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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의 역사가 가르쳐 주는 것]-프랭크 스노든 | 일기 2020-09-2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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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173호(2020년 7-8월호)에 실린 글-


역병이 창궐한지 한해가 다 되어가고 있다. 이 역병은 사회에서 가장 약한 연결고리부터 공격하기 시작하여 수백 년 이어오던 인간의 문화들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있다. 이러한 미증유의 거대 위기에 개인이 대응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 손을 자주 씻고 언제나 마스크를 쓰고 사는 것 이외에는 자연히 바이러스 전파세가 잠잠해지길 기도할 뿐이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아 그 역할이 점점 축소되던 국민국가의 역할이 이러한 바이러스 대응에 있어 아주 중요해졌다. 미국에서도 있었듯이 이런 대규모 역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의 정책 수립과 그 정책의 일사불란한 이행이 중요한데, 미국의 경우에서 보듯 이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이 글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연스레 나올 수 있는 우려를 '역병이 권위주의를 정당화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시작한다. 저자는 코로나에 앞서 유행했던 역병과 대응 사례를 들면서 역병이 반드시 권위주의 정권을 탄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적 정권이 역병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티에서 역병으로 인구가 줄어 결과적으로 노예 해방을 불러온 것과 같은 사례에서 그 반례를 찾을 수 있다. 오히려 권위주의적 통제가 역병 대응에 민주주의보다 낫다는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며, 현대적 공중 보건은 자유로운 정보 유통에 의존하므로 역병의 극복을 위해서는 오히려 민주주의가 더 나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위기 극복에 독재가 필수불가결한 것이 아니라며 한국의 사례를 들고 있는 것이다. 


역병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무한한 성장과 발전에 대한 그릇된 믿음, 동물의 몸에서 인간의 몸으로 옮아 온 병원체, 항공 운송으로 연결된 거대 도시들은 역병을 국한된 지역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 문제로 확대시켰다. 여기에다 만연된 범지구적 불평등은-개도국에서의 창궐은 터지면 대응 자원이 부족하므로 대응할 수조차 없다-역병 퇴치에 대한 희망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역설적으로, 코로나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이라고 쓰고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데 적응했다고 읽어야 할 것 같다)된 것처럼 보이는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병원체의 변종은 반드시 재출현하므로 우리는 매우 취약함을 깨닫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인식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무료로 의료 혜택을 받도록 해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또 그것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어야 하는 이유는 앞서 말했듯 역병의 창궐이 이제는 한 지역,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과제는 그런 체제가 가능하게 하려면 다시 경제의 문제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 역시 바꾸어야만 한다. 항구적 성장 비전에 대한 집착을 버리기, 환경 문제를 고려하기이다. 그래서, 당국의 방역 체제에 협조하지 않는 것은 전세계를 향한 테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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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재정론은 틀렸다] - 홍기빈 | 일기 2020-09-1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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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173호(2020년 7-8월호)에 실린 글-


균형재정론은 지출과 세수를 일치시키고자 하는 재정 운영을 일컫는데, 이 글은 이와 같은 주장을 펼치는 현대화폐이론 학파에 대한 반론의 글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정부의 지출에 제한을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른바 양적 완화에 대해 기존 언론과 학계의 비판적 입장은 근거가 박약하며, 오히려 경기등락으로 인한 충격 완화를 위해 더욱 적극적으로 공적 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화폐는 국가가 세금 징수를 위해 찍어낸 증서와 같은 것이므로 얼마든지 지출을 늘려도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다. 국가의 부채란 가정의 그것과는 달리 각종 금융 자산 창출 시스템 가동의 원천이기 때문에 마이너스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민간 금융 자산 총량 증가를 위해서라도 오히려 국가에서 더 적극적으로 부채를 발행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므로 1년 단위의 수지를 맞추기 위한 기능적 재정 운용에서 벗어나, 초점을 민간 부문 투자 및 고용상태의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이때 세금을 징수하는 원칙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것에 대해서는 감세를, 그에 반대되는 것-과도한 사치와 음주, 탄소 대량 발생 등-에 대해서는 증세를 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이러한 부채 발행과 징세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완전 고용'이며 최종 고용주는 정부가 되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30~40조를 들여 코로나19, 4차 산업혁명 등으로 야기되는 노동시장 붕괴에 대응하고자 하고 있다는 사례를 덧붙였다.

