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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타고 2017년 연재소설 윤고은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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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14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2-23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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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 살이 되기 전,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험한 언니 둘과 마주친 적이 있다. 야, 너 돈 좀 있니? 없는데요. 뒤져서 나오면 맞는다. 조금밖에 없는데요. 애매한 화법으로 인해 나는 그 언니들로부터 어깨 밀침을 두어 번 당하고 돈을 몽땅 빼앗겼는데, 그러고서 이 골목에 들어설 때까지 뒤를 돌아볼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했다. 그러다 마티할머니와 마주쳤을 때, 할머니는 나를 자기 집에 데려가 앉히고는 짜장면을 시켜주었다. 짜장면을 먹고 판피린도 먹고 쌍화탕도 먹었다. 그러고도 내가 온몸을 심하게 떨자 할머니는 엄청 큰 약상자를 들고 와서는 정확히 어디가 어떻게 아픈 거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얘기는 하지도 않고, 궁금했던 걸 물었다. 할머니가 중국집 그릇은 꼭 파란색 비닐봉지에 담아서 내놓는다고 했는데, 파란색 비닐봉지가 집에 없는 날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다. 파란색 비닐봉지가 그리 흔한 것도 아니고. 할머니는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는, 배달 올 때 중국집에서 아예 파란색 봉투를 같이 준다고 했다. 너 정말 많이 아픈 게 아니냐, 하면서.


  마티할머니의 대문 앞에는 그날처럼 중국집 배달 그릇이 놓여있었고, 여전히 파란색 비닐봉지였다. 가장 먼저 이사를 갈 것 같았던 마티할머니가 아직도 남아 있다니. 하긴,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곳에 있었다. 20년 넘게 한 집에서.


  이 골목에 이삿짐 차량이 드나든 게 우리 마당 때문만은 아니었다. 마당은 소문만 있었고 실체가 없었다. 토양검사결과도 정상이었으므로, 표면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많지 않았다. 골목에 변화가 생긴 건 이 일대가 개발될 거라는 얘기가 돌아서였다. 누군가는 이사를 가고, 누군가는 이사를 오고, 그 와중에 빈집도 더러 생긴 모양이었다. 아빠가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와 동생들은 골목을 괜히 갈지자로 누비며 다른 집 창문을 구경했다. 창틀을 미술관에 걸린 액자라고 생각하면 무척 흥미로워졌다. 내부가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커튼의 실루엣이 보이는 경우도 있었고, 화분이나 지압돌기 달린 훌라후프 같은 게 놓인 경우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이 떠나면 집도 늙는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도 죽으면 뼈만 남듯이, 집도 죽으면 골조만 남았다. 어떤 집들이 특히 그랬다. 창문 유리는 금이 가거나 깨졌고, 그 안으로 보이는 벽지는 너풀거렸고, 가구는 연골처럼 빠져나가 집 안이 텅 비었지만, 기둥만은 그대로였다. 막내가 이러다가 나중에는 우리 집도 못 찾겠다, 하고 말하고는 동화 속에서처럼 과자 부스러기를 흘려서 표시해야 될 거라고 했다. 둘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티가 다 먹어버릴걸? 야, 길 못 찾을 걱정은 하지 마. 두 개의 방법이 있어. 하나는 마티할머니네를 찾는 거지. 그 할머니 있잖아요, 깐깐한 할머니, 하면 다 알걸? 둘째는 누나 뒤를 졸졸 쫓아다니는 거야.”


  둘째는 조금 우쭐해 있는 내게 말했다.


  “누나 머리카락을 보면 길이 보이거든. 엄마가 맨날 그러잖아, 유나야, 걸어간 길이 그대로 보이네, 머리카락 좀 줍고 다녀라, 아무데나 흘리지 말고. 크크크. 마티가 설마 머리카락을 먹겠어?”


  괘씸한 녀석들. 내 시선은 저만치 보이는 우리 집 창문으로 향했다. 엄마, 아빠의 방이었는데,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동의서를 받은 후, 아빠는 우리 집 대문에 꽂힌 우편물들을 챙겼다. 그리고 대문을 열었다. 문이 열렸다. 거기까지가 중요한 거였다. 내부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지만, 문이 열렸는데 마티가 잠자코 있던가. 우린 마티처럼,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나는 몇 달 만에 잔디가 이상한 색깔로 변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계속 하고 있었는데, 꿈에서 잔디가 ‘나 충혈됐다!’ 고 소리쳤던 적이 있어서였다. 다행히 현실의 잔디는 내가 늘 알아왔던 그런 모습이었다. 배롱나무도 여전히 멈춰 있었다. 


  이사 후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건 둘째였다. 나야 이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고, 막내는 유치원에 새로 들어간 게 전부였지만, 둘째는 3학년이 되자마자 전학을 가야 했다. 더 이상 무작정 초인종을 누르고서 “은호 있어요?” 라고 묻던 애들과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은호가 있을 때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을 때도 우리 집에 들어와서 마냥 기다리던, 대책 없이 느긋하던 그 애들. 엄마는 전학을 가서도 친구를 사귈 수 있다고 했지만, 둘째는 학기 초에 “너희 집엔 마당이 몇 개야?” 같은 질문을 해서 이미지를 구긴 것 같았다. 왕따까지는 아니지만 약간 위험한 상황이라고 둘째가 얘기했다.

 

  둘째가 그런 질문을 한 건, 우리 마당이 세 개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른들이 볼 때는 하나의 마당이었지만 그 안에도 구획이 있었고, 그건 소유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였다. 둘째가 자기 구역의 식물들을 얼마나 애지중지 보살폈던가(사실은 다른 구역도). 둘째는 계란탕 식은 걸 한 숟가락 떠서, 호호 불고는 꽃과 흙이 맞닿은 경계에 놓아주곤 했다. 아빠의 소주처럼 검증이 된 건 아니었지만 꽃이 마음을 받아먹은 건지, 둘째의 식물들은 특히 잘 자랐다. 둘째는 폭우가 내리던 날엔 우산을 들고 어린 식물들 위에 웅크려 있었고, 작은 삽으로 흙 위를 가볍게 통통 다독여주곤 했다. 부모님이 둘째의 엉덩이를 토닥일 때처럼.


  엄마는 둘째가 요즘 학원을 빼먹고 웬 떠돌이 같은 형들과 어울린다고 걱정했는데, 이 순간 둘째가 얼마나 화사하게 웃는지를 본다면 벌써 해답은 나온 것이다. 그런 표정이 된 건 둘째만이 아니었다. 나 역시 이제야 진짜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몇 달간의 공백을 지우개로 싹 지우듯이.


  아빠는 이제 돌아갈 시간이라며 다시 대문을 닫았다. 막내는  담벼락이 자석이라도 된 듯 거기에 쩍 달라붙었다. 어디서 난 건지 사인펜을 들고는 뭔가를 적지 못해 안달했다. 아빠는 막내를 내버려두었는데, 어차피 주중에 곧 담을 허물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웬일인가, 해서 동생들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나까지도 담벼락에 붙어서 뭔가를 적었는데 ‘안에 사람 있어요.’ 였다. 내 글씨는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았다. 담을 허물지 않아도 크게 미관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문장 끝에는, 책에서 본 그 모자 그림-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 그림을 그렸다. 둘째는 스케일이 달랐다. 우리 삼남매와 채송화와, 마티까지도, 거의 이 골목의 모든 걸. 막내는 형 옆에 붙어서 뭔가를 그렸는데, 그려놓고 보니 슈퍼지렁이여서 아빠한테 혼이 났다.


  둘째는 아빠가 차문을 열자 다급한듯, 지금 피자를 시켜먹으면 안 되냐고 했다. 막내도 합세해 이중창을 시작했다. 나까지 배가 고프네 어쩌네 하자, 아빠는 그쯤에서 우리의 수작을 눈치 챈 것 같았다.


  “피자는 시킬 수 있지. 그런데 대문 안에 다시 들어가서 먹겠다거나 그런 생각은 포기하렴.”


  “그럼 어떻게 먹어? 길에서 먹어?”


  막내의 말에 아빠는 문제될 거 없다는 듯이 차를 가리켰다.


  “피자가 오면 가지고 갈 수는 있겠지. 바로 받아서 지금 우리 집으로 가서 먹으면 되지. 그렇지만 잘 판단해야 된다. 피자가 식는 건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지금 집으로도 피자가 온다는 사실은 큰 반전인 것 같은데. 자, 선택해.”


  우리는 다소 이상해보일지라도 지금 이 풍송동 52번지로 피자를 시키는 방식을 선택했다. 30분 후에 피자가 왔다. 이제부터 차를 타고 다시 아파트로 가는 동안 피자는 서서히 식어가겠지만, 우리가 확인하고 싶은 건 피자의 온도가 아니었다. 우리는 집으로 피자를 시키면 배달이 온다는 사실에, 이 주소가 유효하다는 사실에 행복감을 느꼈던 것이다.


  지하의 일만 떠올리지 않으면 아름다운 날이었다. 지하의 일을 떠올린다 해도 두렵진 않았다. 곧 모든 건 제자리로 돌아갈 테니까. 다시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 도로 양옆으로 늘어선 플라타너스들이 사람의 잘린 목처럼 보였는데 나는 이런 생각을 그냥 방치했다. 뒤뒤 말대로 이럴 땐 그저, 눈을 감으면 되니까.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눈을 떠도 플라타너스 구간을 다 통과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아빠가 말한 기한이 지났지만, 1호 폐기물은 이동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오케이했던 소장이 갑자기 그 일정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소장은 이 일과 관련된 회사의 기록엔 비소라는 말이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들먹였다. 단지 몇 장의 서류를 통해 우리 집으로 온 게 실험용 토끼라는 것만이 증명되었고, 바로 그게 문제였다. 센터 측 입장은, 토끼는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미 충분히 다 썩어버렸다는 거였다. 센터에서 회수하기로 한 건 토끼들이었는데, 토끼들이 이미 흔적이 사라져버렸으니 뭘 회수하겠냐는 거였다. 그러니까 이 일은 모두 이미 유통기한을 지나버린, 더 이상 얘기할 가치가 없는, 그런 일이었다.


  아빠는 센터 측에 문제가 될 게 전혀 없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비소 오염을 들먹일 생각은 아빠도 없었다. 토양검사결과도 그랬고, 아빠도 책임을 피해가긴 어려웠으니까. 애초부터 토끼보다도 비소가 문제였던 건데, 서류에 없다는 이유로 비소를 그렇게 쉽게 모른 척 해버리다니. 아빠는 흙이라도 옮기겠다고 했고, 토양검사를 다시 하고 싶다고도 했다. 지하 10m에 묻어놓고 표면의 흙을 검사하면 중금속 수치가 낮게 나오는 건 당연하다고도 했다. 그 폐기물이 우리 마당에 남긴 흔적은 누구보다 우리가 똑똑히 보았다. 아빠는 센터를 고발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결국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듯이. 아빠는 김과 다른 선택을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같아졌다.  


