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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 한승혜 | 취미생활 2023-02-28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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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한승혜 저
바틀비 | 2020년 0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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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베스트셀러만 읽는 사람? 아니면 베스트셀러는 아예 안 읽는 사람?
나는 후자였다가 전자로 돌아섰다. 반골 기질이 다분한 성정 탓인지, 어렸을 때 청개구리를 잡아먹은 탓인지(사실은 황소개구리였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들을 멀리하고, 유행에는 늘 뒤처진 채 다수보다는 소수를 선택한다. 그래서 안 본 사람이 없다는 유명한 천만 영화도 차일피일 미루다 안 본 게 더 많고, 베스트셀러도 당연하게 안 읽었다.
그랬던 과거를 뒤로하고 요즘은 베스트셀러를 자주 읽는다. 무슨 심경의 변화인가 싶겠지만 그저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이 궁금해졌을 뿐이다. 사람들이 어떤 정보를 얻어 가는지, 작가와 독자 사이에 어떤 생각과 감정이 공유되는지 알고 싶었다. 친구들이 나 빼고 놀까 봐 엉덩이를 들썩이는 아이처럼 그렇게 베스트셀러 코너를 기웃거린다.

그렇다면 베스트셀러는 다 좋은 책일까?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는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다. 저자가 선정한 베스트셀러는 이제 책에 관심을 좀 가져볼까하는 초심자들도 어디선가 조금씩은 들어봤을 법한 책들이다.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자기계발서 [미움받을 용기], 잠깐 각광받았다가 한순간에 스러져간 힐링 책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와 혜민스님의 [고요할수록 밝아지는 것들], 대중성 있는 스토리를 가진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 등 총 28권의 베스트셀러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집이다. '정말 좋은 책인지 아닌지 먼저 읽어볼 테니 여러분들이 보고 판단하세요. 여러분들의 시간과 돈을 절약해 드리겠습니다'를 모토로 저자의 생각을 진솔하게 서술한다. 

그중에서도 한때 대한민국을 남녀 갈등으로 들썩이게 만든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남성들의 비판 논리는 이 책이 여성만 피해자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 여성들이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징징대고 있다는 점, 여성만큼이나 남성도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점, 남자를 싸잡아 비판하는 건 부당하다는 점 등이다. 남성들의 입장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문학 작품의 효용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문학 작품은 누군가 직접 겪지 못한 것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지 '고통 올림픽'을 위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전쟁이나 가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우리나라도 전쟁했는데? 내가 더 가난한데? 내가 더 못 살고 못 먹고 더 힘들게 살았는데?'와 같은 태도는 적절하지 않다.)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그들이 어떤 고민을 하는지를 전달하기 위해 쓰인 책이지 남성을 공격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그저 이야기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이다. 이렇듯 저자의 말에 맞장구치며 읽는 맛이 있어 베스트셀러를 읽어본 사람에게도, 아직 읽을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이 책을 추천한다. 

누구나 초보에서 시작한다. 독서 초보는 좋은 책을 고르는 눈이 없기 때문에 더욱더 베스트셀러 코너를 자주 살핀다. 만 오천 원 남짓의 돈을 책에 투자하기로 결심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골라야 하는지 모른다. 적절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고민하다가 결국 삼X전자에 올인하는 초보 개미투자자처럼 초보 독서가들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흘러가 홀린 듯 베스트셀러를 집어 든다. 그렇지만 그 책이 정말 진실로 좋은 책인지는 알 수 없다. 첫 책에 실망해 독서를 포기하는 길로 갈 것인지, 독서에 흥미를 붙여 독서가의 길로 갈 것인지가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만 읽는 사람, 혹은 베스트셀러라고 하면 덮어놓고 수준 이하로 취급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기회가 될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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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시장 - 김성중 | 취미생활 2023-01-31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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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국경시장

김성중 저
문학동네 | 2015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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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거대한 욕망의 세계
꿈인 듯 현실인 듯, 거부할 수 없는 환상의 문이 열린다


꿈인 듯 현실인 듯 몽환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의 단편 소설 모음집이다. 사실 굉장히 어려웠다. 글 자체가 어려웠다기보다는 여기에 숨겨진 의미들을 파악하는 게 어려웠다. 주인공이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절정으로 치닫는 찰나에 나타나는 환상 같은 장면들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 하고 혼란스러워했다. 그렇지만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는 강지희 문학평론가의 해설과 나의 생각을 비교해 보며 읽어보자. 이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하는 큰 깨달음과 함께 내 해석도 일리가 있구나 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읽는 재미가 있다.

