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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22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23 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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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뒤와 내가 서로를 알게 된 시점은 달랐다. 지난 봄 15번 버스에서 우리가 처음 봤다고 생각해왔는데, 뒤뒤가 날 본 건 그보다 몇 주 전이었다. 굴욕적이게도 내가 친구와 벌을 서고 있을 때였다. 아침 자습 시간에 친구와 학교 매점에 있었던 죄로 말이다. 쉬는 시간이 되기 10분 전에 친구와 나는 매점으로 나와서 왕뚜껑과 맥스봉을 샀다. 친구가 나무젓가락을 경쾌하게 반으로 가르며 말했다.

 

   “10분 안에 클리어하자! 쉬는 시간에 할 일이 많아.”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컵라면에 물을 부어놓자마자 선생님한테 걸려버렸다. 우리는 상습은 아니었는데 상습이라는 누명까지 쓴 채로, 매점 옆에 투명의자 자세로 서 있어야 했다. 진짜 쉬는 시간의 종이 울릴 때까지. 선생님은 매점 앞에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자 그때서야 그만!’ 이라고 말했다. 하필이면 뒤뒤도 그때 날 본 거였다. 뒤뒤는 내가 투명의자에서 해제되자마자, 온몸의 관절을 몇 번 가볍게 풀더니 잽싸게 컵라면을 챙겨들었다고 했다. 나는 기억도 안 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벌을 받고서, 그 와중에 라면을 다시 챙길 정신이 있다는 게 대단하지 않아? 너는 친구랑 다 불어터졌을 라면을 뚝딱 먹더라고. 정말, 생활력이라는 게 뭔지 그날 느꼈어.”

 

   나는 한 모금 들이켰던 음료수를 뿜었다. 생활력이라니, 그게 내 첫인상이란 말인가? 낭만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이제 막 비운 페트병을 한손으로 가볍게 구기자, 뒤뒤가 역시라고 말했다. 나는 뒤뒤에게 생활력보다 에너지같은 표현은 어떠냐고 물었는데, 뒤뒤는 생활력이 어때서?’ 라고 대답하며 수정을 거부했다.

 

   그럼 활력으로 해.”

 

   알았어, 활력. 생각해보면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 궁금해진 거.”

 

   뒤뒤가 내 다음 말을 기다리는 것 같았는데,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습기를 조금 덜어낸 바람이 훌렁 불어오고서야 나는 여기가 풍력발전단지 근처라는 걸 새삼 인식했다. 우리는 익숙한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날개가 부러진 풍력발전기의 보수가 아직 덜 끝난 모양이었다. 부러진 조각들이 어디로 갔을까, 막연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뒤뒤가 말했다.

 

   우리 반 애가 널 알더라고. 자기네 동네에 산다고. 그 동네에서 학교까지 오려면 딱 하나의 정류장을 거쳐야 하던데, 하루는 마음먹고 그 정류장을 거쳐서 학교에 가기로 했지.”

 

   내가 승용차로 갈지, 몇 시에 갈지, 어떻게 알고?”

 

   운 좋으면 보는 거고. 결과적으로 운이 좋았지만.”

 

   스토커냐고 묻자, 뒤뒤는 억울해 했다.

 

   학교에 꼭 최단거리로 가야 한다고 누가 그래? 난 그냥 너희 동네를 경유해서 가는 그 방식이 좋았다고. 솔직히 매일 가게 될 줄은 나도 몰랐는데. 첫날 네가 15번 버스를 탄 게 문제였어. 내가 검색해 온 범위에 없던, 엉뚱한 버스를 타는 걸 보고 뭐지 싶었는데, 그 버스에 따라 타는 순간 느꼈지. , 내가 앞으로 얘만 믿고 따라가겠구나.”

 

   잘못 탄 버스여도?”

 

   .”

 

   그날 우리 벌 받았잖아.”

 

   그렇지만 귀가 몇 센티미터인지도 알게 됐잖아. 귀가 닮았다는 소리도 들었고. 학교를 그렇게 늦어본 것도 처음이었고. 최단거리 말고, 에둘러 가는데 엄청 재미있는 길이 있는 거야, 너는 그런 길로 나를 유인하더라. 같이 있으면 좋은걸 어쩌겠어, 끊을 수가 없었지. , 너 많이 좋아해.”

 

   말이 먼저 튀어나가 상황을 견인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말이 가장 늦는 경우도 있다. 말보다 앞서 걸어간 것이 더 많은 세계, 나와 뒤뒤가 산책한 건 그런 세계였던 게 분명했다. 그리고 이제 저렇게 말이 떨어지자, 막연히 짐작하고 있던 것들이 일순간 긴장한 듯 도열했다.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가볍게 헝클어 놓았는데, 그게 바람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뒤뒤의 손은 메트로놈의 추처럼 보폭에 맞춰 적당히 흔들리고 있었는데, 나는 방금 내 머리를 만진 게 뒤뒤의 손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착각이었다는 걸 알았고, 그렇게 나 역시 뒤뒤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등대섬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는데,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는 그 지점에서 이미 멀어져 있었다. 바다가 바닥을 드러냈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바닷물이 몇 겹씩 들어오는 걸 보면서 내가 말했다.

 

   나도 너 좋아해. 그래도 사귀진 말자.”

 

   ……?”

 

   내가 볼 때 사귀는 건 본품이 아니거든.”

 

   본질, 이라고 말하려던 게 본품으로 잘못 출력된 건데, 뒤뒤가 그걸 이렇게 받아쳤다.

 

   그럼 사은품으로는 어때?”

 

   본품이 뭔지는 알고 있어?”

 

   뒤뒤는 잠깐 하더니 대답했다.

 

   함께 걷는 거. 우린 계속 산책할거야. 그게 본품이야.”

 

   흐음. 나는 뒤뒤의 구성이 꽤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그게 표정에 드러났는지, 뒤뒤가 제품이 마음에 드시죠?’ 하면서 날 가볍게 웃겼다. 나는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손을 내밀어 뒤뒤의 손을 잡았다. 우린 다시 뭍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저런 말을 덧붙였는데, 절대 사은품을 급하게 보내지 마시라, 본 제품만으로도 충분하다, 괜히 오늘부터 날짜 헤아리지 마라, 와 같은 거였다. 그러다가 이런 말도 툭 내뱉었다.

 

   손잡고 걷는 거 참 좋아. 그치?”

 

   그 말에 뒤뒤가 깜짝 놀랐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어머, 넌 손을 잡았어? 난 손이 아니고 발을 잡았을 뿐인데!”

 

   이게!”

 

   우리는 서로 등짝을 때리면서, 도망가고 뛰어가면서도 절대 손은 놓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의 도망과 추적과 그 모든 건 길어야 2m를 넘지 않는 범위의 것이었다. 뛰는 동안, 나는 고백이란 단어에 대해 새로운 정의를 찾아냈다.

 

 고백

  -폐활량 증가에 도움이 된다.

  -몸 안에 새 공기가 들어오는 일. 어떤 환기시스템.

 

 

 

   집에 오니 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후면 드디어 풍송동의 대공사가 시작된다는 것. 몬스터를 잡으려던 사람들의 관심이 모두 유해폐기물로 번져온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원인 제공자들이 어떻게 책임을 지는지 보는 눈이 그 전에 비해 많아진 건 사실이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러 사람들이 사과 릴레이를 했다. 둘째와 막내에게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기도 했는데, 엄마가 거절했다. 관심이 고팠던 적이 있지만, 또 이렇게 몰리는 관심은 무서웠다. 간혹 과격한 댓글을 보면 이게 이슈화되길 바랐던 마음과는 별개로 퍼뜩 무서운 생각이 들곤 했다. 개학이 두려웠다. 전교에서 한두 명만 알아도 결국은 다 퍼지는 게 학교의 구조니까. 기자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유효기간이 길어서 문제가 된 적보다 그 반대쪽이 늘 문제라고.

 

   친구 하나는 우리와 관련된 기사를 읽고, ‘못된 놈들은 다 죽었으면 좋겠어. 벌 받을 거야.’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나를 위로하려는 의도는 고마웠으나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했다. 누군가 자살이라도 해야 이 사태가 마무리되는 것 아니냐는, 그런 댓글도 읽었던 것이다. 표적이 딱히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마티할머니의 말대로 우리 가족은 좀 애매한 지점에 놓여 있었으니. 아빠가 그런 댓글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아침에 앞 동, 루의 창문을 보다가 몇 번이나 눈을 비빈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블라인드가 걷혀진 채였는데, 거기에 넥타이를 맨 와이셔츠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마치 와이셔츠 입은 사람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자세히 다시 보면, 그저 와이셔츠와 넥타이였는데 말이다. 루는 또 어떤 제사에 가는 모양일까, 그 생각이 든 건 오래 전에 아빠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였다. 센터에서 1년에 한번, 실험동물을 위한 위령제를 지낼 때 꼭 검은 양복에 검정 넥타이까지 갖춰 입고 오는 사람이 루라고 했다. 루는 그런 사람이었다.

 

   공사 하루 전날, 우리 셋도 부모님을 따라 나섰다. 반대할 줄 알았는데 잠깐이라는 전제 하에 우리의 풍송동 행이 허락되었다. 우리 셋은 저장고의 자물쇠를 풀고, 그 안의 것들을 선별해서 버리기로 했다. 지하저장고는 그동안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어찌 보면 비소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공간이었지만, 자물쇠 달린 빈 공간 하나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 셋에겐 꽤 안심이 되었다. 그 안에 뭐 특별한 걸 넣어둔 건 아니었어도. 내일이면 없어질, 오늘까지만 유효한 공간, 마당에 흉터처럼 남은 그 문짝, 우리 셋은 거기에 걸어둔 자물쇠를 열기 위해 몸을 구부렸다.

 

   저장고 문을 여는데 세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걸어둔 자물쇠들은 이미 다 열려 있었다. 그것도 놀라웠지만, 아무 잠금장치도 없는 문을 여는데 세 시간이나 걸렸다는 게 더 놀라웠다. 왜 그랬을까. 저장고 내부에서 자물쇠를 걸어두었던 것이다. 결국 그 문을 완전히 부수고서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안에는 이미 누군가가 있었다.

 

   낮은 탄식, 나가라고 말하던 소리, 119를 외치던 소리. 내가 어둠 속 검은 물체에 초점을 맞추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는데, 내 눈보다 조금 더 빠른 손이 시야를 가렸다. 엄마였을 것이다. 아빠였거나. 나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어떤 순간은 속도와 순서를 초월해서 통째로 각인되어 버린다. 나는 그걸 모든 게 정지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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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타고 2017년 윤고은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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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21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20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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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에게 물어보려고 한동안 품고 다니던 질문이 있었다. 아저씨는 어느 편이에요? 토끼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비소라고 생각하세요? 아저씨가 자루를 들고 왔잖아요. 실제로 그런 질문을 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다만 어느 기사에서 루의 말을 몇 줄 읽을 수 있었는데, 처음에는 루가 아니고 소장의 말인 줄 알았다. 언젠가 소장이 아빠에게 했던 말과 닮아서.

 

   무책임한 허위 신고로 인해 회사의 이미지가 실추되었고, 직원들도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기사는 우리 마당에 대한 게 아니고 센터가 휘말린 다른 문제에 대한 거였는데, 루의 저 말이 어쩐지 내 질문에 대한 답처럼 느껴져서 낯설었다. 아마도, 아빠가 거부한 일들을 루는 그대로 진행하는 모양이었다. 그중에 우리 마당의 일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고, 비슷한 다른 일들도 있을 것이다.

 

   기자는 지롱이의 탄생 비화에 관한 기사를 썼다. 그 기사에 따르면, 풍송동에 오래 거주한 주민이 골목 낙서에 대해 민원을 제기하면서 지렁이 좀 와서 보라니까.’라고 말한 게 시작이었다. 여러 지자체 담당자를 오가는 동안 이미 문서 위에 지롱이가 등장해 있었는데, 주민의 잘못된 발음(‘에 가깝게)을 모두가 의심 없이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게임 회사에서도 지롱이라는 말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지롱이는 그냥 지롱이로 남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가 기사의 본론이었다.