 그렇다면 정부는 어떤 형태로 이들을 고용해야 하는지, 계약의 형태는 어떠할지, 적정 예산은 어느 정도일지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문다. 지나친 낙관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오히려 주권국가 말고는 대규모 실업과 전지구적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주체도 방법도 달리 없다는 생각에 이러한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할 바이다. 경제학에 문외한이라 글 속 내용을 백 퍼센트 이해하는 것도 어렵지만 결국 코로나 시대 이후 사회 대응에 대한 근본적인 대안을 모색한다는 취지는 공감할 수 있다.




균형재정론은 틀렸다

L.랜덜 레이 저/홍기빈 역
책담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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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뉴딜과 자본주의](강수돌)를 읽으면서 | 일기 2020-09-17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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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평론> 173호(2020년 7-8월호)에 실린 글-


속물적인 세상이 멈춰야 원초적 생명이 살아난다는 것을 코로나 사태를 통해 사람들은 목격했다. 코로나 시대 다음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 정부는 '한국형 뉴딜'을 제시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존 자본의 해결 방식대로 기업과 고용에 대한 이야기만 있지 '뉴'도 '그린'도 없다. 민주화, 경제위기, 코로나 극복의 담론은 모두 자본에 종속되어 왔고, 지금도 그러하다. 우리가 '돌아가고자'하는 코로나 이전의 사회는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의 굴레다. 코로나의 대규모 확산 역시 자본주의의 극단과 궤를 함께하므로 진정한 코로나 사태의 해결은 탈자본에서 그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위해 약탈적 경제 시스템을 탈피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 사회, 시스템의 변화와 실천이 필요하다. 결국 그것은 '사회 구성원들이 그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자본의 파괴성과 그에 대한 공범관계로서의 노동에 대한 자기 성찰이 전제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상품, 화계, 노동, 자본, 기술, 시장에 의존하지 않는 삶의 양식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와 관련하여 내가 요즘 늘 마음에 품고 있는 질문이 있다. 아이들을 데리고 마트나 상점에 갈 때면 이 어마어마한 물자들이 과연 어디에서 오고 어디로 가며 어떻게 버려지는 것인가를 생각한다. 두렵다. 우리가 끊임없이 찍어내고 소비하는 것들이 과연 얼마나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며 과연, 얼마나 이러한 생활 양식이 지속될 수 있을까. 그리고 언젠간 소진될 자원 환경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삶의 양식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며 그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지에 대한 고민이 때때로 찾아들어 가슴을 무겁게 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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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677호를 읽으며 | 일기 2020-09-16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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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공의 파업 사태를 보면서

의사들의 파업은 여러 가지 질문을 남겼다. 파업은 노동자들의 정당한 권리 실현 수단이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공백은 누군가 메워주거나 그럴 수 없다면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의사'들의 파업은 일반 시민들이 출근할 때 지옥철을 감수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응급실이 운영되지 않아 치료를 받지 못한 중증 응급환자들이 발을 동동 굴렀고 심지어 경산에서는 코로나 감염자가 아닌 응급 환자였던 고등학생 한 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더구나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지구를 휩쓸고 있는 지금이 과연 적절한 파업 시기였는지, 그것을 뛰어넘을 만한 명분이 그들에게 있었는지가 첫 번째 의문이다. 


두 번째 의문. 수련을 받는 동안 집에 가기는 커녕 하루에 잠도 몇 시간 못 자는 생활을 몇 년 동안이나 하다가 몇 번 도망도 가고 한다는 말들이 무용담처럼 반복 재생산되는 의료 환경에서 의사의 수를 늘리겠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의사의 소득은 얼마여야 정당한가>라는 기사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전공의는 우선 우리나라가 국민 1인당 의사 수가 많고 의료 접근성이 높다는 주장은 틀렸다고 말한다. 위의 주장은 서울을 비롯한 일부 수도권 지역에 국한된 것이고,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경미한 질환 말고 중증 응급환자의 의료 접근성이 낮다는 점과 살릴 수 있는 응급환자의 사망률이 높아지는 

점을 그 반례로 든다. 