이 책에는 기억과 맞바꾼 물고기 비늘이 화폐인 [국경시장], 쿠문이라고 불리는 천재병에 걸릴 기회가 주어진다면 짧고 고통스러운 천재의 삶과 이전의 평범한 삶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질문을 던지는 [쿠문], 극도로 수동적인 인생을 살다 곰 모양 유리병으로 변해버린 남자 [관념 잼],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암컷 킹코브라 이야기 [동족], 그리고 곡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다 모두 죽어버리고 마는 [필멸] 등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있다.

이 단편들을 모두 한 데 엮는 키워드는 바로 '욕망'이다. 인생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인물들의 욕망은 누군가에게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무절제한 소비의 쾌락으로,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질투 속에서 살게 한 천재성에 대한 갈망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살해를 할 만큼의 예술에 대한 집착과 열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이 더 이상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제자리를 찾고 싶은 마음을 사물에 그대로 투영하여 모든 사물이 제자리에 있기를 바라는 강박이, 인간의 말을 알아듣게 되자 인간과 소통하고 인간과 같은 육체가 되기를 원하는 소망이 욕망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욕망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바라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 소설 속 인물들의 욕망은 비극적인 결말을 불러왔을까. 

그것은 욕망 중독 때문이 아닐까.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만큼 욕망에 중독되어 머릿속이 온통 그것으로 가득 차버린 채로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만 좇기에 급급한, 그것을 제외하면 삶이 무채색으로 변해버려 정상적인 사고방식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도 충분히 욕망에 빠질 수 있다. 욕망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삶이 무가치해지는 순간 우리도 똑같이 파멸을 맞이할 것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내 삶이 욕망에 잡아먹히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해 본다. 욕망이 인생의 한 부분을 차지할 순 있어도, 욕망 자체가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말이다.

 


몇 편만 간단히 소개하겠다.
국경시장 : P국에 위치한 한국 영사관 직원 조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밀입국자가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는다. 반미치광이 상태로 발견된 이 밀입국자는 있지도 않는 국경시장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의 온전치 못한 기억 속에 존재하는 국경시장은 보름달이 뜰 때마다 서는 야시장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현실 세계의 돈이 사용되지 않는다. 화폐는 오로지 사람의 기억과 맞바꾼 물고기 비늘. 존재조차 모르던 기억, 쓸모없다고 생각한 기억, 너무 끔찍해 지우고 싶던 기억들을 대가로 교환을 하고는 순식간에 흥청망청 써버리고 마는데. 사람들은 쓰면 쓸수록 더 많은 물고기 비늘을 갈구하며 교환소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쿠문 : '나'는 수학과 교수다. 그리고 동생의 천재성을 질투한다.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요양원 생활을 하는 동생의 논문을 훔쳐 내 것인 양 발표하기도 했다. 어느 날 신입생 '류'에게서 천재성을 발견하고는 갈 곳 없는 류를 거둔다. 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기 재능에 집중하기를 바랐건만, 류는 오히려 방에 틀어박혀서는 은둔 생활을 한다. 자신의 천재성에 무관심한 류에 안달 난 나는 외출한 류를 미행을 하는데. 류가 요즘 유행한다는 천재병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의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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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살 끝자락에 다시 읽는 아홉살 인생 | 취미생활 2022-12-30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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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아홉살 인생

위기철 저
청년사 | 2010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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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서울의 한 산동네. 아홉 살인 '나' 백여민은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이 산동네로 이사를 왔다. 제일 높이 산꼭대기에 위치한 끝집이긴 하지만 '우리 집'이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기쁘기만 하다. 여민은 이 산동네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가난과 차별, 부조리, 설움 그리고 풋풋한 첫사랑을 겪으며 인생을 배워간다.

