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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 ○ 그니 리뷰 2022-06-17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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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릉으로 가요

심재휘 저
창비 | 2022년 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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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시가 되기 전의 그저 하현일뿐입니다. 

조금 더 서쪽으로 갔습니다.

- 시인의 말 中 - 

 

[ 서울 ]

 

무엇인가 일요일인데 왠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요일이어서

아무 일도 안 할  수는 없고 무엇인가

어디론가 걷는다


 

길가에 장미가 필 유월은

나를 데리고 걷는다

장미를 보는 순간은 비행기를

볼 수가 없고 구름 위에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들으면 전화기 속의

당신을 들을 수 없어서 무엇인가 일요일인데

왠지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고

걷는다 걸으면서 눈앞의 신호등이 

서둘러 푸르게 변하기를 바라보며 나는

쓸쓸하지 않도록 걷는다

 

걷는다

걷는 동안 나는 나를 또

걷게 할 수는 없다

 


[ 행복 ]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 창문의 발견_런던 ]

                                    

다락방의 창문은 내 방에 기대어 있어서

다양한 목소리로 비가 오지

아니, 그게 아니라 온다니까 내게로

양은 컵을 두드리며

때로는 막대기로 담장을 긁으며

새로 사 신은 구두를 아껴 걸으며

나를 만나러 오지

 

하지만 비는 언제나 창문 밖에 서서

다가오는 시늉을 거느리고서

읽을 수 있도록 흐릿한 표정만 짓지

빗소리를 보내지

첫사랑을 얼굴에 쓴 듯

이별의 날을 흉내 내는 듯


비는 내게 빗소리만 보내지

그런 줄로만 알았지

 

그러나 나는 이제 창문을  말하려네

빗소리는 비가 내는 것이 아니라

창문이 내는 아픈 소리

그러니까 내 방에 기대인 창문은

내 곁의 먼 곳이었네

 


[ 고장난 센서 ]

                      

어릴 때 먹던 고향 멍게보다

서울의 멍게는 잘 생겼다

그래 봤자 멍게는 멍게지만

장을 보고 마트를 나오려는데

출입구의 도난 방지 센서가 울린다

경비가 장바구니를 열어보란다

 

영수증에 적힌 대로

멍게 두알과 소주 한병

그리고 바다 냄새 조금


 

다시 한번 센서를 지나쳐보란다

이번에는 그분이 웬일로 먹통

수산물 코너에서 준 바다 냄새야 덤이지만

고향 봄 바다를 몰래 챙겨 가려는 도둑놈 심보를 

모르는 척해주는 거겠다

 

 


[ 뜻도 모르고 읽는 책 ]

                              

처음 가보는 바닷가였는데

해변의 여관방에 자리를 깔고 누웠더니

그곳에는 어두울수록 잘 읽히는 책이 있었다

밑줄을 칠 수도 없고

귀를 접을 수도 없는

사실은 읽어도 뜻을 알 수 없는 책

 

그 옛날 고향의 순긋 해변에 가면

무허가 소줏집에 가면

레코드판을 따라 돌아가던 노래

아껴 듣던 그 노래를 생각하는 밤이었는데

노래는 시들고 소줏집은 철거되고


그러다가 몸은 누워 잠이 들었는데

뜻도 모른 채 페이지만 절로 넘어가는 책

똑같은 소리가 밤새 계속되는 것 같아도

잘 들으면 매번 다른 소리를 내어서

잠들기 전에 소리를 세는 가련한 밤이었는데

나는 그 책을

버리지 못하고 들고 온 모양이라

오늘은 그 먼 바닷가가

곁에 와 함께 눕는 밤이다

뜻도 모르고 다만

사전에도 없는 그 순긋한 소리에 빠져

뜻도 모르고

 


[ 흉한 꿈을 꾸다 깬 저녁 ]

                                         

마루에 오후의 봄볕을 깔고 그 위에 담요 한장을 더 깔고

엎드려 턱 괴고 바깥을 보면서 잠이 든 모양이다

 

흉한 꿈을 꾸다가 깨어보니 어느덧 몸이 식은 저녁

돌아가시기 전에 속이 안 좋던 아버지

식은 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 드셨다


무엇을 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해 질 녘에는

내 등을 두툼하게 덮어주다가 기울다가

인사도 없이 떠난 햇살이 너무 멀고

흉한 꿈속의 사람은 노을 진 서편처럼 붉게 피었다 진다

 

삼월의 빈집은 겨울보다 더 추운 계절

동네 아이들 노는 소리가 왁자한 저녁에

차가워진 배를 문지르면 배는 이내

뜨신 물속의 식은 밥처럼 온기가 돌고

배 속 먼 곳은 손이 닿지 않아서 여전히 차고

자다 깬 저녁은 금새 어두워진다

 

 

[ 해변의 밤 ]

 

불을 끄고 누우니

파도는 없고 소리만 있는 거야

 

자꾸만 밀어내도 

바닷가의 내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거야

파도는 없고 소리만 가득한 이불

덮고 자야 하는 거야


 

잠시 나는 잠이 들기도 하였던 모양이지

잠의 바깥에서 파도는 기다렸던 모양이지

내가 잠 깨기만을 기다렸다가 이내

너는 지금도 캄캄한 해변이라고 어렴풋하게

온몸에 스며드는 소리만 있는 거야

 

꽃이 지던 창밖의 먼 과수원도

그날의 사랑도

이제는 소리만 있는 거야

해변의 밤이야

 

그런데 해변에는 밤낮

파도가 있는 한 걸까?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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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 ○ 그니 리뷰 2022-06-03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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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

권대웅 저
문학동네 | 2017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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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여름의 눈사람들.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것들.

 

가을밤 하늘에 보이지 않는 소 한 마리가

달을 끌고 간다.