그러나 정부에서 주장하는 안은 단순히 의사의 수만 늘릴 뿐, 지방에서 의무복무기간을 마친 후 의사로서의 커리어를 쌓을 수 있는 기회, 의술을 펼칠 수 있는 인프라 등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결국 그 의사들이 다시 수도권으로 몰리는 악순환을 막을 수 없으리라고도 예언한다. 


즉, '의료 공공성'의 강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해결의 출발점에서 정부와 의사들의 입장이 갈리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오락가락하는 온라인, 오프라인 교육 환경 속에서 당장 다음주 학교 운영에 대한 지침을 교육청 공문 대신 네이버에서 먼저 확인하는 거대 관료조직의 황망함을 익히 경험해 본 바로는 이 중요한 공공의료 정책을 실시하는데 충분한 사전 검토와 대화가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원점 재검토하겠다는 협의점을 일단 도출했지만, 공공 의료에 대한 필요성을 코로나가 일깨워준 지금이 고령화 사회와 대규모 감염병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제도 개선의 적기임을 함께 공감하고 노력해주기를 바란다. 


2.

공매도, 사모펀드, 전국민 사회보험

코로나는 그야말로 약 2세기쯤 지속적으로 가속화되던 자본주의의 폭주를 잠시나마 멈춘 브레이크와 같은 역할을 했다. 환경과 사회를 되돌아볼 위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이 기회를 자본 증식의 기회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 영혼까지 끌어모아 주식을 산다는 이들도 있는데, 나는 이번달 월급이 얼마나 나왔는지도 모르고 그냥 마누라님께서 주시는 용돈 15만원으로 책 사보고 간식 사먹고 찾아오는 옛 제자들 밥 사주는 데 다 쓴다. 그나마 이런 경제 기사를 읽으면서 적어도 내가 참 무지하구나라는 생각은 주기적으로 하고 산다. 사모펀드를 운용해 세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펀드매니저들이 벌어들인 금액이 우리 돈으로 수천억에 달한다고 한다. 어차피 그 돈 다 쓰지도 못하고 저 세상 갈 영감들이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은 1도 없다. 하지만 그것들이 누군가의 삶을 일으킬 수도(사모펀드가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고용을 창출한 긍정적인 사례도 많다), 짓밟을 수도 있다는 점을 수시로 느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3.

교육의 결정적 시기

(김영훈 가톨릭대 의대교수) 학습, 독서, 외국어 같은 것은 시기가 따로 없다. 처음 노출되는 시기보다 노출되는 시간의 길이가 중요하다. 모국어에 최소한 5000시간 이상 노출된 후 모국어로 만들어진 센스나 시냅스, 사고력을 가지고 외국어를 습득하는 게 효율적이다. 

- 유아 성장과 발달의 '결정적 시기'라는 데는 반론이 많다. 그래, 인간이 그 시기를 극복할 수 없다면 사실상 인생이 어린 시절에 다 결정되어 버린다는 이야기다. 일생을 개척해 나간 모든 이의 이야기를 뻥으로 만드는 일이다. 영유아 발달은 오감 자극보다도 부모의 스킨십이 더욱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아이의 지금 이떄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진짜 결정적 시기는 그 때다.


4.

잡다한 생각

- 여기 기사쓰는 사람들 외국 소식 인용을 많이 하는데, 정치고 경제고 환경이고 이제는 국내의 소식만을 갖고 얘기하는 시대가 아니다. 그런데 나는 간단한 회화도 잘 못하니 영어 읽기라도 좀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싶어 무섭다. 야나두라도 좀 해볼까. 

- 기후변화도 경제학적으로 접근이 가능하다. 현재의 기후변화를 초래한 것이 인간적인 요인이 95% 이상일 거라고 과학자들이 말하니 말이다. 탄소 배출에 적정한 가격을 매기고, 에너지 효율을 높이고 재생에너지를 촉진하는 기술에 투자하고, 온실기체를 줄이는 정책을 개선하는 방법이 있다. 또, 세계 GDP의 1%를 거기에 투자하면 투자금보다 훨씬 더 큰 이익을 거둘 수 있으리라고도 한다. 