아홉살 인생. 대한민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대부분 알만한 소설이다. 2003년 MBC '느낌표' 프로그램의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후로는 청소년 권장도서로 아직까지도 스테디셀러로 이름을 올리는 책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이 무려 93쇄 판이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는지 알만 하다.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가 아홉 살 때였다. 아홉 살에 읽는 아홉살 인생. 동갑내기 주인공이라고 만만하게 덤볐다가 큰코다쳤다. 아홉 살의 나는 이 책을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가난은 무거웠고 어른들의 속 사정은 무서웠다. 어렴풋이 기억에 남은 것이라고는 가난한 산동네 이야기였다는 것일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스물아홉 살에 다시 읽은 아홉살 인생에는 어렸을 때 보지 못한 것들이 보였다.

첫째, 6~70년대 고도성장의 그늘에 가려진 산업재해, 노동 문제들이 보였다. 여민의 아버지가 밀린 월급을 받으러 부산에 내려간 사이 어머니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무허가 잉크 공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그만 한쪽 눈을 잃고 말았다. 이 부분에서 화학 약품의 위험성이 노동자에게 제대로 고지가 되지 않았다는 점, 노동자를 보호해 줄 최소한의 장비조차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명백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이지만 안타깝게도 당시에는 관련 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경공업의 발달로 공장에서 일을 하는 여성과 아동이 많았다. 부모님 없이 누나와 단둘이 사는 동네 친구 신기종은 누나가 공장에 일을 하러 갈 때면 집에 홀로 방치되기 일쑤였고, 골목대장 검은제비는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열두 살 이란 어린 나이에 돈을 벌러 공장에 들어간다. 그렇게 많은 10대 소년소녀들이 학업도 포기하고 청춘도 포기한 채 산업화라는 시대의 바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였다.

둘째, 가난과 가정폭력의 대물림 속에 누구나 검은제비가 될 수 있다. 골목대장 검은제비의 아버지는 직장에서 쫓겨난 뒤 술주정뱅이가 되었다. 술에 취해 살림살이를 깨부수고 가족들에게 손찌검을 하는 아버지를 보며 검은제비는 빨리 어른이 되어 꼭 제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말 것이라고 분노에 섞인 다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덜컥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이른 나이에 어른의 길로 들어선다.
생각해본다. 그렇게 검은제비가 아버지 나이가 될 때쯤, 아버지처럼 직장에서 쫓겨날 때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는 않았을까. 술에 취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몹쓸 세상이라고 한탄하지만 사실은 모든 건 무능한 자신 탓이라고 여기던, 슬픔과 외로움과 가난과 불행의 정체를 알아보려 하지도 않은 채 제 피붙이와 제 자신의 가슴엔 쉽사리 칼질을 해대던, 그런 아버지가 어느새 자신이 되어있음을 알아차리지는 않았을까.
검은제비의 굴레, 가난과 가정폭력의 대물림. 사실 검은제비는 검은제비의 아버지일 수도, 검은제비일 수도, 검은제비의 아들일 수도, 아니면 죽도록 증오하는 아버지를 둔 이 세상의 모든 자식들일 수도 있다.

