 망각한 듯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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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22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23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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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뒤와 내가 서로를 알게 된 시점은 달랐다. 지난 봄 15번 버스에서 우리가 처음 봤다고 생각해왔는데, 뒤뒤가 날 본 건 그보다 몇 주 전이었다. 굴욕적이게도 내가 친구와 벌을 서고 있을 때였다. 아침 자습 시간에 친구와 학교 매점에 있었던 죄로 말이다. 쉬는 시간이 되기 10분 전에 친구와 나는 매점으로 나와서 왕뚜껑과 맥스봉을 샀다. 친구가 나무젓가락을 경쾌하게 반으로 가르며 말했다.

 

   “10분 안에 클리어하자! 쉬는 시간에 할 일이 많아.”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컵라면에 물을 부어놓자마자 선생님한테 걸려버렸다. 우리는 상습은 아니었는데 상습이라는 누명까지 쓴 채로, 매점 옆에 투명의자 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진짜 쉬는 시간의 종이 울릴 때까지. 선생님은 매점 앞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자 그때서야 그만!’ 이라고 말했다. 하필이면 뒤뒤도 그때 날 본 거였다. 뒤뒤는 내가 투명의자에서 해제되자마자, 온몸의 관절을 몇 번 가볍게 풀더니 잽싸게 컵라면을 챙겨들었다고 했다. 나는 기억도 안 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벌을 받고서, 그 와중에 라면을 다시 챙길 정신이 있다는 게 대단하지 않아? 너는 친구랑 다 불어터졌을 라면을 뚝딱 먹더라고. 정말, 생활력이라는 게 뭔지 그날 느꼈어.”

 

   나는 한 모금 들이켰던 음료수를 뿜었다. 생활력이라니, 그게 내 첫인상이란 말인가? 낭만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이제 막 비운 페트병을 한손으로 가볍게 구기자, 뒤뒤가 역시라고 말했다. 나는 뒤뒤에게 생활력보다 에너지같은 표현은 어떠냐고 물었는데, 뒤뒤는 생활력이 어때서?’ 라고 대답하며 수정을 거부했다.

 

   그럼 활력으로 해.”

 

   알았어, 활력. 생각해보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궁금해진 거.”

 

   뒤뒤가 내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습기를 조금 덜어낸 바람이 훌렁 불어오고서야 나는 여기가 풍력발전단지 근처라는 걸 새삼 인식했다. 우리는 익숙한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날개가 부러진 풍력발전기의 보수가 아직 덜 끝난 모양이었다. 부러진 조각들이 어디로 갔을까,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뒤뒤가 말했다.

 

   우리 반 애가 널 알더라고. 자기네 동네에 산다고. 그 동네에서 학교까지 오려면 딱 하나의 정류장을 거쳐야 하던데, 하루는 마음먹고 그 정류장을 거쳐서 학교에 가기로 했지.”

 

   내가 승용차로 갈지, 몇 시에 갈지, 어떻게 알고?”

 

   운 좋으면 보는 거고. 결과적으로 운이 좋았지만.”

 

   스토커냐고 묻자, 뒤뒤는 억울해 했다.

 

   학교에 꼭 최단거리로 가야 한다고 누가 그래? 난 그냥 너희 동네를 경유해서 가는 그 방식이 좋았다고. 솔직히 매일 가게 될 줄은 나도 몰랐는데. 첫날 네가 15번 버스를 탄 게 문제였어. 내가 검색해 온 범위에 없던, 엉뚱한 버스를 타는 걸 보고 뭐지 싶었는데, 그 버스에 따라 타는 순간 느꼈지. , 내가 앞으로 얘만 믿고 따라가겠구나.”

 

   잘못 탄 버스여도?”

 

   .”

 

   그날 우리 벌 받았잖아.”

 

   그렇지만 귀가 몇 센티미터인지도 알게 됐잖아. 귀가 닮았다는 소리도 들었고. 학교를 그렇게 늦어본 것도 처음이었고. 최단거리 말고, 에둘러 가는데 엄청 재미있는 길이 있는 거야, 너는 그런 길로 나를 유인하더라. 같이 있으면 좋은걸 어쩌겠어, 끊을 수가 없었지. , 너 많이 좋아해.”

 

   말이 먼저 튀어나가 상황을 견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말이 가장 늦는 경우도 있다. 말보다 앞서 걸어간 것이 더 많은 세계, 나와 뒤뒤가 산책한 건 그런 세계였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제 저렇게 말이 떨어지자, 막연히 짐작하고 있던 것들이 일순간 긴장한 듯 도열했다.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 놓았는데, 그게 바람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뒤뒤의 손은 메트로놈의 추처럼 보폭에 맞춰 적당히 흔들리고 있었는데, 나는 방금 내 머리를 만진 게 뒤뒤의 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알았고, 그렇게 나 역시 뒤뒤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등대섬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이미 멀어져 있었다. 바다가 바닥을 드러냈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바닷물이 몇 겹씩 들어오는 걸 보면서 내가 말했다.

 

   나도 너 좋아해. 그래도 사귀진 말자.”

 

   ……?”

 

   내가 볼 때 사귀는 건 본품이 아니거든.”

 

   본질, 이라고 말하려던 게 본품으로 잘못 출력된 건데, 뒤뒤가 그걸 이렇게 받아쳤다.

 

   그럼 사은품으로는 어때?”

 

   본품이 뭔지는 알고 있어?”

 

   뒤뒤는 잠깐 하더니 대답했다.

 

   함께 걷는 거. 우린 계속 산책할거야. 그게 본품이야.”

 

   흐음. 나는 뒤뒤의 구성이 꽤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게 표정에 드러났는지, 뒤뒤가 제품이 마음에 드시죠?’ 하면서 날 가볍게 웃겼다. 나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손을 내밀어 뒤뒤의 손을 잡았다. 우린 다시 뭍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저런 말을 덧붙였는데, 절대 사은품을 급하게 보내지 마시라, 본 제품만으로도 충분하다, 괜히 오늘부터 날짜 헤아리지 마라, 와 같은 거였다. 그러다가 이런 말도 툭 내뱉었다.

 

   손잡고 걷는 거 참 좋아. 그치?”

 

   그 말에 뒤뒤가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어머, 넌 손을 잡았어? 난 손이 아니고 발을 잡았을 뿐인데!”