- 시인의 말 中 -

 

 

 

[ 저녁이 젖은 눈망울 같다는 생각이 들 때 ]

 


눈은 앞을 바라보기도 하지만 뒤를 볼 수도 있다

침묵이 아직 오지 않은 말을 더 빛내듯

보지 않은 풍경을 살려낼 때가 있다

눈을 감았을 때

바보의 무구한 눈망울을 보았을 때

마음의 뒤란에 가꾸고 있는 것이 많을 때

뒤를 만지듯

얕은 것보다 깊은 것들을 살려내는 눈

 

황소의 젖은 눈처럼 저녁이 온다

꿈벅거리는 큰 눈 속으로 땅거미가 진다

땅속이 환해서 뿌리가 자란다

 

 


[ 땅거미가 질 무렵 ]

 

어둑어둑해지는 저녁 길을 걷다보면

풍경 속에 또 다른 풍경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언젠가 만난 것만 같은

어스름녘

젖은 하늘의 눈망울

물끄러미 등 뒤에 서서

기억나지 않는 어젯밤의 꿈과


까마득하게 잊었던 시간들

생각날 듯 달아나버리는 생의 비밀들이

그림자에 어른거리다 사라진다

잡히지 않으며 존재하는 것

만져지지 않으며 살고 있는 것들이

불쑥불쑥 잘못 튀어나왔다가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시간

그 밝음과 어둠이 섞이는 삼투압 때문에

뼈가 쑤시는

땅거미가 질 무렵

 

[ 당신이 다시 오시는 밤 ]

                                      

누가 환생을 하는가보다

봄밤 달에서 떨어지는 꽃향기가

제삿날 피우는 향처럼 가득하다

목이 멘다

내가 알았던 생이었나보다

기우뚱 떠오르려다

사라지는 나뭇가지 위

달이 밀어내는 꽃봉오리가 뜨겁다

이 밤에 당신 무엇으로 오시는가

목이 꺾이도록 달을 바라보다가

저 달 속에 그만 풍덩 몸을 던져

당신이 오고 있는 길

그 생 쫓아 다시 오고 싶다

 


[ 설국(雪國) ]

                    

눈이 내린다

누군가 지상에 살며 저녁마다 켰던

등불이 내린다

어느 목련꽃 속을 지나왔을까

환하다

그 고요한 흰 미소 너머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설국

지붕마다 열 뼘 두께 눈이 쌓이고

며칠째 발이 묶인 주점 등불 아래

누군가 술을 마신다

맑은 술잔에 담긴 설원(雪原)속으로


기차가 달린다

멀어져가는 불빛 한 점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밤의 긴 머리카락

하얗게 사랑해 하얗게

적멸이 되어 돌아오는 말과

꽃봉오리 속에 같혀 지샌

눈의 날들

너무 환해 기억이 나지 않아

밤에도 하얬다

 

 

[ 허공 속 풍경 ]

 
                                    

처마밑으로 제비들이 분주히 드나들던 집

허리둘레가 넓은 어머니처럼 든든해 보이던

장독 항아리들과 병정 같은 펌프

우뚝 서 있던 마당

툇마루에 모이던 햇빛이 담장을 넘어

지붕 위로 올라갈 때마다 할머니는 아깝다며

소쿠리에 말릴 나물들을 더 얹었다

햇빛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남은 생이 아까웠던 할머니

온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반지르르 닦아놓은 경대 위로

세월이 비껴가는 줄만 알았다


돌아보면 햇빛이 거두어가버린 집

어른거리는 골목 너머 장독대 너머

할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느 허공을 살다 간 것일까

제비들이 처마밑으로 몰고 오던

씨줄의 공간 날줄의 시간들이

잡히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 있는

저 허공 속

환영(幻影)이야

 

 

 

[ 삶을 문득이라 불렀다 ]

 

지나간 그 겨울을 우두커니라고 불렀다

견뎠던 모든 것을 멍하니라고 불렀다

희끗희끗 눈 발이 어린 망아지처럼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미움에도 연민이 있는 것일까

떠나가는 길 저쪽을 물끄러미라고 불렀다


 

사랑도 너무 추우면

아무 기억이 나지 않을 때가 있다

표백된 빨래처럼 하얗게 눈이 부시고

펄렁거리고 기우뚱거릴 뿐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봄 햇빛 한줌

 

나무에 피어나는 꽃을 문득이라 불렀다

그 곁을 지나가는 바람을 정처 없이라 불렀다

떠나가고 돌아오며 존재하는 것들을

홀연 흰 목련이 피고

화들짝 개나리들이 핀다

이 세상이 너무 오래되었나보다

당신이 기억나려다가 사라진다

 

언덕에서 중얼거리며 아지랑이가 걸어나온다

땅속에 잠든 그 누군가 읽는 사연인가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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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 그니 리뷰 2022-05-18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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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류시화 저
수오서재 | 2022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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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삶이 시를 잃었을 때

그대가 기억하는 내 시 한 편이

봄을 담고 그대에게 다가가기를

- 류시화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이다


모든 꽃나무는

홀로 봄앓이하는 겨울

봉오리를 열어

자신의 봄이 되려고 하는

 

 

너의 전 생애는

안으로 꽃 피려는 노력과

바깥으로 꽃 피려는 노력

두 가지일 것이니

 

꽃이 필 때

그 꽃을 맨 먼저 보는 이는

꽃나무 자신

 

꽃샘추위에 시달린다면

너는 곧 꽃 필 것이다

 

[ 떨림 ]


 

손가락을 못에 찔리거나 칼에 베이면

그 순간 손가락의 존재를

강렬하게 느끼게 된다

마찬가지로,

존재가 깊이 상처  입어

날개가 부러지거나

심장에 금이 갈 때

너는 비로소

너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울대를 다쳐 바람으로 대신 우는 울새처럼

차갑고 고독한 행성 가장자리에서

별똥별 빗금으로

금 간 곳 꿰매며

다시 삶에 놀라워하며

 

 

[ 곁에 둔다 ]


 

봄이 오니 언 연못 녹았다는 문장보다

언 연못 녹으니 봄이 왔다는 문장을

곁에 둔다

 

절망으로 데려가는 한나절의 희망보다

희망으로 데려가는 반나절의 절망을

곁에 둔다

 

물을 마시는 사람보다 파도를 마시는 사람을

걸어온 길을 신발이 말해 주는 사람의 마음을

곁에 둔다

 

응달에 숨어 겨울을 나는 눈보다

심장이 닿아 흔적 없이 녹는 눈을

곁에 둔다

 

웃는 근육이 퇴화된 돌보다

그 돌에 부디쳐 노래하는 어린 강을 

곁에 둔다

 

가정법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보다

가진 게 희망뿐이어서 어디서든 온몸 던지는 씨앗을

곁에 둔다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곁에 둔다

 

[ 흉터의 문장 ]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 냈음

 

흉터는 말해 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 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 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


 

[ 겹쳐 읽다 ]

 

새는 어떻게 울대에 쌓인 어둠

그토록 밝게 쏟아 내며

새벽부터 노래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전생의 어둠조차

몸 안쪽에

모아 두고 있는데

 

꽃은 어떻게 가느다란 줄기에

그토록 크고 무거운 꽃송이들

보란 듯이 쳐들고 있을까

나는 작은 번뇌의 무게에도

꺽어진 월하향 꽃대처럼

횡격막에 고개 떨구는데


 

풀잎은 어떻게 야생 기러기처럼

그토록 격렬한 비바람 후에

더 생기 있게 희망의 부리를 내밀까

나는 천랑성 별 아래서

사소한 운명의 몰아침마다

기립근이 끊어지는데

 

비는 어떻게 씻김굿하듯이

그토록 사납게 퍼붓다가

한순간에 멎을 수 있을까

나는 감정의 어휘들 기억에 뒤엉켜

절망의 이편에서 희망의 저편으로 건너가는 데

일생이 걸리는데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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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헌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 ○ 그니 리뷰 2022-04-15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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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이어령 저
열림원 | 2022년 0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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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간 길을 지금 내가 간다.