 

   지롱이 뒤에는 유해폐기물을 주택가에 매립해놓고 모르쇠로 일관한 기업과, 그것을 짐작하고도 방치한 지자체의 고질적인 직무유기가 있었다. 아이들이 뛰노는 그 골목에 1급 발암물질인 비소가 방치되어 있다면?’

 

   이 기사로 인해 기자가 또 피해를 입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기자 말대로 타이밍이 중요했다. 기자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거기에 정확하게 올라탄 것이다. 나는 기사를 보고 기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포켓몬이 우릴 도운 거예요?’ 하고. 곧 이런 답이 왔다.

   구청장! 줄줄이 뇌물 먹은 거.’

 

   최근에 뇌물 수수로 시끄럽게 된 구청장이 센터의 견고한 인맥이라고 했다. 그쪽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센터에서 쉬쉬하던 일들이 불거져 나왔고, 그중 하나가 우리 마당의 일이었다. 센터는 비소를 쓰지도 않았다고 주장해 왔는데, 그 즈음 센터의 비소 구입 내역이 공개되자 말을 바꿨다. ‘비소가 동물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험하려 했다는 거였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설마 그 동물이 우리 식구를 말하는 건가 싶어서였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은가. 센터에서 비소가 토끼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정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센터의 입장은 다른 증언들이 나오면서 흔들렸다. 애초부터 토끼와 비소를 결합한 어떤 실험을 하려던 게 아니라 그건 단지 사고였던 것이다. 실험A에 쓰려던 비소를 소홀하게 관리해서 실험S의 토끼들이 비소에 오염된 것뿐이었다. AS는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 그렇게 합쳐진 것뿐이었다. 3년 전 그 무렵엔 센터가 동물실험 후처리를 대충 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었고, 여러 국가 지원 감사가 있었기 때문에, 센터는 임시로 폐기물을 숨겼다. 바로, 우리 집에. 파낼 깊이가 충분한 마당이었다는 이유로. 그런데 센터가 건립 중이던 폐기물 보관소가 여러 이유로 지연되고, 그 일을 진행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그만두면서 우리 마당의 일은 허공에 뜬 거였다. 그렇게 임시보관소였던 곳이 영구적인 게 되고 말았다.

 

   어쩌면 센터는 폐기물만 거두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우리 골목이 게임으로 유명해지는 바람에 상황이 달라졌다. 우리 마당에서 토양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지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지하 3m 지점에서 채취했을 때 비소가 기준치의 2, 지하 6m 지점에서 채취했을 때 3배로 검출되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마티할머니 집의 토양 검사도 했는데 다행히 거긴 정상이었다. 우리 방과 부엌과 거실의 먼지를 끌어 모아 검사했는데, 그곳은 수치가 좀 높았다. 마당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폐기물을 몇 겹으로 봉해서 지하 깊이 묻은 게 다행이었을까. 그러나 마티할머니 말대로 비가 올 때마다 나쁜 성분이 조금씩 어딘가로 흘러가버렸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할머니는 뒤늦게 난리가 나서, 아빠에게 당신도 피해자라고만 할 수 없다고 했고, 아빠도 그걸 인정했다. 그리고 우린 벌을 받고 있었다.

 

   구청과 시청과 센터와 환경부까지, 떠넘기기가 오가는 과정에서 언젠가 우리가 녹음한 소장의 목소리와 둘째의 일기가 증거물로 제출되었다. 둘째에게 동의하느냐고 물었던 사람이 있었는데, 동의하지 않으면 어쩌겠는가. 저울 한 끝에 일기장이, 다른 한 끝에 전부가 있는데. 결국 센터 측은 고의적인 방치였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판단 착오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저희 센터에서는 자체적으로 이 일에 대한 책임 소재를 밝혀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폐기물 이송을 완료하고, 그 일대를 소독 처리하겠습니다. 전문업체와 상의해본 결과, 산과 같은 화학약품을 이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최근에 개발된 기술로, 기계 내부의 바람을 이용해 흙 속에서 중금속 알갱이만 골라내는 게 가능합니다. 이 일로 심려를 끼쳐드려 지역 주민께…….”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우리가 아는 소장은 아니었다. 소장은 해외에 체류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렸고, 이 사태와 얽힌 관련자는 모두 책임을 지게 될 거라고 센터 측이 말했을 뿐이다.

 

   그럼 우리 슈퍼지렁이도 해외에 있겠네?”

 

   막내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글쎄. 나는 그가 우리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그 지렁이가 담겼던 지퍼백을 흔적 없이 버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동안 내가 많이 검색해본 단어는 비소폐기물이었다. 끔찍한 사례를 많이 본 나머지 우리 마당의 비소가 기준치의 2-3배라는 결과를 들었을 때 생각보다 약한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갑자기 암 환자가 늘어난 마을, 비소가 기준치의 8배로 나왔다는 사과주스, 수십 년간 기준치의 20배나 되는 비소가 묻혀있었던 도로변, 몰래 유해폐기물을 묻었다가 양심 고백한 내부고발자, 수많은 이야기들이 우리와 닮은 듯 다른 듯 있었다.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그 이야기들을 견과류처럼 꼭꼭 씹었다. 이제는 같은 검색어를 입력하면 우리 집 기사도 끌려나왔다.

 

   나는 최근에 좀 특이한 형태로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어떤 단어에 대해 내 방식대로 기록하는 거였다. 나만의 사전, 정도가 될까? 거기에 비소를 적고, 뭔가를 더 써보려 했지만 몇 줄로 정의하기가 확실히 어려웠다. 주입식 교육의 폐해일까, 나는 이렇게 적고 말았다.

 

  비소

   -As

   -중요한 건 아니라는데 가장 먼저 외워진 이름

 

 

  그 앞 페이지에는 뒤뒤가 있었다.

 

  뒤뒤

   -진짜 나쁜 놈들은 항상 뒤, 뒤에 숨어 있다.

   -그런데 가끔은 내 뒤, 뒤에 좋은 사람이 올 때도 있다.

 

 

   뒤뒤가 내 뒤, 뒤에 앉은 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엄마를 따라 나올 일이 있었는데, 낯선 동네에서 뒤뒤를 봤던 것이다. 뒤뒤는 편의점에서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엄마가 주차를 하는 사이에 뛰어가서 뒤뒤의 어깨를 툭 쳤다.

 

   뒤뒤, 뒤뒤!”

 

   뒤뒤는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랐다.

 

   여기서 뭐해?”

 

   간식 샀는데? 너 이거 먹어봤어? 이거 지금 투플러스원이야. 딸기 맛하고 바나나 맛이 있는데 딸기 맛으로 세 개 통일했어.”

 

   뒤뒤가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하나를 내밀었다. 뒤뒤는 집에서 막 나온 것 같은 차림새였고, 어쩐지 당황해하고 있었다. 저렇게 두서없이 중얼거리는 걸 보면. 아아,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혹시나 싶어서 , 설마 이 근처에 살아?’ 하고 물었는데 뒤뒤가 그렇다고 해서 그때부터 내가 당황하기 시작했다.

 

   집이 우리 동네 아니었어?”

 

   집은 여긴데.”

 

   ? 난 네가 우리 동네에 산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아아, 14909가 마음에 들었거든.”

 

   “14909?”

 

   너희 집 앞 버스정류장 번호. 난 그 14909를 지나서 학교로 가는 그 노선이 좋았다니까.”

 

   여기서 우리 동네까지 왔다가, 다시 거기서 학교로 간 거라고? ! 여기서 학교까지는 걸어서도 갈 수 있는데? ?”

 

   알면서 뭘 자꾸 물어보냐!”

 

   저만치서 엄마가 뭐가 그리 오래 걸리니, 하는 표정으로 날 쳐다봤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말했다.

 

   일단, 나중에 얘기해.”

 

   사실은 엄마 때문만은 아니었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는 것 같아서였다. 나는 다시 뒤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개학하면 이제 그쪽으로 오지 마. 이사 간단 말이야. 어차피.”

 

   이사?”

 

   이제 다시 원래 동네로 갈 거야. 몇 달 안 걸려.”

 

   꿈이 아니고 진짜?”

 

   .”

 

   너 기분 진짜 좋겠네, 하고 뒤뒤가 말했는데 이상했다. 기분이 좋은가?

   집에 대해서라면 난 좀 차분해진 상태였다. 우리 가족 모두, 그리고 그 골목의 이웃들 모두가 머리카락 등을 제출해서 중금속 오염도를 검사해야 했다. 다행히 크게 문제가 있다고 나오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을 품고 있었을 마당을 생각하면 막연해졌다. 옛 집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다시 양파를 심고 마늘을 거두고 배롱나무 밑에서 혼나고 채송화가 번식하는 걸 볼 수 있는 걸까.

 

   구청에서는 우리 골목 일대에 몬스터 관련 테마파크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일대를 포켓몬 관련 공사 진행 때문에 폐쇄한다고 공지했다. 발 빠르게도, 게임 회사에서는 지롱이에 대한 추가설명 한 줄을 배포했다.

  '지롱이는 독을 먹고 진화하며, 해독능력도 뛰어나다.’

 

   둘째가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 지롱이가 풍송동 낙서에서 시작된 게 사실이라며 들떠 했다. 그러더니 내게도 부탁을 했다.

 

   누나가 이 번호로 걸어서, 물어봐줘. 정말 지롱이가 풍송동 담벼락의 낙서에서 시작된 게 사실인가요-이렇게 말해. 아, 그리고 해독능력이 뛰어난 것도 사실인가요, 이렇게.”

 

   이미 물어봤다며.”

 

   누나가 해도 사실인지 궁금하다고!”

 

   결국 나는 전화를 걸어서 둘째가 시키는 대로 했는데, 전화기 너머 직원이 다소 지쳤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

 

   저기요, 같은 번호로 다섯 번째 전화하시는데요, 확실히 그렇다고 말씀드립니다.”

 

   얼굴이 시뻘개져서 그 말을 전해주자 둘째도 얼굴이 시뻘개졌지만, 지롱이에게 자신이 영향을 끼쳤다는 게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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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20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16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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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벼락의 슈퍼지렁이 그림이 어떻게 그 게임 속 몬스터-지롱이가 된 것인지,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여러 설이 있었고, 모두 믿고 싶은 이야기를 골랐다.

 

  아빠와 엄마는 일단 지롱이든 지렁이든 슈퍼지렁이든, 그들 사이의 연관성을 배제했다. 그러니까 지롱이는 그냥 우연인 것이고, 슈퍼지렁이는 담벼락에 그리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이유는 골목의 미관상 문제였다. 아빠는 공사가 바로 시작될 줄 알고 아이들의 낙서를 방치한 게 잘못이었다고 말했는데, 그 과정에서 엄마가 나머지 넷의 비밀(풍송동 행)을 알게 되었다. 아빠는 우리가 한 낙서가 끝말잇기처럼 다른 낙서들을 불러온 거라며 우리를 혼냈고, 엄마는 거기에 우리를 데려갔다는 점에서 아빠를 혼냈다. 우리 셋이 최근에 그쪽에 간 건 절대, 절대 몰라야 했다. 이럴 때마다 지퍼처럼 여닫기 간편한 입 하나가 가장 걱정스러웠는데, 나와 눈이 마주친 막내가 찡긋 한쪽 눈을 감아보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둘째는 우리의 낙서를 분명히 마티할머니가 어딘가에 일러바쳤을 거라고 말했다.

 

   포켓몬고 회사에다가 마티할머니가 일러바친 게 아닐까? 요 놈 좀 써 봐, 하면서. 슈퍼지렁이라던데, 하면서. ? 그 골목에선 마티할머니가 짱이잖아.”

 

   둘째가 보여준 게임 화면에 박사에게 보내기버튼이 있었는데, 그 버튼을 누르는 의미에 대해 둘째는 신나게 설명했다.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모르겠는 얘기였는데, 그 얘기를 듣더니 막내가 불쑥 끼어들었다.