  센터 측에서 올해 말까지로 사택 사용기한을 통보했다는 얘기를 들은 날, 나는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둘째는 소파 위에서 열심히 게임을 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둘째가 나를 가리키며 ‘약도 없는 중2라니까, 복수하는 나이지.’라고 말했던 게 퍼뜩 떠올라서, 둘째 옆에 앉아 그런 말은 어디서 들었냐고 물었다.


  “왜, 복수하게?”


  내가 복수를? 둘째가 다 안다는 듯이 말했다.


  “내 히어로 빨리 내놓으시지. 볼펜 말이야. 볼펜!”


  아! 그게 네 히어로가 되어 서랍 안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었구나. 나는 그걸 몰라본 게 미안했다. 그게 없어진 걸 둘째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것이다. 그럼 둘째는 내가 ‘과학과 우리’ 기자에게 메일을 보낸 것까지 알고 있을까? 둘째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향해 ‘아, 그리고!’ 라고 했다.


  “어린왕자도 다 읽었으면 주시지요. 누나 것은 따로 있잖아, 엄연히 그건 내 책이지 않아?”


  “어어,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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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타고 2017년 연재소설 윤고은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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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13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2-20 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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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왜 집을 버린 건데?”

 

  내가 한참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 뒤뒤가 그렇게 물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우리는 집을 버린 게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그렇지만 차마 내 통학 문제 때문에 이사를 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뒤뒤는 내 등굣길 친구 아닌가. 우리는 학교까지 24번이나 42번 버스를 타고 갔는데 버스로 움직이는 시간만 15분은 족히 걸렸다. 옛 집에서는 버스로 20분 정도가 걸렸으니 겨우 5분 단축을 위해 이사했다는 건 부실한 핑계였다. 나는 뒤뒤에게 그 마당엔 공사가 필요해서 이사를 온 거라고 말했는데, 폐기물을 곧 수거할 거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그 폐기물보다 먼저 증발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마당 아래에 동물 사체가 몇 자루씩 묻혀있는 건 징그러운 얘기였다.

 

  뒤뒤가 내 얘기를 듣더니 자신의 왼쪽 귀를 가리키며, 열 살 때 그 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한동안 귀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한 발로 쿵쿵 뛰어도 보고, 면봉으로 후벼도 보고, 귓구멍 쪽으로 손전등 불빛을 쏘아보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그 이물감에 대해 거의 포기했을 즈음, 잊게 되었을 즈음에서야 뒤뒤는 뭔가가 귓문을 열고 나오려 한다는 걸 느꼈다. 그래서 왼쪽 귀 쪽으로 몸의 무게중심을 기울였고 순간 뭔가가 톡, 밖으로 나왔다. 귀에서 나온 건 돌 같았는데 자세히 보면 핏덩어리가 말라붙은 것도 같았다.

 

  “피가 귓속에서 단단하게 굳은 거였어. 엄마는 내가 하도 귀를 못살게 구니까 상처가 생긴 거라고 했는데, 내가 볼 때는 아주 오래된 것 같았거든. 꼭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것처럼?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 그게 10년 후에야 밖으로 나온 거지.”

 

  뒤뒤가 그 얘길 한 건 자기 귀에는 뭐가 한번 들어가면 좀체 밖으로 나오기 쉽지 않은 구조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자신에게는 어떤 이야기를 해도 괜찮다는 거였다. 내가 자꾸 말을 하려다 말고 하려다 말았던 게 답답했을 수도 있다. 뒤뒤가 입 싼 애라고 생각해서는 아니고, 단지 나는 좋지 않은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면 그 말이 상대를 오염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게 신경 쓰였던 것이다. 뒤뒤의 귀에 대해 듣고 나니, 더 말을 하기가 망설여졌다. 내가 하는 말들이 뒤뒤의 귀 안에서 또 한참을 화석처럼, 고생대의 삼엽충이니 중생대의 암모나이트니 그런 것처럼 굳어지면 어떻게 하나.

 

  그래도 걷다가 옆을 봤을 때 내 것과 닮은 5.5cm의 귀가 보인다는 건 확실히 안심 되는 일이었다. 초여름의 오후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저기 보이는 건너편 바다에서는 여름을 앞당기려는 사람들이 패러세일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패러세일링이 시작되는 순간을 조금 지켜보았다. 낙하산이 봉긋 솟더니 주홍빛 해와 동등한 높이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마치 바람을 낚는 것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반대쪽에서 또 하나의 패러세일링이 시작되는 것 같아 시선을 옮겼는데, 낙하산이 부풀어 오르지 않고 점점 쪼그라들었다. 그건 시작하는 게 아니라 이미 저물어가는 패러세일링이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풍선이 부풀고 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그 흐름의 어느 부분이 나를 자극했던 걸까. 나는 뒤뒤에게 비소를 아느냐고 물어보았다. 뒤뒤가 그게 누구냐고 물어서 곧 허탈해지긴 했지만.

 

  며칠 후, 왜 나를 모르느냐는 듯이 비소가 불쑥 나타났다. 과학 시간, 원소 주기율표 위에서였다. 교과서 속의 원소 주기율표가 꼭 아파트처럼 보여서 한 칸 한 칸 들여다보고 있는데 난데없이 이런 글자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As(비소).

 

  이런 게 교과서에도 등장하다니. 선생님은 주기율표를 통해 성질이 비슷한 원소들을 쉽게 알 수 있다면서, 원소기호들은 노래로 외우라고 했다.

 

  “자, 떴다떴다 비행기 알지? 거기다가 붙여 부른다. 수헬리베 붕탄질!”

  “수헬리베 붕탄질!”

 

  그렇게 시작된 노래는 다행히 비소의 차례가 오기 전에 그쳤다. 어떤 애들은 그런 게 우리 교과서에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갈 지도 몰랐다. 아마 뒤뒤도. 비소는 중2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이름이었지만, 우습게도 내가 이 원소주기율표 위에서 가장 먼저 외워버린 이름이 되고 말았다. 애쓰지 않았는데도, 삽시간에.

 

  삽시간에 파도처럼 다가온 일이 하나 더 있었다. 잊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나는 아빠가 정말 폐기물 수거 문제를 해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게 아빠가 이사를 가면서, 우리 가족에게 약속한 일이었는데도. 그래서 어느 일요일 아침, 아빠가 옛 집에 간다고 했을 때 좀 의외라고 느꼈다. 도서관에 내려달라는 핑계로 냉큼 조수석에 올라타긴 했는데, 아빠도 내가 도서관에 갈 계획이 아닌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빠는 마당 공사 전에 주민들의 동의가 필요해서 그걸 받으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공사라니, 그때야 뭔가 느낌이 왔다. 예전에 아빠를 따라가 봤던 그 허허벌판이 원래 폐기물 보관소 자리였고, 그 시설이 이제 완공되었다고 아빠가 말했다. 예기치 않은 말이어서, 너무 놀랐다. 그럼 우리 마당의 폐기물을 이제 빼가는 거냐고 하자, 그렇다고 했다. 다음주 안에 폐기물 보관소가 모든 준비를 마칠 것이며, 우리 마당의 그것이 1호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제 다 제자리를 찾아야지.”

 

  그렇게 말하는 아빠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아빠는 흰 머리가 많이 보이냐고 물었다. ‘염색할 때가 됐는데.’ 하면서. 뭔가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더니, 아빠가 건너편의 세븐일레븐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가 원래 은행이었는데, 저 앞에서 엄마가 핸드백을 집어던져서 아빠가 냉큼 주워서 따라갔던 기억이 있지. 연애할 때, 야아, 너 엄마가 얼마나 성격이 포악했는지 아니?”

 

  “지금도 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너,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되는 건지 몰라?”

 

  “오락가락하면서 제자리를 찾는 거지 뭐.”

 

  “유나 다 컸네. 아빠가 연애할 때 생존전략 하나 전수해줘? 엄마 표정이 안 좋다 싶을 때 얼른 사탕 하나를 입에 넣어주는 거야. 그럼 엄마는 웃을 수밖에 없게 돼 있어.”

 

  “엄마가 왜 핸드백을 던진 건데?”

  내가 묻자 아빠는 별 거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아아. 아빠 쫓아다니던 은행원이 있었는데 저기서 셋이 딱 마주친 거지. 아빠가 그때 아주 결단력 있게 교통정리를 했잖아. 은행원한테 엄마를 딱 소개했잖아, 자, 이쪽이 내가 결혼할 여자요. 이렇게.”

 

  “아빠가 양다리였단 말이야?”

 

  “양다리가 아니고, 아빠를 무작정 쫓아다녔지, 이은애가. 아주 피곤한 스타일이었어.”

 

  “이은애? 이 얘기 엄마한테도 들었던 것 같은데? 이은애가 아빠 뺨을 때렸지?”

 

  “음, 결과적으로는 그런데. 하여간 얼마나 피곤하니. 뺨을 다 맞지 않나.”

 

  아빠는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때 뒷자리에서 살짝 키득거리는 소리가 났고, 아빠는 룸미러를 보다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하마터면 사고가 날 뻔 했는데 뒷자리에서 얼굴을 내민 녀석들 때문이었다. 아빠는 근처 공터에 차를 대고 뒷문을 열었다. 아빠가 엄한 목소리로, 서열 3, 4위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둘째가 자기는 정리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게 좀 웃겼는데, 나중에야 자기도 해당된다는 걸 알고는 풀이 죽은 듯 말했다.

 

  “아빠랑 오랜만에 소풍 가는 것 같아서 떨렸단 말이야.”

 

  아빠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막내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꼼지락거리더니 아빠 입에 쏙 넣어주었다. 사탕이었다. 아빠는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포기했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막내가 편들어달라고 신호를 보내는 걸 묵살하고 있었더니, 갑자기 불똥이 나에게 튀었다. 막내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빠. 내가 비밀을 알려줄까? 누나가 산 넘고 물 건너서.”

 

  내가 냉큼 끼어들지 않으면 안 될 타이밍이었다.


  “아빠! 엄마한테는 비밀로 할 테니까 얘네 구제해주자.”

 

  2인자의 권한으로 아이들은 동행을 허락받았다. 사실 누가 누굴 구제한 건지는 모호했다. 얼마 전에 막내는 뒤뒤와 내가 놀이터에서 한참 얘기를 나누다 헤어진 걸 목격했던 것이다. 뒤뒤가 돌아가자마자 막내가 신이 나서 달려들었다.

 

  “저 형은 누구래? 교회오빠야?”

 

  “아니! 꼬맹이는 몰라도 돼.”

 

  “그럼 꼬맹이는 엄마한테 물어볼래. 물어봐도 돼?”

