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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써 보는 미술 도록 5 ((feat. 아모레퍼시픽 아트 뮤지엄 chapter three, 제6~7전시실) | 아트다이어리(그림으로 쓰는 일기) 2021-10-13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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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심상치 않다.

비교적 뚜렷한 색감으로 저마다의 개성을 피력하는 제5전시실을 나서며 제6전시실로 들어가는 찰나, 갑자기 커다란 벽이 나타나고 거기에는 압도적인 크기의 그림 (사진 같은 그림)이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다. 눈썹, 두 눈, 코, 입, 그리고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는 수염에서 강력한 기운이 퍼져 나온다. 조선 시대의 그 유명한 초상화 <윤두서>가 여기 현대미술 작품들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니 무슨 일일까. 오리지널 작품과 거의 구분이 안 될 만큼 정교하게 다시 태어난 이 그림은 강형구 Kang Hyung-Koo의 <윤두서 Yu Du-seo>이다. 대형 초상 작업을 주로 하는 작가는' 사진 자료에 상상력을 더해 주름, 피부 결, 머리카락과 같은 디테일을 표현'한다. 솔직히 조선시대에 그려진 원작을 자세히 살펴본 적이 없어 이 그림에서 어떤 식으로 '재해석'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지는 기분으로 그 자리에 멈칫 서고야 만다. 엄청난 크기의 캔버스에 얼굴 하나만이 그려져있고 이 엄준한 인상의 인물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한 시선이 있다. 호기심이 일면서도 알지 못할 그 어떤 두려움을 느낀다.


 

 

 

 

강형구의 거대 초상화 앞에서 얼어붙은 발걸음을 얼른 전시실 안으로 옮겨 들어온다. 높은 천고에 조명이 규칙적으로 배치되어 밝고 탁 트인 기분을 느끼게 된다. 미술관에서 가장 큰 전시실이고 '관람객의 시야와 동선에 개입을 최소화'한 곳이다. 앞서 거쳐온 대부분의 전시실과는 달리 제6전시실에는 기둥이 하나도 없다. 게다가 이곳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스케일이 커서 전체적인 개방감이 더욱 돋보인다. 또한, 색감에 있어서 흰색에서 블랙까지의 무채색 스펙트럼을 벗어난 작품이 없다. 흔히 말하는 블랙과 화이트의 시크함으로 매우 모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옛날에 가득 쌓아 두었던 나의 카세트테이프들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각종 장르의 음악을 담은 테이프들에다가 선물로 받은 손수 녹음한 거친 음질의 테이프들까지.... 일상을 이루는 흔한 물건이자 취향의 상징물 아니었던가. 이제는 추억의 빈티지 아이템으로 차원을 달리하게 된 카세트테이프들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킨 작가가 있다. 그레고르 힐데브란트 Gregor Hildebrandt는 '카세트테이프, 레코드판과 같이 소리를 녹음하는 매체를 재료로 음악, 영화, 문학, 하위문화 등에 관한 작업'을 하는 예술가이다. 오늘 이곳에서 <모자이크 - 넬리 Das Moik - A ce soir>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 소피 마르소이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넬리>라는 영화가 있고 (프랑스어 원제 'A ce soir 이 저녁에'를 한국어로는 극중 소피 마르소의 이름인 '넬리'로 바꾼 것 같다), 소피 마르소는 남편의 죽음을 겪는 비극적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슬픔을 견디지 못해 물속으로 들어가는 안타까운 장면인데 작품의 스케일과 생경한 기법 때문인지 슬픔보다는 놀라움이 앞선다. 나무로 선반을 짜고 플라스틱으로 된 테이프 케이스로 채웠는데 그 수가 무려 6,496개의에 달한다. 테이프 커버에는 영화의 장면을 잉크젯프린터로 인쇄해 놓았다. 엄청나게 정교하고 고된 수작업을 동반한 작품인 것이다.



 

 

 

 

소피 마르소 옆에는 세 개의 하얀 직사각형이 자리하고 있다. 메리 코스 Mary Corse의 <무제 (내면의 흰색 띠들) Untilted (White Multiple Inner Band)>이며 (사진으로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은은한 광택과 입체적인 질감이 느껴진다. '고속도로의 차선이 빛에 반사되도록 하기 위해 사용되는 미세한 유리구슬을 아크릴 물감에 섞은 후 캔버스에 수직의 띠 형태로 채색을 하는 독특한 페인팅 기법을 확립'한 화가라는 소개를 읽고 나서 좀 더 가까이 그림에 다가서 본다. 사실 조명이 무척 밝고 벽면도 새 하얀색이라 '작품을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빛이 회화의 표면에 굴절되며 미묘한 색과 질감의 변화를 만들어낸다'라는 가이드라인을 충실히 맛보지 못했다. 이 작품이 담고 있는 빛의 효과를 다차원적으로 이해하려면 조명이 어두운 전시실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이 기발한 페인팅 기법을 제대로 느껴보지 못해 아쉬웠는데 추후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10월 중순 경에 <메리 코스 : 빛을 담은 회화>를 개최한다고 한다. 60년에 걸친 탐구로 빚어낸 총 30여 점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고 있다. 10미터 이상의 대형 작품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메리 코스의 세계를 깊고 다양하게 접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어둡게 내려앉고 있는 이 검은 반원의 정체는 무엇일까. 아! 이렇게까지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주세페 페노네 Giuseppe Penone의 이 블랙 톤의 그림, 제목을 확인하는 순간, 솔직히 조금 실망했다. 문명이 달하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놓인 거대한 암석이나 산, 또는 어두운 우주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혹성의 일부와 같은 신비롭고 원시적인 그 무엇을 기대했지만, <흑연 피부 -눈꺼풀 Pelle di grafite -palpebra (Skin of Graphite -Eyelid)>라고만 적혀 있다. '몸과 자연 사이의 경계를 꾸준히 탐구해온 작가'로 이 그림에서 페노네는 흑연으로 눈꺼풀의 질감을 그려냈다. 주로 연필의 심이 되어 어디에서든 단정하지 못하게 번지기만 하던 흑연이 이 캔버스 위에서는 반짝이는 효과를 발휘하며 주변의 환경을 반사하고 있다(흑연이 반짝이는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림의 규모만 큰 게 아니라 작가는 이 눈꺼풀 안에 거대한 의미를 담아 두었다. '인체를 하나의 풍경으로, 피부를 인체와 자연의 경계'로 인식하는 범상한 정신세계를 보여 준다. 이런 작품을 전혀 몰라 보다니 반성이 필요하다. 예술에 대해 그저 겉보기에 새롭고 거창한 것만 요구하지 말고 정신적인 것을 찾아내어 적극적으로 배워나가야 한다.


 

 

 

큰 규모의 작품 세 개를 따르다 보니 어느덧 벽면의 끝자락이다. 이대로 직행하는 대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입구의 오른 편에 자리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게 낫겠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할아버지에게로 다가간다. 강형구? 바로 이 벽면 뒤쪽에 걸려 있는 <윤두서>를 그린 작가다! 이제 강형구라는 이름과 거대 초상화는 나의 미술 사전에 동의어로 입력된다. 고요한 명상의 시간 속에 잠겨 든 이 노인분의 그림에는 <남자 Man>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사진에 버금갈 정도로 주름과 머리카락, 수염을 세밀하게 그려 놓은 작품치고는 너무 밋밋한 단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익명의 얼굴은 단순한 이름 이외의 특별한 것은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미 침묵으로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내면을 향하여 지그시 감은 두 눈은 <윤두서>의 짙은 눈동자로 번뜩이는 눈 못지않게 강하게 다가온다. 그림 기법도 인상적인데 '에어브러시로 유화물감을 캔버스에 뿌린 뒤 이쑤시개, 못과 같은 도구로 긁어내어' 완성한 작품이다. 말 그대로 심혈을 기울여 손으로 하나하나 이루어낸 그림이다. 얼마나 행복했을까. 상상해 본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의 커다란 캔버스 하나. 작가 자신이 추구하는 그림으로 이에 조금씩 생명력을 더해가는 것, 과연 어느 정도의 희열일까.


 

 

 

예술을 알면 알수록 그 방향은 대부분 본질 추구에 맞춰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방법은 시대와 장소, 예술가 개인의 특성에 따라 무수하다. 닉 비시 Nick Veasey처럼 엑스레이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그는 일상의 물건에서 자동차에 이르는 현대의 삶을 상징하는 다양한 오브제들을 엑스레이로 촬영하여 본질을 드러내고자 한다. < 알렉산더 맥퀸 클레오 드레스, 랑방 드레스 Alexander McQuee Cleo Dress, Lanvin Dress>는 제목 그대로 명품 드레스를 엑스레이 촬영한 작품이다. '피상적인 가치가 아닌 세상 이면의 진실된 가치를 보아야 함을' 말하려는 작업이라는데 이 명품 드레스의 본질은 무엇일까. 까맣고 하양게만 드러나 있을 뿐인데도 - 실제로의 모습은 어떤지 몰라도 - 그지없이 우아하다. 기본 자체가 아름답기 때문에 명품이 되는 걸까, 명품이라고 하니까 뼈대에 해당하는 모습에서 마저도 특별함이 느껴지는 걸까.


 

 

 

 

박제된 듯한 모습마저도 아름다운 드레스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 뒤편으로 돌아선다. 천장 끝에서 시작되어 거의 바닥에 닿는 옅은 노란색이 도는 작품이 있다. 꽃을 연상시키지만 아름답기보다는 무겁게 축 늘어져 있다. 제목은 꽃과는 무관한 <무제 #1243 (단어의 비밀스러운 삶) Untitled #1243 (The Secret Life of WAORDS)>이며 피타 코인 Petah Coyne의 조각 작품이다. 어딜 찾아봐도 내 눈에는 '단어 words'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데.... 재료에서 꽃의 흔적을 찾아낸다. 실크 조화와 버드나무 가지를 사용했다. 뭔가 매끈하면서 끈적이는 느낌이 나는데 촛농 같은 것을 두껍게 덧발라 놓은 걸까. 답은 왁스였다. ' 왁스에 담근 조화와 나뭇가지를 겹겹이 쌓아 올리는 노동집약적인 방식으로 제작'했다. 아마 왁스에 흰색 안료를 섞어 뽀얀 색감을 더한 것 같고, 실크와 레이온 혼합 새틴을 사용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옅은 광택이 도는 것 같다. 천장에서 내려뜨린 후 그 아래 바닥에 둥근 원판을 깔고 다시 그 위에 왁스꽃을 몇 송이 올려놓았다. 분명 조각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작품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기쁨과 공포,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함, 질서와 혼돈, 빛과 어둠, 부패와 재생과 같은 상반되는 가치들을 동시에 담고'있는지는 쉽게 파악이 안 된다. 이런 단어들이 서로 비밀스럽게 내통하며 삶을 한편으로는 행복하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행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아닐까. 예쁜 것 같으면서도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게 하는 이 작품, 문득문득 인생에 대해 '아, 이게 뭐지'라는 의아한 기분이 드는 순간과 매우 닮았다.



 

 

 

 

또다시 마주하는 이름, 조셉 코수스 Joseph Kosuth. 제4전시실에서 보았던 세 점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의 작품의 주인공은 글자 및 언어이다. 다만 이번에는 규모가 확대되어 무려 열 개의 사진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어 "nothing"의 사전적 정의 열 개를 사전에서 잘라낸 뒤 확대 복사하여 전시한' 작품이며, 제목은 (매우 복잡하게도) < 유제 (개념으로서 예술이라는 개념)' [아무것도] Tilted (Art as Idea as Idea)' [Nothing]>이다. 작가가 1960년대부터 추진해온 '언어와 차용에 기반한 작품들'을 활용한 개념미술의 일환이다. '시각예술에 의문을 제기하고 예술의 지위를 해체함으로써 사물의 본질에 접근하고자'하는 작가의 시도는 다채로운 볼거리에 익숙해진 나의 눈에는 한없이 낯설다. 그럼에도 이런 끈질긴 시도가 세기를 넘어서도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사실에 경외심을 품게 된다. 코수스 덕분에 '개념미술'이라는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게 되었다.


 

 

 

 

제6전시실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본 작품은 아담 펜들턴 Adam Pendleton의 < 나의 구성요소들 These Elements of Me>이다. 일단 그 수를 세아려 보니 세로로 다섯 단에 가로로 아홉, 총 마흔다섯 점이다. 이번 전시를 통틀어 가장 큰 규모의 작품일 것이다. 엄청난 스케일로 인해 작가의 예술적 수고는 차치하고서 전시 작업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도대체 무엇을 이리 많이 그려놓은 걸까. 전시실에서는 내 시선이 닿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어 자세히 살펴보기가 힘들었다. 내가 찍어둔 사진을 통해 확인되는 바, 글자와 이미지가 혼용되어 있다. 'BUT NOW I AM'이 여러 장 있고 다양한 모습의 얼굴이 있고 그저 삼각형 사각형 원을 그려놓기도 했다. 작업 방식은 '콜라주 작업을 투명한 필름 위에 실크스크린으로 옮긴'것이다. '역사적 사진, 작가가 소장하고 있는 책의 한 페이지, 아프리카 조각과 마스크 이미지'를 밑그림으로 삼아 '위에 작가가 직접 쓰거나 그린 글귀와 기하학적인 도형들을 겹쳐 배치'했다. 제목에 맞춰 나름 해석해 보건대, 자신이 속한 시대와 장소를 틀로 삼아 '정체성을 표현'한 것 같다. 필름과 실크스크린을 도구로 자신의 일기를 적어 놓은 것 아닐까. 작가의 일기장에는 자신만이 아는 이야기가 담겨 있을 테지만 타인에게도 삶을 들려준다. 오히려 남의 일기이기에 더 흥미롭다.


 

 

 

 

마지막 전시실인 제7전시실은 김창렬 화백을 기리는 특별한 공간으로 마련되어 있다. 올해 1월 5일에 작고하기까지 무수한 업적을 남긴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창렬 Kim Tschang-Yeul을 단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바로 '물방울'이다. 작가의 철학을 담은 <회귀 Recurrence> 연작에 속하는 이 작품에는 천자문을 배경으로 (아마) 일곱 개의 물방울이 도르륵 흘러내리고 있다. 초록색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싱그런 풀잎에 이슬이 맺힌 것처럼 보인다. 투명한 물방을 어떻게 유채로 표현할 수 있을지 놀라울 뿐 아니라, 마치 확대경으로 보는 것처럼 물방울(이슬) 하나하나마다 글자가 반사되어 있어 신비롭기까지 하다. 여기서는 물방울이 흘러내리지만 얼마 전 '뮤지엄 산에서 만났던 작품에는 황갈색의 캔버스 위에 수많은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 어느 사랑하는 사람에게 띄우려고 적어 두었지만 결국 보내지 않아 세월이 지나면서 색이 변해버린 편지... 꺼내 읽을 때마다 깊은 정을 가누지 못해 마구 흩뿌려지는 눈물방울 ... 애틋한 인상으로 다가와 숙연해졌던 그림이다. 거의 50년을 오직 물방울이라는 하나의 소재에 천착했으니 내가 직접 보게 된 이 두 점의 작품 외에도 숱한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담은 장면들이 있을 것이다. '분노, 불안, 공포, 모든 것을 투명한 물방울에 용해시켜 '허(虛)'로 돌릴 때 평안과 평화를 얻을 것이라 하였다'라는 김창렬 화백의 세계를 탐구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또한, 같이 전시된 이 맨발의 사진 < Portraits of Artist (Kim Tschang-Yeul)>에서도 예술가의 혼을 읽을 수 있다. 이 사진의 작가인 육명심 Yook Myong-Shim은 한국 문화예술인들의 모습을 담아 <예술가의 초상> 연작을 만든다. 육명심의 카메라 안에서 김창렬은 물방울을 배경으로 물방울을 그리는, 진정 '물방울만 그리는 물방울 화가'이다. 자신의 작품에만 함몰되어 있는 고독한 예술가의 모습이 아니다. 자신의 예술 철학에 대한 굳은 신념을 지닌 데서 여유와 멋이 묻어난다. 육명심의 글이 참 아름답다.