 

   마티할머니가 그 박사다!

 

   게임을 모른다고 해도, 그 얘기에는 동의할 수가 없었다.

 

   내게도 믿고 싶은 구석이 있었다. 한 달 반 만에 기자에게서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기자는 우리 부모님께 직접 연락하겠다면서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쩌면 그 기자가 유행하는 게임을 통해 새로운 출구를 만든 게 아닐까? 이 모든 게 우연일까? 부모님은 기자의 연락에 반색을 했다. 풍송동이 속한 구청에서도 전화가 왔다. 갑작스러운 연락이 오는 것에 우리 모두가 놀랐다. 한동안 아무리 두드려도 꿈쩍도 않던 문들이 갑자기 일제히 열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구청 입장에서 보면 아빠는 악성민원인이었다. 구청 직원 하나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아빠에게 들켜버렸기 때문에 하마터면 싸움이 날 뻔도 했다고 들었다. 시작은 오래전 토양 오염 검사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풍송동 집은 이미 세 차례나 흙을 파서 중금속 수치 같은 걸 검사했고 항상 기준치 이하’, 그러니까 정상인 걸로 나와서 아빠가 믿을 수 없어 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센터 뿐 아니라 구청도 함께 한 검사였는데, 구청에서는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계속 하시려는 겁니까? 문제가 있다고 나와야 안심하시는 것 같잖아요.” 라고 해서 아빠를 화나게 했다. 아빠는 그게 왜 기준치 이하가 나온 것인지 그 경위를 따져 물으려 했고, 1m도 파내지 않고 조사한 시료를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따졌고, 그래서 피곤한 민원인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구청 측에서 오히려 전화가 걸려온 거였다. 그동안 제기된 민원을 다시 검토하는 주간이라고 했는데, 그 민원이란 게 우리 식구뿐 아니라 아주 여러 경로에서 출발한 거여서 오히려 우리가 좀 놀랐다. 구청에서는 확인할 게 있다며 아빠와 만날 약속을 잡았다.

 

   슈퍼지렁이와 지롱이의 관계에 대해 또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된 건 마티할머니를 만나고부터였다. 우리가 찾아갔던 그날엔 마티할머니를 만날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오히려 그 골목 밖에서 기회가 생겼다. 학원에서 방학특강을 여섯 시간이나 듣고서 버스에 탔을 때였다. 뒤뒤와 영화를 보기로 했는데 혹시나 해서(뒤뒤의 땡땡이에 연루되고 싶지 않아서) 아예 뒤뒤가 끝날 시간에 그 애의 학원 근처에서 보자고 했다. 엄마가 들으면 황당해 할 일이지만(아마 너나 잘 해, 이것아.” 했을 거다.) 버스에 앉아 거리의 간판들을 읽는 것도 내 취미였다. 나는 뒤뒤를 배려한 게 아니라 취미생활을 하는 것뿐이었다. 자꾸 옷매무새에 신경 쓰면서 말이다. 원피스 밑자락이 의자와 내 허벅지 사이에서 구겨지는 것이 싫어서 살짝 엉덩이를 들었다. 단지 옷의 주름을 바로 잡으려고 했을 뿐인데, 그때 누군가가 내 등을 그대로 앞으로 밀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아유, 고마워요.”

 

   나는 얼떨결에, 졸지에 자리를 양보한 셈이 되었다. 뒤에 할머니가 서 있는 줄도 몰랐는데, 그 할머니가 마티할머니일 줄은 더더욱! 할머니는 내가 인사를 하고서야 나를 알아봤는데, 나보다 더 놀랐다.

 

   본판 아깝게 그 뭐냐, 옷차림이.”

 

   내 차림새 때문에 놀랐다는 식이니 이게 웬 테러란 말인가! 완전히 사기를 저하시키는 말이었는데, 나는 오늘 코디에 꽤 신경을 쓴다고 썼던 것이다. 곧이어 할머니가 저고리가 어쩌고 구멍을 꿰매고 어쩌고 해서 약간 안심했다. 할머니의 기준을 너무 믿지는 말자, 싶었던 것이다. 나보다 족히 60년은 더 사신 분이니.

 

   골목이 난리 난 걸 알고 있냐? 집 공사를 시작할 것처럼 하더니만, 담벼락에 낙서를 그렇게 해놓고, ? 아주 도떼기시장이 됐다고.”

 

   게임하러 사람들이 많이 온다면서요? 할머니 포켓몬고 아세요?”

 

   알고 싶지 않다.”

 

   아아, .”

 

   저번에는 마당 가지고 그렇게 신경 쓰이게 하더니 이젠 또 담벼락 가지고 난리냐. 다 너희 집 낙서 때문에 시작된 일이야. 책임을 져야지.”

 

   낙서요?”


   그게 너무 꼴 보기 싫어가지고 구청에 전화를 하니까 시청으로 하라 그러고, 시청에 전화를 하니까 주민센터로 하라 그러고. 주민센터에서는 또 무슨 페인트업체를 연결시켜 주더만. , . 한 댓 군데 통화한 것 같은데. 최종적으로 어디에 신고했는지 기억도 안 나, 지금. 갑자기 듣도 보도 못한 데서 찾아오질 않나?”

 

   어디서요?”

 

   몰라, . 뭐라더라. , 뭐라더라.”

 

   마티할머니가 그 무언가를 기억해내길 기다리느라 나는 내려야 할 지점을 놓쳤다. 할머니는 두 정거장 쯤 더 흘러간 다음에야 그 무언가를 기억해냈다.

 

   그래, 구청이었어.”

 

   구청에서 전화를 넘겼다면서요. 다른 데로.”

 

   아냐, 근데 끝에는 구청에서 다시 전화를 했다고. 그 담벼락 그림이 생각보다 재미있다면서 그걸 홍보에 활용한대. 그러더니 지금 아주 그 모양이 됐지 뭐냐. 그 짐승 잡는 거 있잖니, 그런다고 죄다 와서 그 모양이야.”

 

   그러니까 구청에서 그 담벼락 낙서를 활용한 거예요?”

 

   몰라. 웬 그 짐승 낚시 회사랑 같이 왔다니까.”

 

   포켓몬 회사요? 구청에서 포켓몬 회사에다가 연락을 한 거예요?”

 

   알게 뭐냐.”

 

   이건 둘째가 예상한, 내가 비웃었던 시나리오 아닌가? 결과적으로는 마티할머니가 영향을 끼친 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미 몇 정거장을 지나친 나는 초과한 거리만큼 뒤로 걸어가 뒤뒤를 만났다. 우리가 교집합으로 공유할 수 있는 시간은 세 시간 정도였고, 영화는 두 시간짜리였다. 뒤뒤는 갑자기 그 사실을 상기시키더니, 영화를 다음에 보자고 했다.

 

   ? 우리 영화 보려고 만난 거 아냐?”

 

   그렇긴 했는데. 영화를 보면 한 시간 밖에 안 남잖아. 아까워.”

 

   뭘 하고 싶은데?”

 

   그냥 너랑 얘기하고 싶은데? 영화보다 훨 재미있거든.”

 

   사기 당했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나도 영화가 많이 아쉽지는 않았다. 우리는 스파게티를 사먹고 던킨에 가서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가파른 계단으로 이어진 산책로로 조금 걸었다. 어둑한 계단에서 내 발 하나가 오른쪽으로 홱 꺾이며 휘청, 했는데 그 바람에 뒤뒤가 우당탕탕, 했다. 볼링핀처럼 같이 무너진 거였다. 우리는 화들짝 놀랐다가 동시에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는데 갯벌은 아니지만 또 넘어졌다는 사실이 우스워서였다. 웃음이 바람을 닮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 서운한 곳에서는 내 안에서 바람을 만들어내면 되는 것 아닌가? 제일 쉬운 건 웃는 거였다. 웃는 동안 몸 안에서는 모든 게 줄넘기를 한다.

 

   아아, 근데 나 발목이 좀 아픈 것 같아.”

 

   뒤뒤가 말했다. 어제 애들이랑 농구하다가 발목을 삐끗했는데 거길 또 접질린 것 같다면서. 엄살 아니냐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면서도, 나는 뒤뒤가 한 팔을 내 어깨에 두르고 계단을 내려오는 걸 허락했다. 필요 이상으로 뒤뒤의 팔이 무겁게 느껴져서, 모든 체중을 나한테 싣지는 말라고 했더니 뒤뒤가 말했다.

 

   , 너 나한테 고마워해야 돼.”

 

   ……?”

 

   나 지금 완전히 업히려다가 참고 있는 거란 말이야.”

 

   뒤뒤는 새침한 표정까지 지으며 말했다.

 

   너니까. 배려하는 거라고.”

 

   문제는 사실 무게가 아니라 거리였다. 뒤뒤의 숨소리가 내 오른쪽 귀에 작게 노크 하는 것 같았다. 걸음도 마음도 조심조심, 그렇게 계단을 다 내려온 다음에 뒤뒤는 깡충깡충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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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타고 2017년 윤고은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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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19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13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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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이 지나간 타이밍,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에 흰 구름이 몇 점, 단지 관상용이라는 듯 떠 있었고, 햇빛은 적당한 속도로 골목길을 달궜다. 낯선 사람들이 이 풍송동 골목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 셋도 있었다.

 

 

  마당을 빌려준다는 게 어떤 건지 종잡을 수 없었던 그날이나, 이 일대에서만 잡힌다는 희귀 몬스터를 보러 온 오늘이나, 어리둥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골목을 통과하는 게 아니라 목적지로 생각하고 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우리에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관계없는 건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우리 셋의 표정은 몇 년 전 그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적당히 불안했고, 거품처럼 약간의 들뜸이 있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우리의 정수리 높이 같은 거였다. 나이순으로 섰을 때 예전엔 한쪽이 기울어진 사선 형태였다면, 지금은 가운데가 삐쭉 솟아나 있었다. 그때만 해도 키가 큰 편이었던 나는 중학교에 들어오면서부터 보통 키가 되었고, 몇 년 후면 평균보다 좀더 작은 편이 될 게 분명했다. 그런가하면 둘째는 나보다 다섯 살 어렸지만 이미 내 키를 넘어섰다. 어쩌다보니 이제 산 모양이 된 우리 앞에서, 낯선 사람들은 저마다의 보폭으로 걷고 있었다. 한손에 휴대폰을 들고, 손가락을 활 켜듯이 위로 툭, 툭, 튕기면서.


  “휴대폰 화면 안에서만 보이는 거지, 포켓몬이?”

 

  내가 묻자, 둘째는 물론이고 막내까지도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그 풍송동 50번지부터 55번지 사이, 그 일대에서만 잡히는 몬스터가 있다는 건 그 게임을 하지 않는 나로서는 살짝 꿈같은 얘기로 다가왔는데,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손에 잘 잡히지 않았다. 뒤뒤 말에 따르면 그 게임을 하는 사람들한테도 그건 꿈같은 얘기라고 했는데, 내가 느끼는 막연함과는 좀 다른 의미의 꿈인 것 같았다.


  뒤뒤는 몇 가지 전설적인 몬스터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에베레스트에서만 나타난다는 몬스터를 잡기 위해 실제로 에베레스트를 오른 사람의 이야기까지 들었는데, 소문과 실제가 늘 일치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에베레스트에 오른 사람은 그곳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고 했으니까. 그의 휴대폰에는 텅 빈 게임 배경만 잡혔다. 마찬가지로 둘째의 휴대폰 속에도 딱히 뭐 보이는 건 없었다. 우리가 지금 이 골목에 와 있는데도 말이다.