 

   이게!”

 

   우리는 서로 등짝을 때리면서, 도망가고 뛰어가면서도 절대 손은 놓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의 도망과 추적과 그 모든 건 길어야 2m를 넘지 않는 범위의 것이었다. 뛰는 동안, 나는 고백이란 단어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찾아냈다.

 

 고백

  -폐활량 증가에 도움이 된다.

  -몸 안에 새 공기가 들어오는 일. 어떤 환기시스템.

 

 

 

   집에 오니 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후면 드디어 풍송동의 대공사가 시작된다는 것. 몬스터를 잡으려던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유해폐기물로 번져온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원인 제공자들이 어떻게 책임을 지는지 보는 눈이 그 전에 비해 많아진 건 사실이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러 사람들이 사과 릴레이를 했다. 둘째와 막내에게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엄마가 거절했다. 관심이 고팠던 적이 있지만, 또 이렇게 몰리는 관심은 무서웠다. 간혹 과격한 댓글을 보면 이게 이슈화되길 바랐던 마음과는 별개로 퍼뜩 무서운 생각이 들곤 했다. 개학이 두려웠다. 전교에서 한두 명만 알아도 결국은 다 퍼지는 게 학교의 구조니까. 기자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유효기간이 길어서 문제가 된 적보다 그 반대쪽이 늘 문제라고.

 

   친구 하나는 우리와 관련된 기사를 읽고, ‘못된 놈들은 다 죽었으면 좋겠어. 벌 받을 거야.’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를 위로하려는 의도는 고마웠으나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누군가 자살이라도 해야 이 사태가 마무리되는 것 아니냐는, 그런 댓글도 읽었던 것이다. 표적이 딱히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마티할머니의 말대로 우리 가족은 좀 애매한 지점에 놓여 있었으니. 아빠가 그런 댓글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아침에 앞 동, 루의 창문을 보다가 몇 번이나 눈을 비빈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블라인드가 걷혀진 채였는데, 거기에 넥타이를 맨 와이셔츠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마치 와이셔츠 입은 사람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자세히 다시 보면, 그저 와이셔츠와 넥타이였는데 말이다. 루는 또 어떤 제사에 가는 모양일까, 그 생각이 든 건 오래 전에 아빠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센터에서 1년에 한번, 실험동물을 위한 위령제를 지낼 때 꼭 검은 양복에 검정 넥타이까지 갖춰 입고 오는 사람이 루라고 했다. 루는 그런 사람이었다.

 

   공사 하루 전날, 우리 셋도 부모님을 따라 나섰다. 반대할 줄 알았는데 잠깐이라는 전제 하에 우리의 풍송동 행이 허락되었다. 우리 셋은 저장고의 자물쇠를 풀고, 그 안의 것들을 선별해서 버리기로 했다. 지하저장고는 그동안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어찌 보면 비소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공간이었지만, 자물쇠 달린 빈 공간 하나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 셋에겐 꽤 안심이 되었다. 그 안에 뭐 특별한 걸 넣어둔 건 아니었어도. 내일이면 없어질, 오늘까지만 유효한 공간, 마당에 흉터처럼 남은 그 문짝, 우리 셋은 거기에 걸어둔 자물쇠를 열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

 

   저장고 문을 여는데 세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걸어둔 자물쇠들은 이미 다 열려 있었다. 그것도 놀라웠지만, 아무 잠금장치도 없는 문을 여는데 세 시간이나 걸렸다는 게 더 놀라웠다. 왜 그랬을까. 저장고 내부에서 자물쇠를 걸어두었던 것이다. 결국 그 문을 완전히 부수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안에는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

 

   낮은 탄식, 나가라고 말하던 소리, 119를 외치던 소리. 내가 어둠 속 검은 물체에 초점을 맞추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내 눈보다 조금 더 빠른 손이 시야를 가렸다. 엄마였을 것이다. 아빠였거나.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어떤 순간은 속도와 순서를 초월해서 통째로 각인되어 버린다. 나는 그걸 모든 게 정지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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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21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20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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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에게 물어보려고 한동안 품고 다니던 질문이 있었다. 아저씨는 어느 편이에요? 토끼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비소라고 생각하세요? 아저씨가 자루를 들고 왔잖아요. 실제로 그런 질문을 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다만 어느 기사에서 루의 말을 몇 줄 읽을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루가 아니고 소장의 말인 줄 알았다. 언젠가 소장이 아빠에게 했던 말과 닮아서.

 

   무책임한 허위 신고로 인해 회사의 이미지가 실추되었고, 직원들도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기사는 우리 마당에 대한 게 아니고 센터가 휘말린 다른 문제에 대한 거였는데, 루의 저 말이 어쩐지 내 질문에 대한 답처럼 느껴져서 낯설었다. 아마도, 아빠가 거부한 일들을 루는 그대로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그중에 우리 마당의 일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비슷한 다른 일들도 있을 것이다.

 

   기자는 지롱이의 탄생 비화에 관한 기사를 썼다. 그 기사에 따르면, 풍송동에 오래 거주한 주민이 골목 낙서에 대해 민원을 제기하면서 지렁이 좀 와서 보라니까.’라고 말한 게 시작이었다. 여러 지자체 담당자를 오가는 동안 이미 문서 위에 지롱이가 등장해 있었는데, 주민의 잘못된 발음(‘에 가깝게)을 모두가 의심 없이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게임 회사에서도 지롱이라는 말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지롱이는 그냥 지롱이로 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가 기사의 본론이었다.

 

   지롱이 뒤에는 유해폐기물을 주택가에 매립해놓고 모르쇠로 일관한 기업과, 그것을 짐작하고도 방치한 지자체의 고질적인 직무유기가 있었다. 아이들이 뛰노는 그 골목에 1급 발암물질인 비소가 방치되어 있다면?’

 

   이 기사로 인해 기자가 또 피해를 입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기자 말대로 타이밍이 중요했다. 기자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거기에 정확하게 올라탄 것이다. 나는 기사를 보고 기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포켓몬이 우릴 도운 거예요?’ 하고. 곧 이런 답이 왔다.

   구청장! 줄줄이 뇌물 먹은 거.’