그곳은 아마도 너도 나도 모르는

영혼의 길일 것이다.

- 서문 中 -

 

[ 생물 ]

 

살아서 움직이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천의 물결로 빛나는 강물이거나

천의 이파리가 흔들리는 수풀이거나


 

움직이는 것은 모두 다 아름답다

 

살어서 소리 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천의 지저귀는 새소리거나

천의 갈래로 쏟아지는 빗소리거나

 

소리 나는 것은 모두 다 즐겁다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고

그리고 이슬에 젖은 포도알을 터뜨리는 

여름 아침

 

살아서 어금니로 씹을 수 있는 것은

모두 다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다.

 

[ 말 한마디로 ]

 

추운 겨울, 새벽 길거리에서 신문을 배달하는

아이가 떨고 있었지요

 

길을 가던 여인이 물어보았지요

얼마나 추우니

 

신문 배달을 하던 아이는 대답했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추웠는데

'얼마나 추우니'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제는 춥지 않아요


 

신물을 배달하던 아이는 그렇게 말했답니다

 

작은 말 한마디가 추위를 녹이고, 세상을 바꿔요

내 아이가 추위에 떨지 않게 하는 방법은

남의 아이들에게 따뜻한 한마디 말을 하는 거예요

내 아이에게 하는 것처럼

 

작은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꿔요.

 

[ 잠은 솔솔 ]

 

사람들은

잠이 솔솔 온다고도 하고

잠이 살살 온다고도 하고

 

눈은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히 내리는데

사람들은

눈이 펑펑 내린다고도 하고

눈이 사락사락 내린다고도 하고

 

새는 아무 소리도 없이

하늘에서 날고 있는데

사람들은

새가 훨훨 난다고도 하고

새가 씽씽 난다고도 하고


 

그러나 나도 들을 수가 있어요

내가 엄마에게 뽀뽀를 할 때

엄마 가슴이 뛰는 소리를

내가 아빠에게 뽀뽀를 할 때

아빠의 가슴이 뛰는 소리를

 

잠처럼 솔솔

눈처럼 펑펑

새처럼 훨훨

가슴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가 있어요

 

[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

 

헌팅턴비치에 가면 네가 살던 집이 있을까

네가 돌아와 차고 문을 열건 소리를 들 을 수 있을까

네가 운전하며 달리던 가로수 길이 거기 있을까

네가 없어도 바다로 내려가던 하얀 언덕길이 거기 있을까

바람처럼 스쳐간 흑인 소년의 자전거 바큇살이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을까

 

헌팅턴 비치에 가면 네가 있을까

아침마다 작은 갯벌에 오던 바닷새들이 거기 있을까.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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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사람사전.. | ○ 그니 리뷰 2022-04-15 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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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사람사전

정철 저
허밍버드 | 2020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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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ㄱ..

본명은 기역. 별명은 기억.

기역은 훈민정음 시절부터 줄곧

자신이 자음의 우두머리였음을 기억하고 있다.

자음은 모음을 만나야 글자가 된다는,

의미가 된다는 세종 말씀도 잘 기억가고 있다.

그래서 홀로서기를 주저한다.

독립을 꿈꾸지 않는다.

이런 경직을 키읔이 비웃는다. ㅋㅋㅋ.

 

#7 가다..

이 사전에 실린 첫 동사. 기다리다. 만나다. 포옹하다 같은 동사 다 제치고 가장 먼저 등장하는 동사.

인생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간다. 두 다리를 움직여 그 사람에게 간다. 그 사람이 내게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98 겸손..

착한 손. 내가 먼저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손.

내가 먼저 흔들며 안녕을 챙기는 손.

내가 먼저 모으며 감사를 드리는 손.

저요, 저요 하지 않고

약한 자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손.

내 손에게 이런 손이 되어달라고

손 모아 기도하기.

 

#174 글..

생각이 머릿속에 머물면 그대로 생각.

생각이 입 밖으로 나와 허공을 떠돌면 .

생각이 손끝으로 나와 종이 위에 앉으면 글.

어떤 생각은 말로 생을 마치고,

어떤 생각은 글로 생을 이어가고.

 

#245 내일..

오늘의 절친. 만약 내일이 없다면 오늘 할 일이 엄청나게 많아질까.

아니다 내일이 없는 세상인데 오늘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한다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내일은 그 존재만으로도 오늘에게 살아갈 힘을 준다.

그대에게도 나에게도 같은 양의 내일이 있다.


 

#390 막걸리..

소주의 경쟁자로 알려진 술.

그러나 지갑이 가난한 어느 아저씨에겐

밥의 경쟁자.

밥을 포기히고 마시는 밥.

반찬은 김치 한조각.

그래도 배불리 취할 수 있으니

아저씨의 밤은 행복하다.

서럽게 행복하다.

 

#415 맥주..

소주에는 없는 묵직한 품격.

소주에는 없는 화려한 거품.

소주가 따를 수 없는 우월한 신장.

그러나 몰랐다. 

보리였을 때도, 병에 담길 때도, 병뚜껑이 열릴 때도, 잔에 뒤어드는 순간까지도 몰랐다.

소주와 섞여 소맥이 될줄은. 맥소도 아니고 소맥이 될 줄은.

 

#443 몸..

마음을 넣는 그릇.

신이 처음 인간을 빚을 때 몸은 없었다.

마음을 빚고 그것을 인간이라 칭했다.

마음 하나로 충분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마음은 흔들림이 심했다.

자꾸 헝클어지고 무너지고, 좀처럼 일정한 형체를 갖지 못했다.