 

"그는 물방울만 그리는 물방울 화가이다. 그 물방울은 바로 다름 아닌 아침 이슬이리라. 새 아침이 동트면서 광활한 우주 공간을 관통하여 지상의 풀잎 끝에 맺힌 이슬 속의 영롱한 햇살. 그의 이슬 한 방울 속에는 우주의 신비를 꿰뚫어본 비밀이 숨어 있다." - 육명심




 

 

 

아모레 퍼시픽 아트 뮤지엄이 개최한 현대미술 소장품 전시, CHAPTER THREE 관람은 이렇게 끝이 난다. 대부분 처음 보고 듣는 아티스트들이지만 낯설어 꺼려지는 작품은 없다. 예술의 드넓은 지평을 확인했고 삶과 사물의 본질을 다원적으로 탐구하는 예술가들의 생생한 시도에 감명받았다. 한편, 예술은 소수의 타고난 재능을 가진 행운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누구나 향유해야 마땅한 삶의 공기와 같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더 실감했다. 하나의 작품은 찾아오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풀어준다. 보는 사람 역시 동일한 자아이더라도 각기 다른 작품을 만나며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융합이며 확장이자 발전이다.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설렘으로 이곳을 찾아왔던 나, 이곳에서 두어 시간 동안 새로운 차원의 예술을 접하고 이제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 분명 달라졌고 더 나아졌다고 믿는다. 너무 서둘러 입장하느라 놓쳤던 모양이다. 1층으로 통하는 계단 측면에도 작품이 있다. 연두색의 구형 탁상시계가 시멘트 가루로 보이는 먼지 속에 나뒹굴고 있다. 인간으로서 제일 무서운 것은 흘러가는 시간 아닐까. 가차 없이 시곗바늘을 굴려가며 경고와 재촉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시계도 언젠가 허물어지고 멈출 것이다. 불현듯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예술을 사랑하며 그 불멸의 편에  서 있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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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써 보는 미술 도록 4 (feat.아모레퍼시픽아트뮤지엄) | 아트다이어리(그림으로 쓰는 일기) 2021-10-11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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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2일에 막을 내린 아모레퍼시픽 아트 뮤지엄의 소장품 전시 Chapter Three는 예술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얼마나 풍부한 예술적 발전과 전진, 확장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목격하며 상대적으로 정지된 듯한 나의 삶에 대해 심기일전하게 되었다. 누구나 한 번만 살게 되어 있는 生, 어떻게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그 폭과 의미는 천차만별이다. 어떤 삶을 살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할 필요가 있다. 곧 과거가 될 것이면서 어제까지는 미래이었던 오늘에 대해 더 기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있다.

 

 

오랜만에 나에게 '충격'을 가한 특별한 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Chapter Three>는 별도의 도록이 출간되지 않아 실망이 컸다. 그러나, 이 덕택에 전시를 다녀와서도 쉽게 잊지 않게 되었고 잘 찍어온 작품별 설명을 토대로 나만의 기록을 해보게 되었다. 일종의 복습이다. 예술과 나를 좀 더 긴밀하게 엮어보며 예술과 예술가들로부터 한 수 배우고 있다.

 

 

 

제4전시실에서 조셉 콘수스의 개념미술로 약간의 곤혹(?)을 치른 후,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며 제5전시실로 들어선다. 현대미술에서 불가능한 것이 있으랴! 가브리엘 오로조크 Babriel Orozco는 신문을 한 쪽 뜯어다 놓고 <카세레스 공을 치다 Gareres Gopea>라는 제목을 붙였다. 2010년 작으로 '캔버스에 피그먼트 프린트와 템페라'를 주재료로 한다. '일상적인 재료를 변형하여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으로 미술계에 이름을 알렸다'라고 한다. 실제 신문의 스포츠면에 실린 사진과 설명을 '차용하여 확대 인쇄한' 후, 자신의 붓으로 덧그림을 올려놓은 것이다. '선수들의 충돌이 발생한 지점에서부터 원을 그려 나가 점차 움직임이 증폭하는 형상을' 나타낸 점, 이것이 이 그림의 핵심이고 작가의 능력이다.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휴지통에 넣어버릴 신문 한 장이 작가의 화이트, 오렌지, 블루의 색 선택과 배치에 의해 세상에 하나뿐인 예술 작품으로 승격되었다. 그림을 그리고 색칠을 하기에 앞서 남다른 상상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예술은 역시 상상력!

 


 

 

 

다음은 요즘 가장 '핫한' 한국 작가 중 한 명인 '이건용 Lee Kun-Yong'의 작품 <신체 드로잉 76-1-B>.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며 폭이 점점 커지는 네 폭의 화면으로 구성된 모습이다. 먹을 연상시키는 색감은 아크릴릭을 이용했고 바탕은 캔버스가 아니고 합판이다. 1988년 작품이지만 1970년대에 캔버스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던 미술 시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유독 이 작품만 8개의 사진으로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알려주고 있는데 작품 설명과 작품, 그리고 이 사진들을 위에서부터 차례로 연결해 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캔버스 '앞'에서 붓을 들겠지만 이 그림은 작가가 캔버스 '뒤'에서 그리고 있다! 자신의 키 높이만 한 합판 뒤에 서서 팔을 앞으로 넘겨 팔이 닿는 길이만큼 선을 위아래로 그려나가는 방식이란다. '한 줄의 선이 모두 그어지면 그려진 부분을 톱으로 잘라내고 다시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손목-팔꿈치-어깨까지 점차 선의 길이가 길어진다. 이렇게 화면을 채운 다음, 한 판씩 차례대로 쌓아 붙이면 이렇게 자신의 신체 비율을 보여주는 그림이 탄생한다. 독특한 방식이지만 처음 접하는 거라 사진을 보고 글로 된 설명을 읽으면서도 퍼뜩 이해가 안 된다. 회화인가? 행위예술인가? 합판 못지않게 작가 자신의 신체(팔)가 그림의 주요 구성요소가 되는 것이다. 사진 기록을 살펴보는 사이 나도 어정쩡하게나마 팔을 휘두르게 된다. '화면 아래로 향할수록 붓질의 길이가 길어질 뿐만 아니라 더욱 곧고 밀도 있으며 흰색과 검은색 물감이 점차 골고루 섞인 것을 볼 수 있'다는 설명에 맞춰 한 번 더 훑어보게 된다. 이건용의 기법에 대해 다른 설명도 찾아보게 되었는데 '탈평면'을 시도하며 퍼포먼스 작업을 활발히 펼쳤다 한다. 화면 뒤에서뿐만 아니라 화면 옆에서, 옆으로 서서, 팔에 깁스, 다리 사이에, 양팔로, 어깨를 축으로 등 총 7가지의 상황으로 작품을 그려왔다고 한다. 얼마 전 다른 갤러리에서 이건용의 개인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는데 이번에는 화면을 등지고 앉아 양팔로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양팔이 교차하는 부분이 드러나면서 그림 전체가 마치 하트처럼 보였다. 레드와 핑크 계열의 색을 사용하고 있어 발랄하면서도 로맨틱한 분위기를 전하고 있었다.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 길고도 긴 시간 동안 자신의 예술 철학을 정립하고 온몸으로 실험해 오고 있다니 예술가의 기발한 상상력과 끈기에 감탄을 연발하게 된다.


 

 

 

 

나는 글리터에 대한 로망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나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메이크업 중 하나는 눈두덩에 강렬한 색감의 글리터를 바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굵은 질감으로 반짝이는 글리터는 손톱에서 마저도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도화지에 그림을 그린다면 거칠고 굵은 입자가 돋보이는 갖가지 색의 글리터를 왕창 써 보고 싶다. 크리스 마틴 Chris Martin의 <개울 stream>은 반짝이를 거침없이 사용하여 우주를 연상케한다. 한번 찾아보자 - 나무와 개울을 안고 있는 자연 풍경, 토성, 불교 만다라 그림, 추상표현주의, 사이키델릭 문화 등등. 작가는 반짝이, 레코드판, 빵조각, 베개, 페르시안 카펫 등 도저히 한 데 있을 것 같지 않은 색다른 재료들을 과감하게 사용한다. 이에 비해 작가의 그림 솜씨는 짐작이 좀 안된다. 토성과 풍경은 직접 그린 게 아니라 사진을 갖다 붙여 놓았을 뿐이고 그렸다고 생각되는 것은 강렬한 색감의 글리터로 낙서해 놓은 것이 전부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거대한 영역을 드러내준다. 그림 전체의 배경에는 붉은빛이 깔려 있어 우주와 지구의 모든 존재와 현상은 태양빛을 모태로 한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짙은 파랑의 바다, 옅은 파랑의 하늘, 별빛으로 찬란한 광휘를 드리우는 까만 우주, 그리고 정중앙의 개울 ... 재료와 사유의 콜라주는 독특하게 반짝이는 신비로운 장관을 선사한다.


 

 

 

현란하게 색을 발산하는 <개울> 옆에는 단순하고 귀여워 보이는 새가 한 마리 자리하고 있다. 게리 흄 Gary Hume이 그린 <두 번째 파라다이스 페인팅 Paradise Painting Two)'이다. 새롭고 충격적인 미술'로 급부상한 영국의 신진 아티스트 단체인 YBA (young Abritish Artists)의 일원답게 작가는 누가 봐도 새 bird로 보이는 형상을 그려놓고서도 제목에 새 bird를 언급하지 않았다. 새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세상은 파라다이스와 다름없다... 아마 이런 식의 구태의연한 발상을 전제로 하지는 않겠지만 작가가 새를 모티프로 삼은 이유가 뭘지 궁금하다. 재료도 일상성을 거부하는 듯하다. 캔버스가 아니고 알루미늄이며 산업용 페인트를 사용하여 선명한 색감과 광택을 살렸다. 언뜻 보면 새의 눈과 부리를 빨강으로 찍어 놓은 게 전부인 것 같은데, 그림 설명에 따라 다시 보면 입체감이 살아난다. '색에 따라 페인트 두께를 달리하고 윤곽을 돌출시켜' 단순한 화면에 입체감이 더했다.


 

 

 

 

그 옆에도 단순해 보이는 노랑 그림이 걸려 있다. 네모를 대각선으로 잘라 네 면을 모두 열어젖힌 형태로 도널드 모펫 Donald Moffett이 제작한 <Lot 110207X>라는 그림이고, (미나리아재비꽃 buttercup)을 소제목으로 달아 놓았다. 알고 보니 캔버스나 종이가 아니라 리넨이며, 바깥으로 펼쳐진 삼각형 부분의 두 변에 지퍼를 달아 놓았다. 또한, 네 개의 삼각형은 벽과 닿으면서 벽면을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작가의 연작 <제거된 Gutted>의 일부라는데 어떤 의미에서 무엇을 어떻게 제거해놓았다는 건지 도무지 파악이 안 된다. 모든 지퍼를 활짝 열어놓음으로써 내부를 훤히 볼 수 있지만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제거된'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걸까. 혼자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은 잠시. 소제목 '미나리아재비꽃'으로 인해 즐거운 우연성을 경험한다. 전시를 찾을 무렵 읽고 있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중 <스완네 집 쪽으로 Ⅰ>의 한 장면과 직결된다. 나는 알지 못했던 꽃 미나리아재비꽃을 두고 -푸르고 기다란 미나리와는 생김새가 전혀 다르다- 프루스트는 한 페이지 가득히 언어의 마법을 부린다. 그의 문장에 탄복하여 당장이라도 이 꽃을 찾으러 나서고 싶었다. 검색을 해보니 노란색이고 두 손을 모아 오므린 형태와 흡사하여 영어로 '버터'이고 또한 '컵' (buttercup) 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프루스트의 글과 검색으로 확보한 미나리아재비꽃, 정말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이런 모습으로 맞닥뜨리게 되다니! 너무 놀랍고 반가워서 외마디 비명을! 바람에 하늘거리는 옅은 꽃잎의 성질을 살려 리넨이라는 재료를 선택한 걸까. 닫힌 꽃잎이 아니라 대기를 향해 넉넉하게 열린 꽃의 모양새를 본떠 작품의 네 면을 활짝 열어둔 것 아닐까.


 

 

 

노랑이 빛을 부여받으면 금박이 되던가? 미나리아재비에서 숫자 7로 넘어온다. 베트남 난민 출신의 작가 얀 보 Danh Vo의 <숫자 (7) Number (7)>이다. 실례가 되겠지만 가끔씩 현 대 미술 작품 중에는 '나도 이 정도는 할 수 있겠다'라는 의미 없는 거드름을 유발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문제는 이미 누군가가 해버렸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작품으로 만들어낸 사람만이 예술가가 되고, 이를 보고 나도 하겠다고 넘겨짚는 이는 그저 평범한 사람에 머무르게 된다. 정말 이 작품은 단순하다. '사용된 소비재 운송용 상자'를 공예가에게 보내 중앙에 '7'의 모양이 남도록 나머지 부분에 금박을 발라 버렸다. '공예가에게 보내'라는 부분이 다소 황당하지 않은가? 작가 본인이 직접 손으로 정성스레 붙인 것이 아니라 백 퍼센트 타인의 손을 빌렸다는 말이지 않은가. 왜 금박인가? '버려진 것을 부의 상징이자 종교화, 불교 사찰에 쓰이는 금박으로 회생시킴으로써 상업화된 사회의 가치에 대해 질문한다'라는 대의를 담았다. 거대한 '문화 정치적 주제'를 이토록 간단하고 쉬워 보이는 오브제로 형상화한다는 것, 이런 점에서 예술과 예술가는 남다른 차원을 차지하는 것이리라.


 

 

 

 

제5전시실의 작은 벽면 하나에는 똑같아 보이는 네 개의 그림이 서로 직각을 아루며 붙어 있다. 양혜규 Haegue Yang의 <에투알 Etoile>이며 단순화된 '별'처럼 와닿는다. 그러나, 이에 붙여진 소제목은 좀 난해하다 <신용양호자 상쇄조화 줄기 #151>. 영어로도 여전히 어렵다, Trustworthy Offset Branches #151. 한편, 151번째 작품이라는 사실에서 작가의 끊임없는 끈기와 열정에 놀라게 된다. <신용양호자들> -신용불량자라는 단어를 압도적으로 많이 들을 수 있는 세상일 진대 '양호자'라니 무척 낯설다 - 연작에 속하며 '편지봉투 내지에 개인 정보를 보호하기 위해 새겨진 보안 무늬를 잘라 콜라주'한 작품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어떻게 떠올릴 수 있었을까! 회색, 검정, 노랑과 보라 계열의 색을 입히고 각각은 추상적인 직선을 담고 있으면서 함께 붙여 놓으니 중앙에 '별'이 나타난다. '사회 정보 보안장치의 모순적인 취약함을 지적'한다는 작품의 의미는 다소 심각하지만, 일상적인 재료로 독특한 별을 빚어낸 모습에서 추상이 주는 아름다움을 십분 느낄 수 있다. 또한, 이 '별' 앞에서 서 있는 동안, 나의 머릿속에 각인된 양혜규의 또 다른 모습이 중첩되어 떠오른다. 2019년 5월 런던의 테이트 모던에서였다. 양혜규의 화이트의 블라인드는 무한 반복되는 패턴으로 전시실 하나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창문을 가리는 단순한 블라인드를 수없이 맞대게 한 작품인데 그 아래에 서있는 나에게는 우주선을 발견한 것 같은 스릴이 몰려왔다. . 사소해 보이는 현실의 요소가 예술이라는 문을 관통하면서 상상 그 이상의 영역으로 변환되는 것을 목도한,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양혜규라는 이름에 대해서 환상적인 모험의 순간을 기대하게 되었다.