 

  “교회오빠 아니고, 교, 외, 오빠야. 됐지?”

 

  “교, 외, 오빠. 그게 뭐야?”

 

  “교외에서 만난 오빠. 교외가 뭐냐고? 산 넘고 물 건너.” 

 

  그걸 이렇게 써먹다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는데 막내가 내게도 사탕을 하나 쏙 넣어주었다. 두 녀석은 잔뜩 들떠서는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거냐고 물었다. 아빠가 거의 포기한 듯이 대답했다.

 

  “안에 들어가서 노는 건 안 된다. 풍송동 52번지로 가는 거야.”

 

  “뭐어, 라아, 구우우?” 

 

  동생들은 기분이 아주 좋을 때 말을 길게 늘여 했다. 말의 길이가 늘어나면, 소리가 늘어나면, 마치 그 시간이, 그 사실이 엿가락처럼 늘어나기라도 한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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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기물 위에서 자라는 | 책 밖에서(안부) 2017-02-17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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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윤고은입니다.

잘 지내시지요^^

이제 이야기가 절반을 통과했습니다.

 

유나네는 결국 이사를 했고요.

해적판도, 또 새 인물도 등장했어요.

해적판에 대한 추억, 제 예상보다 더 많이 가지고 계신 것 같아

신나서 댓글을 봤습니다.

댓글 속의 풍성한 정보들을 보며 놀랐고,

또 해적판의 의미를 한 단계 깊게 해석해주신 걸 보며 감탄했답니다.

 

그리고 유나의 남사친 뒤뒤! 

유나에게 뒤뒤가 있어 다행이라고 말씀해주신 분들,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유나에겐 책과 집을 벗어나 산책하는 시간도 필요할 것 같은데,

뒤뒤는 좋은 길동무가 될 거예요.

아직 연재가 진행 중이라 제가 너무 수다스러워지면 주책일 것 같지만

살짝 고백하자면, 뒤뒤와 유나의 관계에서는 봄맞이 제 사심이 살짝 반영되었다는 것!

제 회춘 의지의 표현이랄까요^^

 

소설 속엔 벌써 봄이 와 있고,

우리에게도 지금 봄이 오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당에 있는 폐기물을 잊을 수는 없겠지요.

 

저는 쓰레기-폐기물이 흘러가는 경로에 자꾸 시선이 가서

지금까지 여러 소설에서 쓰레기의 이미지를 활용했어요.

그러다 이번 소설에서는 폐기물을 내 집 마당에 묻게 되었습니다.

끔찍하게도,

유해폐기물을 내 집 마당에 묻은 건 소설적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이미 선점한 장면이에요.

 

후쿠시마 사고 이후를 다룬 뉴스에서 

방사능 폐기물을 묻은 어느 집 마당을 본 적이 있었죠.

그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표정도요.

기억 속에 각인된 장면이었는데,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마당을 빌려주세요' 라는 내용의 현수막을 보게 된 거예요.

그 현수막은 쓰레기와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었는데, 그 순간

이 소설의 첫문장과 대략의 줄기가 떠올랐어요. 

이 소설에서는 방사능폐기물이 아니지만,

위험한 폐기물을 잘못 버려 일어나는 문제는

우리 주변에서, 지금도 여전합니다.

 

슈퍼지렁이와 중금속의 관계, 궁금하다고 하신 댓글을 봤는데

실제로 영국에서 중금속에 내성이 있는 슈퍼지렁이가 발견되었다고 하고요. 

토양 오염으로 인해 지렁이가 변해버린 거죠.

일본에서 슈퍼지렁이가 발견된 기사도 있었죠.

지렁이뿐 아니라 여럿, 후쿠시마의 영향으로요. 

이 소설 속에서 슈퍼지렁이의 역할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니 잊지 말아주세요^^

 

수상한 폐기물을 발 아래 두고 성장하는 열다섯 살.

유나의 이야기는 그렇습니다만,

그게 과연 유나 만의 이야기일까, 그런 생각으로 쓰고 있습니다.

 

전 월요일 아침, 열세 번째 이야기로 오겠습니다.

좋은 꿈 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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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12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2-16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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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다섯 살 5월, 마당을 벗어나길 기다렸다는 듯이 생리가 시작되었다. 엄마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꽃을 좀 사오라고 했다. 아빠는 야근이 일상이었는데 그날은 일찍 왔다. 딸기 박힌 케이크와 분홍색 장미꽃을 한 아름 들고서. 동생들이 무슨 날이냐고 묻자, 엄마는 누나가 어른에 가까워진 날이라고 대답했다. 둘째는 자기가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헤아린 다음, 미리 케이크를 골랐다. 초콜릿케이크가 좋겠다는 거였다.

 

  중학교에 들어오자 내 주변 애들이 대부분 생리를 시작했기 때문에, 말은 안했지만 내심 초조하게 느끼던 부분이었다. 심지어 2학년이 되자 생리를 시작했지만 미루고 싶어서 약을 먹는 애도 있었다. 엄마는 고등학교 때 첫 생리를 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괜히 마당 아래 토끼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런데 좁은 아파트로 이사를 오자 내 몸도 드디어 규격화된 모양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도태되는 것도 두려웠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두렵긴 마찬가지였다. 스무 살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 싶어 하는 애들도 있었지만, 나는 이미 포만감 비슷한 걸 느꼈다. 어차피 인간의 나이란 한 자리, 두 자리, 그리고 드물지만 세 자리 숫자. 그 세 종류 중 하나일 테고, 벌써 내 나이는 두 자리로 진입한지 오래였다. 어른이 되어 하는 일이란 게 기껏 다른 사람 집에 잿빛 자루를 묻거나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 전조증상만으로 충분히 얼룩져 본편은 시작할 지면도 없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일종의 권태라고 생각하자 스스로가 좀 싫어질 지경이었다. 이런 말을 하면(할 기회도 거의 없었지만, 걸러서) 사람들은 내가 아직 열다섯 살임을 상기시켜주었다. 단골 분식집 주인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는데.

 

  “얼마나 좋을 때야. 1년에 1억씩 주고 사고 싶다, 아줌마가.”

 

  아줌마만 괜찮으시다면 한 10년까지도 팔고 싶은 게 내 마음이었지만, 판매자와 구매자가 모두 원해도 불가능한 거래라는 게 아쉬웠다. 마르셀 에메의 소설이 떠올랐다. 그의 소설『생존시간카드』에서는 개인끼리 시간을 매매하지 않던가. 그러나 그건 책장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루가 준 책은 하룻밤 만에 다 읽었다. 해적판이 해적판인 걸 알기 위해서는 정식판본과 비교를 해야 했는데, 정식판본을 아직 읽지 않았으므로 뭐가 어떻게 다른지 알 수 없었다. 좋았던 건, 내가 루와 꼭 같은 동선으로(해적판->정식판) 이 이야기를 접한다는 거였다. 책에서 밑줄 친 흔적을 발견하는 건 덤이었다. 그건 새하얀 눈밭에서 발견한 누군가의 발자국 같았다. 그게 루의 흔적인지 루 이전의 흔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밑줄로 누군가를 상상하고 추측하는 건 권태를 달래기에 충분히 적합한 일이었다.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았다. 루가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가로등 켜는 사람’에게 몰입했다는 것. 루는 그 사람의 삽화를 여백에 따라 그리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사람은 1분 단위로 가로등을 켜고 끄기를 반복하는데, 그게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어린왕자는 명령에 충실한 그를 좋아하면서도, 안타까워 한다. 생각해보면 익숙한 인물이었다. 루도 그렇고, 아빠도, 김도 모두 이 가로등 켜는 사람을 닮지 않았나? 막내에게 이런 일을 시키면 왜 1분에 한번씩 등을 껐다 켜야 하는지 납득이 될 때까지 물어봤을 것이다. 나라면? 아마 주변을 둘러 봤겠지. 나와 꼭 같이 가로등을 껐다 켜는 사람이 여럿 보인다면 나도 따라 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셋 이상 보인다면.

 

  문득 루가 왜 해적판을 내게 줬을까, 그 배경이 궁금해졌는데 나중에 그 이유가 꽤 단순하다는 것을 알고 조금 실망했다. 루는 내가 정식판본의 『어린왕자』를 이미 읽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금 다른 버전의 책을 찾은 거였다고 했다.

 

  “그리고 그거 귀한 거야. 구하기도 힘들고.”  

 

  그나마 그 이유가 조금 위안이 되었다. 나는 둘째의 『어린왕자』까지 가지고 와서 읽기 시작했다. 루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 따라가기 위해서. 친구들과 떡볶이를 사먹는 것도, 수다를 떠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역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혼자 책을 읽을 때였다. 책이 어떤 가림막처럼 느껴지기도 해서였는데, 집 앞 벤치에 앉아 책을 펼쳐 들면 꼭 방해하는 사람이 있었다. 뒤뒤였다. 뒤뒤와는 동네에서, 토요일 오후에 자주 마주쳤다.

 

  “책은 그만 보고, 좀 걸을래?”

 

  건장한 뒤뒤가 내 앞에 서자, 책에 그늘이 졌다. 뒤뒤는 1반이고 나는 5반인데도 우리가 자주 마주친 건 같은 버스정류장을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누가 물으면 내 중학교 통학 문제로 이사를 간다고 했지만, 그 핑계가 무색하게 나는 버스를 타야 했다. 그리고 나쁜 시력에 정보 부족까지 겹쳐서 이사 초기엔 엉뚱한 버스에 잘못 올라타는 일이 종종 있었다. 뒤뒤를 처음 만난 것도 그 잘못된 버스 안에서였다.

 

  15번 버스였는데 그건 우리 학교 앞으로 가지 않았다. 그 오류를 한참 후에야 발견한 건 버스 안에 있던 같은 교복 때문이었다. 같은 학교 남자애가 있으니 방심했던 것이다. 그 교복이 뒤뒤였다. 뒤뒤는 내 뒤의 뒤에 앉아있었다고 했고, 그래서 내겐 뒤뒤가 되었다. 우리는 결국 종점에서 몇 정거장 전에야 겨우 사태를 파악하고 버스에서 내렸는데, 누가 먼저 내린 건지는 몰라도 또 동시에 같은 지점에 떨어졌다. 풍력발전기 몇 대가 줄 지어 서있던 길 위였다.

 

  돌고 돌아 교문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각체크가 시작된 뒤였다. 나는 머리길이까지 문제가 됐다. 우리 학교엔 귀밑 10cm 라는 규정이 있었는데, 내 머리 길이가 허락된 범위를 초과해버린 거였다. 그날의 교문 앞 담당은 하필, 우리 담임이었다. 담임은 그 즈음 곧 두발 검사가 있을 테니 알아서들 정리하라고 얘기해왔기 때문에 나를 보고 꿀밤 주는 시늉을 했다.