  이미 한쪽이 철거되기 시작한 이 골목엔 차도 사람도 많이 다니지 않아서 넋을 놓고 걷기에 적합해보였다.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처럼. 그게 그 게임회사에서 우리 골목을 활용한 이유였을까? 물론 지금은 사람들이 북적북적했다. 둘째가 아직 잡지는 못했지만, 이 일대에서만 나타난다는 그 희귀한 몬스터의 이름은 ‘지롱이’였다. 그 지롱이의 생김새는 게임을 하지 않아도 검색만 하면 쉽게 찾을 수 있었는데, 보는 순간 팔에 소름이 돋았다. 막내가 우리 집 담벼락에 그려놓았던 슈퍼지렁이 그림과 너무 흡사해서였다. 우리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건가? 순서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지롱이라니 그건 정말 우리가 알던 슈퍼지렁이의 짝퉁처럼 생겼다. 우리 집 이야기가 지롱이의 탄생에 기여한 것 같은 생각도 들었는데 물론 심증일 뿐이었다.


  실제로 슈퍼지렁이가 그려진 우리 집 담벼락은 이미 포토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거대한 스케치북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담벼락을 들여다보면 슈퍼지렁이의 수가 더 늘어나 있었다. 다양한 사이즈로, 다양한 표정으로. 처음 우리가 그렸던 걸 제외하면, 모두 길 가던 사람들이 그린 거였는데 너무 익살맞아진 나머지 나중에는 거의 꽈배기처럼 생긴 것도 보였다. 그 꽈배기 같던 지렁이의 모습이 게임 속 지롱이 이미지와 비슷했다. 


  동생들은 몹시 들떠 있었는데, 셋이서만 풍송동에 온 게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골목 입구에서부터 초록색 대문 앞까지 전속력으로 뛰며 시간을 재는 애들을 보고 게임에 빠져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단지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오는 경로를 최대한 단축하고 싶어서 여러 실험을 하는 중이었다. 원래는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미소약국을 끼고 우회전한 다음 다섯 번째 골목으로 슝 들어가면 집이 나오는 건데, 골목 두 개가 합쳐졌고, 그리고 미소약국이 사라졌다.

  

  미소약국 자리엔 어느새 인형뽑기 가게가 들어섰고, 언제든 또 다른 걸로 바뀔 수 있을 만큼 가뿐해 보였다. 미소약국이 그만두기 전에 우리 아빠랑 상의를 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쉬웠다. 아니다. 간판은 바뀌었지만, 저 통유리는 그대로 아닌가? 아빠가 갈아준 유리창은 여전히 그대로란 사실이 꽤 위안이 됐다. 어쨌거나 이제는 다른 이정표들이 필요했고, 아는 길 말고 새 길을 뚫을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요약된 경로는 이랬다.


  1. 버스를 타고 ‘풍송파출소 앞’에 내린다.

  2. 정거장에 내려서 버스 가는 방향으로 조금 직진. 오른쪽에서 인형뽑기 집을 발견하면, 그걸 끼고 돈다.

  3. 현재 기준으로는 세 번째 골목으로 들어간다. 골목 입구에서 마티할머니네 굴뚝이 보이는지 확인하기.


  대문 열쇠는 항상 두는 그 장소(우편함을 들면 나타나는 비밀장소)에 있었다. 지붕 달린 집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해도(건물 열쇠는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피자를 배달시켜 마당에서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들떴다.


  “누나, 우리도 개 조심 붙일까?”


  막내가 말했다. 마티할머니네 집 대문에 ‘사나운 개 조심’이라는 종이가 붙어 있는 걸 본 영향이었다. 그 종이를 보고 우리는 처음에 웃었는데, 마티가 그새 사나워졌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우리 대문에도 그런 거짓말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초록색 대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보고서 몇 사람이 우리 대문 안쪽을 기웃거렸고, 몇은 따라 들어왔고, 심지어 누군가는 ‘화장실이야?’ 따위의 말을 해서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한 꼬맹이가 우리 마당 아래로 난 지하창고의 문을 열어보려고 할 때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나는 얼른 말했다.


  “여기 저희 집인데요.”


  동생들은 우리 골목이 유행하는 게임 화면 안에 등장한다는 사실에 엄청 들떠 있었지만, 이 게임에 연루된 사실을 짜증스러워하는 동네들도 꽤 있다는 걸 뉴스에서 봤다. 엄청난 인파가 늘 출근길과 등굣길과 조용한 산책을 방해한다고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외부인들이 모두 나간 후, 아예 초록색 대문을 닫아버렸다. 막내는 더 이상 3년 된 채송화 얘기를 하지 않았지만, 마당 끝에서 아무도 가져가지 않을 것 같은 자전거 한 대를 끌고 와서는 이걸 숨겨 놓자고 했다. 막내가 마당에서 주워든 건 대부분 고물이었지만, 우리는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하다못해 마당의 모서리에 세워진 고무호스나 나지막한 나무의자 같은 걸 타인이 쳐다보면 그게 꼭 시선만으로 닳아 없어질 것 같았다.


  “못 들어오게 열쇠를 우리가 가져가면 되지.”

  내 말에 둘째가 목이 댕강 달아나는 시늉을 했다.

  “열쇠는 그 자리에 있어야지. 아빠가 알아봐.”


  집 건물로 들어가는 열쇠는 없었으니, 이 마당 안에서 내가 열어볼 수 있는 문이라고는 마당 아래로 난, 그 저장고뿐이었다. 우린 잡동사니를 저장고 안으로 집어넣었다. 양동이 하나, 물뿌리개까지 모두. 내가 저장고 안으로 내려가 물건들을 전달받았다. 지하의 서늘한 공기가 오랜만이어서 잠시 서 있으니, 동생들이 굳이 내 곁으로 내려와서 따라했다. 문을 열 때마다 햇빛이 손전등 역할을 하는 것도 같았다. 암흑 속에서 춤을 추고 있던, 허공의 먼지들이 어디로도 숨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는 게 보였다. 아주 잠시였지만, 모든 게 멈춘 것 같은 그 느낌이 좋았다.


  “우주에 온 기분이야.”


  둘째였나, 막내였나, 누군가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어쩌면 먼지는 조금 무게가 가벼운 별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우리의 발 아래에 뭐가 있는지는 잠시 잊어도 좋았다.


  우리는 그 저장고에 자물쇠를 채웠다. 손에 잡히는 걸 다 걸어보니 세 개였다. 어쩌다보니 삼중 잠금장치가 된 셈이다. 다시 초록색 대문 밖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더 늘어나 있었다. 둘째가 불법 앱 하나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제 지롱이 출몰시간이 3분 남았대.”


  우리도 많은 사람들처럼 휴대폰 속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일몰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몬스터 출몰을 기다리다니. 그런데 시간의 공백이라도 있었던 걸까. 3분이 지났지만, 골목에서 지롱이를 발견한 이들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당황했는데 둘째는 오히려 덤덤했다.


  “이 지롱이를 잡은 사람이 생각보다 적거든. 전 세계에서 두 명이라던가?”


  그러자 막내가 받아쳤다.


  “엥? 우리 반에서 두 명이나 잡았는데?”


  둘째는 그럼 우리 동네에서 두 명인가, 하고 정정했다. 아무튼 생각보다 적다는 얘기였다. 우리가 그 골목을 벗어나기 시작하자 골목의 창문 하나가 스르륵 열린 것도 같았는데, 그쪽으로 시선을 보내자 급히 내부를 감추는 게 보였다. 얼핏, 그 몸짓이 윙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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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타고 2017년 윤고은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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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18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09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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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는 막내를 일주일에 세 번 있는 수영 강습에 보냈다. 어수룩한 신문에서 봤던 대로, 그 수영장은 지역사회에 환원하고 어쩌고 하면서 소장이 자랑했던 시설 중 하나였다. 막내는 꽤 적응을 잘 해서, 시도 때도 없이 수영장에 가고 싶어 했다. 엄밀히 말하면 수영 자체보다도 수영을 오래 한 다음에 손가락 끝을 보는 걸 더 좋아했다.


  “쪼글쪼글한 게 좋아. 이렇게 되려면 진짜 수영을 열심히 해야 돼. 그래야 이렇게 된다고.”


  나는 오며가며 수영장 유리벽에 달라붙어 내부를 구경했다. 막내의 강습시간에 맞춰 가서 통유리 너머로, 노란 수모를 찾아보기도 했다. 노란색 모자가 너무 많아서 한눈에 막내를 찾기는 힘들었지만, 수모 쓴 사람들의 머리가 레인을 따라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고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졌다. 오선지 위의 알록달록한 음표들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걸 보고 있으면 옆에 나와 닮은, 나보다 조금 큰 귀가 와서 합류했다. 방학이 시작된 후에도 뒤뒤와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마주쳤는데, 뭐, 상세하게 내 동선을 안내해준 건 나였으니 뒤뒤가 신통하다고 할 것도 없다.


  『어린왕자』해적판을 내게 준 사람이 루라는 것을 알고부터, 뒤뒤는 독서가 스포츠라도 된 것처럼 서두르기 시작했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같은 듯 다른 두 권을 모두 읽고 오는데 성공했다. ‘성공했다’는 건 너무 과한 표현이 아닐까 싶지만, 뒤뒤가 꼭 그렇게 말했다. 내가 해적판에서 뜯겨나간 두 장이 궁금해죽겠다고 하자, 뒤뒤는 자신이 그 해적판의 원형을 찾아내겠다고 했다. 그런 책은 누구나 쉽게 흔하게 구할 수 있다면서, 아주 흔한 거라는 걸 몇 번이나 강조하면서. 의지는 좋은데, 아직 이렇다 할 성과는 없어보였다.


  태풍은 몇 차례나 올라온다고 했다가 우리 도시에 닿기 전에 소멸되곤 했다. 그러더니 모두가 방심하고 있을 때 별것 아닌 것 같던 새끼태풍이 온 도시를 긁어놓았다. 일주일 내내 바람 소리가 요란해서 단지 창문을 열고(닫아도) 바람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정글에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바람을 동물에 비유하자면 분명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육식동물 쪽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는 어디서 들었다며, 덜컹거리는 베란다 창문에 녹색테이프를 두 줄, 교차해서 붙여놓았는데 별로 효과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팔뚝만한 길이의 일자 테이프 두 줄로 'X'를 만든 수준인데, 전체 유리창의 면적에 비하면 턱없이 작아서 단지 ‘반사!’ 정도의 표식에 불과했다. 태풍이 그걸 깜찍하게 여겨 이집으로 달려들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녹색의 ‘X'자 창문이 달린 집에서 우리는 바람 소리를 들으며 저녁을 먹었다. 아빠가 김치찌개를 끓였는데 부대찌개 맛이 났다. 엄마는 요즘 주택관리사 자격증 때문에 공부를 시작해서 기분으로는 우리 집 고3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빠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 싸움에 대해 물었을 때, 아빠는 반 농담처럼 이런 얘기를 했다.


  “그쪽 변호인들은 뭐, 몇 년 전에는 외계인을 상대로도 승소했다고 하더라고.”


  센터 측 변호인 말이었다. 그런데 외계인이라고? 외국인이 아니고? 나는 어리둥절했는데, 아빠는 그 농담의 효용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외계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없다는 거지. 어떻게든 이긴다는 거야.”


  그때 내 머릿속을 지나간 건 오후에 거리에서 들었던 말이었다. 편의점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 휴대폰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는데.


  “공격을 막는 것만 수비냐? 새끼야, 치기 전에 때리는 것도 수비지.”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 말이 꼭 내게 적용되는 것 아닌가? 내가 그 말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김에 밥을 꼭꼭 싸서 입 안으로 밀어 넣으며 생각했다. 그래, 폭력범으로 고발하지 못한다면 식품위생법 위반으로라도 고발하자! 사기꾼으로 고발하지 못한다면 주차위반으로라도 고발하자!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되는 거 아닌가? 나는 어떻게든 그들이 벌을 받기를 바랐다. 이 소장이 아니면 저번 소장이라도, 저번 소장이 아니면 나중에 올 소장이라도. 누구든, 뒤로 쏙 빠진 책임자들 말이다.