 

 

 

 

 

 

 

요즘에는 초록색이 마음에 든다. 초록이라면 가방, 신발, 카디건 등 모든 아이템이 눈에 확 들어오기 시작, 가지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집의 벽면에도 한 부분이나마 짙은 초록을 칠해 보고 싶고 문짝 하나라도 초록을 입혀 보고 싶다. 제4전시실에서 제5전시실로 들어서면 누구나 오른편 벽 전체를 장식하고 있는 이 초록의 정체가 궁금했을 것이다. 여섯 개의 그림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러브 바이브 Love Vibe>이며 로셀 파인스타인 Rochelle Feinstein이 캔버스에 그린 유화 작품이다. 초록, 하양, 노랑으로 색면을 다르게 꾸몄고 검정으로 글자를 적어 두었다. '글자를 접목한 추상 회화를 통해 개인과 사회적 주제에 접근'하는 게 작가의 주관심사라고 한다. 글자는 좌우가 반전되어 거울에 비친 효과를 내며 다섯 개의 캔버스에서 문구가 분리되어 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 캔버스에서 '정답'을 알려 주는 친절한 수수께끼이지만, 잠시라도 집중하며 판독해 보려는 열심을 내게 된다 'Love Your World'... 세상을 사랑하기에는 나의 삶의 폭이 너무 좁다고 소극적이 될 수도 있겠으나, 이제 세상은 수없이 다양한 타래로 연결되기 마련이므로 세상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나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렇게 제5전시실에는 8점의 작품이 걸려 있다. 8명의 예술가 각각의 특성이 도드라지는 작품이자 동시에 8명의 작가 저마다의 고민과 근성, 열정이 담겨 있다. 일상은 그저 지나가면 그만인 어렴풋한 시간이다. 기억도 희미해지면서 그 어떤 의미도 건져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무색 무향의 현실은 이곳에 자리한 예술에 의해 분명한 가치로 되살아난다. 그리고, 나에게 말한다. 현실과 일상에서 상상마저 무너뜨리는 예술을 탄생시키는 일은 비단 예술가의 특권이나 임무만은 아니라고 말이다. 예술가의 '본보기'는 이제 예술의 무대에서 내려와 나의 일상으로 들어올 차례이다. 보고 배우고 깨달아 실천 또는 모방해 보는 것으로 예술은 크나큰 의미 내지 대단한 아름다움을 발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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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함, 다정함, 그리고 살아남기 (feat.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 나의 독일어 2021-10-0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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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의 독일어'는 <기쁨과 명랑함 Freude und Heiterkeit>을 제목으로 단 짧은 글이다.

이 두 단어는 긍정적인데 한 줄 한 줄 읽어나가며 점차 복잡한 심경이 된다.

스스로 기쁘고 명랑하게 살아보자는 메시지를 넘어 타인과의 관계 및 공동체적 생활 능력으로 그 범위가 확장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나는 반대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나이가 들어가기도 하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삶의 모드가 급변해버린 약 2년 동안, 관심과 노력의 대상은 점점 '나'로 모아지고 있다. 세상도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자신의 삶에 집중하라고 말하고 있다.

 

 

나의 성향이 어느 쪽인지

나는 어느 방향을 선호하는지

'내'가 중심이고 최우선에 놓는 방식과 공동체적 유대감을 형성하며 살아가는 방식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

매일의 삶에서 타인을 위한, 타인과 함께 하는 영역은 어디까지일지

'관계'는 나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관계'를 향해 나는 어느 정도까지 내 삶을 열어야 할지

숱한 생각이 일어나며 뒤숭숭해진다.

 

 

 

일단 독해를 해보면:

 

<Freude und Heiterkeit>

 

Die Offenheit eines Menschen fur den andern kann man leicht messen: wie groß ist seine Bereitshaft, zu helfen und zu erfreuen? Genau so groß ist sein Talent fur die Gemeinschaft.

 

☞ 타인에 대한 한 사람의 개방성은 쉽게 측정할 수 있다: 도와주거나 기쁘게 해주려는 적극성이 얼마나 큰지 보면 알 수 있다.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은 딱 그 만큼이다.

 

 

Heiterkeit f. 명랑함 / heiter (날씨가) 갠, 명랑한

Offenheit f. 개방(성)

Bereitshaft 준비되어 있음, 기꺼이 함. / bereit 준비된

erfreuen 기쁘게 해주다

(z.b.) Das Stadtpark ist ein Gemengut, das alle erfreut. 도시공원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하나의 공공재산이다.

Genau so (앞 문장의 내용과 이어지며) 딱 그만큼 ~하다.

Gemeinschaft f. 유대, 공동체

 

 

 

Die Bereitschaft zur Freude konnen wir schon im Gesicht eines Menschen lesen. Das Gesicht eines Menschen, der(1격 관계대명사) Freude bringt, erweckt unsere Sympathie. Heiterkeit ist ein Zeichen fur das Talent zur Gemeinschaft. Ein Freudenbringer will nicht den andern zum Objekt machen, dem (3격 관계대명사) er seine Sorgen aufladt. Sondern er will Heiterkeit austrahlen, uberall die Lichter anzunden, dem andern das Leben schoner und kostbarer machen.

 

☞ 타인을 기쁘게 해주려는 의지는 이미 그 사람의 얼굴에서 읽어낼 수 있다. 기쁨을 가져다주는 사람의 얼굴은 우리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사람의 명랑함은 여러 사람과 함께 지낼 수 있는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표시가 된다. 타인에게 기쁨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타인을 자신의 근심을 실어놓는 물체로 보지 않는다. 또한 그는 명랑함을 발산하며, 언제 어디에서나 불빛을 밝히고, 타인에게 산다는 것을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로 만들어 준다.

 

 

Gesicht f. 얼굴, 표정

erweckt -erwecken 불러일으키다

Zeichen n. 표시 - zeichen 가리키다, 나타내다

Sorgen - Sorge 근심

aufladt - aufladen (짐) 싣다, (의무) 지우다

austrahlen (열, 빛) 발산하다

uberall 언제나, 어디서나

anzunden 점화하다

kostbar 가치 있는

 

 

 

 

O Gott! 맙소사!

이 글에 따르면 나라는 인간은 공동체 생활에는 '꽝'인 것이다.

남을 기꺼이 기쁘게 해주고 도와줄 수 있어야 공동체적 유대 속에 잘 살 수 있다는 말일 텐데,

나에게는 이런 재능 Talent이 없다. 얼굴 표정만으로 기쁨과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는데 나는 평생 첫인상이 차갑다는 얘기만 들었고 (좀 친해지면 첫인상과 많이 다르다는 칭찬(?)을 듣기도 한다), 내 얼굴은 기분과 감정을 도무지 감출 줄 모르는, 있는 대로 다 드러내고야 만다. 싫어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견뎌보는 능력이라곤 전혀 없다. 명랑하거나 활달한 성격도 결코 아니다. 남에게 나의 문제로 부담을 지우지는 않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빛을 밝히는 환환 성격과는 무관하다. 나로 인해 사는 것이 아름답고 가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내 주위에 몇 명이나 될까...


 

 

이런 성격으로 살아왔기에  아직도 불안불안한 길 위에 있는 걸까.

불평불만 말고 혼자 하는 일에 감사하며 더 열심을 내어 보는 게 맞겠지.

서점? 카페? 취미 숍? 여러 사람과 함께 하면서 각양각색의 사람을 만족시켜줘야 하는 일이라면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안 그래도 알록달록 부드러운 수채화 색감의 책 한 권,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지던 차였다.

제목이 거슬린다. '네 성격 탓에 너는 살아남을 수 없을거야'라고 쏘아붙이는 것 같다.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공저/이민아 역/박한선 감수
디플롯 | 2021년 07월

 

올여름에 출간된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survival of the friendliest 』도 윗글과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제목 자체에서부터 다정한 인간이 되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표지 또한 타인과 잘 어울리는 친밀감을 보여준다. 출판사의 내용 소개를 훑어보니, 한마디로 최후의 승자는 친화력이 좋은 다정한 인간이다. 적자생존으로 정리되는 다윈의 진화론도 사실 알고 보면 그저 ‘신체적으로 가장 강한 최적자가 살아남는다’라는 주장이 아니란다. 적자생존은 다윈의 이론에서 극히 일부를 차지할 뿐이며 다윈도 직접 ‘자상한 구성원들이 가장 많은 공동체가 가장 번성하여 가장 많은 수의 후손을 남겼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처럼 다정하지 않고 친화력이 떨어지는 종류의 개체는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혼자 있는 게 편하고, 오랜만에 날라오는 톡이나 문자, 전화에 응할까 말까 주저하기 십상이고, 말하는 것보다는 글로 적는 편을 선호하고, 누구와 만나자고 제안하기 앞서 그 이유와 필요성에 대해 일주일 이상을 따지게 되고 (3분의 2 정도는 굳이 만날 필요가 없겠다는 결론에 이른다), 누군가와 만나 말을 많이 한 날은 저녁 내내 머리가 아프고 ... 이런 성격 및 성향이라면 다정하기는 글렀다. 유쾌함이나 명랑함도 나의 천성과는 한참 거리가 있다. 그렇다 보니 친화력이란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 달성할 수 있는 힘든 과제이다. 이런 마당에 독서모임 - 취향 공유 클럽 - 아트 동아리 등등 여러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을 도모하다니,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일시적 돌연변이가 돌발한 것이었을까. 포기 또는 실패의 원인은 다정하지 않음에 있었던가.

 

 

타인을 향한 개방적 마음자세를 갖고 여러 사람과 잘 어울려 산다는 것, 나쁠 게 전혀 없는 바람직한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나처럼 이런 친화적 성향을 갖지 못한 유형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다. 차츰 성격을 친화적으로 다정다감한 쪽으로 바꾸려고 노력해 보자? 이 역시 부단히 어렵다. 나름 인생을 살아온 연수가 제법 쌓였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분명한 점 한 가지. 다정함, 활달 명랑함, 친화력 등 생존과 진화에 유리한 성격이 결여되어 내 삶이 힘들다 내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차피 이런 성격 성향으로 이제까지 살아온 이상 급격한 수정이나 방향 전환은 힘들 것이다. 다만, 기억하며 조금은 노력해야 한다. 나의 삶과 타인의 삶은 교차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나 스스로에 충실하되 내 주변의 타인들 한 명 한 명에게도 더 열린 마음으로 먼저 다가가는 데에 더 적극적이어보자. 나 혼자서 빛을 발산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들과 함께 빛을 밝히며 서로 가치 있는 아름다운 삶을 도모해 보는 일, 나 같은 다정하지 못한 부류에게도 필수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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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로 승승장구 | 외국어학습 2021-10-07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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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프랑스어 회화 2

한선혜,서정기 공저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 | 2016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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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4년 되었나 ... 이제 햇수도 가물가물해진 나의 프랑스어 독학.

그래도 다행스럽게도, 계속되고 있다.

발음도 못 하고 읽지도 못하여 '바보'같다고 자책과 한숨으로 일그러진 날들이 많았지만 잘 견디며 포기하지 않은 것이 가장 대단한 일이었다. 독학을 고수하다 보니 이렇다 할만한 지침이나 도움이 없어 어쩌면 많은 길을 둘러 가며 사서 고생한 지도 모르겠다. 왕초보 교재에서 떠듬떠듬 시작하여 어느덧 교재도 여러 권을 접해왔다. 초급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항상 중급을 바라보았기에 비교적 버거운 교재들로 사투를 벌여온 것 같다.

 

 

발음은 전반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 같고 ( 유창한 발음은 아니어도 글자를 보고 읽을 줄 안다는 뜻이다),

문법과 구조를 대충 파악하여 문장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 것 같고 (열거, 접속사, 관계대명사, 분사를 이용한 수식 또는 제롱디프(영어의 분사 구문에 해당)) 등을 잘 짚으면 긴 문장도 겁나지 않는다),

어휘도 차곡 쌓이는 것 같고 (장기기억화하려면 더 줄기차게 반복해서 외워야 한다).

 

 

그러나, 아직 듣지는 못한다. 아직도 내 귀에는 물 흐르듯 빨리 지나가고 안개처럼 모호하다.

문법은 대강 훑어 놓은 상태이고, 동사의 시제와 어미변화는 거의 포기했다. 동사의 원형만 익히고 시제나 인칭별 변화 어미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외운다고 외워지는 게 아니라 체계적인 틀을 세워 나만의 방법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너무 분량이 많고 복잡하다. 이렇다 하여 프랑스어를 읽고 이해하는 데에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파리에서 좀 더 여행을 잘하려면 혹은 장기 체류에 도전하려면 프랑스어를 '말하고 들을 줄 알아야 한다'라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짤막한 문장을 한두 마디 주거니 받거니 하는 수준을 넘어 '대화'가 되려면 적어도 '중급'을 목표로 해둔 교재가 있어야 한다. 시중에 나온 교재들은 대부분 입문이나 초 초급이라 뭔가 부족하고 여러 권을 공부해 보았자 큰 진전이 없을 듯하다. 차라리, 델프 시험을 목표로 이 라인의 교재로 공부해 볼까... 이 분야도 교재가 다양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책 저 책 옮겨 다니다가 연관 상품 하나를 발견했는데! 느낌이 예사롭지 않다!

 

 

한국방송통신대학교에서 출간한 『 프랑스어 회화 Ⅱ』


 

 

미리 보기나 교재 설명 내지 후기가 자세하게 올라와 있지는 않다. 그래도 끌림을 주체하지 못하여 정 이상하면 반품할 것을 각오하고 주문했다. 당일 배송 대상이 아니라 이틀 후에 받았는데 후루룩 훑어만 보아도 내가 찾는 교재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일명 방통대라고 하는 교육 시스템을 나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자세하게 학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분위기임에는 틀림없다. 혼자 힘으로 공부하기를 표방하는 고등학교 참고서처럼 구성이 알차고 설명에 깊이가 있다. 차근차근 읽어보면서 무엇을 어떻게 익혀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우선, 15개의 유닛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실생활과 밀접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회화 교재니까 당연히 음성 파일도 있다. 요즘 대부분 교재들은 QR 코드로 편리하게 접근하지만 이 교재는 CD 첨부되어 있다.(별도로 다운로드하는 파일 같은 건 없다) 남녀 프랑스 원어민이 본문의 대화를 진행하는데 많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으며 발음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억양이다. 처음에는 본문을 보지 않고 듣고, 다음에는 본문을 보면서 한 문장씩 끊어가며 듣고, 잠시 CD를 정지하고선 혼자 소리 내어 읽어본 후 다시 원어민에 맞춰 함께 읽는다. 이런 식으로 4번 연달아 듣고 읽기 연습을 하고 나서 그다음에는 아예 혼자서 3번 정도 소리 내어 읽는다.