- 미중관계에도 보이지 않는 경제적인 영향이 있단다. 지금은 은퇴해 2선으로 물러난 장쩌민 계열 상하이방 세력 원로들이 해외로 빼돌려 조성한 재산이 10조 달러, 그러니까 우리 돈으로 1경이라는 생소한(천문학적인 것도 아님) 금액이라고 한다. 현금 뿐만 아니라 운영하는 회사들도 있는데 트럼프가 여기에 25% 이상의 무거운 관세를 때렸고, 상하이방 원로들이 시진핑 주석에게 압력을 넣어서 미중 무역 관계를 유연하게 만들도록 했다는 동화(?)같은 이야기. 역시 중국은 스케일이 크고, 부정부패는 여전하다. 인민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걸 2020년에도 보여주는 중국의 클라스.

- 우리는 매일같이 생의 마지막일지 모르는 풍경들과 마주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잔잔한 기쁨들을 추억한다.(2019.10.31. 전소된 오키나와 슈리성의 사진을 보며)

- "방향을 잃은 성실함은 미련함일 뿐이고 남에게 베풀지 못하는 미덕은 악덕으로 쉽게 변한다.(이옥순, <무굴 황제> / 아우랑제브 황제의 일생을 통한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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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에게 | 이책 저책 기웃기웃 2020-09-15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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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혜석의 말

나혜석 저/조일동 편
이다북스 | 2020년 0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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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고3 아이들 수업 시간에 자유주제 발표를 돌아가며 시켰다. 그때 한 아이가 무려 '나혜석'의 일생과 가치관에 대해 발표를 하는 거였다. 김소월 한용운도 잘 모르는 요즘 아이들인데 무려 나혜석이라니. 문화 컨텐츠 생산에 관심이 있는 친구라 우리 문학에도 관심이 많은데 그 중에서도 시대를 앞서간 주체적 여성이었던 나혜석이 멋있어 보였던가보다. 국어선생이지만 나혜석에 대해선 이름과 직업 정도만 알 뿐 구체적인 것들은 몰랐으니 자세를 가다듬고 발표를 듣게 됐다. 지금 자신이 아는 것과 품고 있는 포부에 비해 말과 글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는 발표였지만 백년 전에 있었던 한 여성의 분투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하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존재조차 잊고 있던 나혜석이라는 문인에 대해 관심이 조금 생기려는 찰나 마침 리뷰어클럽에서 나혜석의 말을 모은 책 서평단을 모집한다니, 이것은 운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위와 같은 사연을 적어 응모했고 서평단으로 뽑혔다. 후딱 읽고 그 발표한 친구에게 선물을 할 요량이다. 

<나혜석의 말>은 제목 그대로 나혜석이 각종 매체에 기고한 글과 인터뷰를 모은 선집이다. 1920년대의 말글투라 가독성은 좀 떨어지지만 억압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당당히 맞서는 그녀의 용기는 생생하게 느껴진다. 
"우리나라 여성 중 최초의 서양화가였던 나혜석.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으며, 일본에서 서양 유화를 배웠고 국내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미술계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재능은 그림에만 머물지 않았다. 1918년에 조혼과 가부장제 등 여성에게 불리한 관습을 비판한 소설 <경희>를 발표하며 작가로서도 남다른 재능을 키웠다."(머리말)
나혜석은 1910년~1920년대에 이미 유화 작가로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고 소설과 시도 썼다. 그 당시 이광수, 최남선과 같은 많은 선각자들이 그러했듯 다양한 예술 분야에 두루 재능을 보였다. 게다가 일본 유학 시절 유학생 매체에 기고한 글들을 보고 나이를 역산해 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불과 열아홉, 스물의 나이에 우리나라 문화의 잘못된 점을 평가하고 그 안에서 여성의 바람직한 역할을 성찰하고 인습을 거부하는 글을 쓴 것을 보면 시대를 잘못 타고난 천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드는 것이다. 
"조선 일반 인심은 과도기인만큼 탁 터 나가지를 못하면서 내심으로는 그런 것을 요구합니다. 경제에 얽매여 움치고 뛸 수 없으니 지글지글 끓는 감정을 풀 곳이 없다가 누가 앞을 서는 사람이 있으면 옳고 그름을 막론하고 비난하며, 그들에게 확실한 인생관이 없으니 사물에 해결이 없으며, 동정과 이해가 없이 형세 닿는 대로 이리 헤매고 저리 헤매게 됩니다. (중략) 구미 각국에서는 남다르게 행동하는 자를 유행을 삼아 그것을 장려하고 그것을 인재라 하며 그것을 천재라 하지 않는가. 조선은 어떠한가? 조금만 변한 행동을 하면 곧 말살시켜 재기하지 못하게 하나니"(p196)