 

   최근에 뇌물 수수로 시끄럽게 된 구청장이 센터의 견고한 인맥이라고 했다. 그쪽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센터에서 쉬쉬하던 일들이 불거져 나왔고, 그중 하나가 우리 마당의 일이었다. 센터는 비소를 쓰지도 않았다고 주장해 왔는데, 그 즈음 센터의 비소 구입 내역이 공개되자 말을 바꿨다. ‘비소가 동물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험하려 했다는 거였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그 동물이 우리 식구를 말하는 건가 싶어서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가. 센터에서 비소가 토끼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정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센터의 입장은 다른 증언들이 나오면서 흔들렸다. 애초부터 토끼와 비소를 결합한 어떤 실험을 하려던 게 아니라 그건 단지 사고였던 것이다. 실험A에 쓰려던 비소를 소홀하게 관리해서 실험S의 토끼들이 비소에 오염된 것뿐이었다. AS는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그렇게 합쳐진 것뿐이었다. 3년 전 그 무렵엔 센터가 동물실험 후처리를 대충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었고, 여러 국가 지원 감사가 있었기 때문에, 센터는 임시로 폐기물을 숨겼다. 바로, 우리 집에. 파낼 깊이가 충분한 마당이었다는 이유로. 그런데 센터가 건립 중이던 폐기물 보관소가 여러 이유로 지연되고, 그 일을 진행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그만두면서 우리 마당의 일은 허공에 뜬 거였다. 그렇게 임시보관소였던 곳이 영구적인 게 되고 말았다.

 

   어쩌면 센터는 폐기물만 거두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우리 골목이 게임으로 유명해지는 바람에 상황이 달라졌다. 우리 마당에서 토양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하 3m 지점에서 채취했을 때 비소가 기준치의 2, 지하 6m 지점에서 채취했을 때 3배로 검출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마티할머니 집의 토양 검사도 했는데 다행히 거긴 정상이었다. 우리 방과 부엌과 거실의 먼지를 끌어 모아 검사했는데, 그곳은 수치가 좀 높았다. 마당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폐기물을 몇 겹으로 봉해서 지하 깊이 묻은 게 다행이었을까. 그러나 마티할머니 말대로 비가 올 때마다 나쁜 성분이 조금씩 어딘가로 흘러가버렸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뒤늦게 난리가 나서, 아빠에게 당신도 피해자라고만 할 수 없다고 했고, 아빠도 그걸 인정했다. 그리고 우린 벌을 받고 있었다.

 

   구청과 시청과 센터와 환경부까지, 떠넘기기가 오가는 과정에서 언젠가 우리가 녹음한 소장의 목소리와 둘째의 일기가 증거물로 제출되었다. 둘째에게 동의하느냐고 물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동의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저울 한 끝에 일기장이, 다른 한 끝에 전부가 있는데. 결국 센터 측은 고의적인 방치였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판단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저희 센터에서는 자체적으로 이 일에 대한 책임 소재를 밝혀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폐기물 이송을 완료하고, 그 일대를 소독 처리하겠습니다. 전문업체와 상의해본 결과, 산과 같은 화학약품을 이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최근에 개발된 기술로, 기계 내부의 바람을 이용해 흙 속에서 중금속 알갱이만 골라내는 게 가능합니다. 이 일로 심려를 끼쳐드려 지역 주민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우리가 아는 소장은 아니었다. 소장은 해외에 체류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렸고, 이 사태와 얽힌 관련자는 모두 책임을 지게 될 거라고 센터 측이 말했을 뿐이다.

 

   그럼 우리 슈퍼지렁이도 해외에 있겠네?”

 

   막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글쎄. 나는 그가 우리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그 지렁이가 담겼던 지퍼백을 흔적 없이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내가 많이 검색해본 단어는 비소폐기물이었다. 끔찍한 사례를 많이 본 나머지 우리 마당의 비소가 기준치의 2-3배라는 결과를 들었을 때 생각보다 약한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갑자기 암 환자가 늘어난 마을, 비소가 기준치의 8배로 나왔다는 사과주스, 수십 년간 기준치의 20배나 되는 비소가 묻혀있었던 도로변, 몰래 유해폐기물을 묻었다가 양심 고백한 내부고발자, 수많은 이야기들이 우리와 닮은 듯 다른 듯 있었다.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그 이야기들을 견과류처럼 꼭꼭 씹었다. 이제는 같은 검색어를 입력하면 우리 집 기사도 끌려나왔다.

 

   나는 최근에 좀 특이한 형태로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어떤 단어에 대해 내 방식대로 기록하는 거였다. 나만의 사전, 정도가 될까? 거기에 비소를 적고, 뭔가를 더 써보려 했지만 몇 줄로 정의하기가 확실히 어려웠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일까, 나는 이렇게 적고 말았다.

 

  비소

   -As

   -중요한 건 아니라는데 가장 먼저 외워진 이름

 

 

  그 앞 페이지에는 뒤뒤가 있었다.

 

  뒤뒤

   -진짜 나쁜 놈들은 항상 뒤, 뒤에 숨어 있다.

   -그런데 가끔은 내 뒤, 뒤에 좋은 사람이 올 때도 있다.

 

 

   뒤뒤가 내 뒤, 뒤에 앉은 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엄마를 따라 나올 일이 있었는데, 낯선 동네에서 뒤뒤를 봤던 것이다. 뒤뒤는 편의점에서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엄마가 주차를 하는 사이에 뛰어가서 뒤뒤의 어깨를 툭 쳤다.

 

   뒤뒤, 뒤뒤!”

 

   뒤뒤는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여기서 뭐해?”

 

   간식 샀는데? 너 이거 먹어봤어? 이거 지금 투플러스원이야. 딸기 맛하고 바나나 맛이 있는데 딸기 맛으로 세 개 통일했어.”

 

   뒤뒤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하나를 내밀었다. 뒤뒤는 집에서 막 나온 것 같은 차림새였고, 어쩐지 당황해하고 있었다. 저렇게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걸 보면. 아아,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혹시나 싶어서 , 설마 이 근처에 살아?’ 하고 물었는데 뒤뒤가 그렇다고 해서 그때부터 내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집이 우리 동네 아니었어?”

 

   집은 여긴데.”

 

   ? 난 네가 우리 동네에 산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아아, 14909가 마음에 들었거든.”

 

   “14909?”

 

   너희 집 앞 버스정류장 번호. 난 그 14909를 지나서 학교로 가는 그 노선이 좋았다니까.”