 

 

본문 대화 한 편 이외에 <대화를 통한 표현 연습>이라는 부제에 2편의 대화가 실려 있다. 본문 대화에서 익힌 표현에다가 새로운 표현들이 추가되면서 학습의 폭이 더욱 넓어진다. 이 역시 본문과 동일한 방식으로 CD를 반복 청취하며 따라 읽고 혼자 읽으며 귀와 입으로 익힌다. 또한, 내용을 이해하고 내 것으로 활용하기 위해 어휘와 문법도 챙겨야 한다. 어휘는 별도의 워크북에 자세히 나와 있어 어휘사전을 찾아볼 필요가 거의 없다. 나에게 있어서 문법 설명이야말로 이 교재의 가장 큰 장점이다. 크고 작은 문법 사항들이 본책에 이해하며 활용하기 쉽도록 아주 자세하게 설명돼 있어 서너 번 반복하면 왠지 다 알아낸 것 같은 홀가분한 기분이 된다. 본문, 어휘, 문법, 추가 대화 등을 충분히 익히고 나서는 대망의 연습문제에 도전한다. 연습문제에 대한 풀이 또한 워크북에 친절하게 나와있어 아직 미흡한 부분을 체크할 수 있다. 이것으로도 부족할까 봐 워크북에도 확인 문제가 15문항 정도가 실려 있다. 다만, 여기에는 정답만 있고 별도의 풀이는 없다. 여기서는 무조건 백 점, 의심 없는 백 점을 받아야 한다. 앞서 본책과 워크북에서 수차례 알려주고 설명해 주고 풀이해 주었으니 마지막은 너 혼자 할 수 있지?!

 

 

PS: 본문과 추가 대화, 연습문제 파트에 파리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실려 있다. 상호나 거리 이름이 분명하면 구글맵에서 찾아보는데 거의 똑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부를 하며 머리를 쥐어뜯다가 이 사진 몇 장에 다시 기운이 돋는다. 내가 왜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있는지 명쾌한 답을 얻게 된다. 자발적 동기가 발동하여 기꺼이 공부하게 된다.

 






 

 

 

나에게 있어서 이 교재가 특별하게 와닿는 이유는 문법에 대해 자신감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 '시제'에 대해 한 번 더 의지를 갖게 되었다. 직설법 현재형에서 인칭별 어미도 외우지 못한 형편인데 반과거, 복합 과거, 대과거, 단순미래, 전미래 .... 도대체 프랑스인들에게는 과거가 몇 개이며 미래 또한 왜 이리 복잡한지, 여기다가 근접과거와 근접미래도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이 직설법 시제에다가 조건법과 접속법이라는 것도 있다. 이 세 가지 시제법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 직설법을 잘 알지 못하면 나머지 둘은 아예 머리에 들여놓을 방법이 없다. 포기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기하게도) 이 교재의 문법 설명이 나에게 하나둘씩 먹히고 있다. 제롱디프를 자세하고 명료하게 공부하는 것도 여기서 처음이 아닌가 싶다. 현재분사에 신경 쓰게 되고, 수동태와 복합과거에서 과거분사를 다잡게 된다. 분사를 다졌다면 이제 시제와 겨루어볼 차례이다. 과거분사에 관하여 평정심을 확립하고 나니 대과거가 쏙쏙 익혀진다. 항상 복합과거와 구별하지 못하던 반과거 역시 이 교재에서는 좀 알 것 같고, 반과거가 부답스럽지 않으니 조건법에도 마음이 열리며 머리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조건법 현재와 조건법 과거를 구분하면서 가정 표현도 공부할 여유가 생긴다 (알고 보면 영어의 가정법 과거와 가정법 과거완료와 거의 비슷하다). 접속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익힐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더 이상 피하지 않는다. 인칭별 변화 어미를 들여다보면 직설법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다 (NOUS와 VOUS에서만 i가 끼어들 뿐 나머지는 직설법 현재 어미변화와 동일하다). 접속사도 아니도 접속법이라니.. 도대체 왜 필요한지 어디에다 쓰는지 매번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 교재에서는 깔끔하게 정리해 준다. 다양한 예문을 통해 수월하게 이해하고 익힐 수 있다. 별것 아니구먼. 내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독학에 대한 나의 의지 못지않게 교재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나에게 맞는 교재를 발견하니 하루에도 몇 시간씩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공부하게 된다. 그러면서 너무 재미있고 신난다. 프랑스어 교재로는 최단기인 단 일주일 만에 제1차 학습을 끝냈다! 제2차 학습 단계에서는 암기에 주력한다. 어휘를 외우고 문장들을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으며 의도적으로 동시에 자연스럽게 익혀나간다. 유독 안 되는 어휘와 문장은 별도로 노트에 옮겨 적어둔다. 수시로 외우면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기 위함이다. 그리고, 하루에 두 과씩 본문을 보지 않고 CD를 들으면서 원어민의 속도와 억양을 따라잡는다.

 

 

실력이 쑥쑥 늘어나면 흥미도 덩달아 급상승하게 될 것이고 기분 좋게 공부한 내용이라 장기 기억으로도 더욱 쉽게 대거 옮겨질 것이다. 나의 뇌에 마련된 프랑스어방에 대대적인 리노베이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미 '다음'을 준비해 두었다. 방송통신대학에서 출간한 다른 프랑스어 교재들도 살펴보고 있다. 그중에서 『시사 프랑스어』를 사 두었다. 하나의 비교적 긴 글을 읽으며 프랑스어를 좀 더 깊게 공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프랑스의 정치, 문화, 경제 및 역사 등도 공부할 수 있다. 나의 프랑스어 독학에 전례 없는 속도가 붙는다. 이전 어느 때보다 자신감도 더 커져서 중급 이상의 실력에 이르겠다는 의지도 활활 타오른다. 드디어 비상할 날이 온 것이다. 프랑스어로 승승장구할 날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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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feat. 서래 마을 & 장 그르니에) | 리딩다이어리(책으로 쓰는 일기) 2021-10-04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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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러스와의 대결을 벌이는 이 긴 시간 동안, 여행의 감각이 무디어져버릴 위험을 다스리게 해 주는 파이프라인 중 하나는 산책이다. 거의 아무도 눈에 띄지 않고 나 역시 타인의 시선에 드러날 일이 거의 없는 늦은 밤에는 땀이 흘러내릴 만큼 빠른 속도로 걸어 다닌다. 하루 종일 내 몸과 마음속에 축적된 '독'을 배출하고 '노폐물'을 쏟아내기 위한, 어떻게 보면 '생존'의 한 방식으로서의 운동이다. 오로지 나의 팔과 다리, 몸통만이 나를 전진케하므로 나도 기계와 비슷한 체계성과 역동성을 가진 '객체 entity'임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강한 호흡 소리와 심장 소리, 여기저기 피부에서 바로 감지되는 땀.... 실로 살아있음을 느껴 정신적으로도 풍요로운 시간이다.

 

 

 

낮에는 여유롭고 색채가 드러나는 산책이다.

머리 손질에서 양말 선택에 이르기까지 차림새도 신경을 써보게 되고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기대도 상당하다. 장소가 중요하다. 우리 동네는 아니어야 한다. 조금은 거리가 떨어져 있어 이동이 필요한 곳, 떠난다는 기분을 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해 할 수 있고 길모퉁이에 무엇이 있는지 아예 모르는 곳이면 좋다. 아직까지는 서래 마을이 이렇다. 가장 번화한 카페거리에는 익숙해졌지만, 그 이상을 넘어 골목과 골목을 많이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길이 협소하고 얼핏 보아 5~6층으로 이루어진 빌라들이 들어서 있어 일반적인 아파트 동네와는 다르다. 카페 거리에서 한 블록만 들어서도 조용해진다. 1층이나 2층에 상업 공간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주변의 고요함을 깨뜨리지는 못한다. 낮은 건물들이지만 일종의 성벽을 쌓은 듯 외부와 뚜렷한 거리를 두고 있다. 이 비밀스러운 폐쇄로 인해 집과 집, 건물과 건물 사이에도 - 결코 광활한 공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 명백한 '비어 있음'이 확보되어 있다. 덕분에 타지에서 걸어 들어온 산책자는 자유롭다. 타인의 경계를 넘어다본다는 의심을 받을 일이 없고 호기심을 억제할 필요도 없다. 높다란 벽 앞에서 멈추었다가 다시 열린 공간의 낌새를 따라 걸음을 옮긴다. 도시의 한복판이기에 소란스럽기 마련일 거라는 '상식적 편견'은 적용되지 않는다. 벽돌 담장을 처음 보는 것도 아닐 터인데 담벼락을 구경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가까이 뭔가가 다가온 느낌에 화들짝. 지나가는 자동차에 한두 번 '방해'를 받지 않는다면 종일 이렇게 넋 놓고 다닐 게 뻔하다.

 

 

 

외딴섬 같은 이곳을 산책하면서 '집'에 대한 몽상을 마음껏 펼쳐본다.

가드닝까지는 못 되어도 갖고 있는 화분을 마음대로 뒤엎어 볼 수 있고 원하는 식물이나 꽃도 언제든지 들여다 놓을 수 있는 뜰이나 마당이 있는 집,

이른 아침 해가 뜰 때부터 늦은 오후 해가 질 때까지 종일 햇살의 지배를 받기보다는 적절한 음영의 서늘함이 확보된 집,

산자락이나 강자락이 보이지 않아도 담쟁이덩굴의 행색을 바라보며 계절을 새삼 알아볼 수 있는 집,

(나는 피해를 줄지언정) 내가 소음을 피할 수 있을 꼭대기 층에 자리한 집,

무엇보다도 복층 구조로 되어 있어 거실에는 높은 층고를 얹혀 있고, 머리맡에는 경사진 지붕이 있어 거기에 놓은 창으로 하늘을 바라볼 수 있고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다락방이 하나 가능한 집,

이런 집이 있겠나..... 집은 아직도 동경의 대상이런가.

(하나 더 추가하자면, 세상에 딱 하나밖에 없는 카페가 슬세권에 들어와 있는 집)

 

 

 

서래 마을에서 주로 주말에 점심을 먹고 카페에 들르기 전 또는 카페를 나와서 주변을 한 바퀴씩 걸어보고 있다. 아직은 여전히 탐색 중이어서 이 동네가 첫인상만큼 바람직한 곳인지 혹은 만만치 않은 불편함이나 심지어 불쾌해할만한 단점을 감추고 있는 장소인지 잘 알지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충분히 이색적이라는 점이다. 매번 흥분할 정도의 새로움과 마주치게 된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답답함을 풀어 놓을 수 있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봉주흐...( 내가 알아서 프랑스인이라고 생각해 버리는) 외국인들이 자주 지나다니고 거리에서 프랑스어를 발견할 수 있어 외국에 온 듯한 설렘이 일기도 한다. 붉은 벽돌에 댐쟁이 덩굴이 층층 휘둘러져 있다. 하얀 대문도 그 자체가 특이한 데다가 이 역시 담쟁이덩굴로 덮여 있어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비밀의 입구처럼 보인다. 이곳에 음악 학원이 자리를 잡고 있다니!


 

 

 

옆집과 서로 사생활이 털릴 듯한 아슬아슬한 간격을 두고 있지만, 그늘 아래에 색다른 풍경을 연출하는 데에 성공했다. 회색 콘크리트와 타일마저 낭만적으로 격상시켜주는 식물의 위력이 돋보인다. 이 모든 노력은 하나의 테라스 공간을 살려내기 위함이다. 멀리서 보아도 하얀 벤치에 모든 것을 - 이 무심한 뻔할 공간을 극강의 센티멘털한 공간으로 꾸미고자 하는 결의- 다 걸었다. 더불어, 막힌 대문이 아니다. 누구라도 들여다볼 수 있고 언제라도 내다볼 수 있는 문인데 게다가 한 쪽문은 열어 두었다. 파리의 주거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정 cour을 연상시키는, 닫힌 곳에서의 열린 공간이다. 물론, 파리에서처럼 지나가다가 잠시 바람을 맞으러 들어가 볼 수 있는, 타인에게도 열린 공간은 아니겠지.

 


 

 

 

 

나는 실내에든 실외에든 색깔이 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색채찬양론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튀는 색은 자기도 주저하고 남에게도 말린다. 내 집 인테리어에서조차 '너무 강하다'라는 이유로 내가 원하는 색을 만류당하기 일쑤이다. 타협 끝에 한참 묽어진 색채로 실행하고선 곧바로 다짐한다. 다음에는 핑크, 블루, 그린, 옐로를 더 짙게! 따라서, 골목으로 나와 있는 차양이나 간판, 출입문과 창문에 강하고 선명한 색을 입힌 집들이 너무 사랑스럽다. 하나씩 섭렵하며 색감각을 얻어 익힌다. 퍼플과 골드, 테라코타, 오렌지, 블랙과 화이트, 짙은 브라운과 짙은 그레이, 붉은 벽돌과 우드 브라운에 로열 블루, 우드 브라운과 말 그대로 연두, 그리고 어디에서나 홀로 완벽한 존재감으로 공간을 살려내는 레드. 상업 공간이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리를 써야 한다. 집에서도 현관문, 베란다 문, 또는 일부 방문에도 유리를 더하고 선명한 색으로 살릴 수 있겠다. 또한, 식물이 함께 있어야 한다. 어느 상점 공간이든 밖에는 형태와 종류가 다양한 화분들을 갖다 놓았다. 식물의 초록과 브라운은 어느 분위기에나 잘 어울리고 모든 곳에 아기자기한 생명력을 더한다. 한 동네이지만 한 집 건너 분위기가 다르고 각자만의 특색이 돋보여 이를 바라보는 산책자는 참 즐겁다. 물론, 그 문밖의 매력에 이끌려 문을 열고 성큼 들어가 봄으로써 주인의 정성 어린 손길에 답례를 할 수도 있다. 이왕이면 예쁘고 우아하고 잘 가꾸어진 곳에서 먹고 쉬고 싶으니까.









 

 

 

 

이번에는 불현듯 '그곳'을 꼭 찾아보고 싶었다. 2014년 어느 가을 저녁, 서래 마을 어느 고깃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고 후식으로 잔치국수를 먹었었다. 이름을 까먹어 버려 검색으로는 알아낼 수 없기에 그 위치를 더듬어 찾아가 보았다. 분명 그 자리인 것 같은데 지금은 고깃집이 아니라 무슨 면옥이다. 그 맞은편 1층에 파란 문을 가진 커피집이 있었는데 이 역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날 저녁 식사 후, 약간 걸어 나와 어느 카페에 들어갔었는데... 반지하이고 벽에는 사진이 가득했다. 들어가 보니 사진관이기도 한 카페였다. 역시 이름을 까먹어 버려 오로지 직관에 이끌려 골목을 걸어가 보는데! 사진이다! 냉큼 다가가보니 맞다, CharLee. 밖에는 쌀국수 체인점의 이름이 내걸려져 있지만 안을 기웃거려 보니 아직도 사진관인 것은 맞다. 다시 보니 바깥에 실물 사진이 두어 개 입간판으로 세워져있다. 한발 자욱 떨어져 각도를 잡아 보니 이 건물, 상당히 멋이 있다. 외벽에 짙은 목재와 콘크리트를 썼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외부로 난 창이 아예 없거나 가느다랗고 길기만 하다. 그러나, 사진관 겸 음식점의 통유리창과 건물 앞면에 배치한 푸른 식물 덕택에 막힌 듯한 답답함은 상당 부분 상쇄된다. 오늘은 이미 두둑하게 곰탕을 챙겨 먹은지라 이 자리를 확인만 해 둔다. 조만간 혼자라도 쌀국수를 먹을 겸 내부의 사정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 나에게 남겨진 사진처럼 옛 모습 그대로인지 아니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싹 바뀌었는지 - 살펴보러 와야겠다. 왜 나는 이것이 궁금한 걸까, 그 이유를 알지 못하지만 이유를 따져볼 일도 아닌 것 같아 하고 싶은 대로 해보려 한다.