그러나 그에 대한 세간의 관심은 그의 작품과 역량 자체에 대한 평가보다는 '여자가?'라는 호기심, 가정을 저버리고 간통에 빠진 이혼녀에 대한 비아냥과 때로는 비난, 저주로까지 이어졌다. 결혼 조건으로까지 걸었던 그림 그리는 일도 '집안일을 한 후에야' 가능했다. 사회적으로 명망있는 나혜석과 같은 여성에게조차, 똑같이 외도를 했음에도 자신만이 가정과 자녀에 대한 직분을 충실히 하지 않은 부도덕한 여성으로 매도당하는 모습을 보며 가부장적인 가치관이 얼마나 수많은 이름없는 여성들의 삶을 짓눌러왔는지 숙연해진다. 하지만 나혜석은 거기에 지지 않았다. 당당하게 이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매체에 발표(이혼고백서)하고, 남편에게 위자료를 청구한다. 
그가 말한 결혼의 조건은 결혼을 할 때 사랑만큼이나 물질적인 결합을 중요시하는 요즘의 사람들에게도 경종을 울릴만큼 진보적이다. 

"일생을 두고 지금과 같이 나를 사랑해 주시오.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마시오.
  시어머니와 전실 딸과는 별거하게 해 주시오."(p144)

이러한 의식을 바탕으로 이혼은 죄가 아니며, 또한 여성은 남성의 '인형'이 아니라고 세상에 외친다. 비록, 이혼 후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며 가족들과도 연이 끊긴 채 결국 행려병자로 삶을 마치게 되었지만 그의 목소리가 아직 살아있는 것은 그의 가치관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주장했던 것들이 2020년 현재에도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다. 

<모(母)된 감상기>를 통해서는 예나 지금이나 아이를 낳아 키우는 것의 어려움에 공감할 수 있다. 요즘이야 육아는 남편이 '돕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고 있지만 나혜석의 시대에는 언감생심이다. 뱃속에 아이가 있는데도 시댁 식구들을 모두 건사해야 함은 물론, 남편의 친구, 집안일, 생계까지도 모두 신경써야 하는 상황임에도 (이 글에서)남편의 역할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푹 자지도 못하지만 그나마 잠시 잠들었는데 아기가 울어서 깨고 곧장 젖을 물리고. 다시 잠이 들기는커녕 살림, 반찬, 남편 걱정, 빨기도 전에 쏟아지는 기저귀 빨래...... 소녀 시절의 꿈을 잃어가는 대신 아이가 자라나도록 기르는 시간을 견디면서 '모성애'란 여성이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지는' 것이라고, '자연성'이 아니라 '단련성'이라고 솔직히 밝히는 모습에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서 깊이 공감한다. 

시대를 너무 앞선 사상 때문에 개인으로서의 삶은 불행했지만 백년이 넘게 지나서도 그 이름이 회자되는 역설적인 영예를 누린 한 인간의 일생과 가치관을 이 책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남녀의 평등 실현을 상대방 성(性)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주체적 인식, 당당하게 그것을 펼치고 실천하는 용기에서 찾는 롤모델을 찾고 싶은 소녀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YES24 리뷰어클럽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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