 

  “쌤. 제 머리가 긴 게 아니라 귀가 긴 거예요.”

 

  내 입으로 말해놓고도 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어쩌겠는가. 

 

  “남들보다 유독 귀가 긴데 어떡하라고요.”

 

  담임은 손에 들고 있던 30cm 자로 내 귀 길이를 재기 시작했다. 표본으로 두 명의 학생이 더 동원되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뒤뒤였다. 내 귀 길이는 4.8cm였고, 다른 한 여자아이의 귀는 4.7cm였고, 뒤뒤의 귀는 5.5cm였다. 뒤뒤가 나보다 0.7cm 더 길었다. 담임은 나보다 귀가 짧은 여자애는 신경 쓰지도 않고, 나보다 귀가 길면서도 두발 규정을 지킨 뒤뒤를 들먹였다.

 

  “쟤는 남자잖아요.”

 

  “너나 쟤나 두 명의 중딩일 뿐이다!”

 

  그러고서 담임은 다시 한번 우리 귀를 들여다보더니, 귀 모양이 아주 닮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쪽 귀가 저쪽 귀의 축소판 같다.”

 

  그 말에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귀에 초점을 맞춰 보았다. 뒤뒤도 나를 쳐다보았다. 뒤뒤와는 그렇게 알게 됐다. 나중에야 뒤뒤는 그날 15번 버스가 엉뚱한 노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올라탔다고 말했다. 혹시나 하면서도 나는 좀체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궁금해서.”

 

  “궁금하다고? 뭐가?"

 

  뒤뒤는 얼른 대답은 안하고 괜히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 15번 버스가. 그 버스 노선이.”

 

 

  나는 피식 웃었다. 뒤뒤도 피식 웃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버스정류장은 물론이고, 학교 도서관이나, 복도에서 자주 마주쳤다. 그리고 뒤뒤는 지금도 불쑥, 내 앞에 나타나 산책을 권유하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 다섯 시였다. 나는 책을 덮고 뒤뒤를 보았다.

 

  “지금 걷자고?”

 

  “그래, 책 말고 산책!”

 

  그렇게 말하고서 뒤뒤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책이 산책의 줄임말 아닐까?”

 

  나는 웃었는데, 걷다보니 두 단어가, ‘책’과 ‘산책’이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는 언젠가 잘못 갔던 그 지점-풍력발전기가 나무처럼 늘어서 있던 길을 향해 걸어갔다. 벌써 세 번째 다시 가는 길이었는데, 이 산책로가 꽤 마음에 들었다.

 

  나는 지난밤에 꾼 꿈에 대해 얘기했다. 요약하자면 ‘아침에 내가 눈을 뜬 곳이 익숙한 집이 아니었다’는 줄거리였다. 내부는 그 초록색 대문 집이 분명한데, 밖으로 나가보면 앞에 엉뚱한 골목이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밤새 어떤 대륙이동 급의 힘에 의해 집이 밀려온 것 같았다. 옛집에 관한 꿈을 꿀 때마다 뒤뒤에게 얘기했더니, 뒤뒤는 ‘너 마당에 환장한 사람 같다’고 했다. 정말 그랬는지도 모른다. 저만치 보이는 풍력발전기들이 얼핏 나무처럼 보였다. 아파트 화단에도, 학교 교정에도, 거리에도 나무는 많았지만 ‘나만의’ 나무는 없었다. 배롱나무를 떠나온 이후로 내가 발견한, 가장 나무 같은 존재는 저기 저 풍력발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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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타고 2017년 연재소설 윤고은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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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11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2-13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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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더 덜어내지 않아도 된다고 아빠가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책장 앞에 서 있었다. 언젠가 내가 후드티를 벗다 발견했던, 동생의 귀보다 작았던 그 은행잎이 집을 옮긴 마당에 퍼뜩 떠올라서였다. 책장과 책장 사이에 끼워두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 책이 뭐였지. 갑각류처럼 단단한 책들 위주로 머리 가르마를 넘기듯이 펼쳐보았지만, 어디에도 은행잎 같은 건 없었다. 내가 발견한 건 압사한 벌레의 흔적뿐이었다. 먼지다듬이라고도 하고, 좀벌레라고도 하고, 보통은 책벌레로 통하는 아주 작은 녀석. 어쩌면 애초에 은행잎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3년은 무언가를 둔갑시키거나 누락하기에 충분한 시간 아닌가. 열두 살부터 열다섯 살 사이라면 더더욱.

 

  은행잎은 내가 몇 차례 책을 줄여보려고 애쓸 때, 그 틈에 사라졌을 수도 있다. 지금의 책장 안에는 이미 그것이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계속 책을 펼쳐보았다. 책을 펼치는 행동이 문을 여는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단지 네모난 모양 때문일까 생각하면서. 책을 열고 닫을 때마다 우리의 초록색 대문을 떠올리면서. 내가 가졌던 첫 마당의 기억, 그 첫 마당이 결국 마지막 마당이 될 것 같은 예감도 함께.

 

  이사를 하고 일주일이 지나자 막내가 언제 집으로 돌아가느냐고 물었다. 여행은 이제 충분히 했다는 듯이. 아파트 단지 내의 놀이터에는 다양한 놀이기구가 있었지만, 막내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막내가 원하는 놀이기구는 이미 누군가가 신나게 놀고 있는, 바로 그것인데 이곳에는 뛰노는 아이들이 적었다. 키즈카페와 학원이 많은 동네다보니 정작 놀이터는 자주 비어 있었다. 어쩌다 놀이터에서 아이들 무리를 봤을 때 막내는 다급하게 뛰어가 몇 살이냐고 들이댈 지경이었는데, 형의 어깨 너머로 익힌 나이 갑질이 먹히지도 않았다. 막내는 여섯 살 아이 앞에서 자신이 일곱 살이라고 으스댔지만, 여섯 살 아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좀 어이없다는 듯이 자기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야, 쟤가 일곱 살이래.”

 

  그 어투와 표정이 ‘믿어져?’ 라고 의문을 내포하는 것이어서 오히려 어리둥절한 쪽은 막내였다. 엄마는 서둘러 막내가 다닐 유치원을 알아봤는데 그 과정이 막내의 히어로에 대한 기다림과 믿음을 증폭시켰다. 여전히 슈퍼지렁이를 히어로로 기억하는 막내에게 둘째의 옷 하나가 불씨를 지피기도 했다. 잡다한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였는데, 막내가 그 옷의 어느 부분을 슈퍼지렁이라고 오인하면서 다툼이 벌어진 거였다. 엄마는 막내에겐 형의 물건을 넘보지 말라고 했고, 둘째에겐 동생에게 양보하라고 했다. 최종적으로는 둘이서 한번만 더 그 옷을 가지고 싸우면 옷을 버리겠다고 했는데, 결국 그렇게 되고야 말았다. 엄마가 가위를 들고 오자 동생들은 당황했지만, 가위가 옷을 반으로 가르기 시작하자 거의 체념한 듯 동요하지 않았다. 그건 분명 영역 싸움이었다. 내가 갖지 못하면 저쪽도 차라리 갖지 못하길 바라는. 둘째는 반쪽 옷을 버렸고, 막내는 다른 반쪽에 슈퍼지렁이 닮은꼴이 온전하게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안도했다.

 

  우리 집 바로 앞 동에 루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둘째는 불쾌해 했다. 이렇게 이사까지 하고보니 아무래도 루가 우리 마당에 자루를 들고 왔던 그 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는 그게 불행의 시작이라고 믿었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보다 훨씬 전에 이미 모든 건 시작되었고, 시작을 만든 우두머리들은 뒤에, 뒤에 숨어있었다. 

 

  저녁을 먹으러 루가 온다기에 나는 안경을 벗었다. 내 생각에 안경을 쓰지 않는 게 훨씬 나아보였기 때문인데, 사실 내 시력은 그렇게 선택적으로 안경을 쓸 정도가 아니었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 번호를 구분하지 못해 엉뚱한 버스를 탄 적이 종종 있었다. 그런데도 마치 안경이 선택사항인 것처럼 구는 건, 버스를 잘못 타서 버리는 시간보다도 시선이 훨씬 중요해서였다. 루는 올해 서른한 살이었는데, 스물아홉 살 우리 담임보다도 더 젊어 보였다. 그게 내가 열다섯이 되었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루가 전혀 늙지 않은 건지 애매했다. 한때 저녁이 있는 삶을 얘기하던 루는 이제 밤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고 했다. 엄마의 초대 덕분에 오랜만에 집밥을 먹는다면서 말이다.

 

  루는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를 세 권이나 들고 와서 우리에게 선물했다. 책은 이삿짐으로서 최악이지만, 또 선물로 책만 한 것이 없다면서 말이다. 막내의 책은 펼치면 어린왕자가 툭 튀어나오는 형태였고, 둘째의 책은 삽화가 그려져 있는 것이었다. 막내가 어린왕자를 보며 이게 무슨 히어로냐고 묻자 루는 둘째에게 그 질문을 돌렸다. 

 

  “은호가 히어로 전문가라던데?”

 

  둘째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앉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루의 질문은 계속 이어졌고 십 분 후, 내가 목격한 건 서랍 한 줄을 여는 둘째의 모습이었다. 둘째는 피규어를 하나씩 꺼내며 루에게 설명했다. 

 

  “여기선 캡틴 아메리카가 제일 별로예요.”

 

  “왜? 잘 생겼는데.”

 

  둘째는 루를 좀 한심하게 쳐다보더니, 곧 이렇게 말했다.

 

 “설정이 좀. 히어로가 해동된 거라니, 좀 웃기지 않으세요?”

 

  “해동?”

 

  “냉동인간이었다가 깨어났거든요. 아, 정말 모르시네?”

 

  둘째가 코로 흘러내리는 안경을 위로 올렸다. 둘째는 내 안경을 부러워해서 TV를 코앞에서 보거나 어두울 때 책을 보는 등의 노력을 해왔고 마침내 뜻을 이뤘다. 동그란 안경을 쓴 둘째가 전문가처럼 말했다.

 

  “그런데 뭐, 원래 히어로들은 고난이 있어야 되니깐.”

 

  “왜 고난이 필요한데?”

 

  “그냥, 그래야 다시 일어서니까요.”

 

  둘째는 그렇게 말하다가 조금 멋쩍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자기를 가르치려 하지 말라고 말했다. 어느 시점이 되면 알아서 작동하는 후렴구 같은 거였다.

 

  “난 지금 너한테 배우는 중인데?”

  루는 빙긋 웃어보였다. 둘째는 ‘낚였어.’ 라고 말했는데,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의 혼잣말이었다.