 

 

 

 

산책을 거의 마무리할 시점, 새로이 생긴 공간에 눈이 번쩍 떠진다. 지속적으로 상상해오던 올바른 카페의 모습이다. 돌로 된 계단을 올라가면 하얀 파라솔 아래에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다. 카페라는 정해진 공간에 소속되어 있지만 야외에 자리하기 때문에 밖으로부터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도 누구에게든 시선을 '내어던질 수 ' 있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하는 대타 존재와의 시선 장악을 위한 격전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지이다. 내가 구경거리가 되기 전에 내가 그들을 구경거리로 전락시켜버리며 객체화에 있어서 우선권을 가질 수 있는 위치이다. 그들은 이곳의 나를 '부러워하며' 올려다보게 되는 그런 압도적인 위상이 보장되어 있다. 실내에는 높은 층고를 가진 제법 넓은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것 같다. 거의 2층 높이로 내려져 있는 아이보리 시폰 커튼, 심플하지만 우아한 둥근 행잉 라이츠, 높다랗게 줄기가 뻗어 있고 그 끝에서 초록으로 퍼져 나온 식물들... 이 집도 색을 예쁘게 쓰고 있다. 언젠가부터 무한한 애정을 느끼게 된 짙은 그린이 시그너처 컬러인 것 같다. tea plant와 이보다 더 잘 맞는 선택은 없을 것이다. 하얀 파라솔과 민트색 철재 테이블과 의자 세트로 정다움을 더했다. 조도를 낮춘 조명으로 대낮에도 아늑함을 발산한다. 방금 전 커피를 마시고 나온지라 오늘은 이렇게 바깥에서의 감상만으로 끝내야 한다. 바로 다음 번 산책 때에는 디저트 타임은 무조건 이 집에서 이어야 한다. 새로 오픈한 기념으로 20퍼센트를 할인해 준다니 알게 된 이상 이 기회를 놓칠 순 없다.



 

 

 

 

일상에서의 산책.

여행에는 비할 바가 못 되더라도 집 안에서 이루어낼 수 없는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은 틀림없다. 일상과 여행의 그 어느 중간 지점이랄까.

산책에는 여행의 호기심과 닮은 데가 많은 반면, 여행에서의 두려움은 전혀 없다.

산책은 일상의 낯익음과 습관을 배제시켜 버릴 수 있는 기회이면서 낯섦과의 대면으로 나아가게 한다. 여행에서의 산책이라면 제일 좋겠으나 지금 그럴 수 없다면, 일상에서의 산책이 최고의 선택지가 된다. 자주 나서 보련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귀를 쫑긋 세울 수 있는 산책길. 길목마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며 나는 조금씩 변화한다. 더 나은 방향으로의 상승이라고도 부를 만하다.

 

 

『섬』과 『카뮈를 추억하며』로 나에게 언어적 충격을 가져다주는 장 그르니에 Jean Grenier, 산책에 대해서도 나의 언어적 사유적 감각적 허술함과 유치함을 메워준다. 산책이란,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광대한 영역을 아우른다. '곧장 걸어나갔다가 왔던 길로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이 이상한 행동은 잠시 바깥공기를 쐬며 머리를 식히는 행위 그 이상이다. 엄청난 작업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위한 규칙적 습관에 다름없는 칸트의 산책, 내가 보기에는 너무 이성적이고 철두철미하여 매력이 없다. 생을 철저하게 파헤치며 저작들을 탄생시키는 통로 역할을 한 니체의 산책, 너무 치열하고 격정적이어서 부담스럽다. < 모든 숭고한 장소에는 산책로가 있어야 한다. 일으켜 세워 걷게 하지 않으면 내 사유들은 곧 잠들어 버린다>라는 필요성에 입각한 몽테뉴의 산책, 압박을 가하는 필연성이 느껴져 피곤하다. 스스로를 '고독한 산책자'로 명명한 루소의 산책은 어떠한가. 몽상과 명상에 빠질 수 있어 산책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달아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루소의 산책에는 자신이 처한 고립에 대응하는 항변 (그르니에의 언어로는 '마조히즘적인 수단의 하나')이 중심이다. 타인이 틀렸고 자기는 맞다라는 주장의 성격이 다분하여 여유가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보들레르의 산책도 있다. 『파리의 우울』을 가득 채우고 있는 그의 산책은 너무나 화려하고 다단하다. 오늘의 파리, 내가 여행하며 황홀에 잠겨들었던 파리를 생각하며 보들레르의 산책을 상상하게 되므로 이 산책에 절절히 베여있는 우울, 광기, 연민, 절망, 분노마저 낭만적으로 다가온다. 그리하여 너무 비현실적이 되고야 만다. 다행히, 그르니에의 산책에 안착할 수 있다. 그의 산책에는 부족함도 넘침도 없다. 그르니에의 『일상적인 삶 La Vie Quotidienne, 』 속에서 산책 La promedade은 신체적 유희의 경지를 넘어 철학적으로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하나의 장르로 재탄생한다. 그르니에의 산책은 내가 알지 못하는 시공간을 넘나들면서 세미한 곳곳을 무결점의 언어로 거닐어보게 한다. 감탄을 연발하게 하지만 많이 놀라지는 않는다. 그의 글은 늘 이러니 말이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할 여가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백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일상사 가운데 어떤 빈틈을, 나로선 도저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의 순수한 사랑 같은 것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줄 그 빈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산책이란 우리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해주는 수단이 아닐까?

----- 장 그르니에 『일상적인 삶 La Vie Quotidienne 』, 민음사 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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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하는 인간 (feat. 프리드리히 실러) | 나의 독일어 2021-09-29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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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piel und Leben >

spielen 놀다 → spiel 놀이, 유희 leben 살다 → leben 삶,인생

 

 

 

? Der Mensch ist nur da ganz Mensch, wo er spielt,' sagt Schiller. Was sagen Sie dazu? Das Leben ist leider nicht immer ein Spiel, manchmal ist es muhsam, und manche Leute halten das Leben uberhaupt fur ein Ungluck. Sie halten auch die Arbeit fur ein Ungluck und warten taglich acht Stunden auf den freien Abend. Aber ich frag: was tun sie in diesen acht Stunden? Diese acht Stunden sind fur sie ein Gefangnis. Und wie ein Gefangener ißt, trink, arbeit, lebt - so tun sie ihre Arbeit: gleichgultig.

 

 

"인간은 유희할 때에만 완전한 인간이다."라는 실러의 말에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인생은 유감스럽게도 늘 유희일 수는 없고 괴로울 때가 더 많다. 많은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인생을 불행이라고 여긴다. 또한 일Arbeit도 불행으로 여기며 매일 8시간 일하는 동안 내내 자유로운 저녁 시간을 기다린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자 한다: 그들은 이 8시간 동안 무엇을 하는가? 그들에게 이 8시간은 하나의 감옥이 된다. 감옥에 갇힌 포로가 먹고 마시고 사는 것처럼 이들도 자신의 일을 행한다:즉 아무렇지도 않게 (무관심하게)

 

 

muhsam 괴로운

halten A fur B A를 B로 여기다

Gefangnis n. 감옥 - Gefangener m. 포로

gleichgultig 무관심한, 중요하지 않은

 

 

 

 

Das Spiel kenn kein ? ich muß". Es ist Vergnugen und Phantasie. Fur ein kind ist das Speil ernst, denn das Spiel hat eine Ordnung. Fur ein Kind gibt es - im Spiel -keine toten Dinge. Das Spiel macht alles lebendig. Was meinen Sie: muß die Arbeit ein Gefangnis sein?

 

유희를 "나는 반드시 해야 해"라고 (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희는 만족이며 판타지이다. 어린이에게 유희는 진지한 것이다. 왜냐하면 유희는 하나의 질서를 갖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있어서 유희에는 그 어떤 활기 없는 일이 전혀 아니다. 유희는 모든 것을 활기차게 만든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이란 감옥이기 마련일까요?

 

 

Vergnugen n. 만족, 기쁨

tot 죽은, 활기 없는

Ding n. 물건, 일

 

 

 

Will ich moglichst viele helle Stunden in meinem Leben haben, oder moglichst viele dunkle? Manche Leute mischen ihre Arbeit mit Freude, wie Wasser mit Wein. ? Im Spiel" sagt Jean Paul, ? bekommt die Arbeit Flugel.“

 

☞ 나는 제 삶에서 밝은 시간을 가능한 한 많이 가지려 할까 아니면 가능한 한 어두운 시간을 많이 가지려 할까? 많은 사람들은 일과 즐거움을 섞어 놓습니다. 마치 물과 포도주를 섞듯이 말입니다. 장 폴이 이렇게 말합니다 "유희 속에서 일은 날개를 얻는다".

 

 

 

moglichst 가능한 한

hell 밝은 ⇔ dunkle

mischen 섞다.

Flugel m. 날개

 

 

 

일을 의무라 여기며 괴로워하지 말자.

옛날에 빡센 일을 할 때에는 정말이지 빨리 시간이 지나 저녁이 오기만을 기다렸었다. 굳이 이렇게 일하러 다녀야 하는지 끝없이 신세 한탄을 하며 암담해했었다. 조금 더 편안한 일을 하면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할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일할 시간이 다가오면 속에서부터 짜증이 올라오고 일이 끝나갈 즘에 자유로워질 시간에 대한 기대로 기분이 좋아졌다. 왜 일하는가에 대한 제대로 된 성찰 한 번 안 해보고 그저 살기 위한 수단, 내가 하고 싶은 다른 목표를 위한 기반 정도로 삼았다. 지금, 일을 쉬고 있어보니 더 열심히 진정으로 일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도 하고 아쉬워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다시 일할 수 있을까.... 망설이고 있다. 여러 필요에 의해 일을 해야 할 것 같으면서도 예전과 달리 즐겁게 영혼을 담아 잘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자문하게 된다. 일하면서 놀 수 있다는 것은 쉽지 않고, 즐거운 마음을 담아 일하는 시간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누리고 즐겨야 할 텐데 ...

 

 

 

프리드리히 실러? 아득히 먼 옛날 이름은 들어본 것 같다. 독일 작가이자 철학자로 괴테의 벗이었다는 사실밖에 모른다. 빠르게 검색해 보니 '유희'에 앞서 '미'에 대해 설파하는 내용들이 무척 마음에 든다. "미란 현상에서의 자유이다",라는 매우 어려운 주장을 펼쳤다. 미는 주관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객관적인 현상이며, 자기 자신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에 자유이다. 또한, 미는 감성적이면서 이성적인 세계에 속한다. 감성과 이성의 매개 역할을 한다. 인간이 미를 즐기고 있을 때 감성적 충동과 이성적 충동은 서로 상반되게 작용하는 게 아니라 하나로 통합되어 '유희충동'을 일으킨다. 이는 세계와 인간의 통일이 회복되며 인간이 자유롭게 되는 순간이다. 따라서 '인간은 유희할 때에만 완전한 인간이다 Der Mensch ist nur da ganz Mensch, wo er spielt'라는 명제가 타당성을 얻는다. '미'라는 '유희'를 즐길 때 인간은 감성과 이성 양자 모두의 규정에서 벗어나 '무규정적인 자유'상태에 놓인다. 인간의 삶에서 미를 유희로 즐길 수 있다면 이는 유토피아적인 삶에 다름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미를 유희로 누릴 수 있을까?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예술을 교육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에 절대 공감한다. 음악을 듣고 미술을 접할 때 불쾌해지기란 쉽지 않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며 감동과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또한, 정신이 순화되어 착해지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강렬히 와닿으며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은 꿈을 갖게 한다.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에 미와 유희를 철학으로 전하고 있는 실러의 『인간의 미적 교육에 대하여』를 읽어 봐야겠다. 예술을 취향으로 즐기는 수준을 넘어 하나의 삶의 태도로 배우고 익힌다면 나의 일이 곧 나의 즐거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나의 대학 독일어 교재 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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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또는 타협 Freiheit oder Kompromiß | 나의 독일어 2021-09-28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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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자유롭게 살 것인지

조금 답답하고 제약이 따르더라도 타협하며 비교적 안전하게 살 것인지...

어쩌면 이런 고민 자체가 불필요하고 의미 없는 나이가 된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모험을 일삼으며 짧고 굵게 사는 것이 인간의 한 조건인 양 나름 시도해보았으나 별로 신통하지 않더라...라고 깨닫는 일이 점차 많아졌기 때문이다. 반면, 평범하게 살고 싶지 않다, 실패를 겪더라도 도전을 해봐야 한다... 이를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인생도 아쉬웠을 같다.

이제는 전반적으로 평안하게 지내고 싶다. 여행하기와 무지 어려운 책 읽기, 외국어 독학 같은 '버거운' 일을 도모하기는 하되, 자산이든 시간이든 에너지이든 무리하게 소진하는 일에는 관심을 끊겠다. 타협의 길에 접어든 것이다. 그래도 타협이 잘못된 방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터이다.

오늘 '나의 대학 독일어'는 자유와 타협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묻는다.

나의 답은 이미 '타협'이지만, 자유롭게 살겠노라 외치는 목소리에서 생기를 느껴본다.

Was wahlen Sie?

In der Deutschstunde las der Lehrer seiner Klasse diese Fabel vor:

? Sechs Ziegen hatte der Bauer schon im Lauf der Zeit verloren. Sie hatten sich losgerissen, waren in die Berge gelaufen und hatten einen ganzen Tag lang in Freiheit gelebt. Dann kam in der Nacht der Wolf und fraß sie auf. Die siebte Ziege, seine liebste, wollte der Bauer vor diesem Ungluck bewahren. Er warnte und belehrte das Tier, band es tagsuber an einen Baum und sperrte es nachts in den Stall. Als er einmal vergessen hatten, das Fenster zu schließen, sprang die Ziege hinaus, lief in die Berge und freute sich uber ihre Freiheit. Dann wurde es dunkel. Und wie der Bauer vorhergesagt hatte, kam der Wolf und fraß sie auf.“

☞ 독일어 수업 시간에 교사가 학생들에게 7마리 염소와 농부에 대한 우화를 들려준다. 6마리의 염소들은 농부 곁을 박차고 나와 하루 종일 산에서 자유를 만끽한다. 그러다가 밤이 오고 늑대가 이들을 먹어 치운다. 농부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일곱 번째 염소만은 잃지 않기 위해 낮에는 나무에 묶어두고 밤에는 우리에 가두어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농부가 창문을 닫아두는 것을 잊은 틈을 타서 이 염소는 산으로 도망간다. 자신의 자유에 기뻐하지만 이도 잠시, 곧 밤이 되고 농부가 말했던 것처럼 늑대가 와서 이 염소를 잡아먹어버렸다.