 

   여기서 우리 동네까지 왔다가, 다시 거기서 학교로 간 거라고? ! 여기서 학교까지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데? ?”

 

   알면서 뭘 자꾸 물어보냐!”

 

   저만치서 엄마가 뭐가 그리 오래 걸리니,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말했다.

 

   일단, 나중에 얘기해.”

 

   사실은 엄마 때문만은 아니었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 같아서였다. 나는 다시 뒤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개학하면 이제 그쪽으로 오지 마. 이사 간단 말이야. 어차피.”

 

   이사?”

 

   이제 다시 원래 동네로 갈 거야. 몇 달 안 걸려.”

 

   꿈이 아니고 진짜?”

 

   .”

 

   너 기분 진짜 좋겠네, 하고 뒤뒤가 말했는데 이상했다. 기분이 좋은가?

   집에 대해서라면 난 좀 차분해진 상태였다. 우리 가족 모두, 그리고 그 골목의 이웃들 모두가 머리카락 등을 제출해서 중금속 오염도를 검사해야 했다. 다행히 크게 문제가 있다고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을 품고 있었을 마당을 생각하면 막연해졌다. 옛 집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다시 양파를 심고 마늘을 거두고 배롱나무 밑에서 혼나고 채송화가 번식하는 걸 볼 수 있는 걸까.

 

   구청에서는 우리 골목 일대에 몬스터 관련 테마파크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일대를 포켓몬 관련 공사 진행 때문에 폐쇄한다고 공지했다. 발 빠르게도, 게임 회사에서는 지롱이에 대한 추가설명 한 줄을 배포했다.

  '지롱이는 독을 먹고 진화하며, 해독능력도 뛰어나다.’

 

   둘째가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지롱이가 풍송동 낙서에서 시작된 게 사실이라며 들떠 했다. 그러더니 내게도 부탁을 했다.

 

   누나가 이 번호로 걸어서, 물어봐줘. 정말 지롱이가 풍송동 담벼락의 낙서에서 시작된 게 사실인가요-이렇게 말해. 아, 그리고 해독능력이 뛰어난 것도 사실인가요, 이렇게.”

 

   이미 물어봤다며.”

 

   누나가 해도 사실인지 궁금하다고!”

 

   결국 나는 전화를 걸어서 둘째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전화기 너머 직원이 다소 지쳤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저기요, 같은 번호로 다섯 번째 전화하시는데요, 확실히 그렇다고 말씀드립니다.”

 

   얼굴이 시뻘개져서 그 말을 전해주자 둘째도 얼굴이 시뻘개졌지만, 지롱이에게 자신이 영향을 끼쳤다는 게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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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20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16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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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벼락의 슈퍼지렁이 그림이 어떻게 그 게임 속 몬스터-지롱이가 된 것인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여러 설이 있었고, 모두 믿고 싶은 이야기를 골랐다.

 

  아빠와 엄마는 일단 지롱이든 지렁이든 슈퍼지렁이든, 그들 사이의 연관성을 배제했다. 그러니까 지롱이는 그냥 우연인 것이고, 슈퍼지렁이는 담벼락에 그리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이유는 골목의 미관상 문제였다. 아빠는 공사가 바로 시작될 줄 알고 아이들의 낙서를 방치한 게 잘못이었다고 말했는데, 그 과정에서 엄마가 나머지 넷의 비밀(풍송동 행)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우리가 한 낙서가 끝말잇기처럼 다른 낙서들을 불러온 거라며 우리를 혼냈고, 엄마는 거기에 우리를 데려갔다는 점에서 아빠를 혼냈다. 우리 셋이 최근에 그쪽에 간 건 절대, 절대 몰라야 했다. 이럴 때마다 지퍼처럼 여닫기 간편한 입 하나가 가장 걱정스러웠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막내가 찡긋 한쪽 눈을 감아보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둘째는 우리의 낙서를 분명히 마티할머니가 어딘가에 일러바쳤을 거라고 말했다.

 

   포켓몬고 회사에다가 마티할머니가 일러바친 게 아닐까? 요 놈 좀 써 봐, 하면서. 슈퍼지렁이라던데, 하면서. ? 그 골목에선 마티할머니가 짱이잖아.”

 

   둘째가 보여준 게임 화면에 박사에게 보내기버튼이 있었는데, 그 버튼을 누르는 의미에 대해 둘째는 신나게 설명했다.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모르겠는 얘기였는데, 그 얘기를 듣더니 막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마티할머니가 그 박사다!

 

   게임을 모른다고 해도, 그 얘기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내게도 믿고 싶은 구석이 있었다. 한 달 반 만에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기자는 우리 부모님께 직접 연락하겠다면서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쩌면 그 기자가 유행하는 게임을 통해 새로운 출구를 만든 게 아닐까? 이 모든 게 우연일까? 부모님은 기자의 연락에 반색을 했다. 풍송동이 속한 구청에서도 전화가 왔다. 갑작스러운 연락이 오는 것에 우리 모두가 놀랐다. 한동안 아무리 두드려도 꿈쩍도 않던 문들이 갑자기 일제히 열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구청 입장에서 보면 아빠는 악성민원인이었다. 구청 직원 하나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빠에게 들켜버렸기 때문에 하마터면 싸움이 날 뻔도 했다고 들었다. 시작은 오래전 토양 오염 검사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풍송동 집은 이미 세 차례나 흙을 파서 중금속 수치 같은 걸 검사했고 항상 기준치 이하’, 그러니까 정상인 걸로 나와서 아빠가 믿을 수 없어 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센터 뿐 아니라 구청도 함께 한 검사였는데, 구청에서는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계속 하시려는 겁니까? 문제가 있다고 나와야 안심하시는 것 같잖아요.” 라고 해서 아빠를 화나게 했다. 아빠는 그게 왜 기준치 이하가 나온 것인지 그 경위를 따져 물으려 했고, 1m도 파내지 않고 조사한 시료를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따졌고, 그래서 피곤한 민원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구청 측에서 오히려 전화가 걸려온 거였다. 그동안 제기된 민원을 다시 검토하는 주간이라고 했는데, 그 민원이란 게 우리 식구뿐 아니라 아주 여러 경로에서 출발한 거여서 오히려 우리가 좀 놀랐다. 구청에서는 확인할 게 있다며 아빠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슈퍼지렁이와 지롱이의 관계에 대해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된 건 마티할머니를 만나고부터였다. 우리가 찾아갔던 그날엔 마티할머니를 만날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오히려 그 골목 밖에서 기회가 생겼다. 학원에서 방학특강을 여섯 시간이나 듣고서 버스에 탔을 때였다. 뒤뒤와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혹시나 해서(뒤뒤의 땡땡이에 연루되고 싶지 않아서) 아예 뒤뒤가 끝날 시간에 그 애의 학원 근처에서 보자고 했다. 엄마가 들으면 황당해 할 일이지만(아마 너나 잘 해, 이것아.” 했을 거다.) 버스에 앉아 거리의 간판들을 읽는 것도 내 취미였다. 나는 뒤뒤를 배려한 게 아니라 취미생활을 하는 것뿐이었다. 자꾸 옷매무새에 신경 쓰면서 말이다. 원피스 밑자락이 의자와 내 허벅지 사이에서 구겨지는 것이 싫어서 살짝 엉덩이를 들었다. 단지 옷의 주름을 바로 잡으려고 했을 뿐인데, 그때 누군가가 내 등을 그대로 앞으로 밀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아유, 고마워요.”