보다 못한 신은 몸이라는 그릇을 빚어 마음을 그 안에 집어넣었다.

이것이 지금 인간의 모습이다.

마음은 여전히 흔들림이 심하다.

처음 창조될 때부터 그랬으니 타박해서는 안 된다.

몸이 일을 하면 된다.

몸이 마음을 잘 잡아주면 된다.

몸과 마음이 세트로 무너지지만 않으면 된다.

마음이 흔들릴수록 몸을 챙겨야 하는 이유다.


#458 문장..

생각을 글로느낌을 글로, 이것이 문장이다.

물론 좋은 문장이 있고 나쁜 문장이 있겠지.

어떤게 좋고 나쁜지는 국어 선생님 설명을 들으면 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름다운 문장,

가장 아름다운 문장은 어떤 걸까.

소월의 시나 세익스피어의 지문에 그게 있을 까. 아니다.

우리가 늘 하는 말 중에 그것이 있다.

평화롭고 따스하며 여러개의 설렘을 주는 아주 짧은 문장. 집에 가자.

 

#477 바람..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공기가,

나 여기있어요!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처절한 움직임.

평생을 조용히 공기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한 번은 바람이 될 것.

빨랫줄에 널린 양말 한 짝이라도 흔들고 퇴장할 것

 

#494 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시간. 마음이 보이는 시간.

밤엔 마음이 보인다.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마음이 보인다.

얼굴이 시선을 빼앗지 않으니 비로소 마음이 보인다.

깜깜할수록 또렷이 보인다.

신은 사람들이 마음보다 얼굴을 먼저 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차 싶어서 밤을 만들었다.

 

#510 버스..

방향 우선, 방향이 같으면 같이 간다.

내리는 곳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방향이 같으면 함께 달린다.

내리는 곳 다르다고

한 버스 타기를 거부한다면 혼자 가야 한다.

택시를 타야 한다. 그러나 인생엔 택시가 없다.

혼자 달리는 인생은 없다.

방향 같은 사람들과 한동안

어우러지다 한 명씩 차례로 내리는 것이 인생이다.

 

#676 쉼표..

내가 나에게 주는 여유. 내가 나에게 주는 휴식.

인생은 여러 개의 쉼표와 하나의 마침표를 찍는 긴 문장이다. 

쉼표를 많이 찍을수록 문장은 더 건강해지고 더 견고해지고 더 길어진다.

 

#721 아직..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말.

이미 졌다. 이미 늦었다. 이런 표현은 슬프다.

이미를 아직으로 바꾼다. 아직 졌다. 아직 늦었다.

슬프지 않지만 이상하다.

이상하니까 이상하지 않게 다시 바꾼다.

아직 지지 않았다. 아직 늦지 않았다. 됐다.

이미라는 말 한 번 사용 할 때

아직이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한다면 인생은 괜찮다.

아직은.

 

#905 저녁..

돌아가는 시간. 지친 다리도 돌아간다.

처진 어깨도 돌아간다. 무거운 눈도 돌아간다.

다들 고마워하며 돌아간다.

지칠 수 있게, 처질 수 있게, 무거워질 수 있게 해준

오늘 하루 분의 내 일에게 고마워하며 돌아간다.

 

#1043 추억..

색이 바라지 않는 진한 기억.

지난 일은 처음엔 다 기억이라는 이름으로

머리에 저장되지만,

시간이 흐르면 기억의 아주 일부는

추억이라는 진한 이름을 얻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자리를 옮긴다.

기억은 머리가 하고 추억은 가슴이 한다.

 

#1057 친구..

싸울 때 함께 싸워주는 녀석도 친구. 싸움을 말리는 녀석도 친구.

말리는 척하면서 상대를 꼬집는 녀석도 친구.

싸우는 것도 말리는 것도 꼬집는 것도 곁에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친구의 다른 말은 곁. 앞도 뒤도 아니고 곁.

 


#1072 커피..

눈이 마시는 음료. 우리는 입으로 액체를 마시고

동시에 눈으로 그 진한 색깔을 마신다.

커피의 진함 속엔 추억, 설렘, 용서, 차분,

응원 같은 것들이 고요히 스며들어 있다. 

눈에 띄지 않게 숨어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추억을 마시는지,

누가 설렘을 마시는지, 누가 용서를 마시는지 알 수 없다.

각자 다른 이유로 마시는 같은 진함.

이것이 커피의 잔잔한 매력이다.

만약 커피가 투명한 색이였다면

지금처럼 넓게 사랑받지 못했을 것이다.

 

#1234 힘..

마지막 단어. 왜 힘이라는 단어가 이 책의 끝을 장식하는 영광을 안았을까.

책이 주는 게 힘이니까. 지혜라는 힘. 발상이라는 힘. 재미라는 힘. 감동이라는 힘. 위로라는 힘.

그대가 첫 페이지부터 한 장 한 장 넘겨 여기까지 왔다면 이런 말을 드린다. 힘드셨죠?

맨 마지막 단어는 과연 뭘까 궁금해 다 건너뛰고 여기에 왔다면 이런 말을 드린다. 힘내세요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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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꽃잎 한 장처럼.. | ○ 그니 리뷰 2022-03-28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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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꽃잎 한 장처럼

이해인 저
샘터 | 2022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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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처음인 듯, 마지막인 듯 살아가는

간절한 마음이 갈수록 더 필요하다


[시간의 새 얼굴 ]

 

젊은 날엔

더디 가던 시간이

나이 드니

너무 빨리 간다고

그래서 아쉽다고

누군가 한숨 쉬며 말했지

 

시간은 언제나 살아서

새 얼굴로 온다

빨리 가서 아쉽다고

허무하다고 말하지 않고

새 얼굴로 다시 오는 거라고

살아 있는 내가

웃으며 말하겠다


날마다 일어나서

시간이 내게 주는

희망의 옷을 입고

희망의 신발을 신고

희망의 사람들을 만난다

희망을 믿으면 희망이 온다

슬픔도 희망이 된다

 

아프다고 힘들다고

푸념하는 그 시간에

오늘도 조금씩

인내와 절제로 맛을 내는

희망을 키워야지

 

마침내는 시간의 은총 속에

나 자신이 희망으로 태어나

이 세상 누군가에게'하나의 선물로 안길 때까지!