<어휘>

wahlen 선택하다

vor ° las (← vorlesen) 누구에게 무엇을 읽어주다

Ziege / Ziegen f. 염소

im Lauf der Zeit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losgerissen) sich los°reißen 몸을 뿌리치다

(z.b) ich kann mich von diesem Roman nicht losreißen.(이 소설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auf°fressen

1. 다 먹어치우다

2. 몹시 화를 내다

( z.b.) Wenn wir das nicht rechtzeitig erledigen, frisst er uns auf.

우리가 그것을 제때에 해내지 못하면, 그는 우리에게 몹시 화를 낸다(우리를 잡아먹으려 한다)

bewahren 보존, 보호하다 (+ vor: ~로부터)

belehren 가르치다

(z.b.) Er hat mich belehrt, wie ich mich zu verhalten habe. 그는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가르쳐 주었다.

tagsuber 낮 동안에

sperren 차단하다, 가두다

Wir standen num vor der Frage, was von diesser Ziege zu halten sei.

Andrea hatte wohl recht: Das Tier was dumm. Es hatte nicht begriffen, was ihm der Bauer gesagt hatte. Darum geschah der Ziege recht.

☞ 이제, 우리는 이 염소들로부터 무엇을 생각해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안드레아는 전적으로 옳은 말을 했다; 이 염소는 어리석었어. 농부가 일러주었던 것을 알아먹지 못했어. 따라서 그에게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어난 거야(그런 일을 당할만했어).

<어휘>

begriffen ( ← begreifen) 알아듣다, 이해하다

(es) geschah~ recht ~에게 일어날만한 일이 일어났다.

Einige meinten, die Ziege hatte ruhig davonlaufen konnen, abends aber wieder nach Hause zuruckkommen sollen. Sie waren fur den Kompromiß.

☞ 다른 생각을 하는 학생들도 있다. 염소들은 산으로 조용히 갔다가 저녁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어야 해. 이들은 '타협'에 찬성하는 것이었다.

Thomas und Christien aber riefen: Klar, die ziege ist dumm. Aber lieber tot, als ein Leben lang den Strick um den Hals.

☞ 그러나, 토마스와 크리스틴은 목소리 높여 말했다: 이 염소들이 어리석은 건 맞아. 그러나, 한평생 밧줄에 목이 메어있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아.

<어휘>

Kompromiß 타협

riefen (← rufen) 외치다

lieber A als B B보다 A가 더 낫다

Strick m. 밧줄, 올가미

Dann stimmten wir ab: Acht waren fur den Strick, zehn waren fur den Kompromiß, und funf wahlten den Wolf.

☞그러고 나서 우리는 투표를 했다: 8명은 밧줄에 찬성했고 10명은 타협에 찬성했고, 그리고 5명은 늑대를 선택했다.

ab°stimmen 투표하다

Und Sie? Was wahlen Sie?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속박과 제한을 당하더라도 안정적인 삶,

속박과 자유를 오가는 중간지대의 삶,

위험천만이더라도 자유를 추구하는 삶... 이 학생들의 투표 결과처럼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협적인 삶에 한 표 던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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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써 보는 미술 도록 (3) (feat. 아모레퍼시픽 미술관 Chapter three) | 아트다이어리(그림으로 쓰는 일기) 2021-09-2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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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18일 찾았던 아모레퍼시픽 아트 뮤지엄의 현대미술 소장품 전시, chapter three에 대한 세 번째 이야기. 총 7개의 전시실에 걸쳐 작품의 분위기와 규모를 달리하며 현대미술의 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이 중에서 오늘은 제3, 제4 및 제5전시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본다. 미술관 측은 이 세 개의 전시실을 통해 '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제작된 현대미술의 폭넓은 주제의식과 양식을 소개'하겠다고 밝혀 두었다.

 

 

마치 별세계에 들어온듯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조명 속에 이불과 최우람의 설치작품이 천장에서부터 반짝이던 제2전시실, '빛'을 배경으로 하는 유리, 크리스털, 및 하얀 단색의 모노톤이 극강의 화려함을 자아내는 공간이었다. 이렇다 보니 제3전시실에 들어서면 작품이 단 하나뿐이어서인지 심심하고 단출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한편으로는 한껏 흥분되었던 감각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편안해진다. 이에 대비해서인지 기다란 나무 벤치가 마련되어 있다. 첫눈에는 그저 '실 thread', 검정 실을 쭉쭉 이어 문을 만들어 세워 놓은 것 같다. 혹은 뻥 뚫린 벽을 세워두어 관람자의 생각도 멍하게 만들어 버린다. 작품의 제목은 '무제: 조각적 연구, 다섯 파트로 구성된 지지대 없는 작품. Untilteld :Sculptural Study, Five -part Freestading Piece'이고, '프레드 샌드백 Fred Sandback'의 1975년 작품이다. 재료는 검은색 아크릴 실, 단 하나이다. '물리적으로 부피감을 가지지 않고도 공간감을 형성할 수 있는 개방된 조각'이다. 실로 여러 개의 선을 만들었고 이 선들이 ' 모여 면을 이루고 주변으로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이 작품을 대하면 자연히 주변을 슬슬 걸어보게 되는데 작가의 의도에 따라 '보행자 공간'을 이용하는 것이 된다. 작가는 '작품을 감상하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공간'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눈에 띄는 공간감과 변화를 느끼기에는 작품의 규모에 실이 너무 얇고 구성이 단순하다. 위용을 자랑하는 전통적인 조각품들이 때로는 거북한 위압감을 주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지지대 없는 작품'은 발상은 신선하여도 너무나도 소박하여 특별한 감흥을 일으키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그래도 작품의 탄생 시기가 아마득한 1970년대였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매우 센세이셔널한 작품이다. 온갖 별스러운 현대 미술이 활개를 치는 요즘의 잣대로 바라보니 심심하고 소박해지는 것일 뿐.



 

 

 

 

제4전시실에는 '색'이 뚜렷하다. 어디에서인가 무겁고 강한 비트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어 다채로운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는 어느 거리에 들어선 기분이 된다. 들어서자마자 오른 편 바닥으로 눈길이 간다. 벽면에 원작품이 거울처럼 걸려 있고 조명에 의해 매끈한 바닥으로 데칼코마니 효과를 내고 있다. 6장의 패널로 이루어진 그림으로써 '베레글러미제 Verre eglomise'라는 미술 기법을 가르쳐준다. 즉, '유리의 한 면에 그림을 그리고 은도금하여 거울로 만든 뒤 유리를 뒤집어 그림을 반대편에서 바라보게' 하는 방법이다. 그림 또는 거울 앞에 서면 관람자와 전시장의 모습이 비친다. 이는 작가가 거울 위에 그려놓은 드로잉과 '교차하며 새로운 풍경'을 그려낸다. 놓이는 공간과 관람자에 따라 계속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되는 것이다. 신기하고 재미있어하다가 작품의 제목은 뒤늦게 발견, <어떤 이들이 짓는 입모양 Some shapes their lips>이다. 닉 마우스 Mick Mauss의 2017년 작품인데 작가가 이 거울 작품과 '입술'을 연관 짓게 된 배경이 사뭇 궁금해진다.


 

 

 

 

별생각 없이 앉아볼 수도 있겠다. 의자의 존재 이유는 앉는 것이니까. 우리 집에도 색상은 다르지만 거의 똑같이 생긴 게 두 개 있고 카페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스툴이다. 그러나, 이 역시 엄연한 현대미술 작품이다. 내 눈에는 분명 두 개가 보이는데 작품명은 < 하나이면서 세 개인 스툴 One and Three Stools>이다. 왜? 다가가서 자세히 본즉, 스툴이라는 하나의 개념을 ' 사진, 실물, 문자' 이렇게 세 개의 매체로 제시하고 있다. '조셉 코수스 Joseph Kosuth'의 1965년 작품으로 진짜 스툴, 스툴을 찍은 사진, 그리고 사전에서 '스툴'에 대한 정의를 찾아 사진으로 확대해 놓은 것이다. '개념미술'이라는 ( 알 것 같으면서도 도통 모르겠는) 장르의 대표 예술가로 코수스는 '언어를 예술의 도구로 사용하여 미술 작품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한다. '한 사물의 개념이 어떻게 구성되고 소통되는가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라고 하는데... 실물뿐만 아니라 그 사물의 의미를 전달해 주는 모든 변환된 모습에서도 하나의 개념은 동일하게 살아있다는 뜻일까.


 

 

 

 

어떻게 보면 제4전시실은 조셉 코수스가 중심이다. 총 일곱 점의 작품 중 조셉 코수스의 작품이 세 점이고 또 다른 한 점은 코수스가 중요한 영향을 받은 도널드 저드 Donald Judd의 작품이다. 우선, < 다섯 개의 다섯 개 (도널드 저드) five Fives (to Donald Judd)>를 바라보며 '형식보다는 개념을 중요시하는' 개념미술이 어떤 것인지 이해해 보려 한다. 조금 전 스툴에 대한 사전적 정의 자체를 작품으로 편입시킨 것처럼 '언어의 역할과 예술에서의 의미'를 탐구하려는 작품이다. 내용은 의외로 단순하다. 파란 네온 불빛 속에 영어로 1부터 25까지 나열해 두었다. 진품 보증서가 있다는데 바닥에 세워 놓은 흰색의 직사각형 종이 두 장을 가리키는 것일까... one, two, three --- twenty -five에 집중하다가 미처 찾아보지 못했다. 이 파란 네온 작품에는 규칙이 있다. 숫자를 '다섯 단어씩, 다섯 줄로 나열'했고 '숫자가 커질수록 단어의 길이에 의해 줄이 점점 더 길어진다'. 바로 이 설명은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디자인이 아닌 작품의 내용, 즉 수의 개념이 작품의 형태를 결정한다'라는 개념미술의 핵심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나에게는 개념미술이 가장 어렵다. 겉보기에는 단순 명료한 것 같은데 무엇을 의도하는지 또는 꼭 이럴 필요가 있을까 아리송해진다. 잘 모르겠는 것은 이해하려고 애쓰지 말자. 마음을 비우고 시선을 바닥으로 돌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블루가 마치 안개처럼 사방에 자욱하게 깔려 있다.


 

 

 

 

코수스의 파란 네온의 맞은편에는 도널드 저드의 <무제 Untilted>가 벽면을 길게 장식하고 있다. 저드는 코수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두 작품은 서로 마주 보며 대화를 형성하도록 설치되어 있다. 코수스가 저드에게 보내는 일종의 오마주이다. 재료는 '12가지 색의 양극 처리된 압출 알루미늄' (어렵다)이고, 저드는 '산업 재료를 기하학적인 형태로 가공하여 오브제의 순수성을 강조'했다. 회화인가 조각인가. 둘 다 아니다. 자신만의 새로운 3차원 작품을 만들고 '특수한 물체 specific object'라는 용어로 지칭했다고 한다. 12개의 알루미늄 막대를 균일한 간격으로 설치해 놓았다. 형태는 단순하고 명확하되 '색에는 제한을 두지 않았다'라고 하는데 이 작품은 무채색 계열이라 색의 자유로움은 잘 느끼지 못하겠다. 형태와 색의 기본단위로서 주변 공간과의 관계를 부각시킨다(highlighting theri relation with the surrounding space as basic units of shape and color,라는 취지에 맞게 감상해 보려 하는데 너무 어렵다.



 

 

 

 

저드의 12개의 막대가 끝나는 지점의 또 다른 벽면. 조셉 코수스의 작품이 하나 더 설치되어 있다. 다시금 '다섯'을 말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형용사'이다 : <다섯 개의 색, 다섯 개의 형용사 Five Colors Five Adjectives>. 아름다움 또는 심미적인 것은 예술과 무관하다 (aesthetics is irrelevant to art),라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이 작품에서도 '언어적 접근'으로 예술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형용사'라는 단어를 '다섯 개의 언어, 다섯 가지의 색깔로' 보여준다. '언어와 언어가 제시되는 방법을 통해 예술의 의미와 개념을 탐구한다'라는 설명은 왜 이리 이해가 안 되는 것일까. 코수스님, 일반적인 심미적 방식을 거부하고 언어를 이용하여 예술의 '개념'을 말씀하시려면 차라리 글을 쓰시는 편이 더 수월하지 않을까요? 개념미술.. 개념미술... 하도 이해가 안 되어 이렇게 단순무식한 푸념을 하게 된다.

 


 

 

 

코수스의 다섯 형용사의 좌편에는 'forever'이라는 글자가 눈길을 끈다. 캔버스를 세로로 네 폭으로 나누어 빨-파-초의 색동저고리 같은 알록달록을 입히고 마지막 단은 블랙으로 마무리했다. 흑백 대비의 세련미를 살려 하양으로 forever을 썼고 영원의 불빛처럼 색이 퍼지고 있다. 무엇이 영원할까. <우리는 영원히 어릴 것이다 We'll be Young Forever>, 아무래도 젊음이 최고인가 보다. 영원히 젊을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실패도 두려움도 문제 될 게 없지 않을까. 산뜻한 것 같으면서도 (영원히 젊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서글픔도 일게 하는 이 작품은 '데보라 카스 Deborah Kass'의 2015년에 캔버스에 아크릴릭과 네온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20세기 남성 작가들의 대표 작업 양식을 흉내 낸 시리즈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오마주와 차용의 경계'에서 '페미니즘적 관점'을 투입했다는데 이 작품으로는 쉬이 짐작이 안 된다. 이 작품은 '색깔의 종류를 제한하고 대중문화에 나타나는 단어나 구절을 삽입'하는 최근 연작에 속한다. 여기에 적어 둔 forever은 케이티 페리의 노래 <Teenage Dream>에서 인용했다고 하는데, 이 노래의 가사라 아니더라도 forever은 가장 흔하게 접하는 단어가 아닌가 싶다. 아마 작품 전체의 색조나 이미지를 이 노래에서 떠올렸던 것 같다.

 


 

 

 

 

데보라 카스의 작품의 왼편에는 안쪽으로 들어간 공간이 하나 있다. 아, 여기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거였구나. 제4전시실 전체에 울려 퍼지며 강한 진동을 일으키던 사운드 역시 작품의 일환이었던 게다. 3채널 HD 영상을 주로 하는 하나의 무대 같기도 하고 독자적인 다큐를 방영하는 미디어 아트 같기도 하다. 화면은 시시각각 달라지는 글자나 문장을 내보내며 배경을 이루는 그림도 계속 달라진다. '윌리엄 켄트리지 William Kentridge'의 <쾅! KABOOM!>이다. 음악은 '필립 밀러와 투투카 시비시'가 별도로 작곡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남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와 현재를' 그리는 작가이며 이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운반인으로 강제 징용되었던 수백만 아프리카인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작가가 감독한 대규모 퍼포먼스 <머리와 짐 The Head & The Load>의 축소판으로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에 그림자놀이, 텍스트, 옛 문헌자료, 연극 영상을 결합하여' 또 하나의 무대를 마련한 것이다. 사실 알고 보면 신나거나 흥을 돋우는 곡조가 아닐 터인데 전쟁의 희생자를 기린다는 내용처럼 우울하지도 않다. 한 나라 또는 한 민족의 어두운 역사는 어떤 식으로든 트라우마를 남긴다. 애써 지우려고 몸부림치기보다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다양한 형식으로 이야기하며 밖으로 쏟아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이를 위해 예술은 훌륭한 통로가 될 수 있다.