 

  내 몫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낡은 책이었다. 해적판이라고 했다. 나는 해적판이란 말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에 그게 해적이 등장하는 소설인가 했는데, 해적판이란 건 정식 루트가 아니라 어둠의 경로로 출판된 책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저작권이니 뭐니 다 무시한 책. 때로는 속도를 무시하기도 했다. 아빠는 예전에 만화책의 해적판을 찾아 헌책방 거리를 헤맸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빠 말로는 아직 국내에 들어오지 않은 걸 미리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을 때, 연재물의 더딘 속도에 좀더 앞서 가고 싶을 때, 적절한 속도로 해적판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이야기가 아주 다른 해적판도 있었다. 페이지가 몇 개 빠지거나, 문장 몇 줄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고  인물이나 결말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루는 이 해적판 『어린왕자』를 중학교 때 읽는 바람에, 나중에 정식판본으로 『어린왕자』를 읽었을 때 오히려 시시했다고 말했다.

 

  “왜요? 이야기가 달라요?”

 

  “결말이 살짝.”

 

  『어린왕자』의 결말이 뭐더라? 당연히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읽지 않은 책 중의 하나가 『어린왕자』였다. 물론 나는 코끼리를 삼킨 보아구렁이도 알고 있었고, 여우와 장미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지만 정작 제대로 그 책을 읽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루가 돌아간 뒤에 나는 그 책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낡은 책이기도 했지만, 연식과는 상관없이 애초에 인쇄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아무 페이지나 펼쳐 보았는데, 활자마다 굵기도 조금씩 달라 보였다. ‘우리는 꽃은 기록하지 않지.’ 라는 문장에 눈길이 간 건 ‘꽃은’ 이란 활자의 받침 부분이 유독 굵게 인쇄되어서였다. 내게는 그게 ㅊ과 ㄴ의 배열이 아니라, n개의 다리를 끌고 기어가다가 포박당한 벌레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책 한 권을 벌레도감으로 만들어버릴 만큼, 선명하게 압사한 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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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타고 2017년 연재소설 윤고은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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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10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2-09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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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초록색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골목으로 빠져나간 사람들을 떠올려보는 건 꽤 오랜 시간 내 일과의 한 부분이었다. 주로 잠들기 전에 그랬다. 나는 마치 햇빛영화관의 영사기가 된 것처럼, 낮 동안 열심히 빛을 모았다가 밤이 되면 어둠 속에서 필름을 돌렸다. 시작은 항상 우리 집 마당에 사람들이 자루를 들고 찾아왔던 그날부터였다. 동생들이 채송화가 죽었다고 징징대던 기억, 우리를 다그치긴 했지만 어쩐지 불안해보이던 엄마, 서류에 서명을 한 사람은 자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표정을 짓던 아빠. 나는 이제 열다섯 살이 되었다. 열세 살과 열네 살은 어떻게 보냈는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요약하자면 그 시기는 ‘이사 시도와 실패의 기록’ 정도가 될 거다.    

 

  3년 전, 소장이 다녀간 후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째는 ‘대놓고 이사’였고, 둘째는 ‘몰래 이사’였다. ‘대놓고 이사’는 또 ‘결국 퇴사’와 연결되는 거였다. 이사가 아닌 방식은 선택지에 없다고, 엄마가 말했다. 엄마는 비소가 얼마나 위험한 발암물질인지에 대해서 말했고, 아빠는 이 사태에 대해 변명할 생각은 없지만 비소는 사실 도처에 깔려있다고 했다. 다만 기준치를 얼마나 넘었느냐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집을 팔고 이사 가는 방식에 대해선 아예 생각하지도 못했다. 그건 소장의 말대로 잘못을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것이니까. 아빠의 잘못으로 ‘처리된’ 그 잘못 말이다. 게다가 집이 팔릴지도 의문이었고. 아빠가 그 제안을 거절한다면, 회사를 상대로 소송이라도 건다면, 이길 가능성이 있을까도 의문이었다. 서류에 서명한 건 아빠였다. 

 

  아빠는 센터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유령골목의 ‘김’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였다. 우리에게 이 집이 소중하니까 지키기 위해서는, 복구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다고도 말했다. 우리 마당 속 폐기물을 다시 회수해갈 의지와 능력을 가진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아빠는 그 한 명이 되기로 했다. 센터의 제안에 따라 승진도 했고, 마당의 토양 검사도 받았고, 생각보다 마당의 중금속 농도가 그리 높지 않다는 결론도 얻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그 안도의 기운으로 우리는 좀더 이 집에 머물렀다. 좀더, 그러니까 한 두 계절 정도. 다시 가을이 왔을 때 우리는 또다시 이사를 고민하고 있었다. 마당에서 대수술을 벌인 후로 꼭 1년을, 겨우 1년을 살고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토양의 검사 수치는 정상 범위 안에 있었고, 우리 집에 꽂혔던 ‘과학과 우리’ 기자의 관심이라든지, 이웃의 시선도 조금 희석되고 있었는데, 그래도 우리를 등 떠미는 애매한 신호들이 있었다. 

 

  열세 살 가을, 나는 채송화가 여름이 다 가도록 솟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전 해에 필요 이상으로 길게 피어있던 채송화는 마치 그시기를 끝으로 과로사한 것 같았다. 어디에도 씨를 퍼뜨리지 못했기 때문에 그대로 끝나버린 것이다. 열네 살 봄에는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지 않았다. 1년에 두 번씩 성실하게 꽃 피우던 나무가 왜 그 봄을 건너뛰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면 머리가 아팠다. 아빠는 가끔 꽃나무가 그럴 때도 있다고 말했지만, 슈퍼지렁이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슈퍼지렁이처럼 필요 이상으로 자라나서 우리를 두렵게 하는 것들이 여전히 있었다. 열두 살 겨울에 심어 열세 살 여름에 거둬들인 양파는 징그러울 만큼 컸다. 막내의 머리통보다 조금 작은 정도랄까. 200개의 모종을 심었던 걸 생각해보면 수확률은 20%도 되지 않았는데, 살아남은 양파들도 우리 식탁에 오르지는 못했다. 

 

  기괴하게 자라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은 평균만큼도 자라지 않아서 우리를 초조하게 했다. 막내의 키가 어느 지점에 멈춰 있다는 걸 제일 먼저 알아챈 건 나였다. 우리가 즐겨하던 ‘우체부 놀이’를 하던 중이었다. 그건 문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방 안팎에서 이런 대화를 주고받는 거였다. 

 

  “거기 사람 있나요?”

 

  “누구시죠?”

 

  “전 코끼리반 채민호예요.”

 

  “못 믿겠으니 증거를 대요.”

 

  잠시 후 문짝 아래로 쪽지가 들어왔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전 코끼리반 채민호입니다. 이 쪽지가 증거입니다.’

 

  좀 더 시간을 끌 수도 있지만, 나는 이제 이런 놀이를 하기엔 너무 커버렸으므로 가장 심플한 방식을 선택해 얼른 놀이를 마무리 짓고자 했다. 그래서 ‘당신이 당신이라는 증거가 왔으니 문을 열겠어요.’ 따위의 말과 함께 방문을 열었다. 막내는 채민호가 아닌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반전을 준비했지만, 그 놀이와 상관없이 내 눈에 들어온 건 막내의 이마 높이였다. 문짝 옆에는 기린이 그려진 키 측정용 그림이 붙어 있었는데, 순간 막내가 몇 년째 같은 지점에서 나를 본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들어왔다. 둘째가 쑥쑥 자라난 것에 비하면 너무 더딘 속도였다. 

 

  속도가 더딘 건 우리의 이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이사를 가기로 결정한 시점은 내가 열세 살이던 때의 가을이었는데 열다섯이 된 지금에서야 그것이 실행되었으니 말이다. 그 사이에 두 차례, 이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는 바람에 이렇게 지연된 것이다. 처음 사유는 모르겠지만, 두 번째 사유는 너무 황당해서 나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예정일 하루 전에 이사를 접어야 했는데, 시작은 포장이사 업체의 변심 때문이었다. 이중계약을 해놓고 우리를 포기한 것이다. 엄마가 센터의 방해가 아니냐고 의심할 정도로, 이사 가는 과정이 그리 녹록하진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건 이 정도다. 좀 누락된 구석이 있을 수도 있고, 행동보다 더 앞서나가는 말처럼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도 있을 것이다. 

 

  새로 이삿날을 잡아놓고 아빠와 엄마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우리가 선택한 동선은 ‘대놓고 이사’와 ‘몰래 이사’ 사이에 있었다. 두 집 살림을 하는 방식이었다. 우리 집은 여기 그대로 둔 채로, 짐의 절반만 다른 곳으로-센터에서 제공한 집으로 옮기는 거였다. 회사 직원들이 사는 곳이라고 했는데, 경쟁이 치열했지만 운 좋게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다. 내가 다니는 중학교가 그 집과 좀더 가까웠다는 것도 우리에겐 어떤 신호가 되었다. 엄마는 마티할머니가 물어보면, 내 통학을 들먹이라고 했다. 가장 먼저 이사를 갈 것 같았던 마티할머니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엄마 말로는 마티할머니가 집을 내놓은 흔적조차 없다고 했다.

 

  새집은 5층짜리 아파트의 4층에 있었다. 마당을 벗어난 데 대한 보상치고는 좀 낡았고,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동생들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둘째는 엘리베이터가 없으면 그게 무슨 아파트냐고 투덜거렸고, 나는 막연히 이제는 금붕어가 죽으면 변기에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사할 때 최악이 책’이라던 루의 말이 떠올라서, 나는 이사 전부터 책을 덜어내고 또 덜어냈는데, 둘째에겐 화분이 그런 존재였고, 막내에겐 ‘꼬맹이’가 그랬다. 막내는 존재 자체로 짐이 된 기분을 느꼈는지도 몰랐다.

 

  사랑하는 것들이 짐처럼 취급되지 않았으면 해서 무게를 줄이고 부피를 줄였지만, 막상 낯선 집에 도착하니 우리가 짐짝이 된 듯 했다. 오도카니 앉아있던 동생들은 텅 빈 싱크대 안에 몸을 우겨넣으면서 적응을 시작했다. 그릇과 냄비와 수저들을 풀어놓기 전에 먼저, 그 집의 새 살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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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타고 2017년 연재소설 윤고은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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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9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2-06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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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들이받은 게 파란 레인지로버가 아니라 차라리 시간이었다면, 이 계절의 어느 틈이었다면 어땠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최근에 『아인슈타인의 꿈』에서 읽은 문장 때문이었다. 