 

   나는 얼떨결에, 졸지에 자리를 양보한 셈이 되었다. 뒤에 할머니가 서 있는 줄도 몰랐는데, 그 할머니가 마티할머니일 줄은 더더욱! 할머니는 내가 인사를 하고서야 나를 알아봤는데, 나보다 더 놀랐다.

 

   본판 아깝게 그 뭐냐, 옷차림이.”

 

   내 차림새 때문에 놀랐다는 식이니 이게 웬 테러란 말인가! 완전히 사기를 저하시키는 말이었는데, 나는 오늘 코디에 꽤 신경을 쓴다고 썼던 것이다. 곧이어 할머니가 저고리가 어쩌고 구멍을 꿰매고 어쩌고 해서 약간 안심했다. 할머니의 기준을 너무 믿지는 말자, 싶었던 것이다. 나보다 족히 60년은 더 사신 분이니.

 

   골목이 난리 난 걸 알고 있냐? 집 공사를 시작할 것처럼 하더니만, 담벼락에 낙서를 그렇게 해놓고, ? 아주 도떼기시장이 됐다고.”

 

   게임하러 사람들이 많이 온다면서요? 할머니 포켓몬고 아세요?”

 

   알고 싶지 않다.”

 

   아아, .”

 

   저번에는 마당 가지고 그렇게 신경 쓰이게 하더니 이젠 또 담벼락 가지고 난리냐. 다 너희 집 낙서 때문에 시작된 일이야. 책임을 져야지.”

 

   낙서요?”


   그게 너무 꼴 보기 싫어가지고 구청에 전화를 하니까 시청으로 하라 그러고, 시청에 전화를 하니까 주민센터로 하라 그러고. 주민센터에서는 또 무슨 페인트업체를 연결시켜 주더만. , . 한 댓 군데 통화한 것 같은데. 최종적으로 어디에 신고했는지 기억도 안 나, 지금.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데서 찾아오질 않나?”

 

   어디서요?”

 

   몰라, . 뭐라더라. , 뭐라더라.”

 

   마티할머니가 그 무언가를 기억해내길 기다리느라 나는 내려야 할 지점을 놓쳤다. 할머니는 두 정거장 쯤 더 흘러간 다음에야 그 무언가를 기억해냈다.

 

   그래, 구청이었어.”

 

   구청에서 전화를 넘겼다면서요. 다른 데로.”

 

   아냐, 근데 끝에는 구청에서 다시 전화를 했다고. 그 담벼락 그림이 생각보다 재미있다면서 그걸 홍보에 활용한대. 그러더니 지금 아주 그 모양이 됐지 뭐냐. 그 짐승 잡는 거 있잖니, 그런다고 죄다 와서 그 모양이야.”

 

   그러니까 구청에서 그 담벼락 낙서를 활용한 거예요?”

 

   몰라. 웬 그 짐승 낚시 회사랑 같이 왔다니까.”

 

   포켓몬 회사요? 구청에서 포켓몬 회사에다가 연락을 한 거예요?”

 

   알게 뭐냐.”

 

   이건 둘째가 예상한, 내가 비웃었던 시나리오 아닌가? 결과적으로는 마티할머니가 영향을 끼친 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미 몇 정거장을 지나친 나는 초과한 거리만큼 뒤로 걸어가 뒤뒤를 만났다. 우리가 교집합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은 세 시간 정도였고, 영화는 두 시간짜리였다. 뒤뒤는 갑자기 그 사실을 상기시키더니, 영화를 다음에 보자고 했다.

 

   ? 우리 영화 보려고 만난 거 아냐?”

 

   그렇긴 했는데. 영화를 보면 한 시간 밖에 안 남잖아. 아까워.”

 

   뭘 하고 싶은데?”

 

   그냥 너랑 얘기하고 싶은데? 영화보다 훨 재미있거든.”

 

   사기 당했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나도 영화가 많이 아쉽지는 않았다. 우리는 스파게티를 사먹고 던킨에 가서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진 산책로로 조금 걸었다. 어둑한 계단에서 내 발 하나가 오른쪽으로 홱 꺾이며 휘청, 했는데 그 바람에 뒤뒤가 우당탕탕, 했다. 볼링핀처럼 같이 무너진 거였다. 우리는 화들짝 놀랐다가 동시에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갯벌은 아니지만 또 넘어졌다는 사실이 우스워서였다. 웃음이 바람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 서운한 곳에서는 내 안에서 바람을 만들어내면 되는 것 아닌가? 제일 쉬운 건 웃는 거였다. 웃는 동안 몸 안에서는 모든 게 줄넘기를 한다.

 

   아아, 근데 나 발목이 좀 아픈 것 같아.”

 

   뒤뒤가 말했다. 어제 애들이랑 농구하다가 발목을 삐끗했는데 거길 또 접질린 것 같다면서. 엄살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나는 뒤뒤가 한 팔을 내 어깨에 두르고 계단을 내려오는 걸 허락했다. 필요 이상으로 뒤뒤의 팔이 무겁게 느껴져서, 모든 체중을 나한테 싣지는 말라고 했더니 뒤뒤가 말했다.