 

 

 

 

다 둘러보고 나니, 제3전시실과 제4전시실은 매우 실험적인 공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형식의 회화는 한 점도 없고 조셉 코수스의 '개념미술'을 중심으로 보기보다는 상당히 파격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리하여, 현대미술은 제한과 경계없이 무한대로 변주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 이런 이유에서 매력적이고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내가 매일매일 별 차이 없이 무난하게 흘러가는 일상을 살고 있는 동안, 세계 곳곳에서는 새로운 창조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한 개인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을 숱한 가능성을 한자리에서 탐색할 수 있는 이런 시공간이 너무 고맙다. 나를 대신하여 인류 전진의 선봉 역할을 잘 감당해 주는 이 예술가들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있어 나의 무미건조한 일상에 한차례의 강력한 바람이 나부끼게 된다. 이 모든 새로움이 나의 일상에서 어떤 색깔의 에너지로 재발견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제5전시실도 다분히 실험적일 것으로 예상된다. 조셉 코수스의 다섯 형용사를 지나 처음 보이는 작품은 오렌지 색깔이 역력하다. 화이트와 옅은 블루도 등장시켜 색이 더욱 돋보인다. 네온과 알루미늄, 미디어 아트를 통해 움직이는 색을 보았다면, 이제는 캔버스에 물감으로 이루어낸, 더욱 미술 다운 색을 만나볼 차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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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 (feat. 마르셀 프루스트) | 리딩다이어리(책으로 쓰는 일기) 2021-09-2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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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으로 내게 가장 큰 체험은 프루스트다. 이 책이 있는데 과연 무엇을 앞으로 쓸 수 있단 말인가?"

나의 아이콘 버지니아 울프가 한 말이다.

『자기만의 방』으로 나를 사로잡았고 『댈러웨이 부인』으로 '의식의 흐름'에 따른 문학의 묘미를 선사해 주는 울프가 이토록 경탄해 마지않는 책이라면 도대체 어떨까,라는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읽을 엄두조차 낼 수 없다고 단정 지었다. 완역된 한글판이 아직도 출간되지 않았을 정도로 - 2019년 12월 말에 이르러 펭귄 클래식 코리아에서 12권 분량으로 완역해 내놓았다 -너무 방대한 분량이었다. 프루스트에 대한 버지니아 울프의 명언보다 좀 더 나중에 알게 된 바이지만 '앙드레 모루아'라는 사람은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 프루스트를 읽은 사람과 읽지 않은 사람만이 있다"라고 선언했다. 이 말은 그만큼 프루스트를 읽어내기가 어렵다는 역설로 들렸다. 내 아무리 책을 좋아해도 종일 책을 읽는 것도 아닌 데다가 이 책만 읽을 수도 없을 터이고... 프루스트, 정확하게 말하면 프루스트의 역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는 아예 시작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았다.

 

 

 

불행하게도 내지 다행히도 이렇게 혀를 내두르며 '나의 영역'이 아니라고 물러섰던 프루스트와 그의 책은 최근까지도 그 그림자를 나에게서 거두어 가지 않았다. 잊을 만하면 이런저런 책에서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튀어나왔다. 특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 제1편인 <스완네 집 쪽으로 Du Cote de chez Swan>에 나온다는, 너무나도 유명한 '마들렌 이야기'는 수십 번도 더 마주친 것 같다. 모든 창문을 닫아두고 침대에 누워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생이 다 할 때까지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을 써 내려갔다는 전설 같지만 실제로 그랬다는 이야기, 이 방대한 역작 안에는 미술과 음악을 위시한 모든 예술과 철학, 문학이 스며 있어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이라는 이야기 등등 '나는 어쨌든 읽지 못할 것이고 읽지 않겠다고' 제쳐 둔 이 책에 대해서 신비로운 이야기들이 점점 쌓여 갔다. 혹자는 읽다 보면 너무 어렵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하여 자연스레 그만 읽게 될 것이라고, 프루스트의 글을 너무 부담스러워하지 말아도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18년 8월 말,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갔을 때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마르셀 프루스트의 초상화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앞서 2016년 8월에 파리를 다녀온 후, 어느 책을 보다가 프루스트의 초상화가 오르세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들렌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프루스트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한 상태이었는데 너무나 아쉬웠다. 오르세에 있는지를 몰랐다니!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 많은 그림을 보았는데도 어떻게 이 초상화는 내 눈에 띠지 않았을까! 2년을 기다렸다가 발견해 낸 프루스트! 그 순간의 감격과 흥분을 잊지 못한다. 비교적 어두운 조명 아래 걸린 그림 속 프루스트. 검은색 배경에 검은색 복장을 입고 있어서인지 그의 얼굴은 더욱 하얗게 두드러진다. 설렘을 유발하기보다는 무언가를 생각하게 하는 그림이다. 가름하다 못해 뾰족한 얼굴,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면모가 어김없이 드러나있는 눈썹과 두 눈, 보들레르가 말했던 댄디 또는 당시 전형적인 파리 부르주아 계급의 남성을 대변하는듯한 차림새.... 병약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어서인지 프루스트는 가냘파 보이지만 날카로웠고 예리해 보이지만 짙은 우수에 젖어 있었다. 정면을 가만히 응시하는 그의 시선, 어떤 이유에서 그토록 난해하고 복잡하고 긴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했을까.


 

 

 

 

 

그러면서 결국,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한글판 제1권 <스완제 집 쪽으로 1>을 사고야 만다. 구매 날짜로 보면 2019년 8월 9일 금요일. 그렇다면 2018년 오르세에서 프루스트의 초상화를 찾아보기 이전에 이 책을 사 두었다는 얘기가 된다. 프루스트의 초상화를 애써 찾아보는 열성을 발휘한 걸로 보아 이미 프루스트를 읽어보겠다고 작정해 두었다고 나의 기억을 수정하는 편이 맞겠다. 제1권을 정말 다 읽은 것은 한참의 세월이 흘러, 불과 지난 달이었다. 2021년 8월 16일 화요일. 나에게 프루스트는 어느 정도로 맞을까? 이 점이 나 스스로도 무척 궁금했다. 처음 읽는 작가와 나의 케미스트리가 맞지 않으면 아무리 유명하고 훌륭한 책이라도 끝내지 못하고 영영 그 작가의 세계와 작별하게 되니까. 한 마디로, 후회했다. 진작에 그 수많은 기회가 있었던 그 옛날에, 이 책을 읽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다. 나는 못 읽을 거라고 지레 겁을 먹고 말았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아아... 나는 지금껏 헛살아 온 것 아닐까. 프루스트가 느끼고 있는 것의 십 분의 일도 느낄 수 없으며 프루스트가 알고 있는 것의 백분의 일도 알지 못한 채 지금까지 무엇하며 살아왔던 것일까. 프루스트의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는 충격과 감동이었다. 이런 세상을 전혀 모르고 살아온 나의 인생에 한없는 자책과 비통함을 느끼며 숱하게 반성하게 되었다. 감각으로도 지적으로도 게으르고 무딘 나의 현실! 동시에 프루스트의 글 속에서 눈이 떠지고 귀가 열리는, 손끝의 촉각도 살아나는 경험을 하며 즐거워하게 되었다. 제1권을 뒤늦게 읽게 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한글판의 제2권 <스완네 집 쪽으로 2>를 미리 사 두었다. 이러는 사이,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보인 것이었다.

 

 

 

 

나는 매우 급한 성격이 맞나 보다. 제2권을 읽는데 문득 이런 생각. 아직 완결이 되지 않은 이 시리즈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을 읽다가는 내 생전에 마무리할 수 있기는 한 걸까. 한편, 제2권을 읽으며 제1권을 사그리 까먹어 버리면, 그래서 그 이상을 읽어내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큰 그림이 필요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를 망라하는 축을 형성해 둘 필요가 있었다. 도대체 프루스트가 말하고 있는 것, 말하려고 하는 것, 내가 알아먹어야 할 흐름 같은 것을 파악해 두어야 전체적으로 수 천 페이지에 달할 이 책을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쉽게 말해 프루스트를 읽어 나가는데 가이드가 되어줄 참고서가 필요했다. 찾아보았고 운 좋게도 찾아냈다. 불문학자인 김동윤의 친절한 안내서 『프루스트』! 판형이 비교적 작고 120쪽이 조금 넘는, 프루스트의 본책에 비하면 '가볍게' 여겨질만한 책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삶에서 시작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이 '작아 보이는' 책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해와 감상을 도와줄 뿐만 아니라, 방향을 제시해 주어 결코 내가 프루스트를 포기하지 않도록 다잡아 주었다. 나 혼자 한글판을 들고 아무리 열심히 읽어나간다 해도 깜깜한 망망대해를 헤집고 다니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해할 수 없고 복잡한 장면들을 만나게 되면 들쑥날쑥 읽게 될 것이고 그러다가 곧 흐지부지해 질게 틀림없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스토리 라인을 따라 읽는 책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스토리 또는 줄거리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러므로 초보자인 나 자신의 의지에만 기대어 읽어간다면 곧 지루해지고 목적의식을 상실하게 된다. 김동윤의 『프루스트 』가 없었다면 나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기도 어쩌면 제1권에 머무르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 책에서 하나의 '비법'을 고안해 내게 되었다. 이 책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를 다루기보다는 '문학적으로 매우 풍부'한 첫 권 <스완네 쪽으로>와 마지막 권 <되찾은 시간>에 집중한다 (프랑스어 원문으로는 전체 일곱 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권에 주력하여 나머지 다섯 권을 조금씩 언급하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를 조망하는데 한글판으로 제1권 즉 원문으로는 제1권의 절반 정도밖에 읽지 않은 상태에서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를 이용하여 약삭빠르게도 나는 중간 기점들을 건너뛰고 일단 마지막 권부 터 읽어도 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을 잘 읽어나가도록 하늘의 손길이 임하는 게 틀림없다. 1995년에 발행된 김동윤의 『프루스트』에 비하면 완전 신상품이나 다름없는 또 다른 '지침서'를 발견했다. 불문학자 정명환 교수의 『프루스트를 읽다』는 나를 도와주기 위한 책이다. 올해 4월에 발간된 책으로 작가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전권을 읽으며 기록한 이야기이다. 각 권의 주요 내용도 발췌해 놓은 데다가 '겸하여 나의 추억과 생각을 담아서'라는 부제에 맞춰 작가 자신의 이야기도 곁들어져 있다. 주옥같은 프루스트의 문장을 성실하게 읽는 데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나의 사유, 감각, 삶의 방식으로 배워낼 수 있을까 고민해 왔는데, 『프루스트를 읽다』는 이에 대한 길잡이가 되어 줄 책이다. 또 하나 위안을 얻을 수 있으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을 읽기에 나는 아직 늦지 않았다는 안도감이다. 이 노학자 (1929년에 태어나셨다!)께서는 본인이 불문학자임에도 불구하고 90세가 넘도록 프루스트의 이 전집을 한 번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몇몇 에피소드만을 이용하여 '불문학 개론' 같은 강의를 했던 것에 대한 '부끄러움과 뻔뻔함'을 해소하지 않고서는 '자괴심 때문에 편히 눈을 감을 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시달리'다가 드디어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라고 토로한다. '끝까지 읽지 못하고 죽어도, 아예 안 읽고 죽는 것보다는 마음이 편하겠지'라는 생각으로 시작했으니 더없이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을 읽어내신 거였다. 나도 미루고 때로는 무시하다가 이 나이(?)에 이르러서야 프루스트의 첫 장을 넘기게 되었으니 정 교수처럼 반성과 간절함을 갖고 임해야겠다.


 

 

 

정명환 교수는 『프루스트를 읽다』를 집필하기 위해 동료 교수인 이형식의 번역판을 읽었다 (노학자답게 일어 번역본도 참고했다). 사실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한글 완역본이 있는 줄도 몰랐다. 이형식 교수가 펭귄클래식코리아에서 전 12권으로 완역한 시리즈는 제1권이 2015년 11월, 마지막 제12권이 2019년 12월 말에 발간되었다. 4년 동안의 작업 끝에 이루어진 과업인데 책 제목을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라고 옮겨 놓았다. '잃어버린 시간'에 익숙해져 있는 나로서는 왠지 어색하다. 어쨌든, 김동윤의 『프루스트』에서 얄팍하게 떠올렸던 나의 계책을 실행하는데에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 되었다. 프루스트 원작의 마지막 권에 해당하며, 내가 유일하게 읽어 둔 제1권과 직접적으로 맞물리는 내용이 많으며 ( 프루스트가 제7권을 완성한 후에 제1권을 썼다라고도 할 만큼 두 권은 긴밀하게 맞닿아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결론에 해당할 이 마지막 <되찾은 시절 >을 냉큼 사들였다. 읽고 있던 민음사의 제2권을 일시정지해 두고 이 마지막권을 읽기 시작했다. 김동윤의 『프루스트』에 의지하여 (중간을 몽땅 생략하고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 아직은 큰 무리 없이 읽고 있다. '시절'보다는 '시간'을 선호하지만 내가 이 마지막권을 읽는 동안 먼저 읽고 있던 민음사 버전이 완결을 알리지 않는다면, 제3권부터는 이형식 교수의 번역판으로 읽게 될 것 같다.

 


 

 

 

 

사실 빨리 읽어보려는 욕심 때문에 어느 출판사의 번역본으로 읽을까 따지고 있을 뿐, 프루스트를 알아가는 데에는 어느 쪽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기나긴 시간이 걸릴 것이고 눈으로 읽으며 페이지를 넘겨가는 것을 넘어 제대로 알아 가면서 읽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도시의 깜깜한 밤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을 찾기가 어려운 것처럼 프루스트의 이 무수한 문장들 가운데 내가 온전히 소화할 수 있는 이야기는 소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프루스트의 완벽한 글 앞에서 연거푸 좌절할 것이 뻔하다. 프루스트와 나는 별개의 종이런가. 같은 인간이라는 부류에 속한다면 어째서 그와 나 사이에 이토록 큰 간극이 존재하는 걸까. 불과 5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만 프루스트가 펼쳐 보이는 세계는 여러 명의 인생을 합쳐 놓은 것보다 더 넓고 깊어 보인다. 다행히도 프루스트를 읽으며 벅찬 감동을 느끼면서 한편으로 깊은 상심에 빠져드는 것은 나만의 경험은 아닌듯하다. 버지니아 울프도 ' 이 책이 있는데 과연 무엇을 앞으로 쓸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정명환 교수도 『프루스트를 읽다』의 머리말에서부터 '한탄'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나는 읽는 도중에 가끔 책을 내려놓고는 한숨을 쉬었다. 한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 엄청난 감성과 지성, 관찰력과 상상력, 분석력과 구상력을 함께 갖출 수 있단 말인가! 찬탄의 한숨이라기보다도 나로서는 사소한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예술적 전지전능 앞에서의 경외가 자아내는 한숨이었다.

----- 『프루스트를 읽다』 현대문학 정명환

 

 

 

감히 이 '한숨'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프루스트의 '예술적 전지전능'앞에서 초라하게 쪼그라드는 내 존재를 향하여 비애를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이 끝없을 '경외'를 멈추지 않겠다고 충성을 맹세한다. 나의 좁은 지知의 영역이 확장되고 무디어진 감각이 깨어날 수 있는 '은총'을 하사받고 싶다. 이 자발적인 프루스트에의 경외와 복종이 결코 부끄럽지 않은 이유, 오히려 당연한 반응으로 여겨지는 이유를 알베르 카뮈에게서도 발견한다. 카뮈가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고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 그의 스승이자 벗이라 할 수 있는 장 그르니에는 『카뮈를 추억하며 Albert Camus 』를 썼다. ' 이 책을 쓴 목적은 단지 알베르 카뮈의 몇 가지 면모를 상기시키려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하며 서문을 여는 이 책은 장 그르니에의 담담하고 섬세한 (그리하여 읽기가 쉽지 않은) 언어로 카뮈를 말하고 있다. 카뮈가 좋아했던 작가들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프루스트가 등장한다.