 

  ‘시간은 신경섬유가 늘어서 있는 것과 같아서 계속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섬유와 섬유 사이에 현미경으로나 보일 정도로 작디작은 틈이 벌어져 있다.1)’ 

 

  시간이 연속적인 게 아니라 사이사이에 미세한 틈이 있다는 사실, 사람들이 잘 눈치 채지 못할 뿐 조금씩 그렇게 끊어진다는 사실이 내겐 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엄마가 들이받은 게 그 약한 틈이었다면, 그래서 그 충돌로 흐름을 잠깐이라도 멈춰 세울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그 충돌의 순간에 영향을 받은 건 단지 막내의 고른 호흡뿐이었다. 막내는 딸꾹질을 시작했고 그 외에 모든 건, 조금의 쉼도 없이 흘러갔다.

 

  엄마가 집앞에 주차되어있던 소장의 차를 들이받은 건 실수가 아니었다. 계획된 행동도 아니었다. 엄마 속에 있던 화산이 그 순간 분출한 것뿐이었다. 엄마가 골목 어귀에서 아빠에게 전화를 했을 때 들어야 했던 답은 ‘조금만 더 기다리자’는 게 아니었다. 그게 가속페달 역할을 했다. 소장은 자신의 차에 흠집이 생긴 걸 확인했지만,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다.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괜히 만만한 나에게 그걸 내밀었을 뿐이다. 무슨 공업사 명함이었다.

 

  “여기로 연락하면 잘 수리해줄 겁니다. 값은 신경 쓰지 마시고요.”

 

  그게 소장이 한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더 손상을 입은 건 우리 차였다. 거의 자해 수준이었다.

 

  우울한 저녁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싸우지도 않았다. 대화를 하지 않았다. 엄마는 저녁으로 뭘 시켜 먹으라며 카드를 꺼내줬는데, 동생들과 무엇을 시켜먹을 것인가에 몰입했던 그 순간만이, 오늘의 엄청난 굴레에서 약간 비껴 있는 것 같았다. 피자는 빛의 속도로 배달되어왔지만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었다. 평소 같으면 경쟁하듯이 한 판을 먹었을 텐데 우리가 먹는 속도는 평소에 비해 한참 느렸다.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고, 조금 과장하자면 식도에 벽돌 같은 게 차는 느낌이었다. 막내가 피자를 한 조각 앞으로 가져가는가 싶더니 곧 떨어뜨리고 엄마에게로 달려갔다.

 

  “엄마, 울지 마!”

 

  엄마가 운다고? 두 동생들이 덩달아 울기 시작했고, 나도 울었다.  

 

  지하저장고 문을 열고 그 안을 손전등 불빛으로 한번 휘저었지만, 별로 걸리는 게 없었다. 우리는 이 공간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도 않았다. 다음 계절이 온다면 좀 다를까. 이제 겨울의 초입인데, 막연히 다음 봄이 올지 걱정스러웠다. 언젠가 아빠를 따라가서 만났던 골목도 떠올랐다. 그 골목에 피아노 소리가 들리고, 차에 시동을 걸거나 끄는 소리가 들리고, ‘택배요’ 하는 소리가 들리던 때를 상상해보았다. 그 골목에도 한번쯤은 참다 참다 화난 엄마의 ‘쿵’ 소리가 들렸을까. 아니면 시간이 단 한번의 휴지기도 없이 그대로 흘러갔을까. 유령골목이 될 때까지, 단 한번의 머뭇거림도, 고민도 없이?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화들짝 놀랐다. 둘째였다.

 

  우리는 나란히 그 저장고에 앉아있었다. 둘째는 소장의 차에 올라탔다는 이유로 내 눈치를 봐야 했는데, 그래도 본분을 잊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둘째가 내민 볼펜에는 차에 올라탔을 때부터 아이스크림 가게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약 20분 분량의 내용이 녹음되어 있었다. 소장이 둘째의 레인지로버에 대한 지식에 감탄하며, 몇 살이냐고 묻는 게 첫 문장이었다.

 

  “저는 미운 네 살이요.”

 

  막내는 자기가 잘 아는 질문이라는 듯, 냉큼 가로채 대답했다. 둘째도 지지 않았다.

 

  “저는 미친 일곱 살이요.”

 

  소장이 웃는 소리, 이 차를 언제 샀는지 어디를 다녔는지 자랑하는 소리, 막내가 슈퍼지렁이에 대해 자랑하는 소리, 소장이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하는 소리가 이어졌고, 곧 막내가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거, 봐. 진짜야!’ 하는 소리. 막내는 확신에 차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히어로니까 비밀이야, 맞죠?”

 

  막내는 지난 심플라이프 촬영 이후로 슈퍼지렁이를 신종 히어로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중금속을 먹으면 힘이 커지는 건지, 슈퍼지렁이가 채송화와 같은 편인지 아닌지, 그런 걸 궁금해 했다. 히어로 얘기가 시작되었다면 터져나올 질문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소장 앞에서 형이 신발까지 벗는 걸 보지 않았던가(둘째는 자신이 신발을 벗은 건 소장이 아니라 드림카에 대한 예의였다고 주장했다), 막내는 가장 핵심적이라고 생각되는 것만 물어보았다.

 

  “마블인가요?”

 

  “뭐?”

 

  “디씨코믹스?”

 

  “무슨 얘길 하는 거냐.”

 

  둘째가 통역으로 나섰다.

  “히어로 말이에요. 슈퍼지렁이는 어디서 만든 거냐는 거예요? 마블이에요, 아니면 디씨코믹스예요?”

 

  “그런 얘긴 못 들어봤는데. 그런 건 없단다.”

 

  “어? 우리 집 마당에 사는데.”

 

  “잘못 본 거야.”

 

  “있다면요? 있다면 어디 소속이에요?”

 

  소장은 ‘저기 저 아이스크림집이니?’ 와 같은 말을 했는데, 동생들이 떠드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도 않았다. 소장은 결국 동생들의 추궁에 이렇게 대답했다.

 

  “있다면, 그냥 국내산이겠지.”

 

  “국내산이래, 형. 국내산이 뭐야?”

 

  그리고 다음 순간 진짜 슈퍼지렁이가 소장의 눈앞에 나타났다. 막내가 아이스크림케이크를 받아든 후에 소장에게 지퍼백 속의 슈퍼지렁이를 보여준 거였다. 소장이 그게 어디서 난 거냐고 묻는 소리, 둘째가 우리 집 마당에 슈퍼지렁이가 산다고 말하는 소리, 소장이 그걸 자기가 보관해도 되겠냐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둘째는 막내가 고개를 심하게 가로저었다고 했다. 그러자 소장이 지갑에서 누런 지폐를 한 장씩 꺼내 동생들에게 내밀었다고 했다. 몇 마디 말은 흔적을 남겼다.

 

  “어? 돈이다!”

  막내의 해맑은 목소리였다.

 

  “그래, 돈이야. 먹고 싶은 거 사먹고, 장난감도 사고. 자, 그건 아저씨한테 주겠니?”

 

  “이게 뭔데요?”


  “그 지퍼백 말이다.”

 

  “아니, 이건 슈퍼지렁이인데요?”

 

  “그래, 그 슈퍼지렁이, 그거.”

 

  “십만 원에 우리 슈퍼지렁이를 넘기라고요? 왜요?”

 

  이건 둘째의 목소리였는데, 둘째 말로는 그 순간 들킬 뻔 했다고 했다. 소장이 움찔했다는 거였다. 내가 ‘일곱  살 짜리를 누가 의심하니?’ 했더니 둘째는 ‘미친 일곱 살이라니까.’ 라고 응수했다. 내가 볼 땐 확실히 의심보다는 약간의 피로와 짜증이 묻어있는 것 같은 말투로 소장이 이렇게 말했다. 

 

  “위험하니까. 내가 관리하마.”

 

  “우리 히어론데요.”

 

  “히어로가 아니야. 돌연변이다. 앞으로 그게 보이면 절대 집밖으로 못 나가게 해. 그럼 너희가 히어로가 되는 거다. 자, 히어로를 기다리지 말고 너희가 히어로가 될 생각을 해야지.”

 

  그렇게 슈퍼지렁이 한 마리는 소장에게로 갔지만, 우리에겐 목소리가 남았다. 이걸 어떻게 써먹을 수 있을까. 그 저장고에서 밖으로 나오자, 온도 차가 느껴졌다. 여름에는 저장고 안이 밖보다 더 시원했는데, 이젠 저장고 안이 더 훈훈했다.

 

  자기 전에 ‘과학과 우리’를 한번 더 읽었다. 즉각 휘발되기엔 너무 무거운 말들이 가득했는데 가장 걸리는 건 그 골목이 우리의 미래라는 식의 표현이었다. 아빠는 거의 새거나 다름없는 담뱃갑을 두고 온 다음날도, 일주일 후에도 그 골목에 다시 갔다. 담뱃갑은 같은 위치에, 담배 하나 줄어든 것 없이 그대로 있었다. 그곳이 주중이든 주말이든 인적 끊긴 골목이라는 건 관찰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센터에서 뭔가를 준비 중이라는 게 거짓말이라는 걸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엄마는 인맥까지 동원해서 심플라이프 촬영을 했다. 비록 잡지에 실리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 모든 노력들은 우리가 가만히 있지 않았다는 걸 알려주는 거였다.

 

  그러나 세상엔 우리보다 더 큰 거인이 있는 게 아닐까. 내가 개미를 내려다볼 때처럼, 거인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우리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죽어라 달려봤자, 거인이 볼 땐 겨우 한 뼘 정도 이동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우리 마당이 그대로 실험실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거인이 우리 마당에 비소로 오염된 토끼를 넣어놓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어떻게 변하는지 지켜보는 게 아닐까. 창 밖으로 보이는 동그란 달조차 의심스러운 밤이었다. 순간 그게 섬뜩한 구멍처럼, 누군가의 눈동자처럼 보였던 것이다. 내가 실험동물의 생태에 대해 약간 알고 있다는 것도 얼른 잠에 들지 못하는 이유였다. 왜 하필 우리 마당이었는지가 가장 의문이었는데, 조금 알 것도 같았던 것이다. 순하고, 약하고, 누군가를 잘 믿는 건 실험대 위에 올리기에 수월한 조건들이었다.

 

  이게 실험이라면 한 가지 조건이 새롭게 추가되었다는 걸 며칠 후에 알게 되었다. 아빠에게 승진 소식이 들려왔던 것이다. 부모님은 이사와 퇴사에 대해 고민했지만, 승진이라니, 그건 예상 밖의 전개였다.