 

[ 비 오는 날의 연가 ]


스무 살에 수녀원에 와서

제일 먼저

비에 대한 시를 썼다

풀잎 끝에 달린

빗방울이 눈부셨다

비를 맞으며

많이 웃었다

 

일흔 살 넘은 지금

비가 오면

몸이 많이 아파서

마음 놓고 웃을 수는 없지만


 

떨어지는 빗줄기

기도로 스며들고

빗방울은 통퉁 튀는 

노래로 살아오니

 

힘든 사람부터

사랑해야겠다

우는 사람부터

달래야겠다

 

살아 있는 동안은

언제 어디서나

메마름을 적시는

비가 되어야겠다

아니 죽어서도

한줄기 비가 되어야겠다

 

[ 꽃잎 한 장 처럼 ]


 

살아갈수록

나에겐

사람들이

어여쁘게

사랑으로 

걸어오네

 

아픈 삶의 무게를

등에 지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걸어오는

그들의 얼굴을 때로는

모르는 체

숨고 싶은 순간들이 있네


 

늦은 봄날 무심히 지는

꽃잎 한 장의 무게

꽃잎 한 장의 기도로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오랫동안 알고 지내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그들의 이름을

꽃잎으로 포개어

나는 들고 가리라

천국에까지

 

[ 어느 날의 일기 1 ]


 

간밤엔 무겁고 무섭게

태풍이 불더니

아침엔 가볍고 즐거운

새들의 합창

 

또 한 번 살았구나

숨을 쉬는 내 마음에

한 줄기 바람으로 깃드는

지극한 고요함

순결한 평온함


 

시끄러운 세상일

다 모른 척하고

그냥 그냥 쉬고만 싶으니

어쩌면 좋지?

 

[ 3월의 바람 속에 ]

                                

어디선지 몰래 숨어들어 온

근심, 걱정 때문에

겨우내 몸살이 심했습니다

흰 눈이 채 녹지 않은

내 마음의 산기슭에도

꽃 한 송이 피워내려고

바람은 이토록 오래 부는 것입니까

 

3월의 바람 속에

보이지 않게 꽃을 피우는

당신이 계시기에

아직은 시린 햇볕으로

희망을 짜는

나의 오늘


 

당신을 만나는 길엔

늘상

바람이 많이 불었습니다

살아 있기에 바람이 좋고

바람이 좋아 살아 있는 세상

 

혼자서 길을 가다 보면

보이지 않게 나를 흔드는

당신이 계시기에

나는 먼 데서도

잠들 수 없는 3월의 바람

어둠의 벼랑 끝에서도

노래로 일어서는 3월의 바람입니다

 

[ 3월의 바람 ]

                       

아직도 망설이는

꽃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열까 말까

망설이며

굳게 닫힌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싶어

바람이 부네

 

쌀쌀하고도

어여쁜 3월의 바람

바람과 함께

나도 다시 일어서야지

앞으로 나아가야지

 

[ 길 위에서 ]


                                     

오늘 하루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없어서는 아니 될

하나의 

길이 된다

 

내게 잠시

환한 불 밝혀주는

사랑의 말들도

다른 이를 통해

내 안에 들어와

고드름으로 얼어붙은 슬픔도


 

일을 하다 겪게 되는

사소한 갈등과 고민

설명할 수 없는 오해도

 

살아갈수록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감도

 

내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라고

오늘도 몇 번이고

고개 끄덕이면서

빛을 그리워하는 나

어두울수록

눈물 날수록

나는 더

걸음을 빨리한다

 

[ 이별의 눈물 ]

                            

모르는 척

모르는 척

겉으론 무심해 보일 테지요

 

비에 젖은 꽃잎처럼

울고 있는 내 마음은

 숨기고 싶어요

누구와도 헤어질 일이

참 많은 세상에서

나는 살아갈수록

헤어짐이 두렵습니다



낯선 이와

잠시 만나 인사하고

헤어질 때도

눈물이 준비되어 있네요

 

이별의 눈물은 기도입니다

언젠가 다시 만나길 바라는

순결한 약속입니다

 

[ 비 온 뒤 어느 날 ]

                                         

은행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음악입니다

 

비에 쓰러졌던 꽃나무들이

열심히 일어서며 살아갈 궁리를 합니다

 

흙의 향기 피어오르는 따뜻한 밭에서는

감자가 익어가는 소리

 

엄마는 부엌에서 간장을 달이시고

나는 쓰린 눈을 비비며 파를 다듬습니다

 

비 온 뒤의 햇살이 찾아준 밝은 웃음을 나누고 싶어

아아 아아 감탄사만 되풀이해도 행복합니다

 

마음이여 일어서라 꽃처럼 일어서라

기도처럼 외워보는 비 온 뒤의 고마운 날

 

나의 삶도 이젠

피아노 소리 가득한 음악으로 일어서네요

 

[ 길 ]

 
                     

아무래도

혼자서는

숨이 찬 세월

 

가는 길

마음 길

둘 다 좁아서

 

발거음이

생각보단

무척 더디네

 

갈수록

힘에 겨워

내가 무거워

 

어느 숲에 머물다가

내가 찾은 새

무늬 고운 새를 이고

먼 길을 가네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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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아침은 생각한다.. | ○ 그니 리뷰 2022-03-10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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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아침은 생각한다

문태준 저
창비 | 2022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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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깊은 계곡 같은 밤의 적막과 부서지기 쉬운,

서성이는 이 흰 울음을 잊지말자.

- 시인의 말 中 -

 

[ 아버지의 잠 ]

 

아버지는 잠이 많아지네

시든 풀 같은 잠을 덮네

아버지는 일만가지의 일을 했지

그래서 많고 많아라, 아버지를 잠들게 하는 것은

누운 아버지는 늙은 오이 같네

아버지는 연고를 바르고 또 잠이 들었네

늙은 아버지는 목침 하나를 덩그러니 놓아두고



잠 속으로 아주 갈지도 몰라

아버지는 세상을 위해 일만가지의 일을 했지

그럼, 그렇고말고!