 

 

 

열여덟 살에 그는 또한 프루스트를 창조자라고 생각했다(이는 그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찬사였다). 그는 프루스트 작품의 엄격한 구성과 꼼꼼한 세부 묘사 사이의 대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프루스트에 대한 그의 경탄은 이제 프루스트의 책을 그만 읽어야겠다고 씁쓸하게 말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느껴온 많은 것을 프루스트에게서 찾아낼 수 있었고, 그래 결국은 <모든 것이 끝났다. 다시 생각해 볼 것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 『카뮈를 추억하며』 민음사, 76쪽

 

 

 

비록 카뮈가 프루스트로 인해 절망한 것은 그의 나이 18세 때였고 그 이후 카뮈 스스로도 위대한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카뮈도 역시 프루스트를 읽자마자 이렇게 감명과 좌절을 느꼈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불문학자도 한숨짓고 젊은 카뮈조차도 한탄해하던 프루스트! 이런 프루스트 앞에서 내가 무력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내가 프루스트를 정말 끝까지 읽어낼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거의 확실하다. 왜냐하면 <스완네 쪽으로 1>, <프루스트>,<프루스트를 읽다> 그리고 <되찾은 시절> 등 지금껏 두어 달 동안 내 손안에 들어온 모든 프루스트는 재미있기 때문이다. 읽을수록 더 알고 싶다. 더 많은 것을 캐내기 위해 더 깊숙이 들여다보고 싶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은 지 얼마 안 되어 지루해하며 책을 덮어 버리고서는 영영 못 읽고야 마는 '프루스트를 읽지 않는, 읽지 못하는' 부류에 '나는' 속하지 않는다는 이 안도감과 자부심이란!


 

 

모든 문장을 이해할 수 없고 때때로 말 자체가 어려워 흥미가 떨어지기도 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큰 기대를 품고 있다. 울프와 카뮈 같은 세계적 문호들도 감탄과 좌절을 반복하며 따라갔던 프루스트의 길에 나도 이제 합류한 것이다. 프루스트의 세계는 그 독창성과 환상성 그리고 내가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함으로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발하고 있다. 이는 비단 글 쓰는 이들에게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 살아온 과거가 있으며 아직도 살아갈 생을 두고 있는 자라면 누구에게나 프루스트에게서 얻고 배울 게 수두룩하다. 이 땅의 모두에게 허락된 시간의 보편성을 넘어 각자에게 열려 있을 개별성을 찾아 나서야 한다. 그래야 과거-현재-미래는 하나의 인생을 형성할 수 있다. 내가 도달 가능한 지력과 감각의 최대치를 높여가며 삶의 구석구석을 아낌없이 발견하는 것, 프루스트에게서 배워나가고자 한다.

 

 

PS: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과 되찾은 시간을 두 축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모두 읽어내게 할 추동력을 설정해둔다. 강력히 바라며 믿는 바대로 내년 2022년에 - 아마 6월 10일 전후- 파리로 날아간다면 마레 지구에 자리한 '카르나발레 박물관 Musee Carnavalet'을 방문한다. 이곳에는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를 집필하던 방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특히,누워 엎드려 이 책을 썼던 침대는 실물 그대로라고 한다. 또한, '페르 라쉐즈 묘지Cimetiere du Pere Lachaise'를 찾아 프루스트를 만나볼 것이다.

 


내가 프루스트의 세계로 가는 길, 여러 조력자들에게 힘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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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관계대명사 (feat. 장그르니에의 '섬', 카뮈의 서문) | 프랑스어에 울고 웃고(나이들어 외국어라니) 2021-09-22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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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에라도 꺼내 읽으면 그 무엇이라도 평안과 기대의 분위기를 띠며 나를 안도하게 해 주는 글.

책을 열심히 읽어야 할 것 같은 '사명감'을 느끼고 있는 요즘, 장 그르니에의 『섬 Les Iles 』에 알베르 카뮈가 적어 둔 서문은 좀 더 잘 읽힌다. 책을 읽는 자의 행복,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했을 때의 감격과 흥분을 이 서문보다 더 적확하게 황홀하게 표현해 주는 글이 있을까.

 

아직도 서툴 디 서툰 프랑스어 실력으로 사실 이 서문을 프랑스어 원문으로 읽어 보겠다고 감히 엄두를 내어 본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두건만 한 줄 한 줄 성실하게 읽고 싶은 바램은 포기할 수 없다. 『섬 Les Iles 』을 욕심내고 카뮈의 서문을 챙겨보고 그러면서 프랑스어를 향한 원대한 희망을 품게 된 것 이 모든 기적의 출발은 한글판 『섬』에 있다. 김화영 교수의 이 번역 글이 존재하는 덕택에 나는 그르니에의 섬을, 카뮈의 서문을 스스럼없이 읽어내고자 한다. 솔직히 말하면 '커닝'을 하는 거다. 김화영의 문장에다 그르니에의 문장, 카뮈의 문장을 얹어 두고 김화영의 단어 단어로 이 프랑스인들의 언어를 조금씩 밀고 나간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한글과 프랑스어를 오가다 보니 약간의 여유가 생겨서일까. 오늘은 카뮈의 문장 속에서 문법 또는 문장의 구조, 단어와 문장이 갖추어지는 운행방식에 눈길이 간다. '관계대명사'를 챙겨보고 싶어진다. 카뮈의 글은 처음부터, 정확히 말하면, 두 번째 문장부터 관계대명사 que가 등장한다. 대부분의 언어에서 관계대명사는 두 문장 또는 그 이상을 한 문장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편리한 장치이다. 다시 말하면 관계대명사가 쓰인 문장은 대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길이감을 갖게 되며 언어를 배우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특히 외국어 학습자의 입장에서는) 관계대명사가 한두 개 들어간 문장을 한 호흡에 읽어낼 수 있다면 독해에서 진전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아예 top-down 방식으로 프랑스어에 도전해 볼까. 내 수준을 상당히 뛰어넘는 글을 선택해서 한 문장씩 문법과 단어를 섭렵해가는 방식 말이다. 기초부터 하나씩 차근히 공부해 가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조급한 마음도 달랠 겸 좀 더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며 성큼성큼 나가볼 때가 되었다. 이왕이면 언어적으로도 사유면에도 탁월한 책을 선택하자. 뛰어난 한국어 번역본도 존재하는 책....『Les Iles』과 『섬』보다 더 나은 선택은 없을 것이다.

 

 

카뮈의 서문의 3분의 1 정도 가량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계대명사를 찾아본다. 새삼 깨닫게 되는 사실인즉 que와 qui가 어떤 점에서 다른지 여태껏 구분해 보지 않았다. 현재형-과거형(반과거와 근접 과거)-미래형(단순 미래) 등 동사를 공부하다가 포기하면서 문법은 일단 앞뒤가 이어지면 그저 넘어가자는 식으로 완화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앞의 명사 (선행사)와 뒤의 문장이 대략적으로 연결(관계) 되면 이것으로 족한 것이지 따로 관계대명사를 익힐 필요나 여유가 없다고 미루어 둔 거였다.

 

 

그러나, que와 qui는 의미적으로 매치되는 영어의 관계대명사 what과 who 와는 많이 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궁금해서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관계대명사를 속속들이 알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지만, 갖고 있는 초중급 수준의 프랑스어 문법 교재( 송산 출판사, 『프랑스어 문법 총정리』)를 뒤져보게 되었다.

 

프랑스어 문법 총정리 초중급

신중성,김지연 공저
송산출판사 | 2012년 12월

 

 

어? 이게 웬일인가! 프랑스어에도 이처럼 '간단한' 문법이 존재한다니. 거의 믿기지 않아 그저 탄복할 따름이다. 물론, 이 교재 가 쉽고 간단하게 축소해 놓았겠지만 나에게는 지극히 고무적이다. 프랑스어 문법, 해볼 수 있겠다!

 

프랑스어의 관계대명사 Les pronoms relatifs는 4개로 구분되어 있다.

que, qui, dont, ou

 

 

1. que와 qui는 양자 간의 차이점에 포커스를 두며 함께 공부하면 더 수월하다.

 

 

우선, qui는 주격 관계대명사이고 que는 목적격 관계대명사이다.

 

주격 관계대명사란 (영어에서와 동일하게) 선행사를 qui 문장의 주어로 파악하면 된다. 따라서, qui 뒤에는 동사가 위치한다.

Je prends le train. + Ce train part a 16 heures.

(두 문장을 관계대명사로 연결하면 le train과 ce train은 동일 사물이고 ce train은 주어이므로)

→ Je prends le train qui part a 16 heures. (나는 16시에 출발하면 기차를 탄다)

 

que는 목적격 관계대명사이므로 선행사가 que 뒤에 오는 동사 (타동사)의 목적어로 연결된다.

Je n'aime pas la chemise. + Il porte la chemise.

( la chemise가 선행사가 되고, porte의 목적어이므로)

→ Je n'aime pas la chemise qu'il porte. (que + il이지만 il이 모음'i'으로 시작하므로 qu'il) 나는 그가 입고 있는 셔츠를 좋아하지 않는다

 

qui와 que의 공통점은 선행사가 사람인지 사물 인지 구별하지 않는다는 사실. (영어보다 더 간단하다!)

 

 

 

2. 관계대명사 dont은 낯선 개념이다 (영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장치인데 알고 보면 문장을 간단하게 끌어준다)

' 선행사가 관계절에 '전치사 de가 유도하는 보어를 대신'한다..... 문법 교재에는 이렇게 설명되어 있어 뭔 말인지... 그러나, 예문으로 접근하면 이해가 더 빨리 된다.

 

 

C'est le livre. + Je t'ai parle de ce livre hier.

편의를 위해 한국말로 먼저 연결해 보면 '이것은 내가 어제 너에게 말했던 책이야'

'~에 관하여 (영어의 about)'에 해당하는 'de'를 쓰지 않고 dont을 선행사 le livre 뒤에 갖다 놓는다.

→ C'est le livre dont je t'ai parle hier.

 

 

다시 ' 전치사 de가 유도하는 보어'라는 조건에 집중해 보는데, 위 예문 'parler de'에 쓰인 de는 '동사의 보어를 유도한다'라고 표현한다. 이는 de가 동사 외의 다른 품사도 유도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형용사의 보어와 명사의 보어가 있다.

 

 

'형용사의 보어'는 '형용사 +de + 명사'의 모습이다:

J'ai trouve un studio. + Je suis tres contente de ce studio.

( 선행사 un studio는 'de'에 의해 형용사 contente로 유도되므로)→ J'ai trouve un studio dont je suis tres contente. 나는 매우 만족스러운 원룸을 찾았다.

 

Elle a une fille. + Elle est tres fiere de sa fille. ( fiere de에서 de를 없애고 dont를 사용)

→ Elle a une fille dont elle est tres fiere. 그녀는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딸이 하나 있다.

 

 

다음 문장은 de 앞에 명사가 있으므로 '명사의 보어'를 유도하는 상황이다 (영어의 소유격 관계대명사 whose와 유사함):

Tu dois lire ce roman. + L'auteur de ce roman a recu le prix Nobel.

ce roman을 선행사로 두고 'de ce roman'은 dont이 되므로)

→ Tu dois lire ce roman dont l'auteur a recu le prix Nobel. 너는 노벨상을 받은 작가의 이 소설을 읽어야 해.

 

Voici ma copine.+ L e pere de ma copine est vacat.

(ma copine은 선행사, de ma copine을 dont으로)

→C'est ma copine dont le pere est avocat.

 

 

3. '어디'를 뜻하는 의문사 ou는 장소와 시간을 나타내는 관계대명사로 쓰인다.

영어에서는 장소와 시간의 관계사를 '관계 부사'로 부르지만, 프랑스어에서는 그냥 관계대명사.

영어에서는 장소의 관계사는 where, 시간의 관계사는 when으로 구분하지만 프랑스어에는 구분 없이 오직 ou.

(즉, quand은 관계사로 쓰이지 않는다)

 

 

선행사가 시간인 경우:

L e lundi est un jour.+ Beaucoup de magasins sont fermes le lundi.

→Le lundi est un jour ou beacoup de magasins sont fermes. 월요일은 많은 상점들이 문을 닫는 요일이다.

 

 

선행사가 장소인 경우:

Son appartement a une terrasse. + Il a installe une table de ping-pong sur la terresse.

→Son appartement a une terrasse ou il a installe une table de ping-pong. 그의 아파트에는 테라스가 있는데 거기에 그들은 탁구대를 설치했다.

(문장에 따라서 해석은 영어의 '계속적 용법의 관계사'처럼. 즉, 앞 문장을 해석한 후 ou를 '거기에' 또는 ' 그때에'라고 해석하면서 뒤 문장을 이어간다)

 

 

 

관계대명사를 단순 명료하게 가르쳐주는 나의 친절한 문법 교재는 더 나아가, 연습문제도 제공한다 (정답도 알려줌)

 




 

 

 

단숨에 척척... 연습문제에서 모르는 단어 거의 없이 답도 한 번에 쓱쓱... 백 점!

물론, 중급보다는 초급에 좀 더 가까운 이 문법 교재의 예문과 카뮈의 문장은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문장이 어렵고 내용이 추상적, 철학적이 된다 하더라도 문법이 변하는 것은 아닐 터.

한글판을 옆에 두고 카뮈의 서문을 짚어나가노라면 que, qui, dont, ou 모두 눈에 쏙쏙 들어온다. 선행사와 각 관계사의 뒤 문장을 연결하면 긴 문장도 읽히고 이해도 된다. 아름다운 카뮈의 문장과 이 아름다움을 극대화해주는 김화영의 아름다운 한국어, 프랑스어에의 흥미, 알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활용하며 익혀가는 성실함. 프랑스어를 잘 하고 카뮈를, 그르니에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는 방법이다. 실천하자!

 

 

 

장 그르니에의 『섬 Les Iles 』에 앞서 알베르 카뮈가 쓴 서문 중, 관계대명사 que qui dont ou가 들어 있는 몇몇 문장들을 적어 본다:

(유감스럽게도, 예스 24의 글쓰기에는a, e,u 등의 철자 위에 찍히는 프랑스어의 악센트 표시가 잡히지 않는다. )

 

J'avais vingt ans lorsqu'a Alger je lus ce livre pour la premiere fois. L'ebranlement que j'en recus, i'influence qu'il exerca sur moi, et sur beaucoup de mes amis, je ne peux mieux les comparer qu'au choc provoque sur toute une generation par Les Nourritures terrestres. Mais la revelation que nous apportait Les Iles etait d'un autre ordre.

 

 

La mer, la lumiere, les visages, dont une sorte d'invisible barriere soudain nous separait, s'eloignerent de nous, sans cesser de nous fasciner.

Celui qui, entre une terre ingrate et un ciel sombre, besogne durement, peut rever d'une autre terre ou le ciel et la lumiere et les collines comblent a toute heure du jour, ils n'esperent plus.

 

 

Il me semblait que j'entrais dans une terre nouvelle, que m'etait ouvert enfin un de ces jardins clutures de hauts murs que je longeais souvent, sur les hauteurs de ma ville, dont je ne saisissais, qu'un parfum de chevrefeuille invisible, et dont ma pauvrete revait.

 

 

A l'epoque ou je decouvrais Les Iles, je voulais ecrire, je do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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