1) 앨런 라이트맨 <아인슈타인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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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8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2-02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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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서점에 간 건 그 잡지-‘과학과 우리’가 실제로 있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는데, 덜컥 한 권을 사들고 돌아왔다. 잡지는 매대 위에 스무 권이나 놓여 있었고, 할 수만 있다면 그걸 모두 사서 없애고 싶었다. 우리 집이 취재에 기여한 바는 전혀 없었지만, 다 우리를 조준하는 얘기처럼 읽혀서 말이다. 게다가 162페이지에는 낯익은 골목 사진도 있었다. 언젠가 아빠와 루를 따라갔을 때 나타났던 그 골목이었다. 사진 아래에 작은 활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유해 폐기물을 잘못 다뤄 유령 골목이 되었다. 폐기물에 의해 한 세계가 얼마나 쉽게 망가지는가. 어쩌면 이 골목이 우리 모두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저만치 마티할머니가 서 있었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잡지를 가방 안에 넣었다. 내 입이 우리 집의 구멍이 되는 건 사양하고 싶으니까. 내가 유독 마티할머니와 자주 마주치는 게 운이 안 좋아서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운이 아니라 누군가의 노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건 비교적 최근에 와서다. 설마, 외로워서는 아니겠지만 마티할머니는 내가 지나다니는 시간대에 주로 대문 앞에 앉아 있곤 했다.

 

  “외가에는 잘 다녀왔니?”

 

  “예?”

 

  “그치? 외가에 간 게 아니구나!”

 

  “잘 다녀왔는데요.”

 

  사실 최근에 외가에 간 적은 없었다. 비슷한 거라면 엄마가 이틀 전 이모네로 가 있다가 이제 집으로 오고 있다는 게 전부인데, 곧이곧대로 말했다가는 더 말이 길어질 게 뻔했다.

 

  “저번에는 네 아버지가 둘째만 데리고 설악산에 다녀왔다며? 이번에는 어머니랑 막내랑 너만 외가에 가고. 왜 그러는 거지?”

 

  “글쎄요. 뭐, 학교나 회사 때문에 그랬던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스케줄 때문에요.”

 

  딱히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가족 전체가 움직인 적도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정작 최근의 사례는 떠오르지 않았다. 여름 이후로 정말 엄마와 아빠가 동시에 이동한 적이 거의 없긴 했다.

 

  “어머니 아버지가 자주 싸우시니?”

 

  “아뇨.”

 

  “그런데 왜 따로 가지?”

 

  “글쎄요, 빅뱅에서 지디랑 탑이랑 유닛 했잖아요. 그거랑 비슷한 거 아닐까요?”

 

  “유, 뭐?”

 

  할머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왜 이걸 설명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열심히 내가 아는 유닛의 계보를 읊었다.

 

  “식구 많은 집에서 하기가 좋죠. 꼭 완전체로만 다녀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변화도 좋잖아요.”

 

  아차 싶었다. 할머니는 혼자 살잖아! 아, 마티가 있네! 할머니의 표정이 뭔가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내가 이사를 갈 거라고, 엄마가 말씀 안하시든?”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나는 이사를 가기로 했단다.”

 

  “어디로요?”

 

  “어디든!”

 

  심플라이프에 제보를 한 사람이 마티할머니일까? 엄마는 마티할머니가 까칠한 이웃이긴 하지만, 이 골목의 일을 밖으로 내보낼 사람은 아니라고 말했다. 마티할머니는 우리가 이사 오기도 전부터 여기 살았던 터줏대감이었다. 그런데 이사를 간다고? 설마 우리 때문에?

 

  ‘과학과 오늘’과 인터뷰를 진행한 것도 아닌데 여러 사람들이 동요하는 게 눈에 보였다. 아직 학교에서 누구도 내게 지렁이니 구덩이니 마당이니 하는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게 다행스러웠지만, 혹시 내 앞에서만 말을 안 하는 게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런 게 알려진다면 내 사회적 지위와 체면은 추락할 것이다. 아아, 머리가 아팠다.

 

  “새로 온 소장이 일단 현장을 직접 보겠대. 그래, 지금 바로 온대. 당신은 어디쯤이야?”

 

  집에 갔더니 아빠가 엄마와 그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센터에 새로 온 소장이 우리 마당을 보러 오고 있다는 거였다. 뭔가가 좀 달라지려나. 나는 일단 애들을 배롱나무 아래로 소집했다. 애들이라고 해봐야 내 밑으로 둘 뿐이지만, 동생들은 장점이 있었다. 일단 작고, 날렵하고, 누구도 그 애들을 경계하지 않는다. 동생들은 아직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 같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나마 형체를 갖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지나가면 어른들이 하던 얘기를 급히 멈추거나, 화제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게 느껴졌다.

 

  “잘 들어. 이건 중대한 고백이니까.”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막내가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고백점프, 고백점프~.”

 

  “야!”

 

  둘째가 막내를 툭 건드리며 주의를 주었다. 고백점프라니, 그건 우리 가족이 자주 하던 게임 중 하나였다. 무념무상의 표정으로 노래하던 막내는 내 표정을 보고 흠칫 놀라 노래를 멈췄는데, 바로 딸꾹질이 따라왔다. 뒤늦게 분위기 파악을 하고는 딸꾹질을 멈춰보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 과정이 막내를 더 어려 보이게 한 건 확실해서, 나는 길게 얘기하겠다는 생각을 접었다. 그래서 예정되어 있던 고백들을 싹둑 잘라내고 다짜고짜 이렇게 말했다.

 

  “가능하면 모든 걸 녹음해. 나도 휴대폰으로 할게. 모든 게 다 증거야.”

 

  나는 언젠가 생일선물로 받았던 적이 있는, 녹음 기능이 있는 펜을 둘째에게 건넸다. 동생들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가 자기는 뭘 할까, 물어보기에 이렇게 당부했다.

 

  “제발 딸꾹질하지 마.”

 

  복병은 소장이 몰고 온 차였다. 파란 레인지로버. 둘째는 그걸 작은 모형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한번도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둘째의 동공이 흔들리는 걸 느꼈는데, 마치 그 차 이외에 다른 걸 보고 듣기가 힘든 사람 같았다. 심지어는 소장에게 그걸 들킬 정도였다. 소장이 차에 태워줄까 어쩔까 했을 때 둘째가 보인 행동은 굴욕적이었다. 그 애는 어처구니없게도 차에 올라타기 위해 운동화를 벗기까지 했던 것이다. 신발에 흙이 너무 많이 묻어있다고 느꼈던 걸까, 아니면 차의 내부가 너무 깨끗했던 걸까. 둘째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까치발로 차에 올랐고, 막내도 덩달아 올라탔다. 그리고 잠시 후 소장이 사준 아이스크림케이크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마당을 엿보았다. 마당을 한 바퀴 휙 둘러보더니 소장이 아빠에게 말했다. 더 이상 센터에서 이런 식으로 무분별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겠다는 거였다. 그건 자기가 부임한 지금 이 순간부터 적용되는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 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딱히 없다는 거였다. 자기였으면 애초에 그런 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다른 사람이 싼 똥을 치우고 싶겠나. 자네 같으면?”

 

“하지만 소장님 앞마당에 똥이 있다면 어쩌시겠습니까?”

 

“흠. 치우긴 해야지. 일단 내가 오늘 자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내 입사동기에 관한 말이네. 유능했는데 아까운 인물이었어. 그래, 김, 이라고 해두지.”

 

“김이요?”

 

“자네 입장에서는 김이 떠오를 법 해. 내가 봐도 그러니 말이야. 자네가 김의 집을 봤다는 얘기도 보고 받았네. 과학과 우리인지 나부랭이인지 기사도 봤고. 그렇지만 너무 그쪽에 몰입하지 말아야 해. 김과는 다른 결말을 내야 되지 않겠나. 내가 아는 건 김이 두 번 크게 실수했다는 거야. 하나는 그 폐기물을 자기 집에 보관한 것.”

 

“하지만 소장님. 그분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을까요?”

 

“이해하네. 상명하복이 항상 고질병이지. 그렇지만 두 번째 실수를 한 건 김 스스로의 문제였어. 그는 센터가 여러 제안을 했지만 제 발로 박차고 나갔다고.”

 

“왜 나가셨을까요.”

 

“지쳐보였지. 그래서 지금, 내가 채 팀장에게 조언을 하려고. 이 마당 아래에 있는 걸 다시 파내는 순간, 자네는 실수를 인정하는 셈이 되지. 또 실수를 은폐하려고 했다는 그런 오해를 받게 돼. 난 자네가 오해 받길 원치 않네.”

 

“소장님, 그게 저 만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죠? 전 지시대로 한 거니까요.”

 

“상명하복이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라니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장은 목을 좀 가다듬더니 다시 김 얘기를 했다.

 

“김은 좋은 조건으로 해외 근무까지 제안받았지만 거절했지. 버티고 있었다면 지금 나보다는 훨씬 잘 나갔을 친구인데. 나는 채 팀장이 선택을 잘 하길 바라네. 여기 폐기물은 그래도 꽤 신경 써서 처리한 모양인데, 지하 10m라고, 맞나? 원한다면 사택을 이용해도 좋지만, 이곳에 문제가 있다는 걸 섣불리 인정하면 자네의 일이 더 커질 거야. 인정하는 순간 진짜 문제가 생기는 거란 말일세. 실체 없는 그 어두움이,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가시화된다고.” 

 

  그때 ‘쿵’ 소리가 들렸다. 이제 배롱나무의 매미껍질 같은 건 더 없는데 말이다. 그건 두 개의 물체가 충돌하는 소리였고, 두 개의 세계가 서로를 겨누는 소리였다.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는 소리였다. 대문을 열어보니 우리차가 소장의 레인지로버를 들이박은 채 서 있었다. 미숙한 게 있다면 엄마의 운전 실력이 아니라, 이 위협으로부터 우리 가족을 감싸주던 어떤 보호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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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타고 2017년 연재소설 윤고은 YES블로그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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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판을 타고』7회 | 해적판을 타고 2017-01-26 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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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막내는 그 비밀이 뭔지 목격한 적도 없었다. 엄마가 차 안에서 방귀를 뀌었다던 ‘저번’은 막내가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니까. 그건 내가 막내에게 해준 이야기였고 막내는 들어서 알았을 뿐인데, 말이란 게 그렇듯 막내의 기억 속에서 몸을 부풀렸다. 엄마는 이렇게 보탰다.

 

  “차 안에 있는 식구들 때문에 좀 참아볼까 했는데, 참다가는 내 안에 있는 식구가 괴로울 것 같더라고요. 바로 요 녀석 때문에요.” 

 

  막내는 코를 틀어막는 시늉을 하며 웃었고, 기자들이 돌아갈 때는 배꼽인사를 하며 배웅했다. 잔칫날이었다. 집은 깨끗했고 예뻤다. 오랜만에 최상의 상태였다. 며칠 더 손님들이 이어졌다. 월요일과 화요일에 엄마의 친구들이 다녀갔고, 수요일에는 아빠네 팀원들이 모일 거라고 했다. 엄마는 추어탕을 끓였다. 매년 가을 꼭 한번은 집에서 만드는 음식이었다. 아빠가 팀장이 된 이후로 엄마는 추어탕을 끓이면 팀원들을 초대하곤 했다.