  그래서 나는 몇 차례 엄청난 타격으로 헛스윙을 날렸다. 그중에 가장 강력했던 건 막내가 다니는 그 수영장에 대한 거였는데, 여러 트집을 잡을 만한 부분이 있었다. 수질 관리부터 시작해서 사물함 도난 사고와 아이들의 통제에 서툰 것까지, 그 기자가 관심을 보일만 한 교육계의 일은 아니더라도 뭔가 파고 들어가면 분명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막내의 노란 수모를 찾아내며 흐뭇해지는 것과는 별개로, 수영장이 센터와 관련있다는 점에서 나는 그곳이 싫었다. 그렇게 따지면 이 집도 싫어야 하는 거겠지만 확장하면 너무 머리가 아파오니 그만.


  기자에게 연락하기 전에 일단 수영장 홈페이지의 게시판에 글을 올렸는데, 요지는 수영장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내가 상상한 건 이게 번져서 센터가 운영하는 그 수영장에 대대적인 감사가 시작되는 거였다. 그런데 일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내 글을 시작으로 해서 사람들이 수영 강습에 대한 불만을 내기 시작했고, 일주일 쯤 지난 후에 나는 수영장에서 한 강사가 학부모와 아이 앞에 무릎을 꿇는 걸 보았다. 막내는 그날 엄청 울었다. 다른 아이가 위험하게 장난을 쳐서 선생님이 벌을 준 건데 왜 그 선생님이 그만두어야 하냐는 거였다.


  헛스윙도 바람을 만들 수가 있을까. 그렇지만 엉뚱한 사람이 무릎을 꿇은 걸 보고 나는 거의, 전의를 상실했다. 악몽을 꿨고 새벽 세 시쯤, 일어나서도 다시 잠들지 못해서 베개를 들고 엄마 옆으로 가서 누웠다. 잠든 엄마의 손가락 끝에 코를 가져다대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어릴 때는 엄마 손끝에서는 왜 매일 마늘 냄새가 날까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냄새를 붙잡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진짜 태풍이 오고서야 나는 좀 차분해졌다. 멈춰버린 풍력발전기처럼. 태풍이 오면 풍력발전기를 멈춰 세운다는 걸 이번에 알았는데, 얼핏 이해가 가진 않았다. 바람을 낚는 발전기 입장에서 태풍이란 대목 아닌가? 그러나 아빠는 자칫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부러질 수도 있어서, 발전기를 꺼두는 거라고 했다.


  “날개가 엄청 비싸거든. 너무 큰 바람 앞에서는 꺼두는 게 상책이지.”


  아빠가 말했다. 나는 풍력발전기가 도시의 흔한 가로등처럼 멈춰 서서, 일몰 후 두 시간 동안 불을 켰다 끄는 걸 반복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내가 느끼는 차분함이란 모두가 바람에 시달리고 있으니 차라리 공평하다는, 그런 위안에서부터 출발하는 거였다. 모두가 이 태풍의 경로에 대해 말하는 동안 우리 가족만 앓고 있는 그 토끼냐 비소냐의 문제가 잠시 휴전을 선언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지만 웅크린다고 해서, 태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고 해서 모든 게 정말 무사한 건 아니었다. 태풍이 거리를 휩쓸고 더 위로 올라간 다음 나는 풍력발전기의 날개 한 귀퉁이가 부러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셋 중에 가장 먼저 보이는 풍력발전기였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간판도 떨어뜨리고, 몸 사리던 현수막도 찢어버리는 바람이었다. 바람의 부피와 속도를 측정하려고도 하지 않고, 그걸 이용하려고도 하지 않고, 아무 것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었는데도 풍력발전기의 날개는 부러졌다.


  소문만 무성하다가 결국 도둑처럼 왔던 그 태풍처럼, 우리의 출구도 예상 못한 타이밍에, 예기치 않은 지점에서 뻥 뚫렸다. 여름 동안 둘째에게 벌어진 좋은 일이 있다면 엄마가 휴대폰을 사준 거였는데, 둘째가 새 휴대폰으로 접속한 세계 중에 가장 멋진 건 우리의 옛 골목이었다. 거기에 가볼 생각을 한 건 관성 때문이 아니었다. 풍송동 50번지부터 55번지 사이, 우리의 옛 골목 일대에서만 출몰한다는, 게임 속 몬스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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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타고 2017년 윤고은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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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17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06 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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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뒤 휴대폰의 3등신 사진을 지우는 대가로 나는 새 사진을 찍었다. 풍력발전기를 배경으로 뒤뒤와 같이. 찰칵 소리가 나는 순간, 혹은 그보다 몇 초 빨리, 풍력발전기에 불이 들어왔다. 하나, 둘, 셋, 모두 다홍빛으로 물든 풍경이 꼭 촛불을 켠 것 같았다.


  뒤뒤는 나를 집에 바래다주면 시간이 맞을 거라고 했다. 오늘 나한테 오느라 학원을 빠졌던 것이다. 뒤뒤가 다니는 학원은 엄한 걸로 소문이 나서 한번만 학원을 빠져도 바로 부모님께 연락이 간다. 그런데 거길 땡땡이쳤다고? 뒤뒤는 걱정할 게 없다고 했는데, 뒤뒤의 엄마가 학원의 번호 몇 개를 고의적으로 수신거부하고 있어서였다. 물론 그 고의성은 뒤뒤가 만들어낸 것이었다. 뒤뒤는 엄마의 휴대폰에 학원 관련된 번호를 스팸 번호로 등록시켜두었던 것이다.


  “혹시 너희 엄마도 CSI로 태교하신 거 아니야? 우리 엄만 그랬다던데.”

  

  내 말에 뒤뒤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섹스앤더시티? 그거 좋아하셔.” 


  뒤뒤는 흙투성이인 채로, 내 집 앞까지 함께 왔다. 혹시 식구들과(특히 막내) 마주친다면 피곤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작 집 앞에서 마주친 건 루였다. 오랜만이었다. 시력 때문에 나는 한발 늦었다. 루가 나를 먼저 알아보고 인사를 할 때까지도 몰랐다. 루가 살짝 웃어 보인 것도 같았는데, 가로등 조명 때문에 그렇게 보인 건지 진짜 웃었던 건지 애매했다. 다만 안경을 쓰지 않고도 볼 수 있었던 건 지나치게 차분해진 공기였다. 뭔가가 한 풀 꺾인 것처럼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라는 말은 습관적으로 튀어나왔지만, 말하고 보니 진짜 안녕하신 건지 묻고 싶었다. 아빠의 업무를 루가 이어서 맡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확실히 좀 지쳐보이던 루를 지나친 다음, 뒤뒤가 이렇게 말했다.


  “이번 생이고 저번 생이고 아무 인연도 없는 사람처럼 생겼어.”


  “너 드라마 끊어야겠다. 모든 사람이 너랑 꼭 인연이어야 해?”


  뒤뒤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나 말고 너 말이야.”


  뒤뒤가 돌아가는 걸 보며 그 애가 오늘 무사하길 빌었는데, 생각해보니 내 코가 석자였다. 기말고사 성적이 나왔는데 나는 중간고사 때보다 좀 추락해 있었다. 뒤뒤가 나보다 공부를 더 잘한다는 게 내가 보기엔 꽤 반전이었는데, 아까 그렇게 말했을 때 뒤뒤는 ‘너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게 더 반전’이라고 받아쳤다. 어쨌거나 여러 상황으로 보아, 엄마에게 기자를 만난 얘기 같은 건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동생들은 더 이상 이 5층짜리 아파트, 같은 출입구를 공유하는 다른 아홉 집에 대해서 그림을 그려보거나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은 우리에게 이제 시한부일 뿐이므로. 그래도 우리와 같은 문을 공유하는 그 사람들에게 유해한 뉴스가 가는 걸 방치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게 내가 1층, 계단이 시작되는 지점에 있던 무료 신문 더미를 내 가방 안에 통째로 집어넣은 이유였다. 무심코 집어 들었던 그 신문에서 익숙한 얼굴-소장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지역의 꿈나무들을 위해 저희 센터에서는 유치원 및 체육시설과……. 이런 건 아무도 읽으면 안 된다.

  

  가방의 무게가 늘어나자 동선이 바뀌었다. 계단을 오르는 대신 밖으로 다시 나갔다가 아까 그 자리에 루가 그대로 있는 걸 봤다. 내가 다가가자 루가 얼른 담뱃불을 껐다. 예전에는 담배도 안 피웠던 것 같은데, 아빠의 담배까지 이어받은 건가.


  “저번에 저 책 주신 거 말인데요.”


  “어린왕자?”


  “뒤쪽에 몇 장이 없는 것 같던데요? 뜯어진 자국이 있어요.”


  “아아. 뒤에 몇 장이 빠져있지? 삽화랑 글 몇 줄인데. 이사할 때 뜯어버렸어.”

  

  정확히는 두 장이었다. 네 쪽. 그걸 왜 이사할 때 뜯어버렸을까? 루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무겁잖아. 이사할 때.”

  

  종이 두 장이 무겁다고?

  루는 그게 자신만의 습관이라고 했다. 원하는 줄거리를 만드는 방식으로 페이지 한 장 두 장을 빼기도 하고, 심지어 소제목 하나 정도를 덜어낸 적도 있다고 했다. 참 별스럽기도 하네,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도 없어진 두 장이 그것이 해적판임을 보여주는 부분일 텐데. 그 두 장이 사라진 어린왕자는 정식 판본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두 장엔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요?”


  “어린왕자가 좀 다른 방법으로 자살하지.”


  아, 하고는 그가 다시 정정했다.


  “어린왕자가 좀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별로 돌아가지.”


  그러나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루는 얘기해주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없는 페이지는, 사실 없어도 무방해.”


  그때 루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서, 나는 입모양으로만 인사를 했다. 안녕히 가세요, 하고.


 

 

  둘째는 내가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을 들이밀었다. 둘째는 뒤늦게 포켓몬고 게임에 푹 빠져 있었는데, 게임 화면 안에 ‘세븐일레븐’ 표시가 있었다.


  “여기, 거기잖아. 아빠가 엄마 핸드백 주워서 따라간 곳. 내가 지금 그 앞을 걷고 있는 중이거든. 지난주에는 신주쿠에 다녀왔어. 누나 신주쿠 알아?”


  “신주쿠?”


  둘째는 할리우드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의 옛 동네에서 노는 중이었다. GPS 조작 앱 덕분이었다.


  “야, 그럼 집까지 들어가 보자.”


  “에이. 그런 건 안 나오지. 세븐일레븐이랑 맥도날드랑, 그런 게 나온다고.”


  둘째 표현대로라면 친구 맺은 데만. 둘째는 위치 조작의 속도 조절까지 해가면서 전 세계를 누비고 있었다. 단점이 있다면 이게 아빠의 휴대폰이라는 것. 아빠의 휴대폰은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걸 허락하지 않았다. 둘째가 몬스터도감을 쭉 넘겨보며 몰입해있으면 그 위로 이런 문자가 날아들곤 했다.


  ‘쟁점은 폐기물이 토끼였느냐, 아니면 비소였느냐, 하는 겁니다. 채우영 씨가 원하는 건 비소 쪽일 테고요.’


  그렇게 맥이 끊기면 둘째는 게임을 접고 휴대폰을 아빠에게 반납했다. 아빠야말로 진짜 몬스터와 싸우는 중이니까.


  전에 볼펜을 꺼내는 과정에서 둘째의 일기장을 본 적이 있었다. 고백하자면 딱 한번 뿐이지만, 한번에 두 권을 연달아 읽어버렸다. 열 살 남동생의 일기 따위가 뭐 그렇게 궁금하겠는가. 게다가 둘째 특유의 그 사실주의는 여전해서 읽기 편한 내용도 아니었다. 다만 글마다 달려있는 그 물음표가 자꾸 시선을 붙잡았다. 독자의 참여를 유도하는, 앙큼한 질문들이 곳곳에 있었다. 