셋째, 청년 문제의 상징 골방철학자. 힘들게 대학을 졸업한 후 시험공부를 몇 년째 한다는 골방철학자. 꿈은 창대하지만 현실은 비루하기만 하다. 뒤에서 묵묵히 뒷바라지를 해주시는 늙은 어머니의 기대가 버겁고, 일도 안 하고 집에서 시간만 축내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라 손가락질하는 동네 사람들의 시선도 이제 지긋지긋하다.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여 좋아하는 여성에게 직접 편지를 건넬 용기조차 없던 골방철학자는 끝내 사랑을 포기하고 만다. 그리곤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다 자살을 선택한다.
이런 골방철학자의 모습은 현재로 이어진다. 청년 실업, 청년 빈곤. 그 속에 연애와 결혼은 사치가 되어버렸다. 매년 급증하는 청년 고독사는 노년층과 달리 극단적 선택의 비중이 높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들이 머물렀던 원룸이나 고시원에는 공무원 수험서, 이력서들이 함께 발견된다. 지금도 취업의 문턱 앞에 골방에 고립된 청년들이 이틀에 한 명꼴로 세상을 등지고 있다.
골방철학자를 보며 현실에 맞춰 욕망을 바꾸거나, 욕망에 맞춰 현실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현실을 바꾸지 못해 현실에 맞춰 욕망을 낮추고 있는 청년들이 대다수이다. 어디까지 낮춰야 끝이 나는 것일까. 욕망의 내리막길 속에 가난과 사회적 고립, 외로움에 홀로 죽어가는 청춘들이 가장 뼈아프게 다가온다.

-


아홉, 스물아홉. 이제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모든 아홉이 그러하듯 이룩한 것 하나 없이 아홉을 보내고 강제로 새 출발선에 서 있는 지금, 기분이 몹시 헛헛하고 막막하다. 이 책을 썼던 스물아홉 살의 작가는 모든 아홉살 인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네 인생에서 어떤 출발점과 도달점에 연연해하는 것부터가 고정관념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도달점에 닿는 순간, 그건 곧 출발점이 되고 마니까. 그래서 우리네 인생은 중단 없이 쭈욱 진행되는 과정일 뿐인 것이다.'

인생은 죽는 순간까지 단절이 없다. 그저 앞으로 곧게 진행될 뿐이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많은 희로애락 중 하나만 과장해 인생의 전부인 양 착각하지 말자. 흘러가는 인생 속 작은 알갱이에 불과하니.

아홉 살에 울타리를 치지 말자. 인생은 아홉 살에서 끝난 게 아니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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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 취미생활 2022-11-30 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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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지금부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정재민 저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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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펼쳐 든 책이었는데, 저자가 참 낯이 익었다. 알쓸범잡에 나온 정재민 전 판사이자 현 법무심의관이 책의 저자이다. 알쓸범잡에서 정말 재밌게 들었던 판사 시절 에피소드들이 책에 수록되어 있길래 바로 책을 구매했다.  

제일 재밌는 에피소드는 역시 방송에서도 소개했던 희귀병에 걸린 피고인이다. 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전국에 딱 한 명 있는데, 의사가 지금 고향에 있는 시골 병원에 있어서 거기서 치료를 받느라 재판을 받을 수 없다면서 몇 년 넘게 재판을 연기했다고 한다. 이 피고인의 전과가 사기인 점을 고려하여 재판에 출석할 것을 요구했고 드디어 재판이 열렸다. 재판 당일 이 피고인은 침대에 누워 양옆에 간호사 둘과 형을 대동하고 산소호흡기를 단 채 나타났다. 재판을 받을 수 없을 만큼 아프다는, 판사를 향한 무언의 압박이었다. 하지만 간호사도 가짜였고, 형도 가짜였고, 병도 가짜였다. 종국에는 침대에서 머쓱하게 일어나서는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  

나는 가끔 판사 욕을 한다. 이실직고하자면 꽤 자주 한다. 10살짜리 손녀를 수년간 성폭행한 할아버지가 왜 징역 17년밖에 안되는지, 흉악범죄자가 왜 징역 15년밖에 안 받았으며 지금은 무슨 자격으로 국민 세금으로 잘 살고 있는지 등 우리나라 형벌이 너무 약하다며 오늘도 욕을 했다.

저 할아버지는 검사 측에서 20년을 구형했으나 초범인 점, 피고가 반성을 하고 있고 다시는 손녀에게 접근하지 않겠다고 한 점 등을 참작하여 17년이 선고됐다고 한다. 이런 뉴스를 보면 나 포함 많은 국민들이 공분에 휩싸인다. 사형 때려야지 참작은 뭔 참작?!하면서 분개한다. 이에 대한 전직 판사인 저자의 설명은 이러하다.  