 

   ,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 돼.”

 

   ……?”

 

   나 지금 완전히 업히려다가 참고 있는 거란 말이야.”

 

   뒤뒤는 새침한 표정까지 지으며 말했다.

 

   너니까. 배려하는 거라고.”

 

   문제는 사실 무게가 아니라 거리였다. 뒤뒤의 숨소리가 내 오른쪽 귀에 작게 노크 하는 것 같았다. 걸음도 마음도 조심조심, 그렇게 계단을 다 내려온 다음에 뒤뒤는 깡충깡충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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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19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13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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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이 지나간 타이밍,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에 흰 구름이 몇 점, 단지 관상용이라는 듯 떠 있었고, 햇빛은 적당한 속도로 골목길을 달궜다. 낯선 사람들이 이 풍송동 골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 셋도 있었다.

 

 

  마당을 빌려준다는 게 어떤 건지 종잡을 수 없었던 그날이나, 이 일대에서만 잡힌다는 희귀 몬스터를 보러 온 오늘이나,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골목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 목적지로 생각하고 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우리에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관계없는 건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우리 셋의 표정은 몇 년 전 그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불안했고, 거품처럼 약간의 들뜸이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우리의 정수리 높이 같은 거였다. 나이순으로 섰을 때 예전엔 한쪽이 기울어진 사선 형태였다면, 지금은 가운데가 삐쭉 솟아나 있었다. 그때만 해도 키가 큰 편이었던 나는 중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보통 키가 되었고, 몇 년 후면 평균보다 좀더 작은 편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런가하면 둘째는 나보다 다섯 살 어렸지만 이미 내 키를 넘어섰다. 어쩌다보니 이제 산 모양이 된 우리 앞에서, 낯선 사람들은 저마다의 보폭으로 걷고 있었다. 한손에 휴대폰을 들고, 손가락을 활 켜듯이 위로 툭, 툭, 튕기면서.


  “휴대폰 화면 안에서만 보이는 거지, 포켓몬이?”

 

  내가 묻자, 둘째는 물론이고 막내까지도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 풍송동 50번지부터 55번지 사이, 그 일대에서만 잡히는 몬스터가 있다는 건 그 게임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살짝 꿈같은 얘기로 다가왔는데,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뒤뒤 말에 따르면 그 게임을 하는 사람들한테도 그건 꿈같은 얘기라고 했는데, 내가 느끼는 막연함과는 좀 다른 의미의 꿈인 것 같았다.


  뒤뒤는 몇 가지 전설적인 몬스터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에베레스트에서만 나타난다는 몬스터를 잡기 위해 실제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사람의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소문과 실제가 늘 일치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에베레스트에 오른 사람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고 했으니까. 그의 휴대폰에는 텅 빈 게임 배경만 잡혔다. 마찬가지로 둘째의 휴대폰 속에도 딱히 뭐 보이는 건 없었다. 우리가 지금 이 골목에 와 있는데도 말이다.


  이미 한쪽이 철거되기 시작한 이 골목엔 차도 사람도 많이 다니지 않아서 넋을 놓고 걷기에 적합해보였다.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처럼. 그게 그 게임회사에서 우리 골목을 활용한 이유였을까? 물론 지금은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둘째가 아직 잡지는 못했지만, 이 일대에서만 나타난다는 그 희귀한 몬스터의 이름은 ‘지롱이’였다. 그 지롱이의 생김새는 게임을 하지 않아도 검색만 하면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보는 순간 팔에 소름이 돋았다. 막내가 우리 집 담벼락에 그려놓았던 슈퍼지렁이 그림과 너무 흡사해서였다. 우리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건가? 순서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지롱이라니 그건 정말 우리가 알던 슈퍼지렁이의 짝퉁처럼 생겼다. 우리 집 이야기가 지롱이의 탄생에 기여한 것 같은 생각도 들었는데 물론 심증일 뿐이었다.


  실제로 슈퍼지렁이가 그려진 우리 집 담벼락은 이미 포토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거대한 스케치북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담벼락을 들여다보면 슈퍼지렁이의 수가 더 늘어나 있었다. 다양한 사이즈로, 다양한 표정으로. 처음 우리가 그렸던 걸 제외하면, 모두 길 가던 사람들이 그린 거였는데 너무 익살맞아진 나머지 나중에는 거의 꽈배기처럼 생긴 것도 보였다. 그 꽈배기 같던 지렁이의 모습이 게임 속 지롱이 이미지와 비슷했다. 


  동생들은 몹시 들떠 있었는데, 셋이서만 풍송동에 온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골목 입구에서부터 초록색 대문 앞까지 전속력으로 뛰며 시간을 재는 애들을 보고 게임에 빠져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단지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오는 경로를 최대한 단축하고 싶어서 여러 실험을 하는 중이었다. 원래는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미소약국을 끼고 우회전한 다음 다섯 번째 골목으로 슝 들어가면 집이 나오는 건데, 골목 두 개가 합쳐졌고, 그리고 미소약국이 사라졌다.

  

  미소약국 자리엔 어느새 인형뽑기 가게가 들어섰고, 언제든 또 다른 걸로 바뀔 수 있을 만큼 가뿐해 보였다. 미소약국이 그만두기 전에 우리 아빠랑 상의를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쉬웠다. 아니다. 간판은 바뀌었지만, 저 통유리는 그대로 아닌가? 아빠가 갈아준 유리창은 여전히 그대로란 사실이 꽤 위안이 됐다. 어쨌거나 이제는 다른 이정표들이 필요했고, 아는 길 말고 새 길을 뚫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요약된 경로는 이랬다.


  1. 버스를 타고 ‘풍송파출소 앞’에 내린다.

  2. 정거장에 내려서 버스 가는 방향으로 조금 직진. 오른쪽에서 인형뽑기 집을 발견하면, 그걸 끼고 돈다.

  3. 현재 기준으로는 세 번째 골목으로 들어간다. 골목 입구에서 마티할머니네 굴뚝이 보이는지 확인하기.


  대문 열쇠는 항상 두는 그 장소(우편함을 들면 나타나는 비밀장소)에 있었다. 지붕 달린 집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해도(건물 열쇠는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피자를 배달시켜 마당에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들떴다.