  ‘풍송동 집에 가니까 옛날 생각이 나서 피자를 시켜보았다. 정말 피자가 우리 집에 오는지 궁금했다. 피자 아저씨는 우리 집을 잊지 않고 찾아왔다. 아빠가 반대하셔서 거기서 먹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건 참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러면 상냥한 담임선생님이 몇 줄의 정성스러운 답변을 써놓곤 했다. 문제는 사흘에 한번 꼴로 등장하던 둘째의 질문이 언제부터인가는 거의 매일, 최근에는 하루에도 몇 개씩 들어가 있다는 거였다. 선생님은 질문에 답하기를 건너뛰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의 일기에는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하고는 심지어 물음표도 달아두지 않았다. 야, 이런 문장 뒤에는 물음표를 두 개 쯤 찍으란 말이야,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일기장 훔쳐본 얘기를 할 수도 없어서 그만뒀다.


  나 역시 가끔 막연한 질문들을 어디론가 던지고 싶어질 때가 있었는데, 명확한 질문의 형태를 만들기도 어려웠다. 다만 집은 그대로인데 내 몸이 집보다 더 커져버린, 혹은 그 비슷한 종류의 꿈을 가끔 꾸곤 했다. 그런 꿈에서 깨어날 때면 일단 창문을 여는 것이 환기에 도움을 줬다. 창문을 열고 반대편을 보면, 수많은 액자들이 거대한 미술관의 벽처럼 놓여 있었다. 이건 아파트가 줄 수 있는 위안 중의 하나였다. 액자들은 비슷한 크기와 배열로 놓여 있었지만, 그 안의 풍경은 다 달랐다.


  생각난 김에 나는 창문을 열고, 앞 동의 305호가 어디쯤 되는지를 헤아려보았다.  앞 동만 창문 배열이 이상한 게 아니라면 바로 저 창문은 루의 것이 확실했다. 마치 골다공증을 앓고 있는 듯한 블라인드가 보였다. 성긴 막대들 사이로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 방의 불빛이 꺼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았다. 물음표 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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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타고 2017년 윤고은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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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16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3-0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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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뒤, 그리고 풍력발전기.

  둘의 공통점은 바람을 받으면 더 빨리 돌아간다는 것이다. 내 생각이 아니고 뒤뒤의 표현이었다. 뒤뒤는 바람을 타서 여기까지 오는 시간을 단축했다고 말했다. 숨을 몰아쉬는 뒤뒤한테서 땀 냄새가 조금 났는데 음, 나쁘진 않았다. 뒤뒤가 달려온 그 속도가 좋았다. 점심은 먹은 거냐고 묻는 것도.

  금요일의 단축수업이 끝나자마자 헐레벌떡 달려와 기자를 만났고 기자가 시켜준 레모네이드를 먹은 게 전부였다. 속이 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즉석떡볶이를 사먹고, 맥도날드 아이스크림까지 하나씩 입에 물고서 풍력발전단지 쪽으로 걸었다. 저만치 모두 세 기의 풍력발전기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 있는 게 보였다. 풍력발전기는 늘 일정한 속도로 돌지 않아서 좋았다. 멈춰 있으면 멈춰 있는 대로 좋고, 돌아가면 돌아가는 대로 좋았다. 가장 좋은 건 오늘처럼, 갯벌 위로 풍력발전기의 그림자가 빙글빙글 돌아갈 때였다. 이건 적당한 햇빛과 바람, 모두가 있어야 가능한 풍경이었다. 나는 가만히 서서 뒤뒤와 나의 그림자, 그리고 우리 위로 거대한 풍력발전기의 그림자가 천천히 돌아가는 걸 보았다. 그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치 아주 큰 시계의 초침이 리드미컬하게 돌아가는 것 같았는데, 그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이 저 빛과 바람이라는 걸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입구에서 ‘낚시행위 및 쓰레기 무단 투기 금지’ 라는 푯말을 봤는데,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 오늘은 또렷하게 보였다. 그 위에는 ‘준설토 투기장’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검색해보니 공사나 다른 이유로 ‘원래 자리에서 이동한 흙을 버리는 곳’이라고 했다. 원래 자리에서 이동한 흙이라니, 그 풀이를 보자마자 우리 마당의 흙을 다 퍼서 여기다 버리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옆에서 통통한 갈매기 한 마리와 눈이 마주치기 전까지는 정말 그러고 싶었다. 갈매기는 보란 듯이 나를 보고 있었다. 그 옆으로, 또 그 옆으로, 적당한 간격으로 갈매기들이 앉아 있었다.


  저기까지 가볼까, 하고 뒤뒤가 가리키는 곳은 등대전망대였다. 등대는 작은 무인도 위에 있었는데, 세 번째 풍력발전기에서도 얼마 쯤 더 바다 쪽으로 들어가야 했다. 섬으로 가는 길은 하루에 두 번씩만 열렸고, 오늘은 17시까지 유효했다. 우리는 등대전망대로 올라가는 왼쪽과 오른쪽 길을 두고 어디로 갈까 고민했는데, 한쪽은 아주 경사가 가파르지만 빠르고, 다른 한쪽은 경사가 완만하지만 느린 코스였기 때문이다. 꽤 고민하다가 빠른 쪽을 선택했는데, 내려올 때는 자연스럽게 왔던 길을 피하게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별 의미 없는 고민이었다. 단지 순서의 문제였을 뿐.


  등대 1층에서는 어린이들이 직접 만든 예술품, 발명품 전시가 한창이었는데, 뒤뒤가 그 틈에서 안내문 한 장을 챙겨주었다. 막내에게 전해주라면서. 어린이 그림대회 안내문이었다. 


  “저번에 그 동생 진짜 귀엽더라. 몇 살이야?”


  “일곱 살.”


  막내는 햇살 잘 들던 마당을 떠나니, 오히려 키가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비유가 좀 이상하긴 해도, 마치 음지에서 자라는 콩나물처럼 말이다. ‘쑥쑥’ 까지는 아니더라도. 확실히 자라고 있었다.


  “걔, 발랑 까졌어. 요즘엔 뽀뽀할 때 혀도 내민다니까? 코 밑에 수염도 났어.”


  “뽀뽀할 때 혀를 내밀어?”


  “그게 더 충격적이니? 난 수염을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둘 다 약간 반올림해서 말한 거였는데, 뒤뒤는 일곱 살 아이의 수염 같은 것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그보다 다른 단어에 꽂힌 뒤뒤가 부담스러워서 그의 등을 2층으로 밀어 올렸다. 3층에 올라가면 동전을 넣을 필요가 없는 망원경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2층의 햇살이 잘 드는 의자에 앉아 광합성을 했다.

 

 

  이곳은 늘 사람이 없었다. 나는 통유리가 적당히 걸러주는 햇살을 받으며 나른해하다가, 뒤뒤가 준 안내문을 펼쳐보았다. 『어린왕자』를 주제로 한 그림대회라는 설명이 나와 있어서 우연치고는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우리가 앉아있는 벽 뒤로는 세계 각국의 식물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중에 ‘바오밥나무’도 있었다. 바오밥나무는 마다가스카르에 가면 많이 볼 수 있고, 마다가스카르까지는 방금 우리가 걸어온 거리의 8659배를 더 가야 한다는 설명도 나와 있었다. 곳곳에서 등장하는 익숙한 이미지에 뒤뒤도 놀랐다. 얼마 전에 내가 둘째의『어린왕자』를 뒤뒤에게 빌려줬고 그건 뒤뒤가 먼저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뒤뒤는 내가 늘 코를 파묻고 있는 그것이 뭔지 궁금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의욕에 비해 속도가 느렸다. 뒤뒤는 내가 아무 독촉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열 몇 장이 남았다고 고백했다.


 

  “네가 1권을 다 읽어야 2권을 줄 텐데 말이야.”


  “2권도 있어?”


  “정확히 말하면 2권은 아닌데, 다른 그림 찾기 같은 거야. 비교해서 읽어보라고. 그런데 어느 세월에?”


  “오늘 마무리하려고 딱 펼쳐들었는데 너한테 호출이 온 거야. 어쩌겠어! 그런데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정말 저 아래 물길 꼭 뱀 같지 않아?”


  물이 드나드는 길, 물이 빠져서 속내가 다 드러난 길, 구불구불한 그 흔적이 내가 보기엔 슈퍼지렁이 같았다. 우리는 섬이 고립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엔 완만한 길을 선택해서 내려왔다. 아까는 하나가 멈춰 있더니, 그새 풍력발전기 세 기가 모두 돌아가고 있었다. 속을 다 드러낸 바닥을 보며 나는 가볍게 툭, 우리 마당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이야기를 하고보니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된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기분은 훨씬 가벼워졌다. 몸무게가 좀 줄어들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너 피구할 때랑 비슷한 기분이겠네?”


  뒤뒤가 말했다.


  “내가 피구 얘기를 했었어?”


  “아니, 내가 봤지. 저번에 너희 반 피구하던데 너 혼자 살아남아 있었잖아. 처음엔 채유나가 에이스란 말이야? 놀라서 내 눈을 의심했다니까. 그런데 어이없게 공 한번에 끝나더라고. 아니, 공을 받아야지, 그냥 서서 맞으면 어떡해?”


  자주 있는 상황이었다. 피구란 경기가 그렇지 않은가. 누구 뒤에 숨어서 잘 피하다 보면 결국엔 살아남게 되는 거고, 난 피하는 건 자신 있었다. 다만 그러다보니 우리 팀에서 혼자만 살아남아버렸고, 경기를 끝내려면 이젠 내가 공을 던져야만 하는 상황이 오고 마는 것이다. 애들은 ‘채유나 파이팅’ 같은 걸 외쳐대는데, 그렇게 모든 책임이 내게 남는 건 질색이었다. 나는 에이스가 아니었으므로, 상대방이 공을 내게 던졌을 때 어이없게 몸에 맞고 경기를 종료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피구는 왜? 그래서 자꾸 진다는 거야? 의지박약이라?”


  “아니, 혼자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그런 너를 보는 나도 있잖아?”


  뒤뒤가 자신의 휴대폰을 보여줬는데, 그 안에 피구 에이스로 오해받았던 내가 있었다. 얼굴이 얼뜨기 같은 건 그렇다 치고, 몸이 3등신 쯤 되어보였다. 나는 덥석 그 휴대폰을 잡아챘는데 손 안에 잡힌 건 뒤뒤의 웃음소리뿐이었다. 뒤뒤는 나를 피해 뛰어갔고, 나는 뒤뒤의 휴대폰에서 내 사진을 지우기 위해 달려갔고, 마침내 뒤뒤의 휴대폰을 잡아챘다고 생각한 순간 뒤뒤가 용수철이라도 깔고 있었던 것처럼 튕겨나갔다.


  “엇, 미안!”


  뒤뒤가 어쩌다가 내 허벅지를 잡아버린 거였는데, 그 애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었다고 열심히 설명했다. 이미 다 알아들었는데, 수습한다고 하는 말이. 

 

  “너무 얇아서 팔뚝인줄 알았다고!”


  그 말이 욕인지 칭찬인지, 내 다리가 얇지 않다는 건 나도 아는데! 내가 가볍게 뒤뒤를 밀쳤는데, 뒤뒤는 무게중심이 흔들리더니 산책로 아래로 훌러덩 넘어져버렸다. 길보다 높이가 20cm 쯤 낮은, 갯벌로 말이다. 갈매기 몇 마리가 놀라서 혹은 피곤해서 날아올랐다. 진흙을 뒤집어쓴 뒤뒤를 보니 쿡 웃음이 났다. 오늘 처음 웃어보는 것 같았는데, 마치 나일론점퍼를 손으로 빨 때 피식피식 거품이 솟아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뒤뒤는 방금 생각이 난 건데, 하면서 스키점프 얘기를 꺼냈다. 지난 올림픽 내내 스키점프 경기를 봤는데, 1위 후보로 꼽히던 선수가 역풍을 맞아 예상만큼 잘 날아가지 못했다는 거였다. 그런가하면 첫 올림픽 출전에서 순풍을 만나 더 멀리 날아간 선수도 있었다고 했다. 뒤뒤는 그걸 보며 타이밍의 힘을 믿게 됐다고 했다.


  “있잖아, 처음에는 이러고 있는 거야. 몸을 최대한 웅크려야 공기저항을 줄일 수가 있거든? 그러다가 몸을 쫙 펼치고 날아올라야 하는데, 여기서 타이밍이 중요해. 너무 빨라도 안 되고, 너무 늦어도 안 되고. 정확한 타이밍에 딱 날아야지 되거든.”