우선 검사가 보는 피의자와 법정에서 판사가 만나는 피의자가 다르다. 검사 앞에서는 피도 눈물도 없는 범죄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도, 법정에서는 모든 죄를 반성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그리고 법정에서 중요하게 작용하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불리할 때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결하는 것도 그런 결과가 나타나는 데 한몫한다고 한다.  

또 판결에서 중요한 것은 '균형'이라고 한다. 검사가 대변하는 공동체의 질서와 변호인이 대변하는 개인의 자유가 균형을 이루는 지점에서 법이라는 울타리를 쳐두고 그 울타리를 넘어서는지를 판사가 판단하는 것이다. 법이 추구하는 정의의 핵심은 '형평'이다. 법 울타리를 넘어선 자를 칼로 처단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형평을 따져 개인과 개인 사이,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법질서 사이, 구체적 타당성과 법적 안정성 사이, 그리고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상도 칼이 아니라 한 손에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법전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응징보다는 형평을 위해서 말이다.    

판사는 늘 판결로써 말한다. 때문에 판사가 판결을 내릴 때 무슨 마음가짐이었고, 양형을 결정할 때는 어떠한 중압감에 시달리는지 책을 통해서 처음 듣게 되었다. 이해는 되지만 안타깝게도 판사 욕은 계속할 것 같다. 저자가 강조하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아직까지 와닿지도 않을뿐더러, 저자가 지양하는 과잉 도덕주의적 사고를 버리기에는 아직 사회 물이 덜 든 것 같다.

나는 오늘도 엄벌을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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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 취미생활 2022-10-29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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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저/송은주 역
민음사 | 2006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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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9.11으로 아빠를 잃은 아홉 살 소년 오스카 셸. 우연히 깨뜨린 파란 꽃병에서 봉투를 하나 발견한다. 블랙이라고 적힌 봉투에는 열쇠가 들어있는데. 오스카는 아빠 유품인 열쇠의 정체를 찾아 뉴욕에 있는 모든 블랙 씨를 찾아다닌다.
"안녕하세요! 블랙 씨이신가요? 혹시 우리 아빠 아세요?"



[인상 깊은 부분]
현대판 동화. 현실과 동화 사이 그 어드메.
소설 구성이 독특하다. 작가의 실험 정신이 대단한데 이 책을 담당한 출판사 입장도 궁금하다.

- 사진에 페이지를 많이 할애한다. 오스카가 할아버지의 카메라를 들고다니며 찍은 사진들이 삽입되어 있다. 책 초반에는 15페이지 가량을 연달아 사진만 등장시키는 것이 독특하다. 그리고 책장을 빠르게 넘기면 물체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플립북 효과로 마지막을 장식했다.

- 오스카가 미술용품 상점에서 볼펜 테스트 용지를 살피는 부분에서 묘사로만 끝내지 않고 직접 그 용지를 보여준다. 굉장히 아트적이다.

- 아빠의 취미는 빨간 펜으로 뉴욕타임스 오탈자 체크하기이다. 책 본문에 빨갛게 체크되어 있는 편지가 사실 할아버지가 딱 하나 부친 바로 그 편지라는 것을 암시한다. 할아버지는 온점(.) 대신 쉼표(,)를 적는 것이 습관이라 쉼표가 있는 모든 부분에 빨갛게 체크되어 있다. 이 때문에 비극의 날을 얘기하는 부분에서 독일 드레스덴에 떨어졌던 폭탄들과 휘날리던 화염처럼 보이게 하는 시각 효과를 준다.

- 편집 기술을 적극 활용했다. 할아버지는 말을 할 수가 없어 노트에 적어 대화를 하는데 그 노트를 생생하게 표현하였다. 한 페이지에 한 문장을 쓴다던가 아니면 반대로 글을 빼곡하게 편집하여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심정을 표현했다.

- 네 페이지가 번호로 가득한 부분도 인상깊다. 뉴욕에 다시 돌아온 할아버지가 공항 공중전화로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지만 말을 할 수가 없어 말 대신 번호만 하염없이 누른다. 전화 번호키를 활용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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