 

  나는 추어탕 냄비를 들고 서서 마티할머니네 초인종을 눌렀다. 대문이 열리자 마티가 먼저 나와 우리 집 쪽으로 움직였다. 서너 걸음이나 옮겼을까? 늙은 개라 민첩하지도 않았는데, 할머니는 필요 이상으로 거칠게 마티를 붙잡았다. 체념한 듯이 할머니 품에 안기는 개를 보고도, 할머니는 혹시 마티가 우리 집 쪽으로 갈까봐 경계했다. 오래 전에는 마티가 우리 마당을 뛰어다니며 놀았던 적이 있고, 우리 역시 할머니네 마당을 뛰어다닌 적이 있었는데 여름 이후 또렷해진 변화였다. .그런 몸짓을 보고 있노라니 추어탕이고 뭐고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생각해보면 늘 얌체 같은 분이었다. 오늘 심은 양파를 수확할 때면 늘 그랬던 것처럼 할머니에게도 나눠 드리겠지만, 할머니에게서 뭘 받아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주말에 뭘 하던데, 뭘 한 거니?”

 

  “잡지 촬영이요. 심플라이프.”

 

  “요란하다, 요란해.”

 

  “시끄러우셨어요?”

 

  “마음이 시끄러워. 너희 마당 쪽만 보면, 불안해서 못 살겠다.”

 

  마티할머니의 말대로라면, 나는 불안과 한 이불을 쓰고 동거하는 셈이었다.

 

  “이건 뭐니? 아, 추어탕인가.”

 

  그렇다고 하자 마티할머니는 마치 배달음식을 받듯이 당연하게 냄비를 받았다. 그러면서 제피가루를 잘 썼나 어쩌나, 라고 중얼거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아빠는 저녁 무렵 루와 함께 왔다. 갑작스러운 인사이동이 있었고, 아빠의 팀에서 두 명이 다른 팀으로 이동해서 현재 아빠의 팀원은 루 한 명 뿐이었다. 곧 채워질 거라고는 했지만 뭔가 어수선해보였다. 두 사람은 마당에 있는 나무식탁에 앉아 밥을 먹었다. 나와 둘째가 부엌에서 마당까지를 오가며 음식을 날랐는데 어느 순간, 루가 이렇게 말하는 게 귀에 쏙 들려왔다.

 

  “소장은 거의 좌천된 거라던데요.”

 

  그 말에 아빠의 표정이 얼마나 어두워졌는지, 아빠는 바로 옆에 덜컥 앉아버린 딸을 의식하지도 못했다. 표정을 한 겹도 코팅할 여력이 없어보였다. 소장이라면 아빠에게 폐기물에 대해 약속했다던 그 사람 아닌가. 나는 ‘좌천’이 뭔지 얼른 검색해보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걸 느꼈다.

 

  “팀장님도 아시잖아요, 소장 쪽 라인이 다 무너졌다던데. 이제 소장도 뭐, 그냥 아저씨죠. 어디서 만나도 편하겠죠, 이제.”

 

  루의 말투가 좀 웃겼는지, 어느새 루 옆에 앉은 막내가 그 말을 따라했다.

 

  “뭐, 그냥 아저씨죠? 뭐 그냥 아저씨죠.”

 

  아빠가 술을 연거푸 두 잔 들이켰다. 아빠가 소장이 그냥 아저씨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 루는 그게 무슨 뜻인지 한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바람이 배롱나무를 마치 탬버린처럼 흔들었다. 우수수 나뭇잎이 떨어졌다. 루가 허리를 굽혀 붉은 나뭇잎 하나를 주워들고는, 막내에게 손을 내밀어보라고 말했다.

 

  “선물! 자, 저기 가서 놀아.”

 

  손바닥 위의 나뭇잎을 가만히 보던 막내가 그걸 꼭 쥐고 제 형에게 달려갔다. 둘째가 조금 실망했다는 듯이 말했다.

 

  “난 또 돈이라도 주는 줄 알았지.”

 

  막내가 그 나뭇잎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 저녁에 옷을 벗다가, 내 후드티셔츠의 모자 속에서 은행잎 하나를 발견했던 순간은 명확하게 기억한다. 우리 집에는 은행나무가 없었는데 어디서 온 걸까. 은행잎은 아직 덜 자란 것처럼 보였다. 막내의 귀보다도 더 작았으니까. 나는 그 은행잎을 책 사이에 꽂아두었다.

 

  심플라이프 촬영일로부터 일주일 쯤 지났을까. 우리를 취재했던 기자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우리 이야기를 이번 11월호에 넣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우리 가족이 그 지면에 나가는 게 적절치 않다고 익명의 누군가가 잡지사로 건의를 해왔고, 잡지사에서도 회의 결과 무리수를 두지 말자는 결론이 났다는 거였다.

 

  그 누군가가 제보한 내용은 이랬다. 우리 마당에 몇 달 전 수상한 공사가 있었고, 그 공사는 센터의 폐기물과 관련된 걸 거라고.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내가 아는 것과 정확히 일치했으니까. 다만 우리 모두 그 다음 내용까지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그 센터에서 이런 식으로 폐기물을 매립한 적이 처음은 아니며, 어쩌면 우리 마당은 이미 중금속 오염을 걱정해야 할 수도 있다고.

 

  엄마는 기자에게 사실관계를 확인해보라고,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가 공사를 했던 건 사실이지만 센터의 폐기물과 관련된 게 아니라 단지 마당에 저장고 공사를 한 것뿐이다, 누가 그런 소문을 낸 것이냐, 사실이 아니다.

 

  분명한 건 잡지사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어떤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꼭 담아야 할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사실관계도 중요하지만, 때로 어떤 세계는 소문 자체로도 타격을 입거든요.”

 

  기자는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게다가.

 

  “게다가?”

 

  사진작가가 그날 열심히 찍었던 사진들 중에는 꺼림칙한 소문을 뒷받침할만한 것도 몇 장 있었던 것이다. 찍는 사람도 찍히는 사람도 의도하지 않은 사진들, 예를 들면 슈퍼지렁이 같은 것. 기자는 그날 찍은 가족사진 중에 잘 나온 몇 장을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엄마는 메일을 열어보지 않았다. 기자는 우리의 기사를 잠시 보류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지만, 앞으로도 심플라이프에 우리가 들어갈 지면은 없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무기한 보류된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지난 여름 이후로 우리가 늘 마당 생각만 하고 산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당으로부터 아주 자유로웠던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는 마당에 대해서 우리가 좀더 생각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소문이 불어나 있었다. 마치 우리의 마당이 잡지 편집에서 제외되길 기다렸다는 듯이, 대문 밖에서 도는 그 소문에 가속이 붙었다.

 

  엄마의 추궁에 아빠는 우리 마당 아래에 묻힌 토끼들이 실험에 활용되고 버려진 종류는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다음 말을 들어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실험에 활용되기도 전에 이미 다른 방식으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실험동물에게 마취주사를 쓰지 않는 건 아주 조금의 변수도 두지 않게 하기 위함인데, 중금속 오염이라니. 그 토끼들은, 이 토끼들은, 실험용으로 부적합했다. 비소가 기준치 이상으로 많이 검출되는 폐기물이었지만, 센터는 감사를 앞두고 있었다. 시기가 좋지 않았다. 폐기물이 필요 이상으로 확대 해석되어 센터를 뒤흔드는 문제가 되는 걸 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내부에서 해결하자는 데 모두 합의를 했고, 그 내부에서 선택된 이가 아빠였다.

 

  아빠는 컨테이너박스로 지하저장고를 만든 이웃 이야기를 했고, 조만간 아빠도 그걸 만들 거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연구원들끼리 차 한 잔 하면서 주고받은 얘기였다. 사실 우리는 그때 컨테이너박스로 지하저장고를 만들 계획을 갖고 있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때로는 말이 앞서가고 행동이 그를 뒤따르는 경우도 있으니까. 아빠가 지하저장고를 팔 거라는 얘기를 며칠 전에 했다는 이유로, 또 이미 실험동물을 마당에 자의로 묻은 적이 있다는 이유로, 마당 아래를 관통하는 다른 시설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가 선정되었다. 처음에는 감사 기간만 넘기면 다시 회수해 갈 거라고 했다. 센터에서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랬다. 우리는 그렇게 마당을 빌려준 것뿐이었다.

 

  잔인하게도 심플라이프에서는 11월호가 발행되자마자 우리 집으로도 한 부를 보내주었다. 예상대로 거기에 우리 마당은 없었다. 예상치 못한 건 우리에게 또 한번 취재 요청이 왔다는 것인데 잡지 이름이 우리를 당황하게 했다.  ‘과학과 우리’ 였는데, 거기서는 ‘중금속을 먹고 크는 슈퍼지렁이’에 대해 쓰고 싶다고 했다. ‘과학과 우리’의 기자가 몇 번 더 전화를 했지만, 엄마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 연휴로 월요일은 쉽니다. 8회는 다음 목요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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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한 장면 | 책 밖에서(안부) 2017-01-26 0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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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윤고은입니다.

 

7회 원고를 가지고 왔어요.

대략 25회까지 진행될 예정이니

이제, 전체 분량의 1/4 을 넘긴 셈이네요.

처음에 제가 소설을 8시에 올리겠다고 말씀을 드려서

(실은 예약글 기능이 되는 줄 알고!)

알람시계까지 동원해서 최대한 8시에 가까이 가려고 했어요 ㅎ

그런데 이른 새벽에,

<해적판을 타고>로 하루를 시작하시는 분들도 계신 것 같아

요즘엔 자정부터 8시 사이에, 최대한 일찍 올리고 있어요.

올려주시는 댓글들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많은 응원이 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오늘도 한 장의 사진을 들고 왔는데,

마당 삼남매의 모델이 된 아이들이랄까요.

소설의 아이들은 열두 살, 일곱 살, 네 살이니

사진 속의 아이들과는 나이 차이가 좀 있지만 

세 명이 모여 있는 느낌, 그 앞에 놓인 책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진 속에서 가장 많이 치장한 아이가 저예요. 크흐.

다른 둘은, 지금 이 사진의 용도를 전혀 모를, 제 사촌들입니다!

 

가끔 그런 게 참 궁금한데,

제가 기억하는 최초의 장면이 언제일까.

몇 장면이 떠오르긴 하는데, 사진 속처럼 어린 시절은 아니기도 하고,

어쩌면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를 상상해보던 게

제가 또렷하게 기억하는 걸로 재구성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요.

이 사진만 해도

물론 전혀 기억나지 않는 순간인데, 자꾸 그려보니까

없던 일도 있었던 것처럼 '기억나더라는' 거예요.

 

말이 길어졌네요.

전 이제 7번째 이야기를 올리러 가겠습니다. 

참, 다음주 월요일은 설 연휴로 휴재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전 다음주 목요일에 8번째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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