  “타이밍 얘길 또 듣네.”


  “왜냐하면, 바람의 방향 같은 건 인간이 조정할 수가 없으니까, 그걸 지배해야 하거든. 바람에 잘 올라타야 돼. 그러니 타이밍이 중요하지.”


  뒤뒤는 뒷바람이 어쩌고 맞바람이 어쩌고 얘기를 하더니, 이렇게 결론을 냈다. 너희 집에 닥친 일은 아주 거대한 바람 같은 거지만, 타이밍을 잘 맞추면 그 위로 올라탈 수도 있을 거라고. 그래서 그 타이밍이 언제인 거냐고 내가 물었는데, 그 말은 방금 우리 머리 위를 지나간 두두두두, 소리에 가려 전달되지 않았다. 모터를 단 패러글라이딩이었다. 꽁무니에 매달린 모터가 꼭 선풍기처럼 보였다. 글라이더는 새처럼 높이 올라가기도 했고, 추락하는 것처럼 갯벌 가까이 내려오기도 하면서 곡예 중이었다. 우리의 시선이 그 모터 소리를 따라 움직였다.


  “오늘 분위기로 봐서는 저 사람, 생떽쥐베리 쯤 되려나.”


  뒤뒤의 그 말을 들은 건지 어쩐 건지 글라이더는 훌쩍 위로 올라가버렸다. 우리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으로, 절대 불시착 따위는 없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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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타고 2017년 윤고은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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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재 시간 | 책 밖에서(안부) 2017-03-02 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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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매번 글을 아침에 올렸기 때문에 공지 남깁니다.

16화는 오늘 오후(4-5시)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3월이 되어 제 스케줄에 약간 변화가 생겼답니다;;

오늘은 4시 이후에 확인해주세요.

17화부터는 새벽 일찍 올려둘게요!

그럼, 이따 다시 소설로!

새 달인데, 활기찬 아침 시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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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15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2-2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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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사는 5층 아파트 한 동은 모두 세 개의 출구를 가지고 있었고, 하나의 문을 한 층에 두 집씩, 모두 열 집이 공유했다. 얼마 전 우리 셋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같은 문을 쓰는 열 집에 대해 정리해보려고 했는데, 확실한 건 바로 우리 옆집에 젊은 남자가 산다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몇 개월 째, 그 외의 누구와도 제대로 인사를 한 적이 없었다. 그들 중 누군가의 휴대폰 진동음을 내 것으로 착각한 적이 있고, 그들 중 누군가가 싸우거나 웃는 소리를 엿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소음 외에 딱히 공유한 건 없었다. 몇 층에 누가 살고 어떤 가족 구성을 갖고 있는지를 짐작해서 흰 종이 위에 그려 넣었을 뿐이다. 301호에는 나와 다른 중학교에 다니는 여자애가 있고, 102호에는 막내와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있고, 502호에는 임산부가 산다는 식이었다.


  그러다 지난밤, 건물 전체에서 화재경보기가 요란하게, 꽤 오래 울렸고 결국 모두 마주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왔다. 우리가 놀라 현관문을 열었을 때 동시에 옆집 남자도 문을 열었고, 마치 이쪽 문이 열리면 저쪽 문도 열릴 수밖에 없는 구조처럼 순식간에 위층과 아래층에서도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왔다. 계단 난간 아래를 내려다봤을 때, 저 아래로 까만 머리통들이 통통통통 움직여 내려가는 게 보였다. 우리도 따라 내려갔다.


  화재경보기의 오작동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 순간에도 둘째는 사람들의 얼굴 스캐닝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둘째는 다시 방에 들어가자마자 그 아파트 이웃 정보를 수정해댔다. 임산부가 502호가 아니라 302호였고, 중학생은 한 층 더 아래에 사는 식으로. 그 화재경보기 소동이 작은 위안이 된 건 생각보다 이웃들이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는 걸 확인할 수 있어서였다. 여긴 옛 골목이 아닌 것이다. 천장과 벽과 바닥을 공유하고 살지만, 센터라는 같은 공통분모를 갖고 있지만 오히려 익명이 보장되는 곳이었다. 아빠는 더 큰 거짓말에 합류할 수 없어 결국 센터를 그만두었는데, 그걸 아는 사람은 이 동에 없거나 알아도 관심사항이 아닌 것 같았다. 그건 단지 우리 가족만의 문제였다. 그게 어떤 면에서는 편했고, 어떤 면에서는 외로웠다.


  “애들이 접어준 카네이션 말이야, 왜 빨간 색인가 했더니 어떨 땐 책상 위에서 신호등 노릇을 하더라고. 그 꽃이 아빠 힘내세요, 하고 눈앞에서 방긋거리는데 어쩌겠어. 신호등이지. 빨간 불이야. 자, 거기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일랑 멈춰라, 더는 건너가지 마라, 그랬는데.”


  오랜만에 만취한 아빠는 같은 말을 계속 반복했고, 엄마 입에 사탕을 넣어줄 만한 여력이 없어보였다. 카네이션으로 시작되는 아빠의 얘기는 50만원을 탕감받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길이 결국 100만원을 빚지는 길이었다는 얘기로 끝났다. 우리 셋은 엄마가 뭐라고 말하는지에 집중했는데, 그건 요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종잡을 수 없어서였다. 오래 전에 이미 엄마 뱃속을 떠나왔는데도 여전히 엄마의 입장이 우리에게 어떤 기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엄마는 화내거나 울지 않았다. 초조한 기색을 보이지도 않았다. 엄마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떤 일들은 그런 꽃으로도 버틸 수 없을 만큼 크다고, 당신이 최선을 다한 걸 알고 있다고.


  내가 일주일 전, ‘과학과 우리’ 기자에게 메일을 보낸 건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답이 오지 않아서 나조차도 내 메일이 제대로 간 건지, 그 사실을 의심하게 될 지경이었다. 수신확인조차 한 건지 안한 건지 알 수 없었다. 3년 전 그 기사 말미에 나와 있던 메일주소로 무작정 메일을 보낸 건데, 너무 무모했거나 예의가 없었나 싶어 이미 보낸 메일만 읽고 또 읽었다. 


  며칠 후 나는 ‘과학과 우리’로 전화를 걸었는데 그 이름을 가진 기자는 지금 그 잡지사에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물어물어 겨우 그 기자와 연락이 닿았을 때는 내가 지나온 몇 단계의 경로 때문에 이제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거라는 착각을 하게 될 정도였다. 금요일 오후, 학교 수업이 끝난 후에 기자와 던킨도너츠에서 만났다. 소장의 목소리부터 슈퍼지렁이를 찍은 사진까지 준비해서 말이다. 기자는 내 얘기를 듣는 동안 꽤 심각한 표정이 되었지만, 다 듣고 나서는 기대와 너무 다른 반응을 보였다. 일단 자신이 쓴 기사를 기억해내는데 너무 오랜 시간을 들여야 했고(겨우 3년 전인데) 기억해낸 다음에는 이렇게 말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까요.”


  기자의 말에 나는 좀 당황해서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요약하자면 그 기사로 인해 그 잡지사는 그 소송에 휘말렸고요. 결국 그 정정기사도 내게 된 겁니다. 그 사건, 그것 때문에 보낸 시간은 뭐 이렇게 말하긴 뭣하지만 악몽 같네요. 정정기사는 못 봤나 봐요?”


  3년 전 그 슈퍼지렁이 기사를 썼던 기자만 만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마치 누가 반대로 돌려놓은 이정표에 속은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소장이 그 중금속 사건과 슈퍼지렁이를 알고 있다는 걸 증명할 만한 녹음파일을 건넸지만, 기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종결된 사건이라는 거였다. 그러고는 유나 학생의 부모님께서도 애쓰시고 계실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했다.


  “이건 우리 부모님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아서요.”


  “알아요, 가족 모두의 문제죠.”


  “아니요, 그게 아니라. 우리의 미래일지도 모른다고, 기사에 쓰셨잖아요. 기자님이. 그 우리가 누구였는데요? 저희 가족만의 문제가 아닌 거잖아요.”


  나는 왜 이제는 이 사건에 대해 쓰실 수 없는 건데요, 하고 따지고 말았다. 이게 큰 일이 아니면 뭐가 큰일인데요, 하고 말이다. 기자가 커피를 후루룩 들이켜고는 말했다. 


  “모든 일이 다 뉴스가 되진 않아요. 뉴스도 경쟁을 하고 있고요, 조금 더 넓게 보면 알겠지만,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없죠. 차라리, 그렇다면, SNS 해요? 그걸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기자는 SNS가 얼마나 큰 파급력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건 나도 다 아는 얘기였다. 나는 이 말을 할까 말까 계속 고민하다가 결국 뱉어버렸다.


  “SNS로 말하는 거 중요하다는 거, 알겠어요. 그런데 기자님을 이렇게 만나서 얘기하는데, 그럼 이 만남은 그럼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기자는 자신이 지금 몸담고 있는 지면은 전혀 다른 거라고 말했다.


  “그럼 지금은 어떤 걸 쓰시는데요?”


  나는 기자가 내게 내민 명함(격월간 교육, 으로 시작하는) 을 들여다보면서도 굳이 그렇게 물었다. 기자는 학교폭력부터 과잉체벌, 교우관계, 입시제도에 대한 기사들을 주로 쓰고 있으며, 혹시 그런 쪽으로 얘기할 것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말했다.


  “이것도 아이들 교육 문제랑 연관이 없지는 않잖아요. 토양 오염 문제인데요.”


  “……유나 학생 마음은 내가 잘 알아요. 그렇지만 이런 일은 타이밍이 생명인데. 좀 기다려 봐요, 내가 관심가질 만한 사람들을 찾아볼 테니까. 연락할게요.”


  그게 그나마 기자가 내게 해준 가장 긍정적인 가능성의 말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관심가질 만한 사람들이란 표현에 내 의지랄까, 그런 게 반 토막 난 것 같았다. 기자는 다시 연락하겠다고 했지만, 오늘의 만남을 위해 내가 세 번이나 다른 경로로 연락했던 걸 생각하면, 또 오늘 기자가 보인 반응을 고려하면, 과연 연락이 올까?


  기자가 떠난 다음에도 나는 한동안 그 소음 속에 앉아있었다. 언젠가 활자로 읽었던 실험과정이 자꾸 떠올랐다. 토끼의 몸통은 원통 안에 있고, 머리만 밖으로 내민 형태. 토끼의 눈꺼풀이 풀로 고정된 상태다. 눈을 깜박일 수 없는, 토끼의 안구 위에 화장품 원료를 바른다. 샴푸를 주입하기도 하고 눈에 마스카라를 여러 번 덧칠하기도 한다. 일부러 상처를 낸 후 그 위에 화장품을 발라보기도 한다. 토끼는 머리를 움직일 수도, 눈을 감을 수도 없다. 그 안에서 토끼는 목이 부러지거나, 미쳐서 죽기도 한다. 실험이 끝난 후에도 살아있다면 안락사를. 안락사는 그나마 절차를 밟은 경우고, 더 간단한 방법도 있다. 예전에는 동물실험을 상상하면 당연히 장갑 낀 손 쪽에 아빠를 대입시켰다. 혹은 나를.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혹시 우리가 토끼 쪽인가, 하는.


  휴대폰을 집어 들고 뒤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생각해보니 먼저 메시지를 보내는 게 처음인 것 같아 몇 번이나 말을 썼다 지웠다. 지금 바빠? 우리 산책할래? 풍력발전소 쪽 가고 싶은데. 지금 물때가 어떻게 되지? 이거 보면 연락 좀 줄래? 너 뭐해? 나 기분이 별로야. 너 내가 빌려준 책 왜 빨리 안 줘? 다 읽긴 읽은 거야? 지금 급하니 빨리 책 줄래? 혹시 배고프니……. 혹시 배고프니, 라니. 그건 내 스스로에게 경각심을 주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어떻게 첫 메시지를 저런 걸로. 결국 나는 이렇게 보냈다.