  “누나, 우리도 개 조심 붙일까?”


  막내가 말했다. 마티할머니네 집 대문에 ‘사나운 개 조심’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는 걸 본 영향이었다. 그 종이를 보고 우리는 처음에 웃었는데, 마티가 그새 사나워졌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리 대문에도 그런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초록색 대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 몇 사람이 우리 대문 안쪽을 기웃거렸고, 몇은 따라 들어왔고, 심지어 누군가는 ‘화장실이야?’ 따위의 말을 해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한 꼬맹이가 우리 마당 아래로 난 지하창고의 문을 열어보려고 할 때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는 얼른 말했다.


  “여기 저희 집인데요.”


  동생들은 우리 골목이 유행하는 게임 화면 안에 등장한다는 사실에 엄청 들떠 있었지만, 이 게임에 연루된 사실을 짜증스러워하는 동네들도 꽤 있다는 걸 뉴스에서 봤다. 엄청난 인파가 늘 출근길과 등굣길과 조용한 산책을 방해한다고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외부인들이 모두 나간 후, 아예 초록색 대문을 닫아버렸다. 막내는 더 이상 3년 된 채송화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마당 끝에서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것 같은 자전거 한 대를 끌고 와서는 이걸 숨겨 놓자고 했다. 막내가 마당에서 주워든 건 대부분 고물이었지만, 우리는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마당의 모서리에 세워진 고무호스나 나지막한 나무의자 같은 걸 타인이 쳐다보면 그게 꼭 시선만으로 닳아 없어질 것 같았다.


  “못 들어오게 열쇠를 우리가 가져가면 되지.”

  내 말에 둘째가 목이 댕강 달아나는 시늉을 했다.

  “열쇠는 그 자리에 있어야지. 아빠가 알아봐.”


  집 건물로 들어가는 열쇠는 없었으니, 이 마당 안에서 내가 열어볼 수 있는 문이라고는 마당 아래로 난, 그 저장고뿐이었다. 우린 잡동사니를 저장고 안으로 집어넣었다. 양동이 하나, 물뿌리개까지 모두. 내가 저장고 안으로 내려가 물건들을 전달받았다. 지하의 서늘한 공기가 오랜만이어서 잠시 서 있으니, 동생들이 굳이 내 곁으로 내려와서 따라했다. 문을 열 때마다 햇빛이 손전등 역할을 하는 것도 같았다. 암흑 속에서 춤을 추고 있던, 허공의 먼지들이 어디로도 숨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 아주 잠시였지만, 모든 게 멈춘 것 같은 그 느낌이 좋았다.


  “우주에 온 기분이야.”


  둘째였나, 막내였나, 누군가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어쩌면 먼지는 조금 무게가 가벼운 별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우리의 발 아래에 뭐가 있는지는 잠시 잊어도 좋았다.


  우리는 그 저장고에 자물쇠를 채웠다. 손에 잡히는 걸 다 걸어보니 세 개였다. 어쩌다보니 삼중 잠금장치가 된 셈이다. 다시 초록색 대문 밖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더 늘어나 있었다. 둘째가 불법 앱 하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제 지롱이 출몰시간이 3분 남았대.”


  우리도 많은 사람들처럼 휴대폰 속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일몰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몬스터 출몰을 기다리다니. 그런데 시간의 공백이라도 있었던 걸까. 3분이 지났지만, 골목에서 지롱이를 발견한 이들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당황했는데 둘째는 오히려 덤덤했다.


  “이 지롱이를 잡은 사람이 생각보다 적거든. 전 세계에서 두 명이라던가?”


  그러자 막내가 받아쳤다.


  “엥? 우리 반에서 두 명이나 잡았는데?”


  둘째는 그럼 우리 동네에서 두 명인가, 하고 정정했다. 아무튼 생각보다 적다는 얘기였다. 우리가 그 골목을 벗어나기 시작하자 골목의 창문 하나가 스르륵 열린 것도 같았는데, 그쪽으로 시선을 보내자 급히 내부를 감추는 게 보였다. 얼핏, 그 몸짓이 윙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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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18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09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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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막내를 일주일에 세 번 있는 수영 강습에 보냈다. 어수룩한 신문에서 봤던 대로, 그 수영장은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어쩌고 하면서 소장이 자랑했던 시설 중 하나였다. 막내는 꽤 적응을 잘 해서, 시도 때도 없이 수영장에 가고 싶어 했다. 엄밀히 말하면 수영 자체보다도 수영을 오래 한 다음에 손가락 끝을 보는 걸 더 좋아했다.


  “쪼글쪼글한 게 좋아. 이렇게 되려면 진짜 수영을 열심히 해야 돼. 그래야 이렇게 된다고.”


  나는 오며가며 수영장 유리벽에 달라붙어 내부를 구경했다. 막내의 강습시간에 맞춰 가서 통유리 너머로, 노란 수모를 찾아보기도 했다. 노란색 모자가 너무 많아서 한눈에 막내를 찾기는 힘들었지만, 수모 쓴 사람들의 머리가 레인을 따라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고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졌다. 오선지 위의 알록달록한 음표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옆에 나와 닮은, 나보다 조금 큰 귀가 와서 합류했다. 방학이 시작된 후에도 뒤뒤와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마주쳤는데, 뭐, 상세하게 내 동선을 안내해준 건 나였으니 뒤뒤가 신통하다고 할 것도 없다.


  『어린왕자』해적판을 내게 준 사람이 루라는 것을 알고부터, 뒤뒤는 독서가 스포츠라도 된 것처럼 서두르기 시작했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같은 듯 다른 두 권을 모두 읽고 오는데 성공했다. ‘성공했다’는 건 너무 과한 표현이 아닐까 싶지만, 뒤뒤가 꼭 그렇게 말했다. 내가 해적판에서 뜯겨나간 두 장이 궁금해죽겠다고 하자, 뒤뒤는 자신이 그 해적판의 원형을 찾아내겠다고 했다. 그런 책은 누구나 쉽게 흔하게 구할 수 있다면서, 아주 흔한 거라는 걸 몇 번이나 강조하면서. 의지는 좋은데,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어보였다.