아버지는 느티나무 그늘이 늙을 때까지 잠잘 만하지

 

[ 겨울 엽서 ]

 

오늘은 자작나무 흰 껍질에 내리는 은빛 달빛

오늘은 물고기의 눈 같고 차가운 별

오늘은 산등성이를 덮은 하얀 적설(積雪)

그러나 눈빛은 사라지지 않아

너의 언덕에는 풀씨 같은 눈을 살며시 뜨는 나

 

 

[ 밥값 ]

 

허름한 식당에서 국밥을 한술 막 뜨고 있을 때 그이가 들어섰다

나는 그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수레에 빈 병과 폐지 등속을 싣고 절룩거리며 오는 그이를

늦은 밤 좁은 골목에서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이는 식당 한편 벽에 걸린 달력의 28일을 오른손으로 연거푸 짚어 보았다

무슨 말인가를 크게 했으나 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식당의 여주인은 조금도 언짢아하는 기색이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짧은 시간 후에 그이의 앞에 따뜻한 밥상이 왔다

 


[ 꽃과 식탁 ]

 

내게 꽃은 생물연도가 없네

옛 봄에서 새봄으로 이어질 뿐

 

꽃아 

너와 살자

 

우리의 가난이 마주 앉은 이 저녁의 낡은 식탁 위

꽃은 신(神)의 영원한 눈

 


[ 봄비 ]

 

봄비 온다

공손한 말씨의 봄비 온다

 

먼 산등성이에

상수리나무 잎새에

 

송홧가루 날려 내리듯 봄비 온다

 

네 마음에 맴도는 봄비 온다

 

머윗잎에

마늘밭에

일하고 오는 소의 곧은 등 위에



봄비 온다

어진 마음의 봄비온다

 

[ 삼월 ]

 

얼음덩어리는 물이 되어가네

아자아주 얇아지네

 

잔물결에서 하모니카 소리가 나네

 

그리고

너의 

각막인 풀잎 위로

봄은

청개구리처럼 뛰어오르네

 

[ 바람과 나무 ]

                                              

바람이 있을 때에 키 큰 나무가 기둥째 기우는 것을 며칠 마음 놓고 본다

 

어제는 왼편으로, 오늘은 바른쪽으로 나무는 느긋하게, 시간을 두고서, 그러나 바람에 따라 부드럽게 기운다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놓은 적에도, 

비스듬히 기운 나무는 서두름이 없이 천천히 바람을 벗고 제 자세로 돌아간다

 

[ 새봄 ]


 

어린 고양기가 처음으로 담을 넘보듯이

지난해에 심은 구근(球根)에서 연한 싹이 부드러운 흙은 뚫고 올라오네

 

장문(長文)의 밤

한 페이지에 켜둔

작은 촛불

 

[ 아침은 생각한다 ]

 

아침은 매일매일 생각한다

난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은 어선은 없는지를

조각달이 물러가기를 충분히 기다렸는지를

시간의 기관사 일을 잠시 내려놓고 아침은 생각한다

밤새 뒤척이며 잠 못 이룬 사람의 깊은 골짜기를

삽을 메고 농로로 나서는 사람의 어둑어둑한 새벽길을

함지를 머리에 이고 시장으로 가는 행상의 어머니를

그리고 아침은 모스크 같은 햇살을 펼치며 말한다

어림도 없지요, 일으켜줘요!

밤의 적막과 그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한 것은 아닐까를 묻고

밤을 위한 기도를  너무 짧게 끝낸 것은 아닐까를 반성하지만

아침은 매일매일 말한다

세상에, 놀라워라!

광부처럼 밤의 갱도로부터 걸어나오는 아침은 다시 말한다

마음을 돌려요, 개관(開館)을 축하해요!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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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즐거운 일기日記 | ○ 그니 리뷰 2022-02-28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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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즐거운 일기

최승자 저
문학과지성사 | 1999년 0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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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참, 벌써 능청이라니, 하고 말하면,

그것도 능청스럽게 들린다.

그렇다면 더욱더 시적으로 능청을 떨든가 아니면...

- 시인의 말 中 - 

 

[ 주인 없는 잠이 오고 ]

 

주인 없는 잠이 오고

잠 없는 밤이 다시 헤매고,

애들아 이게 시詩냐 막걸리냐,

겨울에 마신 술이

봄에 취하고

흘러간다 흘러가서,

나를 붙잡지 마라,

나는 네 에미가 아니다,

네 새끼도 아니다.

 

 

오냐 나 혼자 간다 가마,

늙은 몸이 시詩투성이 피투성이로

환히 불 밝혀진 고층 건물

층층이 밝은 물이 찰랑거리고


아직은 아직은이라고 말하며

희망은 뱃가죽이 땅가죽이 되도록 기어나가고

어느 날 나는 나의 무덤에 닿을 것이다.

관館 속에서 행복한 구더기들을 키우며

 

비로소 말갛게 깨어나

홀로 노래 부르기 시작할 것이다.

 

 

[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흰 똥을 갈기고

죽어 삼 일간을 떠돌던 한 여자의 시체가

해양 경비대 경비정에 걸렸다.

여자의 자궁은 바다를 행해 열려 있었다.

(오염된 바다)

열려진 자궁으로부터 병악하고 창백한 아이들이

바다의 햇빛이 눈이 부셔 비틀거리며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파도의 포말을 타고

오대주 육대양으로 흩어져 갔다.


죽은 여자는 흐물흐물한 빈 껍데기로 남아

비닐처럼 떠돌고 있었다.

세계각처로 뿔뿔이 흩어져 간 아이들은

남아연방의 피터마리츠버그나 오덴달스루스트에서

질긴 거미집을 치고, 비율빈의 정글에서

땅 속에다 알을 까놓고 독일의 베를린이나

파리의 오르샹가나 오스망가에서

야밤을 틈타 매독을 퍼뜨리고 사생아를 낳으면서,

간혹 너무도 길고 지루한 밤에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언제나 불발의 혁명을.

겨울에 바다에 갔었다.

(오염된 바다)

 

 

[ 봄 ]

 

동의하지 않아도

봄은 온다.

삼십삼 세 미혼 고독녀의 봄

실업자의 봄

납세 의무자의 봄.

 

봄에는 산천초목이 되살아나고

쓰레기들도 싱싱하게 자라나고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이

 입안에서 오물이 자꾸 커간다.

밑을 수 없이, 기척처럼, 벌써

터널만큼 늘어난 내 목구멍 속으로

쉴 새 없이 덤프 트럭이 들어와

플라스틱과 고철과 때와 땀 똥을

쿵 하고 부려놓고 가고


내 주여 네 때가 가까왔나이다

이 말도 나는 발음하지 못하고

다만 오물로 가득 찬 내 아가리만

찢어질 듯 터져 내릴 듯

허공에 동동 떠 있다.

 

 

[ 시작 ]


한 아이의 미소가 잠시

풀꽃처럼 흔들리다 머무는 곳.

꿈으로 그늘 진 그러나 환한 두 뺨.

 

사랑해 사랑해 나는 네 입술을 빨고

내 등 뒤로, 일시에, 휘황하게

칸나들이 피어나는 소리.