  ‘나 던킨에 있는데.’


  얘가 마치 내 고민의 과정을 이미 지켜본 게 아닌가 싶은 속도로, 금방 뒤뒤의 답이 왔다.


  ‘인연이 닿으면 만나겠지.’


  그래놓고 뒤뒤는 10분이 지나기 전에 나타나서 ‘우린 인연이 확실해.’ 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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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타고 2017년 윤고은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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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14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2-23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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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살이 되기 전,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험한 언니 둘과 마주친 적이 있다. 야, 너 돈 좀 있니? 없는데요. 뒤져서 나오면 맞는다. 조금밖에 없는데요. 애매한 화법으로 인해 나는 그 언니들로부터 어깨 밀침을 두어 번 당하고 돈을 몽땅 빼앗겼는데, 그러고서 이 골목에 들어설 때까지 뒤를 돌아볼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마티할머니와 마주쳤을 때, 할머니는 나를 자기 집에 데려가 앉히고는 짜장면을 시켜주었다. 짜장면을 먹고 판피린도 먹고 쌍화탕도 먹었다. 그러고도 내가 온몸을 심하게 떨자 할머니는 엄청 큰 약상자를 들고 와서는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얘기는 하지도 않고, 궁금했던 걸 물었다. 할머니가 중국집 그릇은 꼭 파란색 비닐봉지에 담아서 내놓는다고 했는데, 파란색 비닐봉지가 집에 없는 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다. 파란색 비닐봉지가 그리 흔한 것도 아니고. 할머니는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는, 배달 올 때 중국집에서 아예 파란색 봉투를 같이 준다고 했다. 너 정말 많이 아픈 게 아니냐, 하면서.


  마티할머니의 대문 앞에는 그날처럼 중국집 배달 그릇이 놓여있었고, 여전히 파란색 비닐봉지였다. 가장 먼저 이사를 갈 것 같았던 마티할머니가 아직도 남아 있다니. 하긴,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 20년 넘게 한 집에서.


  이 골목에 이삿짐 차량이 드나든 게 우리 마당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당은 소문만 있었고 실체가 없었다. 토양검사결과도 정상이었으므로, 표면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많지 않았다. 골목에 변화가 생긴 건 이 일대가 개발될 거라는 얘기가 돌아서였다. 누군가는 이사를 가고, 누군가는 이사를 오고, 그 와중에 빈집도 더러 생긴 모양이었다. 아빠가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와 동생들은 골목을 괜히 갈지자로 누비며 다른 집 창문을 구경했다. 창틀을 미술관에 걸린 액자라고 생각하면 무척 흥미로워졌다. 내부가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커튼의 실루엣이 보이는 경우도 있었고, 화분이나 지압돌기 달린 훌라후프 같은 게 놓인 경우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떠나면 집도 늙는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도 죽으면 뼈만 남듯이, 집도 죽으면 골조만 남았다. 어떤 집들이 특히 그랬다. 창문 유리는 금이 가거나 깨졌고, 그 안으로 보이는 벽지는 너풀거렸고, 가구는 연골처럼 빠져나가 집 안이 텅 비었지만, 기둥만은 그대로였다. 막내가 이러다가 나중에는 우리 집도 못 찾겠다, 하고 말하고는 동화 속에서처럼 과자 부스러기를 흘려서 표시해야 될 거라고 했다. 둘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티가 다 먹어버릴걸? 야, 길 못 찾을 걱정은 하지 마. 두 개의 방법이 있어. 하나는 마티할머니네를 찾는 거지. 그 할머니 있잖아요, 깐깐한 할머니, 하면 다 알걸? 둘째는 누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거야.”


  둘째는 조금 우쭐해 있는 내게 말했다.


  “누나 머리카락을 보면 길이 보이거든. 엄마가 맨날 그러잖아, 유나야, 걸어간 길이 그대로 보이네, 머리카락 좀 줍고 다녀라, 아무데나 흘리지 말고. 크크크. 마티가 설마 머리카락을 먹겠어?”


  괘씸한 녀석들. 내 시선은 저만치 보이는 우리 집 창문으로 향했다. 엄마, 아빠의 방이었는데,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동의서를 받은 후, 아빠는 우리 집 대문에 꽂힌 우편물들을 챙겼다. 그리고 대문을 열었다. 문이 열렸다. 거기까지가 중요한 거였다. 내부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지만, 문이 열렸는데 마티가 잠자코 있던가. 우린 마티처럼,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몇 달 만에 잔디가 이상한 색깔로 변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계속 하고 있었는데, 꿈에서 잔디가 ‘나 충혈됐다!’ 고 소리쳤던 적이 있어서였다. 다행히 현실의 잔디는 내가 늘 알아왔던 그런 모습이었다. 배롱나무도 여전히 멈춰 있었다. 


  이사 후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건 둘째였다. 나야 이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막내는 유치원에 새로 들어간 게 전부였지만, 둘째는 3학년이 되자마자 전학을 가야 했다. 더 이상 무작정 초인종을 누르고서 “은호 있어요?” 라고 묻던 애들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은호가 있을 때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을 때도 우리 집에 들어와서 마냥 기다리던, 대책 없이 느긋하던 그 애들. 엄마는 전학을 가서도 친구를 사귈 수 있다고 했지만, 둘째는 학기 초에 “너희 집엔 마당이 몇 개야?” 같은 질문을 해서 이미지를 구긴 것 같았다. 왕따까지는 아니지만 약간 위험한 상황이라고 둘째가 얘기했다.

 

  둘째가 그런 질문을 한 건, 우리 마당이 세 개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른들이 볼 때는 하나의 마당이었지만 그 안에도 구획이 있었고, 그건 소유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였다. 둘째가 자기 구역의 식물들을 얼마나 애지중지 보살폈던가(사실은 다른 구역도). 둘째는 계란탕 식은 걸 한 숟가락 떠서, 호호 불고는 꽃과 흙이 맞닿은 경계에 놓아주곤 했다. 아빠의 소주처럼 검증이 된 건 아니었지만 꽃이 마음을 받아먹은 건지, 둘째의 식물들은 특히 잘 자랐다. 둘째는 폭우가 내리던 날엔 우산을 들고 어린 식물들 위에 웅크려 있었고, 작은 삽으로 흙 위를 가볍게 통통 다독여주곤 했다. 부모님이 둘째의 엉덩이를 토닥일 때처럼.


  엄마는 둘째가 요즘 학원을 빼먹고 웬 떠돌이 같은 형들과 어울린다고 걱정했는데, 이 순간 둘째가 얼마나 화사하게 웃는지를 본다면 벌써 해답은 나온 것이다. 그런 표정이 된 건 둘째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이제야 진짜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몇 달간의 공백을 지우개로 싹 지우듯이.


  아빠는 이제 돌아갈 시간이라며 다시 대문을 닫았다. 막내는  담벼락이 자석이라도 된 듯 거기에 쩍 달라붙었다. 어디서 난 건지 사인펜을 들고는 뭔가를 적지 못해 안달했다. 아빠는 막내를 내버려두었는데, 어차피 주중에 곧 담을 허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웬일인가, 해서 동생들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나까지도 담벼락에 붙어서 뭔가를 적었는데 ‘안에 사람 있어요.’ 였다. 내 글씨는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담을 허물지 않아도 크게 미관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문장 끝에는, 책에서 본 그 모자 그림-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 그림을 그렸다. 둘째는 스케일이 달랐다. 우리 삼남매와 채송화와, 마티까지도, 거의 이 골목의 모든 걸. 막내는 형 옆에 붙어서 뭔가를 그렸는데, 그려놓고 보니 슈퍼지렁이여서 아빠한테 혼이 났다.


  둘째는 아빠가 차문을 열자 다급한듯, 지금 피자를 시켜먹으면 안 되냐고 했다. 막내도 합세해 이중창을 시작했다. 나까지 배가 고프네 어쩌네 하자, 아빠는 그쯤에서 우리의 수작을 눈치 챈 것 같았다.


  “피자는 시킬 수 있지. 그런데 대문 안에 다시 들어가서 먹겠다거나 그런 생각은 포기하렴.”


  “그럼 어떻게 먹어? 길에서 먹어?”


  막내의 말에 아빠는 문제될 거 없다는 듯이 차를 가리켰다.


  “피자가 오면 가지고 갈 수는 있겠지. 바로 받아서 지금 우리 집으로 가서 먹으면 되지. 그렇지만 잘 판단해야 된다. 피자가 식는 건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지금 집으로도 피자가 온다는 사실은 큰 반전인 것 같은데. 자, 선택해.”


  우리는 다소 이상해보일지라도 지금 이 풍송동 52번지로 피자를 시키는 방식을 선택했다. 30분 후에 피자가 왔다. 이제부터 차를 타고 다시 아파트로 가는 동안 피자는 서서히 식어가겠지만, 우리가 확인하고 싶은 건 피자의 온도가 아니었다. 우리는 집으로 피자를 시키면 배달이 온다는 사실에, 이 주소가 유효하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꼈던 것이다.


  지하의 일만 떠올리지 않으면 아름다운 날이었다. 지하의 일을 떠올린다 해도 두렵진 않았다. 곧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갈 테니까. 다시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플라타너스들이 사람의 잘린 목처럼 보였는데 나는 이런 생각을 그냥 방치했다. 뒤뒤 말대로 이럴 땐 그저, 눈을 감으면 되니까.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눈을 떠도 플라타너스 구간을 다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아빠가 말한 기한이 지났지만, 1호 폐기물은 이동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오케이했던 소장이 갑자기 그 일정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소장은 이 일과 관련된 회사의 기록엔 비소라는 말이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들먹였다. 단지 몇 장의 서류를 통해 우리 집으로 온 게 실험용 토끼라는 것만이 증명되었고, 바로 그게 문제였다. 센터 측 입장은, 토끼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미 충분히 다 썩어버렸다는 거였다. 센터에서 회수하기로 한 건 토끼들이었는데, 토끼들이 이미 흔적이 사라져버렸으니 뭘 회수하겠냐는 거였다. 그러니까 이 일은 모두 이미 유통기한을 지나버린, 더 이상 얘기할 가치가 없는, 그런 일이었다.


  아빠는 센터 측에 문제가 될 게 전혀 없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비소 오염을 들먹일 생각은 아빠도 없었다. 토양검사결과도 그랬고, 아빠도 책임을 피해가긴 어려웠으니까. 애초부터 토끼보다도 비소가 문제였던 건데, 서류에 없다는 이유로 비소를 그렇게 쉽게 모른 척 해버리다니. 아빠는 흙이라도 옮기겠다고 했고, 토양검사를 다시 하고 싶다고도 했다. 지하 10m에 묻어놓고 표면의 흙을 검사하면 중금속 수치가 낮게 나오는 건 당연하다고도 했다. 그 폐기물이 우리 마당에 남긴 흔적은 누구보다 우리가 똑똑히 보았다. 아빠는 센터를 고발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듯이. 아빠는 김과 다른 선택을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같아졌다.  


  센터 측에서 올해 말까지로 사택 사용기한을 통보했다는 얘기를 들은 날, 나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둘째는 소파 위에서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둘째가 나를 가리키며 ‘약도 없는 중2라니까, 복수하는 나이지.’라고 말했던 게 퍼뜩 떠올라서, 둘째 옆에 앉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냐고 물었다.


  “왜, 복수하게?”


  내가 복수를? 둘째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내 히어로 빨리 내놓으시지. 볼펜 말이야. 볼펜!”


  아! 그게 네 히어로가 되어 서랍 안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었구나. 나는 그걸 몰라본 게 미안했다. 그게 없어진 걸 둘째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럼 둘째는 내가 ‘과학과 우리’ 기자에게 메일을 보낸 것까지 알고 있을까? 둘째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향해 ‘아, 그리고!’ 라고 했다.


  “어린왕자도 다 읽었으면 주시지요. 누나 것은 따로 있잖아, 엄연히 그건 내 책이지 않아?”


  “어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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