  태풍은 몇 차례나 올라온다고 했다가 우리 도시에 닿기 전에 소멸되곤 했다. 그러더니 모두가 방심하고 있을 때 별것 아닌 것 같던 새끼태풍이 온 도시를 긁어놓았다. 일주일 내내 바람 소리가 요란해서 단지 창문을 열고(닫아도) 바람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정글에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바람을 동물에 비유하자면 분명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육식동물 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는 어디서 들었다며, 덜컹거리는 베란다 창문에 녹색테이프를 두 줄, 교차해서 붙여놓았는데 별로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팔뚝만한 길이의 일자 테이프 두 줄로 'X'를 만든 수준인데, 전체 유리창의 면적에 비하면 턱없이 작아서 단지 ‘반사!’ 정도의 표식에 불과했다. 태풍이 그걸 깜찍하게 여겨 이집으로 달려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녹색의 ‘X'자 창문이 달린 집에서 우리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저녁을 먹었다. 아빠가 김치찌개를 끓였는데 부대찌개 맛이 났다. 엄마는 요즘 주택관리사 자격증 때문에 공부를 시작해서 기분으로는 우리 집 고3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빠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 싸움에 대해 물었을 때, 아빠는 반 농담처럼 이런 얘기를 했다.


  “그쪽 변호인들은 뭐, 몇 년 전에는 외계인을 상대로도 승소했다고 하더라고.”


  센터 측 변호인 말이었다. 그런데 외계인이라고? 외국인이 아니고? 나는 어리둥절했는데, 아빠는 그 농담의 효용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외계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다는 거지. 어떻게든 이긴다는 거야.”


  그때 내 머릿속을 지나간 건 오후에 거리에서 들었던 말이었다. 편의점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 휴대폰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는데.


  “공격을 막는 것만 수비냐? 새끼야, 치기 전에 때리는 것도 수비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말이 꼭 내게 적용되는 것 아닌가? 내가 그 말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김에 밥을 꼭꼭 싸서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그래, 폭력범으로 고발하지 못한다면 식품위생법 위반으로라도 고발하자! 사기꾼으로 고발하지 못한다면 주차위반으로라도 고발하자!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어떻게든 그들이 벌을 받기를 바랐다. 이 소장이 아니면 저번 소장이라도, 저번 소장이 아니면 나중에 올 소장이라도. 누구든, 뒤로 쏙 빠진 책임자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몇 차례 엄청난 타격으로 헛스윙을 날렸다. 그중에 가장 강력했던 건 막내가 다니는 그 수영장에 대한 거였는데, 여러 트집을 잡을 만한 부분이 있었다. 수질 관리부터 시작해서 사물함 도난 사고와 아이들의 통제에 서툰 것까지, 그 기자가 관심을 보일만 한 교육계의 일은 아니더라도 뭔가 파고 들어가면 분명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막내의 노란 수모를 찾아내며 흐뭇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수영장이 센터와 관련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곳이 싫었다. 그렇게 따지면 이 집도 싫어야 하는 거겠지만 확장하면 너무 머리가 아파오니 그만.


  기자에게 연락하기 전에 일단 수영장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글을 올렸는데, 요지는 수영장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상상한 건 이게 번져서 센터가 운영하는 그 수영장에 대대적인 감사가 시작되는 거였다. 그런데 일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내 글을 시작으로 해서 사람들이 수영 강습에 대한 불만을 내기 시작했고, 일주일 쯤 지난 후에 나는 수영장에서 한 강사가 학부모와 아이 앞에 무릎을 꿇는 걸 보았다. 막내는 그날 엄청 울었다. 다른 아이가 위험하게 장난을 쳐서 선생님이 벌을 준 건데 왜 그 선생님이 그만두어야 하냐는 거였다.


  헛스윙도 바람을 만들 수가 있을까. 그렇지만 엉뚱한 사람이 무릎을 꿇은 걸 보고 나는 거의, 전의를 상실했다. 악몽을 꿨고 새벽 세 시쯤, 일어나서도 다시 잠들지 못해서 베개를 들고 엄마 옆으로 가서 누웠다. 잠든 엄마의 손가락 끝에 코를 가져다대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릴 때는 엄마 손끝에서는 왜 매일 마늘 냄새가 날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냄새를 붙잡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진짜 태풍이 오고서야 나는 좀 차분해졌다. 멈춰버린 풍력발전기처럼. 태풍이 오면 풍력발전기를 멈춰 세운다는 걸 이번에 알았는데, 얼핏 이해가 가진 않았다. 바람을 낚는 발전기 입장에서 태풍이란 대목 아닌가? 그러나 아빠는 자칫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부러질 수도 있어서, 발전기를 꺼두는 거라고 했다.


  “날개가 엄청 비싸거든. 너무 큰 바람 앞에서는 꺼두는 게 상책이지.”


  아빠가 말했다. 나는 풍력발전기가 도시의 흔한 가로등처럼 멈춰 서서, 일몰 후 두 시간 동안 불을 켰다 끄는 걸 반복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내가 느끼는 차분함이란 모두가 바람에 시달리고 있으니 차라리 공평하다는, 그런 위안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였다. 모두가 이 태풍의 경로에 대해 말하는 동안 우리 가족만 앓고 있는 그 토끼냐 비소냐의 문제가 잠시 휴전을 선언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웅크린다고 해서,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고 해서 모든 게 정말 무사한 건 아니었다. 태풍이 거리를 휩쓸고 더 위로 올라간 다음 나는 풍력발전기의 날개 한 귀퉁이가 부러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셋 중에 가장 먼저 보이는 풍력발전기였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간판도 떨어뜨리고, 몸 사리던 현수막도 찢어버리는 바람이었다. 바람의 부피와 속도를 측정하려고도 하지 않고, 그걸 이용하려고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는데도 풍력발전기의 날개는 부러졌다.


  소문만 무성하다가 결국 도둑처럼 왔던 그 태풍처럼, 우리의 출구도 예상 못한 타이밍에, 예기치 않은 지점에서 뻥 뚫렸다. 여름 동안 둘째에게 벌어진 좋은 일이 있다면 엄마가 휴대폰을 사준 거였는데, 둘째가 새 휴대폰으로 접속한 세계 중에 가장 멋진 건 우리의 옛 골목이었다. 거기에 가볼 생각을 한 건 관성 때문이 아니었다. 풍송동 50번지부터 55번지 사이, 우리의 옛 골목 일대에서만 출몰한다는, 게임 속 몬스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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