멀리서 파도치는 또 한 대양과

또 한 대륙이 태어나는 소리.

 

오늘 밤 깊고 그윽한 한밤중에

꽃씨들이 너울너울 허공을 타고 내려와

온 땅에 가득 뿌려지리라.

소리 이전, 빛깔 이전, 형태 이전의

어둠의 씨앗 같은 미립자들이

어둠의 씨앗 같은 미립자들이

내일 아침 온 대지에 맨 먼저

새순 같은 아이들의 손가락을 싹 틔우리라.

 

그리하여 이제 소리의 가장 먼 끝에서

강물은 시작되고

지금 흔들리는 이파리는 

영원히 흔들린다.

 

 

[ 하산下山 ]


참으로 이젠 이해할 수 없는

한 세월 위에 또 한 세월을 눕히고

나는 이제  가야 합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근원적으로 피비린내 나는

이 세상의 고요 속으로

나는 처음으로 내려서겠습니다.

어떻게 왜 그래도

이 세월은 흘러가겠지만

어느 이름 없는 묘지에 다시 한번

할미꽃들 어우러져 피어났다 스러지겠지만

 

죽어도 눈감을 수 없을 때엔

죽어도 눈감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보다 더 무거운

더 괴로운 이파리 위에서라도

어디서나 흔들리는 피곤한 잎사귀 위에서라도

나는 하룻밤 단잠을 자고

확실하게 떠나겠습니다.

한 경전經典이 무너지면

또 한 경전經典을 세우며.......

 

어머니 이것은 누구의 눈알입니까?

어머니 이것은 누구의 심장입니까?

 

 

[ 즐거운 일기日記 ]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 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미터의 날개가 돋고.....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주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꾸고 한판 잘 놀았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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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채식주의자 아닌.. 너와 나는 가능주의자.. | ○ 그니 리뷰 2022-02-12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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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가능주의자

나희덕 저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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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땀. 눈물.

이 세가지 체액은 늘 인간을 드나든다.

- 시인의 말 中 -

 

[ 흐르다 ]

 

좋아하는 동사를 묻자 그는

흐르다, 라고 대답했다

나도 그 동사가 마음에 들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 가 흘러내리다, 의 동의어라는 것을

 

그저 수평적 움직임이라고만 생각했다

몇 줄기 눈물이 볼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기 전에는 

실감하지 못했다 눈물의 수직성을

 

눈에서 입술로, 상류에서 하류로, 젊음에서 늙음으로

살아 있음에서 죽음으로, 높은 지대에서 낮은 지대로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고 내일로, 최초의 순간에서

점점 멀어지는 방식으로,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의 방향으로,

기억의 밀도가 높은 시간에서 낮은 시간으로

 

흐르는 모든 존재는

흐르는 동시에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아래로 아래로 떠밀려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흘러오르다, 라는 말이 어디 있는가

 

고요 있거나

갇혀 있지 않는 한

쉴새없이 흘러내리는 물과 흙

피와 눈물

세포와 원소

사랑과 우정

또는 시간과 기억

 

원치 않았지만 그것이 끝내 우리를 데려다 부려놓는 곳

어떤 하류의 퇴적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흐르다, 라는 동사는 흐르지 못한다는 것을

 

[ 찢다 ]


찢고, 찢고, 찢는다

 

모든 기록은 일종의 얼룩이라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찢을 때마다 들리는 종이의 비명

그러나 정작 찢어야 할 것들은 손도 대지 못했다

 

저 나무 상자에는

오래 열어보지 못하는 것은 찢을 자신이 없기 때문이고

찢을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예의

아직은 완전히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도 아닌데

나는 왜 열지 못하는가

 

그렇게 찢기고 찢겼으면서, 차마 찢지 못한

한 줌의 사랑이 남아 있지도 않은데

 

찢으면 찢을수록

끝내 찢지 못한 것들이 떠오른다

 

나는 이루는 마지막 페이지

또는 첫 페이지

 

한 번도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그걸 찢는 순간에야 비로소 이해하게 될

편지들

 

[ 사라지는 것들]

 

하나씩 사라졌다

 

정수기가 사라졌다

전기 콘센트가 사라졌다

벽에 걸린 티브이가 사라졌다

보이지 않게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방역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무엇이든

 

자정 넘으면

쉼터도 문을 닫고

방문자센터도 폐쇄되고

공공화장실도 잠겨 있고

급식소도 당분간 열지 않는다

 

역에서 잘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천막을 칠 수 있는 곳을 찾아냈다

날이 추워지기 전까지는 그럭저럭 버틸 수 있겠지

여자들은 천막도 칠 수 없다

한밤중에 누가 덮칠지 알 수 없기에

그나마 여자화장실이 안전하다

똥 묻은 휴지가 넘쳐나고

오줌 섞인 물이 바닥에 흥건해도 어쩔 수 없지만

 

길에서 자는 사람들이 실제로

바이러스의 숙주가 된 적은 많지 않다

도시의 섬처럼 각자 떠다니니까

그런데도 왜 하나씩 사라지는 것일까

 

우리를 사라지게 하려고?

멸종저항운동이라도 벌여야 할까?

 

그들이 사라지게 하고 싶은 것은

정수기나 전기 콘센트나 티브이가 아니라

거기 줄을 대고 있는 존재들,

가장 확실한 시각적 방역을 위해 사라져야 할 존재들

 

사라지는 것들은

어느새 사라진 것들이 되었다

 

[ 가능주의자 ]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

그렇다고 제가 나폴레옹처럼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은 불가능들로 넘쳐나지요

오죽하면 제가 가능주의자라는 말을 만들어냈겠습니까

무엇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이 시대에 말입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산산조각난 꿈들을 어떻게 이어붙여야 하나요

부러진 척추를 끌고 어디까지 가야 하나요

어떤 가능성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가능주의자가 되려 합니다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믿어보려 합니다

 

큰 빛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반딧불이처럼 깜빡이며

우리가 닿지 못한 빛과 어둠에 대해

그 어긋남에 대해

말라가는 잉크로나마 써나가려 합니다

 

나의 시대,, 나의 짐승이여,

이 이빨과 발톱을 어찌하면 좋을까요

찢긴 살과 혈관 속에 남아 있는

이 핏기를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 것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무언가 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떤 어둠에 기대어 가능한 일일까요

어떤 어둠의 빛에 눈멀어야 가능한 일일까요

 

세상에, 가능주의자라니, 대체 얼마나 가당찮은 꿈인가요

--------

* 오시프 만델슈탐,「시대」 ,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조주관 옮김. 믄학의숲, 2012, 96쪽

 

[ 여행은 끝나고 ]


여행에서 돌아오자

미루어둔 불행이 일제히 들이닥쳤다

벽장문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잡동사니들처럼

 

예외적인 날들은 끝났다고

그것 보라고

이게 바로 도망칠 수 없는 네 몫의 삶이라고

누군가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앰블런스에 아버지를 태우고

응급실 가는 새벽,

비에 젖은 도로 위에는 점멸등이 깜빡거리고

브론테 자매가 살았던 목사관에서처럼

음울한 겨울바람이 불어왔다


폭풍의 언덕에서는

불우한 가족사가 그녀의 고장을 먹여살라고 있었지만

여기서는 나의 가족사가 깃발처럼 나부꼈다

 

남동생은 고속도로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렸고

점점 여위어가는 어머니의 얼굴,

아버지가 몇 해째

응급실과 중환자실과 입원실과 집을 오가는 동안

폭풍은 우리를 막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더, 더, 막다른 곳으로

 

꿈에서 깨어난 듯 고통스러웠지만

고통을 음미할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신의 벽장 속에는

뜯지 않은 불행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여행은 끝나고, 이제

쓰디쓴 풀과 거친 빵을 삼켜야 하는 시간

물을 긷고 또 길어야 하는 시간

 

구멍 뚫린 독

끝없이 물을 길어 부어야 했던 다나이드처럼

*******

음력생일인 나.. 그해엔  12월 31일이 생일이였고.. 부안 해넘이축제에 가는 길에 너무 교통이 막혀서 도로에서 시간을 보내다 새벽녁에서야 집에 도착하니 아빠는 응급실에.. 몇 해지나.. 아빠는 하늘나라로.. 돌아오지 않을 소풍을 떠나야했다..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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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마음의 수수밭.. | ○ 그니 리뷰 2022-01-2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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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저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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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수수밭 ]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윗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번 머리를 흔들고 산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 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 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 동해행(行) ]


 

그는 지금 동해로 간다

차창 밖에서 누가 손을 밀어넣는다

그까짓 세상 같은 거 절망 같은 거

확 잡아채 강둑에 던진다

강물이 퍼렇게 눈을 뜨고 올려다본다

못난 몸 어디가 조금 젖는 것 같다

노을이 붉어지고

잔정에 붙들린 마음이 붉어져

낄룩낄룩 낄룩새처럼


춘천강을 건너간다

경춘선은 왜 휘어지다 말다 이어지는가

차는 속이 거북한 듯 몇번 쿨럭거린다

건성으로 질주하는 직행버스

일사천리 질주만이 전부라는 듯

고속으로 달린다

지름길도 회전길도 후진시킨다

그는 비로소 어깨에 힘을 내린다

지정석에 앉아

이렇게 달리는 게 직진하는 生이냐, 그는

이정표 쪽을 물끄러미 본다

아득한 삶의 절벽, 비탈길 오르다

뒤축 닳은 세월 갈아 끼지 못했다

불시에 마주친 검문소 몇개


잘못이 없는 데도 넘어서는 속도계

한계령을 와서야 겨우 속도를 늦춘다

저 고개를 넘어야, 결국 나를 넘어서야......

지금 그는 동해로 간다.

 

 

[ 외동, 외등(外燈) ]


 

나는 오래 여기 서 있었습니다. 외동 1번지

다시는 저 다리 위에 저 정가장엔 가지 않으리라

내려가서 길바닥에 주저앉지 않으리라

갈퀴별자리 옮겨 앉는 날 밤이면

내 청춘의 붉은 바퀴 굴러가다 멈춘 것 보입니다

가슴을 조금 움직여 두근거려보지만

그 길 따라오는 사람 있겠습니까

나는 꿈을 가지지 않기로 합니다

날마다 골목이 나를 불러 꿈을 주고

세상 구석까지 따라가게 합니다

세상아, 너는 아프구나. 나는 얼굴을 돌리고 눈만 껌벅거렸습니다


늙은 느릅나무 뒤에는 주름진 황톳길이 구불텅거리고

어슬렁거리는 개들 옆으로

저 혼자 젖는 취객들이 많이

어두워져 돌아오고 있습니다

오늘밤 나는

신열에 들뜬 듯 머리를 싸매고

풀섶에 숨어 우는 벌레들의 울음을

사람의 말로 다 적기로 합니다

산간벽지 떠돌다

잔가지 생잎 쓸린 잡풀들

몰래 숨어든 외동1번지 느릅나무 곁에서.

 

 

 

[ 한계 ]


 

한밤중에 혼자

깨어 있으면

세상의 

온도가 내려간다

 

간간이

늑골사이로

추위가 몰려온다

 

등산도 하지 않고

땀 한번 안 흘리고

내 속에서 마주치는

한계령 바람소리


 

다 불어버려

갈 곳이 없다

머물지도 떠나지도 못한다

 

언 몸 그대로

눈보라 속에 놓인다.

 

 

 

 

[ 말 ]


 

어느날 나는 내가 생각한 것의 반만큼도

말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말의 성찬이나 말의 홍수 속에서

나는 오히려 말이 고팠다

고픈 말을 움켜쥐고 

말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쉬운 말들과 놀고 싶어서

말의 공터를 한번 힐끗 본다

참말은 문득 예리한 혀끝으로

잘려나가고 씨가 된 말이

땅 끝으로 날아다닌다


 

말이 꽃을 피운다면 기쁘리

말이 길을 낸다면 웃으리

말은 누구에겐들 업(業)이 아니리

 

모든 말이 허망하여도

말의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냐

우리는 누구나

쌓인 말의 나무 밑으로 돌아간다.

 

 

[ 역(驛) ]

 

마음은 모르게


마음 밟고 떠나고

정거장 나온 몸이

다시 떠난다

 

가출(家出)하여, 굴러가는 바큇살

처처에 박히는, 때로 길가에

내어말리는 세월이여

가는 길은 도대체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갔다

가고 남은 길을

철길이 가린다

나, 평행선에 올라 밟는다

갈 길은 멀고

살 길은 짧아라


가슴속 끓는 기적 소리

누군가 그 속에 누워 있단 말인가

머릿속 석탄들이 꺼멓게 타고 있다

급정거에 밀린 등을 밀면

개찰구를 빠져나가

내 발자국을

따라가는 → 驛

 

...  소/라/향/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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